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 참음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 해설
지난 겨울에는 <목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만, 올해 여름수련회 때에는 <목회자의 덕목>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처음 생각해 볼 것은 ‘인내’입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 교회였습니다. 분쟁의 문제, 도덕적인 타락의 문제, 교만의 문제, 이러한 것들도 사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사도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하였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나머지 열한 사도들, 가룟유다가 죽은 후에 뒤에 맛디아가 뽑혔는데, 마지막 사도들까지 모두 공통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 생애를 모두 본 사람들이 사도가 될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도바울은 사실 그 범주에는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사도직은 독특하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명된 사도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의 목양의 감화를 받을 때에는 그러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신앙이 식고 사도바울의 가르침이 너무 엄격하다고 불평이 터져 나오면서 일부에서 그러한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사도는 지금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크다는 모든 사도들보다 내가 더 크다.”
저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나머지 열두 사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드러낸 것과…”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사도바울이 이야기 할 때, 사도는 열두 사도를 염두에 두고 그들과 키 재기를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람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혹은 그릇된 가르침을 쫓아 마음이 혹할 때 그들이 위대하고 커서 사도처럼 보인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많이 빼앗겼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비롯하여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 봅니다.
II. 사도된 표: 참음(ὑπομονή)
그러면서 사도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나, 사실은 사도 맞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이 사람이 사도가 된 원인을 가지고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캐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사도행전에는 세 번이나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열매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나에게 사도된 ‘표’가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표’라는 헬라어 단어가 ‘세메이원’(σημεῖον)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메이원’은 원래 ‘표적’ ‘이적’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던 것이 기이하고, 또 하나는 뒤에 ‘표적’과 ‘기사’가 나오는데, 그때에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세메이원’이라는 단어가 기적, 표적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내가 사도라는 것을 하나 제시하겠는데, 진짜 놀라운 거다. 사도가 아니라면 이러한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사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표가) 복수로 나옵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무슨 사역을 하든지 간에 항상 ‘세메이원’이 따라 다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복수인 ‘세메이아’(σημεῖα)로 나오는데, 그 ‘세메이아’가 무엇인지 뒤이어 소개됩니다. 먼저 ‘휘포모네’(ὑπομονή)라고 나옵니다. ‘참음’입니다. 이것도 역시 복수로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세메이아’가 복수이므로, ‘휘포메네’ 이 단어도 복수로 나옵니다. 이 둘이 짝을 맞추면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그 표가 따라 다니는데 그 표가 바로 ‘참음’이었다고 말합니다. 뒤에 나오는 ‘표적’과 ‘기사’와 같은 것들은 사도 시대에는 매우 특별히 따라다닌, 하나님의 일회적 은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학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도들에게도 있었던 것이기에 제쳐놓고, 사도바울이 특이하게 ‘참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표였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너희들이 사도라고 생각하며 존경하고 따라가는 인기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진짜 사도인데,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표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도가 아니었다면 그 세메이온은 없었을 것이다. 그 세메이온이 바로 참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음’ 뒤에 나오는 것, ‘표적’과 ‘기사’가 어쩌면 더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사도들을 미친 듯이 따랐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말로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홀린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확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한 것들을 모두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속이는 영’이었습니다. 사도는 오늘 사도됨의 표를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다 밀쳐 버립니다. ‘표적, 기사, 능력, 이러한 것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만 가지고는 참 사도를 분간하기 어렵다. 바로 이것을 제쳐 놓으면서 진짜 사도라 할 수 없는데, 그 덕목이 바로 참음(휘포메네), 인내, 견디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궁금증이 있는데 저는 이 말씀을 한 15-16년 전에 만난 이후 어떤 의미에서 나를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늘 붙들어주는,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생각하였던 것이 ‘어떻게 참음이라는 것이 사도가 된 가장 중요한 세메이온이 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참음에 대해서 정의해야 합니다. 