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설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1:6)
녹취자 : 이경순
저는 21살에 회심을 해서 그때부터 성경을 읽기시작 하였습니다. 열심히 읽을 때도 있었고 게을리 할 때도 있었지만 왜 그런지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꼭 이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을 별로 못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에 우리 집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우리 집사람은 자기는 다윗이 제일 좋다고 그래서 같이 좋아하자고 그래서 그러고 보니까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그러다가 신약성경을 읽다가 사도바울이 훨씬 훌륭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니까 바나바가 더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다윗보다는 요나단이 더 훌륭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게 별로 지조가 없이 오락가락 하다가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 마음 전체를 사로잡았고 그 이후로도 세례요한에 대한 탐구를 한동안 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공간복음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공간복음은 시간의 순서대로 예수그리스도사건을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목적이 비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주제별로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시간적인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뭉쳐서 된 덩어리들이 모여서 요한복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기에 앞서서 요한복음일장에서 먼저 예수님의 선구자로 왔던 세례요한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몇 구절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목사가 누구인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이해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배의 위치가 불분명해졌다는 것을 지난시간에 말씀을 드렸는데 똑같은 일들이 목회자에 대해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누구냐 라고 할 때 이 그림이 아주 애매하다는 것 입니다. 목회라고 하는데 그 말이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건축을 하는 것부터 해서 목회자가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린 교회를 일곱 명의 성도와 함께 개척을 하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도 이일이 나한테 딱 맞는다. 그리고 나는 참 이일을 잘 하고 있고 아주 익숙해져있다 라고 하는 느낌이 한 번도 안 들고 항상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이 목회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진짜 다방면의 재능들이 필요하구나. 그리고 20년을 살아오다 보니까 이제는 남들하고 이야기하면 남들은 모르는 게 없는 사람처럼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씩은 다 해야 됩니다. 우선 건축법을 시작해서 은행에서 융자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에는 공장이었지만 제가 지금부터 10년 전에 제가 직접 구상을 해서 직접 디자인을 해서 구조 변경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일 년 동안 불에 복이듯이 하고나니까 건축에 대해서 알게 되고 건축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사실은 독일에 와서 늘 매력을 못 느끼는 게 건축물입니다. 너무 심심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화란에 가보면 화란은 별로 거기도별로 재미없고 현대의 건축술들을 많이 적용해서 포스트 모더니즘계열의 건물들을 많이 만드는데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물에 대한 그런 건축에 대한 것은 아니고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미술, 디자인, 출판, 조직, 인사관리, 급여, 심지어는 교회에 카페도 하나 있는데 일 년에 매출이 한4억 정도 나옵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경영마인드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돈을 계속 잠식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엄청난 많은 다양한 재능들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기본적인 것이고 목회자는 더 많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마음속에 눌림이 있습니다. 내가 내일을 잘 못하고 있다 그리고 손 이 안 닿는 부분들이 너무 많이 있다 이런 것 입니다. 목회자가 뭐하는 사람인가 물으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에 특히 미국이나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그만큼 다양한 능력과 관심들을 요구하고 그런 것들이 오늘날 목회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목회라고 할 때 회는 양 무리 입니다. 양 무리들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 무리를 치는 것이 뭐냐? 목회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지금은 아주 혼란스러워 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100년 전 정확하게 말하면 19세기 중반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쯤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막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19세기 중반쯤에서 미국을 기준으로 할 때 목회자가 누구냐고 말할 때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태버내클 교회에서 목회할 때 그 형체가 체육관도움처럼 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저것이 무슨 건물입니까 하고 물으면 불신자들이 저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답니다. 그처럼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목사가 누구냐 라고 할 때 오늘날 의사가 누구냐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정확한 목회자의 기능에 대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을 기준으로는 250년 정도 미국을 기준으로 150년 정도 그 사이 안에 뭔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그 변화가 바로 목회자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목회자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그분들을 절대로 무시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신학교를 나오고 목회에 종사하고 있는데 목회자인 자신이 아이덴티티가 무엇인지 에 대한 인식이 명료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쁘다 좋다는 문제를 떠나서 명료함입니다. 자 그러면 조금 더 나아가봅시다 군인이 있습니다. 군인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외적의 침입으로 국가의 영토와 국민의 생명을 유사시에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의 덕은 열심히 훈련을 해서 전쟁에 아주 능한 사람들이 되는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성도 좋아요 공부도 잘해요 체격도 좋아요 그리고 유머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 하고도 잘 지냅니다. 그런데 전쟁만 나면 도망갑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회자에게 있어서 군인에게 있어서 전쟁에 용감하게 임하여 승리하는 그 능력이 군인에게 있어서 떼놓을 수 없는 본질적인 정체성에 속한 것이라면 목회자에게 그런 것은 무엇이냐 이겁니다. 