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위하여Ⅲ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복음 사역자의 동지애(롬 16:3-4) 1997.2.15 1
2. 피 묻은 진리를 가르치라(마5:2, 스7:10) 1997.2.22 14
3. 영혼을 사랑하는 교사(빌1:8) 1997.3.1 27
1. 복음 사역자의 동지애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함께 교회학교를 섬기면서 함께 영혼을 돌보는 일을 수종 들면서 좀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함께 교회학교를 섬기면서 아이들과의 문제, 내가 가르치는 영혼들과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섬기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하겠는가에 대해 약 40분간 나누고 싶어서 제가 첫 번째 강의 시간에 섰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벌레만도 못한 인생들을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피로 우리를 속하사 우리를 주의 자녀 삼으시고 이 복음에 빚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생명 있는 동안에 우리들이 이 부채의식 속에서 자유로워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삶을 연장 받는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살아있는 이유가 분명하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신 그 거룩한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저희를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옛날에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경우도 별로 없었지만 어쩌다 이야기하게 될 때 제일 신나는 이야기가 전쟁이야기였습니다. 그 때 아버님이 뒤에서 공산군에게 총을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관통해서 뼈가 다 부러졌는데 그걸 기가 막히게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걸어 다니는데 지장이 없으실 정도로 완벽합니다. 몇 사람들이 다 끊어내야 된다고 하셨는데 훌륭한 의사를 만나는 바람에 고치셨습니다. 늘 그분에 대해서 감사하고 계시는데 ...
그 분이 전쟁이야기를 하시는데 ‘전우애’라고 하는 것은 평화시에는 잘 안 나타나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안 나타나냐 하면 커다란 산이 있는데 이 밑에서 명령을 하달을 받는 거지요.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저 고지를 점령하라 라는 명령을 하달 받으면, 대대에 떨어지면 대대가 다시 중대, 중대가 다시 소대별로 나누어서 작전 계획을 짜서 그 다음에 공격을 하는 것 아닙니까? 어쨌든지간에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쳐 올라가야 하고 올라가다 보면 올라오는 것을 가로막는 사람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게 마련이죠.
근데 재밌는 것은 올라가기는 올라간답니다. 올라가는데 ‘돌격’ 하면 말 올라가서 제일 먼저 엄폐물을 찾잖아요? 엄폐물을 찾으면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어쩜 그렇게 기가 막힌 장소를 찾는지 몸이 쏙 들어가고, 포탄이 90도 각도로 떨어지지 않으면 죽지 않을 정도로 돌멩이에 폭 싸인 그런 곳을 찾아낸다는 거지요. 딱 달라붙고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는 거지요. ‘올라가라 올라가라’ 그러고 ‘사격’ 그러면 조준해서 사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숨어서 총만 오리 사냥꾼처럼 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 만발을 쏴도 그 총에 사람이 거의 죽지 않을 정도로 그런 식으로 싸움을 한다는 것이지요.
근데 재미있는 것은 뭐냐하면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인데 바위틈에 붙어서 주머니에서 건빵을 꺼내서 먹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같이 붙어있는 병사가 달라고 그래도 안 준다는 거예요. 절대로 안 준대요. ^^ 6.25 때는 8만 명 정도의 군인이 굶어 죽었다고 하니까 엄청난 사건이었죠. 그게 국방부 사건인가 그런 거 아닙니까? 외국에서 원조해 주는 물자들을 위에서 다 떼어 먹어서 군인들이 거지가 되고 강도가 된 그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건빵도 귀하죠. 그런데 무슨 전우애가 있겠습니까? 건빵도 하나 안 나누어 먹는 그런 전우애가 어디 있어요? 그러다 도저히 안 되면 뒤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답니다. ‘ 안 올라가면 사격하겠다’ 사격한다는 게 무슨 얘기냐 하면 조준 사격하겠다 이거예요. 명령 불복종으로. 그리고 진짜 지휘관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면서 총알이 이번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올라온대요. 그러면 이제 일어서기 시작한대요. 그러면서 움직이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드르륵 공산당들 괴뢰군들의 총이 난사되면서 그 자리에서 핏덩어리가 되어서 동료가 옆에서 쓰러지는 것을 본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바위틈에 붙어서 건빵도 안 나누어 주던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뒤에서 ‘엎드려! 엎드려!’ 고함을 질러도 정신이 확 가는 거예요. 그리고 뻣뻣이 서서 돌진을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백병전 상황이 실제로 연출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진짜로 옆에서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지고 면상이 벌집이 되어서 사람이 아니라 피 흘리는 고깃덩어리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사람이 쓰러져서 난사당하는 모습을 보면 일어난다는 거지요. 그리고 돌진을 한다는 거지요. 그런 장면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맨 정신으로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그 때 생명을 나누는 전우애 그런 것들이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물론 전쟁이 끝나면 다시 건빵을 안 주겠지요.^^ 그러나 하여튼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는 전우애 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전쟁터에서는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 말이죠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전사로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전사로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전우애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보면서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세례 요한과 같은 삶으로 시작은 했는데, 물론 세례 요한은 그 사역의 기간이 워낙 짧은 것도 있었지만 ,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의 인생에 휴식이라는 부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그의 주변에느 항상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람같이. 뭐라고 말하냐면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나니... 이런 사람들이 바울의 주위에는 항상 있었다는 거지요. 목이라도 내어 놓을 만한 동역자들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물론 바울같이 훌륭하지도 못하고 훌륭하게 섬기지도 못하지만 그런 점에서 같은 동역자로서 시기가 날 정도로 이 사람이 참 부러워요. 어디를 가든지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목이라도 내어 놓을 만큼. 갈라디아 교인을 향해 하는 말은 눈이라도 빼어줄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늘 있었단 말이지요. 이 사람이 한 군데서 계속 40년 50년 목회를 했는데 그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면 그렇게 시기날 것도 없어요. 난 아직까지도 사오십년 하지 않았으니까 좀 더 있어보면 눈은 몰라도 눈썹이라도 빼주겠다는 사람이 나올지^^ 두고 봐야죠. 그런데 이 사람은 한 교회에서 종사하다가 죽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요. 어떻게 보면 자기교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들만하면 떠나는 그런 순례자적이고 순회 전도자적인 삶을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도 어디에 가든지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을 만한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16장에 보면 로마서 마지막 부분인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 정도의 사람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어 놓을 사람이 여럿 있었단 말이지요.
