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세 목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10)
녹취자: 김경애/허혜숙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세 번째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10절입니다. 모두 함께 읽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9절부터 말씀을 전했습니다. 목회는 기도요, 목회의 목표는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지식과 모든 총명을 통해서 그 사랑이 풍성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10절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목회의 구체적인 세 가지 목표가 나옵니다. ‘성도들을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라는 의미인데, 다시 말해서 목회를 해서 이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을까 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목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도록 길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한 성도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허물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는 ‘선한 것’이라고 나오지 않습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나왔습니까? (시비라고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이 훨씬 더 정확한 듯합니다. ‘시비’라기보다는 희랍어로 ‘디아페론타’(διαφέροντα)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들(different thing)을 분별하며’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대개 진리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막 먹으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맨 처음에 중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침마다 먹는 요티하오라는 튀김과 콩국입니다. 콩국은 별 문제가 없어보였으나 요티하오의 제조과정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천진에 처음 갔을 때 길거리에서 요티하오를 튀겨주는데 새카맣게 된 기름에 튀겨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요티하오를 튀기면 새까만 요티하오가 나오는 것입니다. 요티하오에 까만 티끌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동행한 분에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저 기름은 얼마 동안이나 쓴 거예요?” 대답하기를 “주님만이 아십니다.”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런 기름은 발암물질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일 아침마다 그런 기름에 튀긴 음식을 수없이 사먹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가끔 작은 호텔이나 숙소에 가서 요리를 튀겨주는 것을 보면 깨끗합니다. 약 20년 전의 일이니까 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분별없이 먹고 싶은 것을 막 먹으면 몸속에서부터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육체의 생명이라는 것은 마시는 것, 먹는 것, 호흡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정말 중요한데 지금 중국은 공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공기가 너무 나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에 적용해보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 수많은 가르침들을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모르고 아무거나 막 섭취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혼이 발암물질에 오염됩니다. 무안에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곳을 섬기고 있는 좋은 목회자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같이 대화를 해보면 압니다만 그분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격적인 분이셨고, CRTS를 시작 즈음에 학생들도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2년이 못되었을 때에 그분이 신사도운동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집회를 하면서 사람들이나 쓰러뜨리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니 싸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좋았던 분이 말도 안 되는 그런 운동에 빠지는 것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막 섭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단이라는 말도 그런 것입니다. 실마리가 다른 것입니다. 볼 때는 다 비슷해 보이는데 실마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처럼 보이는데 잡아당기면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을 보면서 염려되는 것이 있는데 신학적인 혼란입니다. 자기 견해가 분명한 가운데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공부하고, 참된 것과 다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면서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목회자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성경을 잘 알 뿐 아니라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서 올바른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도 이해를 하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지만 그것이 왜 나쁜지도 이해하며, 그것이 교회 안에서 뿐이 아니라 사회의 사상, 철학의 사조, 그리고 오늘날 시민들의 사고방식까지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올바른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과 신학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디아페론타’ 곧 ‘다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모본을 보여줍니다. 그는 두란노에서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 자신도 연수를 더하여 죽을 때가 가까이 올수록 신학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탁월하고 치밀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잘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참된 것을 분별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누가 잘못 되었는지 분별하며, 다른 것을 가지고 왔을 때에 모든 성도들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도 받았지만 앞에서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기억 하십니까? ‘자칭 사도라 하되 거짓된 자들을 구별하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 교회의 탁월한 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분별력이 탁월하면 사랑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분별력을 가지는 것과 사랑을 가지는 것을 별개입니다. 옛날에는 탁월한 분별력과 사랑도 있었지만 이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그 탁월한 것이 빛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해 지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진리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 부합하는 상태, 그것이 진실입니다. 중국어에도 ‘도덕’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습니까? ‘따우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십니까? 