아까 이야기 했던 것들은 목회자가 꼭 해야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못하면 목사가 아니다 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라고 해서 다 건축법 을 다 알겠어요 아니면 목사라고 해서 디자인을 잘 알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국에 있는 청교도들이 목회 직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견해들을 참고해서 요약을 하면 이런 명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는 누구냐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땅 끝까지 전파하다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이게 목사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목사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기능이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자신이 그 진리대로 살아서 가르침대로 살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보여주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라는 명칭이 그렇게 썩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목회자라는 명칭에 의해서 사실은 많은 것들이 너무 모호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하는 일이 무어냐 이것은 목회인데 그냥 무조건 사람들을 돌보는 그런 의미에서의 목회가 아니라 모든 것들의 중심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목회자가 가장 목회자로서 하여야할 본질적인 사명이 설교입니다. 우리 지난시간에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목표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 예배의 본질적인 두 요소가 성령과 진리라면 이것이 충족되는 예배가 될 수 없도록 그래서 예배가 원래의 그 영광을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냐 이겁니다. 결국은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맞나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 야훼라는 이름하고 희랍어 하난 이라는 히브리어 하난 이라는 동사로서 은혜를 베풀다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 자 그런 뜻입니다. 아주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 이게 바로 세례요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그에게는 아주 분명한 미션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켜 예수그리스도가 뒤이어 오실 때에 그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하는 것이 세례요한이 하여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럼 세례요한은 누구였을까요?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거의 기적의 가까운 출생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장 80절에 보면 이 아이가 파이디언이라고 나오는데 빈들에서 자랐다고 나옵니다. 파이디언이란 말이 신약성경에서 원래는 어린이를 가리키는데 베이비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이 세례요한은 많으면 오륙 세 적으면 아주 갓난아이 적에 이미 광야로 보내졌고 누군가에 의해서 돌봄을 받으면서 삼십년 동안 세월동안 광야에서 양육을 받고 예수그리스도가 등장하시기 직전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광야에서 외친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그래서 예수 오실 길이 마음에 예비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짧습니다. 설교 몇 편 남기고 죽은 것밖에는 기록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훌륭하게 자기의 일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나은 자중에는 요한보다 큰 자가 없을 정도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목회가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목회,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 목회자체가 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렇게 해서 뭔가 또 다른 종류의 이 세상의 영광을 목회라는 사역을 통해서 성취해 가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19세기에 전설적인 설교자 스펄전 목사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는 태버내클 처치에서 목회를 했고요 전성기 때에 육천명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과 같이 대형교회가 많은 시대가 아니던 때에 교구에서 육천 명이나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이층에 예배당에 무너져서 사람이 죽는 사고가 날 정도로 그렇게 초만원을 이룬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얼마나 목회자의 설교와 교회의 성장 혹은 변화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냐면 1975년에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그때에 한국의 한 목사님이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40여명정도의 성도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모두 추리닝을 입고 참석을 했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없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랍니다. 그래서 왜 추리닝을 입고 왔냐고 했더니 예배 끝나고 테니스도 치고 이렇게 운동하러 나가려고 온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거기를 방문하고 나서 몇 년 있다가 피터 마스턴 목사님이 부임을 했습니다. 재작년에 제가 그 목사님하고 만났었는데 아주 영어가 깔끔하고 그리고 군더더기가 없는 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40년 동안을 40명의 교인을 데리고 목회를 하셨는데 현재는 영국에서 주일날 장년성도가 900명 정도 모이고 어린이 들이 600명 정도 모인답니다. 여러분 영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흥입니다. 한국에서는 별 이름도 내 놀 수 없지만 영국에서 어린아이들이 600명이 모인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내가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교회의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45년 전에 어느 목사님께 들었노라 그랬더니 그 때는 자기가 오기전이였기 때문에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자기가 부임 했을 때 그 정도 숫자 이었답니다. 뭐가 교회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요? 설교입니다. 그분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스펄전과 존 기어 목사님이었는데 롤 모델로 보고 보수주의에 입각해서 그분은 내가 보기에는 개혁주의보다는 근본주의에 가까우신 분이신데 설교가 아주 깔끔하고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 이성적인 영국 사람들이 합리주의 찌들고 찌들은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교회가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가 평소에 교회성장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3P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교회가 파산하고 크리스털 자체가 가톨릭으로 팔렸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그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파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 위대한 구원 역사에 대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게 있으셨는데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유보되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됨에 세례요한이 등장했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설교자는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위대한 구원의 경륜을 전개해 가는 위대한 인물들이 그러니까 바로 그런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서 사도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어느 날 반성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이렇게 과부를 돕는 일에 공괴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일을 할 수 있는 집사를 세우고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그때에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한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사도들이 