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를 말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사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5-36)
녹취자 : 김세나
차를 타고 오면서도 제목이 나의 목회를 말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목회에 대해서 말할 게 별로 없는 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리고 한 시간동안 고민하며 차를 타고 왔습니다. 이 여기에 나오는 이 성경 말씀은 교회를 개척하게 된 말씀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신학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뭐 넉넉한 생활비를 받으면서 그렇게 큰 불편함이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무슨 학교에 갈등이 있고 그랬던 것도 아닌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마음이 이렇게 흡족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잠을 청하려고 이제 침대에 누웠는데 집사람은 잠이 곤히 들었는데 저는 잠이 안 와요. 그래서 뭐 천장 쳐다 보고 있으면 뭐하랴 그러면서 내려와서 우리 집사람 발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기도하는데 마음 속에서 간절한 기도가 나와요.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그 수많은 영혼들이 고통받는 광경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고 내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데 너무 안일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 때 제 마음에 찌르듯이 와 닿은 성경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었어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리고 새벽녘에 잠이 들고 그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밤에 잠을 잘수가 없고 마음이 아주 괴로워요. 그래서 내려와서 다시 우리 집사람 발 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더니 이번에는 우리 집사람도 자기는 자는데 남편이 발 아래에서 기도를 하니까 편하지 않았는지 수시로 내려와서 같이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똑같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긍홀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난 교회를 개척해야 된다는 마음이 생겨났어요. 뭐 교회를 개척해 본 적도 없고 그 당시에 학교 교수 하면서 안수도 안 받았어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저를 채용할 때에 당연히 안수 안 받았으면 채용이 안 되었을텐데, 당연히 목사 안수 받은 줄 알고 채용을 했지요. 그런데 이제 전도사 생활하면서 교수 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아이고 나는 말도 안 된다. 나는 그저 좀 더 교수 생활을 하다가 큰 교회도 필요 없고, 200명 되는 교회에서 청빙하면 내가 가서 목회를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말도 안 된다. 그런데 강력한 마음을 부어 주시는 거예요. 3일을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하고 확신을 한 것이 93년도 11월 중순경의 일이었어요. 그리고 12월 12일날 방배동에 있는 아주 조그만 골목 지하에 거기에 두 번 교회를 하다가 문 닫고 간 그 장소에서 열린교회를 개척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까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이 그렇게 한 3주 만에 그 지하실 하나 얻어서 그래서 제가 적금 붓고 있었던 것 1500만원 깨뜨려서 보증금을 내고 딱 이만해요. 꼭 이만해요. 이것보다 조금 작아요. 그러한 장소를 얻어서 그래서 의자를 열 개 놓으니까 딱 맞더라고요. 20개. 20개인가. 4명씩 앉는 의자 20개를 놓으니까 입추의 여지가 없더라고요. 이만한 어린이 방 하나하고 그렇게 얻었어요. 그리고 이제 개척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죠. 뭐 개척을 하려고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개척을 했고 그 때 이미 저는 나름대로 그래도 설교의 눈을 떴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교회를 개척하면서 마음속에는 떨렸지만, 마음속에서는 한 1년 열심히 하면 300명은 모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7명이서 지하실에서 시작을 했어요. 우리 집사람 포함해서. 그럴 만했던 게 7명이 12월 12일에 시작을 했는데 1월 둘째쯤 되어서 3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래서 뭐 되지 않으랴. 그런데 그것은 교만이었고 하나님이 참 많이 낮추시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때는 그렇게 생각안 되었는데 지금은 생각하면 고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하는데 교회가 잘 안 돼요.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서 설교를 하면 예배 시간마다 펑펑 울었어요. 어떤 때는 사람들이 하도 울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하라고 진정을 시키고 설교를 했어요. 그런대도 이상하게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대도 두 가지가 이상했어요. 등록하는 것과 십일조 헌금 하는 것. 각자 자기네 교회가 다 있는 거예요. 자기네 교회는 안 가고 우리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헌금은 거기에 갖다 내고. 그 때에 참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인간이 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참 복잡하구나. 우리는 그 교회 다니고 은혜 받으면 가서 또 다니고 그럴텐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이제 제가 정신없이 바빴어요. 학교에서 제가 거의 하루에 20시간을 강의했고 보직까지 맡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교회에서 일체의 사례금을 안 받고 그리고 그냥 봉사했죠. 그러다가 이제 어느 순간에 아 이것은 아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그 좋은 대우를 뿌리치고 사표를 냈어요. 그리고 나는 배수진을 치고 목회에 올인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사표를 낸 것이 교회를 개척하고 2년 뒤의 일이었어요. 그리고 이제 온전히 메달려서 목회를 하기 시작을 했는데 그 때에 교회가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사실 선배들이 목양 일념, 목양 일념 그럴 때 아니 그러면 목회하는 사람이 목양을 하지 가서 장사를 하나 그랬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이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그랬는데 이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고요. 이 민망히 여기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희랍어로 에스프랑끄니스데라고 하는 희랍어 수동태 단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창자에 이르기까지 떨리다. 그런 뜻이에요. 왜냐하면 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어요. 우리는 대게 심장에 있다고 믿잖아요. 창자에 있다고 믿었어요. 아프리카 콩고 사람들은 간에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여러분 우간다의 이디야민이 정적을 죽인 다음에 배를 갈라서 간을 씹어 먹었거든요. 그게 이제 우리들이 보면 미친 짓이지만, 이것을 씹어 먹어야지만 이 놈의 혼령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번역이 굉장히 어려운 번역이죠. 이 제대로 번역을 한다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셨으니. 이렇게 번역을 하면 가장 훌륭하게 한 번역이에요.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두 개의 단어가 나오는데 에림메노이 라는 단어와 에스케메노이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모두 수동태 완료분사 복수형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많은 무리들을 예수님이 보셨는데 그들의 영혼의 상태가 내동댕이 쳐지고 괴롭힘을 당하고 하는 그러한 피해를 받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거예요. 그렇게 놓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이 이제껏 제자로 훈련받던 예수님의 그 제자들을 예수님이 사도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그 모든 연약한 것들과 병든 것을 고칠 수 있는 영적인 권세를 주신 거예요.
