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복음의 경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라”(빌 1:8-11)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갇혀있으면서 쓴, 그의 생애 말기의 편지 중 한 권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설교하러 갔을 때 바울이 갇혀있었던 감옥이라고 알려진 곳을 갔습니다. 그 위에는 사도 바울의 고난을 기념하는 예배당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배당의 지하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그 당시의 흔적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크기가 네댓 평정도 되는 넓이의 땅굴이었고 그 위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고 쇠창살이 있었습니다. 거기가 그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도 바울은 그곳에 갇혀서 빌립보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 늘 기도드리던 바를 편지에 옮겼습니다.
제가 오늘 읽어드린 이 짧은 본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충격적으로 중요한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영혼들을 섬기고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커다란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 구절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맨 처음 남자를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빚으셔서 그의 육체를 만드시고 “후” 하고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영혼을 창조하셔서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모든 인류 중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아담 한 사람 뿐 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 하와는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고 이후에 생겨난 모든 사람은 육신의 생명을 통해서 그의 자손들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와도 똑같이 흙으로 빚지 않으시고 그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여자로 만드셨겠습니까? 남자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남자가 우월한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남자는 직접 창조하시고 여자는 남자의 일부로 만드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자는 원재료가 흙이고 여자는 그보다 훨씬 고급인 갈비뼈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최신 제품이 옛날에 나온 제품보다는 뭐가 나아도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깊은 뜻이 “한 사람”을 창조하신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담과 하와의 결혼식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와를 창조하여 이끌어 내오실 때에, 결혼식이 성립하기 직전에 아담은 하와에게 고백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어 성경에 의하면, “그 뼈들 중의 한 뼈요 그 살들 중의 한 살이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이 표현은 ‘the best’ 최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중에서 없어도 되는 살, 꼭 필요하지 않은 뼈가 아니라 한 점만 없어도 생명에 지장이 있고 한 토막만 사라져도 치명적인 죽음에 이르는 그런 결정적인 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두 사람을 사실상 한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고백은 부부 사이에 통용되는 고백이 아닙니다. 부부이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사회였습니다. 만약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 고백을 아담과 하와만 나눴겠습니까? 이후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 셋, 이 모든 가족이 함께 나누었겠습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회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서로를 “이는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하면서, 그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사랑하시는 것처럼 온 인류가 그 한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사랑이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 그 아름다운 고백을 남긴 아담은 바로 그 뒷장인 3장에서는 “함께 있어서 너무나 괴로운 여자”로 하와를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주신 하나님을 은근히 원망하는 말투로 하나님께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부터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는 고백은 깨어지고 인간은 각기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갈등으로 가득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의 전망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기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서로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특히 교회는 바로 이런 타락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도입하시고, 이제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고, 이 시기를 성경은 말세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완성된 인류 사회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을 내리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의 고백을 누려야 할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안타깝게도 아직 완전하게 완성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 고백을 할 수 있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고 이기적인 자기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고 불평하던 아담처럼 여전히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죄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모두 정말 뜨거운 은혜 가운데 살게 되면 거의 종말에 이루어질 그 고백을 매우 흡사하게 실현하게 되고 만약 은혜에서 극단적으로 모두 멀어지게 된다면 풍비박산이 났던 아담과 하와의 그 집안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서 교회가 이 세상과 추호도 다를 바가 없는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그것이 바로 경륜입니다. 경륜이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이 뜻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타락한 인류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구원하셔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런 아름다운 사랑의 사회를 이루어가면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인류 사회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이 경륜이라는 말의 유래를 생각해 보려면, 어린 시절에 베를 짜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베 보다 더 좋은 것은 비단을 짜는 것입니다. 비단을 짤 때 씨줄과 날줄이 겹치면서 짜게 됩니다. 