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상호교통과 세계의 완성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대부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복해져야 할텐데 복이 필요할텐데 그래서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복되지 않고 복과 연속성이 없습니다. 두 번째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면 하나님이 복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복과 하나님이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래서 복과 하나님 사이에 불연속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견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십니다. 곧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주실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태양이 햇빛을 비춥니다. 이 햇빛은 그 자체로 많은 일을 합니다. 광합성 작용을 통해서 식물 안에서 양분을 만들어 생존을 위해 공급하기도 하고, 햇빛이 비추면 몸에 해로운 미생물 균들이 죽기도 합니다. 또 햇빛이 잘 비추면 봉오리가 맺혀있던 꽃들이 활짝 핍니다. 꽃을 활짝 피우는 것이 꽃이라는 피조물의 행복, 오늘도 양분을 공급받아서 광합성 작용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의 행복, 옷을 벗고 햇빛을 받아 몸의 해로운 균을 죽이는 것이 건강을 원하는 사람의 행복이라면 어떤 경우에든지 인간과 식물이 태양의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가면 그런 다양한 행복이 생기게 됩니다. 태양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가와서 이 사람에게는 이것을 주고 저 사람에게는 저것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찬란한 햇빛으로 가까이 나아가면 이런 놀라운 생명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행복을 나누는 인간의 의도 자체가 가치판단의 중심축이 자신을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은 변화되고 하나님께 가야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은 말뚝을 박고 여기 서서 도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행복을 주셔야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을 점점 더 본질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문제의 답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위한 진정한 진리의 탐구를 향해 나아가면 복잡하고 다양해 보이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그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을 제가 처음으로 적립해서 여러분들에게 첫 발표를 하는 것입니다. 이 강의는 커뮤니케이션, 만물의 상호교통이라고 하는 이 현상을 신학적으로 상세하게 살펴보고 성경적으로 궁구하고 철학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놀라운 이해에 도달될 것이고,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의 빛 앞에서 세계는 시작으로부터 마지막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그 과정이 무엇이고 완성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강의안 첫 페이지에 오타가 났는데요, 제가 읽겠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만물은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 성령 안에서의 창조는 창조된 만물의 상호교통의 근거이다. 상호교통이란 창조된 만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창조 목적을 향하여 서로 관계를 맺고 신적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삼위일체가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은 서로 만세 전부터 교통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령을, 성령은 성부를 삼위 간에 서로 사랑하시는데 이 삼위일체의 교통의 본질이 생명과 사랑입니다. 창조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공동 사역입니다. 삼위 중에서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시는데 결코 떨어지시는 법이 없는데 창조에 있어서는 성부가 주되게 개입하시고 성령과 성자가 함께 하셔서 창조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렇게 창조된 모든 세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가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 이것이 상호교통의 교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상호교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과 만물들이 각자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이어져서 관계를 이루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교통은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전에 먼저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창세기 1장2절에 “웰 로하흐 엘로힘 메라헤테트 알프네 하마임”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메라헤테트’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알프네’ 위에 ‘하마임’ 그 물 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라고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보며) ‘운행’이라는 것은 버스가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다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운행하는 장소인 이 장소의 크기보다 운행하는 주체인 이 버스가 훨씬 작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 지점을 출발해서 가고 있는 동안에는 여기에 버스가 없습니다. 가고 나면 여기에는 버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메라헤테트’가 과연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메라헤테트’는 가운데 세 글자 ‘라하프’라고 하는 동사에서 온 분사 여성형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그림을 보며) 이렇게 ‘하마임’ 물이예요. 여기서 물은 우리가 보는 줄줄 흐르는 그런 물은 아닙니다. 어쨌든, ‘하마임’이라고 표현되는 질료 상태가 있고 이것 전체를 감싸고 있는 동작을 ‘라하프’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로하흐 메르헤테트’라는 동작은 세계의 창조의 기반이 되는 모든 재료보다 훨씬 크게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무한성과 관련시킬 때에도 왼쪽에 있는 설명은 가당하지 않고 위가 맞습니다. 적당한 번역을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휘돌아 감싸고 있었다.’ 혹은 ‘두루 감싸고 있었다.’ 정도면 될 것입니다. 마치 어미닭이 달걀을 날개 아래 품을 때 날개가 달걀보다 훨씬 커서 알이 날개 아래 포섭되듯이, 창조될 세계의 재료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성령의 품 안에 포섭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세계가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통의 본질이 생명과 사랑인데 성령께서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림으로 다시 보자면 세계가 가운데 원으로 있는데 창조될 세계의 재료들이 있는데 성령이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감싸고 있는 데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여기에서 두 질서가 생겨나는데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질서는 물리적인 이치와 아름다움, 도덕적인 질서는 윤리적이고 심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이 세계 안에서 두 개의 질서를 형성합니다.
하나의 질서는 자연적인 것인데 우주 만물들이 자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가 하면 식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통해서 생명유지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산소를 배출하면 그 산소는 동물들에게 꼭 필요한 산소가 됩니다. 동물들이 먹고 배설한 배설물이 분해가 되면 양분이 되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것이 자연적인 질서입니다. 대부분의 자연과학은 자연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법칙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생명 현상 쪽에서는 생물학 쪽에서 물체의 현상 쪽에서는 물리학 쪽에서 화학적인 연결고리들은 화학 쪽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자연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자연적인 질서가 없다면 개별적인 사실들만 흩어져서 존재할텐데 그것은 탐구의 대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연의 모든 것들이 서로서로 연결 됩니다. 자연적인 질서가 형성되어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서로서로 시계의 부속품들이 엮어져 돌아가듯이 눈에 보이지 않게 엮어져서 돌아갑니다. 여기 마당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하나는 암놈이고 하나는 수놈입니다. 나무에 무슨 암놈, 수놈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한 그루만 있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암, 수가 함께 있어서 바람에 날려 서로 교접을 합니다. 그래서 가을이면 은행이 가득 매달립니다. 이렇게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질서를 한 성령 안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질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질서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쭉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악하게 살고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규칙을 어기면서 살면 반드시 불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도덕적인 질서는 인간의 영혼과 관계되고 자연적인 질서는 육체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인간의 육체는 질병에 가까워지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게 됩니다.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가 인간의 육체와 영혼 사이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볼 수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의 생존유지를 위한 작용입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위로는 육체가 있고 아래로는 영혼이 있어 막과 같은 것이 마음입니다. 육체는 인성을 형성하고 영혼은 하나님의 성품을 전적으로 닮아 신성을 형성합니다. 신성과 인성이 마음이라는 막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예수의 한 인격 안에 있는 양성, 신성과 인성의 모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두 개가 서로 넘나들면서 교차합니다. 눈으로 어떤 물체를 보는 것은 육체가 합니다. 본 것을 전달하는 것도 육체가 합니다. 내가 그것을 보는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기억은 육체에 있는 것에 아니라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기억이 올라오면서 지금 전달되어온 사랑하는 사람이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광경이 육체의 눈을 통하여 전달되어 오고 영혼 안에서는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하는 기억이 떠오르고 마음이라는 막을 흔듭니다. 여기에서 네 가지 인간의 강력한 감정이 생겨납니다. 기쁨, 슬픔, 두려움, 고통.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눈물이 나고 어쩔 줄 모르는 고통이 생겨납니다.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희로애락이 이런 원리에 의해 생겨납니다.
