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소명과 준비
(1996년 부산신대 개강세미나)
설교기간|1996년 8월 26일-30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3월 22일
목 차
1. 한 사람을 준비하시는 하나님(눅 1:80上) 1996.8.26 부산신대 개강세미나 1
2. 육체적 준비 : 육체와 순결(눅 1:80上) 1996.8.27 부산신대 개강세미나 8
3. 인격적 준비 : 인격과 생활(눅 1:80中) 1996.8.28 부산신대 개강세미나 21
4. 정서적 준비 : 사랑과 열정(눅 1:80中) 1996.8.29 부산신대 개강세미나 35
5. 영적인 준비 : 경건과 능력(눅 1:80中) 1996.8.30 부산신대 개강세미나 48
1. 한 사람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上)
어느 날 천국에서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낭랑한 천사의 목소리가 전국 방송국에 울려 퍼졌습니다. “천국에 계신 신구약 성도 여러분들께 알려 드립니다. 모든 성도들은 지금 곧 볼 수 있는 천국 전망대에 모두 입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분도 빠짐없이 모두 오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걸어가면서 아벨을 보고 이야기 했습니다. “아벨 이것이 무슨 소리요? 아니 천국에서 왜 우리를 한군데에 다 모이라고 하는 거요?” “글쎄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이 거기 바울 자네는 알아?” “선배님 저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실라가 “글쎄 나는 알 법도 한데 가봅시다.” 그리고 갔는데 이제 그 전망대에서 모두 하늘나라를 내려다보니까 조금 있더니 방송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신구약 성도들은 모두 기립하여 박수를 치십시오.” 영문도 모르고 박수를 막 쳤는데 “당신 왜 쳐?” “나도 모르겠는데” 그러더니 또 천국에서 방송이 들려오는데 “여러분 저 밑에서 목사 한사람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박수를 보냅시다.” 한사람의 목사가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신구약 성도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친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만큼 한사람의 목사가 회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웃는 신학생들은 뭐, 낫습니까? 낫기는 뭐가 낫습니까? 다 그 사람이 그 사람들 아닙니까? 여러분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는 목사님 말씀 들으면서 은혜도 받고 회개도 하고 가끔은 눈물로 흥건히 고인 그 의자에서 자리를 뜨면서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쥐고 주님 뜻대로 살아야지 다짐을 했는데 신학교 들어오고 나서 세월이 흘러가다 보니까 머리는 커졌습니다. 쥐뿔도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바람은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설교를 들어도 ‘야 뭐 저거 주경학적으로 저것이 뭐 맞는 이야기인가? 우리 성경 해석학 선생님은 저렇게 해석하면 계속 나가면 이단으로 빠진다 하던데... 야 저거 뭐 참 한심하구나. 저런 설교를 듣고 내가 은혜를 받았으니 옛날의 내가 부끄럽다.’ 여러분 이렇게 하면서 혹시 커 가고 있지 않은지 여러분 한번 생각 해 보지 않겠습니까?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라고 하는 전후 독일 시대에 목회를 하던 아주 훌륭한 설교자가 한분 계셨습니다. 모두 대전후의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하자면 좌경 사상으로 있을 그때에 틸리케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증거 해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영적인 감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때 헬무트 틸리케가 쓴 책속에서 어느 불행한 신학생의 귀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하나 썼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느낀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1장 80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에 나오는 내용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열정이 있고 사모함이 강한 청년이 시골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서로 기대고 교제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말씀으로 교제하다가 뜻을 세우고 도시로 가서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앞으로 복음 사역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정확하게 이년정도 흐른 다음에 이 학생이 실로 오래간 만에 자기가 이전에 다니던 그 아름다운 시골 교회에 방학 때 오게 되었습니다. 어김없이 사랑하는 많은 지체들이 그 뜻을 세우고 한때는 함께 어울리며 교제하고 사랑과 눈물이 있는 그런 사귐으로 한 지체였던 그 형제의 귀향을 진심으로 환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여서 그 형제를 환영해 주고 그리고 드디어 이제 그 형제가 그 교회에 방학 동안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예전처럼 성경공부 모임에 이 형제가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순진한 시골 청년 자매들이 그때는 같이 어울려 성경공부를 했지만 그래도 도회지에 와서 2년여 동안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 도사가 옆에 있는데 누가 감히 거기서 성경공부 인도를 하겠다고 하겠습니까? 그저 아낌없이 인도자의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형제 옛날에는 우리가 같이 놀았지만 이제 맞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이제 이 상좌에 앉아서 우리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게. 그래서 올라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경 같이 읽고 그리고 각기 그 성경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을 서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과 다름없이 자기가 그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복음의 진리와 기도할 때 주셨던 본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이 신학생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형제 옛날에는 형제처럼 그 성경을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시안다’라고 하는 신학자를 아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 칭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갔다고는 말할 수 없지. 옛날에는 그 사람의 견해가 그래도 상당히 그럴듯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에 와서는 그 사람의 의견이 옳지 않다고 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그래도 그 사람의 견해가 괜찮지 않냐?”라고 말하는 사람들하고 싸움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데 뭐 은혜를 받아서 깊이 성경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주사 바늘을 하나 꺼내서 관념을 쫙 찔러 넣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다 “와! 대가가 낫구나.” 이제는 생명은 사라지고 논쟁과 관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면 지금과 같이 역사 비평에 의한 방법에 의한 신학 연구가가 횡횡하는 이런 시대에는 더욱 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붙들고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신앙의 생명을 공급 받는 탄탄한 영적인 삶이 신학공부의 기반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방법을 가지고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지고 역사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였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움직여지는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읽어가도 누구 하나 본받고 싶은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잘 났기에 그러냐?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없는 것인데 그건 내 마음이지 누가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누가 나보고 대중가요 가수 중에 왜 서태지가 안 좋으냐고 따질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싫은데... 내가 좋아 하는 사람이 없는데...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랬습니다. 다윗이 좋아 보였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가니까 간음도 하고 별의 별 사건이 다 일어납니다. 그래서 별로 안 좋아 집니다. 어느 날 또 바울이 좋아 보였습니다.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오늘날에 말하자면 분주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온전파의 일꾼의 모델이지 않습니까? 세월이 흘러가다 보니까 그 보다는 바나바가 백번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윗보다 요나단이 백번 나은 것 같고 세월이 흘러가다 보니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이렇게 지조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한 8년 전엔가 성경을 읽어 가다가 어느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것이 누구이겠습니까? 세례요한. 그 후로는 이 사람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자기 좋아 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 할지 모르지만 나는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잠깐 이 세상에 살다 갔지만 그러나 정말 불꽃처럼 살다 갔습니다. 그가 몇 년을 사역을 했는지는 미스터리이지만 짧으면 6개월 길면 2년 정도의 사역이 아니었겠는가 생각 합니다.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30년 세월 동안을 준비 했습니다. 그리고 몇 편의 설교를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짧은 인생을 산 그 사람을 가리켜서 자기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죽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만치 한 순간을 불꽃처럼 태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에 예비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다 갔다는 말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역사를 움직이기 위해서 사람을 준비 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의 캄캄할 때 영적인 회복이 보이지 않고 교회는 소망이 보이지 않고 많은 사람이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참된 진리를 잃어가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한 아이를 광야에서 준비시키시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역사의 전환점은 결코 우연히 혹은 예고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준비하시는 일은 하나님도 인스턴트 식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천지창조보다도 더욱 그 위대하심과 자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세상은 말씀 한마디로 창조 되었지만 그러나 역사에 쓰시는 한 사람은 결코 말씀 한마디로 준비하시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 준비 되는 것입니다. 처음 조상은 흙과 갈비뼈로 간단히 빗으셨지만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하여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키는 일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이 앞길에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은 기록된 선지자의 계시가 끊어진지 사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던 때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을 외쳐서 주 오실 수 있는 길을 마음에 예비하도록 만들어 주는 그 일을 위해서 세례요한을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메시아의 오심에 앞서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나타난 것을 이사야 선지자 40장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30:6-8)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테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한 예언으로 말라기를 마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 구약성경 마지막 거기에서 그는 세례요한의 출현을 이와 같이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그의 앞길을 예비하고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놀라운 신앙의 변화가 어떤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4-6)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즉시 신약에 들어오면서 누가 복음 1장은 나실인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을 세례요한의 출연에 대해서 예고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죄가 되며 그리고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엘리아의 심령과 능력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중 많은 사람을 고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리라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방법은 하나님이 한 어린 아이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아이가 갈대 상자에 누워서 나일강을 떠내려가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은 그 갈대 상자 안에 위대한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미리암이 그 아이를 건져서 그리고 그 바로바로 공주의 손에 갖다 주어서 거기서 히브리 사람의 젖을 먹고 자라게 하는 그 가운데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자라면서 한 시대의 역사를 뒤 바꾸어 놓을 꿈도 함께 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며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실 그 때에 수많은 세월을 기다려 오던 일류 구속의 위대한 여명을 키우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여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할 모든 영적인 리더십이 사라지고 백성들은 하나님 없는 것과 다름없는 삶을 구가해 가고 있을 그때에 한 시대를 일깨워서 다시금 그 역사위의 신앙을 꽃피우게 할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계획은 한 아이 사무엘이 엘리의 지도 아래서 자라가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계획도 함께 자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을 이 시대 조국 교회의 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학교는 떠났지만 꽃다운 시절 십년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가끔 싫어지는 때가 있었는데 학생들은 싫어지는 때가 없었습니다. 뚜벅 걸어 나오면서 학교 담벼락을 붙들고 먼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찬송)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할고
신학교에 있는 9년 동안 고통이었습니다. 나는 개척교회를 그렇게 9년 동안 했으면 부흥 했을 것 같습니다. 조금도 행복한 시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왜 조국교회의 미래를 보면 사람이 필요 합니다. 그런데 거품처럼 사라져갈 사람들은 많은데 이 뒤웅 치는 물줄기를 호령하며 거슬러 살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권능을 보여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바다를 참 좋아 합니다. 바다에 가서 특별히 커다란 바위가 있는 옆에 서 있으면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파도가 부딪치면서 파도가 큰 바위를 때리면 거품이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듯이 웃으면서 파도위에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나게 떠오른 거품 중에 두 번째 파도가 올 때까지 남아 있는 거품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잠자는 이 시대의 다수가 되고 싶습니까? 깨어 있는 소수가 되고 싶습니까? 거품처럼 사라지는 포말과 같은 인생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사라지고 싶습니까? 아니면 한 시대에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당신의 위대한 영광과 권능을 한번 이 세상에 선포하고 싶습니까? 서 말의 가루가 되고 싶습니까? 한줌의 누룩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그 놀라운 역사를 이룰 때에 물론 하나님은 제도도 사용하시고 방법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방법이나 재주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에도 방법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늘을 가르고 이 땅 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은 인간이 세운 제도와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이 아파하는 것도 사람의 방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 사람입니다. 내가 이세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이는 내 마음의 합한 자라. 내가 이를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주님은 사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 사람의 출현을 기다리셨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여러분 어느 천문학자가 말했습니다. 나에게 한해의 지렛대와 지레 점을 달라 그리하면 손가락 하나로 이 지구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리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한 사람은 지레 점과 같습니다. 아무리 크고 엄청난 역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한사람을 지레 점으로 하여 역사의 지렛대로 역사를 바꾸십니다. 누가복음 3장 1절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말씀에 임함을 받고 예언 사역을 시작한 경위를 말합니다. 디베로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의 갈릴리에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레와 두라고니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 분봉왕으로 안나스가 가야바가 대 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역사적으로 AD 27년입니다.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라야 될 요한에게 임하니라. 다시 말해서 요한 한 사람이 은혜를 받고 말씀 사역하기 위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이 사건이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한 가정의 사건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소명을 받은 이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역사와 관계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많은 지푸라기와 같고 거품과 같은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을 따라 사십시오. 그러나 소명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준비되기를 꿈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아들로 살아가는 사람은 겨우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을 보십시오. 그 시대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그 시대가 보지 못하는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를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새로운 지평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시대가 그 틀에 찍어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혼탁하고 더러운 교계의 풍조가 찍어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온 사람들 이었습니다. 해 맑은 영혼을 가지고 온 사람들 이었습니다. 정결한 심령을 가지고 온 사람들 이었습니다. 거룩한 인격을 가지고 하늘의 능력으로 부음 받은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횃불과 같이 한 시대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증거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겠노라고 발을 들여 놓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어찌된 노릇인지 만만하게 변해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는 사람보다는 신앙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제 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개척교회를 해도 안 될 것이라는 패배주의가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1년에 30명만 모여도 성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빛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세상은 점점 어두워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한데 사람들은 점점 더 교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뒤를 쫒아가며 뒷북이나 치고 가려운 데나 긁어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준비되기를 사모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흘러가는 물결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믿지 말고 세상이 우리를 틀에 찍지 못하도록 사도가 말한 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원어적으로 틀에다 찍어낸다는 뜻입니다. 신학교 와서 보면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입니다. 뭔 생각을 하든지 다 똑같습니다. 얼른 얼른 빨리 빨리해서 어디 급하면 다른데 전학이라도 가서 얼른 목사 안수 받고 검은 가운 뒤집어쓰고 목사님 되고 싶은 생각, 얼른얼른 교회를 키워서 중형차 한번 타보고 싶은 것, 빨리빨리 영어 공부해서 한자리 꿰어 차고 싶은 생각, 그런 생각들입니다. 변화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삶이 우리의 삶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신학교 와서 하나님께 내마음을 모두 드리는 그런 은혜 속에서 자라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요한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늘 두르고 다녔던 휘장 기억하십니까? 손이 있고 입 위에 심장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림입니다. ‘꼬르 메움 띠비 오페로 도미네, 프롬프테 에트 신쎄레!”(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님께 나의 마음을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그는 정말 피 떨어지는 따뜻한 심장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고난과 가시밭길이 있는 종교개혁의 한 시대를 걸어갔습니다.
(찬송) 세상 부귀 안일함과 원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때문에 그 십자가를 타고 다니고 그리고 덕을 보고 호위호식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지기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이 민족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굴절된 이 민족의 교회사에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의 역사가 꽃 피울 날을 기대하며 자신을 거룩한 역사위에 바치기를 원하는 세례요한과 같은 마음으로 이 시대를 지나는 사람을 우리는 어디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동강나서 상처받고 한순간도 샬롬을 모르고 살아 왔던 이 찢어진 민족의 역사위에 하나님의 교회는 서 있습니다. 역사와 관계없는 교회의 영성, 개인의 삶과 동떨어진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 모두 거짓말입니다.
오늘 요한을 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아이가 희랍어 본문에는 ‘파이디언’이라고 나옵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4-5세 이상 된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아주 여러 군데에서 이 ‘파이디언’을 ‘베이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갓난아이 일 때에 그는 광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에서 세상과 구별시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거기에서 훈련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유대 광야에 나타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그렇게 외칠 때 누구한테 그것을 배웠습니까? 신학교 다닐 때 어느 선생님한테 배워서 가지고 나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 외쳤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모든 학문을 사용하셨지만 그러나 그 시대를 향해 말씀하시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세례요한의 가슴을 파헤치고 지나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준비되기 위해서는 가슴속에 무엇이 있어야 되고 외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 무엇과 그것이 있는 사람이 소명입니다.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운을 뒤집어쓰지 않아 별일을 다 해도 없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족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고 자기의 죄악 된 앞에서 통곡이 없는 사람들은 소명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전치사는 into입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호세아가 여기에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들어가서 입으로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의 영혼을 관통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민족의 역사를 향한 교회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의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비애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윌리암 퍼킨스는 설교란 무엇인가 말하기를 한 영혼을 파헤치며 관통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를 향해서 증거 한다고 하는 것은 뼈 사이에서 메시지가 우러나와서 그 메시지가 심장을 관통하면서 피를 바르고 살갗을 뚫고 나오며 진액을 칠하고 입으로 뿜어져 나오며 눈물을 머금은 것이 한 시대를 향한 설교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깊은 내면의 세계가 파헤쳐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에 의해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일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섬기는 시간 보다 더 많은 시간을 교회의 거침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위대한 설교자 조지 윗필드는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회심치 못한 사역자야 말로 교회의 독이다. 소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교회에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에게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자기의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 갖추어지지 못한 이 모습을 끌어안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당해 나갈까를 고민하며 이 길에 들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소명 없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십년 있으면서 매학기 마다 마지막 4학기 때 가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학교 집어 치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해서 94년도 2학기 때는 9월에 개강을 하면서 선지자에 대해서 특강을 했습니다. 특강을 듣고 나서 한 클라스에서 다섯 학생이 휴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 했다고 했습니다. 기도원 올라가서 주님이 정말 이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지 물어 보고 내려와서 마지막 학기 내년에 하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무 말씀 안하시면 속히 돌아가서 햄버거 집을 하든지, 그토록 먹고 싶은 불고기 집을 하든지, 정수기 외판을 하든지 화장품 장수를 하든지 아무거나 해라 열심히 하나님 믿으면서 작은 교회 섬기면서 주의 영광에 충성되게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이지 무슨 인생이 그렇게 복잡하겠습니까? 나는 그 학생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했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학교를 떠나는 것을 보니까 그 학생은 하나님이 부른 학생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또 금방 가서 너 하나님이 부른 것 같아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웬만하면 방향 전환 해야 합니다.
2. 육체적 준비 : 육체와 순결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上)
어제는 제가 ‘아이가’ 라는 한마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실 때는 제도와 방법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두 번째 ‘아이가 자라며’ 그랬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세례요한이 천천히 자라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과 내일에 나누어서 말씀 전할까 합니다.
