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기독교 선비로 살다가 죽다
녹취자: 오희열
Ⅰ. 들어가는 말
이 시대의 목회자들은 매우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고 많은 요청들을 교회 내외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오늘 이제 제가 여러분에 강의하려고 하는 “목사, 기독교 선비로 살다 죽다”라는 제목은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선비에게 모든 것을 다 목사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지행일치의 학문의 방식, 이것에 관하여서는 우리 기독교 목사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고, 실제로 한국 교회 초기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실제로 목사직을 이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면서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강의할 순서는 들어가는 말,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 목회자가 되는 길,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아가페와 까리따스, 목회자로 살다가 죽는 길, 목사와 선비의 학문 방식, 목회자와 신학함의 방식, 이 순서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다기화 된 사회에서 예전에 없던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교회에 요구하고 또 그렇게 변화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선교적인 요구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한 소외의 문제나 그런 것에서 인간의 정신이나 생각들이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복잡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선교적으로 교회가 해야 할 요구들도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목회자는 누구인가? 이 자리매김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목회라는 말은 정말 애매합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정체성을 우리가 생각할 때, 목회자는 진리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인식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란 저의 말로 하자면, 개혁신학자들과 청교도들의 모든 사상을 종합할 때, 우리는 이러한 목회자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고 죽어간 사도들의 후예이다.” 기본적으로 설교자는 사도들의 후예이고, 선지자의 후예라는 사실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존 칼빈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The servant of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의 종” 이라고 불렀고, 존 오웬은 자신을 “The servant of the Gospel of the Christ”,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servant라는 말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직한 말은 아닙니다. 원래 “doulos”라는 단어는 servant 라기보다는 slave 입니다. “노예”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servant는 월급을 받는 servant도 있었고 집에서 출퇴근하는 servant도 있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doulos”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에데다”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slave 라고 번역을 해야 맞는데, 그 당시 이 사람들이 노예제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컴플렉스가 있어서 킹제임스 버전이 나올 때 slave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하고 servant를 선택해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slave입니다.
Ⅱ.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
목회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합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을 디모데서에서는 “너희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그래서 목회자를 세우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불신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온전케 하려 함이라” 이것은 교화입니다. edification 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목회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A. 구원(salvation)
구원입니다. 성경을 알았는데 성경 안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느니라.” 이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단에서 목사, 장로 기도회가 있었는데 한 3천 명 목회자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거기서 강연을 하면서 강조한 것이, 지금 우리들이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사실 긴급동의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은 ‘회심의 문제’입니다. 특히 여러분의 성결교단은 신학적으로 회심에 대한 강력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회심에 대한 강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구라파에서는 born again 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견해는 거의 모든 christianity에서 기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사회의 컨텍스트의 관계를 연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대안을 세워야 한다는데 그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출발인데 그런 회심이 불분명해진 것입니다. 이번에 알프레드 아들러의 시리즈들, “미움 받을 용기”를 비롯해서 많은 책들이 있는데, 특히 이 “미움 받을 용기”는 75만부가 팔렸습니다. 사실 심리학계에서 그 사람의 이론은 이미 오래전에 다 폐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광을 일으키는 이유는 뭔가 나 자신이 종교적으로 조차도 변화되지 않은,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는 것을 긍정해주는 것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처럼 체면문화가 있는 사회에서는 커다란 파괴력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이럴 때 일수록 회심의 중요성을 외치고,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참된 신앙에 도달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오늘날의 도덕적인 문제도 이 회심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엊그제도 뉴스에 보니까 어떤 신학대의 학생 하나가 성매매를 하다가 위조지폐를 사용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신학교 안에서 회심의 증거도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신학교가 “Welcome!”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명이라도 더 와야 학교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등록금에 기대해서 목회를 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말씀드립니다. 도전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시골에서 목회하는 사람입니다. 서울도 아니고 서울에서 14km떨어진 외곽에서 목회하는 사람입니다. 매주 설교하러 올라가는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설교와 이론들을 공부해도 회심을 외치지 않고 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으면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어야만, 회심을 해야만 성화의 길을 갈 것 아니겠습니까?
