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길 자기 죽음의 길
기도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빈들의 마른풀과 같고 구르는 돌의 이끼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인생들을 사랑해주셔서 이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오늘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목회의 사역들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여기에 모여서 은혜를 구하오니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오늘 이 짧은 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또 들을 때에 주의 충만한 은혜가 주의 종들에게 가득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잘 흔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면 고이는 샘물 말고 깊은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은 날이 가물어도 좀처럼 마르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목회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목회의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우리를 통해 흘러서 교회와 양떼들을 두루 적실 때 그때 사실은 가장 아름다운 목회가 되는 것이죠. 지금부터 한 7~8년 전인 것 같습니다. 온 땅에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가뭄이 너무 심각해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던 때였는데 이른 봄이었습니다. 우연히 치악산을 가게 되었는데 산속을 쑥 들어가니, 물이 어른 두 길쯤 되는 파란 물이 한없이 흘러서 아래로 휘돌아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 달 동안 비 한 방울도 오지 않았는데 그렇게 엄청난 물이 산에서 계속 흘러내려 오면서 그 물이 메마른 들판을 두루 적시며 흘러가며 그 산 아래 있던 논밭은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넉넉히 물 좋은 동산과 같았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목회를 하는 목회자와 그 아내가 그 영적인 삶과 인격이 이렇게 산처럼 곧고 크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을 통해서 교회라고 하는 목회지를 두루 적시고 거기서 수많은 영혼들이 해갈을 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목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보다는 인간이 개발해 놓은 많은 재주와 방식을 더 신뢰하는듯 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얼마나 진실하고 올바르게 목회를 했느냐에 의해서 목회의 성공을 가늠하기 보다는 목회가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교회가 얼마나 크게 되었느냐에 의해 목회의 성패를 저울질 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사명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도구로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들이 염려스럽게도 우리교회의 일각에 많이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이 세상의 사조에 우리의 생각이 뒤섞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셨고 우리를 목회로 불렀다. 주님을 만나기전에 목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다가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품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에서 도저히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지 않는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목회를 꿈꾼 것이 아니라 이제껏 죄인으로 살아왔던 옛 삶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나같이 더럽고 추악한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도록 살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삶의 전환, 그 한복판에는 항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전에는 못 보던 일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놀랍게 되고 이 사랑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아서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그냥 살림이나 하고 직장에 다닐 수가 없게 되어서 그 영혼들의 울부짖는 수많은 소리들을 기억하며 내가 만약 이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도 이 사랑을 몰라서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내버려 둔다면 재앙이 끼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 일생 전체가 이 사랑 몰라서 불행한 사람들, 그렇지만 지금도 바보같이 이 세상에 물질이 없고 사람의 사랑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그대들의 망각이 내가 만난 예수그리스도를 고쳐질 수 있다고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고민하여 그래서 들어선 길이 목회예요. 그렇지만 말이죠. 우리가 그런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고 하나님의 그 가슴절인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목회사역에 들어섰지만,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꾼들로 선택이 되었지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이 못 본 사랑을 보고 남이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여전히 거듭난 성품과 함께 부패한 죄인의 본성이 남아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목회사역을 하고 있지만 세상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더러운 인간의 정욕에 우리의 심령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 자신 안에 정말 하나님의 뜻에서 살지 않으려 하고 처음 십자가에서 내 몸을 다 불사르게 내어 주서어라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사랑을 전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몰라서 핍절하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사랑을 심어주고 싶다고 하는 그런 사모함과 갈망이 식어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인들을 목회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잘 보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기 되기 이전에 먼저 한사람의 좋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모두 목회라고 하는 사명이 있지만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때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아서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이 처절한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목회의 현장에 보냄을 받기 전에 먼저 주님 곁에서 사랑을 받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가 없이 목회자가 된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내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제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아무런 소원이 없고 어떻게 하면 나같이 쓸데없고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생명을 부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내 입의 혀가 굳어질 때까지 내 핏줄의 피가 식을 때가지 예수의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가 우리의 꿈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무릎을 꿇고 섬기는 그 길에 존귀와 영광이 없고 멸시와 가시관이 기다린다 해도 아멘, 그리고 들어선 길이 목회의 길입니다. 