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이 있는 복음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2010. 08. 08 온가족 여름수련회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2010. 08. 09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0. 08. 10 온가족 여름수련회
1.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됨(엡2:10) 2010.8.8 온가족수련회(저녁) 1
2010. 08. 09 온가족수련회 새벽예배
2.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됨(엡2:10) 2010.8.9 온가족수련회(저녁) 13
3. 선을 행하며 살게 하심(엡2:10) 2010.8.10 온가족수련회(저녁) 29
4. 믿는 도리의 모본(히3:1-2) 2010.8.9 온가족수련회(새벽) 342
5. 충성된 자를 가까이 하심(민12:6-7) 2010.8.10 온가족수련회(새벽) 51
소명이 있는 복음 1
2010. 08. 08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0. 08. 09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0. 08. 10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0. 08. 09 온가족수련회 새벽예배
2010. 08. 10 온가족수련회 새벽예배
2010 온가족여름수련회 첫째 날(8.8) 저녁집회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됨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I. 본문해설
II. 인간: 하나님이 만드심
A. ‘만드신 바라’(ποίημα)
- 존재를 하나님께 빚짐
- 목적을 가지고 지으심
- 창조: 사랑 안에서 만드심
B. 사람이 무엇이관대..
III. 신자: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심
A. ‘창조된 바라’(κτισθέντες)
- 타락한 상태에서 재창조됨
- ποίημα로서 살아 갈 수 없음
- 구원: 창조 목적을 계승함
- 재창조: 구속의 위대함
B.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구속에서 중보직이 잘 드러남
- 내포적 대신의 죽음 안에서
- 내포적 부활의 생명 안에서
a. 영원한 부활 안에서
b. 현재적 생명 안에서
C. 그리스도 몸의 일부임
- 교회: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 구원: 성례전적으로 교회에 수렴됨
a. 계량적 자람
b. 성질적 자람
IV. 맺는 말
2010 온가족여름수련회 둘째 날 (8.9) 저녁집회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됨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I. 들어가는 말
II.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A. ‘선한 일들’(έργοις άγαθοίς)
1. 선(善)과 선한 일들
a. 선(善): 하나님 자신
b. 선한 일: 하나님의 의지
-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과 만물을 이롭게 함
- 하나님 자신에게 회귀함으로 神愛와 人愛는 하나임
2. ‘神愛 卽 人愛’
a. 인간이 하나님 사랑함으로 자기 선을 버림
b. 하나님 선(진정한 선)을 받아들임
c. 선한 삶을 보여주심: 성경의 계명들
B. ‘위하여’(ἔπὶ); 대하여, 향하여(unto)
- 인간 창조의 목적 자체가 선한 일들을 위함
-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임
III. 미리 예비하신 계획임
A. ‘전에 예비하신’(προητοίμασεν)
- 목적어: 앞 문장 전체
1. 인간이 선을 위해 창조된 것은 구속 이전임
2. 선한 일을 정하시고 인간을 그렇게 살게 하심
a. 외적: 필요한 것을 주심
b. 내적: 적합한 능력을 주심
1) 인간의 구성 - 영혼과 마음
2) 사랑의 감화 - 의지의 분기
B. ‘하나님께서’(ό θέος)
1. 인생은 창조세계의 한 부분: 결코 중심이 아님
2. 신앙은 돌이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知-愛-生
IV. 결 론
2010 온가족여름수련회 셋째 날(8.10) 저녁집회
선을 행하며 살게 하심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I. 들어가는 말
II.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심
A. ‘선한 일들 안에서’(ἐν αὐτοῖς)
1. 선(善 )은 하나님 한 분이심
2. 그 선을 유통하는 ‘선한 일들’은 복수임
a. 선한 일들: 인간과 피조물들과의 관계이기에
1) 하나님을 향하여 선함; 神愛
2) 인간을 향하여 선함
- 모든 인간에 대한 人隣愛
- 모든 성도에 대한 支體愛
3) 자연 만물을 목적에 맞게 사용함
b. 신자를 구속하신 목적
- 자신이 선한 일들 안에서 살아감
-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게 도움
-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선을 이룸
B. ‘우리로 행하게 하시려고’(περιπατήσωμεν)
1. 구약의 의 희랍어 표현임
a. 단회적 간헐적 행동이 아님
b. 지속적이고 본성적인 성향을 보여줌
1)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을 거스름
2) 중생한 본성은 하나님을 추구함
3) 선한 일을 향한 본성적 애호가 있음
2. 중생과 은혜
a. 이는 중생의 효과이고 은혜의 작용임
d. 은혜의 지속성: 그 길을 가게 하시는 지속적 보증임
VII. 결론
소명이 있는 복음 1
2010. 08. 08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0. 08. 09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0. 08. 10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0. 08. 09 온가족수련회 새벽예배
2010. 08. 10 온가족수련회 새벽예배
1.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됨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Ⅰ.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제 1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과 신령한 복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그리고 하나님이 재창조하실 이 세상의 전망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감격적으로 서술한 후에 2장에 와서는 그런 영광스러운 기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에베소교인들과 자기 자신이 넓게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원래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비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고 마음과 욕심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에베소 교인들의 어두운 과거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이유는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이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공로나 유익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이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를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한 사랑을 성도들에게 새겨주어 그들이 받은 구원과 영광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아울러서 사도는 바로 그렇게 은혜로 주어진 그 큰 구원의 역사가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다준 그 복음 구원의 속에는 소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를 위하여 베풀었던바와 똑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리고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다시 가슴에 새겨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들이 이제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고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3일에 걸쳐 생각해보고자하는 것입니다.
Ⅱ. 인간: 하나님이 만드심
사도는 이 에베소교인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주어진 은혜의 구원이 그들의 행위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 구원을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못박으면서 사도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A. ‘만드신 바라’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이기 전에 먼저 인간으로서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바 된 존재라는 사실을 에베소교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드신 바라.’ 희랍어로 ‘포에마’ 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바로 제작물, 혹은 장인들이 솜씨를 가지고 만든 작품, 기구, 도구, 창작물,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바 라고 하면 인간의 존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다시 예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 희미했던 ‘나’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빚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전적으로 그분의 의해서 창조된 것이고 우리의 존재를 그분께 빚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은 수많은 물건들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입고 있는 이 옷부터 시작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편안히 앉아있는 의자, 그리고 이 마이크와 확성기로부터 시작해서 여러분이 멀리서도 큼지막하게 볼 수 있는 이 화면과 건물, 전등, 벽돌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간의 손에 의해서 제작된 것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마 공기 빼고는 아무것도 이 안에서 인간이 제작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처음부터 장인들이 만들 때에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소리를 크게 내게 하기 위해서 확성기를 만들었고 어둡고 깜깜한 밤에도 이렇게 함께 보며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전등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하나도 제작자의 의도가 없이 이 세상에 만들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라는 이 존재는 사실 인간이 만든 모든 수공품에 비해서 얼마나 놀라운 가치를 지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값으로 칠 수 없어서 주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도 소중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에 비해서 탁월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때에 목적이 없고 의도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일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 목적과 그리고 충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사람 전체를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고 그 속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같은 사람이 없는 나도 하나님이 의도가 있으셔서 만드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육체로 한번 태어나고, 두 번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중생으로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고, 그리고 또 한 번의 탄생이 필요한데 그것이 자신이 어떤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올바르게 알 때에 복음을 통해서 얻은바 이 구원은 그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고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위해서 받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이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없는 사람은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영광을 취하고 이 세상에서 어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는 올바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취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참 신자들만이 경험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 내게 맡겨진 나의 인생의 분깃을 담대하게 살아가는 이 인생과 신앙의 안정감이 무엇인지 그는 모를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어요. 제발 교회에 와서는 진지해지라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죽었다가 깨어나도 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들, 그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하시고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혼을 주시고 그리고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탁월한 지성을 하나님이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으신 분이고 만약에 무엇이 필요한 분이라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겠지요. 아무것도 필요하시지도 않은 분이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를 기뻐하신 것은 인간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선하심과 인자한 사랑을 한없이 부어주셔서 그래서 이 세상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꾸고 돌보아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설교 속에서 인용하는 이야기지만 저는 젊은 시절에 특히 회심하지 전에 정말 고통스런 인생의 시기를 지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내가 오늘도 인간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바퀴벌레였으면, 그리고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였으면, 그리고 집 주위에 이름 없이 자라난 풀포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17, 18, 19, 20살까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셔서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주님을 아는 지식이 많이 깊어지고 난 후에야 사실은 그때의 내 물음이 결코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단절해놓고 자신만을 고려할 때에는 자기가 이 세상에 왜 있어야하는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은 쓸데없이 태어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충분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여라. 너희의 가장 큰 본분은 나를 경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식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일 주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가면서 저는 깊이 감격했어요. 도대체 우리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사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게 손해가 될 리가 없는데 마치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니라.’ 고까지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진심으로 깨닫게 될 때에 마음의 눈은 열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신 장본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에 의해서 지은바 된 피조물뿐이라는 것입니다.
B.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런데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이 우리를 단지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아무리 우리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은 부족한 것이 없건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할 때에만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를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때로는 위협하시고 때로는 치시고 징계하시면서 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강력히 채찍질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며 사는 그 사랑 안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인간을 부르셨습니다. 사랑이 식을 때에는 예기치 못한 기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 은혜를 받게 하심으로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셨고 오류에 빠졌을 때에는 진리의 빛 가까이 우리를 이끌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오류에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참된 길을 알아도 그것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도 그 뜨거운 여름인데 어린아이들을 안고 갓난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자매들을 보면서 마음으로 참 박수를 쳤습니다. ‘저런 것이 얼마가 힘들까?’ 남들이 보기에는 시집갔다고 그러더니 애를 낳고, 애를 낳았다고 하더니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래요. 어떤 자매는 계속 애기를 갖기만 하고 낳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그랬더니 그것은 벌써 낳고 지금은 두 번째래요. 걔는 지금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래요. 그런데 그 하나를 돌보기 위해서 자매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밤잠을 못자고 제시간에 먹지도 못하고 아마 정말 고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생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그런 마음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헤아릴 수 없이 이 많은 사람을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아닙니다. 정말 이상적인 어머니로서 그렇게 우리를 돌보셨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생활을 이렇게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때 우리가 항상 부자는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항상 우리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세상에서 잘나가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요? 오늘도 여기에 와서 헤르만 바빙크 라는 신학자의 책을 요새 읽고 있는데 읽어보니까 깨알 같은 글씨로 막 써서 내가 필기를 해놓았는데 날짜를 보니까 1985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쓴 그 글씨들입니다. 제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던 때 가난하고 못 먹고 그래서 신대원에 다닐 때에는 아침에 학교에 갈 때 일찍 가서 김밥하고 컵라면을 먹던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아주 진심입니다. 그렇게 가난했어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그저 서울의 변두리에 손바닥만 한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었을 때였어요. 그런데 매일 기뻤어요. 왜? 내가 주님을 사랑하니까……. 우리의 참된 기쁨은 그분을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아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사람답게 사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모두 아픈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당신 안에서 행복해지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을 사랑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린 것이 무엇이 있어요? 헌금했다고 그러는데 여러분이 다 썼잖아요. 하나님이 한국 은행권을 갖다가 무엇 하시겠어요.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다 타버려요. 하나님께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결국은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섬긴 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했잖아요.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멘. 이 사실을 가슴에 꼭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해서 나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며 살 그때에 내안에 가장 충만히 계실 수 있기에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부르시는구나! 라고 믿으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모든 삶이 행복이라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멘.
Ⅲ. 신자: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심
그런데 오늘 사도는 그렇게 말해놓고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인간의 일반에서 그 다음에 신자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A. ‘창조된 바라’
신자의 정체가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지으심을 받은 자니’ 그랬는데 직역하면 ‘창조된 바니’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까 나온 ‘만드신 바라’ 가 make 라면 이것은 create에요. 없는데서 새것을 창조하는 그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원래 있는 우리를 고치고 수리하신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에 원래의 목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구원해주신 그것이 거의 창조에 가까울 정도로 완전히 새것을 만든 것이라고 그렇게 오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냉장고도 없던 여름철에 생선을 잡아서 팔지도 못해서 쌓아놓았더니 완전히 짓물러서 파리들이 와서 뜯어먹고 완전히 흐물흐물하게 썩어서 이제는 썩은 생선물이 줄줄 흐르는 것 같던 그러한 생선 같은 인간이 새 생명을 부여받아서 이제는 물속을 힘차게 헤엄치는 등 푸른 생선이 된 것과 같은 변화에요. 분명히 그것도 사람이고 저것도 사람인데 그렇게 완전히 썩어서 시체물이 흐르는 그 시체와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 사이의 계속성을 찾아볼 수 없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굳게 붙들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만을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관심이 구원에만 있으면 안 됩니다. 구원이 핵심이기는 하지만 더 넓은 신학적인 구도에서 보면 구원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어디론가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궁극적인 끝이라면 복음의 소명이 있을 수가 없지요. 복음으로 끝나야지요. ‘만족이 있는 복음’ 그렇게 끝나야지요. 그런데 소명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속하신 것은 창조, 그리고 구속, 그 다음에 재창조,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의 창조의 계획과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주인공으로서의 우리 인간의 창조가 사람의 타락에 의해서 망가져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당신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하지 않고는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창조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그 구속은 이제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이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를 머리를 하여 재창조될 것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은 창조와 재창조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 재창조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재창조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셔서 교회를 이루시고 이 교회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 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면서 다시 아직까지도 살지 않은 이 세상을 다시 살아나도록 그렇게 구속하고 전도하고 그리고 재창조될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문화와 문명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에 맞게끔 고쳐나가고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전수받았던 한국에서의 뜨거운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이런 건전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지 못할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어렸을 때 받은 교육을 회상해보면 이 세상을 비아냥거리고 아주 더러운 곳으로만 묘사를 해서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우리는 그 세상으로부터 도피해야지만 경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고 그리고 금욕을 가르치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십자가 신앙을 강조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를 아주 절절하게 묘사해서 십자가의 커다란 감동이 마음속에 일어나도 그것을 이 세상에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세상에 물들지 않게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나를 잘 알던 어느 형제 하나가 나한테 와서 자기네 교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교회에 굉장히 좋은 청년들이 많은데 이상하게 은혜를 받고나면 모두 직장을 그만두고 교회의 직원으로 들어오려고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경건해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는데 세무직은 절대로 응시를 안 한다고 합니다. 왜? 부패할까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가서 그것을 고치라니까요.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런 신앙이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입니다. 무조건 영화구경 가지 말라고 그러고 그래요. 왜 그래요? 요즘 아주 좋은 영화감독이 나와서 아바타를 타바타로 바꾸던지 해서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어요. 무엇인가 거스르면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세계를 단 한 뼘도 하나님의 땅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진취적으로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셨어요. ‘이 세상은 유업을 받을 권리가 없는 인간들에 의해서 불법적으로 점유 당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것들을 모두 뺏어서 그래서 상속권이 있는 자로서 그것을 차지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업으로 바꾸어야한다. 단 합법적으로 싸워야한다.’ 어느 날 가서 ‘땅 내놔라.’ ‘왜?’ ‘너는 하나님을 안 믿잖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신데 이것은 하나님 것이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깃발을 높이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끝까지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왕국에 대한 소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찬양)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위 신국적 소명이라는 것이 그것이 나 하나에게 부과된 소명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성삼위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인 교회에 공동체적으로 부어졌듯이 이 하나님 나라의 왕국의 소명도 이 모든 교회 공동체 위에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왕국을 향한 소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지평이나 교회의 역사적인 지평 어디를 보든지 이런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고뇌가 없는 교회는 병들어요. 흔히 우리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목사님, 성도들의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지금 당장 빚에 쪼들리고, 직장을 잃고, 나이가 들어서 시집갈 염려를 하고, 시집 장가를 갔는데 애가 없어서 걱정을 하고, 전세금이 오르고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무슨 그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소리를 합니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의 생활의 과거를 돌아보아도 답이 나와요.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섬길 때 우리의 마음에 여유가 있고 고민거리가 없어서 주님을 섬길 생각으로 가득할 때가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만약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개인의 이런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를 현실적으로 괴롭히는 문제잖아요?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기를 원하면 오히려 이것을 좀 초월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을 구속해놓으신 원대한 계획과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오히려 거기에 나의 마음을 집중하고 나 개인의 이런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맞추며 고정하며 그것을 고민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놀랍게 이것들을 이루어주셔요. 그 원리가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이 무엇이에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목적을 따라서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우리 개개인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문제들은 지금도 수없이 문제가 있어왔고 지금도 문제가 있고 앞으로도 문제는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생겨날 때 우리가 이런 문제를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마음이 묶여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계획이라든지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태어나서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 기회를 잃어버린다든지 하는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놓으신 이 원대한 교회적인 소명을 내팽개치고 그리고 자신의 먹고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절대 신앙생활의 원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B.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각각 목적이 있게끔 창조하셨지만 우리는 타락한 이후로는 도저히 그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자신이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도 없는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랬으니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관을 통해서 이 세상에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범죄하고 타락하고 만물의 모든 상호적인 연관들이 다 산산이 깨뜨려져서 이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다시 창조하실 때도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것들을 다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 재창조의 첫 열매가 바로 우리 타락한 인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죽으실 자격이 있기 위해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했고 또 우리를 위해서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에 바쳐지기 위해서는 참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인간들이 진 죄를 당신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아무렇게나 개별체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인간을 창조하셔서 모두를 하나의 영적인 연합으로 묶으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교회를 설립하지 않으셨어도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영적인 아주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원리가 그러합니다. 보십시오. 달과 지구는 멀리 떨어져있건만 달과 지구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거리에 따라서 말하자면 물때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가하면 파도가 치기도하고 수많은 자연현상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사물들이 서로 연관되어있는 가운데 관계를 가지면 영혼을 가진 인간 하나하나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그들로 연관을 이루지 않게 하였겠어요?