비단을 짤 때는 눈에 잘 보이는 아름다운 문양이 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위에는 실밥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비단을 짜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디자인이 있어서 형형색색의 실들을 제 때에 집어넣어서 밑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그림과 무늬가 그려집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짤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봐도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짜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몇 달에 걸쳐서 비단을 모두 짜고 뒤집어 보면 빨간 바탕 위에 학이 날아다니고 물이 흐르고 거북이가 기어 다니고 사슴이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금실, 은실이 섞인 비단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경륜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 경륜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우리의 목양이 무엇을 지향해야할 지를 알려줍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중간에 있는 것을 모두 빼버리면, 바울이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희랍어 성경에 “아가페”라고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삽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너무 싫어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마광수라는 작가가 두 주 전에 자살을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도 사실은 인생이 싫어서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자살은 너무너무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어 하는 열망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자살이란, 너무너무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어 하는 열망의 표현입니다. “이렇게”가 아니라 다르게 살고 싶은데 도저히 그것이 환경적으로 불가능할 때, 그 때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설명입니다. 결국 그 자살도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기 때문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 아들은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침대에서 뒹굴뒹굴 구르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사랑이 너무 충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몸을 편안하게 쉬게 하고 싶은 그 사랑이 너무 가득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너무 괴로운 때가 있습니다. 그때 누가 복음을 들려줍니다.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불 일 듯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며 예수 믿으러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저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하면 내가 좀 편해질까 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저는 제가 살고 싶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 보니까 아, 내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나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희랍어로 말하자면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나 좀 살려주세요!”하면서 주님께로 갑니다.
제가 열네 살 두 달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2학년입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다가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가난하고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저는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지러질듯 한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으로서 사는 것인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와 풀포기가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하루는 그 어린 나이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보며, “너는 정말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도 짧게 살다가 죽으니까 얼마나 좋겠니?”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가다가 엎드러져 울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목사님의 설교는 저의 그런 질문에 대해서 땡전 한 푼어치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주일학교 교사를 만났지만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을 통곡하고 일어나서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무신론자로 평생을 살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상관없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까 엎드려 울 때는 없었던 이상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6년 동안을 방황했습니다. 문학작품을 읽고 공감을 했지만 거기에 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보니까 내 인생의 많은 고민이 사실은 하나님 안에 그 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나 같은 사람을 오래전부터 사랑하셨구나!”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세 전에 택하셔서 나를 사랑하셨구나!” 그렇게 만난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런 후에 자기 인생을 살 때 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사랑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번역을 하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지순한 사랑’입니다. 나쁜 동기 없이 하나님과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에로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아가페를 만나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돌아옴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계획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사랑이 그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너희들 가운데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 감옥에 갇힌 목회자의 소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충격적으로 중요한 목회의 목표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영혼들을 돌보고 격려하고 돕고 상담해주고 훈련하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의 목표에 꽂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것이 전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서 변심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든 목회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의,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목표는 나의 목양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나의 목회 사역의 성과가 어떤지, 물론 나의 구역에 몇 명이 모이든지, 내가 구역을 1년 섬겨서 몇 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것도 평가의 한 가지 기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입니다. 결정적인 질문은 ‘그 사람들이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그 성과를 잴 수 있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목회의 목표입니다. 