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신학생 세미나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목회의 진보를 위해서(딤전4:15) 2007.2.27 1
1. 소명!! 점검했습니까?
2. 목회에서 그 진보는 무엇?
A. 목회의 진보 하나 사랑
B. 지식의 진보
C. 목회기술의 진보
2. 고난을 연단으로 준비하라(욥23:10) 2007.2.27 13
1. 서론
2. 연단을 겪은 욥의 신앙
A. 고통을 연단으로 삼으라.
B. 온전함을 이루는 연단.
3. 결론: 계절에 눈물 흘리십시오.
1. 목회의 진보를 위해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1. 소명!! 점검했습니까?
옛말에 괄목상대란 말이 있습니다.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었다 할 때 괄(刮)자는 부빈다는 뜻이고 목(目)은 눈을 말합니다. 즉 눈을 부빈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서 눈을 부비고 다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 모습을 볼 때 눈을 부비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10년 전의 그 사람이 맞아?” 이것을 진보라고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보를 이루어야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마음은 정말 순수했습니다. “아 정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영혼을 위해 사는 이 길 밖에 내가 할 게 무엇 있겠는가?” 이 마음이 소명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소명이 아니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십시오. 이 길은 그렇게 좋은 길도 아닙니다. 저는 이 시간에 누군가 사는 게 즐겁습니까? 죽는 게 즐겁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10초도 망설임 없이 죽음을 택할 겁니다. 하나님이 살게 해 주시니까 사는 겁니다. 제가 13년을 교회를 개척해서 단독 목회했고 전도사까지 합하면 정확하게 24년을 목회했습니다. 13년간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했는데 만약에 내가 선택해서 하는 직업이었다면 최소한 6번은 그만두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이 길이 아니라면 가지 마십시오. 혹여 하나님께서 징벌하시지 않으실까 걱정하신다면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는데 그만 둔다면 잘했다 칭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징벌을 말하기 전에 맨 먼저 점검해야할 것은 소명입니다. 사람들은 이 소명이 환경이 이끌어서 소명으로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 예전에 대학시험 1, 2 차 시험 떨어져서 3차 신학대학간 것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은 환경의 인도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인치 심으로 어떤 무엇인가 자각함으로서 소명이 생기는 겁니다. 처음에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원대한 꿈이나 선교를 해서 인생을 불태워야겠다는 꿈을 처음부터 가지고 목회를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은혜받기 전에 내가 목회를 하기 위해서 은혜가 필요하지 해서 목회를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 없이 그냥 살다가 주님을 믿게 되고 어떤 계기가 되어서 이렇게 믿으면 안 되겠다 해서 온전히 주님을 더 온전히 믿고 살기위해 애를 쓰다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되고 그래서 이 사람이 놀라운 변화를 받게 되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게 되면 나만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만족이 안 되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았으면 좋겠는데 세상 사람들이 나와 같이 살지 않기 때문에 슬프고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아이들을 국어나 산수를 가르치던 선생이었는데 이것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하는 선생이라는 일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시급한 일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내 마음을 기울이수 없는 겁니다. 그 불이 시키는 것이 소명입니다. 요즘 신학교에 학생들이 벌 떼처럼 몰려드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한편으로는 축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가 많은 겁니다. 심지어 본인이 회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학교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제가 교수시절에 신학교에서 면접을 보는데 한 5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인데 “왜 신학교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의 집사람이 기도를 하다가 응답을 받아서 제가 왔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집에 가시고 집사람을 보내십시오.” 라고 말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여러분에게 분명한 소명이 없다면 그만 두십시오. 그것 때문에 절대 하나님이 벌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평신도로 진실하고 착한 신도로 살아가면 됩니다. 제가 9년 동안 신학교에서 교수로 제직하면서 200여명을 내보냈습니다. 지금도 흩어져서 잘들 삽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목회의 길을 가면 생고생만하고 인생은 구겨집니다. 그러면 이것도 싫다 하면 한 가지 길이 있는데 빠른 시간 내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소명을 결판을 내십시오. 1-2백만원 하는 등록금해결 같은 걸로 졸렬하게 소명여부를 판단하지 말고 맞으면 맞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나에게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기도원에서 투신하는 마음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자매들 소명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느 목회하는 형제에게 콩껍풀이 껴서 소명 없이 목회의 길을 가는 경우가 있는데 함부로 가는 길 아닙니다. 가면 죽어라고 고생만합니다. 먼저 소명에 대해서 점검을 해야 합니다. 직업으로서 목회는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왜 이 길을 가려합니까? 정정당당하게 열심히 해서 직업생활하면서 교회에서 교사로 집사로 장로로 해서 열심히 살면 되는데 되지도 않은 그 길을 가려고합니까? 많은 사람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읽고 많이 포기 했습니다. 얼마나 복입니까? 아니면 가지 마십시오. 아무 영광이 없습니다. 이 길은 그렇게 환경에 의해서 어거지로 가는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가변적입니다. 여러분들이 떠밀려서 졸업을 하고 1년 후면 강도사 시험에 거의 붙습니다. 그 다음 목사 안수를 받으면 죽어도 목삽니다. 강도사까지는 하다가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데 목사안수까지 받으면 죽어도 목삽니다. 뭘 하던지 목삽니다. 그러면 그 후에 취업을 해야 하는데 어느 교회 부 목사라도 가야하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공급 과잉시대입니다. 저희 교회 전도사 한 명 뽑는데 30명이 신청했습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부 목사 자리 하나 얻어서 평생 그렇게 시시하게 사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신학교 정리하고 어떻게 무엇을 하면 살 것인가 생각하십시오.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회사에 다니고 영업을 하고 하는 것은 삶의 한 양태에 불과합니다. 다니엘은 공무원 이였습니다. 에스라는 율법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농사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만 사랑하신 것 아닙니다. 목회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사랑받았던 평신도들 많았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게 길을 열어주실 겁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서 한 교회에서 목사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름답게 섬기며 살아가십시오.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혹시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 제가 은혜가 떨어진 상태에서 내 마음대로 그냥두면 어떡합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아까 말한 대로 목숨을 걸고 결단을 하고 매달려 보십시오. 이 길을 가야한다면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을 보여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다시는 이 소명의 문제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번에 저희 교회 여전도회 성도님 중 직장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몇 년 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 아들이 주일하교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밥을 먹다가도 아이들의 변화되지 않아서 운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어린이 회심집회를 했는데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하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자랑을 하는데 자신의 반 아이들 중 2명이 회심을 했다고 자랑하는 자신의 아들의 표정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런 평신도와 비교될 수 없이 깊이 연장되어서 도저히 부업처럼 하면서 살수가 없다 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이것을 받고 신학교를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 없이 학년만 올라간다면 불행한 목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이 점검이 이루어진 후에야 저의 강의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출발입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불러주셨다면 이 일 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것들은 다 허무한겁니다. 회사를 크게 해서 돈을 많이 벌 으면 뭐 할 겁니까? 언젠가 회사도 문을 닫고 돈을 번 사람들도 죽을 겁니다.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영원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잠시 보이는 것들만 위해 살다가 죽는다면 그 인생은 너무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는 영원을 향한 섬김입니다. 누구든지 그 사람이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으로 가득 찬다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영혼을 위해 자신을 바치며 섬기는 일입니다.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2. 목회에서 그 진보는 무엇?
