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시처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 16:12)
Ⅰ. 본문해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는 주후 57년경 제 3차 전도여행의 끝 무렵에 사도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서 고린도지방 겐그리아의 집사 뵈뵈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고린도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의 선교 계획과 하나님의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담고 있는 광대한 서신입니다. 오늘 읽은 16장은 로마서의 끝자락입니다. 이 서신의 끝에는 34명의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위대한 선교사요 위대한 목회자요 위대한 저술가였지만 이 편지가 끝날 때는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동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평범한 한 인간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34명의 동역자 가운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로서 ‘버시’라는 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Ⅱ. 바울의 동역자, 버시
12절의 하반절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로마서 마지막 장을 읽다가 한없는 은혜를 받은 구절입니다. 마른 땅과 같아서 무슨 메시지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구절,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는 구절에서 저는 매우 큰 은혜를 받았고,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이 구절은 제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A. 사람됨과 섬김
먼저 이 짧은 절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됨과 섬김이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 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짧은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버시라는 동역자를 생각하면서 그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과 사람됨의 특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많이 수고한 사람
제일 먼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버시’ 하면 떠오르는 특징이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에코피아센’(ἐκοπίασε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코퍼스’(κόπος)라는 명사에서 왔습니다. 이 명사는 아주 힘들고 고된 일, 고통스러운 과업, 고난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버시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넘치도록 많은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모든 환경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기대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과 똑같아지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합력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반드시 순풍에 돛단 것처럼 우리 삶이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이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세상나라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기 안에서도 옛 본성과 새 본성의 다툼이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새 본성의 마음과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살려고 하는 옛 본성의 마음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선한 뜻을 세워보십시오. 그러면 금방 선한 뜻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방해들을 여러분 바깥에서 안에서 느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이 믿음의 길을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셨겠습니까?
버시는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었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난관과 싸우며 많이 고생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 곁에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한결 같이 사도 바울에게 헌신하며 주님을 섬겼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피붙이처럼 사랑을 받던 사람들도 돌이켜 바울더러 정말 사도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을 의심했고 그의 사역에 모함을 더했습니다. 동역자들 가운데도 그러한 배신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희생을 두려워하며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버시는 주님을 위해 함께 동역하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남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마음에 어떤 인상으로 남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일을 할 때 건성으로 하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배짱에 맞을 때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직분을 맡았는데 뺀질거리는 사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기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버시를 보십시오. ‘버시’라는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 다가오는 인상은 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넘치도록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신앙의 인격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 주 안에서 섬긴 사람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버시’ 하면 생각나는 것은 ‘주 안에서 섬긴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엔 큐리오’(ἐν κυρίῳ)라고 나옵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승화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라고 하였을 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신 통치자로서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버시를 일만 하는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버시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언제나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아, 버시. 우리 주님과 함께 하던 사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께 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에 늘 복종하며 살던 사람.”이라는 인상이 가득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일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머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께 연합되고, 그 연합 안에서 주님을 기뻐하는 영적 생활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쓰레기 하나를 줍고, 의자의 줄을 맞추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성가대에 밥 한 끼를 대접해도 예수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나 같은 사람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버시는 사도 바울을 존경했지만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끌림 때문에 그 일을 하며 수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 어떠한 이익 때문에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았고 그분의 마음이 버시의 마음 가운데 부어졌기 때문에 주님을 섬겼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원하셨기 때문에 버시는 주님을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섬길수록 주님이 더욱 존귀해집니까? 섬길수록 주님의 은혜가 더욱 넘칩니까? 수고하면 수고할수록 나 같은 죄인을 사용하시고 이 쓸데없는 인간을 쓸모 있게 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니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 사랑받은 사람
