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고난과 영광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눅 20:9)
녹취자: 정유선
유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사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생애적으로 커다란 은혜를 받은 것은 제가 이 내수동 교회 전도사 생활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한 30년 가까이 된 이야기지만 그때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정확하게 얘기하면 한 25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 87년도부터 92년도까지 이교회에 있었습니다. 89년도에 성경을 읽으면서 가을 즈음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이 누가복음 20장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고 그게 일평생 이 말씀이 저의 목회와 삶에 영향을 주었고 가는 방향을 정하게 했습니다. 사실 이 성경에 큰 은혜를 받고 제가 한 5년 동안을 순교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이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어떤 내용이냐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커다란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권위 있게 말씀을 전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권세를 주신 분이 누구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나도 너희들한테 하나를 질문하고 싶은데 그 대답을 하면 나도 대답을 해 주마 그러셨습니다. 그러고 물으신 질문이, 세례 요한이 와서 세례를 주었는데 그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거냐 아니냐,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대답을 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자신들은 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이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라는 말이 첫째는 충격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 충격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아주 행복하게 다가와야지, 마치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굴러오는 것처럼 회개를 안 하면 깔려 죽을 것 같은 재앙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많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정치적인 대적자였던 헤롯 같은 사람도 이 사람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줄을 알아보았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종교지도자들이 세례 요한 그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 요한이 먼저 와서 외친 메시지와 잠시 후 오신 예수님이 하신 설교의 내용이 일치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이 사람들이 대답을 못하고 예수님도 대답을 하시는 대신 이 유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음씨 좋은 사람이 있어서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원을 만들 뿐만 아니라 살 집도 있었고 포도를 수확해서 그것을 거두어 짜서 포도주를 만드는 시설까지 모두 완비해 놓고 먼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농토가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소작으로 농사를 짓게 해주었으니까 이 사람들은 한마디로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갈 데 없는 사람들이 그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의 포도원에 와서 살면서 경작하고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넉넉함을 안겨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이 사람들이 여기 들어왔을 때는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이 말씀 하셨는지 이해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게 된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 당시에 텅 비어있는 미개발지가 아니라 발달한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던 아주 번영한 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정말 세력 있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고 최후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거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셔서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하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주신 것을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한참 흘러서 포도를 수확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종을 보내서 이제 수확한 중에 약속한 일부를 나한테 보내라고 해라, 그랬습니다. 그 사이에 이 농부들의 마음은 변했습니다. 맨 처음 그 포도원에 들어와서 자신들에게 농사를 짓게 해준 주인의 은혜에 감읍하는 겸손하고 감사에 넘치는 마음이 사라졌고 이 포도원이 자기 포도원인 것처럼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줄 수 없다, 그러고 그 종을 심히 때렸습니다. 두 번째 종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결국은 나중에 피투성이가 된 채 종들을 내쫓았습니다. 주인이 보기에 아주 괘씸했지만 그래도 너그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잘 몰라서 그럴 테니까 이번에는 내 아들을 한번 직접 보내자, 그러면 아들의 말은 듣겠지 그러고 아들을 직접 보냈더니 이 포도원 농부들은 저기 저 오는 저 아들이 이 주인의 유업을 물려받을 아들이니까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주인이 죽어도 유업을 받을 사람이 없고 그렇다면 이 땅이 우리 땅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고 그 아들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시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이사야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원에 비유하면서 그 포도 열매를 정의와 공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 포도원에서 극상품의 포도가 맺혀서 최고로 좋은 포도를 수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은 거기서 이방사람들은 이방 신을 섬기고 부도덕하게 살아가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도 그 모든 이방 백성들이 보는 그 한복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기 때문에 정의롭고 공평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어서 이방의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들이 정말 인생을 잘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심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이 끝나고 나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의 마음은 부패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역사의 비탈길에 홀로 서서 “오늘날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강 건너 편에서 너희 조상들이 섬기던 그 이방신이냐 아니면 여호와냐,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라고 외쳐야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당시 이 성경을 읽으면서 아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예수님은 죽으셔야 됐으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이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속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셔야 됐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이 나중에 사도 바울이 회심하는 이유가 되고 이후에 목회자가 진정으로 어떻게 해서 목회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저를 보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혹은 신학자가 어떻게 해야지 진정한 신학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이다.” 