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2013-2014년 수요예배)
설교기간|2013년 4월 10일-2014년 11월 1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12월 18일
목 차
충성된 자의 행복 1 (2013.04.10.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2 (2013.12.04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3 (2013.12.18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4 (2014.01.29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5 (2014.02.05. 수요예배)
1. 충성된 자들의 복됨(잠 28:20) 2013.4.10 수요예배 1
2. 충성된 자는 낙심치 않음(수 14:9) 2013.12.4 수요예배 8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6 (2014.02.26 수요예배)
3. 주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잠 25:13) 2013.12.18 수요예배 17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7 (2014.06.25 수요예배)
4. 충성된 자의 특권(민 12:1-8) 2014.1.29 수요예배 24
5. 충성된 자와 온전한 삶(시 101:6) 2014.2.5 수요예배 36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8 (2014.07.03 수요예배)
6. 충성된 자와 안식(출 33:14) 2014.2.26 수요예배 47
7. 환란은 충성을 입증함(계 2:10) 2014.6.25 수요예배 55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9 (2014.11.05 수요예배)
8. 버시처럼(롬 16:12) 2014.7.2 수요예배 64
9. 충성과 낙담(수 14:8) 2014.11.5 수요예배 70
10. 아멘과 충성(계 3:14) 2014.11.12 수요예배 78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1
충성된 자의 행복 1 (2013.04.10.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2 (2013.12.04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3 (2013.12.18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4 (2014.01.29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5 (2014.02.05.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6 (2014.02.26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7 (2014.06.25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8 (2014.07.03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9 (2014.11.05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10 (2014.11.12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1) 2013. 04. 10 수요예배
< 충성된 자들의 복됨 >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잠 28:20)
I. 본문해설
II.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
- “충성된 자”와 대조됨
- 초점이 자기의 만족임
- 부를 행복의 원천으로 삼음
- “속히 부하려 함”: 범죄함
- 하나님 밖에서 행복하려 함
- 형벌을 받음: 심판+질서
III. “충성된 자”
- "ish emunot": 신실함들의 사람
- aman/emet/amun/emunah 견고충실
A. 하나님의 성품을 앎
- 자신, 교회, 세계를 향해 신실하심
- 사랑이 충성의 동기임
B. 은혜 속의 사명을 발견함
- 은혜의 목적론적 성격
- 자기만족의 영성은 부패함
C. 구체적으로 삶을 재편함
- 사명중심? 자기이익중심?
- 충성의 첫째 조건: 최고 가치로 여김
- 다를 모든 것들로 도구삼음
IV. “복이 많아도”
- "rab berakot"
- asher와 berakot
- 충성된 자에게 영적, 섭리적 복 주심
- 충성된 삶: 우리 삶의 조정장치
- 충성할 사명 없음: 바람에 날리는 삶
- 변함없이 찾으시는 사람
- 충성된 자: 자신이 제일 먼저 유익함
V. 적용과 결론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2) 2013. 12. 10 수요예배
< 충성된 자는 낙심치 않음 >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 (수 14:8)
I. 본문해설
- 가나안 정복왕 갈렙 유다(민13:6)
- 그나스 족속:에서 자손(창36:11)
- 그나스족 여분네 아들(수32:12)
- 기업으로 산지를 구함(수14:12)
II. 가나안 정탐 보고회
- 민수기 13-4장이 배경임
A. 이스라엘의 불신앙
- 밤새도록 통곡하는 이스라엘
- 신앙 없는 절망에서 강팍해짐
- 미래 불안, 약속 망각, 구체적 대적
B. 정탐자, 갈렙의 신앙
- 불신앙을 통분히 여김(민14:6)
- 정탐의 진실: 젖과 꿀, 아름다운 땅
- 하나님의 기쁨⇒인도⇒주임
III. 충성된 인격의 특징
A. 섬디가 낙심치 않음
- 섬김 중 난관과 시험은 늘 있음
-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 일하심 기대
- 충성됨의 유지: 사명 인식+은혜
B. 사람들에 희망을 줌
- 약속+인도+동행+보호를 신뢰함
- 당신 뜻 따르는 자를 버리지 않으심
- 불신앙적 보고: 남의 간담 녹게 함
- 절망의 응시와 소망의 응시: 믿음
- 올바른 관점을 유지하고 전파함
IV. 적용과 결론
- 충성은 개인 아닌 공동체의 문제임
- 충성된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 충성 통해 온전한 인격으로 빚어짐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3) 2013. 12. 18 수요예배
< 주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 >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 25:13)
I. 본문해설
II. 사람을 통해 일하심
- 구원 사역을 이루심에 사람을 쓰심
- 사자: "찌르" 사신, 전달자
-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일함
III.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 목표는 언제나 어려움을 동반함
- "네에만": trustworthy
- 변함없이 충성스러움: 인내가 필요
- 인내하는 힘: 은혜와 올곧은 의지
-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 얼음 냉수: 눈의 시원함
- 하나님 일에 대한 주님의 안타까움
IV. 적용과 결론
- 충성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4) 2014. 01. 29 수요예배
< 충성스러운 자의 특권 >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민 12:1-8)
I. 본문해설
- 구스 여인과의 결혼
-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
- 말씀 아닌 편견으로 판단
- 모세의 온유함이 승함(3)
II. 갈등하는 자들을 부르심
- 세 사람을 회막으로 부르심
- 하나님과 특별히 만나는 곳
- 회막의 두 용례
a. 성막을 가리킴(출29:32,42)
b.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 만나는 곳(출33:7)
- 하나님 임재의 장소: 제비, 희생, 말씀, 찬송
III. 충성과 특별한 교제
A. 하나님과의 교통들
1. 미리암과 아론: 선지자, 환상, 꿈
2. 모세: 대면, 명백함, 형상을 봄?
- 어떤 형상도 못 봄(신4:15)
- 얼굴 말고 등을 봄(출33:23)
- 신적 속성에 대한 특별한 경험
- 신령함은 신적 속성 경험과 관련
B. 충성하는 자의 특권
1. 하나님과의 특별한 교통
- 친구와 같이 얘기하심(출33:11)
-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함
2. 그의 지도력을 세워주심
- 어찌 비방하길 두려워 않느냐(8)
- 거룩한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심
IV. 적용과 결론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5) 2014. 02. 05 수요예배
< 충성된 자와 온전한 삶 >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 (시 101:6)
I. 본문해설
- 다윗의 시: 제왕의 통치
- 인자와 정의가 성취되는 나라
-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삶
II. 충성된 자를 살핌
- "나의 눈이 충성된 자들에게 있어"
A. 모든 사람들을 보심
- 왕의 눈이 충성된 자를 찾음
a. 자신과 동일한 소망: 인자+정의
b. 그 일을 위해 충성스럽게 섬길 자
- 하나님 면전에 드러나는 마음과 삶
- 신앙의 깊이는 곧 하나님 면전의식
B. 충성된 자를 찾으심
- נֶֽאֶמְנֵ : 신실한 자들, 굳건한 자들
- 순간의 발휘 아닌 성품의 발현인 삶
- 사람 됨에서 나오는 하나님 위한 삶
- 진정한 충성: 사랑일치+목표합치
- 충성된 자를 기쁘게 쓰시는 하나님
C. 온전한 삶으로 입증됨
- "완전한": תָּמִ֑ים -온전함
- 열심히 일함과 온전한 삶의 분리
a. 일의 동기가 하나님 사랑이 아님
b. 일의 목표가 하나님 의지가 아님
III. 충성된 자들의 은총
A. 함께 거하게 하심
- 거한다: יָשַׁב(yarhab), שָׁכַן(shakan), גּור(guhr)
- 함께 거주함: 친밀+사랑+운명
- 가장 큰 복: 하나님이 함께 하심
-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마1:23)
B. 당신을 섬기게 하심
- ἐλειτούργει (erhareteyni) ⇒ שׁרת(sharat): 섬기다
- 충성의 결과 이 세상의 번영이 아님
- 그것이 동기될 때 섬김은 충성 아님
- 섬김 자체 안에서 하나님 즐거워함
IV. 적용과 결론
- 충성된 자 앞엔 수많은 난관이 있음
- 그것을 이기며 살게 하는 힘: 관계
-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뤄지게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6) 2014. 02. 26 수요예배
< 충성된 자와 안식>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 (출 33:14)
I. 본문해설
- 백성들의 죄와 모세의 기도
- 안식이 없었던 모세의 일생
II. 위기속에 올리는 기도
- 심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 자신의 은총으로 공동체 섬김(12)
- 모세의 세가지 간구
A. 갈길을 보이소서
B. 은총을 입게 하소서
C.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III. 하나님의 응답
A. 하나님이 동행하심
B. 그것이 모세에게 쉼임
IV. 적용과 결론
- 끊임없는 간구로 나아가라
- 간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김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7) 2014. 06. 25 수요예배
< 환란은 충성을 입증함 >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I. 본문해설
- 환란과 궁핍이 특징인 교회
- "여호와의 총회"(민20:4) 유대인 무리들이 복음과 교회를 박해함
- 빌라델비아와 함께 칭찬받은 교회
II. 환란에 대한 경고
A. “장차 받을 고난들”
- 사랑하는 교회에도 고난주심
- 징계 이상의 더 큰 계획이 있음
- 믿음, 하나님과의 관계 드러내심
B. 마귀의 시험
- 복음을 대적한 유대인들을 사용함
- "감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복음의 능력, 악인들에 현시않음
- 믿음의 반응있는 자에만 나타남
- 악을 당하게 하심과 의존하게 하심
C. 교회의 환란
- "너희가": 환란의 공동체적 성격
- "십일 동안"(1) 짧음(2) 뜻하신 날
- 환란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게 하심
-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의존케 하심
III. 충성과 상급
A. “충성하라”
- "네가": 그리스도의 몸, 환란 당하나 믿음에 부요함
(하늘자원주심)
- "충성하라": 어떤 일에 대한 헌신이라기보다는 관계에 대한
헌신임
- 단순한 열심 아닌, 사랑/정절요구
B. “생명의 면류관”
- 그리스도 통해 누리는 신적관계
- "하나님 앞에 살게 함": 힘과 영광
- 지상의 명예와 행복 이상의 영광임
IV. 적용과 결론
- 공동체와 함께하는 믿음을 입증함
- 하나님 앞에서 힘과 용기 얻게 하심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8) 2014. 07. 02 수요예배
< 버시처럼 >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롬 16:12)
I. 본문해설
- 57년경 제 3차 전도여행의 끝 무렵
- 고린도에서 기록한 듯 (롬16:1)
- 선교계획과 구원교리를 가르침
- 서신 끝에 34명의 이름들 언급됨
II. 바울의 동역자, 버시
A. 사람됨과 섬김
1. 많이 수고한 사람
- ekopiasen<kopos 고된 일, 고난
- 넘치도록 고난 받으며 수고한 사람
2. 주 안에서 섬긴 사람
- en kyrio 그리스도/통치주안에
- 사랑과 연합+그리스도 은혜통치
- 인간적 끌림과 사람 앞의 헌신 아님
3. 사랑받은 사람
- agapeten: 수동분사 hasid 동치어
-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사람임
- 충성과 사랑 받음 갈등관계만 아님
B. “버시”라는 이름
- persida<persis에서 유래: 여성
- 페르시아의 노예들의 흔한 이름?