B. 교화(edification)
교화,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온전함으로 도달하게 하기 위해서, 성인으로, 신앙적인 성인, 다 자란 사람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도 그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약을 하자면 인격과 성품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케 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Ⅲ. 목회자가 되는 길: 그리스도와의 만남
목회자가 되는 길이 무엇이냐, 목회자가 되는 것을 우리들은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나는 목회자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은 설교할 수밖에 없다. 그를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쏟아지는 폭포수를 컵으로 받아내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매 맞고 투옥당할 지라도 풀려나면 다시 설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목회를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무엇에 대한 수단입니까? 목회는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그 진리를 따라 살도록 만들어주는 수단이 목회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목회의 비전이 있기 전에 외치지 않으면 안 될 진리가 가슴속에 끓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지일 목사님이라고 103세인가 104세까지 사셨고, 박인수 목사님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친구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 40년을 더 사셨습니다. 이분이 놀라운 게 101세에 미국 집회에 오셨습니다. 그 연세에 비행기를 타고 말입니다. 그분이 어느 선교사들이 모인 집회에서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은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도 피 냄새가 나지 않아. 예수의 피가 없어.” 이것이 104세 먹은 노인의 장탄식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확고하게 그 무엇이 가슴에 불붙는 진리,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나타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는 길은 무엇이냐, 설교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설교자가 아닌 사람은 목회자가 될 이유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설교할 소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굳이 목회자가 될 필요가 없고 굳이 신학을 하지 않고 목회자 옆에서 평신도의 신분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되는 길은,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납니다. 광야에서 영적으로 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가페와 까리따스의 관계를 유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십자가와 부활사건
목회의 소명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알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사도바울을 생각해봅시다. 바울이 있었는데 바울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설교는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수단이었고 구원받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우리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 아주 가벼운 스킬부터 시작해서 성경신학 공부까지 많겠지만,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설교할 수 있는 학문적인 역량을 길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탄탄한 철학적 기반입니다. 여기 교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제가 철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탄탄한 철학적 기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설교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철학을 부전공이라고 믿어라.” 왜 그런지는 내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도바울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만난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인지, 베드로가 만난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인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베드로전후서를 썼고 이 사람은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작품을 쓴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바울하면 로마서를 띄우는데 저는 그렇지 않고 골로새서는 로마서를 능가하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인생 말년에 쓴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할 수 있기 위해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백그라운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종교적으로는 유다이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문화에 아주 친숙한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설교를 듣는 이방인들과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 지에 대한 아주 확고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심리적인 편견은 유대인만 하나님의 선민이고 나머지는 쓰레기이다. 신학적 편견은 “나사렛의 그 젊은이는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였습니다. 당시에 보편적으로 공유하던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아주 거대한 음모가 뒤에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를 사형시키시오!”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죽이면 되지 왜 죽이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했느냐, 그것이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의 거대한 신학적인 플랏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에서는 반드시 나무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사울같은 젊은이도 ‘아, 예수가 죽은 것은 그냥 사람이 죽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구나.’하며 팩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만납니다. 이것을 남에게 들었다면 무시했을 텐데 자기가 직접 경험합니다. 그러고나니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신학적 팩트가 자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못 박혀 죽었다”라는 팩트, 의심할 여지가 없는 팩트였습니다.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구약 전통에서 부활이나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어마어마하게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유대인에게 이러한 부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두 개의 팩트를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지 혼란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이 “대속의 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어두운 지성을 찢고 대속의 교리가 깨달아지면서 구약에서 내려오던 제사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의미들이 찬란한 빛처럼 꿰고 지나가고 달음질 쳐 오면서 인류와 세계의 모든 경륜에 대한,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를 꿰뚫고 빛처럼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해석을 히브리서에서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사도가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제가 그 사실을 최근에 쓴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책에서 이론적으로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문제를 항상 그리스도, 십자가를 우리의 구원과 관련시켜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구원만이 아니라 창조와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련된 것이고 모두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들을 교부시대 때에 발전시켜서 거대한 세계관으로 형성했던 사람이 이레나이우스 라는 인물입니다. “레카프텔라치의 교리”라고 해서 “총괄갱신론”이라고 우리는 말하지만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번역이고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라는 이론으로 이 세계와 우주의 모든 인류의 역사와 종말을 관통하는 세계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는 간단하게 창조, 타락, 구속, 완성, 이렇게 네 가지 단어로 요약을 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웅장합니다. 그 내용들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담고 있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초창기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인격적인 체험에 대한 신학적인 논구들이 점점 증대해 오면서 마지막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쯤 되어서는 그것들이 우주 전체를 바라보는 아주 심오한 세계관을 전개된 것입니다. 굉장히 철학적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책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런 웅장한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제사들이 바라보면서 달려온 궁극적인 실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희랍어로 “소피아”입니다. 소피아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논구를 하고 있지만 소피아라는 그 말을 사도가 썼을 때, 그 소피아의 의미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쓴 그 의도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이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열쇠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B. Agape와 Caritas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체험할 때, 뭐가 깨달아지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속하셨을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나에게 미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 사랑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김세윤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divine enforcement, 신적인 강제력으로 사로잡혀서, 희랍어로 ‘아낭케’, 숙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서 살 수밖에 없는, 가슴에 벼락을 맞은 숙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숙명과 같은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설교자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통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아주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 순수성이 보존되어 왔습니다. 이 사람이 그랬고 2세기의 대부분의 변증가들이 그랬고, 역사에 길이 남는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회개하고 아주 뚜렷하게 회심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총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완성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대속의 교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아닙니다. 그 후에 종교개혁의 시대를 연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로 이런 회심을 경험하면서 소위 theologia gloria, “영광의 신학” 를 버리고 theologia crucis, “십자가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개신교의 지평을 엽니다. 칼빈도 역시 파리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복음적 체험을 통해서 가톨릭과 결별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개신교의 중요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윌리엄 스틸 같은 사람은 목회자의 소명의 체험과 평신도의 소명의 체험을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한다면 평신도는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까? 정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신도들은 생업을 하면서 그냥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무치게 되면 내가 이 생업을 다 버리고 여기에 전적을 헌신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의 강제력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소명입니다. 설교자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 할 수 있느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주님을 깊이 만나라. 두 번째,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하라. 세 번째 치열하게 기도하라. 네 번째, 삶을 진리에 일치시키는 진실을 추구하라. 다섯 번째,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어거스틴이 고백록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기 확인을 하게 됩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 자체로 무엇이기에 당신은 저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만약 내가 그렇지 아니한다면 나에게 노하시고 끔찍한 비참에 처하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하시나이까?” 만약에 하나님께 우리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에 부합하는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혹하리만큼 우리에게 당신만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까리따스’의 문제가 나옵니다. ‘까리따스’는 사람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있고 죄인이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찾아갈 때에는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이유로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었지,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깊은 고뇌를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면서 진리가 그리웠던 것은, 진리를 찬송하기 위해서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진리 없이 살아가는 내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진리를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때는 에로스의 사랑으로 찾아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그 만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고 에로스의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까리따스’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까리따스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에로스와 아가페의 지평 융합을 이루면서 ‘amare Deum’, ‘하나님을 사랑함’을 포함해서, ‘amare Deo’,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아닌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르고, 혹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의도답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amor sui’, ‘자기사랑’과 ‘cupiditas’, ‘육욕애’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랑으로 태어나서 그것을 거스르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그 사람들에게 진리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입니다.