조금 설명을 드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넣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때에는 혈기 충천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열심을 품은 표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엄청난 신학적인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사실중 하나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 얘기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냐면 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을 충동해서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죽이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합니다. “사형 시키십시오.” 그러면 되잖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사형 시키는 방법까지 지정을 해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목 졸라 죽이면 안 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될까요? 참수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실수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지만 후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져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됐던 것인데, 유대인들의 거대한 음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신명기에 나오는 성경 구절 때문에 나무에 매달려서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고 참수를 당하거나 교수형을 당하면 사람들은 이것은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라는 하나의 사실이 있었고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사람이 살아난 예는 아주 드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승천기>라고 하는 책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부활하거나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특히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림을 받았던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각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고 모세도 그런 사람이었다고 유대인들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남한테 얘기를 들었으면 헛소문이라고 말하겠는데 바울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고 밀려오는 혼란이 도대체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하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정도로 인정하신 분이면 저주하셨을 리가 없고 저주하신 분이면 인정하셨을 리가 없는데 두 개가 다 사실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고민 속에서 사도 바울이 발견하게 된 위대한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도 사실이고 저주를 받은 것도 사실인데 그 저주가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한 저주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당하신 저주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늘이 찢어지면서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탁월한 학문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잖습니까? 그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이 세계와 역사와 인간과 성경을 보는 눈이 한순간에 활짝 열리면서 우리들이 아는 바울의 신학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더 원숙해지면서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위대한 서신서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같은 것은 심오한 철학과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데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던 것은, 여기에 나오는 이 수많은 죽임을 당한 종들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들의 죽음은 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벨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피 뿌리며 죽어간 세례 요한까지의 선지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러실까? 첫째 종이 가서 실컷 두드려 맞고 왔으면 당장 이 주인이 군대를 동원해서 가서 그 못된 소작인들을 싹 쓸어버리든지 아니면 소작인들이 뭔가 위협을 가해도 이 종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완벽하게 호위를 해준 가운데 가서 주인의 메시지를 전하게 해주지, 하나 보내니까 얻어맞고 둘째 보내니까 능욕을 당하고 셋째를 보내니까 거의 피투성이가 돼서 실려 오는데도 계속해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는 것은 무엇일까, 이 종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종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이 뭘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목회라는 말, 그 말처럼 애매한 말이 없습니다. 어디까지가 목회고 어디까지가 목회가 아닐까요?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서 교회를 짓는 일부터 시작해서 속 썩히는 교인들 달래는 일, 죽은 교인들 시체 치우는 일까지, 부부싸움하고 헤어지려고 하는 부부들을 달래고 야단쳐서 다시 살게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목회사역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줄을 그을래야 그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한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일도 목회자에게 본질적인 일은 아닙니다. 목회자가 누구일까, 목사가 누구일까,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많은 혼란을 느낍니다. 호주에 한 번 갔더니 거기 있는 목사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교인들이 형광등만 터져도 전화를 한답니다. 그래서 가서 형광등 다 갈아주고 심지어 싱크대가 터져서 물이 샌다고 목사님 이거 어떡하면 좋냐고, 그것까지 가서 고쳐준답니다. 도대체 목회자가 해야 될 일이 어디까지인가? 그런데 모든 일들을 행할 수 있지만 그게 목회의 본질적인 일은 아닙니다. 목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청교도들은 아주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그것이 양보할 수 없는 목사의 정체성입니다. 