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론 I(pp.31-54)
녹취자: 조경훈
교리전체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다고 했습니까?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입니다. 학습지진한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든지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서론.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신론. 그 하나님이 누구를 창조하십니까? 인간론. 인간이 타락해서 누가 오시죠?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구원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이룹니까? 교회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무엇을 기다립니까? 종말론. 이렇게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서론을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 원래 참된 종교는 하나였다. 두 번째는 계시.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접근에 따른 분류입니다. 일반계시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특별계시는 특별한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매개체가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계시, 특별계시는 매개체가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초자연계시라고 불렀습니다. 세 번째는 성경. 인간이 쓴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영감.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사람이 기록한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영감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감화를 시키신 것입니다.
오늘은 신론에 들어갑니다. 신론은 교회론,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1부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2부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다룹니다. 오늘은 1부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나옵니다.
첫째는 선천적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타고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인간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앙이 없는 옛 노인 분들도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최고의 정성을 들이면 하늘이 감동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하늘이 무엇이겠습니까? ‘천벌을 받을라.’ 그런 짓을 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 그때 하늘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냐?’ 인간이 그래야 한다는 것은 누가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겠습니까? 결국 철학으로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이유는 그 많은 철학은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데 까지만 끌고 가지 그 사고를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답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희랍시대를 보면 철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의견을 달리 하다가도 마지막에는 손잡고 자신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이성을 토대로 합니다. 이성을 토대로 아무리 연구하고 논고를 해도 마지막에 그 모든 것의 뿌리에까지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 정의는 실현이 되어야 하는가? 왜 부정을 하고 야비하게 살면서 권력을 얻고 부자가 되었던 사람보다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 장엄하게 죽어버린 사람을 더 존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에 대해서 철학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선천적 지식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일반적인 성질의 지식입니다. 종교에 씨앗이 인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예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실제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6.25때 미군과 함께 근무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텐트에 앉아서 신은 없다는 이야기를 열변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쾅 하면서 포탄이 근처에 날라 와서 텐트에 파편이 확 쏟아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소리 지르는 사람이 무신론으로 열변을 토하던 사람입니다. Oh. My God!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을 부르거나 절대자를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보여주는 것은 인간 안에 ‘sensus divinitatis.’가 있다는 것입니다. ‘sunsus divivitatis’는 직역하면 ‘신성에 대한 감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감각이 모든 인간에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양심입니다. 살인을 한 사람이 마지막에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경찰을 불러서 ‘내가 이런 죄를 저질렀고 공범은 누구다.’ 라는 것을 자백을 하고 3일 인가 며칠 있다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천국과 지옥도 없다고 생각한 그 사람에게 죽기 직전에라도 그것을 토설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토설한 후에야 편안히 눈을 감게 한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종교의 씨앗, ‘sensus divinitatis’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이런 종교의 씨앗이 있습니다. 이 씨앗은 자라가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데 이것은 저절로 자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의 빛이 정확하게 들어와야지만 올바르게 자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흔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런 신이다. 혹은 이런 자연의 힘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 줄 때 사람들은 헷갈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종교의 씨앗을 다른 방면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교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후천적 지식입니다. 태어난 후에 배움으로써 습득되는 것입니다. 