여러분, 사람을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아플 때 자기 몸도 아픈 것을 아세요? 그래서 부모들이나 혹은 형제들이 아주 특별한 사랑의 연결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이 아픈 것을 느껴요. 그게 타락해서 영적인 관계가 끊어진 인간에게도 그런 것들이 남아있다면 타락하지 않고 아주 아름다운 영혼으로 상호연관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을 때 어떻게 아름다운 연결이 이루어졌겠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바로 그렇게 아담 하나의 죄가 아니라 모든 태어날 인류 속에 질병과 같이 퍼진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하나하나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그 육체를 통해서 난 모든 인류의 하나의 전체적인 몸속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어요. 그렇게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는 모든 인간을 품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으로 모두 감싸셔서 그래서 당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이 모든 인류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죄 가운데 가장 죄가 많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저주의 징계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죽은 바가 되었고 그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실 그때에 우리는 그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날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셔서 그렇게 우리를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이 아무리 생애적인 감격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어도 여러분이 그 복음 안에 있는 구원의 소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어요.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임의적인 복음이 유행하느냐하면 소명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피나게 힘든 길이니까 소명으로 안돌아가고도 행복해지는 비결이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거짓말입니다. 그럼 문제는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소명을 따라서 살아야 할 텐데 그러면 그 소명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소명이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라는 소명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 소명도 이 소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인데 이 소명도 우리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수단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요. 그게 뭐냐 하면 복음, 성령, 믿음입니다. 성령이 주가 되시고 복음을 수단으로 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자 여러분, 어떤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을 때 구원받는 것이 먼저에요? 아니면 교회에 접붙여지는 것이 먼저에요? 그것은 사실은 대답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 밖에 떨어져있던 사람이 성령의 큰 능력으로 중생해서 그 몸에 접붙여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사실은 구원 그 자체도 공동체인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고 교회 속에서 배포된 책인 성경을 읽고 복음을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하는 성령의 역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게 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 그 자체가 공동체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자마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이 영적인 보편교회에 한 핏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소명도 나 혼자 동떨어진 그런 소명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명은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시는 소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소명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분명히 너희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고해주셨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지만 제자들은 성령이 임한 후에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않았어요. 커다란 핍박 속에서 스데반이 순교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지요.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를 이미 계획하고 있으셨지만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베드로가 교회에 와서 증거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서 모두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로 한 하나님을 교회가 찬송할 수 있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라고 느끼지를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는 그것은 주님의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우리 교회를 있게 하셨잖아요? 우리보고 18세기를 책임지라거나 23세기를 책임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셔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들이 지나간 시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지금 시대에는 우리의 몫입니다. 이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우리는 수많은 일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일손이 부족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모두 일손이 부족합니다. 돈도 부족합니다. 마음을 바쳐 기도할 사람들은 더 많이 부족하지요.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명을 가슴에 품지 않으면 우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만약에 그런 소명을 품으면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 찾아가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지 않으면 고쳐질 수 없이 병든 이 세상의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아무리 많이 헌신해도 돌아오는 결과는 거의 없어도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의 망가진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어요. 거기 모두다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헌신이 필요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왕국을 향한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휴가철에 군인들이 다 나와요. 옛날에는 군인이 외출을 나오면 옷을 각이 지게 다려서 입고 모자를 쓰고 명찰까지 달고 똑바로 다녀야지 그렇지 않으면 헌병대에 끌려가서 죽도록 맞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휴가를 나오면 군복을 다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더라고요. 그런데 또 그렇게 하라고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육군인지, 공군인지, 해병대인지, 특전사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렇게 섞여서 스포츠 머리한 청년들이 공도 차고, 농구도하고, 맥주도 마시고, 화투도 치고, 탁구도 하고 막 어울리면서 놀아요. 그래도 그들은 비상이 걸리면 정확하게 자기가 돌아가야 할 소속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속은 어디에요? 소속이 어디에요? 뭐? 3교구 2구역? 그렇게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어요? 차라리 개봉동이라고 그러지요. 그런 소속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요. 오늘은 여기에 와서 이렇게 농담도 하고 여러분하고 놀러 가고 그러지만요. 주님이 ‘비상’ 그러면 저는 달려갈 데가 있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가 어디에요? 나는 여기에요. 어디에 가는지 나는 여기에요.
성지순례를 갔는데 며칠이 지나니까 다들 힘드니까 자기는 가고 싶다고 합니다. ‘나는 빨리 교회에 가고 싶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목사가 ‘아 나는 집에 가고 싶다.’ 그게 우리 모두 그렇게 돌아갈 자기 자리가 있어요. 적어도 ‘거기는 내가 있어야 될 자리입니다. 나는 소속이 거기입니다.’ 그게 바로 소명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보면 그렇게 소명을 느끼면서 한곳에 굳게 서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승리합니다. 가끔 전쟁의 역사를 보면 6.25때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한쪽이 군인들이 워낙 충성스러워서 훌륭하게 자기의 지역을 사수하는 것입니다. 옆에서는 다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포위가 됩니다.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설악산을 갈 때마다 항상 마음속으로 감격을 느껴요. 그게 뭐냐 하면 38선을 지나잖아요. 이 서쪽으로는 평지고 유엔군들이 있어서 물자도 많았어요. 저쪽 제일 험한 데는 한국군들에게 주었어요. 이게 내 나라니까 마지막까지 미친 듯이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휴전선이 이렇게 옆으로 누웠잖아요. 휴전선이 38선 밑으로 오고 위로 올라갔잖아요. 지도를 잘 들여다봐요. 우리에게 소속이 있어요? 그게 하다못해 저기 문서선교부에 가서 테이프 하나를 뒤집으면서 굽는 것이라도 자기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꼭 어떻게 교회에서만 있겠어요. 자기 가정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나에게 맡겨주신 고유한 소속이 있어서 ‘이것은 내 소명이다.’ 그러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이 저리도록 이루어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어야지만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을 분투하면서 주님을 섬기다 온 사람들은 그럴 수 없어요.
C. 그리스도 몸의 일부임
사도바울은 바로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면서 같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렇게 왕국을 위한 소명으로 사는 가운데 교회는 탄탄하게 영적인 건물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반드시 이바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교인들이 모였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왕국의 소명과는 상관없이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으니까 이제 예수 덕분에 한번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보자고 자리를 펴고 그런 식의 복음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모인 교회는 명백히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데에 방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 역사에 흔히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부흥이 일어나고 개혁의 바람이 불면 그것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항거하고 불을 끄는 일을 사실은 큰 교회들이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참다운 성경적인 경건, 그리고 성경적인 복음의 이해로 돌아가고 자신들이 열심히 이 왕국의 소명을 가지고 섬기면서도 이것이 정말 올바른가하는 것을 또 다시 되짚어보고 고민하는 그런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재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진노 가운데 살아가는 허무한 인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을 아는 지식의 빛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짐승처럼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이 무엇인지, 자신을 어디에다 쓰려고 하나님이 빚으셨는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저처럼 방황하고 누군가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적처럼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모래알같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로 잰 듯이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때려주셔서 주님의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을 강퍅한 사람들인 여러분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이셔서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구원해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분만큼 죄짓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여러분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간들이 아직 많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슨 이유인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고 우리였어요.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복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명을 뿌리치고 이렇게 스스로 나를 주인 삼은 삶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을 주님이 모르셨다면 주님이실 수 없잖아요.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주셨어요. 우리는 이 큰 은혜가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설명할 수 없어요.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님께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배치해놓으시면 수시로 탈영하는 이 거짓된 우리들을 그래도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시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소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그것 하나만을 알뿐입니다.
(찬양)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IV. 맺는 말
국내에 다니든 외국으로 다니든 이 세상에는 너무 할 일이 많아요. 어떤 때는 외국에서 돌아올 때 어떤 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주님을 섬길 일들이 전 세계에 수없이 흩어져 많은데 하나님 당신이 그 피로 구속하신 그 은혜를 입은 당신의 백성들은 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하나만 붙들고 열심히 봉사해도 그렇게 큰 유익을 영혼들이 얻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모르면 저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와서 ‘목사님! 이제 제 나이가 이만하니 제 인생이 저물어갑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전투자리를 죽어도 못 찾겠으니 목사님이 한번 지정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배치될 전선의 도표를 수없이 가지고 있어요. 교인이 일만 명이라도 다 보낼 자신이 있어요. 거기에서 정말 그렇게 눈물로…….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주님께 빚진 인생이잖아요? 당신의 피로 구원해주셔서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물질도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재능도 우리의 젊음도 내 것이 아닙니다. 허무합니다. 허무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새벽에도 눈이 떠져서 마음으로 눈물이 나요. 어쩌면 이렇게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흐르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님이 부르실 때에 부끄럽게 갑니다. 그러지 말고 삼일밖에 안 되는 수련회지만 나는 여러분이 도망친 군대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그 토치카, 그 차가운 철책선, 그 추운 바다, 그 하늘, 그 산, 어디에든지 돌아가서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날만이 나의 날이지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내 날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면서
(찬양)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살다가 간다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은혜에는 보답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하나님 내가 전투복을 입고 왕국의 소명을 가슴에 새기고 그래도 나는 내 자리가 있었습니다. 탈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합시다.
2.선한 일을 위해 창조됨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Ⅰ.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목적이 있게 만드셨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빚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타락해서 이제는 그 본래의 창조의 목적을 이해할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인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참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창조된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어떤 일들을 위해서 지음을 받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미리 예비하신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Ⅱ.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A. ‘선한 일들’
제일 먼저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느니라.’ 고 말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에르고이스 아가도이스’ 라고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단수로 나오지만 원래 이것은 복수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다.’ 그래서 선한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이 모든 창조세계를 만드신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 자신이 선이신데 우리들은 그 선 하나가 아니라 많은 선한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 즉 선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위해서 지으셨다는 선한 일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껏 기독교 신앙을 대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려고 하는 기독교신앙의 전체 중에서 여기저기서 내 입맛에 맞는 것들만 뜯어다가 그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순간순간 예수님을 믿으면서 감동도 많이 받았고 은혜로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20년씩 30년씩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하나님 앞에 신앙의 경험도 참 많이 했을 것이고 기적도 경험했을 것이고 감동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감동과 은혜들이 우리에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안에 우리를 구속하신 계획이 있고 우리를 구속하신 계획은 하나님이 이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려는 원대한 재창조의 계획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은 형편없이 타계적이 되어서 그래서 이 예수 믿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좋지만 이 세상에 나아가서 나의 삶을 드려서 나의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므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삶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 안에 있는 소명이라는 사실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분히 신앙이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자기에게 어떤 만족을 주고 유익을 주고 감동을 주면 은혜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교회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올바로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원망하게 되고 급기야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 그릇된 신비주의나 혹은 잘못된 이 세속주의에 물든 신앙에 오염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안에 교회라는 계획이 있고, 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계획이 교회 안에 있고, 그리고 이 모든 구속의 계획이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려는 그 위대하고 원대한 재창조의 계획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을 만나서 우리 교리 반에서 하는 카테키투누스를 일러주었더니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합니다. 그래서 그랬죠. (스투데오에르고숨=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신의 가장 큰 본분은 무엇입니까?=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에 대해서 배워야합니까?=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배워야합니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장 풍부하게 계시되었으니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주 원대한 그런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에 죽을 때도 이 유언을 하고 죽을 것 같아요. 저는 말이죠. 저도 스물한 살에 회심을 해서 은혜를 참 많이 받았고 그 당시의 교회는 지금의 교회보다 훨씬 더 뜨거웠어요. 금요일에 금요기도로 모이면 꼬박 4시 반까지 기도회를 했습니다. 기도도 훨씬 뜨겁고 신앙의 체험도 많고 어떤 교회에서는 강아지 빼고는 전부다 은사를 체험했다고 자랑할 정도로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러던 때였어요. 그런데 제가 정말 주님을 올바로 알고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와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고 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고 그 창조 안에 구속이 있고 구속 안에 재창조의 계획이 있다는 이 원대한 우주론적인 구도를 알기까지는 감동도 있고 은혜는 있지만 항상 내 인생이 쪽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것과 같았어요. 어떤 때는 잘 달려가고 바람에 빠져서 가지만 이런 것에 눈을 뜨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나서는 갑자기 내 인생을 살아가는 이 배가 커다란 군함으로 바뀌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믿고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는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와 그리고 모든 인류에 대한 계획 교회에 관한 원대한 계획, 그 안에 관련을 맺고 있는 나의 인생과 관련된 계획이라는 이 지평이 열리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거기에서 신앙의 담대함과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우주적인 사건인가 하는 것이 가슴에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저도 사실 이 본문을 벌써 몇 달 전에 주님을 이 본문을 통해서 깊이 경험하고 은혜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것을 여러분에게 풀어드리는데 아주 쉽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잖아요? 하나님 자신이 선입니다. 그 하나님 자신이 선하신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하나님이 창조하시 세계를 대우해주시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참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귀납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한순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은 사랑이시고 선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요.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중생하고 회심하고 나면 그것들을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이 수없이 이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초등학교 다닐 때 미리 영어 공부를 하지 못했거든요. 중학교를 들어가면 제일 먼저 Penmanship을 가지고 ABC를 배우면서 영어를 배우잖아요. 그렇게 영어를 한창 배우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차를 타고 저기 길거리를 지나가면 저기 영어 간판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 너무 신기하잖아요? ‘아! 저게 무슨 뜻일까? 아! 자동차라는 뜻이구나! Car…….’ 어떤 아이하고 엄마가 버스를 탔어요. 서너 살 먹은 애들은 말을 막 배우니까 엄마한테 물어보잖아요. ‘엄마, 엄마.’ ‘왜?’ ‘사과가 영어로 뭐야?’ 사과 그림이 간판에 있는 것입니다. ‘Apple.’ ‘엄마 그러면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저런 큰 차는 뭐라고 그래?’ ‘Bus.’ 그러면서 엄마하고 아이하고 너무 재미있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얘가 한글은 간신히 읽을 수 있는 나이였어요. ‘엄마 저런 집은 뭐하는 집이야?’ ‘Coffee Shop.’ ‘엄마 저기는 뭐야?’ ‘저기는 Mart.’ 그런데 저기 글씨가 보여서 ‘엄마 저거는 뭐야?’ 그런데 오렌지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라고 쓰여 있어요. ‘엄마 오렌지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는 영어로 뭐야?’ 갑자기 엄마가 아이를 딱 눕히더니 볼기를 때리면서 ‘잠이나 자.’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아는 것만큼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문맹에서 뜨여져서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신기하잖아요? 너무너무 신기하잖아요. 똑같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져요. 그런 감격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의 연관,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떻게 이 인류와 창조 세계 속에 나타났고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더 증폭시키시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막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아름다우심이 막 창조물 속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들어오는 빛은 감당할 수 없는 빛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막 그런 빛들이 한꺼번에 막 쏟아져 들어오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빛들이 막 쏟아져 들어올 때 그때 광림수도원을 자주 갔었어요. 일주일에 이틀씩 갔었으니까……. 밤이면 별들이 가득 빛나잖아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것입니다.
