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C 간담회 2
녹취자: 박지성
(질문 1) 원래 목사님께서 추구하는 방향이 있는데 여기에 잘 소개가 되지 않은 것 같아 궁금합니다.
(답변 1) 그런 질문을 계속 받는데 시간이 없어서 프레젠테이션을 다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 쪽에 소장파 이슬람 신학자로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학자로 풀러에서 공부를 하고 아프리카 케냐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철수 선교사가 와서 며칠 동안 우리 교회를 쭉 돌아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장파 선교학자로서 이정도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를 처음 봤다고 얘기할 정도로 그렇게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 프레젠테이션을 못했지만 절기를 따라 가는 국내, 해외 아웃리치 말고도 호스피스 사역이라든지 국내 전도사역 등등이 있습니다. 저희가 현재 화요일마다 매주 150명의 성도들이 나와서 열매는 사실 많이 없지만 지역을 돌며 축호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앞에서부터 차단을 하니까 요즘 같은 때는 축호전도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지금 그것을 저희들이 17년째 계속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열매가 없다하더라도 그쪽 사역들이 계속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의 말기 암 호스피스 환자들의 사역부터 시작해서 병원전도가 여러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형무소 전도, 사형수 전도 등등해서 굉장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주일날 참석하는 2800명 정도의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엔게이지 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런 식으로 사역의 장들이 많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가지고 있는 염려는 사람들에게 교리만 가르쳐서 머리만 키우는 교회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쨌든지 섬김의 장 속에서 그것들을 펼쳐보려고 하는 많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지사역이나 이런 쪽들도 이웃사랑위원회나 돌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될 삶의 영역이라는 것이 교회가 어떤 것을 조직을 해서 교회가 고유한 기능을 펼치는 것도 물론 있지만 그래서 그것들을 우리들이 세분해서 60개 위원회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교회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존재하는 섹터를 나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위한 것은 예배나 이런 것들로 규결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의 거대한 군사조직체처럼 보는 것도 문제가 있고, 병원처럼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결국은 군대와 똑같이 군대를 보면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을 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군인들이 피를 흘리면서 전투를 하는 사람이 있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부대가 있고, 부상을 입고 돌아와서 병원에 가는 사람이 있고, 이렇게 종합적으로 모두 이루어지듯이 교회의 기능이 그렇게 오버론 해야 한다고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을 획일화해서 ‘우리는 교회는 군대다’라는 식으로 ‘우리는 병원이다’라고 접근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역들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실제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하는 문제는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는지도 관계가 있지만, 알다시피 어느 교회든지 사역을 펼치는 그 장속에 들어와서 사역을 하는 사람은 20%~30%의 교인 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것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신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대로 그 사상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성화의 소명 그 자체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희망과 의지를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정직과 이런 것들을 펼쳐 보이면서 살아야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 2)
(답변 2) 이야기를 하자면 굉장히 긴데 요점을 간단히 간추려서 이야기를 하면 우리들이 지금 교리를 거의 교회에서 무시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이것을 사조적으로 보면 교회 속에 세속주의의 정신이 스며들어온 아주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는 것은,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이 뭐냐면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 사상을 예수쟁이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2세기의 교부 테르튤리아누스, 우리들이 교회사 시간에 배운 터튤리안입니다. 터튤리안 시대에만 하더라도 교회에 와서 입교를 하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우주론이었습니다. 코스몰로지. 여러분이 교회사를 배우셨으니까 잘 알고 있는 초대 교부 중에 대표적인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을 한번 보십시오. 오리겐이 쓴 “신학 원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최초의 조직신학 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우리는 ‘그 책은 개혁신학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접근을 할 수는 없지만 거의 철학책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해서 지옥 갈 영혼을 구원을 받게 하고 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함께 교회를 이룬다는 그 개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뭐냐면 근거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인 나는 누구고, 이웃은 누구고, 교회는 무엇인가를 깨달으면서 결국은 그런 사상의 얼개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와 가장 잘 비견될 수 있는 것이 공산주의인데 공산주의는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면 모든 세상의 역사와 경제활동 심지어 정치, 사회구조, 도덕까지 공산주의 시각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그 기본적인 골격이 뭐냐면 교리입니다. 지금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오늘 날의 가치포기적인 정신사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개념들은 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성애도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뭐가 나쁘냐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미국에 있는 어느 교수는 부부관계가 남자와 여자사이에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와 남자사이에도 성립한다. 그 정도가 아니다. 동물하고도 얼마든지 부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까지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제까지 내려오는 절대적인 가치개념 같은 것들을 무너뜨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것이 진리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굉장히 기분 나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날의 설교들이 탈 신학적인 설교가 되어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가치에 대한 거부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신앙을 떠나서 이성을 제일로 보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감정으로 넘어가서 지금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어떤 이것이 진리다고 이야기하면서 교리를 가르치는 것 자체가 오늘날의 시대정신에서는 굉장히 생경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리를 가르치면 사람들이 딱딱하고 지겨워서 싫어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절대로 편견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냐면 짧은 시간 안에 기독교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강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린이 교리교육부터 잘 스며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가 성장이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교회를 하면서 가장 어렵고 교리적인 설교를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주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나는 역설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사상이 견고하게 설 때 아주 체계적인 것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아주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돌아가셔서 영혼들을 불러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80%가 양태론입니다. 초대교회의 샤벨리아니즘, 모델리아니즘입니다. 전부다 교회사 속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어떻게 생각 하냐면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양태론을 믿든지 삼신론을 믿든지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하지 않았으면 초대교회 사람들이 왜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싸웠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물어보십시오. 대게 호모이우슈우스입니다. 예수는 신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신과 유사한 존재이다.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80%이상이 다 그렇습니다. 그것을 방치하고 내버려 둡니다. 그러는 속에서 교리적 관용주의 속에서 수많은 이단과 자유주의들이 다 들어옵니다.