그러면 무엇에 있어서 우리가 진보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진보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겁니다.목회자의 최고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겁니다. 그 일은 너무도 어렵고 중차대한 일이기에 내가 끊임없이 진보를 이루어야지만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 중차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번영을 위해 목회 사역에 부름을 받았는데 내가 무엇에 있어서 성장을 하고 진보를 이루어야 하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 저는 크게 4가지를 오늘저녁에 말하고 싶습니다.
A. 목회의 진보 하나 사랑
첫째는 사랑의 진보입니다.
목회자의 자격, 한 인간으로서 같은 형제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의 요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입니다. 베드로를 예루살렘교회의 목회자로 부르시면서 예수님이 물으신 질문은 “네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엠디브는 했느냐”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였습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써의 인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네 양을 치라 하시면서 양떼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했냐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양떼를 사랑하는 사랑은 예수님께 의미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양떼를 사랑하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우리 신앙의 최고의 화두는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그러면 사랑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그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만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형이상학적인 정의는 어떤 대상을 최종적으로 그것만을 즐거워하고 누리려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 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사랑한다면 왜 사랑하는데 그런 질문은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됩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원하시지 않은 것은 모두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붙들게 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 주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시길 원하시는 것도 사랑하게 됩니다. 근데 그 안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양떼들 , 잃어버린 영혼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포함되는 겁니다. 근데 이 사랑이 정도(Degree)가 있습니다. 사랑은 성장을 합니다. 사랑과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 입니다. 극도의 미움과 지순의 사랑의 중간은 권태입니다. 그러니까 미움과 사랑은 움직이는 하나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성장을 하는 겁니다. 작은 사랑이라고 불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씨앗이 싹이 나고 성장하듯이 사랑도 나무가 자라듯이 성장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자라야 합니다. 여러분께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신학교를 처음 와야겠다고 문을 두드릴 때와 비교하면 양적으로 지성적으로 많이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런 성장 말고 처음 신학교에 들어올 때 보다 지금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 합니다.
성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준비하며 생각 드는 것이 저는 오히려 처음 신학교 문을 두드릴 때, 그리고 교수생활을 하며 변화를 받았을 때, 그때가 지금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외적으로 내가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되고, 교수가 되고, 강도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하는 것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지위 순서나 외적인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그 사랑은 주님과 자신만 아는 겁니다. 비전을 가지라고들 하는데 가장 중요한 비전은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비록 큰 교회의 목회자고 못 되어도 작은 교회의 목회자가 될지라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착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기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자각하고 스스로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곤고한 영혼을 끌어않고 대신 울어줄 수 있을까요? 회심하지 않는 영혼을 보면서 그 영혼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에게 임할 심판인 것처럼 가슴 아파하면서 그를 위해서 통곡할 수 있을까요?
키드 민스터의 리차드 벡스터가 그의 책 회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이 바로 누군가가 대신 울어 주어야 할 불쌍한 영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목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회란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것”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다시 한번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런 회복의 경험을 통해 내가 사랑할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다. 라는 것을 깊이 깨닫습니다. 사랑이 자라가는 것은 학위가 자라고, 목회기술이 자라고, 교회가 자라고, 사회적 지위가 자라는 것 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걸어가는 겁니다. 사랑의 진보를 이루어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끊임없이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겁니다.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어제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항상 가슴속에 눈물이 흐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사랑한다 는 것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사람이 항상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만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아주 사랑이 충만한 곳이 아니라 가장 더러운 죄인들이 모이고 야비한 인간들이 모인 곳입니다. 여러분 몇 해 전에 대만에 사스(SARS)가 발생되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병원의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었습니다. 병원은 병을 고치는 곳이지만 사실은 가장 더러운 환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희망 없고 망가진 인간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전부다 가슴에 칼 한 자루씩 꺼내 찌르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찌르고 싸워도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그 칼을 다 맞으면서도 자기를 찌르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걸어 가야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정으로써는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목회자가 무엇이 모자란 사람입니까?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번다면 무엇 못하겠습니까? 직장에서 만났더라면 고개도 못들 형편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목회자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상처를 주고 가시노릇을 합니다. 세상 같았으면 넌 해고 아니면 맘에 안 들면 사표 쓰고 때려 치면 되는데 이 길은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때에 소명을 받은 사람과 소명 받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납니다. 사람보고 그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들어선 것이기에 멸시와 욕을 다 당하면서 그 길을 희생으로 걸어 가야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자신은 많은 고난을 당해도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주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이 희생의 길을 걸어가며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 길이 바로 목회의 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의 진보 없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랑에서 계속 자라나서 인격이 사랑의 인격으로 계속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워하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교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못 참겠어하는 혈기가 끊임없이 못 박혀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랑의 진보를 이루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섬기며 살다가 나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걸어갈 수 있어야합니다. 그 사랑의 진보는 그 사람이 피 흘리는 만큼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며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며 자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의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인격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모든 은사보다도 탁월하게 뛰어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할아버님 목사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50이 넘어서 정치운동 하시다가 은혜를 받아 목회를 하셨는데 그 분에게 귀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시골에 가서 무료로 부흥회를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하셨습니다. 어느 지역에 갔는데 귀신들린 청년하나가 있었는데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이 까짓것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했는데 나가질 않고 귀신들린 청년이 더 펄펄 뛰더란 겁니다. 몇 번을 했는데 나가진 않고 실망만 하다가 이 귀신들린 청년을 새벽마다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새벽마다 강대 아래서 그 청년을 끌어 않고 기도를 해주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는 겁니다. 이 청년이 귀신이 들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을까 나는 이 청년을 능력이 없어 고쳐주질 못 하는구나 탄식하며 끌어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3일을 끌어안고 우니 귀신이 나가더란 겁니다. 그 후에 그분 말씀이 모든 영적인 능력 가운데 최고의 능력은 사랑이다. 란 겁니다. 그래서 전도사 때부터 모여 앉아서 성도들 욕이나 하고 담임 목사 욕이나 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제일 혐오하는 부류의 신학생들 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가슴이 아파도 내가 용서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B. 지식의 진보