(찬양)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그 추운 겨울인데 별빛이 막 쏟아져요. 너무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서 정말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릴 때나 하나님이 느껴지던 삶이 바뀌어서 그 별빛 사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그뿐만이 아니라 학문의 세계 속에도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요. 그것을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그런 설교를 한참 많이 했잖아요. 그렇죠? 어느 자매가 글을 썼어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예전에는 예배당에 와야지 겨우 하나님이 느껴졌는데 그것도 예배당에 올 때마다 하나님이 느껴지면 착한 신자지요. 그것도 안 느껴지니까 눈을 지그시가 아니라 꽉 감고 그리고 예배시간에 잠을 청하지요.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들에 핀 풀포기들과 길가에 돋아나는 새순만 보아도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구나!’ 그런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에 사물들을 보면서도 그런 감동이 생겨나니 맨 처음에 죄가 없던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어떠했겠어요? 정말 요즘은 조금 덜합니다. 한때 그것들이 확 밀려들어올 때 그냥 온갖 사물들이 하늘의 별, 식물, 인체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확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아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계신데……. 그런 모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선하신 수많은 증거들이 전부다 아름답게 빛나도 그 모든 것들이 이렇게 하나로 원뿔처럼 수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에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워요.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선이신데 그 하나님은 당신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직감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하신분이시라는 사실을 성경의 진리를 믿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이 선하신분이심을 알게 해주시지만 그 알게 해주시는 방식이 이렇게 영혼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직관함으로서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나니까 예전에 내가 살아왔던 삶, 그리고 지금 나의 삶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모든 만물들을 대해주시는 예전의 방식을 그때는 나는 몰랐어요. 지금도 대해주시는 방식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피조 세계 속에 관계를 맺으며 뻗혀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쉽게 설명을 해볼게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주님을 모르고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고집대로 이 세상을 방황하며 살 때에는 하나님은 없어요. 막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게 하시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옛날의 나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쫙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때는 나 혼자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때부터 나와 관계를 맺으시고 사랑으로 나를 추적해서 찾아다니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만 관계한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단호히 역사를 해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죽었는데 제 친구 하나가 있었어요. 제가 늘 열심히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해서 반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군대를 갔는데 아주 늦게 군대를 갔어요. 휴가를 왔어요. 그러더니 내 손을 꽉 붙들더니. ‘남준아!’ ‘왜?’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더라.’ ‘나는 고맙지만 교회도 왔다 갔다 하는 애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자기네 부대에서 큰 사건이 났다고 합니다.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는데 요즘은 그런 것을 했다가는 큰일이 나죠. 줄 빳다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을 안 듣거나 고참이 심사가 뒤틀리면 새로 들어온 애부터 시작해서 제대가 가까운 애들까지 일렬로 세우고 그 다음에 고참이 빳다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고참이 빳다를 때려서 끝에까지 오면 그 다음에 끝의 애는 자기가 때려야 되니까 거기서 나와서 또 때리고 그러면 누가 가장 많이 맞겠어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애는 일어나보지도 못하고 계속 얻어맞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제대가 석 달밖에 안 남았는데 자기가 거기서 마지막에 빳다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군대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거든요. 제대가 석 달 남으면 선하게 대우를 해주고 다 빼주거든요. 그러니까 갑자기 화가 나더라는 거예요. 내가 제대가 석 달밖에 안 남았는데 이 자식들이 개판을 쳐서 제대를 한 달 남은 선배한테 내가 이 나이에 빳다를 맞는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나더래요. 그래서 빳다를 들고 딱, 딱, 딱, 세 명인가 쳤는데 갑자기 이것도 다 허무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석 달만 있으면 나갈 텐데 얘들도 불쌍하지 않냐? 갑자기 어깨에 힘이 쭉 빠지더래요. 그래서 빳다 방망이를 던졌는데 얘까지 때리고 그만두고 빳다를 던져버렸는데 그 다음 애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이 그렇더라고요. 얘가 누구 빳다를 맞아서 죽었는지 모를 때에는 걔를 건드린 모든 사람이 살인공동정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얘는 그 앞에서 빳다를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거기에 있는 모든 부대원들이 증언해주었어요. 그래서 얘 혼자 살아난 것입니다. 그 때린 사람들 중에서 혼자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자기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화가 나서 때렸는데 이상하게 세 명을 때리고 빳다를 집어던지게 만든 마음이 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니 뭐 남의 일이니까 아멘까지 할 것은 없지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이 생기니까 옛날에 일어난 일인데도 하나님이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사물들 속에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에게 선하게 대해주셨다고 하는 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게 중생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은 딱 정확하게 하나님이 그렇게 모든 사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선하게 대해주신다고 하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눈이 정말로 잘 열리게 되면 어떤 때는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사람, 그렇게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그 사람까지도 결국은 그 사람도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신 사람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오히려 은혜를 베푸시는 선을 행하시는 도구가 된다는 그런 믿음까지도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정리를 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만물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것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선하시게 대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선하시지만 이제 다른 모든 것들이 무엇이 선하냐? 하나님 이외의 것들이 무엇이 선하냐? 할 때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최종적인 궁극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셔요. 우리 인간도 우리 인간 자신을 사랑하잖아요? 하나님을 본받은 것이지만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셔서 하나님 자신이 선이셔요.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는데 그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이 창조한 모든 세계를 돌보고 가꾸실 때에 당신 자신이 정하신 그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 그러잖아요. 건강해야지! 그런데 술을 먹잖아요. 건강해야지! 그런데 운동을 하지 않잖아요. 건강해야지! 그런데 과식하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자기가 정하고 실제로 자신에게 반대로 행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안 그러시거든요. 그것을 가리켜서 선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선한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셔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는데 이바지 하는 것 그것이 모두 선한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와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 속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인간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서 선한 것을 뿜어내시고 그것들을 이 모든 창조 세계 속에 휘돌아서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이 세상에 보여주시는 것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우리 인간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쳐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을 고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재환 선교사님이 오셔서 아주 은혜로운 특강을 하셨잖아요? 물론 우리는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합니다. 노력을 하는데 그것으로만은 이세상이 고쳐지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복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고 교회에 한 지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때에 그때 이세상이 고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그렇게 자기가 깨뜨려지고 회개해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서 하나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되느냐하면 이번에는 다시 학교를 세운사람은 학교 속으로 이 사랑을 보내고 공무원 생활하는 사람은 공무원 생활하는 속으로 자기의 이런 사랑을 보내야 합니다. 의사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료인으로서의 삶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서 그래서 자기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휘돌아서 하나님의 이 선하심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모든 직업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죄에 대한 회개, 복음에 대한 능력, 한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일, 그 일 없이는 교육도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문명도 모든 인간의 노동도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칠 수 없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은 이제 그 다음에는 그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깊이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전부다 교회직원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면 세상은 누가 지켜요. 독수리 5형제한테 맡길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교회는 사람들을 은혜를 받게 해서 다 신학교를 보내라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으로 복음 속에 나타난 이 소명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모든 직업 활동 속에 충만하게 채우며 예전에는 돈을 벌기위해 치료하던 의사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정치하던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서 또는 자기가 입신영달하기 위해서 정치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독립해서 살고자하는 강한 욕구와 의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만물들은 서로서로 의존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것들이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된 존재에요.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존하지 말고 너 자신을 하나님 삼아 독립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렇게 독립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런 식으로 인간이 살아가려고 하니까 결국은 인간 각자 각자가 자기의 욕망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살면서 수많은 비극적인 투쟁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잘 믿으면 점점 박력이 없어져요. 진정한 능력은 약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 약해지는 것은 비굴이지만 예수 안에서 약해지는 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심히 큰 것이 나타나게 되는 그런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 전에는 박력이 있고 예수 믿었어도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막 박력이 있고 자기가 마치 불의와 싸우는 의의 화신인 것처럼 그렇게 까불지만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한없이 약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말 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잘난 척하고 확신이 있고 그리고 내가 강하다고 믿을 때는 함께하시지 않던 하나님이 ‘나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이렇게 살 때 그렇게 고백할 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 없이 강하게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이 흘러가는 대로 당신 자신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사람들이 오지랖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 가족밖에 몰라요. 아니 가족도 몰라요.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자기가족, 친척, 자기교회의 지체들, 연약한 형제자매들이 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을 자기 깨어짐 속에서 받아들인 사람이 이 세상을 향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나눠질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고 자기를 포기하게 되면 즉시 나는 하나님 속으로 내가 하나님 속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은 다시 나를 당신의 능력으로 나를 다시 이 세상에 보내서 나로 하여금 흘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사가 ‘계명 중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물으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첫째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독립심을 깨뜨리고 깊이 회개하니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품게 되어서 사람을 향해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향해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신 성품을 흘려보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관계있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성품입니다. 그리고 이미 있는 관계들을 돈독하게 하려는 성향입니다. 이런 사랑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가득 채워질 때 자기사랑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비운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마음 자체는 비어서 공허하게 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에 가득할 때 우리는 추루한 자기의 사랑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랑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이 영혼을 위해서 살지 않고 이웃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심령에 깊이 밀려올 때 그때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는 그 일을 가리켜서 선한 일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이 선하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설명한 이러한 사실들을 저도 예수를 믿으면서 처음부터 깨달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성경을 탐구하고 학문을 하면서 주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에 대해서 궁구하면서 나도 깨닫게 된 바에요. 그러면 이렇게 깨닫고 정리될 때까지는 누구도 선하게 살 수 없느냐?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깊은 사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의 모든 관계를 이해하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아직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요. 그래서 우리는 높은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계명들 ‘너는 거짓말하지 말라. 이웃에게 친절을 행하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형제를 용서하여라. 맡은바 너의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여라.…….’ 이런 주님의 수많은 계명들을 우리는 성경을 넘기면서 접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아이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도와주소서.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말씀을 주셔요. 여러분도 믿음 생활을 하면서 그래본 적이 있지요? 일주일 내내 고민하고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랬는데 주일날 오면 정답이 딱 나와요. 또 다시 ‘하나님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주일날 오면 정답이 딱 나와요. 성경을 펼치면 정답이 딱 나와요. 그런 경험은 여러분 거의 모두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간절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끊임없이 열어 보여주셔요. 그래서 계명의 빛들을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기도를 해봐도 알 수 있고 예배를 드려 봐도 알 수 있고 성경을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어요. 이게 말하자면 청진기에요. 성경을 딱 펼쳐서 마음을 모으고 성경을 읽을 때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기울어졌을 때는 성경을 피면 하나님의 말씀이 막 쏟아져요.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막 쏟아져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혹은 두 번, 세 번씩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너무 갑갑합니다. 깨달은 것이 많으니까 매일 모여서 계속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나만 나오지 누가 나오겠어요. 그러나 만약에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고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성경을 계속 넘겨도 안 나와요. 깨달은 것을 성경에다 많이 적어놓았는데 몇 년이 지나서 믿음이 상당히 성장했는데도 다시 읽을 때는 그 깨달음이 안와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고 당신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은 주님이 버려두시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계명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계명대로 순종하면서 살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도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뜨겁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은혜의 세계를 알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날 우리는 이제 구원에 대한 개념이 이제 종교개혁자들 이래로 한쪽으로 너무 치우쳤어요.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덜했는데 이후에 개혁파정통주의자들 이후로 이단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려오면서 나누는 바람에 이 구원의 개념이 아주 굉장히 많이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멘 하면 구원이 확 오고 한번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면 우리가 개판 치면서 살아도 하나님은 일수불퇴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으로 인식해서 구원받은 것 그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받은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그릇된 안전감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방종하게 사는 원인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고 한 사도 바울의 경고에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하면 항상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예수 안에서 다시 재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서도 보면 수많은 선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 놓여 있잖아요? 그렇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면 돌보아야하고 복음을 듣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을 보면 전도해야하고 그리고 상처받고 고통 받는 지체들은 위로해야하고 힘들고 어려움을 당하는 지체들은 붙들어주어야 하고 약하고 쓰러지려는 지체들은 우리들이 굳세게 해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나를 조금 희생해서라도 그 사람이 행복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활짝 피어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이바지하도록 이웃들에게 해야 하는 착한 일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볼 때마다 나를 구원하신 것은 이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 소명입니다. 신학교 가는 것만이 소명 아닙니다. 신학교 좀 그만 왔으면 좋겠어요.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은 전혀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쏟아져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교회에 신학교 소명 검증 위원회를 만들어서 샅샅이 검증해서 갈 사람만 갔으면 좋겠어요. 교회를 헷갈리게 하지 말고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인간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재창조하셨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이 속에 노예의 인자가 배어야하는 것입니다. 노예, 종입니다. 종의 인자가 이 속에 배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버리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그 일 어떻게 하든지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지식, 건강, 지혜, 물질, 재능, 시간,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나와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하심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그런 감동과 감화를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께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이바지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하는데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사는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아무리 생애적인 감격 속에서 만나주셨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그가 하나님과 올바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저렇게 소명을 따라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의 감격은 우리 안에서 계속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여러분이 제가 작년부터 계속해서 예배시간에 무위도식이라는 말을 많이 썼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무위도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지 무위도식해도 될 정도로 넉넉한 가정이 우리에게 몇이나 되겠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나는 그런 종류의 무위도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여러분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이고 돈을 많이 벌고 행세하는 권력가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신앙적인 섬김이 없는 삶은 무위도식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는데 그게 창조의 목적과 무슨 관련이 있어요. 자기 자아실현의 목적과 관계가 있겠지요. 공부를 많이 했다고요? 여러분의 공부가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얼마나 이바지했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산 그 삶이 초점 자체가 선하신 하나님께 맞추어지면 내가 여기서 구두를 꿰매고 하다못해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살아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삶이지만 내 자신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고정되어있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행하며 살던지 그것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서 산 생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히 그 사람에게 보답해주실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한없이 건조하고 고통 받는 삶이잖아요. 생각해보십시오.