근데 바울을 보면서 더 매력적인 것이 뭐냐면 자기 사람들을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어요, 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고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가 기억나는 사람이 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기억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목회의 정신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심지어는 그리스도파 이런 식으로 얘기가 나오늘 걸 가리키면서 뭐냐 하면 도대체 아볼로가 누구냐 게바가 누구냐 내가 누구냐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한 파의 주인이 되실 수 있겠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강권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시키는 대로 너희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을 뿐이다. 그리고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셔서 결국 마지막에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 아니시냐 그는 예수님이 아니시냐 그럴 정도로 철저히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주는 그런 삶, 그의 보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사람으로 모이고 꼬이는 이런 것들이 사역의 중심이 아니라 진정한 보람은 자기를 통해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소망이 워낙 커서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바울은 잊힌바 되는 그런 삶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종종 같은 시대를 살았던 웨슬레와 윗필드를 그렇게 비교하기도 합니다. 윗필드의 인격의 깊이를 거론하면서 그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웨슬레만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잊게 하라. 한 번 설교하고 오면 사람들이 1km-3km씩 줄을 섰다고 하니까 어마어마 한 것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이 윗필드는 잊어버리게 하라.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만 기억나게 하라. 그런 삶을 살았는데도 그런 사람들이 생겨났단 말이지요. 그것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이냐 하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사람들 자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아꼈어요. 그런데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끈을 맺으려는 동기에서의 리더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으로 자기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부었단 말이지요. 그것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기도 했어요.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부으신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바울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제 교사가 되거나 구역장이 되거나 하면 모두 리더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거기에는 지도자, 지도력, 리더십이 문제가 되는 거지요. 리더십은 소인배적인 리더십이 있고 군자적인 리더십이 있어요. 소인배적인 리더십은 뭐냐면 뭔가 상하관계, 복종의 관계로 묶고, 인간관계로 다시 동여매고 해서 자기와의 관계를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이익을 주고 받는 관계를 미끼로 해서 사람을 얽어매는 것입니다. 이런 정략적인 리더십입니다. 이런 것이 소인배적인 리더십입니다. 그리고 이런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늘 교주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백 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비판하면 토라져버리는 비위맞추기 힘든 리더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군자형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목표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리고 만남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진 관계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 늘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에게 어떻게 예속되고 복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섬기고 있느냐 하는 것을 관심으로 가지는 리더십입니다. 그런 리더십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을 보면 단순히 그런 것만이 아니었어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면 이 사도 바울이 이런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든지 혹은 디모데라든지 하는 많은 가는 곳마다 나타났던 수많은 유무명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고 심지어는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줄 만한 사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니 , 물론 이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살고 하나님을 향해 충성되고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물론이고 이 사람은 자기를 위해 목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심장을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follower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인격 속에서 큰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나는 사랑장을 우리들이 수요일마다 살펴보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그러한 사랑에 대한 진정한 기독교적인 정의를 거기에서처럼 그렇게 상세하게 내린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면 사도바울의 영성 그 자체의 한 복판에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를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부어졌던 것입니다. 인위적인 계산이 아니라 바울 속에 역사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동역자들을 그런 특별한 사랑으로, 말하자면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근데 교회당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혼자 하면 괜찮게 할 사람들이 모아 놓으면 수준이하가 되는 사역의 현장, 공동체 현장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거기서 깊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료애, 다시 말하면 전우애가 없는 것이지요. 영적인 전쟁이 긴박하고 긴박한 영적인 전쟁 속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능히 감당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그러한 spirituality영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영성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치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함께 같은 목표를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뜨거운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물질을 마구 허비하면서 써 버리는 사람이 가장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멍청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자기의 건강을 마구 낭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바보 같은 사람이 있으니 누구냐 하면 자기 주위에 있는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하찮게 흘려보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위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존 웨슬레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빨리 동역자들을 찾아보십시오. 왜냐하면 성경은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사람들을 규합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 가지 모순된 생각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저는 이겁니다. 우리들이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매여서 우리들이 진정으로 사역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그런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두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무치도록 헌신된 삶을 살고 싶어 는 그런 거룩한 그리스도인이고 한 명은 날라리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할 얘기가 있겠습니까? 무슨 할 얘기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어제 계명을 어기고 술 먹고 노래방을 간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은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월급이 많이 오르고 헌금이 얼마나 오르고 교회가 증축이 되고... 이 사람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사역을 하려고 하면 우리는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흐르는 게 있습니다. 나와 같이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버림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눈빛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를 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로이드존스가 리바이벌이라는 책에 쓴 한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는 부흥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왜? 부흥을 만나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될 때 그 교회 속에는 제도가 가져다주는 unity가 아니라 연합이 아니라 동일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체험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영적인 연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작은 부흥을 깊이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깨닫게 된 것은 모든 지체들이 너무나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늘 기도하게 되고 염려하게 되고 누가 믿음에서 승리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가 그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기뻐지고, 누가 실족하고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성령을 슬프고 슬프게 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 모두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는 일들이 일어나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도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런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떠나보낸다기보다 그런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관계를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게 하신 것을 하나님이 주신 매우 특별한 특권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키우고 그것을 붙들고 살려고 하지 않는 이런 신앙의 태도는 매우 하나님 앞에 잘못된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어린 신자들은 이런 혼돈을 경험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 사람을 의지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맺어진 동역자들을 그리스도의 피 뭍은 사랑으로 함께 사랑하는 전우애--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난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난 여러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고 눈물을 쏟으면서 나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고, 최근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말해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놀라운 체험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의지할 만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여러분들은 제게 있어서 사랑해야할 대상일 뿐이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군사 된 자들로서 함께 동료애를 갖는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전혀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신앙이 어리지만 자신들은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죠-- 자신은 뭔가 더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많은 부분이 그 사람 마음에 있는 사랑 없음을 합리화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반드시 비용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공동체, 사역해 나가는 이 공동체 속에서의 진정한 영적인 연합, 진정한 생명적인 연합, 그리고 전우애 정신에 의해서 뭉쳐진 자기희생의 결합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모릅니다. 옛말에 一人 百步는 不與 百人 一步라 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혼자서 백 발자국을 뛰어 가는 것과 백사람이 손잡고 한 발자국을 걸어가는 것은 같은 성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의 신앙자체가 공동체 속에 부여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서양 사람들은 영원히 그 복음의 깊이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편견들이 있잖아요? 동양인은 동양인으로서의 편견이 있고 서양인은 서양인으로서의 편견이 있잖아요? 그런 편견들이 깨뜨려지고 벗겨져 버리고 고쳐져 버리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막 쏟아져 들어오지요. 그렇죠. 그런 서양 사람들이 가진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 중의 매우 뛰어난 청교도들이라든지 후일에 태어난 많은 걸출한 영적인 인물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해를 빚지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걸 정직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 경우에 서양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동생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 된 삶,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공동체적인 성격...그런 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개인의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공동체를 통해서 전수된 복음,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이 복음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너무도 많이 서구화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도 그러한 갭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보다 더 옛날로 돌아가서 두레가 있고 향약이 있고 그리고 대소가의 모든 식구들이 한 집에 모여서 살고, 거기서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대가족 사회가 있고 씨족 사회가 있는 것을 보면 성경이 이야기 하는 공동체의 정신과 너무 일치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연구하면서 정말 그런 것들을 순간순간 감탄할 적이 많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과 유사한 문화를 주셔서 외국 사람이면 좀처럼 보기 힘든 성경의 진리들을 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중에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공동체 정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 자체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만 그 unity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유년 주일학교를 섬기고 있고, 중등부를 섬기고 있고, 청년부를 섬기고 있다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해서 만나는 그 모임이 한없이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하나 됨을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심으로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부흥을 경험하고 변화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경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도저히 들어오지 않던 진리들이 들어오고, 들어온 진리들이 나의 삶과 나의 신앙을 새롭게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집사람하고 어느 날 아침 마태복음9장을 놓고 큐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내가 요즘에 은혜를 받은 말씀인데... 