먼저 ‘아이가 자랐다’는 말에서 우리는 육체적인 준비가 사역을 위해서 먼저 선행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복음 사역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이 거룩한 나머지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준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린나이에 애굽에 팔려간 요셉을 30세가 될 때까지 갖은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이름 없는 노예로, 이름 없는 종지기로 애굽의 사람의 집에서 노예처럼 종처럼 살아가도록 만든 후에야 비로소 총리로 삼으셨을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3일 동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사역을 이루면 구속의 대업이 완성 되는데 왜 예수님은 3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준비 시켰겠습니까? 왜 세례요한을 기저귀를 채운 채 선지자로 사용하시지 아니 하시고 자연적인 성장을 하게 하셨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을 때는 기어 다니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30세쯤 되도록 자연적인 성장의 시기를 갖게 하셨을까? 이렇게 묻은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비둘기의 알을 재물로 받지 아니하시고 성숙한 비둘기를 재물로 받으셨습니다. 어미젖도 못 뗀 송아지가 아니라 숙성한 짐승들을 재물로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애는 세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30년, 3년, 3일. 그는 3년 동안의 섬김을 위해서 30년 동안을 자연적으로 성장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성장하셔서 죄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육체의 성숙은 사역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더욱이 건강하고 성숙하게 자신을 준비 하는 것이야 말로 힘에 넘치도록 수고하여야 할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더욱 소중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잘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이 사람이 샌님같이 골골하고 기침을 콜록거리며 넥타이를 매고 칼날처럼 바지 주름을 세운 채 광야에 이는 모래 바람이 괴롭다는 듯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렇게 하얀 와이셔츠에 주름 잡힌 바지를 입고 나타난 나약한 지성인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얼굴은 두껍고 수염이 나 있고 그리고 온 몸에는 정열적인 에너지가 넘쳐흐르고 오랫동안 모래 바람과 그리고 뜨거운 뙤약볕과 추위에 절어온 그의 건강한 피부는 그의 외모 속에서도 출중한 용기를 느끼게 할 만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복음 사역은 막중한 육체적인 노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모든 육체의 힘으로 에너지를 남김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쏟아 부어야 할 때에 쏟아 붓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장에서부터 만들어져서 정성껏 포장 되서 여러 상인의 손을 거쳐서 가게에 유통되고 있는 양초는 오직 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불이 활활 타오를 때 그래서 어둠을 비춰줄 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지금은 비록 준비하고 있지만 언젠가 사역의 현장에 들어설 때에 우리는 무한한 육체의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건강이 나쁘고 몸이 고통스러워서 주님을 위해서 불꽃처럼 자기의 건강을 태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때에 육체의 질병과의 지루한 싸움을 하느라고 인생의 황금과 같은 시기를 노치고 있다며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 사역은 일생동안 멈출 수 없는 콜링(calling)을 그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안식년 그 필요 있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성경에서 따온 것처럼 아전인수 격으로 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부분만 구약으로 돌아갑니까? 격변하는 시대에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서 불굴의 투지로 살았던 종교개혁자들은 안식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던 투쟁적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밤같이 어두워져 있는 이 세상의 영혼을 구원할 구령의 열정에 활활 이글거리던 사람들은 오히려 오락을 경멸하고 휴식을 미워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렇게 섬기고 불꽃처럼 살고 싶은 열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마가복음 1장에는 하루 종일 복음을 전하고 밥 늦게 숙소에 계셨는데 밥 늦도록 숙소에 와서 예수님의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오셔서 “내 근무시간은 5시다 끝났으니 내일 9시에 와라”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옆에서 막 깡패들이 싸우는데 경찰을 부르니까 엥 하고 지나가는데 5시가 되니까 팻말을 꺼내더니 Out of Service 근무시간 끝났음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하나님 섬겨서 되겠습니까? 그럼으로 중요한 것은 건강을 보존 하느냐, 헤치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건강을 보존하느냐? 누구를 위해서 건강을 다 써버리도록 사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존경하는 설교자 하나님의 사람 ‘조지 위필드’에는 18세기의 영국을 그리고 신대륙을 복음으로 건진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지난 수세기동안의 그 사람처럼 하나님만을 위해서 넘치도록 수고하며 산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그의 마지막 운명하는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집회를 갔습니다. 그는 탁월한 설교의 능력을 가졌지만 교회를 해서 담임목사가 되라는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교단을 만들어 줄 테니까 교단의 장이 되라는 것까지 거절 했습니다. 그리고 순회 설교자로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밤늦게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등불을 들고 위필드 목사는 2층에 준비된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던 성도들이 그 목사님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이제 2층으로 올라가는 목사님을 쫒아 왔습니다. 그리고 등불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목사님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많은 성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자 이 위필드 목사의 마음속에서 다시 그 목자 잃은 양떼들을 향한 연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들고 다시 그 계단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되는지를 가르치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등불이 다 사그라져 갈 때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것이 위필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하나님께로 가고 없었습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선교에 헌신해서 29세의 아름다운 나이에 너무나 힘에 넘치는 수고를 한 나머지 일생을 마쳤던 ‘데이비드 브래이너드’라는 선교사를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마지막 남아 있는 한줌의 살과 피까지도 하나님을 위해서 바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임종이 가까운 시기의 일기를 읽어보면 우리로 하여금 눈물 없이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다 외우지 못하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이제 어느 마을에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한다. 나귀는 참 편리하다. 왜? 내가 어디로 가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기가 길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곳에서 말씀을 전하고 쓰러질 듯이 자기의 몸을 그 노새인지 나귀 위에 실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다가 너무 기운이 없어서 떨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말에 엎드려서, 그 노새에 엎드려서 그 짐승을 타고 그곳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강단에 오르면 사자와 같은 힘을 하나님이 주셔서 그리고는 정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서 인디언들로 하여금 우상을 모두 버리고 십자가의 깃발을 마을에 꽂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편의 설교를 마치고는 강대 아래에 주저앉아서 한사발의 피를 쏟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그는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칼빈은 마지막 때에 별명이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이었습니다. 치질을 비롯하여 30여 가지의 질병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24년이 넘는 세월 동안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위해서 몸 바쳐 헌신했지만 저는 아직 그 사람이 일 년 씩, 이년씩 몸의 휴양을 위해서 사역지를 떠났다는 기록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와 사지에서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그들은 건강을 깎아서 하나님 앞에 바친 사람들 이었습니다.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 사람들이 그렇게 건강을 해쳤다고 감히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자기의 건강을 바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무질서한 생활과 그리고 정립되지 못한 잘못된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무절제함으로 우리의 건강을 해쳤다면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사역을 위해서 건강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거룩한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그 재단 앞에 바쳐질 그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건강하게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악의 세력들과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투지로 싸울 수 있게끔 육체적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선생 한분이 계셨는데 학교 다닐 때는 맨날 공부는 순교자적인 각오를 가지고 공부를 하다 결국 신학교 선생 몇 년 하시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아마 제 나이또래 밖에 안 되었을 것입니다. 30대에 죽었습니다. 공부를 너무 하다가... 여러분 물론 공부 자체가 중요하고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부는 섬김을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건강을 잘 관리하면서도 공부를 마치고 와서 신학강단에서 힘을 쏟고 가르치고 가르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면 하나님께 얼마나 더 영광이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복음 사역에 길에 들어서게 된 신학생들은 단지 육체가 성숙하고 건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직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거룩한 소명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들의 그 여러분들은 그 거룩한 일들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들이므로 육체를 순결하게 보존하며 성숙해 가야지 순결을 잃어버린 육체의 성숙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넘치는 헌신의 교리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역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이 부족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못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재물을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소명은 거룩한 일에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해 세워서 거룩하고 정결한자로 만들어서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부름 바 된 그런 소명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교 도상에 서있는 여러분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과 몸을 하나님만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리는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서울에서 이름을 들면 다 알 수 있는 아주 유명한 부흥강사가 목회하시는 교회에 제가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설교를 끝마치고 꽤 길어 졌습니다. 10시 45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 집으로 가려고 걸어 나오는데 학생 하나가 “목사님. 상담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은 새벽기도를 해야 되는데 이 오밤중에 어디서 또 상담을 하나?’ 그래서 뿌리치고 가면 니고데모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은 거절을 안 하셨는데...’ “그래. 가자.” 하고 차를 타고 우리 동네에 와서 앉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반학과가 다 섞여있는 그런 여러분 같은 평범한 신학대학에 군대 안 갔다 온 3학년 다니다가 학교를 잠시 쉬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뭐 어린아이였습니다. 얼굴이 앳되어 보이고 사람이 참 선해 보입니다. 착해 보입니다. 그런데 고백을 하는데 “목사님! 저 학교에서 잘렸습니다.” “왜 신학교 다니다 잘렸느냐?” 자기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바다를 보여 달라고 해서 밤에 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본 것 까지는 좋았는데 불행히 그날 하룻밤 동침을 하고 넘어서는 안 될 선을 건넜습니다. 여러분 있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학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교수라는 사람이 나와 가지고 이제는 장미여관으로 가자고 소리치는 시대에 뭐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시대가 그런 시대 아닙니까? 또 문학적으로 보면 꽃다운 시절에 한번 곁길로 들어갔던 것, 아름다운 인생의 한 페이지로 아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큰 살을 에는 것 같은 쓰라린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매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결혼하자고 졸랐더니 낙태를 했습니다.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또다시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 이 자매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얼마나 고통 받는 세월을 보냈는가를 이야기 하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데 손가락 사이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만한 나이 때 장미여관으로 가도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안 됩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유야 어떻든지 거기를 넘으면 그때는 끝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사람들이 아무리 장미여관으로 가자고 소리치고 그런 문학이 공공연하게 환영을 받고 그런 영화들이 눈만 뜨면 어디서도 볼 수 있어도 여전히 7계명은 무서운 계명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들을 와서 털어 놓을 때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후회는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유쾌하지 않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예화) 서른 살을 갓 넘은 자매 하나가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는데 한 남자를 유혹해서 넘어뜨렸습니다. 60세가 넘은 그 교회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가정을 모두 청산하고 그 여자 하나 바라보고 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렸습니다. 불과 일 년이 안 되어서 이 여자는 다른 남자를 찾아서 떠났습니다. 이제는 한 교회를 목양하며 영혼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던 그 목회자가 안주머니에 칼을 꽂고 연놈을 찾아 나서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만나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이 살인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리 관대해도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이혼하거나 이런 스캔들에 휘말렸던 사역자들에게서 한없는 무력감을 나는 보았습니다. 간단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래서 깊은 신앙의 사람 다윗도 말합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가 인간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었습니다.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아버지도 자기를 자식 취급 안했습니다. 형들도 자기를 동생 취급 안했습니다. 장인은 자기를 죽이겠다고 총 들고 쫒아 다녔습니다. 아내 미갈도 자기를 전혀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아비의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칼 들고 일어서는 놈들로 자라고 있었고, 형제들끼리 자매들끼리 간음하고 난리를 쳤습니다. 세상에 무슨 낙이 있었습니까? 한 여인을 보는 순간에 마음이 다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토록 마음 바쳐 사랑했던 그 한 여자와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정말 다윗이 불쌍한데 하나님을 찬송하던 그 입술은 붙어 버렸고 그가 늘 키던 화연은 아름다운 가락을 잃어 버렸습니다. 춤을 추며 즐거워하던 그의 몸은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변했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파괴되었고 그의 가정은 깨뜨려졌습니다. 그의 삶의 아름다운 지성소에는 거미줄이 끼고 골방에는 뱀과 쥐가 기어 다니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순간의 쾌락이 거룩한 삶과 기쁨과 희망과 아름다움을 모두 한 번에 날려 버렸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학생을 기억합니다. 착한 학생 이었는데 얼굴을 보면 그 사람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착하고 진실하지만 불행한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혼 깊은 데에 있게 되었습니다. 4년 가까운 세월동안 저는 여러 명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깊이 고통 하다가 결혼했으며, 결혼한 다음에도 회복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순결하게 보존하는 일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소명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 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누구도 그런 사람을 정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너무나 약한 사람들은 결국은 소명을 더럽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평생의 기도 제목으로 삼고 육체의 순결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순결의 실패가 교회 안에서 여러분들을 통해 일어난다면 거기에는 이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고통은 교회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일어나는 엄청난 고통과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영적인 손실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뿐 아니라 상대방의 영혼과 가정에 회복되기 힘든 신앙적인 손실을 안겨주게 됩니다. 영혼을 건지고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가 이렇듯 악한 자에게 발꿈치를 물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전신갑주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단 한발의 독화살을 맞고 격전지에서 들것에 실려 영안실로 옮겨지는 구년의 신세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화) 역사적인 사료에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길선주 목사가 놀랍게 은혜 받고 평양에서 신령한 목사가 되었다고 하니까 평양의 기생들이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길선주 저 놈이 남자가 아니야? 우리 한번 누가 호리나 내기 한번 할까?” 드디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길선주 목사가 성경 찬송 가방을 들고 기생들이 있는 그곳까지 가게 되었답니다. 아마 틀림없이 길 목사는 전도를 할 목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와서 왔다 갔다 할 때 까지는 좋았는데 잠시 후 시간이 흐르더니 사람들이 한사람 두 사람 없어지더니 가장 요염하게 생긴 기생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리고는 음식을 권하다가 길선주 목사님 팔을 붙들고 품에 안겨 왔습니다. 그때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여자를 집어 던지면서 비명을 지르며 가방도 버려두고 기생방을 뛰쳐나오면서 외치는 외마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길선주가 죽습니다.” 뭔가 한 시대에 한 획을 그었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뭔가 달라도 달랐습니다.
결혼 했다면 아내와의 결합을 굳게 하십시오. 결혼하지 않았고 당신에게 그런 육체의 정욕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험이 몰려오고 있다면 속히 결혼 하십시오. 정욕의 불을 끄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궁극적인 비결은 당신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으로 충만해서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는 삶을 통해 그런 시험을 향해서 내어줄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요한 칼빈은 7계명을 주해하는 가운데 실제적으로 이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가득차서 유혹을 향하여 내어 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해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순결하게 보존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든 성장은 스스로의 성공을 겨냥한 준비일 뿐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있어서 오늘 밤이 새도록 해도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원색적인 간증을 수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 여기에서 그치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금도 7계명은 무서운 계명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이가’는 ‘파이디언’입니다. 일차적인 뜻은 4-5살 이상의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명백하게 ‘베이비’라는 뜻으로 쓰여 졌습니다. 하나님은 짧은 시간동안 세례요한을 들어 사용하시기 위해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이러한 세속의 문화가 없는 정결한 광야에서 자기의 은혜의 생명을 싹에 감추시면서 준비 시키셨습니다. 그를 세속으로부터 구별 하셨습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목회 환경은 예수님 때가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이 결코 경건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집회에 오면 최고의 고통은 잠자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자면 좋겠는데 주최 측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가니 여관입니다. 괴롭습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훨씬 더 사악한 환경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준비 되어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구약의 제사장들을 생각합니다. 정결한 세마포 옷을 입고 그들이 제사를 수정 들었습니다. 제사 드리는 그 성소가 깨끗한 곳 이었겠습니까? 짐승들이 죽어가고 피가 튀고 연기가 솟고 죄인의 울부짖음이 있고 그리고 짐승들이 죽어가면서 쌓인 배설물들이 난장판으로 벌려져 있는 곳 이었습니다. 그 연기 나고 피 튀기고 똥이 있고 배설물들이 있고 울부짖는 죄인의 울음소리가 있는 그 곳에 정결한 세마포 옷을 입고 사이사이를 오가며 죄인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사모함으로 샬롬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그 제사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겉멋 들으면 안 됩니다. 마귀가 웃습니다. 마귀가 하늘에서 웃습니다. 삶이 할렐루야가 아니라 삶이 개차반인데 무슨 변성을 내고 공갈을 치면 사람은 속겠지만 연계해서 속겠습니까?
(찬송)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깨끗한 마음, 사실은 지금 제가 하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세상에서 어려운 일인가 저는 압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니 마치 이리 떼 가운데에 너희를 보내는 것 같구나” 말씀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준비도 안 되어있는 사람들이 덤벙되고 사역의 현장에 들어가서 사단이 발 한번 걸면 넘어져서 헉헉 대다가 인생 끝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에서는 20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불면증 환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24시간 TV방송을 하는데 그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가 뭐냐면 설교자들이 나와서 설교하는 프로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도자라 해서 ‘텔리빈져리스트’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짐 베커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조지스왓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불면증 환자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설교 축도가 끝나고 나서는 텔레비전을 끄기 전에 양복장으로 걸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서 선교 헌금을 긁어야지 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춘부하고 타락했습니다. 미국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그로부터 은혜를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 회복되기 어려운 좌절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 나라에는 복음사역자들의 뒤를 전문적으로 캐는 잡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교계를 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의 양심에 의존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볼 때 겸손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역자들이 되어 가지고 외국의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하는 것은 조국교회의 아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공생에서 설교하실 때 그 시대를 향하여 즐겨 쓰시던 그 이름이 있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 지금이 바로 그러한 세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주님의 마음으로 잘못 나가고 있는 이 세대, 이 마지막 패역한 시대를 거스르며 외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 학교에서 하나님의 쓰실 그 날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비난해야 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육체를 순결하게 보존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의 외침을 악마가 듣고 비웃을 것입니다. 삼손은 잠시 들를 나이에 무릎을 베고 있는 동안 한 없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잠시 동안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는 삼손이 가지고 있던 모든 콜링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한때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사마에 우리가 바쳐질 수 있었다면 우리를 순결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애써 온 노말들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지배하며 죽이기를 힘쓰고 이 모든 일에 성령을 의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십시오. 늘 은혜를 받고 사모하십시오. 저는 불행히도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총신의 학장으로 계실 때 그 분 가까이에서 모셨던 분들이 하는 말이 학교에서 자가용을 주었는데 자가용 뒤에 타기만 하면 집으로 가시는 동안에도 자가용 안에서 소리 내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학교를 살피시옵소서.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어찌하시렵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신병자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찬송 들고 새벽 4시에 모란봉에 올라가서 1시가 되어서 내려오는 경건한 삶을 유지했고, 다듬이 방에서 훈장 같은 사람들에게 신학 공부 했는데 한국의 신학을 통해서 신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선생들의 후예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제한된 시간에 저는 이 문제의 필요성을 더 많이 피를 토하듯 역설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말합니다. 육체를 건강하게 미래에 하나님이 쓰실 날에 정열적으로 자신의 삶을 불 사를 수 있도록 준비 하십시오. 그리고 순결하게 준비하십시오.
두 번째 준비는 지적인 준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위해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자라갔습니다. 키만 멀대 같이 크고 메뚜기와 서청만 배 두드리고 먹어서 배 튀어나오고 얼굴에 기름기 흐르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지성도 함께 자라 갔습니다. 오늘날에는 두 가지 생각이, 극단적인 생각이 교회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말씀을 아침에 잠깐 올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능력만 받으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그냥 권능 주시니까 똥밭 매던 사람도 나가서 외치고 말입니다. 소 몰던 사람도 가서 외치고 얼마나 무식한지를 스스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또 한편으로는 공부만 하면 된다. 그것은 마치 면도날 가지고 빗장을 부수겠다는 것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준비는 출중하게 함께 준비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17세기에 종교개혁 이후에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사람들 가운데 머리 텅 빈 무식쟁이 이름 있으면 한번 찾아보십시오. 누구입니까? 물론 그 시대에 라틴어가 일반적이었지만 자기의 설교를 라틴어로 다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일반 학문을 탄탄히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 가운데 목사 하면 최고의 지성입니다. 최고의 인격자, 가장 신령한 사람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공통적인 고백이었습니다. 복음을 들고 거리를 누볐던 조지 위필드는 옥스퍼드에서 공부 했습니다. 고래고래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사창가를 복음으로 누볐던 전도자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에서 공부 했습니다. 그들에게 위대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때 까지만 해도 목사 하면은 최고의 지성인입니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 까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한 성령운동 같은 것이 들어오면서 말하자면 무식해도 능력만 주면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은 오히려 지적인 사람은 오히려 능력이 없다 따라서 지식은 능력을 방해한다. 해괴망측한 논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뭐 밭 매던 사람도 들어오고, 중학교 중퇴자, 고등학교 다니다 잘린 사람, 이런 사람들이 들어와서 목회생활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물론 부인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밖에 못나오고 고등학교를 채 못나왔는데도 워낙 신실하고 하나님이 소명을 주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일생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신적인 강제력에 사로잡힌 소명자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한둘이지... 여러분 나 고등학교도 못 나 왔습니다. 그것이 뭐 자랑입니까? 나는 학위도 없습니다. 그러면 학위가 무슨 독약입니까? 하다못해 나는 유학도 못 갔다 왔습니다. 못 갔다 왔으면 바보지 나처럼 말입니다. 그런 무식한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럼 인격적으로는 고매합니까? 교회는 상식만 통해도 한국교회는 80%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풍조를 야합해서 덕 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개장사를 하려고 해도 오랏줄이 있어야지 도대체 뭘 가지고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 준비는 함께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총신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냈습니다만 총신의 뒷동산은 언제나 울부짖는 기도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80년대에 그 불이 꺼졌습니다. 다시 안 붙었습니다. 언젠가는 붙이러 가야 합니다. 외국의 신학자들이 와서 감탄을 했습니다. 정말 이상적인 신학교라고... 열심히 공부하고 뒷동산에 올라가면 언제든지 이 캄캄한 밤에 민족을 위해서 복음화를 위해서 부르짖는 종들의 목소리가 기도원처럼 그 숭실대 뒷산에 가득했습니다. 이제는 저렇게 개 짖는 소리밖에 안 들립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웃을 일이 없습니다. 뭐 웃을 일이 있습니까? 통곡하면서 이 어두운 시대에 한 복판을 지나가야 합니다.
지적인 준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성경 자체에 대한 지식입니다. 수업시간인데 대학원에서 수업하는 시간에 어느 선생님이 “여러분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하는 기록이 아마 없죠?” 어느 학생이 뒤에서 “무슨 말씀입니까? 출애굽기 몇 장 몇 절, 호세아 몇 장 몇 절” 깨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책을 열심히 읽다가 보니까 어떻게 목사라고 성경을 다 알겠습니까? 중세시대에는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뭐가 나오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성경 자체에 대한 깊은 지식을 소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알 같은 글자를 외우고 하는 그런 지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친숙해져서 마음에 그 내용들이 쌓여가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는 호롱불 밑에서 성경도 읽어보고 눈물도 흘려봤는데 신학교 들어오고 나니까 리포트 쓰느라고 성경은 부교재입니다. 성경을 펴면 성경이 말합니다. “오래간만에 햇볕보네.” 잘못됐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방대한 학문들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쓸데없는 책들을 읽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가까이 관련된 책부터 시작을 해서 점점 더 먼데로 컴퍼스를 그려 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상한 책 어디서 하나 집어 들어서 저 멀리 있는 책을 하나 집어 들고 씨름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과 가까이 할 수 있으면 더 멀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데모가 벌어 졌습니다. 데모하면 이슈가 있을 것 아닙니까? 재단은 각성하라든지 말입니다. 아니면 빨리 대학으로 승격시켜 달라든지... 아니면 뭐 교수님을 더 영입하라든지... 데모하는 내용인데 캐츠프레이즈가 뭐냐면 헬라어를 선택과목으로 하자고 데모하는 것입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신학교입니다. 내가 그래서 미쳤다 했습니다. ‘순 도둑놈들만 모였군.’ 성경을 털도 안 뽑고 먹으려는 놈들만 모였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윌리암 거널이라고 하는 청교도 설교자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모든 물이 깨끗하지만 원 샘에서 뜬 물이 가장 정결한 것처럼 원어의 샘에서 길어 오르는 메시지가 가장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현악적이길 싫어하던 사람들이 원어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그 스펄전도 모든 목사들에게 말했습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는 꼭 공부하십시오. 원전을 읽도록 여러분 자신을 채찍질 하십시오.” 저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학원을 졸업할 때쯤 되었는데 모교에서 선택과목을 하나 주면서 히브리어를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싫다고 했지만 하여튼 오라고 해서 가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정말 구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 원어을 마스터 하지 않으면 헛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고대의 많은 중동 언어들도 히브리어를 완벽하게 정복하면 하나하나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시간 바쳐서 원어 공부에 열렬히 매달렸습니다. 여러분 나는 신학교 다닐 때 제일 싫은 사람들이 흐느적거리면서 걷는 사람들입니다. 로비에 앉아서 새우깡 먹으면서 한 없이 잡담하는 사람들 이 제일 경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시간 나한테 주면 얼마나 좋을까? 떠나온 학교를 이야기해서 안 되었지만 학교 선생님들이 여기는 훌륭하신 분들이니 안 그럴 것입니다. 신학교 선생들이, 목사라는 분들이 휴게실에 앉아서 왜 2000원 내기 바둑을 두고 있습니까? 신학교 선생이... 내가 나이가 좀 많았으면 바둑판을 확 쓸어버리는 건데. 그 시간에 저는 공부 했습니다. 글 한줄 더 썼습니다. 그것은 범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 모두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 시한부 인생을 까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날들을 동전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동전 하루, 지폐 일주일짜리, 큰 지폐 한 달 짜리, 더 큰 수표 1년 치입니다. 하루에 동전 한 개씩 안 넣으면 살려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년 지나면 큰 수표 하나 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젊음이라고 하는 것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 있는 지불 만기 어음입니다.” 나는 10미터 이하는 뛰어 다녔습니다. 제 신발은 그래서 꺾어 신은 신발이 많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집으로 학교로. 그러면서도 교육전도사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히브리어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 대목 이야기 할 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제일 통쾌해 하십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공부를 해서 6개월, 1년, 이년 공부하고 나니까 히브리어 성경 삼분의 이를 읽었습니다. 눈을 감고 한글 성경을 보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히브리어 성경은 아마 이렇게 나와 있을 것이다. 신명기의 명문을 사전 하나 안 찾고 몇 장 씩 읽어 나갈 때는 내가 광야 옆에서 모세의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나는 그 성경 때문에 하나님과 확실히 가까워 졌습니다. 어떤 때는 남들이 놀 때 하루를 아꼈습니다. 12시간씩 공부에 매달리면서 공부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도 가난하게 살아서, 먹지 못해서 별이 확 돌았습니다.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운 사람들은 쉬운 길을 갈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것 하나 견디지 못하면서 복음 들고 나서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아골 골짝이 웃습니다. 그런 사람이 와서 뭘 합니까? 그리고는 히브리어 커닝하는 것은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라고 합니다. 헛소리도 참 가지가지입니다. 지금은 얼마나 도움을 받는지 모릅니다. 학교를 떠나 왔지만 구약 설교 하려고 본문 펼치면 가슴에 다가 옵니다. “아! 그때 쏟아 붇기를 잘했다.”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축으로 그것을 얻고 싶어서 몸부림치게 하는 힘이 나옵니다.