새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선지자의 중요한 두 임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들이 사도로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 정체성을 구약의 선지자의 맥락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누가복음 3장에 보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그랬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고 하는 이 구절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사람의 어떤 사람을 선지자로 부르셨을 때에 그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소명기사라고 하는데 소명기사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구절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히브리어로 ‘와이 예히 데파르 엘로힘’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이름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전치사가 나옵니다. ‘알, 네, 엘’ 등등 여러 전치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누구누구위에 누구누구에게 누구누구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라고 나옵니다. 그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의 소명기사에 결정적인 보도가 이 하나님이 말씀이 임하니라입니다. 그리고 그 전통을 따라서 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성장하던 개인적인 생애를 끝내고 공적인 사역의 무대에 등장하는 그 기사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고 단순히 하나님이 커뮤니케이션의 방편으로서 당신의 말씀을 누구에게 주시는 그것이 아니라 이 소명의 체험을 통해서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 소명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의 위엄과 초월성을 체험하고 동시에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가지신 분인가 하는 것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그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 인간 교회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는 하나의 통일된 시야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전치사 하나를 가지고 무엇인가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것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호세아서 일장 사절을 보면 비로소 여호와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였더라. 이렇게 나옵니다. 히브리어 문장에는 ‘때일나트 디베르 아도나이 베 호세아’ 직역을 하면 맨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호세아 앞에 있는 전치사가 히브리어로 ‘베어’, 이것은 ‘into'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소명기사를 작성하실 때 이 전치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각각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어떤 방식으로 임하는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시절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아들은 그 시대의 정신을 가지고 삽니다. 일단 그 시대의 정신에 감염이 되면 자기가 숨 쉬고 있는 그 정신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뭔가 자기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니어 라르크가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지난 가을에 한국에서 노회에 있는 목사님이 모여서 수련회를 일박이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나보고 강의하나만 해달라고 해서 무슨 강의를 하냐고 하니까 그냥 아무거나 해달라고 해서 늘 보는 사람인데 무슨 강의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침시간 두 시간을 이용해서 한 20여명 둘러앉아서 중세 말부터 시작을 해서 현대철학까지 철학사를 개관하면서 오늘날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훼손된 상대주의가 교회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철학사를 쭉 짚으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강의가 모두 끝났을 때 어느 한 목회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정말 감명 받았습니다. 정말 저는 그런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제 전공이 철학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야기는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그분에게 철학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항상 그 철학이 유행하는 그 시대 속에서 그런 각도에서만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70년데 한국영화를 보면 웃음이 나와서 볼 수가 없습니다. 머리는 장발로 기르고 양복은 깃이 넓고 넥타이는 길이는 짧고 여기는 호빵처럼 커다랗게 주먹만 하게 매달고 다니는데 너무 촌스러운 것입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머리를 짧게 깎고 다녔으면 사람들은 뭐라고 놀리냐면 북에서 왔수 그랬었습니다. 그 당시의 유행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이 안하니까 그런데 이 소명이 임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 나냐면 단순히 하나님이 이 말을 전해라 하고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선지자들의 기능을 우리들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하거나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는 것이 선지자의 기능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기능은 선지자의 기능 중 아주 지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의 기능은 구약에서 모세가 가르쳐준 율법을 그 시대에 어떻게 적용하여 이 사람들을 삶과 신앙을 판단하고 그 율법에 부합하도록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설교하는 것이 예언자의 중요한 직무였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 예수님이 오시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예수님이 과연 오시면 불법복제 해적판 쓰실까? 아니면 불법다운로드 받는 거 하실까? 등등 생각하듯이 그 당시의 사람은 모세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것이 그 사람들의 화두였단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서 그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주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이사야서 6장에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기사가 정확히 나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스랍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니까 뭘 해야겠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제일먼저 내가 입술이 부정한자 가운데서 여호와를 뵈었도다. 하면서 그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한 두려움에 떠는 것 그리고 자기가 아주 불결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소명의 사건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 담에 숯불로 그 입술을 지지시고 왜 그리고 온갖 객체가운데 입술입니까 눈도 되고 아니면 손을 펴서 기적을 행하는 손바닥일수도 있는데 왜 입술입니까? 결국 말로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이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나를 위해서 갈까 나를 보내소서. 그리고 소명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들이 중대한 변화들입니다.