그런데 사실 이것은 전도와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이에요. 거기에서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가운데 목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자기의 뼈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에요. 우리는 여러분, 아까도 우리 교수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만, 제가 교회를 개척하던 때가 지금부터 18년 전인데 그 때와 지금이 어떠냐고 누군가가 저에게 물으면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나는 말하고 싶어요. 18년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고 싶습니다. 특히 농촌이 아니라 도시인 경우에는 이것이 더욱 더 적용이 되는 말이에요. 내가 이 귀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20년 사이에 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제가 길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교회를 개척을 해서 10년이 넘고 많으면 15년이 넘으신 분들은 그 당시의 목회를 할 때에 가지고 있었던 사회를 바라보고 영혼을 바라보던 시각을 기본적인 복음적인 관점, 인간은 죄인이라든지 그리스도 없으면 안 된다든지 하는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은 불변하지만 그러나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그 자체와 생각을 여러분들이 많이 바꾸지 않으면 목회에 상당히 지장을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하셔야 해요. 그래서 의외로, 저도 개혁주의를 아주 사랑합니다만 개혁주의를 사랑하고 청교도를 잘 말하는 사람들의 교회가 의외로 건강하지 않고 계속 쭈글어들어서 그래서 현대와의 거의 접촉점이 없이 교회가 침체에 빠지는 경우는 저는 주위에서 자주 봅니다. 그래서 이러한 속에서 여러분들이 깊이 고민을 하셔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저는 그 당시에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처음에 한 3년 동안 목회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정신 없었고 그러다가 이제 저도 안수를 받고 이렇게 하면서 목회를 5년을 하고 나니까 담임 목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윤곽이 희미하게 떠오르더라고요. 그런데 저도 그렇게 무지막지한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그렇게 그게 어려울까. 어렵더라고요. 5년이 걸리니까 담임 목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직무가 그려지더라고요. 그런데 밖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5년이 아니라 15년을 했는데도 아직까지 그림을 못 그리는 담임 목회자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고 사실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이 뭐냐 하면 예배였어요. 나는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강력하게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미 읽으셨을 것이라 기억하는데 1997년도에 제가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쓴게 교회를 개척하고 3년 반이 되었을 때 일이었어요. 그 안에 예배에 나오는 그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내용을 제가 직접 목회하면서 생생하게 경험한 내용들이었지만, 지금 그 책이 다시 리메이크 되어서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오는데 97년도에 나왔을 때 그 책이 10만부가 넘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그 책에서 제가 이야기 했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읽지 않으셨다면 꼭 구입해서 여러분들이 읽어보시도록 권하고 싶고, 생명의 말씀사에서 최근에 나온 그 책의 뒤편에는 제가 작년인가 재작년에 우리 합동측 총회에서 천여명 목사님, 장로님 모임 가운데서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되어서는 절대 교회가 미래가 없다는 그 아주 중대한 강연을 한 CD도 붙였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전에 보셨다면, 지금 목회를 하고 한 13년 정도 지난 다음에 다시 그 책을 읽는다면 아마 새로운 느낌을 받으실 수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어쨌든 예배가 굉장히 중요한 거라는 거죠. 왜냐하면 이 우리의 그 목회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에이든 윌슨 토저의 지적과 같이 참된 예배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목회 사역의 목표에요. 그리고 이 예배는 결국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의 그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제 웨스트민스터에서 그 아주 박식하게 구약을 가르쳤던 메르디티크라인 이라고 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 메르디티크라인이 자기의 책 속에서 그 예배와 제의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어요. 우리들이 흔히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은 일원론적인 사고라 해서 이원론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하는 플라톤주의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내치고 그리고 우리는 이제 통합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구분되지만 그러나 결국은 펼쳐지는 하나의 나라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제 예배와 제의와 우리의 일반적인 삶, 특별 은총의 영역과 일반은총의 영역 자체가 구분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제 이러한 것들을 극단화 하게 되면 또 다른 오류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 오늘날을 보면 예배가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서 형식적으로는 중심에 와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영향을 받는 데 있어서는 여러분, 예배가 중심에 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들으시면 충격 받으시겠지만 한 15년 전에 어느 선교단체에서, 신학연구소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예배를 끝나고 나가는 교인들을 대문 바깥에서 앙케이트를 냈어요. 지금 방금 예배가 끝났는데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하셨습니다. 95%가 교인들이 모른다고 그랬어요. 그 중의 절반은 방금 예배를 드렸는데 읽은 본문이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도 생각이 안 난대요. 그래서 더 재미있는데 5%의 사람들을 추적을 해서 3일 뒤에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랬더니 5명 교인 가운데 2명은 3일 사이에 잊어버리고 3명만 기억을 하는 거예요. 그게 소위 복음주의적인 교회의 예배의 광경이에요. 이런 식으로 이제 예배를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예배가 드려져니까 삶이 잘못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셔야 하는가 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삶이 있고 그리고 이 예배가 이렇게 이 속에 예배가 갇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이원적인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나 이것이 똑같이 예배와 삶이 구분이 없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래서 이제 메리트 크라이같은 본이 종합하면 이 분이 그런 것은 아니고 제가 만들어 냈는데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이렇게. 그래서 이것은 예배에요. 혹은 제의에요. 그 다음에 이것은 삶이에요. 생활이죠.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을 타고 만난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승하고 하강하고 할 때 구분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층차를 보면, 이렇게 놓고 층차를 보면 여기에는 이만큼 고도차이가 날 것 아니에요. 여기에 이렇게 예배가 있고 삶이 있는 거예요. 이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예배가 되고 제의가 되고 이 가장자리가 삶이 될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런데 이게 어디까지가 예배고 어디까지가 삶인지 끊어지지가 않는 거죠. 가장 성경적인 그 예배의 도식이에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예배는 삶으로 흘러가야 하고 삶은 삶이 있어야 예배가 가능하고 그렇지만 예배와 제의는 일반적인 삶 보다 우위에 있어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삶이 안일하고 태만한 사람이 주일날 와서 눈물로 열렬하게 예배드린다고 하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에 있어서 이 예배와 삶, 이것에 대한 균형 잡힌 강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거죠.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에서 예배하다 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히스타하베 라고 하는 히스타베 동사인데 경배하다, 그 다음에 엎드리다 이런 뜻으로 사용이 되었어요. 이것에 대한 번역이 라뜨레이하 에요. 이게 봉사라는 말로도 쓰이는데 그러면 라뜨레이하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베드. 그 종으로서 섬기다. 경작하다라는 뜻이거든요. 이러한 삶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넓은 의미의 예배는 삶이고, 좁은 의미의 삶은 예배에요. 다시 말씀을 드릴게요. 넓은 의미의 예배는 삶이고, 좁은 의미의 삶은 예배에요. 그래서 이 두 개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사는 것만큼 예배하고 예배하는 것만큼 살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생각이 이미 목회를 하면서 정리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예배를 아주 강조를 했죠. 더군다나 그 때는 제가 30대였으니까 뭐 무한한 기력이 있었죠. 진짜로 나는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마음 먹으면 그 정신력으로 뭐 그 버텼어요. 그래서 수많은 책들도 쓰고 그랬습니다만, 그렇게 하잖아요. 예배 시간에 뭐 11시에 예배를 드리면 거의 뭐 1시 정도에 끝났고, 대게 설교 시간은 100분 정도였어요. 100분 정도. 그리고 길게 할 때에는 뭐 11시에 예배 시작해서 2시에 끝난 적이 있었어요. 설교만 144분 30초를 했는데 그랬죠. 그러면 뭐 저야 그때는 교회를 크게 만들어야 되겠다는 욕심도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냥 하나님이 말씀을 부어주신 대로 설교자의 가치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제 체력도 뭐 버텨줬고요. 그런데 교인들이 작은 교회에 점점 모여져서 이것보다도 한 30% 작은 예배당인데 270명까지 모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예배를 드렸냐 하면 막 그냥 우겨 넣는 거죠. 여기에도 사람이 앉았으니까. 머리를 이렇게 들고. 그렇게 해 놓고 우겨놓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보람을 느꼈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거죠. 사람들이 거기 와서 변화를 받고 이제 교회에 등록을 하고 하면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을 했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를 보면 좀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간절한 갈망 거기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하는 기대 이런 것들이 없어요. 너무 없이 교회에 나오고 또 설교자가 예배의 목표 자체를 아주 낮게 잡아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그냥 커다란 실수 없이 그냥 이렇게 워십 서비스를 완성하면, 마치 가톨릭에서 미사 하듯이 그러면 그냥 되는 거다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뭐 제가 부교역자로 있었을 때에도 그 교회에서 보면 예배가 시작되기 5분 전인데도 교인들은 안 와요. 영화관에 갈 때에는 15분 전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교회에는 5분전 되면 막 러시아워처럼 밀려와요. 그리고 땡 하고 예배가 시작되어서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죠. 그리고 나서 설교가 시작이 되는데 옛날에는 사실은 예배 시간이 기본적으로 2시간이었어요. 주일 예배가. 목사님이 항상 예배당에 올라가서 1시간 40분 예배드린다고 신자인줄 아냐고 그랬거든요. 지금은 1시간 안에 예배를 끝마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아주 많은 거죠. 그러다보니까 순서는 계속 늘어나고 설교 시간은 계속 줄어들어서 20분 뭐 어느 교회에서는 18분, 15분. 이렇게 하고 끝나는데 그것도 사람들에게는 너무너무 지루하고 지겨운 시간이에요. 오죽했으면 듣기 싫은 이야기 하면 설교하지 말라고 해요. 그래요. 그렇게 해가지고 앉아서 예배드리는데 그 시간을 무엇으로 때우느냐 하면 이런 것 주보 만들어놓고 주보나 보고 앉아서 슬슬 읽고 그리고 헌금 나온 것, 옆으로 나눠놓고 곱해보고 왔다 갔다 왔다갔다 해보고 이러다가 그래도 못 견디니까 졸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예배 시간이 전화가 와 가지고 전화벨 울리는 사람, 그리고 또 어디서 전화가 왔길래 급한지 설교 시간에 그것을 가지고 통로로 뛰어 나가는 사람, 그리고 뭐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 난 그래서 말해요. 거기 하나님 안 계시다. 내가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확신을 하는데 거기 절대로 하나님이 안 계시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면 내가 앞장서서 하나님 오시지 말라고 말리겠다. 하나님이 뭐 하러 거기 오시겠어요. 그게 민방위 교육 받는 거지,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목회요. 다른 것이 없고요.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야 됩니다. 오죽 했으면 루터가 멜랑키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당신은 설교할 때 사람들이 당신 설교를 듣고 화가 나든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화가 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게끔 설교를 하래요. 이해되시겠어요? 사람들이 당신 설교를 듣고 화가 나든지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을 못 미치는 네가 네 자신을 보고 화가 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라는 거죠. 그게 설교에요. 그러니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예배에요. 예배. 거기에 목숨을 거셔야 해요.