B. ‘위하여’ : 대하여, 향하여(unto)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인간이 이런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원래 이 단어는 희랍어 ‘에피’라는 단어인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대하여, 향하여’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실 때에 처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실 때에 그리고 타락한 그 인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재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라는 인간을 이렇게 창조의 목적을 향하도록 창조의 목적을 향해서 하나님이 방향을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정위되어 있을 때에만 인간이 정위되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돌고 그리고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주님의 선하심에 덕을 입으면서 마지막 자기를 그렇게 선하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휘돌아갈 때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서있는 안에서 이 사람은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답고 아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파란 풀밭에서 뛰어다니는 토끼들을 보면 특히 회색 산토끼, 하얀 집토끼들을 보면 예쁘기 짝이 없지만 그 토끼 새끼들 100마리가 예배드리는 이 예배당에서 뛰어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예쁠 수가 있어요? 그게 바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이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하시는데 이바지하게 하시려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빚으셨어요. 아무도 쓸모없이 창조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이 세계 안에서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선한 일들을 하게하시려고 주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탈해서 살 때 그 사람은 마치 숲속을 뛰어다녔으면 그렇게 아름다웠을 토끼가 안방에 뛰어다니고 거실을 뛰어다니기 때문에 아주 추잡하고 더러운 토끼가 된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이 정하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에 맞게끔 거기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맞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지만 여기는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신 자리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을 때 가장 예쁘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서 결국은 나를 통해서 주님의 선하심이 흘러갈 수 있다면 내가 일평생 내게 맡겨주신 선한 일을 감당하며 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죠.
Ⅲ. 미리 예비하신 계획임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선한 일을 향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재창조하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때 겨우 마련한 것이 아니라 미리 예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A. ‘전에 예비하신’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전에 예비하신 것인데…….’ 그랬습니다. 무엇이 전에 예비하신 것이에요? 무엇을 전에 예비하셨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지으신바 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사람들인데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예수 안에서 구원해놓으시는 실제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만세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피조물들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끊임없이 거스르고 하나님과 원수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 사람의 삶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행복이 있을 수 있겠어요? 인간의 모든 잘못은 하나님 안에서나 얻을 수나 있는 행복을 하나님 밖에서 얻어 보려고 하는 탐심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소중한 존재로 창조하셨어요. 그냥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실 때가 있기 때문에 정말 소중한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선한 일들을 작정하시고 인간을 그렇게 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구속의 근거를 마련하시고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모든 대속의 공로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하심으로써 우리를 그 피로 속죄함을 얻게 만드셨고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위에, 공동체위에 충만하게 임하여 이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이 되게 하셨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교회에 접붙여져서 그 교회에 부어주신 성령의 충만한 은혜에 그 성령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같은 인간의 영혼 속에 충만히 흘러 예수의 몸에 일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고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사는 그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선을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에는 이것은 오히려 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악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선의 사랑의 감화가 아니라 자기의 욕망대로 살게 하는 악한 의지의 감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만이 간절히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시험해봅시다. 우리 모두 은혜의 필요를 느끼죠? 동의하면 아멘을 해보세요. 우리 모두 은혜가 필요하죠.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이제 더 이상의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깊이 인정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이 은혜가 없기 때문에 죽을 것 같아서 주님께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그렇죠? 그러나 여러분 막상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부어주시옵소서.’ 할 때에 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그렇게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그 은혜를 달라고 기도할 때에는 우리가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향하여 덤벼드는 것처럼 그렇게 간절히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언젠가 우리도 산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에 그 추운 밤에 입술에 침을 바르면 침조차도 얼어붙는 그 차가운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월 달, 2월 달에도 부르짖고 기도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런 간절한 부르짖음, 부르짖다가 그냥 죽어버려도 차라리 간구하고 싶다는 이런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다가 온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정확하셔서 당신이 은혜를 주셔야할 사람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 토요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전도를 나갔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이 나가서 전도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아요. 안양역 앞에서도 전하고 지하도에서도 전도했는데 그 아이들은 그 다음 주에 전도하러 나가기 전에 기도할 때 펑펑 울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가 이 뼈 사이에서 진실하게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기도에 묶이고 기도는 삶에 갇히는 것입니다. 산 것만큼만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는 것만큼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별로 필요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까? 수많은 하여야할 선한 일들이 주변에 널려져 있는데도 충성스럽지가 않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일에 마음을 쏟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양심이 정말 속임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구하며 눈물을 흘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마 하루만 나와서 다리가 아프도록 복음을 전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타박을 받고 그리고 야멸치게 문을 꽝 닫는 그런 거절당함을 경험해보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내가 전할수도 없고 내가 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일이 있을 때도 있어요. 예를 들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헌신, 심지어는 내 마음속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섬기는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진실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 자체를 아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기뻐하셔요.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일이 해야 하는 아주 선한 일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 나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신다면 내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능력이 없으니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은혜를 주십시오. 나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건강이 부족할 때 우리가 얼마나 깊이 마음이 침체되는지 생각해보세요.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고 싶은데 온몸이 반란을 일으킬 때 그때 주님 앞에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서 기도하면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할 때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찬양)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그런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교만이 깨뜨려지고 나는 아무능력이 없고 주님을 깊이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영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 예쁜 영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이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힘이 되시는 것을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이렇게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 목적대로 살도록 하나님이 두 가지 방면으로 우리를 도우셔요.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외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계속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계속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워요. 우리들이 허영을 부리지는 않지만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목표를 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며 섬길 때에는 돈이나 물질이나 이런 것들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끔 내버려두시지 않으셔요. 정말 놀라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큰 부자를 보내어서 몇 백억 돈 보따리를 풀어서 그런 어디 몇 년에 한번이나 나오는 어떤 동화책에 나오는 그런 기적만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안하시고 정말 기적 같지 않은데 사실은 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교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한 뜻을 세우며 주님을 섬겨가고자 할 때 하나님이 필요한 것들을 놀랍게 채워주셔요. 외적인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얼마나 놀라우냐하면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려고할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헌신되어있고 그 선한 일에 소명을 느끼면서 살면 일손이 부족하면 하나님 나 혼자는 도저히 할 수 없으니 돕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돕는 사람을 보내주셔요. 물질을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물질을 주셔요. 재능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재능을 주셔요. 하나님이 놀랍게 이런 외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하나님이 이러한 선한 일을 행하기에 적합하도록 우리에게 이것을 행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셔요. 그래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 지혜로워집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행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충성스럽게 살다보면 하나님이 놀랍게 그 사람에게 지혜도 주셔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충성스러운 것과 지혜로운 것이 짝으로 나타나기를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짝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나타나요. 하나님이 그렇게 베풀어주셔요. 낙심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선한일이기는 하지만 나 혼자 손해 보는 것 같고 나 혼자 희생하는 것 같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이 위로해주십니다. 위로해주셔요.
(찬양)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언젠가 함께 교회를 섬기던 지체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어요. 같이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소개를 했어요. ‘옛날에 나와 함께 교회를 섬겼던 사람인데 정말 충성스럽게 섬겼단다.’ 그랬더니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에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계시고 당신을 위해서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 가까이에 계셔요. 이론이나 상식이 아니라 비록 좀 모자라고 부족해도 자기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사람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거룩한 소명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 그 사람입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주님을 크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작은 일을 한다고 주님을 작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큰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조금 사랑하면서 일을 하면 주님을 못 만나고 하다못해 교회에서 마당을 쓸고 국수 먹은 그릇을 설거지해도 주님을 크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면서 주께 하듯 할 때 그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생애적으로 크게 주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한 번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말씀을 읽을 때에는 말씀의 은혜를, 기도할 때에 성령의 놀라운 위로를,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는 능력을 주셔서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신비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섬김의 길을 가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셔요. 그래서 무위도식하면서 사는 성도들은 정말 그들의 섬김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소속이 어디입니까? 일생동안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이루실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할 때 여러분의 소속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B. ‘하나님께서’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전부터 예비해두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기 만세전부터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예수님이 재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교회에서 온갖 섬김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보양 받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의 신부인 교회의 쏟아부어주시는 그 사랑의 분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의 세계, 하나님이 창조하신 끝없이 넓게 펼쳐진 이 우주와 그리고 이 세계의 역사 속에 티끌 같은 한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그렇게 창조된 인간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 누구도 의미 없는 존재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흉악한 죄인들조차도 하나님은 목적이 있으셔서 그를 창조하셨고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은 그 인생을 돌이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 돌아가게 되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끊임없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복음에 합당한 삶, 즉 하나님이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에 값없이 주신 은혜 속에 담겨진 은혜의 소명, 하나님이 이교회를 이루시고 이 교회를 통해 온 세계를 당신의 뜻을 따라 재창조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에 담겨진 소명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세계 속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비웃듯이 아버지를 떠나지만 그러나 곳곳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워두셔서 그래서 날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속을 입었으니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선하신 성품이 흘러가는 도구로 살 수 있다면 하나님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충성스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곳곳에 아주 소중하게 남겨두셨어요. 그래서 요동하지 않고 비록 연약하지만 남들이 웃고 떠들고 춤추고 노래하고 자기의 욕망대로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꺾이지 않을 그때에도 하나님이 남겨두신 그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교회를 지키며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덤으로 받은 인생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매일 매일 자신이 이 세상 전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그렇게 연약한자처럼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수종을 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보편교회는 여전히 건재하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섬김을 통해서 지금도 기적과 같은 일들을 행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지켜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편안하게 유익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 우리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성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며 남들이 다 버리고 간 그 일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주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적인 사명은 하나님이 이렇게 신앙의 열렬함이 있는 나라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순교의 길을 걸어간 비록 순교자는 되지 못했지만 매일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자기의 육체 속에 채우려고 했던 이름 모를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희생의 섬김 속에서 오늘 우리들은 신앙의 유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이 편안한 신앙생활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피를 밟고 서있는 것이고 그들이 그렇게 피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그들의 마음속에 흘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이렇게 우리의 많은 동료들이 우리의 앞선 신앙의 선조들이 자기의 피를 흘리고 살을 찢어서 그렇게 주님을 섬겼던 충실한 사람들의 희생을 이용하고 그 속에서 유익도 누리지 않고 나태하고 살다가 죽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역사 앞에서도 부끄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믿음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서 그래서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 어둠속에서 건져주신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신 진리의 부채의식을 깊이 느끼면서 주님의 그 사랑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을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주님이 흘리신 그 보혈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이런 생활을 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손바닥이 뚫어지기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너무 너무 사랑하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도대체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리를 강조하지만 살기위한 교리이지 단지 알기위한 교리이겠습니까? 비록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운 과학적 이치는 미처 몰랐어도 이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나 같은 인간을 창조하신 주님의 그 큰 사랑은 알아서 그래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기위해 자기를 끊임없이 바치는 사람이 모든 만물의 이치를 알면서도 그 이치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우리는 말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조하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의 강물이 흐르고 우리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주님을 섬기며 세월이 많이 지나갈수록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더 뜨거워져서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의 몫에 태워진 이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특권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거라.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라고 말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라고해서 정말 건강하고 좋은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누군가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 교회의 아픈 부분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마치 주님이 섬세한 손길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병든 그리스도의 몸을 치료하는 도구가 되어서 그래서 주님은 기적의 능력으로 우리를 고쳐주셨지만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이 교회를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고하면서 작은 성취에 들뜨고 교만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모두들 평탄하고 은혜롭다고 하는 때에 교회 구석구석 아프고 연약한 지체들을 자기 몸처럼 끌어안고 그들을 위해 울어주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베풀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전부이시고 사랑하는 지체들은 주님의 전부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시대에 오히려 성공을 꿈꾸는 대신 자기 포기를 꿈꾸면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자기가 지려는 사람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자기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살아나는 지체들을 보면서 행복해하고 그리고 그 지체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도를 따라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잊힌바 되어도 조금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제자도의 정신을 따라가는 삶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너무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의 성공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교회가 아니라 성도의 모든 삶이 십자가를 닮아 빚어지도록 그렇게 가르쳐주는 것 언제든지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어떻게 행복하게 죽는지 그리스도와 더불어 얼마나 아름답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지 죽어도 많은 사람들 속에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보여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관은 자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그래서 교회는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의 일부분이 된 것이 언제나 부자연스러워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찬양)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IV. 결론
잠깐 흘러갑니다.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을 기쁘게 했던 우리 임채국 형제를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갓 태어나서 기어 다녔어요. 그런데 36년이라는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갔어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섬기고 사랑하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십자가 사랑의 이 많은 빚이 우리의 어깨위에 얹어졌는데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내려놓고 매일 아침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단 1년만이라도 주님을 꾸밈없이 그리고 가식됨이 없이 우리의 마음의 어느 한부분이라도 남은 것이 없이 우리의 혈관에 흐르는 피 중 주님을 위해 흘리기를 거절하는 한 방울의 피가 없이 예수를 위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찢어지기를 거부하는 살이 단 한 점도 없이 그렇게 일 년만이라도 섬기다가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매일 아침마다 여러분도 기도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 시대에 보편교회를 맡기셨으니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연약한 모든 교회를 섬기고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나게 하셔서 이 동네에 모여 하나님이 이 교회를 이루게 하셨으니 이곳에서 힘닿는 대로 주님께 우리의 인생 전체가 진 빚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내가 준 은혜로 네가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 하실 때에 ‘하나님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졌지만 그러나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말씀의 지팡이를 의지하여 일어서서 부족하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지만 마음은 올곧게 주님을 위해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에 우리 모두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을 찬송하고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이 교회에서 한 지체로 만났던 것을 한없이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인도해 오신 그 하나님을 우리 모두 손잡고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중 한사람이 되어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선을 행하며 살게 하심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Ⅰ. 들어가는 말
마지막으로 사도는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이미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예비하신 것이고 구속 속에서 드러내신 것임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즉, 그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하게 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예수 안에서 재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Ⅱ.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심