위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 그리고 목회자의 설교사역, 선교사들의 선교사역, 그 일을 돕는 평신도들의 사역,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마지막에 만들어내야 할 작품이 이전보다 더욱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어떻게 이 사랑이 풍성해 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 다시 말하면 지식과 총명이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은 불길에 비유하고 지식은 그 불을 끄는 물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지식을 많이 강조하면 사랑이 식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진술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을 끼얹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불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식의 스위치를 끄면 끌수록 사랑이 열렬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고 혹시 그렇다면 그 감정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어젯밤에 사역을 모두 끝내고 야시장에 갔습니다. 야시장에 갔더니 귀신 축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불꽃이 터지고 사람들이 북을 치면서 시끄럽게 몰려다녔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 하나는 우상을 가마에 매고 다니면서 흔들고 다녔는데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뒤에서 웃통을 모두 벗고 따라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흉측한 흉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도끼, 칼, 창,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것으로 자신들의 벗은 몸 위를 마구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신들렸을 때, 강신했을 때 그들이 그 흉기로 자신의 몸을 마구 치면서 자해행위를 한다고 하는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순수한 선지자의 열정이 있고 거짓 선지자의 열정이 있습니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이 아니듯이 뜨거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교역자들과 함께 수련회를 갔는데 그곳 리조트에서 다른 사람들이 부흥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한 번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앉아서 강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강사 한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의자 위에 올라가고 책상에 올라가서 발을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분위기는 부흥회 분위기였는데 이단 부흥회하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다단계 판매회사 단합대회였습니다. 그 모임 자체가 너무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속에서 사람들이 열정을 받으면서 자기들이 연봉 1억을 할 수 있겠다는 꿈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그 사랑의 불길이 점점 더 타오르게 하는 두 가지 요소를 설명하는데 ‘모든 지식과 총명’을 설명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사랑이라는 것을 타오르는 불길로 묘사한다면 이 불길을 활활 타오르도록 밑에 놓여있는 두 개의 장작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지식과 총명입니다.
첫 번째로 ‘지식’은 희랍어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고 하는데 ‘에피’는 ‘전체적인’이라는 뜻이고 ‘그노시스’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지식’, ‘온전한 지식’, 어떤 사물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 속속들이 그 사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무슨 뜻인지를 속속들이 잘 알게 될 때 바로 그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제가 늘 좋아하는 말로, 신앙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계속 성장하려면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을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다가, 성령을 읽다가, 신학공부를 하다가, 독서를 하다가, “아! 하나님이 그런 분이었구나!”, “아!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정말 놀랍다!”
여기에 교회에 와서 제일 반가웠던 것은 책들이 쭉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참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지식을 사모해가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성경과 책, 이 두 가지가 두 손에 들려 있어야 합니다. 깨닫는 기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력, 판단’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판단력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주님을 향한 사랑은 더욱 더 뜨겁게 타오르게 됩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크게 세 가지 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인류,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서 공부하고 교회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지식의 내용입니다. 그 지식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이 목회의 할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지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목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결정적으로 지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인간이 정말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저렇게 사람을 대하지는 않을 텐데,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저렇게 교회에 상처를 주지 않았을 텐데, 이런 것을 보고 아파하는 마음이 영혼에 대한 긍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식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교회 속에 함양될 때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이 마음속에 불길처럼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 그것은 사랑일 수가 없고, 사랑 없는 지식, 그것은 참 지식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세계에서 지식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고귀하고 교회가 얼마나 예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가르쳐줄 때,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폭넓게 많은 음식들을 잘 먹지만 안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민물고기입니다. 몬도가네식의 개구리, 뱀 같은 것도 원래 먹지 않지만 민물고기는 어떤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켜니까 그 방송에서 어떤 마을에서 유명한 향토음식을 전문가와 함께 소개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음악과 함께 붕어찜 이야기가 나오는데 생각만 해도 싫어서 꺼버리고 싶었지만 그냥 들어보았습니다. 한 20분 동안 붕어찜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놀라운 것이 20분이 지나고 나니까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하는 것을 듣고 “에잇!”