여러분 요새 오픈데이즘 아십니까? 오픈데이즘. 오픈 데쓰 오브 갓. 지금 미국에서 엄청나게 활발하게 논의가 되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소위 얘기하는 식자층이라는 사람들이 이것을 배워 와서 온 교회에 다니면서 전파합니다. 교인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도 미래에 되어 질 일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배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펠라기안주의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목회자들이 모릅니다. 그렇게 배워 와서 전파합니다. 지나친 이야기지만 엔트라이트의 소위 얘기하는 뉴 퍼스펙티브 온 폴린 씨올로지에 대한 오늘날의 제임스 던과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논쟁들도 이것보다는 하류이지만, 이만큼은 아니지만 이와 상당한 연결 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부다 다 인간이 모든 결정과 행위의 주체라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리를 배우지 않고는 그것을 판단을 못합니다. 빨려 들어갑니다. 이런 라인을 타고 릭 워렌 새들백 처치 이런 쪽에 나오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펠라기안 내지나 세미펠라기안주의를 깔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혁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인데 무엇이 개혁신학입니까? 목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게 돼서 설교한 것들을 가져와서 쭉 펼쳐놓고 보면 줄을 그어놓고 읽어보면 ‘아! 이 사람의 신학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이 교단마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단으로써의 특성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고신이라고 해서 특별히 이런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감리교라고해서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전체적인 설교 그 자체가 하나의 오프라 윈프리의 쇼같이, 아침마당에 나오는 것 같이 인간들에게 감동을 주고 이웃을 위해서 선한 삶을 살게 만드는 식으로 가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에티컬 한 설교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구자유주의속에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나는 피를 토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목회자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직무유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교인들을 카타키스무스로 만들어서 “당신은 왜 태어났습니까?”하면 교인들이 대답을 해야 합니다. “스투데오 에르고숨, 공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무엇을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잘 계시되었으므로 우리는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엊그제 제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마이클 호튼 교수에게서 추천서를 써 달라고 1000페이지 정도 되는 조직신학 원고를 받았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전부다 신론이었습니다. 신론 안에서 서론이 나오고 신론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인간 창조, 신론 안에서 구원, 신론에서 삼위일체 안에서 신적 작정의 펼침이 구원입니다. 그 다음에 신논 안에서 교회론, 신론 안에서 종말론 전부다 신론 하나 아래서 이것을 펼쳐나갑니다. 그런 식의 신앙의 접근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정말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나는 정말 눈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20년 만에 자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열렬하게 환영했던 사람들이 목회하는 시골 도시를 다 돌면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분노하면서 “20년 전에 그렇게 나의 종교개혁에 동참하고 분연히 일어섰던 목회자들의 교회를 찾아가보니 우리 교인들은 사랑스러운 돼지새끼들이었습니다.” 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코가 빨간 채로 설교하러 올라갑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술에 취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쓴 것이 마르틴 루터의 대소요리문답입니다. 가르쳐야합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현대적으로 가르칠 것인가라는 것은 별개지만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차근차근히 특히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합니다. 저는 이 강도 가지고는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교리에 대해서 차근차근히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이 브리지에서 네 살 먹은 아이가 둘이서 싸웠습니다. 여자아이와 남자 아이가 싸우다가 갑자기 남자아이가 물었습니다. “야, 너 우리가 왜 이렇게 싸우는지 알아?” 여자 아이가 “네가 잘못 했잖아. 네가 내 것 뺏으려했잖아.”, “아니야”, “그럼 왜 싸워?”, “너와 내 속에 새카만 것이 많아서 싸우는 거야.” 전적타락의 교리를 아이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예화)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일로 어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근처에 교회가 세 개가 있는데 우리교회, 건너편 교회, 옆에 교회. 그 유치원의 선생님이 크리스천이라 아이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아주 잘 아름답게 설명을 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이쪽 교회에 있던 아이가 “야, 천국이 정말 좋구나. 엄마에게 보내달라고 해야지.”그랬습니다. 모두 여섯 살 먹은 아이들인데 그 중 우리 교회의 아이가 “야, 거기는 너희 엄마한테 부탁한다고 너 거기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옆에 있는 아이가 “그럼 나도 착하게 열심히 살아서 들어가야지” 그랬더니 우리 교회 아이가 “착하게 살아서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그러니 아이들이 눈이 둥그레져서 그럼 거기에 어떻게 해야 가는데? 그러니까 “회심해야갈 수 있는 나라야.” 어려서부터 그런 사상이 정확하게 생기도록 그래서 이제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합니다.