그는 많은 일들을 하지만 어떤 일도 본질적인 일이 아니고 가장 본질적인 일은 두 가지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사명이었고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이제 반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 사도들까지 과부들을 돕고 고아들을 돕는 이 일에 마음을 쓰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집사들을 세우면서 그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여야 하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고유한 직무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특별히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정의와 공평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주인이 보낸 이 종들이 만약에 주인의 보냄을 받아서 소작인들에게 가서 소작인들이 즐거워하는 말을 했더라면 얻어맞고 마지막에 피 흘리며 실려 오고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회자로 우리를 보내신 것은 이 백성들 편에 서서 이 백성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서 늘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라고 우리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목회에서 최악의 목회 중 하나가 성도를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입니다. 고객 아닙니다. 고객이 아니고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들을 잘 가르치고 깨우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가 목회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정확하게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이 목회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즉 불신자들은 이 성경을 읽어서 구원을 받고 두 번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고 인격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선하게 살아가는 것, 이런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 성경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방식에 의해서 사용해서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목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항상 교인들을 대할 때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어머니 같은 따뜻한 사랑과 아버지 같은 엄격함, 그래서 때로는 자기의 회중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칼날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죄를 도려내고 하나님 앞에 마땅한 정의와 공평을 드리지 않는 방종한 삶을 꾸짖어서 회개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것을 잘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교인들이 좋아하는 목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한번 봅시다. 오늘날 교인들은 이제는 쉽게 목사로부터 목양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도 선명하게 이것이 너희의 죄고 잘못이다 라고 하는 지적을 받고 회개하는 일들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여러분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한 번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치고 목사를 포함해서 온 교인들이 눈물로 회개한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오랜 목회의 경험 속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살아있는 기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예외 없이 회개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구원파가 세월호 이후에 큰 충격을 받고 교세가 상당히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구원파에 가입을 했는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회개하기 싫은 사람들이 가기 제일 좋은 교회가 구원파 교회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매일 매일 성적인 죄를 집니다. 습관적으로.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그런데 정통적인 교회에서는 네가 회개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네가 계속해서 회개하면서도 죄를 짓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안 된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에는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그건 문제 없다 라고 가르칩니다. 한번 회개했으면 하나님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두 번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성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원파 교인들은 성화를 모릅니다. 원래 이단이라는 것이 안 가르쳐야 되는 것을 많이 가르쳐서 이단이 되는 경우가 있고 덜 가르쳐서 이단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구원파는 후자에 속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것은 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병신 신앙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회개하기 싫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신나는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강한 매력을 느끼면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신앙생활 속에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번에 박옥수 목사도 유병언씨하고 똑같은 죄목으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전체가 그것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목사든 누구든지 그건 모두 껍질일 뿐이고 하나님 사랑이 마음속에 사라지고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이 없어지고 나면 누구든지 다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지 누가 다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욕심 없습니까? 큰 교회 목사만 욕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교회 목사나 그것은 모두 껍질일 뿐이고 마지막에 다 파 들어가 보면 하나님 사랑이 마음속에서 떠나면 자기 욕망인 것입니다.
(예화) 우리 노회에 목사님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은 은퇴하셨습니다. 별난 목사님입니다. 괄괄하고 그러십니다. 그 교회에서 매월 농어촌 교회에다 보조금을 보냅니다. 어느 교회나 다 하잖습니까? 그래도 그 교회가 한 600~700명 모이는 교회였는데 담임목사가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이 목사님이 자기네가 보내주는 돈을 받는 교회들이 어떻게 목회하고 있는지를 자기가 직접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한 교회를 갔습니다. 가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도 잠기고 사택도 잠겨서 동네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교회가 있는데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인까지 합해서 한 세 명이 예배를 드린다고 그러고 목사님은 어디 갔는지 늘 돌아다닌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거기서 어두워질 때가지 기다렸답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그 목사님이 어디 다니시다가 저녁 때 사모님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자기도 못 타고 다니는 승용차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띈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차를 세웠습니다. 문을 내리고 “누구십니까?” 알 리가 없지요. “야, 이놈아! 나는 너네 교회 도와주는 아무교회 담임목사다.(멱살을 잡고) 너 우리 교회가 보내주는 돈 가지고 이렇게 좋은 승용차 타고 다니냐?”