- 세상의 미천한 자였으나 사랑받음
III. 적용과 결론
- 충성은 진실한 인격 안에 더욱 빛남
- "하나님께 경건하고 우리에 친절" 암브로시우스에 대한 Aug의
회고
- 사역과 함께 빛나는 사랑의 인격을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9) 2014. 11. 05 수요예배
< 충성과 낙담 >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수 14:8)
I. 본문의 배경
-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사
- 요단 건너 여리고 6장, 동맹군 격파 10장, 가나안 정복 및 분배
11~21장
- 그니스 사람 갈렙이 산지를 요청함
- 85세의 가나안 원주민 출신이었음
- 약 45년 전 가나안 정탐시절 회상함
II. 갈렙의 회상
- 각 지파에서 지휘관 파송 정탐케 함
- 삼무아, 사밧, 이갈, 호세아, 발디, 갓디엘, 갓디, 암미엘,
스둘나비, 그우엘‥잊혀진 이름들
- 주의 맘에 남는 자와 잊혀지는 자들
- 에스골의 포도송이, 석류, 무화과
- 절망: 성의 견고함, 큼, 아낙자손
- 갈렙 "조용하게 하고 이르기를‥"
- 소리 높여 통곡하고 운 백성 Nm 14:1
III. 충성된 자는 실망치 않음
A. 마음이 다른 사람 (민 14:24)
- 낙담한 백성들과 다른 마음을 가짐
-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의 연합
-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 능력에 있음
- 마음이 다른 사람은 얼마나 적은가
- 환경과 상황을 통해 마음이 드러남
- 자신에게도 감췬 마음을 시험하심
B. 하나님을 온전히 따름 (민 14:24)
-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분별하라
- 제 희망사항을 주의 뜻으로 분장함
-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행 13:22)
- 주의 마음이 앞서고 그것을 따른 삶
- "다른 영을 가져 나를 온전히 따름"
- "다른 영" 악령과 마귀 아닌 온전함
C. 여호와께 충성함 (수 15:8)
- 충성한다는 것은 흔들림 없는 사랑
- 요동하지 않는 사랑의 비밀은 연합
- 충성은 인격의 오랜 결합 사랑 결과
- 야망이나 사역의 성취감 아닌 사랑
- 사랑하는 자의 기쁨이 삶의 보람임
- 전능하신 주께 대한 신뢰 없이 불가
- "백성들의 간담 녹게 함": 10대 2표
- 주님 수중에 있어 버림받지 않음 앎
IV. 적용과 결론
- 충성을 시험으로 입증해야 할 때 옴
- 하나님과 사랑의 연합 속에 산 자들
- 사람 때문에 충성한 것 아님을 보임
- 충성하는 자들을 남몰래 위로하심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10) 2014. 11. 12 수요예배
< 아멘과 충성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계 3:14)
I. 본문해설
-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의미들
- 교회 상태를 진단하고 격려하려 함
- 그에 앞서 예수의 자기 계시 제시함
- 라오디게아 교회의 부요함과 나태
II. 아멘과 충성이심
A. 아멘이신 예수
- "아멘"의 의미와 말씀 성취로 오심
-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오심
- "아버지의 뜻 따라 대속" (갈 1:4)
-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 주의 뜻
- “어찌 전통으로 계명을" (마 15:3)
- 주기도문 가르침 "뜻이 이루어짐"
- 십자가 죽으심과 세계 경륜의 성취
- 그 뜻을 "다 이루었다" (요 19:30)
B. 충성이신 예수
- 아멘이 그 분의 삶의 목표를 보여줌
- 충성은 아멘 이루신 삶의 방식임
- 성도로 살며 두 가지 경계해야 할 것
- 포괄적 헌신과 감정적 헌신에 만족
- 아멘이신 예수 별명은 충성이었음
- 오랜 사랑에서 빚어진 인격적 특징
- 단순한 사랑 아닌 삶으로 뻗쳐진 힘
- 충성스런 삶이 아름다운 영혼 보존
-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예수를 생각함
III. 적용과 결론
- 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사람의 순종
- 아멘 없는 헌신은 자기 성취의 발로
- 헌신 없는 아멘은 자기 기만의 고백
- 존재와 삶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 주의 뜻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 삼음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1
충성된 자의 행복 1 (2013.04.10.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2 (2013.12.04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3 (2013.12.18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4 (2014.01.29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5 (2014.02.05.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6 (2014.02.26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7 (2014.06.25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8 (2014.07.03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9 (2014.11.05 수요예배)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10 (2014.11.12 수요예배)
충성된 자들의 복됨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28:20)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짧다고 해서 진리가 적게 담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 한절 중 일부를 여러분에게 설교함으로써 충성된 자들의 복됨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잠언과 시편에서 잘 사용하는 문학적인 기교 가운데 하나는 대조법과 병행법입니다. 즉, 두 사람이나 두 사실들을 대조하여 A는 A'하고 B는 B' 하다고 대조를 이루고 그래서 짝을 이루게 해서 발전하거나 반복하거나 상승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이 시나 지혜서들이 잊혀지지 않게끔 우리들에게 생생한 기억을 남겨주는 기법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는 충성된 자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충성된 자’는 하나님께 충성된 자이고 이러한 사람들은 복이 많고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삶의 특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충성된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그 마음을 가지고 자기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사람, 결국 이 두 가지가 나뉘어질 수 없는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충성된 자’와 대조되는 자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Ⅱ.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
우선 ‘속히 부하고자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초점이 충성된 자의 초점과 다릅니다. 그래서 초점이 자신의 만족입니다. 모든 초점이 자신의 만족이고, 오늘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결국 그 물질을 사용해서 현재적으로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고 내일의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물질을 통해 보장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속히 부하고자 하는 동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를 자신의 행복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세상의 부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까 육체는 이 세상의 자원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없이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따라 살 수 없으니까,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육체는 도구가 되지만, 그것이 즐겁고 행복한 것이 진정한 복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결국 충성된 자와 대조를 이루고 그는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예화) 모든 사람들이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면 반드시 범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서브 프라임 사태’가 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사니까 잘 모르지만, 한번 다큐멘터리에 보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고 적금 들 듯이 그렇게 주식을 사서 모으면 그저 노후가 보장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월가의 탐욕으로 인해서 한 번에 다 날아가 버리고 결국 퇴직을 하고 머리가 하얗게 된 할아버지들이 주유소에서 기름이라도 넣어 주어서 돈이라도 벌고 먹고 살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일자리가 없고 집은 차압당해서 길거리에 쫓겨나 다리 밑에서 살거나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사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누군가가 속히 부자가 되려는 탐욕을 발동시킬 때 자신도 불행해 지고 다른 많은 사람도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충성된 자’와 대조가 되는 이 사람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그 결과가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형벌을 면할 수 없으리로다.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따라서 결국 그들의 신실하지 않음이 드러나 외면을 당하고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의 인생관이고 삶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사람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충성된 사람입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라고 했습니다. 이 ‘충성되다’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이쉬 에므노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직역을 하자면 ‘신실함들의 사람’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에므노트’라고 하는 단어가 복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아멘이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습니다. 그래서 ‘아멘, 아만, 에메트’는 진리, 혹은 신실함입니다. ‘암’은 ‘아므나’, ‘견고하다, 충실하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된 자는 결국 삶의 초점이 자기의 만족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그 누군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이 임금이면 임금, 하나님이면 하나님, 직장의 상사면 상사, 무엇인가 자신이 모든 마음과 뜻을 다해서 성취되기를 원하는 그 목표 자체가 자신의 안일이나 만족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높은 자기 바깥의 어떠한 가치에 자기를 합치 시킨 결과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충성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똑같이 자기만을 위하는 이욕에 빠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누구든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만족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성향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고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남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Ⅲ. ‘충성된 자’
A. 하나님의 성품을 앎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데서 충성스러운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품, 죄인인 자기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그 후로도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매 순간 붙들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있는 이 모든 인류를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 세상의 인류와 교회,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성품을 앎으로써 결국 충성하게 되는 것이니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충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충성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성, 충성은 순종은 노예적인 두려움에서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드리는 그러한 강요된 복종과는 다릅니다. 자율적인 인간의 마음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의 삶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가장 자신이 행복한 삶이라고 믿을 때 비로소 충성스러운 삶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된다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이렇게 강력하게 호소하고 외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올바르게 알지 않고는 하나님 마음에 있는 계획을 따라서 기꺼이 살아가고자 하는 충성된 마음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겠습니까? 오늘 새벽, 어제 새벽에도 제가 설교 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럴 필요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우상을 섬김으로써 재앙을 면하고 이 세상의 번영의 복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우상을 섬겨서 자기가 고상한 사람이 되고 지적인 사람이 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아주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고상한 욕망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긴다기 보다는 우상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번영을 위해서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이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지적하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우상은 자신 속에 있는 탐심을 투사시켜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면 우상을 섬겨서 복을 받으면 복을 받지도 못하겠지만,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상을 섬겨서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해야지만 그것이 가능해지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시고 우상보다 능력이 있으시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서 복을 받고 그래서 부자가 되고 번영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러면 우상이 싫어하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처럼 진노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우상은 나중에 가나안에 가서 만나거나 출애굽 해서 만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답이 쉬운데 왜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이 심지어 죽여 버렸습니다. 생명을 무릅쓰고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께 복을 받지 우상을 섬겨서 복을 받으려 했던 이유는 결국 무엇입니까? 그게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보다 훨씬 쉬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은 자기에게 아부만 하면 복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우상은 재물을 가지고 올 때, 이게 어떻게 번 돈인가. 과연 이러한 제사를 드릴 자격이 있는가. 이 제사가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한 것인가 하는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냥 떼거지로 몰려 밥을 먹지 못해 걸신들린 귀신들입니다. 파리 떼처럼 덤벼들어서 빨아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도덕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그냥 이 모습 이대로 나가서 신들에게 복을 달라고 빌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를 드리면 껄덕 거리면서 “아, 정말 배가 고팠다. 이거라도 주니까 고맙다.” 이러한 것은 귀신이지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면 “제사드릴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반성해 보라. 심지어는 네가 제사를 드리는 것 때문에 정말 괴롭다. 너는 정성껏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는데 너는 제사를 드릴 자격이 없다. 이제껏 살아온 삶이 제사에 합당하지 않다. 네가 진정으로 제사를 드리려면 회개하고 돌이켜서야 한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초점이 자기에게만 맞춰진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최근에 여러분이 너무너무 하기 싫은 일인데 하나님이 그것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한 적 있습니까? 일평생 사는 동안 한두 번도 못해 보고 죽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예화) 그게 여러분 밥 먹는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최고로 싫어하는 음식이 브로콜리였습니다. 왜 먹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파 대가리 같은 것을 어적어적 씹어 먹는데 씹히는 질감부터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항상 무엇을 먹을 때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의 선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집안은 암의 가족력이 있습니다. 할머니, 고모, 아버지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거나 혹은 암에 걸리셨습니다. 항상 긴장을 합니다. 그리고 요새는 환경이 엄청 나빠지니까 4명 중 1명은 암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대학원에 있을 때 교수님이 자기 집에서 공부하자고 불렀습니다. 교수님 집이 미군부대 안에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공부를 하고 제자들 왔다고 밥 사주겠다고 하면서 나오셔서 미군부대 뷔페에 갔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담는데 교수님이 접시를 들더니 브로콜리를 하나 가득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왜 그렇게 많이 담으시는지 물었더니, “김 목사, 이거 몰라서 그렇지. 정말 몸에 좋은 거야. 미국 사람들이 꼭 먹어.” 그리고 파란 브로콜리 말고 하얀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몸에 좋다고 하시면서 가득 담으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따라서 몇 개 담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 부터는 먹으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맛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한 두 개씩은 담습니다. 그게 오랜 세월이 걸려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20년전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좋은 것은 못하게 해도 하고,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절대로 안 합니다.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예화) 요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매년 소금을 과다 섭취하기 때문에 250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짜게 먹는가 하면 아침 식사 안 하고 회사에 나와서 김밥 한 줄과 컵라면 하나 먹습니다. 하루 나트륨 소비량의 1.6배가 들어간 것입니다. 1.6배. 그렇게 먹고 하루 종일 소금 안 먹어도 그 사람은 이미 과다 섭취가 되어서 건강의 위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컵라면 국물이 맛있다고 원샷을 합니다. 그것은 정말 소금을 들이 붓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으면 큰 일 납니다. 그렇게 광고를 하고 수없이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소금 푹 넣어서 짭짤하게 해서 먹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당장 좋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자기가 좋으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지 않고는 결코 그 분께 충성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옛날에 한번쯤 하나님 안 사랑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옛날에 사랑한 하나님 요즘도 계속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 사랑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우리의 심령 속에 다가오지 않으면 우리들이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신 안에 무엇인가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영구적인 인자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휘필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는 것 같으면 자기가 회심한 교회의 의지를 찾아가서 의자에 키스를 했다고 합니다. 입을 맞추면서 아, 여기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셨구나. 휘필드가 어려서 웨이터를 했습니다. 인기가 짱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하고 흉내를 잘 내고 하니까 술집에서 온갖 동네사람 흉내를 내며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술집 웨이터 하면서 살다가 죽을 쓰레기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감격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지면서 충성된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도록 주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이! 도전하고 힘을 주고 그를 자극할 때에 정동이 일어나면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이미 도달했고 주님의 은혜가 없어도 내가 능히 하나님을 위해 충성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이 붙잡고 있으실 그 때에만 주님의 사람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충성된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누구신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자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B. 은혜 속의 사명을 발견함
