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백지영, 조원정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되어주신다고 한 시인은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 2절부터 5절까지 그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였습니다. 2절에서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목자이신 줄 알았다면, 3절에서는 죽었던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 구원의 경험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부르게 되었고, 5절에서는 이 모든 것보다도 더 놀라운 은혜, 즉 가슴 벅차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목자이신 줄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밤하늘에 불꽃놀이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불꽃을 대포로 탕 쏘면 희미한 빛을 그리면서 저 높이 하늘을 오르게 되고 정점에 도달해서 확 터지면서 화려한 불꽃이 장식됩니다. 오늘 23편 이 시편에서 5절은 그렇게 작렬하는 불꽃의 폭발과 같은 지점입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당시의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해 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사람들이 모두 모여 축하하고 주인은 자신의 집에 마련해 두었던 아주 품질이 좋은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내어 놓고 그 잔은 포도주로 가득 차고 사람들이 술잔과 술잔을 맞부딪치며 흥겨워하고 있는 잔치집의 문맥이 바로 이 5절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의 빈 잔을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잔치 집에 있었던 술잔을 빌어서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으로 묘사를 하면서 그 영혼의 빈 잔, 마음의 빈 잔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은 기쁨과 환희, 감격이 충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마음에 이렇게 빈 잔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혼의 빈 잔인데, 이 영혼의 빈 잔은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혼의 빈 잔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거룩한 기쁨, 영광스러운 소망 이런 것들로만 채워질 수 있는 영혼의 빈 잔입니다. 이것을 사람이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모든 인간에게 이런 영혼의 빈 잔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이 잔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서 이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영혼의 빈 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 있고, 먹을 것 있고, 따뜻한 집이 있으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고민이 없었는데, 철이 들고 나이가 먹게 되면 먹을 것 있고 입을 것 있고 가족들이 다 있어도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채워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인생의 시기마다 각각 다른 것들로 이 영혼의 빈 잔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품을 떠나 이제 친구라는 세계를 알게 되면 아이들이 놀이에 빠지게 됩니다. 재미있게 놀 수만 있으면 그것이 자신의 허무한 마음을 가득 채워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춘기가 지나서 아이들이 젊은 나이가 되면 쾌락을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좀 더 나이가 들게 되면 결혼도 하고 이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게 됩니다. 아마도 내가 느끼는 이 영혼의 허무함은 성공을 못해서 그런 것이니 성공하면 이 마음의 허무함들이 가득 채워지고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시집 장가가서 살아보니까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지고, 그 다음에는 아이들이 올망졸망 태어납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고 자기는 굶어도 이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 아이들을 통해서 이루어보려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투사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아이들이 다 자라서 시집가고 장가갈 나이쯤 되면 그 다음에는 이제 돈이 최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재산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성공도,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도 어차피 올라갈 수 없으니까 돈이나 열심히 모아서 그래서 이 아이들을 남부럽지 않게 시집 장가보내고 우리 노후도 안정적으로 보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시집 장가가면 아이들을 태어납니다. 그러면 이제 아들, 딸들이 와서 직장 생활하겠다고 아이들을 맡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너무 싫고 귀찮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만 둘 수가 없는 것이 한 푼이라도 벌어먹고 살겠다는 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한 달, 두 달 데리고 있어 보니까 보통 귀여운 게 아닙니다. 엄마 아빠는 찾지도 않고 어디 갔다 오면 할머니, 할아버지 그러면서 곰살스럽게 안기고 뽀뽀하는데 옛날에 자기 자식보다 더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리고 정을 붙여서 이제는 자식 기르는 재미보다도 손주 기르는 재미에 빠져서 이 아이들이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다면 난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속 썩이고 말 안 듣는 아들 딸 생각하다가 얼마 남지 않은 유산이지만 손주 녀석들한테 물려줄까 하는 유혹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 아이들이 6학년 될 때까지입니다. 6학년 되고 나면 할머니 저리 가, 할아버지 오지 마 냄새 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엄마 아빠도 별로 필요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귀찮고, 자기끼리 놀 수 있는 재미난 세계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허무한 것입니다. 