하고 끄려다가 하나님에 관해서 쭉 이야기를 하니까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라디오에서 설명하는 사람이 얼마나 이야기를 잘 하는지, 고춧가루와 양념을 어떻게 해서 쪄서 나온 붕어의 껍질을 벗기면서 흰 살을 발라 거기에 시래기를 얹어 먹어보라고 하는데 자기가 말을 하면서 침을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철이 든 이후까지 그 음식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졌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먹어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약 7년 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적극적으로 그 집을 찾아가서 먹어야겠다는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누군가와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20분의 묘사가 7년이 지나는 동안 그 느낌을 유지하게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여러분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설명해주어서 ‘나도 한 번 그분을 만나봤으면 좋겠다.’ 교회가 얼마나 예쁜 곳인지를 설명해서 ‘나도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설명해서 ‘나도 한 번 그 사람들과 얘기해봤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설명해서 ‘나도 좀 그렇게 듣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지금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 같아도 7년 전에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설명을 듣고, 여러분은 잊었지만 7년이 지나도록 제 마음 속에 평생 혐오하던 붕어찜을 먹어 볼 마음을 갖게 된 것처럼, 7년이 지나도록 그 마음속에 ‘그래, 나도 기회가 주어지면 예수를 한 번 믿어 볼 거야!’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거두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크고 소중한 섬김인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여러분을 여기에 세워두신 것입니다. 구역장과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의 크고 중요한 준비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초등학생 아이 하나가 회심을 했습니다. 정말 눈물 흘리고 회개하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자신이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 정말 이상해. 목사님이, 전도사님께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많이 설교했지만 나는 믿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선생님께서 하나님이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시는지 아느냐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실 때 나는 모든 것이 믿어졌어요.” 그것을 전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를 예루살렘의 목회자로 세우시기 전에 실패한 그 사람을 불러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신 이유였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목회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사랑이 풍성하게 되어서 어떤 방식으로 살게 하시려고 그 사랑을 주시는 것인지 보시겠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가족들과 함께 캠핑을 여행 해야겠다. 기분 좋으면 거기서 다른 나라도 여행해 봐야지.” 그때 우리는 차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많은 짐을 싣고 갈 때 내 차가 적합한지 생각해봅니다. 이 차는 너무 오래되었고 출력이 약해. 렌터카 회사에서 4500cc짜리 큰 차를 빌렸습니다. 그리고 가서 기름을 넣고 그것도 모자랄 것 같아서 연소를 돕는 첨가제까지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시동을 걸어보니까 “부르릉!”하는 소리까지 달랐습니다. 오르막을 달려보니까 가뿐하게 올라갑니다. 자,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성능이 좋은 차를 준비하고 에너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렇게 에너지를 채우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채운 에너지를 가지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분별하며’, ‘진실하며’, ‘허물없으며’ 첫 번째 ‘분별하며’는, 성경에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다른 것들을 구별해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데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판별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매 순간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이 아까 왜 저 뒤에 앉으셨습니까? 순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 같아서 거기 앉은 것입니다. ‘앞자리에 앉으면 강사를 가까이에서 마주 봐야하고 혹시 뭐라도 물어보면 어떡하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잠깐 졸면 금방 표가 나겠지만 뒷자리에 앉으며 잘 표가 안날거야.’ 이런 등등의 모든 판단을 하고 뒤에 앉은 것입니다. 매 순간 모든 것들이 주어져도 우리는 자기에게 가장 좋다고 판단되는 것을 선택하지, 좋은 것을 버려두고 매우 나쁠 것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아마 나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줄 거야.’ 하면서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매 순간 말입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다른 것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주석가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좋은 것들 중에서 최상의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좋아 보이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진짜 최상의 것이 무엇인지를 딱 분별해내는 능력,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사랑이 더 충만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해진 사람들을 찾아가 봅시다. 왜 불행해졌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전혀 그렇고 싶지 않았지만 태어나기를 불행할 수밖에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말도 못하는 아이인데 아버지가 때리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진짜 좋다고 하는 것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에 불행해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때 그런 판단을 안 했더라면 우리의 인생은 훨씬 행복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많은 돈이나 목숨을 연장시켜주고 건강을 주는 것보다 올바른 판단을 한 번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더 큰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을 추적해가면 결국은 분별을 못 하게 된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충만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 분별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충만해질 때 그 분별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진실하여’라고 합니다. 이 ‘진실하다’는 말은 여기에서 쓰인 희랍어로는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곡식 같은 것을 거르는 채와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태양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단어가 합성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두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채와 관련 있다고 보는 것은, 뭔가 섞여 있는 것을 함께 넣고 채질을 하면 아닌 것들은 빠지고 참된 것들만 남습니다. 