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경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녹취자: 정유선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북왕국과 남왕국이 나누어지고 나서 아마 가장 탁월한 군주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형편은 매우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살다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때가 온다, 그렇게 징계를 받는 때가 되면 그때야 너희들이 후회하면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며” 할 때가 온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제사장들의 나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사실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나오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오는 그 구절에 대한 울림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중요한 말씀을 주시는데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더 이상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그것이었습니다. 히브리말로 ‘다트’라고 하는 것이지요. ‘야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냥 지식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지식이 무엇인지는 구약 전체를 보면 아주 명료해집니다. 그게 뭐냐면 ‘다트 엘로힘’입니다.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알자, 알자, 알자” 이렇게 동사가 나오는데 사실 이 단어가 맨 먼저 쓰인 것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이 하와와 알다”라고 하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뭘 보여주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구별하는 가장 중심에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지식을 결국은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어주실 텐데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본질적인 차원과 현상적인 차원에서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면서 어려운 신학의 난제들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시간과 공간의 문제와 관련이 돼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영원 전에 작정하시는 하나님이시면 시간 속에서 그걸 전개할 때 인간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사람들이 늘 흔히 품는 의문 같은 것들 있잖습니까? 이런 것들을 잘 풀지 못할 때 전통적인 신학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고 다니는데 어쨌든 그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에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식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 이 지식이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지식을 버릴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 지식을 간직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보면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서구에서 지식과 삶이나 이런 것들을 구분하는 이런 것들이 사실은 히브리적인 사유가 아닙니다. 희랍의 분석적 사고이지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합니다. ‘안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는 것입니다. 브로마이드를 제작해서 주민등록번호부터 시작해서 출신학교와 취미사항 모두 연예인의 것을 외운다고 해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되어서 같이 잠자리를 하고 살아보면 그것이 이제 진정으로 아는 거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히브리에 가면 처녀들은 절대 남자를 안다고 할 때 이렇게 말을 못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는 발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전존재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은 지식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신앙과 삶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배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파고들어가서 성경신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채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예증으로서 드는 것입니다.
똑같이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미 우리에게 받은바 소명이 있을 것이고 또 받은바 소명의 체험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 소명을 어떻게 유지하며 사느냐고 하는 것은 그것과 관련은 있지만 또 다른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신비하게 소명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목회자가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 사랑해서 신학공부 한다는 사람이 미국 와서 실컷 공부시켜놓으니까 마지막에 결국은 박사과정 하다가 신앙 집어치워버리고 결국 무신론자가 될 수 있을까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원래부터 그 사람이 주님을 믿었다는 것이 가짜일 수도 있고 소명을 체험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과 함께 우리들이 고려해야 될 것은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우리의 가슴 속에서 계속 유지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소명의 유지 문제를 오늘 아침에 잠깐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는 내내 이 소명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모든 사역과 섬김의 기본적인 동기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도 일이니까 한참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고 익숙해지게 됩니다. 