하면서 쭉 설명을 해 나가는 거예요. 설명을 하면서도 내 마음이 막 뜨거워졌습니다. 그랬더니 입을 실룩거리면서 내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그럼 당신만 잘났단 말이유? 그럼 다른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교회가 다 썩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뭐... 믿는 사람이 없네!! 이런 식으로 계속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사람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 앞에서 성경을 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얘기해봐야 소용이 없었으니까요. 자기 의에 꽉 찬 신앙생활이에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기도문을 들으면서 변화시켜주셨지요. 우리교회 개척하기 전입니다. 김경해 전도사님과 다 증인이지요. 진리가 그를 변화시켜서 내가 만난 동일한 하나님을 만날 때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감동받은 책 주면 시들먹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감동받은 책은 저 쪽에 가면 불이 붙기 시작해요. 은혜 받은 때는 저 쪽에 가면 더 커다란 은혜가 되기 시작해요. 그런 것들이 뭐냐하면 영적인 하나 됨입니다. 그런 것들이 살시적?으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라는 책을 쓰면서 영적으로 뛰어난 설교자는 있었지만 부부가 함께 그 영적인 것들을 공유하며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며 지극히 헌신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도 부부가 함께 행복한 부부는 매우 소수였습니다. 칼빈과 이델렛트, 루터와 훰보라, 그리고 로이드 존스와 베다니 그리고 찰스 스펄전과 수잔나 이런 사람들 정도인 것입니다. 나는 웨슬리의 전기를 읽으면서도 웨슬리와 웨슬리의 부인 속에서는 읽을 것도 없지요. 남편이 집회 갔다 오면 맨날 머리끄댕이 잡고 반 쯤 죽였으니까. 바 제일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윗필드를 보면서도 그런 걸 느끼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에이든 토저 같은 경우에도 그런 것을 느끼기 힘든 경우였습니다. 에드워wm와 사라 피에르 펀트도 처음에는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펀트가 후에 --물론 원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에드워즈와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진정한 하나 됨이 이루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은 교회의 진정한 하나 됨을 위해서라도 부흥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흥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들로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부흥 비슷한 게 일어나거나 혹은 그것보다 훨씬 수준에 못 미치는 부흥이거나, 부흥이 아직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언제 올 지도 모르는 부흥에게만 책임을 미루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치 무엇과 똑같으냐 하면 , 난 이것밖에 못 섬긴다. 왜? 난 부흥을 못 만났기 때문에. 나는 전도도 할 수 없다. 나는 전도하러 안 나간다. 왜? 어차피 안될거니까. 왜? 하나님 못 만났으니까. 부흥이 안 부어졌으니까. 하나님이 부흥을 부어 주시면 난 그냥 허락해 드리겠다. ^^ 굳이 안 된다고는 안 하겠다. 이런 식으로 누가 하나님인지 모르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기대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 편으로는 궁극적으로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 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어떠한 정신으로 동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는가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 있는 사람들 중 누구를 위해서 목을 내 놓을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건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데 까지 가는 사람 바울이 목을 내 놓았던 것은 자기 민족을 위해서 목을 내 놓았습니다. 구체적이었습니다. 성령이 내게 증거 하기를 환란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가 내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누구를 위한 복음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아직 믿지 않는 동족들과 이방인을 위하여 자기의 목을 내 놓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사랑을 가르치고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 되는 교회를 세워가면서도 정말 우리들 속에 이런 전우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를 보여 주는 데, 하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체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신앙의 인격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체들과 함께 섬기면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향해서 피붙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들에게 해 줄 수 없는 희생을 영적인 형제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핏줄에 매인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 거룩한 소명에 매인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지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향해서 사랑 없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들입니다. 가족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피 바른 형제들을 향한 그러한 깊은 사랑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건조하고 너무나 피곤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고 나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래도 친구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 알고 난 다음에는 난 친구도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취미를 함께 나누는 동호인의 클럽도 저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을 맘 놓고 해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의 진정한 사랑과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았다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세상에 있는 친구들과 친밀한 교분을 나눌 시간이 있다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다 잃어버렸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혹은 사회에 나와서 생명처럼 생각했던 소중하게 생각하던 친구들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같은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제게 있는 거라고는 여러분들 밖에 없습니다. 근데 어느 정도는 형제들도 잃어버렸습니다. 친척들도 잃어버렸고 동기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역에 헌신된 다음부터는 소원해진 면도 많았습니다. 반성을 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즐거워하던 모든 것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장식품이 되어주고, 위안거리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여행을 하고 싶다고 휙 떠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워도 그저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찾아가보고 싶어도 다시 찾을 수 없게 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저를 심히 원망하며 떠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똑바로 믿기 위해서 어떨 때는 못할 짓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마지막에 제게 남은 것, 여러분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주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수요일에는 수요일, 금요일에는 금요일, 그리고 공휴일은 누구 말마따나 교회 ‘밥’ 아닙니까? ^^그래서 또 못 만납니다. 그래서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제 마음속에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이 없고, 여러분 속에 저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너무나 억울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의 사랑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사랑을 알고 그 은혜의 빛 안에 살아가는 것과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피 뭍은 형제들로서 함께 사랑하고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것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아있는 사람들이 불과 한품에 안을 정도의 작은 숫자의 사람들만 제 인생에서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저 쫓아서 열심히 신앙생활 했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남아있는 여러분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이 사람들처럼 중요한 의미는 갖지 못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는데 함께 이제는 모두 잃어버리고 이제는 그 대가로서 남아있게 된 이 지체들이 함께 피 뭍은 형제들로서 여러분들에게 사랑스러워지지 않고, 더욱이 한 기관에서 같은 목적을 위해서 같은 배를 타고 영혼을 섬기고 그 영혼을 건지는 이 일에 신명을 바치도록 함께 부름을 받아서 함께 봉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흐르지 않고, 전우애가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시고 싶었던 그 방식을 따라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동안에는 그들이 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에 대한 지식은 무엇인가 마치 초점이 않은 사진처럼 무엇인가 분명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 영성의 심장부에는 항상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성-- 그 사람의 영성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인격적으로는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이 뛰어나도 인격은 단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는 그곳에도 사랑이 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걸직한 부흥사로서 한 생애를 마감하신 분인데 저도 그 분 설교를 몇 번 들었고 제가 아는 가까운 친구가 그 목사님 밑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한 번은 제가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요. 기도원에 갔는데 --그 목사님이 예로 드는 것은 뭐냐면 은혜는 받았는데 아주 인격적으로 변화가 되지 않은 대표적인 부흥사로서의 예를 드는 겁니다. --기도원이니까 목사님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부목사를 부른 거예요. 그 목사님 성함이 이 장수 였답니다. 이 장수 인데 목사님이 이름을 고쳐 주었대요. 장수가 뭐냐 장천이라고 해라 . 자기 부목사한테 그렇게 시킨 거예요. 그렇게 해 놓고 이목사 , 이목사 부르는데 대답을 안해요. 그러니까 거기 목사님들 평신도들이 많~~은데 ‘장천아!!’ 그러더래요. 아무리 목사님 연세가 드셨다고 해도 그렇 수 있겠어요? 그런데 내가 똑같은 경우를 또 한 번 봤습니다. 어느 기도원이라고는 말 안하겠는데 친구가 전 영범이에요. 신학교 동창인데 기도원의 원목으로 있습니다. 기도원이 꽤 큽니다. 책 많이 봤다고 하면서 자기가 기도원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 보여주려고 (얻어 쓰려고 간 사람이니까) 쭉 설명을 열심히 하는데 저 쪽에서 “ 영범아~~” 스타일을 완전히 구긴 거지요.^^
먼저 예를 든 그 목사님-- 공항에 나갔는데 사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제가 모시고 있던 그 목사님에게 인사를 시키는 거예요. ‘목사님 인사드려’. 그러더래요. 그래서 난 그 목사님보다 연세가 많아 보이는 데.. 같이 늙어가는 처지긴 하지만.. 인사를 하더래요. 그래서 누구십니까? 그랬더니 돌아가신 그 목사님이 --아까 장천아 그랬던 그 목사님--두드리면서 ‘목사님 얘가 우리 교회 장로입니다’ 그러더래요. ^^ 그러니까 한 번 만난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거지요. 그럴 수 없다 완전히 masochist다 사람들을 억누르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때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 말씀이 귀에 쟁쟁해요. 나도 ‘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일 교회 장로님인데 어떻게 자기한테 은혜를 받았지만 어깨를 두드리면서 얘가 우리교회 장로입니다. 내 말이면 꼼짝도 못합니다. ’ 그 얘기까지 하더래요. 공항에서.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요? 내가 그렇게 비아냥거렸더니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그거예요. ‘김 전도사 넌 잘 모르는 소리다. 왜냐 그 사람이 비록 인격이 안 다듬어져서 부목사한테 교인들 다 있는데서 ~장천아~ 그렇게 부르고 하지만 자기기 그 목사님을 오랜 세월 지켜 봤는데 그 목사님만큼 자기 교회 부목사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예가 뭐냐하면 전에 있던 교회를 옮기면서 그 교회를 그냥 그 부목사 주고 떠났어요. 그게 사실 교계에서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돈으로 치면 10억도 넘는 거예요. 주고 떠난 거예요. 우리는 가서 지을 테니까 이건 너 해서 살아라 교인들 300명 떼어주고 말이지요. 그런 사람이 어디있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성화되어야 하지요. 깨져야 되지요. 고쳐져야 됩니다. 그것이 어떤 표현되는 양식은 신앙적인 수준이나 성화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분명하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 그 영적인 사람 핵심부에는 특이한 체험이나 놀라운 능력이 깃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그 피 뭍은 사랑, 피 뭍은 복음을 체험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랑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피 뭍은 복음에 빠져본 적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사랑에 목 멘 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 함께 자기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로 부름을 받은 그 지체들에 대한 불붙는 피 뭍은 사랑, 그런 사랑이 --표현이 각기 다를 수 있지요-- 그 분이 정말 성화되었더라면 점잖고 거룩하게 표현했겠죠. 그러나 그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심 없는 동료에 대한 사랑--그것들이 우리에게 감화를 주는 겁니다. 참된 영성의 핵심부에는 이러한 사랑이 있다 이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견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년이 다 지나가도록 함께 섬기는 교사들, 함께 섬기는 구역장들을 위해 단 한마디의 기도도 해 보지 않은 적 많죠? 어떤 처지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적이 많죠? 그러면서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삶 속에서는 용해되지 않는 소화되지 않는 설익은 교훈과 성경의 복음들을 사람들에게 넣어주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불쾌하고 얼마나 가식적인 삶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주님을 만난 이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이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고 그 십자가의 복음에 피 바른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의 복음이 많은 지체들에게 함께 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를 십자가를 볼 적마다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곤고한가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정말 그는 나의 격려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기도해 줄 것인가 그리고 함께 섬기면서 -쉽게 얘기하면- 함께 섬기는 그 모임 자체가 한없이 즐겁고 기쁜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 사랑 그러한 은혜가 있는 모임이 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연합을 함께 이루면서 우리들이 함께 사역을 해 나갈 때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됨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점에 있어서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반 쪽 밖에 복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에 부합할 때 우리의 삶은 복음에 더 찬란한 빛으로 다가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했던 이유도 이런 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렇게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렇게 동역자들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자기를 위해 목이라도 내 놓을 것 같았던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들이 그리워지고 생각나는 그러한 사역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기도하겠습니다.