찾아오는 자식도 없고, 유산이라도 몇 백억 가지고 있으면 아마 일주일에 한번 씩 아들 딸 사위들이 불났게 들고 서로 모시겠다고 그러고 생일은 우리 집에서 하라고 난리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몇 백 억은커녕, 조그만 것 하나 세 들어 살면서 연금이나 받아서 근근덕신 삽니다. 그러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때그때마다 그것이 최고인 줄 알고 목숨 걸고 그것을 얻어 보려고 살았는데 마지막에 돌아보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사회가 돈이라면 거의 미치고 환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도 죽이고 자식도 고소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런 모든 몸부림 그리고 타락, 쾌락주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도 그 근원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영혼의 빈 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허무함을 달래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수유리 어느 큰 병원에서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는데 갑자기 택시에 실려서 사람들이 환자를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 갑자기 쓰러졌는데 심장마비 같으니까 봐 달라고 그래서 데리고 가서 눕혀 놓고 보니까 이미 벌써 소생 가능성이 없어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냉장실에다가 넣고 가족들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먼 데 사는 가족들인지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헐레벌떡 가족들이 와서 펑펑 울고 난리가 났습니다. 가족들은 울고 있는데 죽은 시체를 들여 다 보던 의사는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손을 오므리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손을 피고 죽습니다. 그래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손을 펴고 아무 것도 없이 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손은 쥐고 한 손은 펴고 죽은 것입니다. 의사생활을 그렇게 오래했는데 이런 시체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이 손에 뭐가 들어있을까 너무 궁금해서 손가락을 하나씩 펴보았습니다. 투두둑 하고 화투 2장이 떨어졌는데 삼팔광땡입니다. 사연인즉, 장사 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쳐서 돈을 잃고 그러다 나중에 마지막에 딱 붙잡았는데 삼팔광땡, 화투를 들여다보고 벌벌 떨다가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덜컥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었지만 우리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화투 2장 쥐고 삼팔광땡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 보면서 웃지만, 우리는 그것보다 좀 큰 땅문서, 집문서, 저금통장 그리고 학위 이런 것 한번 손에 넣어보려고 살다가 죽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들이 오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렸을 때는 많이 썼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잊어버린 단어들이 있습니다. 환희, 기쁨, 감격, 희열, 터질 것 같은 즐거움 이런 단어들입니다. 왜 이런 단어들이 사라졌을까요? 예전에는 우리의 기쁨이 가족, 친구, 우정, 이웃,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자본주의적인 방식에 의해 우리의 삶이 재편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교인이 이야기합니다. 자기네 회사에 직원이 하나 있는데 30살 밖에 안 된 자매인데 연봉이 일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표를 써가지고 왔답니다. 이 여자 직업이 TV에 나오는 쇼호스트인데. 이것이 매일 매일 실적을 달성해야 하니까 피를 말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하는 이야기가, “사장님, 돈은 많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직장을 못 구해서 방황하던 시절에는 억대 연봉을 30세 되기 전에 받아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탑이 될 것이다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이 속에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끝까지 모르다가 그냥 죽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것이 하나님 사랑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전혀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이 힘든 것 같아도 가만히 우리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래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 그리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찼던 그 기쁨은 오직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그때 주어진 것이지 다른 곳에서는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시인이 그렇게 영혼의 빈 잔을 하나님이 가득 채워주셔서 터질 것 같은 기쁨과 감격을 누렸는데 그것은 세상 다른 곳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목동이긴 했지만 나중에 왕이 되었으니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부귀영화 누렸다지만 아버지 다윗이 만들어 놓은 것을 누린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다윗이 성전을 짓는데 바친 금이 얼마인가를 계산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2.5톤 트럭으로 80대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며 120조원입니다. 금이 한 돈에 5만원이었을 때 30조원이었습니다. 지금 20만원 가까이 하니 120조 원어치입니다. 은은 300트럭, 그러니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사람이었고, 그 당시에는 허락이 되었으니 세상에 예쁜 여자라면 다 가질 수 있는 왕이었단 말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없었겠습니까? 