신학도 공부니까 하다가 보면 식견도 넓어지고 공부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대화를 해보면 우습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목회를 하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목회의 성과를 보여주려고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신학 공부하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처음의 동기를 돌아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해주신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경험, 그것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트 엘로힘’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몇 년 전에 와서 갈라디아서 6장을 특강을 하면서 잠깐 다루었던 문제인데 이것은 제가 이것들에 대한 신학을 스스로 연구하면서 터득하게 됐을 때 그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제임스 패커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참고가 됐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발견하고 수십 년 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고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틀이 되었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이야기가 왜 신약에 와서는 싹 사라질까요? 사라지고 오히려 부정적으로 쓰이거나 소극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저희에게 있으나” 이렇게요.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서 커다란 신학적인, 소위 얘기하는 'conversion',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코발리타스테이’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지식, 두 번째는 ‘모드소페란디’ 하나님의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부 다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지식, 두 번째는 ‘모드소페란디’,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계화의 관계 속에서 실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 이외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몰두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가, 그 다음에 하나님의 속성이 이 세계화의 관계 속에서 특히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는가에 대한 지식,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코아, 핵심입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마침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중요성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에 와서 획기적인 'conversion'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제가 붙인 이름인데 'Christlogical conversion', 기독론적인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무슨 뜻이냐면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전달해주는 가장 훌륭한 매개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는가 하는 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오면서 'Christlogical conversion'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게 뭐냐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화육하셔서 그래서 그분이 하신 일이 바로 보이지 않고 듣기만 하던 하나님의 성품을 당신의 인격과 사랑 안에서 visible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그것들이 어떻게 시행되는가 하는 것을 당신의 삶 전체로써, 인격과 삶과 행동으로써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을 담지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햇살처럼 강력하게 퍼져나가니까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특별히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것과 연관 지어지는 그의 성육신의 인격과 지상 생애를 통해서 그 찬란한 하나님의 성품과 빛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론의 중요성이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 프리즘 아시잖아요? 과학 시간에 쓰는 광학 프리즘. 이 프리즘에 빛이 통과합니다. 이 빛은 색깔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빛이 통과되면 일곱 가지로 파장의 크기에 따라서, 길이에 따라서 일곱 가지로 분광이 일어납니다. 스펙트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쪽에 있는 태양을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의 존재라고 한다면 그 존재가 인간들과의 관계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과할 때 여기에서 일곱 가지로 분광이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코발리타스’ 혹은 'attribute', ‘속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속성이 강한 방식으로 인간 속에서 시행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찬란한 계시의 빛이 있는 것입니다. 설명하면 굉장히 긴 이야기지만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의 방식에 관한 앎을 갖게 되면 이것은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객관적인 지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라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되면 그것은 지금 자기가 이 땅에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과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을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ledge of God'이라는 이야기가 거의 안 나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로 환치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우리의 삶에 인도가 되어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안정된, 단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피에타스’,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스켈티야’, 하나님을 위한 학문이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학의 임무이고 우리의 목회사역의 전체는 결국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평신도들에 비해 아주 우월하게 가지고 있는 탁월한 사람이 일평생 예수님이 당신의 존재와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듯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일평생 그 빛을 나누어 주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그게 목회입니다. 이게 빠져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종교적인 비즈니스밖에는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중심이 안 되면, 목회가 잘 되면 교만해집니다. 교인 200명만 모여도 누구에게 배우려고 들질 않습니다. 강사로라도 불러야지 오지 안 옵니다. 안되면 굉장히 자존감이 없고 그럽니다. 