그럼 모두 육체를 통해서 들어오는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눈 감고 가만히 누워있으면서 상상을 합니다. 3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상상합니다. 갑자기 밑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물방울처럼 떠올라서 마음을 건드리면 출렁하고 움직입니다. 30년 전에 끝난 일인데 눈물이 쏟아지면서 서러운 기억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보고 싶은 사람도 떠오릅니다. 인간의 희로애락, 애오욕이 마음 안에서 출렁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귀로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깐 예전에 경험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지성 속에서 깨닫게 되니까 이것이 전달되어 오면서 출렁하고 움직이면서 이것이 결국에 육체에 넘어와서 눈물이 나고 콧물까지 나와서 휴지를 찾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인 질서가 인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물을 창조하시는데 구조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한 번에 모든 것이 확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질료부터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도자기, 작은 컵, 꽃병, 항아리를 만드는 데 재료는 모두 진흙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도기장이는 먼저 진흙 덩어리를 큰 것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조금씩 떼어 하나하나 만들듯이 하나님이 질료를 창조하셨습니다. 질료는 물질과 관련이 됩니다. 물질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도 내지는 틀이 있겠죠. 그걸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형상에 질료를 꽉 채울 때 (컵뚜껑을 들며) 이런 물질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료가 있는 거기에 형상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형상을 따라서 질료에서 사물들이 창조됩니다. 이것은 중세의 신학자들과 칼빈까지도 모두 다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훌륭한 설명을 줍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부활의 날에는 어떻게 부활을 할까요? 다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화장을 안했습니다. 화장하고 다 없어지면 마지막 날에 무엇으로 부활하느냐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장을 하지 않아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다 없어집니다. 저희 할머니 산소 이장을 해보니까 40년이 지나면 뼈가 한 바가지 남고 다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없어지는게 인간인데, 그러면 없어진 것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아주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질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한 번 생긴 물질이 없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있는 것을 없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또 없는 것이 생겨나는 것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질료의 이론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명쾌하게 해답을 줍니다. (그림을 가리키며) 이것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물질이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시간의 무상성을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형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이 안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것이 물질이 되겠죠. 그러면 이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질료가 물질이 자꾸 허물어집니다. 인체가 썩듯이, 나무 책상이 썩어서 없어지듯이 없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이 없어진 것들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은 이것이 없어져서 가시적인 물질이 아닌 질료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썩는다든지 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돌아가게 됩니다. 형상만 남게 됩니다. 형상은 있지만 형상이 있어도 이것을 채울 물질이 없으니까 이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다시 이 상태로 돌아간 인간의 육체를 향해서 인간의 몸이 되도록 형상을 부여하시면 다시 이런 몸을 입어서 인간들이 다시 영화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주 합리적인 설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화장을 하건 신경을 써도 다 타서 없어져도 신경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질료는 아무도 손대지 못합니다. 그 질료 상태에서 때가되면 하나님이 다시 형상을 부여하셔서 다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됩니다. 내 발톱 내 손톱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에는 3중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적 상호교통, 둘째는 미학적 상호교통, 세 번째는 영적 상호교통입니다.
자연적 상호교통은 아까 설명한 바와 같이 자연적 상호교통이 자연적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그것들이 아주 놀랍게 서로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 같은 경우는 이파리 하나가 해충에게 공격을 당하면 나무는 나무의 온 이파리에게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이파리는 대비 태세를 갖춥니다. 나무가 가을이면 빨갛게 물들었다가 다 떨어집니다. 나무가 스스로 이파리를 향해 죽어라 하고 명령합니다. 그냥 있다가는 겨울에 함께 나뭇가지도 다 죽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잎이 다 살아있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나무의 양분을 다 빨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겨울을 날 수 없습니다. 빨아들이기만 하고 공급을 못해주면 나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무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나무가 어느 한 순간에 죽어라 하고 확 떨어뜨려버립니다. 우리의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포는 하나가 일년 이년을 가는 것이 아니고 초보다도 더 작은 단위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60조 개의 세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서 한 쪽에서는 불이 꺼지듯이 사라지면서 한 쪽에서는 막 생겨납니다. 위급한 때가 되면 한꺼번에 불이 꺼지도록 세포에게 명령합니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세포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면서 60조 개의 전등이 어떤 쪽에서는 꺼지고 켜지고 다시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는 일들이 반짝거리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인간이라는 생명을 일정 기간 동안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자연적인 질서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질서 안에서 인간은 생성하고 자기를 복사하고 자기를 확장하고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자기 바깥으로 뻗쳐나갑니다. 그러면 60조 개의 세포가 불이 꺼졌다 들어왔다 꺼졌다 들어왔다 하면서 유지하는 놀라운 균형이 바로 life, 생명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그렇게 신비하다면 인간의 영혼 안에서도 얼마나 놀라운 작용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 영혼으로의 여행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자연적인 질서는 자연과학적으로 탐구를 할수록 놀라운 질서를 가진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질서가 마지막 끝에 어디에 가서 닿아있는가 하는 것은 과학이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 신앙이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찾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습니다. 