여러분 신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 들어와서 얼마나 책을 읽었습니까? 리포트 쓰려고 군데군데 침 바르고 넘기면서 짜깁기 한 것 말고 자기의 신학 지식의 습득을 위해서 커버에서 커버까지 마지막 읽고 사인한 책이 몇 권입니까? 이중에는 10권이 안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추측이 틀림없다면... 깡통들입니다. 내가 가르친 제자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와서 교수님 수업시간에 좋다고 하는 책을 다 읽었는데 2년 읽고 나니까 두 키나 됩니다. 1년에 한 키를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읽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 갈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겠다는 사람들이 교인들 보다 책을 안 읽어서야 되겠습니까? 아무튼 책을 안 읽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학교 다닐 때 공부하라고 하면 맨날 기도원가고 교회 봉사 한다고 하고 출석도 대리 출석 해 달라고 하고 그런 거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거짓증거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에 다 문제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공부도 안 하는 친구가 교인이 한 백 명 모이니까 목회는 안 하고 공부하러 다닌다고 합니다. 왜 공부할 때 공부하고 목회할 때 목회하지 그것을 뒤집어서 하려고 합니까?
스펄전은 고등학교 밖에 안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꾸준한 독서는 그로 하여금 고등학교 밖에 안 나온 사람으로서 당대의 최고의 신학자들과 논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청교도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그 신앙을 이백년 후에 목회 속에서 재건한 사람이었습니다. 17세에 설교하기 시작해서 코 밑에 솜털이 돋아나는 20살 애송이 나이 때 이미 일만 명이 모이는 교회당에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읽은 책 중에서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하면서 청교도 서적에 관해서 서평 해 놓은 책만 1,400권입니다. 세례요한이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광야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광야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까? 인터넷이나 하고 사이버스페이스나 굴리면서 오락이나 하면서 선데이 서울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장기나 두고 바둑이나 두고 볼링이나 굴리면서 세월 보냈을 것 같습니까? 기타나 치면서 노랫가락이나 흥얼대면서 베짱이 같이 30년을 보낸 것 같습니까? 잡기나 즐기면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구약 신앙의 기초가 되었던 오경을 읽으며 이스라엘의 선택과 율법을 익혔을 것이고 선지서을 통해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와 선배 선지자의 영성과 사역을 본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 관해서 예언한 이사야를 탐구하고 말라기를 묵상하면서 어떻게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완벽하게 사람들의 마음속, 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속에 예수 오실 길을 열 것인가 하면서 진리와 함께 시름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지력을 쌓아가고 지성을 연마해 가면서 하나님 앞에 커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정서를 배우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탐구했을 것입니다. 간간히 예루살렘에도 나갔을지 모릅니다. 안 나갔어도 들려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조국의 역사와 굽어진 종교계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탐구의 과정을 통해 더욱더 지적으로 연마된 사람으로 숙련되어 갔을 것입니다. 그의 사역은 단지 빈들에서 성령을 받고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례요한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소명을 전적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보면 30년 동안 광야에 묻혔다가 예루살렘에 뛰어 들어온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지식의 탐구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 많은 이 세상에 죄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죄인들이 하는 짓을 한번 다해 보고 타락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지런한 독서와 진지한 학문의 탐구는 성경과 이 민족의 갈 길과 역사와 조국의 아픔과 상처를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의 비탈길에서 어떤 사람으로 이 고통 받는 이 민족의 역사위에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는 자로 서야 할 것입니다.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공부를 안 하던 사람들이 그렇지만 하면서 말하는 사람이 꼭 한사람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 입니까? ‘디엘 무디.’ 알다시피 이 사람은 초등학교 중퇴입니다. 그런데 현격하게 복음사역을 위해 놀랍게 공로를 세웠습니다. 한번 설교하는데 어떤 사람이 세어 보니까 문법이 24번 틀렸다고 합니다. 말을 해도 어눌한 사람이었는데 선교학자들은 이 사람이 직접 전도한 사람이 백만 내지 백삼십만 정도 될 거라고 추산 합니다. 그러면서 공부 안 하는 학생들이 꼭 그 사람을 자기의 조상처럼 생각하면서 “무디도 하나님이 쓰셨는데...”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무디를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한 사람 속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당대의 사람들로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무디만이 하나님 앞에서 몇 백 년에 한사람 가질까 말까한 아주 귀한 것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디도 썼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용기를 갖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무디처럼 살고 있습니까? 무디처럼 영혼을 사랑합니까? 무디처럼 민족의 복음화를 향해서 타는 가슴이 있습니까? 무디는 정식 교육은 못 받았을지 모르지만 커닝하거나 남의 리포트 베껴내면서 신학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본받지 않고, 내가 그래서 그랬습니다. “너하고 무디하고 닮은 것은 공부 못하는 것 밖에는 닮은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은 무디가 아니라 문둥이다.” 오히려 지식으로 구비된 사람들, 영적인 커다란 감화를 하나님 앞에 받았던 사람들 그리고 정결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탁월하고 거룩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기독교의 역사를 움직였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스승 가운데 영국의 설교자 존 오웬을 기억합니다. 그분의 저작이 1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집입니다. 그 앞에 책을 펼 때마다 나는 왜 이리 작아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왜소한 난장이가 된 느낌입니다. 그 사람은 하늘의 일을 말해주고 나는 땅의 일을 말해줘도 모르는 무식한 목회자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일평생 배워도 배울 수 없는 그 분의 전집을 대하면서 이 사람 앞에 비하면 나는 짐승처럼 무식한 놈이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장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주석해도 ‘practical commentary’가 아니면 쓰지 않았습니다. 학자끼리 주고받는 주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석을 읽고,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거룩한 열심을, 경건을 촉발시키는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으니까 왕이 그분을 선생으로 모시지 않았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드는 천재에 가까운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세 살부터 할아버지한테 훈련을 받으면서 사과하는 것을 글로 옮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6살 때에 논문을 썼는데 곤충에 관하여, 8살 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유물론에 관한 소고”, 13살 때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모두 섭렵하고 교부들의 서적과 아틱 헬라어로 되어있는 그리스의 모든 문집들을 줄줄 읽어 내면서 13살의 어린 나이에 예일대학에 입학 했습니다. 4년을 그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시 2년 뒤에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약관 19살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영적으로 변화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미국의 땅에 칼빈주의의 초석을 놓는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요 철학자요 교육가요 사상가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8세기 말 이후 19세기 20세기 초반까지 오도록 미국이 비록 소수의 칼빈주의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와 경제와 이 학계를 움직이는 핵심세력이 될 수 있었던 기초를 놓았던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탁월하게 학문적으로 준비되고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꽹과리 치면서 불 때러 지나다니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바꾼 것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리던 부흥은 못 만났지만 탁월한 복음의 이해에 모든 교회의 강단이 비치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칼빈에 관한 임마누엘 스티켈베르거의 책을 읽으면서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칼빈이 파리에서 두 개의 대학을 졸업하는데 22살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마 이 젊은이가 유럽에서는 가장 박식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탁월한 천재적인 암기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 전날 배운 방대한 책들을 암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한 메모 쪽지 한 장으로 장시간의 설교와 강연, 성경공부, 신학연구 모임을 인도했습니다. 그는 성경자체에 대해서 놀라운 지식과 다른 저작에 관한 뛰어난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것을 쭉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제네바에 들어가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파렐과 함께 손잡고 종교개혁을 하게 되는데 그때 스스로 그는 자기를 들어내기를 싫어하면서 겸손하게 파렐의 그늘 밑에서 조수처럼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제네바에 모여서 가톨릭 교파에 속한 사람들과 개혁파 측에 속한 사람들이 토론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때 유력한 가톨릭의 옹호자 한 사람이 나와서 침을 튀면서 명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개혁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수천 년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경건한 글을 남겼던 영광된 모든 교부의 그 훌륭한 글과 문집들과 영광된 문서들을 모두 부인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도 위배되는 해괴한 이단들을 만들어 내어 전파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하면서 증거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명연설을 듣고 나서 좌중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습니다. 그때 바짝 마른 몸에 얼굴이 핼쑥한 젊은이가 한 쪽 구석에서 비시시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이 누군가 수군거렸습니다. “온지 얼마 안 되는 칼빈이라는 젊은 친구인데 공부를 많이 했다나봐.” 칼빈이 지그시 눈을 감고 그 장시간 동안 쏟아 놓은 연설을 완벽하게 기억하면서, 재생하면서 조목조목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고 영광된 교부의 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해괴한 이단을 퍼뜨린다고 당신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당신의 논지를 반박하겠습니다.” 포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당신은 이점에 대해서 뭐라고, 뭐라고 말했는데 그 점은 아우구스티누스 문집 제 몇 권 무엇의 몇 번째 아티클 몇 번째 줄에서 몇 번째 사이에 있는 내용인데 그 내용에서는 분명히 그 거룩한 교부가 말하기를 이렇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다고 말했지만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교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 문집이 세 번째 책 여섯 번째 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부터 그 다음 페이지 중간 부분까지 이어지는데 그 아티클이 세 번째 인지 네 번째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쪽수는 아마 맞을 것입니다”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물 흐르듯이 쏟아 부어져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으로 나는 그리스도인과 학자로서 양심적으로 당신을 판단하건데 당신이 고함을 치면서 이야기 하지만 교부, 교부 하면서 성스러운 교부를 들먹이지만 내 학자적인 양심으로 볼 때에 당신은 교부들의 전집의 내용은커녕 껍데기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과 회중 앞에 정직히 고백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나의 반론을 마칩니다.” 이번에는 회중에 물을 뿌려놓은 것이 아니라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모두 절었습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아! 이 무식한 목사여 어찌하려는가?” 그때 장땅리라는 한 수도자가 일어섰는데 이 사람은 아주 대중적인 설교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여튼 대중을 선동하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데 아주 일급의 재주를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설교자이었습니다. 모든 거기 모인 사람이 그 사람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일어섰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가톨릭의 반격이 시작되는 구나. 뚜벅뚜벅 걸어 나오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수도사로서 이해하기에는 성경의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그 사하심을 받을 수 없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진리를 거슬러서 살아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이 시간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가톨릭에 몸담고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지만 오늘 칼빈 선생의 이 변론을 보면서 나야말로 캄캄한 어둠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며 진리를 오도하고 있었던 괴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카톨릭의 골수가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그럼으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제까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살아 왔던 모든 수도사의 삶을 포기 합니다. 나는 이 옷을 벗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서 진리를 다시 배울 것입니다.” 그것을 기록한 사람이 그렇게 명시적으로 고백한 사람은 장땅리 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수많은 수도자들이 거기에서 회심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자기는 확신 합니다. 칼빈이 “아니 맞다니 까.”, “왜 이리 우겨 글쎄”, “성경에 다 나왔다고”, “내가 봤는데 뭘 그래”라고 했다면 역사가 바뀌었겠습니까? 사단의 손으로 넘어 갔을 것입니다. 이런 목사가 되고 싶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무릎이 까져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팔꿈치가 까져야 합니다. 책상 앞에서 씨름해야 합니다. 깡통처럼 가방 들고 전도사 소리나 듣기 좋아하고 덜렁덜렁 돌아다니면 망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게 공부 했는지 모릅니다.
마르틴 루터도 시간이 없어서 다 말 못하지만 동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여튼 그 사람이 쓴 저작 전집이 제게도 있습니다만 평범한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부지런히 베껴도 25년을 베껴야 합니다. 그분이 정확하게 몇 년에 죽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56살인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정도 아니면 그것보다 약간 긴 인생을 살면서 기도하고 밥 먹고 교회 돌보고 투쟁하고 다 하면서 토해 놓았는데 그렇게 토해 놓지 않았습니까? 비결이 뭡니까? 바쁠 때 세 시간 더 했고 안 바쁠 때는 두 시간 더하고…….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를 하고 명상을 함으로서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교수님의 표현대로 그것은 신학적인 가능입니다.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와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죽고 또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통해서 한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지 죽든지 살든지 합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4학년들은 오늘 통회 자복하고 시간표 갖다 놓고 10분이라도 헛되게 쓰는 것 있으면 회개해서 그리고 한권의 책이라도 붙들고 매달려야 합니다. 3학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나온 2년 반의 세월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결심해야 합니다. 2학년, 1학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학문과 그리고 성경을 위해서 졸업하기 전에 내기만큼 읽고 이 학교를 나가겠다, 내 비록 부산에 있는 신학교를 나왔지만 서울의 명문대를 나오고 신학대학원에 들어 온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지성으로 내 인격의 토대위에 정말 복음을 소화해서 이 어두운 시대를 예리한 선지자의 통찰로 꿰뚫어서 어두운 시대에 길이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이리라 결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서 준비는 다 됐는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준비가 아직까지 세 가지나 남았습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3. 인격적 준비 : 인격과 생활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上)
육체적인 준비에서 성숙과 순결의 문제를 다루었고 성경과 학문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면에서 자라가야 하냐면 인격적인 준비에 있어서 자라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품과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 세 번째로는 정서에 있어서 자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사랑과 열정의 성숙의 문제를 이야기함으로서 일단 ‘자라며’에 대한 실체적인 주해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준비 중에 하나인 영적인 준비에 대해서는 목요일 저녁에 수성동 성결교회에서 연속해서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이 ‘자라며’라고 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육체적인 성장 그리고 지적인 성장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는 세 번째로 인격적으로 우리들이 자라가야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의 쓰임에 부합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 사역은 자연과의 싸움이나 악령들과의 전쟁만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과만 싸우는 골방의 투쟁도 아닙니다. 우리의 복음사역은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준비가 요구되는 것도 바로 복음사역의 이와 같은 특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 말씀 하시기를 “목회는 사람가지고 하는 장사야” 늘 그렇게 권면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싫으나 좋으나 복음사역에 있어서 지도자의 위치에 서기를 원하고 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설마 이 신학교에 들어와서 이렇게 어렵게 주경야독하면서 공부한 뒤에 교회 가서 여러분 사찰이나 하려고 이것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찰이 하찮은 직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관에 모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이 어려운 신학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런 고달픈 훈련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서 일 할 수 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지도자의 위치에 서야 하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 앞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고 어떻게 믿어야 할지 길을 가르쳐 달라고 묻는 관계에 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다듬어 지지 못한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게 되면 지도자의 결점을 와서 용감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의 모습을 정직하게 비춰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평안하게 살아갈 사람을 목회자의 인격의 하자로 말미암아 불행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지옥으로 지나가는 것 같은 고통 가운데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들을 따르고 신뢰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가 좋아서만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슨 팬클럽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가 좋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교회에 있어라 해서 있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를 완전히 신뢰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내 주셨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그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의 인격적인 하자와 문제를 누가 가서 감히 “목사님 당신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렇게 이야기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말하면 받아들일 목회자는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목회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 지도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인배형 지도자가 있고 군자형 지도자가 있습니다. 소인배형 지도자는 언제나 자기 주위에 아부꾼들을 포진시켜 놓습니다. 언제든지 자기가 인격적으로 그 사람들을 묶어서 늘 좋은 소리만 하고 아첨하며 쫒아 다니는 사람들을 포진 합니다. 저는 얼마 안 되는 세월동안 신학교에 봉사하고 교회를 봉사하면서 그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보려면 지도자를 만나지 않아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소인배형 지도자인지 군자형 지도자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전도사로 부름을 받아서 주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열심히 교인을 섬기고 성경 안에서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섬기면 되는 것이지 추종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교에 와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밥 벌어 먹으려고 신학교 선생으로 들어 온 것이 아닌데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기도하고 집필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무엇이 옳은 길인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러면 되는 것이지 꼭 조직의 생리는 그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서 각양모양으로 우리에게 주셨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당회장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교육 전도사로 불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찰로 불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버스기사로 불렀습니다. 학교에서도 어떤 분은 재단이사장으로 부르고 교수로 불렀습니다. 그것이 아래 위 입니까? 주님이 각 사람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그 자리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사랑함으로 함께 섬기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꼭 당회장이니까 전도사를 발밑에 넣고 인격적으로 밟아야 되고 하면 되겠습니까? 다 소인배형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저는 군자형 지도자들도 꽤 여러 명 알고 있습니다. 통이 큽니다. 자기에게 매이는 사람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이면 껌뻑 죽는 사람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바른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길을 걸어가려고 하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개성도 틀리고 성향도 틀리고 출신도 틀린 사람들을 그 다양성을 다 포용하면서 함께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는 재미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인격입니다. 이런 군자형 지도자들이 되어야지만 하나님의 조국의 교회가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졸렬하고 통 작고 쩨쩨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기껏 하는 일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교회는 큰 교회도 별로 없습니다. 조그만 교회에서 몇 명 되지도 않고 다 풀죽은 교인들 목회자랍시고 그것 타고 다니면서 교인들이나 타고 앉아서 어른 대접을 젊어서부터 받으려고 하고 말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되겠습니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변하지 않는 지도자의 이 못된 인격 밑에서 고생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결집된 힘으로 섬겨야 할 교인들이 목회자와의 인격적인 부딪힘 속에서 고생하며 공동체의 힘을 소진해 버린다면 그 지도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그 교회의 힘, 조직의 힘, 공동체의 모든 힘과 열정을 낭비하는 죄를 하나님 앞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전 참 깨어지기 잘하는 유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보시겠지만 20여 년 전의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 한 18년 전입니다. 뭔가 이렇게 순수하고 깨끗해 보려는 그 자질은 있었던 것 같은데, 제 생각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아주 약합니다. 유리그릇처럼 저는 누구하고 다투는 적도 없지만 다투면 밤에 잠을 못자는 성격이었습니다. 괴로워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되겠는가 봅니다. 저를 좋은 직장 다니던 것을 다 집어 치우게 하시고 그리고는 교회에 전도사라고 갔는데 무슨 전도사 입니까? 사찰같이 봉사를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8년 동안을 한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나는 사실 돌아 가셨지만 그 목사님을 비난하거나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얼마나 목사님이 까다로운 신지 눈물 엄청나게 많이 흘렸습니다. 나중에는 심장병이 생겼습니다. 말하자면 인격적으로 모난 담임목사님하고 같이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를 섬긴 다기 보다는 그 밑에서 섬기면서 아주 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화 벨 소리가 따르릉 울리면 가슴이 막 오그라드는 병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화에 대고 폭언을 퍼 부으시는 것 때문입니다. “야 인마 그 전화가 네 전화냐? 왜 이렇게 전화를 쓰는 거냐?” 사실 저는 살아오면서 아버님한테도 큰 소리를 안 들었습니다. 어머님한테는 물론이고. 그런데 직장에 다닐 때도 상사한테 그렇게 안 당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교회처럼 사랑이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작은 가슴에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다음에 담임목사가 되면 내가 사찰한테는 진짜 잘 해줘야 되겠다. 그리고 전도사들한테 잘 해줘야 되겠다.’ 그 마음 가지고 하는데 글쎄, 우리 전도사님들이 그렇게 생각 하겠습니까만 하여튼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달래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겨울이면 그 추운 겨울에 수돗물이 날이 추우면 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것 얼렸다고 혼내는 것입니다. 가스 불 안 잠근 거 하다못해 교인들이 야밤에 와서 똥 싼 거까지... 그래서 교회를 떠나려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너는 더 있어라. 다른 교회에서 사례금도 많이 주고 공부도 할 수 있게끔 배려도 해 주겠다고 오라고 하는데 기도만 하면 ‘너는 가면 안 된다.’ 그때는 그것이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합니다. 8년 동안 불같은 연단을 받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 무슨 자신이 생기냐면 이제 내가 목회하는 동안에 어떤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와도 내가 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자신은 없지만 그러나 싸움 안 할 자신은 생겼습니다. 우리가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 부를 수 있는 심정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들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 안에 형식적인 신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통해서 선포되는 참된 복음을 거절하고 정직히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한 줌의 누룩이 되기보다는 서 말의 밀가루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안락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타나서 그렇게 안일한 삶을 살면 안 된다 예수의 제자의 길은 그런 길이 아니다 우리는 빛으로 살아야 된다. 소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외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저 말이 거짓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구실을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을 보면 우리가 말실수 할 때가 있습니까? 번지르르하게... 그들에게 가장 좋은 빌미는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인격에서 흠을 잡아내서 “봐! 인격이 이렇게 개떡 같은 친구한테 쏟아져 나오는 말이 그것이 신빙성이 있겠어?” 이렇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며 “맞아 맞아 그 입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어?”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설교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버림받는 소금이 되기보다 환영을 받는 꿀이 오히려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의 다듬어 지지 못한 인격은 우리의 말을 허풍이나 떠버리는 사람의 말로 만들어 버리기 아주 좋은 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면으로 말을 꾸려 가는데 있어서 그 형식적인 신자들과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전공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우리 목사님 참 좋은 목사님이다. 와서 설교 좀 들어 보십시오.”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야! 오늘 아침에도 신문에 또 나왔더라. 강간 미수로 걸렸다며...” 이런 일들이 교회에는 말 할 수 없이 커다란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학벌도 무시하고 인격도 무시하고 능력 받았다 하면서 무대포로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안수를 받고 목사랍시고 간판을 올리는 이와 같은 선교적인 상황에서는 정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라도 이런 세태를 거슬러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저희 집에 복음이 처음 들어 온 것은 지금부터 한 50년 전입니다. 