SFC 간사 수련회 특강2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 20:17-19)
녹취자: 김경애
알다시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남긴 어떻게 보면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아는바와 같이 이 에베소 교회는 커다란 부흥과 함께 세워졌고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역은 결코 쉬운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지방에 있는 교회는 부흥 가운데 섰을지라도 그 지역이 온갖 이단적인 사상들의 본거지였고 또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았지만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제 성령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자기가 양 무리로 담당했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오라고해서 유언적인 설교를 남기고 있습니다. 나는 이 의미심장한 구절을 여러분들에게 모두 다 설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라고 한 말씀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유언적인 설교의 마지막을 사랑하는 에베소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가르쳐주기에 앞서서 먼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어쩌면 순교할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게 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는 설교하던 때도 있었고 설교하지 않던 때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때도 있었고 잠시 복음 전하기를 멈추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언제나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너희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구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잘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못했다고 비굴해하지도 않습니다. 순교의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이즈음에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이 자기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린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은 보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들리는 말은 잊어버려도 눈에 보였던 그 삶은 너무나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에 남아서 그 사람의 말은 사라졌어도 그 사람이 보여준 삶은 향기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남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 사역자들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의 복음 사역을 수종들게 하기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로 전하는 우리의 복음이 본문이라면 그 전하는 복음을 따라 사는 우리의 삶은 그 본문에 대한 주석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복음 전하는 것이 능수능란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주석을 우리의 삶으로 잘 쓰면 사람이 언어를 통해 전달하지 못하는 많은 것이 그 주석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주일학교 어린학생들은 선생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아무리 침을 튀기며 훌륭하게 설명해도 감동을 받지 않다가도 주님의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는 선생님을 보고 예수님이 정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교회를 개척하고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사람들과 헤어졌습니다. 곤고하던 때도 있었고 은혜가 충만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어느 때이든지 항상 가슴에 새겨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매 순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항상 똑같이 살지 못했다고 하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 성공을 꿈꾸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한 토막 한토막이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되기를 힘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언제나 그의 사역에 있어서 섬김은 쥐어짜듯이 강요된 섬김이 아니라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와 합치하는 진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번 물어봅시다. 어떻게 해야지만 이렇게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삶의 고백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지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사역이라는 것은 마치 옹달샘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잠금 동산 안에 왕 만이 들어가는 그 동산 안에 봉한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작은 샘이 흘러나와 우물을 가득 채우고 그 우물이 흘러나와 작은 개울을 이루며 흐를 때 거기에서 온갖 아름다운 꽃과 화초 그리고 매우 귀한 약재와 향료의 재료들이 생산되었던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자랄 때도 있고 부족할 때도 많이 있지만 사역의 원리는 우리의 내적인 인격과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 사역이 결코 사람이 세워놓은 목표를 따라 우리 자신을 모질게 충동하는 그런 인위적인 사역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우리 안에서 가득하고 그것이 우리의 인격이 될 때에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으로써의 섬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로 선교사를 나갔던 어느 형제가 돌아와서 저한테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가보면 그냥 일을 하는 것이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말씀이 어느 날 선교사들이 모여서 함께 회의를 했는데 흑인들이 여러 가지로 선교사들을 힘들게 하고 속을 썩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힘들고 상했는데 그중의 한 선교사가 그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왜 그렇게 개념 없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검둥이 새끼들이 그랬답니다. 그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내적인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고백으로써 우리의 섬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구였습니까? 주님이 언제 우리보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캠퍼스에서 영혼들을 돌보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우리를 협박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간사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키겠노라고 우리를 위협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우리에게 그렇게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소명 때문에 영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소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실 때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 마음을 물려받은 것이 소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모두 나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대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있는 줄도 몰랐던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게 된 것도 하늘을 누비고 땅을 헤아리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였습니까? 우리는 세계의 비전도 하나님 나라의 왕국의 소명도 우리는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다만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고행이 있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보게 되었습니다. 