그래야 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칼빈을 이야기하지만 제네바에서 칼빈이 마나오피치 천명을 모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칼빈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루터가 어느 교회에서 목회하고 몇 명이나 교인을 모았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그런 세세한 비즈니스의 업적 때문에 우리들이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울려 퍼지는, 소위 이야기하는 존재적인 울림 그것 때문에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아주 엄격하고 엄정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럼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네비게이션을 찍으면 길이 쫙 나오잖습니까? 할 수 있으면 그 길을 계속 따라가려고 할 때 목적지에 도달하지 다른 데로 아무 생각 없이 가는데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만 나오지요. 우트레히트 대학의 교수로서 영국 청교도의 영향을 받았고 역사적으로 화란에 소위 이야기하는 ‘나델포르마티에’라고 하는 제2의 종교개혁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푸치우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대단한 학문의 소유자입니다. 아주 엄청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소위 이야기하는 ‘프리시저니즘’이라는 삶의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이 분이 캠브리지에서 잠시 강의를 하는데 화란에서 신앙이 계속 침체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 청교도 신앙이 탁월하게 꽃피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소위 얘기하는 프리시저니즘, 엄격주의라는 것을 도입을 하게 됩니다. 몇 구절 읽어 볼테니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가 쓴 ‘데 프라이시다테 아드일러스트룸’이라는 책제목인데 <모본에 이르는 엄격함에 관하여> 라는 논문입니다. 17세기 때 논문인데 이런 얘기를 합니다.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오직 엄정함, 곧 엄격함만을 말하는데 이는 인간 행동의 정확함 혹은 완전함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교훈에 일치하고 진정한 실신함으로 받아들여지고 의도되어지고 감동을 받은 엄격함입니다.” 한 구절 더 들어보십시오. 왜 이렇게 신앙에 있어서 엄격한 삶을 살아야 되느냐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그 모든 엄정성의 근원이시고 유효인이신데 그분은 거룩하시며 완전하시며 정확하고 순결한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신다.” 둘째로, 이 부분은 다른 책입니다. 이 책은 <논지의 집>이라고 하는 곳에 나오는 겁니다. 뭐라고 나오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단일하고 유일한 엄정함의 기준이다. 거기로부터 그의 양식 혹은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율법과의 합치와 일치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한다. 만약 이런 일치의 매듭을 건너뛴다면 많은 것들은 신앙에 있어서 지지되어야 할 것들이 검증되지도 못한 채 의심만 남을 것이다.” 우리들이 누가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상은 할 수만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성령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정신을 유지하며 사는 가운데 우리의 소명의 현재적인 유지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를 이야기 할 때, 여러분 가운데 개혁주의 아니신 분도 있으니까 개혁주의 이야기하기 전에 복음주의를 먼저 이야기하면 오늘날 복음주의는 사실은 견해가 둘로 나뉘어지는데 개혁주의가 뿌리라고 주장하는 조지 마스턴 같은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많은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뿌리는 개혁주의와는 좀 다른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한국의 복음주의는 사실은 유럽에 있는 복음주의와는 거의 상관이 없고 미국의 복음주의와 영향이 있는데, 미국의 복음주의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뿌리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 프린스턴을 비롯해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화란 개혁주의의 뿌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제 들었던 세 사람의 20세기의 칼빈주의자들이 모두 화란사람들입니다. 루스베리컵 조차도 태생이 화란사람입니다. 그런 개혁주의가 뿌리가 된 게 있고 그 다음에는 미국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게 바로 18세기에 일어났던 조나단 에드워즈, 그 다음에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에 일어났던 복음주의적인 운동, 부흥운동입니다. 거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탁월하고 건전한 인물도 있지만 찰스 빈이나 이어지는 디엘 무디나 이런 사람들처럼 신학적인 기반이 의심스럽거나 확고하지 않은 이런 부흥주의까지도 같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그 두 개의 뿌리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놓고 볼 때에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을, 복음주의를 선택하든 엄격한 개혁주의를 선택하든 간에 우리가 공부해야 될 것은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뿌리를 제대로 공부해야 되는 것이 첫 번째고 왜냐하면 어차피 개혁주의를 선택하든지 복음주의를 선택하든지 공통적인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어떻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뿌리가 되는 부흥주의가 일어났는가 라고 하는 것, 그것들이 어떻게 미국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정확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오늘 우리가 어떻게 신학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고 하는 독자적인 판단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결론은 각자 다르게 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굉장히 필요하다 이 얘기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개혁주의의 목회의 정통이라고 하면 그것은 뭐냐 하면 목회자는 18세기 때까지만 해도 탁월한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것은 수능점수가 안 나오는 학생들이 의대에 가겠다고 하는 것이랑 거의 비슷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부흥주의가 맨 처음 조지 위필드 같은 사람들이 미국에 집회를 다니면서 벌써 그런 문제들을 사실은 만들어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얘기하는 subjective impulse라고 그래서 조지 위필드가 주관적인 충동을 강력히 믿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점에서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신실한 사람들조차도 이미 벌써 신학에 있어서 아주 자유로운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많은 문제를 나중에 양산합니다. 