호화스러운 집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왕이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나는 가난하고 곤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누리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제가 이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행복은 바로 이런 기쁨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때로는 시련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 하기 위해서 환난도 당하고, 큰 근심과 고통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항상 이렇게 우리의 영혼이 주님으로 가득 찬 기쁨, 터질 것 같은 환희,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 사랑으로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재산이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일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은혜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나 같은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십자가 사랑 때문에 내 마음의 빈 잔이 가득 차서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고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가득 찬 적이 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전도 열심히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서 통계를 내보았는데, 교회 오래 다닌 교인들이 전도 많이 하느냐 하면 아닙니다. 그러면 처음 나온 교인이 전도 많이 하느냐 하면 아닙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누가 많이 하느냐 하면 기쁨이 가득 한 사람이 가장 전도 많이 합니다. 자기가 예수 믿어서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늘 눈물이 흐르고 그래서 곤고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쁨이 있으니 여러분들이 이런 충만한 기쁨 속에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이렇게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고 그로 말미암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성경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셨기 때문에,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어주셨기 때문에 두 가지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것을 보겠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신 것이 왜 이 시인의 마음속에 그렇게 큰 감격이 되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식사 관습에 대하여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동서양으로 말하면 사실은 동양에 가깝습니다. 사고방식이나 이런 것들이 서구 사람들보다는 동양 사람의 사고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혹은 동양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식탁을 함께 나눈다는 것, 예전에는 번역이 ‘내게 상을 베푸시고’로 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이 이 상을 학교에서 주는 상장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상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슐한’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테이블 중에서도 밥 먹는 식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파나 혹은 평평한 곳에 이렇게 반쯤 뭔가에 기대고 다리를 쭉 뻗고 기대어서 비스듬히 앉아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야트막한 탁자 그 위에 음식들이 놓여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을 차려서 밥을 먹는 것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족이다 혹은 우리가 서로 형제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은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옛날 양반들이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상민들하고 같은 방에서 잠은 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밥은 같이 먹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 저 상것들과 내가 형제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관습이 중국에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도 하고 선교 역사를 한국에서 가르치시던 분이 제게 해준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다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를 미처 배우지 못하고 갑니다. 지금이야 많이 통일되었지만 중국에도 여러 부족의 말들이 있었는데 가서 손짓 발짓 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면 전혀 언어가 다른 부족이 만나도 세 시간이면 의사소통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지도를 보여 주면서 우리는 먼 미국에서 당신들을 사랑해서 여기에 왔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고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의사 표명을 합니다. 그러면 잠시 후에 수염이 긴 노인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말하자면 족장들인데 이 이방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의를 합니다. 그리고 장시간 회의 끝에 활짝 웃으면서 그들이 나와서 맞아주며 너희 여기서 살아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 이방인을 환영하기 위해서 우리로 말하자면 마을회관 같은 곳으로 모두 주민들과 함께 이동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식탁이 차려지는데 차려지는 음식들이 미국인 선교사는 듣도 보도 못하던 음식인 것입니다. 뱀은 물론이고 바퀴벌레, 쥐 그런 것까지 다 먹으니까, 특히 광동 쪽에 가면 다 요리를 합니다. 어떤 한국 사람이 중국에 가서 숲(soup)을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무엇인데 그렇게 맛있는지 뚜껑을 열어보니까 조그만 거북이하고 바퀴벌레가 잔뜩 들었더랍니다. 지금도 만주 쪽에 가면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하면, 우리는 옛날에 국수였고 지금은 갈비탕 끓이지만 지금도 거기서는 시집 장가가는 날에는 빠지지 않는 요리가 있는데 뱀국입니다. 