두 번째는 은혜 속에서 사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는 것이지만 목적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의 질서가 그렇습니다. 여기에 꽃이 있는데 왜 가져다 놓았겠습니까? 심심해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예배 시간에 설교자가 못 생겼으니까 옆에 꽃이 있으니까 혼돈을 일으켜서라도 설교자가 조금 이렇게 덜 그래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무엇인가 목적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여러분이 이른 아침에, 심지어 밤에 뒤척이는 몸의 움직임도 목적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허리가 아프니까?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였더니 피에 다리가 몰리니까 어디에 높이 올려보려고 서로 남의 허리에, 엉덩이에 올려놓는 것 아닙니까? 목적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쓸 데 없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큰 은혜를 죄인들에게 부어주실 때 그리고 그를 죽었던 자리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아 주실 때 그의 영혼에 큰 복을 부어 주셔서 새 삶을 살게 해 주실 때 어찌 거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의도가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 그래서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이 처음부터 은혜를 못 받아서 그저 은혜가 무엇인지 사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안 되긴 했지만 원래 안 된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관심 자체가 그 은혜를 하나님이 그렇게 주셨으면 받은 바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부르심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을 따라 살면 그 은혜가 계속 우리 안에 풍성해 집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죄를 죽이는 삶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좋아하는 환경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풍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은혜를 받으면 자기만족적인 영성으로 사용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금새 부패해 버립니다. 얼마나 가겠습니까? 말씀이 이러한 것이구나. 하나님이 날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그렇게 감탄만 하고 자기 만족을 누리는 것이 몇 달이나 가겠습니까? 짧으면 두 달, 길면 6개월. 경험상 그렇습니다. 길게 가지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속에서 나같은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이 무슨 경륜인가. 어디에 쓰시려고 나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주시지만 거저 주신 그 은혜 안에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그 것을 따라 순종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계속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무위도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려면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목표에 도전해서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 자기의 끊임없는 한계를 느끼면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절실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침대에 놓았다가 소파에 엎드렸다가 바닥에 누웠다가 리모콘을 들고 TV를 보는데 자기가 체력이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무리 체력이 나빠도 거기에서 그저 돌쩌귀를 따라서 문이 도는 것처럼 침상에서 구르는 일이야 웬만하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중병 든 사람들이 아닌 한. 그러나 이제 자기 체력이 얼마나 저질 체력인지 일어나서 달리기라도 해 보고 아니면 유격 훈련이라도 가서 해 보면 자기 체력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삶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충성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C. 구체적을 삶을 재편함
마지막 세 번째는 구체적으로 삶을 재편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삼는 생활에서 돌이켜서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집에 불이 났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나오겠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불이 막 나는데 무엇을 가지고 뛰어 나오겠습니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뛰어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가 사랑하면 집문서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 아이 끌어안고 뛰어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누라를 사랑하면 마누라를 업고 뛰어 나올 것입니다. 마누라가 더 튼튼하면 영감을 업고 뛰어 나올 것입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떤 책에서 오래전에 한번 읽은 글인데 피아노를 치는 여성인데 그렇게 피아노를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젊은 여성이 피아노를 끌고 나오는 것을,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무 그 피아노를 아끼니까 괴력이 순간 발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혼자 있는데 불이 났을 때 무엇을 가지고 뛰어 나갈까?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나 혼자만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 있다가 불이 나면 책이라도 소중한 것 몇 권 가지고 뛸지 모르겠지만, 뭐 그렇게 아까운 것이 있겠습니까?
결국 충성의 최고의 조건은 자기가 충성하는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 그것이 결국 충성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구체적으로 삶을 재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어떤 것들은 희생시키지 않고는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다르게 어떤 일에 있어서 진보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삶을 재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많은 요인들이 생겨도 그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힘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만 잘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수없는 장애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핑계가 별로 없습니다. 핑계가 없습니다. 핑계가 많은 사람들 중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은 복이 많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복은 ‘베라코트’라고 하는 복수로 나옵니다. 얼마나 복이 많으면 하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인 은혜의 복과 물질과 우리의 현세의 모든 삶을 전부다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성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섭리의 복도 주십니다. 충성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의 조종 장치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명이 이것이고, 나는 이 일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 일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미끄러지고 다른 길로 가지 않을 수 있는 조종 장치가 되어주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고 하나님 앞에 새 힘을 얻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사람, 그러니까 충성할 사명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구약 시대가 신약 시대로 변하고 그리고 오늘날에는 신약 시대 중에서도 말세를 사는 시대가 되었지만 변함없는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에게 충성된 사람들 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편이 아니라 계산하는 사람 편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며 주님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리며 사는 사람들의 기도에는 그렇게 살지 않는 기회적인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영혼의 힘, 기도의 은혜, 하늘을 향해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간절한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모두 버리고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고 불러주신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간절한 바람이고 충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셔서 그래서 당신 앞에 충성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한된 인생, 제한된 시간을 주셨습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가 하루를 살아간다 하는 것은 죽음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고 어느 날 때가 오면 불연 듯 우리의 인생이 끝날 것이고 인생이 끝나지 않아도 말할 수 없고 노래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고 전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할 수 없도록 그렇게 우리의 모든 신체의 기능이 상실되는 때가 옵니다. 그렇게 보면 이렇게 주님을 위해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때도 그저 장마철에 햇볕처럼 참 10분이지 우리의 젊음도 우리의 건강도 육체의 모든 것도 다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이라 일컫는 이 날에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아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충성된 자는 낙심치 않음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수 14:8)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이 본문은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된 후에 가나안을 함께 정복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정복의 두 영웅이 있었는데, 모세를 이은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또 한 사람이 바로 유다 지파의 갈렙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민수기 13장 6절에 보면 이 갈렙은 열두 지파 중 유다지파에 속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나스 족속이었고, 그나스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싸워야 했던 원주민으로서, 창세기 36장 11절에 보면 에서의 자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갈렙은 가나안 정복의 영웅이었지만, 원래 혈통적 출신으로는 가나안 원주민의 혈통이었고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이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받아들여졌고 어쩌면 조상들이 애굽으로 끌려와서 거기에서 노예살이를 하다가, 이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자손에 합류하였을 수도 있고, 그 전에 조상 때부터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혈통적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으로 맺어진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개방적 선교적 구조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여호수아서 32장 12절에서 보면 그나스 족속의 사람, 여분네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름까지 기억되는 것으로 보아서 조상도 이미 이스라엘 공동체 속으로 들어온 지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자신의 기업으로 산지를 구하였고, 그리고 그 산지를 주면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정복을 하겠다고 할 정도로 아주 이 믿음이 충만하고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II. 가나안 정탐 보고회
그가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지만,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13장과 14장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까지 왔을 때 이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냅니다.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선발이 되어, 스파이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형편과 군사력과 지형을 알아오도록 보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을 빼 놓고는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이 아주 비관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정말 아름다운 땅이었는데, 아주 몹쓸 땅이라고 혹평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가나안을 정탐하였을 때, 오랜 전쟁과 모든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력으로는 저 가나안 원주민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만약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쳐들어가면 저들의 손에 모두 찢겨 파멸될 것이라고 하는 패배할 것이라고 하는 판단이 이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거짓보고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제 그들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진 놀라운 문명을 가진 장대한 민족인지 설명을 하고, 그 땅이 악하다고까지 이야기 했으니 백성들은 이에 대해서 크게 낙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간담이 녹아내리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A. 이스라엘의 불신앙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이들은 통곡하였고 신앙이 없는 절망 속에서 마음은 강퍅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자기들과 지금도 함께하고 있는 그것을 보면서도 신앙이 사라지자 절망에 이르게 되었고, 이때 그들의 마음은 매우 강퍅해져서 미래를 향한 불안, 과거의 약속에 대한 망각, 그리고 현재적으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대적을 하면서 모세에게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큰 원망의 말을 쏟아놓으면서 그들은 다시 지도자를 세워 자신들이 떠나온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B. 정탐자, 갈렙의 신앙
그러나 정탐자인 갈렙의 신앙은 이들과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거짓된 보고를 듣고 밤새도록 소리 높여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 앞에 엎드려 있을 그 때에,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그들 가운데서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통분히 여기는, 말하자면 마음의 표현이고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의 탄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회중에게 말하였습니다. 정탐의 진실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땅은 쓸모없는 악한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매우 아름다운 땅이며 그래서 거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실만한 훌륭한 영토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기만 하면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반드시 그 원주민들을 꺾고 인도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의 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 갈렙은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갈렙이 열 명이나 되는 비관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 그 이야기를 듣고 심히 통곡하며 울고 있는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단호히 떨치고 일어나서 이렇게 그들의 불신앙을 통분히 여기며 정탐의 진실을 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강하게 확실할 수 있었던 동기에 대해서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이 이 갈렙으로 하여금 정탐의 진실을 말하게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통분히 여기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Ⅲ. 충성된 인격의 특징