두 번째는 지식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결국은 목회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뜨거운 사랑의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 얻게 된 통찰들을 지식으로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 입니다. 때로는 교훈하고 야단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해서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걸어가는 순례자의 길을 가르쳐주는 그 사역이 바로 목회입니다. 자기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데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할 때 나도 몰라 하며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면 목회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차근히 성도들에게 “원래 인간이란 이런 존재거든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는 이런 것이고 이 은혜의 효과인 사랑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어 이런 사랑이 네 마음속에 들어갈 때 네 영혼속의 구조는 이렇거든 그래서 네가 생각을 하고 이런 마음을 먹으면 이 은혜의 작용이 방해를 받아. 그런데 사실은 이 하나님의 커다란 공정한 성품과 관계가 있단다.” 그러면서 이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에 관한지식, 세계에 대한 지식, 영혼에 관한, 지식 하나님의 관한지식, 심지어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 교회에 관한 지식, 마지막 종말에 관한 지식, 성경은 물론이고 일반 사회와 문학과 모든 지식들에 관한 지식들이 총 동원 되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이 없다 그러면 목회를 잘 못하는 겁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데 뭐라고 이 사람에게 전해줄지 모르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칼을 주긴 줬는데 날이 서지 않아서 잘려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날선 검과 같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아름다움이 뭐인가 할 때 문학적인 아름다움만 이해를 하면 충분히 글을 쓸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음악에서의 아름다움이나 공학에서의 아름다움이나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사람은 틀립니다. 그래서 철학은 천재적인 머리가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이라 하면 미술에서 말하는 아름다움, 문학에서 말하는 아름다움, 건축에서 말하는 아름다움, 미학에서 말하는 고유의 아름다움, 음악에서 말하는 아름다움, 체육에서 말하는 아름다음, 천문학에서 말하는 아름다음, 이런 여러 개의 아름다움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지평이 아니라 수십 개의 지평이 한꺼번에 다가오고 그것을 소화해서 아름다움이란 이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철학인데 신학은 그 위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머리가 텅 빈 사람들이 진리를 잘 전해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까? 즉 지성이 목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인 능력이 쌓여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깊이가 약해도 정확한 지식만 갖춰도 설교시간에 엉뚱한 말은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머릿속에 컨텐츠가 없는데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학원을 나와서 석사학위도 가지고 있는데 영어 몇 줄도 읽지 못하는데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지도하고 진리를 논변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인데 오리지널 텍스트를 줄줄이 읽는 것이야 교수들이야 한다 치더라도 어느 정도는 번역이 맞게 쓰여 있는가 맞춰 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배에 이상이 생겨 수술에 들어갔는데 그 수술하는 의사가 배의 장기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해서 헤매고 책도 읽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의 배를 그런 의사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사람마다 지적인 능력의 차이가 있으니까 모두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겠지만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독서하고 연구하고 열심히 매달려서 공부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신학에 있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글을 수입해야하는 처지 아닙니까? 사회에서는 입사하려고 이를 악물고 영어공부를 하는데 한 2년만 이를 악물고 공부하면 원서를 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데 왜 하지 않습니까? 되지도 않는 이상한 번역이나 된 책이나 봐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에게 전해들은 예기입니다. 고신에 구약학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나중에 학장까지 하셨던 분입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본과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예과에 들어갔습니다. 1학년 때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해서 그 학생이 3년이 지나서는 classmate를 모아놓고 영어원서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집요한 결심, 나에게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결심이 이러한 결과를 이룬 겁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신대원 다닐 때 전도사 하지 말고 어려워도 공부만 하십시오. 그게 여의치 않다면 2학년 때까지만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를 자유자제로 하려면 뭔가 신앙의 세계를 신학화 하려면 최소한 5년 정도는 다른 것에는 관계없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공부에만 자기 자신을 다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쯤은 공부에 자기를 헌신한 나머지 자기 건강에 위협이 올 정도까지 공부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공부하면서도 눈물도 있어야 합니다. 공부한답시고 교회를 안 섬기고 뺀 질되면 쓰레기가 되는 겁니다. 전도사 하지 않는다면 교사라도 해야 합니다. 주일이면 책을 덮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심방하고 눈물을 쏟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문병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어린영혼들을 돌보는 사역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이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학문을 탐구하는데 매달려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느릿느릿하게 다니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10M만 넘으면 뛰었습니다. 전철에서 단어를 외우며 다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3년만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단어를 외우는 사람을 절대로 따라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연애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응답 받고 가는 겁니다.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연애하면 안 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목숨을 다 빼앗아 가는 겁니다. 그냥 열심히 공부하면 기가 막힌 자매를 보내주십니다. 기독교 목회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을 말합니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일정한 지식이 있어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그런 사상이 없으니 성공하는 비결만 따라다니니 바보가 되는 겁니다. 중매결혼 하십시오. 공부할 시간에 연애하니 공부가 되겠습니까? 지혜로운 자매는 형제를 볼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구나, 아 저 사람은 겉은 뻔지르 하지만 머릿속이 통 비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그 일에 기본을 갖출 수 있도록 공부를 계속 해나가야 합니다. 그 일에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하루의 잠들기 전에 내일의 공부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영어가 아니라면 한글로 된 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열심히 읽어서 체계적으로 지성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프고 무거울 때는 가볍고 세상 돌아가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 갈 때는 항상 공항 서점에 들러서 일반 서적을 꼭 구입해서 기내에서 읽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반 지식들도 쌓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 누구를 만나더라도 일반 대화가 잘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의 저변을 쌓아 가야합니다. 정치 사회 문학 보건 미술 미용 의학 등등 어느 분야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더라도 대화가 되어야합니다. 이런 것들을 일부러 시간 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신학공부 하면서 머리가 무거울 때 쉬면서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책 속에서 살면서 지식의 저변을 넓혀 가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지적인 저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몇 년을 공부하면 그 신학의 안목을 가지고 오늘날의 시대의 교회와 역사와 그리고 인간을 조명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학과 관련된 인접 학문까지 공부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학문의 폭들을 계속 넓혀가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놀랍습니다. 근데 여러분은 저보다는 훨씬 환경이 좋습니다. 저는 여러분 만할 때 책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 다닐 때 구입한 책은 100원 단위까지 기억합니다. 왜? 