참는다는 것은 감각이 둔해서 그냥 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환경이 불편하면 즉시 환경을 바꿔야 시원한 사람이 있고, 그냥 그런대로 잘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견딘다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별로 없어서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집에 가서도 집안이 산란하면 정리를 해주고 싶습니다. 그것을 못 견딥니다. 정돈을 해 놓아야 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른 나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 상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 불평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것은 견딤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여기에서 ‘견딘다, 참는다’고 하는 것은 제일 먼저 ‘고난’을 참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복음전파자로서, 선교사로서 당한 많은 고난들.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듯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 소망까지 끊어져 마음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그러한 많은 고난,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음이 이유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참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지저분한 환경 속에서 늘 살 수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사람들은 참는 중이 아닙니다. 원래 생긴 게 그렇게 생겼습니다. 별로 상 받을 게 없습니다. 무엇인가 그러한 환경에서도 감각이 없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들은 무슨 목표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성이 게을러서 치우기 싫고 사람이 지저분해서 지저분한데 있어도 돼지가 우리에 있는 것처럼 편한 것입니다. 돼지를 카페트에 올려 놓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습기도 없고, 드러누울 똥도 없고, 먹을 여물통도 없는데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러한 것이 자신에게 맞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참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음은 언제나 목표, 목적을 전제합니다. 목적을 가지고 참는 것입니다.
(예화) 800m 달리기 선수들이 달리기를 합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상태 속에서도 800m 달리는데도 1분 30초에 끊으니까 그러면 8로 나누면 100m에 16초 정도에 끊으면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16초에 달리라고 하면 심장이 뒤집어 질 것처럼 될 것입니다. 그것을 800m를 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지막 골인 해야겠다고 하는 목표 하나를 가지고 달립니다. 그러한 종류가 바로 참음입니다.
III. 사랑으로 인한 참음
세 번째로,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이 참는 것이 그렇게 위대한 사도의 표라고 말하였겠습니까? 이러한 반문을 해 봅니다. 무엇이 그 괴로움을 참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그 극한 괴로움과 고통을 참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 목표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총체적인 목표 뿐 만 아니라 개별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잊어버렸겠지만, 『죄와 은혜의 지배』를 공부하면서 이러한 교리를 배운 바가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순종해야 되겠다고 먹는 마음이 개별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신자를 잘 목양해서 지식과 총명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분별력과 진실함과 허물없음의 사람들이 되게 해서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 번에 배운 것입니다. 그것이 총체적인 것입니다. 어느 목회자도 어느 한순간에 ‘나는 이제 신학교 들어갈 때 그 목적에 동의했는데, 이제 동의할 수 없어.’ 이러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두신 것’입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래도 견딥니다. 힘이 듭니다. 또 견딥니다. 쉬고 싶습니다. 그래도 참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견뎌 냅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적인 것입니다. 개별적인 참음입니다. 그것들을 다시 세분화 하면 그 길을 계속해서 견디면서 걸어가고자 할 때 수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수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매순간 매순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목회자들이 어떻게 미끄러지는지 아십니까? 목회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얘야, 너는 이제 이 목회지에서 떠나서 선교를 가거라.’ 혹은 ‘이 교회를 떠나서 어디로 가거라.’ 아니면 ‘이 사역을 그만두고 저 사역을 하거라.’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일로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는 길이 어느 순간에 너무 힘이 들어서 시작됩니다. 그 때에 지성적인 수많은 유혹하는 대안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합리화를 찾습니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내가 목회를 그만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 내가 지금 몇 년 쉬고 재충전하여 이다음에 더 크게 쓰임을 받아야지.’ 등등으로 타협이 이루어져 어느 한순간에 미끄러집니다. 물론 하나님이 너무 뜨겁게 사랑하셔서 주권적으로 옮기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대부분 자기 자신이 그런 데서 한계를 느낍니다. 그때 합리화 할 수 있는 재료들을 찾으면서 끝이 납니다. 깊은 근원을 더듬어서 이것을 지적하면 결국 그 사람이 한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거기에서 그 일을 그만둔다고 해서 주님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길을 버리고 장사를 하겠다고, 또는 회사원이 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은 다 판단을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결정하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은혜생활을 하면서 이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는 사람들은 주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가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목표가 너무너무 가치 있기 때문에 그 현실 속에서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냅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내가 더 이상 못할 것 같은데 그런데 기도하면 그것을 이기며 나아갈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생겨납니다. 