칠판을 놓고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과 경험을 통해서 인간에게 습득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모두를 통해서 인간이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지식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무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종교의 씨앗이라면 이것은 누군지를 알고 어떤 존재인지를 하나님에 대해 알고 배우고 해석하고 자기에게 적용하면서 이해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습득되는 후천적인 지식입니다.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지식은 그 빛의 밝기로 비유를 하자면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빛이 어두운 밤에 비추는 한 동강의 촛불이라면 후천적인 지식은 5와트의 전구가 될 수 도 있고, 60와트의 전구가 될 수도 있고, 220와트의 전구가 될 수도 있고, 태양과 같은 빛이 되어서 찬란할 수도 있습니다. 그 밝기는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아 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으로 하강하면서 세계와 인간, 나 자신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가 생겨나서 어떤 길이 옳은 길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행동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행동이고 올바르지 않은 길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나와 인류와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 이바지할 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더 잘 깨닫게 해줍니다. 성경 호세아서 6장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필기해 보십시오. ‘나는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의 탐구의 대상은 크게 셋이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 둘째는 인간에 대해, 셋째는 세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나님은 성경과 신학공부로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공부는 인문학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다시 둘로 나뉘는데 보편적 인류로서의 인간,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나입니다. 여러분도 ‘나도 나를 모르겠어.’ 라고 자주 얘기 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눈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1차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누구고 세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인간에 대해서도 공부해야합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철학은 나중의 문제고 눈치만 있어도 고생을 덜 합니다. 어쩜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 뿐 아니라 40대 50대 된 사람들도 손자병법도 안 읽습니다. 40대는 논어를 읽을 나이입니다. 손자병법은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 읽어야 할 책이고 재독하는 시간은 직장생활하면서입니다. 그러다보면 30대 후반쯤 되면 이것이 지겨워집니다. 이것이 인생에 전부란 말인가? 이것에 더 깊은 뿌리는 무엇인가? 하면서 논어를 펴는 것입니다. 그게 40세입니다. 그런데 50세가 됐는데도 눈치가 없어서 사회에 계속 차이면서도 교회에 와서는 ‘저는 고난 받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엄청나게 사람들에게 까이고 치이면서 고통을 받는데 왜 사람들이 나만 미워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아는데 자기만 모릅니다. 교리반 끝나고 손자병법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아마 남편과 안 싸우면서 남편을 이기는 법. 싸우면 지지 않는 법을 남편이 배울지 모르지만 손자병법을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을 이기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것을 열심히 읽다보면 30대 중반에 지겨워지고 무엇인가 더 깊은 것이 없을까 생각할 때 논어를 읽는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하면 진도를 못나갑니다.
저는 만32살에 대학에 교수가 됐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엄청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학이 건전하고 이성적인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이 드신 교수님들하고 모여서 다음에 들어올 젊은 교수들을 뽑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 사람을 추천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학위를 하고 어디서 포닥(post doctor)을 하고 너무 공부를 잘하고 학회지에 논문도 많이 내고 이 학교 저 학교에서 오라고 해서 우리가 빨리 데려와야 한다고 얘기해서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표 찍으려고 그러는데 저 뒤에서 연세 드신 교수님이 “맞아. 다 좋아. 공부도 잘하고 그만한 사람 없지. 정말 훌륭해. 그런데 좀 싸가지가 없어. 그러니까 모두 죽이야.” 한 방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다고 하면 반론이라도 있는데 ‘싸가지가 없어.’ 그러니까 그것으로 끝이고 영원히 그 학교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이 거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참 슬픈 역사이고 지금은 좀 개선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인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온몸으로 고생하며 조금씩, 조금씩 깨닫거나 아니면 마지막까지 못 깨닫고 이 사회에 앙심을 품고 인간에 대해 혐오를 느끼며 입술을 깨물며 죽어가게 됩니다. 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그렇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손자병법도 훌륭하고 다른 처세술에 책도 수없이 강물을 이루지만 그것은 참고할 뿐이지 성경이 진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다음에 내가 누군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600페이지 정도의 책은 쓸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성찰의 삶이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줍니다. ‘아! 나는 이런 점은 부족하구나.’ ‘이런 점은 내가 참 잘하는 것 같아.’ ‘앞으로도 잘 해야지.’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자기 바깥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올바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한 번 쯤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들이 개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10년 전에 『개념없음』 이라는 책을 썼을까요? (외국 교수들이 오셔서 이 책이 뭐냐고 물어서 conceptless라고 하니까 철학책인줄 알더라고요.)