책 살돈이 없었기 때문에 점심 값을 아껴서 생명의 말씀사에 가서 구입했기에 애정이 남아서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지금은 책살 돈은 있는데 너무 일이 많아서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저에게 결제를 받으려고 사람들이 복도에 줄을 서 있습니다. 주일이면 10분도 시간이 없습니다. 평인이면 가족들하고 식사한번 하려고해도 비서가 시간을 잡아줘야 됩니다. 전에는 책살 돈이 없어서 눈물이 났는데 이제는 책살 돈은 있는 데 읽을 시간이 없어서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은 저보다는 낮지 않습니까? 아마도 여러분도 시간이 지나면 저와 같이 바쁠 겁니다. 지금 열심히 탐구하고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제 나이가 있는데 무슨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래도 이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르쳐줘야 할 진리는 끊임없이 넓고 나는 넓은 진리의 바닷가의 서 있는 어린소년에 불과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저는 정말 모릅니다. 어떤 교인은 제가 원고도 없이 설교하는걸 보고 우리 목사님은 머릿속에 설교가 꽉 차있어서 뚜껑만 열면 쏟아져 나온다고들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집어넣는지는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공부하는 것 싫어합니다. 그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여보 나는 든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이 탄차를 타고 막장에 내려가서 하루 혹은 일주일 쓸 탄을 캐서 올라오는 광부입니다. 이런 걸 교인들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하나 캐 와서 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해주는데 이 일을 성실히 하려고 애를 쓰니까 추웠던 적이 별로 없으니까 이것은 저절로 나오는 거구나 생각하는 겁니다. 은혜 안에서 연구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3달만 하면 이 안에서 뭐가 나오겠냐는 겁니다. 저는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도 책 살 시간, 읽을 시간은 없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노력은 합니다. 작년에 신학을 공부를 하다가 엉뚱하게 천체에 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1년 2개월 동안을 과외 하고 보니 그것을 통해서 얻게 된 신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제 온몸을 전율케 했습니다. 오늘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저는 신학을 1년을 공부해서도 얻을 수 없었던 아주 놀랍고 새로운 성경의 깨달음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만약에 내가 어린 나이서부터 철저하게 학문의 훈련을 받아서 이런 인접의 학문들을 많이 공부해서 광활한 이 학문에 세계에 눈을 떴더라면 내가 신학을 공부했을 때 얼마나 놀라운 신학의 진리들을 더 많이 발견 할 수 있었을까? 만약에 그랬더라면 나의 목회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그러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외국 사람 이름을 3-4번 읽어도 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이 썩은 머리를 가지고 애를 쓸 뿐입니다. 50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알파벳부터 다시 공부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공부를 하다보니까 프랑스어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외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어느 정도의 책을 읽을지 의문이지만 내가 얼마만큼 할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데 까지 끊임없니 노력해서 진리를 찾아가 것 말고 내가 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내 자랑을 위해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500만원어치 불어로 된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 책장 앞에 서서 괴로워 라도 하자 이런 생각입니다. 그 앞에서 자극을 받아서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기도라도 한다면 그것에 가치를 둘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지식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해야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사도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고 여러분도 예수님을 만났지만 로마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사도바울 밖에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진리를 발견하게 될 때 그 경험이 어떤 사실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데 이때 우리 속에 지식이 많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많으면 빛이 퍼져 나가면서 엄청난 진리의 세계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머리 안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면 눈물만 흘릴 뿐 뭔가 명료하게 전달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자기가 느꼈다 하더라도 풀어서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공부해야합니다. 건강한데 6시간 이상 자면 범죄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도 6시간을 못 잡니다. 그냥 건강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수면을 줄이고 자기를 목표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평생을 남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진리들을 접하면서 살수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그러면서 한 학기도 교회봉사를 쉰 적이 없이 그러면서 매달렸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 공부를 꽤 했는데 다시 영어 공부 후에 근 10년이 지나서 다시 하려하니까 영어단어 생각이 하나도 안 났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 1학년 2학기 때 결심을 하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졸업을 할 때는 영어 원서 7000페이지를 읽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영어를 극복을 했습니다. 공부를 해서 눈물이 나야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지혜가 부족하면 눈물로 구해야합니다. 구약을 공부해야하겠는데 히브리어를 모르니 꼭 해야겠다 싶어 가을 내내 학교 다니면서 문법을 공부하고 12월 방학하자마자 들어앉아서 이것을 독파하고야 만다 하고 맘을 먹고 책상 아래 요강을 갖다 놓고 하루에 17시간씩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 달을 읽으니 창세기 17장까지 읽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속도가 붙어서 막 나가게 됐습니다. 나중에 신명기 한 페이지를 읽은데 막히지도 않고 직독직해가 되었습니다. 밤중에 드러누우면 천정에 히브리어가 왔다 갔다 하곤 했습니다. 그 환희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어를 길다랗게 찢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사전도 없이 읽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히브리어가지고는 부족하다 싶어 쒜기문자를 공부했습니다. 이렇듯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고 세운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좋은 것을 희생하지 않고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때 잠깐 한 2년 정도 공부한 것이 두고두고 나에게 유산이 된 것입니다. 정말 회개하고 공부해야합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소명이 아닙니다. 마른 뼈와 같이 껍데기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이제야 비로소 신학 전체가 들어옵니다.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양이 역사적인 자료가 어마어마합니다. 최소한 7년 정도는 하루에 12시간씩 읽어도 읽을 수 없는 자료입니다. 그것도 우리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C. 목회기술의 진보
세 번째는 목회기술의 진보입니다.
맨 처음에 목회사역을 위해서 전도사가 되서 들어서면 설교라든가 목회라는 걸 잘 모릅니다. 그냥 어린이들 전도하고 선생님들하고 모여서 회의하고 기도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을 익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아까 말한 전자의 두 가지가 없이 기술을 익힌다면 한 낱 꿈일 뿐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두 가지가 있다하더라도 목회 기술이 없으면 그 사람의 목회사역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이 목회는 아마추어의 일이 아닙니다. 선배목사님들께서 목회를 종합 예술이라고 할 때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를 하려면 사람을 우선 모읍니다. 이것은 정치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모이면 땅을 사야합니다. 이것은 부동산입니다. 교회를 지으려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합니다. 이것은 금융입니다. 또 지으려면 설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건축입니다. 잘 지으려면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예술입니다. 공간을 배치하고 유지하려면 건물 유지입니다. 또 사람이 늘어나면 거기에 직원을 배치해야 합니다. 이것은 경영입니다. 조직이고 인사입니다.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이 있으니 경영 경제입니다. 이런 지식이 없으면 다 누군가에게 해줘야 하는데 자기가 모르면 맡길 수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 하는지 못 하는지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다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포괄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지식들이 모자랄 때 교회는 이상하게 건강하지 않고 목회자는 진실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답답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회의 기술들을 배워야합니다. 어린이 전도하면 그 전도하는 비법과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중 등부 사역을 한다하면 책이든 누군가에게든 배워야합니다. 요즘 나온 청소년들에 나온 교육적인 책들이라든지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 열정 없이 때우는 삶입니다. 제가 교역자들을 자주 써봅니다. 이론적으로는 열정이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써서 열정 있는 사람으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안 됩니다. 여러분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릇에다 불을 담근다면 불이 담겨집니까? 그 사람 자체가 차가워서 오히려 불이 꺼집니다. 오히려 열정이 너무 넘치는 사람을 절제시킬 수는 는 있어도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 열정을 불어 넣는 것은 힘든 겁니다. 진짜 놀라운 변화를 받기 전에는 어려운 겁니다. 오늘 눈물을 흘리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어제도 그랬던 사람입니다. 