그 힘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는 뭘 이야기 하는가 하면,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자신의 참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거기에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쭉 나오면서 세 번 반복해 나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참고 견디느니라.” 세 번 반복되는 속성이 유일하게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경험하게 된 까리따스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떠올랐던 속성이 뭐냐 하면 ‘오래참고’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로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전승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성격이 매우 불같고 독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참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보면 히브리서를 포함하여 참음을 이야기 하면서, 가장 훌륭한 모델로 등장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결국 많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 점에 있어서 받은 감화가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실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도가 그러한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입으면서 가장 집요하게 주님이 깨뜨리셨던 부분이 바로 불같은 성격, 참지 못하는 마음, 이러한 것들 이었던 것 같습니다. 참음에 대해서 수없이 나오는데, 솔직히 이야기해서 사도바울만 그렇게 고난을 겪었겠습니까. 모든 사도들이 다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가 워낙 압도적으로 성경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또한 누가가 사도바울의 비서처럼 일하면서 두 번이나 추가하지 않습니까. 절대 다수가 사실은 사도바울에 포커스를 맞춰서 신약성경이 기록이 됩니다. 사도바울의 경험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을 깨뜨려 사랑으로 굴복시키며 참게 만들어 가시는 그 모든 자기 깨어짐의 과정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 오래있었다는 것 때문에 뭐든지 특별하게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 하나는 뭐냐 하면 그가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인내하며 주님을 섬겼던 기간이 얼마인가, 그것은 그가 장소를 불문하고 그가 어디에 있었든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측정하는 척도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끊임없는 마음의 괴로움, 목회 자체가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교사들과 구역장들 많지 않습니까? 연말이 되면 자꾸 그만둔다고 하는데, 우리교회는 그래도 좀 괜찮은 편인데 다른 교회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50%이상이 거의 빠져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50%는 뜨거운 은혜가 있어서 남는 것이겠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것을 천직으로 생각해서 그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지만, 오래 교사를 하다보니까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게끔 된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매스를 데고 정확하게 갈라보면 사실은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않은 것들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떠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면 왜 떠나는지 아십니까? 일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을 줄여줘도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있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힘이든 것입니다.
(예화) 저는 평신도를 다 경험하였습니다. 21세에 회심하며 6개월 정도 은혜 생활 한 후에 미끄러졌습니다. 미끄러져도 교회는 여전히 나왔습니다. 교회가 작으니까 주일학교 교사도 했습니다. 토요일이면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실컷 먹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포도주도 먹고 하는데 하루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설교를 할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코 꿰어서 그냥 했었습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신앙이나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죽겠는데, 설교를 누가 하든지 주일 재껴 버리면 한 달만 안 나가면 교회에서도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께 절대로 우리 집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교인 100명 밖에 안 되는 교회였습니다. 심방 오시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술이 깨서 탁 일어나면 가야 했습니다. 그 당시 신학교도 가지 않은 때였는데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겠습니까? 옛날에 주님을 조금 만났지만 별로 은혜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냥 아이들 설교집, 공과, 이러한 것을 가져다 놓고 찾아서 해 보는 것입니다. 저는 담배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토요일 저녁때 성경을 펴 놓고 담배를 한 대 물고 뻐끔뻐끔 피면서 성경위에 훅 하곤 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아예 없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설교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목회자였다면 절대로 그런 녀석 데려다가 설교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껌 좀 씹으면서 교회를 갑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 괴롭습니다. ‘다음 주에 목사님을 만나서 담판을 져야지. 못한다고 해야지. 못한다고 해야지.’ 그런데 눈에 훤하였습니다. 내가 가고 나면 아무리 돌아봐도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한 성경의 구절을 보면서 이것도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생각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교사들이 은혜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 있는 것, 그 자체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그냥 고스톱이나 치고 술이나 마시고 싶은 사람을 데려다가 여름수련회에 앉혀 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코드가 안 맞아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코드가 맞으려면 뭐가 필요한가 하면 끊임없이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 목표가 지금 나의 안락한 삶보다 더 빛나야 합니다. 그래야지 참을 수가 있습니다.