그런 뜻이 있고, 태양빛과 관련되어 말하면 어두운 곳에서 보니까 색깔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는데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보니까 그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약간 키가 작고 인물에 자신이 없는 여성들은 선을 볼 때 저녁시간을 택해야 하고 환한 일식집이나 한식집보다는 약간 어두운 양식집에서 선을 본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결혼성사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뭔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 만난 다음에 정이 들 만할 때 한식집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헤어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될 때 태양빛 아래로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실해 진다’라는 것은 ‘정체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정체를 드러내는 것, 진실한 것은 항상 솔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무조건 솔직해지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 “솔직하게 말하는데, 오늘 저녁에 난 그 집 담장을 넘어가서 그 집 물건을 훔칠 거야.”, “그래, 나 어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탈취했어. 어쩔 건데?” 이런 것을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진실은 어떤 팩트를 사실로 드러내는 솔직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진리가 있고, 이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킨 상태를 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 모두 내비게이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내비게이션의 원조는 한국입니다. 항공기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제가 94년도에 헬리콥터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생전 처음으로 내비게이션을 보았습니다. A라는 목적지에서 B라는 목적지까지 차로 가면 3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20분 정도에 갔습니다. 헬기가 보통 시속 280km 정도로 날아갑니다. 목적지를 찍으니까 파란 줄이 딱 나타났습니다. 헬기가 이륙하니까 파란 줄 위에 빨간 줄이 나타났습니다. 헬기가 약간 옆으로 가면 그 빨간 줄이 옆으로 그려집니다. 다시 돌아가면 파란 줄에 다시 겹쳐집니다. 진리가 우리가 가야할 경로라면 우리가 실제로 가는 길은 거기에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있는 비행기는 빗나간 것을 보고 다시 항로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목적지에 돌아올 수 있지 “파란 줄이 있든지 말든지 나는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갈 거야.” 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진리에 합당하게 자신이 부합된 상태가 진실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능력보다 더 탁월한 가지를 가진 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듣고 기뻐하기만 하는 사람은 거울을 보고 온갖 검댕이가 묻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뭐가 묻었다고 하고 가는 사람과 똑같다고 봅니다. 거울의 효용성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내가 이 얼굴로는 김남준 목사의 특강을 들으러 갈 수가 없겠구나.”하고 싹 씻고 뭐 좀 바르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고 오신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진실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불 일 듯 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젠가 우리를 판단하실 날이 옵니다. 주님이 우리 살아생전에 오실 수도 있고 우리가 먼저 주님께 갈 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모두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하며 산 모든 것에 대해서 판단을 받을 때가 올 텐데 그때에 허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라는 것은 추호도 허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넘어뜨리거나 자신도 넘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윤리적으로나 진리를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 크게 넘어지는 일이 없이 주님 앞에 서게 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모해야 하고 자기가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여태까지 배운 내용을 하나로 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그 밑에는 두 개의 장작이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총명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을 불 일 듯 일어나게 하시는 이유는 신자로 하여금 세 가지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인데, 첫째로는 모든 좋은 것들은 분별하고 두 번째는 진실하고, 마지막은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11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라” 그래서 결국 맺히게 되는 것이 ‘의의 열매’입니다. ‘의의 열매’는 ‘불의의 열매’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의’는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부합한 상태가 ‘의’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율법에 완전히 부합한 상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서 열심히 가는데 까치발로 들어도 그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미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존엄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영혼이 죽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신자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왕 같은 제사장들이고 이방을 위한 빛입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깊이라는 것은 사람을 얼마나 예의바르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를 얼마나 존중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으로서 존귀하게 여기느냐, 세상의 지위나 재산, 미모, 그의 권력과 상관없이 발가벗겨 놓은 한 인간으로서 그를 존귀하게 생각할 수 있느냐 하는 그 깊이는 그의 영적인 깊이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깊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사랑의 깊이와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광을 인간은 죄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처음에는 하나님과 그렇게 놀랍고 탁월한 교통을 이루며 살도록 되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이 새롭게 나타난 의가 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그 의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의가 회복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잘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을 마음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모두 부어주십니다. 그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은 아들과 혼인관계에 있는 교회에게 부어집니다. 교회에 부어진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 한 구석도 피와 신경이 흐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짐으로 그 사랑과 생명을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사랑은 알겠는데 생명은 무엇입니까?” 설명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육적인 생명은 하루를 생활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명은 그런 것과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절망적인 현실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정말 살기가 싫고 죽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안 되지만 예수 믿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살 수가 없습니다.