그때 처음 가졌던 말할 수 없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래도 좋고 나같이 하잘 것 없는 인간을 통해서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서 충분 합니다 하는 고백이 지금 오늘도 우리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의 교인들을 목회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은 자신 한 사람을 스스로 목회하는 것이다. 수천 명의 교인을 한편의 설교로 뒤흔들고 당신의 연설로 교인들의 마음을 한곳에 모으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서 맨 처음의 어두운 죄악길에서 건져내어 빛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워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의 처음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우리는 교인들을 위해서 한 시간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시간 이상의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을 두 시간 가르친다면 나 자신은 세 시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자신을 가르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편이어서, 똑같은 일을 다른 사람이 하면 질책하고 내 자신이 하면 내 편을 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편이 되면 교회가 병들고 목회가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내편이 되지 말고 오히려 내가 하나님 편이 되도록 내가 또 다른 나를 계속 감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나를 따르려거든 제일 먼저 나를 부인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아니야, 나는 하고 싶지만 예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어’ 하는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그런 자기부인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데로 풍랑이 일면 이는 데로 떠도는 삶을 통해서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부인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도 크게 힘 있게 역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이렇게 은혜가 역사하도록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이기도록 역사하실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훌륭한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것 말고, 또 하나의 방편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사실 목사님 보다는 사모님들이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자의 아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게으름 가운데 기도를 하지 않거나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능력이 거의 없는 메마른 기도생활, 교회에 대한 섭섭함. 남편에 대한 원망,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족 이런 등등의 많은 정신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의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하루에 8시간 기도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8시간씩 기도할 것이 많습니까?
교인: 아니요
목사님: 근데 왜 그래요?
교인: 목사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4시간만기도하면 기도하고 싶은 것 웬만큼 기도해요.
목사님: 근데 4시간은 뭐해요?
교인: 네 시간은 나는 하나님을 쳐다보며 웃고, 하나님은 나를 쳐다보며 웃으시고 우리 둘이 그렇게 마주앉아 있으면 4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정말 우리가 새벽기도에 안나가는 사모님이 몇 분이 되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모가 몇 분이겠습니까? 그러나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하늘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실 때 수많은 기도 소리 중에서 두드러진 기도, 흐느낌과 목마름으로 부르짖는 기도의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도저히 그 두 눈을 기도자를 향해서 돌이키시고 그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기도를 드리는 사모님들이 많았으면 이 땅의 목회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비옥하게 될 것입니다. 힘들게 현상을 유지하는 목회 말고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옷소매를 잡아끌어 의자에 앉혀두고 관리하는 그런 목회 말고 승천하는 화염과 같이 능력이 타올라서 죄인들의 가슴에 말씀의 검을 꽂고 교만의 자들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더러운 죄인들의 가슴을 찔러 죄악들을 쏟아내어서 하나님 앞에 다시 정결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드는 그 강력하고 능력이 있는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기도, 그런 기도는 평범한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그런 간절한 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처음 이목회의 길에 들어설 때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그 친밀함 속에서 주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 주님이 들려주시던 그 세미한 음성, 그리고 기도 속에 역사하시던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능력의 위대함.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남편과 나의 목회에 하늘의 축복을 불러 내리던 그 늠름하고 굳건하고 능력이 있는 목회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울부짖고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듣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사람의 외침에 귀 기울이신다. 정말 주님만을 위해 살고 싶고 영혼들만 위해서 죽고 싶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 이외에 모든 더러운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싶은 마음을 가진 순전한 사람, 그래서 몸은 이 땅에 있으나 발뒤꿈치를 들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면서 그분을 닮은 신자가 되길 원하고 그분을 위해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삶. 지금도 자신의 번영과 그리고 자신의 영달과 안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패역함과 자기의 게으름, 능력 없음, 부족함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일들을 가슴아파하며 주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겠어요?
주님을 송축 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간절히 주님의 은혜만이 나의 만족입니다. 내 진정한 꿈은 이 땅에서의 성공, 사람들로부터 평판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제가 언젠가 멀리 있는 지방에 외딴곳에 잠시 쉬러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친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여기는 시골 교회라 그런지 참 비전이 없다. 서울에는 목회자도 유능한 사람이 많고 교인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고 기회도 많은데 여기는 참 비전이 없다.”