제가 사실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설교자로서 서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그것은 제가 신학교 교수를 하면서 우리 교단에서 존경받는 목사님 교회에 청소년부 담당 교육전도사로 담당을 하면서 신학교 교수를 했어요. 그런데 신학교에 있을 때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운데 교회에 오면 아주 심령이 괴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애들이 회심의 흔적이 없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예배 시간에 막 전에 있던 교역자하고 이취임식을 하는데 요만큼 모여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가 들리지를 않아요. 애들이 떠들고 비행기를 날리는 거예요. 저는 그런 것 못 보거든요. 가서 혼을 내 놓고 휘어 잡았어요. 애들이 그렇게 휘어 잡히기는 하지만 말을 듣습니까. 마음을 닫고 너무 괴로워서 토요일마다 보따리를 싸가지고 교회에 가서 예배당 여기에서 그 엎드려서 토요일마다 철야를 했어요. 뭐 꼬박 세우지는 않고 기도하다가 청소도 하고 그 다음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지막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설교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그러다가 이제 쭈구리고 앉아서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 설교를 해요. 그것을 제가 2년을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으셔서 그러다가 진짜 정말 놀라운 부흥을 주셨어요. 그런데 설교를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주 처참한 마음, 왜냐하면 우리의 목회의 영광이라는 게 뭐겠어요. 우리의 목회의 영광이라는 것은 큰 빌딩 짓고 사람들이 수없이 모이는 그것이 목회의 영광이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청교도들이 목회자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그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후예이고,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그 사도들의 후예라고 생각을 했는데, 선지자들이 무슨 왕 앞에서 설교를 했다고 자신의 영광이라고 생각을 했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수많은 백성들이 귀를 기울였다고 우쭐했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사람은 감옥에서 혼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그게 사실은 누가 그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습니까. 안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그 말이 이루어졌잖아요. 그러니까 목회에서의 가치 자체를 그 외적인 그런데다 두지 말고 정말 목회의 최고의 영광은 방황하던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받고 단정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여기에 목회의 영광을 두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동료 목회자들 만나고 다음 주에라도 만나서 지난 한 해 동안에 우리 목회 사역에서 회심의 열매가 얼마나 있는지. 맨 모여도 세상에 재미없는 모임이 목회자들의 모임이에요. 맨 교회 땅 산 이야기, 말 안 듣는 장로 혼내준 이야기. 성지순례 갔다 온 이야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리고 교회가 커 보니까 이것은 거의 형벌과 같은 거예요.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큰 문제가 뭐냐 하면 목회 자체가 하나의 경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효율을 추구하고 마케팅의 기법을 동원하고 그리고 조직을 관리하고 무슨 그 기업체를 꾸려나가는 것 같은 연장선상에서 교회를 보는 것.
실제로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대교회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는데, 목사님 나 주일이면 도대체 회장이 된 것인지 목사가 된 것인지 모르겠어요. 결제 받으려고 쭉 서있고 말이지. 그렇게 살아요. 그런 속에서 목회의 본질을 수시로 잊어버리게 되니까 우리가 그것을 굳게 붙들어야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의 회심이에요. 나는 저는 18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한 번도 금년의 표어 금년의 목표 이런 것들을 세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보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사가 있을 때 할 수 없이 임직식 같은 것을 할 때 만드지만, 예배 시간에 만들 필요가 없고 종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찬송 부르려고 하면 부르고 설교하면 듣고 축도하면 집에 가면 되지,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찬송 부를 것을 무슨 일주일 전에 정해야 할 것이 뭐가 있겠냐는 거예요. 가서 부르면 되는 거지. 맨 날 부르면 되는 거지. 예배 시간에 시간이나 때우게끔 붙들고 다니게 만드는 것, 거기에서 하면 뭐 합니까. 거기에 무슨 교인들이 시도 쓰고 간증도 쓰고, 그게 무슨 문학잡지입니까. 주보가. 무엇인가 뚜렷하게 그 시간에 예배에 와서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 라고 하는 절박함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뭐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악기를 수없이 도입을 해가지고 그냥 막 거의 이게 무슨 밴드인지, 교회 성가대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하는데 그것도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종교개혁 속에서 내려오는 이 전통 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찬양은 나 좋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흐트러진 정신을 모두 하나님 앞에 모으는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우리의 정신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많은 사물을 보면서 우리의 정신이 찢어진다고 묘사를 했어요. 디스텐데르라고 하는데 그렇게 라틴어로 디스텐데르가 찢어지다 에요. 찢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예배자로서의 적합한 마음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것들을 아텐데레, 다시 모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 그 다음에 주님을 향한 경배 속에서 흩어져버리고 분산되었던 우리의 마음이 모아지는 거에요.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가장 적합한 자세가 되는 거죠. 그렇게 생각을 하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단순한 방식으로 예배를 하면서 사람들이 그 예배의 장소에서 여기가 구별된 곳이고 구별된 시간이고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신다 라고 하는 영적인 아주 분명한 그 성령의 경험과 은혜의 체험이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 깨달아져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개혁주의의 신앙의 원리는 뭐냐 하면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설교가 사람들에게 파고들 수 있도록 설교를 해야 해요. 감성을 찌르라는 것이 아니라 지식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원고를 써 왔는지는 모르지만 놓고 계속 이러고 한 시간 내내 읽는 거죠. 교인들이 다 자죠. 그것 왜 그런 정도로 설교를 하려면 집에서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는데 그렇게 표현력이 없으면 외워야죠.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고 이렇게 해서 진심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생각을 해야 하는 거죠. 그렇게 안 하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와 닿는 것이 아니죠. 마음에서 시작된 말은 사람의 마음에까지 다다르지만 머리에서 떠올라서 전달된 마음은 허공에 흩어지거나 기껏해야 머리에까지 다다릅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죠. 여러분들은 설교 한편을 위해서 얼마나 준비를 하십니까. 저는 전도사일 때 5년 동안을 풀 스크립트로 설교를 작성했는데 설교 한편을 작성하는데 24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준비를 해서 그래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가지고 말하자면 그 설교 속에서 설교자가 고뇌했던 그 피와 땀과 눈물이 함께 묻어나야 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대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파가지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배는 안 드릴 수가 없어서, 그리고 드리고 싶고 그래서 처음으로 환자복 위에다가 코트를 입고 동네에 있는 교회에 가서 두 번 예배를 드렸어요. 