여기에서 우리는 충성된 사람의 인격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A. 섬기다 낙심치 않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충성된 사람은 결코 섬기다가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을 정하고 그 길로 행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결심하고 뜻하는 바가 선한 것일 때에는 언제나 그 선한 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그 결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일 것 같으면 그러면 더더욱 난관과 시험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버리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난관과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그 사람이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대도 이러한 시련과 고통, 커다란 역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련과 역경, 환란과 어려움들이 섬기는 중에 누구든지 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생애 동안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던 사람 중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평탄한 길을 걸어가고 잔디밭에 뛰노는 것처럼 유쾌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죄 가운데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평화가 없는 것이 이 세상의 본질일진데, 하물며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면서 사는 이 모든 무질서한 세상에서 그 창조의 목적으로 자신이 돌아갈 뿐 아니라 이 모든 만물들을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웃들을 그 목적으로 데려가려고 할 때에 이러한 시련과 난관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주 뜻을 세우며 주님을 섬기던 모든 사람들의 삶은 시련과 역경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니 우리처럼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실 이유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벌 받아야 할 일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분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음성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멀리 떠나 제 마음대로 돌아가면서 그러면서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온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눈물 없이 우리들이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고난으로 가득 찬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던 사람으로서는 모세를 가리키고, 예수님은 신약에서 모세에 의해 그림자처럼 예표 되었던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계획을 위해서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하였던 아들로 묘사합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집에 충성하였던 종이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충성하였던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은 그 예수님의 별명을 ‘충성된 증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이요, ‘충성’이셨습니다. 그랬는데도 예수님의 생애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으로 얼룩졌고 마지막 한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신 그 분은 십자가에서 원수들에 의해 못 박혀 고난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이유가 예수가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뒤잇는 것이라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 시대와 조금도 다름없는, 어떤 의미에서 더 악해진 이 세상에서 우리도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낙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선한 일을 하다가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는 상황을 만나면서 절망으로 다가가는 것이 낙심입니다. 그래서 이 낙심은 결국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커다란 작용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면서 어떤 사람을 희망을 갖는 해석을 내리고, 어떤 사람은 거기에서 절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의 정탐꾼들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보고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이었습니다.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었고 이미 성 위로 마차가 지나가고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의 두께를 지닌 성벽을 건축하고 자기의 요새를 삼던 발달한 문명을 가진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이스라엘 열 지파 사람들만 본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도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얼마든지 낙심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이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왜 입니까?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기심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고자 하는 죽는다고 하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이기심에서 사욕을 좇으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지만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꺼이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갈렙은 충성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똑같이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도 그 사람들처럼 낙심하는 대신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낙관적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섬김 속에는 항상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 하나의 계산이 더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면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아직 젊었고 힘이 넘쳤으므로 새벽 기도 나오라고 아주 강조를 하고 매주 싫은 소리를 하다가 실패하고, 심지어는 평생 새벽기도를 하겠다고 하는 서약서를 받았습니다.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써낼 때는 막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써냅니다. 평생 새벽기도. 10년 작정, 평생 작정. 그런데 그 중 멀리 사는 지체가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나와라, 하나님께서 은혜 주셨으면 기도해야지. 가족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해야지. 새벽기도 나와라’ 그랬는데, ‘목사님, 새벽기도 나오면 저는 직장에 가서 죽습니다.’ 그래서 ‘살려고 기도하는데 왜 죽냐?’ 하니까 ‘밤에 10시 넘어서 와서 새벽에 왔다가 거기에서 그 먼 직장에 갔다가.’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도 한번 해 봐라’ 그때 은혜를 받았으니까, ‘네’ 그리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간증을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이 계산할 때에는 10시 가까이 집에 들어와서 씻고 책도 좀 보고, 그때는 교회 숙제도 많았을 때입니다. 숙제도 하고, 공과하고 그러고 나서 밤 12시 되어서 잠에 들어 그때 새벽기도가 5시였나, 5시 30분이였나, 지금보다 훨씬 일렀습니다. 5시간도 채 못자고 달려 나오고 직장에 가서 일하고, 그러니 뭐 지금 이것도 피곤한데 얼마나 고단할까 그랬는데 하던 이야기가 뭐냐 하면, ‘제가 그때 빠뜨렸던 계산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충성된 사람이 아니고는 이러한 계산법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새벽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가면 그렇게 마음이 상쾌하고 하나님이 육체적으로도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피곤해서 막 지쳐있는데 매우 기쁜 소식을 알려주면 그때 힘이 막 솟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기쁜 소식보다도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새벽에 받고 가니까, 이 속에서 막 기쁨이, 육체적으로 힘이 솟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 앞에 있는 난관을, 하나님 일하면서 만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게 해 주실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업이시고,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일을 건축에다가 비유한다면 그 하나님은 시공자이시고, 시공주이고 나는 그 공사판의 짐꾼에 불과합니다. 건물이 못 올라가면 속이 타는 사람이 짐꾼입니까? 아니면 시공주입니까? 그렇습니다. 건물을 지었는데 임금을 못 줘서 고소를 당하여 붙잡혀 가는 것은 시공주이지, 오늘 날품을 팔기 위해 들통을 매고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는 그의 집에 다만 종이고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이 일을 원하신다고 생각하면 우리 모두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을 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제가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담임목사를 서너 번 해보다가 이 교회를 왔다면 안 힘들었을 것입니다. 처음입니다. 처음. 그리고 이렇게 큰 교회도 처음입니다. 평신도 때나 교역자 때나, 제가 다녔던 교회 중에 제일 큰 교회가 600명 모이던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다 아는, 저는 그랬습니다. ‘교회는 왜 짓나. 그 돈 가지고 선한 곳에 사용하지’ 그런데 어땠습니까? 사람들이 넘치니까 교회를 지어야 하는데, 이리로 이사를 왔습니다. 땅을 사고 교회를 짓고 해야 하는데 돈 1500만원 밖에 없는데 이 땅을 계약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대책이 있습니까?’ 무슨 대책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시작하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 돈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활명수 박스를 사다놓고 일주일에 1박스씩 먹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뭐하는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돈이 없어서 결국 일이 잘못 되면 어떻게 하나.. 기도는 하면서도 노심초사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한참 많이 일할 때 70여명의 일꾼들이 일했으니까 품삯이 얼마나 많이 나가겠습니까?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탁 하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게 네 일이냐? 이게 네 일이냐? 시공주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생각하고 ‘나는 여기에 품꾼이다’라고 생각하고 나니까 한 순간 근심이 탁 하고 줄 끊어지듯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1억이 필요하대요, 2억이 필요하대요.’ 장로님들에게 전화 와서 산꼭대기 올라가서 한숨을 쉬고 돈이 없어도 ‘생길거야.’ 즐거운 마음으로 ‘생길거야’ ‘어떻게 해요?’하면, ‘난 몰라. 기다려봐!’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아무리 우리가 믿음을 가져도 어떻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다 보여주시지는 않습니다. 내일일은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니까 안 보여주십니다. 안 보여주시는 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모르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았는데 좋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니지’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잘못되는데 하나님을 왜 의지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이나 할 것입니다. 미리 당겨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서 딱 가려놓으시고 안 보여주십니다. 10초 앞도 안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충성된 사람은 섬기다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풀타는 확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매일 매일 붙들려 살 때에, 이 충성됨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충성은 한번 열받 아서 주님을 위해 이 한 목숨, 그러다가 그 다음날 ‘못 바치지’ 그렇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계속 유지될 때 충성입니다. 인격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종종 우연히 악을 행할 때가 있고, 악한 사람도 엉겁결에 좋은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엉겁결에 좋은 일을 한 그것을 우리는 선한 인격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사명을 인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 사는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은 생일 축하할 때 ‘생일 축하합니다.’ 그렇게 불러주면 안 됩니다. ‘왜 태어났니?’ 그렇게 불러줘야 합니다. 그것을 먼저 알아야지 생일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할 일도 모르는 게 왜 태어났니?’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먹고 있고 마시고 이 세상에서 편안히 사는 것이 사는게 아니라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뒤 흔드는 어마어마한 일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작은 일이라도 섬기면서 살아서 티끌만큼이라도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예쁘게 만들면서 살아가는 삶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라 믿는 사람들은 생일축하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Happy Birthday to you’입니다. ‘네가 태어나서 내가 기쁘다’. 그리고 ‘네가 태어났으나 너도 기뻐하거라.’ 왜 입니까? 우리같이 들풀의 이슬같이 살아갈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나라를 티끌만큼이라도 수종 들게 하셨으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그러니까 생일을 너도 기뻐하고, 우리도 기뻐하자. 그럴 이유가 있다. 그런 뜻 아닙니까?
그래서 섬기다가 어려움이 올 때, 그 때 비로소 누가 충성된 사람인가, 누가 충성된 사람인지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 충성됨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옛날에 충성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이지만, 옛날에 그랬으니까 그것으로 옛날의 삶을 살았고, 오늘은 옛날의 충성심이 아니라 오늘날의 충성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두 가지가 없으면 절대로 충성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계를 움직일만한 어마어마한 일을 맡겨 준다고 해서 사명감이 커지고, 작은 일을 맡겨준다고 해서 사명감이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인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그 존귀함을 반드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명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 그래서 어떠한 때에도 그것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충성되게 살아가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이라고하는 의식은 포괄적인 인식이 있고, 개별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포괄적인 것은 뭐냐 하면 어떠한 삶의 모습을 하든지 공통적으로 통용되어야 할 사명의식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십자가 사랑으로 구해 주셨구나. 일생 동안 나는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우리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포괄적인 사명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고 구체적인 것이 없으면, 이것은 연애 감정인 것입니다. 연애 감정. 연애 감정이라는 것이 좋은 뜻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한번 젊은 사람들이 찻집에 앉아서 막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여성이 ‘아, 나는 무슨 영화 보면서 그 사람에게 반해 버렸어’ 하는 것입니다. 만나지도 못한 사람을 어떻게 화면에서 보고 반해 버립니까? 사람 향기가 나니까 반하든지 말든지 하지, 그렇게 말을 요즘에는 그렇게 경박하게 말을 사용하는가 봅니다. 보지도 못한 그 사람은 자기 같은 사람에게 관심도 없을 텐데, 세계적인 배우가 관심이 있겠습니까? 반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포괄적인 사명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래서 선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예수 안에서 재창조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정의 주부로, 그리고 구역장으로, 아파트 줄반장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그 포괄적인 목적을 지금 그렇게 아내로서 아파트 통장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구역장으로서 그 속에서 실제적으로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평생 하나님이 그 세 가지 일만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을 높이실 수 있고, 낮추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평촌에서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 갈 수도 있고, 뉴욕으로 이민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든지, 거기 가면 뉴욕으로 이민 간 사람을 하나님이 열린교회 구역장을 시켜 주시겠습니까? 거기에서 무슨 LG아파트 3동 두 번째 줄 줄반장을 시키겠습니까? 장소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다른 일을 맡겨 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개별적인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계속 바꾸시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러한 사명을 개별적으로 오늘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인식하면서 현실 속에서 그 포괄적인 사명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명에 대한 인식이 또렷하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명이 교회를 관리하는 직원이라고 할 때, 망가진 곳이 없이 교회가 언제든지 쓰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교회 방송시설을 관리하는 직원이라 할 때, 언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명료하게 전달이 되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내년에는 5년 후에는 하나님이 어디로 보내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사명에 관한 또렷한 인식, 그것과 함께 매일 매일 그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사랑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 매일 내 안에서 새로워질 때 그 때, 우리는 섬기다가 낙심치 않는 것입니다.