2. 피 묻은 진리를 가르치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5:2)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7:10)
기도하겠습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오늘도 저희들이 교사학교 두 번째 주 시간입니다.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영혼에 대한 열정,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 이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이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이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용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분명하게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공부를 했고 얼마나 많은 세상의 지식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 들으면서도 느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한분을 통해서 수많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역자들이 해 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나가시는 것들을 보잖아요? 결국 하나님이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인격을 보시는 거예요. 근데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 가운데 핵심에는 무엇이 있냐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에요. 사람이 자기가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은혜와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결국 그 많은 은혜와 체험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방법은 계속 연구하면 되지만, 말씀 자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의 영혼이 변화되는 놀라운 기쁨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서 또 말씀의 은혜 속에서 끊임없이 경험되어야지만 기도도 가능하고 성경도 가능하다 이거예요.
지금부터 한 7년 전 일거에요. 아까 읽은 마태복음 5장 2절을 이렇게 보면서 아마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몇 번째 되지 않는 짧은 절 일겁니다.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그렇게 하고 2절이 끝나잖아요. 근데 그것을 보면서 아주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뭐냐하면 평소에 예수님은 생애 전체를 통틀어 보면 예수님의 친구가 몇이 있었습니다. 고독, 침묵, 고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예수님의 침묵하시는 성품-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침묵으로 대답하실 적이 많았습니다. 고난 받을 때에도 침묵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이미 이런 것들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난을 받을 때 잠잠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예고되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과묵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늘 입을 여시니까 진리의 말씀이 마치 폭포수가 쏟아져 나가듯이 확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이 5,6,7장 까지 나오는 산상수훈의 설교는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설교한 것의 골자만 추린 거라는 거지요. 이 설교를 도대체 팔복산에서 몇 시간에 걸쳐서 주님이 하셨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아침서부터 시작되어서 늦은 시간까지 상당히 장시간에 걸친 설교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골자만을 추려서 5,6,7장을 기록한 것이지요. 근데 이걸 보면서 제가 목회자로서 깊은 도전을 받았던 것은 어떤 부분이냐 하면 그렇게 과묵하신 예수님이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쉬지 않고 흘러내려 오는 것이지요. 사실 어떻게 표현 하냐면 이렇게 예수님이 이렇게 설교하기 위해 오늘날 설교자들이 준비하는 것처럼 전날 밤 책이나 주석이나 갖다놓고 골똘하게 연구하며 원고를 작성하신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냥 손에 심지어는 성경도 들고 오셨을 리가 없어요. 왜냐? 그 땐 성경이 두루마리였으니까. 회당에서나 펴서 읽을 수 있는 것이지 길거리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사도행전에 나와서 설교한 모든 사도들도 기억을 더듬어서 설교한 것이지요. 근데 예수님이 팔복산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근데 이게 5장인데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병자를 고치는 사건들이 쭉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 그 무리들 속에서 예수님이 빠져 나오셔서 팔복산으로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 때 거기서 예수님께 치료받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 중의 일부가 산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성경의 묘사에 보면 예수님은 좀 높은 데 올라가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쭉 앉은 거지요. 그러니까 설악산처럼 깎아지른 산이 아니라 동산 같은 곳에 앉은 거지요. 그러니까 죽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마치 보좌에 앉아있는 왕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산 아래에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었습니다. 손을 얹으면 병자가 낫고, 귀신들린 자가 온전해지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났고, 죽은 자도 살아나는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 산에서는 아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요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하고 있었고, 모든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회중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을 고요히 듣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5,6,7장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자체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핵심을 찌르는 진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장면 자체가!!
여러분들은 신앙이 어떻게 자란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된 신앙이 어떻게 바로잡힌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온전하지 않은 신앙이 어떻게 온전해 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따라서 산 위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다양한 동기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 고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거기 나오는 제자들은 12제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형하고 유산을 나누어 볼까 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양한 목적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제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좌정하시고 조용하게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병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 신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거룩한 장면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 자체가 보여주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은 고요히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순전한 교훈을 듣는 데로부터 신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이처럼 성장하게 된 원인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하는 가운데 그룹 바이블 스터디 이야기를 꼽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견해는 좀 다릅니다. 그룹 바이블 스터디는 오늘날 교회를 망쳐 놓은 굉장히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룹 바이블 스터디 그 자체가 교회를 망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잘못된 방식 자체가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교회는 여태까지 탄탄하게 교회가 서 온 몇 가지 방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가장 잘 배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소는 교리입니다. 제일 먼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 세례 받기 전에 배우는 사람들은 특히 세 가지를 중심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입니다. 사도신경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주기도문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십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그것을 상세하게 풀어서 3년 가까이 가르쳤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말이지요.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교리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세례문답 할 때 그 때에 배우는 교리들을 신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세례를 받으면서도 자기가 뭘 믿는지 세례의 의미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래도 저희 교회에서는 시험을 봐서 떨어지면 안 줍니다. 외우는 거지요. 세례를 받으려면, 자기 자녀에게 세례를 주려면, 학습을 받으려면 한권을 우리 교회는 다 외워야 됩니다. 그래서 떨어지면 일주일 여유를 주어 재시험의 기회를 주고, 일주일 후에도 떨어지면 다음 기회에 줍니다. 그가 거듭난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교리를 배우는 방법 자체가 그 교리를 외워서 어떤 규칙을 외워서--군대에서 군인의 길 그런 것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과 함께 교리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뇨? 이렇게 물으면 교리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과 1,2분이면 외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교리를 외우면서 설교를 통해서 배우든 문답을 통해서 배우든 스터디를 통해서 배우든 뭘 통해서 배우든 지 간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생각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의 도리를 정직하게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오늘날 그룹 스터디 하라고 답 달면서 하는 스터디 교재를 만들어 놓으면 머릿속에 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성경은 요만큼 공부하고 와가지고 자기 얘기를 한 없이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의 신변사와 자기의 일상사를 이야기하고 성경에 대한 어줍지 않은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디딤돌이 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교회가 참 가르쳐야 될 것들이 약화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교리 자체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해지기 시작하였던 겁니다. 성경 자체가 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 진리를 깊은 은혜 속에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교리의 내용들을 체험하고, 그 체험된 내용들이 우리의 인격 속에 용해되어서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으로 우리를 데려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터전 위에서 성경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이 교회가 신앙의 견고함을 유지해오는 방편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간단하게 드려지는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교리 교육도 무너집니다.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는 훈련이나 GBS 프로그램 같은 걸로 들어와서 버티려고 하는 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에서 영혼들을 가르치는 직분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결론이 뭐냐면 예수님이 입을 열어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니까, 입을 탁 여니까 폭포수와 같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는 거지요.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예수님 속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지요.
삶은 진리를 위해 있고 진리는 삶을 위하여 존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책망 받을 일이 없습니다. 칼빈 같은 사람은 분명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고 아는 동기가 순수하냐? 정말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즐거워하기 위한 목적,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한 목적에서 습득되는 지식이 아니면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에 관한, 말씀에 관한 지식들이 가득 차 있을 때 그것들이 우리의 을 통해서 흘러나와서 한 없이 지식이 지식의 꼬리를 물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성품이 어떤 성품이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으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고 따라가고 생활해야 되는 것들이 우리 속에서 넘쳐 흘러나오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앵무새와 같은 식으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입니다. 오늘 두 가지만 얘기 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성경자체에 대한 지식입니다. 에스라를 보니 그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 그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결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우선 말씀에 대한 부지런한 연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에스라 자신이 진리의 말씀에 가득 찬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아이들을 모아놓고 참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대신에 세상의 잡다한 이야기, 세상사 이야기 , 시사 이야기 이런 것들로 맥없는 예배를 드리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게 자기 마음속에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진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없어서 그래요.
만약에 말할 수 없는 진리가 가슴 속에 불붙고 있으면 그는 다른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가 자기에게 말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덮어 두는 것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하는 것만큼 힘듭니다. 말씀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가득 차 있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론할 때에 사람들은 궁핍함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우선 예수님이 이렇게 입을 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머릿속에서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구약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계속해서 구약을 비교하고 옛 계명을 새 계명과 비교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조차도 사실은 구약에 대한 해설이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해설을 하는 분이 메시아이셨고, 메시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신약시대에 참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 참 주님을 믿는 도리가 무엇임을 권위를 가지고 해석을 했는데 여태까지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의 가르침과 신약의 가르침이 갖는 엄청난 차이를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신 겁니다.