오늘 영혼을 위해서 전도지를 가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은 어제도 그런 사람이었고 내일도 그럴 사람입니다. 어떻게 가슴에 불이 없을 수 있습니까? 신앙을 떠나서 그런 무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까? 똑같이 학교 들어가서 똑같이 대학원 들어왔는데 어떻게 저 사람은 1년 동안에 지적으로 성숙했는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 뒤쳐졌을까? 생각을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분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고민이 안 드느냐 하는 겁니다. 옆 친구가 새벽기도를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자기 자신은 어떻게 퍼져서 잠이 오느냐 하는 겁니다. 잠이 오면 이상한겁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영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면 끊임없이 한편으로는 자신이 은혜를 받으면서 정심을 불어넣고 두 번째는 더 잘 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연장의 발견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하려고 몸부림 친 사람들에 의해서 연장은 만들어 진겁니다. 이것이 연장 발달의 역사입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말은 거짓입니다. 그들은 아무 붓으로나 글을 쓰지 않습니다. 장인들은 보따리 연장을 풀 때 벌써부터 그 연장은 틀립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이 탁월하게 설교를 잘 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서재에 가서 그 사람의 연장을 한번 들 여다 보십시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연장들이 많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작품들이 나오는 겁니다. 지금 중 등부를 맡고 있다면 다른 교회의 중 등부 부흥을 본으로 삼고 삼고초려해서라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도전도 없이 그냥 여태껏 해온 그 연장 가지고 발전도 없이 꾸역꾸역 하면 오래 사역하면 교회는 병들고 자신은 고장 납니다. 교사를 잘 했던 사람은 전도사도 잘합니다. 전도사를 잘 했던 사람은 목회도 잘 합니다. 저는 목회에 관한 80%를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거의 다 배웠습니다. 영혼을 위해 우는 법, 설교하는 법, 전도하는 법, 신방을 하는 법, 사랑하는 법, 등등을 주일학교 선생을 하면서 거의 다 배웠습니다. 자신의 텅 빈 교회학교를 보면서 아이들이 지천으로 쏟아져 나오는 학교에 전도지를 들고 나가지 않는다면 목자도 아닙니다. 열심히 영혼들에게 전도하는 비결. 잘 가르치는 비결, 심방을 잘해서 영혼들을 묶어두는 비결, 영혼들을 사랑하는 비결, 전도 집회 잘하는 비결, 아이들을 모아놓고 회개하는 비결들을 주님 의지해서 끊임없이 배워나 가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될 때쯤에는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멍하게 있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고는 설교는 하려고 하는데 삶이 바쳐주지 않는데 그 설교가 뭐 대단한 설교가 되겠습니까? 자기가 깨뜨려 지는 가운데 설교가 새물처럼 쏟아나는 겁니다. 영혼을 전도하는 그 일을 위해서 자기의 마음을 다 쏟은 사람은 설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강단을 내려와도 성도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각자가 하고 있는 직분과 사역에서 자기를 다 드리십시오. 전도사 된 뒤에 목사가 된 뒤에 다 드리려고 하지 말고 지금 다 드리십시오. 새 신자를 등록 직분을 맡은 사람은 주일날 등록 교인이 없다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회개를 해야 합니다. 교사직분을 맡은 교사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회심하지 않았다면 그대의 책임임을 알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럴 때 이 사역이 보다도 큰 사역으로 건너가는 진검다리가 되는 겁니다. 이찬수 목사님을 가끔 만났는데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 고등부 사역자시절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불러서 장년부 사역을 맡으라고 제의 했습니다. 그때 이찬수 목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끊고 “저는 아직 사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더 주십시오.”그리고 거기에서 올인을 했다고 합니다.
전도사 때 담임목사의 마음으로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후에 목회 사역을 잘 합니다. 고민 하십시오. 깊이 고민 하십시오.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 내게 맡겨진 부서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리고 배우려고 하고 있는가? 고민 하십시오. 중고등부 청년부를 맡았다면 최소한 나는 이 사람만큼은 되고 싶다. 또는 이 사람의 이것만큼은 본받고 싶다 결심을 하고 온 힘을 다해 그것에 목숨을 거시길 바랍니다. 내가 전도사로 사역을 하다 여기에서 죽어도 좋다는 심정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거기에서 승부를 봐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목회의 기술은 온전하게 잘 하려고 할 때에 계속해서 진보를 이룰 것입니다. 온전해지려고 할 때에 거기에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채찍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 은혜와 도우심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자신의 최선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거기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태양의 빛은 그렇게 뜨겁지 않지만 렌즈에 모아진 태양의 빛은 나무도 태우고 종이도 태웁니다.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모으고 자기의 사역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사랑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고 지식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고 목회기술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는 사람들이 될 때 지금 여러분들이 겪는 고난과 어려움들은 후일에 큰 상급으로 값아 질 것 입니다. 그래서 10년, 15년 후에 그렇게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와 땀을 흘렸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 자리에 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나타날 겁니다. 딱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아름답게 타오르다 간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교회의 청년부에 가면 능력이 없다고 싫다고 하고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겠다고 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깊이가 없다고 하고 그리고 1년만 지나면 다른 목회자를 구할 때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냥 붙어있어 보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의 목회자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분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붙드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길을 지켜주실 겁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새벽기도 안했으면 오늘 회개하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라도 새벽기도 나가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보면 모두 그렇진 않지만 목회사역을 하면서 변화되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 교역자들은 벌써 사역을 하는 자세기 틀립니다. 자기 맡겨진 교사들이 안 나오고 등록이 저조하고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을 때 남들 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갔는데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점퍼입고 교회 나와서 추운 교회당 한 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교역자들 있습니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허락 하소서.
내 목회사역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이 기도하지 않을 때는 교회에서 지원을 안 해줘서, 담임 목사님이 목회 발목 잡아서, 장로들이 시비를 걸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릴 때에는 다 자기의 부족 때문에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가 나오고 자기가 깨뜨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토요일 날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는데 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설교가 변화되고 영혼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는 침 바른 설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설교를 원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설교만이 사람의 마음까지 다다랄 수 있습니다. 그 영혼들이 깊이 변화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목회사역에 놀라운 진보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후에도 잘 합니다. 여러분 두고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의 친구들을 보면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는데 진전이 없을 겁니다. 20년 후에 봐도 몇몇은 변화겠지만 대부분은 진전이 없을 겁니다. 한번 안 되는 사람은 놀랍게 변화되지 않는 한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깊이 변화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영혼들을 돌보는 이 목회기술을 익히는 일에도 마음을 쏟아야합니다. 그래서 잘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들이 변화되기를 갈망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야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겁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기에 그렇게 온전해진 사람들이 드문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복종시키며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여러분들의 진보를 주님 앞에 나타내 보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고난을 연단으로 준비하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1. 서론
욥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자랑하고 싶은 사람, 그래서 욥과 같이 동방의 의인이며 그리고 순전한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으실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렇게 고난을 받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또 그 안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욥이 오직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하리라.
