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위하여Ⅶ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교사와 목양 (1) (마 5:2) 2004.3.7 제7회 열린교사학교 1
2. 교사와 목양 (2) (빌 1:9) 2004.3.28 제7회 열린교사학교 4
1.교사와 목양 (1)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2)
제가 목회 사상 가장 짧은 세미나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5장에서 그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교하시는 것이죠. 팔복과 함께 시작된 이 산상수훈은 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 장엄한 교훈의 첫 시작을 오늘 성경은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들고 다니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두루마리였고, 이렇게 책으로 엮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는 그 당시 구약밖에는 없었지만,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지고 다니면서 이야기 할 그런 엄두를 못 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복산에 오르셔서 많이 모인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신 것이죠. 많은 신약 학자들이 이 5장, 6장, 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보다 더 긴 길이로 행해진 예수님의 설교를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는 데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산상수훈이 만약에 한 번에 설교된 것이라고 하면, 그 양은 방대한 양이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 팔복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천국시민으로서의 이 땅에서의 삶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량을 그렇게 설교하시는데 실로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설교하셨는지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그 전 날 밤에 탁자에 앉아서 깨알 같은 글씨를 써서 그래서 수없이 노트를 넘기면서 영혼들에게 가르치셨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랬더라면, “입을 열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물이 가득 찬 댐에 수문이 열릴 때, 터치 듯이 그 수문이 열리면서 하얀 물이 폭포수처럼 밀려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입을 여시자 진리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넘쳤던 것이죠. 예수님은 평소에 과묵하신 분이었지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자, 입을 여시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와 같이 흘러 나왔고, 그 말씀이 흘러넘치는 흐름에 거기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깊이 잠겼을 것입니다. 그 말씀이 가르쳐졌을 때 도시락 뚜껑을 만지작거리거나, 시간을 보면서 ‘언제나 이 지루한 가르침이 끝날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중에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막 쏟아놓은 그러한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었는가 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답이죠. 누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흐르는 물처럼 유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 놓아서 영혼을 두루 적시게 할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을 가진 분은 이 세상에 없다는 점에서 그 말은 맞지요. 그러나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되죠. 예수님은 이미 열두 살 되셨을 때에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박사들과 함께 성경을 토론하시면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성경지식을 소유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 자동적으로 물려받은 지식이 아니라 자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배웠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우는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진리를 점점 더 많이 터득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과 그리고 내면의 세계가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교사가 하는 일은 참 많죠. 심방하고 전화하는 일부터 심지어는 그의 공부를 가끔 도와주기도 하고, 놀아주기도 하고 상담하기도 하고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전인적인 목양이고 총체적인 목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모든 문제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돌보고 그의 아픔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그렇지만 간과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교사의 고유한 사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본질적이고 고유한 사명은 오직 하나이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성경 진리의 말씀을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구체적인 목표가 있으니,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복음의 진리를 잘 가르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가르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성화되어 가고, 또 살아 있는 동안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오늘날 교회학교는 이러한 본질적인 사명에 대해서 멀어져 있는 것 같은 우려를 갖게 만듭니다. 많은 행사들을 준비하고 이벤트들을 준비하지만, 정말 그 영혼들에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집회(?)를 수없이 다녀왔습니다만, 대부분 이렇게 앉혀놓고 앞줄에 앉은 열 사람을 일으켜서 어제 주일에 영혼들에게 가르친 성경본문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여덟 명 정도가 모른다고 대답을 하는 게 제가 가지고 있는 통계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대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리가 없고, 선생도 잊어버린 진리를 학생들이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려고 분투했을 리가 없는 거죠. 그리고는 머리를 맞대고 어떤 행사나 이벤트를 통해서 영혼들에게 즐거움을 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렇게 문화적인 한 현상으로서 영혼들이 거듭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 전적인 부딪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궁금한 것은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한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첫째는 성경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해서 그 성경을 묵상하고 매일매일 읽는 것이 교사의 마음속에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그 자체에 대해서 친숙해지고, 그래서 그 성경진리와 친숙한 가운데 영혼들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비결을 배우고 그것을 전수받아서 영혼들에게 성경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교사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죽고 내가 가르치던 아이도 언젠가는 내 손을 떠납니다. 