“목사님 비전은 무슨 비전입니까”
“김 목사님, 그러면 당신은 비전이 없습니까? 당신이 비전이 있어서 교회를 개척했고 교회가 커지니까 땅을 사고 이사를 가고 교회를 짓고 그런 것들이 다 비전이 있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그건 마치 애를 낳아서 기저귀를 사고 애가 학교에 가니까 가방을 사고 애가 커서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할 수 없이 월세 살다가 전세 얻어서 방하나 늘리는 것이지 비전은 무슨 비전입니까? 주님께서 목사님이 여기 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여기에 두셨는데 여기서 언제 하나님이 우리보고 공간을 조그맣다고 야단치셨습니까?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보고 가슴아파하신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 아무개 목사 봐라 똑같은 신학교 나와서 교회에서 몇 천 명 모았는데, 너는 그냥 50명 가지고 몇 년째 같잖냐, 이렇게 야단치시는 하나님은 없어요. 언제나 하나님이 마음아파 하시는 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올바르고, 신실하게, 참으로 신실하게 안하니까 하나님이 마음아파 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기뻐하셨고,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저도 몰라요. 언제 몇 년 후에 나를 섬으로 쫓아 보내시고 선교지로 보내시고 시골 오지로 보내실지 나도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여기 두셨으면 힘닿는데로 예수사랑 전하세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들의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며 굶는 자들과 함께 먹고, 그렇게 양 때를 돌보다가 죽는 것이 비전이지 무슨 비전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길 들어설 때 커다란 저택에 살고 싶어서 들어섰습니까? 고급승용차가 탐이 나서 목회의 길에 들어섰나요? 많은 사례금이 필요해서, 애들 유학을 보내고 싶어서 이 길에 들어섰는가요?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지금이라도 우리가 죽어서 주님이 너희가 이제는 고단하고 힘든 이 세상에서의 목회를 끝내고 이제 내 옆에 와서 쉬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 옆에서 사랑을 받으며 그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면서 그 은혜를 많이 누리며 사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살고 싶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직까지는 슬픔이 많은 세상이고 우리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의 그 은혜가 뼈 속 깊이 사무치는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절절한 사랑을 전해줄 이가 없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생애를 마름하고 주께서 부르실 때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면 그날이 우리 생의 최고의 날이 되겠지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 달려갈 길도 남았고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면서 우리의 목회의 길을 가야해요. 그래서 사는 날 동안에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좋은 평판에 칭찬과 존경 그런 것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싫다고 해도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사랑스럽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에요. 세상의 명예와 존경과 목회의 성공과 모든 것을 우리의 손에 거머쥐고 있다고 해도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빛나가려고 하는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하찮게 여기고 주님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더 목을 매는 우리의 성화 되지 못한 더러운 욕망과 땅의 것들에 목매여 하는 우리의 모든 몸에 속한 지체들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못 박고 그래서 우리들이 날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며, 어제보다 오늘 더 주님을 위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제 보다는 오늘이 더 예수님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것 까지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자기 죽음과 깨어짐이 있는 삶을 사는 것, 그 삶이 참 신자의 삶이고 그것을 많은 교인들에게 보여주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목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은 자기의 책속에서 말하기를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참으로 예수를 믿는 것을 어떻게 믿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렵죠. 아무렇게나 욕심을 따라서 인생을 살기는 70년이 짧지만 정말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서 세상 유혹과 더러운 손짓을 뿌리치고 주님의 사랑만을 갈망하는 순결한 신부로 이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막살기에는 인생 70이 짧지만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어요. 1년만 살다 죽을 것 같으면 이를 악물고 한번 주님 앞에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예수를 위해서 그렇게 아름답게 살던 사람들이 교회가 성장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미끄러진 삶을 사는 것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처음에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개척의 깃발을 꽂을 때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랜 목회 속에서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부패한 신자가 되는 일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기서 못 박히다 라는 말은 희랍어로 에스타오르타이라는 단어예요. 현재 완료예요.