하나는 침례교회였고, 하나는 통합측 교회였는데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 목사 되고 나서는 그렇게 평신도처럼 가서 예배드린 게 처음이었는데 야, 어떻게 저것을 기독교의 설교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속에서 분노가 생겨나는 거예요. 도대체 그 생활비 받고 일주일동안 저 사람은 뭘 하다가 온 것인가. 그렇게 하면 안 돼죠. 여러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잖아요. 작사, 작곡, 노래, 춤까지 잘 출 수 있으면 만능 엔터테이너이죠. 그런데 그렇게 못하면 되지도 않는 곡 부르지 말고 그 훌륭한 목사님들 스펄전이나 칼빈이나 훌륭한 목사님들 있잖아요. 가서 그분들이 설교한 것 열심히 읽고 그것이라도 잘 정리해서 내용이라도 있게 자기가 깊이 은혜 받고 외쳐야 되잖아요. 이 예배와 설교에서 원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목사가 설교를 펼쳐놓고 너무나도 은혜를 받아서 가슴이 찔려서 피가 흐르면 교인들은 겨우 눈물을 흘려요. 웃음이 나옵니까.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피를 흘릴 정도는 아니지만 눈물을 쏟아요. 그리고 교인들은 겨우 땀이 나요. 그런데 덜렁덜렁 해가지고 그 준비도 별로 없이 올라가서 된 소리 안 된 소리 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예요. 목사라고 하는 이 말은 진리를 맡은 하나님의 종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을 바꾸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서 예배 시간이 구별된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못했는데 그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꺾어져서 그래서 그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거예요. 그러한 일들을 위해서 목회자가 부름을 받은 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아 그것도 달란트라서 설교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은 물론이죠. 아니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공부한다고 해서 다 칼빈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운동 한다고 해서 다 조용기 목사님이 되겠습니까. 제자훈련을 한다고 해서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이 되겠습니까. 열심히 설교를 준비한다고 해서 자기가 세기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가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사역의 결과만을 통해서 하나님이 평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임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경배의 과정이에요. 몸부림을 쳐야죠.
자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모든 교인이 전도의 달란트가 있습니까. 그러나 전도는 모든 교인의 의무에요. 어떤 사람은 달란트가 있어서 5천명, 만명을 전도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힘들게 힘들게 해서 일년에 두 세명 밖에 전도를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세상 끝날까지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이죠. 목회자도 마찬가지에요. 그것이 목사로 불러주신 부르심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거죠. 뭐냐 하면 설교를 여기에서 갔다가 저기에다가 던져서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설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설교를 하셨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설교였어요. 당신 자신을 울리고 나온 말씀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듣는 사람을 깊이 찌르는 거죠. 영혼들은 영혼이기 때문에 목사가 설교를 하면 이게 누구의 것 배낀 것인지 아니면 신문 읽다가 나온 이야기인지, 아니면 일주일 내내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 하다가 나온 신음소리인지 그것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금방 알아요. 금방 아는 거예요.
재미있는 예화 하나 들려 드릴까요. 여러분, 한 때 고신에 계셨죠. 우리 박윤선 목사님. 그리고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종신하셨습니다만, 그 합동 측에 계실 때 교회를 하나 개척을 하셨어요. 50이 넘으셔가지고 그 때에 개척교회인데 거기에 그 대학의 이화여대 교수분이 예배에 참석하셨어요. 그 분은 누구냐 하면 문선명 교파로 알려져 있는 거기의 신자에요. 그 분이 주일 밤 예배마다 참석을 하셨어요. 몇 달 착실하게 나오니까 부목사가 하도 궁금해서 교수님, 우리 박 목사님 설교 들어보시니까 이해가 됩니까. 이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드래요. 난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도 박 목사님 설교가 맞는지 우리 문 선생님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6개월 다니면서 자기가 하나 확신이 오는 게 있대요. 뭐냐 하면 저 연세 드신 분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실 때 그냥 얼굴이 시뻘게져가지고 피를 토할 듯이 외치는데 진리가 아니라면 절대로 저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진리이니까 설교자가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이지, 그럴 수 없다. 제가 들은 거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자, 저기 십자가가 있거든요. 한번 가 보세요. 굉장히 좋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 하는 거죠. 자기가 그 십자가 아래에서 떨어지는 십자가의 보혈을 맞으면서 그러면서 이리로 오라고 불러야죠.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잘 들어 보십시오. 설교한 본문에 자기도 은혜를 못 받고 교인들이 은혜를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것은 사행심리이죠. 자기는 그 설교 본문에 회개한 적이 없으면서 내 설교 듣고 인생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무슨 도박하는 심리이지,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비록 국내의 유수한 설교자와 같은 그러한 설교의 언변과 능력이 없을 지라도 한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 마음이 깊이 찔린 설교를 준비해야 되는 거죠. 그렇죠. 제가 여러분 그것이 뭐냐 하면 삶이 거기에 따라와야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들도 있어요. 드물긴 하지만, 많아요. 그런 목사님도 있어요. 그런 목사님들이 제일 힘이 나는 설교는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하는 설교에요. 또 목사님들 가운데 전도 열심히 하는 분들 있어요. 그 분들은 전도하라는 설교할 때 제일 힘이 나요. 노숙자들을 돌보는 이런 목사님들 있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 할 때 그 설교 속에서 힘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구제하라는 설교만 해야 겠어요? 전도하라는 설교만 해야 되겠습니까. 기도하라는 설교만 해야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설교 해야 되잖아요. 삶의 정방면에 있어서 주님께 헌신되어 있어야 해요. 그 때 거기에서 그것이 나오는 거죠. 나는 확신해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배의 준비를 위해서 일주일 동안에 상당한 날들을 떼어놓고 마치 이번 주일 설교가 내 인생의 마지막 유언인 것처럼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교회가 반드시 변합니다. 그리고 말씀 드리는 게 뭐냐 하면 설교의 가치는 자기의 독창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설교 원고 써 놓고 내용도 없고 되지도 않으면 자기 원고 버려 버리고 차라리 남의 원고를 붙드세요. 지금 책이 시중에 수없이 나오는데, 그 대신 그것을 갔다가 어느 부흥사들이 하는 것 마냥, 남의 집 설교집을 뜯어 가지고 올라가서 그렇게 설교하는 것은 도둑질이에요.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게. 그것을 잘 읽고 은혜를 받아야 해요. 칼빈 설교이든 스펄전의 설교이든 누구의 설교든지 간에 잘 듣고 성경적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먼저 받으세요. 예배자가 되어 본 사람만이 설교자가 될 수 있어요. 가장 훌륭한 설교자는 좋은 청중에서 나와요. 좋은 청중에서. 그러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청중이 아닌 설교자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재주꾼이지 예배자가 아니에요.
제가 우리 부교역자들에게 항상 타이릅니다. 좋은 청중이 되는 것이 설교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얘기해요. 설교 시간에 움직이지 말라. 움직이지 말라. 예배 시간에, 특히 설교 시간의 목표는 45분 설교를 하든지 100분 설교를 하든지 부동자세여야 해요. 숨 쉬고 눈꺼풀을 깜빡하는 것 이외에는 움직이지 말아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개척을 하면서부터 철저히 훈련을 시켰어요.