B. 사람들에 희망을 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충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셔서 가나안 땅을 주셨고 여기까지 데려 오셨고 우리와 동행하셨고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뢰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하여 일하는 주체이시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사심을 버리고 당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10명의 정탐꾼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까? 불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불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심기가 허약하고 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호도하고 사실을 뒤엎고 거짓을 만들어 내어서 함께 있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게 실망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확 임하여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들이 끌려가서 얻어맞고 핍박을 당하고, 그럴 때에도 교회에 돌아와서 그 핍박을 받은 것을 보도할 때에 끝나고 나자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지축을 뒤 흔들었고, 그리고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충만해 지게 되었습니다. 왜 입니까? 핍박을 받고 고통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보고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이렇게 핍박을 당하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강한 성령의 능력과 담대함으로 힘입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이야기 하는 것과 낙심하고 실망해서 계속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보면 그래서 대게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들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낙심시키고 하는 것은 대게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 충성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종종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큰 뜻을 세우고 일할 때, 따르는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그 길로 가도 괜찮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해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으로 돌아가서 ‘돈 1500만원을 가지고 이 엄청난 사업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우리를 설득시켜 보십시오.’ 라고 한다면 저도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로는 설득할 수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는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이 보다 어려운 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설득이 되는 것입니다. 이심전심으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모른다고 봅시다. 그래서 맨날 부르는 찬송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이고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된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넘어지게 만들었고 그 후로 40년이 조금 안 되는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그 애굽을 떠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시체로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사람이 절망할 때에도 아주 작은 점 하나를 보며 응시하다가 절망하고 소망을 갖을 때에도 작은 것 하나에 집중하면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분투하면서 사느라고 고난은 받지만, 마음이 이 절망과 어두움으로 썩지는 않습니다. 왜 입니까? 거기에는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확신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고 행하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충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나 한 사람이 충성스럽게 살면 수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불충하게 살면 절망과 좌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영혼들에게는 주님의 살아계신 놀라운 증거가 아주 빨려 들듯이 스며들지만 상하고 변질된 영혼에게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가슴에 스며들어서 그의 마음을 썩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당신을 믿어도 충성된 사람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볼 때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향해 충성된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위로와 사랑, 그리고 그 험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승리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힘을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을 맡겨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줄을 알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 온전히 굽히지 않는 온전한 꿋꿋함을 가지고 그 일을 감당합니다. 그러니까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래서 온전한 인격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았을 때에는 괜찮았던 사람들이 무엇인가 일을 맡겨 주었더니 거칠고 무례한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못 맺는 가운데서 은혜의 공급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세상일 하듯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거칠어지고 영적으로 무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포기할 수 없는 이 일을 위해 충성하다가 그 만나는 어려움들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가운데 점점 더 점점 더 온전한 인격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안에서 충성하였던 사람들은 노년에 아름다운 영혼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온화한 인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충성이요 헌신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기뻐하셔서 낙심하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맡겨 주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낙심하지 않고 온전히 헌신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는 일꾼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 25:13)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잠언은 이야기로 된 책이 아니라 짤막짤막한 경구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그래서 오늘 13절에 나오는 내용도 앞뒤 문맥과는 별로 상관이 없이 마치 삽입된 것처럼 충성에 관한 경구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지혜자가 많은 사람을 거느려보고 또 자신도 일을 하면서 충성된 일꾼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그를 통해서 일을 시킨 사람들이 얼마나 큰 유익을 얻는지를 체험한 데서 우러나오는 경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에게 적용시켜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 분의 일꾼이라고 하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될 때 하나님의 마음도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시원하게 되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에는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당신 홀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그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완전하고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개척하고 또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성된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아름다움의 현실성뿐만 아니라 또한 가능성까지 주셨고 현실성은 하나님 한분에 의해 나타나지만, 가능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얼마나 이 세계를 가꾸느냐에 따라서 이 세계는 더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덜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II. 사람을 통해 일하심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일반적인 문화,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도 언제나 당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고, 당신이 이 일을 이루시지만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이 일들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추수하는 날 얼음 냉수 같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자는 히브리말로 ‘찌르’라는 단어인데, 주인에 의해서 특별한 임무를 받고 파송되는 그러한 신분이 있는 종입니다. 그래서 사신, 혹은 왕이나 주인의 메시지를 가지고 전달하는 메신저, 이러한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매우 특별한 임무를 띠고 혹은 주인의 어떤 의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보낸바 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무 쓸모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하나님이 그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발견한 그것을 잘 이루려고 애쓰고 힘쓰며 살아가는 생활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인생을 보람 있게 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모두 당신을 대신하여 일하는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전도지를 들고 뉘 집의 대문을 두드리고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거기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교회에서 영혼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거기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목회로부터 시작해서 교회 식당에서 설거지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뜻과 의도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려고 거기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무위도식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넓게는 이 세상 모든 인류를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도록 살아야 하고, 보다 더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익을 주는 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 타락한 그 인간들 중에서 우리를 선택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것,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의도에 맞도록 섬기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러니까 무위도식 하는 삶은 가깝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모욕하는 것이고, 멀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래서 짐승 같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죄짓고 악을 행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짐승 같은 생활이 아닙니다. 짐승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엊그제도 멧돼지 한 마리가 뛰어 나와서 병원에까지 들어가서 환자들을 물고 그랬다고 하는데, 그게 몇 사람입니까? 그런데 사람은, 제가 아는 어떤 한 분이 연세도 많으셨는데 그 분 취미는 밤에 혼자 등산을 하는 것이랍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10시 혹은 11시에 기사보고 이 산에 내려달라고 해서 6시에 저쪽 반대편으로 데리러 오라고 합니다. 누구랑 가는가 했더니 혼자 간다고 합니다. 혼자 밤새도록 5시간, 6시간씩 산행을 하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진짜 무서운 것은 사람인데, 그 밤에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진짜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목표 없이 사는 것이 짐승같이 사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만 있습니까? 맛있는 음식 먹고 편안하게 자면 만족입니다. 그런데 짐승은 그런데, 인간은 그것보다 조금 더 무엇인가를 원합니다. 더 달콤한 음식, 더 달콤한 음악, 배만 부르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더 달콤한 것도 먹고 싶고 그 다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싶고 향락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말이 내가 죽어도 테이프를 통해서 계속해서 전 세계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그 소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테이프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너무 불행한 삶입니다. 젊어서는 그러한 생각 없이 살지만, 나이 들은 다음에는 목표가 없이 일생을 산 다음에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무위도식 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언제나 그 목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이 뒤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좋으니까 선한 목표를 한번 정해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그 목표를 정하자마자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초만 되면 사람들이 이런 저런 결심을 아주 많이 합니다. 그래서 헬스클럽의 회원들이 제일 많이 등록하는 때가 1월이랍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사람들이 1년 치 끊고 한 달, 두 달 나오다가 안 나오는데 그 사람들 때문에 먹고 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100명이 등록해서 100명이 다 나오면 100명밖에 못 받을 텐데, 한 30명, 20명도 안 나오니까 나머지 자리를 또 팔고 또 팔고 그러는 것입니다. 성경도 항상 창세기부터 그날 시작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 금년에 한번 못 읽으신 분들 많지 않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결심은 합니다. 언젠가 한번 새벽기도 작정을 합니다. 이번에도 교역자 중 한 사람이 새벽기도 작정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할 수는 있습니다. 하면 뭐 합니까? 지키지 않는데. 옛날에는 평생 새벽기도 작정을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작정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은커녕 요즘도 안 나옵니다.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 결심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선한 목표는 언제나 어려움을 동반하고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가치 있는 것만큼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희생입니다.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일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살면 됩니다.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난 본성을 가진 인간은 그렇게 안일한 삶을 사는 것이 누구나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연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삶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가, ‘참 어쩌면 저렇게 충성스러울까? 요즘 같은 시대에 저런 젊은이가 어디 있을까? 야, 정말 변함없이 충성되구나’ 그것은 그날 결심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충성은 인격적 특성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어루만지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이기고 극복하면서 살아간 치열한 삶의 과정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된 인격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뒤집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태도가 그 사람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어떤 사람이 하면 그 사람이 일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일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위도식하는 사람에게는 영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한 어떠한 영적인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성경적인 목표와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고, 또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빈둥거리면서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마치 안락하게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갑옷을 입힌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할지 생각하면서 옷을 입습니다. 쓰레기나 치우고 흙이나 파야 되겠다고 하는데 예쁜 투피스에 모자까지 쓰고 리본까지 달고 삽 들고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작업이 있구나 생각하면 허름한 바지에다가 춥지 않게 단단히 입고 목도리 두르고 실장갑 끼고 나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그렇게 일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나태하고 무책임하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 자신이 가장 커다란 피해자입니다. 그렇게 일을 몇 년 하고 나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충성된 사자’라고 되어 있는데, ‘충성되다’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네에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충성스럽다’, ‘royal' 이러한 단어가 아니라, ‘trustworthy', ‘믿을만한’ 그런 뜻입니다. ‘믿고 무엇인가 맡길 만한’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신실한. 조금 다르게 번역한다면 충직한, 그러한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하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줄까 하는 것은 아직 모르지만 그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할 때, 그 사람과 많은 교제의 경험을 통해 성품을 읽은 것입니다. 어떠한 성품을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 잘은 일에 신용을 잘 지키고 신실한 사람은 그 사람은 믿을 만한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신문에 여러 해 전에 글을 썼습니다. 무엇인가 고발하는 내용이 아니라 어느 회사를 아주 칭찬하는 글을 썼습니다. 무엇인가 읽어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손목시계를 샀습니다. 명품 그러한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국산시계를 5-6만원 주고 샀을 것입니다. 그것을 차고 충청도 어디엔가 가서 낚시를 했습니다. 산지 6개월 되었는데 하도 낚시를 한참 하다가 시계를 보니까 시계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이 다 떨어졌나 생각해 보니까 약을 넣은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래서 전화를 했답니다. 믿지는 셈 치고 시계 회사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무슨 시계가 산지 6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 아무리 국산이라지만 이렇게 멈추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항의를 했더니, 정말 죄송하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했답니다. 지금 전화 거시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까 어디 어디에 내가 와있다고 말했더니 오전에 전화를 했는데 오후에 충청도까지 직원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계를 고치고 가는 것을 보면서 너무너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한국 기업 가운데 아직도 이러한 기업이 있구나. 10만원도 안 되는 시계를 팔고 그 직원이 내려와서 시계를 고쳐가지고 갔으면 그 회사는 무엇이 남겠습니까? 너무 이 사람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 회사 이야기를 아주 감동적으로 썼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업을 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밝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trustworthy', 믿을만한 회사입니다. 정말 믿을 만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변함없이 충직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혁혁한 무슨 성과가 있고 사람들 눈에 보이는 어떠한 업적이 있고 심지어는 학벌이나 지위나 이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일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섬기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일에 대한 태도와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다르게 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너무 일에 미치거나 일 자체가 주는 목표와 기쁨에 심취하다가 보면 그야말로 일 자체가 그에게 목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워크 홀릭’이라고 부릅니다. 일 중독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충성된 사람은 충성되게 일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은 뭘 맡기도 그것을 믿을만하게 그것을 처리합니다. 오늘은 충성스럽게 일하다가 내일은 간신배가 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 속에서 하나님을 늘 만나고 하나님의 도우심에서 감격하면서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은 대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소수의 사람들만이 일을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소수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너무 관조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올바르게 행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은 떼어놓을 수 있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렇든 상관이 없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온전한 그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가끔 교역자나 누군가를 쓰기 위해 이력서를 받아보면 일 년에 한 번씩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뢰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항상 물어봅니다. ‘왜 교회를 떠났습니까? 왜 이렇게 교회를 자주 옮겨 다녔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목표는 언제나 어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에 변함없이 충성스럽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충성스러운 인격을 가졌다면 그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어려움과 싸우면서 인내해온 이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충성스러운 인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더욱이 그 하나님의 일은 영적인 어려움 까지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단순히 돈 가지고 사업을 하고 사람을 굴려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씨름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충성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냥 하는 인내가 아니라 영적인 싸움을 승리해 나가게 만드는 그러한 종류의 인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러한 모든 어려움 속에서 인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굳세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임하면 우리는 언제나 굳센 사람들이 되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꽉 붙들면 그 때 비로소 주님 앞에 가졌던 우리의 올곧은 의지가 그 올곧음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지금 충성스러운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오랫동안 모든 어려움과 싸우며 인내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인내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끊임없이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한 사람이 진정한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운동선수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만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피눈물 나게 연습을 하고 시합에 임할 때는 덜 먹고 많은 운동을 해서 체중을 조절하고 한 많은 날들 동안 자신의 훈련과 극기의 과정이 있고 난 후에야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보면 스케이트 선수들이 아주 선전을 하였는데 그 중 여 선수 하나를 눈 여겨 보게 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니까 얼마나 잘 타지 않겠습니까? 몸에 딱 맞는 경기복을 입고 스케이팅을 하는데 보니까 자매 다리가 연약한 형제 허리 만합니다. 근육 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서 스피드와 추진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날씬한데 다리는 완전히 연약한 형제 허리 만했습니다. 거기에서 파워가 나오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나 이상화 선수 다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서 힘이 나옵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졌겠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분투하면서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집을 못 간 것도 억울한데 나는 구원을 못 받았나, 그게 아니라 여자가 시집을 가서 애를 낳고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기르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면서 결국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구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연단을 시키실 것입니다. 그런데 시집가서 애를 낳고 그 아이를 길러 보면서 자신이 부모한테 얼마나 못된 자식이었는가 배우고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만듭니다. 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인내를 더 이상 못 하거나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견디다가 보면 이 속에서 반감 같은 것이 드는 것입니다.