저희 집에 있던 고모들이 제일 먼저 구락부에 다니면서 야학을 하다가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왜 그런지 우리 집안이 오래도록 복음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20살이 넘어서 회심을 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집안 식구들이 믿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집안 식구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 고모님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신방을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 식구 중에 몇 식구는 아직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인데 그 분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전도에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목사님이 식사를 다 끝낸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면 점잖게 목회자의 풍모를 지키면서 복음을 전하면 되는데 나는 거기서 한 모습을 보면서 그때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지만 한 모습을 보면서 교회에 나갈 마음이 싹 떨어졌습니다. 젓가락으로 이빨을 쑤시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닫혀 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제직회를 하는데 전도사 한 사람이 느닷없이 뛰어 드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집사님들 다 있는데 “너희들 다 죽일 거야 내가”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소리소리 지르면서 “당신들 다 내가 명예훼손으로 고소 할 거야” 그런 사람 앞날에 선한 열매 없습니다. 뭐 화나는 일이 있었다면 왜 이렇게 내가 어려운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해결을 해서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순서를 밟으면서 이성적으로 해결해야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제직회에 전도사가 뛰어 들어와서 “너희들 내가 다 잡아 낼 거야”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또 그것만이 아닙니다. 또 어느 사역자들은 가는 곳 마다 문제가 별로 없지는 않지만 그 자체가 문제지만 부인들이 꼭 돈을 꾸고 띠어먹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 잘 다스려야 합니다. 못 다스리려면 아예 발을 들여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역자의 문제고 사역자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전문적으로 복부인처럼 그 사모님이 돈을 띠어먹고 도망가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필요해서 돈을 빌렸는데 교회마다 빌리게 되었고 상황이 꼬여서 못 갚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지도자들은 폭언을 퍼붓기를 좋아 합니다. 그러면서 꼭 하는 말이 ”내가 이래도 뒤끝은 없어“ 뒤끝이 없습니다. 당한 사람은 뒤끝이 있는데, 자기는 뒤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퍼 붓고 돌아가면 잊어버리니. 당한 사람은 오년이고 십년이고 지나도 박혀 있습니다. 롱펠로우가 뭐라고 했습니까? “옛날에, 옛날에 나는 뜰을 하나 쏘았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화살이 나무에 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네. 나는 오래전 아주 오래전에 하늘을 향해 노래를 한 곡조 흘려보냈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노래가 내 친구의 가슴속에 메아리 치고 있었네.” 자기는 잊어 버렸을 것입니다. 돌아 가셨는데도 내 가슴에는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물론 그분 다 용서 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도 찾아 가서 인사하고 돌아 가실 때도 장례에 참여 했습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누가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의 양이고 교회의 일꾼들이지 자기의 속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 그들의 진지한 선포를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족한 구실들을 만들어 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나면 누가 우리를 가르치겠습니까? 여러분 누가 우리를 가르치겠습니까? 신학교 가보니까 학생은 많은데 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소수입니다. 자기는 돌아다니면서 김교수님 제자라고 하는데 나는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자기하고 인격적인 연대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목사가 되고 나면 가르치겠습니까? 신학교 다닐 때는 고분고분 하다가 안수를 받고 길거리에서 만나면 한참 이야기해서 나는 “아이고! 목사님 그러십니까? 저러십니까?” 집회 같은 데에 가서 돌아 올 때가 되었는데 사실은 “저 목사님한테 배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나는 그 사람이 내가 가르친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교회의 무슨 당회장이나 부교역자쯤 되는 줄 알고 깍듯이 인사를 계속하니까 “아! 그렇습니까?” 맞먹는 것입니다. 너도 목사 나도 목사인데... 그러다 막판에 옆에 있는 사람이 “김목사! 혹시 이 김교수님 한테 배우지 않았어?” “배웠죠. 목사님 제가 배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너무너무 교만 합니다. 길거리에서 스승을 만나면 “저 박아무개 목사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됩니까? 목사면 자기네 교회에서나 목사지 스승을 만났는데 “몇 년도에 졸업한 아무개입니다. 지금 어느 교회에서 목사로 있습니다.”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버릇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고 지도자로서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어떤 정신으로 목회할 것인지가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서 교인들이 떠받들고 상좌에 앉으십시오, 이 음식 드십시오. 이렇게 삼년 사년 굴려 먹다가 오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선생님 만나면 “저 김 아무개 목사입니다.” 그러는 것 아닙니다. “김 아무개입니다. 몇 학번입니다.” 목사가 되고 나면 가르칠 사람이 없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을 스스로 성경을 통해 가르쳐야 하는데 고도의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수련 끝에 얻어지는 영적인 삶입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보고 깨닫고 뉘우치고 새사람 되는 일 이것은 고도의 영적인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얼마든지 겸손해 질 이유가 많은 신학생 시절에 서 있지 않습니까? 우선 경제적으로 여러분들은 겸손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삼십 만원, 사십 만원 심지어는 전도사라고 이름만 걸어 놓고 무보수로 봉사하는 상황이니까 경제적으로도 겸손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교회 정치적인 입지에서도 볼 때 목사님이 “12월부로 그만 둬!”하면 떠나야 합니다. 겸손 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선배 목사님들 흉을 보지만 초보운전 아닙니까? 언제 해 봤습니까? 또 배움의 도상에 서 있지 않습니까? 모든 면에서 볼 때 초보운전입니다. 모든 방면에서 아직 완전히 준비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듯 훈련 받을 기회가 많을 때를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 이리저리 피해 사례금을 바라면서 교회를 옮겨 다니고 그리고 어느 교회에 가면 좀 편하게 지낼까 이렇게 찾아다닌다면 그 사람의 인격이 변하겠습니까? 신학교에서 몸담고 있을 때 커닝을 해서 잘못한 학생들을 아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골목에서 테러를 하려고 했답니다.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학교 왔다 갔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신학교에서... 나는 끝까지 싸인 안 했습니다. 탈법으로 졸업을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 후손의 신앙을 맡길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습니다.
신학교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매일 데모하는 놈입니다. 그것은 기도 해줘도 안 변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딴 판입니까? 4월, 5월만 되면 신나는 학생은 그 학생입니다. 춘투가 시작되니까 그래도 어떻게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만났는데 이 사람이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박수 소리가 몇 번 들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 했더니 데모하다가 대학원까지 데모 하다가 그 다음에는 졸업 하니까 할 때가 없으니 어디 가서 합니까? 동회 가서 합니까? 구청에 가서 합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오라는 데도 없고 해서 개척교회를 했는데 이것 가지고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피 토하면서 설교해도 교인들이 고개도 안 돌립니다.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 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인격이 다듬어 져서 아주 확실하게 예수 믿는 사람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하는 말이 “목사님! 교인들은 이론과 투쟁가지고 안 변합니다.” 신앙과 인격과 말씀의 감화... 그나마도 막차타고 변했으니까 그 학생은 할렐루야입니다. 이렇게라도 변하시기 바랍니다. 참 가치 있게 어려운 사람들하고 지내면서 내 인생을 하나님이 많이 다듬으시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목회하다가 보면 왜 아픈 일이 없겠습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뭐 있어?’ 돌아다니면서 말하자면 험한 말 하고 다니는 사람들 교회에 있습니다. 화나고 끓어오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오죽 불쌍한 인생들인가 그러고 나면 주님의 마음이 밀려오고 그렇게 해서 외롭고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끼리 사슴처럼 서로 기대며 양들처럼 서로 볼을 비비며 그렇게 한 평생 살다가 위로하고 돌보고 하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아닙니까?
그런데 지도자의 성격이 칼날 같아서 여기 가서 부딪히고 저기 가서 부딪히고 어느 목사님은 회계집사가 까분다고 펀치를 날렸는데 한방에 이빨이 다섯 개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태권도 단수가 영욕의 단수는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인격적인 부딪힘이 많고 수많은 상처 받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목회하기 때문에 특별히 목회자가 인격적으로 투명하면서도 깨어지지 않는 단단한 그릇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흐물흐물 물러서서도 안 됩니다. 결단을 내릴 때는 용기 있게 칼을 뽑아서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인격적인 부딪힘이 많고 상처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 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막걸리만 한잔 먹어도 다 푸는데 교회에서는 쩨쩨하게 못 푼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 마음에 데미지를 많이 입은 사람들은 무섭습니다. 가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 들여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한때 가질 정도로 세상에서 유리하고 고생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밖에는 나를 받아 줄 사람이 없다고 세상에서 그렇게 많이 상처받고 고통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격적인 부딪힘에 매우 약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용납해 주기 보다는 용납 받고 싶어 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이해받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목회자가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거룩한 기쁨을 주고 신령한 고민을 불러일으키고 영생과 구원에 이르는 근심을 하게 하는 대신에 목사님의 개인적인 인격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이 교회를 언제까지 다녀야 하나 날짜를 세면서 교회에 나오게 한다면 그가 목자요 삯꾼만도 못한 것입니다. 짐승 아닙니까? 물론 이 세상에서 누구도 완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그러한 목회자는 없습니다.
(예화) 작년 여름에 저희 교회에서 수련회를 하는데 특별간증 시간이 한 시간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님 친딸 손동희 권사님을 미국서 오신지 몇 시간 안 되는데 모셨습니다. 그래서 간증을 하는데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손양원 목사님 알죠? 사랑의 원자폭탄. 정말 자기 아들 둘을 죽였는데 그 아들을 재판장에서 살려 달라고 해서 진짜로 자기 양아들 삼은 사람 아닙니까? 그분은 우리가 볼 때 성자입니다. 그런 인생을 사신 그분의 딸의 이야기입니다. 딸보고 그러더랍니다. “애야! 동희야! 나는 지금 부흥의 약속이 있어 간다. 너 지금 빨리 주재소로 가서 걔네들 처벌하지 말고 우리 아빠가 말씀하시는데 양아들 삼으려고 하니까 용서 해 달라고 가서 이야기해라.” 이 딸이 그렇게 사랑하는 오빠가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아빠.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유별나게 믿느냐”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면서 통곡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렸습니다. 아버지가 “애야 십계명을 다 지켜도 주님이 말씀하시기에 이보다 큰 계명은 없느니라 말씀하시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다른 것 작은 것 다 지키고 큰 계명 못 지키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투옥되고 이러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너는 가라.” 성자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그 목사님 욕하며 다니는 교인들이 그 교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 못됐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괜히 모함을 받는지 인격적인 결함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아서 말씀이 전파될 길을 막고 있는지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목회자가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마음을 열고 무엇이든지 말씀 하옵소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마음에 거슬려도 아마 목사님의 본뜻은 저것이 아닐 거야 이렇게 해석할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고 걸리면 좋게 이야기를 해서 이해가 되어도 아마 저 뒤에는 무슨 술수가 있을 거야 아마 저 말을 하는 것은 지금 누구를 치려고 하는 소리일거야 그리고 무슨 꽁수가 뒤에 도사리고 있을 거야. 우리는 목회사역과 복음전파 사역의 영적인 특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인격이 교회의 영적인 변화를 저절로 가져오거나 전도사역의 성공을 보장해 준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격과 동떨어진 말씀 사역이 얼마 가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인격이 다듬어져서 예수의 향기를 풍기는 인격이 되겠습니까? 기억해야 될 것은 세련되어져 간다는 말과 노력한 인격으로 변화되어져 간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격적인 준비는 기독교적인 예절을 함양하거나 교회 안에서 능숙한 처세술을 익히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격적인 준비라고 말할 때 한사람의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그래서 그 말씀의 물에 깊이 잠겨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인간성이 질적으로 변화되고 인격적으로 고매한 신앙의 사람이 되는 자기 성장의 과정, 목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닮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다음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기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 닮은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았는데 먹는 것 입는 것 얼굴모양 다 여러분 하나도 안 닮았어요. 혈액형도 틀려요. 그러면 여러분 자식입니까? 어디서 주워 온 것이지. 닮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뒤져도 없습니다. 발가락이 하나 닮았다면 그것이 발가락이 닮았다 아닙니까?
(찬송) 널보는 이 마다 주 생각하리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인격적으로 정말 고매한 선생님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 분 계셨습니다.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데 그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고 다듬어진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을 많이 받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감화를 받고 다듬어 지는 그러한 경건한 삶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의 향기가 안 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배웠다는 것 때문에 그분이 오히려 안 배웠으면 훨씬 겸손했을 텐데 능력이 많은 사람은 능력이 없었으면 오히려 주님을 상당히 닮았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들어와서 입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와 하나님의 말씀이 관계가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깊이 변화 받을 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바라보고 사느냐 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성공한 목회자 누구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몇 십만 모은 목회자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너새니얼 호손 (Nathanier Hawthorne의 『큰바위의 얼굴』이라는 소설 읽기 싫어도 국어책에 나와서 다 읽어 봤습니다. 한 소년이 큰 바위의 얼굴을 보면서 정말 저런 사람이 나온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누구 입니까? 그 시골에서 촌부로 살아가는 그 노인, 그 노인이 바로 그 큰 바위의 얼굴입니다. 뭘 소유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What to be? 무엇이 되어 갈 것이냐?’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혁역한 복음전파의 공로를 세운 다음에 우리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발견되어서 우리 인생에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헤롯과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정적의 관계였습니다. 헤롯에게 당신 그따위로 결혼생활하면 안 된다. 여자관계 청산하라 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놈이 한 놈 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비난하는데도 헤롯은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자로 알았더라. 신앙의 인격은 추종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신앙의 인격이 아닙니다. 대적 자들에게도 머리를 숙이게 하는 그런 신앙의 인격이 그것이 참 하나님 앞에서 빚어진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악에 굴하지 아니 하고 불의에 타협치 않는 그의 거룩한 강인함이 하루아침에 생겼습니까? 하루아침에 광야에서 유대광야로 외치기 위해서 나올 때에 어느 날 아침에 하늘에서 후우하고 거룩한 인격 부어져라 하고 생겨났습니까? 그것은 만화영화에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여러분 언제 여러분의 인격이 고매해 질 것 같습니까? 졸업장 받고 학장님이 악수해 주는 그 순간, 검은 가운 뒤집어쓰는 순간, 당회장에 취임하는 순간, 마지막 죽는 순간, 그 모습 그대로 죽는 것입니다. 평생 그 사람 살아온 모토가 무엇입니까? ‘냅둬. 이대로 살다 죽을 겨. 이 모습 이대로 살 겨.’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람도 우리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헤롯이 세례요한을 볼 때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은 녀석이었고 그리고 만나기도 싫은 사람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괴로워 번민하면서도 세례요한의 말을 달게 들음이어라.” 그렇게 신앙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 말하자면 그의 인격이 감화를 주니까 자신은 고치지는 못하지만 하여튼 괴로워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하고 고매한 인격을 가지면 교인들을 야단을 쳐도 그 영적인 권세 앞에 승복합니다. “이게 뭡니까? 돈이 있다고 그렇게 사치스럽게 살아도 돼. 김집사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런데 목사님이 얼마나 검소하게 사는지 그 문제에 있어서 칼날같이 깨끗하다는 것을 아니까 무릎이 숙여 지는 것입니다. 자기는 돌아다니면서 할 것 다 하면서 “그렇게 살며 돼!” 속으로 “너나 잘해라” 나 정말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신학교 다닐 때 학생이어도 봤고 선생이어도 봤으니까 중립적인 위치에서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나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고 회개하는데 어느 분이 올라가서 설교를 하면 “아멘”, 누가 올라가서 설교를 하면 “쳇! 자기는”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그런 마음이 듭니다. 예배 시간에 자기와 싸우는 것입니다. 아 그래도 이러면 되나 그러다 보면 축도 시간이 됩니다.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면 평소의 삶, 평소의 인격 그만큼 인격적인 준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 가신 것은 변화되고 싶어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올라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위에 올라가시니까 기도하러 올라 가셨는데 그 속에서 예수님은 놀랍게 변화 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러한 준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얼마동안에 적어도 3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광야에서 세례요한은 자기를 죽이며 싸웠습니다. 분노하기 잘 하는 마음, 사치스러워 하고 싶은 마음, 사람 위에 높아지고 싶어 하는 마음 이것을 죽이면서 광야에서 싸우고 또 싸우고 싸웠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인격적인 연단에서부터 이러한 인격적인 사람으로 빚어졌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목자잃은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성품도 오랜 세월동안 배웠습니다. 보십시오. 그를 비롯한 모든 신앙의 인물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 거룩한 인격으로 다듬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작가는 말하기를 “목회자에게는 경건 이상의 거룩함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매일 추구하는 바가 ‘Holiness’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십시오. 그의 인격은 비난을 받을 때 나타났습니다. 그의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하더라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습니까? 동족들을 때리는 애굽의 병사를 단숨에 가서 쳐서 죽여 버릴 정도로 과격했습니다. 40년의 위대한 생활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그 까다롭고 말 많고 불순종하기 잘하는 그 말썽쟁이들을 인도해 가면서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다듬어져 갔습니다. 지면에 온유함이 넘치도록 승하한 사람으로 바뀌어져 갔던 것입니다. 그의 빛난 얼굴을 보며 백성들이 눈부셔 하던 거룩함의 표징들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임을 보여 줄 수 있는 거룩한 인격의 표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인격적인 목회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인격의 탁월성은 그의 깨끗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선포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누가 말합니다. 설교한 것의 50%만 살면 성자다. 설교를 하도 잘 하니까 사모님이 보따리를 싸 가지고 와서 강대상에 들어 누웠습니다. “여보! 나는 여기가 좋아 나는 여기서 잘 거야.” 당신은 설교단에서는 거룩한데 집에 오면 개떡이니 우리 강대상에 살림 차립시다. 여러분 50% 살면 안 되죠. 설교는 한 인격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삶의 반영이고 그의 삶은 그 선포하는 메시지에 부착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선포하는 선포는 사람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미래를 예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요한은 양떼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창이었더라. 복잡하게 쓰고 있지만 결론은 뭐냐면 세례요한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설교자의 선포가 삶과 하나로 어우러진 본보기를 보는 것입니다. 삶으로 설교하는 자는 강단에서의 말이 어눌하여도 그 설교의 색깔이 빛바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려온 다음에 그 설교에 대한 주석이 삶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구약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목회자들의 물질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학생이 “차는 어느 정도까지 타고 다닐 수가 있을까요?” 목사님이 명답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나는 어느 차를 타고 다니고 목회자가 어느 정도 생활비를 써야 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정신을 유지 하십시오. 의복은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음식은 건강을 위하여, 차는 교통수단을 위하여 그러면 도를 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가슴에 쟁쟁히 울려 퍼집니다. 비록 말에 있어서 그렇게 능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삶이 뒷받침되는 설교자는 강단의 말이 비록 좀 어눌하지만 그러나 설교가 끝난 다음에 삶이 그 설교를 주석해 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을 보면서 그때 그 설교가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그의 삶이 설교를 빛나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즉석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설교는 쉽습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어느 후배가 와서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웃으면서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렵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는 쉽고 기도는 어렵지만 삶은 훨씬 어렵습니다. 설교는 즉석에서도 할 수 있지만 오늘 아침에라도 준비할 수 있지만 선포대로 살아가는 인격적인 삶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하루아침에 팽개쳐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말의 잔치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고상한 말은 신앙세계 속에 모두 동원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아마 논쟁적인 정신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학을 배울수록 말이 많아지고 선생만 되고 싶어 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 문제에 대해서 깨끗하게 정리된 철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사역의 길에 들어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는 이름석자 대면 여러분 다 아는 분입니다. 함께 식사석상에서 아야기하는데 “목사님 저 빌딩 보이십니까?” “예” “우리 교회 교인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까?” “저분 신앙이 참 좋습니다. 목사가 아! 요즘 돈이 몰리네 걱정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저녁에 천 만 원 짜리 수표 가지고 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목회해도 교회에 그런 교인들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물질에 있어서 정리가 안 된 사람이 그것을 집어넣고 살아가면 행하는 것은 범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존 웨슬레가 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설교 앞에 회개하니까 “나는 당신들의 돈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돈에 대한 사랑은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포기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끝까지 안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 이상 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신학 공부한 사람은 쓰던 가락이 있어서 막 나갑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들은 그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텐데 전도사 때 못쓰고 굶주린 것이 한이 되어서 교인 200명도 안 되어도 저택에서 살고, 그랜저 타고 다니고 껄떡거린다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사랑이 정리가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 안수 받기를 사모하지 마십시오. 기다리고 준비하십시오. 광야에서 성숙해 가야 합니다. 여러분 10년 먼저 뛴다고 10년 치 더 많이 일하고 죽는 것 아닙니다. 준비 안 된 사람이 먼저 뛰어들면 죄 더 많이 지다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축복 안하시는 사람이 50년 동안에 못한 일 5년 동안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역사상의 설교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화) 주후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설교자이었던 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입니다. 저는 그분 좋아 합니다. 물론 개신교 신앙가는 아니지만 참 좋아 합니다. 그렇게 성경에 박학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분이 지금 도시는 생각이 안 나는데 시골에서 주교로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감화를 사람들에게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로마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귀족들이 생각하기를 ‘그 시골 촌놈들이 그런 명 설교를 들을 수가 있겠느냐? 그분 모셔 와라.’ 그래서 보쌈을 하다시피 그 분을 모셔 왔습니다. 그런데 ‘아차 뭐가 잘못 되가는 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3일도 지나기 전입니다. 보자마자 이 청렴한 사람 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교회의 사제들을 다 모아서 ‘벽에 붙어 있는 것 다 띠어라. 금, 은, 패물들, 우상 같은 것 다 띠어라.’ 해서 다 두들겨서 가난한 사람들 양식 바꿔 먹게끔 놓아 주어 버렸습니다. 눈이 홀딱 뒤집혀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와서 뭐 좋은 소리하나 그리고 와가지고 구두 앞에 보석 박은 예쁜 신발 신고 귀족부인들이 살래살래 와가지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데 뭔가 자기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줄 줄 알았을 것입니다. ‘회개하라.’ 외치면서 복음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순교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죽였습니다. 교묘하게. 그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물질에 대한 사랑을 깨끗이 끊어서 인격에 있어서 정리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 웨슬레를 하나님이 위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감리교회의 시조 아닙니까? 그가 여러 가지 흠도 많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훌륭하게 사용하신 이면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난한 복음 전도사 시절에 일정액의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가 말을 타고 다닌 거리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거리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그냥 돌려보냈겠습니까? 무수한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항상 유명하던 때나 무명하던 때나 똑같은 액수의 생활비만 쓰고 나머지는 구제하고 선교하고 다 나눠주고 흩어 버렸습니다. 젊은 시절에 성결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은퇴할 때 목회사역의 마지막을 물질 때문에 부끄럽게 낙서하듯 막 써버리고 사역의 마지막을 마치는 부끄러운 선배들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도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목회서신을 가르쳤던 목사님이 계십니다. 