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수고한 사람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16:12)
녹취자:이경순
오늘 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기독교의 대의와 그 대의를 따라서 살아가야할 신자의 삶의 도리에 대해서 긴 편지를 쓴 후에 마지막에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이 16장에서 부록처럼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십 여명 가까운 사람들의 실명이 거론되면서 그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또 그들의 이름으로 문안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그리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인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상은 너무나 뚜렷하고 다른 인상들에 비해서 아주 뛰어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그 인상을 갖게 되고 또 그 인상을 생각할 때마다 그 사람이 떠오르는 그런 인상을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살아오면서 가까이 살아가는 사랑하는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웃들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참 인자하고 사랑이 많았던 사람, 어떤 사람은 친절했던 사람 ,어떤 사람은 인색했던 사람, 어떤 사람은 말에 절제가 없어서 늘 상처를 주었던 사람, 등등등 여러 가지 많은 인상들이 떠오르고 어떤 인상은 여러분의 이익과 관련이 있고 어떤 인상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뚱뚱한 사람, 마른사람, 밥을 잘 먹는 사람, 입이 짧은 사람, 등등의 그런 인상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동역 자들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제자와 같은 교인들 그리고 아들딸과 같은 믿음 안에서의 자녀들이 많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한결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바울의 복음사역에 이모저모로 동참하고 함께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거론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도바울과 특별히 함께하고 그리고 복음에 있어 동지가 되어 수고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도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와 같은 거명된 두 사람의 이름도 역시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바울과 함께 수고한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세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단 한번밖에 안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떠한 이력을 가지고 사도바울을 섬겼는지에 대한 흔적들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도바울은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는 수고한 사람들이라고 묘사를 하고 특별히 버시 에게는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고 그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버시’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었는데, 특별히 하나님 앞에 수고한 성도,
특별히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짧은 성경구절 속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한 그 말만을 가지고 버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주님을 어떻게 섬긴 사람이었는지 에 대한 중요한 인상을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제일먼저 이 버시는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수고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코피어사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지치다, 힘이 빠지다, 피곤하다, 기력이 쇠하다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서 이 버시라고 하는 사람은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와 함께 주님을 위해서 사도바울을 도와 많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입으로 헌신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과 뜻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기위해서 손발로 수고하고 애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교회에서 주인 노릇하는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 잘하고 논리가 정연한 사람들이 언제나 교회에서 주인노릇을 하는 것 같습니다.사람이 보는 앞에서 주인 노릇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실 때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서 주인 노릇하는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의 사람, 논리의 사람, 논쟁의 사람,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들을 이루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 ,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주님이 이유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지치도록 힘에 지나도록 그리고 피곤하여 주저앉을 때까지 애쓰고 수고하는 희생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논리가 없고 그리고 사람보기에는 말로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하기 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사람 같지만 설명할 수 없어도 우리 그리스도가 이유가 되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원인이 되고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오늘도 허리를 굽혀 수고하고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을 위해 애쓰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위대한 뜻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버시는 이 사람들과 드루베나 드루보사와 함께 하나님 앞에 깊이 수고한 사람으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 때문에 만났고 하나님의 교회를 함께 섬기고 이런저런 이유로 주님께 부름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봉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오랜 동안 이 교회를 섬기고 죽은 다음에 과연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아!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힘을 다하여 수고하신 목사님, 이렇게 여러분들의 마음에 제가 남을 수 있을까요? 세월이 모두 지나고 이런 저런 일로 우리가 헤어지고 심지어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노아 여러분들은 땅에 남고 나는 하늘나라에 갔을 때 비록
이 땅에서 여러분들을 보는 것처럼 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천국에서라도 제가 열린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빌 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 땅에 남아있는 사랑하는 그 성도 비록 남보다 뛰어난 지식은 없고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과 권세를 가진 부자는 아니지만 주님의 교회를 위해 나와 함께 수고했던 성도,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불속에라도, 물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무에게도 기억되길 원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기억되기를 원했던 수고한 사람이라고 우리 모두 각자의 마음속에 인상에 아로새겨 질수 있을까요?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사람의 판단과 기억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수고했는데도 사람들이 기억을 못해줄수도 있고 충성스럽게 살았는데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았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희생을 알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일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주님의 판단에는 착오나 오류가 없으시겠죠.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사람의 마음에 기억 되는 것보다는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억되는 사람 ‘잘하였구나. 내가 네게 맡겨준 그 자리에서 정말 많이 수고했구나! 이제 너의 그 무거운 짐을 벗고 이제는 내 곁에서 쉬거라 ’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지나가는 말이겠지만 가끔 저보고 쉬시라고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남보다 더 충성스럽거나 헌신되서가 아니라 살아온 날들 중에서 정말 과연 쉴 만큼 그렇게 수고한 적이 있는가? 몸으로 애쓸 때에는 마음이 흡족하게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았고 마음이 그래도 주님께 헌신될 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앞에 실제로 몸이 부서지도록 하나님 앞에 수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주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스스로 말하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고 고백하신 수고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새벽마다, 깊은 밤마다 기도하신 것은 낮에 기도하면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정자에 앉아서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한가로이 예수를 명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주님처럼 수고하며 사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신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버시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분명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남아있었으니 여러분도 우리 주님 앞에 그렇게 수고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주안에서 섬긴 사람으로 사도바울이 마음속에 기억이 남았습니다.
