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눈물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들어가며
본문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이 밀레도에 오기를 청하였고 그들에게 유언적인 권면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 권면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도는 자신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지, 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도가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이 그런 삶을 살도록 만들었던 구체적인 동기와 거기서 비롯된 삶을 상세하게 말함으로써, 자기가 떠나고 없을 때에 그들이 다시 한 번 자신의 모범을 본받아 양떼를 목양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교회를 비롯하여 어떤 조직이든 리더로서 한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도 일이지만, 하나님이 붙여주신 영혼들을 돌보고 섬기기도 해야 하기에 책임이 더욱 막중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을 잘 돌보고 가르치는 사명에 대하여 생각할 때, 저는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엘리의 가문을 떠올립니다. 엘리의 가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귀한 경계가 됩니다. 엘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없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은 사사와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그의 후임자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는 일에 힘썼던 것처럼, 그에게도 백성들을 잘 가르쳐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사실, 엘리도 한때는 그 사명을 잘 감당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녀들조차도 신앙으로 올바르게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엘리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것을 그대로 복음의 시대인 오늘날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영혼을 돌보고 가르치는 사명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나무라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섬기고 그들을 바른 길로 안내하는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와 같은 영적공동체에서 리더는 영혼을 섬기는 사람으로, 그 리더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섬김을 받는 영혼의 상태가 달라지기에 결코 대충 그 사명을 감당해서는 안 됩니다.
다 드린 섬김의 고백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해야 영혼을 가르치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상적인 영혼 섬김의 모범을 사도 바울에게서 봅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다 아는 바니”라고 말문을 엽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멈추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본문 말씀으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영혼들을 섬긴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고귀한지 모릅니다.
한번 여러분 각자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해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들을 어떻게 돌보았습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신 가족, 동료, 부하직원, 교회 공동체의 교인 등을 향해 바울처럼 담대하게 “내가 여러분을 위해 어떻게 일하고 섬겼는지 여러분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 거기 모인 모든 장로들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자기의 목자인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듣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도의 말을 매우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행 20:18). 하지만 사도의 이 짧은 고백에는 3년이라는 세월이 담겨있었습니다. 자신을 깎는 사도의 섬김과 일치하는 고백이 그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에 그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가장 먼저 총론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영혼을 가르치고 이끄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마음으로 혹은 눈코 입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온 몸을 다 소진하여서 전인격적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저는 전도사가 된 이후에 사역을 네 달 정도 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동안이지만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내가 살아왔던 삶과 신앙생활 속에서 가슴을 찢는 애절한 기도의 제목들은 대부분 영혼을 섬기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그 몇 달 동안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기도생활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는 영혼을 섬기지 않는 대신 몇 달 동안 아주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공부를 잘하게 해 달라고는 마음을 찢으면서 기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을 섬기는 것은 온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단에 오르는 설교자의 설교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설교자에게 진리대로 살기위해 피 흘리며 분투하는 6일이 있어야만 한다.” 틸리케의 이 말이 설교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영혼을 책임지고 섬기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명령하는 것, 무엇인가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남에게 권면을 해 주는 것,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리더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그러한 것이 리더의 중요한 역할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리더의 사명 전부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허락된 지도자의 위치를 자기 자랑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사도 바울의 본을 받아 여러분의 존재를 다 드린 삶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들을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고난의 나날들을 이겨낸 섬김
이제 본문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이 말씀을 희랍어 성경에서 살펴보면 여기에 나온 단어들이 복수형으로 쓰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눈물”, “간계”, “시험” 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은 모두 복수형이고, 겸손도 단수형으로 쓰이긴 했지만 앞에 “모든”과 결합하여 복수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바울의 사역은 수없이 겸손과 눈물을 요구받고, 수많은 간계과 시험들로 인해 고통당해야 했던 섬김이었습니다.
지도자의 첫 번째 덕목, 겸손
사도는 아시아에 와서 영혼들을 섬기면서 영혼 섬김의 결정적인 덕목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첫 번째로 내세운 덕목은 겸손이었습니다.
영혼들을 가르치고 섬기는 자가 견지해야할 첫 번째 자세는 스스로의 비참함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결코 겸손일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는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시아에 와서 영혼들을 섬기면서 기억하는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덕목들을 순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 ‘비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이것을 사람들에게 늘 죽어지내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한 번 잘 살펴보십시오. 영혼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그런 의미의 겸손을 가지고 영혼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식들을 교육시킬 때 그런 의미의 겸손한 마음을 가져서야 교육이 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는 디모데후서에서 성경의 효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의 효능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효능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기초 자체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예를 들어 ‘책망’은 학생이 잘못된 길로 걸어갈 때는 야단치는 것인데,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겸손으로는 책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겸손은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튀게 나타내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문제에서 자기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 정도를 세상에서는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겸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경험함으로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으로 영혼들을 대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및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진정한 경험 없이 참된 겸손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주님의 형상을 보면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로서 교인들이 잘못할 때 그렇게 하면 되느냐고 야단을 치는 것과 교만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일 포악하게 성질만 부려서도 안 되지만 말입니다. 결국은 무엇을 위한 겸손이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을 책망하거나 바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하는 절대적인 우월감에서 하는 책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르치는 자로서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는 그런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며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할 말이 없는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리더로서의 아주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다음 세대에 의해 더 좋은 교회가 건설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리더들이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 땅에 와서 영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과 자격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제일 먼저 ‘겸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그 위대하심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인가를 철저히 깨달은 그 겸손함이 마치 혈액과 같이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는 모든 섬김의 혈관 속에 속속들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느끼며 산 사람이 아니면 고백할 수 없는 말입니다.
