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2
2018.10.27 토요교리반5
녹취자 : 조원정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등등 나옵니다. 여기에서 형상이라고 할 때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형상이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더 많을 수 있겠지만 대충 따져 보면 이렇게 쓰는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새긴 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형체를 가진 모양이 있는 어떤 물건, 모습 이런 것을 형상이라고 합니다. 우상도 보이지 않는 신들을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희랍 철학에서 질료와 반대되는 형상입니다. 질료라는 말 배웠습니다. 질료와 형상이 있다고 했는데 질료는 밀가루 반죽과도 같은 것이고 형상은 제빵사 속에 있는 특정한 빵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 속에는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맛도 있고 향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최대한 만들 때에 머릿속에 있는 그대로 만들어서 구워서 먹어보니 자기가 의도한 뜻대로 되었을 때 잘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질료의 반대입니다. 형상은 정신적인 것이고 질료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두 개가 만나서 개별 적인 사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팬, 이것은 개별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입니다. 어떤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팬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닙니다. 형상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닮은 특성,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닮은 성실, 혹은 특성, 이것을 가리켜서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는 image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이것은 스태츄 정도로 번역을 하고 이것은 form 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형상의 개념을 알았으니까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했을 때 형상과 모양은 히브리어로 첼렘과 데무트라는 단어인데 이 두 단어는 신학자들이 동일어의 반복이라고 봅니다. 이 두 개가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의 반복이라고 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상과 모양을 따로 나눕니다.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보고 하나님의 모양은 초자연적 은사를 가리킨다. 이건 인간에게 맨 처음 타락하기 전에 있었던 의를 허락한다. 타락과 함께 이것은 날라가 버렸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형상은 자연적 은사라고 봅니다. 인간의 자연 본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영적인 성질,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성, 이런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지성의 능력까지 들어갑니다. 이런 것들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본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원시적인 의를 잃어버렸어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상당한 능력이 있고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합리성이 인간에게 있다. 우리 개신교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루터파의 견해는 사실 루터는 루터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루터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의 써클을 모두 묶어서 루터파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여기 인간이 있는데 이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형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주신 의가 있는데 참 지식, 뭡니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 거룩 이라고 쓰면 안 됩니다. 거룩함입니다. 거룩은 형용사입니다. 거룩함,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깨져 버렸습니다. 깨져 버렸으니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날아가 버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음 통해 주어지는 의로써만 회복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문제는 이렇게 되었을 경우 인간이 아무것도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고 오직 은총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점은 너무 훌륭하고 좋은데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와 짐승은 어떻게 다른가? 이것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라고 하더라도 영혼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동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을 짐승과 다르게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좋은 설명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개혁파에서 볼 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부터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을 닮은 일종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적으로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은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관계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하여 하나님의 본래의 참 지식과 의와 거룩, 이것은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 형상이 정신과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이 형상이 포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형상이 육체를 포괄한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생긴 모양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범위가 인간의 육체가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파괴라고 봅니다. 그것은 매우 큰 죄라고 봅니다. 혼자서 산에 돌멩이를 깨트리는 행동과는 다른 의미가 인간의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가격할 때에는 다른 도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자기가 나가다가 화가 나서 벽을 한번 때린 것과 화가 난다고 지나가는 사람을 싸대기를 때린 것과 도덕적인 의미가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그 형상의 개념 안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보다 나중에 신학이 발전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우리가 극단적인, 그보다 독재 같은 이런 정치 제도를 우리들이 미워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무수한 인권의 유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실지 모르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대통령이 저 자식 집어넣어 하면 6시간 안에 반드시 감옥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비슷한 일들이 중국을 비롯해서 후진국에서 이번에 일어났던 터키의 살인 사건부터 시작해서 이 모두가 민주주의가 없는 독재 치하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부자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미친 듯이 갑질을 하고 인간 취급을 안 하며 살아가는 이런 사회에 우리들이 저항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법 앞에 평등하게 존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존엄한가? 