나쁜 짓을 하면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따우’(道)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덕적인 기준이고 진리입니다. ‘떠’(德)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래서 덕이 많은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고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덕은 사랑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도덕’이라고 하는 말은 객관적인 ‘도’에 주관적으로 ‘덕’이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전체를 가리켜서 ‘도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진리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난 다음에 그 진리에 자신이 합치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 ‘진실’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모든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노장 사상도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상에서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계속 변하는 것이니 오히려 어느 것 하나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편견과 아집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도덕’에 관한 그런 견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도덕’은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아이를 길러보셨을 것입니다. 단것을 보면서 ‘이것은 너무 달아서 먹으면 안 된다’ 고 가르치며 안줍니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 먹고 싶어 합니다. 우리 손녀도 단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한 밤중에 사탕을 달라고 졸라대니 엄마는 한 밤중에 무슨 사탕이냐면서 야단을 치고, 그러면 약 상자를 뒤져서 달콤한 약을 찾아서 먹어버립니다. 그런 아이를 엄마는 먹지 말라고 말리고, 이를 어기면 때려서라도 저지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커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나면 왜 그런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두 살, 세 살 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설탕의 화학기호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우리 몸에 당뇨와 같은 질병을 일으킨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혈관의 구조가 어떻게 되고 그것이 어떻게 콜레스테롤을 유발하게 되는지를 설명 해봐야 이 아이가 못 알아듣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주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해 그렇게 뛰어난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믿어라, 그리고 이렇게 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이 자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집니다. 공부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그래서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거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라’는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를 알았다’고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야고보 선생은 거울을 보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봅니다. “아, 여기 무엇이 묻었구나”라고 하면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든지, 안 되면 뭐라도 발라서 없앱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진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그 진리에 합당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자기를 합치시켜야 됩니다. 자,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에 우리를 합치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즐거운 일일까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찬송)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삶은 복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사랑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진리는 여전히 좋은 것이지만 자기를 거기에 합치시키기 싫습니다. 때로는 그 진리가 자기를 찌르는 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국의 공기가 어땠습니까? 중국 쪽에서 미세먼지가 날아옵니다. 그래서 주의보가 떨어집니다. 한국의 대기 상태는 전적으로 중국에 달려있습니다. 약 20년 전만 해도 서울의 공기는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법적인 기준을 높여서 도시를 정화시켰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한국에 온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깐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약 30년 전에 한국은 지금의 중국에 있는 뒷골목보다 훨씬 더 더러웠습니다. 오죽하면 신문에 사설이 났는데 ‘길거리에서 오줌을 싸지 말자’였겠습니까? 사실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깨끗해 졌습니다. 만일 이곳 마당에서 스티로폼을 태우면 금방 경찰이 올 것입니다. 큰일 납니다. 그런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건축하다가 스티로폼 같은 건축 폐기물이 나오면 굉장히 많은 돈을 주고 치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한국이 깨끗해 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공기가 좋잖아요? 들이마셔 보십시오. 공기가 좋으면 햇빛도 아주 좋습니다. 아침에 비치는 맑은 공기와 햇살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눈에 안질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빛이 좋을까요? 너무 괴로울 것입니다. 아침 햇살은 너무 좋은 것인데 내 눈에 안질이 있다면 그 빛은 내게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아기 돼지를 얇게 해서 껍데기를 바삭바삭하게 만든 음식이 있는데 ‘권동차이’라는 음식입니다. 전 세계에서 그렇게 맛있는 요리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주 비쌉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먹는 것 만큼 맛있지 않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이 요리를 맛있게 먹으려면 한 사람 앞에 천 위안은 줘야 합니다. 아주 비싼 것은 2천 위안도 줘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먹는 것이 훨씬 더 맛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약 10년 전에 수술을 했습니다. 편도선 절제 수술을 했습니다. 퉁퉁 부은 편도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었는데 잘라냈습니다. 집도의도 20년 의사생활을 했지만이렇게 큰 편도는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하튼 그것을 잘라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인들이 애를 낳는 것이 이보다 힘들까?’ 편도를 절제하고 꿰매었으니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어서 8kg나 빠졌습니다. 중국 요리를 좋아하지만 특별히 광동 요리를 좋아합니다. 동북 요리는 열 개를 시키면 세 개 정도는 입에 안 맞습니다. 그러나 광동 쪽 요리는 다 맛있습니다. 제가 모두 좋아하는 요리들입니다. 제가 특히 좋아하는 요리가 ‘충칭 라즈지’입니다. 바삭바삭하고 매우 맵습니다. 그것을 너무 좋아해서 편도선 수술을 받은 제가 그것을 먹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편도는 칼로 잘랐습니다. 그 매운 고추가 목으로 넘어갈 때 상상이 되십니까? 그러면 ‘충칭 라즈지’는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라즈지 자체는 너무 좋은 것이지만 아픈 내가 먹는 것은 너무 나쁜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는 좋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 진리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싫어합니까?