그래서 무를 썰어 넣고 팔뚝만한 뱀을 동태처럼 토막을 쳐서 끓여서 그것을 한 그릇씩 먹어야지만 진짜 결혼식을 했다 그러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나이든 처녀들 보면서 우리는 국수 먹을 때가 됐는데 어떻게 하나 그러는데 거기서는 뱀국을 먹여야 할 텐데 그렇게 얘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나오니까 못 먹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하면서 끌고 가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사람들이 음식을 차려서 내 놓는 것은 우리는 서로 형제라는 뜻인데, 이것을 안 먹겠다고 하는 것은 나는 너희하고 형제하기 싫다 그 뜻인 것이고, 같이 살고는 싶은데 형제가 아니면 간첩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죽으면서도 마지막까지도 자기들이 왜 죽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배경이 여기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한 식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의 빈 잔은 충만하게 채워졌습니다.” 이 뜻입니다. 이것을 설명했더니 질문을 하기를, 목사님 혹시 이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이 배고픈 다윗을 위해서 상을 다 차려서 네 줄로 묶어서 구름타고 내려 왔느냐고 하는데 그렇게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어서 어떻게 성경을 읽겠습니까? 하나의 문학적인 묘사인 것입니다. 시인이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식탁의 문화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가족처럼 대해 주셨는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차려주시고’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차려주시고’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구약성경은 옛날 이스라엘 말,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라크’ 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동사는 군대들을 줄 세우는 것, 물건 같은 것들을 차례대로 정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베풀어 주신 상이 밥상은 밥상인데 간단한 밥상이 아니라 수많은 가지 수의 찬이 올라와 있는 아주 화려한 식탁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손님으로 갔을 때 집에서 내 놓는 식탁은 그 사람이 그 집안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화)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친청 엄마는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저런 사위 녀석한테 딸이 콩꺼풀이 씌어서 시집을 가는 것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죽어라고 반대를 했는데도 결국은 갔습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인간성이야 착하다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남자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이 딸이 신혼여행 갔다 온 후 친정에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온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고 엄마 혼자 계십니다. 그리고 너무 조용합니다. 전부치는 냄새도 닭 잡는 소리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상을 차린다고 나가시더니 1분 만에 상을 가지고 들어오셨습니다. 귀퉁이 떨어진 팔각 소반에다가 사위 먹으라고 밥을 한 그릇 내 왔는데 아침에 누가 퍼먹던 밥을 수돗물에 헹구어서, 마치 제사 밥처럼 그 위에다 숟가락 하나 꽂아서 그리고 올라왔는데 반찬이라고는 수많은 사람의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종지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것은 밥상이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 집안에서 와도 괜찮고 안 와도 괜찮은 진짜 별 볼일 없는 손님이라고. 그것을 이 작은 식탁이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일입니다. 저는 심방 갈 때 그 집에서 음식 대접하는 것을 못하게 합니다. 주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식사시간을 피할 수 있으면 좋고, 그래도 섭섭해서 밥을 먹겠으면 밖에 나가서 갈비탕을 먹든지 하지 절대로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자매님이 꼭 식사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말렸는데도 하겠다니 할 수 없지 그러면서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을 가서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는 이제 상을 들여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교자상을 셋이서 들고 들어오는데 얼마나 음식을 정성껏 화려하게 많이 차렸는지 젓가락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무랐습니다. “자매님,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한 끼 먹으면 지나가버리는 밥인데, 이렇게 할 시간에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시지요.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쓸데없는 일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자매님이 “목사님,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으면서 했습니다.” 정색을 하고 얘기하는 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점심을 차리기 위해서 열흘 전부터 필요한 김치를 담그고, 밑반찬을 만들고, 일주일 전부터 물건을 사다가 요리할 준비를 하고, 삼일 전에 최종적인 장을 보고, 하루 전에 그날 당일 생선을 뜨고 하면서 그냥 어염집 밥상이 아니라 최고의 정성을 기울여서 반찬을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와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데요. 그리고 제 평생에 죽을 때까지 목사님을 언제 또 대접하겠으며,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아니겠습니까?” 내 생애에서 잊히지 않는 단 한 번의 밥상이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런 밥상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이후에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자매가 반찬을 하나 하나 만들면서 맛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니, 어쨌든 그 상을 받아 놓고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인데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그러한 밥상이 바로 ‘아라크’의 밥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 집안에서 아마 역사상 최고의 vip가 되었던 것인데, 상이 그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그렇게 대우해주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 시인 다윗에게. 여기에 보면 원수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말에서는 단수로 나오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입니다. 