존함은 안 밝히겠습니다. 그분이 아마 이런데서 자기 존함 밝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울에서도 중심가에 있는 큰 교회에서 목회하던 분 이었습니다. 그 교회를 42년 동안 담임을 해서 자기 손으로 유아세례를 준 아이 머리 위에 장로 안수를 주었다니까 실로 긴 세월동안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죠. 박사만 백 명이 모이는 교회였다니까 지금이야 그렇게 대단한 수가 아닙니다만 그때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참 고매한 분입니다. 그런 분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분이 막판에 말입니다. 교회를 42년 동안 임직을 하다가 퇴직을 하시는데 큰 싸움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교인이 그때 당시에 오천 명 이상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실력 있는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싸움은 간단합니다. 목사님이 40년 동안 하다가 은퇴하시게 되었으니까 이 목사님이 세상에서 40년 동안 직장생활하면 퇴직금 아마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굉장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생을 다 바친 것 아닙니까? 그렇죠. 노후에 이 목사님 편안하게 모셔 드려야 한다 하면서 45평형 아파트를 드리고 생활비를 드리도록 당회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펄쩍 뛰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마지막 내 가는 길을 욕되게 하느냐? 내가 물질이 탐나서 이 목회 사역을 걸으니 이제 우리 두 늙은이 남았고 아들딸들 다 크도록 교회에서 등록금 줘서 공부해서 다 성장해서 출가 했는데 두 늙은이가 아들딸들이 자기 집에 오라고 하는데 그 집에 가서 얹혀살다가 눈 감으면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인데 왜 이렇게 하느냐? 안 받는다. 이유 없다. 말도 하지 말라고. 목소리가 또 굉장히 크셨습니다. 그런 목소리는 커도 상처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당회에서는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한창 씨름을 하다가 장로님들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한테 따지는 것입니다. 좋아요 목사님 우리는 목사님의 그 고매한 인격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님만 잘 되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은 42년 동안 목회하고 단칸방도 없이 이 교회를 나왔다 하면 “오! 성자구나 그러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교회 장로들 보고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순 나쁜 놈들이다. 42년 동안 부려 먹고 그냥 쫒아 냈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 그럴 것 아닙니까? 목사님 목회해 오신 이 교회에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이 어린애 같은 목사님이 이 대목에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그렇겠구나. 며칠을 고민하다가 나타나셨습니다.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받겠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단 13평 이하면 받겠습니다.” 장로님들이 32평으로 올려 달라고 애걸복걸 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19평으로 낙찰이 되었습니다. 이사하는 날 이 목사님은 목회 철학이 있으셔서 사택을 개방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사가 여신도하고 둘이 앉아서 이야기 하는 것을 아주 혐오 하셨습니다. 장로가 있고 전도사가 있는 앞에서 말하라. 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하고 혼자 이야기해라. 그것이 성경적이다. 이렇게 믿는 분 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 그것은 이야기 할 거고 목회 철학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집사님들이 그 목사님 사는 아파트에 가서 이삿짐을 나르면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짐을 옮기는데 그 목사님 집에 있는 가구 중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 40년 전에 싫고 온 일제 철제 캐비닛이었습니다. 성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저 같이 일천한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분들의 이름석자를 떠올리는 것도 그분들에게는 모욕이겠지요? 그러나 참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잘 안 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능히 보아도 차지 않고 귀는 들어도 족하지 않는 법입니다. 결핍을 견디는 성품이야말로 인격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단련되지 아니하면 누구도 이런 물질의 위협에서 인격적으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직전까지 그만 두고 나니까 겸비해 지더군요. 이제는 돈도 하나도 없고 가난한 전도사 시절이 잊히지 않습니다. 야유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기를 참 좋아 합니다. 절제를 합니다만 그랬습니다. 그런데 전도사 시절인데 저 옆에서 그 집사님들이 불판에다가 소고기를 사 가지고 와서 그때는 소고기를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교인이 소고기를 사가지고 왔는데 이게 돼지고기인줄 알고 고추장에다가 볶아 먹을 정도였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구워 먹는데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형편도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슴에 찡하게 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전도사님 보고 밥 먹을 때 가면 “야! 고기 좀 많이 먹어.” 옛날 생각이 늘 납니다. 단칸방에서 기와도 아니고 루핑이 쳐진 집에서 머리 위에 물을 한 컵 마시다가 놓고 자면 돌덩이 같이 얼어버리는 집에서 3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던 그 옛날 정말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던 내 자신의 모습이 쇠퇴하여 가는 것 같아서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 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고기가 먹고 싶어도 껄떡거리며 먹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처음 그 마음 그대로 그 인격 그대로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준비하는 사람들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한국교회에 베델성서 바람이 분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바이블 스터디 교재를 그 목사님이 만들었습니다. 젊은 목사님 이었는데 성경교육 방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가 그것을 만들고 나서 그는 일약 무명에서 말하자면 전 미국에 알려지는 탑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각 교회에서 도대체 이 걸출한 공부 교재를 쓴 사람이 누구냐? 아무개 목사라 하더라. 불러와라. 이유가 없다. 뭐든 폭력만 빼고 뭐든 동원해서 불러와라. 우리 교회에 이런 분을 교육목사로 불러와서 마음껏 성경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게 한다면 얼마나 든든해지겠느냐? 그래서 찾아 나섰습니다. 걸출한 교회들이 줄다리기 경쟁을 하다가, 하다가, 하다가 안 되니까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교회가 밤에 와서 승용차에 납치해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짐은 나중에 와서 싸가지고 갈 테니까 일단 가자. 우리가 기도 많이 했으니까 당신은 도장만 찍어라.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교회에 교육목사로 부임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사람은 유명해 지고 볼일인 모양입니다. 아파트 하나 줘서 들여보내면 되는데 푸른 풀밭에다가 저 푸른 초원위에 정말 그림 같은 집을 지어줬습니다. 그래서 화강암으로 예쁘게 깎아서 집을 하나 지어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성경을 가르치는 그 일에 몰두하면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눈을 뜨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황홀한 것입니다. 눈뜨고 보면 아름다운 풀밭에 구름이 흘러가고 개울이 흐르고 황홀한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내가 생활의 모든 염려를 털어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매진할 수 있겠구나. 딱 일주일을 살고 나서 이 목사님이 건축업자를 다시 불렀습니다. 건축업자가 “왜 그러십니까? 목사님?” “옆에다 허름한 목재 그리고 녹슨 함석을 이용해서 방을 하나 만들어주십시오” “아 무슨 말씀입니까? 목사님 광은 다 있고 다용도실도 다 있고 그 안에 차고도 있고 다 있는데 무슨 광을 거기에 만듭니까? 제 작품 망치려고 결심했습니까?” “작품 망쳐도 당신보고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만들어 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애원합니다.” 투덜대면서 목사님이 시키니까 아마 집사님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헌 목재를 두드려 박아서 광을 하나 허름하게 만들고 위에는 시뻘겋게 녹슬고 구멍이 뻥뻥 뚫어진 함석을 지붕으로 얻었습니다. 저녁때만 되면 목사님이 걸어 나와서 그 광에 들어가서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원래 양치기였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알고 변화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해서 어린 시절에 학교도 못 들어가고 양을 치다가 저녁에는 잘 곳이 없어서 건초 더미 위에 덜렁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면 함석 지붕위에 구멍이 뻥 뚫어지고 까만 하늘에 말하자면 푸른 별들이 송송 송송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 별빛 아래서 들어 누워서 찬송 부르고 잠 안 오면 건초 더미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찬송)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많은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미국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가 공부를 하게 되고 신학을 마쳐서 그래서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안한 호화로운 침대에서 자고 나 보니까 왠지 마음 한 구석에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데서 전화가 옵니다. 우리 교회에 한번 와 주시겠습니까? 원고를 써 주시겠습니까? 책을 내 주십시오. 자기가 유명해 지는 것처럼 생각 될 때마다 그 창고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구멍 뚫어져서 찬바람이 세어 들어오는 광에서 기도하는 그 어린 시절, 변함없이 만났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라.’ 저희 선배 가운데 대 선배입니다. 김 예진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 목사님은 순교 하셨습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대단한 분이 아니셨지만 참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순교 하였냐면 서울 시내 사람들 다 피난 갔는데 피난 안 가고 이 목사님 혼자 삼각산 기도원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주여! 이 나라를 어찌 하시렵니까?” 삼일동안 금식하며 기도원에서 내려오다가 산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냥 지나갔으면 살았는데 산길에서 사람을 만나니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고 “이보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예수 믿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공산당에게 고발해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총살당했다는 말도 있고 이북으로 끌려가서 순교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여튼 순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그때 제가 태어나기 전이니까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 곁에서 그분의 삶을 본 사람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부흥강사였습니다. 부흥회를 열심히 다니며 그 당시에 가난하니까 무슨 사례금을 주었겠습니까? 조금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집으로 바로 안 들어옵니다. 그 사례금을 넣고 그때 가난하지 않은 교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1950년대인데. 그러니까 달동네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때야 다 달동네였지만 그러나 더 큰 달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김 집사 요즘 어떻게 사나?” 부엌을 이렇게 보니 끼닛거리가 없어서 부인이 울고 있습니다. 사례금 다 나누어 주고 빈털터리로 교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신도 죽 끓여 먹고. 이것이 목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신 분 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가난해 지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도의 부유함을 위해서 가난해 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실제로 그 선포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그러나 적어도 그의 선포는 삶을 반영하고 있었고 그의 설교 속에는 그의 인격이 배어 있었습니다. 외치는 것처럼 살았고 사는 것처럼 외쳤고 외치는 것 안에 삶이 있었고 삶 안에 외침이 배어 있었습니다. 사람은 그의 선포의 독특성을 금방 알아 차렸습니다. 서기관의 가르침은 인격과 가르침이 분리 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세인과 율법사의 교훈은 삶과 교훈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세인과 율법사의 그 능수능란한 가르침을 버리고 광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선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 오시는 앞길을 마음에 예비하였습니다. 그는 인격으로 설교 하였고 그의 설교는 그의 인격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 쳐 주었던 것입니다. 조국교회가 그리워하는 사역자는 직업적인 강단의 꾼들이 아니라 이렇게 인격적으로 준비되고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정리가 되어서 오직 양떼를 위해서 인격으로 설교하고 설교로 인격을 확증할 수 있는 이렇게 준비된 사람들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4. 정서적 준비 : 사랑과 열정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中)
첫 번째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육체적으로 우리가 순결하게 준비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성이 준비 되어야 한다. 성경과 학문의 문제, 세 번째 어젯밤에는 인격과 삶의 문제를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랑과 정열의 문제를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그러나 복음사역에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부딪쳐야 하는 커다란 난제 가운데 하나는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잘못된 열정이 교회의 경건하고 거룩한 영성을 얼마나 심각하게 훼파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번에는 잘못된 열정, 빗나간 열정 때문에 교회가 많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펜듈럼(pendulum)이 반대로 가 버렸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여튼 뜨거운 것은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 그래서 차가운 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역사에서 보면 뭔가 중심을 잡는 균형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 공부 할 때 전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역사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은 오늘 또 반복 됩니다. 이전에 봉착했던 교회의 어려움은 오늘 또다시 반복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옛날에 선조들에게서 지혜를 배웁니다. 지혜를 보탭니다. 그래서 보다 슬기롭게 이런 역사적인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교회사가 전공도 아닙니다만 그러나 짧은 식견에서 가만히 보면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진지한 운동을 해 왔습니다. 제일 처음 오순절 강림 사건을 통해서 강력한 말하자면 성령강림과 함께 초대 기독교가 시작이 됩니다. 기독교 자체는 말하자면 신앙에 있어서 정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지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아니면 지식이 먼저냐 아니면 체험이 먼저냐 이런 것들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하자면 그 모든 것들을 신앙의 요소 속에서 기가 막힌 균형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다가 약간 세월이 흘러가면서 2세기에 접어들면서 알다시피 변증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기독교가 사상적으로 로마 사회로부터 많은 사상적인 핍박을 받으니까 변증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기독교가 어떤 변증의 틀 속에서 굳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면 이제 말하자면 소위 이야기하는 이지주의라고 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벌써 2세기에 벌써 강력한 반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몬타누스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자기가 보혜사 성령이다. 말하자면 등장하게 됩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이 기독교가 하늘로부터 내리 부어지는 신에 의해서 개혁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주정주의 쪽으로 펜듈럼이 옮겨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옮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알다시피 그 이후로부터 급격히 가톨릭화 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차가운 교리 중심의 교회, 예식 중심의 교회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12세기쯤 들어와서 수도원 운동이 벌어지면서 다시 이쪽으로 갑니다. 성경도 둘째 문제고 중요한 것은 신비한 오성의 빛, 그 신비 속에서 뭔가 체험을 통해서 빛이 비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누가 가장 잘 알려 주느냐 신비주의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영교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까 오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못자국난 그것이 자기한테 재현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말하자면 주정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 때 다시 균형을 잡는가 하더니 그 다음에 후반기에 가서는 다시 또 차가운 교리주의로 가다가 다시 또 경건주의가 나오고 합리주의 신학이 다시 나오고 그다음에 다시 또 오순절 운동이 나오고 이렇게 하면서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을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시대에 태어나면 한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예전에는 머리를 기르고 다녔습니다. 70년대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짧게 깎고 다니면 사람들이 북에서 왔소? 라고 물어봤습니다. 요즘은 왜 그렇게 안 하고 다닙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이 안하니까... 남들이 하면 나중에 결국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두 가지 극단입니다. 아주 차가운 이기주의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의 감정에 흘러 가버리는 말하자면 천박한 주정주의 어느 하나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코 이 쪽이나 이쪽이나 참다운 복음 신앙으로 역사를 개혁하고 교회를 변혁하는 데에는 힘이 없다고 하는 사실이 교회사에서 입증 되었습니다. 세속에 물들기 싫어서 수도원으로 튀어 나갔는데 그 속에서 세상보다 더 심하게 썩어 들어갔습니다. 숲속에서 썩어 들어갔습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양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극단적인 신비적인 오순절 운동 아니면 인간의 머리 하나로서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인간의 상식의 차원으로 발가벗기려 하는 이지주의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이런 것에 너무나 지쳐버린 나머지 이제는 뭔가 뜨거운 것은 나중에 교회에 항상 문제를 일으키더라. 그래서 차가워지자. 체험을 천시하고 뜨거운 정열을 열정을 비하하는 그런 모습으로 교회가 변해 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 구약에서 나오는 소위 이야기하는 ‘다트 엘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라고 하는 그 자체의 말이 ‘야다’에서 왔습니다. 이 ‘야다’는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문맥에서는 주민등록을 알고 얼굴을 자주 맞대보고 밥 먹은 것 그런 것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여자가 지나가는 남자보고 나는 저 사람 잘 알아 그러면 시집 못 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생각은 자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라고 하는 말이 이것으로 쓰였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to know ‘아담이 하와를 알매 가인을 낳은지라.’ 거기에서 온 동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체가 이스라엘 문맥에서는 이것이 또 어디에 쓰였냐하면 선악과라는 말에도 이 다트가 쓰였습니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이 다트라고 하는 개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이 개념은 그 성경의 문맥에서 보면 그것은 결코 말하자면 이지적인(intellectual)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요소가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가 그 백성들을 향해서 4장에서 이야기 하는데 이 독특한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림으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 그만큼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은 뭐냐면 성경에서 이러한 ‘다트 엘로 임’을 소유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하는데 따까리 하던 사람들이야 이런 것 없이도 했을지 모르지만 주역으로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것에 뛰어난 사람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뛰어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자면 무식한 사람의 선지자가 되었다 그런 소리 어디 가서 하지 마십시오.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선지자들이 구름떼같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결국 이 ‘다트 엘로 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알고 그 시대를 알아서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표준을 제시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살았더라면 모세가 죽은 지 700년도 넘은 이 시대에 어떻게 모세가 가르쳤겠는가? 그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선지서는 모세 5경의 그 시대적인 적용이요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를 아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알고 문맥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트 엘로 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열정의 사람들 이었습니다. 불붙는 사랑과 정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말씀이 임한 선지자적인 체험 이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가 오랜 생활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만히 그냥 기다리기만 하다가 불이 떨어져서 선지자가 되었다 그것이 아니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아이가 자라매 심령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강하여져 갔습니다. 약했었는데 강하여져 갔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모세와 선지자와 시인의 글들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나타났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 이것을 본 받았습니다. 그 신령한 은혜가 거룩한 정서에 자라게 만들었습니다. 이 구약에서 선지자를 읽어 가면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부르실 때는 모두 그 선지자 앞에 뭐가 나타나는가 하면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기사가 제일 먼저 나타납니다. 어느 선지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소명이 뭐냐면 대게 이야기의 패턴이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하니라 이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하나님이 누구누구에게 말씀하심이라 하나님이 누구누구를 불러 가라사대... 혹은 야훼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있었다 엘 혹은 알 혹은 배 뭐 여러 가지로 쓰입니다. 누구누구에게 누구누구 위에 누구누구 속으로 다양하게 쓰입니다. 이것도 미묘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게는 임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선지자의 콜리의 패턴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 무슨 뜻이냐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견해가 인간인 선지자에게 커뮤니케이션 되는 물리적인 소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의사소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이 이렇게 선지자에게 말씀하실 때 일어났던 선지자 안에 있는 이 놀라운 변화에 대해서 완벽하게 설명해 낼 사람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인격적으로 고매한 스승이 몇 분 계셨습니다. 그분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면 제게 감화가 옵니다. 그런데 이분은 하나님입니다. 우주를 만드신 광대하고 영광스러우신 지존이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물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하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임하는 것과 동시에 말씀이 임하는 것과 동시에 말씀이 임하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시대를 향하여 간 소위 이야기하는 신적인 정서가 물 붓듯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만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를 향하여 말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입니다. 예언자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이 못된 세상 다 죽일 거야 한다고 해서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 학교 다니면서 선생으로 있고 학생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운동을 보았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돌을 던지는데 나는 의롭고 이 돌을 맞는 놈들은 다 죽일 놈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인데 교계를 향하여 돌을 던지면 자기는 그 교회 아닙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타오르는 열정 그 자체가 모두 하늘로부터 임한 열정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로 부터 임한 열정도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목표에 불타는 말하자면 진념도 있습니다. 열정도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내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인천 근처에 있는 신도시에 교인이 200명도 안 모이는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가셨습니다. 저는 직접 한번밖에 설교를 들어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뛰어난 설교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교회를 어떻게든지 부흥시켜야겠다는 절대적인 열망을 가진 분 이셨습니다. 얼마나 격무에 시달렸는지 교인이 1200명이 넘게 되었는데 장로님들이 그렇게 목사님을 말하자면 괴롭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그런데 그 목사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혈압으로 과로로 돌아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곁에 있던 부교역자들이 그럽니다. 돌아 가시시전 우리 목사님은 이상했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 괜히 중얼중얼 거렸다고 합니다. 기도하나 하고 보면 기도는 아닙니다. “그래 두고 봐 난 꼭 해내고 말거야 내가 그런다고 못 할 줄 알아 난 반드시 할 거야 할 수 있어 꼭 할 거야” 디바인 파도스는 아닙니다. 인간을 미치게 하는 요소는 목표이상 가는 훌륭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시대는 성공에 미친 시대입니다. 성공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이 교회로 들어 온 것입니다. 물량주의 기복주의 악한 열매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 하고 있습니다. 교인이 적게 나오는 날이면 힘이 없습니다. 교인이 가득 모이면 왠지 힘이 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추구점으로 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는 재미로 이 길을 들어선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대에 전해주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될 사람들이 너무 차갑습니다. 정열이 넘쳐야 될 것 아닙니까? 레포트 하나를 써도 기도 한번을 해도 찬송 한번을 불러도 설교 한번을 해도 교회 봉사 한번을 해도 통곡하며 봉사하고 통곡하며 사랑하고 통곡하며 부르짖고 통곡하며 전도하고 통곡하며 엎드려지는 가슴속에 끌래야 끌 수 없는 말하자면 신적인 강제력의 불꽃이 역사하여야 되는 것 아닙니까?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참 불꽃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불꽃은 한번 피었다가 사라지는 불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타오르는 불꽃입니다. 세례요한이 누가 건드리는 사람도 없는데 분노와 사랑과 열정과 말하자면 미래를 향한 불타는 가슴으로 광야에 등장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설마 세례요한이 처음 광야에 등장해서 외칠 때 “저 회개하는 게 좋겠는데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그러대요 기왕이면 회개한번 해보십시오. 일단 한번 해 보시라니까요 저 회개 하실래요” 이렇게 설교 했겠습니까? 온 몸에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슴은 불타고 눈은 이글거리고 얼굴에는 그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의 마음이 겹쳐서 흐르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피를 말린 설교였습니다. 동의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어디에서 만들어 졌습니까? 하루아침에... 아닙니다. 천천히 쌓여 가다가 마지막에 광야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불붙듯이 다시 한 번 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외칠 때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타자로서 외친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의 역사와 교회에 필요한 것은 돌 던지는 열정이 아닙니다. 몇 시간 동안 캠퍼스와 총장실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고 그리스도가 왕 노릇하는 그 나라 그 학교 그 민족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자신까지도 세례요한은 임박한 하나님의 신보 앞에 와 있는 마음으로 선포했습니다. 요단강변에서 그는 불을 토하듯이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거룩한 분노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높아지고 나는 낮아져야 하리라. 그는 능하여야 했고 나는 쇠하리라. 그는 높이 들리워져 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드러나고 나사렛 유세의 요한은 잊혀야 하리라. 그랬으면 좋겠다 말로만 하고 뒤로는 다른 꿍꿍이속 가지고 있는 이중인격자는 아니었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불의를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 앞에라도 가서 너 그 따위로 살면 안 된다 외쳤습니다. 그의 정서적인 준비를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까? 값싼 정서가 아닙니다. 거룩한 정서 홀리 파르스 그의 설교는 뼈 사이에서 우러나와 형체를 잦추었고 심장을 관통하여 피를 발리었고 살을 찢고 흘러나옴으로 진핵을 묻히고 흐느낌과 함께 토해져 나옴으로 눈물을 적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를 깨운 것입니다.