한 7, 8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인 한 사람이 자기 친구를 교회에 데려왔습니다. 일요일이니까 밥이나 함께 먹자고 하고 불러내서 교회 가까운 곳에서 밥을 먹고 자기가 예배 드려야 하는데 교회가 가까운 곳에 있느니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지혜롭게 이야기해서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는 불신자 자매였는데 남편과 심한 갈등 끝에 이혼을 결심한 가정주부였습니다. 아이까지 있는데 그 긴 세월을 살다가 이혼을 하려고 했을 때는 얼마나 결혼 생활이 괴로웠겠습니까? 이혼서류에 먼저 사인을 하고 장농 위에 올려놓고 남편에 얼른 도장을 찍어서 법원에 제출하자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배에 들어와서 비교적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필 그날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제대로 걸린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이 정말 은혜를 주셨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이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는 그 설교를 듣고 화가 났다고 합니다. 차를 타고 아내와 집에 가면서 불평을 했습니다. “여보, 나 오늘 설교 듣기 정말 힘들었어.”, “왜?”, “우리 목사님 진짜 이상해.”, “왜?”, “아니, 이렇게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 중에 누가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그렇게 긴 시간을 오직 그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설교를 하실 수 있을까?” 했더니 아내가 정색을 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나는 여러 번 생각했는데?” 했답니다.
남편과 아내가 둘이서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이 사랑 가득한 표현으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 좀 봐. 나 고백할게 있어.”, “왜? 뭔데?”, “여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아내가 갑자기 짜증을 확 내면서, “아니 당신은 어떻게 내세에도 네 생각만 하니?” 하더랍니다. 이렇게 서로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까 그 교회에 온 자매가 예배를 드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심을 했습니다. 40대 중반 정도의 자매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을 불렀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또 도장 찍으라고 하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둘이 마주 섰고 남편은 아내가 따발총처럼 퍼부을 줄 알았는데 아내가 어깨를 들먹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힘없이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생각했습니다. ‘이건 또 뭐지?’ 아내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정말 미안해 나 같은 여자랑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나는 우리 불행의 모든 원인이 당신에게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당신을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하며 울었습니다. 남편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냐?” 했겠습니까? 남편은, “아니야. 내가 나쁜 놈이었어.” 했습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그 생명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정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자매님이 한 분 있는데 아이가 지체장애아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계속 밀려오는 질문이 있는데 “Why me?”,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하필이면 나 입니까?” 그리고 정상적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 너무 불행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어느 날 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후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싸우고 극복하는 것, 이전에 믿음으로 첫 번째로 해야 할 행동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그냥 현실로 받아들일 용기로 가져야 한다.”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이 자매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믿음으로 살아보니까 자기의 아이가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겸손의 은혜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많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장애가 있어도 감사하시오.” 말해도 그 말은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말하고 간증하니까 수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줍니다.