한 사람이 종교의 씨앗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버려두면 짐승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뢰하지 않지만 진화인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이 처음에는 독수리가 와서 한 번에 채갈 만한 크기인 110cm밖에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개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도덕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배워가지 않는다면 종교의 씨앗이 있더라도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개는 개만도 못하는 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돼지는 돼지만도 못한 돼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놀랍게도 돼지만도 못한 인간,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개, 돼지가 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선택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위대한 존재인 것입니다.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대함의 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감동이 물밀 듯 밀려왔는데 여러분들은 롯데리아에서 사은품 받은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특별계시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났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을 잘 안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안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하나님이 인간, 사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떤 성품이 들어났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성경은 참 놀랍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다.’ 라고 믿음을 실재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으면 오래 참는다.’ ‘믿으면 소망을 갖는다.’ ‘믿으면 하나님께 순종한다.’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 ‘믿으면 핍박이 와도 견딘다.’ 이런 믿음이 무슨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성경이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사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믿음을 실제로 행사해서 자신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존재가 뭐다 그렇게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무엇입니까? 열린교회에서 설교를 잘 듣고 교리공부를 하게 되면 철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기반을 갖게 됩니다. 철학책을 두 페이지도 못 읽었었는데 굉장히 쉽게 쭉쭉 읽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쉬운 철학책에 한해서입니다. 본질은 어떤 사물의 자체가 무엇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컵의 기능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여기에 액체를 따라서 먹는 것이다.’ 모든 액체가 이 컵과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린아이 소변을 누게 해주는 엄마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먹는 것, 마시는 것, 주스 일수도 있고 녹차 일수도 있고 생수 일수도 있습니다. 성질이 뭐냐고 할 때는 유리는 떨어뜨리면 깨지고 그래서 항상 조심해서 놔야 됩니다. 사람이 원한다고 던져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질입니다. 그러면 본질이 무엇이냐 입니다. 본질은 물론 도자기입니다. 도자기는 명사고 도자기의 본질은 점토, 흙입니다. 깨들어 가면 점토 흙이 백토였냐 황토였냐 흙토였냐 그리고 이 위에는 어떤 것들로 유액을 입혀서 꽃모양이 있다는 게 본질이 아니라 덧입혀진 이 꽃은 성분이 뭐냐 이것이 본질에 대한 논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혀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4장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라고 말합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하나님을 크기, 높이, 길이, 몸집, 얼굴, 신체부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영’은 인간의 영혼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우리 몸 안에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면서 안 계신 곳이 없으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 물질 속에서도 계시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영이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 안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서로를 인격으로 대하시고 자기 밖으로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제가 이 벽 앞에 서서 “너 오늘 뭐했어? 어떻게 지냈어? 나 없을 때 너무 쓸쓸했지?” 그러고 벽을 쓰다듬으면 여러분들은 ‘드디어 담임목사가 치매가 오기 시작했구나. 과연 저 설교를 우리가 신뢰할 수 있을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꽃 앞에 서서 “너 참 예쁘구나. 오늘 뭐했어? 누가 먹을 것 좀 줬어?” 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치매라고까지는 생각 안하고 우리 목사님이 정서가 참 풍부하다고 생각 할 것입니다. 과하게 “너무 보고 싶었어!”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하면 그것은 치매입니다. 그런데 한 번 쯤은 “정말 예쁘다. 너 어떻게 그렇게 예쁘니? 아침 먹었어? 오늘은 더 예쁘네.” 이렇게 말하는 정도는 시심이 넘쳐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인격적인 관계를 갈망하는 인간이 문학과 예술의 형태로 인격을 여기에 투사시킨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정도는 봐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는 문학, 예술, 음악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의 생각을 그에게 전달하고 그에게서 받고 그의 감정을 내가 느끼고 그가 우울하면 나도 왠지 우울하고 기뻐하면 나도 우울했다가 기뻐지고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내가 무엇을 결정하고 그것이 저 사람에게 전달되고 저 사람의 결정이 나에게 전달되고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면서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집니다. 처음에 스치듯이 ‘어? 예쁘게 생겼네. 저 사람 괜찮은데.’ 이렇게 시작했다가 나와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대화해보니까 영 쓰레기이면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별로네. 