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20170822_중국 집회)
목회란 무엇인가
김남준
1. 기도와 사랑의 목회(빌 1:9) / 2
2. 지식과 총명의 목회(빌 1:8-11) / 7
3. 목회의 세 목표(빌 1:10) / 12
4. 목회의 궁극적 목적(빌 1:11) / 18
5. 예수의 심장으로(빌 1:8) / 24
1. 기도와 사랑의 목회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나는 로마에 갔을 때, 바울이 갇혔다고 하는 감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감옥이 정말 그 감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회 밑바닥에, 물론 나중에 그 위에 교회를 지었을 것입니다. 교회 밑바닥 지하실에 있는 좁은 굴이었습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바울이 칭찬을 많이 한 교회입니다.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우리가 여기서 제일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목회는 기도로 하는 것이다.”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훌륭한 사람도 목회를 위해서 기도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무릎과 팔꿈치로 하는 것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무릎은 기도를 뜻하고 팔꿈치는 공부를 뜻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목회에 있어서 기도의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있던 교회입니다. 이런 것들이 현대에 와서는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들의 관심사들이 너무 흩어져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생활에 헌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때 기도는 목회를 위한 준비, 목회를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을 놓고 보면 기도 그 자체가 목회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기도 그 자체는 사역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사역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본을 따라서 여러분도 어쨌든 “목회”라고 이야기할 때는 기도가 가장 먼저입니다. 그래서 많이 알고 기도하지 않는 목회자보다는 조금 알지만 치열하게 기도하는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요새 우리 교회가 몇 년 사이에 아주 은혜롭습니다. 중요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두 달, 세 달 전에 오랜만에 교역자들을 여기에 모아놓고 책망을 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11년 동안에 열 번을 입원하고 아홉 번을 수술을 했습니다. 거의 해마다 수술을 한 것입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아주 탁월하게 건강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건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새벽에 도착해도 아침에 샤워하고 강단에 올라가서 주일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쓴 책 가운데 40% 정도는 밤 12시에서 새벽 4시 사이에 쓴 책이었습니다. 무쇠 같았습니다. 그래서 안 자고, 덜 먹고, 안 놀고 최선을 다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월요일에 휴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월요일에 일정이 더 많습니다. 월요일에 교역자들이 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왔는데 한 11년 전부터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이제까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주일을 제외하고는 새벽기도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이렇게 나빠지고 수술을 1년에 두 번씩 하고 나니까 잠이 깼는데도 새벽기도 하러 교회에 나올 체력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부교역자들도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망을 했고 많이 회개를 하고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월요일부터 사경회가 시작 될 때 새벽에 나와 보시면 알겠지만 모든 부교역자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월요일부터 제가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교역자들은 강대에 올라와서 기도를 하는데 그 아래에 중국의 목회자들을 위한 방석을 깔아드릴 것입니다. 거기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니까 교회에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혼자 있었고 매일 새벽마다 450명도 넘는 교인들이 모여서 열렬하게 사경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목회자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젊지 않습니까? 제가 젊고 신학 교수하던 시절에는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많이 들고 건강이 나빠지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뿌려야 합니다. 이번에 목회수업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가시면 자신과 약속을 하십시오. “내가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은 무릎을 꿇고 있을 것이다. 기도를 못해도 그 시간을 지킬 것이다.”하고 마음을 쏟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대신 누구를 기도시키노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남에게 시키지 않으시고 직접 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러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목회는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도가 무엇인가? 전도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전도이다.” 그러면 목회는 무엇입니까? 그때 하나님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을 계속 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호수에 나타나셨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만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물어볼 때마다 희랍어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양떼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등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이 열렬히 등산하고 싶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반성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순간도 변한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늘 똑같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μᾶλλον καί μᾶλλον, the more and the more) “점점 더 점점 더”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목회자의 인격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리스도와 연애하는 사람입니다. 연애 해 보셨습니까? 지금 연애 중이신 분 손들어보십시오. 높이 들어보십시오. 연애를 하면,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어제까지는 새가 울었는데 사랑에 빠지고 나면 새가 노래합니다. 어제까지는 그냥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는데 사랑에 빠지면 나무가 손을 흔듭니다. 사랑이 끝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1970년대 미국의 Skeeter Davis라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듀엣의 여가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불러서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The end of the world”라는 노래입니다. 거기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노래)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왜 태양은 빛나는지
왜 파도는 밀려오는지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you said good-bye
저것들은 이 세상이 끝난 줄을 모르나봐
당신이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그 사랑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스물한 살 때 처음 회심을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말할 수 없이 방황하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변했습니다. 사실 사람을 사랑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은 기쁨과 괴로움이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왔습니다. 모든 세상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불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외의 인간은 불변하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제 손녀가 세 살이고 손자가 한 살입니다. 손녀가 처음에 태어나서 점점 자라는데 너무 예뻤습니다. 새로 연애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한 번 출근하면 밤늦게까지 집에 잘 안 들어갔는데 빨리 집에 가서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손녀가 점점 커지니까 “할아버지! 할아버지!”합니다. 어디 가서 가게의 물건만 보면 사다가 손녀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조금 자라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애들은 젊은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기 고모는 너무 좋아합니다. 더 좋아하는 것은 자기처럼 어린 아이들입니다. “혜린아, 이리 와서 할아버지 사랑해요, 해야지.”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별로 안 좋아지게 됩니다. 옛날처럼 좋아하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요즘은 “딩동” 하고 벨을 누르면, “할아버지 온다!”하고 달려와서 안아줍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처럼 뽀뽀하고 매달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도 전처럼 집에 일찍 들어가서 보고 싶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손자가 너무 귀여워집니다. 손자는 할아버지를 너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온 식구가 누나에게만 관심을 가져주는데 저는 항상 가서 번쩍 안아서 흔들어줍니다. 너무 좋아합니다. 온 식구들이 인정을 합니다. 중국에 갔다가 닷새 만에 “딩동”하고 벨을 누르고 들어갔습니다. 아이가 보행기를 타는데 한 3m 정도 떨어져있는데 저에게 돌진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식구 아무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 10개월 되었는데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온 몸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니 나도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됩니다. 밖에 나와 있어도 손자가 더 보고 싶어집니다. 비서와 백화점에 갔는데 예쁜 여자아이들 옷을 보면서 비서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것 보시면 손녀에게 사다주고 싶으시죠?”, “아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변합니다. 또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목회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할 때는 목회가 너무나 재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이면 헤어지기가 싫고 기도하면 끝내기가 싫습니다. 말씀을 전하면 너무 잘 듣습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씀을 전해드릴까요?”, “길게만 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눈치가 있었기 때문에 두 시간 정도 하고 끝냈습니다. 약 20년 전에 중국이 굉장히 순수했을 때, 눈치 없는 한 한국 목회자가 추운 날에 중국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길래 무슨 말씀을 전해드릴지 물어보니 아무거나 좋으니 길게만 해달라고 하니까 밤 11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것을 다 들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중국의 어느 도시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600명이 매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자가 없었습니다. 제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놓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목사를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목회는 너무 쉽고 재밌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었는데 어느 한 순간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그때부터 목회의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지만 않으면 문제가 적겠지만 목회자를 괴롭힙니다. 지체들을 괴롭힙니다. 심지어는 악을 행합니다. 그럴 때 목회자가 얼마나 괴로울지 생각해 보십시오. 목회의 가장 큰 보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복과 불행이 결국 사랑의 문제와 결합됩니다. 올바른 것을 사랑할 때 행복해지는데 올바르지 않은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불행해지지 않겠습니까? 끊임없이 그 사랑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정말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고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웁니다. 일을 열심히 합니다. 모입니다. 매일 모여서 밥 먹고 애씁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목회는 성공적인 목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를 너무 외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인이 얼마나 모이는가? 얼마나 큰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커다란 빌딩을 건축했는가?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할 때, 하나님이 싫어하신 이유가 성전이 텐트로 지어졌기 때문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첫째로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둘째로 목회의 본질적인 목표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거짓된 사랑은 죽게 만들고 참된 사랑은 살아나게 만들고, 그래서 주님을 조금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을 점점 더 뜨겁게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이것이 저의 첫 번째 강의입니다.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제가 말씀 드린 것을 가지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목회는 기도이다. 목회는 예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늘 첫 번째 강의에 대해서 여러분의 반응을 보여 주십시오.