Ⅳ. 목회자로 살다가 죽는 길
목회자로 살다가 죽는 길. 우리는 흔히 비전을 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웃기는 것이, 무슨 비전이 있겠습니까? 저는 항상 목회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자체가 신성모독적인 질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철학은 모든 학문 위에 있어서 그 학문들을 내려다보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얘기해달라고 하면 나는 “태멘”이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창세기의 맨 첫 글자가 “태”이고, 계시록의 마지막 글자가 “멘”입니다.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목회철학입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목사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업가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전에 있었던 인생관과 결별하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보여준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한번은 어느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왔습니다. 불신자를 위한 잡지였습니다. 인터뷰를 하자고 하는데 나는 내 얼굴을 언론에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안 하려고 했는데 선교적으로 해 주는 것이 좋다는 내부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왜 나를 인터뷰를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정치, 경제, 종교, 문화를 돌아가다가 종교 순서가 왔는데 천주교, 불교, 그 다음으로 개신교 차례가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인터뷰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를 물어보고 쭉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고 끝난 다음에 기자가 하는 말이, “제가 개신교 목사님들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왜요?”, “스님 같으십니다.” 했습니다. 저는 한 순간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눈치 챘기 때문에 굉장히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신자인 기자의 눈에도 스님은 철학자 같고 목사는 비즈니스맨 처럼 보인 것입니다. 끊임없는 사역, 사업, 무슨 비전… 그런데 그것에 진리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할 말은 많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A. 목사와 선비의 학문 방식
목사와 선비의 학문의 방식을 비교합니다. 목사와 선비는 다릅니다.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세계관이 다릅니다. 기독교가 생각하는 것은 아주 분명한 시초가 있는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은 무시무종하신 분이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들은 유시유종(有始有終)하거나 혹은 유시무종(有始無終)한 것들이 있는데, 유시무종한 것들은 하나님이 덕을 입히시기 때문에 무종, 끝이 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은 이런 세계관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관도 다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분명히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선비들은, 인간이 끊임없이 불경건한 것,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구속받을 정도로 절망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하늘과 통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원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비와 학문의 방식을 보겠습니다. 유학자와 선비는 다릅니다. 그리고 선비의 이상, 체득의 방식을 보겠습니다. 유학자와 선비는 다릅니다. 유학자는 그냥 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유학자이면서 선비일 수는 있지만 선비가 못 된 유학자 일 수는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학문과 윤리를 분리해서 배웁니다. 오늘날 신학을 공부하면서 삶이 신학이 추구하는 진리와의 일치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선비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인의예지를 구현하는 것을 삶의 이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좌우명을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삼았습니다. 자기를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치”라는 것은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폭압적으로 억누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그렇게 행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닦고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치”는 하늘의 질서로 이웃을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케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사람에게 지정된 온전한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소명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서 성숙으로 나아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학문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도 선생님이고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에 낀 이끼도 선생님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없이 흐르는 물에게서도 교훈을 배웁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피지카(Physica)”, “자연학”, “로지카(logica)”, “논리”, 그리고 “에티카(ethica)”, “윤리” 이것을 자연 속에서 발견하고 자기의 삶에 적용시켜서 자기의 삶을 덕스럽게 하는 그런 학문의 방식을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것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날아다니는 “피지카”입니다. 그런데 그 새가 나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기카”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이것이 “에티카”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눈뜨는 순간부터 마지막에 잠드는 순간까지 자기 앞을 스쳐가는 먼지 하나에도 그 의미를 물으며 거기서 무엇인가 하늘의 이치를 배우고 인간으로서 참으로 살아가야할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탐구하는 정신이 이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존 오웬 같은 사람은 Spiritual-Mindedness 라고 불렀습니다. “신령한 방향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입니다. “위기지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들을 완성시키는데 자신이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이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선비의 이상은, “입신(立身)”, “양명(揚名)” 이 두 단어가 선비의 이상입니다. 우리는 “입신양명”이라고 하면 교계의 정치꾼들이 약삭빠른 이익에 눈이 멀어서 하는 행동들의 동기를 말할 때 “입신양명”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입신행도(立身行道), 양명후세(揚名後世)”입니다. “도를 행함으로 자신을 세우고, 이름을 당대에 남기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남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참 도를 따라가는 사람은 당대에는 인정을 못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간 후에야 그 사람의 업적과 삶의 행적이 공정하게 평가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당대에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 잊혀지는 사람보다는 당대에는 그렇게 못해도 후세에 그 뜻이 알려져 이름이 높여진 사람이 되는 것이 선비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항상 자기 시대에 고난 받을 각오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유학자들의 세 등급이 있습니다. 이것을 논어에서 이야기했는데, “덕을 행하는데 뜻을 둔 사람은 공명에 관심이 없고, 공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름이 진정으로 사람들 앞에 존중받기 위해서는 부귀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나 부귀에 뜻을 가진 사람, 다시 말해서 부귀를 추구하는 놈은 무슨 짓이라도 할 놈이다.” 여기에는 “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청빈을 주장했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중앙에서 커다란 관직을 가지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이 사치하고 방탕했는데 그런 일을 하면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조선왕조를 500년동안 버티게 만든 위대한 정신의 힘이었습니다. 이렇게 세 등급이 있는데, 도덕에 뜻을 둔 사람, 공명을 찾는 사람, 부귀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부귀보다는 명예를,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을 구해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슷한 이야기를 레잘로시안츠에서 이야기합니다. 레잘로시안츠의 1번입니다. 평생 살면서 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결심문을 만듭니다. 자기에 대한 결심문입니다. 그것을 약 100개 더 되게 만드는데, 그것을 작성해 놓고 스스로 그것을 했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비판합니다. 한국 교회에도 이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아마 세 번째 내용일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온 인류의 행복과 유익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자.”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설교학을 여기서 공부하면서 설교를 잘해서 우리 교회 하나 어떻게 부흥시키고 큰 교회 만들어서 뭔가 사역의 보람을 느껴봐야겠는 생각을 가졌다면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설교자의 존재의 가치는 자신의 피를 발라서 진리를 토해내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커져봐야 좋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리 크지도 않지만, 내가 해 보니까 좋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꿈꾸지 마십시오.