여러분, 나는 그 목사님이 한 행동을 잘했다 잘못했다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실 때에만 하나님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손 놓으면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 자신 속에서 보잖습니까? 솔직히 목사이지만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목사인 나보다 더 순수한 내 설교에 은혜 받은 교인들을 만날 때가 많잖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자, 그러면 그래도 일생 주님을 만나서 생명을 주께 드리겠다고 다짐했던 목사가 그렇다면 이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죄와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평신도들의 경우에는 어떻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목사의 질문은 요리사가 아닙니다. 요리사는 먹고 싶은 사람이 먹고 싶다는 대로 맛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요리사지만 목사는 요리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마음속에는 내가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 모든 교인과 정 반대편에 서서 원수도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사자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요새 외과의사를 잘 지망을 안 한다고 그럽니다. 너무 고달프고 돈도 안돼서. 그런데 외고의사가 진짜 의사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병실 바깥에서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큰 수술 아니에요. 그냥 2cm만 째면 되고 수술한 바로 그 다음날 퇴원할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수술하는 환자한테 환자가 너무 벌벌 떠니까 간호사가 저 얘길 하나보다 그랬더니 그 간호사가 의사한테 하는 이야기더랍니다. 초짜 의사가 수술하는데 너무 떠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2cm만 자르면 돼요.” 누가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겠지만 목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후배 목사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겸손해라. 그리고 늘 자기를 낮춰라.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에는 내 이 교회에서 쫓아내면 쫓겨나리라 각오를 가지고 해라.”
내가 7명의 성도들을 데리고 방배동 지하 예배당에서 교회를 개척을 했고 2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 지금 벌써 한 10년 전이니까 교인이 한 이천 명 정도 모이던 때였던 같습니다. 내가 교회를 개척해서 장로들 대부분이 내 설교를 듣고 회심할 사람들인데 누가 날보고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딱 한번 설교를 한 8주 동안 하면서 ‘어쩌면 이 설교를 듣는 동안에 교인들이 나를 돌로 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보고 나가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손 씻고 나가겠다.’ 그리고 하던 설교를 멈추고 새로운 시리즈를 8주 정도 했습니다. 그게 제목이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켜라>. 그리고 정말 무섭게 설교했습니다. 그때 한 번 딱 ‘교인들이 이 설교를 듣다 나를 나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비록 먹고 살 대책이 없어도 나는 나가겠다.’ 그렇게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교인들이 엄청나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의사 같아서 어떡해야 됩니까? 딱 진찰을 정확하게 해야 됩니다. 강구정이라는 사람이 <나는 외과의사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의사의 자격을 셋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독수리의 눈. 뭐냐 하면 의사가 필요한 것은 정확한 지식입니다. 아는 사람 한사람이 동네 병원에 아파서 갔는데 진찰을 하더니 큰 병원에 가봐라 당신 암이 분명하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갔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불안해서 다른 큰 병원에 갔더니 또 암이 아니랍니다. 그 정도면 누구 말을 믿겠습니까? 작은 병원 의사 말을 믿겠습니까, 큰 병원 의사 말을 믿겠습니까? 정확하게 3년 후에 죽었습니다. 암으로. 그러니까 그 동네 병원 의사가 정확하게 맞힌 것입니다. 그런데 큰 병원에서는 발견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지식, 독수리의 눈. 그 다음에 사자의 심장,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교인들이 잘못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담대하게 사자의 심장으로 설교해서 의사도 진짜 고쳐야 되겠구나 하면 그냥 옷 벗기고 배를 확 가르고 전기톱 가져와서 머리를 긁어서 뚜껑을 확 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수술이 되잖습니까? 보통 담력으로 하겠습니까? 전기톱을 가지고 와서 뇌를 열어서 파서 뚜껑을 벌컥 열고 순두부 같이 생긴 뇌에 손을 댈 수 있어야 되잖습니까? 그러다가 쫓겨나면 쫓겨나는 겁니다. 진리의 말씀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영광입니까? 그런 각오를 가지고 외쳐야 되고 마지막에 여인의 손길이랍니다. 기술이 좋아서 잘 만져야지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뇌를 열어놓고 덜덜덜 떨고 여기저기 부셔놓으면 반병신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확해야 됩니다. 그것이 목회의 기술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교인들이 순수하지 않고 회개를 안 한다고 하는데 내가 묻고 싶은 이야기는 회개를 하라고 한 번 목숨을 걸고 외쳐본 적이 있습니까? 어느 평신도가 얘기하기를, 자기 30년 전에 그 설교를 듣고 아직 못 들었답니다. 교인들만 나쁘다고 그러면 안 됩니다. 목회자는 바로 이렇게 포도원 악한 농부들을 위해 보냄을 보낸 사람처럼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의와 공평을 행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 세미나를 합니다. 그러면 많이 오면 한 150명씩 모여서 세미나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시골교회 다니면서 보면서 느끼는 것이 설교 준비를 해가나 안 해가나 마찬가지입니다. 머리 하얀 노인네들이 졸고 있으니까 처음에 목회할 때 설교 준비도 열심히 하고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의욕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쉽게 할 거냐, 어렵게 할 거냐 라고 하는 문제는 상황의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철저히 탐구해서 목회자가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담고 그것을 설교하는 그 시간에 진솔하게 외쳐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제는 분명하게 자신을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강력하게 설교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게끔 그런 삶을 살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일보다도 더 고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그런 훌륭한 목사가 된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시골에 내려가서 교인 몇 명도 되지 않는 데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십대 때 일이었습니다. 교인도 몇 명 안됐는데 젊은 청년 하나가 계속 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도 답답해서 “이보게 청년! 그렇게 엎드려 자지 말고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보란 말이야.” 이때 스펄전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고 예수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그 사람이 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더 크게, 많이, 높이, 강력한 영향력을, 이런 것들은 예루살렘의 가치가 아니라 바벨론의 가치입니다.
