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20170822_중국 집회)
4. 목회의 궁극적 목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해지고 허물이 없게 되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을 보면 ‘의의 열매가 가득차서’가 분사로 되어 있는데 그게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의의 열매가 가득 찬데 그게 ‘into’로 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가득 찬 것이 의미적으로 어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광과 찬송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의의 열매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되어 있는 의의 열매는 ‘디아데케’(διαθήκη)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언약’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륜을 따라 다르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의’라고 할 때 ‘의’를 조직신학적으로 규명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가 상주시는 의로 나타나고 벌주시는 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직신학적인 의라기보다는 의라고 하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맺게 해주시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져서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의의 열매를 맺는 주체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서 신학적으로 볼 때 의가 무슨 뜻일까요? 구약에서는 의가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법에 부합한 상태가 의입니다. 구약에서 의를 이야기할 때는 명료한 잣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그 사람이 의로운지 의롭지 않은지를 판단합니다. 율법에 부합한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의의 개념이 훨씬 더 적극적이고 풍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풍성하고 적극적이게 되었을까요? 핵심적인 것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가 됩니다. 그 의는 예수님이 죄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인류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담당하시므로 획득한 율법적인 의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바울신학의 새 관점에서는 이러한 전가의 교리를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나 알미니우스 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의를 주신 다음에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의를 이루면서 살게끔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을 부정하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은 과도적인 것이었고 이러한 옛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더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행동원칙으로 정리된 것이 구약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그 행동원칙으로 제시되는 것 이외에 그 이상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없었는가?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있었지만 구약의 성도들은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십계명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자신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닫습니다. 결국은 이 계명을 진정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바깥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몽학선생 삼아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제 3용도입니다. 그런 율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담겨진 뜻은 그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그들은 결코 십계명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십계명 중에 어떤 것들은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 같은 십계명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도록 만드셨는데 신약시대에는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인류 속에서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의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물론 율법에 부합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뜻을 이루어드리면서 사는 모든 인격과 삶의 열매가 의의 열매입니다. 훨씬 구약보다 포괄적입니다. 이런 저런 죄를 짓지 않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사랑의 원리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셨을 때 기대하셨던 뜻을 나라는 존재를 통해 성취하면서 살 때 성취된 열매를 많은 사람들이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의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로 맺혀지는 열매가 아니라 존재와 인격, 삶, 사역,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KJV에서는 ‘being filled with’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러한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의의 열매가 거의 없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앙과 목회 사역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과 의해서 결정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역의 목표입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
그러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목회사역을 하면서 성도들이 우리의 목양을 받으면서 얼마나 더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가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인격과 삶 속에서 그런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 우리 사역의 목표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하면 열매의 종류를 보면서 그 나무가 그 나무였다는 것도 알게 되고 ‘이 나무는 참 고맙구나, 이렇게 좋은 열매를 우리에게 주니 이 나무는 참 고마운 나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은 유익을 얻고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를 통해서 맺혀지는 인격적인 열매입니다. 인격이 밖으로 발산되어서 삶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에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저런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 그것이 그리스도시구나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독사’(do,xa)라고 되어 있는 ‘영광’은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홀로 갖고 계시는 영광입니다. 둘째는 발산적인 영광인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임하는 ‘쉐키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으므로 빛이 발산하면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고 장소적인 쉐키나들이 구약의 역사에 있어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지막 세 번째인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어떤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표현에 ‘I honor you’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나는 너를 찬송한다, 영광 돌린다’라기 보다는 ‘나는 너를 인정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광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 없지만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 앞에 굴복하여 그 영광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바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Effective Glory,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 목회사역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 가 우리 목회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는 단지 목청을 높이고 누군가를 정죄하는데 쓰이는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야하는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Soli Deo Gloria를 외치면서 남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Soli Deo Gloria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기도 목회를 통해서 성도들의 사랑을 불러 일으켜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점점 풍부해지고 결국 성도들이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될 때 그것을 통해 의의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의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과 찬송을 홀로 받으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Soli Deo Gloria의 목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결국 목회자의 영광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돌보라고 맡겨 주신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어떻게 점점 더 풍성해지게 되었고 결국 분별력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의 인격과 삶 속에 예전에 없던 하늘의 열매가, 그리스도의 열매가 얼마나 많이 맺히게 되었는지 그것이 바로 우리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물론 한해를 사역했을 때 얼마나 사람이 모였는가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태만한 사람을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그의 하는 일과 사역에 복을 거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사역이 쇠퇴하고 있으면 목회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면서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데 시련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내게서 목회의 은혜를 거두시는가를 고민해야합니다. 