진리체득의 방식에 대해서 한강(寒岡)정구(鄭逑)가 4체를 얘기합니다.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인식하는 방식이 사물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진리를 체득하는 것인데 체인(體認), 온 몸을 인식하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과 내면의 도덕을 분리하는 분리주의적 지식의 섭취 방법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체찰(體察), 온 몸을 성찰함. 체험(體驗), 온 몸으로 그것이 진리인지를 시험하고, 체행(體行), 온 몸으로 그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선비의 지식 체득의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자아의 완성과 타자의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는 우리 기독교 목회자들도 똑같은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자아의 완성이라면, 그리스도를 닮기를 힘쓴다는 것이 완성이라면, 또한 너희도 흠 없이 티 없이 이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사도바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간청은 타자의 성취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이라는 명제, 이것도 자기 것도 아니고 어거스틴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그 명제를 가지고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데카르트의 사유의 방식은 이미 벌써 그 전에 스콜라주의가 붕괴하면서 충분한 지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는데 이 사람에 의해서 정리된 것입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 무슨 뜻입니까? ergo는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그럼 그 앞에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인식되는 것들을 의심해라.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인상과 파악되는 지식을 의심해라. 그렇게 의심해도 마지막에 의심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남는데 그것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입니다. 이것을 자끄 라깡 같은 사람은 한 방에 날려버립니다. 파스칼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모든 생각을 모아서 자신의 사유를 하고 그렇게 생각한 다음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옳다고 생각을 해도 느끼는 것이 강하게 다가오면 그것을 결정하는 주전적인 존재가 인간이다.”고 합니다. 자끄 라깡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관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내면을 응집하고 응집해 들어간다고 해서 자아가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한국의 철학자들 가운데는 이런 이야기 합니다. “서양 철학의 모든 오류는 주체의 문제에 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 할 수 는 없지만, “데카르트 이후로 모든 서양 철학자들은 항상 주체라는 개념을 단독자라는 개념에서 살폈다. 그래서 그것을 ‘홀로 주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홀로 주체’가 ‘서로 주체’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는 존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유사한 개념을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개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격물치지”의 학문은 성의 정신, 뜻을 다하고,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자신의 몸을 닦고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것입니다. “격물치지”는 어떤 하나의 물건을 바라볼 때 그 물건을 치열하게 탐구하고 사색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물의 특성을 깨달은 지식을 통해서 삶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격물치지”의 개념입니다.
B. 목회자와 신학함의 방식
목회자와 신학함의 방식을 보겠습니다. 목회자들이 선비들에게 배울 관점 중의 하나가 통합적인 관점입니다. 지식을 파편적, 단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식을 전부 함께 연결 된 것으로 보면서 그것과 이상을 결합하면서 삶의 일관성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상이 있고 사람이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이상이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적용하고 인간의 사회가 이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그러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던져서 그것을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 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이유는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술쪽 보다는 사상과 문학으로, 수사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르네상스를 증진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남긴 유명한 작품가운데 “Oratio de hominis dignitate”라는 연설문이 있습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자료입니다. 이 인간존엄성에 대한 연설에서 르네상스적 인간관을 기가 막히게 정리해 냅니다. 그것은 “인간은 신 앞에 존엄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미완성된 모상품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닮아서 창조되었지만 신은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신을 향해 정화되어 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의 존재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자기가 신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고 이웃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제가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들이 이래야 하는데!’했습니다. 선비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 大丈夫”,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데서 살아가며”, 이것은 인입니다. 인으로 모든 인류를 품기 때문에 그는 가장 넓은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올바른 곳에 자리를 잡으며 천하에서 제일 큰 길로 행하며”, 이것은 명분입니다. 그리고 “뜻을 얻으면 이웃과 함께 그 길을 얻고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가나니,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며 빈천이 그의 뜻을 옮기게 하지 못하나니 무력의 위협이 그를 굽힐 수 없는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대장부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선비가 된 다는 것은 대의를 위해서 선비가 되는 그 순간 하시(何時)라도 죽을 준비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선비가 아닌 사람은 슬슬 꽁무니를 빼면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지만 선비는 깨끗이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나온 “사도”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안 보십니까? 설교자가 되려면 영화를 봐야 합니다. 그 대신 입을 헤~ 벌리고 “아, 재미있다.” 하며 보면 안 되고 제3자적인 입장에서 그 속에 어떤 문화의 코드가 들어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 기독교의 관점에서 어떻게 변증하고 비판할지에 대한 날선 관점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와 영화에 대한 해석은 해석학적 순환을 이룹니다. 자기가 이런 철학적 사유들을 탄탄히 가지고 있으면 그것들이 아주 정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화 한 편에서 수백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것보다 더 많은 현대 정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것이, 세자라고 세워놓았는데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잘라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놈을 잘라라!”하기에는 왕의 체면이 서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하를 불러서 주청을 올리도록 지시합니다. “이 세자는 가망이 없으니 폐서인하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시옵소서.”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신하가 돌아가서 유서를 써 놓고 죽어버립니다. “왕이여,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한 것입니다. 다른 신하하게 다시 시켰더니 그 사람도 똑같이 써 놓고 죽습니다. 그것이 선비정신입니다. 하시(何時)라도 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은 좀 비겁하지 않습니까? 이런 순교사상을 성경보다 더 완벽하게 말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자살이나 죽음을 현실도피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마지막에 죽음으로써, 그 피로써 글을 쓰는 것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하나의 proclamation입니다.