저는 1년 반 정도 천체물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공부하면서 신학을 향해서 성경을 향해서 새로운 눈을 뜨는 생애적인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배운 전체의 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일평생 공부 하는 사람도 있는데 겨우 1년 반 조금 못되게 공부를 했는데 분량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분량의 크기와 상관없이 새롭게 발견하게 된 자연적인 사실들이 나에게 아주 놀라운 통찰을 주고 성경과 신학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설교가 한 번 점프하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1년 동안 밤마다 별을 보면서 혼자서 울고 웃고 감탄을 하며 소리 질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강의를 준비하며 인생의 놀라운 기적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적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실들을 잘 깨달아 알수록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보여 주십니다. 저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 우주의 사실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데 너무너무 놀라웠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실에 대해 알려 주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내 설명을 듣고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놀라운 증거,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나 창조주를 향하여 살아라 하는 메시지를 성경에만 남겨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우주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 공간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농도가 흐립니다. 가장 진한 농도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농도가 퍼져갑니다. 그런 밖에 있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성경을 연구할 필요를 느끼고 성경을 연구할수록 더 멀리 퍼져 있는 색깔이 다른 하나님 존재에 관한 지식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우주적인 구도자의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자연적인 질서가 놀랍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체를 비롯해서 더 많은 놀라운 것이 있지만 시간 관계상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는 미학적 질서입니다. 미학이란 위치, 크기, 색깔, 빛깔, 디자인과 균형, 비율 이런 것들에 의해서 무엇인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가을이면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듭니다. 단풍나무는 빨갛게 물듭니다. 군데군데에 있는 사철나무는 파란색입니다. 그 색깔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러한 놀라운 질서가 있습니다. 봄에는 파란색, 여름에는 하늘색, 가을에는 빨갛게, 겨울에는 하얗게. 온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가을에 모든 나무가 새빨갛게 물이 든다고 생각하면 뭐가 재미있습니까? 노란 것은 빨간 것 사이에 있기에 예쁘고 빨간 것은 파란 것들 사이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빛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학적 질서입니다. 왜 우리는 생긴대로 살면 안될까요? 우리처럼 용모를 포기한 사람들을 어쩔 수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코를 깍고 눈을 찢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거울을 들여 봐도 비율이 맞지 않기 때문이죠. 미학적 질서가 안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장품을 영어로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cosmetics라고 합니다. 그게 ‘코스모스’라는 히랍어에서 나왔습니다. ‘코스모스’는 우주도 되지만 질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화장품은 질서 없는 얼굴을 질서가 있는 것처럼 포장해주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화장을 안하고 다니는 자매들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 얼굴에 무슨 추가적인 질서가 필요하겠는가, 나는 완벽 그 자체다. 아니면 용포댁, 용모를 포기한 댁.
세 번째로 영적 교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으니까 영적 교통이 이루어지고, 영혼을 가진 인간과 영혼을 가진 인간 사이에는 영적 교통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우리가 아주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 교통이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연적인 사물과 인간 또 자연적인 사물들 간에서도 어느 정도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무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올 때,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세포 조직을 뜯어서 관찰해보면 동물세포와 식물세포가 다릅니다. 그런데 단연코 식물세포보다 동물세포가 더 매우 복잡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DNA가 발견되었을 때 인간의 그것은 동물들의 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발견되고 나니까 똑같았습니다. 이것이 생물학적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신학적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입니다. 인간은 두 개의 질서 속에 있는데 그 중에서 인간의 육체는 자연적 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동물들과 함께 자연적 질서에 속해 있습니다. 육체만을 가지고 말하면 인간이 동물에 비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면 동물이 인간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대뇌를 비롯해 정신작용과 관련되는 육체에 있어서는 인간이 동물과 차별이 있지만 다른 것들은 절대로 인간이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육체만을 가지고 말하면 동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모든 사물들이 영적인 교통을 이룹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림을 보며) A번 자연적 피조물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이 계시고 성령 안에서 크고 작은 피조물들이 창조되었고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선은 서로가 영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줄의 굵기는 교통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자연적인 사물들 간에 영적인 교통이 있지만 이것은 독자적으로 영혼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교통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이 이 모든 것들 속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이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교통하시기 때문에 실선처럼 연결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연적 피조물과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 사이를 봅시다.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은 굵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연적인 피조물들이 존재합니다. 자연적인 피조물들과 인간 모두 다 성령 안에 있지만 자연적 피조물들끼리는 그림A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런 정도의 영적인 연결을 가집니다. 그런데 인간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피조물들과의 관계는 더 강력한 영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한 개체인 인간이 영혼을 담지한 담지체이고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이 교통하기 때문에 이런 연결을 가집니다.
이런 연결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인간이 타락했을 때 이 상호교통의 연결을 타고 죄고 한 번에 확 퍼졌습니다. 예를 들면 전기가 벼락을 맞고 쇼트가 되면 전기코드를 빼놓은 가전제품은 안전하지만 전기 코드를 꽂아 놓은 모든 가전제품은 벼락이 떨어지면 모두 다 망가집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만약에 이런 연결이 없다면 인간이 타락했는데 왜 땅이 저주를 받겠습니까? 왜 짐승들끼리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하겠습니까?