이렇게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해설해 나갈 때 막힘이 없이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 나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것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신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반 밖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분은 부지런히 성경을 탐구하신 분이었어요. 열두 살 때는 이미 성경지식이 깊이 차 있어서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토론을 하는 그런 자리에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습득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말씀 자체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저는 이 말씀 자체에 대한 지식의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성경 자체를 읽어 나가서 성경 자체가 무슨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지런히 꾸준히 성경을 읽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교리 반에서도 은혜 카드를 쓰고 구역에서도 은혜 카드를 씁니다. 기도한 시간, 성경 읽은 장 수, 경견 서적 읽은 것.. 카드에 보면 다 나옵니다. 근데 허덕허덕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실천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한 시간 이상 기도하고, 성경도 댓 장 이상 읽었으면 좋겠는데 부대끼면서 살다보면 여러분 그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고 기도 속에서 충만함을 받는 것은 오늘 오후에도 말했지만 신앙생활의 두 수레바퀴에요.
이걸 포기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겁니다. 다른 지름길은 없어요. 맨 날 기타 통이나 두드리면서 돌아다닌다고 해도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본적인 경건의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능력을 공급 받아야지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이 샘에서 물을 길었어요. 거기에서 능력을 공급 받고 신앙생활을 했단 말이에요. 그러고서 오늘날 새로운 샘이 있다 제 3의 샘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가 노래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훈련 받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많이 있지만 그건 모두 상품과 같은 거예요. 잠시 나타났다 거품과 같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 두 가지예요. 그래서 성경을 꾸준히 읽어나가야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말씀 자체의 지식을 위해 성경 자체를 읽는 것과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성경을 보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길러나가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습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에서 저는 앞으로는 모르겠어요. 아직까지는 테마별로 설교하는 것이 지 지금의 여러분들의 수준에 가장 유용한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앞으로 좀 더 장구한 세월이 흘러서 제가 설교자로서 좀 더 원숙해 지면 로마서라든지 고린도전서라든지 호세아서라든지 통째로 설교를 하겠다고 덤벼들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그럴 수 있는 역량도 안 된다고 보고, 또 그럴 수 있는 역량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주제별로 하는 것이 저는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내가 설교를 하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좀 쑥스럽기도 하지만 여러분, 설교를 한 번 듣고 나면 그 설교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35%정도 섭취되고 나머지는 모두 흘러가 버립니다. 그게 어디서 입증 되냐면 우리 교회 섬김 파트 가운데 녹취 헌신자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제가 설교한 것을 녹음한 테이프를 집에 가지고 가서 들으면서 컴퓨터에다 글자로 옮기는 겁니다. 제가 원고 없이 설교를 하니까 오늘 설교를 하고 다음날 와서 또 설교를 해도 설교가 틀립니다. 나도 사실은 이것을 보고 어떻게 설교를 했을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속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묘사까지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풀어 놔야지만 그걸 보고 책도 만들고 교재도 만들고 한단 말이지요. 이 만큼 풀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풀면서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간증이 많이 나옵니다. 들었을 때 자기는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자기는 거의 다 깨달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녹취를 하면서 풀어요. 푸는데 푸는 방법은 대게 word by word로 풀어요. 발가락 끝에 녹음기를 놓고 계속 흘러가게 play를 눌러 놓고 pause를 누르면, 여러분.. 쓰고 좋은 주일아침입니다...쓰고 이런 식으로 치면서 쓰는데 60분짜리 하나 풀려면 120분에서 150분 많이 걸리는 사람은 180분까지 걸리지요. 사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집중해서 예배드리는 것도 아니고 발가락으로 이렇게 컴퓨터 쓰기 위해서 하는데 그거 읽다가 변화되는 지체들을 많이 만납니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설교를 들을 때 모두 이해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핵심적인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을 부딪치고 지나갔을 때만 우리 마음속에 남는 것이지 자기의 어떤 영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흘려버리고 나면 그것들이 계속해서 자기 속에 남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회개하고 눈물 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회개하고 눈물 흘렸는지를 영원토록 기억하는 거예요. 영원토록. 살아있는 동안에 늘 기억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기 전에는 내가 어떤 사고를 가졌었는데 말씀을 듣고 깨달은 후에는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 하는 조리 정연한 지식의 체계들을 갖추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읽어가야 되는 거예요.
이번에 시골 집회를 내려가서 굉장한 걸 배웠어요. 우리나라에 아주 유명한 설교가 한 분이 계셨는데 돌아가셨어요. 그런 시도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교회 수준은 굉장히 영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시간표 한 번 짜 놓은 것 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하고, 기도 하고, 밥 먹고, 큐티 할 사람 큐티 하고 아침 집회 하고 끝나면, GBS하고, 특강 듣고 자고.. 저녁 집회하고 ... 그게 우리 순서 아닙니까? 이건 수준에 못 미칠 정도예요. 어떻게 했냐? 오전에 집회를 하고 설교를 오후에 모여서 말씀을 재독하는 시간을 같는 거예요. 재독이 뭐냐? 나는 상상도 못했는데... 첫 시간에는 조용히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시간에는 교인들이 모두 모여서 설교를 다시 틀어요. 그 다음엔 노트를 가지고 듣는 거예요. 두 시간 세 시간 계속 되는 설교를. 근데 그 이야기가 재미있는 게 첫 시간에 도저히 깨뜨려지지 않던 사람들이 다리 쭉 뻗고 정리하면서 깨트려진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설교자로서 가지고 있는 가장 안타까운 약점은 뭐냐하면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너졌어요.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나서 왜 무너졌는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 때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는지 생각이 안 나요. 또 생각이 나더라도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그러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긴 받는데...비유를 하자면 의자를 가지고 와서 이렇게 차곡차곡 놓아야 사람이 앉을 거 아니에요? 돈 생기면 의자를 하나씩 사서 이 안에다 집어 던지는 거예요. 나중에 와 보니 의자가 60,70개 분명히 들어갔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거예요. 들어가서 앉을 수도 없고 높은 의자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고 사람이 앉을 수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거예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쓰레기처럼 머릿속에 들이미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의 신앙의 특징이 뭐냐? 견고함이 없어요. 회개하는 마음도 똑같고 불붙는 마음도 똑같고 열정도 똑같은데 차이는 뭐냐? 견고함이 없어요. 뿌리박히질 않아요. 그리고 중독자가 뭘 찾듯이 계속 더 격렬한 체험, 더 격렬한 뒤집어짐, 녹아짐... 자꾸 녹으면 뭐가 남겠어요? 다 타 버리지. 쉽게 얘기하면 말씀을 들어서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자기가 살아가는 사상이 되어야 해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요즘에 와서 계속 느끼는 것이 ‘예배시간에 듣고 흘려버리는 설교만으로는 확실히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새록새록 다가와요.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를 비롯한 경건한 사람들이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과 함께 강조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서적을 읽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보면 주일날 뭘 하냐? 예배를 드리고 육신이 쉬고 집안 식구들이 모여서 예배시간에 은혜 받은 말씀을 나누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신앙서적을 독서하면서 주일을 보낸다.