이 정금이라고 하는 것은 순도가 높은 금을 가리킵니다. 어렸을 때 금을 재련하는 일을 본적이 있습니다만. 지금이야 과학적이고 첨단화된 방법으로 금을 제련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사금들을 많이 캤습니다. 사금이라고 하는 것은 돌 속에 금가루가 섞여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개울바닥을 뒤지거나 바위 같은 것들을 개울가에서 떨어지는 철광석들을 잘게 부수어서 부유법이라고해서 거품을 일으키면 재료들이 분리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면 금가루들이 한 쪽으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모으면 노란 가루들이 됩니다. 그렇지만 순도는 형편없습니다. 그것을 흑연으로 된 그릇에다 놓고 아주 뜨거운 불로 붙이면 녹기 시작합니다. 그 가루들이 녹아 통로를 따라 흘러내릴 때 밑에 흘러가지 않고 가라앉은 고체들을 반복하서 제련하면 제련할수록 불순물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순전한 금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잘 제련된 금의 가치는 불순물들이 함유된 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납니다. 욥이 자신이 그렇게 단련된 후에는 정금같이 나올 것 이라고 고백한 것은 지금 현재 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에게 불결한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예전에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 욥이 자신의 불결에 대해서 몰랐을까요? 성경에 보면 이 욥은 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부지불식간에 죄를 지었을 범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던 사람이었고 자식들을 위해서도 제사를 하나님 앞에 올렸던 인물이었습니다. 죄와 불결에 대해 예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임은 틀림없었지만 이미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정결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잘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못 되었습니다.
2. 연단을 겪은 욥의 신앙
그 사람이 오늘 이렇게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들 욥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굉장한 철학적인 내용들이 욥기 속에 많이 들어가 있고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의문입니다. 대체로 욥이란 사람이 주전 22-23세기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거의 아브라함의 시대와 거의 동일합니다. 단서들이 화패 단위라든지 단어들 속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계시의 전진성의 측면에서는 보면 너무 앞서가 있는 겁니다. 보좌위에 계신 중보자, 내가 육체 바깥에서 그를 뵈오리라. 하는 부활사상, 정결사상,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한 이 놀라운 사변, 이런 것들은 오히려 1200년 후의 다윗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진전된 계시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심심치 않은 논란의 대상입니다. 어째든 욥이 고난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통한 하나님의 존재에 증거들 그리고 의로운 줄 알았던 자신 속에 남아있는 그 더러움과 무지의 잔재들을 통해서 더 정결해지기를 사모하게 되었던 사실들을 우리들이 동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주님 앞에 부르심을 받아 “나 자신을 아버지께 헌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길로 들어섰을 때에는 우리가 사금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은혜를 정말 많이 받아서 주님께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습니다. 하는 헌신 있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무지, 미숙함, 악함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완고함, 이런 것들이 뒤섞여있는 가운데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 한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쓰지 않으시고 우리를 고치고 연단시켜서 깨끗하게 만드셔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나 자신의 바라보는 시야에 있어서나 자신 안에 있는 섬김의 동기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중국 선교에 아버지라 불리우는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열심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잘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걸 위해서 하나님께서 연단을 하시는 겁니다. 이 연단한다는 말은 쇠에 불을 가해서 그것을 녹여서 불순물을 빼내는 겁니다. 자기 형체가 부셔지지 않으면 그 불순물들이 고체의 상태에서는 금과 단단하게 결합이 되어있기 때문에 불로서 녹여서 형질을 변화시키기 전에는 그 함께 결합되어있는 것을 떨어뜨릴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정금을 만들 때 쇠 덩어리를 칼로 깎으면서 불순물들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불을 가해서 쇠 덩어리를 녹이는 겁니다. 이렇게 녹이면 달라붙어있던 흙이나 불순물들이 떨어지고 그리고 엄청난 1200도 이상의 열을 가하니까 탈건 타버리고 탈 수 없는 이질적인 것들은 액체로 되어 밑으로 가라앉게 되어 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저 사람은 특별히 연단하시는구나.” 느껴질 때가 있을 겁니다. 근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만 연단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연단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단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연단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이것은 둘로 설명이 되는데
A. 고통을 연단으로 삼으라.
첫째는 연단은 어째든 고통의 형태를 통해서 다가오는데 고통을 받을 때 그냥 고통만 겪으면 그것은 고생입니다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고생을 통해서 그 인성이 파괴되고 맙니다. 여러분 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을 살아오면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 그래서 자라면서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사랑을 받거나 격려 받지 못하고 고생을 한 사람들은 성격이 굽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이 비관적입니다. 상처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것인 일반적이 현상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정말 놀랍게 변화된 사람들이 있는데 소수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 고생이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 고생을 당하면서 그 고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을 하고 말씀과 은혜로 그 모든 고난의 의미들을 수용을 하면서 그것이 도구가 되어서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의 의해서 빚어져 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고난이 아주 놀라운 선물이 되어서 이 사람을 아주 놀라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겁니다. 그 저의 동창 가운데 학교에서 일만 있으면 나타나서 핏대를 세우며 혈기를 부리던 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주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습니다. 매사 생각이 부정적이고 교수들에 대한 존경도 없고 수업시간에 꼬투리 잡아서 교수들하고 싸우고 하여튼 그렇게 해서 참 보기 안 좋았습니다. 그러던 형제가 어느 날 나를 만나로 온다고 해서 만났습니다. 만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속으로 “너도 고생 많이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목회를 잘 하는 것은 그만 두고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목회하면 저절로 그렇게 잘 됩니다. 제자 가운데 운동권에 있는 제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튼 대모도하고 속을 썩였습니다. 그러던 제자를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참으로 놀랍게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화가 되었느냐 하고 물으니까 개척교회를 하는데 운동권 정신으로 하려니까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교인들을 다루다 보니까 자기가 깨뜨려 진겁니다.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성도들에게 잘못했다고 먼저 하고 그러다 보니까 얼굴에서 독기가 빠져나가고 그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겁니다. 그렇게 변화된 겁니다. 그러니까 고생을 많이 한 목회자들을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연단화 되지 않은 사람들은 마음에 많은 한이 맺혀있습니다. 그것은 고생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가난 하게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아온 목회자가 목회를 하며 물질의 유혹에 덜 빠질 것 같습니까 아니면 부유하게 살던 목회자가 물질의 유혹에 덜 빠질 것 같습니까? 정답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회자는 별명이 짠돌입니다. 수업이 동료들하고 같이 다녀도 절대 밥 한번 사는 법이 없습니다. 그 대신 저는 얻어먹는 법이 없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얻어먹는 겁니다. 전 돈이 없어 낼 처지가 안 되면 절대 안 따라 갑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어린시절에 그렇게 가난하게 자라서 내 수중에 돈이 없으면 큰일 난다 싶어서 항상 돈을 어디엔가 남겨둔다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아주 부유하게 자라서 목회를 하는데도 씀씀이가 큰 경우입니다. 팍팍 쓰니까 항상 돈이 모자랍니다. 그러니까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가난하게 자랐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안다고 할 때는 은혜를 받아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방면에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B. 온전함을 이루는 연단.