세 번째는 도덕적 피조물 간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을 삼위하나님을 이렇게 새까맣게 칠해 놓은 이유는 이 교통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삼위 안에 있는 삼위 간의 교통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선으로 표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교통하고 사람들과의 교통은 이 굵기가 훨씬 더 굵어져서 영혼과 영혼 사이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자인 경우와 불신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신자일 경우에 교통은 보다 더 강력한 교통력을 갖고 상호교통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하나님과 자연적 피조물들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상호교통 속에서 만물을 성령 안에서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을 성령 안에서 창조하셔서 모든 것들 속에 자연적이고 미학적이고 영적인 연결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 연결 자체가 하나님 당신의 신성에 충만한 영광을 창조 모든 세계 속에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죄도 그것을 타고 들어와서 삽시간에 온 우주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창조 시에 찬란한 영광도 상호교통의 연결을 타고 확 들어와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면 맨 왼쪽 그림에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고, 이 땅의 모든 자연은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결국은 이 땅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만물은 독자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못 갖고,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하나의 소비 대상일 뿐이라는 견해가 A입니다. 사실 ‘존재도 사상’이라는 데에도 이런 것이 나와 있습니다. ‘존재도 사상’이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떤 것은 많이 있게 하시고 어떤 것은 덜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체로 있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수록 적게 있습니다. 무생물 같은 것입니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생성합니다. 더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감각적인 기능만 아니라 약간의 정신적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더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기억 속에서 시간을 초월하며 영혼의 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상상력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육체와 영혼이 만나면서 다양한 도덕적 판단과 가치,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차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인간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에 반드시 봉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맞습니다. 자연적이 물질들, 죽어 있는 것들이 양분을 공급해서 식물을 살리고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되고 인간은 식물과 동물 모두를 먹으면서 힘을 얻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은 중세까지 내려 온 ‘존재도 사상’입니다. 이 커다란 골격은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반드시 왼쪽 그림처럼 볼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생태계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지구의 사용연한이 앞으로 천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년이면 용도폐기가 된답니다.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는 그런 곳이 되는 것이죠. 가장 커다란 이유는 기온의 상승 때문입니다. 온난화 현상입니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빙하가 다 녹아내리면서 몇 십 년 정도 지나면 우리나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사라지고 비오는 때와 오지 않는 때,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지고 그런 기후를 갖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유치원, 초등학교 때 시골에 강원도 대관령 아래쪽에 집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이야기인데, 여러분 안 믿어지겠지만, 얼마나 추운지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적이 일 년에 몇 번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눈이 옵니다. 그 추위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로 할 수 없고, 중강진 쪽에 사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이쪽 골목에서 저쪽까지 제대로 방한도구를 얼굴에 안 쓰고 다니면 곧바로 귓불에 동상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도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이게 온난화 현상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이산화탄소를 줄여야 하는데 미국 같은 곳에서 협조를 하지 않아 문제입니다. 과학자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용도 폐기될 때 어디로 가야할 것이냐를 연구합니다. 가장 유력한 곳이 화성이라고 봅니다. 그 전에 주님이 오시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만... 화성은 지금 10퍼센트 정도 산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다 산소를 채집해서 산소 발생 장치를 만들어서 호흡을 하고 여기에서 한 것처럼 거기에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장을 만들어서 의도적으로 탄산가스를 배출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올라가서 온난화 현상을 만드는데, 화성은 표면을 파고 들어가면 군데군데 마다 다르겠지만 직경 약 몇 킬로에서 백 킬로까지 물입니다. 거기서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자동적으로 산소가 발생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데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착착 진행이 되면 100년 정도 걸려서 화성을 리모델링하여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웃으실지 모릅니다. 하여튼 수 년 내에 화성에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화성까지 가려면 우주선 타고 3년 정도를 가야한다고 합니다. 오고 가는데 6년입니다.
그러면서 ‘생태신학’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가 ‘존재도 사상’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섬기면 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우리한테 봉사해야한다 이러면서 모두 다 짓밟았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연을 대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가운데 그림 같은 견해가 나옵니다.
인간 너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인간이고 이 세상의 통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특별한 존재이지만, 자연적인 질서에 관점에서는 너는 구르는 돌멩이나 풀, 나무 하나, 출렁거리는 파도의 물방울 하나와 모두 동창생이라는 것입니다. 평등하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가운데 견해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건 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볼 때 상호교통의 이론으로 볼 때 가장 적합한 이론은 B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과 주로 관계를 맺고 이 땅의 사물들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관계는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똑같지 않은 종속된 아주 작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이 무슨 재미가 있으시겠습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에게 사랑스런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을 위해서 피아노도 사주고 컴퓨터도 갖다 놓고 바이올린도 사주고 책상도 예쁜 것 사주고 침대도 갖다 놓고 꽃병도 갖다 놓고 그러는데 아들이 죽고 없다면 그 방이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마 들어가기 싫을 것입니다. 자꾸 생각나니까요. 하나님에게도 인간이 없는 우주와 세계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고 한들 그것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호교통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상호교통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그 존재를 하나님께 기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존재하게만 해놓고 하나님은 철수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좋은 존재로 창조하셔서 거기에 적합한 작용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는 혼자 작용하는데 그 작용은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존재와 작용들이 서로서로 놀랍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계속해서 상호교통 하도록 자연적으로 미학적으로 영적으로 교통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 속에 흘러가지 않으면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피조세계 속에서 생명과 사랑으로 흘러가시면서 그 모든 것들을 연결 지으십니다. 그게 바로 생명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이 생명과 사랑이 당신 자신이 너무나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것들이 바깥으로 흘러넘치도록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확장시키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의 세계입니다. 이 창조의 세계를 통해서 안에서 자연적 피조물과 도덕적 피조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과 사랑이 두 개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연결되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신 동시에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이 무엇이냐 물으면 “하나님”이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생명이 곧 하나님입니다. 생명과 사랑이 하나님 안에는 나뉠 수 없는 하나입니다. 피조 세계의 사랑과 생명은 나누어진 것처럼 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명과 사랑이 아주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을수록 고등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을 더 많이 닮은 피조물이 되고, 두 개가 어설프게 연결되거나 연결이 느슨할 때 하등의 피조물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 식물, 무생물이 있게 되는데, 무생물 같은 경우에는 생명과 사랑의 연결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무생물이니까 생명이 없으니까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 대신 자기는 생명과 사랑이 없어도 생명과 사랑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아주 화가 났을 때 물컵의 물을 들 때와 아주 온유하고 은혜 받았을 때 물컵의 물을 들었을 때 그 물은 다른 물이라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우리가 육각수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엔도우 슈사코라는 일본인이 쓴 책에 보면 컵에 물을 넣고 파괴적인 이야기를 써 놓으니까 물의 결정이 달라지더라.. 신기하다 하는데 신기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 예상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못 받은 사람들이 자꾸 저 나무 만지면 안 됩니다. 건들지 마세요. 안 좋아져요. 그리고 마음에 맺힌 것이 많은 사람이 땅 자꾸 밟으면 안 됩니다. 그 밑에 개미들이 다 영향 받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지구를 떠나야죠.