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잘 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설교자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나의 말씀의 능력이 특히 설교의 능력이 예배와 어떤 연관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스펄전과 같은 설교자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조지 위필드 같은 부흥 설교가 입니까? 그렇지 못할 겁니다. 모든 사람이 헬무드 틸리케처럼 그렇게 설교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것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연관관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하나가 없다는 것이 나머지를 정당화 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나는 설교에 은사가 없기 때문에 예배는 포기하는 목회를 해야 되겠다 라든지 아니면 나는 설교에 은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찬양이나 열심히 불러서 예배를 드려야겠다. 그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은사가 있는지 없는지는 피 흘리듯이 분투해 봐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살아가는데 저 고등학교 때까지 세 사람만 모이면 입을 떼지를 못했습니다. 그중에 여학생이 하나 섞여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주어와 동사가 바뀌었습니다. 지금 10만 명씩 모인데서 설교해본적은 없지만 10만 명이 모여도 별로 크게 감격하지도 않겠지만 떨지도 않을 거 같습니다. 고구가 같은 사람들이 10만 명이 모였다고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은사가 없다 그리고 그 담에 헌신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는 잘 자란 설교자는 설교를 가지고 설교자가 됩니다. 그런데 정말 큰 나무와 같은 설교자들은 설교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설교자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설교자가 됩니다. 세례요한 보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맞나니 이름이 요한이다. 이것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샬라흐’라는 히브리 동사를 씁니다. 그것은 보내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심지어 화살을 쏘는 것도 ‘샬라흐’라고 하지만 자기 명령을 받아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보내는 것 특히 종을 지시해서 갔다 와라 그럴 때 가는 동작을 ‘샬라흐’라고 씁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은 선지자로 사역을 하기위해서 등장할 때 모든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그가 하나님 곁에 있다가 온 사람이라는 것을 인격과 말과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선포 속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과연 나에게는 나의목회 나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행위 그 속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 곁에 있다가 온 사람이라는 흔적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두 가지로 사용이 되는데 sermon preaching 입니다. sermon은 설교내용입니다. 이 설교내용은 그냥 내용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경험하였을 겁니다. 죽어라고 설교준비를 하고 가슴이 뿌듯했는데 이제 이걸로 설교를 하면 감동의 쓰나미 가 밀려올 거다 그리고 설교를 했는데 쓰나미는 커녕 발목을 찰랑찰랑 하다가 물이 빠져버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머는 훌륭했는데 preaching이 후졌던 것입니다. 어쩔 때는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설교할 때가 되니까 양심에 가책이 되면서 용서해달라고 빌면서 한번만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설교를 했는데 망신이나 안당하고 내려오면 좋겠다. 했는데 진짜 쓰나미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설교가 끝난 지 한 시간이 넘도록 집에 갈 생각을 안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sermon는 후졌는데 preaching이 탁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고해서 그것을 용기를 얻고 아 설교는 준비가 필요 없구나. 이렇게 시작을 하면 잘못된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끔 묻습니다. 설교준비 얼마나 걸리냐고 묻습니다.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걸립니까? 지난 12월에 우리교회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열린 교회에서 설교한 모든 설교를 다 녹취를 끝냈습니다. 약 오천 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교역자들은 제가 아프거나 교회에 없거나 이외에는 설교할 기회를 거의 안주었습니다. 새벽기도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제가 다했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수요예배도 가끔 하라고 하고 금요예배는 아예 맡기고 주일오후예배도 제가 다섯 번 설교를 하니까 체력이 도저히 안돼서 마지막 오후 예배는 하라고 맡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준비를 해야 될까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여러분들은 얼마나 걸립니까? 어느 목사님이 한 달에 두 번 설교하라고 하면 잘할 수 있겠답니다. 설교학에서 나오는 대로 준비를 해서 할 수 있겠답니다. 두 번이 뭡니까 일주일에도 수없이 설교를 해야 하는데 비행기 타고 오다가 두주동안 설교할 것을 제보니까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일곱 편을 준비해서 한국에 돌아가야 일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음에 제가 전도사 시절에 34살에 교수가 됐고 35섯 되는 해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구약학 한다고 겁죽대고 하다가 우기리더도 하고 바벨론토판 공부한다고 껍죽대다가 주님 깊이 만나고 다 접고 청교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제가 설교 한편을 준비하는데 초안이 된 상태에서 원고를 작성하는데 20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5년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 원고를 작성하는데 관록이 붙기 시작했고 그 후에 개척교회를 하고 1년 후부터 제가 무 원고 설교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무슨 설교를 하든지 간에 설교의 수준은 지식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가지고 있는 미문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이 누구인가 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은 라틴어로 ‘꾸비드 에스트 데우스’, ‘신은 무엇인가?’ 영어로 말하면 와트 넷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훌륭한 답 중의 하나가 오전에 하나님은 영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왓 데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담에 중요한 질문은 ‘꾸부드 에스드 데오스’, ‘신은 누구인가?’ 이것은 속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분의 속성이 무엇인가 이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이 본질로서는 규명할 수 없는 교회학에서 단순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님이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는 눈부신 태양과 같이 무엇이라고 규명할 수 없는 그것이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는 성품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소위이야기 하는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두 개에 대한 앎인데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이 세상에서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이게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기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냐면 설교자를 참으로 설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크기입니다. 