A. ‘선한 일들 안에서’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 선한 일들 가운데서 즉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구속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서라는 것은 ‘그 선한 일들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선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선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모순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선대하시고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뜻에 대해서 역행하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하나님은 선하시고 선한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지만 그 선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 속에 나타내보여 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보다 더 큰 찬란한 광채로 하나님 당신을 닮은 영혼을 가진 우리 인간들 한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크기와 그리고 강함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짐승만도 못하고 우리 앞에 있는 바위덩이만도 못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4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아마 건국 이래 최대의 말하자면 부실건축물 압사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직도 수십 명의 사람들의 시체를 찾지 못했어요. 결론은 증발해버렸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건물 사이에 깔려서 완전히 납작하게 되어서 며칠이 지나니 다 증발해버려서 사람 자체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그게 겨우 인간의 육체라는 것입니다. 값어치로 따지더라고 인간의 몸뚱이 하나를 비료로 만들면 이천 원어치도 안 되는 그런 값어치의 인간의 몸입니다. 육체로 따지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혼을 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 당신이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이 사실을 영혼을 가진 인간들과의 사귐을 통해서 아주 찬란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크기로 따지자면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바위나 산이나 흐르는 강이나 하늘에 떠있는 천체와 비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존귀함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천하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상 전부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일진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선하심을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특별히 그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아주 잘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그 많은 관계의 축복들을 깨닫고 그에 합당하도록 그 하나님이 자신을 선대해주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에요.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바로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가서 속에서 이런 신앙의 원리를 아주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잠근 동산이 있고 그 동산에는 많은 진귀한 풀과 나무, 그리고 약재와 향초들이 가득한데 그런 것들이 아주 기름진 땅에서 아름답게 번성하고 있는데 그것을 추적해 들어가고 추적해 들어가면 거기에는 덮은 우물이 있고 그 안에는 봉한 샘이 있어요. 그래서 그 샘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물이 온 땅을 두루 적심으로써 황폐하고 메마른 땅이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기화요초가 가득하고 향료와 약재료를 내는 아름다운 화초들로 가득한 왕의 동산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영혼에 그리고 나의 육체에 나의 영적인 삶속에 나의 육체의 환경 속에 두루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선하신분이신가 하는 것을 아는 감격이 그 마음속에 넘칠 때에 그것이 흐르고 흘러서 우리의 삶 전체를 복되고 아름답게 하고 우리의 삶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원리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셨지만 타락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를 구원해주시고 영혼을 치료하시고 그와 동행하면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심으로써 그가 이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 전체 창조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갖추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베풀어주신 큰 구속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자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서 그 모든 피조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선한 성품이 흘러나가도록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위 생태신학 혹은 생태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즉 지구의 온난화가 너무 심각해져서 이제는 북극에 있는 얼음들이 모두 녹아내리고 이 북반구에는 이렇게 찜통더위인데 지금 남반구 아래쪽에서는 냉탕입니다. 그래서 이상저온현상이 계속 됩니다. 이런 모든 이 지구환경의 부조화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어요. 바닷물은 온도가 계속 올라서 예전에는 흔치않던 수많은 태풍과 그리고 기상이변현상 때문에 폭우가 내리는 이 엄청난 기상으로 말미암는 재해들이 일어나고 첨단과학의 시대를 이루었는데도 기상을 예측하는 일들이 점점 어렵게끔 불규칙성들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들의 탄소배출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탄소배출을 제로로 만들어도 이 바다의 온도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천년의 세월이 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잘 돌보고 가꾸어야된다는 각성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것은 참 우리들이 생각해볼 점을 많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명심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부패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파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탐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일반적인 생태계에 악을 미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끔찍한 악들을 인간에게 바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러한 생태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이런 부르짖음이 상당히 일리가 있고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귀를 기울이게 하는 그런 교훈이 있지만 사실 우리들이 자연세계에 대해서 저지른 그 악과는 비교될 수 없는 끔찍한 악을 우리 인간들에게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이라는 목적을 떠나고 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유통하는 통로일 뿐이라는 그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의식을 올바로 갖지 못할 때에 그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어마어마하게 큰 끔찍한 일들이 벌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는커녕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각기 자기가 하나님과 같은 만족을 얻기 위해서 욕망을 극단적으로 팽창시킬 때 인간에게는 더 끔찍한 악을 행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질병에 걸리고 경제적인 불평등과 불균형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지와 질병과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이 탐욕과 악들이 자연세계에 까지 영향을 미쳐서 이렇게 끔찍한 환경의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참된 이 모든 문제는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지는 것처럼 저 멀리 파문이 퍼져서 지구의 환경이 파괴되는 것이 제일 밖에 있는 문제가 환경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것들을 점점 안으로 수렴해서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는 인간들이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이 끔찍한 경쟁과 파괴력이 있고 그 더 중심부로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이렇게 환경이 파괴되고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참된 질서와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복음을 전파하여야할 절체절명의 필요성을 직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던 시대에는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바로 물질부족과 질병에 있다고 믿었고 그것에서부터 치유 받아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대에는 무지가 인간의 모든 악이요 그것을 극복하고 참된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면 이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면 인간사회는 참된 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어요. 오늘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수고하며 일하지만 그것은 진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의미의 선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선으로 돌아가고자 하고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간이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모든 유토피아적인 시도들은 항상 물거품으로 돌아갔어요.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요.
어떤 때는 이 권력을 왕에게 맡겨보기도 하고 귀족들에게 찢어보기도 하고 공화정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민주정치로 이것들을 해보기도 하고 독재정치도 해보고 수많은 방법으로 통치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 없이 선을 찾고자하는 인간들의 피어린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무엇을 통해서도 인간은 참된 선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심지어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건전하고 진지하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고 성경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고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어요. 오히려 자신을 버려 참된 성경의 선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성경과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가 구축한 선의 아성을 말하자면 부강하게하려는 그런 끔찍한 시도들을 해서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고 기독교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속에서는 자아교를 이룩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오늘날에도 광범위하게 번지고 이런 변질된 기독교신앙들이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환영을 받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진지하지 않는 신앙은 모조리 쓸모없는 쓰레기에요. 교회에 와서 춤추고 노래하고 즐기기나 하려고하는 이 신앙들은 모두 다 쓰레기에요. 어떠한 진리의 요소도 그 안에는 없어요. 자신이 그 안에서 어떤 만족을 누리고 위안을 얻고 자기는 담대하게 고백하기를 신앙이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고 확실하게 단언할지라도 그것은 자기의 느낌일 뿐이지 실제 그것은 진정한 선으로 돌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복하지 않아요.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가슴을 찢어야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70년대, 80년대에 교회에 몰려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세상은 얼마나 많이 나쁘게 변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려고 우리는 도저히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돌이키시고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은 우리의 어두운 지성을 진리의 말씀으로 밝혀서 그래서 주님을 믿으며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신앙입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심방을 갔는데 심방을 해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소식들을 들어요. 우리교회 다니는 어느 초등학생인데 1학년이래나 2학년이래나 회심을 하고 은혜를 받았어요. 초등학교에 가서 자기 짝에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야, 우리 열린 교회 가자.’ ‘내가 왜 여태까지 교회를 안다녔는데 너희 교회를 가야하느냐?’ 요즘 애들은 그런다고 합니다. ‘내가 왜 가야하느냐?’ 그러니까 얘가 ‘너는 예수님을 믿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교회에 와야 한다.’ 질 아이가 아니죠. ‘내가 이제껏 예수를 안 믿고 살았는데 내가 왜 너를 따라가서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그랬더니 대답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그래.’ 그랬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엄마가 그랬대나 아빠가 그랬대나 얘가 이것을 알고 한 소리인가? 하고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정확하게 설명을 하더래요.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에 진짜 어렸을 때에 교리를 아주 잘 믿게 해야 합니다. 두 번의 기회가 있는데 한번은 어려서 자연적으로 순수해서 무엇이든지 엄마 말을 잘 믿으며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 기회이고 두 번째 기회는 뭐냐 하면 영적으로 어린아이일 때 예수 믿고 갓 태어났을 때 그래서 뭐든지 그냥 젖을 빨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흡인력이 있을 때 그게 짧으면 일주일, 이주일일수도 있고 길면 일 년이고 이년일수도 있어요. 그때 무르팍에 놓고 교리를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확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초등학교 때 그 학생처럼 교육을 받아서 그렇게 탄탄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으면 지금쯤 열린 교회의 모습이 엄청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마 수련회도 이렇게 절반밖에 안 오지 않았을 거예요.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요새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섭섭할지 모르지만 목회하는데 여러분 보다는 여러분의 자식들에게 기대가 더 커요. 정말입니다. 내가 두고 보는 것입니다. 아마 걔네 들이 자라서 열린 교회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큰 이변이 없다면 내가 어느 정도는 보고 죽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는 오히려 더 기대가 됩니다. 정말 철저하게 그 아이들이 회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누구와 관계를 맺으셔요?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사랑하시고 내 뒤에 있는 사람도 사랑하셔요.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선하심으로 돌보시잖아요. 그러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모든 것들이 다 나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오지랖이 넓은 것입니다. 쫙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 보면 헨리 마틴이나 이런 사람을 보면 선교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발자취를 남겼던 사람들인 데이비드 브레이너 같은 사람들이 기도의 영역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입니다. 기도의 영역이 넓어요. 우리는 뭐 우리교회, 우리구역식구 그것만 해도 숨차지요. 하다 안 되면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구하지 못하오나 다 선하게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는 하나마나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그런 뜻입니다. 응답되었는지 어떻게 확인을 합니다. 그게 쫙 펼쳐지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들이 여러분 모두 그런 경험이 있을 거예요. 은혜를 많이 받으면 아마 가보지도 못한 아프리카에 있는 교회, 미국에 있는 한인들, 아니면 영국에 있는 목회자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 사람들과 다 관계를 맺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당신과 관계를 맺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향한 당신의 애틋한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나라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서도 부흥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확 가슴이 떨리는 것입니다.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미국에 있는 교회의 일각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점점 종교 다원주의화 되어가고 기독교가 변질이 되어간다고 그러더라. 그런 소식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내가 열심히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보다.’ 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과장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아본 사람들은 그런 것을 다 느낄 것입니다. 그런 것이죠?
우리가 신학대학 3학년 때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미국인 교수님이 오셔서 선교학을 가르치는데 ‘너희 나라가 천만 명이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지만 아직까지도 교회가 없는 지역이 590군데나 된다.’ 교회가 없는 지역이라는 것은 사방4㎞내에 100가구가 사는데도 교회가 없는 지역을 말한다. 100가구가 되면 10%가 예수를 믿으면 10가정이 예수를 믿고 10가정이 십일조를 하면 한가정이 교회의 목회를 할 수 있다고 보고 그것을 무교회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5가정이 모여 있는 그런 곳까지 치면 수천 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국 사람이 조사한 것이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이 조사한 것입니다. 정말 창피했어요. 그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여기에 표를 붙여놓았으니까 너희들이 원하는 곳에 동그라미를 치고 가서 거기의 선교 상황이 어떤지를 다 살펴보고 와서 보고서를 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기를 갔던 형제들 중에 그때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졸업을 하고 아예 거기에 가서 교회를 개척한 친구들이 있어요.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곳을 방문해서 무릎을 꿇고 그 땅에 있는 잠재적인 하나님의 백성들, 또 예수를 이미 믿었지만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너는 여기에다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그 관계는 수없이 많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여야할 선한 일들이 무수하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죠. 신앙적인 눈으로 보아야 보이는 것이지 신앙을 제외한 눈으로 보면 ‘그것을 왜 내가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묻는 것입니다. 그게 왜 내가 해야 할 일인가하고 묻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들이 은혜가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로 살지 못할 때에는 우리들이 선이라는 것 자체가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들어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고 기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할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것들이 확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수없이 하여야할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보면 이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를 섬기잖아요. 그런데 보면 그분들이 사실은 가장 부러워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직장을 다니건 전업주부로서 교회에 봉사하건 그 영역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야할 소명이 있다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직장이든지 어디든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이 교회의 안, 교회 밖의 세상 어디든지 눈여겨보면 수많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선한 일들인데 그 일들을 누군가가 잘 감당하면 그 일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던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아까도 김 영길 총장님이 이야기하다가 신우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정말 한 3년 동안 다니기가 싫었어요. 사표를 여기다가 써놓고 주머니에 넣고 직장을 다닐 정도로 그렇게 죽기보다 싫었어요.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아주 새로운 일이 생겨요. 직장 안에서 성경공부 인도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디스크에 걸려서 회사를 못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뭐냐 하면 나를 보고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라고 그래요. 나는 나 자신 하나 추스르는 것도 힘에 겨운데 성경공부를 인도하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나도 굉장히 방황을 많이 했었는데 그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서 점심때 마다 창고에 모여앉아서 성경을 공부하다가 은혜를 받았어요. 교회에서는 목사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못 받았는데 그런데 거기에 가서 형제, 자매들하고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다가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기도를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재미를 붙이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인도자가 허리 수술을 한다고 몇 달 동안 못나온다고 나보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라고 그래서 인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이 교회에서 전도대원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해도 뺀질거리고 안 믿던 사람들이 직장에 나왔을 때 점심시간에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 모임에 한번 와보라고 그러고 오니까 나 같은 총각집사가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찬송을 부르고 성경공부를 하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회심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어요. 아, 그렇구나! 주님을 만나기전까지는 자기가 일을 해도 왜 이 일을 해야 되는지를 몰라요. 은혜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나야지만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왜 보내셨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감격이 마음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만둘 때까지 한 4, 5년 동안은 정말 행복하게 직장생활을 했어요. 매일매일 나 같은 인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어요. 지금도 그 모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 창고에서 시작한 모임에서 내가 아는 것 만 해도 벌써 목사가 여러 명이 나왔어요. 사모도 여러 명이 나왔어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찾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고 나면 정말 이 세상에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외국에 갔다 오던지 아니면 국내에서 신학교를 다녀오든지 목회자를 위한 집회를 갔다 오든지 아무튼 어디를 갔다 오든지 갔다 오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할 일이 많은데 하나님 이 세상에는 노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도 노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선한 일들 안에서 행하게 하려고 너희를 창조하고 구속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들 안에서 한다고 그러니까 수많은 하여야할 선한 일들에 에워싸여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주님을 열심히 섬기며 살아가는 지체들이 교회에도 많이 있어요. 그렇죠? 나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보면 능력이 있고 재능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있는 자매들이 교회에도 많아요. 아까 똑같이 이야기했듯이 전업주부로서 교회를 섬긴다는 것만이 아니라 직장을 다닌다고 그래도 분명한 자신의 소명이 있는 사람 그래서 학교선생이면 이 어린아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겠다는 선교적인 소명감, 사업을 하면 열심히 하고……. 제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먹고는 산다는 말이라고 그랬지요. 먹고 사는 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사업을 했으면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서 이 세상의 구겨진 곳을 펼쳐야 합니다. 어제 이재환 선교사님이 이야기하잖아요. 천원이면 생명을 구하는데 그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펼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서 그리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일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바빠요. 얼마나 바쁜지 몰라요. 왜? 인생은 짧고 유한하고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날들은 이렇게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짧은 날들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인생은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때가옵니다. 그러면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에 우리는 일들에 에워싸여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가끔 보면 왜 공부하면 교회를 봉사 못하고, 직장을 다니면 교회 일을 못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리고 뭐 하나 맡겨주면 그것 하나만 해야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있잖아요. 오늘 이 말씀을 명심합니다. 복수에요. 그 선한 일들 안에서 쉽게 얘기하면 선한 일들이 수없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 에워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관련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영광이죠. 왜 영광이에요? 주님을 몰랐더라면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그분께 독하게 대적하면서 악을 행하며 살면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과 괴로움의 근원조차 몰랐을 인간을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이 구원하셔서 무지에서 벗어나도록 말씀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또 깨달았어도 그렇게 살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의욕을 갖게 만드시고 힘을 주시잖아요? 구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간증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셔서 우리로 그렇게 살게 하셔서 그래서 당신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고 살게끔 하셨는데 그것이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우리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언제 제일 행복했습니까? 간단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살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지금같이 맛있는 음식을 덜먹고 지금처럼 좋은 집에 살지 않고 지금처럼 비싼 옷을 입지 않고 지금처럼 많은 물질에 에워싸여 살지 않아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분명한 일이 있어서 그래서 내 마음 중심을 바치며 눈물로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소명감이 있었던 그때 우리는 가장 행복했어요.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가끔 충고를 합니다. 물론 그 말은 충분히 이해는 하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바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다는 핑계로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훼손하면서 일 중심으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인 한에 있어서는 그 말이 옳지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묻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문하고 싶어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거셨습니까? 정말 바쁘십니까? 정말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분투하고 몸부림치는 것만큼 주님의 이름을 내기위해서 몸부림칩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정말 부러울 정도로 탁월한 하나님과의 내적 교제 속에서 충만함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에요.