보게 되니까 그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영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이 예전의 나처럼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경배하며 주님과 원수된 가운데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도 그 근본적인 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들은 그렇게 상처받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살도 섞이지 않고 피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이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려고 하면 잃어버린 영혼들의 그 불쌍한 모습이 떠올라서 이 일 이외에는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되어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부르신 자리는 틀려도 영혼을 돌보고 그 영혼을 위해 섬기도록 주님이 우리를 위해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을 돌보는 자들의 소망이요 또 소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은 바로 날이 갈수록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인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통해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전보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해서 날마다 영혼 전부터 계신분이지만 날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리고 예전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분의 눈물이 내가 우는 이유가 되고 그분의 기쁨이 내가 희열에 차는 이유가 되도록 그렇게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고 우리의 사역은 그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인 것입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면류관도 곧 시드는 것이거늘 세상에서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세상의 영광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돌보는 자의 사역의 복은 사역자 그 사람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기쁨이 되고 사역은 결코 피곤하지 않습니다. 한편의 설교는 그의 신앙고백이 되고, 한 번의 복음전도는 그의 살아있는 간증이 될 것이며, 그의 영혼을 위한 기도는 그의 마음에 한없이 달콤한 주님과의 밀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실패의 열매들은 수렴해 들어가고 수렴해 들어가면 마지막에 하나의 원천에서 만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서 식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사역은 한없이 피곤하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잘못 가르쳤을 때에는 자괴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잘 가르쳤을 때에는 자신의 삶과 지나치게 유리된 자신의 가르침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사라지지 않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이미 입은 이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기가 잘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지를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은 아니지만 자신의 양심을 따라서 부끄러움 없이 매일 매일 살았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섬김과 모든 삶에 있어서 최고의 무기는 진실입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순전하여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가식이 없는 삶이야말로 모든 능력 있는 사역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까? 저는 17년 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기분이 나쁠지 모르지만 아마 여러분들의 섬김과 사역이 항구 가까운 곳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하는 사역이라면 아마 저희 목회자들의 사역은 좀 큰 배를 타고 대양에 나가서 파도와 더불어 싸우며 하는 그런 사역일 것이라는 나는 생각을 합니다. 단순하지도 않고 그리고 파도도 어떤 때는 나도 은혜의 세계를 많이 지나왔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도 그 파도가 무섭다고 느껴질 때가 아주 많았고 그리고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저녁때에 눈을 감으면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은 적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약한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한가! 그것입니다. 약할 때에는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잘한다고 주님 앞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의 능력으로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사역의 난관 속에서는 주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내 마음을 하나님이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으면 우리의 사역을 마치고 이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줄 때 똑같이 ‘내가 처음 이 학교에 혹은 이 교회에 부임하는 날부터 떠나는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모두 아는 바니’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세상의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만들어놓은 결과를 가지고 상을 받지만 복음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결과만을 가지고 상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결과를 이루기위해서 행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아도니처드슨 이라는 선교사는 미국 보스턴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수많은 큰 교회에서 그를 부목사로 청빙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그는 지금의 미얀마선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6년 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한사람에게도 세례를 줄 수 없었습니다. 6년이 지나던 때에 처음으로 한사람 회심 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일주일중 토요일 하루를 기도하는 날로 정하고 미얀마에 있는 영혼들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불사르며 기도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 사람에게 6년 동안 선교비를 보내주었는데도 한명도 전도를 못했다고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 후 그 한사람의 열매가 6만 명의 그리스도인으로까지 자라가는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소망은 큰 열매를 거두는 성취지향적인 사고보다는 내가 한 알의 밀알로서 잘 썩어서 죽는 것 그것이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사도 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차례대로 언급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내가 너희들 가운데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그랬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제일 먼저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공을 보여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열매를 보여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박수치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3년 반 동안 있으면서 그는 겸손의 모본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 회심하기 전 사도 바울은 겸손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독선적이고 오만에 가득차고 충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늘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여주었다고 믿었던 한 가지 본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겸손은 어디서 무엇 때문에 비롯된 겸손이었을까요? 