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잘못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이 못 하게 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되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너무 좋은 것이고 쉽습니다. 연애를 해 보셨습니까? 서로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내가 딱 맞춰줄 때, 그래서 상대방이 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볼 때에 행복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도 특권처럼 느껴집니다. ‘나만 이렇게 해 줄 수 있어.’ 이것은 사랑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깨졌습니다. 그러면 ‘왜 나만 밥을 해야만 하지?’ ‘왜 내가 애를 셋이나 낳아서 길러야 해?’ ‘왜 나만 아침마다 와이셔츠를 다려서 바쳐야 하나? 너는 손도 없어?’ 라며 그 사람 마음에 자기가 합치시키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더 심해지면 아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이 남편의 마음에 너무 들어서 고맙다고 하면 다음부터는 아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제일 꼴 보기 싫은 것이 상대방이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사랑 하나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도’는 그리스도입니다. 진실해 진다는 것은 내 존재와 삶이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일생의 소원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려운 점이 나옵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르치는 대로 사람들에게 저절로 사랑이 생긴다면 목회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장땡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많이 아는데 진실하지 않습니다. 중국사회에도 그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농민공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겠습니까? 아니면 공부 많이 하고 권력을 많이 쥐고 있는 사람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겠습니까? 한국사회에서는 후자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몰지혜화가 이루어집니다. 지식은 많은데 그것이 지혜가 되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보니 진실 같은 그런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만들어 줄까? 그리스도를 애인처럼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까’ 그것이 관건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 되는 것’입니다. 그 ‘허물없다’는 말은 희랍어로 ‘아프로스코포스’(ἀπρόσκοπος)라는 단어인데 ‘아'는 없다는 것이고, ‘프로스코포스’는 흠집입니다. 예를 들면 대만에도 ‘배’가 있습니다. 대만의 배 한 박스 값은 한국의 배 한 개 값과 똑같습니다. 한국 배는 중국 배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한국의 배가 와삭하면서 아주 맛있습니다. 그것이 나오는 철이 가을입니다. 10월쯤입니다. 최고의 극상품,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은 한 개에 60위안 정도로 아주 비쌉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맛있어도 거기에 흠집이 없어야 합니다. 손톱자국이 났다든지, 어디에 긁혔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좋은 물건은 손님들이 만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손이 닿을 때 과일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으로만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흠집이 있으면 안 됩니다.
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나는 눈처럼 하얗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나는 예수님 보다 더 순수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흠집이 있는데 뭐, 어떻게 흠집 없이 살겠어? 그냥 적당히 죄 짓고 사는 거지’라고 하며 살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완전히 흠이 없을 수는 없지만 흠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목표를 세워야지만 많이 흠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 때에 많은 흠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살아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사람들은 지도자가 싫으면 온갖 비난을 합니다. 심지어는 없는 것도 있다고 하고 욕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흠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지만 다만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어려운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리통 속에 들어있는 사람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하라고 매일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관심사는 본인이 기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목회자는 기도하고 있나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할 때 꼭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그것이 왜 궁금할까요? 들려오는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면 자신들이 그것대로 살면 됩니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해 저는 열심히 노력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몇 시간이냐고 묻습니다. 어렵지요. 그러니까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여야 합니다.
결국 목회를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사모님에 대해서 교인들은 험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너무 사치스럽습니다. 너무 좋은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사모님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주일날은 주님의 날이니까 평소에는 화장을 안 하다가도 화장을 하고 옷 중에서도 제일 아끼는 좋은 옷을 입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자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하고 너무 수준이 차이가 난다고, 목사님의 집안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말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목사님이 ‘여보, 그렇게 잘 보이게 하고 다니지 마.’라고 했더니 사모님이 평소 하던 데로 하고 교회에 나갔답니다. 6개월쯤 지나서 또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충분히 사례비를 주는데 사모님은 식모처럼 하고 다니지? 저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대우를 안 해준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저러는 것일거야’ 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그냥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세요.’ 그냥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세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 다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 두 번째 진실한 성도가 되게 하는 것, 세 번째 허물없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하 중국목회자 소감 발표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