그들이 우리를 통해서 성경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되면, 우리는 사라져도 그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 계속 성장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성경을 사랑하고 매일매일 성경을 읽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영적인 은혜의 비밀들을 터득해 가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느 학자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해져 보신 적이 없이 어떻게 이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이 박해를 받아본 적이 없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이렇게 장중하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의 많은 비밀들, 은혜의 비밀들은 자신이 몸소 그 진리대로 살려고 순종하려고 몸부림칠 때에 그 때에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진리의 껍질이 깨뜨려지기 시작하고 말씀에 담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맛들이 자신의 영혼 속에 흘러들어서 자신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고, 그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영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본인들이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진리의 말씀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성의 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적어도 교사의 손에는 참다운 성경의 진리를 다루는 견실한 책이 들려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가 애독하고 있는 책이 1년 열두 달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멈춰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퓨리탄 라이브러리까지 있어서 무슨 책이든 빌려 볼 수 있도록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든 것 없이 성경을 펼치고 마치 은혜의 세계를 모두 항해하고 온 것처럼 그렇게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선이에요. 허풍이에요. 진실한 교육이 될 수가 없어요. 구도자가 구도의 길을 가르칠 수 있지, 구도의 길을 포기한 사람이 하나님의 참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지성의 폭을 넓혀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해 가는 그런 교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교사와 목양 (2)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우리가 영혼들을 돌보면서 우리가 돌보는 영혼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목표는 너무나 아주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이미 구원 얻은 사랑하는 어린 영혼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신앙의 목표를 우리들이 영혼들을 돌보는 교육의 목표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게 뭐지요. 참되고 진실한 신자로 자라게 하는 것이에요. 유치부 때 거듭난 아이가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언제쯤 받아야 할까요. 대학부 1학년 때 쯤? 그러면 그동안에는 뭐해요? 너무 빨리 전도한 거 아니에요? 고3때쯤 전도해야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어느 나이에 예수를 믿게 되었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구원받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표, 그리고 특별히 믿음 생활하는 이 목표가 모두 동일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영혼들이 일단 거듭나고 구원받은 영혼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왜냐하면 그 영혼들이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는 이 동아리 속에 들어와도 거듭나지 않는다면, 다시 걸어서 그들이 밖으로 나아가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 그들이 거듭날 기회를 지금보다 더 많이 가질 것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만약 거듭나지 못한 영혼들이 있다면, 그것이 그 영혼들에게는 우리가 마지막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영혼들의 회심을 위해서 진진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 혼자 거듭나게 하시는 거죠.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드의 지적과 같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도 않고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당하게 될 그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에 대해서도 떨어보지 않고 그래서 그 자신이 거듭나야겠다, 라고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몸부림쳐보지도 않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라고 지적을 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거듭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지만, 바로 성령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구원받지 못한 너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세계를 준비하셨고, 그런 구원이 없이 살아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두려운 미래를 보여주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삶이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선택된 삶인가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해요. 때로는 두려운 마음을 주어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호소해서, 때로는 그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주산같이 정확하게 가르쳐서, 때로는 그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애쓰는 그 모습을 통해서,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글로 때로는 동영상으로 때로는 편지로 때로는 이메일로, 무엇으로든지 하여튼 그 영혼에게 자극을 주어서 자기 자신이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깊이 고민하게 만들고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이거죠. 우리가 이것을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이겁니다.