법학은 그 자체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합니다. 왜 존엄합니까? 왜 존엄합니까? 아무도 대답을 못 합니다. 법학은 그것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존엄하게 태어났다. 어디에 그런 증거가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형상 안에서 존엄성의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항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다. 왜 그렇게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뉠 수 없는지를 명쾌하게 이해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참되게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 하나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 사랑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고 갑질하고 인간을 비천하게 대하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도 이상하게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사랑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참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개가 찢어지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요약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두 번째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인간에게 도덕적인 형상이 있고 자연적인 형상이 있다는 것, 이것은 이렇게 나누고 이야기 하는 것은 카톨릭의 생각과 아주 유사합니다. 문제는 카톨릭에서는 이것은 건재하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개혁파에서는 그렇게 안보고 상당히 아직도 합리성 같은 것들을 섭리성 같은 것들이 인간의 자연적 형상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은 동의를 합니다. 하나님 안 믿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지 않는 사람의 학문도 상당히 믿을만한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문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들에 대해서 모두 이쪽에서 죄의 결과가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까 이야기 했던 이 견해하고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형상에 관한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자세히 공부하고 싶으면 지난해에 공부 했던 신학 공부 이렇게 했다를 보면 하나님의 형상 파트가 있습니다. 상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꼼꼼하게 천천히 읽으시면 이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아주 잘 이해가 되고 정리가 잘 될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큰 도전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주제가 행위 언약 안에 있는 인간입니다. 아담이 행위 언약 안에 있었는데 행위 계약이라고 하는데 계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입니다. 우리들이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계약 이러면 전세계약, 혹은 매매계약, 사무실 임대차계약, 자동차 계약, 이런 정도로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이 계약에는 서로 입장이 동일한 위치에 있는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이 있고 A와 B사이에 차등이 나는 관계에서 부 대등한 사이에서 맺어지는 계약이 있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자매에게 집을 팝니다. 나도 갑이 아니고 이 자매도 을이 아닙니다. 물론 팔려고 하는데 사려는 사람이 20명 쯤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갑질은 할지 모르겠지만 그 돈 가지고 안 된다고 하든지 더 달라고 한다든지 이럴 수 있지만 더 좋은 조건에서 계약을 할 수 있지만 계약이 합의가 되면 동일한 입장에서 계약을 하고 서로 의무를 져서 집을 사고파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계약입니다. 대통령이 문씨라고 해서 문씨하고 박씨하고 서로 불리하게 계약하는 것은 없습니다. 똑 같습니다. 서로 동등한, 평등한 입장에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나라 국민입니까? 대한민국 국민 되겠다고 동의서 쓴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누가 나를 나 동의도 안 받고 그렇게 한 것입니까? 이런 것이 에이케이스에서 이루어지는 비케이스에서 이루어지는 법이 딱 규정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 대한민국 국민이다. 우리는 속지주의가 아니라 속인주의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태어난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는 핏줄이 어떻게 되는가를 봅니다. 엄마 아빠가 한국 사람이고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 난 어디에서 태어나든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나에게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계약은 계약인데 대등한 계약이 아닙니다.
두 번째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일반 사람이면 지지 않아야 될 의무를 공무원이면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지금 많이 약화되었는데 옛날에는 공무원이면 대통령 욕도 못하고 엄청나게 많은 의무를 졌습니다. 군인들 같은 경우는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국민이면 안 져도 되는 의무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대신 권리도 있습니다. 그것을 공법상의 특별 권력관계라고 합니다. 특별 권력 관계 속에 들어간 사람은 특권도 누리지만 동시에 특별한 의무도 짊어 지니는 것입니다. 에이케이스가 아니라 비케이스입니다. 군인이 되는 순간 내가 보병이 되겠다고 싸인 안 해도 그것은 국가 마음입니다. 어떤 훈련을 시킬지 어떤 월급을 줄지 그 사람은 절대로 전국 육군 노조 이런 것 없습니다. 못하게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아들의 엄마를 뜯어보면 죄가 됩니까? 안 됩니까? 죄입니다. 처벌 받습니다. 단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아무 죄가 안 됩니다. 사법상의 특별 권력 관계입니다. 성인이 된 아들이나 딸의 뜯어봐서 어떤 피해를 받게 되면 고발하면 처벌을 받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특별 권력 관계를 주는 것입니다. 에이가 아니라 비관계입니다. 이런 법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행위 계약 속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행위 언약 속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계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인간이 사인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계약입니다.