저는 제 생애에서 은혜의 탁월한 호황을 누리던 시기가 몇 번이 있었는데 그중의 한번이 제가 88년도 89년도 90년도 이렇게 신학교 교수로 처음 부임했을 그때였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지금 목회하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정말 바쁜 삶을 살았어요. 건강도 나빠서 화장실에 앉으면 한 컵씩 피를 쏟았어요. 그런데 삶의 모든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었어요. 삶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삶이라는 것이 통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흐르는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기도했었어요. 가장 바쁠 때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초점의 문제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전도를 나가기 전까지는 영혼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심각함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복음을 들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절절한 광경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연민의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기고 삶 전체로 분투하는 그곳에 신앙의 감격이 있는 것이지 삶 전체는 하나도 주님을 위한 어떤 분투도 없고 하나님 말씀을 단지 엔조이하려고 하고 남보다 교리를 더 많이 안다고 자랑해서 교리적인 지식을 늘려가고 더 어려운 책, 더 어려운 책 그렇게 찾는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한 일들이 아닙니다. 그 선한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예전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위해 이마에 땀이 흘러 겨우 식량을 먹었지만 이제는 나의 삶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불편하고 섬기면 지체들이 편하고 내가 조금 희생하고 더 불편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선의 통로가 되잖아요. 그런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저는 김을 참 좋아합니다. 교인들이 김을 하도 많이 사다주어서 이제 김을 그만 사와도 될 것 같아요. 겨울에 들어온 것을 여름에 먹어도 남을 정도로 김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항상 김이 비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어린 시절에 한번 바닷가에서 김을 만드는 것을 보았어요. 그 이후로는 어떤 김을 봐도 비싸다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요즘은 기계화되어서 굉장히 쉽겠지만 그때는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원래 김이 미역처럼 생겼어요. 그것을 커다란 대나무 통에 넣고 김 따는 철이 겨울인데 그 추운겨울에 그것을 맑은 바닷물 속에 넣고 야구방망이 같은 것으로 한없이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려야지만 모래가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없이 돌린 다음에 그것을 깨끗이 씻어서 작두에 아주 자잘하게 썰어서 그것을 칼로 다져요. 그리고 그것을 물에 풀어요. 풀어서 그것을 됫박으로 되어서 네모난 나무틀에 밑에는 발을 놓고 확 뿌리면 물은 빠져나가고 김만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 한 장 한 장을 전부 햇볕에 너는 것입니다. 겨울이면 그것을 햇빛이 쫙 비치면 따다닥 하는 소리가 나요. 그것이 김이 말라서 떨어지는 소리에요. 그렇게 해서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다시 다듬어서 열장씩 묶어서 파는 것이 시장에 나온 것이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절대 비싸다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와서 이곳에서 남의 교회이기는 하지만 사랑의 수양관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잖아요. 이 땅 전체를 어느 성도가 교회에 바쳤어요.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헌금하고 장로님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그래서 이곳을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려있는 교재 한권도 누군가가 밤을 새우고 기도하고 그리고 헌금하고 ‘잘해야 할 텐데’ 그렇게 고민하면서 그 교재 하나도 만들고 명찰하나도 만들고 하다못해 교회에 있는 포스터 하나도 그렇게 해서 된 것이니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님을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이었는데 그 짐승과 같은 사람이 변해서 하나님을 알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도구가 되어서 밤이나 낮이나 눈물로 고생하고 하나님 앞에 살았겠어요. 그 모든 일들이 그것이 선한 일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복음의 소명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를 한 것이 엮어지고 엮어져서 그런 작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기억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주신 그 많은 은혜의 자원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당신의 나라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 했는지의 크기를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셔요. 마음의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하나님 저는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저는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선한 일들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주님 앞에 내어놓을 것을 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꿈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시중 든 것이었습니다. 내 자신이 주님의 선하심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비가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용서할 수 있었고 베풀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고 그리고 나눠줄 수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도록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 되니라 고 하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쳤습니다. 지금도 나에게는 꼭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아주 절실한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복된 사람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주인공으로 사용해주시는 것 같은 기쁨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까도 총장님 말씀하시는데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해서 학력고사 성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진짜 좋은 애들을 뽑아야겠다고 그래요. 들어올 때는 성적차이가 나는데 공부를 시켜보면 다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런 소명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시는 보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정말 감사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미국에 집회를 갔는데 공항에서 4시간을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거예요. 이러다가 내가 여기에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마음속에 ‘내가 이 미국을 다시 오나 봐라. 다시는 안 온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비행기를 타고 가만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나님이 사용해주신다는 것이 감사한가? 언제까지나 하나님이 영원히 사용해주시겠어요? 여러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역사 속으로 우리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잠깐입니다. 그런 선한 일들에 에워싸여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십시오. 거기가 어디이든지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십시오.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십시오. 그래야지만 여러분도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B. ‘우리로 행하게 하시려고’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페리파테소멘이라는 희랍어 단어인데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할라크 델레크라는 말의 희랍어적 표현입니다. 델레크는 길이고 할라크는 걷다 에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하나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무슨 표현이냐 하면 각 사람은 태어나서 결국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환경에 의해서도 주어지지만 더 중요하게는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길은 그 사람의 성품이 빚어낸 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 속에 있는 성향을 따라서 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선한 길로 걸어가고 만약에 그 속에 그런 것이 없으면 악한 길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우리를 재창조하셔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신 이것은 단회적이고 간헐적으로 충동적으로 선한 일을 한두 번 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인생의 길을 걸어간 궤적은 그 사람의 본성이 시킨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본성상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하나님을 등지고 살 수밖에 없는 이 죄악된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바꾸어 주실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단지 과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구원이 아니라 죽었던 우리 영혼은 완전히 재창조하시는 새로운 은혜에요. 그래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구하셔서 그래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신자의 마음속에 집어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는 법이 없어요. 약해지는 법은 있지만 사라지는 법은 절대로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새 본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하게 사는 이 본성을 따라 살지 않는 동안에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생한 본성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 된 본성 때문에 항상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고자하는 그런 또 다른 성향이 우리에게 있어요. 하나님이 이 본성을 여전히 우리에게 잔재처럼 남겨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자기 자신을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순간 주님을 의존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약함도 하나님이 당신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넘칠 때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게 되지만 신앙생활을 잘하고 능력이 있고 씩씩한 지체들보다 병들고 나약하고 불쌍한 지체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지는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을 의지하는 신자의 간절한 기도와 울부짖음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악하고 모자라는 처지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안에 죄가 남아있는 이것이 하나님께 건강하게 나아가기만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매 순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나에게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매일 매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를 받고 어느 순간에 불쑥 충동적으로 선한 일을 하고 그리고 잠시 후에는 집어치워버리는 이러한 단절된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부족해도 끝까지 한걸음으로 믿음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온전히 한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한번 당신의 사랑에 깊이 감격하고 순종하겠노라고 작정해도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전달되는데 고난과 시련, 결핍, 그리고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충성되게 살려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매일 매일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마음에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여러분 시간이 나면 한번 교회를 이렇게 구석구석 돌아보십시오. 열린 교회의 큰 은혜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한번 보세요. 그것은 설교자의 유창한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눈물을 흘리며 영혼을 돌보며 무엇인가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일들을 고생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감당하려고하는 이름이 없는 수많은 지체들의 섬김 속에서 열린 교회를 이끌어 나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며 하나님의 선이 자신을 통해 유통하는 도구로써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의 약함을 절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철저히 경험하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거기에 깊이 잠겨서 섬기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렇게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일들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도 우리 교구들이 쭉 모여서 그렇게 교구를 섬기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보고하는데 매 교구마다 마음의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피 흘리고 눈물을 흘리는 섬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 의해서 주님의 교회가 유지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도 이 세상에는 무너진 이 하나님의 나라의 보편교회의 한 구석들이 너무 많고 어딘가에는 무너지기는 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충성되게 살려는 사람이 없거나 혹은 있어도 그 능력이 부족한 많은 교회의 구석들이 있어요. 그것을 나의 교회,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을 이루는 나의 지체들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소명을 우리는 그 보편교회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연약한 교회를 보면서도 그것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여기고 그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이 정말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고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이바지하도록 도와달라고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어요. 절대 무위도식하지 말아요. 내가 이것은 교회의 일군이 필요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서는 여러분의 인생에 절대로 행복이 없어요. 여러분이 지금은 무슨 설교를 듣고 감동을 느끼고 그 진리를 엔조이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절대로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없어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끝까지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당신의 은혜의 세계는 당신을 위해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셔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기의 소명의 현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디이든지 소명이 있어야합니다. 단지 그 자리나 차고앉아서 세월이나 보내고 있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노회나 교회에 가면 10년, 20년 근속 상을 주는데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0년, 30년을 근무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단 1년을 영혼들을 섬겨도 진하게 피를 흘리면서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을 끌어안고 섬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 것이 여러분의 교회와 주변에 수없이 많고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수없이 많은 소명의 현장들이 있어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고 그리스도 때문에 유익을 얻고 그리스도 때문에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고 자신을 실현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람을 얻는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러나 예수와 함께 죽고 십자가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빚어내서 그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님의 생명이 나를 통해 주님의 생명을 모르는 자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에요. 너무나 소수에요. 20명 30명이 우글거려도 차라리 단 한 명이 자신이 이 일을 위해서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그 섬김의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 있을 때 더 크고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요.
전에도 들은 이야기지만 또 들으니까 감동이 됩니다. 아니 어떻게 학교가 월급을 줄 돈이 없어서 국가 보조금으로 월급을 나눠주었는데 그렇게 53일 동안 감옥에 있는 동안에 46억이 걷혀요? 나도 좀 가고 싶어요. 눈 딱 감고 몇 달 있다 나오면 빚도 다 갚고 교회도 짓고 설교 준비를 안 해도 되고 얼마나 좋아요. 정말 가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살고자하는 자는 죽게 하시지만 주님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죽지 않고 살게 하셔요. 오늘 총장님이 나에게 큰 감동을 주셨어요. 그렇구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일군이 부족해서 어렵고 그런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구나! 은혜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헌금을 덜해서는 안 되겠지요. 정말 하나님의 원리는 그런 원리구나! 그래서 입이 천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어요. 입이 만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목회자들을 만나고 그래도 나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별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찬양)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III.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그대들의 영혼의 목자가 된 사람으로서 간절히 여러분을 위해서 비노니 소명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떠나왔으면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발견한 소명이 화장실을 치우는 것이라면 그곳으로 돌아가시고 주방에서 밥을 하는 것이었다면 거기로 돌아가시고 주일학교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면 거기로 돌아가시고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매일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었으면 거기로 돌아가시고 주님이 주신 물질을 조금이라도 흩어 나누어주어서 병들고 연약한 지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여러분의 처음 소명이었다면 거기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죽으십시오. ‘여기가 제 자리옵나이다. 주님이 우리가 힘들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지신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종처럼 취급받으며 주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나 같은 더러운 인간이 고난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 사실에 감사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고 주님은 날마다 사시고 사망은 내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우리 가족들 가운데 역사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족들과 구역의 식구들의 영혼의 회심을 위해서 회심의 은혜의 보존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하고 주께서 여러분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건강을 사용하겠다고 하실 때에 그때에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기꺼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그래서 바람같이 속히 지나는 짧은 우리의 인생의 날 동안에 주님을 마음껏 섬깁시다. 그래서 미구에 우리들이 우리의 슬픔과 고난으로 가득한 이 피곤한 인생의 길을 마름하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이 땅에 있는 교회, 우리들이 섬겼던 이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함께 눈물로 기도하고 돌보았던 이 시대의 보편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아름답게 피어나 창조의 본래 목적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하나님을 섬겨가는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잠시 머무는 나그네 인생길동안 우리의 건강과 그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생명을 바쳐서 섬겼던 날들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여러분의 소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자 영혼이 허우적거리는 것 같아서 기도하려고 애를 써보아도 허공을 돌아왔지요? 옛날에는 말씀의 은혜를 받았는데 그러면서 졸린 눈을 부릅뜨고 설교를 들어보려고 해도 마음에 꽂히는 말씀이 없었지요? 무엇 때문일까요? 왜 해보려고 그랬는데 왜 그렇게 안 되겠어요? 그 자리에서 기도해보십시오. 기도에 힘이 생깁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말씀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에 자리로 돌아가셔서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믿는 도리의 모본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히 3:1-2).