능력 있는 설교자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돌아와서 회심하고 그리고 거기에 함께 하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사람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만으로는 교회가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1930년대쯤 프린스턴의 교수이기도 했던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외치지만 자기의 자녀들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부흥이 오면 저놈의 자식이 확 변할 텐데…….’ 라고만 생각한다고 비판하였습다. 그것은 그것이고 그 자녀를 눈물로 양육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그 복음을 경험하고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위대한 십자가 사건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정신이 영혼을 위한 가르침과 모든 섬김에 실핏줄 같이 베어서 영혼들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두 번째 덕목, 눈물
두 번째는 ‘눈물들’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지고 성격이 아주 칼 같은 말하자면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벌써 두 가지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것에 대한 가편 투표를 할 때 그 의로운 사람이 돌에 맞아 죽는 광경을 보면서 그 옷을 지키는 증인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공문을 가지고 달려가는 광경을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차가운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기에서는 눈물로 영혼들을 섬겼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눈물이 흘러도 그 눈물의 의미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강퍅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셨습니까? 마음이 하나님 앞에 확 풀어지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러움과 응어리가 안으로 엉키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눈물은 그런 종류의 눈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영혼들을 섬기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는데 그 눈물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내가 이래서 눈물을 흘렸고 저럴 때 눈물을 흘렸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는 속속들이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고뇌는 일치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가 흘렸던 이 눈물도 그런 종류의 눈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영혼들을 섬기며 흘린 이 눈물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첫째로는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끌어안으며 회심을 갈망하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둘째로는 교회 안에 있는 목회자로서만 섬긴 눈물이 아니라 선교사의 삶을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에 대한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늘 이야기합니다. 구령의 열정이 없는 교역자는 필요 없다고 말입니다. 구령의 열정 없이 단지 기능적으로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찾아서 가라는 것입니다. 구령의 열정이 없는 교역자는 필요 없습니다.
영혼을 가르치는 자들이 어떻게 그 영혼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물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영혼들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자기에게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영혼들 하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자신이 직접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해 보면 비로소 한 영혼이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가르쳐 주시면 내가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앉아 있는 기적에 가까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날 후배 하나가 전도사 때 중고등부를 하는데 와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자기는 교사들 때문에 속상해서 전도사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가서 죽어라고 전도해 가지고 애들 긁어모아서 각 반에 배치시켜 주니까 아이가 조금 있다가 “저 우리 아빠가 이제 교회에 나가지 말래요.” 그러니까 교사라는 사람이 “그래. 그래도 부모님 말씀도 들어야지 어떡하겠냐? 우리 서로 기도하면서 때를 또 기다려 보자. 가라.”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온 현상입니까? 자기가 데리고 온 영혼이 아니라서 그런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흘린 이 눈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사람으로서 뿐 아니라 전도자로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감히 권면합니다. 교회의 리더이십니까? 전도를 안 하신다면 여러분은 건강한 교회의 리더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게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대치할 수 없는 것은 그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교인이 많이 모여도 전도하러 모이는 사람들의 수를 보면 너무나 슬픕니다. 그게 뭐 하는 것입니까? 일 년 열두 달이 지나가도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리더로서 자격 미달입니다. 감정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여러분 속에 영혼 사랑이 있습니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혼을 섬기는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이 집, 저 집 벨을 누르면서 사나운 개에게 물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예수 믿으세요. 교회에서 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다. 전도가 체질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은 그 소명의 기초적인 출발 자체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구령의 열정이기에 전도에 냉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고 할지라도 전혀 전도를 안 하는 사람이라면, 그만 두십시오. 그런 직분자를 통해서 그 교회의 영혼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 영혼들이 망가지면 그 책임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그런 식으로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은 그 영혼들과 흩어졌을 때 그들을 위해서 절대로 눈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영혼들의 절대적인 가치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삯꾼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돌보는 그 영혼들도 구할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영혼도 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은 전도자로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세상의 부귀함과 장래가 촉망되는 종교 지도자의 모든 좋은 전망들을 버리고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그분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회심치 못한 영혼들을 위해 희생하며 흘린 그런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직분자라면 어떻게 하든지 전도를 해야 합니다. 