학문에 정진함. 목회를 하려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한 사람 중에서 설교 잘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세계적인 논문을 쓴 사람 중에서 설교를 기가 막히게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학문이 요구하는 학문과 전공학문이 요구하는 지식과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지식의 지평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로마서 9장을 읽다가 잘 몰라서 목사님에게 물어보니까 “이건 너무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대답을 못하고 신학자를 찾아가 봐라.” 그래서 신학자를 찾아갔습니다. 한 교수를 만나서 대답을 들어보니까 “나는 조직 신학자라서 성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하더랍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교수를 찾아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구약학자라서 신약은 모릅니다.” 그래서 신약학자를 찾아갔더니, “나는 공관복음전공이라서 로마서는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신학을 하는 교수를 어렵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어보니까 “나는 데살로니가전서 전공이라고 로마서는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서로 논문을 쓴 교수를 찾아서 물어보았더니, “아, 미안합니다. 제 전공은 8장입니다.” 하더랍니다. 아주 심각하게, “제 전공이 8장이기 때문에 9장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했답니다. 이것이 아우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8장을 많이 알면 9장을 모른다고 얘기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이 설교에서는 똥입니다. 필요도 없는 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려면 종합적으로 하나님과 세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이런 것들은 물론이고 철학, 과학, 문학, 예술, 그리고 법학, 천문학, 양자역학, 의학, 동양의학, 이런 모든 것들의 지식이 종합적으로 습득되면서 이러한 관계들을 자기가 신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내공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기, 천리마가 한 번 크게 뛴다고 해서 열 걸음을 나아갈 수는 없다. 노마, 아주 노둔한 말입니다. 별 볼일 없는 말입니다. 노마십가, 노둔한 말일지라도 열흘을 달리면 거기에 미칠 수가 있다.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몸으로 때워서 열심히 공부해야만 뭔가 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너무 아름다운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증언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와서 전하는 것이 너무 시시하고 사람들에게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음식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에 먹방이 많이 나오는데, 순대국이 화면에 나오면 쳐다보면서 “먹고 싶다!”합니다.
제가 민물고기를 잘 안 먹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얼마나 그럴싸하게 붕어찜을 선전하는지 두 번을 듣고 나니까 한 번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설교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혼에 대한 감각이 계속 자라갈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고 성도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입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마다 자신의 추루함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킴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 한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언어로써 삶으로 존재로써 보여주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싶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란 죄와 타락으로 더럽게 된 것과 창조주가 부여한 아름다움을 구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그 자체가 모두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인해 더러워진 것과 하나님의 선하고 원래의 아름다운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들을 구별해서 보여주고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아 가면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서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수가 있느냐 하면 그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 크기는 자신의 추함을 발견하는 크기입니다. 자신의 추함을 발견하는 것이 멈추고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사라지면 더 이상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것입니다. “아포프토시스”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생물학에서도 하나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몸은 약 60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 어떤 세포가 죽습니다. 뇌 세포는 죽으면 재생이 되지 않지만 나머지 세포는 죽고 나도 새로 재생이 됩니다. 3개월이 지나면 3개월 전의 세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우리 몸이 다 갱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60조 개의 세포가 우리 몸 속에서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면서 생명이 유지되는데 사람이 완전히 죽으면 그런 세포의 죽고 살아나는 일이 멈추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60조 개의 꼬마전구가 계속 깜박거리면서, 꺼졌다 들어왔다 하면서 인간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 세포의 죽음이 두 가지가 있는데 네크로시스의 죽음과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이 있습니다. 희랍어로 네크로는 ‘죽은’입니다. 이것은 어떤 화학물질이나 타격, 질병 등에 의해서 죽음이 강요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타살입니다. 외부적 원인에 의해서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크로시스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아포프토시스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규명이 되지 않습니다. 세포가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자살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데 세포 자신이 찢어져서 리소솜에 의해서 삼켜지고 분해가 되면서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이때 ATP라는 화학 에너지가 나옵니다. 그것이 세포라는 공장을 돌리는 전력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옆에 있는 세포가 세포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고 심지어는 세포분열까지 하면서 몸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아포프토시스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Final stage of 아포프토시트 인데, 이런 아포프토시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요소들이 끊임없이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12, 13년 전에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한 1년 동안을 환희 속에서 지냈습니다. 제가 천문학을 한 1년 과외선생을 불러서 공부했는데 1년 넘어가니까 그 다음에는 복잡한 수식으로 들어가서 거기서부터는 제가 접었습니다. 그 1년을 공부하면서 제가 놀랐습니다. 생물학도 과외 선생을 불러서 배웠습니다. 과외비가 한 달에 꽤 많이 나왔습니다. 제 개인 돈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몸의 세포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포프토시스를 하지 않고 모든 세포들이 살겠다고 들러붙어서 엄청난 영양분을 빨아들이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식되면 그것을 의학적으로 암세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암세포는 넘치는 생명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넘치는 생명 때문에 그 임자의 몸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이 뒤에 나옵니다. 이 속에 Pillars of Creation 이라고 하는데 천문학에서 나옵니다. 독수리 비슷한 모양이라서 독수리 성운인데 지구에서 약 6500만 광년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기둥이 세 개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여기까지의 길이가 4광년입니다. 길게 얘기하면 복잡한데, 간단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별이 폭발을 하고 일생을 끝냅니다. 백색외성의 상태에서 펑하고 폭발을 합니다. 폭발을 하고 나면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우주먼지가 됩니다. 