(예화) 작년의 일입니다. 근처에 사는 집사님의 애들이 셋입니다. 언니가 3학년이고 6살 5살인데 서로 밤중에 모여서 교리배운 것을 자랑합니다. “누나, 누나, 이런 것 알아?” 유치부 아이가 물어보니까 누나가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짜증나 죽겠네.” 그럽니다. “너 그럼 하나님의 존재의 필연성에 대해서 말해봐.” 그렇게 차근차근히 가르쳐야합니다.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믿어야 될 내용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의심 없이 쭉쭉 빨아들이면서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배우는 것입니다. 견고해지려면 반드시 교리를 배워야합니다.
(질문 3) 개척하셨을 때부터 성도님들의 양육을 교리공부로 시키셨습니까?
(대답 3) 교인이 50명이 안 모였을 때에도 엄격하게 교리시험 봤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문답집을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중생의 회심의 표가 없으면 세례도 안 줬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전도사님 부인이 유아세례를 줘야하는데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신학교를 나온 자매였는데 집에 가서 엄청 싸웠을 것입니다. “너는 신학교도 나왔고 믿는 사람이라고 내가 확실하게 보증을 하지만 어떻게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겠다는 사람이 이것도 안 해왔느냐. 너는 미역국이다”라고 떨어뜨렸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교리시험을 볼 때 장로 한 사람 목사 한 사람 워낙 많으니까 둘씩 나눠서 시취를 합니다. 교리문답집 총회에서 나온 것을 한 달 동안 가르친 다음에 외워야하는데 완벽하게 외워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트립니다. 예전에는 확 떨어트렸는데 요새는 그래도 좀 목회를 하면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세례를 주기 바로 전에 봤는데 두 주쯤 전에 시험을 봐서 떨어지면 재시험을 칠 기회를 줍니다. 한 주 후에. 그때까지 안 해오면 그냥 떨어트립니다. 그래서 얼마 안 됩니다.
(질문 4)어떤 성도들은 배우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양육을 안 받고 교회를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답변 4) 사실 그것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제가 된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오는 사람들이 모두 붙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설교할 때 나는 설교를 안 듣는 사람을 보며 설교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상하니까. 듣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음식점에 음식을 만들었는데 사먹고 가는 사람 위해서 만드는 것이지 왔다 구경하고 가는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만든다면 주방장이 맘 상해서 어떻게 음식을 만들겠습니까?
(질문 5) 개척교회 같은 곳은 목회자가 한 사람입니다. 물론 양육을 성도를 대상으로 잡지만 아무리 혼자라도 시스템은 있어야하는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어렵고, 교재를 선정하는 문제도 어렵고, 해야 한다는 동기는 있고 몸부림을 치며 교리를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이 있는데 1,2년 하다가 교재가 바뀌기도 하며 교회의 교육이 뒤죽박죽되는 악순환이 있습니다. 실재교회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시스템 구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5) 제가 논문에서도 썼지만 1970년대까지는 막 성령운동하면서 교회의 부흥이 와락와락 됐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사람이 모이는 것이 보증이 됐습니다. 그런데 80년 후반, 85년 이후부터 그런 좋은 시절들이 지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형집회 이런 것들에 대한 것들이 8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해서 서서히 꺾어지게 되면서 관심이 제자훈련, 성경공부 쪽으로 많이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라처치들이 많이 기여를 했습니다. ‘네비게이토’라든지 ‘CCC.’같은 단체들이 많이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쪽에서 가지고 있는 교재들의 신학적인 취약점들을 차지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신선하고 좋은 것들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런 것들은 사회적인 팩트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60년대 70년대까지는 외롭고 소외되는 것 등의 문제들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별보고가서 부지런히 밥 벌어 먹어야지만 저녁때 끼니라도 때우고 몸부림치면서 사니까. 그러다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80년대 초부터 우리들이 잘 살기 시작했고 자가용을 갖기 시작한 것이 85년도부터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회가 갑작스럽게 70~75년도에 엄청난 수출을 하면서 80년대 오면서 잘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공허해지기 시작합니다. 배가 부르면 사람들이 딴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공허해지기 시작하고 미친 듯이 일을 했는데 알다시피 중동근로자로 나간 것이 70년대 말 80년대 초였습니다. 다녀와 보니까 마누라도 바람나고 가정이 다 깨지고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관계의 결핍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성경공부모임, 제자훈련 이런 것들이 강한 매력을 가졌고 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사람들이 성경공부와 이런 것들이 좋다고 매달렸을 때 진짜 성경을 체계적으로 열렬히 가리키기 위한 성경공부였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상당히 의심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재료였고 오히려 사람들 자체가 모여서 나누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하는 그런 속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부족했던 사회적 욕구 같은 것들이 채워지는 심리학적인 면들이 많았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무브먼트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이제 소그룹에 대한 관심이 아주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자훈련이나 이런 것들이 소그룹의 이념들과 맞지 무슨 부흥회나 그런 것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 소그룹을 이용해서 공부하는 내용들을 가만히 보면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든지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니드에 부흥하는 그런 종류의 답을 성경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실존주의 적인 접근 방식의 바이블 스터디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 역사가 지나가고 나서 지금 2000년대로 들어오고 났을 때에 그렇게 강해설교를 이야기하고 성경공부 교회마다 안하는 곳이 없었는데도 마지막에 실제로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뭘 알게 되었느냐고 껍질을 딱 까놓고 보면 너무나 아는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면 우리 교회의 교리반에서 보는 퀴즈 문제를 신학대학원 졸업하는 사람들에게 주면 20점 밖에 안 나왔습니다. 20점에서 40점 박에 안 나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녀도 제대로 교리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신론 앞에 조금 하다가 삼위일체 들어갈 때쯤 휴강하고 조금 하다가 땡 쳐버리고 나머지는 리포트, 그리고 요새는 신학도 한 과목을 한 학기씩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론하고 인간론하고 묶어서 한 학기에 하고 기독론하고 교회론하고 한 학기를 합니다. 그런데다가 책은 가벼운 책이 아니라 묵직한 책이니까 자기도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이제까지 배운 것을 싹 쓸어버리십시오. 싹 쓸어버리고 나는 초보자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우리는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이니까 루이스 뵈레콥을 공부하든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공부하든지 영어로 읽을 수 있으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어제 보여드린 튜레틴을 가지고 공부를 하든지 이렇게 하면서 에릭슨 같은 사람들 자유주의들은 많으니까 조심하고 체계적으로 다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은혜를 받고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에게 가르쳐야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질문 6) 어떻게 말씀을 전수하고 계십니까? 어른들에게 가르쳐야한다는 것이 맞는데 그 어른들이 교회의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에게 말씀을 어떻게 전수하고 있는지 목사님께서는 장년들에게 설교를 하고 계신데 장년들이 가정에서 어떻게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해야하는지를 교회가 준비하고 있습니까?