소위 얘기하는 street preaching이라고 해서 길거리에서 성령 받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고 해서 성직과 평신도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그것을 또 많은 사람들이 wonderful freedom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누구든지 성령 받으면 목회할 수 있다는 식의 것들이 이제 양산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게 벌써 18세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19세기, 20세기에 와서 디엘 무디 운동이나 이런 것들로 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운동과 같은 것들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은 잘못된 것들이고 원래 개혁주의의 전통은 탁월한 지성인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지혜를 복음을 통해서 발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까지 이런 전통들이 내려오는데 1929년 이전에 올드 프린스턴을 보면 걸출한 신학자들의 명단과 미국에서 영향을 끼치던 목회자들 혹은 설교자들의 명단이 일치합니다. 탁월한 설교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 글을 통해서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 같은 것들이 많이 비판을 받고 하지만 그러나 저는 많이 생각이 다른 게 영국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런 것을 외쳐야 할 때의 상황과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상황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좀더 조심스런 평가를 내려야 합니다. 올드 프린스턴에 있는 벤자민 워필드 같은 사람의 책을 읽어보면 학문적으로도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고 그 분이 만약에 사모님만 아프지 않았지만 -일평생을 4시간 이상 사모님 옆을 비우지 않았답니다.- 더 큰 영향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평생을 그렇게 사시면서도 엄청난 양의 저작을 남겼고 그의 설교를 읽어 보면 우리가 알고 있었던 워필드에 대한 인상을 지워주기에 충분합니다. 아주 영향력 있는 강력한 설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설교라는 행위 자체가 신학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상이 전부 다 빠지거나 삭제된 가운데 성경을 한 구절 읽고 그 다음에 이런 식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피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 성경신학계에서도 많은 반성을 하고 있지만 20세기는 사실은 성경신학이 꽃피는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신학이 꽃 핀 것은 사실은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20세기에서 활짝 꽃이 핍니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성경신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던 성경의 다양한 쉐이드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었다는 면은 긍적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너무 신학적인 중심성이 없이 자의적으로 성경신학이 흘러가게 되니까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내게 되는 겁니다. 최근에 김세윤 교수님의 케이스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는 김세윤 교수님을 굉장히 좋아했고 거의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원서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최근에 책을 한 권 쓰셨는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칭의와 성화>인데 구원이 취소 될 수 있다고 간단하게 얘기하고 끝납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증거를 쭉 드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안 됩니다. 개혁주의권 내에서 구원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학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학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자기가 어느 한 분야에 성공할 때 사실은 한 분야의 연구의 결과가 어떻게 소통을 해야 되는가 하는 중요성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설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사상을 설교하는 것인데 사상은 무슨 사상을 설교하는 거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게 신학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뷰티가 가장 찬란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하나님에 대한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아름다운 겁니다. 신학이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두 번째, 신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당신의 성품을 시간과 역사라고 하는 공간 속에서 연출해내면서 찬란한 그 아름다움이 투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심미자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년 됐나, 미국에 갔을 때 저는 기회가 되면 학자들을 만나서 배우는 게 저의 취미인데 마침 그랜드 래피지에 갔더니 조지 마스턴 교수가 거기 와서 은퇴하고 강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서 한번 좀 배알해라 그랬더니 잘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김남준 목사가 연구한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아는 게 별로 없지만. 강가에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두세 시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유의지론>을 읽으면서 의지의 결정론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요하게 질문을 해서 괴롭혀 드렸는데 아주 너그럽게 경청하면서 때로는 듣기만 하시고 때로는 답변을 주시고 그리고 나서 목회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점에서 보면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심미하면서 그런 아름다운 하나님을 심미하면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목회다 그렇게 말씀드렸을 때 아주 기쁘게 동의하면서 몇 말씀을 보태셨습니다. 