수고하되 이 사람은 주안에서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다가 시험에 들거나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미끄러진 구실을 사람 때문에 미끄러졌다, 목회자 때문에 미끄러졌다, 성도들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교회에 실망했다, 등등 자신이 미끄러져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을 사람과 엮어내서 찾습니다.
햇빛 나고 따뜻한 여름에는 천하의 모든 산들이 푸르러 어느 나무가 사철 푸른나무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을이 와서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에 삭풍이 몰아칠 때야 비로소 사철 푸른나무는 변함없이 푸른 빛을 발하여도 그렇지 않은 나무들은 나뭇잎을 모두 떨궈내고 앙상한 가지로 산을 지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지만 이세상사람 누구도 그가 섬기는 것이 얼마만큼 주안에서 주님이 동기가 되어 섬기는 것인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양심도 속임이 심해서 때로는 우리자신도 우리가 주님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주님 때문에 섬긴다고 생각하고 사람으로 인해 넘어졌을 때 그 섬김이 사람 때문에 이루어진 섬김이란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주님을 위해 수고한 이 버시는 주님이 이유가 되어서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매한 인격이나 그에게로부터 받은 물질적인 도움 때문에 바울에게 헌신해서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유가 되어서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주님의 교회와 성도와 이웃들을 변함없이 섬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안에서’ 라고 할 때 ‘앤큐리우’라고 하는 이 단어는 아주 많은 신비성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단어들은 매우 신비한 단어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 안에서 섬겼다라고 하는 것은 제일먼저 이 버시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특별히 수고할 수 있었던 근거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 속에서 주님을 섬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안에 삽시다, 그리스도안에서 사랑합시다, 주님 안에서 간구합시다. 이 모든 말들은 다름이 아닌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인 연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래서 이 버시는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 속에서 주님을 섬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많이 주의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과의 영적인 연합 없이 많이 수고하는 노동자와 같은 사람들도 교회 안에는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섬기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의 영에 붙들린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의 힘을 느끼기 보다는 일에 매여서 다만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일하면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일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섬김으로 승화되는 것이죠,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다니엘이 여러 왕들이 바뀌면서도 변함없이 국사를 돌보았지만 사실은 ‘다리오왕’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고 사도바울이 복음에 매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노예가 되었으나 사실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주님 안에서 섬기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더욱 강하게 결합시키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일이 단지 일이나 혹은 우리의 의무가 되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한 사랑의 고백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주님의 교회를 위해 많이 애쓰다가 실망하고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만 힘들게 헌신한다고 미끄러지고, 자기가 열심히 봉사하고 애를 썼는데 목회자가 한결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실망했다고 하나님을 섬기다가 미끄러지는 것이니 이런 것들은 주님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과 연합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사람을 보고 사람 때문에 섬긴 것이죠.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안에서의 섬김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버시의 섬김을 생각하면서 주안에서 수고한 사람이라고 부른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은 버시의 섬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들의 삶속에는 언제나 예수의 심장의 정신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섬기는 일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종 느껴지는 영적인 측면인 것입니다. 이 사람 버시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본받아 애쓰고 지치고 기력이 지나기까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주안에서의 섬김이었습니다. 혈기와 그리고 육정으로 인한 섬김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주님과의 연합 안에서 주님의 고난을 본받은 섬김이었던 것입니다. 고난 받을 때마다 이렇게 우리의 섬김이 주안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티끌같이 주님을 섬기면서 그 작은 섬김이 커다란 의가 되어서 자기처럼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자기처럼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편을 가르고, 마음을 찢고, 하는 그 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사람의 섬기는 모습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티끌만큼 교회를 섬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교회를 많이 아프게 하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들은 주안에서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섬기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안에서 섬기는 사람은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안에서 섬기는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수고하고 섬기는 자기를 보면서 존경하고 존중하고 자기를 칭송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던 예수님을 그들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섬기려고 할 때 나처럼 섬기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이 시험에 들고 그를 원망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주님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우쭐해져서 