그 때 이 지식은 오늘날 우리들이 그리스적인 사유의 방식에서 이야기 하는 그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의 지식인이냐 지식이라는 히브리어가 ‘다아트’ 이것은 ‘야다’는 동사에서 옵니다. 이 ‘야다’가 구약성경에서 처음 쓰인 것이 창세기인데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아와 동침하였다고 할 때 그것이 야다 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영어의 노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의 노우라는 단어에 성교하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있으리오. 라고 할 때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 노우 힘 이렇게 얘기하면 큰일 납니다. 혼삿길이 막힙니다. 자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전인적인 경험을 통한 앎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안다, 인식하다 추리하다, 판단하다는 이런 동사가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다양한 단어로 나뉘어서 사용이 안 됩니다. 하나의 단어로 통합해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동사에서 빈 같은 것 오성으로서 직관하여 아는 것 이성으로서 추론하여 아는 것 이런 많은 것들이 동일한 동사들 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영혼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능들 의지의 기능 지성의 기능 직관의 기능 추론의 기능 이런 것들이 하나의 명사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왜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분석하는 것 자체에 그렇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통합적인 성격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소명사건을 통해서 폭발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탁월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핵심은 ‘카도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무엇이냐면 신학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온 땅과 만물위에 초월하시는 타자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타자,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엄위와 그 크심 앞에서 인간은 티끌이다 두 번째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가운데 가장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예를 들자면 우리도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도 사랑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감히 나 같은 것은 누구를 사랑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랑이 결함투성이의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카도시’입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구나. 라고하고 끝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 사람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신의 삶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실현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면 하나님의 그레이트 네스 그 초월적인 위대하심 앞에서는 인간이 자기가 티끌만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겸비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 앞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모든 최고의 가치의 기준은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었던 사람의 생각이 바뀌어서 그래서 자신은 그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야할 티끌 같은 존재요 무한히 죄를 지은 더러운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할 처지에 있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온 우주의 중심이시고 절대자이시고 그분의 영광이 이 모든 세계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하는 위계질서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할 자리에 자기를 갖다 놓은 것이 세속주의입니다. 술 먹고 춤추고 노래하고 죄짓는 이것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인간을 놓은 것이 세속주의입니다. 그렇게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이 모든 인식의 새로운 세계를 그러면서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눈을 뜨면서 모든 하나님과 세계와 교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지식들이 거대한 하나의 사상의 체계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하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약의 성도들이 박해를 받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시대에는 종교관용주의였습니다. 로마제국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워낙 다양하고 땅덩어리가 넓고 아주 독특한 종교들을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바보 같은 시도는 안했습니다. 두 개만 지키면 자유를 누렸습니다. 세금을 제대로 내는 것 황제숭배주의에 반기를 들지 않는 것 황제만 섬겨라가 아니라 황제도 섬겨라 그러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와 모든 국가가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추호에 혜택을 못 누린 종파가 있었는데 그게 기독교였습니다. 유대주의도 누렸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못 누렸습니다. 그러면 그 똑똑한 로마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씨를 말려야겠다고 했던 것은 단순한 폭력적 잔인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큰일 날 종교다 그 위험성을 정확하게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세례를 받기 전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은혜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꺼이 세례를 받을 때 이 사람은 단순히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죄를 회개한사람이 아니라 교부들이 사도들이 전해주었던 이 기독교의 사유의 체계를 사상적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유체계의 핵심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유체계를 받아들이면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럼 거기에는 황제숭배 같은 황당무계한 유사종교가 양립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서 폭력적인 로마의 정치에 대해서 사회의 제도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판단의 틀을 갖게 되는 사상 전체를 수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부활의 소망과 함께 전파될 때 이것은 제국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위험한 요소라고 하는 것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에 모두 죽인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어떤 종교도 그런 식으로 로마정부에 의해서 대적을 받은 종교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만 그렇습니다. 지금 중국 같은데서 기독교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시간문제입니다. 기독교 사상이 들어가면 중국의 부의 41퍼센트를 1퍼센트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면 일당독재 성차별 이런 것 가만히 안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 그런 많은 사회적인 악들이 있는데 가만히 있는 한국사회나 이런 것들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교회가 썩은 겁니다. 