이하 중국 목회자들의 이야기 - 참고용
제가 중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 중국교회가 허술합니다. 신학적으로도 허술합니다. 교회의 체계도 너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작년쯤에 옌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거짓말 같은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여기에 와서 간증도 했습니다. 교회를 짓는데 돈이 너무 모자랐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데 못 보던 아주머니가 며칠째 나오더랍니다. 그냥 시골 아줌마였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목사님.” 하고 부르더랍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OO사는 사람인데 친척집에 잠간 다녀오려고 왔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이 교회에 헌금을 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얼마나 헌금을 하시려고 합니까?”, 1억이면 60만 위안일텐데, 교회를 건축하다가 모자란 돈이 딱 60만 위안이었습니다. 우연이었겠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마련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자기네 교인들을 살펴보면서 누가 헌금을 좀 할까 했는데 전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목회자들은 매일매일 기적을 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허술해 보이지만 이런 기도로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자매님이 간증한 것과 유사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청년들이 자기 어머니의 기도를 늘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많이 기도하셨답니다. 한국 교회도 그런 기도 때문에 이제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전통이 끊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중에 하루에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실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나처럼 살인적으로 바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유명해지고 나면 내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2. 지식과 총명의 목회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두 번째는, 어떻게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질 수 있을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지금 우리가 읽은 구절의 의미를 보자면 이런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기도하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9절, 10절, 11절, 이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랑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커지느냐는 것입니다. “지식과 총명으로”입니다. 재밌는 것은 “지식과 총명으로”라는 말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엔 에키그노세이 카이 파세 에이스데세이”(ἐν ἐπιγνώσει καὶ πάσῃ αἰσθήσει). “지식과 지각, 혹은 총명”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지식”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는 단어입니다.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뜻이고 “에피”는 “무엇에 관하여”, 혹은 “무엇 무엇 전체를” 이라는 뜻입니다. 희랍사람들이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냥 근거가 없는 얕은 지식과 아주 깊이가 있는 완전한 지식을 구분했습니다. 소위 “독사”(do,xa)와 “에피스테네”(ἐπιστήμη,)라는 지식입니다. “독사”는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사견”, “사적인 견해”입니다. 별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그냥 자기 느낌에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피스테네”는 “온전한 지식”입니다. 예를 들면 “이 물건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어볼 때, “그것은 에어컨을 끄고 켜는 거야.” 하는 것은 그냥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지식이 되려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고 무슨 원리에 의해서 이렇게 작동하는지를 모두 설명해 낼 수 있어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르는 것이 거의 없도록 온전히 알고 있는 지식,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전치사를 보면 “무엇 무엇 안에서”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수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풍성해지는데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사랑이 풍성해지게 하느냐 하면 지식과 총명을 가지고 풍성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잊히지 않도록 그림처럼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불을 피웠습니다. 요만큼 불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뭔가 태우는 것이 있어서 불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다 탄 다음에 꺼질 것입니다. 불은 요만큼입니다. 맨 처음에는 아주 힘들게 불을 피웠습니다. 거기에 나무를 계속 집어넣습니다. 나중에는 잘 마른 장작을 거기에 계속 집어넣으면 처음에는 요만했던 불이 큰 불길로 일어날 것입니다. 거기에 제물을 올려놓으면 다 태워버릴 정도의 불길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표현을 할 때, 작은 불을 장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한다, 그때의 “장작으로” 라는 그 그림을 “지식과 총명으로” 라고 바꾸어 보십시오. 아까 어느 자매님이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기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조금씩 사랑을 합니다. 그러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옛날에는 내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한 줄 알았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었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크고 완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니까 그렇지 못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교회나 한국교회를 보면서 제가 늘 마음에 염려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장작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목숨을 버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금방 꺼집니다. 특히 공동체 속에 붙은 불이 금방 꺼집니다. 더 많이 기도하면 물론 사랑의 불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다시피 여러분이 5년 10년 동안 매일 펑펑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 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불이 계속 일어납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엘리야의 싸움을 기억해 보십시오. 불을 엘리야가 성냥으로 켰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장작을 준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냥 계속 하늘에서 불이 내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광야의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작을 태운 후에는 꺼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목회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사랑의 불길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지식”이라는 장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을 놓고 하나하나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 그걸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르나르드라는 중세의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배운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erveaux)입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notitia est amor”, “지식은 곧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amor ipse notitia est” (love itself is a form of knowing)
요즘 한류 교류가 뜸하지 않습니까? 한국으로 중국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옵니다. 겨울연가를 비롯해서 한류스타들이 영화를 찍은 장소 같은 곳을 방문하기를 좋아합니다. 거기 가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두꺼운 책들이 팔립니다. 인터넷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찾아봅니다. 쓸데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좋아하니까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궁금해집니다. 뭘 잘 먹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가까이에서 보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키는 얼마나 되는지, 모든 것이 궁금해집니다. 사랑이 식고나면 아무것도 알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목회가 풍성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진리에 대한 지식이 목회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나면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한 번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나면 너무 재밌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재앙은 지식이 없는 목회자입니다. 두 번째 재앙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교인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사랑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북경의 아파트인 것 같은데 사람들이 몰래 모였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는데 사실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 통역이 순차통역이라서 너무 힘이 듭니다. 불이 계속 나와야 하는데 툭툭 끊어지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통역도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참 잘 했습니다. 순차로 통역을 하는데도 말씀을 들으면서 몇몇 자매들이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울겠습니까? 새로운 지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울면서 온 것이 아니라 왔는데 새로운 지식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그런 분이었구나!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구나! 교회를 그렇게 불쌍히 여기셨구나! 그렇게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구나!” 이런 마음이 생겨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작입니다. 