그렇게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마음으로 멸시하고 우리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밀쳐놨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버시는 수고한 사람이었지만 주님 안에서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주님의 고난을 본받으며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이 버시가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도 주님 안에서 수고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버시는 그들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고 고난을 받으며 주님을 섬긴 사람으로 그 이름이 기억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23절에서 스스로 고백하기를 수고를 넘치도록 하면서 사역의 길을 걸어 왔다고 눈물로 고백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주신 우리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싶어서 이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 3절에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사랑하는 마케도니아 교회의 가난하고 환란과 시련을 많이 당했던 그 마케도니아 교회를 기억하면서 저 사람들이 예수살렘의 굶주리는 형제를 위하여 힘에 지나도록 고생한 교회였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마게도니아의 헌신에 대해 감격했던 것은 마케도니아가 너무 많은 가난 속에서 찌든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자교회였고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마케도니아 교회는 자기가 입은 겉옷이라도 벗어주고 싶고, 자기식탁앞에 나온 이 밥그릇이라도 마케도니아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을 정도로 가난에, 가난에 그런 가난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환란과 많은 시련을 많이 당한 핍박과 고난의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의 사랑하는 형제들이 굶주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가난한 교회로서는 감당할 수 없이 힘에 지나도록 헌신한 교회였다고 부자교회 고린도교회를 부끄럽게 하면서 이 마케도니아 교회를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부자인 고린도교회야 이 일에 헌신하든 말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 자기들을 위하여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아버지의 그 사랑을 헤아리며 ,힘에 지나도록 그들은 자신들도 굶주리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을 것입니다. 계시록 12장 11절에는 천국에 간 사랑하는 성도들의 특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도 아까와 하지 아니하며 주님을 섬긴 사람들이었다고 계시록은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바람같이 있다가 사라지는 우리의 일 생중 무지해서 하나님 모르고 내 맘대로 살았던 인생의 날들을 제하고, 주님은 만났지만 진리의 빛이 너무 희미하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주님을 섬겨야 할지 몰랐던 날들도 빼버리고 그리고 진리도 알고 주님 섬기는 자리에도 있었지만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섬긴 것도 빼버리고, 또 주님을 알고 진리를 알아 섬기는 자리에 두셨지만 부패한 정욕에 물들어서 하나님을 섬김 의지가 별로 없던 날도 빼버리고 하느라고 열심히 했지만 사실은 잘못했던 것까지 제하고 나면 우리의 일 생중 정말 부끄럼 없이 주님을 섬겼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의 날들이 몇 달이나 될까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많이 수고하신 우리주님을 소개하기를 죽기까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고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가르쳐주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우러나왔으니 너희도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라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가 주님을 위해 많이 수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섬겼던 많은 날들은 너무나 많은 순간이 옳지 않은 동기에 물들어 있었고 또 동기가 바른 동안에도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에는 우리의 육체가 게을렀고 우리가 육체가 주님을 위해 섬길만한 좋은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싫증에 물들어 주님을 섬기기에 마음속에 싫어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버시는 이 위대한 사도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마음속에 어떤 사람으로 남을까요? 주님의 교회에서 공연히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 일평생 주님의 교회에 혹처럼 붙어있어서 주님의 교회를 괴롭히기만 하다가 죽어가는 사람 아무 할 일없이 주님의 교회에서 무위도식하는 사람, 혹시 이런 사람으로 주님의 마음에 기억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많이 수고한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되도록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이름은 버시였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페르시다 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이 페르시다라는 이름은 틀림없이 여자이름이고 앞에 나오는 이 페르시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페르시아에서 온 것일 것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페르시아 출신의 로마시대 여자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러면 이 버시는 유대인도 아니고 또 헬라인도 아니고 이방사람 페르시아에서 어떻게 떠돌아 여기에까지 온 사람이고 그러다가 우리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겠죠. 어쩌면은 사도바울이나 사도바울의 제자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그 사람은 주님을 안 그날 이래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을 것 입니다.어쩌면 이 이름은 그저 우리들이 연변에서 온 사람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듯이 그냥 그렇게 족속의 이름으로 불리었고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시는 이 세상적으로 보면 아주 한미하고 하찮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 버시는 그렇게 하찮은 이름이었어도 주님의 나라에는 이 사랑하는 자매의 이름이 충성스러운 믿음의 증인들,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비록 버시처럼 이 세상에서는 한미하고 그리고 하찮은 사람들이고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라도 그래서 이세상사람들이 무엇으로 보나 우리를 기억해줄만한 이유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실만한 충성스러운 삶을 살자고 여러분들에게 권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고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세상을 위하여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세상에 하찮은 사람, 이 세상이 기억해줄 필요가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그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아주 고귀하고 소중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버시는 얼마나 많은 사연을 안고 페르시아로부터 혹은 자신이 페르시아로부터 왔을 수도 있고 혹은 조상들이 페르시아사람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을 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요. 