그래서 리챠드 백스터가 그의 생애적인 작품 ‘회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죠. 자기의 회중들을 보면서 그랬어요. 거듭나고 회심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그 영혼들을 보면서 “내가 주님 앞에 가면 여러분들을 두고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그 때에 가서 힘을 다해서 내 양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지만, 여전히 많은 영혼들이 끝까지 회심하지 않은 채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아뢸 때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쏟아질 것입니다.” 사실 거짓말이죠. 천국에는 눈물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목자로서 얼마나 처절한 심정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것이 없으면 목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여러분 나쁜 그리스도인이 언제 결단을 하고 ‘오늘부터는 뜻을 정하고 베드 크리스찬이 되어야겠다.’ 그리고는 고무신 거꾸로 신은 적 있습니까? 그냥 엄벙덤벙거리면서 살다가 보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아주 질이 안 좋은 외식하는 신자가 되거나 베드 크리스찬이 되는 거예요. 삯꾼도 마찬가지에요. ‘자 진실한 목자의 삶은 어제로 끝이고 오늘부터는 가롯유다의 길을 따라 삯꾼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노라.’ 그리고는 삯꾼의 길을 걸어가느냐 말이죠. 그게 아니라 이거죠. 선한목자로 남고 영혼을 진실로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교사로 남기 위해서는 그냥 우리들이 주일날 출근하고 일주일을 영혼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영혼에 대한 진지한 고뇌 없이 그렇게 살아가서는 우리가 반드시 나쁜 목자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돌보는 영혼들 중에서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보고 우리가 어떤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웃을지 모르지만, 회심의 역사가 있는 날은 밥을 안 먹어도 배불러요. 마음이 근심이 되고 어두울 때에 목회자에게 가장 큰 위로는 누가 회심했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이제는 다 모르잖아요. 그래서 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그래서 어느 날은 그래요. “어휴, 그 아무개는 큰일 났어.” 그러면서 제가 혼자 중얼거리는 거죠. “어떻게 그렇게 살아서 뭘 할꼬.” 그러면 집사람이 옆에 있다가, “여보 아니야. 아니 글쎄 내가 잊어버리고 얘기를 못했는데,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최근 4, 5개월 정도에 얼마나 놀랍게 변했는지, 정말 그 사람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사람이 되었대. 그러면서 하나님 원망했던 날들을 후회하고 어린아이처럼 예수님 닮으며 신앙생활하고 싶다고 그렇게 가정에서도 아내에게 따뜻하게 하고 그렇게 아이들에게도 잘하고 그런대.” 그러면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오는 거예요. 그 전주까지는 저쪽에서 그 사람이 걸어오면, ‘아이구, 저 인생은 또 어떻게 하나.’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반가워서 악수를 하지요. 이게 이러한 기쁨은 영혼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말해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천사들에게도 안 맡긴 직분이에요. 그러니까 너무너무 귀한 거지요. 구원받지 않은 아이들은 자기가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그러면 누가 대신 울어주어야 하잖아요. 그럼 누가 해야겠어요? 그 일차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어요? 부모와 그리고 영혼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빌고, 그리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서 그래서 그 영혼들을 주님께로 구원받도록 인도해야 해요. 그것 없이는 그 위에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르친다 해도 그것은 뜨물통에 생수 붓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도 그 아이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구원받지 못했는데. 죄와 싸울 수 있겠어요? 죄를 이길 수 있겠어요? 죄를 죽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이 영혼들이 자기가 맡은 부서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이것은 영혼들을 돌보는 이 교역자와 교사, 부장이나 그런 일꾼들이 얼마나 눈물을 흘렸느냐. 영혼을 위해서 많이 아파한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감격의 눈물도 함께 주셔요.
그러면 이러한 회심의 역사가 설교중이나 예배 중에 공과 공부 중에 또는 기도회 중에 심방 중에 항상 그치지 말아야 해요. 나는 아주 단정적으로 이야기해요. 하나님의 회심의 역사가 없는 사역은 하나님이 그들이 모여서 섬기는 그 무리 자체를 싫어하시는 거예요. 안 좋아하시는 거죠. 정말이에요. 단언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한 교역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사들이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절대로 그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물론 모여서 예배드리는 모든 아이들이 한꺼번에 회심하게 되는 역사는 매일 일어나는 역사는 아닐 거예요. 그러나 하나 둘 혹은 셋, 매주 그치지 말아야 해요. 그런 회심의 역사가 그치면 어떻게 될까요? 영혼들이 굉장히 빨리 마음이 굳어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의 영혼처럼 기도해야 해요. 자신의 영혼처럼. 아이들이 한 번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웃어요. 두 번 이야기 하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세 번 이야기 하면, 진지해지고 네 번째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요. 지옥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지옥 갈까봐 저 선생님이 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가 있느냐. 지옥은 안 보이지만,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까 진짜 지옥이 있는가보다. 아이들이 그렇게 해서 믿는 거예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야 해요.