(답변 6) 기본적으로 볼 때 성경적으로나 교회 역사의 전통으로 볼 때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정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부모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안 하면 자라나는 세대들이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기적입니다. 요행이거나 기적입니다.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나겠지만 솔직히 부모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사실 자기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지 자녀들의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가정이 다 콩가루 집안이 됐는데 네 새끼는 네 책임이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던져주는 것만으로 교회가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가정이 버린 아이들을 고아원에서 데려다 기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교회가 돌봐야 합니다.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도 가정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못하는 가정이 대부분입니다. 절반정도 된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가 그래도 상태가 좀 낫다고 하는데도 절반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심지어 여기에서 부모들이 은혜를 받고 펑펑 울고 그래도 자기 하나만 결심하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이 안 변하면 똑같은 가정의 갈등이 계속 됩니다. 난 다른 교회는 절반 훨씬 이하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부모들이 자식교육을 못하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가르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날 아이를 놓고 목사님 주일설교를 예화까지 반복해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몇 번만 하면 아이들이 “엄마는 한소리 또 하고 또 한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장년들에게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쳐서 콘텐츠가 있게 만들어야지만 아이를 무릎에 놓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백스터가 쓴 책 가운데, 리처드 백스터 전집이 4권으로 나와 있는데 영어로 되어있는데, 그 중에 마더스 카테키즘이라는 교리문답이 있습니다. 상당히 긴데 기본적인 성경의 교리와 성경의 내용 전체를 계시록까지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문답에 “예야, 교리문답 배우자”라고 엄마의 말이 나오며 시작됩니다. “엄마 그것을 우리가 왜 배워야 해요?”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믿고 살라고 가르친 교훈이니까 배워야 한다.” 아이가 또 물어봅니다. “엄마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 안 배우는데 우리는 왜 이런 것을 배워요?” 그러면 엄마가 “신경 쓰지 말아라. 그 사람들은 짐승이다. 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이 교리문답에서 배워야한다.”
(예화) 몇 달 전에 신문에 나왔는데 러시아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폐허가 되는 아파트가 있지 않습니까? 재개발할 때 아이하나가 발견됐는데 폐허에서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 같은 아이가 발견된 것입니다.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소리 지르고 짐승처럼. 그래서 경찰이 거기에 가서 그 아이를 접수를 했는데 개가 길렀답니다. 엄마는 이 아이를 버리고 가고 그 아이를 개가 젖을 먹여서 5년을 키웠답니다.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안 가르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최근에 미국에서 우리 동기 한 사람이 왔는데 자기가 교회를 하면서 당했던 황당한 일을 이야기 합니다. 와보니까 세례를 안 받은 사람이 성찬을 먹더랍니다. 안된다고 딱 잘랐답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사람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 다음날 그 사람의 부인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왜요?” 이 양반이 집사입니다. “우리 남편이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사회적으로도 목사님보다 낫고 똑똑하고 배운 사람입니다. 그까짓 떡이 몇 푼이나 된다고 우리남편을 못 먹게 합니까?” 그것이 짐승이 아닙니까? 안 가르치니까 그렇습니다. 그까짓 떡이 몇 푼이나 된다고 치사하게 못 먹게 하냐고 하니 목사가 뒤로 나자빠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겠는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집사가 되는 사람이 성찬을 못 먹게 했더니 자기 남편의 사회적인 지위가 목사보다 나은데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떡 한 쪼가리 포도주 한잔 못 먹게 하냐고 그러면서 목사한테 삿대질을 하고 대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안 가르치면 그렇게 됩니다.