(예화) 선교사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탈북자들 사역하는 선교사를 만났는데, 북한을 탈출해서 접경 근처에 있으면 선교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소문을 듣고 선교사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오게 되면 이들은 나돌아 다닐 수가 없습니다. 밖에 나가면 잡혀서 송환되면 그야말로 죽음이니까 말입니다. 방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쳐 주는 것도 1-2시간이지 24시간 같이 사는데, 그러니까 항상 선교사가 들어온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너 여기 오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다 해주는데 그 대신 예수 잘 믿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 두 번째 조건은 네 마음대로 중간에 못 나간다.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가 하면 성경 100독 한 다음에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성경공부를 가리킨 다음에 남는 시간에는 성경을 읽히게 하고 기도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100번 성경을 읽는 과정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 사람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악 물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품게 되는 사람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할 때에 어떤 마음으로 거기에 임하게 되느냐에 따라서 이러한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매 순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미루지 않고 자기의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기 위해서 분투한 올곧은 의지가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충성스러운 사람이 될 때 그 때 그에게 무엇을 하나님이 맡기시든지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잘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이러한 사람들은 주인에게 어떤 마음인가 하면 ‘추수하는 날의 얼음 냉수와 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추수를 해 보셨습니까? 저는 농사짓는 시골에서 살았지만 농사는 안 지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 추수 봉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여러 해 다녔습니다. 가을에 직장에서 침침한 건물에 앉아서 사무 보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확 트여진 들판에서 낫으로 벼를 베는 것이 너무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매해 다녀오면 그 다음날에 몸살이 났습니다. 정말 거저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뭐냐 하면 허리를 굽히고 이것을 써는데, 그 때에는 기계도 없고 손으로 그것을 하는데 줄을 맞춰서 가지 않습니까? 내가 요령을 피우면 다른 사람은 저 만큼 가는데 나만 이만큼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이 많이 남겨 놓고 갑니다. 일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바짝 달라붙어서 줄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허리를 못 피겠는 것입니다. 허리를 한 번에 한번 펴면 진도가 안 맞습니다. 그러니까 딱 구부리고 앉아서 계속 벼를 베는데 여기에는 물집이 생기고 여기에는 벼 이삭에 손을 자꾸 베입니다. 이것이 도시에서 곱게 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쉼 없이 일했는데 노동양이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벼 베기 하면 밥을 네 끼 내지 다섯 끼를 줍니다. 간식까지 포함해서. 아침에 가서 9시에서 10시 반만 되면 휴식하고 먹을 것을 줍니다. 추수는 햇볕이 바짝 나는 날에 하지 않습니까? 벼를 쭉 널어놓아서 쫙 말라야지, 비가 오면 썩으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해가 바짝 나는 날만 추수를 합니다. 목은 타들어가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휴식 합니다. 술 먹는 사람들은 막걸리를 먹고 그렇기 않은 사람들은 얼음을 띄어서 시원한 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간식이고 뭐고 그것이 제일 맛있는 것입니다. 시원한 냉수. 그래서 실감이 절절히 납니다.
그런데 사실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냉수’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 보충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 주인의 마음에 마치 추수하는 날에 눈의 시원함 같아서’ 우리말에는 그러한 표현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얼음냉수’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추수해서 막 갈증이 나고 쓰러질 것 같은 그 때에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빙수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발을 먹고 나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아마 그 어떤 것도 이 시원함을 대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에 충성된 자는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되어가는 당신의 일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주에 설교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방황하는 무리를 보시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장면이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많아도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드믄 것입니다. 어쩌다가 그러한 사람을 만나시면 주님이 그에게 무엇을 주셔도 아까울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 모를 때에는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 주님을 알았으니 일생동안 주님을 섬기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인데 그러면 그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주님은 얼마나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고, 그렇게 충성스러운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을 것인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Ⅳ. 적용과 결론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든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웃 중의 어떠한 사람들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충성스러운 인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치고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늘 눈물을 흘리고 불타는 목표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치열한 삶이 그 사람을 충성스럽게 진실하게 헌신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충성스럽게 살아가면서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이 매일 매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진실로 충성스럽게 살아가서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충성스러운 자의 특권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1-8)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는 동안에 겪었던 불신앙과 불순종, 이것을 다루고 훈련하셨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민수기 12장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구스 여인과 결혼한 모세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구스 여자는 아마도 본처인 십보라가 죽은 후에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여기 본문에 나온 구스 여인일 것으로 추측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에티오피아 여인이면 함족 계열이고, 결국 까만 피부를 가진 흑인이었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이스라엘 회중 속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여인의 아버지 혹은 조상이 먼저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은 후에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에 소속되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혈통이 이어져 나왔기 때문에 아마도 이 여자도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땅에서 탈출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 말고 중다한 잡족들이 따라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 수만 많다는 것이 아니라 족속이 여러 종류의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서 출애굽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애굽의 10대 재앙을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었고,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혈통을 향해서 열려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나 그때에나 하나님의 국가의 개념을 혈통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모세가 또 한 번 결혼을 했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이 재혼 뿐 아니라 일부다처제를 기뻐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묵인되던 때였습니다. 십보라가 살아있었다 할지라도 이 결혼은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제까지 늘 모세 옆에서 왼팔과 오른팔처럼 사랑하고 협력하였던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게 되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본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다민족 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들이 이미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이스라엘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그들을 결코 차별 대우 하지 않고 율법의 모든 약속들의 유업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신앙의 양심에 자신의 행동이 추어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을 받을 때 모세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세가 비방을 받을 때에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들 보다 더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모세에게 어울리는 성격은 아닙니다. 다혈적이고 폭력적이고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연단 속에서 다듬어지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추어에 부끄러움이 없었더니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의 온유함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결국 이 갈등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점점 크게 확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말하자면 배반이나 혹은 이렇게 지도자에 대한 대적은 거기에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높은 지위에 세우신 사람들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그 책임이 막중한 것입니다. 결국 이 갈등이 잠자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갈등한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미리암과 아론은 바로 모세와 출애굽의 모든 역사에 동참하고 더욱이 미리암은 모세가 바로 공주의 집에서 잘 양육 받아서 이스라엘을 위한 지도자가 되도록 도운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사람의 편견에 붙들리게 되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소명과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배신하는 편견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II. 갈등하는 자들을 부르심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을 다른 곳이 아닌 회막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회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히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회막이라는 이 용어, 히브리어로 ‘모에드’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성경을 잘 찾아보면 이 회막이 한 가지 뜻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 이 회막은 성막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9장을 비롯해서 수백 개의 성경 구절에 나오는 대부분의 ‘회막’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언제나 가지고 다녔던 이동식 성전인 텐트로 된 성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동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고, 그러면 그 텐트를 모두 거두어서 포장을 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규례에 의해 그것을 매고 이동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지정해 주시는 장소에서 멈출 때가 오고 그러면 제일 먼저 성막을 펴고 열두 지파의 진이 그 성막을 에워싼 형태로 진이 쳐져서 약 250만-300만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생활하면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성막이 이전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회막’은 그 성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막’이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창세기 33장 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을 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니라’ 하였습니다. 성막은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진 한 가운데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성소는 언제나 정중앙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창세기 33장 7절의 회막은 진 저 바깥에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유하게 있는 제사를 올리는 성막이 아니라 특별한 필요에 의해서 모세가 성막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회막을 이스라엘 진 바깥,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바깥이니까, 진으로부터 뚝 떨어진, 오늘로 말하면 도시에서 뚝 떨어진 외곽의 한적한 곳에 텐트를 쳤던 것입니다. 이 텐트를 광야 생활 내내 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모세가 기도하러 올라간 사이에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께서 매우 진노하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시고 모세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을 걸고 살려달라고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면서 이 백성들과 내가 사자를 보내어 이 백성들을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가지 않겠다. 그리고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모세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였을 때 커다란 회개와 각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단장품을 다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을 때 모세는 이 회개의 운동이 몇 시간 혹은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일이 아닌 줄을 알고,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면 기도의 은혜가 꽉 차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지 않고는 진에 돌아가 차마 잠들 수 없고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저 바깥 먼 곳 한가한 곳에 텐트를 치고 거기에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거기를 찾았던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인 위기의 때에 특별한 영적인 부담감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을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던 사람들, 이 사람들을 가리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텐트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회막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민수기에서 회막 앞으로 그들을 부르신 것은 두 번째 의미가 아니라 첫 번째 의미인 성막 자체를 가리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하면서 회막 앞 이라는 단어를 쭉 찾아보니까 회막 앞에서 굉장히 거룩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공격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였습니까? 지도를 그려놓고 제비를 뽑아서 각기 정복이 끝나면 지파별로 어떻게 땅을 나눌지를 제비를 뽑습니다. 그 제비뽑기를 바로 성막 앞, 회막문 앞에서 하였습니다. 회막문 앞은 짐승을 죽여 희생을 드리는 곳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나 모세에게 특별히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을 때 즐겨 사용하시던 곳이 바로 회막 앞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곳에서나 나타나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만나는 곳을 지정하시고 거기에서 그 백성들을 만나기를 즐거워하십니다. 교회가 바로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는 장소가 거기에서 신전 의식을 느끼고 거기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거기에서 말씀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에게 베푸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벅찬 가슴으로 찬양하는 장소가 바로 교회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Ⅲ. 충성과 특별한 교제
A. 하나님과의 교통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직접 모세를 대적하던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자, 모세가 왜 너희들보다 탁월한 지도자냐,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셨기 때문이지?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특별히 받는 사람이지? 그래서 너희와는 다른 영적인 지도자이지?’ 그 대답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일 것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말씀이고 주님이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말씀해 주신 신령한 교통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말에는 무슨 뜻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모세가 너희들보다 특별한 지도자라면 즉, 하나님이 특별한 계시를 모세에게 주셨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라면 우리도 그러한 계시를 받고 그러한 교통을 하나님과 누렸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권위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많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이 미리암과 아론의 이야기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이 문제를 재판하실 이유가 없으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것도 갑자기 나타나셔서 말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의 교통의 수준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은 미리암과 아론에게 설득 당하였느냐.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내가 지금 진실을 말할 테니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판단하거라.’라는 의미입니다. 너희 중에 분명히 선지자가 있다. ‘있으면’이라는 말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제나 선지자들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다, 그들은 나 여호와의 계시를 특별히 받기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 여호와는 그들에게 어떤 때는 환상으로 나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또한 꿈에 나타나서 나 여호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시구나.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것을 원하시는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너희에게 전달해 주어서 너희들은 그들의 말을 순종함으로 나의 인도함을 받아온 것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은 바로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린 선지자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또 다른 수준의 교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무슨 뜻입니까?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환상이나 꿈으로 주로 교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직접적인 교통이 있었으니 그것의 특징이 세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대면하는 것, 명백한 것, 형상을 보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대면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에서도 영어와 똑같습니다. ‘face to face'입니다. 그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이야기 하는 것이 대면입니다.