저는 솔직히 주일에 조금 일찍 와서 가르치고 조금 늦게 가는 것은 교사로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느 정도 여건만 갖추어지면, 사실 교회에 와서 맹숭맹숭 예배만 드리는 것 보다 자기보다 훨씬 못한 구역장 밑에서 되지도 않는 성경 배우고 있는 것 보다 성경 한절이라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 기분도 좋지 않아요. 선생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 모두에게 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충족되잖아요. 그것도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주일에 조금 일찍 오고 조금 늦게 가고 하는 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하면, 십자가가 의미가 너무 졸렬해지잖아요.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어려운 거냐. 일주일 만에 나타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 줄 때에 그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그냥 선생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위해서는 일주일동안에 목자로서의 삶이 자신이 영혼들을 가르치고자 할 때에 영혼들에게 기대하는 그 이상의 삶을 자신이 먼저 구현하기 위해서 진리의 증언과 더불어서 몸부림치면서 산 6일이 있을 때에 그 하루가 그렇게 살아있는 말씀의 증언이 흘러나올 수 있는 날이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자신이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하고 노력을 할 뿐만 아니라 여기 뭐라고 했어요. ‘내가 기도하노라.’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해요. 그러면 여러분 말하고 싶겠죠. 목사님. 그게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으로 내 뛰고 늦게 까지 야근하고 집으로 달려오고, 정말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 또 청년교구에서 뭐 좀 하라. 이거 정신 들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오늘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어떡하노라? 기도하노라. 이 편지 쓸 때에 사도바울이 옥 속에 있었던 것 아세요. 감옥 속에서 사형의 날을 기다리는 죄수의 몸으로 온갖 고문과 문초를 받으면서도 바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그렇게 목자의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길은 어때요? 너무 어려운 길이죠. 그리고 고난이 많은 길이에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울어서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인계하는 것을 뼈저리게 생각을 해야 해요. 주님이 나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주셨는데. 거듭남이 없었구나. 어떡할까. 그러고 많이 울어주어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 아들이 지금 고3이거든요. 사실은 제가 올해로 결혼한지가 여러분 놀랄지 모르지만 24년인가 25년째입니다. 우리 아들이 제 때 태어났으면, 지금 아마 대학교 4학년, 늦어도 3학년쯤은 되었을 거예요. 아이가 없었어요. 7년 만에 태어났어요. 그런데 제가 가정의 달이면 꼭 설교를 하지만, 그 아이가 나를 굉장히 기쁘게 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총명하고 공부도 잘해. 계속해서 100점만 받고. 그리고 지금이야 애들이 다 크니까 그렇지만, 어려서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한 번씩 만져보느라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얼굴도 예뻤어요. 그런데 얘가 4학년, 5학년, 6학년 올라가면서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굉장히 우리 마음에 근심이 되었어요. 그런데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그 때도 우리 교회에 주일학교가 있었는데 얘가 도저히 변화가 안 돼요. 그래서 고민하던 끝에 어린이 선교단체에 수련회를 보냈어요. 그런데 얘가 거기 가서 회심을 경험하고 왔어요. 생전 처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때까지 거듭나지 않았지요. 그걸 경험하고 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왜 그랬냐? 그 수련회를 3박4일인가 5일인가를 하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지루하고 힘들고 그랬었는데 어느 순간에 자기가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는데 그 생전 처음 그 기간 동안에 담임선생님으로 만난 그 선생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더라는 거죠. 그 광경을 보면서 진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한 거예요. 그 후에 조금 미끄러지는 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회심한 이후로 쭉 신앙의 길을 유지하면서 지금도 잘 신앙생활 하려고 애를 쓰는 변화 받은 그 학생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정말 회심의 역사는 우리의 눈물에 비례해요. 여러분들 중에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있다면, 지금 아직까지도 그 영혼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찔리고 아파해야 해요. 우리가 마지막 만나는 선생일지 모르잖아요. 그렇죠? 그 때 여러분 리챠드 백스터처럼 주님 앞에 갔을 때에 내가 그 영혼에게 그림으로 글씨로 이메일로 핸드폰으로 편지로 엽서로 말로 들려주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수없이 했지만 그 영혼은 결국 내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내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두 번째는 그럼 이 구원받은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들이 흔히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이 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감정이 무디고, 그리고 열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좀 지성이 모자란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입증을 하는 거예요. 바울이 감옥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빌립보 교인들이 참 은혜를 많이 받은 교인이에요.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서 세우게 하신 교회가 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었거든요. 이 빌립보 지방은 여러분들이 터키 쪽을 가면, 마르마라 해협이 있고, 그 해협에서 보스포로스를 통과하면 러시아의 흑해로 이어집니다. 해산물이 많고 다리 하나로, 그 때는 뭐 다리야 없었겠습니다만, 이 아시아 사람들이 유럽으로 건너오는 길목이었어요. 빌립보는 바로 그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문명이 발달한, 그래서 거기에다가 로마제국의 모습을 재현하게 해서 그래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 사람들에게 로마의 영광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샘플시티였어요. 