(예화) 전도사 때 150명 정도의 교회에 있었는데 목사님이 얼마나 괴롭히던지, 심장에 병이 생길정도로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있기 싫었습니다. 목사님과 한번 부딪혔습니다. 그 이야기는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그러면서 교회를 떠나야 되겠다고 마음의 결심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에게 떠난다고 말씀 드려도 놀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 당시 아내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착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랬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데 목사님과 헤어지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았으나 맡고 있는 영혼들이 그림처럼 떠오르면서 하나하나 심장을 찢는 것 같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울었습니다.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사람보고 교회에 충성한 것이 아닌데... 그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지만 더 있자.’ 그리고는 교회를 계속해서 섬겼습니다. 목사님은 나를 굉장히 신뢰하였습니다. 당신 교회를 나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해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150명 모이는 교회를 욕심낼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랬습니다. 나를 못 떠나게 한 그 사랑이 결국 내가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꽉 붙들고 “목자로서 이 양떼들을 버리지 말아라.” 가슴이 찢어지게 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김철수 선교사가 나보다 한참 어립니다. 다섯 살, 여섯 살 정도 어립니다. 신대원에서 만났는데, 교회를 일 년에 한 번씩 옮깁니다. 저는 그 당시 교회를 섬긴 지 8년이 되었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모든 상황으로부터 교회를 떠나야 하는데 더 이상 있고 싶지가 않다고, 그러나 기도를 하면 그 영혼들과 헤어질 수 없다고 하면서 제가 막 울었습니다. 그러자 김철수 선교사가 형이 너무 양떼들과 사랑이 깊어서 그러니 자신이 기도해 주겠다고 하여 한 동안 그 교회를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참음은 사랑이 만들어내는데, 사랑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끊임없이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목회사역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 이 길을 들어설 때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 이 길을 들어섰지, 우리가 육신의 영화를 위해서 이 길을 들어섰겠는가, 우리가 그것에 충분하지 않고 처음 총체적으로 우리가 생각했어도 수시로 우리가 인간의 더러운 욕망에 의해서 순수함이 수시로 위협을 받기 때문에 매순간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면서 씻어내서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내가 여기에 서 있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횟수로 8년을 그 교회에 있으면서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부른 찬송이 그 시절 제일 좋아하던 찬송이었습니다. 눈물 없이는 못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참음의 원천이고 그것은 기적을 행하고 역사를 일으키고 유능하게 설교를 하고, 머리가 총명해서 조직을 잘 이끌어가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한 덕목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 중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째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그러면서 덧붙이십니다.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 강령이라는 말이 희랍어로 ‘벽에 박힌 못’이란 의미입니다. 못을 거기에다가 다 걸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못이 박혀 있고, 거기에 율법, 선지자의 글, 모든 가르침이 거기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걸려 있지 않으면 땅에 떨어집니다. 원래 주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구약을 관통하면서 신약까지 흐르는 일관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덕목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회복시키실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 이후에 모든 목회자들이 될 때에 목회의 꿈을 꾸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사랑에 사로잡히면서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르실 때 그렇게 불렀으면 그 부르심대로 살기 위해서 당연히 그 사랑이 충만하게 그 목회자 안에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다가 집어 던져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쓰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그 사람들만 거기에 오래토록 있을 수 있습니다. 다 남이 진 십자가는 작고 가볍고 아주 훌륭해 보이고, 내가 지는 십자가는 불공평하고 무거운 십자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화) 한 12년 전 열린공간 마당에서 아침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후배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선배님, 정말 부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배님을 부러워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부러운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나를 부러워하지만, 당신이 여기에 있으면 한 달도 못되어서 사표될 걸.”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래서 나는 기쁨의 목회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100%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신뢰하는가 하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너무 넘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있어도 그것을 이길 수 있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평안과 기쁨은 그 따위 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면 아멘, 그러한 점에서 저는 믿습니다. 확실히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목회를 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안 일어나기 때문에 기쁨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목회를 꿈꿉니다. 