(질문 7)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도전받은 내용들을 시행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개척하시고 부터 변치 않게 가지신 굳은 신념, 변치 않는 마음으로 보통 목회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순모임에 일관되게 가르치는 그럼 마음을 목회자들이 갖는다면 한국교회에 비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개척교회의 목회자들이나 연약한 목회자들이 목사님처럼 일관되게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책이라든가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7) 목회에 대한 본질과 가치에 대한 생각이 목회자 속에서 먼저 정리가 되어야합니다. 나는 이 교회가 첫 번째 교회입니다. 물론 부교역자로 섬겼던 교회는 있지만 이 교회가 내가 담임 목회한 첫 번째 교회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종신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한 번 더 개척을 해보고 싶은 그러면 예전보다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별로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17년 동안 설교하면서 어떤 때는 이 설교를 하다가 교인들이 나보고 이제는 교회를 떠나라고 그럴 수도있겠구나.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궁금하시면 3, 4년 전에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켜라”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이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내가 열린교회를 떠나도 좋다고 마음을 먹고 설교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가라고 안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가치 자체를 자꾸 이렇게 접근합니다. “교리를 가르치면 교회가 성장합니까?”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 이야기는 꼭 뭐와 똑같으냐면 “전쟁을 하면 경제가 발전합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요새 북한 방사포가지고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사실 별것 아닙니다. 그래서 수천발의 폭탄을 쏴서 소나기처럼 수원까지 쏟아 붓는다고 칩시다. 굉장히 많이 파괴될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파괴는 되어서 피해는 입히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요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고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주님을 사랑하면 돈이 좀 생깁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와 반대적인 급부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니까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리를 가르쳐도 말하자면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가르쳐야 할 진리가 목회자 속에 불붙지 않으면 그것을 가르쳐야 할 필연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사실은 여러분이 같이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예레미야서로 준비했다가 설교를 바꿨습니다만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하도 자기를 핍박하니까 꼴 보기 싫어서 그럼 나 예언 안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결심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속에서 불붙어서 그래서 사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토해놓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설교자의 소명입니다. 사람도 못 볼 것을 봤다든지 보고 싶은 것을 봐서 마음에 기쁨과 놀라움이 꽉 차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데 하물며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외치지 않겠습니까?
(예화) 제 친구가운데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직장 다닐 때 제가 복음을 전해서 방황하다가 돌아와서 신학교를 다니고 가서 목회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잘합니다. 교인이 한 80명도 안 되는 교회에 가서 200명을 만들고 거기서는 뭐 쉽게 사람들이 호락호락 예수 안 믿습니다. 지금도 본 토박이들은 딸을 시집보낼 때 뱀을 싸서 보냅니다. 이정도로 토템이즘이 무서운 땅입니다. 1700평에 교회도 지었습니다. 하루는 부교역자 얘기가 나왔는데 부교역자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안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 제주도까지 봉사하러 오겠느냐는 것입니다. 통합측 교회인데. 그럼 그러지 말고 사례를 조금 더 주고 사례는 사례대로 하되 서울에서 여기 올 수 있는 비행기 표를 좀 끊어주면 그래도 오지 않겠느냐. 금요일에 봉사하고 월요일에 아침에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장로들이 그런 것에 협조를 안 해준다는 것입니다. 장로들도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전도사가 가르쳐야지 집사가 만날 붙들고 똑같은 것, 체육활동 같은 것만 하면서 교육을 하면 교육이 되겠냐고 했더니 친구가 “김 목사님, 여기는 비전이 없어”그럽니다. “비전이 뭔데?” “아니 무슨 비전이 꿈이 있어야 되잖아? 그래서 부교역자들도 여기는 비전이 없어서 안 내려와.” 그래서 제가 “비전이 뭔데?” 그랬습니다. 사모님도 함께 계셨는데 제가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거기서 목회하다 죽으면 그만이지” 그러니까 목사가 마음이 좀 상했는지 “그럼 비전 없이 무슨 목회를 하냐?” “비전이 뭔데?” 그러니까 “아니, 당신도 비전이 있었으니까 방배동에서 평촌동으로 건너가고 교회를 짓고 그러는 것 아니야?”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야. 아니, 사람들이 모이니까 할 수 없이 교회를 지은거지 그게 뭐 좋은 일이라고 죽을 고생만 했구만. 그게 뭐 그렇게 유쾌하고 좋은 일이라고.” 제가 그래서 “난 그랬다 교회에 오고 나서 교인이 절반으로 줄면 난 절반 팔아버리겠다고 얘기했다. 이거 쓸 일이 없는데 왜 지어놓고 무슨 건축 쇼하는 것이냐.” “그래도 뭐 비전이 있으니까 예배당도 짓고 우리는 젊은이도 없는데 당신네는 젊은이도 있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야.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하냐? 만드냐? 하나님이 너 여기 제주도에서 목회하라고 할 때 젊은이 없을 것을 모르고 실수로 보냈는데 해보니까 젊은이가 안 오냐? 그것 다 허황된 것이다. 젊은이하고 목회한다고 신나냐? 네가 젊어지냐? 뭐가 신나? 아니 그것도 영혼인데 그냥 젊은이 맡겨줬으니 할 수 없이 젊은이 하는 거고 늙은이 맡겨 줬으면 늙은이 데리고 잘해서” “그 사람이 예수 믿어도 봉사도 못하는데?” “당연히 못하지 예수 믿어도 자기도 지탱을 못해서 골골하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그렇게 돌보다가 죽으면 무릎에 놓고 축도해줘서 장사지내주면 그것이 목회지 그렇게 하다가 죽을 때까지 죽는 것이 목회지 무슨 비전은 얼어 죽을 비전이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는 은혜를 못 받고 사모님이 은혜를 너무 받으셔서 몇 달 후에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 그때 비전은 무슨 얼어먹을 비전이야 그 말씀에 자기가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게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 아닙니까? 