그렇게 번성하고, 그러면 타락한 도시인데 그 도시 한복판에서 이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꽉 찼어요. 그랬더니 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해서도 많이 헌신을 해 주는 열매까지 맺게 되었거든요. 그런 이 빌립보 교회인데 이런 사랑이 많아.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는 이 사랑이 그냥 그대로 있거나 그 사랑의 불꽃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사위어서 꺼져버리는 그런 사랑의 불꽃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어요. 어떻게 하고 싶을까요? 그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신앙이 횃불 같은 사랑이었다면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만들고 싶었고,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이 모닥불과 같았다면, 커다란 산에 불붙은 것처럼 그렇게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사랑을 그렇게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든 요소를 둘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지식과 총명을 통해서 그들 속에 있는 사랑의 불꽃이 그대로 있거나 사위지 아니하고 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그런 커다란 이글거리는 화염이 되기를 원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지식과 총명이에요. 지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주고 신앙의 참된 이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줌으로써 축적되는 지식을 가리키는 거예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교리를 잘 가르쳐서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서 영혼들 속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들을 차곡차곡 쌓이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교리로 뼈대를 세우고 설명으로 그 살을 붙여서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집을 짓도록 지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죠. 그래서 가르친 지 채 3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주일에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모르는 선생님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자신이 가르쳐준 것이 선생님의 마음에 남아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 설명을 들은 아이들의 마음에 그 지식이 쌓일 수 있겠으며 자기가 영혼들에게 뭘 가르쳐 주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영혼들이 그 말씀을 좆아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겠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깊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항상 이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명료한 감각을 유지하고 그 진리를 구도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풍요해져 가고 있는 것들을 자신이 경험하는 살아있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에요. 교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나 제가 가지고 있는 서울 시내 교사들의 통계에 의하면, 온 제가 만난 교사들 가운데 30%만 매일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 밭에서 어떤 영혼들이 자랄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선생님을 통해 보고 그리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그 진정한 변화, 인간으로 참으로 살아가는 이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질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는 그 교사의 뒷모습을 보는 일 없이 그 밭에서 어떤 영혼들이 자라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영혼들에게 차곡차곡 심어주는 거예요.
또 하나는 총명을 가르쳐 주는 것이에요. 이 총명을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영적인 통찰력, 그리고 분별할 수 있는 지각을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으로 인생을 분별하는 지혜를 배우게 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자주 영혼들을 만나야 해요. 주일날 딱 나타나서 한 시간 가르치고 헤어지는 것 가지고는 교육이 안 되는 거죠. 자주 만나야 해요. 그래서 선생님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고,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입증 받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거죠. 바로 이것을 위해서 가르치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이 뭘 한다고 말했어요? ‘기도하노라.’고 말했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은 예수님 만나고 구원받고, 구원받은 영혼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심겨져서 가르치는 그 지식과 알려주는 총명을 통해서 계속 그것이 연료가 되어서 계속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타오르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그 일을 위해서는 우리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전도사 때 중등부, 고등부, 이렇게 영혼들을 유치부 빼고 제가 다 거쳐 왔습니다. 그런데 부서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섬기는 자세에요. 정말 선생님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모여서 눈물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얼음같이 차가웠던 영혼들의 마음에 회심을 주시더라고요. 노력한 것도 별로 없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누가 오라고 그런 것도 아닌데 제가 토요일에 와서 엎드려 기도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부른 적도 없는데 선생님들이 토요일 밤이면 보따리를 싸가지고 왔어요. 모여 앉아서 기도해요. 성령님이 역사하시니까 정말 교사로 섬기면서도 한 번도 영혼의 회심하지 못한 상태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았던 교사들이 바로 그렇게 때문에 먼저 눈물 흘려야 할 영혼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셔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만약에 저 영혼들이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저 완고한 영혼이 변화될 수 있다면,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 할 수는 없노라.