그런데 식물들의 경우에는 능동성과 수동성을 함께 가집니다. 나무가 수동적이어서 여러분이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주고 어루만져 쓰다듬어주면 살아납니다. 집에서 화초 많이 경험해 보셨지요. 화초를 계속 살리는 사람이 있고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술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애를 쓰는데도 잘 안자란다 싶으면 은혜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세요. 또 능동적인 것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에 나이테가 형성되는데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면 나이테도 같아야하는데 절대 같지 않습니다. 그 땅에 전쟁이나 기근 아주 비참한 살육사건이 일어나면 나무의 나이테가 다릅니다. 식물이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수동성만 아니라 능동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동물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고, 더 위로 올라가면 인간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랑과 생명이 결합됩니다. 놀라운 일이죠. 무생물의 경우에는 자기번식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존재로서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산이나 바위를 보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러지만 그건 존재에 대한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 되었고 너무 유물론적인 생각입니다. 몇 만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바위를 보고 몇 십 년만 지나면 사라지는 자기를 보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유물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돌멩이나 바위에게는 자기생성 능력이 없습니다. 고체성을 가지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를 훼손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식물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은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자기를 생성합니다. 그래서 자기와 똑같은 그 무엇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개체를 생성합니다. 식물학자들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꽃이 수정 받이를 할 때 암술과 수술이 만나서 수정이 될 때 인간과 동물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쾌락을 느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사랑과 생명현상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물들에게는 좀 더 고등합니다. 동물들이 만나 짝짓기를 합니다. 그리고 교미를 하면서 아주 놀라운 쾌락을 맛보고 잉태를 하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가 새끼 낳았다고 문병 오는 것 보았습니까?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개는 엄마만 알지 아빠는 모릅니다. 그리고 개 둘 사이에 눈물겨운 사랑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새끼와의 사이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만 암캐와 수캐 사이에는 그런 것들이 있을까요? 사랑으로서는 생명 현상이 있긴 하지만 아직 정교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줍니다. 식물에 비해서는 정교하죠.
인간에게 올라가면 아주 놀랍습니다. 만나자마자 성적인 관계를 갖고 아이를 갖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눈치를 봅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같이 있고 싶습니다. 접촉하고 싶고 마음에 연합이 일어나면서 결혼을 하고 그리고 육체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를 자신의 생명처럼 여자도 사랑하고 남자도 사랑합니다. 그 아이와 함께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관계를 계속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이 성장하면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놀라운 삼위일체의 모상입니다. 거기서 생명이 생겨납니다. 하나님 안에는 둘이 한꺼번에 있는데 인간에게는 계기적으로 사랑이 먼저 있고 사랑 안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이 사랑을 지탱시켜줍니다.
부부가 살다가 싫증이 나서 에휴 재미도 없네 그러다 애가 나오면 둘이서 맨날 얼굴 쳐다보다가 다투기도 하다가 애를 보면서 애 때문에 화해도 하고 기쁨을 느끼면서 삽니다. 지루해질만 하면 두 번째 아이가 또 나오고, 이 아이는 딸이야. 아까 첫째 아이랑은 또 달라서 거기서 재미를 느낍니다. 지루해질만 하면 또 아이가 나오는데 이번에는 두 명이 한꺼번에 같이 나와. 그러니까 또 신기한 겁니다. 이러다 살다보면 못 헤어지고 살게 됩니다. 생명과 사랑이 정교하게 연결이 될수록 고등한 사물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동물 이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이것으로 충분하지만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육체에서 사랑과 생명이 교통하는 것도 매우 특별하고 영혼의 사랑과 생명이 교통하는 것, 이것이 오히려 더 상호교통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상호교통이 상태에 따라서 네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타락 전, 타락 후, 회복 중, 영원한 세계로 나누어집니다. (그림을 보며) 성부하나님 성자,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 교통의 본질이 사랑과 생명 둘이 함께 삼위 안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과 상호교통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당신을 닮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깊이 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가히 작은 신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놀라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 자신이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위에 맞는 삶을 못삽니다.
이런 생명과 사랑이 이렇게 빛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있고 다른 자연적 사물이 존재합니다. 이런 자연적 사물들이 서로 상호교통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사랑이 교통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여기에는 아주 작은 미생물부터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의 천체까지 모두 해당됩니다. 생명이 있는 자연적 사물은 그 영광을 무생물에 비해서 훨씬 더 찬란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생명이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것처럼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펼쳐지고 이것을 커뮤티케이션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원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상태로 머물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이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지식, 인간의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과 사랑, 인간의 자기 바깥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지식과 사랑은 끝에까지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증진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처음 아담도 타락하지 않았으면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고 덜 사랑할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빛나는 창조세계의 질서는 고정된 것일까요, 발전 가능한 것일까요?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입니다.
창조물들이 찬란한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상호교통을 통해서라면 상호교통 이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이 안에 넘치는데 이 생명과 사랑이 원천적으로 볼 때 끝이 없습니다. 생명과 사랑을 저수지처럼 가지고 있는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끝이 없기 때문에 계속 흐르게 됩니다.
우리가 흐른다고 할 때 두 가지 종류의 흐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정도로 계속 흐르고 흐르면서 사라지면 계속 흘러도 똑같은 흐름이 됩니다. 또 하나의 흐름은 계속 흐르는데 이것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점점 더 강렬하고 강하게 흐르는 흐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처음에는 콸콸 흐르는 것 같은데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흐르는 것이 꺼져버리고 멎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피조세계 속에 흐르는 이것은 둘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계속 흐르거나 갈수록 점점 더 넘치게 흐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중에 첫째보다는 두 번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중요한 명령 두 가지를 주십니다. 하나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종교명령과 또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충만해지라는 노동명령 혹은 문화명령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 충만해라 그리고 다스리라..
다스리라고 할 때 히브리 단어가 ‘라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폭력을 사용하여 나무를 다 꺽고 때려 부수고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거나 관리자로서 모든 물건들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동작을 말합니다. 정복한다는 의미는 반항하는 것을 때려부순다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된 것이 아담에게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했지만 인간이 노동을 가미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창조 세계를 가꾸면 이 영광은 계속해서 점증하는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정복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영광은 점증했을 것입니다. 이 점증은 사랑과 생명의 분여, 사랑과 생명의 흘려보냄을 통한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본질은 생명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가시적으로 인간에게 나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존재도’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존재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완전한 있음이시고 인간은 하나님보다 덜 있는 존재이고 동물은 그 보다 더 덜 있는 존재이고 그 다음에 식물, 이렇게 내려가면서 피라미드를 형성합니다.