그러니까 가장 안타까운 것이 뭐냐면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그렇다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여요- 받아들이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자체가 사상이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사상이 되어야지만 사람--사람은 이런 것이다! 십자가--그건 이런 것이다! 미움- 아 그것은 이런 것이다! 이런 자신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앙의 견해들이 생겨날 것 아니에요? 남녀가 다니면서 연애하며 결혼한다 했을 때 난 기독교인이 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 것들은 아무데서나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체계적으로 쌓여져 가야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재는 다 있어요. 공터에 벽돌 한 채 부리고 가고, 빨간 벽돌 한 채 와르르 부리고 가고 대들보 와서 한 차 와서 부리고 가고, 그 위에다 물 왕창 붓고 가고, 시멘트 가루 왕창 쏟아 붓고 가고, 전기 다마 사가지고 와서 한 트럭 쏟아 붓고 가고.... 있긴 있어요. 뒤져 보면 나오긴 나와요. 근데 이런 게 집을 지어야지..... 그러니까 언제 안전하냐 하면 가슴이 화끈화끈 할 때만 뭔가 안전하고 늘 불안한 거예요. 그러나 자재는 다 들어간 거예요. 몇 억 원 짜리 자재는 다 쏟아 부었어요. 그래도 한 쪽은 사정이 그렇지만 다른 한 쪽은 어때요? 말씀을 들으면서 철골부터 세우는 거예요. 벽을 세우기 시작하고 2층을 올리고 3층을 올리고 지붕을 세우고 얼개미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 바닥을 깔고 다음에 실내장식을 하면서 등을 만들어 붙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벽이 보강이 되고 첨탑이 올라가고 아름다운 지붕이 덮여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속도 점점 더 아름다운 데코레이션을 이루어 가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그런 식으로 화물차 부리듯이 잔뜩 쏟아놓으니까 지식은 있어요. 이야기 하면 옆에서 계속 맞장구치는 거예요. 맞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네가 여태까지 맞다고 한 것 얘기해봐 그러면 못하는 거예요. 남이 미움은 이런 거고 사랑은 이런 거야. 그러면 자재가 다 있으니까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쩜 나하고 그렇게 생각이 똑같냐? 계속 그렇게 얘기를 하는 데 너 한 번 얘기해 봐 그러면 못 하는 거예요. 집이 안 지어 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말씀에 대한 탐구가 너무 소홀한 거예요. 탐구를 하지 않는 거예요. 계속해서 차로 잔뜩 부려 놓는 거예요. 잔뜩 부려 놓으니까 있기는 다 있는데 자기 입으로 얘기 하라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건축이 세워지게 되면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독특한 관점이 생기는 거예요. 거기서 보면서 쭉 흘러가면서 아 이건 아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말씀의 은혜를 받고 보면 어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하는 것을 보면서 저건 아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직감적으로 이건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근데 문제는 그렇게 집을 잘 지은 사람에게는 그게 왜 아닌지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마지막으로 신앙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다 보인다고요. 계속 화차 부리듯이 부려 놓은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아는데 왜 아닌지는 모르고 계속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설득할 수도 없고 자신도 아니다 라는 느낌만 드는데 이게 진실한 건지 아닌지 확신이 있어야지, 논리가 있어야지만 그 논리 위에 발을 디딜 것 아니에요? 삶이 불안한 거예요. 거룩한 삶이 없다 이거예요.
제가 청교도 시대를 쭉 보면 설교를 한 사람이 위대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건 그럴 수 있어요.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면 그런 설교 할 수도 있겠죠? 위대해 보이는 것은 그걸 듣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조나단 에드워드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2장 보셨지요? 깨알 같은 글씨로 60,70페이지 나갑니다. 그걸 진짜로 설교를 했대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빨리해도 네 시간은 설교를 해야 해요. 그 원고를 줄이지 않고 했다면. 한 없이 파고 들어가는 그것을 그들이 앉아서 들은 거예요. 그들이 은혜를 받고. 그게 위대해 보이지 않겠어요?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그런 설교를 듣기 전에 기독교 신앙 자체가 말씀으로 체계화 된 거예요. 막 와서 쏟아 부어도 문제가 안돼요. 막 쏟아 부어도 기와는 지붕으로 올리고 누르스름한 돌멩이는 바닥에 깔고 허연 돌은 옆에다 붙이고 등이 쏟아져 들어오면 달고... 이게 되어 있는 거예요. 아예 그런 것이 안 지어진 사람은 막 쏟아져 들어와도 그게 뭔지 모르는 거예요.
제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설교가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어느 지체가 그런 얘기를 해요. 한 번 설교를 다섯 번으로 나누어서 할 수 없어요? 왜?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니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대요. 건축되지 않은 상태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건축되어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안돼요. 쏟아지면 지붕에 올릴 거 올리고 바닥에 내릴 거 내리고... 자기가 바닥에 내려가라고 말만 하면 내려가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고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점점 견고해 지는 거예요. 이게 골조 없이 수 십 년 갖다 부어도 결국 쓰레기 더미 밖에 됩니다. 다 치워야 되요. 만약 튼튼한 철골이 짜여있는데 50년 동안 거기에 덧붙이면서 내부공사를 한다고 쳐요. 뜯어내기도 하잖아요. 왜? 나중에 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집 채 전부 허무는 거예요. 아니라고. 천정 이 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뜯어내고 새로 들어온 물건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갖다 붙여도 뜯어 맞춘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한 집이 지어지는 거예요.
문제는 투자를 안 하는 것이에요. 그게 가장 큰 문제예요. 예수님의 경우에 입을 열었을 때 진리의 말씀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이 단지 구약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메시야 적인 인식이 독특한 기독교 신앙의 집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바리새인의 삶을 보니까 그들이 왜 아닌지 그런 식으로 계속 믿으면 종말이 어딘 지 주님의 눈에는 발가벗은 듯이 다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평범하게 말씀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찌르는 말씀. 번뜩이는 말씀. 그게 다 집과 같은 신앙의 체계 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누구라고 말할 순 없지만 우리 교회에서도 비교적 그런 집이 잘 지어져 있는 지체들을 만납니다. 견고해요. 물론 열정이 식을 때도 있고 붙을 때도 있는데 견고해요. 요동하지 않아요. 이런 것들이 안 지어져 있는 사람들은... 이게 지어져 있는 사람들은 식어도 딱 서있는데 이게 아닌 사람은 뜨거울 때 확 타오르고 식을 때 와르르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게 맞나? 여태까지 아멘 한 것은 뭐고 이제 와서 이게 맞나?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이 지어져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주제만 주어지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외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러니까 그런 구조가 없는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혹 하는 거예요. 야 대단하구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아니다 회칠한 무덤이다 라고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보이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두 가지예요.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열심히 책을 읽는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우리 교회가 장기적으로 탄탄한 신앙을 갖추려면 교사나 구역장, 집사 이렇게 직분별로 정해놓고 필독도서를 정해 놓고 임명할 때 그걸 확인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방법이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오는 책 들 중 95%가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이고 나머지 5%정도가 읽을 가치가 있는 책들인데 그 중에서도 300여권 정도 엄선을 해서 많이 읽어나가요. 300여권 읽어도 별로 안 걸려요. 부지런히 읽으면 3년만 읽으면 읽는다고요. 넉넉잡고 5년 안되면 10년 ... 금방 죽는 것도 아니고^^ 쭉 읽어요. 독일어 영어 불어를 읽으라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말 신토불이 국어를 읽으라는데 그것도 안 읽거든요. 부지런히 읽으세요. 책 사는데 돈 좀 투자해요? 돈 벌어서 뭐해요? 외투라도 팔아서 사야지. 좋은 신앙 서적 살 돈이 없으면 옛날 대학 때 읽던 다른 책 팔아서 사라고요.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처음부터 아예 아닌 길로 들어선 사람이면 말도 안해요. 변화를 받고 조국 교회를 위해서... 자기는 조국교회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대요. 왜 그러냐? 신앙이 잘못되었대요. 어떻게 잘못되었는데? 모르겠대요. 뭐예요? ^^ 가슴만 불타고 머리는 차가운 거지요. 뭘 좀 알아야 될 것 아니에요. 같이 깡통 소리 나는데 한 사람은 비판적인 깡통이고 한 사람은 비판조차도 없는 깡통이에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거룩한 삶이 나오겠어요? 그러면서 맨날 와서 하는 얘기가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어요? 좀 굳센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 그게 다 지식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에요. 책을 부지런히 투자하세요. 수입의 20일조 정도 투자하세요. 그게 일생을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흔적이잖아요. 읽으면서 거룩하게 살려고 애쓴 흔적이잖아요. 그럼 뭐해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쭉...
읽지 못해도 사요. 사. 그래서 못 읽으면 가끔 책을 펴 놓고 ‘미안하다 미안해’^^ 그래서 햇빛이라도 보여줘^^ 자 봐라^^ 나는 정말 안타까워요.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에 대해 잘못된 방식으로 발발거리는 거에 대해 너무 미워요. 투자해요. 그래서 사요. 읽지 못해도 나에게 그런 책이 꽂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번씩 만져 보면서 ‘미안하다 미안해 내일은 햇빛 보여줄게’ 그러면서 살아야 된다고요. 부지런히 사서 읽고 탐구하고 읽고 또 탐구하고 그래야 되잖아요? 물론 여러분들이 몰라서 못사는 걸로 알겠어요. 이제 알려 줄 테니 사라고요. 우리 교회에서 ‘북 세일’이라고 할까 도서 전시회를 한 트럭 가지고 와서 늘어놓을 테니 그 땐 카드 다 가지고 와요. 한꺼번에 들여놓고 천천히 읽어요. 여러분들이 적어도 5년 10년 신앙생활을 했으면 적어도 경건 서적이 한 서가는 나와야 되요. 그게 바로 경건한 성도들이 그렇게 사모했던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했던 거예요. 주간지는 일주일에 두 권씩 읽으면서...