(예화) 1999년도에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그때도 벌써 교인이 한 800명 정도 모였을 때 일이었어요. 교회 옮겼죠. 옮겼는데 CBS에서 주일의 강단 녹화를 하겠다고 프로듀서 3명이 왔어요. 엔지니어들이. 그리고 설교를 녹음을 하는 거예요. 넓은 예배당이었죠. 한 900명 들어가는 예배당에 한 800명 모였을 때, 그러더니 그 코드를 뽑아야 하는데 이것을 뽑아야 되는데 뽑을래다 뽑을래다 한 시간 내내 못 뽑고 갔어요. 왜냐하면 완벽한 침묵이 흐르니까 어느 교회는 그런 이야기를 해요. 창세기 28장 18절에 보면 우리 교인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펼치지 않거든요. 그런데 어느 교인이 책을 펼치거든요. 천둥이 치는지 알았대요. 온 예배당에 한 900석 정도 되는 이 소리였는데, 이 소리 한 장 넘기는게 천둥치는 소리처럼 들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예배 시간에 회중이 천명이 되든지 2천명이 되든지 5만명이 되든지 간에 한 손으로 확 움켜잡아서 그 사람들이 마음을 쏟아서 설교자에게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놓고 설교를 해야죠. 꼼꼼하게 설교 준비를 하고 재능이 없다, 달란트가 없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여러분 가운데 탁월한 분도 계시겠지만, 그냥 풀 스크립트를 쓰세요. 완전하게 원고를 쓰세요. 완전하게 원고를 쓰면 80분 정도 설교 하려면 A4 용지로 해서 16장정도 써야 해요. 타이프 치는 용지로 꼼꼼하게 써서 예전에는 교정까지 다 봤어요. 써 놓고 그 다음에 하루 정도 교정보고 그랬어요. 깨끗이 써놓고 그리고 그것은 가지고 올라가서, 그것은 초창기의 일이에요. 지금은 전혀 안 그래요. 그리고 가지고 올라가요. 그런데 보지는 않아요.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암기해서 설교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건강이 허락하면 토요일날 엎드려서 강대에서 생사를 결판을 내고 은혜를 주시든지 설교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게 하시든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고는 마지막에 올라가서 이게 내 생애의 마지막 순간처럼, 리차드 백스터 말씀처럼 나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죽어가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인 것처럼 설교 한다. 책상에 항상 써 놨다고 하잖아요. 전설적인 인물이에요. 그 분이 굉장히 학자이신 것 아십니까. 외쳤어요. 그리고 간절하게 외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예배시간 마다 기적이 일어나요. 그리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설교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난 사람이 그 교회에 매달려야지 그게 내 교회이지, 그 건물이 예뻐서 왔는데요. 우리 친구가 많아서 왔는데요. 우리 목사님이 삼촌이라서 왔는데요. 부목사님이 삼촌이라고 왔는데요. 그게 자기의 양 떼 입니까. 주님 만나서 깨뜨려지지 않아본 사람들이 그게 참 주님의 양 떼 입니까. 주님의 교회 안에서 생활하다가 나중에는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하는 그것은 교회의 최악의 형태의 교회에요. 그러니까 그런 각오를 가지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돼요.
할무트 틸레케르라는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가 주일날 와서 외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목사가 와서 주일날 외치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6일 동안 그 말씀을 붙들고 피 흘리며 몸부림 쳐야 한다. 그 때에 그것이 계시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해요. 교회가 커지는 것 자체가 영광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계속 커지면 목사의 그 마음이 녹아 내려요. 예배당이 모자라서 예배당을 준비해야 해. 말도 못합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예배당도 지어보고 그리고 교육관을 한 번 사봤는데 4년 터울을 두고, 2년 터울을 두고 4년에 걸쳐서 160억 짜리 프로젝트를 했어요. 불과 교인 700명일 때, 70억, 80억 짜리 프로젝트. 천명 좀 넘어갔을 때 다시 80억. 나중에는 교인들이 헌금을 안 하더라고요. 헌금 다 싹싹 거든지 2년 밖에 안 되었는데 다시 또 헌금을 하라는 거예요. 죽다가 살아났어요. 그러면 무슨 욕심이 있겠어요. 아무 욕심이 없어요. 욕심 없는데 애 낳으면 방이라도 하나 마련이라도 해 놔야 할 것이고, 남녀 애 아들, 딸 낳으면 얘네들이 사춘기 들어가면 방을 나누어 줘야죠. 어떻게 한방에 넣어 둡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이에요. 300명 애들 데리고 왔는데, 한 2-3년 사이에 애들이 600명이 되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는 고통이 몸부림쳐요.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돈 때문에 그렇게 단련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에요. 나는 목사는 돈과는 관련이 먼 줄 알았어요. 사택을 제가 교회 사택, 교회 가건물에서 10년을 살았어요. 3층 꼭대기에 샌드위치 판넬을 가지고 사택을 준비했는데 22-23평 되는 곳에서 네 식구가 사는데 창문을 열면 저기 교육관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돈 때문에 울어보기는 처음이에요. 생전 살면서. 저녁마다 그 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거예요. 살려달라고. 교인이 또 넘쳐서 예배당을 지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래서 너네들끼리 지으라고. 나 은퇴하면 지으라고. 정말 자신이 없어요. 그게 성장하는 교회의 고통이에요. 남들이 들으면 뭐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는데 전혀 안 행복하거든요. 목사가 무슨 전공이 건축학입니까. 신학이지. 말도 못하는 끊임없는 고통, 괴로움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의 정말 목회자로서의 최고의 가치는 두 가지에요. 하나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충만히 닮아가는 것, 그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거예요. 말씀에 설교를 이 마음속에서 간절히 충심에서 우러나와서 몸부림이 담긴 설교를 하려고 노력을 하라. 한명이 들어도 그것은 상관이 없고, 그리고 사모 혼자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그 말씀이 살아있는 한 역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몸부림 쳐야 된다 이야기입니다. 예배 시간에 매일매일 회개하는 사람을 주시고 눈물을 흘리고 어떤 때에는 예배가 12시 반에 끝나기로 되어 있는데, 의외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서 한 시간 넘었어도 예배가 안 끝나는 일이 매주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가끔 있어야 하잖아요. 가끔. 설교자도 시간을 잊어버리고 교인들도 시간을 가끔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한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외쳐야죠. 오늘날 거듭되는 지금 교회의 많은 문제들 대부분은 목회자들 문제에요. 목회자들. 신문을 열수가 없어요. 요새는 너무 괴로워서. 그게 남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이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다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인데 검은 가운 하나 뒤집어 써놨다고 그게 새 사람이 되겠어요? 절대 아니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몸부림 쳐야 되는 거죠.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목회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 은혜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위가 터졌을 때, 그 깨뜨려진 바위에서 생수가 솟아났듯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깨뜨려진 육체를 통해서 생명의 물이 솟아나고 그 그리스도 만나고 변화 받은 목회자의 마음속에서 흐르는 그 진한 아픔과 눈물을 통해서 거기에서 그 진리의 말씀들이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금년부터 생각을 많이 바꾸셔서 나는 성공하기 위해서 태어난 목회자가 아니라 내 인생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전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깊이 몸부림치고 설교에 생명을 걸어보세요. 그러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가끔은 성경책 사이에다가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야 해요.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그 해 받으셨나
깊이 깨뜨려져서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고 그것을 잘 기록을 해 놓으셔야 해요. 기록을 해 가지고 그렇게 기록해 놓은 것 속에서 설교를 찾아야 해요. 어느날 설교해야지, 그러면서 성경을 핀다 이야기에요. 그것은 직업적인 의미에요. 그러니까 성경이 그랬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곧 검을 가지라. 이게 그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고 차곡차곡 언제 설교할지 모르지만 노트에 기록을 해 놔요. 그리고 가슴속에 쭉 묻어놓는 거죠. 그래서 필요할 때 그것을 꺼내서 그래서 다시 잘 감동을 불러 일으켜서 예화도 좀 잘 좋은 예화, 진실하게 찾아내고 해서 잘 작성을 해서 그래서 여러번 읽고 해서 외우고 그리고 핵심만 요약을 해서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외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만 한다고 목회가 되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보면 의외로 설교를 꽤 잘하시는데 목회가 잘 안 되고 교인들이 흙처럼 부스러지는 교회들이 있어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 다음에는 교인들을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말씀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 욕구를 가지고 교회가 체계적으로 성경을 가르쳐야 해요. 그 중에서 아까도 말씀을 나눴습니다만 우리가 지금 심각한 게 뭐냐 하면 교리 교육이에요. 교리 교육. 지금은 교파에 따라서 아무 차이점이 없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모든 교회에서 교리를 거의 안 가르치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심지어는 자기가 장로교인이 된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교리 교육을 시켜야 돼요.