여러분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중국 국민이라면 중국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대한민국 국민인데 대한민국 나라나 나라 밖에서 남의 나라를 위해 스파이 일을 할 때는 엄정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동의를 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이미 큰 권위를 가진 나라 속으로 태어나면서 그 계약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태어나면 대한민국 법령집이 한 팔로 품어도 다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준수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성인이 되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법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놀라운 그림자들이 있구나 해서 재미있습니다.
조건은 순종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어떤 사람은 이것을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특히 이단에서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것을 또 성과 관련해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 쓸데없는 소리이고 평범한 과일입니다. 그 과일이 지금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과라고 합니다. 여기 툭 튀어 나온 거 보면 남자는 있는데 여자는 없습니다. 영어로 아담스 애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열매가 지금 남아 있는지 안 남아 있는지 아마 남아 있지 않으리라 봅니다. 어쨌든지 그것은 평범한 과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일이 신비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일을 먹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지가 계시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드는 예화인데 황제가 앉는 의자입니다. 청소부가 청소를 하다가 황제 앉는 의자에 살짝 올라가 앉아 봤는데 저쪽에서 황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럼 벌이 어떻게 됩니까? 사형입니다. 황제도 대개 치사하지 살짝 앉았다고 뭐가 닳았겠습니까? 밥 먹는데 손님이 화를 퍽 내면서 주인장 하고 부릅니다. 이거 보라고 파리가 이게 뭐냐고? 주인이 하는 말이 손님 덩치답지 않게 왜 그러십니까? 그게 먹어 본다고 얼마나 먹겠습니까? 파리가 먹는 양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고 의미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당연히 사형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먹지 말라는 엄명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것을 어기고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 하나님을 자신의 부하 정도라고 생각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약을 지키면 영생이 약속 되어 있습니다.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 할 것인가? 양자 택일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계약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계약이 유지되는 조건이 행위에 있기 때문에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아담 안에 모든 인류는 죽었으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 안에서 살아났다 6장 7절은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행위 계약의 요소는 당사자는 삼위 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입니다. 아담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로써 아담입니다. 한 덩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약속은 생명의 약속, 계약의 조건은 절대적인 순종, 계약의 형벌은 이렇게 될 때 불멸하도록 태어난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 영혼이 죽는다. 영원히 죽는다. 이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의 분리입니다. 액면 그대로 보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인간은 죽는다고 했으니 즉시 죽어도 정당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할 경우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서 이 세계를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얘기한 것처럼 위로 하나님을 알고 지성과 사랑으로써 지혜와 사랑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뜻을 구현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즉시 죽어버리면 하나님의 생각을 이어 받아서 창조 세계를 이끌기로 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위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풉니다. 무슨 은총을 베푸시는가 하면 두 가지를 베푸십니다. 첫 번째는 죽음을 연기하십니다. 두 번째는 속죄를 예고하십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해줄 메시아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이것은 죽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사이에 자손을 태어나게 하고 죽는 것입니다. 개체가 자꾸 이어지는 것입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라는 사경회 시리즈가 있습니다. 다섯 개 정도 되어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집중해서 그 시리즈를 들으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모두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사고의 변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계약의 상징은 생명나무가 유일한 상징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적인 육적인 생명의 상징과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것이라는 보증을 제시한 것입니다. 행위 계약의 유효성입니다. 행위 계약이 지금도 살아 있는가? 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인간이 우리들이 흔히 받는 질문이 이런 것입니다.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는 먹어나 보고 벌을 받았지 우리가 그 할머니하고 먹고 그게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왜 원죄라는 죄를 짊어지고 벌을 받아야 하느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단에서 많이 제기합니다. 우리는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선악과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여기 실과가 있는데 여기 아담이 있고 하와가 있습니다. 이 선악과를 쳐다봅니다. 안 따먹으려면 꾹 참고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 등등 이렇게 해야지 안 따먹었을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것이 영원히 갈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기한을 가진 것이라고 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것을 안 따먹었습니다. 불멸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 밑에서 계속 후손들이 태어나고 나라는 인간까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불멸을 누렸습니까? 