세 번째는 ‘사랑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수고하고 사랑하는”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아가페텐”’ἀγαπητήν)이라고 나옵니다. 수동분사 여성형입니다. ‘아가페텐’은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이런 뜻입니다. 버시는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my beloved friend', ‘사랑하는 친구’ 이렇게 됩니다. 누구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입니까? 나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버시는 하나님께만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 사이에 종종 갈등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라고 반문해야 하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신하고 충성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다 보면, 진리의 문제에 관하여 그런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 특히 성도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갈등관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부터 사랑은 받지 못합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불러 일으켜서 저 사람과 더 깊은 영적 교제 속에 함께 지체로 살고 싶다는 마음은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미천한 인격과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 혈기,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이기적인 동기, 수많은 지체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10년이 지나도록 밥 한번 사줄 줄 모르는 구두쇠 기질,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과 연관이 없는 인격적인 결함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버시는 하나님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을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 격인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도 버시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고 그리운 이름이었고 함께 교제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종종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어느 교회에 보내주시든, 큰 교회든지 작은 교회든지, 5년이나 10년 정도 사역을 하고 나면 덕을 볼 가능성이 있는 교회든 아니면 빈손으로 내보낼 것 같은 가능성 없는 교회든지 간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렬히 헌신해라. 그래서 담임 목사와 장로님과 권사님과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그대들이 떠나고 세월이 많이 흘러도 나이 드신 분들이 그대들을 기억할 때 눈물이 나는 사람이 되어라. ‘우리 교회에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신 전도사님,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모두 포기했던 목사님.’ 그러면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다.” 교역자만 그렇겠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교회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장로님, 기도가 필요한 시기에 생각나는 권사님, 구역장,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버시는 많이 수고하였을 뿐 아니라 주님과 사랑의 연합을 누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성도들에게도 아울러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교회의 한 성도로 인정받았을 텐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많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교회를 섬기도록 하신 것은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 쓸모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이 당신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진심으로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 버시처럼 많이 수고하면서 하나님과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버시”라는 이름
‘버시’라는 이름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페르시다’(Περσίδα)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페르시스’(Περσίς)라는 단어의 제3격입니다. ‘페르시스’라는 이름은 ‘페르시아’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페르시스’는 페르시아에서 끌려온 여자 노예 중에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 하나를 가지고 모든 것을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정황을 알고 있었던 당시 로마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로마의 국민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였을 리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낳았을 때 아무리 그 이름이 좋아도 자기 자녀 이름을 ‘쪽바리’라고 지을 사람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주석가들의 말로는 페르시아 여자 노예들의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이 여자가 이름도 없어서 ‘연변댁’, 이런 식으로 불린 이름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이 사람이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들이 추측하는 바와 같이 버시는 정말 페르시아에서 끌려온 비천한 노예, 혹은 노예 집안에서 태어난 미천한 여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 바울에게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라는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미천한 사람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복음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몇 살이었을 때 이 편지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미천한 자였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다가 사도 바울과 사랑하는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비천한 여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요령을 부리지 않고 많이 수고하였더니 위대한 사도의 마음에도 지워질 수 없는 존귀한 동역자가 되었구나.’ 주석가들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 여자는 주님을 몰랐더라면 그저 쓰레기처럼 살다가 죄와 더불어 죽었을 비천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비천한 신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구름 같이 허다한 위대한 믿음의 증인 중 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짧은 구절이기는 하지만 성경은 버시가 기적을 일으켰다거나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설교자나 선교사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16장을 해설하면서 여기에 많은 동역자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모두 목회자나 선교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버시는 로마 교회에서 청소하는 자매였을 수도 있고, 이름 없는 전도사였을 수도 있고, 교회 한 구석에서 책을 만들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허기진 상태에서 모임에 오는 사람들에게 빵을 구워줬던 여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충성스러웠고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성은 진실한 인격 안에서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어거스틴을 기독교로 인도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밀라노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를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마니교에 빠져서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 하다가 그 가르침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회심할까를 생각하며 종종 예배당을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먼발치에서 존경하던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 설교의 의미를 잘 몰랐지만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너무 고단한 목회사역에 쉴 틈이 없었기 때문에 암브로시우스는 조금만 시간이 나면 혼자 있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깨트릴까봐 다가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존경의 눈빛을 보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는 경건하고 우리에게는 친절하고 겸손한 목회자였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함과 겸손함, 온유함과 평안함, 이러한 인격의 특징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의 크기에 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버시처럼 힘에 넘치도록 고난을 받으며 수고하고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또한 성도들에게 사랑 받는 아름다운 인격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