지식입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말 주님의 은혜로 온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공부를 하지 못합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어제도 우연히 예전에 공부한 내용들, 그러니까 그동안 공부한 책들, 강의안들, 수집된 신학 자료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은 것을 보았는데 약 5만 건의 자료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가르친 내용들,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내용들,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새는 옛날 공부한 것을 갖고 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기를 원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지식은 아무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주님 사랑의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지식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이 불붙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의 지식은 그리스도에 관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총명으로” 입니다. 희랍어로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라고 합니다. 이것은 ‘깨닫다’라는 뜻의 동사, 아이스타노마이(aisthánomai)에서 온 명사입니다. 현대 희랍어 성경에는 철학적인 용어인 노에시스(νόησις)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노에시스든지 아이스데시스든지 이 말은 ‘인식’, ‘이해’, ‘판단’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있는데 그 인식과 이해가 판단력과 관련될 때, 실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 우리들이 그것을 ‘총명’이라고 부릅니다. 지식의 크기와 총명의 크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 지식이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아닐 때에는 지식의 크기가 매우 커도 총명이 매우 부족할 수가 있고, 때로는 그 지식이 좀 부족해도 판단력이 아주 뛰어난 경우가 있을 때에는 총명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총명은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개별적 환경들이나 조건들에 대한 실천적이며 구체적인 판단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이성’과 ‘경험’에 관한 것이라면 ‘총명’은 ‘판단’과 ‘실천’과 관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펼쳐지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효과 있는 정확한 판단력을 제공하는 것이 총명입니다. 총명은 적용적이고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판단의 능력입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사모님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집은 재산이 꽤 있는 부자였는데 가난한 신랑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요즘은 법으로 정해져서 그렇지 않지만 한국이나 중국이나 여자는 유산 상속에 있어서 조금 소외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오빠들에게 재산을 다 나눠주고 자기는 시집을 갔다고 조금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아빠 차라도 가져가겠다면서 차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 차를 운전하고 가는 중에 하나님이 판단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너는 목회자다. 너는 목회자의 아내이다. 영혼을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가다가 차를 세워놓고 막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총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목회자의 설교를 듣거나 가르침을 받고 나면 안개 속을 지나는 것 같다가 선명하게 길이 딱 보여야 합니다. 그것을 직접 가르쳐 줄 수도 있고 에둘러서 가르쳐 줄 수도 있지만 선악에 대한 분명한 판단력, 어떤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총명한 판단력, 그런 것을 수단으로 해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고” 그래서 목회자는 판단력이 올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총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영적인 지도력의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자신의 목회자가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한 5년 전에 봤을 때는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저 목회자만큼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점점 더 저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서 나는 발 벗고 나서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한 10년 후에 와서 다시 설교를 했는데 저 사람이 그때의 그 목회자가 맞느냐고, 그때 그 촌스럽게 설교했던 목회자가 맞느냐고 눈을 부비면서 다시 쳐다보게 되는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 저렇게 지식이 뛰어나게 발전했나, CRTS를 졸업하고 저렇게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구나, WRTS를 졸업하고 저렇게 되었구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발전해 가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 속담에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이 생명을 바쳐서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나는 사도바울이 일평생 추구했던 것이 선교가 아니라 지식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기쁨은 성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그것도 기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도들이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 그것도 기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아지던 교인이 적어질 수도 있고 어제는 나를 천사 다음을 존경하던 사람이 내일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에 우리의 기쁨의 근거를 두면 삶이 요동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 그분을 사랑할수록 배우는 총명,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공부도 별로 못합니다. 그런데 한 참 공부할 때는 밤 12시까지 혼자 공부하다가 내려옵니다. 그러면 마당에 바람이 확 붑니다. 혹은 옥상에 올라갑니다. 그러면 마음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어제보다 내가 이만큼 신앙적으로 지식적으로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기쁨 속에서 사는 목회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장작 삼아서 성도들의 마음에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불이 점점 더 뜨겁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불 하나하나가 모여서 교회 전체에 타오르는 부이 됩니다. 그 불을 온 세상에 실어 나르는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강의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목회의 목표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목회자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총명입니다. 그 지식과 총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3. 목회의 세 목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10)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세 번째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10절입니다. 모두 함께 읽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9절부터 말씀을 전했습니다. 목회는 기도요, 목회의 목표는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지식과 모든 총명을 통해서 그 사랑이 풍성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10절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목회의 구체적인 세 가지 목표가 나옵니다. ‘성도들을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라는 의미인데, 다시 말해서 목회를 해서 이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을까 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목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도록 길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한 성도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허물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는 ‘선한 것’이라고 나오지 않습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나왔습니까? (시비라고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이 훨씬 더 정확한 듯합니다. ‘시비’라기보다는 희랍어로 ‘디아페론타’(διαφέροντα)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들(different thing)을 분별하며’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대개 진리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아무 것이나 막 먹으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맨 처음에 중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침마다 먹는 요티하오라는 튀김과 콩국입니다. 콩국은 별 문제가 없어보였으나 요티하오의 제조과정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천진에 처음 갔을 때 길거리에서 요티하오를 튀겨주는데 새카맣게 된 기름에 튀겨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요티하오를 튀기면 새까만 요티하오가 나오는 것입니다. 요티하오에 까만 티끌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동행한 분에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저 기름은 얼마 동안이나 쓴 거예요?” 대답하기를 “주님만이 아십니다.”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런 기름은 발암물질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일 아침마다 그런 기름에 튀긴 음식을 수없이 사먹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가끔 작은 호텔이나 숙소에 가서 요리를 튀겨주는 것을 보면 깨끗합니다. 약 20년 전의 일이니까 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분별없이 먹고 싶은 것을 막 먹으면 몸속에서부터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육체의 생명이라는 것은 마시는 것, 먹는 것, 호흡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정말 중요한데 지금 중국은 공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공기가 너무 나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에 적용해보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 수많은 가르침들을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모르고 아무거나 막 섭취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혼이 발암물질에 오염됩니다. 