누가 그러대요? 책을 왜 못 읽냐고 그랬더니 성경 미안해서 못 읽는대요. 책 읽으려면 성경이 그런대요. ‘나도 안 읽었는데..’^^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눈물인 나더라고요^^ 그걸 영어로 well-born그러는 거예요. 잘 났다!! 근데 그리고 그 다음에는 테잎을 듣는 거예요. 이번에 열린 말씀 준비하면서 보니까 100세트가 나왔더라고요. 4년이에요. 제가 40년이야 살지 않겠어요? 너무 야무진 꿈인가? 그러면 1000세트가 되지 않겠어요? 감당할 수 없는 양을 쏟아내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그것들이 들을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열린 하늘 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제게 부어주시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건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할 의무예요.
근데 문제는 그게 흘러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내게 왜 그렇게 고단한데도 책을 많이 쓰냐고 그러는데 인세 받으려고 그런다고 그러는데 책 조금 써도 인세 들어와요. 조금 쓰면 그 책이 오래 보급되기 때문에 마찬가지예요. 쓰는 이유는 급해요. 1년에 4권씩 쓴다고 해도 40년 이래봐야 160권밖에 못 쓰고 죽는다고요. 저게 저렇게 테이프로 묻어 놓으면 빛을 못 보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교회 교인들인데도 안 듣잖아요. 책 나오면 갖고 가서 본다고요. 물론 안 보는 사람도 있지만 . 그래서 빨리 책으로 나와야 해요. 근데 사는 게 부담이 되나 해서 세트 비치해 놓았어요. 은경자매에게 말하면 거저 빌려 준다고요. 물론 많이 빌려가요. 내가 심방할 때 뭐 뭐 들으라고 하고, 또 뭐뭐 듣고 나서 다시 심방한다고 하니까 듣기는 하는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멍하니 전철타고 다니면서... 일간스포츠하고 결혼했어요? 어디 신문 없나?^ ^ 옆의 사람 목 내밀고 가련하게... 그러다가 이렇게 하면 한 대 얻어맞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라고 그랬더니 후줄근하게 살아요? 그러다가 휴지통에서 주웠는데 하필 코 풀어 놓은 거예요^^ 왜 그래요? 녹음기 하나 사서 귀에 고 늘 듣고 적고 정리하고 ...자신의 삶은 풍성해지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그러면서 ‘사랑과 미움’ 그러면 미움에 대해서 무엇인가 뿌리를 캐는 거예요. 독일에 가면 마리아 수녀 회에 가면 그런 게 있어요. 한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걸 몇 달 동안 파고들어가면서 자기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말씀에 의해 걸리는 모든 뿌리를 뿌리 채 뽑기 전까지는 그 말씀의 주제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예를 들면 미움. 그러면 미움에 대해 바닥까지 파헤쳐서 하다못해 강아지 미워한 죄까지라도 다 파내는 거예요.^^ 해결을 보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해결을 해야지만 정리가 되는 거예요.
참 안타까워요. 분명히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 들여요. 그런데 몇 트럭씩 계속 갖다 붓는 거예요. 처음에는 저러다 집을 짓겠지.. 짓지도 않아요. 계속 들어부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계가 있는 거지요. 그게 잘못된 것이에요. 이러한 지식들이 있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부지런히 재독하는 훈련을 해 나갔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부지런히 탐구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저보다는 덜 바쁘잖아요? 여러분들은 얼마나 좋아요? 토요일 같은 때 직장 안 나가는 분들도 있지요? 임영섭형제 같이 . 또는 자유로운 사람들도 있잖아요. 3일정도 한 세트 기도원에 가지고 가서 이번에는 성령에 대해 뿌리를 뽑으리라. 그러면서 공부를 위해서 설교를 듣는 거예요. 쭉 정리를 해서 덮고 나서 혼자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그게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못된 생각들이 그 그물에 다 걸리게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입을 열면서 쏟아져 나왔던 것은 단지 성경 자체에 대한 지식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던 거예요. 망원렌즈를 ‘외식’ 에 맞추면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위선, 사랑, 봉사, 구제, 헌신...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말씀에 대한 지식 때문이에요. 마지막으로 에스라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스스로 준행하니까 가르치는 폭발력이 있는 거예요. 삶이 하나님과 살아가는 삶이 진리와 밀착되어 있으니까 언제든지 그 이야기만 나오면 열정이 솟아오르는 거예요. 왜? 자신의 삶 자체가 말씀에 묻어있으니까. 피 묻은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지. 기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쉬워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가르치는 말씀 자체에 자기의 피가 묻어야 된다고요.
그러니까 실천하는 삶에 의해 강력한 후원을 받지 않은 말씀에 대한 지식은 내가 늘 비유하듯이 갑 속에 든 칼이에요. 둘이 늘 싸워요. 한 쪽은 뺏어요. 번득번득해요. 스치기만 하면 목이 가는 거예요. 이 쪽 사람은 어때요? 갑 째 들고 싸우는 거예요. 검술은 훌륭해요. 그러나 이 칼은 아무리 맞아도 안 죽어요. 그러나 저 칼은 한번만 스치고 지나가면 끝나는 거예요.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아도 삶이 없으니까 몇 대 두들겨 맞아도 까딱없어요. 도대체 교인들이 설레는 말씀을 안 가르치니까 즉 펀치가 아니고 계속 쨉을 맞으니까 안 쓰러진대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자꾸 맞으면 피곤해서 쓰러지지 않겠어요? 했더니 목사님 자꾸 맞으니까 이골이 나서 더 안 쓰러집니다.^^ 그거예요. 그 파괴력은 자기가 그 진리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데서 오는 거예요. 거기에다 생명을 걸어야 되요. 그 때 비로소 생명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탄생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3.영혼을 사랑하는 교사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녹취자 : 조원정
제가 옛날에 가끔 설교시간에 하는 연세 드신 목사님 유별나신 목사님 그 분 밑에 있을 때 거기서 여러 가지 연단들을 많이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님을 한편으로 늘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했던 면은 신학사상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잡탕이 많았지만 신앙이 황당무개하진 않았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옳은 것은 옳은 거 그런 것이 분명하셨습니다.
옛날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 하면 자유당 시절 때 정치 깡패 하던 분입니다. 우락부락하게 김두한 비슷하게 생긴 분이셨습니다. 물론 김두한처럼 그렇게 멋있지는 않지만은 노동 운동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회개한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의 정치적인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다리가 부러져 누워 있는 사람을 돈을 줘서 부하를 시켜 가서 쇠방망이로 다리를 몽둥이를 부러 뜨려 놓았답니다. 물론 사회가 한창 혼란스러워서 그런 것도 나왔겠지만 그런 인생을 사시던 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디서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그분이 지방에 많이 내려가지는 아니하고 가끔씩 내려 가셨습니다. 유명한 부흥사가 아니었으니까 큰 교회 같은 데는 가실 기회가 별로 없으셨지만 시골 교회에 자기가 다 자비량해서 가시니까 부흥사를 부를 그런 여력이 없는 곳을 가셨으니까 1년에 몇 번씩 가셔서 봉사하셨습니다. 부흥회 갔다 와서 한 얘기들은 황당합니다. 문도 없고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교회당에 부흥회로 써 부쳤는데 가보니까 그 교회 목사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이 앉아 있는데 하나는 목사님이고 하나는 부인이고 하나는 그 집 아이랍니다. 결론은 세 사람이 모여서 부흥회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도 다 하시는데 참 귀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한 지방에 부흥회를 내려 가셨는데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정상적인 행동을 하겠습니까. 주위에 불쾌감을 주고 인간 취급도 안하고 사람들이 교인들이 귀신 쫒아 준다고 기도실에 엎어 놓고 패고 어디를 누르면 귀신이 나간다고 해서 완전히 온 몸이 멍이 들었답니다. 가서 그러면 되느냐 하고 사실 기도를 해도 귀신이 잘 안 나가더랍니다. 새벽시간에 올라가서 기도해 준다고 하고 불러가지고 강대상 마루 바닥에 둘이 앉았는데 기도해 주려 했는데 기도해도 귀신이 잘 안 나가고 해서 한심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자기도 한심하고 그런데 순간적으로 자신도 이런 삶을 원하지 않는데 이렇게 귀신들린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마음이 들면서 그분은 좀처럼 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날 새벽에 둘이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또 데리고 왔더랍니다. 또 끌어안고 울고 삼일 동안 끌어안고 울었답니다. 귀신이 나갈 때는 소리를 치고 난리를 치고 나가는데 이거는 살짝 들었는지 어쨌는지 말입니다. 삼일 동안 울었더니 권위 있게 서서 손을 얹고 막 머리를 흔들면서 귀신아 나가라고 막 소리를 칠 때는 안 나가더니 끌어안고 삼일 울었더니 귀신이 나가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더랍니다. 그분 하시는 말씀이 이게 바로 사랑의 위대한 힘이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니까 그를 위해서 슬퍼하는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눈물을 흘리니까 하나님이 권위를 가지고 해도 안 되는 것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라는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하는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최고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 아무리 들여다봐도 가슴이 답답한 구절을 세 개나 만납니다. 하나는 사랑한다는 것도 답답한데 사실은 내 교인을 사랑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나는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닌데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비슷한 일기를 위필드에서 봤습니다. 위필드가 헌금을 많이 거뒀다는 것은 교회사에 널리 알려진 이야깁니다. 헌금을 걷는데 도사와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돈 통을 다 털어가지고 가져 갈 정도로 헌금을 걷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돈에 대해서 저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지 않느냐 하는 허황된 소문이 많이 돌았습니다. 그때 그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죽어도 그 얘기는 못하고 죽을 거 같습니다. 뭐라고 하냐 하면 여러분들이 여기서는 모르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가서 보면 내가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했고 내가 얼마나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당신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섬겼는지 하늘나라에 가면 여러분들은 다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정직한 설교자가 그렇게 까지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영혼을 돌보는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사역을 위한 다양한 도구 다양한 준비 이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영혼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때는 절제되어야 하고 어떤 때는 모두 나타내어야 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변화된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야 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모든 목회에 모든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근본적인 기초는 그리스도 때문에 영혼들을 사랑하게 된 숙명적인 사랑에 메인 마음입니다.