(예화) 제주도로 한 번 세미나를 내려갔습니다. 거기에 친구가 있는데 직장 다닐 때 제가 말씀을 전해서 같이 은혜를 받고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됐는데 사모님하고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목회 잘 돼?” 꽤 잘했습니다. 한 70명 가량 교회에 가서 200명 만들고 교회도 짓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비전이 없어.” “또 무슨 비전?” 그랬더니 “요즘 젊은이가 없어. 그리고 부교역자 구하기도 힘들어 .” 그래서 “구해. 서울에 있는 애들 금요일이나 토요일쯤 내려와서 봉사하고 주일에 올라가라 그래.” 그러니까 비행기 값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행기 값이 많이 들지 않겠습니까? 20만원이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교회가 아주 작은 교회도 아니니까 비행기 값은 따로 줘라, 그러면 내려오겠다는 신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장로들이 그런 것을 허락해주나?” 그럽니다. 장로들의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도와주지 않으면 50만원 사례비를 받고 80만원을 비행기 값을 내면 누가 와서 봉사를 하느냐 말입니까? 그랬더니 “김 목사님, 여기는 비전이 없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무슨 얼어 죽을 비전?” “젊은이가 없잖아.” 그래서 “야, 너가 젊은이가 좋으면 신촌에 가서 개척을 하지 왜 제주도 내려와 있냐?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하냐? 다 가고 없는 젊은이를. 비전은 무슨 목사가 비전이냐? 하나님 보고 목회하는 것이지.” “아니 그럼, 김 목사 당신은 비전도 없냐?” 그래서 “내가 무슨 비전이 있냐.” “그럼 비전도 없는데 방배동에서 이사 와서 평촌에 가서 교회당을 짓고.” 그래서 “그게 무슨 비전이야? 아니 부부가 둘이서 살다가 애 낳고 그럼 할 수 없이 방 하나 더 얻어야 되고 애를 낳았는데 그게 남녀야. 그런데 애들이 중학교 갈 때 쯤 돼. 그럼 어떻게 한 방 쓰게 해. 그러면 방 하나 더 얻고 그게 그거지 그게 무슨 비전이냐. 너가 정말 그렇게 젊은이들이 좋으면 왜 제주도에 왔냐? 신촌에 가서 개척을 해야지. 아니 없는 젊은이를 어떡하라고 젊은이 타령 하냐? 내가 가르쳐줄까? 나는 비전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굳이 비전을 쓴다면 당신 비전은 여기 처박혀서 그냥 열심히, 노인네들이면 어때? 당신도 노인네 돼가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복음 전하고 심방하고 아프다고 그러면 병원 찾아가고 죽었다고 그러면 가서 염해서 묻어주고 그러다가 네 동네 다 끝나면 그 다음 동네에 가서 그렇게 해. 그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신촌에 가서 한번 젊은이들에게 전도해 보든지.” 목사님은 은혜를 별로 못 받았는데 사모님이 은혜를 한없이 받았습니다. “아멘. 아멘.” 무슨 비전입니까? 이게 무슨 우리 사업입니까?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이 일평생을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렇게 탁월한 학문을 하면서 천재와 같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때 그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아는 친구들이 안타까워하는 편지를 보내자 답장을 썼습니다. ‘너무 슬퍼하지들 말게. 나라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저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에 불과한데 이 배는 그리스도의 교회요, 나는 그 밑창에서 그저 노질하던 하찮은 노예 하나가 죽는 것인데 그까짓 게 뭐 그렇게 대단하겠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자신을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치고 자기이름을 알아주고 그게 뭔데요, 그까짓 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소명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을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종들이 와서 충직하게 주인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것이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 얻어맞고 피터지고 마지막에 거의 죽을 지경이 돼서 피투성이가 돼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무슨 상 받았다는 얘기 여기 안 나옵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이 목회를 잘 하면 후손이 잘되고. 안 그런 사람 많습니다. 박은호 목사님 돌아가실 때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기 아들 때문에 가슴 졸여하셨고 조용기 목사님은 그랬답니다. 사석에서. “누구든지 내 아들 좀 어떻게 해주면 내가 그 사람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겠다.” 안 그런 사람 많습니다. 그럼 우리가 뭘 기대해야 됩니까? 어떤 사람은 목회를 잘 했더니 아들이 프린스턴 들어가고 딸은 부잣집에 시집가고 손녀는 뭐 어떻게 되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이 훨씬 많고 나도 열심히 목회 했는데 우리 아들 프린스턴 안 갔습니다. 