이 시인을 괴롭혔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 앞에서 하나님이 이 시인 다윗을 위해서 커다란 식탁을 차려주시고 그와 함께 독대하여 함께 식탁을 나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낚시 줄에 묶여서 구름타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이런 종류의 기적의 식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빈 잔이 영혼의 빈 잔이니, 시인이 받았다는 이 감격스러운 식탁도 사실은 영적인 식탁이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는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쓰시고자 기름을 부어주셨고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고난의 깊은 골짜기들을 지나야 했습니다. 기름부음 받기 전까지는 다윗에게 원수가 없었지만 기름부음을 받고 보니 자기를 사랑하여야 마땅한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려 자기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미워한 적이 없고 원수들을 미워한 적이 없었지만 그를 시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다윗의 원수가 되었고 수시로 그의 생명을 노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날마다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고 있었지만 주님과 대면할 때는 언제나 주님이 그 모든 원수들은 알 수 없는 화려한 식탁을 차려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 다윗을 하나님은 너무 너무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는 동안 다윗에게 베푸신 성대한 말씀의 식탁이었습니다.
(찬양)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불쌍히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어주소서
하나님이 곤고한 인생의 고비마다 성대한 말씀의 식탁을 이 시인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하늘의 만나를 시인에게 먹이셨고 그 식탁에서 배부르게 먹고 난 후에 시련을 이길 용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장 큰 고난의 때에 오히려 이 시인은 담대하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러면서 많은 고난, 시련과 역경을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그 고난의 모든 골짜기를 지나며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생명적인 관계, 바로 그런 생명적인 관계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상을 차려주시는 것으로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찌 맑고 밝은 날만 있겠습니까? 시련도 올 것이고 고난도 오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가슴 찢어지는 이별의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이 모든 시련을 어떻게 이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돈으로 이기나요? 젊음으로 이기나요? 아닙니다. 몇 해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의 딸이 미국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질 수 없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집안의 반대 때문에 자살을 했습니다. 이 어린 자매가 죽은 다음에 재산이 얼마인가 하고 조사를 해 보았더니 2000억을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자원은 돈이 아닙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근본적인 문제들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은 생명의 문제이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 험악한 세상을 이기고 상처뿐인 세상에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힘,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을 채우는 그 힘인데, 그것은 이 세상의 자원으로부터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시련의 계곡을 지나고 그리고 폭풍이 이는 것 같은 인생의 바다 한 복판을 지날 때에도 그렇게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힘을 얻으며 그 진리의 말씀을 먹으며 원기를 회복하고 자기 신앙의 길을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이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 때문에 이 시인의 빈 잔이 가득 차는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꼈을까요?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던 세 솥발과 같은 직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신정국가였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도 왕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주신 제도가 왕의 제도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분노하심으로 왕을 주셨고 진노하심으로 왕을 폐하였다고 했는데 세 개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떠받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첫째 직분이 왕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나라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자기 나라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사명을 가진 사람이 왕이었습니다. 또 한 직분이 있었는데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고 말씀에 대한 확신과 체험과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제사장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선지자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가서 보여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백성들 앞으로 제사장은 죄지은 백성들을 데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세 직분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지혜, 매우 특별한 능력,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부으면 붓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 있고 선택한 사람에게 기름을 붓도록 선지자에게 명을 주시면 선지자는 분별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기름을 붓는 순간 성령의 놀라운 강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에 성령이 역사하셨던 방식과 신약시대에 역사하셨던 차이를 이해해야 됩니다.