교인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설교가 맥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자기도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냐는 것입니다. 전철 같은데서 가끔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으니까 뭘 하나 들고 와서 좋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목이 다 쉬었습니다. 그 병 걸리고 이 약 안 바르면 멍텅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치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복음을 손에 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외칠 때 확신 속에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집 앞에 우편물통에 전도지가 하나 들어 왔습니다. 그 전도지가 저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전도지가 하트모양으로 예쁘게 총천연색으로 돈 많이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행복해 지시렵니까? 전도지 이름입니다. 나도 행복해 지고 싶으니까 뒤져 봤습니다. 첫째 좋은 공기를 많이 마시십시오. 뭔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두 번째 햇빛을 마음껏 받으십시오. 세 번째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십시오. 9가지 다 내려간 다음에 마지막에 예수도 믿으십시오. 이게 뭡니까 비싼 돈 들여서... 피 묻은 복음이 생수하고 끼워 팔기 해야 팔리는 복음이... 뭔가 이제는 기독교 사역자들 가슴속에 어떤 암시가 있냐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직접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다 싫어 할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세상신장보기 좋은 것으로 포장해서 이야기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패배주의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열정의 부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없이 설교하고 하나님의 심정 없이 교회와 역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의 문맥은 10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는 것과 같은 문맥에 있습니다. 10장 1절에서 사도들을 만드셔서 세상으로 파송하기 전에 그 동기에 대해서 9장 35절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심이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이것은 물리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통찰로서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예수님 곁에 온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법 밥벌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창기와 기생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물의 배후를 그 모든 사람들의 겉모습을 꿰뚫어서 그들의 실제의 영혼의 상태들을 바라보니까 ‘에스크랑프니스테’ 한 것입니다. be moved to the once bowels 비 무브드 투 더 완스 바월스 창자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움직이라 그런 뜻입니다. 무슨 뜻 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령의 자리가 배에 있다고 봤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간에 있다고 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장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의 문맥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문맥에서는 말하자면 이 ‘bowel’ 이 ‘창자’라고 하는 것은 인격이 깃들여 있는 내밀한 성소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민망히 여기다 이것은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반바지 입은 것 같은 이성을 본 것 같은 이런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으셨더라. 이에 하면서 10장 1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를 세운 그 예수님의 내면적인 동기는 뭐냐면 ‘에스프랑크니스테’ 신정의 창자가 찢어지는 것 같은 그런 아픔입니다. 따라서 그 아픔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도자로서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 여기 와서 많이 했습니다. 물질에 있어서도 깨끗해야 하고 육체적으로도 순결해야 합니다. 편한 길이 있어도 고달프게 지적인 탐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도 잘 성숙해서 돌멩이 맞고 정 맞고 끌 맞고 마지막에 페이퍼까지 맞아서 잘 다듬어져야 합니다. 목표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편한 길 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목표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의 마음 어찌하든지 내 인생의 최상의 목표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던 이 세상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는 내 살을 찢고 그리고 뼈를 깎고 내 심장을 키워도 하나님의 쓰심에 준비되고 말리라 그 에스프랑크니스트 정서적인 준비가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이 공부만 하고 기도도 안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드라이스 칼라라고 합니다. 미국교회에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가르치는데 가슴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너무 교회를 모릅니다. 미국에는 이미 하버드 같은 데는 학제 자체가 엔디비코스 들어갈 때 학제로 나갈 거냐, 목회자로 나갈 거냐, 갈라섭니다. 그러니까 목회자 들어 갈 사람은 엔디비 들어가고 학자 될 사람 에스티엠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는 전문적으로 신학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밀려드는 그 공부에 기도도 못하고 교회도 못 섬기고 하면서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해서 나가서 마지막에 칼 들고 신학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서 훨씬 나은 편입니다. 요한은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을 읽으며 지적인 이해가 깊어지고 은혜 안에서 자랐고 정서가 준비 되었습니다. 안일한 사역자의 삶은 주님의 마음으로 양떼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이 심적인 열정 사랑이 부족해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게 많은 지식이 있고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내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설교하지 않는 것은 외식입니다. 강단을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위한 사역입니다. 세상이 교회 때문에 복음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기 위한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동기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영혼들과 연약한 지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끓어오르는 연민 창자가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드라이 스칼라가 문제라면 드라이 페스터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불행입니다. 비극입니다. 교회의 상처이고 아픔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사하라 사막도 있고 많은 사막들이 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비만 내리면 몇 년 안에 옥토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증해보려고 몸부림치는 게 리비아 아닙니까? 대수로 공사 어마어마하더군요. 철판을 꺾어서 둥그렇게 만드는데 한 장 크기가 32평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물을 보내서 수천 년 내려온 사막을 옥토로 바꾸겠다는 것이 리비아의 야심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마음이 차갑게 메말라 있어도 하나님의 진리의 은혜만 부어지면 완전히 변화가 됩니다. 1741년에 영국 스코틀랜드 캄보스레인이라고 하는 곳에서 역사의 기록에 남을만한 큰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는 복음이 환영받기 마련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어떤 노인네 한분이 앞자리에 나와서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면서 기도하는데 누군가 했더니 그 지방 최고의 신학교의 교리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이었습니다. 그분 하는 말이 이전에 나는 속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제는 내가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저는 교리학자중에 저는 조직신학이 전공은 아닙니다만 헤르만 바빙크를 참 좋아 합니다. 구시대의 사람이긴 합니다만 그의 조직신학 책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 사람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내리면 메마른 신학생들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여튼 대학원에 들어가니까 똑똑한 사람 많습디다. 우리는 영어 원서 한권 가지고도 며칠씩 허덕거리며 읽어내려 가는데 어제 빌려간 독일어 원서 오늘 다 읽고 와서 “별 내용 없어” 하는 것을 보면 속상하기도 하고 그리고 나서 역시 독일어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불어를 공부해야겠다고 사람은 옆에서 출발점이 틀리다 그런 느낌을 받겠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통통 튀고 교수님이 30분 강의하고 나면 뒤에 앉아서 학우들 모아놓고 수업시간 끝난 다음에 40분 강의 하면서 지난번 강의를 완전히 깔고 뭉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하고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부지런히 삼각산 올라 다니더니 하나님 만나고 깨뜨려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위에 지식의 강물이 흐르면 유능하면서 겸손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식이냐 은혜냐 바보 같은 질문 하지 마십시오.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잘 질문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배님이 말씀 하십니다. 신학교에서 흘리는 눈물은 30년 동안 내 마음에서 마르지 아니 합디다. 주님의 마음이 언제나 우리 속에 느껴져서 더욱 그 주님의 정서로 양떼를 목양하고 고난의 길도 기꺼이 갈수 있는 전도자적이고 순례자적인 삶이 예비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가 죄를 대적하여 싸우게 하고 거룩한 목표에 대한 사모함으로 우리의 심령을 불붙게 합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뜨거운 열정들이 우리 가운데 식어 가고 있습니다. 커다란 문제가 아닙니까?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래도 뭔가 기도만 하면 뭔가 문이 열리는 것 같았는데 신학교에 들어와서 오히려 더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말은 많아 졌습니다. 행위의 열매는 없고... 주님을 부르기만 합니다. 저는 지금도 30여 년 전의 일인데 생생하게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는 거리에 나가면 전도부인들이 있었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벽돌장 몇 개 놓고 올라가서 시장 어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타락했고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서 새 사람이 되었는지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말하면 사람들이 나도 예수 믿고 싶다고 손을 들면 옆에 쫒아 다니던 조수들이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전도 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대신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말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마음속에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 퍼킨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을 파헤치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은혜로운 정서는 신령한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존경하는 스승가운데 한분입니다. 교수도 하셨고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 하셨습니다. 교인이 오백 명 육백 명 되는데 봄이면 대심방을 하지 않습니까?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심방을 가시는 것입니다. 가서 어떻게 1년을 지냈습니까? 쭉 물어 봅니다.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있었군요. 찬송하나 부릅시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 눈을 감고 이제 성경을 찿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창세기 1장, 2장, 3장, 4장 자 우리 성경 한절 봅시다. 시편 31편입니다. 목사님은 눈을 감고 사람을 피합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습니다. 하면서 쭉 읽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려움이 생긴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울먹이면서 기도 합니다. 이것이 목양의 마음 아닙니까? 목자의 마음 아닙니까? 가서 기름진 음식이나 대접 받고 상석에 앉았다 와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이름 값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을 때 우리는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되고 체험은 은혜로운 정서를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 최근에 나온 최근도 아니지만 75년도에 발표된 지금은 떠나셨지만 총신에서 가르치셨던 세계적인 신학 학자 김세윤 박사님이 75년도에 쓰신 박사학위 논문이 독일에서 상당히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The Origin of Paul's Gospel” 아주 두꺼운 책입니다. 요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바울이 복음사역을 하게 되고 신학을 구성하게 되어서 결국은 복음을 초대교회에 제시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이 뭐냐 하면 말하자면 기독론과 구원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The Origin of Paul's Gospel”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독론과 구원론 두 가지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이 뭐냐면 많이 이렇게 껍질이 포장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헬레니즘의 요소도 있고 유다이스틱한 요소도 있고 로만적인 요소도 있고 그 시대의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기고, 벗기고 벗기면 마지막에 들어 가보면 코 앞에 남는 다는 것입니다. 이 핵심이 뭐냐면 다메섹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님을 만났고 그 분을 만나자 마자 바울의 마음속에는 divine and reinforcement 신적인 강제력 같은 이상한 것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은데 하여튼 내안에 무엇이 있어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살고 싶은데 내안에 어떤 강제력이 있어서 예수를 위해서 죽지 않을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안에 나는 내가 존귀하게 되고 싶은데 내안에 무슨 이상한 요소가 있어서 그렇게 살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위해 죽고 예수의 심장으로 살고 예수를 위해서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그 어떤 enforcement가 내안에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spiritual mystery입니다. 아주 깊이,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80년 동안을 중국 선교로 이름을 날렸던 허드슨 테일러 목사님은 8세에 선교를 시작해서 98세에 은퇴를 했습니다. 하루는 후배 중국 선교 지망생들이 대 선교의 원로이신 이분을 찾아왔습니다. “테일러 목사님” “예” “목사님 저는 교회에 많은 영혼들을 한번 전도해서 천국 보내고 싶습니다.” 목사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 가지고는 선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목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중국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중국의 영혼들 귀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중국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나라가 더 좋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이 있고 굶주림이 있고 핍박이 있는 이곳이 뭐가 좋습니까? 나의 고국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좋은 것만 하고 살겠습니까? 나는 내 나라가 좋지만 내 안에 누군가가 살아 있어서 이곳에서 살게 하시니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강제력입니다. 이런 것이 역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열정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불꽃처럼 살았던 전도자들은 모두 피 끓는 전도자들 이었습니다. 거룩한 진리에 불 붙여진 신령한 전도사를 느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탄탄한 신앙을 기초로 한 것이었습니다. 헬무트 트리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 비평적 연구 방법이 횡횡하는 이러한 신학의 시대에서 강조될 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 성경말씀과 연결된 강건한 영적인 생명력이 탄탄한 신학연구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젊은 신학생들의 희미하고 미성숙한 사고력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가져다주는 생명력에서 그 신학적인 생명을 유지시키는 피를 공급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은 냉담한 것이 마치 지성적인 신앙의 표지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어둡지 않은 신앙이 기독교 생명의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관념의 주사 바늘로 생명력을 무력하게 하고 있는 시대인 신학을 하면서 마음이 식어지는 것은 신학 함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공부하다 보면 탕자가 되어서 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가끔 나옵니다. 구약을 하려다 보니 히브리어를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들어갔습니다. 하다 보니까 히브리 성경의 40%이상은 단어가 오리지날 meaning이 무엇인지 확인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전통적인 독법에서 읽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컴프레티브 필롤로지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교 언어학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어로는 희소인데 그러나 아카드나 우가리스나 이런 문헌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문헌들을 공부하기 위해서 이제는 톱 한 쪼가리 가지고 그 언어를 연구해야 합니다. 쪼가리 하나 발견되는 것들 주워 모아서 문법 체계를 세우는데 30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문법을 가지고 공부하면서 해득해 가기 시작합니다. 가다가 보니까 그 다음에 다시 문제가 되는데 이것보다도 더 루트가 되는 언어를 공부 해야지만 문제가 풀립니다. 그러면서 아카드어 수메르어 막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들어 왔네. 돌아보니까 60이 넘었습니다. 돌아 갈 길이 막막합니다. 전치사 하나 연구하다가 학문의 미로에 빠져서 젊은 세월 다 보내고 “너 뭐 하다가 왔냐?” “수메르어 전치사 연구하다가 왔사옵나이다.” “잘났다” 저는 칼빈을 존경합니다. 신학 때문이 아니라 신학함 때문입니다. 그는 경건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있는 신학공부, 고통이 있는 목회. 나의 이 마음을 주님께 바치나이다. 사실 마음이라고 번역 되었지만 그것은 나의 이 심장을 주께 바치나이다. 안셀름은 그의 유명한 신증명을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책 읽은 그 자리가 눈물로 얼룩지는 경건 기도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정서를 함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상 좋은 원천이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지 살펴보십시오. 마음이 뜨거워 질 것입니다. 아침에는 머리를 차갑게 하는 신학 서적을 읽으시고 경건한 사람의 전기와 순교자들의 열정을 읽어 보십시오. 제이엠 케인즈는 영국에서는 찬밥 신세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전화위복이 되어서 근대 경제학의 캐두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 했습니다. 차가운 지식 차가운 머리와 그리고 뜨거운 가슴을 가져라. 왜냐하면 분명히 이렇게 하면 경제가 발전 할 수 있습니다. 개량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수치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가장 과학적으로 극대화된 효율입니다. 그러나 웜 하드를 가져라. 성장의 그늘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라. 그가 일생동안 주장한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경제학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똑같은 충고를 받습니다.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다 타버리고 나면 뭐가 남겠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박수치고 북치고 다 때려 부수고 나면 태워 주소서. 뭐가 있어야 집을 짓지? 원래 뜨거운 동네 있잖습니까? 그쪽에만 가면 소방관 물부터 끼얹습니다. 다 태우고 맨날 기초공사 다 했다고 언제까지 그 소리 할 것입니까?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겁고 그렇게 되십시오. 조화를 이루는 신학교가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학교의 사명이 큽니다. 놀라운 균형을 한번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정서를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서 건설되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역사의 산고와 극심한 고뇌 그리스도와 그들이 짋밟고 지나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흘린 신음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경책의 모서리가 왜 붉은색인지 아는 사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은 피의 강물을 따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팔짱끼고 수수방관하던 냉담한 사람들 말만 까진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뛰어 들어서 피 흘리고 고뇌하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진지하게 하나님의 교회에 영적인 상태와 신앙에 의해 고민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의 피 묻은 헌신을 통해서 그들의 피를 삼키면서 교회의 역사는 변혁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역사와 단절된 교회의 영성, 개인의 삶과는 동떨어진 개인의 영력, 이런 것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샤머니즘적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 아주 능력 있는 목회하던 분 이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전설적인 전도자 앞에 초상 앞에 서서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단일 교회로서는 세계 최대의 선교비를 지출하던 교회였습니다. 그가 말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이 아멘 바이 유어 라이프 당신의 삶으로 아멘을 말해 달라. 그렇게 고난에 동참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갔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냉담한 사람들은 신사참배 시대에 모두 저랬습니다. 배교 했습니다. 공산당 나올 때 공산당과 빌붙었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불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위해 죽었습니다. 구차히 사는 것 보다는 영광스럽게 죽기를 택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력을 모든 이 세상의 영광과 보화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났던 한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이야기 하는 말씀을 듣고 큰 감화를 얻었습니다. 일제 신사참배가 극도에 다다랐을 때, 순간순간 순교의 칼날이 다가오고 있을 때 어느 목사님이 올라가서 말했습니다. 동역자 여러분 저는 결심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에게도 내가 없더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숙연했습니다. 아! 저 목사님은 다 정리 했구나. 맨 뒤에서 이름도 없고 얼굴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하나가 고개를 묻고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결심 못했던 모양입니다. 몇일 후 신사참배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던 그 목사님은 배교 했습니다. 뒤에서 이름 없이 흐느끼던 그 성도는 순교했습니다. 가슴에 타 오르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정서 없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배운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와서 이 시대에 배교에 가까운 냉담함을 본다면 소스라칠 것입니다. 가치 없이 조작된 뜨거운 교회들 때문에도 마음 아파 할 것입니다. 북을 치고 꽹과리를 치고 그것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머리도 가슴도 비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정서는 구별된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함으로 획득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생들은 입학을 하자마자 이런 식의 신령한 삶을 살기 어렵게 하는 상황에 마주 대하게 됩니다. 소명도 오락가락 하죠. 그런데 학적부에 물기도 마르기 전에 전도사를 해야지만 아르바이트비용이라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내적인 성장보다는 제도를 따라서 목사가 되기에 바쁘죠. 신앙이 2학년으로 올라갔는지 고민거리가 안 되지만 낙제해서 1학년으로 머무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죠. 거룩한 정서는 직업적인 정서로 바뀌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은혜에 의지하기 보다는 방법과 수단을 배우고 요령을 배우는 일에 바쁘게 됩니다. 삯꾼과 참 목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바로 정서입니다. 삯꾼과 참 목자의 배경적인 차이는 정서입니다. 여러분 요즘은 야경꾼들이 없죠. 방범대원들이 돌아다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어렸을 때는 호루라기도 없었는지 나무대기를 들고 딱딱 치면서 다니는 야경꾼들이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돈 주고 산 사람들입니다. 한번은 흉기를 휘두르는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뛰어가서 방범인지 야경대원인지를 불러 왔습니다. 칼을 휘두르면서 싸운다고 저기라 하는데 ”어디 어디 여기?“ 그리고 이쪽으로 도망을 갑니다. 왜냐하면 삯꾼입니다. 그럼으로 쉽게 사역에 뛰어들지 말고 철저하게 자기 훈련의 기회를 가지십시오. 고난을 이기십시오. 역행해서 인내하는 방법을 배우고 문제가 생기면 인간의 머리로 해결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이 해결하는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거룩한 정서도 그 과정에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한마디로 불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정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쓰인 것입니다. 제가 오늘 예를 한없이 들어도 끝이 없습니다만 이 말이 진리인지를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지 제가 몇 케이스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차갑고 뜨거운 것은 결코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차가운 사람이었습니다. 뜨거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스테반을 죽일 때 돌 던질 때 거기서 가편투표라고 옷을 지키던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니까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어도 살아도 주를 위하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파도스입니다. 자 예를 들어 봅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생애를 보면 결코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차가운 논리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애굽 병정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사건을 재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가 된 다음에 어떻게 변했습니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 하시려거든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주시옵소서. 생명책이 무슨 술집 장부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지워버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모르고 지금 농담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이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영광을 위해서 자기 이름쯤 지워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교한 다음에 5장에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아모스의 애가라 흐느끼며 부른 노래라. 의의 선지자가 흐느끼며 5장을 썼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벌거벗은 몸으로 성내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이 이렇게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미친 짓 하면서 돌아 다녔습니다. 무엇이 시켰습니까? 열정이 시켰습니다.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골육지친 중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로다. 천국에서 죽어가는 내 동포를 보기 보다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내가 타 들어가면서 천국에서 즐거워하는 내 골육지친 보고 싶다. 평범한 정서입니다. “바울아 내 마음은 하나님이 너를 미치게 하는 구나.” 그리스도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내 소원은 이렇게 결박당한 것 말고는 당신들도 나처럼 이렇게 미쳐버리는 것이 내 평생소원입니다. 바울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미친 사람 아니면 이 시대에 피 묻은 복음 들고 나아가서 예수 믿으라고 증거 하다가 그 복음과 함께 세상에서 핍박받고 죽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미쳐야 합니다. 돌아 버려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선지서를 오래 가르쳤습니다. 특히 소선지서를 가르쳤는데 가르칠 때마다 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소 선지서 배우는 마지막 시간은 항상 통성기도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이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수님 선지서 특별히 호세아서를 잘 이해하고 공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목사님 되겠습니까? 무슨 책이 좋습니까?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우선 성경을 많이 읽어라. 그리고 주석을 보기 전에 호세아의 마음이 되어라. 성경을 많이 읽다보면 호세아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호세아의 마음 호세아의 정신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럼 어느 정도 그 정신이 들어와야 합니까? 좋은 질문 했다. 강남에는 퇴폐적인 거리가 많습니다. 나는 못 가봤지만 로데오 거리부터 시작을 해서 햄버거 하나에 9800원이라고 합니다. 그런 로데오 거리부터 시작을 해서 강남의 카페 골목 압구정동 방배동의 먹자골목 별 골목이 다 있습니다. 이제 시험해 볼 때가 됐겠지? 네가 정신을 많이 먹은 다음에 네가 압구정동을 가는 거야.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헤맸지만 너는 압구정동을 가는 거야. 그래서요? 압구정동을 가서 거닐어 보는 거야. 그러면 거기에는 온몸을 다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정신 빠진 여자도 있고 얼굴을 칼로 다 깎아 가지고 조각처럼 만들어 다니는 얼굴에 돈을 바른 성형 수술한 미인도 있겠지? 그리고 열고 들어가면 술집도 있고 카페도 있고 야한 영화를 상영한다는 그런 술집도 있겠지? 가보는 거야. 그래서요 교수님? 가보는 거야. 어떻게요? 다 걸어 보는 거야. 걸어가면서 아이고 좋네. 야! 저런 여자하고 한번 살아보면 좋겠네. 이렇게 되면 아직 멀은 거고 호세아의 정신이 젖어서 그 거리를 걸어가면 그때 그 사람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그 아름다운 여인이 너와 거의 관계없이 보이고 불쌍한 영혼으로 보이고 외제 승용차를 몰고 돌아다니는 그 오렌지족들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로 달려가는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할 텐데 네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할 텐데 그러면 이제 너의 마음속에 뭔가 타오를 꺼야. 그래서 어쩔 줄 모르는 뭔가가 타오를 거야 그때가 되면 이제 호세아서를 연구할 준비가 되는 거야. 호세아는 이스라엘 시대의 백성들에게 8세기에 예언 했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호세아의 반복이 아닙니다.