여러 해를 한 부서를 목회했는데 회심이 거의 없다면 근본적으로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가 혹은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내가 목회사역으로 들어온 것이 부르심이 없는데 나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더 필요하면 직업도 바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소명을 받은 가장 훌륭한 증거는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 되어 가는 것, 그것도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이 변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소명이 아니거나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목회 사역에서 거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성찰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껏 목양사역하면서 이런 열매가 얼마나 있었는지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목회는 원래 다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라헬이 야곱에게 앙탈을 부리면서 처절하게 울부짖습니다.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혼들의 회심과 변화의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되는 사람들이 목회자이고 그렇게 오래 사역하고 나면 그런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마지막으로 전치사 하나가 나옵니다. ‘디아 투 예수 그리스투’(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여기서 ‘디아’는 원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의 열매가 가득해져서 그 의의 열매가 영광과 찬송 속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 전하고 가르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연합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니오 쿰 그리스토(unio cum Christo),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의 이런 저런 모습을 다 깎아내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없애버리면 교회가 될 수 없는 마지막 하나의 요소를 이야기 하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과는 달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교회의 본질과 관련시켜서 꽉 붙들었기 때문에 신학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니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대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성자에게 부어주시고 성자에게 부어진 사랑과 생명은 그의 신부인 교회,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된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부어진 사랑과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는 개인,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 그리스도가 없는 개인, 이런 것들은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들입니다. 어떤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오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고 나는 교회에 접붙여진 몸이니 내가 이것을 받는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러한 생명과 사랑을 받을 때 나는 예수 안에 있고 다른 모든 형제들도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 원리에 의해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복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을 뿐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늘의 생명과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생명은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입니다.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을 조금 하면 갈등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깊이 하면 그 사랑이 엄청난 힘을 줍니다. 불신자로서 한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사생명입니다.
(노래)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Cause you don't love me any more
너무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햇빛이 계속 빛날까? 왜 파도는 해안가로 밀려오는 것일까? 왜 새들은 노래하고 왜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을까? 당신이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세상은 끝이 났는데.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사한 생명을 많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모상입니다. 사랑하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빗나간 사랑이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에너지를 줍니다. 그리고 잃어버릴 때 삶에 대한 애착도 함께 놓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인데 그 사랑은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추구해나갈 때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사랑의 힘을 한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온갖 시련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셀린디온이 불러서 히트를 쳤던 ‘The power of Love’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때로는 두렵기는 해요. 그렇지만 당신과 사랑하는 일을 그만 두려고 하는 생각은 몇 광년 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과 함께 사랑의 능력을 배우고 싶어요.’ 이런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목회사역을 어떤 사람은 ‘환희와 희열’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바람직하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순간들입니다. 목회를 하다가 너무 보람이 있고 기쁠 때는 하나님이 예외적인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눈물 나게 고생스럽고 당장 그만두고 싶은 미칠 것 같은 고통을 겪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크기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크기만큼 그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하게 하는 동력이 목회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말씀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변화되고 나를 예수님 다음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열심히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교역자가 아니라 배설물 같이 알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치 자기 종처럼 취급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참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참게 만드는 힘, 목회를 하게 하는 힘이 목회 자체 안에서 오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물어보신 것이 ‘네가 양 떼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어보셨던 것입니다. 교회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목회에 동기가 되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닙니다. 목회의 즐거움을 교인들에게서 찾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듣고 은혜 받는 사람들만 목양하는 목회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23년 동안 목회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목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목회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회하다가 외로우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에서의 외로움은 그렇게 달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사들과 성도들을 붙들어 주기 위해서 나의 가정을 개방하고 같이 밥도 먹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격려를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그렇게 사랑해주셨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쳐서 그 생명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어느 정도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요즘 목회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홀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으면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목회자로서의 강직함과 품위를 지키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어지는 생명과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목회인데 예수와 연합된 교회의 몸인 한 지체로서의 우리 목회자가 다른 지체인 교인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교회론적인 발언입니다.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신학적으로 인성적 연합이라고 하는 것인데) 모든 인류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인류는 그렇게 됩니다. 멸망할 사람들은 멸망하지만 남아 있는 모든 인류는 그렇게 한 몸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또 다른 몸의 한 지체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 충만한 생명의 힘으로 우리들이 살아갑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에서 네 번에 걸쳐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드렸고 마지막에 한 번이 더 남았는데 맨 앞에 시작되는 구절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입니다. 총 5시리즈로 구성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한 해 동안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잘 기억하면서 완성도가 높은 목회사역을 하여 여러분들도 변화되고 성도들도 변화되는 은혜가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