안 누렸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똑같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불멸을 누린다고 본다면 나와 최초의 아담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로 엮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적 연대라고 봅니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로 묶여져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아담이라는 사람과 나라고 하는 사람의 존재가 모종의 연합의 연대를 이루어서 이 사람이 한 잘못된 것이 나에게도 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불멸할 사람에게 사망이 들어오고 죄가 들어오고 심판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너무 불쌍히 여겨서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처음부터 약속하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를 용서 받게 해주시는데 여기는 아담이었고 여기는 예수그리스도이신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서 내가 불멸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것 같이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와 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창조부터 마지막 종말과 영원 세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분은 둘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있고 두 번째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을 통해서는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은혜와 용서가 들어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행위계약이 유효하게 살아 있어서 아담이 행위 계약을 위반하고 형벌을 받게 된 행위 언약에 대한 심판이 불신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미친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아담은 구원을 받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빛을 지식의 빛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는 죄의 원흉인 동시에 구원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타락해 버렸을 때 행위 계약이 유효하다고 하려면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행위 계약의 조건에 부응할 수가 없습니다.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도저히 안 돼는 것입니다. 행위 계약은 생명의 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행위계약을 따라서 법적 의무를 담당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지고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속죄로 대속으로 우리가 은혜의 계약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2장인데 죄의 상태 아래 있는 인간입니다.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프레스코화입니다. 뱀이 유혹을 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최초의 죄는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가 들어와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죄는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너 죄를 지었구나. 이럴 때는 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가 이 뿌리라면 악은 이것이 이렇게 자라서 맺은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어법적으로 이야기 할 때 이것과 이것을 혼돈합니다. 이것이 죄라고 할 때 어떤 때는 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아예 뿌리와 열매를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서 죄악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이 죄를 이야기할 때 너희 안에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할 때는 죄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너의 책임은 아직 면제가 된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죄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고 이야기할 때는 경향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성입니다. 이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대적, 하나님을 향한 적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의지인데 반감과 대적으로 나눕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우리 안에서 펼쳐지는가 하는 것을 현미경 보듯이 상세하게 설명한 책이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옛날에는 필독서입니다. 아침에 펴서 차분히 펴서 저녁까지 읽으면 팔일이 걸립니다. 그것을 읽든지 설교를 들으면 30개 정도 테잎이 되는데 그렇게 보고 나면 여러분은 확 눈이 열려지고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그만큼 기독교 신앙이나 이런 은혜의 세계의 지식에 있어서 유치원 수준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겸손해지십시오. 해보십시오. 저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CCTV에서 상영했던 삼국지 98편을 완독을 했는데 되던데 왜 못하겠습니까? 들으면 바뀝니다.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성적으로는 불신앙과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지만 먹는 것이 더 나을 걸 하고 생각으로 먼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시작이 지성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욕구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순서적으로 보면 지적인 기능이 작동하니까 욕구도 생기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욕구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올바른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패배하고 마귀에 밥이 되고 죄의 밥이 되는가하면 생각이 정돈이 안 되고 흐릿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성벽이 없는 도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수시로 공비가 출몰해서 공격을 해서 원하는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쌓아 올릴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으로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입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 정도도 모르면 과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될 정도의 최소한의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마저 없는 사람은 어떡합니까? 가르치는 수준이 초등학교 5.6학년 들 에게 가르치고 싶은 수준입니다. 더 겸손하게 많이 배워야 합니다. 책을 이렇게 쌓아 놓고 읽으라고 권장하는 교회가 몇 군데나 되겠습니까? 직원이 아침 10시부터 6시까지 근무하면서 안내까지 써주는 데가 그것도 빌려줍니다.