신약시대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 성령이 오셔서 항구적으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할 수 있게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달랐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어떤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오시고 하나님이 그 일을 다 하게 하신 후에는 성령이 다시 떠나가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권 속에서 저절로 떠나가시기도 하고 때론 하나님이 징벌하심으로 성령이 떠나가시기도 합니다. 성령이 임할 때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특별한 능력이 그 사람에게 임해서 남다른 지혜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고 남다른 지혜를 가지고 솜씨를 발휘하고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일을 훌륭하게 완수 해 낼 수 있는 탁월한 정신과 영혼에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고 다윗의 생애를 바꾸어 놓은 사건이 첫 번째 기름부음 받을 때 일어납니다.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목동 다윗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는 갑자기 비상하리만치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을 가진 탁월한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시는 동안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은 아주 큰 기쁨과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시인이 범죄 했을 때 제일 무서워 한 것이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데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인의 빈 잔을 가득 채운 것이 한편으로는 말씀을 통한 관계의 경험이었다면 또 한편으로는 기름 부으심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 성령의 체험이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웠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어느 한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말씀 속에서 큰 은혜를 받는 것, 말씀과 함께 성령의 큰 능력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모든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우게 되는 비결입니다.
저는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전까지 9년 정도 교회를 기어 다닐 때부터 다녔으니까 한 13년 정도 교회를 다녔지만 저는 회심하지 못했고 교회를 떠나서 깊이 방황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이제 청년이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사는지 너무 궁금했고 심할 때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오늘도 인간으로서 살아 있어야 된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 책을 찾아보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은 정말 많았습니다. 문학작품들입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물음표는 던져 주지만 대답을 들려주지는 않았습니다. 위로는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 비정상은 아니구나 이렇게 훌륭한 작가도 이렇게 고민을 했구나 그런데 왜 답은 없지 아무데서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상서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별로 공부를 잘 못했습니다. 고민하고 집도 가난하고 하니까 등록금도 늦게 내고 했는데 영어는 너무 좋아했습니다. 몇 번 자살하고 싶었는데 영어가 너무 재밌어서 못 죽은 때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쯤 거의 모든 책을 자유롭게 읽었습니다. 사상서들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답을 내렸을까 했는데 자기네들은 답을 내렸는데 그 사람에겐 답이지만 나에게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왜? 나에게 평안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특별한 일이 있어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낮에는 너무 덥고 시끄러우니까 밤에 일어나서 공부를 했습니다. 새벽 네시가 되면 우리 집이 넓은 벌판이었는데 서울 변두리였는데 교회가 저기 들판 한 가운데 있습니다. 땡그렁 땡그렁 종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그 소리가 그렇게 심금을 울리는 겁니다. 지금은 못 들어 보는 종소리지만 누가 이렇게 쇠 종을 치는 겁니다. 이게 어디서 나는 종소리인가 하며 새벽에 나가 봅니다. 들판에 나가서 보면 안개 속에 저 멀리서 불빛이 있고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땡그렁 땡그렁 매일 그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말을 잘 하던지 제 동생 지금은 우리 교회 장로가 되었는데 열심히 교회 다녔는데 내가 한 달 동안 하나님이 없는 증거를 이야기 했더니 자기도 교회를 그만둬 버렸습니다. 나중에 회개 많이 하고 다시 인도했습니다. 매일 그렇게 종소리가 들리는데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내가 확신할 수 없는데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평화가 종소리를 타고 내 마음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그 종소리가 그렇게 가슴을 포근히 하며 들려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 발로 걸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어느 수요일 이었습니다. 멀리 있는 외딴 벌판에 있는 교회였는데 2층에 있는 교회인데 들어가 보니 교회는 손바닥만 하고 교인은 20명 정도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비닐 장판을 깔고 이렇게 누덕누덕 기운 두꺼운 방석 위에 앉아서 톱밥 난로를 떼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좋은 오르간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삐거덕 거리는 풍금이었는데 어느 자매가 풍금을 치고 거기에 맞춰서 찬송을 부르는 겁니다. 나는 맨 뒤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았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어서 돌아오라 집을 나간자여 돌아와 돌아와