뭐 저래.’ 그랬는데 만나서 대화해보니까 사람이 너무 따뜻하고 얘기가 통하는 게 너무 많다고 생각되면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람이 나에게 전달되고 내가 이 사람에게 전달되면서 다른 내가 되어가고 다른 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진정한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제가 강아지 코코를 한 1년 4개월 동안 기르면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개가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을 탁 켜면 먹방, 노래방이 나왔는데 요즘은 개방입니다. 어디를 틀어도 개 이야기 개하고 바캉스 간 이야기 개에 대한 용품, 호강하는 개부터 해서 성남 모란시장에서 죽을 때를 기다리는 개까지 다양하게 나옵니다. 사람들이 개를 너무 사랑하고 개를 데리고 애지중지하면서 가서 잘 수 있는 호텔에 가고 온갖 고급 용품을 사서주고 그럽니다. 요즘 나는 그것을 보면 가슴이 애잔합니다. 저럴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왜 그렇게 개에 미치느냐 하면 사람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너무 힘겹게 서로를 맞추어 가면서 기쁨을 얻기까지는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와 주고 좋아해 주고 일방적으로 자기를 추종해 주는 개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개와 인간의 관계는 선대의 관계이지 절대적으로 인격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개를 기르면서 정서적으로 어느 정도 도움을 받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개에게 거의 올인하면서 사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인간성이 현저히 모자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런 씨름을 해야 합니다. 너를 통해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게 인격적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씨름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일생을 살다가 온 인간인데 하나님같이 높고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을 만났을 때 어울리겠습니까? 양아치같이 살다가 귀족과 같은 집안에서 교육을 받고 탁월하게 예의범절을 갖추고 지성적으로 뛰어난 자매를 만났을 때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반말도 못하고 밥 먹을 때 넥타이 매고 와야 되고 포크와 나이프는 항상 바깥 것부터 사용해야 하고 손으로도 못 닦고 냅킨으로 때려야 되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면서 품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고 꼭 그렇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드는 것입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The Princess Diaries, 2001)” 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1965)”에 나왔던 여자가 여왕으로 나오고 이상하게 생긴 여자애가 나왔다가 공주로 변신하니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개망나니 같은 애를 공주로 만드는 과정이 그 영화입니다. 교리반을 듣고 영화를 보면 느낌이 다릅니다. 일반계시의 빛가루가 떨어집니다. ‘아. 저렇게 되어가는 거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기쁘고 또 고쳐지지 않는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그것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 같은 경험을 하고 그러면서 남녀 간의 사랑이 깊어져가듯이 주님과의 사랑이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완전히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많은 자매들과 형제들이 이런 결혼생활을 원합니다. 한 40세 연상의 남자를 찾아보면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혹시 나올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결혼을 절대 안할 것입니다. 수준 낮은 사람과 살면서 이해해 줘야하니까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것이 안 되면 할 수 없이 위인들의 영웅전기를 읽으면서 싱글로 보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부딪히면서 그 속에서 인격적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성품은 아니지만 존재가 무한히 완전하십니다. 우주는 크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150억 광년이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측정 가능한 크기를 말하는 것이고 그 바깥에는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인간 하나 없는 저 광활한 우주에 가스 덩어리로 돼있는 금성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뭐하실까?’ 그런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안 계신 곳이 없이 모든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장소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무한히 계시는데 영원하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동일하십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단순성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구성요소를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구성요소는 몇 개의 구성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성물이 A, B, C, D… 등으로 구성물이 많다면 논리적으로 어느 하나도 꼭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들이 섞여 있을 때에는 그 절대적이지 않은 것들이 섞여있는 존재는 절대로 절대적인 존재나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성은 굉장히 어려운 개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햇빛이 비출 때 살균작용도 하고 얼어붙었던 땅에서 새싹이 움트게도 하고 햇빛이 비취면 빨래가 마르기도 하고 식물 생태계는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순환작용이 일어납니다. 태양에는 새싹도 없고 빨래도 없고 졸졸 흐르는 시내도 없고 심지어는 살균제도 없는데 태양 안에는 태양이 비취는 효과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도 태양 안에는 없지만 그 빛이 전달되어서 효과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구성요소 없이 찬란하게 눈부신 분으로서 그 분이 누구인지 구성요소를 가지고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다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인간과 피조물 속에서 그 분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것이 단순성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동일하고 하나님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뜻합니다.