무안에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곳을 섬기고 있는 좋은 목회자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같이 대화를 해보면 압니다만 그분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격적인 분이셨고, CRTS를 시작 즈음에 학생들도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2년이 못되었을 때에 그분이 신사도운동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집회를 하면서 사람들이나 쓰러뜨리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니 싸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좋았던 분이 말도 안 되는 그런 운동에 빠지는 것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막 섭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단이라는 말도 그런 것입니다. 실마리가 다른 것입니다. 볼 때는 다 비슷해 보이는데 실마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처럼 보이는데 잡아당기면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을 보면서 염려되는 것이 있는데 신학적인 혼란입니다. 자기 견해가 분명한 가운데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공부하고, 참된 것과 다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면서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목회자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성경을 잘 알 뿐 아니라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서 올바른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도 이해를 하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지만 그것이 왜 나쁜지도 이해하며, 그것이 교회 안에서 뿐이 아니라 사회의 사상, 철학의 사조, 그리고 오늘날 시민들의 사고방식까지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올바른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과 신학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디아페론타’ 곧 ‘다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모본을 보여줍니다. 그는 두란노에서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 자신도 연수를 더하여 죽을 때가 가까이 올수록 신학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탁월하고 치밀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잘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참된 것을 분별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누가 잘못 되었는지 분별하며, 다른 것을 가지고 왔을 때에 모든 성도들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도 받았지만 앞에서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기억 하십니까? ‘자칭 사도라 하되 거짓된 자들을 구별하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 교회의 탁월한 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분별력이 탁월하면 사랑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분별력을 가지는 것과 사랑을 가지는 것을 별개입니다. 옛날에는 탁월한 분별력과 사랑도 있었지만 이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그 탁월한 것이 빛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해 지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진리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 부합하는 상태, 그것이 진실입니다. 중국어에도 ‘도덕’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습니까? ‘따우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십니까? 나쁜 짓을 하면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따우’(道)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덕적인 기준이고 진리입니다. ‘떠’(德)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래서 덕이 많은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고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덕은 사랑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도덕’이라고 하는 말은 객관적인 ‘도’에 주관적으로 ‘덕’이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전체를 가리켜서 ‘도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진리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난 다음에 그 진리에 자신이 합치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 ‘진실’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모든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노장 사상도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상에서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계속 변하는 것이니 오히려 어느 것 하나를 고수하는 것 자체가 편견과 아집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도덕’에 관한 그런 견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도덕’은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규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아이를 길러보셨을 것입니다. 단것을 보면서 ‘이것은 너무 달아서 먹으면 안 된다’ 고 가르치며 안줍니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 먹고 싶어 합니다. 우리 손녀도 단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한 밤중에 사탕을 달라고 졸라대니 엄마는 한 밤중에 무슨 사탕이냐면서 야단을 치고, 그러면 약 상자를 뒤져서 달콤한 약을 찾아서 먹어버립니다. 그런 아이를 엄마는 먹지 말라고 말리고, 이를 어기면 때려서라도 저지합니다. 아이는 엄마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커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나면 왜 그런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두 살, 세 살 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설탕의 화학기호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우리 몸에 당뇨와 같은 질병을 일으킨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혈관의 구조가 어떻게 되고 그것이 어떻게 콜레스테롤을 유발하게 되는지를 설명 해봐야 이 아이가 못 알아듣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주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해 그렇게 뛰어난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믿어라, 그리고 이렇게 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이 자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집니다. 공부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그래서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거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라’는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를 알았다’고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야고보 선생은 거울을 보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봅니다. “아, 여기 무엇이 묻었구나”라고 하면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든지, 안 되면 뭐라도 발라서 없앱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진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그 진리에 합당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자기를 합치시켜야 됩니다. 자,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에 우리를 합치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즐거운 일일까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삶은 복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사랑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진리는 여전히 좋은 것이지만 자기를 거기에 합치시키기 싫습니다. 때로는 그 진리가 자기를 찌르는 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국의 공기가 어땠습니까? 중국 쪽에서 미세먼지가 날아옵니다. 그래서 주의보가 떨어집니다. 한국의 대기 상태는 전적으로 중국에 달려있습니다. 약 20년 전만 해도 서울의 공기는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법적인 기준을 높여서 도시를 정화시켰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한국에 온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깐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약 30년 전에 한국은 지금의 중국에 있는 뒷골목보다 훨씬 더 더러웠습니다. 오죽하면 신문에 사설이 났는데 ‘길거리에서 오줌을 싸지 말자’였겠습니까? 사실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깨끗해 졌습니다. 만일 이곳 마당에서 스티로폼을 태우면 금방 경찰이 올 것입니다. 큰일 납니다. 그런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건축하다가 스티로폼 같은 건축 폐기물이 나오면 굉장히 많은 돈을 주고 치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한국이 깨끗해 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공기가 좋잖아요? 들이마셔 보십시오. 공기가 좋으면 햇빛도 아주 좋습니다. 아침에 비치는 맑은 공기와 햇살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눈에 안질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빛이 좋을까요? 너무 괴로울 것입니다. 아침 햇살은 너무 좋은 것인데 내 눈에 안질이 있다면 그 빛은 내게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아기 돼지를 얇게 해서 껍데기를 바삭바삭하게 만든 음식이 있는데 ‘권동차이’라는 음식입니다. 전 세계에서 그렇게 맛있는 요리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주 비쌉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먹는 것 만큼 맛있지 않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이 요리를 맛있게 먹으려면 한 사람 앞에 천 위안은 줘야 합니다. 아주 비싼 것은 2천 위안도 줘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먹는 것이 훨씬 더 맛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약 10년 전에 수술을 했습니다. 편도선 절제 수술을 했습니다. 퉁퉁 부은 편도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었는데 잘라냈습니다. 집도의도 20년 의사생활을 했지만이렇게 큰 편도는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하튼 그것을 잘라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인들이 애를 낳는 것이 이보다 힘들까?’ 편도를 절제하고 꿰매었으니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어서 8kg나 빠졌습니다. 중국 요리를 좋아하지만 특별히 광동 요리를 좋아합니다. 동북 요리는 열 개를 시키면 세 개 정도는 입에 안 맞습니다. 그러나 광동 쪽 요리는 다 맛있습니다. 제가 모두 좋아하는 요리들입니다. 제가 특히 좋아하는 요리가 ‘충칭 라즈지’입니다. 바삭바삭하고 매우 맵습니다. 그것을 너무 좋아해서 편도선 수술을 받은 제가 그것을 먹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편도는 칼로 잘랐습니다. 그 매운 고추가 목으로 넘어갈 때 상상이 되십니까? 