세상에서는 하찮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오늘 사도바울의 마음속에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복음의 동역 자가 되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버리기까지 수고했던 자매로 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기억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이 헌신된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고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도 이 여자 버시의 이름이 깊이 아로새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 남들이 박수칠만한 학식이 없을지라도 우리주님이 우리의 이름 석 자를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기억해주는 사람 없고 알아주는 사람 없어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하찮았고 우리의 부모도 우리의 가문도 한미하여 어디에다 명함을 내놀만한 아무 자랑거리가 없었지만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고 난 다음에 우리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주님을 섬기던 수고로운 우리의 인생의 길을 모두 다 걸어가게 하신 후 우리의 눈을 감기시고 우리 코의 호흡을 거두시고 그리고 우리의 입술의 혀를 멈추게 하시고 우리의 핏줄에 흐르는 피를 차갑게 식어지게 하실 그때에 주님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이 땅에 있을 때 나를 충심으로 섬긴 성도였고 네가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이 이름 없이 빛도없이 수고하고 애썼는지 내가 기억하노라’ 하고 주님이 인정해주신다면 우리의 생애는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생애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오래전에 필리핀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보여줄게 별로 없었는지 그곳에 있는 선교사님이 집회 끝난 후에 우리 용사의 묘에 갑시다. 난 그래서 필리핀 용사의 묘인 줄 알았어요. 갔더니 가난한 필리핀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파란 잔디가 아주 정성껏 가꾸어져 있는 넓은 공원이 나타났고 그 공원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벽을 쌓아서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벽에는 수만 명은 될 만한 사람들의 이름이 한 글자 한 글자 저 위부터 아래까지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차대전 때에 거기서 일본과 싸우다가 전사한 자국의 병사들의 이름이었습니다,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의 이름은 별로 못 보았고, 그저 졸병으로서 전투에 참전했다가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스믈셋, 스물넷 이런 꽃다운 나이에 포탄 속에서 산화해간 이름, 찾을 수 있는 데까지 다 찾아서 파란풀밭위에 하얀 대리석으로 집을 짓고 양쪽으로 세워진 큰 벽에 이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 병사들이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어떤 사람은 육지에서 어떤 사람은 바다에서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갈 때 자신들은 누구의 마음속에 기억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들이 죽은 후에 국가는 이들을 기억하여 이렇게 아주 아름다운 무명용사의 현충원을 만들어 놓고 그리고 거기에다가 그 사람들의 이름을 대리석에 하나씩 하나씩 새겨 놓은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때로는 소외감을 느끼면서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의 이름이 저렇게 기억이 되겠구나, 충성되게 산사람들의 이름을 국가도 잊지 않는데 우리주님은 기억하시겠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까요? 태어난 날은 우리가 알지만 언제 우리주님이 우리를 불러 가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주님을 위해 섬기며 산 날이 아닌 날들은 사실상 살았다 이름을 가졌으나 죽음의 날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맡겨 주셨을 수 도 있고 남들에게는 흔히 안주는 위대한 사명을 맡겨 주셨을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아주 작은 일에 우리를 불러 주셨을 수 도 있고 어쩌면 일평생 버리적 거리며 섬겨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일 주님의 일 이 보편교회 작은 교회 한 모퉁이를 섬기다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슬처럼 사라질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까짓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의 섬김의 이유는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을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만들어 주셨던 성령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짐승 같았던 우리들을 변화시키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사람 되도록 여기에 우리를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읍시다. 지금은 비록 주님을 섬기기에
고단하고 힘겨운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도 잠시 후에는 우리에게도 쉼이 있을 것이고 잠시 후에는 우리에게도 위로가 있을 것이고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이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날 동안 어둠속에서 흘렸던 우리의 눈물을 씻겨주시는 위로의 날들도 그때에는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주님을 섬기면 산 사람들만이 완전한 기쁨과 희열을 누리게 될 것이고 거기서 우리는 남아있는 우리의 교회를 기억하면서 거기서도 우리는 이 지상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될 것이고, 이 땅의 모든 보편교회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교회를 통해 이 온 누리에 하나님의 큰 영광이 가득하게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해주시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거기서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버시처럼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시련이 많으면, 주님을 위해 섬기며 흘리는 눈물이 많으면 그 고난과 시련은 면류관이 될 것이고 여러분들이 흘린 그 눈물은 그 면류관에 매달린 보석이 될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우리 모두 눈물 흘리며 며칠 더 우리의 고난의 길을 가다가 영광의 날에 주님의 보좌 앞에서 모두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