복음의 정신이 제대로 역사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정신이 역사하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 십자가를 전하여 예수 믿게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이 사상의 체계를 물려주는 사람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잘 돌보고 격려하고 때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겁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므로 서 그 진리의 사상의 체계를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아까 이야기하다 잠깐 끝났는데 신약과 구약사이에는 중요한 디스롭션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놀랍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렇게 강조가 되는데 신약에 와보면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용어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토로지칼 컬불전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론적인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대대적인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무슨 전환이냐면 핵심적인 것은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품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 이장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들께 나아갈 때에 심히 두렵고 떨렸다 그러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및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로 들어가기 직전에 전도여행을 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아테네입니다.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학자들과 스토아 학자들을 만나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했을 뿐입니다. 이게 고린도로 갔을 때 두렵고 떨렸던 이유였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한 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피아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소피아가 그 당시 사람들은 고린도전서를 들을 때 고린도는 당시에 굉장히 잘나갔던 도시였고 철학적인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서 내공을 길러서 세계문명에 등장하는 것이 아테네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같은데서 내공을 길러서 아테네에 가서 한판 뜨는 겁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정말 대단한 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소피아라는 단어를 딱 봤을 때 아 이거구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찾으려고 했던 소피아 구약의 호크마 이게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였구나. 왜 예수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세계가 왜 이 모양인지 인간은 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모두 드러나는 것입니다. 핵심 인 것입니다. 그 하나에 열쇠를 꽂고 이해를 하게 되는데 확 하고 하나님의 경륜의 세계가 열리면서 아까 말씀한 사상의 체계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전서 이장에서 어떻게 이 세상의 철학이 실패했고 결국은 철학의 최종적인 완성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철학자들이 가장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그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장에서 아주 아름답게 개진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이장은 무지무지 중요한 장입니다. 복음지혜와 성령의 관계가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알지 않고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은 영적인 수준의 변화 이것이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7년 전에 제가 책을 한권 썼습니다. 그 책을 쓴 것이 저에게는 데뷔하는 사건이었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책을 쓸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한다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 서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는 학생이 제 강의를 듣고 나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교수님 강의를 듣고 설교자가 누구인가 설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미당 서정수 씨의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보다 소쩍새가 야리야리하고 예쁜 새가 아니라 되게 못생겼습니다. 올빼미하고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야행성 동물 조류입니다. 낮에는 숲에서 자고 밤에만 나타나서 들쥐, 박쥐 이런 것 잡아먹고 사는 새입니다. 어느 날 가을에 국화꽃이 활짝 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국화가 다 국화가 아니라 국화꽃 비싼 것은 화분하나에 삼백만원짜리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봐도 탐이 날 정도로 예쁩니다. 어떻게 길렀는지 수십 송의 국화가 키가 똑같습니다. 다 뽑은 게 아니라 기를때부터 똑같이 자라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서 이 국화는 다른 국화와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국화꽃 기른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종자가 뭐냐 무슨 비료를 주었냐. 무슨 영양제를 주었느냐 라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 사연이 있었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국화가 2월쯤 되어서 가지가 나올 때 소쩍새가 밤마다 와서 우는 겁니다. 봄이 되니까 이게 좀 더 많이 이파리가 나와서 매일 밤 와서 우는 겁니다. 그러다가 뜨거운 여름이 되었습니다. 이 국화는 치열한 고통 속에서 이 수액을 끌어올리면서 꽃을 피우고자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됩니다. 어느 날 서리가 내리는 가을의 계절이 다가 오고 있을 때 소쩍새는 그날도 와서 피나게 울었습니다. 울다 울다가 피 흘리고 죽은 그 다음날 아침에 국화꽂이 활짝 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국화꽃을 보면서 “야 멋있다 누가 길렀어. 종자가 어디서 왔데 나 좀 받아가자” 그렇지만 죽어간 소쩍새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헬무트 틸리케가 이차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틸리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연약한 인간의 설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비록 연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한 주간동안 자기가 설교하고자하는 말씀을 붙들고 피 흘리는 삶을 삶으로서 연약한 한 인간의 증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
수필을 쓴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초등학교 이학년 학생이 수필을 쓰고 대학교 이학년 학생이 대학교 이학년 학생은 그냥 늘 쓰는 거니까 쓰고 초등학교 이학년 학생은 나는 정말 뛰어난 수필을 쓰고 싶어 나 이 한편만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이 수필을 쓰고 죽어도 좋아 그리고 실재로 혈서까지 쓰고 수필을 썼습니다. 대학생이 쓴 수필과 목숨 걸고 쓴 초등학교 이학년이 쓴 수필 중 어느 수필이 더 수준 높은 수필이 될 수 있을까요? 대학생입니까? 초등학생입니까? 초등학교 이학년 학생이 목숨을 걸어도 걔는 이학년일 뿐입니다. 걔가 목숨을 건다고 초등하교 이학년 이상 뭐가 나오겠습니까? 요즘 종종 탁월한 천재들이 있답니다. 미국의 어느 교수가 머리가 하얘서 쭈굴쭈굴 해졌는데 키이츠 전공자입니다. 어느 날 난 정말 모르겠어. 키이츠의 세계는 한이 없어 깊어 평생을 연구했는데도 모르겠어. 그러더랍니다. 키이츠는 26살에 죽었습니다. 종종 그런 탁월한 천재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이학년은 목숨을 걸어도 모든 초등학생 이학년 보다는 나은 수준의 수필을 쓸수있을 수 있지만 자기보다 10년을 많이 산 그 삼촌 같은 사람을 능가하는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겁니다.