저는 개척을 하면서부터 이것은 철저했어요. 원칙을 세웠는데 그게 뭐냐 하면 교리를 모르면 절대로 회심했어도 세례 안 준다. 그래서 세례 받으려면 두 가지 자격이 있는데, 그것은 확실하게 회심했어야 하고, 두 번째는 회심 했어도 기독교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면 안 된다. 그래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놓고 세례 받을 사람들은 한달 반 정에 신청을 해가지고 그리고 한달동안 열심히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놓고 가르치고 세례 받기 두 주전에 시험을 봐야 해요. 그 시험을 어떻게 보냐 하면 당회원 한 사람과 부목사 한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이제 교인들이 많아지니까 한번에 응시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했냐 하면 둘이서 면접관이에요. 방하나에 탁 들어오는 거죠. 물어 보는 거예요. 장로님과 목사님과 번갈아가면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저는 구원 받았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회심의 증거들을 쭉 간증을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교리편에 들어가서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뭡니까. 그러면 그 자리에서 총알같이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모두 외워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를 내 가지고 열 개에서 2개 이상 틀리면 그냥 떨어뜨려 버리는 거예요. 불합격이죠. 그러면 일주일 후에 재시험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 때도 못 외우면 세례 받을 의사가 없는 것이라 치고 내쳐버리는 거죠. 그러면 다음에 들어오든지 말든지 본인이 알아서 하고, 그러니까 그 동안에 세례를 받으면서 기독교 교리 전체를 외우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해 놓고 그것만이 아니라 그러다가 청년들의 경우에 결혼하잖아요. 결혼하기 전에 이 교리 시험을 봐야 해요. 교리시험에 불합격하면 교회 안 빌려줘요. 담임 목사 주례 안 서주고요. 교리 통과해야 해요. 그러다가 조금 있으면 시집 장가가서 애를 낳잖아요. 애를 낳으면 부부가 와서 교리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교리 교육의 유효기간이 3년이에요. 결혼한 지 3년 안에 아이를 낳으면 다시 교육 받을 필요 없고 시험만 보면 되는 거예요. 다시 물어보면 대답을 하면 돼요. 모든 당회원들이 면접을 해요. 시험을 봐요. 그런데 3년이 넘었어요. 그러면 둘 다 와가지고 다시 한 달동안 교육을 받아야 해요. 그렇게 해야 해요. 그리고 두 번째 애 낳으면 또 똑같이 해야 해요. 3년 안에 낳으면 시험만 보면 되고 3년이 넘게 낳으면 교육받고 다시 시험 봐야 되고 그러다가 보면 교회에서 집사가 될 때 있잖아요. 집사가 될 때에는 다시 교리 시험을 봐야 돼요. 교리시험에 불합격하면 그것은 안 된다 이거죠. 교리시험을 보고 합격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입교하고, 교리문답하고 들어와 가지고 한 2년 쯤 지난 다음에 무엇을 하냐 하면 교리학교를 해요. 교리학교는 제가 직접 가르쳐요. 다른 것은 몰라도 교리학교는 제가 직접 가르쳐요. 교리학교에 한 2백 명씩 들어와요. 들어와서 루이스뻘꼽의 조직신학을 가지고 공부를 해요. 그래서 매주 테스트에요.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리고 마지막에 90점이 나와야지만 수료를 하는데, 그것을 수료해야지만 가르칠 자격을 줘요. 그것 수료하지 않으면 절대로 교사가 될 수 없어요. 구역장은 더더욱 물론이에요. 그리고 안수집사도 임직투표에 나올 수가 없어요. 그것을 끝나고나서 다시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고급 교리반을 모집을 해요. 거기에는 기독교 강요, 라틴어에서 직역한 초판본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거예요. 한 천 페이지 정도 돼요. 공부하고 매주일 시험을 보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봐서 마지막에 정확하게 90점이 넘어야 해요. 조금 줄었어요. 옛날에는 2400페이지를 읽혔어요. 기독교 강요 최종판, 6권 짜리. 그렇게 해 놓고 나면 이 사람들이 집에서 기독교 강요를 옆에 놓고 계속 읽는 거예요. 1년에 두 번 읽는 사람도 있고 한번 읽는 사람도 있고, 계속 읽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놓고 그 고급 교리반을 마쳐야지만 임직 투표에 나올 수 있어요. 장로, 권사. 거기에 나올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아직까지도 우리 교회에서 17년 동안 있으면서 누가 교리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교리교육을 받고 개혁주의교리를 습득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절대로 집사도 될 수가 없으니까, 안 되니까 그러니까 누가 허튼 소리를 해도 사람들이 다 교리적으로, 이번에 왜 어느 교단 교파에서 만들어가지고 휩쓸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동네에도 옆에 있는 교회 하나는 한 교구가 무너져버렸어요. 심지어 얘기 들으니까 부목사, 장로들까지 쫓아가고 이단으로. 우리 교회는 피해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침투해 와도 동의를 안 하니까요. 내놓고 교리 논쟁을 하면 이게 발끝도 따라올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해 놓고 도서관을 만들어 놓고 도서관에다가 수많은 개혁주의교리책들을, 그리고 성경신학에 관한 책들을 8천권 넣어놓고 거기에 가서 늘 공부하고 성경읽고 일년이면 구역공부를 책을 가지고 해요. 교리서와 이런 책들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일년에 최소한 3권 정도 공부해요. 한 10년 정도 다니면 신학책을 최소한 30권 정도 공부하는 거예요. 뭐 하죠. 그렇게 해 가지고 공부를 하는 거죠. 철저하게 하는 거죠. 그것도 모자라니까 일년에 두 번 내지 세 번 정도는 온 교인들을 기도원에 모아 놓고 이제 그 마당에다 모아놓고 어려운 그 역사신학 강의나 무슨 중생론이나 아니면 무슨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상가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장중함을 공부하고 나니까 다른 사상들은 우습게 여기는 거죠. 우리 교회 교인들은 95%가 대학 출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요즘 교육 수준이 높아져서 다 알아들여요. 안 가르쳐서 그렇지. 자기네들이 목사보다 더 많이 책을 읽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말이죠. 매달 읽어야 할 책을 선정해주고 교회 서점에서 싸게 파는 거예요. 그리고 읽으라고 강력하게 푸쉬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책을 읽고 어떤 책은 좋은 책이다. 나쁜 책이다. 구분을 해주는 거죠. 그것을 읽는 거예요.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뭐냐 하면 사상의 힘이고 윤리의 힘이에요. 사상적으로 정통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고 생활에 있어서 철저하게 윤리적인 삶을 사는 거예요. 두 가지가 기독교의 힘이에요. 핍박도 꺾지 못하는 힘이라고요. 위대한 힘이라고요. 뭐 어떤 사람이 나보고 그래요. 그렇게 교인들에게 가르치면 머리만 커지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항상 물어봐요. 그러면 내가 하나 물어볼 텐데 어느 교회가 머리가 커진 교회가 있는지 얘기해 보세요. 어느 교회가 머리가 커진 교회가 있는지 한번 얘기 해 봐요. 한 마디도 잘 못해요. 내 그 교회 가서 한번 배우려고 하니까 그래서 머리가 커진 교회가 어느 교회인지 얘기해 보라고. 자기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 있지도 않은 일이에요. 있지도 않은 것. 어느 교회가 그렇게 머리가 커진 교회가 어느 교회가 있는데. 있잖아요. 그래도 우리 교회 온 교인들이 나름대로 말씀을 사모해서 온 사람들인데도 모아놓고 20명을 모아놓고 조사해 보니까 18명이 양태론자에요, 삼위일체에 있어서. 그리고 구원을 어떻게해서 받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죠. 믿는 게 뭡니까. 쩝쩝쩝쩝쩝쩝쩝쩝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게 뭡니까. 몰라요. 쩝쩝쩝쩝쩝쩝쩝쩝. 그 왜 기도 잘 하다가 교인이 갑자기 미끄러져서 기도도 안하고 그럽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몰라요. 한번 물어 보십시오.