덜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상이 있습니다. 플라톤주의 사상입니다. 거기에서는 악의 문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일자’라는 말을 씁니다. 가까이 있는 존재가 있는데 이것이 고등한 생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동물, 식물, 무생물 순서가 됩니다.
플로티누스라는 사람은 신플라톤주의의 거두인데, 하나님은 완전한 있음을 가지고 계시고 인간은 하나님보다 못해서 여기 까만 부분만큼 없음을 가집니다. 있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있음이신 이 분은 완전한 선이 되십니다. 인간은 이만큼이 없습니다. 이게 ‘프리바치오보니’ 선의 결핍이 됩니다. 이 선이 결핍된 것이 악의 정체라고 보았습니다. 동물은 이것보다도 더 많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까만 부분이 많아 이것이 프리바치오보니, 선의 결핍입니다.
그래서 결국 플라톤주의에서 이야기하는 ‘물질계약설’이라는 것은 모든 물질은 악하다는 것이 이런 구도를 가진 것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즉, 지적이고 영적이고 사유적인 것으로 올라갈수록 있음은 많아지고 없음은 적어지는데 비해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인간에게서 동물, 동물에게서 식물, 식물에게서 돌멩이나 쇳덩이 같은 무생물로 내려올수록 없음이 훨씬 더 많아집니다. 없음이 많아질수록 악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려올수록 악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으니” 할 때 ‘폴 로고스 에게네토사르크스’ ‘사르크스’는 고깃덩이, 살을 말합니다. 그 로고스 말씀이신 그 분이 살코기를 입고 온 것입니다. 그 살코기는 여기 존재의 분류에서 보면 악 덩어리입니다. (책상을 치시며) 이런 것들이 악 덩어리입니다. 이런 것들과 많이 접촉하면 접촉할수록 인간은 계속해서 영혼이 하늘로 상승하지 못하고 물질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손대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플라톤주의자들이 어떻게 손 안대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숟가락 안 쓰고 어떻게 밥을 먹겠습니까.. 컵에 물 따르지 않고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사용 안한다 하더라도 손은 물질이 아닙니까? 물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도 물질 때문에 영혼이 갇히게 된다는 사상과 함께 물질 자체가 영혼을 잡아당긴다는 것보다는 물질에 마음을 자꾸 빼앗기는 인간의 이러한 존재의 질서를 무시하는 인간의 마음의 욕망. 이것을 정신 차리고 제대로 보면 이런 건 시커먼 것이니까 여기로부터 점점 마음이 멀어지고 저 하얀 것을 향해 올라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안하고 이 순서를 무시해서 더 좋은 것을 버려두고 악이 훨씬 많은 시커먼 덩어리를 좋아하고 자꾸 거기에 집착을 합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그 영혼에게 쇳덩어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고양, 영혼의 상승을 막습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와 영혼 전체인 인간을 지도하는 능력입니다. 이게 결국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힘을 잃어버리게 되면 육체의 욕망이 날뛰면서 인간은 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떠나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철저한 금욕주의의 삶을 삽니다. 목표 자체가 영혼을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하늘을 향해 날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래는 마니교에 빠져있었습니다. 마니교라는 것은 216년에 마니라는 사람이 페르시아에서 태어납니다. 이 사람은 아주 독특한 사상가였습니다. 당시에 아주 지성적인 사상이 세 가지 있었는데, 가톨릭교와 신플라톤주의와 마니교였습니다. 마니교가 당시 지성인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방식 자체가 성경을 펼쳐 보이면서 성경에서 아주 중대한 논리적 모순들을 찾아내서 공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무너뜨리고, 우리 마니교는 말도 안되는 성경을 믿으라고 하는 가톨릭시즘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이해되는 것만 믿고 우리는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종교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혹해서 빠져있었습니다. 마니교의 정체가 여러 가지를 섞은 것입니다. 불교, 기독교, 영지주의, 동양의 신비사상을 섞어서 가톨릭의 이단을 만들었습니다. 거기는 나름대로 정교한 신화와 논리를 가지고 세계관을 만들었습니다. 하르낙이라고 하는 역사가가 말하기를 마니교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와 인간에 관한 총 포괄적인 신학적 설명을 한 사상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에서는 엉터리 같은 것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하고 통일성이 있는가 했더니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고 제 각각인데, 마니교는 너무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어서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나중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여러 과정이 있는데.. 이 사람이 워낙 뛰어나니까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했더니 너무 고차원적인 질문이니까.. 이런 질문을 할 때 이 사람은 이미 상당한 철학적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런 철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몰랐는데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알게 되었습니다. 범상치 않게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야 간신히 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의 설명도 필요 없이 모든 책을 읽었고 거의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몇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입니다. 그런 천재였는데 처음엔 혹하고 믿었는데 철학적인 수준이 깊어가면서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고민을 이야기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면 파우스투스라는 최고의 스승이 오시는데 아실 수 있을거라고.. 그러고 가서 들었는데 별로예요. 질문을 했더니 쩔쩔 맵니다. 철학적인 수준이 중하정도예요. 그래서 자기가 논리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을 했더니 오히려 나를 잘 가르쳐주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실망을 합니다. 두 번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두 번째에는 당시에 최고의 마니교 지도자와 공개토론을 해서 묵사발을 만듭니다. 그리고 다 쓸데없는 것이구나 하고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의지할 곳 없이 방황을 하고 다니다가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회심을 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회심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풀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회심의 계기가 빅토리누스라는 사람의 책을 만나게 되면서입니다. 빅토리누스라는 사람은 신플라톤주의자였는데 희랍에 있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번역해서 사상서들을 라틴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것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의 눈이 확 떠지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일반계시 차원에서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주후 2세기에 플로티누스라고 하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입니다. 그 사람의 대 스승이 플라톤입니다. 그 사상을 섭렵하고 받아들이니까 다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악이라고 하는 것이 선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이 악이 선의 결핍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을 결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악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질서가 생겨나고 동물과 인간 사이의 질서가 생겨납니다. 그러면 세계를 질서롭게 형성하기 위해서 악은 없으면 안되는 꼭 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플라톤주의의 설명인데 예수를 믿으려고 들어와보니까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악은 세계가 창조될 때부터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선한 것입니까 결함이 있는 것입니까? 악이 있으니까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을 합니다. 만약에 이 악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거기에 두셨던 것이라면 도덕성의 문제가 있고, 만약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들어온 것이라면 능력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도 믿을 수 없고 저래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이 있었고 우주와 천제, 정신의 세계, 물질의 세계 그리고 지구 수많은 풀과 꽃과 수많은 사물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개별적으로 완전하고 질서에 있어서도 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매우 좋았더라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 성경을 탐구하면서 오랫동안 계속 되어 온 의문들을 풀 수 있었습니다. ‘프리바치오보니’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완전한 창조요 하나님은 어떤 악을 스스로 도입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냈습니다.
