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빛으로 온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요 1:6)
녹취자 : 이시내
그런 질문들을 자주 받습니다. 기왕에 목회의 길로 들어섰는데 잘 하고 싶지, -장난하듯이 그렇게 목회를 하다가 마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지만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런 현실적인 질문들을 합니다. 사실 저는 좋은 선생님들을 몇 분 만났지만 그런 그림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그려주는 선생님들을 못 만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그 책은 제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그렇게 깨닫게 된 내용들을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정리해서 나온 책입니다. 거의 제 생각에는 10만부 정도가 팔리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고 요즘은 안 읽은 사람들이 그래도 꽤 있는데 예전에는 거의 모든 신학생들이 읽었던 책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이 책은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이 그때는 제가 거의 목회의 초년생이었고 이제 긴 세월을 목회하면서 이제 생애의 마무리를 해야 될 시점에서 아직도 한 10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지만 -은퇴를 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길게 보면 20년 정도 시간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렇게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저물어가는 인생을 바라보면서 정리한 책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입니다. 아직 1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년에 2권이 나오고 후년에 3권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그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사실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의 한 구석에 내가 예전에 그런 것들을 잘 몰라서 힘들게 보냈던 그 기억들이 항상 같이 떠오릅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게 접근을 해서 풍성한 신학적인 지식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개척을 해서 교회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이만큼 까지 왔으니까 나름대로 교회가 성장된 비결은 무엇일까 뭐 그런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식으로 설교를 준비하나 그런 것이 궁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뭐 다양한 관심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면 목회를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아주 좋은 것이고 또 학문을 많이 탐구해서 풍성한 지식을 가지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여러분들이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딱히 본받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잘난 척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슴에 확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나니까 우리 집사람이 자기는 다윗의 팬이라고 해서 다윗을 한번 보니까 사람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정말 본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요나단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이 정말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바나바의 인격이 더 훌륭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왔다 갔다 하면서 지조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것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정말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이 사람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인물이고 어떻게 보면 신약의 시작이고 어떻게 보면 구약의 끝자락에 서있는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설명으로 목회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잘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요1:6)” 일반적인 뜻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셔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좀 더 영적인 뜻으로 본다면 그가 태어났지만 그가 진짜 보내심을 받은 것은 서른이 돼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 동안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의하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제사장인 그 아버지가 이 아이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쨌든 예루살렘의 제도권 안에서 키우지를 않고 광야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리들 틈 속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그것이 에셈네파냐 하슬힘이냐 학설이 구구하지만 누가 그것을 확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보냄을 받고 거기서 자라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나니’라고 할 때 그 보냄은 육체적인 출생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사역이라는 면에서 보면 그는 그 광야에서 보내심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파송된 것을 뜻한다고도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보내심을 받기 전에 하나님 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설교를 하던, 목회를 하던 하나님 곁에 있다온 흔적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청교도를 좋아할 수도 있고 개혁신학을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칼 바르트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던지 그것은 각자의 자기 자유인데 설교할 때 드러나는 것은, 설교할 때 정말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바르트나 칼빈이 감화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가까이 있다가 온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인격과 삶, 언어, 모든 정서 속에 깃들여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기까지 빈들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기 전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칩니다. 광야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게 됩니다.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런 일을 하기 직전에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중요한 기사가 나오는데 세례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더라고 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것은 소위 구약의 선지서가 이야기하는 ‘와 이에 데바르 야훼’(), 곧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다’라고 하는 전형적인 선지자 소명 기사의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시대를 향해 외쳐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가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에 그게 바로 “메타노에아”(μετανοέω), 곧 ‘회개하라’ 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하고 세례요한이 서로 밀실에서 담합을 한 것도 아닌데 두 분이 각각 외친 메시지가 일치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처럼 결국) 목회자가 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역이 해결해 주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 신앙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결국은 신앙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되는데 어떤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 계기는 사역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화) 여러분 선배가운데 3, 4기쯤 인턴쉽에 형제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을 낳았는데 아내가 늘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신학생이 되어서 그렇게 기도 안 해서 이다음에 어떻게 목회하려고 해? 제발 기도 좀 해. 가서 제발 성경 좀 읽어.’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열심히 살던 아내가 쓰러졌습니다. 병원에 가보니까 위암말기입니다. 아이들은 이제 두 살, 한 살 이렇게 밖에 안 되었는데 위암말기입니다. 이제 막판에까지 오니까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밤마다 밤 12시가 딱 되면 간호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12시가 되면 동네에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6개월을 기도했는데 결국 사모님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몸부림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형제는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이 잘 되든 잘 안되든 이렇게 가슴이 아프도록 고민하지 않는 사역자들이 있는데 목사들만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사들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삯꾼 목자로 매우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삯꾼 목자는 삯꾼이 되려고 결심한 사람이 아니라 참 목자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뜨겁게 기도합니까? 안 합니다. 말씀을 부지런하게 탐구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열심히 탐구합니까? 안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못하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안 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안 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면 열렬히 기도 못하는 사람이 그럼 지금 마음을 먹으면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 모두 다 알지 않습니까?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진짜 외국에 있는 학자들도 만나면 이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을까? 할 정도로 학식이 뚜렷한 현저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이제 좀 위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때에 안 되겠다 나도 좀 유식해 져야지 하고 그 날 밤 책을 펴면 삼위일체 같은 어려운 책이 열렬히 읽힙니까? 안되지 않습니까?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안하니까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못하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으니까. 이제 그런 것들을 모든 삶의 방면에 확대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가 남자를 너무 좋아합니다.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절규하듯이 울부짖으며 말합니다. ‘내가 어디가 맘에 안 드세요? 내 살이라도 깎고 보기 싫으면 뼈라도 갈아버릴 용의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겠습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하거나 사역을 하기 전에 이미 주님을 깊이 만나서 주님 곁에 있다온 흔적이 느껴져야 합니다.