그러면 ‘충칭 라즈지’는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라즈지 자체는 너무 좋은 것이지만 아픈 내가 먹는 것은 너무 나쁜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는 좋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 진리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싫어합니까?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잘못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이 못 하게 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되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너무 좋은 것이고 쉽습니다. 연애를 해 보셨습니까? 서로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내가 딱 맞춰줄 때, 그래서 상대방이 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볼 때에 행복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도 특권처럼 느껴집니다. ‘나만 이렇게 해 줄 수 있어.’ 이것은 사랑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깨졌습니다. 그러면 ‘왜 나만 밥을 해야만 하지?’ ‘왜 내가 애를 셋이나 낳아서 길러야 해?’ ‘왜 나만 아침마다 와이셔츠를 다려서 바쳐야 하나? 너는 손도 없어?’ 라며 그 사람 마음에 자기가 합치시키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더 심해지면 아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이 남편의 마음에 너무 들어서 고맙다고 하면 다음부터는 아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제일 꼴 보기 싫은 것이 상대방이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사랑 하나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도’는 그리스도입니다. 진실해 진다는 것은 내 존재와 삶이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일생의 소원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려운 점이 나옵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르치는 대로 사람들에게 저절로 사랑이 생긴다면 목회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장땡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많이 아는데 진실하지 않습니다. 중국사회에도 그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농민공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겠습니까? 아니면 공부 많이 하고 권력을 많이 쥐고 있는 사람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겠습니까? 한국사회에서는 후자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몰지혜화가 이루어집니다. 지식은 많은데 그것이 지혜가 되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보니 진실 같은 그런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만들어 줄까? 그리스도를 애인처럼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까’ 그것이 관건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 되는 것’입니다. 그 ‘허물없다’는 말은 희랍어로 ‘아프로스코포스’(ἀπρόσκοπος)라는 단어인데 ‘아'는 없다는 것이고, ‘프로스코포스’는 흠집입니다. 예를 들면 대만에도 ‘배’가 있습니다. 대만의 배 한 박스 값은 한국의 배 한 개 값과 똑같습니다. 한국 배는 중국 배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한국의 배가 와삭하면서 아주 맛있습니다. 그것이 나오는 철이 가을입니다. 10월쯤입니다. 최고의 극상품,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은 한 개에 60위안 정도로 아주 비쌉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맛있어도 거기에 흠집이 없어야 합니다. 손톱자국이 났다든지, 어디에 긁혔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좋은 물건은 손님들이 만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손이 닿을 때 과일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으로만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흠집이 있으면 안 됩니다.
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나는 눈처럼 하얗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나는 예수님 보다 더 순수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흠집이 있는데 뭐, 어떻게 흠집 없이 살겠어? 그냥 적당히 죄 짓고 사는 거지’라고 하며 살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완전히 흠이 없을 수는 없지만 흠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목표를 세워야지만 많이 흠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 때에 많은 흠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살아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사람들은 지도자가 싫으면 온갖 비난을 합니다. 심지어는 없는 것도 있다고 하고 욕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흠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지만 다만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어려운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리통 속에 들어있는 사람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하라고 매일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관심사는 본인이 기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목회자는 기도하고 있나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할 때 꼭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그것이 왜 궁금할까요? 들려오는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면 자신들이 그것대로 살면 됩니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해 저는 열심히 노력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몇 시간이냐고 묻습니다. 어렵지요. 그러니까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여야 합니다.
결국 목회를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사모님에 대해서 교인들은 험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너무 사치스럽습니다. 너무 좋은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사모님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주일날은 주님의 날이니까 평소에는 화장을 안 하다가도 화장을 하고 옷 중에서도 제일 아끼는 좋은 옷을 입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자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하고 너무 수준이 차이가 난다고, 목사님의 집안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말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목사님이 ‘여보, 그렇게 잘 보이게 하고 다니지 마.’라고 했더니 사모님이 평소 하던 데로 하고 교회에 나갔답니다. 6개월쯤 지나서 또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충분히 사례비를 주는데 사모님은 식모처럼 하고 다니지? 저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대우를 안 해준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저러는 것일거야’ 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그냥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세요.’ 그냥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세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 다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 두 번째 진실한 성도가 되게 하는 것, 세 번째 허물없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4. 목회의 궁극적 목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해지고 허물이 없게 되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을 보면 ‘의의 열매가 가득차서’가 분사로 되어 있는데 그게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의의 열매가 가득 찬데 그게 ‘into’로 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가득 찬 것이 의미적으로 어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광과 찬송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의의 열매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되어 있는 의의 열매는 ‘디아데케’(διαθήκη)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언약’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륜을 따라 다르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의’라고 할 때 ‘의’를 조직신학적으로 규명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가 상주시는 의로 나타나고 벌주시는 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직신학적인 의라기보다는 의라고 하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맺게 해주시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져서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의의 열매를 맺는 주체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서 신학적으로 볼 때 의가 무슨 뜻일까요? 구약에서는 의가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법에 부합한 상태가 의입니다. 구약에서 의를 이야기할 때는 명료한 잣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그 사람이 의로운지 의롭지 않은지를 판단합니다. 율법에 부합한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의의 개념이 훨씬 더 적극적이고 풍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풍성하고 적극적이게 되었을까요? 핵심적인 것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가 됩니다. 그 의는 예수님이 죄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인류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담당하시므로 획득한 율법적인 의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바울신학의 새 관점에서는 이러한 전가의 교리를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나 알미니우스 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의를 주신 다음에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의를 이루면서 살게끔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을 부정하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은 과도적인 것이었고 이러한 옛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더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행동원칙으로 정리된 것이 구약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그 행동원칙으로 제시되는 것 이외에 그 이상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없었는가?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있었지만 구약의 성도들은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십계명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자신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닫습니다. 