그 분이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아주 가볍기 짝이 없는 피상성이 문제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와 사역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래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신학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신학자들은 이렇게 남이 한 학문의 결과를 연구하다가 위대한 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겁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찬란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후 정말 많은 세월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보냈습니다. 내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사실은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난 존재적인 초월성과 모든 인간들 위에 뛰어난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신학은 참 예쁘다, 신학이 참 예쁜 이유는 예쁜 하나님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저의 글을 보거나 많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묻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도 정말 바쁠 텐데, 진짜 바쁩니다. 제가 교회가 좀 자그마할 때는 집필 여행도 가고 좀 여유가 있었지만, 너무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이렇게 보내도 되나 하고 낙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도 해보셔서 알지만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안 하고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교회를 이끌어가면서 바쁠 텐데 어떻게 그렇게 공부할 시간이 납니까 그러는데 결론은 이겁니다. 좋아하는 것은 다 시간이 있습니다. 그게 하기 싫어서 그렇지 좋아하는 것은 다 시간이 납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 한 사람이 한 15년 전에 있었는데 교역자의 시간에 자기가 얼마나 바쁜지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오줌 눌 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두 부부가 영화관에서 만났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할 시간이 많다 이겁니다. 나에게 있어서 신학은 그런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안 납니다. 그렇지만 좋아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나의 부족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목회도 하고 공부도 했으니까 이젠 목회에 대해서는 뭔가 관록도 생기고 신학을 하는 데서도 판단이 아주 뛰어나고 설교를 하러 올라가면, 제가 개척하기 전에 설교한 것까지 포함해서 여태까지 오천사백 몇 편을 설교했다고 통계가 나왔는데 전부 텍스트로 풀려져 있습니다. 오천사백 편을 설교를 했으면 하다못해 뭘 해도 이제는 관록이 있어서 내가 설교하러 올라가면 회중을 꽉 잡았다 그런 게 있어야 되잖습니까? 그런데 전혀 없습니다. 요즘은 설교 준비하는 데 개척할 때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립니다. 그걸 보면서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목회는 언제나 원치 않는 가슴앓이이고 설교는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 이국의 언어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책을 다 읽지도 않고도 그 저자를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런데 난 잘 안됩니다. 난 내가 읽는 책의 대부분이 그 사람이 나보다는 다 나은 것 같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 있으면 책을 별로 읽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놀라운 속도로 책을 읽으면서 번뜩번뜩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참 좌절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천재도 아니고 남다른 탁월한 지적인 능력도 없으니 나 자신의 능력과 그들의 격차를 인정함으로 감사를 잃어버리지 말고 꾸준히 게으르지 말게 살다가 죽자 이렇게 단순할 예정입니다. 어제 잠깐 말씀드렸지만 고행록을 읽으면서 그때 병원 입원했을 때 읽었는데 병원에 입원하면서 몸이 아픈 것보다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이것 보면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나?” 이 사람 이렇게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사실은 이 분이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믿기 전에도 탁월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나는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의 글을 스스로 통달했고 제가 배운 지식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은 어느 동네에 가서 지식이 아주 뛰어나다는 사람을 불러놓고 내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 해주면 내가 가르쳐주는 이야기들을 겨우겨우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걸 보고 너무 좌절이 되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 사람은 이렇게 해 주시고 나는 읽어도 겨우 이해될까 말까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한 6개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시지는 않으셨는데 내 마음이 이러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어거스틴은 너와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종이란다.” 나는 그의 지성의 능력을 부러워했지만 하나님은 정신의 크기만이 아니라 삶의 순결과 사랑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저 네 처지에 만족하라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은 우리 집사람이 포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 많이 싸운 게 신학교 다닐 때는 책사는 것 때문에 싸웠고 요즘에는 책 사는 것 때문에는 안 싸웁니다. 내가 생활비 가져다 책 사는 사람 아니니까요. 그런데 뭐냐면 공부하지 말라고 싸웁니다. 2년 전이었습니다. 주일날 방송 5번을 설교합니다. 그러면 한 5시간 내지 길면 7시간 합니다. 그러고 밤새도록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은 공부하러 나오는 날입니다. 새벽에 가방을 매고 교회 연구실로 가는데 아내가 붙드는 것입니다. 인상을 팍 쓰고 “여보, 제발 오늘은 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요. 그만큼 공부했으면 이제 죽을 때까지 안하고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해도 오히려 설교 듣기가 버거우니까 이제 그만해라.” 그래서 “여보, 이렇게 연구 안하고 설교하면 설교가 너무 쉽다고 그러지 않을까?” “당신은 뭘 설교해도 어려우니까 괜찮다.” 그래서 내가 그때 얘기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야. 내가 누구냐면 매일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 저 막장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그걸 캐가지고 올라와서 그것을 갖다가 불을 때는 광부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도 가서 공부를 해서 캐가지고 올라와서 다음 주일이면 매 주일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불을 때서 나누어주는 그런 사람이다. 가진 게 많이 있어서 공부 안하고 울궈먹을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내는 현관을 나서는 나의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지 아십니까?