여자가 화장품을 바릅니다. 영어로 코스메틱, 질서, 화장품은 질서 없는 얼굴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 화장품입니다. 화장품을 좋은 것을 써서 화장을 하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세수하고 오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공부많이하고 이것저것 설교 집을 보고 뭔가 좀 잘해보겠다고 하면 화장품을 바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판불변입니다. 수준을 높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목회자가 일평생 추구해야 될 것은 영적 성장입니다. 교회를 5년 전보다 더 요령 있게 목회를 해서 말 안 듣는 장로들을 잘 다루고 비위도 잘 맞추고 집사들하고 싸우지 않는 비결을 터득하는 이런 것은 그것은 영적성장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성장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어서 5년 전 6년 전의 설교를 보면서 정말 순수하긴 했지만 어렸었구나. 참 어렸었구나. 그렇게 자기의 설교가 부끄럽게 느껴져야지 어 옛날엔 잘했어 그럼 요즘 뭡니까 왕년에 타령하는 사람 있습니다. 금년에 신통한 사람은 왕년타령안합니다. 영적 성장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진리에 묶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목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어떻게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거대한 평원과 같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두 권의 책을 선물로 드리고 갑니다. 이번에 강의한 내용은 직접적인 원고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일부러 그렇게 보내드렸습니다. 두 권의 책이 있는데 두꺼운 책은 36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데 이 책 전체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하는 내용을 해설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어렵다고 느끼실 수 있어요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지는 진리로 들어가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관문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찬란한 빛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경험이 목회자를 만듭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소극적 인 것이고 적극적인 것은 성경을 통해서 사도들과 교부들이 물려주신 기독교사상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서 영적인 수준이 결정되지만 결정된 수준으로 진리를 증언할 때 이것이 디테일하고 정확하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의 가장 커다란 실수가 신대원을 졸업하면 자기가 학문을 띠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운전면허증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운전면허증을 주는 것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내도 정상을 참작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주에 가면 그날 반드시 합격시켜주는 자동차 면허시험장이 있습니다. 떨어지면 계속 뒤에 가서 줄서면 됩니다. 붙을 때까지 시험을 봅니다. 결국은 그날 붙게 해줘서 보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차를 몰고 도로에 나갈 수 있습니까? 나갈 수는 있지만 일 키로도 못가서 어딘가 들이받든지 받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 사실상 운전면허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 공부는 다음에 오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성경을 가장 열심히 친밀하게 읽었을 때는 대부분 신학교오기 직전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항상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어디를 설교할까 남을 위한 성경읽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담에는 신학공부입니다. 가끔 저보고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몇 시간 걸 리냐고 묻습니다. 그럼 나는 대답합니다. 스펄전에게 배운 것인데 스펄전이 설교하는데 워낙 잘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설교 얼마나 준비하였습니까? 하고 물으면 스펄전이 항상 하는 말이 일평생입니다. 설교를 위해서 얼마를 준비하느냐 이것은 수준이 낮은 사람은 많이 준비해도 디테일한부분에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초등학교 이학년짜리 수필이 오래 준비한다고 해서 대학교이학년짜리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영광의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설교는 하나의 결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스님들이 죽고 나면 다비를 합니다. 불에 태우면 사리가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이분이 얼마나 신령한 스님이었는지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그게 호르몬 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한 목사님도 태우면 그게 나온답니다. 그런데 고승들이 사리가 나오는 것은 참선을 열심히 하고 장좌불하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 사리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나 죽어서 한 30개쯤 나와라 어디서 무릎 꿇고 앉아야 많이 나오나 하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 동시에 목사인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며 살았더니 결과로서 그의 인격과 지성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어떤 사람이 막 설교하면 들으면서 아멘 오 주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가 저렇게 못살았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하는 설교가 있는가 하면 누가 설교를 하면, 자기는 , 지는 그렇게 하나? 