제일 먼저 우리는 이 겸손은 자기가 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데서 비롯되는 겸손이었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은 자신에게 있으나 죄가 자기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분투하며 살면서도 자신 안에 여전히 죄가 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19세기 세계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고 오직 죄인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죄인은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고 또 어떤 죄인들은 이미 용서를 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아무리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주시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셨을지라도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모든 유업을 누리면서도 항상 자기 확인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님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를 용서해주신 사실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자기 고백인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모든 불평, 그리고 분노,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내가 부당하게 취급받고 있다는 억울함 이 모든 것은 다 자신이 어떤 중요한 Somebody라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목회를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도 또 혹은 사람 앞에서도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난 괜찮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날 주님이 나를 영혼들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살라고 불러주신 그날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강건해서 나를 거기에 세운 그날 나는 없어졌습니다.’ I am nothing. 큰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십시오. 그리고 여기 이렇게 서서 주님의 왕국을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신분의 상승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치사하게 이사람 저사람 붙들고 하소연하지 말고 주님 한분께 매달리십시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매일 깨달을 때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옥 속에 갇혔을 때 그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오 미쁘다 이 말이여! 죄인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함이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두 번째는 그가 겸손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는 시련을 통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사역이 거침없이 잘 나가는 것만큼 위험한 때가 없고 내 주위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이 우리를 좋게 해주시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나쁘게 해주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좋은 것임을 발견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큰 능력을 주셨는데 그 능력이 고난을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신 사람일수록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 능력 때문에 어려운 일도 쉽게 하고 힘든 것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오히려 주님이 능력을 주신 사람에게는 고난도 많이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 중에 정말 평탄한 길을 걸어간 사람이 누가 있으며 불세출의 능력을 받은 사람 중에 안락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누가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 죽은 자도 기도해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의 고난을 덜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의 모본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신 적이 없는 그 예수님의 모본을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큰 시련과 고난 앞에 그는 자기가 얼마나 약한지를 발견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을 설명한 후 자신은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망선고를 받았고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겨진 적이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언제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낮추는 기회로 삼기보다는 그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내고 원망하고 혹은 미워하고 마음에 성령이 슬퍼하시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겸손해지는 기회로 삼아야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게 만듭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알지만 어려움을 당해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겸손해졌습니다. 다른 때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낮아진 심령 속에 흘러들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주님 앞에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시련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겸손해진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원한을 품고 마음이 굳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들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적용하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것들을 묵상하면서 그러면서 자기 겸손의 기회로 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의존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다 끝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도 교인이 다 가버리고난 교회의 마당에 혼자 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큰 고통과 시련이 올 때마다 주님은 그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 한분뿐이시라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보에티우스 라는 17세기 화란의 신학자는 자기의 책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은 간절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내는 기도생활이야말로 우리 복음사역자들의 인격에 특징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하지만 그렇게 울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많이 있는데 복음 사역자들은 그들을 위해서 대신 울어주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에는 기도의 샘물이 고입니다. 교만하고 높아진 마음에는 이 물이 모두 쏟아져 내려 건조하고 메마른 땅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깊이 무릎을 꿇고 마음을 쏟으며 세상과 나는 간곳이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기까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제가 처음 대학교수로 부임한 것이 88년 34살 때였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학교로 들어갔지만 제 눈앞에 펼쳐진 그 신학교의 광경은 정말 처참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학생들이 30%가 넘고 수시로 경찰서로 불려가서 연락이 오는가하면 길거리에서 술을 먹고 패싸움을 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안다니는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 현실들 속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순수하지 않았겠습니까? 매일 울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제가 4년을 근무했는데 그 4년 동안 흘린 눈물이 열린 교회를 하면서 17년 동안 흘린 눈물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교수의 영광과는 나는 상관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마음이 나는 슬픈 자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의 축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서서 아이들은 이렇게 방황을 하는데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축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었습니다.