여기에서는 인간이기 위해서는 하나님보다 못해야 하기 때문에 못한 것만큼 ‘프리바치오보니’ 선의 결핍이 오는데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출발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있음이시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들은 완전한 있음으로 창조하고 싶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 있음의 한도를 정하고 동물은 동물에게 있음의 한도를, 식물에게는 무생물에게는 각각의 있음의 한도를 정하신 것입니다. 한도를 부여하셔서 그 한도 내에서 있음을 소유하게 만드셔서 질료를 창조하시고 형상을 부여하신 것이 인간이 되게 하시고 동물이 되게 하시고 식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꽉 채웠으니까 이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이란 하나님 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지정된 있음의 정도가 있는데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악해서 이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지정된 있음을 상실하는 것만큼 악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창조한 세계는 이런 것들이 각각 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것이 상호교통에 있어서 아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있음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사물 하나하나가 완전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상호교통을 허락하셔서 이 우주의 모든 사물들이 한 가족인 것처럼 영적으로 연결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처럼 그렇게 교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타락을 하게 되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서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 피조 세계 속에 교통이 이루어지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은 자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생명과 사랑을 누리고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 있던 생명과 사랑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 버리시고 일부분만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관계가 다 깨드려진 것입니다. 찬란하게 비추었던 빛이 비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보이시고 인간을 구속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 사랑과 생명이 본질인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인간들에게로 엮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된 인간들이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고 접붙여진 지체들끼리 하나님께 다시 생명을 얻은 영혼들로서 연합을 이루면서 이렇게 형성하게 되는데 이게 결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타락된 세상이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는 첫 번째 모판입니다. 여기에서 이것들이 새끼를 치고 번식을 해서 결국은 온 세상을 포괄하고 들어오지 못할 자들은 완전히 끊어서 지옥으로 던지고 남아있는 피조 세계까지 그 교통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오늘날 이 시대의 계획입니다. 바깥에 있는 인간은 인간인데도 아까 앞에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런 상태를 지속하게 됩니다. 이런 관계들이 다 끊어진 상태에서 삽니다. 저 사람하고 정말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결혼했지만 안됩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마음먹지만 실제로는 잘 안됩니다. 이렇게 끊어졌기 때문에 않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다 깨진 상태 속에서 살아갑니다. 만물도 지금 우리 시대를 보면 일부는 구속되어 있지만 이것은 아주 소수이고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아직도 죄 때문에 상호교통이 깨진 채 존재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상호교통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은혜 떨어지면 불신자들끼리 악을 행하는 것보다 더 큰 악을 믿는 사람들끼리 행합니다.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회복을 이루십니다.
이제 점진하는 영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을 사람들이 오해해서 창조의 상태로 돌아가는구나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창조 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러한 상태였다면 타락한 다음에 깨뜨려지면서 영광이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구속이 진행되는 중에는 부분적으로 영광이 회복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깨뜨려진 채로 영광이 회복되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영광을 회복해 나가는 것이 미션이고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고 거룩한 삶이고 하나님 사랑의 전파입니다.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완성이란 죄와 갈등하면서 살아가는 구속의 미성취 상태가 완성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고 버림받을 사람은 완전히 버림 받아서 세계가 구속 상태가 완성이 될 때, 4번의 상태가 1번의 상태와 같아집니다. 이쪽 측면에서 보면 4번은 2, 3번에 비해 완성이지만 5번의 측면에서 보면 4번은 겨우 출발점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부분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 2, 3, 4번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 다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발점을 해서 완성 이후에는 이것들이 점증하는 영광으로 발전하는데 점증하는 영광의 점증은 끝이 없습니다. 무한히 영광이 점증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구속을 모두 완성하시고 그래서 인간이 모두 구원되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세계가 될 때 어떻게 될 것인가? 그때 인간들 사이에는 서로 미움과 다툼이 없고 다시 뒤로 퇴보할 가능성이 없는 완전한 교통을 누리게 됩니다. 이 교통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이 영광이 점증하는 영광입니다. 이 점증하는 영광의 본질은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을 점점 더 넘치게 이 세계 속에 부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부어주십니다. 인간과 만물 위에 부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영광은 점점 더 찬란하게 온 세계에서 점증합니다.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전율하는 영광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싫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계속 주어지고 예전에는 경험한 적이 없었던 더 놀라운 사랑, 예전에는 느낀 적이 없었던 더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이 경험되면서 그것들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상호교통이라는 통로를 타고 콸콸콸 흘러갑니다. 그래서 그것들 속에 생명과 사랑이 확 피어납니다. 이것이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 말고 자연적 피조물 속에도 이것들이 펼쳐집니다.
결국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면 인간을 통해서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모두 더럽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이 속에 불어 넣으실 그 때에도 결자해지에 의해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랑과 생명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 자연적인 모든 피조물은 인간만 바라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고 구속을 받는 그 날에, 자신도 다시금 창조 시에 누렸던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온 풀과 나무, 꽃, 새들과 짐승들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만물이 완성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들의 성령 충만은 대개 근심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아니면 우리의 개인적인 기쁨을 위해서, 능력 있는 사역을 위해서, 은사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운수대통하기 위해서..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령 충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을 주시기 위한 목적은 절대로 그러한 개인의 행복의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은 언제나 계셨고 이 땅에 수시로 내려오시고 이 땅에 충만히 거하시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이미 보내신 그 성령을 더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 때가 말세의 끝입니다.