전도자로서 영혼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르침은 성경에 대한 자기 지식 자랑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그마한 지푸라기와 같은 성경 지식에 대한 자랑으로 자기를 거들먹거리고 교회에서 리더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영혼을 섬기며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배우고, 그 영혼을 섬기며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배우며, 그 영혼을 잘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삶, 그 이상의 삶을 우리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사도가 흘린 눈물의 첫 번째 의미가 회심치 못한 자를 향해서 흘리는 목회자로서의 눈물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눈물의 두 번째 의미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흘리는 전도자 혹은 선교사로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이 눈물은 과도한 선교 사역과 목회 사역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추측이 아니라 영혼을 섬기는 자라면 경험적으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가 아무리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할지라도 먼저 자신의 영혼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눈물을 신용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고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망가진 다른 영혼을 보면 눈물 흘릴 수 있고 온전하지 못한 교인들을 보면 불쌍해하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망가진 영혼을 보면서 아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영혼을 돌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리더들 가운데는 자신이 마치 신앙과 삶의 여러 문제에 있어 통달의 경지에 오른 사람인 양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영혼이 죽어있다는 증거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결코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진대,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온전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온전함은 더 온전해지고자 치달리면서 어찌하든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더 진실해지고 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분투하며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 “이 정도면 돼. 다른 성도들이 나만큼만 되면 교회가 욕먹는 일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의 성숙과 온전함을 인하여 몸부림치면서 우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를 많이 칭찬해줘도 너무 괴롭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천하만국 수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흔들며 잘한다고 칭찬을 해도 하나님이 “넌 못났어.” 그러면 끝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자각하며 하나님 면전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다른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흘리는 이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패성과 더불어 싸우고 자기를 복종시키는 가운데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도한 목회사역 속에서도 자신의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 몸부림치며 분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온전함을 위해서 분투하고 눈물 흘리는 이 사도 바울의 모습 자체가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는 훌륭한 교재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사람의 삶만큼 굉장한 것은 없습니다. 고신대학에 총장, 학장을 지내시던 한상동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1976년도에 작고하셨는데, 그분이 신학교에서 설교하는 주된 주제가 ‘참되게 살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설교하면, 신학생들이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늘 채플실이 눈물바다가 되곤 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청강생으로 들어와서, 어렵게 공부하여 결국 목사가 되신 분인데 그분이 학교에 다닐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영어 시험 시간이었는데, 그때 이 분은 전도사로 교회를 개척하고, 먼 길을 통학하면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과목 같으면 모르는 문제가 나와도 설교라도 한 편 쓰고 나오면 60점이라도 받을 수 있겠지만, 영어는 그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아무리 성령이 충만해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기에 시험지를 백지로 남겨 놓고 “주여. 주여.” 기도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신학생이 보다 못해 삐딱하게 앉으며 답안지를 자꾸 한상동 전도사 쪽으로 밀었습니다. 이 순진한 한상동 전도사는 처음에는 ‘이 사람이 게를 삶아 먹고 왔나, 왜 이렇게 삐딱하게 앉아 자꾸 옆으로 시험지를 미는 건가?’ 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지켜보고 또 생각을 해보니, 옆 자리에서 시험 보던 전도사가 베껴서라도 답을 쓰고 낙제라도 면하라고 시험지를 밀어주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을 순간, 한상동 전도사는 시험지를 덮어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뒷산에 가서 펑펑 울면서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기에 나를 가장 잘 아는 내 짝이 이것을 보여주면 한상동 전도사가 그것을 보고 쓸 것이라고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까? 이러는 내가 영혼을 목양해 나갈 수 있는 인격이 되겠습니까?”
답안지를 보여준 사람은 영어를 잘하는 전도사였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 시험지 엎어놓고 나와서 빵점 맞은 그 사람은 후에 그 학교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삶이 전도사 이전부터 계속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말년에 강단에 올라가서 “참되게 살자!”라고 이야기할 때에 수많은 학생들이 통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모든 아름다운 가르침은 종이로 만든 꽃과 같습니다. 시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피어 본 적도 없는 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굉장히 성격이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까? 그 얘기는 그가 아주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놀랍게 사랑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말년에 그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연세가 너무 많아서 설교를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 지체들이 부축을 해서 단상에 올라가면 손을 높이 들고 “자녀들아, 너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라고 내려오면 그곳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능란한 말, 현란한 언어, 그리고 뛰어난 언어 구사력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고 이전에 혈기 충만하고 폭력적이던 자신의 그 옛사람을 십자가 아래 다 묻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성화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자기 죽임의 과정을 지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많은 완성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의 못된 자아와의 피눈물 나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그 존재 자체가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무리 사랑에 대해서 현란한 이야기를 해도 감동할 수 없었지만 그 할아버지가 올라와서 “자녀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고 하는 말에 교인들이 위력을 느끼면서 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이르지 못하고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 그런 원리 속에서 영혼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그 정신이 그분들은 거대한 거목과 같고 우리는 아주 작은 싹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질은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리더쉽은 진짜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자신의 부패한 생각과 성품들을 변화시켜 보다 더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몸부림과 눈물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거룩과 온전함을 위해 분투하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교훈은 모두 가짜입니다. 그런 리더는 기계적인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훌륭한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엄격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분투하며 흘리는 뼈아픈 눈물이 없는 사람들의 가르침은 영혼의 진정한 변화에 아무 유익도 줄 수 없는 차가운 진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