이 뜻깊은 히브리서 제 3장에서는 사도가 핍박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시대에 곳곳에서 신앙의 변절을 겪는 교회들을 보았습니다. 이때에 이 수신자들을 격려하고 믿음 가운데 곧게 서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히브리서를 쓴 것입니다. 이러한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 히브리서 저자가 택한 방식은 좀 특이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충성스럽게 살고, 그러면 어떤 큰 상급이 있고, 믿음을 배반하면 어떤 큰 징벌이 있는가, 이것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미리 가르쳐준 것인가, 이것을 보임으로써 충성스럽게 살도록 격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론 적이고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충성스런 삶을 살도록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서라고 불립니다.
2천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게 된 원리나 2천 년 전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사는 원리나 원리는 똑 같았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감동을 입어서 주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초기에 복음이 전해질 때 참 다행스럽게도 비평주의를 반대하고 건전한 청교도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복음을 들으면서 한국교회가 평양 대부흥을 거치는 가운데 확립한 두 개의 확고한 신앙의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신앙과 종말신앙입니다. 종말 신앙은 이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은 잠시 지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십자가 신앙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 분의 피로 거저 사신 바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을 차례다라고 하는 순교신앙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결합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히브리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그들이 어떤 정체를 가진 사람들인지를 그들에게 일깨워 줍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결국 구원을 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 구원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되었다 그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면 언젠가 우리가 스스로 힘들 때 버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부르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생을 돌아보면 어떤 때는 주님을 잘 믿는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나도 내가 싫은 적이 있습니다. 나도 내가 싫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만 나를 좋아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릴 때가 없는 때도 있습니다. 이 모근 것이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만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그 때에 이미 우리가 어떠할 것을 시간을 초월해서 모두 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시다는 생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우리의 옷깃이 여며질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부족한 것을 주님 앞에 깊이 고백하고 오늘 하루도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이렇게 어린아이 같고 수시로 미끄러지는 우리를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리에게 커다란 격려가 될 것입니다. 나도 내가 싫어질 때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해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면 또 한 가지의 사실은 우리가 구속받은 것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전수받은 이 소명이 사실은 하늘나라의 소명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부르심은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이 부르심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 하는 부르심의 목적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당신은 하늘에서 우리를 불러주셨지만 부르신 즉시 우리를 하늘나라로 옮기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이루고 살아야 할 가치는 땅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그리고 무엇을 마실까? 그래서 그것을 먹을 때 어떻게 내가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내가 입을 때 어떻게 내가 행복해 하고, 그것을 마실 때 내가 어떻게 만족을 누릴까, 이것은 땅의 가치입니다. 땅에서는 이런 가치가 아주 중요합니다. 실제로 앙케이트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물건을 사러 갈 때에 이렇게 정장을 하고 깔끔한 용모를 하고 가는 사람이 대접도 잘 받고 물건도 싸게 산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잠바나 걸치고 티셔츠나 입고 가면 주머니에 돈이 두둑해도 그저 슬슬 실업자처럼 가서 ‘이것 얼마예요?’라고 물어보면 대답은 해주지만 주인이 물건을 팔 의사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여성들도 똑 같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통계를 냈는데 상대방 회사에서 무엇인가 부탁을 하러 왔을 때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특히 여직원 같은 경우에 예쁘게 화장을 하고 단정하게 하고 가면 훨씬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 하지만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다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또 그럴 것입니다. ‘아, 목사님 저는 영업사원도 아니고,...’ 영업사원입니다. 가서 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파는 영업사원이기 때문에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다니면 안 됩니다. 마음의 폭탄을 맞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런 모든 것들을 우리는 궁극적 가치가 아니라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우리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아마 떼어놓을 수 없는 고민 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늘의 부르심을 위한 가치가 아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늘의 가치가 ‘너희는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것이 하늘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보면 분명히 주님 안에서 복음을 받고 그 하나님 앞에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의외로 관심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가치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누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 대폭적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하는 그런 변화를 여러분이 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의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을 만났을 때 그 문제 자체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이상하게 응답이 없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 초연해지고 ‘내가 이 문제 때문에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이 길을 걸어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관심 이동을 하고 오히려 다른 것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놀랍게 우리의 인생의 필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역사를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부르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부르심은 하늘에서 왔지만 그 부르심을 이루는 장소는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은 하늘로부터 왔지만 부르심을 이루는 장소는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지 충성되지 않은지 하는 것은 사실은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드물긴 하지만 종종 어떤 사람은 말씀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에 대한 관심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분투하게 사는 삶이 없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해 전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어느 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과 먹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이 있고 그것이 달콤하게 느껴져서 감동을 받는 것은 말씀을 즐기는 사람이나 말씀을 먹는 사람이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여럿 봤습니다. 그저 복도를 지나가고 마당을 지나가고하면 후딱하면 날 붙들고 성경을 물어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말씀에 정말 관심이 많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저 관심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성경에 나오는 한 가지 기록을 살피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을 때 천사가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두루마리를 주면서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를 받아서 먹었습니다. 먹고 난 요한의 그 경험을 자기가 고백을 하는데 ‘내 입에서는 아주 달더라’‘, 그래서 씹어 먹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달더라, 그런데 그것이 배에 내려갈 때 배에서는 아주 쑥같이 쓰더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래도 먹고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기만 할 뿐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해서 자신의 삶으로 그 말씀을 이 땅에서 성취해 드리려고 하는 충성스런 삶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는 맛보기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의 맛을 오래도록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의 구조는 지식과 정서, 의지 이런 모든 것들이 마음과 연결이 되어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나 진리의 참 맛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총체적으로 그것을 붙들고 살려는 전인적인 반응이 없으면 입맛만 그렇게 계속 유지되는 그런 예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미각을 유지하지 못하지만, 작은 말씀이라도 그 맛을 본 후에 철저하게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충성스럽게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이 삶은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의해서 분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럽게 살다 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있는 자에게 더 많이, 없는 자에게서 그것조차 빼앗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부르심인데 이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의 가치를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살도록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어려움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려고 할 때 만나는 힘든 상황들을 모두 오히려 사용해서 자신의 충성을 입증합니다. 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이 장작이나 어떤 물건들을 만났을 때 그것들은 불길을 방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이 실제로 타고 있는 동안에는 그 방해가 나타났을 때 오히려 그 방해를 사용하셔서 불길을 더 크게 태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그 일을 이루지 못하도록 생겨나는 방해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리고 그것들을 오히려 태워 자신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충성의 불길을 더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종종 만나면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무엇인가 아무 어려움이 없이 교회가 순조로워지면 불안하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냐면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때 아무 어려움이 없이 잘 지나가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거 태풍의 눈 아닌가?’ 태풍이 만나서 바람이 불면 가운데 눈이 생기는데 아주 고요한 바다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어떤 때는 몇 킬로밖에 안 될 때도 있고 클 때에는 몇 백킬로 천 킬로까지 이어집니다. 지금같이 위성이 발전되고 첨단 장비들이 개방될 때에는 작은 고기배 하나도 GPS를 통해서 정보를 받으며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태풍의 눈 가운데 들어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에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구역을 돌볼 때 어렵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자기의 맡은 일을 그만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우리가 뜻을 세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해야 되겠다 라고 마음을 먹으면 언제라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나무토막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마음의 불을 붙여서 태워버리려고 할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우리의 충성스러운 마음의 성향들은 석유를 부은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바로 우리가 그런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광스럽게도 하나를 더 붙여 ‘거룩한 형제들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넉넉히 당신의 약속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돼지처럼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주님이 이 세상에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늘의 가치를 구현하면서 살 것인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얼마나 충성스런 사람인가 하는 것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더불어 싸우며 분투하며 살아가야 할 모순이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배를 드릴 때에 마음을 다해서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눈물로 감동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서약을 하고 결단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진실한 예배자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그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길가에 떨어진 씨나, 돌짝 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나 모두 공통적으로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마에 주님을 섬기는 땀이 흐를 때 우리의 뺨에 주님의 복음에 감격하는 눈물이 계속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된 삶이 그렇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을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소개합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예수그리스도였고 또한 구약에서 예수님의 예표로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에 대해서, 내일 새벽은 모세에 대해서 전해주려고 합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오늘 그 분이 우리에게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대신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분이신 것과 동시에 또 하나의 예수님의 별명을 소개하자면 ‘우리 믿는 믿음의 도리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 어떠한 길을 따라가는 믿음이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전체의 생애를 드려서 모본을 드려서 우리에게 들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있도록 도리를 알려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 믿는 믿음의 도리로서 우리를 위해서 일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사셨던 생애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셨던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는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그리스도는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서 매순간 자기를 모두 드리는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에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간에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대로 이르기를...’ 이렇게 예수님의 관심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일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광과 영달을 위해 사시는 대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감추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치신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공생애에 등장하셨을 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나아가서 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즉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어린 양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이 내게 세례를 베풀어야 할 텐데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반문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리하여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결국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사시면서 당신 자신이 높임을 받아야 할 이유가 많았고 당신을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 분은 마치 하나님의 종이라도 되신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낮춰 일평생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위해서 빌거나, 하늘에 있는 어떤 무엇을 위해 주님 앞에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질 것을 위해 기도하셨고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도록 33년을 이 세상에서 사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끝까지 지켜보았던 충성스러운 사람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천사의 말을 빌어 우리에게 증거하기를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시오’... 예수님의 별명은 ‘아멘’이었고 ‘충성’이었습니다.
요즘은 별로 그런 적도 없지만 무슨 일 좀 해보라고 맡기면 손 사레를 치면서 자기는 못한다고, 한편으로는 겸손을 가장해서 자기는 능력이 없어서 못한다고, 또 한편으로는 거드름을 펴면서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마음속으로는 ‘이 사람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당신의 별명은 아멘이셨단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삶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 분의 생애가 ‘아멘’의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것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아멘이 없으면서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배짱이 맞을 때는 돈도 시간도 충성도 바치지만 심사가 뒤틀리면 집어 치우는 사람 그 사람은 과거에 충성스럽게 살았어도 그는 하나님께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의 보람에 충성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아멘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충성된 사람이 되려면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던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아멘 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멘의 생애를 사는 사람들이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아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꼭 필요하면 아멘하라고 하락을 하고 하라고 합니다. 설교 시간에 입술로 아멘하지 말고 당신의 삶에서 아멘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감동을 받아서 아멘 하는 것은 아무 비용이 안 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가슴에 꼭 붙들고 이 험한 세상에서 그 아멘을 삶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희생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죄인들이 좋아하는 말만 했더라면 왜 그렇게 미움을 받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말을 하는 대신 하나님이 말하게 하신 그것을 말하는 일에 아멘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속으로 하나님 이 세상에서 인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혹은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는 아멘을 위해서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마음속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을 허락합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 아멘에 자신의 삶을 실천하는 삶을 사셨는데 그것이 바로 충성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종종 충성된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내가 충성스럽게 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그랬지. 그래서 어려운 일은 물러가게 하시고 힘든 일은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능력을 주실거야’ 그런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능력은 주시는데 절대 쉽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고통을 많이 받으면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량없이 성령을 받으시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그 분인데 그래서 우리보다 더 큰 능력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가 쉬운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능력을 많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이 받으신 능력만큼 그 분의 고난도 컸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내게 맡겨진 길을 걸어갈 때 외롭다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두 손을 얹고 노래를 부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단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능력이 질병에 시달리고 이단 사설에 교회가 위협을 받는 어려운 목회를 하고 있는 너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명심하거라 그런 하나님의 큰 능력이 너에게 임하면 너는 고난을 받아야 한단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도 모르고, 주님의 은혜도 모르고, 그렇게 우리의 고집대로 살 때에 우리에게 고난이란 것이 있었습니까? 고생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없었습니다. 고난은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서 소명을 알게 해주시고 소명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다음에야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생하면서 사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사는 것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충성스러운 생애였습니다. 모세의 그 생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시는 그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생애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는 희미하고 실체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충성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 이제 시장기를 느끼며 떡을 먹고 싶어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들이 모르는 다른 양식이 있노라’ 그 양식이 뭐였습니까? 밥이었어요? 아니면 빵이었어요?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마지막 공생애 3년 동안에는 가족도 없이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모두 내어주신 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그 일에 당신 자신을 한 톨 불쏘시개처럼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당신 자신을 드리면서 사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교회 생활을 하고 스쳐 갔는데도 충성스럽게 섬겼던 사람들, 지금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서 해어져 있지만 충성스럽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이름을 기억하면 마음에서 눈물이 맺히고 울먹이게 됩니다. 그러니 이렇게 교회를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우리들에게도 충성스러운 형제들이 그렇게 느껴지는데 이 교회를 당신자신의 몸으로 삼으신 예수님에게는 그리고 당신 아들의 신부로서 이 교회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는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으로 느껴질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인 것과 동시에 그 마지막으로 아멘의 생애를 사신 종지부를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심으로 찍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예수님의 전 생애의 아멘의 마침표였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지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이 십자가가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두 개의 의지가 함께 있었습니다. 죄 없는 몸이지만 인간의 의지가 있었고, 또 인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제 2위 성자의 의지와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하신 예수의 의지가 함께 있었습니다. 오류와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의 의지 측면에서 보면 생명이신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저주를 받고, 이 죽음에서 끊어지는 것은 인간인 예수그리스도에게도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우물가에서 죄 많은 여인에게 한사발의 물을 청하셔야 했던 것처럼, 죄는 없으셨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런 약함이 있으셨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으면 예수님이 어찌 사람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자신을 쏟아 부으시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의 의지를 의지로서 인성의 의지를 누르시고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셨으니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충성스러운 당신의 생애를 마지막 아멘으로 마침표를 찍으신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인간의 필설을 능가하는 극한의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 ‘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옵나이다’ 하고 당신 자신이 죽으시는 그 죽음의 고통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기쁨으로 극복하시면서 당신의 생애를 마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삶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별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복을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모두 공급해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많은 은혜도, 남다른 진리에 대한 깨달음도, 우리가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격차도 모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뒤를 따라 착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는 주님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새로운 영혼의 생명을 주었고 그리고 이 세상에 육체의 생명을 연장시켜 살게 하였고 그리고 나는 너에게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단다. 너는 그것으로 나를 어떻게 섬겼느냐? 내가 너에게 준 하늘의 많은 은혜, 죄를 짓고 나에게 용서를 빌 때마다 네 죄를 사하여 주었고 다시 은혜를 주었노라 그런데 네게 준 그 많은 용서와 언약 속에서의 그 무한한 은혜를 너는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였느냐?’ 주님이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간절히 사무치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기도원에 올라가서 3일 동안 한 가지 기도만 했습니다.