얼마나 한심하냐 하면, 교수님 계신데 죄송하지만, 뭐 대부분 이 학교 학생들은 아니고 총신학생들이나 다른 학생들인데 신대원 학생들도 가끔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거든요. 교리반에서 교리반 시험 보면 40점 나와요. 40점. 신대원 학생들도. 정말 한심한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기독교의 전통 자체가 철저한 교육이에요. 그래서 설교 하나만 해가지고 하면 안 돼요. 설교는 중심이 되고 설교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꾸준히 교리를 가르쳐야 해요.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저희 교회에서는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쳐요. 우리가 잘 쓰는 말이 있어요. 누구와 쭉 이야기를 해 보면 목사님, 그 사람은 아직까지 정리가 안 되어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이 말 하고 저 말 하고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거예요. 그런 판단력이 생기는 가운데 사회와 인생과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교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사삐엔띠아, 지혜에요. 지혜. 삶을 사는 지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우리 교회에서 교리반에서 늘 잘 하는 까뜨키스무스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스튜데오 에로고스.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당신들은 왜 태어났습니다. 이러면서 목사가 물어보면 우리는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뭘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계시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외우게 하는 거예요. 오늘 시간이 없어서 다 못하는데 갓난아이때부터 교리교육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 오직 성경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상,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칼빈주의 교리들을 어린아이 시절서부터 철저하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남녀 아이가 네 살 먹은 아이가 교회에서 싸웠어요. 막 싸우더니 남자아이가 갑자기 야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알아? 여자 아이가, 네가 나쁜 짓해서 싸우는 거잖아. 아니야. 너와 내 속에 새카만게 많아서 싸우는 거야. 전적타락의 교리를 배운 게 기억이 나는 거예요. 교육시키는 거예요. 철저히, 철저히 교육을 시켜요. 그렇게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철저히 배우게 하는 거예요. 교리를 배우게 하는 거예요. 흔들리지 않게, 그러면 안 돼요.
그렇게 철저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이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게 뭐냐 하면 교회가 윤리적이어야 해요. 윤리적이어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이 복잡한 교리와 사상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보이는게 아니에요. 그러나 삶은 모든 사람이 불신자라도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교회에서 그렇게 황상한 일이 일어나고 대부분 그 물질적인 부정직이나 윤리적인 문제잖아요. 그것은 안 돼죠. 어느날 우리 교회에 방송장비인가 뭔가 납품하는 사람이 봉투를 들고 왔어요. 이게 뭡니까 그러니까 그 방송장비 뭐 구입해 주셔서 감사해서 그 준대요. 리메이트죠. 아 이런 것 받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어느 교회도 주고, 어느 교회도 주고 어느 신학대학교도 주는데, 심지어 갖고 오라고 그러는데 우리 교회는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여러분, 저희 저희는 교회를 하고나서 처음에는 저도 잘 몰라서 힘들었는데 교회가 커지고 지금 저희 교회 일년 예산이 70억 쯤 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한 제도가 세워진 이후로 한 7년서부터는 한번도 재정 때문에 교회에서 다툰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어떻게 하냐 하면 연말이면 그 교회 제도가 어떻게 되어있냐 하면 예산을 세우는 부서가 따로 있고, 쓰는 부서가 따로 있고 두 달에 한번씩 감사하는 부서가 따로 있어요. 완전 독립성이 유지되고 있고, 그리고 그 다음에 철저하게 감사를 해서 그것을 보고를 하고 그리고 연말에는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일주일동안 감사를 해요. 그리고 공동의회에 그 사람들이 직접 보고를 해요. 그 사람들은 우리 교회 교인들도 아니고 다른 교회 교인도 아니에요. 완전 불신자에요. 일부러 불신자를 골랐어요. 그리고 샅샅히 조사해요. 그리고 지적을 안 하냐. 지적 합니다. 책임도 물어요. 그것을 7년을 했어요. 그러니까 올해 뭐라 그러냐 하면 더 이상 지적할 게 없대요. 그렇게 해 놓고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코스닥에 상장한 회사 중에서 우량 주식회사의 수준이래요. 그래서 우리 교회 재정 원칙은 분명해요. 대부분 담임 목사들이 문제 일으키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그만큼 커졌고 하니까, 솔직히 담임 목사가 활동하고 하려니까 담임 목사가 뭐 사례금이 한정 되어 있으니까 뭐 무슨 돈으로 제가 그런 활동을 하겠습니까. 수시로 전화 걸어서 와서 목사님, 5백만 원만 보내 주십시오. 3백만 원만 보내 주십시오. 뭐 5백만 원, 천만 원. 그것 돈도 아니에요. 어떻게 그것을 제가 개인적으로 할 있겠어요. 교회에서 하는 거죠. 그 대신 뭐냐 하면 몇 년 전에도 그래요. 다른 교회도 다 하는데 목사님 영수증 없이 일 년에 몇 천 만원 쓰십시오. 그것 아니에요. 그래서 원칙이 뭐냐 하면 담임 목사든 누구든지 간에 영수증이 없는 지출은 없다. 영수증도 세법상으로 정확하게 준수해서 간이영수증은 안 받아줘요. 간이영수증은 세법상으로 3만원까지만 받아줘요. 3만원 까지만 간이영수증으로 하고 3만원이 넘으면 모두 세금계산서 발행해야 해요. 여러분들 목회자 하셨으니까 잘 알겠지만 자 이런 물건을 사요. 그런데 5천 만원이에요. 그러면 영수증 대충 해달라고 하면 5천만 원이라 해요.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세법상의 영수증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5천5백만 원 달라고 해요. 부가세니까. 어느 교회에서 소득세까지 내야 되기 때문에 5천7백만 원 안 주면 죽어도 안 끊어준다고 해요. 그것은 세무서에 딱 노출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언젠가 재직들을 모아놓고 하니까 재직자들도 꼭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참 대답하다 그랬어요. 몇 년 걸쳐서 설득을 해서 그것은 옳지 않다. 교회의 커피숍이 하나 있는데 일 년에 한 3억 매출이 돼요. 교인들이 대부분 사먹는 거죠. 세무서에 다 신고했어요. 차 한전 마시면 에누리 없이 천원 짜리 차 팔면 100원 부가가치세 납부하고 서점도 있는데 서점도 세무서 등록을 해서 완벽하게 세금을 내라. 우리 일체 그런 것 없다. 물건을 얼마나 많이 사겠어요, 일 년에. 예를 들면 20억 원어치 물건을 사면 그렇게 정확한 계산서를 달라는 것 때문에 2억 원을 더 쓰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그것이 옳다고 보는 거예요. 안 된다. 정확하게 해라. 지금은 뭐 얄잘 없어요. 아예 그 간이영수증 들고 와서 10만 원 썼습니다 그러면 재정부에서 돈을 안 줘요.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되겠죠. 왜 원칙대로 하지 않았나. 그렇게 해 가지고 완벽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회계사가 자기는 교회가 이런 곳인지 몰랐대요. 너무 놀랬대요. 그래서 완벽하게 하고 회계서류는 5년이 보관기간이고 파기하잖아요. 