5장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명칭’이라고 돼 있는데 굉장히 무례한 번역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말할 때, ‘아버지의 명칭’이라고 안 하고 ‘우리 아버지의 존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만물의 성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의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것이 하나님이 동물들을 이끌어 그에게 데려오는데 이름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이름이 기가 막힌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목이 긴데 기린, 뻐꾹뻐꾹 거리며 우니까 뻐꾸기, 어쨌든 이름 하나만 딱 들으면 연상이 되어서 그 명사가 어떤 실체를 지시하는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름은 굉장히 중요해서 아무렇게나 막 지으면 안 됩니다. 옛날에는 어른들이 이름을 지을 때 ‘말자’ 라고 지어서 이걸로 여자애는 끝이고 그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라고 하는데 존재감이 없습니다. ‘끝순이’ 라는 이름이 거기서 나옵니다. ‘제발 여자아이는 너로서 끝나라.’ 그 다음에는 안 태어날 거라는 미신 속에서 그런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나쁜 것이며 한 인간을 존귀하게 보고 그에게 합당한 이름을 지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존함을 잘 연구하면 하나님의 성함은 하나님 자신이 계시해 주십니다. 그 속에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놀라운 암시와 비밀들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함에 대해서 한 과를 할애해서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몇 가지로 범주가 나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지고.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는 높음의 끝, 젊은 사람들 표현대로라면 높음의 끝판왕을 표현하는 존함이 있습니다. 첫째는 ‘엘(אל)’입니다. 그리고 ‘엘로힘(אלהים)’ 입니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라고 보고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어원적인 설명이 다양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엘은 ‘강하다.’에서 옵니다. 강하고 권능 있는 분이며 모든 인류에게 계시된 이름입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가장 강하고 권능이 있어서 세력이 강한 분, 경외의 대상 그분이 엘, 엘로힘입니다. 둘은 복수형태지만 하나님이 세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사람들은 신비하고 장엄한 것을 볼 때 복수형을 씁니다. 인간의 얼굴을 복수형인 ‘파님’이라고 씁니다. 사람의 얼굴이 너무 신비한 것입니다. ‘하늘’은 ‘샤마임(שמים)’, ‘물’은 ‘마임(מים)’이라고 모두 복수 형태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온(אליאן)’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지고하신 분, 너무 높음의 끝판왕 그래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분을 뜻할 때 자신의 존함을 엘리온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이름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맞게 자신의 존함을 계시하시고 이후에 인간들은 경우에 맞게끔 하나님의 여러 존함 중에 적합한 존함을 떼어다가 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도나이(אדוני)’는 우리말로 ‘주님’입니다. ‘모든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분의 것이다. 소유주이시고 그 분이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함이 아도나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함은 엘, 엘로힘, 엘리온, 아도나이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함입니다. 이것은 피조물과 우호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존함입니다. ‘샤다이(שדי)’라고 하는데 원래는 ‘샷다이’입니다. 샷다이 앞에 엘이 붙어서 ‘엘샷다이(אל שדיי)’ 라고 합니다. 이 이름에 대해서는 구약학자들 사이에 해석이 많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알마티’입니다. ‘전능한’ 그리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진 이’라는 의미입니다. ‘셔터이’가, ‘전능자’라고 계시하는 이유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의 능력을 믿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존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이 성함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 성함은 인간이 뭔가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을 때, 자신의 능력으로 모자라는 일은 못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근심할 때 하나님이 위로의 형태로 주시는 이름이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할 때 ‘너의 인생을 주관하는 자는 나 여호와.’라는 것을 계시해서 보여주시기도 하시는 이름입니다. 옛날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인 경건한 청교도들이 매일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존함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함에 대한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똑같은 것입니다.