(찬양)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연구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 그렇게 아팠습니다. 내 힘으로 잘할 수 있으면 아마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면 눈에 무슨 보이는 증거는 하나님이 제시해주시지 않았지만 항상 마음속에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마지막 떠나는 날까지 이렇게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 큰 능력을 받은 그 탁월한 지성인이 자기를 모두 불사르게 내어주었던 그 순교의 사람이 그렇게 겸손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주님을 의지해야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이 기도하십시오. 두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않도록 많이 기도하십시오.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마른 눈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간절함으로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면서 그렇게 겸손해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는 눈물이었습니다. 겸손과 눈물이었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포학하고 표독스럽고 독선적이고 충동적이던 악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사랑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영혼을 향한 눈물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사역자는 영혼을 바꾸는 이 복음 사역은 자신이 흘린 눈물의 잔을 마시면서 그 복음 사역의 본질을 터득해가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애독하던 책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입니다. 내 일평생에 그 책을 여섯 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권의 책을 샀습니다. 지금도 학교에서 강의하면 항상 학생들에게 읽히는 필독서입니다. 그는 인디언의 영혼들을 위해서 헌신한 선교사였습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4살에 인디언선교에 투신하여 29살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기는 온통 눈물로 가득한 일기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책을 읽고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만약에 신자라면 누구든지 이 책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사람인지를 깨달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 보면 ‘오늘은 나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다. 오늘 하루를 모두 기도에 드리기로 결심했다. 별이 보이는 새벽에 기도하러 올라갔다.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온 몸에 땀이 흐르도록 하루 종일 기도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에 별이 가득하였다.’ 눈 덮인 언덕에서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그 눈밭이 붉은 선혈로 물들었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들 가운데 영혼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일기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제가 한 25년 전에 제가 작곡을 해서 곡을 썼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고 필요하면 기록해두십시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능란하고 박식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사도 바울이 흘렸던 눈물의 제일 큰 이유는 영혼의 비천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제가 맨 처음 전도사 생활을 할 때에 섬기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옛날에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깡패 비슷하게 하시다가 회심을 하고 50이 훨씬 넘으셔서 신학공부를 하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이분이 서원을 하나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돈이 없어서 강사를 모시지 못하는 가난한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 년이면 몇 차례씩 아주 시골에 있는 교회에 가서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모이는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방에 내려갔는데 멀쩡하게 잘생긴 청년 하나가 있는데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분도 자기가 상당히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셨는지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안 나갑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안 나갑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기도를 했는데도 안 나갑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새벽기도에 가서 그 청년을 오라고 그래서 기도를 해주다가 끌어안았는데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청년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너무 불쌍하더랍니다. 왜? 고쳐줄 능력이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삼일을 기도해주었더니 귀신이 나갔습니다. 대개 귀신이 나갈 때 막 소리를 지르고 가래침을 뱉고 그러고 나갑니다. 그런데 조용히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셔서 그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능력보다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 아이를 붙들고 귀신들린 네가 불쌍하고 내가 목사이면서도 너를 못 고쳐주는 내가 불쌍해서 그래서 눈물을 흘렸더니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영혼을 위한 눈물이 목자의 눈에서 마르기 시작할 때 가슴에서는 독초가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눈물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그랬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간계들’ 이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간사한 꾀들로 유대인들이 이 복음에 훼방하였고 수없이 사도 바울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목회의 환경은 얼마나 좋습니까? 누가 우리의 생명을 노립니까? 적은 우리 안에 있지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 한국처럼 완벽하게 복음 전파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는 것이 소명의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사도 바울이 괴로웠던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의 어떤 인간들이 ‘사도 바울이 정말 사도냐?’ 하고 대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원래 열두 사도야 예수님이 직접 세우셨지만 자기가 주님께 세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누가 본 사람이 있느냐?’ 그리고 그의 사도직을 의심했을 때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변증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도가 아니라고 그러지만 나는 사도 맞거든. 그리고 내가 사도인 중요한 표가 있다. 그 첫 번째 표가 참음이고 두 번째 표가 기사다.’ 기적을 앞세우지 않고 참음을 먼저 앞세웠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모든 참음과 그리고 기사와’ 그의 논리는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자꾸 나를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가 아니라고 그러는데 내가 만약 사도가 아니었더라면 이 많은 고난과 괴로움을 참을 수가 있었겠느냐? 나를 이렇게 참게 만들었던 것은 예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나를 참게 했다.’ 고 고백한 것입니다. 참으십시오. 어려움이 오면 그냥 원래 복음 사역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그리고 엄청난 세상의 영광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까? 요즘은 사람들이 저렇게 금박이 발린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만 원래 성경은 빨간색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성경이 네 손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올 때마다 나를 주님을 위해 그 고통을 당하게 해주신 주님께 찬송을 올릴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깊어질수록 단순해지지만 악한 자들은 불신앙이 깊어질수록 교만해지고 악랄해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사랑으로 선으로 그 악을 갚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힘들고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다고 느껴질 적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이 주님의 그 당하신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인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매 순간 고난이면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부르고 시련이면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부르고 그래서 잠시 머무는 이 세상보다는 주님의 나라에 영원한 나의 집이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래서 매 순간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징검다리 신앙이라고 그럽니다. 돌멩이 하나하나를 보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보면 물에 빠집니다. 하나하나 건너가면서 매 순간을 주님 앞에 드리며 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고생하는지 나는 조금 알지만 우리 주님은 많이 아십니다. 주님으로 위로를 삼고 그리고 이 복음 사역의 길에서 주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 형제자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