마지막 때에 특별히 성령을 더 부어주시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심으로써 만물의 상호교통을 완성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만물을 상호교통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교통이 끊어진 피조물들을 교통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이 진리와 함께 인간 속에 오시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생명과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던 인간의 영혼에 놀라운 중생과 회심의 변화가 일어나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 눈에 죽어 있는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영혼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하고 생명과 대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흘러 보낼 때 또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를 살리십니다. 또 흘려보내고 또 흘려보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선교적인 관점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화의 길에서 미끄러져서 신앙이 식었을 때에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 은혜 충만한 사람이 가르쳐주는 진리의 복음,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권면해주는 말, 그가 대신 드려주는 간곡한 기도를 통해서 그의 영혼이 다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인입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죽었던 자과 같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이런 생명의 현상이 가장 풍부하게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작은 이 공동체를 만드시는 데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이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서 죽음을 극복하게 만들고, 이것들이 끊임없이 흘러 넘쳐서 사람들에게 이 생명과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 교회의 가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세계 속에 무너져버린 만물의 상호교통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의 영광을 이 피조 세계 속에 장엄하게 무한히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눈동자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이 성령의 교통 속에서 인간과 교통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의 영혼과 육체 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열한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공부도 잘하고 가문도 좋고 사람 인품도 괜찮은데 교역을 시켜보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혼이 그 사람 때문에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공부도 그렇게 잘하지 않고 문제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혈기도 있고 왠지 동의하기 불안한 인격 같은데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는 영혼이 달라붙고 그와 접촉하면 이상하게 사람들이 뜨거워지고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그렇습니다. 이번 열린 신문에 고등학생의 간증 읽어보셨습니까? 한 고등학생이 왔는데 아주 일꾼감이예요. 이 교회 좀 다녀보겠습니다. 고등부 목사가 그 아이 이야기를 한참 들어보고 너는 네 교회로 가라 너희 부모님과 함께 다녀라 라고 했어요. 자기 같은 사람이 오면 굉장히 좋아하고 반겨줄지 알았는데 엄마한테 가라는 거예요. 아빠라 다니라고. 오지 말라고 하니까 더 오기가 생겨서 오잖아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예화) 중등부 전도사 시절에 중등부 부장선생님이 여러 번 심방해도 잘 나오지 않는 학생의 집에 가서 출석부의 이름에 빨간펜을 그으며 다시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그 다음 주에 나왔다는 이야기.
누군가는 손을 대면 생명과 사랑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외모나 이런 것으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았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움직이는 것이고 사랑은 결국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흘러, 그리고 그 사랑은 피조 세계를 향해 흐르고 그 사랑을 또한 피조 세계를 향해서 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는 곳에 접촉하는 영혼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성령 충만은 중요한 것이고 구약 시대에 성령 충만을 못 받은 것은 큰 죄가 아닌데 마지막 때에 성령 충만을 못 받은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 다 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표시가 이렇게 되어 있지만 한사람 한사람 표시가 어긋나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망가진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거미줄처럼 퍼져 스며들어 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 기뻐하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는 피조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나무나 나비나 태양이나 새들이나 산, 별, 구름, 기러기까지 이 모든 것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상호교통이 회복 됩니다. 그러면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찬란한 상호교통 속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영광과 충만한 것을 피조물 구석구석에 실어 날라서 하나님의 찬란한 빛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여기에 수만 개의 등을 달고 약간 밝게 했습니다. 이게 창조예요. 전기가 망가져서 팍하고 불이 확 나갔어요. 이게 타락입니다. 다시 수리를 해서 탁 들어왔어요. 이게 회복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100와트짜리 전기 시설에 220와트 전구를 끼웠어요. 그러면 아주 희미합니다. 그러면 안되죠. 그래서 220으로 확 올립니다. 몇 만개의 등불이 확 빛을 발하면서 이게 점증하는 영광입니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때에는 성경이 필요 없습니다. 설교가 필요 없어요. 왜냐면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니 온 땅이 창조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찹니다. 밤과 낮이 없으니 아침이 따로 있을 수 없지만 그 다음날 눈을 뜨면 그 전에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영광,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찬란한 영광, 매순간 비치는 그 찬란한 영광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영광을 합친 것보다 더 찬란한 영광으로 비례승수로 팍팍 펼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확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부활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정동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면서 그 분과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희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율하는 가슴 벅찬 감동이 매순간 찬란한 영광의 광채 속에서 계속됩니다. 이것이 성도를 위해 예비하신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줄달음질 하는 구속의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미래가 주는 메시지는 그 때까지 먹고 놀고 죽을 때 기다리고 죽어서는 부활할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전망을 가지고 그 일을 우리들이 성령 충만해서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적인 죽음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영적인 끊어짐과 갈등 그리고 모든 다툼, 이런 비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가지고 땅 끝까지 모두 흩어져서 만나는 모든 사람 접촉하는 모든 인간에게 삼위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넘치도록 하나님이 흘려보내실 수 있도록 우리들이 상호교통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죽음이 가득한 땅에 생명이 미움과 갈등이 가득한 곳에 사랑이 그래서 하나님의 사라지고 타락한 인간의 죄만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삼위의 교통하시는 영광이 가득 차도록 인간 스스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운명을 변혁시킬 수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고 마지막 때에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지위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결정적인 일은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학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임종을 앞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이런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해서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만물에게 이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주어서 이 세상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에 아무 관계없이 살다가 죽을 운명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과 사랑을 흘러 보내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이 완성될 때에는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을 피조물 속에 직접 부어주시겠지만 지금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용하여 성령을 통해서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을,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하나님이 없는 그 곳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전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갈등하고 아파하지만 우리가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이 위대한 세계 우리의 선조들로 인해 망가진 이 세계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하나님으로 가득 찬 이 세계와 우주로 만드는 도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생각을 할 때 이것은 정말 가슴 벅찬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느끼는 갈등이나 고통,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 겪어야하는 아픔이나 고통들은 이 영광스러운 우주적인 비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전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잠시 시간 속에서 있다가 사라질 육체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어서 접촉하는 그곳마다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어서 그들의 운명을 바꿔줘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얼마나 가슴 벅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무 가슴 벅찹니다. 이 논문을 일주일 동안 완성하면서 아, 그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이 온 땅과 세계와 이 드넓은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흘려보낼 성령의 동반자로 우리를 삼으셨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