그 먼지들이 우연히 한 곳에 모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 서로 중력에 의해서 잡아당기면서 모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름군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뭉치면서 응축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응축되면 핵반응을 일으키면서 더 급속하게 응축이 됩니다. 축구 경기장만한 수소를 축구공 하나의 크기가 되도록 응축시키면 약 섭씨 6000도의 열이 발생합니다. 그러면서 응축이 되고 핵반응이 일어나다가 어느 정점의 온도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이 폭발을 하면서 이 별들이 이 무리에서 뚝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수많은 알집처럼 작은 별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성(super star)의 출현입니다. 그러면 이런 별들의 위대한 탄생은 죽은 별의 먼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죽음으로써 사는 이 자체가 인체의 구조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세계를 관통하는 자연의 원리인 동시에 도덕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비들이 자신들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는 언제든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도에 비추어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는 치열한 성찰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도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원리가 성경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절, To die is to gain.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예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말하기를 “사망은 위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 그래서 목사는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선배 목사님의 말씀이, “목회는 끊임없는 굴욕의 길이다.” 무슨 커다란 영광을 거기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끊임없는 굴욕의 길이고 끊임없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길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죽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죽음 때문에 예수의 생명이 다른 사람의 몸에 나타나게, 이렇게 살아가는 과정, 그것이 “도열의 삶”입니다. 도 때문에 기뻐하는 삶입니다. 끊임없는 죽음 속에서 도열을 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기쁨의 삶을 사는 것, 이것입니다.
Ⅴ. 맺는 말
맺는 말은, 정말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까? 설교자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의 강의가 설교자 아닌 사람을 설교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세계에서 유명한 설교학자의 두꺼운 책도 아무리 탐독을 한다고 해도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되려면 주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그리고 치열하게 공부하십시오. 어느 정도냐 하면, 신학교 시절에는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공부에 몰입하는 시간이 최소한 5년에서 10년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네 번째, 신실해지십시오. 다섯 번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질의응답>
질문 1) 서두에 말씀하신 기자분이 목사님께 스님 같다고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도올 김용옥이 생각났습니다. 목소리도 비슷하고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라는 닮은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질문은 이러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자 했던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한 계기가 될 만했던 사건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시간적으로 활용을 잘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공부에 소양이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동기적인 계기가 있어야 출발점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쭙니다.
답변1)
(찬양) 온천한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에 성결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참 인간의 우연이라는 것이, 최형근 교수님이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초등부학생이었고 그 친구는 유치부 학생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만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작사했다고 믿어지는 노래이고 그런 이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이 세상에 묻어있는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을 과장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사물을 맨 이성으로 파악할 때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 이런 것을 깨닫는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편견이 없이 자연의 세계를 관찰하면 그 분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파악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다릅니다. 이것을 칼빈은 “코그니치오 디플렉스”, “이중의 지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첫번째, 꼬그니띠아 끄레아또리스, 창조주에 관한 지식입니다. 모든 지식은 창조주에 관한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한 분이 계셨고 모든 것을 당신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창조 세계 속에는 그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이 시간적으로 먼저 얻어지지만 후에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꼬그니띠아 레뎀또리스, 구속주에 관한 지식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다시 위로 올라가서 예전에는 구속주에 대한 지식이 없이 바라보았던 창조주에 관한 지식을 교정하면서 다시 파악해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지식에 대한 지평은 넓어지고 비로소 모든 세계에 관한 지식이 공정성을 갖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18세기 중엽까지 미국이나 구라파를 보면, 구라파의 경우에는 슐라이어마허 이전까지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지성인들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통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을 비롯해서 찰스 피니나 D. L. 무디 같은 오순절운동 등에 의해서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임스 오르가 지적했듯이 확고한 이론과 체계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지식은 오류에 빠지거나 소멸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시대에만 하더라도 신학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당시에 있었던 플라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교부들의 책, PL과 GL로 나누어져 나오는 교부들의 전집을 모두 읽고, 중요한 책들, 피터 롬바르두스의 쎈뗀띠아이 같은 것들은 거의 외울 정도로 읽어야 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책들을 읽는 것이 신학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원어로 읽고 당대의 학문을 섭렵하고, 중세의 신학, 철학들을 이해하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을 향해서 “당신은 칼빈주의자 입니까?”, “Are you Calvinist?”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그가 했을 답이 저의 답입니다. “I’m Catolic.”,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로마 가톨릭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로마는 지역이름인데 가톨릭은 “가톨릭”, “보편”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의 신문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나의 책을 즐겨 읽어주는 많은 독자들이 있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썼습니다. “나는 칼빈을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나는 내 시대나 다음 시대에 Calvinist로 불려지는 것을 거절하겠습니다. 