또 다른 호세아의 분신이 나타나서 이 강남의 거리에 이 서울의 거리에 예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선지자들 속에 있었던 것은 진리와 신념과 사랑입니다. 하나 더 재미있는 질문 하나 해 볼까요? 고멜을 수없이 찾아 왔지 않습니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미칠 것 같은 사랑입니다. 나가서 바람피우고 다른 남자의 애를 낳아서 왔습니다.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미워해야 합니다. 못된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입니다. 속에서 이 상황을 보면 이 여자를 미워해야 하는데 사랑은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헷세드가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아가페가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 그것이 누구의 마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는 그렇게 철저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하여튼 시기별로 신학을 하면서 세 단계를 거치게 하셨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의 정서를 깊이 느끼게 한 단계 교회를 깊이 사랑하게 하는 조국교회에 대한 사랑의 계기 그 다음에 이 민족에 대한 사랑의 정서를 갖게 한 물론 내가 사랑하는 방법과 정치가들이 사랑하는 방법은 틀리겠지요. 중요한 것은 표현이 아니라 마음 아니겠습니까? 삶과 역사의 현장에 대한 정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정서와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역사와 삶의 현장에 대해 느끼는 정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정서와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와 관계없는 교회의 영성 복음전도 개인적인 삶과 단절된 신비한 영적체험 모두 거짓말입니다. 역사의 오류 모든 정서가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열광적인 정서는 바알 선지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자기 몸을 칼로 가르면서 바알의 능력을 고대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 바알 선지자들의 그 열정을 우리는 거룩한 열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열광입니다. 관심의 열광 그러나 거룩한 선지자들에게는 신령한 정서에 타오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정서 한 복판에는 쓸데없는 열망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불변의 법입니다.
(찬송)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불변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날을 하바국 선지자는 그리워했습니다. 그 그리움과 목마름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너 왜 살아 있냐?’ ‘혹시나 해서요.’ ‘뭘 혹시나야?’ ‘혹시 하나님이 날 쓰셔서 이 땅에 물이 바다를 덮움과 같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지식이 공법이 이 물 같이 정의가 하수 같이 흘러가는 그런 복된 세상이 올까 혹시나 하고 살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저는 전문적인 역사가는 아닙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저는 한국 근대사를 읽으면서 확실히 근대사의 여명기에는 민족의 역사가 교회의 품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끌어안고 씨름하고 눈물 흘리며 닦아주고 피 흘리면 씻겨주고 했습니다. 이제는 상관이 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역사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마이너리티의 말하자면 열광적인 자리로 끝나기 쉽다는 말입니다. 민족의 역사를 껴안고 교회를 가슴에 품고 그리고 말하자면 고난을 받으면서 이 민족의 역사의 앞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러한 정서적인 준비를 잘 갖춘 후에 하나님의 영광의 사역을 위해서 아름답게 쓰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서적인 거룩한 열정과 신령한 사랑으로 불붙는 사람들이 되어서 뭔가 이 역사의 한마당에 나타날 때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시대를 향해 외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영적인 준비 : 경건과 능력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中)
오늘 이 시간에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에 형제 된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역사적인 하나님의 쓰심에 준비하는 미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꿈은 꾸지만 그러나 미래에 대해서 올바로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가슴에 먼저 새기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곧바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준비하고, 역사를 사랑하면 미래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그 날을 대망하며 하나님 앞에 준비하는 것을 주께 하며 주님 앞에서 하듯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실 때마다 그 전환점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가득할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한 백성을 뽑아 내셨습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참다운 백성으로서의 기업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 가운데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선량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민족을 일으켜 세우심으로 당신이 누구신가를 보여 주기로 작정하십니다. 그 일들을 이루심에 있어 하나님의 시작은 갈대 상자에 누워서 나일강에 떠내려 오는 한 아이를 주목하시는 것으로 한 역사의 시작의 여명은 밝아 왔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진술은 이루 말하기 지루할 정도로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두운 때를 헤매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라고 하는 한 아이를 여호와 앞에 자라가게 만드셨습니다. 모두 다 타락하던 그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건한 어머니 밑에서 젖을 먹고 자랐던 그 믿음의 사람의 아들 한 사람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게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의 한 여명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조차도 이 같은 공식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요셉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뛰놀며 그리고 목수 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가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한 역사 아니 세상의 구원의 역사를 위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고자 하는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꿈도 아이와 함께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때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400년 동안 끊어진 캄캄한 암흑의 시대에 한 사람이 구원의 예약을 통하여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 오시는 앞길을 내기로 예정된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진부한 목소리가 아니라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그 어떤 목소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에 불타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대에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대를 향해 쏟아 놓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 시대에 알리기 위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 그 누군가의 출현을 하나님이 이 역사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밝은 태양이 떠오르고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 빛이 온천지에 빛나는 광명의 시대가 오기 전에 언제나 암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오기 전에는 새벽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찢으면서 비쳐오는 한줄기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사람을 통해 비췄습니다. 하나님의 빛이었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비치거나 자신을 통해 비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비췄습니다. 저는 부산신학대학에서 80절을 가지고 이미 네 번을 설교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반부를 중심으로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세례요한은 많은 준비 육체와 순결의 준비, 인격적인 준비, 그리고 성경과 지식의 준비, 학문의 준비 무엇보다도 거룩한 열정에 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의 준비를 갖추면서 함께 자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준비가 오늘 이 80절 말미에서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며 그 다음 심령이 강하여져 가고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으로 커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주 간난아이 때에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그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심령이 강하여지고’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주의를 끌게 합니다. 첫째는 ‘푸뉴마’ 라고 하는 이 심령과 강하여지고 라는 진행형 동사가 연결되어 지고 두 번째는 강하여 지는 것이 점진적으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고 마지막에 세 번째는 이렇게 점진적으로 강하여 진 것이 광야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심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인격의 가장 깊은 좌소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심령의 축복을 여러 번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강하여지고 라고 하는 것은 바로 power,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심령과 능력이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예고가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은 말합니다. 저가 또 ‘옐리아에 부느마’ 심령과 ‘듀나미스’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른 자를 음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을 때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마음의 길을 닦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완악했고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인지 모르며 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이 사실은 우리 일생 가운데 한 번의 증거를 통해서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18세기 위대한 신학자이며 복음 전도자이고 부흥으로 쓰임을 받았던 천재적인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드는 말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증거는 단 한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평생동안 계속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이 역사에 쓰임 받기 위해서 그가 마주 해야 했던 역사는 단순히 윤리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자기의 몸을 다 바쳐서 사랑으로 불사르기만 하면 세상이 저절로 바뀌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싸움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해서는 세례요한이 모든 지성과 학문과 인격과 정서와 사랑과 열정과 모든 것이 귀하게 사용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의 중요한 준비에 의해서 지지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였습니다. 능력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이미 이사야서에서 예언 되었지만 그는 소리꾼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토하며 그 시대를 향하여 너희는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러나 그가 꿈꾸는 사회는 단지 법을 지키고 정의롭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꿈꾸는 사회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열고 왕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역사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 거룩한 말씀의 영광이 꽃피울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실현되는 그 영적인 왕국을 꿈꾸면서 온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감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조국의 역사와 조국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시니 이 때이니이까?” 물어 보았습니다.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로 회복시켜 주시는 때가 이때 이옵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왕국은 말할 필요도 없이 구약 시대를 살아가고 예수님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고 그리워하던 왕국 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를 복속하고 그리고 그 나라가 와서 무릎을 꿇고 왕에게 조공을 바치던 그런 강력한 국권을 가진 영광스러운 나라, 그런 나라를 꿈꾸고 그리워했습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있으나 그러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뭔가 주님이 바라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과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각이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새 시대에만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오시는 앞길을 예비해야하는 이때에도 이미 적용된 말씀 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빵을 나누어 먹고 옷을 나누어 입는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중요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역사를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가지고 아파해야 합니다. 여러분 젊은 시절에 그것을 배우십시오. 나이 들면 쉽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 피 묻은 조국의 역사, 다친 다리를 끌고 온 이 조국교회의 역사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역사는 무관심한 다수가 써 내려간 것이 아니라 아파하고 끌어안고 고통 하는 소수에 의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기억되어 나갔습니다. 특히 복음적인 청년들에게 이 문제는 깊은 각성을 요구 합니다. 이제 조국은 말합니다. 교회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교회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를 퇴치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그리고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을 아낌없이 후원하고 기도하고 그들을 돕고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제가 아는 전도사님 가운데 한분이 부산에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이분이 어렸을 때 부터 마음에 한이 맺혀진 게 뭐냐면 교회는 맨날 자기들끼리만 좋아하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세상을 너무나 돌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내려와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정말 몸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와서 정말 열심히 지역사회를 위해서 일 했습니다. 그래서 쓰레질도 하고 가난한 사람 쌀도 퍼다 주고 정말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도 그 전도사님은 아주 성자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동네이니까 사람이 아파서 사경을 헤매면 교회에 와서 전도사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업고 뛰면서 병원비를 대주고 그런데 이상한 것이 교회에는 사람들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3년 지난 다음에 반성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오니까 교회는 문제 아니고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해택을 많이 받으면서도 교회는 잘 안 나옵니다. 그다음에 조용히 반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몸 바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줘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 입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면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안 일어났을까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한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민족과 역사와 이런 것에 대한 의식도 없고 그냥 예수 천당하고 우리를 누비는 그런 삶도 결국은 이 역사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60년대에 뼈저리게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그렇게 와서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해서 몰려 온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거운 짐이 되고 비게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 되지 못한 다수의 회중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못하는 비게 살이 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아주 훌륭하게 목회하시는 교계에서 존경 받는 목사님, 그분이 사석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가 내 마음대로 안 되기 시작한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비곗살이 끼는 것입니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들어도 복음은 머리에서만 감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보게 되면 큰 부흥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회개하고 삶이 변혁되는 역사가 일어 날 때 악을 쓰고 그 부흥의 불길을 끌려고 역사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17세기 아일랜드나 아니면 18세기에 뉴잉글랜드에서 부흥이 일어 날 때 정말 웃을 수 없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화) 제가 잘 알고 있는 형제 목사님 가운데 한분이 윤락가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참 귀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그런 사역을 후원해야 합니다. 그 룸살롱을 누비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두들겨 맞고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다. 그 창녀들이 목요일이면 룸살롱 구석에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누군가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눈물을 씻겨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 생활을 청산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입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기술도 없습니다. 어느 직장을 택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주님은 믿고 싶습니다. 이것이 딜레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제로 빼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 공부하고 오늘밤에 또 몸을 팝니다. 내일 아침에 회개하고 모래 또 몸을 팝니다. 글피에 또 성경 공부하고... 어떻게 해야 이것이 종식이 되냐는 것입니다. 돈 문제 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고민해 봅시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아주 멋있는 해답을 18세기 부흥이 준다는 것입니다. 한 도시에 부흥이 일어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고 창틀에 매달려서 그리고 말씀을 전하니까 사람들에게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뭐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왔습니까? 뭐가 새롭습니까? 하나님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살면 하나님께서 혼내십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술꾼들이 밤에 나와서 술 먹으러 술집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을 갔는데 한집도 문을 열은 집이 없습니다. 그 술꾼들이 ‘도대체 이것 무슨 일이냐? 평일인데 왜 문을 열은 술집이 없냐? 가만 있어봐 저기 뭐가 붙어있잖아.’ ‘오늘부로 패업함. 어젯밤 술집 주인이 회개하였음.’ 그러면 어때. 그것을 하는 것 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 확실히 이제 이 길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길인지를 내가 알았습니다. 나를 정결케 하시고 주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싫다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생활 청산은 못하겠는 것입니다. 한 달에 이삼백만 원 수입이 되거든... 정답이 있냐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몸부림치면서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 윤락가 가서 복음 전하고 예수 믿게 하고 새사람 되도록 애쓰고 그래서 그를 이끌어 나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로 하여금 옛 생활을 단절하고 주님께로 이것은 누구만이 하실 수 있습니까? 성령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 마음 알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쪽으로 치우친 것입니까? 저쪽으로 치우친 것입니까? 제 마음 아시겠습니까? 한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다 끌어안으면서 마지막 궁극적인 해결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나 가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모습을 갖춘 윤락녀, 이것이 성경에서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몸 파는 여자,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라도 안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능력이 임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가서 전해 주어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안가면 누가 가겠습니까? 만나는 손님이 와서 복음 전하겠습니까? 동침하는 남자가 예수 영접 시키겠습니까? 소외되고 버려진 그곳에 우리는 가야 합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분은 우는 자와 함께 우셨습니다. 고통 하는 자와 고통하고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싸안고 고뇌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안일하지 않습니까? 은혜받기 위해서 여러분 왔겠지요? 은혜 주시면 뭐 할 것입니까? 힘들게 살아가던 그리스도인의 삶, 편하게 살아 보기 위해서 은혜 받으려고 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픕니다. 능력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은 가시밭길입니다. 권능이 충만한 사람들의 삶은 핏길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주님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 조국의 역사에 주님이 오시면 어느 자리에 앉아 계시겠습니까? 아름답게 지어지고 카펫이 깔려져 있고 몇 십억씩 하는 오르간을 가져다 놓고 예배를 드리는 그 로얄박스에 예수님이 앉아 계시겠습니까? 나는 사회사업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를 보십시오. 한 민족의 역사와 단절했던 모든 신앙의 운동은 파멸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고사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외면되었습니다. 물론 사상에 따라서 어떻게 이 역사를 가지고 고민하는가 하는 것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무슨 신앙이냐고 묻고 싶지 않습니다. 교단이 어디냐? 합리주의냐? 자유주의냐? 나는 그것을 묻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적이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민족의 역사 여기에 대해서 고뇌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원에 가거나 부흥에 모인 수많은 군상들을 보는 것입니다. 박수치고 북소리에 맞혀서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그리고는 도대체 바뀌지 않은 삶을 그대로 짊어지고 세상에 내려가는 사람들 무슨 역사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폴란드가 공산화 될 때 95%가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한 것 없이 조용히 공산화 되었습니다. 숫자를 가지고 기독교의 세력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문제는 뭐 입니까? 돌이켜 서야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낮은 자를 찾아가고 그들과 함께 고통하고 슬퍼하고 우는 것까지는 우리의 인격으로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변화 시키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누구의 힘입니까?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려가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을 깎고 돋우는 일 이었습니다. 높은 산은 낮추고 그 다음에 꺼진 웅덩이는 높이는 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적인 힘을 가져야지만 할 수 있는 일 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사역을 위하여 복음의 섬김을 위하여 영적인 준비가 필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기술이나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역에 영적인 섬김에 필적 할 수 있는 거룩한 단련과 준비가 없이는 수행 할 수 없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성공은 세상에서의 차원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역사를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6장에서 윤리적인 권면을 합니다. 아비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종과 상전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실제적인 윤리적인 삶의 권면에 마지막에 가서 뭐라고 말 하냐 하면 정말로 너희는 주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여 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심과 주를 입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름은 결과 유괴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정서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나오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나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남편을 존경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그 가정이 찢어지고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윤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어떤 세력이 들어와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오해를 깊어지게 만들고 영적인 갈등이 생기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식을 온유함으로 기르고 싶은데 그것이 그 뜻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부모에게 순종하고 싶은데 그 안에 불순종의 요소들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빛다운 삶을 살고 싶은데 못하게 되는 것은 단지 윤리적인 훈련의 부족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소양도 중요 합니다. 그러나 소양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뭔가 이렇게 쌓여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뭐냐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의 주관자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이 구약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복음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도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구약의 궁극적인 의미를 들어내는 일관된 해석 이었습니다. 성령강림 후에 있었던 사도들의 중요한 임무도 구약을 통해서 신약시대에 일어난 이 위대한 그리스도 구속의 사건과 성령강림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 이었습니다. 두 사역 모두 영적인 사역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들에게 놀라운 능력이 필요했고 엘리아가 그 점에서 모든 세대의 말씀 사역자를 복음을 전하고 자 하는 우리들에게 선명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엘리아의 능력으로 와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앞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완강하고 무지하고 어두웠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능력이 피하신 그래서 사람들 마음가운데 비추는 2년 정도 되는 아주 짤막한 세월을 살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계의 중요한 인물의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역사의 변혁이었습니다. 이 역사를 뒤집어서 혁명적인 변혁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부를 거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 역사를 바꾸는 것도 이 민족을 바꾸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민족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아직도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등소평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파리를 등소평이 활보하던 그 시기에 누군가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만들었다면 중국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훌륭한 미래를 향한 투자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을 향해서 쏟아 붓는 것입니다. 언젠가 손봉호 교수님하고 하루 저녁 같이 잘 시간이 있었는데 교제를 하는 가운데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국 교회 정신 차려야 한다. 무슨 백 몇 억 삼백억 사백억 이제는 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드려서 교회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자기가 화란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그렇게 지은 교회들이 백년이 되지 않아서 다 부서지고 팔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 팔리고 디스코텍으로 바뀌고 슈퍼마켓으로 바뀌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건물이 없어서 교회가 망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없었습니다. 누가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그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영적인 사람들 그 교회를 채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해 돈 들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 말하자면 투자를 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강하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약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적에는 약했습니다. 그가 무슨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 광야에서 강한 사람으로 변해 갔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몇 년 하셨습니다. 무슨 찬송 좋아 하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갑니다.