제가 단연코 말하는 데 그러한 것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재껴 놓으셨던가, 여러분 마음들이 하나님을 떠났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 지체로서 그 교회의 양떼들을 목양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아픈 게 많은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서 사랑의 합치를 이룬 우리에게 고통이 없고 괴로움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서 있을 자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성에 있어서 사도바울이 우리만 못하였겠습니까? 주님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 우리만 못하였겠습니까? 신학적인 깊이가 우리만 못하였겠습니까? 인격이 우리만 못하였겠습니까? 그런 사람도 괴롭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자신은 안 괴롭다고 하는 것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 그러한 면에서는 내가 인정을 하지만, 잘난 척이거나 과장이 항상 묻어 있는 것입니다.
24년 동안 담임 목회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쓰셨고, 저만큼 좋은 일을 수없이 본 목회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괴롭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신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긴 세월 목회하면서 지나왔지만 저는 말합니다. “설교는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다. 그리고 목회는 지금도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입니다.”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습니다. 가슴 아프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내가 거기 있는 게 좋다고 하시니까 참는 것이지, 내 마음 대로 하라고 하면 내가 이 짐을 당장 벗어 버리지요. 그러한 면에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이 그것을 참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설교는 나에게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 가슴앓이가 좋다고 하면 그것은 정직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이 너무 고귀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받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나 같은 것이 조금 희생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까 참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참으십시오. 인내하십시오. 모든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인내하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진짜 주님을 만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는 움직일 수 없는 표입니다. 스티로폼 엉덩이같이 한 교회 가서 1년, 2년 있다가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들이 탁월한 목회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훌륭한 설교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던 80년, 81년도부터 시작해서 36, 37년 어간에 수많은 파도를 저는 보았습니다. 그 파도위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 이름 세자가 남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영원히 빛나게 만들어주는 것은 주님의 손에 꽉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한번 정직하게 하나 물어봅시다. 목회사역에 문을 두들이고 내 인생을 다 드리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신학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때보다 신학지식도 늘어났을 것입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늘어났을 것입니다. 사역의 경험도 늘어나고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말 네가 참음의 사람인가?” “인내의 사람인가?” “예수님 때문에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람인가?” 그것을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꽉 붙들고, 반대로 이야기 하면 주님의 손에 꽉 붙들려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그 사람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경만 있습니다. 어디 가서 설교하든지 듣는 영혼들이 있을 것이고, 듣는다면 그 중에는 변화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중점은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 그렇게 되고 그렇게 되어도 너무너무 고달픈 길입니다. 나라면 그 길을 자청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가치를 세상의 척도에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이 나이에 몇 천 명 모이는 교회 목사님만 바라보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꿈을 꾼다면 여러분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한 거품들에 대한 환상은 진실하려고 수없이 노력하여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화) 1985년인가 1986년도에 대한예수교합동측 경기노회에서 신문, 언론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목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권총으로 쏴서 죽였습니다. 이유는 2500만원의 돈을 빼앗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경찰에서 수사하였는데 대답이 아주 재밌습니다. 그 2500만원으로 교회를 지으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하는데, 그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저 말이 상당히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사람은 열등감이 굉장히 심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주변에 목회를 하는 친구들을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자기보다 공부를 못하였는데도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보니 번듯한 예배당을 지어서라고 여겼습니다. 그 당시 2500만원이면 큰돈이었습니다. 방배동에서 방2개짜리 빌라 2층집이 350만원이면 전세를 얻을 정도였으니까 2500만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관양동 와서 32평 정도의 아파트를 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심한 열등감 속에서 그런 큰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한 꿈은 야망입니다.