두 번째는 진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있어도 연단을 받지만 하나님의 손에 안 다루어지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없어도 연단을 받지 않습니다. 그냥 고생할 뿐입니다. 부끄럽지만 제 간증을 하겠습니다. 신학 4년을 마치고 총신대학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우리 때는 엠디브 60명을 뽑는데 1200명이 지원을 했으니 경쟁률이 1/20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총신대학교 해택 그런 것 하나 없어서 우리 때는 총신대에서 3명밖에 못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하는데 1학년 2학기 10월경쯤에 친구들이 우리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그래 가자해서 우리 집에 데려갔습니다. 지하실 방에 앉아서 라면도 끓여 먹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신학생들의 관심은 책입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느닷없이 밑에 케비넷을 열더니 리포트를 꺼내서 읽는 겁니다. 한참을 읽다가 말도 하지 않고 우울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다음 몇 칠 있다 만나서 그날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니 하는 말이 형이 쓴 리포트를 보고 자기 집에 가서 자기 리포트를 보고 “난 왜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몇 칠 동안 침체에 빠졌다고 합니다. 자기는 한 학기동안 똑같이 학교를 다니는데 저는 한 학기 리포트를 쓰는데 타이핑을 하는데 한 학기 제출하는 리포트 분량이 A4용지로 40매를 냈습니다. 예로 교수가 신학의 원리라는 주제로 리포트 5매 이상을 제출하라고 하면 저는 한 달 동안 신학의 원리에 대해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서 논문 쓰듯이 썼습니다. 40매를 논문처럼 하나 제본을 하고 하나는 제가 관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논문 하나를 쓰기 위해서 원서를 포함해서 필요한 곳 군데군데 해서 약 20권 정도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각주까지 달아서 발표회 어느 곳이든 그 원고를 인쇄해서 나눠주고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리포트 작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에세이를 쓰고 나면 지금이라도 신학의 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라고 하면 강의를 할 수 있고 루이스 벌콥과 박형용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저는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거의 모든 페이퍼를 그렇게 썼습니다. 그러니까 전 시간이 항상 없었습니다. 친구들보면 여기저기서 짜깁기를 해서 내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예기 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그렇게 해서 유익을 얻으려 하니까 항상 시간에 쫒깁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월요일 쉬는 날이면 도서관에 가서 꼬박 책을 읽었습니다. 즉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는 완성도는 여러 가집니다. 대충 할 수도 있고 잘 할 수도 있습니다. 대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연단하시려고 해도 연단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를 온전함을 이루려고 할 때 연단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내게 어린 영혼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사역의 목표가 주일날 때우듯이 설교를 하고 큰 사고만 안 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그런 일을 많이 맡겨 주셔도 그 사람에게 부담은 될지언정 연단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을 보게 됩니다. 그 영혼들이 회심하지 않고 부모에게 뭔가를 바라고 교회를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생각 속에 도전을 받으면 이런 평범한 상황이 그에게는 엄청난 연단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내면의 세계에 찔림과 고통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학교를 다니려고 하니까 어쩔 수없이 야간대학으로 갔습니다. 제가 우체국장을 하면서 하루에 5시간정도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평생소원은 직장 그만 두는 것 이었습니다. 원 없이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저녁10시 10분에 수업이 끝나면 11시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12시경에 집에 들어와서 씻고 그때서야 밥을 먹고 하루일과를 정리하고 나면 새벽 1시가 됩니다. 또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 4시 30분에는 일어나 예배당 불을 피우고 새벽기도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교회사택에 살았는데 머리위에 물을 떠놓고 자면 물이 돌멩이처럼 얼어 버리곤 했습니다. 너무 힘겨워 그렇게 직장을 그만 두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집에서는 미친놈이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째든 이제 공부 좀 하려나 했더니 이제는 교회에서 발목을 잡습니다. 독특한 목사님이셨는데 주일학교 맡기고 고등부 청년부에 3구역에 교회청소까지 맡기셨습니다. 나중에는 학교가지 않는 날은 신방까지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하루에 22집까지 신방을 했습니다. 신방을 가면서 속에서 고통스러워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아직 거기 있으라. 해서 그곳에 8년을 있었습니다. 목표를 포기하면 연단은 없습니다. 뭔가 온전함을 이루려고 할 때 연단이 됩니다. 그래서 총신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남들은 기숙사에 있으면서 공개강좌 했지만 저는 교회 다 섬기면서 다니려고 하니까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월요일이면 위클리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라틴어 희랍어를 공개강좌를 해서 점수를 내고 영어 성경 시험을 봐서 1200명이 시험을 봐서 60명을 뽑으니 거의 만점을 받지 않으면 거기 못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피를 말렸습니다. 주일날 새벽서부터 저녁 11시까지 교회를 섬기고 새벽을 꼬박 세워서 위클리 테스트 준비를 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들었던 생각이 그래도 내가 신학교 선생을 하겠다고 소명을 주셨는데 뭘로 가르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채플실에 들어가서 눈물로 기도하곤 했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등록금이 45만원인데 교회에서 7만원이 나왔으니 먹고살기도 빠듯했고 그야말로 생고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연단이 됩니다. 뭐 대충 공부하고 살고 섬기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고생을 해도 연단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몸부림을 치면 교회를 섬기는 모든 것이 연단이 되고 가정의 일들 학업의 일들 이런 모든 것들이 연단의 도구가 됩니다. 인격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매한 신앙의 선배들의 인격을 보면 이 고매한 인격의 선배들에 비하면 나는 쓰레기에 불과하구나 하나님 제가 정말 변화 되어야겠습니다. 제자 나인 것이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못한 자신을 보면 눈물이 나고 포기하지 않을 때 연단이 되는 겁니다. 그 모든 것들을 가리켜서 칼빈은 십자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새벽에 학교 채플실에 앉아서 무릎을 끓으면 끓자마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냥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30분정도를 울고 나면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공부하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사역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온전함을 이루려고 하는 그 속에서 다른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이 사람에겐 견딜 수 없는 연단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불이 되어서 우리의 본성을 녹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본성과 함께 부착되어 있었던 부패함과 더러움들을 그 연단 속에 동반된 진리의 힘으로 그것들은 내려놓게 되는 겁니다. 즉 재료 분리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금을 최소한 9번 이상해야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똑같이 학교 다니는데 어떤 사람은 졸업할 때 정말 예수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역의 연단을 잘 감당했던 사람들은 사역을 잘 하게 되고 학문의 연단을 받았던 사람들은 놀라운 학문의 지식을 소유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인격의 연단을 받았던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근데 저도 교역자들을 데리고 있고 성도들을 데리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연단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마음의 가책을 느낍니다. “내가 요즘 기도생활 안하고 게으르니깐 하나님께서 영혼을 보내주시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깊은 밤에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심지어 금식 기도하고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에 인해 괴로워하고 내 사역에 축복이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그러면 그 자체가 연단이 됩니다. 그런데 하여튼 감당할 수 없는 낙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영혼들이 계속 줄어들면 요즘에는 추세가 다 그렇습니다. 