뭐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어저께도 총회에 가서 내가 교육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솔직히 얘기해서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예레미야, 이사야 같은 걸출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나오지만 그 사람이 왕하고 독대하고 왔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더 존경하고 한번 예언할 때에 몇 명이 모였느냐를 보고 선지자에게 별 달아주고 그랬습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존경을 받고 그랬던 것이지 그까짓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7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런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큰 교회의 목사는 목사님이고 작은 교회의 목사는 목사라고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전부다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몹쓸 풍조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큰 교회를 해도 절대 거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아니 무슨 많은 사람 섬기는 노예나 적은 사람 섬기는 노예나 종은 마찬가지이지 그런 생각을 우리들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공부를 너무 안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 교회는 매달 이 책을 읽으라고 제시를 합니다. 책을 읽으십시오. 책을 읽어도 맨 어느 교회에서는 전교인에게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 그것을 읽힙니다. 메릴린 히키의 책을 선교사 하나가 꽂혀서 외국어로 번역해서 출판한다고 그래서 아이고 정말 딱하다. 그 책이 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판단력 없이 꽂혀서 말입니다. 건전하게 개혁신학을 배운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뉴욕에 가서도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지금 다시 신학교를 들어갈 수도 없고 다시 들어간들 다 배운 것이니까 자기가 독서를 해야 합니다. 자기가 약하면 네다섯 명이서 매주 월요일에 오후에는 운동하기로 하고, 저녁에는 가정사역을 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모여서 아침 일찍 9시쯤 모여서 공부를 해라. 모여 앉아서 기독교 강요를 차근차근히 읽으면서 발표를 하든지 하나하나 한두 달 하면 별것이 아니지만 10년 동안만 계속하면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내게 됩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르쳐야하고 교회가 작다 크다 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명이라도 올바르게 가르치다 죽으면 그것이 목회자의 보람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질문 8) 오늘 전도에 대해서 발표하신 전도사님과 이어서 하셨던 봉사회 같은 경우에 증거 할 때에 전도지 한 장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개념과 주위에서 생각하는 것과의 격차가 느껴집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저 역시도 전도지를 만드는 것 때문에 4,5년을 고민하다가 뉴질랜드 쪽과 조인을 하다가 분량이 많아서 접고 했었는데 교회에서 전도지의 초안이 다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 격차가 자꾸 생기니까 실제적으로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전도와 선교의 현장에서의 그런 부분을 나름대로 열린교회의 여러 가지 시스템을 보니까 도전되는 부분들도 참 많은데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SFC쪽에서 있으니까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답변 8) 저는 사실 전도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도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들이 제시해야지만 비성경적인 방식이 안 되고 또 그것만 고려하면 안 되는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신학자들에게는 사실 전도에 대한 것들을 별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다 이미 기독교 천지였기 때문에 전도에 대한 관념이 없지는 않았지만 매우 약했습니다. 참된 교회냐 아니면 거짓된 교회냐 하는 관점이 많았고 청교도들의 전도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사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청교도가 영국 청교도인데 그 당시에 에피스코파처치 아니면 캐톨릭처치 아니면 디센터들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전해도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들도 우리들이 참고는 하지만 그것을 100% 베껴서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은 역사의 문맥을 잘못 읽었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고려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들의 상황은 청교도나 16세기 개혁주의 상황하고는 다르고 오히려 1세기의 문맥하고 훨씬 유사합니다. 신학적인 유산들은 우리들이 그것으로부터 계승한다고 하더라도 전도와 선교적인 것들은 오히려 1세기 문맥에서 더 많은 고민들의 공통점들을 찾아낸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고민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서도 신학적인 고려를 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고려를 많이 하면서도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하냐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도 보면 유급 전도자들을 동원해서 한 명 등록시키는데 두당 얼마씩 지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에서 말이 안 나서 그렇지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전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을 보면 그 교회에 계속 다니는 사람이 직업적으로 유급전도자로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것 욕하면서 자기네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담임 목회하는 여러분 중에서 매일 여러분이 직접 교인들을 데리고 직접 전도하러 나가는 교회가 몇 교회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을 욕만 많이 하지 절대로 본인들은 안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모두 염려하면서 우리는 일단 너무 세속적인 방법을 배척하고 인격적으로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어쨌든 교회를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복음이 선포되고 가르칠 수 있으니까 처음에 목표 그 자체를 세속적인 방법으로 오면 비누를 주니 타올을 주니 이런 것은 아니지만 복음의 핵심적인 것들을 전하고 그 다음에 교회에 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관계를 형성하고 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외치고 그 다음에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차근차근히 올가나이제이션된 데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은 1:1 교육을 통해서 올 수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들어와서 제도권 안에서 그렇게 우리들이 시스템을 따라서 공부하게끔 복음을 전하게 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질문 9) 시대적 배경이 있다 보니까 같은 고백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6장의 교제에 대해서도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확대의 개념정도를 강조하고 시대적으로 볼 때 그럴 때에 열린교회가 세계의 교회와의 연합이나 하나 됨을 통해서 세계를 섬겨나가는 데 있어서 두 가지를 묻고 싶은데 하나는 세계적인 교류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때 추구하게 되는 세계 복음화에 대한 목사님이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림이나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답변 9)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들은 기본적으로 개혁신학에 동의를 하고 우리 교회에서 그 성장과정을 컨펌할 수 없는 사람은 우리가 파송을 안 합니다. 