칼빈은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존재의 의미는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에 있다.”하였습니다. 순수하고 크면 물론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빛나는 빛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 존재의 의미라면 목회자도 마찬가지로 그 가르침을 따라서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톨릭의 목회자들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자유롭습니다. 발령을 내지 않습니까. 오래 있지 않습니다. 2년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집니다. 간다고 해서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활동비 조금 더 줄지 모르겠습니다. 어딜 옮겼다고 해서, 조그마한 교회로 옮겼다고 해서 욕먹는 것도 아니므로 부담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정말 주님의 경륜을 이루어드리는 목회를 하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가겠다. 그리고 내가 보석과 같이 보일 그 자리가 어디일까?’ 그것이 열린교회 담임목사의 자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너무 작은 개척교회일수도 있고, 노인들만 잔뜩 살고 있는 시골 작은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예 젊은이라고는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죽어서, 자기의 품안에 죽어가는 노인들만 있는 그 마을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역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마음속에서 탈각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역사적인 인물들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이 사용하셨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 것들이 부족한가?’ 그것을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청교도 책들과 위인들의 전기를 엄청나게 읽으면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나 자신은 항상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부끄러워서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정말 불완전한 사랑이고 이러한 식의 사랑이 정말 주님께 합당한 사랑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확 타오릅니다. 무슨 꿈이 있겠습니까? 진짜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무슨 꿈이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 꿈꾸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영혼들이 돌아온다는 소식,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 그들이 고통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신앙으로 산다는 이야기,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토록 견디면서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실재적인 참음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참는 것을 사도바울은 성공한 사람이나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무렐리우스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완전한 참음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그분을 모본으로 삼으면서 참은 것입니다. 참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는 것은 참음이 아닙니다. 더 이상 자신이 못 견딜 것 같다고 하는 그 한계에서부터 참는 것입니다. 그 안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축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졌습니다. 골 몰고 막 달려갑니다. 폐가 터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대1 노마크 찬스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골을 몰고 들어갑니다. 왜 입니까? 한 골 넣었을 때 수많은 여전도사님들이 쳐 주는 박수를 생각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는 것입니다. 한계를 탁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논리적으로 그 참음의 정도는 점점 더 점점 더 심해 질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허파가 터질 것 같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늘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만큼 우리가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너를 보는 이 마다 주를 생각하리
그러면서 어느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는가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주를 생각하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속에 형성된 인격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삽니까 하는데 매일 매일 한계 상황을 만나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폐활량을 늘려 가듯이 그렇게 터질 것 같으면서도 더 참고, 참았다 싶으면 또 다른 고통스러운 일을 주셔서 또 참게 하시고, 또 참게 하시고 하면서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 능력 범위 안에 들어온 속에서는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이태리에 후배 하나가 있습니다. 그 후배 교회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이 열리니까 이제 같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책도 몇 권 읽었습니다. 탁월하게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부터 시작해서 몇 권을 읽었는데 자신이 이 교회를 와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잠을 자다 깨었는데 고양이 우는 소리가 나더랍니다. 길 고양이가 여기까지 들어왔나, 아무리 봐도 고양이 소리인데 화장실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새벽2시였는데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아내가 화장실에 엎드려 우는 소리였습니다. 목회가 너무 너무 괴로우니까 우울증까지 와서 사모가 신음하면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참겠는데, 아내가 우울증에 걸리기까지 힘들어 하니까 순간 유혹이 오더랍니다. ‘야, 가정이 살고 봐야지.’ 그러나 그것을 다 견디는 것입니다. 