험한 세상에 나 혼자 있게 마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거친 비바람 불어 올 때 나를 보호하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참 곤고하던 시대를 이 찬송을 지체들과 부르면서 마음이 많이 찢어 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은 이 찬송은 몇 달에 한번만 불러야지 맨날 부르면 안 됩니다. 도대체 패잔병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아놓고 무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습니까? ‘싸우러 가기는 가지만 질주를 믿사옵나이다. 그러면서 가는 사람들 그리고 돌아와서 지치고 깨졌사옵나이다.’ 그것이 뭐 자랑입니까? 물론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우리의 찢어진 마음 고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매일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재능과 외모를 가지고 역사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꼼꼼히 준비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얼마나 꼼꼼히 준비 했는지 준비를 듬성듬성 이야기 하는 데만 4일이 걸렸습니다. 정말 꼼꼼히 준비 했습니다. 인격적으로 학문적으로 그리고 정서에 있어서 순결에 있어서 준비 했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그러나 인격이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인격을 믿고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습니까? ‘내가 30년 동안 고매한 인격을 닦았는데 지들이 내 말을 안 듣겠어?’ 하고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광야에서 지식적으로 잘 준비했습니다. 지식을 믿고 역사에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광야에서 독학은 했지만 박사학위 서너 개 딴것만큼 공부했는데 그래도 내말 안 듣겠어?’ 그렇게 해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순결한 육체로 준비했습니다. ‘나같이 경건한 사람이 있나 나와 보라고 그래? 내가 이렇게 자매도 가까이 하지도 않고 장가도 가지 않고 순결한 몸으로 나오는데 지들이 내말을 안 듣겠어?’ 그것을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또 그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사람과 역사를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그 타락한 제사장들 ‘나같이 이렇게 진실하게 이 민족의 역사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렇게 해서 역사에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꼼꼼히 준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준비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었던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성경의 예화 하나를 오늘 다른 각도에서 또 한 번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몇 번째 돌멩이로 사태를 종식 시켰습니까? 첫 번째입니다. 그런데 통에는 몇 개가 있었습니까? 그러면 4방은 헛발 할 것을 각오하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한발 그것으로 사태를 끝냈지만 그는 다섯 개를 준비 했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잘 먹고 잘 살다가 갈 곳으로 가는 길을 택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갔습니다. 물매를 던졌습니다. 이것 생전 처음 해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왕년에 수없이 해 봤습니다. 지금도 중동 지방에서는 50미터밖에 담배 한가치를 세워 놓고 여섯 살 배기 어린 아이들이 이것을 던져서 정확하게 맞춘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 그런 것이 생기면 그 아이들이 금메달을 싹 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사자가 슬금슬금 나옵니다. 어디 양떼들한테 덤벼들라고 저것을 맞추기는 맞추어야 하는데 어디를 한번 맞출까? 왼쪽 눈을 한번 맞추어서 애꾸로 만들까? 콧등을 부려 뜨려 버릴까? 이빨을 모두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버릴까? 마음먹으면 거기에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의하던 관습대로 나간 것입니다. 그는 겨냥한 곳이 있었습니다. 온몸 어디를 맞아도 안 죽게 생겼습니다. 딱 한군데가 있는데 그것이 폼을 내느라고 요렇게 만든 것입니다. 거기를 맞추면 되겠습니다. 물매를 돌리며 뛰어 나갈 때 오랜 세월동안 연습해 오던 물매였지만 물매에 던지는 기술을 의지 했습니까? 하나님 의지 했습니까? 그럼 퀴즈를 내겠습니다. 몇 대 몇 입니까? 50대 50? 그럼 30 대 70? 하나님 70 기술 30. 0 대 100입니다. 다 준비 했지만 준비한 것 가지고 해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구 의지 했습니까? 하나님 의지 했습니다.
놀랍습니다. 목회사역을 하거나 복음 전도를 위해서 수고하는 일꾼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주시나 했더니 ‘내가 이렇게 준비가 다 되었는데 세상 정말 나 몰라 볼 거야?’ 화내면서 ‘나도 세상이 아무리 오라고 해도 안 가.’ 이런 사람 안 씁니다. 그러면 준비도 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안 쓰십니다. 열심히 그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준비 되었습니다.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는데 그런데도 하나님 주님이 나 안 밀어 주시면 어떻게 주님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 하나님이 만나면 밀어 주십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놀라운 준비를 했지만 전혀 그 준비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누구? 하나님만을 의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자기의 심령이 점점 강하여져 가는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져 간 것입니다. 제가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를 제법 많이 다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은혜 받고 싶은 젊은이는 많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 안 받으면서 사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잠깐 동안은 괜찮은데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고 싶어서 휴가도 반납하고 회비까지 내고 교역자들한테 야단맞으면서도 불편한 수련회를 쫒아 옵니다. 그런데 은혜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소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정말로 삶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 영적으로 강하여져 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약합니다. 대포 소리 들으면 깜짝 놀라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치루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총을 쏘고 대포를 쏘던 1차 대전 같은 시대가 있습니다. 그때에 전쟁터에 나가는 말을 어떻게 준비 시켰는지 아십니까? 귀마개를 해 놓고 옆에서 계속 대포를 쏘는 것입니다. 그러다 귀마개를 하나씩, 둘씩 벗기는 것입니다. 그 훈련을 안 받고 말이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막 뛰어 가다가 꽝하며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사로서 말하자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말미암는 복음의 놀라운 변혁을 위해서 영적인 전쟁의 한 마당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군기 아래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강하여 진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재능과 외모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 능력은 천차만별입니다. 바울도 내가 알고 예수도 내가 알거든 너희는 누구냐? 귀신이 물었습니다. 귀신의 세계에서도 기억해 주는 영적인 인물이 있고 기억할 필요도 없이 무시되는 인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까? 레오날드 레이븐힐(Leonard Ravengill)이라고 하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기록될 뿐만 아니라 지옥에도 기억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악한 세력들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강력한 세력에 의해서 쫓겨 나가는 귀신이 있다는 사실을 볼 때도 영적인 능력에도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한 역사를 움직이셨습니다. 우리의 꿈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한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내어 보내시기 직전에 하늘로부터 커다란 능력의 부으심을 한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놀라운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말하자면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힌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는 또 한사람의 선지자가 되어 주어서 나타났습니다. 그의 특징은 능력 이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한 순간에 특이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를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우리는 그런 능력의 부으심을 사모하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꿈꾸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번에 부어 주심이 그를 선지자로 만들기 전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영적인 힘과 특성, 영적인 자질들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학교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입학하기 전에는 기도의 영을 간직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영적인 은혜가 깃들여 있던 사람이었는데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마치 그런 열렬한 기도생활과 뜨거운 복음 전도의 열정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이 촌스러운 가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학교에 훌떡 집어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찮게 여겨 잃어버려 지도록 자신을 방치 합니다. 관념과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는 신약적인 개념을 몇 가지 손에 쥐는 대가로 이런 영적인 삶들을 하챦게 버리고 맙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예화) 제가 잠깐 강의를 나가던 신학교가 있었습니다. 한 학기 정도 나갔습니다. 전부 해서 3학기 정도 나갔는데 순복음 계통의 어느 신학교였습니다. 순복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학교에 가서 수업시간에 기도할 때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긴 수업 들어가기 전에는 찬송을 하나 부르고 들어가는데 학생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하는데 저쪽 뒤에서 엎드려서 흐느껴 웁니다. 내가 몇 학교 다녀 봤지만 여기 참 좋구나. 정말 애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 학기 못 나갔는데 그러다 2년인가 3년 있다가 다시 한 학기 나갔는데 어떻게 그 시기에 학교가 그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입학할 때는 똑같은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3년쯤 학교 다니고 나면 “교수님 저도 아무래도 할 것이 없는데 외국 가서 박사학위 받고 신학자나 되어야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50살 먹은 신학생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지적인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답안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자는 획이 틀리고 한글은 맞춤법이 틀리고 영어는 알파벳이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답안지에 일본어까지 썼는데 일본어는 나도 모르니까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럽니까? 들어 올 때 인생 마지막 길에서 예수 만나고 그리고 몸 밖에 드릴 것이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리고 막판에 복음을 위해서 들어 왔는데 3년 다니는 동안에 그 기도의 영, 내 생활, 말씀에 순종하는 어린 아가 같은 믿음 팔아먹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한 가지 확신입니다. ‘나도 신학하면 될 거야! 나도 한번 막판에 이름 한번 띄어 볼 거야.’
(예화) 프란시스 쉐퍼라고 아주 존경받는 기독교 사상가가 있습니다. 그분이 쓴 책 가운데 복음주의 위기 또는 재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정말 눈물 없이 읽을 수 있는 사연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한사람이 아까 말씀 드린 것 같이 복음의 열정에 불탑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 간 것입니다. 들어가는 첫 학기부터 껍데기를 벗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보면서 “너 신들렸냐?” 신학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은 촌스러운 것이다. 벗겨 버립니다.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 합니다. 그런 것은 신학생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창세기는 신화고 출애굽기는 꾸며낸 역사고 레위기는 여러 개의 문서가 짜깁기 되고 계시록은 사기꾼들이 만들어낸 조작이다. 그러고 보니까 가죽 껍데기 두 개가 남습니다. 그런데 심각하게 그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막판에 이 사람들이 귀신 들려 버립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무당을 찾아가서 스피리추얼리즘(spiritualism) 영매술에 빠집니다. 막판에 완전히 패인의 인생을 가면서 마지막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쉐퍼 박사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박사님 나는 은혜를 받고 떡을 얻으려고 신학교 들어 왔는데 신학교에는 나에게 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속으로 많이 흐느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오늘날 우리를 향한 경고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문은 강력한 신앙의 다스림 아래서 관념은 건전한 말씀의 통치 아래서 다스려지지 아니하면 좋은 지식들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고갈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지식을 그런 영적인 자질을 주고 살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신학함의 오해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 신학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만 우리의 신학의 차원에 일반적인 신앙의 생활에 대해서 말해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전히 좋은 것입니다. 여전히 뜨거운 의미의 생활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감격하는 삶이 여전히 좋은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깊은 보람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끝내고 난 다음입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끝난 다음에 모든 교인들이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바닥에 엎드려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검은 머리를 헝클이며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온 나날들, 무너지는 자신의 가치관을 부여잡고 하나님 내 인생 어떻게 치료해 주시옵소서. 내가 너무 어리석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애처롭게 울어서 다른 사람이 교회에서 기도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가까이 가서 어깨를 두드립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안 무너집니다. 그리고 세상도 너무 안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언제나 마음을 녹입니다. 뜨거운 기도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절한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우리들을 쓰실 날을 기대하며 우리의 영적인 삶이 나날이 강하여져 가는 이런 놀라운 영적인 자질들의 함양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가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예수를 믿고 회개하던 때에는 그렇게 뜨겁고 간절하던 기도가 집사님쯤 되고나면 식어지기 시작합니다. 신학교 들어 올 때 불같은 기도가 그래서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그럽니다. 1학년 클래스 강의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성령 충만하니까 말도 제일 잘 듣습니다. 레포트 많이 내줘도 아멘, F를 맞아도 주여!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뜨겁게 1학년들이 기도하고 있으니까 3학년이 와서 초 치는 것입니다. “야! 그만해 임마 우리도 한때는 다 그랬어 메뚜기도 한 철이야, 3학년 되어 봐. 철 들 때가 있어” 그리고 나서 졸업할 때쯤 되어서 이미 완전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졸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벗겨졌을 때 그때 인제 대학원 졸업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 보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요령을 피워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다시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껏 7년 가르쳤더니 나가서 하는 소리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 모조리 헛것이다. 그러면 뭡니까?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사람은 무슨 보람이 있습니까? 내용은 사라져 버리고 차가운 형식이 지배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어찌하든지 여러분의 가치를 이제는 어디에 둘 것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그 쓰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준비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되자는 운동이 한국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사도들의 후예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권능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일들을 위해서 영권을 가지고 나아가 싸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의 선포는 낡은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에 다 나오는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세인 앞에서 많이 듣던 말이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서 나오니까 달리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한 설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족보도 없고 추천자도 없는 이단의 비슷한 들사람들에 나와서 세례를 받게 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담대히 꾸짖었는데도 그들은 쩔쩔매매 살아온 새로운 삶의 방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미래를 예비하는 길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말씀의 사역이 영적인 사역임을 복음 전도의 사역이 정말 신령한 사역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이러한 능력이 세례요한 앞에서 강화되어 간 것은 그의 심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능력은 심령이 어떠한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에 힘입었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목사나 전도자들만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성도들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사람들 같은 사자와 같이 만들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사역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말이 어눌해서 잘 말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뭔가 복음을 전해야 될 텐데 어떻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보고 우리 집에 다 모여 내가 뭐 줄게. 그래서 사람들이 건넌방에 모이니까 목사님이 써놓은 설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말 못하니까... 그 설교 집을 읽을 때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으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만들었습니까? 성령의 권능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 아주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냐면 참회가 없는 것입니다. 근본이 바뀌는 정직한 회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신학교를 섬기는 어느 장로님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 저는 장로지만 회개하라는 간절한 외침을 설교단에서 들어 본 것이 30년 전입니다. 여러분 바뀌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가득 채우면 그 교회는 라오디기아 교회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회심해야 됩니다.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책망 받고 거룩한 삶을 촉구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으로 가득해지는 것과 성도가 많아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우정으로 충만해 지는 것과 신령한 은혜로 가득 차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모이는 것은 성령이 아니어도 할 수 있습니다. 모여서 사이좋게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신용협동조합 같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인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며 이 교회의 정직한 회원으로 남는 것은 성령이 죄를 책망하시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은 이러한 능력이 자기 속에 강화되어 갔습니다. 그가 어떠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살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흔적이 있지만 이제는 단지 능력을 받았던 자로 기억되어야 좋을 사람이 있습니다. 위장과 허위로 예전의 능력이 있는 자로 행세하려고 하지만 분명히 말씀과 복음사역 속에 뭔가 빠져나간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심령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결하게 보존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하늘나라의 능력이 역사 하겠습니까? 거룩한 삶을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룩한 성령이 오시겠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할 때 가룟 유다는 제외 되었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는 한때 그러한 능력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이 돈을 사랑하게 되자 그의 심령에는 능력이 사라지고 사단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구약에서 더욱 극명하게 들어 납니다.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시고 악신을 임하게 하시기 전에 사울의 마음이 심령이 하나님 앞에 변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안타깝게 ‘주여! 성령이 내게서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라고 애원한 것은 범죄한 후였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은 그의 구원은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 분명히 계시고 떠나실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범죄하자 그는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고 사라질 것 같은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쁨이 사라져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심령이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것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사리 누리게 된 그 놀라운 영적인 특권들 그 놀라운 첫사랑의 축복들, 그 놀라운 영성들을 하찮게 잃어버리고 육체로 영적인 일들을 감당하려고 하니 그것은 마치 바퀴 잃은 수레를 힘으로 밀고 가려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언덕위에 땅을 개간해 놓았는데 아무리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비가 올 기미가 없습니다. 작물이 타 들어 갑니다. 할 수 없이 이 농부는 아래 계곡에서 물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20분, 30분 걸어서 그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리에 넣어서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물을 다시 가져 오려고 내려갔다가 한 초롱 두 초롱 길어 오니까 뿌린 물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짓을 하루 종일 했는데 그 다음날 나와서 보니까 햇빛은 또 비치고 어제와 똑같이 작물은 타 들어 갑니다. 이제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저앉아서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늘에서 먹구름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딱 십분 왔습니다. 그런데 땅이 흠뻑 젖고 잠시 후에 와보니까 그 모든 작물들이 소생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음 이것을 전하며 복음사역을 감당해 나가려 하는 이 일과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시는 은혜와 도움을 통해서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흥을 기다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흥은 우리가 수십 년 동안 할 수 없는 그 일을 위대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을 변화 시키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면 역사도 변화 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어도 만약에 우리가 복음으로 이 민족의 역사, 이 교회의 변혁을 위해서 승부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꾸는 일에 작은 기여밖에는 못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절망적인 일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안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한번 변하는지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예배드리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밀려와서 자기의 옛 삶을 드러내고 묵었던 상처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물의 회개를 드리는 것이 언제이었습니까? 몇 년 전이었습니까? 눈에는 눈물이 마르고 가슴에 불이 꺼져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도와 형식의 틀 속에 안주해 버리려고 하는 교회의 속성과 그리고 안일한 메시지에 위로를 받으면서 그렇게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원의 표 하나를 가지고 위안을 받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행심 어린 회중의 종교 심리와 그리고 종교적인 습성 이것들과의 사투가 없이는 교회를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변화 받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 찬 교회는 하나님에게 고통입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는 단지 교회에 운영비를 대고 목회자의 생활비를 대는 물주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아무 기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당한 때 거대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떠오르는 것을 우리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조국 교회의 역사에 필요한 사람들은 바리세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아닙니다. 글자 하나를 가지고 따지고 논쟁하는 말하자면 현학적인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태와 형식에 젖어서 하나님의 면전 의식 없이 살아가는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세워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를 그런 사람들로 역사는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가며, 누가 이 민족을 위하여 나를 대신하여 나아갈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깊이 절망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부정한 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만군의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고통하며 괴로워하며 흐느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 때문입니다. 무능력하고 죄악 되고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절망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펼쳐진 우리의 사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 잘 믿다가 복음 덕으로 십자가를 타고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담보로 하여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이 세상의 안락이나 누리다가 역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딸랑 천국의 티켓을 들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가 그 사람의 추구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참된 복음을 만나면 만날수록 뭔가 내가 생각했던 기독교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기독교와 다르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았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어두운 세상을 살았는가를 보십시오. 영혼이 거듭난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거듭 났습니다. 삶의 꿈이 거듭 났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 앞에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 여호와 앞에 돌아오는 것이 꿈 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누구신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리고 그 사랑을 하나님 앞에 세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온 몸으로 복음의 삶이 무엇이고 그리고 이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우리가 핏빛으로 살아야 될지 어떻게 이 어두운 시대를 안락을 미워하고 명예를 미워하고 안일한 삶을 청산하고 우리 앞에 살아갔던 위대한 영적인 거인들과 같이 한 시대의 개벽을 알리는 외친자의 소리로 살아야 될 것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빛은 언제나 어두움보다 소수입니다. 소금은 언제나 아주 작은 것입니다. 작은 자라고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언제든지 불신자가 다수였습니다. 교회는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잠자는 사람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역사를 온 몸으로 고난을 받으며 지나갔습니다. 문제의 많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님이 깨우신 영적인 부흥과 각성을 위해서 부르짖으며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의 역사를 온 몸으로 그 고난을 맞으며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영혼을 만지고 지나 가셔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들 먹고 마시던 시대에 산성에서 토굴에서 외로운 교회당에서 금식하며 그 시대를 지났습니다. 모두들 춤추며 노래하던 시대에 그들은 흐느껴 울며 역사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모두들 희망이 있다고 말하던 시대에 그들은 아파하면서도 절망을 말해야 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하나님만을 의지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개울이 흐르고 꽃피고 벤치가 있고 아기자기하고 발 담그고 놀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뜨거운 열사의 햇볕이 내리 쬐고, 밤이면 추워서 모닥불을 지펴야 하고, 어두워지면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무서운 광야입니다. 세례요한은 그곳에서 컸습니다. 그 외로운 광야에서 바람 소리를 친구삼아 고독을 이웃삼아 하나님 앞에 커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광야는 어디 입니까? 그곳으로 나가야지만 가물지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광야는 어디 입니까? 형식적인 예배생활, 건성건성 나와서 듣는 신학교 수업, 건성건성 나와서 봉사하고 헌금이나 몇 푼 내고 돌아가는 의식 없는 예배의 삶 그런 것은 결코 광야가 아닙니다. 그런 데에서는 하나님 만날 수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세례요한이 하나님을 그렇게 크게 만난 것이 빈들 이었습니까? 왜 광야였습니까? 왜 따뜻한 가정이나, 도서관이나, 예루살렘의 거리나, 핫도그 집이 아니었습니까? 왜 하필이면 이 외로운 광야에서 그것도 삼시동안이 아니라 피눈물 말리는 것 같은 혹독한 연단이 30년이나 흘러간 다음에 사역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구별된 삶을 살고 거룩한 심령을 가진 자의 마음속에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들은 영혼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 시켰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너 참 예수 잘 믿는다. 너 만큼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어디 있니?’ 그렇게 말해도 그들의 마음은 허 했습니다. 뭔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내 마음속에 있는 이 놀라운 갈증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 마음속에 사무치는 이 무엇인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위해 살기 위해서 한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지만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인내의 밤을 슬기롭게 지냈습니다. 고통과 멸시의 밤을 지혜롭게 보냈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어두운 역사의 밤중에서 새벽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모두들 춤추며 노래하던 시대에 위기를 외치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혼의 시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고정시키며 당신을 찾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들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이 교회와 우리 안에 부어 주시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준비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완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고 고백하며 우리에게 거룩한 능력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이 교회에 거룩한 권세를 부으시기까지 하나님 앞에 그치지 아니하고 보좌 앞에 나아가 매달려 기도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함성으로 한 시대의 역사의 밤이 마감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앞에 고정된 심령으로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성령의 놀라운 권능으로 민족과 교회를 위해 충만하게 나타나게 될 영광스러운 복음의 때를 복음의 부흥의 위대한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던 그 사람들의 눈물의 기도가 마를 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부흥의 여명을 이 땅에 주셨던 것입니다.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사십시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훌륭하게 준비 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여러분 형식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광야의 빈들로 나아가서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드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의 소명과 준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