가끔 와서 신학생들이 저에게 자기가 소명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소명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매우 분명하게 오는 것입니다. 소명은 자기가 인식할 수 있게끔 오는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징표가 나타납니다. 그 소명은 꼭 목회자로서의 소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교사로서 부름을 받아도 거기에는 반드시 징표가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영혼에 대한 사랑 없이 목양의 사역에 거드는 이 모든 것들은 신앙적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영혼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혼을 맡겨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에 대한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 없는 것은 결국 자신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사를 비롯해서 목회자의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영혼들을 향한 눈물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자기가 너무나 잘 압니다. 영혼들을 생각할 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눈물이 있을 때 그 사람의 기도는 사랑이 용해된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한 불붙는 사랑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랑이 되어 질 때 그의 모든 섬김은 불이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 이것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을 건조하게 하고 우리의 모든 섬김을 메마르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위험한 요소는 우리가 사랑을 그 무엇으로 대치해서 해결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지 않고 프로그램이나 계획을 가지고 얼마든지 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마음 사랑을 부어주지 않고도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환심을 통해서 영혼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 이런 것들이 모두 영혼에 대한 정직하고도 진실함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우리들은 깊이 고민하고 우리 자신 속에 사랑이 없음을 깊이 아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양의 관계는 인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목양의 영혼들을 돌보는 이 직분에 가장 커다란 기초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한없이 감격하고 그것이 영혼을 향한 사랑에 동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교회 학교 사역에 종사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런 사랑에 감격 없이 영혼들에게 자기가 영혼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호소하며 다니다가 부끄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만으로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사랑은 권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진정한 권위는 그 사랑의 기원이 그리스도 예수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사랑에 감화 받고 감동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그 사랑의 깊은 감화와 감동이 없는 사람들이 영혼만을 사랑하고 영혼에 대해 불탈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사역을 하면서 영혼에 대한 참다운 사랑이 메말라 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혼들이 실족하고 영혼들이 잘못되었을 때 아파하지 않고 고통하지 않는 것은 병든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끝없이 감화를 입은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인생의 말년에 가까워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투지로 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계속 불붙은 사랑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꾸 섬기다 보면 그렇게 섬기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사랑은 사라져 버리고 일만 남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바울과 같이 이렇게 엄청난 일, 살을 에이는 것과도 같은 격무와 고난에 시달린다면 오늘날 웬만한 목회자들은 모두 뼈만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육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말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오는 감동을 입으면서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하거나 목회사역을 하지 않으면 세월이 많이 흘러 가버리면 망가진 가정, 파괴되어 버린 자신의 인간성 이런 것들만 재고처럼 쌓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방지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줄 대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십시오. 주님이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불러서 복음을 전하는 이 자리에 세우셔서 영광스러운 계획을 위해서 수종 들게 하셨는지를 언제나 잊지 말고 상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하고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나를 위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내 인생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찬송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혜인지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 앞에 늘 느끼는 부담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니 특별한 삶을 살아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것이 일생에 늘 큰 부담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 자기의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각자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누구하고 비교할 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분에 넘치는 매우 특별한 사랑 매우 특별한 은혜를 입게 하셔서 돌덩어리와도 같은 인생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으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인생에 가장 커다란 숙제인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가 되지 아니하면 결국은 가장 좋고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를 깊이 병들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까 우리는 그 사랑에 늘 감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순간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끊임없이 채워져야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동력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교 다니면서 목회학을 배울 때 토요일은 목회자가 두문불출하고 그림같이 책상에 앉아서 설교준비를 하라고 기도를 하라고 배웠습니다. 대개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근데 리처드 백스터는 토요일 마다 심방을 했습니다. 그것은 양떼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에 예배도 인도하고 설교준비도 하고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선교 사업도 하고 했을 겁니다. 토요일 날 가방을 들고 동리를 두루 다니면서 연약하고 고통 하는 지체들을 심방하면서 그때 자기의 가슴이 양떼들에 대한 사랑으로 촉촉이 젖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주일을 준비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려고 앉아 있는데 올라갈 때 두 마음이 있다고 칩시다. 이 웬수들 오늘 또 봐야 돼. 그러고 올라가는 것과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권고하고 상처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일종의 그리움이 되어서 말씀을 전하는 가슴에 하나 가득 밀려올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차이 나게 전파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을 늘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무던히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심방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늘 사랑의 동기가 되어서 행함으로서 우리의 사랑은 더욱 불붙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게 된 사실을 잊지 않고 우리 가슴 속에 늘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듭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교만해지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영혼들이 변화되면 내가 잘 가르친 게 되고 그렇게 안 되면 내 가르침은 훌륭한데 저 돌이 못 알아들어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무가치함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 있으면 영혼들을 가르칠 때 잘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 영혼이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의 결함과 우리 자신의 한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는 그런 마음들이 더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일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영혼을 돌보는 그런 교사들과 목자들이 있는 그 교회의 양떼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목자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양떼들에게는 생명수가 됩니다. 그들이 흘리는 수고와 그들이 흘리는 땀은 그들에게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 양떼들은 우리의 양떼들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양떼들이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충성과 사랑은 맡겨주신 이 양떼를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명을 받는 처음 순간부터 이걸 깊이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바울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데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자기를 핍박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얼마나 일치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지체들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 되었는지를 사도 바울은 소명을 받는 그 순간부터 깊이 체험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 그것이 교회를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과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에 불붙었고 그 사랑이 영혼들을 향한 사랑에 불붙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 사랑은 형제들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세우는 이 일에 깊이 투명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영혼들을 사랑하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자라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기간 동안 수종을 들며 사역을 하면서도 그는 모든 위험한 부패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생애 자체가 사랑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더 순결해지고 고결한 생애가 되었습니다. 관록이 붙고 이름이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재능을 점점 더 많이 활용하게 되면 점점 신앙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위험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숙달된 교사들은 숙달된 교사대로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의 재주를 의지하는 위험이 언제든지 존재합니다. 항상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데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삶은 전혀 우리에게 다른 삶을 보여 줍니다. 그 비밀은 바로 사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날로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에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날로 새롭게 그에게 각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영혼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일에 익숙해지는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지체들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이 눈 뜨게 되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는 거룩하고 순결한 삶으로 생애를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우리 자리에 계시다면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금년 한 해 동안 섬길 때 우리 재능은 없고 많은 재주나 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재주는 없지만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이 언제나 우리 속에 식지 않아서 주님이 우리 섬기려고 하는 동기 자체를 참 귀엽게 보시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당신의 더 큰 일들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교사를 위하여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