(예화) 18세기에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가운데 길레스피(Thomas Gillespie)라고 하는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는 사람은 아실 것입니다. 목사들이 무슨 일로 모였냐 하면 요리문답서(catechismus)를 작성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그 날 작성할 요리문답이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길레스피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으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길레스피 목사가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할 때 맨 처음에 adoration(경배)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지 않습니까? ‘거룩하고 자비로운신 하나님’ 이렇게 우리는 간단하게 시작하지만 옛날에 청교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찬양과 그 감격을 한 후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쭉 하나님에 관해서 adoration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 느껴진 것입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하늘에 있다가 땅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모든 목회자들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자, 우리 회의를 시작합시다. 이제 하나님에 관한 요리문답을 작성합시다.’ 그랬는데 한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잠시 전 조금 아까 길레스피 목사님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묘사하며 adoration을 하셨는데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에 관한 그렇게 명료하고 은혜로운 진술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요리문답으로 작성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래서 복귀하듯이 다시 길레스피 목사가 뭐라고 하나님을 찬양했는지 서술하면서 그것으로써 요리문답을 작성했습니다.
하나님 가까이 있다 온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 그분의 위대하심과 높으심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됩니다.
두 번째는 치열하게 학문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학생들은 공부를 너무 안합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이 현재 하고 있는 공부의 삼분의 일은 별로 쓸데도 없는 공부입니다.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책을 펴고 이리저리 점프하면서 쓰는 요약도 아닌 그런 가짜 레포트들이 목회자가 되는데 무슨 어느 정도의 유익을 주겠습니까? 자기가 소화를 해서 자기 사고와 지적인 능력을 증진해야지 그게 목회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그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되지 않습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를 안 합니다.
(예화) 제가 총신에서 석좌교수로 요청 받아서 가니까 학생들이 얼마나 열렬히 환영을 하는지 이틀 만에 수강신청이 끝났습니다. 학생들이 많아져서 강의실을 옮겨 주셨는데 학생이 120명인가 왔습니다. 한 학기 하고 나니까 한 30명으로 떨어졌습니다. 너무 은혜롭고 너무 좋은데 너무 지독하게 공부를 시키니까 2학점 짜리인데 8학점만큼 힘들다고 그럽니다. 그래도 불평을 못하는 것이 제가 한 학기에 책을 6권을 주었습니다. 받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학기에 9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매주 레포트를 내고 새벽기도 갔는지 안 갔는지 체크하고 전도 했는지 안했는지 7명씩 모아서 매주 학교에서 기도회를 해야 되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 그런데 이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한 2년 해보고 나서 손님이 하도 안모이니까 이제 저도 좀 바겐세일을 해야지 요새는 한 45명 정도 모여서 재미있게 공부를 합니다. 잘 격려를 해서 강의합니다.
그 때 진짜 공부 꽂혀서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총신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아마 거의 졸업을 했을 것입니다.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일주일에 한 3권씩 책을 읽어가면서 헬라어, 라틴어 공부에 도전받고 미친 듯이 공부하니까 어린 나이에 많이 외우고 갔습니다. 우리도 신대원 들어갈 때 하루에 라틴어 단어 150개, 200개씩 외우지 않았습니까? 다 까먹었지만. 그렇게 학생들이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학생들이 생겨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자기공부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하다가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목회 때려 치고 보따리 들고 유학을 갑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이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공부는 분석적이고 탐구적이고 학문적인 공부가 아니라 통합적이고 서로 말하자면 interdisciplinary(여러 학문 분야가 관련된)한 그런 공부를 해야 됩니다.