(찬양) ‘주님, 날 안아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안아주십시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우리 모두 사모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기도 속에서 묵상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어루만져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경건의 삶을 갖기 위해서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릴 사명의 자리가 있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수시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그 은혜로운 만지심 때문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도 했지만, 또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주님을 섬겼던 충성스러웠던 삶 때문에 주님이 더 많은 사랑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에서 미끄러진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순종하거라, 순종하면 그 다음으로 너희의 마음이 안정되고 지성이 맑아지리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증진되리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너희를 감동하리라’ 이런 순서로 우리에게 미끄러진 자가 돌아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섬기라고 허락해주셨던 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집을 멀리 떠난 탕자가 마음에 결심을 하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겠다’ 라고 다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워준 자리에서 한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를 떠난 곳에서 일만 마디의 말로 육체의 열렬함 속에 부르짖는 그 기도보다 훨씬 힘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섬기라고 세워주신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진실하게 부르짖는 한 번의 기도는 이탈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보다 더 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여기가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신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마음이 건조하고 기도가 허공을 치는 것 같을 때마다 우리는 잠시 기도를 멈추고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부르짖는 기도의 자리, 여기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을 섬기라고 주신 자리입니까? 혹시 나의 기도가 허공을 치고 간구가 힘이 없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사람의 몸을 입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도 때로는 아프셨고, 고통도 받으셨고, 때로는 배신도 당하셨고, 때로는 홀로 있는 외로운 순간도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여건, 아무것도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도록 도와주지 않았지만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앞에 아들로서 충성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있는 잠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시고 하늘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한 분이 그렇게 자기를 버려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선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던 처음의 그 자리, 혹은 금년 맨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른데서 회개하지 말고 거기서 회개 합시다. ‘하나님, 여기가 나를 세워주신 자리였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힘들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주님도 때로는 우신 것을 기억하며 충성스럽게 섬기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충성된 자를 가까이 하심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잇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민 12:6-7).
성경에 상세한 기록은 안 나오지만 이 모세는 아마 이 형제들 간의 관계가 각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이 미리암, 그리고 아론이 등장하는데 모두 모세를 훌륭하게 보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서 히브리 아이를 출산할 수 없다고 선언을 하고 죽게 되었을 그 때에 그 바로의 궁에 이 모세가 입양되는 그 일에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 미리암이었습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넌 다음에 거대한 성가대가 ‘여호와와 같은 신이 어디에 있느뇨’ 찬송 할 때에 그것을 지휘하던 사람도 미리암이었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이 일찍이 모세를 대신하는 선지자로 세웠고 말을 잘 못한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아론을 이 모세의 대변인처럼 세워주셔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모세가 광야 교회를 이끄는 동안에 함께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앙 때문에 모세를 단순한 자기들의 동기간이 아니라 주님이 세운 지도자로 알고 그렇게 섬겼겠지만 형제들 간의 우애도 아마 작용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형제들과의 관계가 중대한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원인은 모세가 제공한 것 같습니다. 구스 여자를 취하여 장가를 간 것입니다. 이 구스는 요즘 말로 말하면 이디오피아 여성입니다. 그러니 피부색깔이 검은 색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에게 왜 장가를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는 원래 혼인의 제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일부다처제를 잠정적으로 허용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권장했다기 보다는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이 습성을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인정해 주시고, 일반 섭리 속에서는 아마도 그 때에는 인구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이제 인간들이 이 땅에 번식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나님이 잠시적으로 허용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미리암과 아론의 모세에 대한 도전은 모세가 장가를 갔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이미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이 여자가 흑인이었다는데 문제가 된 것이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점에 있어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모세는 단순한 정욕으로 이 여자를 취하여 장가를 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평생 생사고락을 함께 해오고 바로 앞에까지 함께 섰던 이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 광야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미리암이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모세에게 전면적으로 도전을 해 왔습니다. 모세에게는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긴 세월을 광야에서 지나는 동안 상당히 단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세의 성화된 인격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비난을 받은 그 때에 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보다도 온유함이 모든 지면에 뛰어났었다고 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아마 엄청나게 폭발을 했을텐데 광야의 쓰디 쓴 목회를 보면서 산전, 수전, 화생방전, 핵전쟁까지 거치면서 이 모세는 그 죄 된 성품이 죽고, 죽고, 또 낮아지고 낮아져서 이런 커다란 자존심이 상하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세의 마음에 탁월한 평정은 다른 것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는 깊은 확신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미리암과 모세는 도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전을 한 방식이 무엇이었냐면 ‘야,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와만 말씀을 하셨느냐?’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지도자가 까만 여자와 결혼해도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아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자만 모세에게만 말씀하셨더냐? 우리에게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느냐?’ 성령을 받은 70인의 장로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세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더냐? 도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권위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모세의 권위는 애굽에서 모든 학문을 통달했기 때문에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모세는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기에 그의 리더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면 여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말 가운데 사람들이 다 젊고 어릴 때에는 치열하게 공부도 하고 경쟁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아이는 좋은 대학에 어떤 아이는 더 못한 곳에 어떤 아이는 더 못한 곳에 가고 그러면 걔네들이 친구들 속에서 살아가는 그 아이들이 자신감이나 그런 것들이 틀립니다....
그런데 그것은 20대의 일이고 나이 오십이 되면 용모통일, 그래서 그림같이 예뻤던 자매나 못생겼던 자매나 모두 똑 같습니다. 60세가 되면 학력 통일이랍니다. 나이가 70이 넘으면 경제 통일입니다. 어차피 늙어서 돈을 쓰러 갈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학력 통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광야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워낙 탁월한 분이었으니까 남아있었겠지만 나이 80이 넘은 할아버지였습니다.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근거가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하나님의 지도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아주 큰 근거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통이었습니다. 저는 심리학적으로 이 부분을 볼 때 미리암과 아론에게는 모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과 교통하기는 하는데 모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만 하나님과 교통하느냐,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교통하지 않느냐’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 보다 승하였더라’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던 모세였기 때문에 또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고 온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선교적으로 많은 암시를 줍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할 때 핏줄로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핏줄이 아니라 신앙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핏줄이기 때문에 언약백성으로 인정을 해 주신다기 보다는 그 핏줄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그 핏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되도록 그런 선교적인 공동체로 아브라함의 가정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에 보면 언약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도 모두 좋은 신앙을 가지고 언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반을 해서 불신앙으로 떨어져 나갑니다. 에서 같은 사람이 그랬고 이스마엘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 핏줄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음으로서 이 공동체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와서 핏줄도 계승하지 못한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처음부터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 개방된 공동체였습니다. 그렇게 개방된 공동체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한 그 너로 말미암아 라고 한 말이 히브리어로 ‘메카’인데 직역을 하면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니’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이 모든 인간을 향해 당신 자신을 개방하시는 것이 필요했듯이 이스라엘 공동체도 그렇게 개방적인 선교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지역이나 혈연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폐쇄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거룩한 정신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이 모세가 장가든 구스 여인도 이스라엘 회중에 있었던 여인이었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유입된 사람이고 그렇게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유입된 후에는 핏줄이나 피부색이나 혹은 출신 때문에 전혀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갖게 하시고자 했던 신앙이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에 도전하는 것은 민족의 편견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갑자기 부르셨습니다.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고 세 사람이 나아왔을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 계시던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셔서 하나님이 직접 판단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 미리암과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아론과 미리암도 선지자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상으로 또 꿈으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렇지만 내 종 모세와는 그런 방식으로 교통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면하여 명백하게 말하고 마치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대하며 친근하게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내 종 모세와 교통하였고 그는 나 여호와의 형상을 보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시면서 미리암과 아론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끄러움을 내리시면서 모세를 정당하다고 판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죄 없는 지도자,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는 이 지도자에게 도전하고 대적한 미리암과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둥병이었습니다. 문둥병은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는 뜻으로 천주의 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릴 수 있는 질병 중 가장 큰 질병인 천주의 문둥병으로 이 두 사람에게 내리신 것은 이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광야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인간의 편견과 사람의 상식으로 이 모세에게 도전하므로 공동체에 커다란 불화를 가져왔던 이 지도자 미리암과 아론에게 하나님이 온 몸이 하얗게 되는 문둥병을 내리셨으니 문둥병의 균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가장 문둥병이 성한 환자가 되게끔 단번에 징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그 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집에 충성을 했습니까? 모세와 함께 죽을 고비도 넘기고 완악한 백성들에게 수없는 원망과 도전을 들으면서도 지도자 모세의 가까이에서 보필하며 충성스럽게 이스라엘 광야 교회를 수종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미리암과 아론이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모세에게 전면적으로 도전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하는 죄까지 지었을 때 하나님은 마치 미리암과 아론이 이전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했던 모든 좋은 점을 단번에 지워버리기라도 하시는 듯이 천주의 큰 질병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미리암과 아론의 죄가 크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죄악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려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광야 교회의 질서를 세우심으로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라도 이 사건을 기억하며 두려움 가운데 경고를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가장 무서운 판결로 이 두 사람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문둥병을 걸리게 되면 율법에 의해서 이들이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있을 수 없게끔 진 밖으로 쫓겨남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육체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걸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은 출교를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임했을 그 큰 두려움과 공포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했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두 문둥병에 걸리게끔 징계하시지 않으셨고 물론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우상을 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라고 섬기고 악을 행할 때에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문둥병으로 징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얼마나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했는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얗게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끔 문둥병에 걸린 미리암과 아론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 두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서 다시 원래의 지도자의 자리로 복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긍휼임을 보여주시고 미리암과 아론을 하나님이 눈꽃과 같은 문둥병으로 징벌하셨지만 그들을 향한 영원한 진노가 아니라 그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기 위한 징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오늘 그것이 아니라 왜 일평생 모세 옆에서 수종을 들고 마음과 뜻을 다해 섬겼던 지도자들, 지도자이기 전에 한 피 받아 태어난 그 형제와 자매인데 하나님이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모세와 교통해 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모세야 그 광야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였고 담임 목사였으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다르게 대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사사 엘리가 생각이 납니다. 엘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사였고 당시 사사는 왕과 제사장의 직분을 선지자의 직분까지 함께 겸하고 있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분명히 엘리가 지도자였고 최고의 이스라엘 백성의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엘리 밑에서 이제 선지자로서 수업을 받고 있던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교통해 주셔서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니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항상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겠죠?
그런데 이 모세의 교통의 이유는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에게는 내가 꿈도 보여주고 이상으로도 내가 말하였다. 그것도 내가 전달해 준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않다. 내 종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 다시 말하면 모세다 단순한 지도자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주 충성된 삶을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온갖 비밀들을 사랑하는 종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충성스러웠던 아모스 선지자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하고자 하는 일을 내 사랑하는 종들에게 감추겠느냐?’ 즉 ‘내 사랑하는 종들에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비밀이었지만 당신 앞에서 충성스러운 선지자들 그래서 주님이 불러주시기를 ‘내 종 선지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을 누리면서 그 놀라운 은혜의 세계 안에서 믿음으로 자라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의 일 안하고 세상 적으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고생은 많이 하지만 고난은 없습니다. 방황과 방랑이 다른 것은 방랑은 의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고 방황은 무엇인가 목표가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지금 방랑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방황이라고 부릅니다. 똑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게 맡기신 선한 일이 무엇이고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계획이 무엇이었을까를 깨닫고 자기의 소명을 발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난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고 주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하셔서 여기에 세우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여기서 이 뜻을 이루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거기서 주님을 잘 섬기고 살아가려고 할 때에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련과 괴로움을 당하면서 고통을 끊임없이 받게 되고 그렇게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받을 그 때에 위로가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섬기면서 고통을 받고 시련을 당할 때 수시로 찾아오셔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셔서 그 속에서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탁월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우리와 똑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자신의 성품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사람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시련과 어려움이 있을 때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절망을 낙심하고 주저앉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강함과 약함은 백지 한 장의 차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렇게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이제는 모두 다 여호와를 버리고 나 혼자만 남았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신은 죽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이렇게 불세출의 지도자가 된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에게 도전을 하고 원망을 할 때 그는 주저앉아서 ‘내가 이 백성들을 낳았습니까? 내가 왜 이 백성들의 유모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 내 생명이 족하오니 나를 죽여주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탁월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때때로 그는 울부짖으며 ‘하나님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나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나는 광야의 슬피 우는 참새와 같고 방아새와 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이룬 사람이었지만 그도 고백하기를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핍박의 칼날이 다가오고 있을 때 담대한 베드로전서, 후서의 설교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던 위대한 하나님의 종 베드로도 한 때는 예수를 배반하고 부인하며 세 번이나 도망갔던 사람 아니었습니까? 어찌 이러한 약함이 그런 인간들에게만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분명히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우리 인간처럼 약하게 낮아질 수 있는지를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울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모든 당신의 종들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방법,
(찬양)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칼을 주거나 호위병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도저히 의지할 수 없도록 철저히 주저앉아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시지 않은 탁월한 신비함으로 그들과 교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 다윗은 말했습니다.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쓰라린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 상처로 가득 찰 즈음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고난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은밀한 은혜의 세계, 그리고 그 아름다운 아주 탁월한 신앙의 세계를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위로하시던 방법이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세상과 원수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셨던 힘이었습니다. 왜? 왜 그러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고난당할 때, 외톨이가 되었을 때,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시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까?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모두 말로도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이 길이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야할 적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직관에 의해서, 하나님 사랑의 직관에 의해서,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주님께 받은 응답을 따라서 하나님 계명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우리를 소외시키고 그리고 우리는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주님을 미력이나마 섬기면서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많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든 삶의 상황이 평안했을 때에는 못 누리던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제를,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혹은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발길을 돌릴 그 때에 오히려 주님께서는 생애의 가장 친밀한 교제로 다가오십니다.
(찬양)내 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 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그래서 모든 것이 평안할 때에 멀게 느껴지던 하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오해를 받을 때, 삶의 소망이 끊어진 것 같았을 때,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하나님 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을 그 때에 오히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당신이 아무에게도 보여주시지 않은 하나님의 성품의 비밀, 그리고 은혜의 세계의 그 눈부신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무엇 때문에?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그 마음과 삶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이 공평하게 그에게 탁월한 교통을 베푸심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보여주었던 모세의 이 탁월한 관용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래서 치밀한 고난의 불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섬겼던 업적을 잊어버리게 하시고, 주님을 위해 섬길 때 이루었던 일들의 크기와 영광을 잊어버리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치 진토에 떨어진 자가 된 것처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세워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자기가 사랑했던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며 황급히 맨발로 도망을 갈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 속에서 ‘하나님은 내 영광, 내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나이다’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원수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많은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벗은 발로 이 왕궁을 벗어나 도망을 가지만 ‘하나님은 나의 영광 나의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나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탁월하게 교통해 주시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 사람, 주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붙잡혀서 여기에서 미력이나마 주님을 섬기는 사람, 매 순간 자신의 인생을 촛불처럼 태워 빛을 발하듯이 그렇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태워서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를 여기에 보내신 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온 마음을 다해 거기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 그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교통을 베푸심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주님이 원래 여러분을 불러주셨던 그 자리, 주님이 내게 베푸신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미력이나마 섬기겠노라고 했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셔서 거기에서 충성스럽게 섬기십시오. 사람은 늘 변하나 우리 주님은 변함이 없으시니 여러분이 섬기되 인간 앞에서 섬기면 그 사람이 여러분을 인정해 줄 때에야 여러분이 모든 것을 가진 것이지만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여러분은 허무한 것을 섬기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니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주님이시니 거기에서 충성스럽게 섬길 때 아프면 주님께 아프다고 통증이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부족한 것 때문에 주님의 일을 그르칠까봐 염려되오니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탁월한 친밀함을 충성된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임재 해 주실 것입니다.
소명이 있는 복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