결국은 이 계명을 진정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바깥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몽학선생 삼아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제 3용도입니다. 그런 율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담겨진 뜻은 그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그들은 결코 십계명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십계명 중에 어떤 것들은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 같은 십계명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도록 만드셨는데 신약시대에는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인류 속에서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의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물론 율법에 부합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뜻을 이루어드리면서 사는 모든 인격과 삶의 열매가 의의 열매입니다. 훨씬 구약보다 포괄적입니다. 이런 저런 죄를 짓지 않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사랑의 원리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셨을 때 기대하셨던 뜻을 나라는 존재를 통해 성취하면서 살 때 성취된 열매를 많은 사람들이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의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로 맺혀지는 열매가 아니라 존재와 인격, 삶, 사역,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KJV에서는 ‘being filled with’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러한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의의 열매가 거의 없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앙과 목회 사역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과 의해서 결정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역의 목표입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
그러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목회사역을 하면서 성도들이 우리의 목양을 받으면서 얼마나 더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가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인격과 삶 속에서 그런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 우리 사역의 목표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하면 열매의 종류를 보면서 그 나무가 그 나무였다는 것도 알게 되고 ‘이 나무는 참 고맙구나, 이렇게 좋은 열매를 우리에게 주니 이 나무는 참 고마운 나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은 유익을 얻고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를 통해서 맺혀지는 인격적인 열매입니다. 인격이 밖으로 발산되어서 삶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에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저런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 그것이 그리스도시구나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독사’(do,xa)라고 되어 있는 ‘영광’은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홀로 갖고 계시는 영광입니다. 둘째는 발산적인 영광인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임하는 ‘쉐키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으므로 빛이 발산하면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고 장소적인 쉐키나들이 구약의 역사에 있어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지막 세 번째인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어떤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표현에 ‘I honor you’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나는 너를 찬송한다, 영광 돌린다’라기 보다는 ‘나는 너를 인정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광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 없지만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 앞에 굴복하여 그 영광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바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Effective Glory,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 목회사역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 가 우리 목회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는 단지 목청을 높이고 누군가를 정죄하는데 쓰이는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야하는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Soli Deo Gloria를 외치면서 남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Soli Deo Gloria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기도 목회를 통해서 성도들의 사랑을 불러 일으켜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점점 풍부해지고 결국 성도들이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될 때 그것을 통해 의의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의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과 찬송을 홀로 받으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Soli Deo Gloria의 목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결국 목회자의 영광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돌보라고 맡겨 주신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어떻게 점점 더 풍성해지게 되었고 결국 분별력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의 인격과 삶 속에 예전에 없던 하늘의 열매가, 그리스도의 열매가 얼마나 많이 맺히게 되었는지 그것이 바로 우리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물론 한해를 사역했을 때 얼마나 사람이 모였는가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태만한 사람을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그의 하는 일과 사역에 복을 거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사역이 쇠퇴하고 있으면 목회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면서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데 시련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내게서 목회의 은혜를 거두시는가를 고민해야합니다. 여러 해를 한 부서를 목회했는데 회심이 거의 없다면 근본적으로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가 혹은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내가 목회사역으로 들어온 것이 부르심이 없는데 나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더 필요하면 직업도 바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소명을 받은 가장 훌륭한 증거는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 되어 가는 것, 그것도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이 변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소명이 아니거나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목회 사역에서 거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성찰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껏 목양사역하면서 이런 열매가 얼마나 있었는지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목회는 원래 다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라헬이 야곱에게 앙탈을 부리면서 처절하게 울부짖습니다.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혼들의 회심과 변화의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되는 사람들이 목회자이고 그렇게 오래 사역하고 나면 그런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마지막으로 전치사 하나가 나옵니다. ‘디아 투 예수 그리스투’(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여기서 ‘디아’는 원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의 열매가 가득해져서 그 의의 열매가 영광과 찬송 속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 전하고 가르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연합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니오 쿰 그리스토(unio cum Christo),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의 이런 저런 모습을 다 깎아내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없애버리면 교회가 될 수 없는 마지막 하나의 요소를 이야기 하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과는 달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교회의 본질과 관련시켜서 꽉 붙들었기 때문에 신학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니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대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성자에게 부어주시고 성자에게 부어진 사랑과 생명은 그의 신부인 교회,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된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부어진 사랑과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는 개인,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 그리스도가 없는 개인, 이런 것들은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들입니다. 어떤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오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고 나는 교회에 접붙여진 몸이니 내가 이것을 받는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러한 생명과 사랑을 받을 때 나는 예수 안에 있고 다른 모든 형제들도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 원리에 의해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복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을 뿐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늘의 생명과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생명은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입니다.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을 조금 하면 갈등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깊이 하면 그 사랑이 엄청난 힘을 줍니다. 불신자로서 한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사생명입니다.