요즘 제가 좀 덜한데 목사님은 왜 설교시간에 우십니까? 울 때 자기 기분이 이상하답니다. 그 사람은 진짜 회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예배시간에 설교 말씀을 듣고 당신들이 모두 우는 날 나는 안 울 것입니다. 별로 감동이 안 됩니까? 책을 읽으십시오.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합니까? 머리는 균형을 잡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 했습니다. 생각을 하면서 지식을 섭취하면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다 쓸데없는 지식들을 채워 넣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항상 이 손에 성경과 책이 들려 있고 기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거 안 하고도 훌륭하고 행복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이단이거나 이단에 매우 가깝게 가 있는 신앙의 본질을 떠난 가르침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감정적으로는 금지된 것을 먹으려는 호기심입니다. 욕망을 품는 것입니다. 오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가지고 고등학생들하고 북 콘서트를 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황제니까 사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황제들 중에 타락한 사람들 많습니다. 황제가 되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허무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이 무슨 얘기가 감명 깊게 다가왔는가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된다. 남이 무엇을 하는지 남이 무엇을 먹는지, 보는지 우리는 관심 갖지 말자. 단 관심을 가져야 될 때는 그것이 사회와 관계된 일 일 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저 사람이 먹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든지 하는 것이 이 사회 전체에 행복에 어떤 영향을 주는 공적인 의미가 있을 때 그것은 그것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다루어서 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공공복리에 진작할까? 그것을 생각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튜브를 비롯해서 저는 sns안 하는 것 아십니까? 없습니다. 이메일도 저는 일 년에 몇 통 할까 말까입니다. 하고 싶은 사람은 비서 이메일로 보내면 됩니다. 할 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면 들어가 보면 만날 먹고 입고 노래하고 개 기르고 놀러간 이야기 다음에 아무 필요도 없는 신비한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이런 것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을 보지만 그 자체를 즐거워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 목적이 없습니다. 벤쯔라는 청년이 나와서 엄청난 양들을 먹어대는데 대단한 요리법도 아니던데 그게 뭐가 그렇게 궁금합니까? 남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뭐가 그렇게 궁금합니까? 그렇게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야 되겠다는 자기 인생에 대한 목적성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갈 길을 안 가는 것입니다.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은 빨리빨리 걷습니다. 갈 때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석양으로 기울어집니다. 행복하겠습니까? 목적이 없는데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이런 병들이 그리스도인에도 심하게 번지고 있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의 정신을 끊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완전히 담을 닫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문화를 접하라는 것입니다. 교리를 배우는 것은 그런 판단을 제대로 갖기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가진 것입니다. 뱀으로 가장한 사탄의 시험으로 죄가 발생된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합니다. 도덕적인 형상은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뭔 이야기를 하다가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설명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반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아니 그럼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운 이 사회의 제도, 건설적인 법체계, 그 법을 집행하는 정치체계, 이런 것들은 어떻게 남아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시작하면서 배운 일반 계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계시는 일반 은총과 관련되고 특별계시는 특별은총과 관련된다고 했습니다. 특별은총은 구원에 이르는 은총입니다. 특별은총은 구원에 관한 계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이라고 하는 말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별히 구원 받을 사람에 한해서만 접근할 수 있도록 열렸기 때문에 특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문은 어떤 국회의원만 들어오시오. 하는 것은 특별 문이지만 특별 문이라고 써놓고 아무나 드나드시오, 이건 특별 문이 아닙니다.