샷다이, 엘샷다이가 이런 이름인데 이 이름보다 더 위대한 성함이 있습니다. 나머지 모두를 잊어버려도 마지막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이름이 ‘야웨(יהוה)’입니다. 우리말성경에는 ‘여호와’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여호와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히브리어 글자 자체가 이렇게만 나오고 밑에 글자가 안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좀 복잡한데 아까 얘기했던 야웨는 이렇게(ppt 확인) 나옵니다. 이렇게 나오다가 밑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모음을 붙여놓은 것은 이 이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감히 그 이름을 올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하나님의 본명이기 때문에 너무 거룩해서 올릴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위반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면 ‘주님’이라고 읽도록 지시하기 위해서 아도나이에 해당되는 모음을 야웨에 붙인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따라서 읽은 것이 우리말성경의 독법입니다. 그 일을 영어성경 독일어성경이 제일 먼저 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고 야웨일 가능성이 제일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원성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자존성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의 덕을 입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계시는 것입니다. 불변성은, 외부의 무엇에 의해서 당신 자신이 변화되시지 않고 자기 자체의 결함으로 변질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만들었건 어디서 나왔고 올라가지만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냐?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근거가 되시고 스스로 존재하며 내부나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변질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야웨라는 이름의 기원입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야웨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이렇게 씁니다. 이것은 영어로 말하자면 미래형이나 현재형에 쓰는 어두입니다. 앞에 오는 철자입니다. 떼고 나면 마지막에 이게 남는데 이것은 이거의 옛 형태라고 보고 실제로 이것은 왔다 갔다 합니다. 하야(חיה)는 ‘있다’ 를 뜻합니다. be, become, is becoming 현재, 미래, 현재진행형 모두에 해당됩니다. 어쨌든 존재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야웨의 존함이 나왔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정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원래 이것을 어떻게 불렀는지를 정확하게 기억을 못하고 추정할 뿐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장 14절 1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4-15) 중요한 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5)입니다. 히브리어로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 입니다. 영어로는 ‘I am that I am.’ 혹은 ‘I am what I am.’ ‘나는 있는바 그것이다.’ 정확히 번역하면 ‘나는 내가 있는 그것이다.’ 어렵지 않습니까?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는 말씀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굉장히 중요한 언급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모든 있는 것은 있게 한 원인이 있습니다. 모든 있는 것들이 원인이 있다면 있게 한 것에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건 어떤 것도 용도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 공간에서 모든 다양한 사물들은 하나의 목적에 이바지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기 위한 곳이라는 이 하나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들만 여기에 있지 그것과 관계없거나 그것에 이바지하지 않거나 그 목적에 위배되는 것은 여기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면 건축가가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후에 만들어 놓았거나 실수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교리반에서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에 한 줄 기억하라면 ‘하나님은 있는 분이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실 때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생각이 먼저 있으셨겠습니까? 행동이 먼저 있으셨겠습니까? 당연히 생각입니다. 그것을 ‘관념’ 혹은 ‘이데아’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따라서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뻥튀기 하듯이 세계를 확 쏟아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기에 태어나서 둘이 만나게 될 것을 하나님은 그렇게 계획하시고 알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 와 있는 것은 짧게는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길게는 여러분들이 태어나기 전 엄마 배속에서부터 더 멀게는 만세 전부터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이 시점에 여기에 모여서 교리반을 신청하고 여기서 제 2강을 듣도록 계획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으시고 그 외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분의 있음에 덕을 입은 것입니다. 시에서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세속 시인도 의도하지 않았을 테지만 은혜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심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신바 되었고 우리 존재는 그분에게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에게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죄는 독립하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렇게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하는 이유는 하나님에게 깊이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없는 자와 같고 그 분만이 진정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잠시 있는 내가 아니라 영원히 계신 그 분께 이어지면서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이것 밖에 설명을 못 하는데 하나님의 존함 하나를 가지고 한 시간을 할 수도 있고 오늘 하루 종일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한없는 묵상이 나오면서 고난과 시련이 와도 “잘 될거야.” 