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지금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동사의 시제입니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제껏 못 박혀 왔고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안에서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매 순간 마치 비가 온 뒤에 농부가 애써서 경작하지 않아도 비가 온 후에 돋아난 잡초와 가라지처럼 우리 안에는 부패한 욕망들이 고개를 들어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셨던 R.A 토레이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할아버지가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셨죠. 그 손자 목사님이 한국의 예수원에서 하나님 섬기시다가 작년에 소천 하셨습니다. 그 분이 설교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팔순이 훨씬 넘은 그 존경스러운 목사님이 성도들 앞에 고백을 하셨습니다. 나는 여기서 우리 수도원에 기도하기 위해 올라오는 아리따운 자매들을 볼 때 수시로 유혹을 받습니다. 팔순이 넘은 그 거룩한 목회자가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물가지고 날 씻든지 불가지고 사르던지 내 안에 죄 다 닦으사 나를 새롭게 하소서. 그래서 바로 사도 바울이 그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놓으신 계획대로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나의 육체의 부패한 욕망. 그리고 육체에 속한 옛사람의 성품 아직까지도 잠시 몸담았던 본향인 이 세상을 그리워하는 나의 죄악 된 육신의 성품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거짓과 위선 허위와 가식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진실한 영성을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이 길에 들어섰지만, 그러나 오늘도 주님이 붙잡아 주시는 그 은혜가 아니면 내가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어제 은혜로는 어제 살았고 오늘 은혜로 오늘 살아갑니다. 어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어제 나를 살게 했지만, 오늘 내가 살기 위해서는 오늘 또 내가 다시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신앙의 고백이에요. 그래서 목회가 무엇인가 어느 동역자가 물었습니다. 나도 많이 안해 봐서 잘 모르지만 아마도 두 눈의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일 거야. 목회자가 강대에 엎드려서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사명의 깊이와 넓이에 비해서는 너무 초라한 것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하는 그것을 보면서 뼈저리게 후회하고 아파하는 그 눈물을 흐르고 흘러서 교회를 그대로 적셔 쓴 뿌리는 죽게 하고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믿음의 나무들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사모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큰 교회를 목회하지 않지만 한번도 부러워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재미없습니까? 교인 이름도 몰라요. 길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도 사람을 알아볼 수 가 없어요.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사모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주님의 손에 붙들린 막대기와 같은 것이에요. 그 막대기로 풀섶을 치시면 우리는 풀섶을 치는 거예요. 주님이 막대기로 아이들을 치는 회초리로 쓰시면 우리는 아이들을 때리는 회초리가 되는 것이에요. 우리를 천하게 써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도 우리에게 유익이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맡기셔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해야 해요. 그러나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 모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아서 우리가 주님을 섬겨가는 그것들만이 우리의 최고 관심사가 되어야 해요. 제 마음속에 목회를 잘 하는 것 못지않게 숨질 때까지 간직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얼마를 목회하다 무슨 이유 때문에 죽을지 모르겠지만 그날에 이르게 되면 그 날이 내 일생의 전체의 날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성화된 날이길, 그리고 살아온 생애 목회한 모든 날들 중에서 내가 죽는 그 날이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날이었으면..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이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의 눈물은 마음으로 흘러들어가서 더러운 욕망을 씻어내고 육신의 욕망에 가리워서 세상 감투에 가리워서 볼 수 없는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눈앞에 보이는 이 인생이 헛되고 이슬 같은 것인 지를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가장 연약하지만 십자가를 질 용기를 얻게 되고 그 모든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 나를 위해 베풀어 주신 그 희생과 고난의 깊이와 넓이 그 뼈저린 고통을 오늘 그리스도를 위해 영혼들을 주님의 진실한 성도로 세우는 일을 위해서 당하는 그 고난 속에서 재현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섬기면 섬길수록 마음이 굳어지고 직업적인 사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면 섬길수록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고 섬기면 섬길수록 그 기도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그 은혜 이외에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는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 안에 사신 예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많이 죽으세요. 그리고 많이 기도하세요. 그리고 간절히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들에게 목회의 사명을 맡겨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