일반은총을 하나님이 안 주셨으면 타락과 함께 인간사회는 짐승들의 사회보다 더 무자비한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을 읽지 않아도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은 죽이면 안 된다. 죄 지은 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맞아야 됩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줘야 합니까? 안 줘야 합니까? 무단횡단을 한번 했습니다. 사형을 시켜버립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저건 아니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규칙을 어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긴 크기와 받는 벌이 형평이 안 맞을 때 그거 사이에 형평을 찾아가는 인간의 능력과 본성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일반은총, 일반계시 덕분에 그런 것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것들이 무너졌다고 할지라도 아까 이야기 한 자연적인 본성이 남아 있는데 그것 자체가 죄에 의해 오염이 되었다. 죄 때문에 하나도 쓸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에 의해 오염이 되어서 어느 것도 죄라는 동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실도 하나님께 올려 질 수 있을 만한 봉헌될 수 있을만한 가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죄가 주는 절망 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 사회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좋은 나라가 될지 다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장로 대통령이 몇 명이나 나오고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정부라고 하는 것은 특별계시가 일반은총의 영역 속에서 다스리면서 가야 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제가 오늘 늦었습니다. 나는 오늘 백퍼센트 중간고사라고 이렇게 들었습니다. 제가 사과의 의미로 다음 주에 중간고사를 안 보겠습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격하게 공감하십니까? 대신 쪽지 시험은 보셔야 합니다. 쪽지시험을 다 합친 것을 중간고사로 보고 기말고사를 보겠습니다. 원래 이 교리반은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하면서 이것을 해야 하는데 연세 드신 집사님들 권사님들 우황청심환 먹고 와서 기말고사 봤습니다. 그분들은 지금도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 교리반을 통과했다는 자부심, 허술하게 한 적은 없습니다. 부목사님한테 2년 정도 맡겼는데 그땐 은혜를 많이 베푼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방위훈련처럼 됩니다. 여기는 육군 사관학교니까 제대로 해야 합니다.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서 내일은 중간고사 안보고 쪽지시험 보는 거로 하겠습니다. 기말고사 때는 범위가 많아지니까 힘 좀 쓰셔야 합니다. 시험 안 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기말고사 때 수능 보던 때처럼 줄 그면서 세 번 읽으면 95점 이상 맞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나달나달하게 해서 책에다가 다 적으십시오. 나중에 펴면 거기에 한꺼번에 다 나옵니다. 핸드폰 잃어버리든지 날아가 버리면 소용없습니다. 거기에 다 옮겨 적어서 그거 하나만 펼치면 설명이 다 나오고 성경 구절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패했고 무능해서 아무 것도 못한 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전적 무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못한다. 전적 부패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정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죄에 오염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두 번째는 전적인 무능, 이것은 아무 것도 못한다. 수학도 못하고 밥도 지을 수가 없고 죄 때문에 집도 찾아갈 수가 없고 커피도 타 먹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만한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 그리스도의 중보의 공로 없이 하나님을 직접 만족시켜드릴 만한 어떤 일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사망의 법에 종속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서 본성이 되어가지고 아예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중독입니다. 중독 걸린 사람 무섭습니다. 담배, 알코올, 이런데 중독이 되면 자기 주체성을 거의 상실합니다. 특히 알코올의 경우, 알코올이 들어가면 자기가 아닌 사람이 되는데 그렇게 아닌 사람이 되어야지만 견딜 수 있으니 중대한 모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중독이라고 이야기 할 때 하나님 사랑에 중독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이웃에 사랑을 베푸는데 중독이 되었다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뒤에 나오는 독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독입니다. 그런 말은 사용을 안 합니다. 악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점은 별로 좋지 않으면서 결별할 수 없는 습관을 갖는 것은 매우 나쁜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인생 비유를 하자면 계단 뛰어 오르기 대회가 있습니다. 스포츠웨어를 입고 63빌딩까지 뛰는 대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한 옳지 않은 습관이 죄를 구성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은 달리기를 하는데 계단에다 기름칠을 하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미친 듯이 올라가는데 세 개 올라가면 네 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정리를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괜찮습니다. 나는 아메리카보다 깔끔하고 탁 쏘는 에스프레소가 좋아.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것도 카페인이 매우 안 좋은 체질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막 중독이 되다 시피해서 카페인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되기까지 자기를 커피에 허락을 하면 안 됩니다.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 괜찮습니다. 예배드리는 시간도 음악을 안 들으면 불안증이 일어난다. 그것은 안 됩니다.