(노래)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Cause you don't love me any more
너무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햇빛이 계속 빛날까? 왜 파도는 해안가로 밀려오는 것일까? 왜 새들은 노래하고 왜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을까? 당신이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세상은 끝이 났는데.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사한 생명을 많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모상입니다. 사랑하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빗나간 사랑이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에너지를 줍니다. 그리고 잃어버릴 때 삶에 대한 애착도 함께 놓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인데 그 사랑은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추구해나갈 때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사랑의 힘을 한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온갖 시련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셀린디온이 불러서 히트를 쳤던 ‘The power of Love’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때로는 두렵기는 해요. 그렇지만 당신과 사랑하는 일을 그만 두려고 하는 생각은 몇 광년 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과 함께 사랑의 능력을 배우고 싶어요.’ 이런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목회사역을 어떤 사람은 ‘환희와 희열’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바람직하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순간들입니다. 목회를 하다가 너무 보람이 있고 기쁠 때는 하나님이 예외적인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눈물 나게 고생스럽고 당장 그만두고 싶은 미칠 것 같은 고통을 겪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크기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크기만큼 그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하게 하는 동력이 목회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말씀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변화되고 나를 예수님 다음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열심히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교역자가 아니라 배설물 같이 알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치 자기 종처럼 취급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참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참게 만드는 힘, 목회를 하게 하는 힘이 목회 자체 안에서 오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물어보신 것이 ‘네가 양 떼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어보셨던 것입니다. 교회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목회에 동기가 되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닙니다. 목회의 즐거움을 교인들에게서 찾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듣고 은혜 받는 사람들만 목양하는 목회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23년 동안 목회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목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목회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회하다가 외로우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에서의 외로움은 그렇게 달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사들과 성도들을 붙들어 주기 위해서 나의 가정을 개방하고 같이 밥도 먹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격려를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그렇게 사랑해주셨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쳐서 그 생명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어느 정도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요즘 목회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홀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으면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목회자로서의 강직함과 품위를 지키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어지는 생명과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목회인데 예수와 연합된 교회의 몸인 한 지체로서의 우리 목회자가 다른 지체인 교인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교회론적인 발언입니다.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신학적으로 인성적 연합이라고 하는 것인데) 모든 인류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인류는 그렇게 됩니다. 멸망할 사람들은 멸망하지만 남아 있는 모든 인류는 그렇게 한 몸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또 다른 몸의 한 지체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 충만한 생명의 힘으로 우리들이 살아갑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에서 네 번에 걸쳐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드렸고 마지막에 한 번이 더 남았는데 맨 앞에 시작되는 구절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입니다. 총 5시리즈로 구성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한 해 동안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잘 기억하면서 완성도가 높은 목회사역을 하여 여러분들도 변화되고 성도들도 변화되는 은혜가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5. 예수의 심장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저희는 9절부터 11절까지 네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네 번의 강의를 간략히 다시 한 번 요약하고 오늘 마지막 설교 8절을 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기쁨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사랑을 …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것이 첫 시간에 배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는 기도다. 그리고 목회는 성도들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을 풍성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이 사랑이 어떻게 풍성해지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은 지식과 총명 때문에 점점 더 풍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한 그림을 그려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입니다. 그 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불길은 지식과 총명이라는 나무를 태우며 더욱 거센 불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간은 목회의 세 목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첫째의 목표는 그렇게 성도들을 돌보아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선한 것’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희랍어 단어는 ‘디아페론타’, ‘다른 것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진리와 유사해 보이는 많은 것들을 올바로 분별해내는 것,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목양의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의 두 번째 목표였습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객관적인 진리인 도에 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삶과 더불어 일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중에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은 있지만 신 앞에 진실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위선자는 마음에 없는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종종 마음에 없는 악을 행하는 사람을 위악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누구도 지어낸 행동을 일관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삼투압 현상처럼 한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인격과 생활은 결국 낮은 쪽으로 일치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목표가 허물없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무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티나 흠집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좋은 과일이라도, 배가 아주 크고 좋고 맛있어도 겉에 흠집이 생기면 가격이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죄인인데 완벽하게 흠 없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렇게 살 것처럼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살 때 비교적 흠이 적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한 비유를 들어드렸습니다. 인간은 어느 때도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으나 그러나 원을 그릴 때는 어차피 완벽한 원을 못 그려도 마치 완벽한 원이 그려질 수 있는 것처럼 머릿속에 생각하며 그려낸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의 세 목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풍성하게 해서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고,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시간에는 그렇게 해서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 싶은가를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의의 열매가 가득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디카이오시네’(의, δικαιοσύνη)였습니다. 그리고 이 의의 개념이 구약에서는 율법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신약에서는 이 율법이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율법을 통해 복음을 보고, 신약에서는 복음을 통해 율법을 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율법이 지시하는 바를 참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최고의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의에 대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가득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그것이 바로 인류가 모든 사람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하는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류의 연합의 완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질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미 침투했고 그것을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이상은 우선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확장되는 것이 전도인데 전도는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 가인처럼 살인하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과 이웃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종말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사회의 이상을 먼저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목표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고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영광에는 크게 세 가지 영광이 있는데 본질적 영광, 발산적 영광, 효과적 영광인데 여기서는 세 번째 효과적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그분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찬송이 된다는 말은 그분을 모르던 사람들이 의의 열매를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을 높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들에게 전했던 말씀의 가장 짧은 요약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은 8절을 보려고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심장’이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스프랑크나’(σπλάγχνον)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심장으로 번역이 되어있지만 원래 심장이라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카르디아’(καρδια)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cardiology라고 하면 심장학, cardiographer는 심장 박동계입니다. 그래서 ‘카르디아’라고 하는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이 ‘스프랑크나’라고 하는 단어는 놀랍게도 ‘창자’라는 뜻입니다. 복수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일까요?
중국어 성경에도 아마 심장(心腸)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마음 심과 창자 장. 굉장히 절묘한 번역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영혼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얘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평균적으로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마음에 있다고 보십니까? 마음은 실재(實在)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은 마음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너는 내 생각 속에 있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있는 게 아니라 “너에 대한 생각이 내 정신 안에 있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실재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안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중국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혹시 유물론 때문에 그런 관심사가 사라져 버린 건 아닙니까? 장자, 맹자, 공자와 같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애간장에 있다고 흔히들 이야기한다구요? 여러분 모두 동의합니까? 어쨌든 창자에 있는 건 똑같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노장사상에서도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미신적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사상의 영혼학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조선의 유학에서는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민간신앙에서니 믿는 것이지 정통 유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그 단어는 창자를 가리킵니다. 창자의 일부가 아니라 위 아래 있는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이 창자를 심장으로 번역을 했을까요? 이게 소위 이야기하는 문화적 등가번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인간의 영혼은 심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할 때에도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합니다. 또 왕이나 높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할 때도 심장에다가 손을 댑니다.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쓴 호머의 문학에 보면 인간의 영혼이 등 척추뼈 중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등뼈 중앙에 있어서 사지로 뻗쳐진 낚싯줄 같은 것을 영혼이 꽉 쥐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이 떠나가면 줄이 탁 풀리면서 온몸이 통제할 수 없이 풀어져버린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칼로 등을 찔렀다. 그리고 다시 칼을 뺐을 때에는 실처럼 영혼이 묻어나왔다.”
아프리카 콩고의 지도자 가운데 1925년부터 2003년까지 살았던 사람 가운데 이디 아민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독재자였습니다. 하사관 출신이었는데 나라를 쿠데타로 장악하고 엄청난 독재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주동자를 죽여서 배를 갈랐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간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간을 회로 먹었습니다. 그 광경을 사람들이 보면서 경악을 했습니다. 그것이 영혼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내버려두면 이 영혼이 다시 부활해서 자기를 해칠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영혼이 간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영혼이 다시 부활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씹어서 그것을 먹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그를 가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KJV)을 보면 “in the bowels of Jesus Christ”라고 번역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자들 안에서”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사는 복수인데 이게 동사로 사용이 됩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마태복음 9장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나오는데 이 단어가 ‘에스플랑크니쉬데’(ἐσπλαγχνίσθη)라는 단어입니다. 수동태 과거형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창자까지 흔들리도록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애절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마음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에스플랑크니쉬데’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한다면 이러지 않을까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애간장이 녹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가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자기가 도울 수 없을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마음의 상태를 ‘애간장이 녹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얼마나 근심을 하고 마음 아파했는지 창자가 녹아서 내리는 겁니다.