내가 오웬의 책을 모두 탐독했지만 오웬주의자로 불려지는 것은 싫고 오웬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서 받은 영향력이 제일 많고 천국에 가서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어거스틴이지만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로 불려지는 것은 거절하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가 25권 탐독했지만 Edwardsian으로 불려지는 것은 거절합니다. 내책에 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나의 Follower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십시오. 읽고 당신이 하나님을 찾는 데에 도움을 받았으면 쓰레기통에 던지십시오. 그리고 밟아버리십시오. 그리고 김남준의 길도 아니고 어거스틴의 길도 아닌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자기가 자신의 인생에 진정한 주체가 되어서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내 이름 석 자도 잊어버리고 기억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그런 점에서 나는 공부는 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모든 학문을 습득하려고 애쓰고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 2) 오늘 “목사 선비로 살다가 죽다”라는 주제의 강의를 감동 깊게 잘 들었습니다. 두 가지인데, 첫째는, 목회자가 기독교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간의 모습, 바람직한 사회상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다루고 있는데 이 세상의 모습은 그것과 정 반대로 가고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런 속에서 목회자의 사회참여의 부분이 “선비로서 살다가 죽는다”고 했을 때, 목회자의 사회 참여가 교회에서 설교자의 직분으로 한정되어져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 사회 속에서 참여가 가능한지, 또는 방법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적인 부분과 이슬람적인 부분의 문제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설교 안에서만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법까지 참여할 수 있는지, 두 번째는 목회자의 자기 죽음에 대해서 일상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있는데 그것을 목회자의 자기 죽음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목사님의 개인적인 경험과 말씀을 더 듣고 싶습니다.
답변 2) 너무 많은 대답을 요구하기 때문에 두 번째부터 대답을 하자면, 끊임없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섭리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삶의 사태들을 일어난 사건과 그것을 일으킨 제1 원인자만을 생각하게 될 때, 끊임없는 복수와 미움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칼빈은 그래서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 안에서 이것들을 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명할 수 없이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도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분의 수중 안에 있다고 믿으면서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듣고 싶으시면 저를 따로 부르십시오. 너무 긴 주제입니다. 두 가지 책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4년도에 쓴 ‘자기 깨어짐’,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라는 두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 2월에 영국 키더민스터의 목회자들이 저를 불러서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이라는 것을 강의했는데 그것도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약을 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목회자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하고 그렇게 죽음으로써 목회자는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 속에서 새로 체험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적생명의 실현”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질문은, 그것은 여러분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동성애하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은 목회자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러운 욕설을 퍼부어서 신문을 일베 처럼 도배하는 것도 목회자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하는 일이 진리를 설교하는 일에 방해를 주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띠를 두르고 나가서 피를 토하며 외칠 것인지, 그냥 설교만 할 것인지, 그것은 각자 본인의 양심에 맞게 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고 그런 점에 있어서 예를 들자면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하이데커와 같이 나치와 타협할 것인지,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양심 속에서 대답할 문제입니다.
질문 3)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목사님 책을 좀 보고, 열린교회가 방배동에 있을 때에 새 가족으로 출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창기에 쓰셨던 책을 보면 기도원에서 말씀 한 구절로 받은 은혜들을 기록해 놓으신 책을 읽은 적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다양한 책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요즘은 처음 저술하셨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셨던 그런 것들이 요즘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많이 분주하시겠지만 여전히 그러한 은혜들을 누리시고 목회가운데 성공하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답변3) 저런 질문에는 사실 함정이 있습니다. ‘당신이 계속 학문적인 책을 계속 많이 써 내는데 혹시 속은 텅 빈 것은 아니냐?’ 두 번째는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내 마음이 참 편안할 것 같다’, 이런 것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책을 계속 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건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제가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 1995년에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한다”였는데 그때에 쓴 책이 재판되고 있지만 거의 수정을 하지 않습니다. 내 견해를 바꿔야할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신앙을 타오르는 불길 같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지금은 나는 신학을 그동안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사유해보면서 저는 발전했다고 생각을 하고 기본적인 그 길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신학을 symphonia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symphonia라고 말하고 싶고, 지금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 책들이 초창기에 나올 때는 설교자의 열정, 부흥, 청교도의 죽고자하는 신앙 등에 집중된 것이었다면 그 후에는 생각과 사유의 지평들이 훨씬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원에는 제가 내일도 들어갑니다. 자주 갑니다. 가서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기도 많이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질문 4)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 때문에 실제적으로 여러 학우들이 학교를 떠난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 : 제가 박수를 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설교자들이 매너리즘에 빠진다면 거기에 도움이 되는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4) 굉장히 좋은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이런 때에는 더욱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목회자는 교인 때문에 목회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제 은퇴를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은퇴를 하고나서 한 없이 허함을 느끼는 것은 안 되지 않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끊임없이 찾고 그리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했던 사도바울처럼 그런 생각이 가장 중심에 서야한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 “나에게는 하나님 이외에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변증할 것도 없습니다.” 똑같이, 그것이 교회든 사람이든 자신의 꿈이든 이상이든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의 존재의 기반이 흔들려버릴 정도가 되는 것은 잘못된 삶을 산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 집사람이 나 하나를 남겨두고 하늘나라에 갈랑말랑 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잘 이겼습니다. 