하고 사람들이 어깨를 두드려 줍니다. 사실 아닙니다. 안 될 때도 많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안 일어날 때도 많습니다. 그것은 사탕발림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눈을 떠서 그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수많은 물고 뜯는 추악한 삶의 투쟁들이 있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 세상 속에서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것일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욕망을 버리고 나 혼자 굴러 떨어졌다라고 생각하는 그 곳에서 나를 아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있으시고 스스로 계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없는 것 같은 나를 있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에 달콤한 사탕발림보다 용기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방탄소년단(BTS)의 멋있는 리더의 이름이 김남준인 것을 아십니까? 한 5년 전만 해도 김남준을 검색창에 치면 걔네들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안 보입니다. 저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느 날 인터넷을 봤는데 “김남준 너무 귀여워. 갖고 싶어.” 그래서 ‘누구야. 도대체 미친 사람 아니야?’ 하고 들어가 보니까 이 김남준이 아니고 요번에 U.N에 가서 연설한 방탄소년단의 리더인 김남준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함에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새벽부터 입술이 부르트도록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이야기하면서 힘이 나는 것입니다. 진도를 못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아름답고 너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갈한 사람이 펑펑 솟아오르는 샘물에서 고단한 삶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생수를 퍼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생수를 팽개치고 쓰레기 같은 구정물을 먹으면서 더 먹겠다고 옆에 사람 머리를 쥐어박고 뜯고 혈투를 벌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볼 때도 너무 가여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떻겠습니까?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이제 이해되지 않습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 예수의 귀한 이름’이라고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기독론에 들어가면 예수의 존함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이 위로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적 별로 없지요? 조용히 ‘주님. 엘, 엘로힘, 아도나이, 엘샤다이’ 하면서 하나님의 성함을 외워보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구약은 이렇게 이야기가 됐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함을 대충 기억으로 더듬어 보면 대게 어떤 것입니까? 저 멀리 지극히 높은 곳에 뛰어난 능력으로 권능의 끝판왕으로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이 딱 오지 않습니까?
신약에서는 좀 다릅니다. 퍼즐처럼 하나님의 육각면체 아니면 정16각이나 36각 면체처럼 있으면 이쪽 면체에서 엘, 엘샤다이, 엘로힘, 아도나이, 엘리온 등으로 구약이 보여 주었다면 신약은 문 페이지처럼 돌리면서 빛이 들어오는 또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의 사촌쯤 되는 언어인데 다니엘서의 일부, 예레미야의 일부, 에스라서의 일부가 사용됩니다.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였는데 구약 공부하는 사람은 아람어까지 공부해야합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써졌습니다.
그리스어로 하나님은 테오스(θεος)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엘, 혹은 엘로힘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신약에 가장 보편적인 존함입니다. ‘나의 하나님’, ‘너희들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이런 식으로 소유격으로 많이 표현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모든 만물의 원인이신 존재 그것들에 뛰어나신 신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주 퀴리오스(κυριος)라고 하는 단어는 ‘주’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얘기하는 아도나이와 맞먹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이 ‘주’라는 명칭이 구약에서는 대체로 하나님에게만 사용이 되었는데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에게도 이 존함이 사용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공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심으로써 그 분은 주가 되는데 그 호칭은 여호와께서 받으시던 호칭입니다. 이 의미는 만물백성의 소유주이며 지배자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 8절에 예시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단어가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을 히브리말로 ‘아브’라고 하는데 이게 ‘아버지’입니다. ‘엠’은 ‘엄마’입니다. ‘엠미’ 하면 ‘내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아빠’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단어가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파테르(πατηρ)로 나옵니다. 이것은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가족관계에서 불리는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이 ‘아빠’, ‘dad’ 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대디(daddy)’ 보다는 약간 아버지 쪽으로 향했고 친밀하면서도 가족관계에서 통용되는 아버지의 호칭입니다. 공식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가족관계 속에서의 아빠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고 신약에서는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때로는 모든 인류의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너무 많이 은혜를 받느라고 2과밖에 못나갔습니다. 다음주에 3과 아니면 4과를 나가보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