20년 전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자기의 일기 속에서 이 가사를 남겼어요. 너무 감명을 받아서 제가 이 곡을 거기다 붙였습니다. 이 노래 들어 본 적이 없지요. 그 찬송을 부르면서 남들이 다 잠든 토요일 밤에 우리 모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기도했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잘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은혜에서 미끄러진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밤새워서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주일 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다가 가슴을 보면,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고들 고백을 했습니다. 제 일생에 태어나서 그 때처럼 가슴 아팠던 때가 없었지만, 그 때처럼 풍성하고 본질적인 회심의 역사를 주시던 때도 없습니다. 요즘에 교회를 이렇게 보면서 한편으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한지 몰라요.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만약에 내 가슴에 멍이 들도록 두드리면서, 숫자가 많아지긴 했지만 그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면, 아마 지금 보다 훨씬 더 많은 회심을 주실 텐데 어떻게 할까. 육체는 연약하고 일은 많아지고 집중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 때에 어떻게 할까. 정말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이 사명이 얼마나 고귀합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래요. 회심의 역사가 그치는 것이 느껴질 때에는 누구도 원망스럽지 않고 그리고 그들이 강퍅해서 회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목회하는 내가 강퍅해서 내가 그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그렇게 가슴을 때리며 울며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변화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섬기고 나서야 리챠드 백스터처럼 온 힘을 다해 전했지만 그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눈물로 기도해도 그들이 변화되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우리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라헬은 그 본처가 아이를 낳는 것을 보면서 야곱에게 울부짖지 않았습니까. 여보, 나로 아이를 낳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리겠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 영혼의 심령이 되어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의 회심과 변화를 위해 하나님 앞에 몸부림친다면 우리들이 수만 마디의 말을 가지고도 변화시킬 수 없었던 영혼들을 하나님이 친히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기 전까지는 죄인인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거짓말까지는 아니지만 과장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떻게 그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그 영혼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피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죄인의 길에 있을 때에 얼마나 자신이 돌아오기를 목메어 하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과장입니다. 그래서 영혼들을 돌보기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걸어 간 이 길을 주님이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이 길은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어보시고 나서 비로소 영혼을 맡기셨잖아요. 그래서 그 영혼들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이 그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과 그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섬김 안에서 실제화 되는 것을 경험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내가,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을 붙들고 고생을 하고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이미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의 죽음이 지금 섬김의 현재의 삶 속에서 realization, actualization 실현, 재현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지금도 전도사 때가 기억이 나요.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던 때에요. 그 때 생각난 게 뭐냐 하면 ‘이 영혼들이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이 고등부실 저 벽 뒤에 제가 못 박혀 죽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본질적인 섬김을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우리의 이 섬김의 일지를 피와 눈물과 땀으로 써 내려가야 해요. 이 조국교회의 미래가 여러분들의 손에 달렸어요. 정말 여러분의 손에 달렸어요. 영혼들을 위해서 아무리 큰 빌딩을 사고 좋은 시설을 만들어 주고 먹을 것을 많이 주고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면 그것이 쥐뿔이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시스템이라고 하는 기계 속에 집어넣어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의 섬김 위에 하나님이 복 주실 때에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던 놀라운 변화와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그러한 마음과 그러한 사모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영혼들을 섬긴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영혼과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고 그게 예수의 마음이에요. 그게 바로 바울이 얘기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 그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의 기독교 교육의 현장은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피 대신 땀을 흘리는 사람들,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들을 그 토양에서 영혼들이 꽃피고 열매 맺는 사역이에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사명을 주셨지요. 그리고 미력하지만 어쨌든 힘을 다해서 할 수 없는 것은 못하는 거죠.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서 오늘도 이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목사님, 하고 끌어안는 영혼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너희들이 이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된 다음에도 감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 가지고 됩니까? 빌딩가지고 됩니까? 번뜩이는 지혜가지고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보조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여러분들이 뜨거운 사랑, 그 사역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정사의 정신으로 그렇게 영혼들을 섬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교사를 위하여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