어느 날 우리 집사람을 놓고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보, 이제서야 내가 당신이 죽어도 내 존재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진 것 같아.” 하나님 이외에 감히 너무 사랑했노라,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삶의 뿌리가 흔들린다면 진정한 자기 주체성의 삶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흔들릴 때가 있는데, 어거스틴이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회개의 정신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를 읽고 신학교를 떠난 사람이 제 어림짐작으로 200, 300명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회자 아내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목회의 길을 걷지 않기로 한 자매들도 많이 있는데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질문 5)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90%정도 많은 부분을 동의하고 공감을 했는데, 강의 중에서 철학의 힘에 대해서 저희들에게 도전을 주셨고, 철학이 바탕이 되지 않은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의 위험성을 가르쳐주시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택은 철학적인 바탕이 된 제자들을 먼저 뽑으시지 않고, 철학적인 훈련과 소양이 잘 되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선택하셨어도 사용하셨던 부분을 볼 때에, 오늘날 이 시대에도 철학의 힘을 가진 자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은사가, 혹은 그 능력이 안 되는 분들이 학문적인 철학이 아니라 제자들처럼 삶의 철학, 말씀하신 것처럼 피 뿌림의 도전적인 신앙과 목회적인 삶을 통해 깨달아지는 철학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변 5)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철학을 여러분이 대학 때 수업시간에 들은 철학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박종용 씨가 사상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상이란 그것대로 살고 죽을 수 있는 사상이어야 한다. 그런 지식의 체계여야 한다. 그것이 사상이다.” 예수님께서 철학자들을 뽑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은 불쌍한 자를 구제해라, 병든 자들을 고쳐줘라.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전부라고 생각하면 기독교가 이 세상의 복지정책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은 당신이 오셔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가르침에서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과 인생관을 기본적으로 뒤엎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흐르는 사상을 계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사상의 선구자답게 알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역사에서 보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수에 속한 사람들은, 예를 들면 데포의 신전에서 헤르메스 이런 사람은, 거기서 가스가 나오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헛소리들을 하는데 헤르메스가 그것을 듣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지식의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한쪽 방향으로만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정신병자의 중얼거림 같기도 한데, 그 사람 속에서는 로고스의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천재의 특성입니다. 예를 들어서 천재는 문학을 하는 사람은 “죽음”이라고 하면 문학에서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의학 하는 사람은 생물학적인 죽음을 생각합니다. 미술 하는 사람은 미술에서 죽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생각합니다. 철학자들에게는 이 모든 지평이 한꺼번에 교차를 하면서 죽음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그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바울을 보면 그 사람이 알듯 모를 듯 남겨놓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웅장한 체계로 기독교의 체계를 완성해 낸 것입니다. 웅장한 체계로 만들어 놓은 것들을 상세한 인테리어로 하는 것을 후대의 학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골격을 놓았던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놓았기 때문에 160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 사람의 사상이 도전을 받기는 하지만 부러뜨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특별히 시간과 영혼, 선과 악,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양철학이 그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어거스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비판하는 것도 사실은 어거스틴에게서 배운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셸 푸코 이런 사람들이 어거스틴을 탐독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해체주의자들이 해체하는 방식을 사실은 어거스틴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자기가 어떤 얼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성경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100독하신 것과 대학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고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한 번 성경을 읽은 것 사이에는 비할 수없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은 요술지팡이가 아닙니다.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계시의 빛이 더 보이기도 하고 덜 보이기도 하고 굽어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철학을 하라고 하는 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철학 책들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제가 얘기하는 것은 The way of thinking, 사유하는 방식을 철학자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을 무시한 사람은 없습니다. 현존하는 종교개혁자 중에 마틴 부처라는 사람이 있고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화란에 살아계신데 이 분과 제가 깊은 교제를 갖고 그분이 평생 모은 장서 전체를 나한테 넘겨주셨습니다. 물론 제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것을 도서관으로 들여왔습니다. 그분과 교분이 깊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너무 regid 할 정도로 개혁주의자입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보기에는 너무 편협한 칼빈주의자로 보일 정도로 보수입니다. 그래서 학생 하나가 면전에서 물었습니다. 그 전에 제가 신학적으로 성경읽기라는 것을 작은 팜플렛으로 써서 보내드렸었고 유학 온 학생이 그분께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신학이 철학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너는 김 목사가 쓴 그 책을 봐라. 거기 다 나와 있다. 어떻게 철학을 모르고 신학을 공부할 수가 있느냐?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르고는 철학을 공부할 수가 없지. 꾸준히 공부해라.”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철학의 내용을 많이 알아서 철학을 이야기할 때 교수님과 논쟁할 정도의 실력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플라톤은 어떤 방식으로 사유를 하며 철학을 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플라톤과 다른가, 왜 아리스토텔레스를 먼저 받아들인 이슬람권이 학문에 있어서 기독교권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그래서 결국은 이슬람 철학자를 통해서 기독교의 신학이 꽃 피우게 되었는가, 왜 아직까지도 그것을 결별하지 못하는가, 그런 것들을 고민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마다 그 사람들을 공부해보면 플라톤이 사물을 보면 생각했던 방식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방식이 다르고 윌리엄 오캄이나 쿠자누스가 생각했던 방식이 다르고 오늘날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 같은 사람이 생각했던 사유의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누구에게 매혹되면 안 됩니다. 매혹되지 말고 항상 객관적으로 그것들을 보면서 그 사고방식들을 배우면서 내가 보완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의 안경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과 다양한 안경을 끼고 다양한 각도에서 성경을 보는 사람은 현저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유의 훈련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