두 번째 신학공부를 하는 이유는 신학이 예쁘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예쁜 것은 사랑의 원인입니다. 예쁘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서가에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울었는데 이제는 책 살 돈은 있습니다. 책은 샀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참 안타까운 겁니다. 보면 여러 책들이 있습니다. 한 7~8년 전부터는 생각이 바뀌어서 서재를 나 혼자 쓰다가 어디로 처분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5만권입니다. 모으는 데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어갔는데 이것을 잘 모아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책을 내가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사게 됩니다. 거기 보면 1881년부터 1972년까지 살았던 여러분 아실지 모르겠는데 화란의 신학자 흐로샤이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석가로도 유명한데 그 사람의 책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나온 책까지 있습니다. 서재에 들어가면 책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뭐라고 그러냐면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흐로샤이데 같은 유명한 신학자의 서가에 오랜 세월 지내다가 내 서재에 이사 온 책들도 있습니다. 제가 서재에 들어설라치면 서가에 있는 수많은 책들이 제게 말을 걸어온답니다. 목사님 저도 사랑해주세요. 내 얼굴도 좀 봐주세요. 저도 좀 읽어주세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책들의 속삭임이 소란스럽거나 귀찮게 느낀 적은 없습니다. 모두 읽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가끔 서가에 들어가면 한심한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읽을 책이 많은데 이러고 사나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이 아니면 지킬 영혼이 없습니다. 영혼을 위해 봉사한다 그러는데 뭘 위해서 봉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영혼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이것이 목회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를 못 느끼는 사람이 영혼을 어떻게 돌봐주어야 되겠다고 하는 감각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서 깊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려는 탐미의 정신이 그것이 신학을 끊임없이 공부하게 하는 그런 동력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신학이 어떻게 모든 분과가 통합을 이루는지를 경험했고 40대 후반이 지나서 50세쯤 되었을 때야 모든 이 세상의 학문이 어떻게 상호 연관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영적인 경험이었고 우주를 향해 눈을 뜨는 정신적인 개안이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50세쯤 됐던 때였는데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50세에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를 로이드 존스 목사님한테 배웠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50세에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는데 저도 그때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이니까 하여튼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깊이 나를 만나주시든지 죽여버리시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달라고. 나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티끌만큼도 아름답게 하지 못하고 산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너무나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것을 사다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괴로울 때면 예배당을 자주 찾았습니다. 거기서 주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회심 때 그리고 그 후에 주님을 깊이 만났던 때를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구하며 50이 넘기 전에 한번만 저를 만나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몰두하니까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말 주님을 한번 깊이 만날 수 있을까 할 때 그때 제 마음에 위로를 주던 것이 어거스틴의 저작들이었습니다. 그 저작들을 탐독하면서 깊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주님을 깊이 만나는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그렇게 어거스틴에 깊이 심취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눈이 뜨여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두운 하늘로만 여겨지던 우주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성경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는데 성경이 정수이기는 하지만 다는 아닙니다. 희미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들이 파문처럼 퍼져나간 곳에 여기에 예술, 학문, 사상 심지어 이교도의 종교철학까지도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관계를 갖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요것과 끊어진 상태에서 이것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진리를 알고 이것들을 모두 통일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 겁니다. 가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체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정말 너무 창피했습니다. 신학에서 사실은 풀 수 없었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그런 천문학에서 발견하면서 학문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자각을 얻게 된 것이 하나의 큰 소득이었습니다. 실제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 과학이 사실은 알지만 해석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은 사실은 과학자들의 몫이 아니라 신학자들의 몫입니다. 