(예화) 오늘 신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 대면결제가 아닌 것은 반드시 본인에게 통보해 드리겠다고 나왔습니다. 대면결제가 무엇입니까?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고 제화나 용역을 사고 그리고 그 값을 흥정해서 카드를 지불하고 돈을 내는 것이 바로 대면거래입니다. 그런데 어느 출판사나 혹은 물건 파는 곳에 내가 한번 거래를 합니다. 그 다음에 전화를 해서 나 고객 아무개인데 무슨 무슨 물건을 보내 주시오, 그리고 결제는 이미 알려준 그 카드를 하시오 해서 결제를 하는데 이것은 대면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리암, 아론과 같은 선지자들과 다르게 모세는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구약에서는 선지자의 비조입니다. 고조할아버지입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봉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지자가 시작된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비조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후에 나타나는 그러한 낮은 권위를 나타내는 선지자와 모세의 영적 권위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은 자주 모세를 예수님과 비교를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입법자는 모세, 신약에서 새로운 율법을 세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비교를 하고 모세는 구약의 여호와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종으로 섬겼던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죽기까지 충성하셨던 분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신약시대에 사도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요 더 큰 일을 행하셨다고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신 후 정말 사도들이 열렬히 복음을 전파하고 헌신하여 예수님보다도 더 위대해 보이는 일을 해서 선교의 세기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의 권위 관계도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모세가 하나님과 교통한 수준이 미리암과 아론 같은 선지자들의 수준이 아니었다고 못 박으면서 그들에게는 도저히 없는 첫 번째 특징을 대는데 그것은 대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대면하여 말한다는 것은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얼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교통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면하여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빛을 비추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심판해야 할 죄인들을 대면하여 책망하십니다. 그때 죄인들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애들이 엄마, 아빠 모르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꾸 슬슬 피하고 눈을 못 맞춥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경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친근히 하고 싶으신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비추어 그들과 대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그 자신도 그 만남을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대면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암과 아론은 아무리 많은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에 관한 꿈을 꾸었다 할지라도 또 음성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세가 누렸던 것과 같은 친구와 대면하여 말하는 것 같은 그러한 친밀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서 모세와 미리암과 아론과 같은 일반 선지자들을 구별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거나 꿈으로 그에게 말씀하시면 그 다음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한 것과 같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처음 받을 때 분별력이 없었던 사람들은 그 환상을 보고도 그 환상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그 보자기가 열리더니 율법에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벌레 같은 것들이 막 나오고 하늘로부터 그것을 먹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탁월한 사도도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 성령의 감화를 받고 난 다음에 ‘아, 이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선물로 주어진다.’라는 뜻을 깨닫고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편견이 산산이 깨지면서 복음의 우주적 성격을 확인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환상과 꿈은 언제나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올바르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올바르게 꿈에 나타나서 메시지를 주셨는데, 그것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은 왜곡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을 잘못 전할 가능성이 언제나 선지자들에게는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명백함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대면하셨을 뿐 아니라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명백한 말로 하나님이 모세와 교제하셨던 것입니다. ‘말한다’라고 하는 것은 소리를 내고 공기를 울려서 음성으로 전파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말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의 형태가 아니라 ‘명백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보태시기라도 하는 듯이 그 말도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고 해석이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모호한 언어가 아니라, 그래서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점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나눈 교통은 미리암과 아론이 속한 일반 선지자들의 교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수준의 것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정말 해석하기 어려운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를 찾아보십시오. 33장 2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는 살 자가 없음이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0-23). 이 말씀도 이해가 안 되는데 신명기 4장을 찾아보십시오. 신명기 4장 15절입니다. 모세 자신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고 나옵니다. 4장 15절은 이해가 됩니다. 백성들 너희들은 형상을 못 보았다. 그런데 사실 어디를 보아도 모세가 하나님의 형상을 봤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 하나님께서 ‘형상을 본다’고 하시는데 그 형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해석이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이 부분을 성경에 기초하여 최대한 성경에 가깝게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이 된다고 봅니다. 우선 첫째 출애굽기 33장 23절의 이 사건이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이 있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손은 어디 있고 얼굴은 어디 있고 등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모양을 가지신 분이 아니신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신인동형적 표현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가 있는 그곳에 임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나타나는데 그 장소적 임재의 영광이 너무 찬란해서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영광이 너무 찬란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뵈올 수조차 없는 엄위와 찬란한 광채의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이 백성들을 가나안 땅을 주신다 하셔놓고 하나님께서는 안 가시고, 임마누엘은 안 해 주시고 사자를 보내어서 그것을 가나안 땅을 주시면 그 하나님의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다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다시 말하면 용서해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해 달라고 목숨을 걸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았다’ 하시며 허락해 주십니다. 모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확증을 보여 주십시오. 증명해 주십시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모세의 이러한 간청을 보면서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너는 내가 해 주겠다고 하는데 못 믿느냐, 이렇게 책망하시는 분위기가 아니고 그것을 오히려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의 믿음입니까? 이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원합니다. ‘저,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걱정 하지마. 내가 도와줄게’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그 일이 큰 일 같이 생각이 안 됩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사람이 그 약속을 실행하고 하지 않고 하는 것이 나의 인생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일 때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여기에 그렇게 꼭 해 주신다고 써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저 사람을 갑자기 믿을 수 없다는 의미라기보다 너무나 간절히 그것을 원한다는 표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다. 기드온과 양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표징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면서 그것을 당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나의 영광의 일부를 보여주마. 너는 내가 지나갈 때 내가 너를 큰 손으로 바위에 숨기고 그래서 내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지만 내 등은 보여줄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죄인으로서 감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 중 그 진수는 차마 볼 수 없고 그 약간의 흔적을 너에게 보여 줄 테니 그것이 내가 너에게 은총을 베푸는 확증 징표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징표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유산을 실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결혼을 하기로 했다고 할 때 다 주는 것이 아니라 반지를 주면서 ‘받아라. 내가 너를 데리고 간다’ 하면서 끼워줍니다. 그것을 보고 징표로 삼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큰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러면 결국 이것은 형상을 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물리적인 어떤 형상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저의 해석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은 무슨 뜻이 되는가 하면 미리암과 아론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환상을 보거나 꿈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이것은 모두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들인데 모세와는 하나님이 친밀하게 대면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 의한 혹은 자신에 의한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해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도 명백히 깨달을 수 있는 메시지의 수여방식과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에 대한 다른 선지자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이러한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무엇인가 저 사람이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신비한 것들을 굉장히 많이 봤는데 그런데 교만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저 사람과 대화를 하고 교제를 해 보아도 저 사람이 영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그러한 신비한 세계를 본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보다 아주 돈독하고 깊은 신앙을 가진 것 같은 사람을 만난 적 있지 않습니까? 저는 참 많이 만났습니다. 특히 신앙생활 몇 년 했을 때 그 때 열심히 기도원 다니고 했으니까 만났었습니다.
(예화) 21살 때 기도원에 갔는데, 회삼하고 나서 막 불 붙어서, 몇 번 이야기 한적 있습니다만, 기도원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3시간 30분 만에 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어느 집사님 한분이 저를 보더니 한참 쳐다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성격이 활달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가만히 앉아 있다가 조용히 기도하러 갔는데 그때 무지무지 추웠던 때입니다. 바위 위에 앉았는데 입술의 침이 얼어붙을 정도로 그렇게 추웠습니다. 한 시간쯤 기도하다가 들어와 불 쬐고 가서 기도하고 했는데 막 쳐다보더니 그러는 것입니다. ‘이보게 청년, 자네는 가까운 시일 내에 두 여자 때문에 시험에 들겠어.’ 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까? 그 말이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 확인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두 여자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면 더 일찍 장가를 들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저 분이 내가 못 본 세계를 봤을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동의가 다 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신비한 세계나, 은사에 대한 경험 자체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을 바꿔 놓지 못합니다. 그 사람을 바꿔 놓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 대한 경험입니다.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일본사람의 속성이 그래’ 등등 이야기 합니다. 신학적으로 ‘속성’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성품이지만,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어떤 성향이라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빼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 그러한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속성간의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분이시고 영원한 분이시고 신실한 분이시고 하니까, 영원, 신실, 정의, 자비, 이러한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은 하나님, 완전하지는 않으신 하나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은 없으신 하나님,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리켜서 속성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니까 유혹이 흔들어도 마음이 흔들리기는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라는 생각이 드니까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 똑같은 말은 아니지만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신비한 체험이 그 사람을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체험이 그 사람을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자의 신령함은 하나님의 속성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할 때 이 지식이 우리의 삶의 모든 방향을 결정하고 이 지식이 우리에게 그 지식이 요구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4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준엄한 책망을 이스라엘에게 하시는데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 여호와도 너희를 버려서 다시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지식이 산수, 사회, 일반지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은 하나님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 결국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을 때 갑자기 확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속성이 나에게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경험이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속성만이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인간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셨는데 그 사랑이 시간과 공간 속에 어떻게 펼쳐져서 나타났는가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을 때 그렇게 되는 일이 없고 고통스러웠구나. 그때 승승장구 하면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테니까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을 계속 막으셔서 고통을 받았구나.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셨구나 이렇게 하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나타나는데 이것이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할 때,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절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지식을 절대로 모르면서 하나님을 확 직관해서 ‘하나님 안에 사랑이 있구나’ 이러한 식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시간과 공간이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속성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속성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실행되는 방식으로서의 지식은 결코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생겨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지개처럼 확 뻗혀서 쏟아져 나온 그 기록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그러면 거기에서 주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이 생겨나는데 이것을 우리들이 어린 아이의 수준의 말로 하면 ‘하나님을 만난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여기에서 미리암과 아론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의 형상을 보거늘’이라고 묘사하신 그것은 모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특별한 경험,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적 속성의 경험을 통해 신령해진 방식이 미리암과 아론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미리암과 아론은 꿈만 꾸고 환상은 보고 하나님의 속성은 추어도 경험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모세는 꿈이고 환상이고 다 필요 없고 언제나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만을 경험해서 두 사람들 사이에는 완전히 그렇게 계곡에 의해서 산과 산이 나뉘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분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한 그 깊이는 현저히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예화) 제임스 파커가 쓴 책 가운데 500만부 이상 팔려서 전 세계를 흔들어 놓은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책입니다. 꼭 한번 사서 읽어 보십시오. 도서관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처음 시작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스펄전의 설교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 설교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속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면서 탄식을 합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탁월한 속성의 묘사가 코에 솜털이 나는 어린 아이 같은 설교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 결정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성과 속성의 시행 방식에 대한 수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예화) 조나단 에드워즈가 예일 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숲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그 때 그 체험을 설교 시간에도 한두 번 인용한 적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시고 높고 위대하시고 자신은 정말 죄로 가득 찬 더러운 존재이고 모든 피조 만물들은 티끌 같다는 생각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커다란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이 두 개의 대조되는 말하자면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존재의 격차, 완전함과 거룩함의 격차가 압도하듯이 밀려오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한 없이 울었다’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뭐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눈물이 나고, 우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셨을 때에도 ‘뭐 좀 해 주십시오.’ 했는데 하나님께서 탁 해 주시면 기도 많이 하다보면 감격스럽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정말 티끌 같은 사람이라는 것,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함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만들지 않는 속성에 대한 경험은 없습니다. 언제나 무슨 속성을 경험하든지 속성을 경험하고 나면,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전체를 함께 통하고 있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떠한 속성을 경험하든지 간에 결국 그 나타나는 마지막의 결과는 거룩함이 주는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완전하신 분이시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지, 사랑해야지, 이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경험한 것을 은유적으로 여기에서 ‘나의 형상을 보거늘’ 그러한 심오한 속성을 경험하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깊은 세계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누렸던 놀라운 속성에 대한 경험이 이 신약 시대에는 훨씬 더 일반화되어 여러분에게 경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여자가 나은 사람 중에서 요한 만큼 큰 자가 없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는 크다.’ 이게 하늘나라 천국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은 구약시대 끝자락에 서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오실 그 성령의 시대가, 세례요한이 그렇게 위대하고 큰 사람이지만 그 시대 이후에 누릴 성령의 교통과 이것을 통한 하나님의 속성의 경험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으십시오. 우리의 억만 가지의 기도의 제목을 짜고 짜고 또 짜고 줄이고 줄이고 다 줄여서 하나로 행주 짜듯이 꽉 짜면 하나의 기도제목으로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옵소서’라는 제목으로 집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소원이 모든 우리의 일상적인 간구 속에 침투해 들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B. 충성하는 자의 특권
이러면 이제 특별한 교제의 수준들, 교통의 서로 다른 수준들에 대한 언급이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면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만 미리암과 아론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그러한 탁월한 수준의 영적인 교통을 주셨을까? 출애굽기 33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이야기 하시는 광경을 ‘친구와 같이 이야기 하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친밀하였으면 그 광경이 마치 아주 그리워하고 친한 친구가 나누는 것처럼. 하나님과 말을 텄다는 그 뜻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 있는 마음과 마음을 흐르는 연합의 정, 친구를 너무 좋아하면 연합이 되지 않습니까?