참, 대단하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두셔서 그렇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민교회는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시면 가십시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안전합니다. 보십시오. 목회가 순풍에 돛단 배 가듯 갑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건강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도 있습니다. 모든 게 다 럭키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봅니다. “전도사님, 존경합니다.” “목사님, 존경합니다.” 사단이 그 사람을 놔두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그러니까 고통 받는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안 없어집니다. 목회 끝나면 그게 끝나면 다른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기에 너무 심난한 세상으로 다가오지 않게끔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한 사람은 없습니다. 늘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데려가십니다. 항상 똑바르게 가십시오. 말 경주할 때 보면 여기에 말에 옆에 못 보도록 안경을 씌웁니다. 캡을 씌우고 달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옆에 보면 자기 레인에서 이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곁눈질 하면서 ‘얘는 고생도 안하고 좋은 부모 만나서….’ 그 사람도 주님 사랑하는 사람이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쟤는 돈도 많아서….’ 그러면 또 다른 십자가가 있습니다. ‘쟤는 허리도 튼튼하고 건강하고….’ 나는 허리만 아프고 괴롭지만, 허리보다도 쓰라리고 아픈 데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렇게 설교도 잘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을까.’ 그 사람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영혼들이 가슴에 칼을 꽂고 갔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것을 해봐야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보면서 교만의 죄를 짓던가, ‘너는 나보다 한 수 아래야.’ 하던지 아니면 찌그러져서 ‘나는 왜 이럴까. 부럽다’ 이것만 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전자가 되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매달리는 눈물이 사라질 것이고, 후자가 되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일 텐데, 그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계속 생각해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어느 날 같이 잠을 잤는데 벼락을 맞아 체인지가 된다면 한번 해 볼만 할 텐데,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내 가는 길을 가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가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뭐가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다 버리고 자기 레일을 탁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에 두셨습니다. 나에게 목회의 길을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유치부를 가르치라고 합니다. 초등부를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만 생각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수없이 괴로운 일이 일어나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면 결국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 속에서 나는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 예수 사랑 밖에 없다!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사람보지 말고, 그리고 교회 보지 말고, 자신을 향한 박수와 갈채 보지 말고 위에 계신 주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손에 꽉 붙잡혀서 강직하게 가십시오.
저는 박희천 목사님이 주일이면 교역자 회의를 하셨습니다. 교역자들 7명밖에 안 되는데 교역자 회의 하는 시간이 항상 한 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끝나면 마지막에 항상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를 던져 주셨습니다. 노트에 항상 기록하였습니다. 그 분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고, 양떼를 희생했던 사람들을 맨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의 공로를 잊어서 맨손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만, 주님은 결코 공짜로 희생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가는 그것을 지금도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이 정말 그러셨구나. 그 주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8년 동안 있었던 연단 받은 그 교회에서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영혼 사랑과 어떤 까다로운 사람과 목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나에게 힘이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오래 참기를 원하십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 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교구 사람이 모였는지, 몇 명을 전도하였는지는 통계에 나와 있지만, 여러분들이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지, 덜 사랑하는지 양떼들을 얼마나 마음 깊이 찢어질 듯한 아픔으로 사랑하는지 사람이 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재도 짐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완벽하게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과 자신만 아는 비밀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식어지면 주님이 무엇을 생각하시든지 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주님을 너무 사랑하면 그것이 전부 다 인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오래 참으십시오. 오래 참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목표를 가진 참음이어야 합니다. 참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매일 매일 부어지는 은혜 속에서 옵니다. 그 분의 손에 꽉 붙들려서 사십시오.
그러면 붙들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내일 아침에 계속 하겠습니다. 일어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