그런 생각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에 그 공식을 가지고 따진다면 사도들은 그렇게 열심히 헌신해서 요한 빼놓고 모두 제명에 못 죽고 순교하잖습니까? 그래서 무슨 보상을 받았습니까? 세례 요한은 그렇게 목이 잘려서 여자에게 주는 선물이 되었는데 그래서 무슨 보상을 받았습니까? 그 후손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제가 중국 북경에 갔을 때 제임스 파커 이런 사람들이 와서 설교하고 부시 대통령도 왔다 갔다는 강화스 교회에 갔습니다.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에 갔을 때 우리로 말하자면 담임목사를 만났는데 몇만명 교회입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식당에서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분이 목회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화혁명이 일어난 겁니다. 70년대에.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이 탄광에 끌려갑니다. 탄광에 끌려가서 죽도록 20년 가까이 복역을 하고 집에 돌아온 겁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돌아왔는데 부인은 도망갔고 큰아들은 공산주의자가 됐고 둘째 아들은 그 집안의 충격 때문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집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었답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 일생 동안을 복음을 위해 살고 영혼을 전도하는 일을 위해 살고 교회를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 이게 나에게 돌아온 것입니까? 부모님들은 충격으로 다 죽고 아내는 도망가고 큰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고 작은아들은 미치광이가 됐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아들아,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목사님이 마당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아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한 25년 전에 이 성경을 읽으면서 마지막까지 정말 의문이 들었던 것이 그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당신의 이 종들은 그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왜 하나님은 정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선지자로 불러서 그렇게 소모품처럼 고난을 당하며 죽게 하신 것일까?’ 그때 깨달았던 한 가지 사실이 저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뭐냐 하면 설교자의 사명은 너무 고귀한 것이라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주실 수 있는 상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상급을 하늘나라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멸시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혹은 박해를 받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말고 그에 대한 보상을 이 세상에서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됩니다. 그래도 종들은 이렇게 때리고 능욕을 당하고 상하고 그랬을 뿐이지만 아들은 목숨을 버려서 죽었잖습니까? 그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요새 친구들 만나면 이야기가 대개 은퇴 이야기 아니면 건강 이야기입니다. 은퇴 이야기를 가지고 교회에서 섭섭하게 해주는 사례가 있고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다 버려라. 버리고 그냥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다가 교회에서 한 푼 안주고 쫓아내면 ‘아멘’ 하고 가서 빌어먹고 좀 주면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그렇게 살다 죽자.” 그것을 가지고 막판에 교회하고 추하게 싸우고 심지어 법정에 끌고 가고 욕을 하고 교회와 딴살림을 차리고 장로들이 서로 찢어져서 쌈박질을 하고 그게 설교자의 할 일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맨 처음에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사실 목회하려고 우리가 아멘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이 복음이 너무 소중해서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가여워서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생명을 받쳤던 것처럼 그 처음 마음을 가지고 살자, 그러면 우리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쓰셔서 그래서 하나님께로 많은 사람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보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