반주가 나오는데 형언할 수 없이 눈물이 계속 쏟아지는 겁니다. 아 하나님은 살아계셨군요 당신이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당신을 배반하고 멀리 떠났을 때에도 방황하고 죽음의 골짜기를 넘나들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으로 여기셨군요. 처음 거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 20명 30명밖에 안 되는데 말끔한 청년 하나가 나오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목사님도 젊은 분이 아니라 오십이 훨씬 넘으셔서 느즈막에 신학을 하셔 가지고 옛날에는 노동 운동도 하고 이러던 분이 험하고 거칠게 사시던 분이 회개하고 목사가 되셨는데 교회에 나오니 얼마나 귀여우시겠습니까? 교회간지 한 달 밖에 안 되었는데 세례를 받으라는 겁니다. 아니 목사님 그게 말이 됩니까? 너는 두 살 때부터 열다섯 될 때까지 교회를 다녔으니까 일 년씩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시면서 시월 달 쯤 되었는데 십일월에 추수감사절 때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 교사도 해라 했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목사님에게 ‘아니오.’ 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 귀퉁이에 와서 쭈그리고 앉은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세례를 받으면 우리 주님과 결혼을 하고 신부가 되는데 이 몰골을 해 가지고 주님의 신부가 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는 없고 해서 매일 저녁 30분은 걸어가야 되는 거리를 걸어서 교회에 가서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 무릎을 꿇고 촛불을 켜놓고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더러운 죄인이 어떻게 주님을 모질게 배반을 했던지 하나님 잘 아실 텐데 내가 주님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일주일을 매일 저녁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데 깨끗하게 옷을 빨아 입고 가서 세례 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장로님과 함께 물그릇을 가지고 오셔서 내 앞에 오셔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는데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손을 얹고 기도해주는 그 순간 위로부터 생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따뜻한 기운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온몸을 가득 채우는 겁니다. 갑자기 내 몸이 무게가 거의 없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겁니다.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겁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모질게 하나님 없다고 대적하고 거짓된 사상, 거짓된 생각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하나님이 징벌 대신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고 이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부가 되게 해주셨구나 그런 감동이 밀려오면서 큰 피눈물이 났습니다. 얼마나 엎드려서 눈물이 났는지 고개를 들어보니까 예배는 끝나고 이미 사람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몇 사람이 교회 왔다 갔다 하는데 창을 이렇게 보니까 교회가 너무 가난하니까 너무 추워서 11월 20일경 되었는데 벌써 창문에 서리가 끼었습니다. 아주 추웠는데 햇빛이 이렇게 비취는 겁니다. 이제껏 내 인생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모든 꿈, 모든 바람 하나도 없고 꿈이 있다면 오직 하나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것 내가 오래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얼마를 살든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을 정말 높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복해지기 보다는 거룩해져서 주님 신부가 되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찬양)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경험한 첫 번째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이 이후에 더 흥미 진지한 체험이 많았고 더 극적인 체험이 많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체험입니다. 왜? 사람이 이렇게 순결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실 때에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영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그분을 알 사람도 없고 사랑할 사람도 없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할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비고 빈 마음 예수를 믿어도 무엇인가 허한 것은 부자가 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살고 있는 집이 초라해서가 아니라 그런 성령의 은혜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게 찰 때 마음은 온전히 고양되고 자신의 인생 전부를 드려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살리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가장 비참한 골짜기에서도 홀로 버려두시지 않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분만 사랑하고 그분께만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가득 찼기 때문에 이 시인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려서는 아버지께 인정받지 못했고 형들에게 미움을 당하였고 사랑하는 아내도 자기의 믿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랑하는 아들 딸들도 자기 신앙을 본받지 않고 각자 타락했고 끔찍한 비극과 살인, 폭행들이 가문에 이어졌지만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지만 불륜의 관계였고 그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영혼의 어둠속에서 지내었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도 자기를 버리지 않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우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견디고 핍박도 승리로 이겨내면서 믿음의 경주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깊이 만나 이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깊이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