그런 것들을 알 때 신학의 지식이 굉장히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고 정말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구나, 성경 안에서만 아름다우신 분이 아니라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서 아름다우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학을 할 때 너무너무 중요한 것은 진실한 신앙으로 신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가 비옥해지기 위해서는 이런 진실한 신앙으로 신학을 하는 것이 목회를 하는 시간 내내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하면서 더 이상 공부를 안 합니다. 그런가하면 목회와 아무 관계가 없는 방식으로 공부를 해서 그 사람들 공부가 목회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가 되게 되는 그런 것들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진실한 신앙으로 신학을 하기 위해 너무너무 중요한 좋은 신학함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진리에 부합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개혁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그리고 신앙적인 관심사와 완전히 이탈해버린 신학적인 공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심하면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신앙을 죽이면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결국은 덕스러운 삶을 살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신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냐?”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내가 반문했습니다. “너 전도하니?” “아니오.” 그래서 “훌륭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너가 앞으로 목양할 교인들이 이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그 삶을 너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거다.” 소위 개혁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이런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전도해야 된다 그러면 전도 잘하는 사람 불러다가 간증 듣고, 기도 열심히 해야 된다 그러면 기도 많이 하는 사람 불러다가 간증 하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같은 일기 한번 읽고 끝내고, 그리고 설교 잘해야 된다 그러면 위대한 설교자들 이야기 듣고 감동을 받으면서 무용담 듣는 것처럼 끝내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는 진리가 단지 지성의 창고에 쌓이는 수확물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제일 먼저 적용이 되어서 자신을 그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탐구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강의한 것 같은데 4년 전인가 5년 전에 왔을 때 ‘일평생 설교하지 않는 법’ 강의 했잖습니까? 기억납니까? ‘일평생 설교하지 않는 법’ 궁금하시면 나중에 들어와서 보십시오. 뭐냐면 설교를 하기 위해서 성경을 대한다기보다는 자신이 그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적용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항상 설교가 풍부합니다. 20년 넘게 열린 교회를 목회 해 왔으니까 이제는 얘기해도 된다고 보는데 물론 마음이 너무 건조해지고 뭘 설교해야 되나 이런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 설교해야 할 내용이 설교할 기회보다 항상 많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기도하면서도 주어졌지만 성경을 읽으면서도 주어지고 매우 어려운 현대의 신학적인 논의들을 공부하면서도 나는 설교의 재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되 자신에게 적용할 때에 거기에서 많은 설교할 내용들이 나오는 겁니다. 어거스틴이 남긴 유명한 글귀입니다. ‘모드스 비벤디 코피야도켄디, 삶의 방식에 가르침의 풍부함이 달려있다.’ 어떤 식으로 사는가에 의해서 가르침의 양이 결정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요즘에 은혜를 많이 받아서 기도에 꽂혔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즐겁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헌신이 됐습니다. 그때 설교할 때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면 가르침이 풍부해지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불쌍히 여기는 것에 감동을 받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삽니다. 그러면 도켄디가 풍부해집니다. 풍부해지면서 나오는 겁니다. 그것도 사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과 신학이 질료와 형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설교가 빈약한 이유는 형상은 많은데 질료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제대로 된 신앙과 신학의 관계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제빵사가 빵을 만듭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영국 최고의 제빵사입니다. 수백수천 가지의 빵을 만들어 온 사람이고 세계 최고의 제빵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빵에 대한 아이디어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질료가 필요합니다. 반죽도 필요하고 거기에 들어갈 속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많습니다, 형상이. 그런데 갖다놓은 게 아주 허접한 밀가루이고 팥도 없고 설탕도 없습니다. 그걸로 만들라 그러면 제대로 된 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학은 형상을 부여하지만 이 풍부한 신학을 기다리고 있는 질료는 신앙에서 생겨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네. 성령강림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지. 죽어도 해야 돼. 할 수밖에 없어.” 그러면 성령강림에 관한 주제를 여기저기서 찾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신앙의 질료가 마련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강림 주일이 오는 것을 생각하면서 묵상을 하면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의 성령의 강림사건을 생각하면서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질료가 풍부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질료가 풍부해져도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맛대가리가 없는 빵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개가 항상 목회자의 인격 속에 균형을 이루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내가 강연을 하면 공부에 도전을 많이 받고 공부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목회가 그렇게 갑자기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전인적으로 같이 추구해가야 됩니다. 