(예화) 우리 아들도 웨스트민스터에 가 있는데 유학을 갈 때 “뭐로 갈래? 그 돈이면 그 돈으로 가면 너 한 몇 억 날려야 될 텐데 아빠가 도와주지도 않을 것이지만 네가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하던지 뭘 하던지 전세금을 다 까먹고 날려야 될 텐데 나 같으면 그 돈으로 책을 사놓고 집에서 혼자 공부하겠다.” 학교에 가서 교수님한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김 목사님은 혼자 하셔도 되고 너는 가라” 그랬답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이 그렇습니다. Th. M으로 간 어느 학생이 그랬는데 “목사님, Th. M으로 배우고 있는데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고 목사님한테 다 배우다 간 내용들입니다. 차이점은 그 때는 한글로 배웠는데 지금은 영어로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월요일이면 여기서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인턴쉽이 끝나고 스터디 들어올 사람은 들어오십시오. 오 목사님한테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시험보고 들어와야 합니다. 영어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들어와서 공부하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다부지게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역을 하고 전임사역자가 딱 되면 공부를 못합니다. 교회에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관심사 자체가 갈라지면서 공부를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고 공부를 일평생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총신 다니는 학생들은 지겹도록 이야기 들었겠지만 한 번 총장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제가 고사를 했지만 학생들이 그러더랍니다. “김남준 목사님 오시면 절대로 안 된다고.” “왜 그러냐고 하니까 문제가 있냐.”고 하니까 “아니라고 너무 좋으신 분이고 너무 꼭 오셔야 되는데 우리 졸업한 다음에 오셔야 한다고. 공부안하고 태만한 사람들 학교 지하에 유치장 만들어서 가두실지도 모릅니다.” 존 오웬 목사님 그랬지 않습니까? 공부 안하는 학생 유치장에 가둬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총신 지하실에 철창을 만들어서 거기다가 착고까지 채워서 아예 가둬버리고 그냥 빵만 하나씩 하루에 하나씩 주는 것입니다. 왜 공부를 안합니까? 공부를 안 하는 것은 소명에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별로 신학적인 영양가도 없는 남의 예화로 가득 찬 설교집이나 새로운 목회방법이라는 책이나 들고 다니고 하면 미래는 없습니다. 지금은 묵직한 책을 읽으면서 다져져서 공부를 해야 될 때입니다. 어느 정도 건강에 위협을 받아서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은 물어볼 것입니다. 목사님은 응급실 실려간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때 의료보험도 없고 돈이 없어서 응급실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기억은 제가 총신에서 신대원 3학년 때 세 번을 쓰러졌었습니다. 과로와 영양실조였습니다. 지금 그 건물이 다 부셔졌지만 이상근 교수님 조교였을 때 그 방에 혼자서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있는 것은 있는 거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면 평소에 실력을 닦았던 사람과 안 닦았던 사람이 차이가 납니다. 공부를 해라. 한 학기 동안 저한테 아주 지겹도록 들을 것이고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은 사람취급도 못 받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면 열렬히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합니다. 기도를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못하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왜 못합니까?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읽은 학생이 누구였습니까? 왜 기도를 못합니까? 은혜의 지배아래 있지 않으니까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만나서, 예를 들어 자매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으면 가슴속에서 매일매일 언어가 강냉이 튀겨지듯 매일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또 언어가 쏟아져 나올 때가 언제냐 하면 지겹게 미울 때 그때도 언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을 때는 언어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열렬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교역자들 요새 새벽에 열심히 기도하는데 교회에 나와서 새벽기도에 모두 나와서 열렬하게 기도합니다. 집이 멀다고 새벽기도 수시로 빠집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집 가까운데서 사역지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집 바로 옆에 있는 교회를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집 바로 옆의 사역지를 찾으면 열심히 나갈 것 같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거리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입니다.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럼 이제 세 개를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라. 목숨 걸고 공부하라. 열렬히 기도하라. 네 번째, 다섯 번째 두 개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네 번째는 신실하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하라.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한 사람이 되어라. 속임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목회의 기술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목회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을 무시하지 말라. 그러나 그것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주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목회의 기술을 무시하지 말아라. 그래서 (우리가) 목회의 기술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교회에 와서 사역을 하고 싶지만 교회입장에서는 사람이 너무 없습니다. 이번에도 우리가 교역자 모집공고를 내일 냅니다. 기독신문에 내는데 많이 들어옵니다. 이력서가 60장, 70장 들어와도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쓸모가 있는 사람은 진실할 뿐만 아니라 유능하게 자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의 기술을 무시하지 말아라.
이 다섯 가지, 첫째 주님을 깊이 만나라. 두 번째 목숨 걸고 공부하라. 세 번째 열렬하게 기도하라. 네 번째 신실하라. 다섯 번째 목회의 기술을 습득하라. 그래서 어디에 내다놓든지 교회가 탐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