협력선교는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파송하면 모든 것을 풀서포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사업이 있으면 본국을 설득해서 사업을 하고 지원을 받고 이런 새로운 사업이 있어서 한다고 설득이 되면 지원을 하고 그래서 교회가 무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그런 체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선교사 자신이 거기에서 사역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그쪽에 있는 문화들과 타협을 하는 부분까지는 간섭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세계교회와의 협력의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아직은 뭐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제가 이제 최근에 몇 년 들어서 부지런히 외국에 있는 신학자들과 함께 교류를 하고 외국에 있는 교회들과 교류를 하고 제가 가서 집회도 하고 하는 그런 쪽으로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들어서 부쩍 우리 교회에 개혁신학자들이 많이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폴란티카 총장이라든지 피터 릴백이라든지 화란의 아자 아우드리안 교수라든지 등등의 이런 사람들이 자주 와서 설교를 하고 내년에도 지금 마이클 호튼, 웨스트민스터의 가프리 총장, 줄리어스 킴 교수 , 리차드 멀러박사 이런 사람들의 교회의 설교가 계획에 잡혀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신학교들하고도 그런 협력관계들을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함께 어소시에이션을 이루어 공통된 기구를 만들고 이런 것들은 아니고 협력을 하니까 가능한 한 우리들은 개혁신학 쪽에서 서 있는 교회들과 그렇게 연결을 가지고 학자들과 연대를 가지면서 우리들이 후원을 하고자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프레젠테이션을 안 봤을지 모르지만 우리교회가 하고 있는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가 아까 후세에 어떻게 물려주느냐고 누가 질문을 하셨는데 “한국교회의 미래의 역할” 그 논문과 거기에서 내가 얘기를 한 것은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가 신학발전에 이비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신학교, 총신에 우리교회 만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교회가 없을 것입니다. 3년에 한 번씩 총신신대원에 1억 5000만원씩 후원을 하고 대학부에 4년에 한번씩 1억, 끝나면 또 내고 끝나면 또 내고 이렇게 해오고 있고 각 신학교에 저희들이 국내의 한 10개 신학교 정도에 가서 제가 한번 설교하고 제 저서 한권씩 주고 점심을 대접하고 장학금을 주고 이번에 고신에도 5월에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넓혀서 해외까지 그래서 해외의 개혁신학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학교까지 저희들이 쭉 돌면서 장학금도 캘빈, 웨스트민스터에 2만 오천 불, 3만 불씩 기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미나도 해주고 제 책도 보내주고 이렇게 하면서 이제 부지런히 신학발전에 이바지하고 학회나 이런 것들도 성실하게 지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또 저희 교회는 중국에 CRTS라는 개혁파 신학교를 하나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교수들과 끊임없이 연대를 가지고 미래의 중국지도자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중국의 학생들이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30명 정도 모이는데 34명 정도 모이는데 저희들이 티에이칭까지 해서 무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풀타임이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6주정도 인텐시브 코스로 하고 월요일마다 모여서 학생들이 희랍어라든지 히브리어라든지 그 다음에 교양강좌, 기독교강요, 교리반을 공부하는데 첫 해에 1명을 교육시키는데 만 불이 들었습니다. 천만 원 좀 더 들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떨어져서 이번에 한 34명인데 예산이 2억 좀 넘게 잡혔습니다. 한 사람 앞에 한 700만 원 정도로 사실 굉장한 희생입니다. 중국에서도 1000만원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인데 아마 중국에서 제일 훌륭한 대학교 다니는 박사과정의 학비보다 훨씬 비쌀 것입니다. 절대로 500만원까지는 안되니까. 그렇게 고급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생색도 안 납니다. 그 돈이면 선교사 20가정을 파송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쏟아 붓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4년제 대학을 안 나오면 입학을 안 받아주고 영어시험 치러야하고 그 다음에 성경, 신앙고백 그렇게 하고 한국의 최고의 교수들을 보내서 충분히 교수들에게 사례를 하고 보람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최근에 갔더니 어느 선교사들이 아마 열린교회에서 하고 있는 CRTS가 중국에서 최고의 신학교일 것이다. 그런 평가를 들었습니다. 입학 자격부터 지성적인 수준이 안 되면 안받아주는 것으로 그렇게 철저한 개혁신학으로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한 12명~14명이 수학여행을 와서 2주 동안 여기에 머무르면서 훈련을 받다가 갔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이바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조심하셔야 할 것은 청교도와 개혁신학의 심취하는 것은 좋은데 컨텍스츄얼한 릴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맹종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가 나는 청교도 좋아하지만 나는 청교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전도 안하고 설교만 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기도도 안합니다. 부목사들이 되어서 언제든지 강단으로 돌격할 자세만 되어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환상에 젖어 있는데 목회 안 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청교도나 개혁주의 신학 보다는 오히려 19세기 20세기에 있었던 복음주의 운동 열렬한 전도 운동이나 이런 것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심지어는 정통적이지 않은 그 모라비한이나 베티스트들의 그런 열렬한 선교적인 열정에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교회가 잘 안 되는 이유가 진짜 습득해야 할 개혁주의의 정수는 안 받아 들이고 껍질만 받아들이는데 그 껍데기가 오늘 날 우리 시대에 안 맞는데 오히려 반대로 정수는 거기로부터 빨로 껍데기는 그 때 옷이 아니라 치열하게 복음을 전파하던 그런 시대의 옷을 입고 나타나서 전사적인 삶을 살아야지 되지 않습니까? 교회가 그런 식으로 약하게 하니까 부교역자들이 거의 전도 안하면서 교역을 배웁니다. 실재로 자기가 깃발을 들었을 때에는 못합니다. 해보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교인들을 내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결국 주저앉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아쉽습니다.