너나 잘하세요. 이런 마음이 들면 설교자와 설교자의 언어가 일치를 이룰 때는 후자 같은 생각이 잘 안 듭니다. 물론 사람이 완악하면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칼빈은 ‘훼밀리 에로티’라고 불렀습니다. 특별히 ‘스피리쳐 훼밀리 에로티’ 영적인 친밀성 안셀무스는 그러니까 어떤 진리의 내용이 자신 속에 육화되어서 지성과 자신의 영혼 안에서 친숙해진 상태에서 성경을 설교하지만 마치 억지로 성경을 설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고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로 자기를 자기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사람의 설교자가 짧은 한마디의 말로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와야지만 그런 촌철살인의 설교가 나옵니다. 설교자의 언어화된 설교는 빙산의 일각이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본 것이 아홉이 묻혀있고 설교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나여아 하는 것입니다. 그게 깊이 있는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교가 다루어져야하는데 하나는 원천적인 학문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오늘 어디를 설교 할 것인 가와는 상관없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저수지에 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성경을 읽으면 받은 은혜가 쌓여가야 되고 두 번째는 통전적으로 학문을 공부해서 신학이 중심이 되고 그담에 신학 안에서도 교회학 성경신학 어느 한쪽만 가면 안 됩니다. 성경 신학 교회학 역사신학 그리고 실천신학 이렇게 공부를 해가고 그담에 신학하고 가까이 넘어와서 철학, 역사, 문화, 예술, 자연과학 이런 것들을 공부하면서 독존적인 지식을 강화하면서 원천을 계속 저장하는 것입니다. 산위에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 물을 가득 채우면 비가 별로오지 않아도 틀면 쭉 내려오면서 땅들을 두루 적시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있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담에 이번 주의 설교 한편의 설교에 마음을 쏟으면서 정확하게 잘 준비하는 것 이 두 개가 겸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담에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어느 청교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깨어짐의 가루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가 깨어짐으로 가루처럼 만들어 거기에 눈물을 쏟아 반죽을 하고 성령의 화덕 속에서 구워서 그것을 꺼내어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떼어서 입에 넣어주는 것 이것을 설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치열하도록 영적인 성장을 위해 분투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라는 명료한 인식을 가지고
성경과 친하게 충실하고 치열하게 기도해서 이 모든 일들이 성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말씀을 먹어 성도들이 주일날 자신의 영혼의 축제일이 되어야 합니다.
재를 무릅쓰고 왔던 사람들이 베옷을 벗고 기쁨의 화관을 쓰고 교만하게 살던 사람이 거기 와서 회개하여 그날 새로운 주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주일날 경험하게 될 때 아 이날은 정말 주님의 날이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이 예배는 장엄한 것이구나. 그런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교회가 교인이 많이 안모였을 때 괴롭지 않았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지만 저는 교회에서의 영광을 크기로 재는 것은 예루살렘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바벨론의 가치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많이 그리고 높이 사람들의 영광을 한 몸에 이 바벨론의 가치 그런데 예루살렘의 가치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소수가 곧 다수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몸부림 치고 나머지 결과는 하나님 맡기는 겁니다. 20년 목회했는데 한 번도 교인을 많이 못 모았다는 이유 때문에 부교역자들을 내보내거나 야단치거나 한적 없구요. 올해 교인들 모이는 목표를 정해본적이 없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진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든지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교회에서도 정말 이제도 잘했지만 더 탁월한 열심히 진리를 캐며 그 진리를 진실하게 뜨겁게 전파하면 그 진리를 붙들며 살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 큰 교회가 된다고 내가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예배를 향하여 갈 수 있습니다.
이 큰 책이 꼼꼼히 읽어보시고 좀 어려우시면 아 내가 평소에 공부를 잘 안했구나. 그리고 인터넷 찾아가면서 공부를 하시면서 하시고 이것은 사실은 맨 처음 영어로 쓴 것이었는데 번역을 해서 정리한 것이고 작년에 웨스트민스터 동부에 있는 신학교에서 개강집회에서 그 때에 강연한 내용입니다. 오늘 설교한 내용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니 두 책을 잘 읽으시고 그리고 깊이 도전을 받으시고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목회하든지 간에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목회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많은 주린 영혼을 가진 교인들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