그게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은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고 다르게 사랑하게 만들고 그리고 다르게 이기도록 만들어줍니다. 그 생명이 이 속에서 끊임없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 “열매”라는 말에 별로 감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껏 열매라고 해봐야 아이들 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가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이상해요.”, “뭐가?”, “여호와의 열매가 왜 이렇게 고달파요?” 애들 기르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압니다. 겨울부터 노동을 하면서 땀을 흘립니다. 그런데 가을에 열매가 맺힙니다. 다행히 열매가 맺혔는데 사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습니다. 따서 궤짝에 담는 순간 돈다발로 변합니다. 그때 이 농부의 가슴에 차오르는 기쁨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해 놓으셨을 때 우리가 그런 열매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영광과 찬송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빙글빙글 돌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문 돌리듯이 여러 사람에게 돌아가며 나눠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잘 쓰는 말일수록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성경은 ‘영광’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본질적인 영광’,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발산하는 영광’입니다. ‘쉐키나’(Shekhinah)라고도 하는데 특히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느 한 장소에 계신 임재의 효과를 찬란하게 발휘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모세의 떨기나무에 붙은 불같은 것, 그리고 성막 위에 늘 있던 구름과 불기둥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쓰여 진 것은 세 번째의 의미입니다. 세 번째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되는데, 그것을 저는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표현 가운데 “I adore you.”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나는 당신을 찬송합니다.”, 혹은 “나는 당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것인데, 그 뜻은 “나는 당신을 인정한다. 아주 탁월하게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은 없지만 시련 속에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 같으면 당장 자살해 버릴 텐데 어떻게 저런 시련 속에서 저렇게 기쁘게 살까?”, 그리고 더 불행한 일이 닥쳤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나중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도대체 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이 누구시길래 저런 놀라운 평강과 기쁨, 생명을 줄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아이가 장애아가 되어서 정말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저 사람은 어떻게 그런 불행이 자신의 인생에 말할 수 없는 은혜라고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이 있는 거 아닐까? 있는 것 같아.” 이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더 큰 영광일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 세상을 지나는 한줄기 빛처럼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우리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시고 소금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소금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방부제가 아닙니다. 소금으로 음식에 맛을 내듯이, 그리스도인 섞이지 않았을 때 무미건조하던 사회에 그리스도인 섞임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서 함께 모여 살아가는 놀라운 기쁨과 보람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역할 중의 하나입니다. 빛이라는 것은 사상의 역할이고 소금이라는 것은 윤리의 역할인데 사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위대한 경륜에 목양으로서 참여하는 그림입니다.
오늘 이것을 모두 요약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혼을 돌보는 목양을 하게 하신 이유는 사랑의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하시기 위함인데 그 불길을 타오르게 하는 두 개의 장작, 지식과 총명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의 불길로 세 가지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인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살아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찬송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경륜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8절로 돌아갑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예수의 심장을 나누어 가짐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심장’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희랍어로 ‘스플랑크나’입니다. 이 말은 원래 심장이 아니라 ‘창자’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동사로 사용될 때는 마태복은 9장 35절에 나오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실 때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시는, 새로운 번역에는 ‘불쌍히’ 여기신다고 나오는데 그때 쓰인 동사가 이 단어입니다. “창자가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셨으니 예수님의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다른 섞임이나 사심이 없이 영혼이 담긴 뜨거운 사랑으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바울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로부터 무슨 대접을 받을까, 빌립보 교회에서 어떤 유명한 사람이 나와서 정치계를 주름잡으면 거기에 교인들을 청탁 넣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그런 순수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심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경륜이 충실하게 이 교회에 자신의 바람을 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숙제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진리를 알고 자유하게 된 사람들만이 무지 속에서 속박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엾어 하지, 자신이 속박 받고 있고 거기에 만족해하는 사람이 자유의 갈망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처음 시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이럴까? 사회가 왜 이럴까? 하는 생각도 해야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내가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은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망가진 것이 많은 이 사회를 온전하게 하는 시발점이 되도록 내 자신의 창자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하고 그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펼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발점으로 나를 사용하신다면 기꺼이 내가 그렇게 되겠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입니까? 그냥 성실한 것? 열심히 목사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사랑의 기쁨 속에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