뜨거운 신앙과 차가운 신학적인 지식,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져서 질료는 신앙을 통해서 계속 마련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목회를 풍부하게 하는 비결은 목사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그러면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대설교자나 신학적 설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항상 뜨겁고 성도들이 받는바 은혜가 있습니다. 좀 어눌해도.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이 신앙생활을 잘 못하게 되고 그런데다 신학지식도 훌륭하지 않고 그러면 목장이 아주 거칠어지는 목장이 나오고 거기서 양들이 아니라 염소가 양산이 됩니다. 이 교회 못 다니겠다고 막 몸부림치는 성도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속에서. 다 나쁜 놈들이 아니라 뭔가 그럴 수밖에 없는 뭐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는 일들이 계속해서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예수의 흔적을 갖는 겁니다. 이건 이미 제가 강연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하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데 나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몸에 나는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표 가지고 자랑하는데 너희는 거기에 흔적이 있냐, 우리는 여기에 얻어맞은 흔적이 있다, 그렇게 얘기를 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영적인 해석으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이 모든 길이, 과정이 구도자로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과 일치를 이루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진정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진지한 설교청취자였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개인적으로 간절한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뜨거운 기도인도자, 열심 있는 전도자였던 적이 없는 파송된 선교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 적이 없는 당회자, 이런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예배인도, 설교, 기도인도, 선교사역 이런 것들은 자기 신앙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자기가 그 위치에서 그것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목회자는 과욕의 의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의 요람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배자였던 사람이 정말 예배인도자가 될 수 있고 설교를 잘 청취하는 탁월한 청취자가 신뢰할 수 있는 설교자입니다. 목회자는 많은 공부를 해야 되지만 그러나 책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의 사람이 돼야 됩니다. 성경입니다. 신학교 다니는 시절에 목회를 하면서 우리들이 많은 책들을 읽고 열심히 탐구해야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심에 와야 되는 것은 철저하게 성경이어야 됩니다.
(예화) 옛날에 우리 가르쳤던 김희보 교수님 마지막에 저랑 한 두어 번 만나고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시고 하늘나라 가셨는데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분도 사모님이 책좀 그만보라고 같이 텔레비전 보자고 맨날 그러셨는데 그렇게 책을 보다가 책을 얼굴에다 덮고 주무신답니다. 사모님이 제발 이러지 말라고, 이제 이 나이에. 그러면 목사님이 그러셨답니다. “여보, 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 권을 쓸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이 분은 그렇게 책 많이 보시고 그래도 성경과 함숙하셨습니다. 그래서 채플 시간에 항상 두 손으로 성경을 딱 받들고 원고도 없이 설교를 하시고 소리 지르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채플 시간에 학생들이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렇게 성경을 사랑해야 된다.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인격을 가져야 됩니다.
(예화) 여러해 전에 벌써 한 5~6년 됐나, 집회를 갔는데 거기서 제가 조교로 있었던 스승님을 뵀습니다. 이상근 박사님. 집회 끝나니까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보여주랴, 아니면 디즈니랜드를 보여주랴 그래서 그런 것 다 필요 없고 우리 선생님이 여기 계시다는데 한번 찾아봐다오, 그랬더니 15평 아파트에서 혼자 사십니다. 몸이 불편하셔서 뭔가 이렇게 집고 간신히 다니셨습니다. 그때 그분 연세가 구십 넷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년 전까지 차를 몰고 다니셨답니다. 92세까지. 목사가 조직신학 책을 썼구나 하고 좋아하셨습니다. 집안을 둘러보는데 집안은 지저분하고 목사님 혼자 목발도 아닌 쇠처럼 생긴 것을 밀고 다니면서 사시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같았습니다. 7년 전에 하늘나라 가셨는데 잊을 없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혼자 누워서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그걸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평생 신학 공부하면서 살아왔다고 하지만 저분처럼 됐을 때,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애들도 다 따로 살고 교회는 은퇴를 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구십 넷이면 칠십에 은퇴해도 24년 지났으니까 교인들은 이름도 모를 것 아닙니까? 그런 할아버지는. 그렇게 혼자 이십 평생을 지저분한 아파트에서 초라하게 살면서도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뭐 혼자 있나? 우리 예수님하고 늘 같이 있는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목회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에 남는 것은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번에도 오면서 책을 한 권 마무리하고 왔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명해지는 것은 별 관심 없고 정말 마지막에 간절히 남아있는 소원이 있다면, 이제 한 10년 있으면 은퇴를 하잖습니까? 마음먹으면 내년이라도 할 수 있고. 언젠가는 은퇴를 하고 오늘이 김남준 목사님 고별 설교하는 날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마지막에 펼칠 때 마지막 설교인데 30년 동안 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성경 본문을 사회자가 낭독할 때에 설교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되는 것. 두 번째는 살아온 날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 날이 되고 살아갈 날들 중에서는 가장 적게 그리스도를 사랑한 날이 그날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마지막에 다 사라져가고 내 일평생 신학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추구했던 나 자신 그 이외에 아무것도 남는 게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얽어갈 때 거기에 위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