낙원에서 추방되고 생명나무에 접근이 금지가 됩니다. 죄의 본질은 죄는 특별 악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특별한 악이라는 뜻입니다. 일반 악이라는 원래 특별 악이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었는데 개인적인 의미인데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무슨 죄든 짓고 나면 기도가 안 되고 성경이 안 들어오고 설교가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의 침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 전체를 놓고 전면적인 접근을 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를 잘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죄입니다. 토스토옙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번역하면 punishment 이고 and 가 됩니다. 여기에는 crime입니다. sin 하고 crime 하고 뭐가 차이가 납니까? sin은 내면에 있는 죄입니다. 지금 라스쿠티닉리니코프가 나오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죄와 벌에서는 고리대금을 하는 노파를 살인한 죄와 이어지는 죄인으로서 갈등과 벌에 다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죄가 아니라 실행한 것입니다. 이 sin을 국가의 법이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너 지금 보증금 올린 주인을 미워하고 있지? 징역 1년 그러지는 않습니다. 너 시집에 명절 때 마다 가긴 가지만 시어머니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넌 징역 3년 이러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민주국가에서는 뭐라고 부릅니까? 양심의 자유라고 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것은 나에게 자유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타나서 규칙을 깨고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법이 그만한 행동을 했을 때는 crime이 되는 것입니다. 형법을 crime law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crime and punishment입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면 죄는 뿌리이고 뿌리에서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죄는 특별함입니다. 죄는 절대적인 성질을 갖는다. 죄와 선과 악의 대조는 절대적이어서 회색이라는 것이 없다. 죄는 죄이고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다. 선과 악이 뒤섞여서 희미하게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신 한 그것이 죄일 수는 없습니다. 생수를 먹을 것인가? 끓여서 먹을 것인가? 죄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낼까? 공립학교에 보낼까? 대안학교에 보낼까?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 뇌물을 줄까 말까는 죄입니다.
죄는 죄책과 오염을 내포합니다. 이건 설명했습니다.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 인간의 부패성, 위에는 칭의로 아래 것은 성화로 해결이 됩니다. 죄의 본질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음 안에 지성과 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마음 안에 죄만 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안에 함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이 두 개는 서로 자기의 자리를 다투는 것입니다. 죄는 외부적인 행위만이 아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것도 죄다. 사상, 감정, 악한 의도, 형법에서는 처벌 안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법에서는 이에 대해서 책임을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00인생처럼 됩니다. 죽으라고 미워하면서 안녕하세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 악수 했을 뿐인데. 복음을 알고 나면 내가 이렇게 평화롭게 대하면서도 마음속에서 정말 저 형제를 미워했습니다. 가슴 아프게 회개를 하게 됩니다.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는 실제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성이 있었는데 이게 타락했기 때문에 죄책과 오염이 들어왔고 이것은 가지치기 하듯이 퍼지면서 모두에게 유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대표설이 있습니다. 가장 개혁주의적인 견해입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아담과 후손의 이중적인 관계는 자연적인 머리이고 언약의 머리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범죄 하자 원죄가 증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접 증가설이 있는데 결론으로 이야기하면 부패성이 후손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와 우리 사이에 흐르는 원죄의 물려받음이라는 개념을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본죄라고도 하는데 실행 죄라고 이야기도 하고 혹은 자범 죄라고 이야기도 하고 혹은 고범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원죄가 있고 원죄에서 본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원죄는 인간 안에서 sin을 형성하고 sin이 본죄를 형성합니다. 본죄 안에는 실행한 것은 crime이 될 수 있지만 마음 안에서는 sin이 될 수 있습니다. 원죄 안에서 이것들이 모두 나오면서 인간이 내면의 죄, 혹은 생활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죄책과 오염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성경의 진술은 죄가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 되고 유아도 죄 아래 있고 인간은 모두 날 때부터 죄 때문에 정죄 아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