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사명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5~17)
녹취자: 김경애
사도 바울이 옥 속에서 쓴 이 편지 중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빌립보 교인들이 무엇 때문에 살고 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죽어야할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빌립보 교인들을 목회하는 사도 바울의 목회 사역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라는 것은 자신이 양떼들을 돌보는 일인데 그 일이 그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이 주님을 깊이 만나야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난 신앙의 경험 속에서 인간이 혹은 신자가 참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 그리고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실 이것이 없으면 그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인턴십을 마치고 이제 일터로 돌아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전에도 주님을 깊이 만났겠지만 그러나 주님을 더 깊이 만나도록 제가 여러분에게 촉구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공부하고 아무리 많은 좋은 목회의 기술을 익혀도 목회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옆에 있다가 온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학문이나 혹은 기술의 습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렇게 할 때 교인들을 위한 목표가 생겨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목회의 목표 즉 목양의 목표에 대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흠이 없는 자녀들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게 하는 것’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가르쳤고, 설교했고, 지금은 그일 때문에 옥 속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 밖에서 발견한 비전입니까? 어디서 이런 목회의 목표를 배웠습니까? 누가 사도 바울에게 이런 것들이 목회의 목표라는 것을 터득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의 목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빌립보 교인들을 이렇게 만들기 전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 그런 자신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그 크고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답하고 살아야하느냐고 할 때 이 시인이 정말 내가 흠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이 시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다. 그런데 그 세대 속에서 나는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빛들로 나타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자신의 목양의 목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흠이 없고 순전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들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골육지친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그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소명의 심장부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제 그렇게 되면 결국 교인들을 어떻게 목양해야할 것인가 하는 목회사역의 목표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 것인가 하는 신앙적이고 개인적인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목표가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가 하나님을 만난 것만큼만 목회를 하는 것이지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혹시 반대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큰 주님의 영광을 보고도 그보다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자꾸 변하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모든 목회의 목표 그리고 목회의 거룩한 고민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누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세 번째로 제시되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학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이라고 그러느냐하면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고 했습니다. 혹은 그 말씀을 붙든다는 것도 희랍어상으로는 말이 되지만 어쨌든 생명의 말씀을 밝혀 그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말씀의 빛이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회자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많은 학문을 공부해도 산더미처럼 많은 책을 가지고 이 설교단에 올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든지 어마어마한 많은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든지 마지막에 들고 올라오는 책은 모두가 한권 성경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 성경을 누가 해석하느냐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되기도 하고 혹은 죽음의 말씀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결국 그 학문을 그 말씀을 올바로 생명력 있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 말씀을 탐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 보아야할 것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이 공부를 해도 그 학문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학문을 모두 치워버린다고 해서 거기서 생명이 생겨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그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올바로 해석되고 권위 있게 가르쳐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한데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거룩하신 주님을 깊이 만나야하고 치열하게 학문을 탐구해서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위대한 의미들을 드러낼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열렬하게 기도하고 발견한 그 진리들을 일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전 방위적인 삶에 적용해서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썼어야합니다. 종종 설교자가 올라가서 성경본문을 펴놓고 자기가 이 문제를 가지고 엄청나게 고민한 것처럼 이야기를 해도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 고민이 그 전날 설교준비를 하면서 겨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숙성된 고민인지 아니면 뭔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지 신앙생활이 허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인 것처럼 과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종교적인 보상심리입니다. 그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 책을 읽다가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면 단지 글자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불붙게 만드는 성령의 보고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어떻게 회심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깐에는 하나님의 부름심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당시의 뉴잉글랜드 미국입니다. 열심히 드나들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열매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데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금방 죽겠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막 떨고 있는데 모라비아파 교도들이 그들은 경건주의 후예들이었는데 거의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조용히 앉아서 평온하게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웨슬리가 자기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깊이 회심하고 우리가 아는 웨슬리가 됩니다. 신학적으로야 동의 안 되는 부분이 많지만 그러나 그분의 설교사역과 헌신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놀라운 회심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마르틴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읽어도 회심하지 않던 사람이 마르틴루터의 주석을 읽으면서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성경 그 자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또 그렇게 공부해야합니다. 무엇을 공부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이때에 자신이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명이 자신의 양떼들에게도 주어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목양의 동기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밝혀’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등불처럼 있는데 설교자 자신이 어두워지는 시간에 등불들이 쭉 있는데 가서 하나씩 불을 붙여서 등불에 불을 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 불러주신 자신을 그 사역에 적합하도록 준비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그러면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말씀의 생명을 충만하게 체험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목회자의 성취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날에 무엇이 자랑이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온전하게 된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때는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더욱 절절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한 목회자의 성취는 큰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목회를 할 뿐이지 큰 교회가 무슨 큰 영광이 되겠습니까? 교회가 커질수록 오만 잡다한 사람들,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변화도 되지 않고 어디선가 숨어있고 그러면서 교회의 덩치를 키우는데 그것이 무슨 영광이겠습니까? 왜 그렇게 교인들이 큰 교회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부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고 또 그 교회가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한들 그 일이 하나님이 못하시는 어떤 일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일 자체가 감동을 드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목회자라는 사람이 교회나 크게 만들고 그 교회나 타고 다니고 권력이나 행사하고 장로들도 마찬가지고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예수 믿은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 마지막 날에는 지푸라기처럼 확 타서 없어질 허무하고 헛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목회의 성취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목회의 성취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지는 못하고 그리고 사회적으로 권세가 있어서 교회에 와서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어도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한 구석에서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저런 사람이구나!’ ‘인간이라면 저렇게 살아야하는구나!’ 오늘 장로님이 기도하실 때 존재의 울림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게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내면 훌륭하게 목회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절대로 이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눈에 띄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사람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이 별로 기억해주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를 붙들고 도우시는 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원래 이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시련도 당하고 고난도 만나고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지나가는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구별하고 사라질 존재이면서도 영원한 존재인 것처럼, 없어질 것이면서도 영원히 있는 것인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누리는 그것이 허무입니다. 박막을 살다가 없어질 존재가 사실은 있지도 않은 것을 진짜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그 자체는 허무한 것을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은 모두 물위에 떠있는 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누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예증으로써의 삶도 아니고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가는데 이런 사람인 것이 하나님 앞에 늘 죄송해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우리 교회에 헤릿 이밍크 박사가 와서 칼빈 신학교 총장이었는데 와서 말씀을 전하고 잠깐 만나서 같이 교제를 나누었는데 거룩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거룩함이 무엇이냐?’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신자의 반응에 대한 핵심을 요약하자면 영어로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Thanks for what God is. Sorry for I am.'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하고 'Thanks for what God is.' 나 자신이 이런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 한없이 죄송한 'Sorry for I am.' 이것이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거기서 모든 순종, 그리고 복종, 자기 부인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10주 동안 숙제도 지독하게 많이 내주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것은 여러분에게 그저 한 길을 보여준 것이고 이제는 누가 여러분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