(질문 10) 교리교육을 강조하셨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느낌이 열린교회는 큐티나 개인이 성경을 연구하는 부분에 대해서 언급이 안 된 것 같은데 혹시 개인이 평신도들이 성경을 직접 관찰해서 적용해가는 과정을 성도들에게 맡기는 것이 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10) 교인들이 대부분이 성경 읽고 큐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큐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됐냐면 해석학적인 훈련들이 안 된 상태에서 주관주의 적인 방식으로 큐티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정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서점에 가면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교회 공과공부 시스템에 대해서 소개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일 먼저 설교가 이루어집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와 같은 설교가 18주나 20주 정도 설교가 이루어지고 설교가 끝나고 나면 그 책의 경우에는 한 2년 후에 책이 나왔는데 다른 것의 경우에는 1년 있다가 나올 수도 있고 바로 나올 수도 있는데 끝나고 나면 책이 나옵니다. 그러면 설교에서 은혜를 받고 다시 책으로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책을 묵상집 형태로 만들어서 교리묵상집이라고 해서 매일 하나씩 두 페이지 혹은 세 페이지를 읽으면서 하나씩의 교리적인 사실들을 마음에 담는, 그래서 성경공부가 사람들을 설득하고 깨우치는 것이라면 교리묵상은 그것들을 마음에 담아두는 그래서 우리의 삶 자체가 움직이게 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에서는 자기가 마음만 먹고 손을 뻗치면 자료들은 무지하게 정리가 잘 되어있습니다. 사실 말씀 설교안내책자를 보면 기도가 안 될 때는 무슨 설교를 들어야하는가? 고부간에 갈등이 있을 때는 어떤 설교를 들어야하는가? 그런 것 까지 다 나옵니다. 굉장히 친절하게 우리 나름대로 해주고 있고 이루어진 설교들이 끊임없이 교인들을 위한 재교육 교재로 쓰일 수 있도록 도서관 같은 곳에 잘 정리가 되어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우리들이 계속 활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접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큐티를 가로막는다거나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권장합니다.
(질문 11) 요즘 예배의 양태가 사람중심적인 예배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열린교회도 거룩한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예배에 대한 입장이나 목회자의 역할, 준비 이런 부분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 11) 예배에 대해서는 이미 제가 13년 전에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책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 책이 생명의 말씀사에서 개정은 별로 안했지만 교정만 봐서 뒤에 MP3까지 달려서 나왔습니다. 아마 열린교회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예배에 대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대해서 우리들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단 예배 시간 자체에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으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시간에 광고도 안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이루어지면 일어나서 송영을 하고 그 다음에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을 연달아서 3장정도 부르고, 헌금을 하고 그 다음에 설교를 하고 끝나고 난 다음에 찬송 하나 부르고 축도하고 예배를 마치니까 광고시간도 없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성도들 끼리 인사를 하고 교회 소식의 광고할 것들은 말로 하지 않고 영상으로 뉴스로 편집을 해서 지난주 열린교회에서 있었던 소식을 뉴스로 시청합니다. 영상으로 아나운서들이 나와서 다 설명을 해줍니다. 그래서 교회 돌아가는 것을 모두 공유하고 공지사항은 나중에 광고로 나오고 그래서 끝나면 대부분 내가 기도하고 끝나는데 너무 중요하게 강조해야 할 것이 있으면 그때 짤막하게 광고를 하고 제가 기도하고 예배가 모두 마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고 예배가 끝나면 교인들이 뉴스 안보고 가면 어떻게 하냐했는데 아무도 안 가고 뉴스를 봄으로써 한 달 동안 담임 목사가 외국에 가서 집회 한 것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런 모임이 있었던 것이 뉴스에 나오니까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린교회의 예배가 어떤가라고 하는 것은 참여해서 보시면 알 수 있겠고 예배에 대한 제 사상은 “예배에 대한 감격에 빠져라”를 보시고 뒤에 DVD가 있는데 제가 작년에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있을 때 제가 좀 신랄하게 강의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이해를 하실 수 있으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가시기 전에 부탁을 하는데 “목양”이라는 책인데 거기 뒤에 CD까지 들어 있어서 읽고 책을 보시면 목양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되고 기타의 자료들은 서점에서 여러분이 필요하신대로 여러분이 구해가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