중국어에는 그런 절실한 표현이 있습니까? (마음이 녹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더 강렬한 표현이 있습니까? (간장이 토막이 난다. 끊어진다.) 그런 표현은 우리도 씁니다. ‘애간장이 끊어진다.’ 제가 알기로는 중국 고사가 있는 걸로 아는데 단장(斷腸)인 것 같습니다.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왔는데 어미가 멀리까지 따라와 죽은 것을 보고 그 배를 갈랐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다 끊어졌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공감하겠습니까? 그런 의미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애간장이 그렇게 녹는 것처럼 그런 뜻으로 “예수의 심장”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사랑이 자기에서 스스로 자가발전된 것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생겨난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이 소유격은 주격적 소유격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 그런 뜻입니다.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라도 절실하게 했든가 실패를 해본 사람들은 잘 압니다. 혹은 자식을 사랑해본 사람이나 하다못해 강아지라도 사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실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나서 제가 3일씩 밥도 못 먹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에게 개를 못 기르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가슴 아픈 기억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극대화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바울이 그런 심장을 가지고 너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면서 가지셨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왜 민망히 여기셨을까요? 많은 영혼이 유리하고 고생했기 때문에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건져서 주님의 애가 끊어지는 마음을 덜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섬김이고 목양입니다. 전도와 목양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혼을 돌보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심장을 가진 사도바울의 모든 관심은 자신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은 곧 죽을지도 모르는 사형당하는 죄수였지만 그의 관심사는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to die is to gain)고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는다면 자신이 온전히 예수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염려되는 것은 교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했냐면 ‘이 고통이 많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내게 정말 좋은 것이다.’ 그 다음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근데 너희를 생각한다면 내가 좀 더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사도바울의 삶의 이유가 -삶의 동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나는 나만을 생각한다면 현실의 고생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미래의 행복 그 사이에서 더 많이 괴로움을 당하지 말고 죽는 게 좋을 것이다.’는 말입니다.
저도 심히 험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21살에 회심하기 전까지 그랬고 그 후에도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만약에 주님이 여러분의 머리가 하얗게 되고,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얘야. 내가 너에게 한 번 더 삶의 기회를 주겠다. 다시 태어나거라.”라고 말씀하신다면 다시 태어날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찬성표를 들어도 제가 주님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주님, 됐습니다. 한번 산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봐. 이번에 더 좋은 부모님을 만나봐. 더 예쁜 자매를 만나고 영화와 같은 사랑을 해봐. 네가 하고 싶은 공부도 더 하고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한번 여행도 맘껏 해보고 부자도 되어봐.”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다 괜찮습니다. 한번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청년하고 대화를 했습니다. “쟤들 부럽지 않니?” 너무 어린, 당시 19, 20살이었습니다. “아니요.” “왜 안 부럽니?” 힘이 있고 모든 남자들이 좋아하고 총미하고 진짜 어린 자매들이 지나가면 냄새도 다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들어가면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그렇지 않냐?” 싫다고 합니다. “왜?” “내가 왜 그 예쁜 얼굴 하나를 위해 죽을 것 같은 20대로 돌아갑니까?” “싫다.” 그 청년들이 그러니 나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게 하는 것, 그렇게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일단 한번 자신이 힘든 인생을 산다고 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너무 가벼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만 부당하게 다루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비교의식이 생겨나고 나면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회심하기 전 불신앙이어도 한 가지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신나는 인생이라고 해도 남의 인생을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눈물이 나고 피를 토해고 다 못가고 죽어버리더라도 내게 부여된 인생을 살고 싶다. 나의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 그런데 그 주체를 그리스도 밖에서 찾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끊임없이 주체가 되려고 노력하고 노력할수록 삶에 있어서 무지무지한 ‘소외’를 경험했습니다. 나중에 신앙을 갖고 보니까 설명이 되었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 안에 참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 돌아가고 난 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자기가 지속적으로 있을 때 그때 자신이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서 한 인간이 가장 훌륭하게 누구에 있어서도 노예가 되지 않고 자기의 삶의 완전한 주체가 된 표현이 나옵니다. 그 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게 바로 가장 완전한 자기 주체성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인간은 최고의 휴머니즘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이 창자에 이르기까지 가슴이 저미도록 성도들을 사랑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돈을 주셔서 그렇습니까? 직분을 주셔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를 사랑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였습니다. 자기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고가 안 나는데 예전에는 기차 건널목 사고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기찻길이 따로 있고 도로가 넘어가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기차가 이리로 지나가고 차가 이리로 지나갔습니다. 어린아이가 딴 데 정신을 팔다가 기차가 오는 것을 모르고 기차 건널목으로 들어섰습니다. 건널목을 관리하던 관리사가 그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들어서 그 아이를 밀쳐내고 자기는 무참하게 깔려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 구출하려던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엄마가 왔습니다. 그리고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죽는 게 더 좋았을텐데.’ 이러지는 않습니다. 죄 없는 그 관리요원이 죽었기 때문에 그 엄마는 죽은 남자의 부인, 부모님, 자식 앞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를 죽인 것은 아니었고, 죽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아의 엄마는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 자기 가정 때문에 죽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렇다면 만약 그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떨쳐버릴 수가 있을까요? 떨쳐버릴 수 있다면 너무 철면피한 사람 아닙니까? 그게 바로 대속입니다. 그것 때문에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위증이라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위증을 한다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 TV에서 청문회를 하는 것을 보면 다 돌에 맞을 사람들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란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위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십계명을 어긴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위증이 불가능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이러한 고백은 자신의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이 영혼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목회는 -영혼을 돌보는 일은- 사람들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와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목회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상처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를 통해서 자기가 떠받들어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하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창자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목양을 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예수의 심장이 있느냐, 예수의 창자가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정말 영혼들이 미끄러지고 주님을 멀리 떠날 때 그 창자가 원숭이처럼 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목회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고 우셨다는 이야기는 3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을 위해 함께 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두 연약한 인간인데 어떻게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자가발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여기 청년들은 모두 한사람 앞에 50명 내지 100명씩 돌보는 목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돌아가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게 목양의 사명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실 때만 주님의 사람이지 놓아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께 꼭 붙들려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