영혼을 잘 안보내주시면 지역적으로 원래 전도가 잘 안 되는 지역입니다.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래도 한 두 명은 변화 됩니다. 이러면서 끊임없이 연단 받을 수 있는 기회들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5-6년만 지나서 목사가 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연단 받은 사람의 말은 권위가 있습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이 “십자가를 지십시오. 이것이 당신이 사는 길입니다.” 이 말이 단순한데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으면 청중에게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게 당신이 사는 길입니다. 할 때 먼저 설교자의 눈가에 눈물이 고입니다. 달변과 핏대로 “십자가도 안지고 뭔 신앙생활을 하려고합니까” 할 때 듣는 청중들 마음속에서는 공허하고 그건 거짓이야 하는 것을 성도들은 느낍니다. 이 무언의 힘은 그 사람의 인격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짧은 연설로서 듣는 사람의 실금을 울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대로 긴 세월을 연단 받으며 살았어야 됩니다. 그래서 온전해지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리포트를 왜 제때 못 냈냐? 그랬더니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핑계되면 바보입니다. 그런 얘기는 학교 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가서 왜? 영혼들을 못 섬겼습니까? “논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연단이 안 됩니다. 그냥 묵묵히 다 제가 게을렀습니다. 제가 잠을 안 잤더라면 리포트를 쓸 수 있었고 자기가 쓸데없이 보낸 시간들을 절약 했더라면 쓸 수 있었습니다. 교회 가서는 논문을 썼어도 덜 자고 덜 놀았으면 아이들 심방하고 전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자기가 핑계되지 말고 그대로 짊어지고 철칙을 세워서 학교 가서는 교회 핑계안하고 교회 가서는 학교 핑계안하고 집에 가서는 학교핑계, 교회핑계 안하기를 세워야합니다. 그러니까 어디가든지 죄인입니다. 나는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겸손해야합니다. 그렇게 할 때 어디를 가든지 자극을 받는 겁니다. 그것을 짊어지는 것이 연단입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신앙의 삶은 신학교육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유학을 하면 뭘 합니까? 그것은 개념의 전달일 뿐 체험의 전달은 아닙니다. 결국 문제는 내용을 뭘 배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찌꺼기가 빠져나가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연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벌써 틀립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한 전도사가 강단에 올라와서 “여러분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담임 목사 설교만큼 유창하지 않아도 교인들이 마음속에 뜨거운 감화를 받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우러나옵니다. 이것이 연단이 만들어낸 효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핑계되지 말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 지기를 힘써야합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해 지기를 힘써야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진보를 보이기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합니다. 저는 책을 읽다보면 낙심이 됩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이렇게 깊은 지성을 소유했을까? 또 목회를 잘하는 목사님들을 보면 나는 이것도 목회라고 하고 있나 빨리 그만 두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낙담이 듭니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자극을 받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 연단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내적인 갈등과 고난을 예수의 고난에 투영 시켜야 합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교회에 가서는 목회의 현장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고
책꽂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신을 보며 울고 그렇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 지도록 몸부림을 칠 때에 고통이 생겨나는데 그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투영시킬 때 그 안에서 예수와 함께 자신의 부패한 본성이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아 예수님도 이 고난의 길을 가셨으니 나도 이 고난의 길을 감사함으로 가야지” 그러면서 거기에서 구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내 안에서 예수 닮은 성품이 다시 부활하는 겁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사람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은 이런 자기 연단의 과정을 많이 걸었을 때, 거기에 가르칠 수 있는 지성이 어느 정도 채워졌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때 이상하게 그 사람의 설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고 짧은 설교인데도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말들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흡인력이고 정신적인 흡인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냥 목사나 빨리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제자들과 같이 목사 안수 받았습니다. 그래도 늦게 받은 것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내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연단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그 길을 걸어가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성공된 사역은 목회기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으로 대개 2년 안에 될 교회와 안 될 교회가 판가름 납니다. 문제는 그 시간 안에 그 사람의 됨됨이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개척교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자기가 지성적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면에서 연단을 통해서 갖추어진 사람이 될 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겁니다. 잘 준비 되어서 딱 한 번 불꽃처럼 태우고 죽는 겁니다. 길게 할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한 20년 화끈하게 불꽃처럼 태우고 나중에 시간 남으면 선교사역을 하든지 말씀연구를 하던지 보람 있는 사역을 하다 죽는 겁니다. 제 말이 먼 얘기 같지만 금방 옵니다. 허송세월 하지 말고 몸부림을 치십시오. 목표를 가지십시오. 공부에 있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의 지성을 따르고 싶다. 영성으로는 어떤 사람을 본받고 싶다. 인격에 있어서는 최소한 어떤 사람처럼은 되어야 할 텐데 하면서 자신을 채찍질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어리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가 둘 정도 있고 나이도 30대 초반쯤 되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덜컥 암에 걸렸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에는 게으르게 살았는데 이제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죠. 교회에서 가만히 기도해서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 같지 않아 밤 12시마다 산속에 들어가서 아내를 살려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인가 1년인가를 그렇게 했는데 결국은 아내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그 형제가 놀랍게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는 것, 연단 받는다는 것, 피를 토하듯이 기도한다는 것들을 배워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고난 받는 모든 사람들이 변화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그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3. 결론: 계절에 눈물 흘리십시오.
온전해지기를 힘쓰십시오. 그리고 시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엉터리로 학교를 다니는 부정직하고 불성실한 학생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면 세월이 지나면 여러분도 똑같이 되고 맙니다. 시험 때면 꼭 주스를 사와서 친절하게 접근하는 학우들의 마지막 결론은 시험 준비해 놓은 것 있으면 복사해 달라는 겁니다. 저는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렇게 빌려주면 3-4번 복사해서 컨닝 페이퍼 만들어 쓰는 겁니다. 그냥 그걸로 인생이 끝난 겁니다. 하나님의 복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 청빙 받아 가면 감당이 안 되서 쫓겨나고 개척을 하면 주님의 축복이 없어서 교회가 되질 않습니다. 진실해야합니다. 여러분은 본질에 있어서 승부하면서 그 길을 가십시오. 그리고 눈물을 많이 흘리며 신학교를 다녀야합니다. 신학교 때 흘리는 눈물은 30년을 간다고 합니다. 신학교 때 눈물을 많이 흘리면 땀 흘리며 사역을 하지만 신학교 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목회할 때 피 흘리며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많이 눈물을 흘리며 사역을 하십시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07년 신학생 세미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