개척되고서부터 하나도 안 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은퇴할 때까지 안 버리려고 그래요. 어저께 회계 담당자가 너무 양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그래서 아니 그것 양이 많으면 스캔 떠 가지고 마이크로필름이라도 만들어가지고 세세무궁토록 보관해라 그랬어요. 누가 와서 언제 들여다보던지 간에 부끄러움이 없이. 그것을 왜 교회가 그렇게 비난을 받냐. 누가 인터넷에, 인터넷에 백번 이라도 공개할 필요가 있다. 할 수 있다 이거예요. 못할 게 뭐가 있냐 이거예요. 최근에 교회 몇 군데가 막 찢어지고 막 난리인데 다 90%이상이 돈 때문이에요. 왜 그렇게 해요. 쓸 수 있는 돈이면 정정당당하게 쓰는 것이고, 못 쓸 돈이면 쓰지 말아야죠. 공개적으로는 쓸 수 없고 은밀하게 쓸 수 있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목회자 자신이 그렇게 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안 된다. 철저하게 해서 책임을 묻고 그렇게 해가지고 하고 우리 교회에서는 외부 강사가 와서 설교하고 가시면 대게 50만 원 드리는데 세금 떼고 드려요. 그리고 세무서로 보내요. 아무개 교수님 우리 교회 와서 강의하고 50만원 받아갔다고 세금서 보내요. 그리고 세무서에서 돌아갔는데, 그 교수님이 소득이 얼마 안 되면 상관이 없는데 소득이 많은데 그것을 누락을 하고 신고를 안 하잖아요. 그러면 당장 문제가 오는 거예요. 네트워크를 다 이루어요. 전부다 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어떤 생활이냐 하면 자부심이 굉장해요. 우리 교회는 교회가 그런 것을 투명하게 하지 않으면 소득을 받고 십일조를 해야 하는데 본 교회 안 내고 어디서 선한 사업에 쓸 데 없나 찾아다닌다고요. 그것,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교회가. 그러면 왜 그것을 철저하게 하지 않느냐.
여기도 세례교인 의무금 있죠? 저희 교회는 세례교인 의무금이 있어요. 내려와요. 그런데 어느날 몇 년 전인데 행정실에 있는 직원이, 목사님. 왜. 세례교인 의무금이 내려왔는데 한 사람 앞에 만원 인가 7천 원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도 내야 할 돈이 천오백만 원쯤 된다고 그래요.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내는 교회가 없는데 우리도 절반으로 툭 잘라서 신고하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야, 내가 그렇게 하자 그래도 너는 목사님, 열린교회까지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를 해야지 너는 나한테서 정직에 관한 설교를 그렇게 설교를 듣고 지금 말고 그것을 반토막을 잘라서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 아이, 총회가 돈을 올바르 쓰는 것 같지도 않고. 그것을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 받아야 할 문제이고, 그렇게 하면 되냐. 얄잘 없이 정확하게 12월 말로 세례교인 숫자 헤아려가지고 탁 갔다 냈어요. 엄청난 돈이에요. 한번 내고 내면 허리가 휘청해요.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돈 이야기 하나만 더 할까요. 저희 교회가 9년 전에 땅을 사가지고 오는데, 땅을 36억을 달래요. 그런데 그러면 여러분 거래라는 게 36억 달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 그래야 되겠어요. 조금 깎아 주십시오. 얼마쯤 하면 괜찮겠어요? 한 33억 정도 사면 되잖아요. 집 주인은 36억만 달라고 하는데, 우리는 39억을 줬어요. 그것도 우리 교회 역사에 길이 남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36억을 해달라고 하는데, 6억을 비자금으로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가지고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세금이 얼마냐 그러니까 3억이래요. 그것 우리가 내 주마. 그래서 39억에 샀어요. 그러면 그 때 돈이 많았느냐 천오백만 원 가지고 39억 짜리를 계약 할 때니까 다 빚내서 준 거예요. 그리고 이야기했어요. 교인들에게 그렇게 해서 교회를 질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에다가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우리는 여기여기에다가 교회를 질려고 그러다가 이렇게 이렇게 법을 어겨야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를 못 졌다라고 마음속에 푯말을 세우는 것이 후손들에게 감동을 주는 길이다. 그리고 안 된다 그랬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하고 났을 때 교인들이 엄청 은혜를 받고 그 의사, 뭐 이런 사람들이 그냥 세무서 불러가지고 나는 정직하게 세금 낼 테니까 법대로 하라. 그러는 운동이 한참 일어났었어요. 그래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자.
뭐냐 하면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어차피 빛의 운명은 어둠과 다르고 소금의 운명은 부패할 음식과 달라요. 그러면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에는 빛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철저하게 그러한 말하자면 정도를 걸으면서 윤리의 힘을 우리들이 이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정직하게. 그렇게 하고 살자. 그거예요. 그것을 교회에서 그렇게 올바르게 할 때, 교인들에게 그 모든 것들이 스며드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삶에 있어서 구분점이 딱 되는 거예요. 어느날 내가 딱 그랬어요. 그런 설교를 했어요. 당신들은 24평에서 30평, 32평 가면, 조금 있다가 40평, 42평에서 45평 50평 그렇게 올라가는데, 십일조는 언제 할래. 언제 정산할거냐. 그리고 막 설교를 했어요.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맨 마지막에 정산을 하든지 중간에 집 팔아서 정산을 하든지 그러면 32평에서 45평 가려고 집 팔았으면 이익 남은 것 중에서 십일조를 내야지. 그리고 더 대출을 받아가지고 45평으로 가야지 그 위에 보태고 보태고 가서 그것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면 그것 되냐. 십일조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을 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옳다고 하면 해야지. 조그만 돈은 내고 큰 돈은 못 내고 그 무슨 개 배짱이냐. 그게 되냐. 막 설교를 했더니 그 다음 주에 한 사람이 8천만 원을 통장으로 쐈어요. 십일조 드립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그러한 것을 교인들에게 강력하게 외칠 수 있는 교회의 힘이 교회 자신이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렇잖아요. 그것 막 슬슬슬슬 해가지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슬슬슬슬 하면 안 되죠. 그래서 어디서 나와서 감사를 하든지 간에 정직하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죠.
7년 동안 감사를 받았어요. 내년서부터는 좀더 강력한 감사를 받을 수 있는 공인회계사를 또 찾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당부를 해요. 오면 항상 봐주지 말고 책임질 사람 책임지니까 내 얼굴 보지 말고 강력하게 감사를 해서 찾아내라. 당신들의 임무다. 끝나고 나면 목사님, 전 불신자이지만 정말 놀랬습니다. 코스닥에 상장한 회사 중 우량 기업 수준입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복식부기 하라고 해서 복식부기까지 다 했고요. 교회 재산에 대해서도 감정회사에 의뢰해가지고 교회 재산이 얼마인지 실사해가지고 거기에서부터 단가 생각하고 해 가지고 복식부기 다 하라고 해서 다 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신앙의 철저함과 사상, 또 하나는 윤리의 힘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해요. 그 때에 설교자는 그 교회의 모습 속에서 담대하게 설교할 수가 있는 거죠.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