(예화) 어렸을 때 그런 친구 한두 명 없으면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인가 학교 지각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공부는 안 하고 노트 한 페이지에 가득 ‘김남준 김남준 김남준’ 그렇게 적어 놓은 것입니다. 연합의 감정입니다. 웃지 마십시오. 그 때는 진실하였습니다. 그리워하는 연합입니다.
그러한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모세와 대화하시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마음은 모세의 마음속에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스며들면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의 지도력을 세워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8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어찌해서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니느냐’ 여기에서 ‘종’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종’에 대해 말씀하실 때 크게 두 가지인데, 숙명적인 노예를 가리켜서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를 기억하라.’ 이것은 숙명적이고 패배적인 의미에서 종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나의 종이다’ 또한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종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겠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나의 종 선지자’ 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깊은 애칭입니다. 깊은 애칭. 그래서 뭐냐 하면 종들인데 두 종류가 있지 않습니까? 그냥 세경 받아서 챙겨서 떠나 버리는 종이 있고 어떻게 어떻게 신분은 종인데 결국 오래 살면서 주인과 가족과 방불한 사이가 되어서 주인의 슬픔과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 같은 가족과 같은 종이 있지 않습니까? 그를 향한 사랑은 아주 큰 것입니다. 가족보다도 더 큰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지지하시면서 ‘너희가 어찌해서’ ‘어찌해서’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하나님의 마음에 전혀 안 들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너희가 어찌해서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무서워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면서 거룩한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시고 그의 지도력을 굳건히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궁금증이 나옵니다. 이것은 균형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하나님 주권적인 의미에서 해석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셔서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가 그 속에서 윤리적인 교훈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제시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너희에게는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였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결국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면 주님의 주권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그러한 특별한 교제의 교통을 누리고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 그 지도력을 세워주실 만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놓였을 때 자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까지 걸면서 하나님이 이 백성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이 족속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간절히 매달립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충성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온 집에 충성함이라’ 하나님과 관련된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한 한 가지 일에만 헌신하였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탁월한 교통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그의 지도력을 위기 가운데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모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이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이 보편교회 어느 한 모퉁이에서, 우리와 교파가 다르고 신앙의 고백이 다소 상이할지라도 온전히 마음을 쏟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들 가까이 계셔서 그들에게 특별히 당신의 속성을 경험하게 하시고 당신의 지도력을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가 비난을 받을 때 보호하시고 시련을 만날 때 붙드시고 위기와 역경을 만날 때 보호해 주셔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각별한 도우심과 보호를 받으며 살게 하시고 원하지 않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의 다양한 국면들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그를 점점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무엇을 맡겨 주시든지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의 첫 번째 혜택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 속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아무렇게나 하면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면 하나님이 그렇게 충성스럽게 사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하게 하셔서 그래서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이 많고 무위도식 하는 사람보다는 말이 없이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깊이 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태하고 게을렀던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새로운 한해 정말 주님을 위해 무엇이라도 어느 한 곳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그 일에 충성하면서 주님의 속성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 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충성된 자와 온전한 삶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 101:6)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시편 분류상으로 본다면 이 시는 찬송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의 저자는 표제에서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이 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시속에서 노래하는 중심 주제는 인자와 정의, 곧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꿈꾸면서 시인이 이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온전한 삶을 살 뿐 아니라 자기의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온전한 삶을 살게 되기를 꿈꾸고 또한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한 나라의 정치가가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질서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산다면 그 나라의 백성들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6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다윗이 한 말씀입니다. ‘내 눈이 이 땅에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할 때 ‘나’라는 1인칭은 다윗을 가리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나라를 꿈꾸지만 자신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혼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자기와 똑같은 뜻을 품고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살 사람들 중에서 충성된 사람들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있다면 함께 그들에게 그들과 함께 할 것이고, 또한 자신을 우리말 성경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만 ‘따르게 한다’ 이것이 다윗의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한 다윗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충성된 자를 살핌
제일 먼저 이 시인은 ‘나의 눈이 충성된 자들에게 있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이런 나라를 만들고자 간절한 사모함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그러한 나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충성된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한 충성된 사람을 이 왕은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고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번영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많은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온 사면으로 살펴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자가 누구인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크게 세 가지 중요한 교리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A. 모든 사람들을 보심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왕의 눈이 충성된 자를 찾은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의 맡기신 사명을 따라서 충성스럽게 살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왕은 자신과 동일한 소망을 품은 사람, 즉 이 나라에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을 찾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사랑과 공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는 서로 상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정의를 무시하기 쉽고, 또한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쉽게 사랑을 무시합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랑은 짓밟히고 사랑을 부르짖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의는 침해됩니다. 이것이 이 세상 나라의 삶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죄에 대한 아주 민감함이 생겨납니다. 예전에는 죄와 악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죄와 악에 대한 개념, 양심의 바른 작용들이 아주 선명해 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악을 행하는 사람도 미운 것이 아니라 너무 불쌍하고 가엽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길로 돌이킬 수 있다면 자신의 좋은 것을 내어주더라도 기꺼이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에 대한 감각이 아주 또렷하게 살아나면서도 그 정의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보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악을 행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가 함께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그 정의가 사랑에 의해서 성취되는 그러한 나라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섬길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충성되기만 하면 사람이 보기에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찾으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 드러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살든지 결국 그의 마음과 삶은 하나님 면전에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선을 행하면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친절하신 하나님을 만나지만 스스로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지 악인도 의인도 누구도 하나님 면전 앞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났다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생각할수록 가슴 아파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람과 매우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보이지 않으시지만 안 계신 곳 없이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얼마나 진지하게 의식하느냐 그것이 어떤 영적인 감각 속에서 느껴지느냐가 신앙의 깊이이고 어떤 의미에서든지 한 사람의 영적인 깊이는 하나님의 면전 의식의 깊이를 제외하고는 언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다면 당신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그 피로 사신바 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얼마나 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긍휼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B. 충성된 자를 찾으심
두 번째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을 보셔서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당신 벗어나서 살지 못하게 하실 뿐 아니라 두 번째로는 당신이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중 충성된 자를 찾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나의 눈이 충성된 자들 안에(혹은 충성된 자들에게)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시지만 특별히 당신을 향해 충성된 사람들을 눈여겨보시고 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 ‘충성되다’라고 번역된 이 말은 사실 히브리 성경에 ‘네에메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만’이란 동사의 분사입니다. 이 동사에서 여러분이 매일 사용하는 ‘아멘’이라는 단어가 온 것입니다. ‘아멘’은 원래 히브리말입니다. 그것을 희랍어에서 소리 나는 대로 옮겼고 그래서 우리가 ‘아멘’ ‘아멘’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에서 ‘아멘’ 하면 ‘certainly-확실히’입니다. 놀랍게 이게 원래 의미가 ‘굳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여성형이 되어서 ‘오므나’가 되면 뜻밖에 유모라는 단어가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임지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니까 그들이 불순종하고 너무 마음 아프게 할 때에, ‘내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내가 이 백성들의 유모입니까?’ 이 때 나온 단어가 ‘오므나’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양육’이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원래 무슨 뜻인가 하면 ‘faithful, 신실한’이란 의미입니다. 우리말에서 충성된 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신실한 자들입니다. 그 다음에 또 무슨 뜻인가 하면 굳건한 자들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충성스럽다는 개념은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근무를 하거나 혹은 일을 한다고 할 때, 특히 군인이 군부대에서 군무한다고 할 때 긴 시간 동안 복무하는데 칼로 무를 자르듯이, 김밥을 자르듯이 탁 하고 어느 한 시점을 끊으면 분명히 그 순간에 형편없이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주 잘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실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헌신하며 사는 그것이 인격적인 특징이 된 사람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그러하기 때문에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물론 특별한 때에는 더 많이 헌신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늘 교회를 섬기지만 갑자기 교회에서 불이 났다든지 아니면 어려운 일이 생겼다든지 하면 휴일에도 나오고 아니면 밤중에라도 나오고 이러면서 사는 것은 우리들에게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사람 마음 자체가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은 아마 그러한 일을 안 할 텐데, 옛날에 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와서 축사를 하고 격려를 하였습니다. 그 때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이 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 육사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자기 아들도 육사에 다녔었습니다. 대통령이 왔다간 다음에 부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뭐냐 하면 온 산에 올라가서 군인들이 새카맣게 덤벼들어서 솔방울을 따는 것입니다. 소나무에 솔방울이 달려 있는 것은 은행나무에 은행이 달려 있는 것처럼 막 따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솔방을 다 따는 것입니다. 장병들이 사다리로 올라가고 나무위로 올라갑니다. 왜 그랬나 하니까 대통령이 지나가면서 ‘솔방울이 참 너무 많네’ 하면서 지나가더랍니다. 설마 대통령이 그것을 따라고 그랬겠습니까? 그것을 다 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대통령이 온다고 까만 아스팔트를 하얀 하이타이를 풀어서 그것을 닦는 것입니다. 차로 지나가는데 하이타이까지 풀라고 대통령이 그랬겠습니까? 더 재미있는 일은 보도블록이 약간 오래되었습니다. 구청에서 저 위쪽에 보도블록을 새로 깔았는데 밤중에 군인들을 동원해서 후진 것을 거기 다시 끼워 넣고 새것을 꺼내다가 갈아 끼우는 것입니다. 구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인들은 신경 안 씁니다. 순간을 탁 잘라놓고 보면 얼마나 사람들이 열심입니까? 어둑어둑할 때까지 올라가서 훈련 안 하고 다 솔방울을 땁니다.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어느 한순간에 예를 들자면 이 일을 열심히 해서 끝나면 휴가를 보내주마 그럴 때 밤새서 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군대에서 너무 급하면 그러한 당근을 겁니다. 오늘 새벽 3시까지라도 끝내라. 새벽 3시까지 계속 해서라도 이틀 만에 끝내라. 그러면 하루 외박을 보내주겠다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정신없이 헌신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충성은 순간의 발휘가 아니라 자신의 변함없는 신실한 성품이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데 그 됨됨이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성품,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래서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자기가 충성하고 있다는 의식도 없습니다. 그렇게 의식하고 있는 그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 어울리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과 안 어울리는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렷이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배추 장사가 배추를 파는데 기억에 남겠습니까? 배추 장사가 어느 날 장사가 안 돼서 똥을 팠다고 한다면 몇 월 며칠인지 또렷이 기억이 날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자신이 충성스럽게 일하지 않는 것을 항상 부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자신의 성품의 반로이기 때문에 충성하는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충성은 사랑으로 말미암는 일치와 그 사랑으로 말미암는 목표의 합치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빨리 빨리 전수를 받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들을 많이 느낍니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거기에서 하나님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느끼고 거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목표와 자신이 생각하는 목표와 언제나 일치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충성된 사람의 사람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자를 아주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로 충성스러우면 하나님이 물질이 부족하면 물질을 주셔서 건강이 부족하면 건강을 주셔서 자신의 재능이 모자라면 재능 있는 사람들을 붙여 주셔서 그래서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정말 놀라운 것이 무슨 일이든지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감당하려고 하면 수많은 간증들이 생겨납니다. 이 일을 내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증거를 여러 곳에서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섬기는 현장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밖에는 이 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예비해 주셔서 그래서 그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에 깊이 헌신했는데 섬기는 일이 너무 외로웠다고 하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대게 충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오랫동안 우리 혼자 했다고 칩시다. 사람은 나를 돕지 않아도 누가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찾으십니다. 유능하고 돈 많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만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C. 온전한 삶으로 입증됨
세 번째로는 충성된 자는 자신이 충성되다는 것을 온전한 삶으로 입증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라. 사실은 번역은 잘못 되었습니다. ‘따르리라’가 아니라 ‘섬기리로다’입니다. 6절이 틀렸으니 성경이 얼마나 틀린 곳이 많을까? 이것을 어떻게 믿고 읽을까 생각하지 마시고 인간이니까? 자, 그런데 그래서 이제 성경을 읽을 때 가능하면 좋은 영어 성경과 같이 읽으면 이런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이나 NIV 성경 같은 것들 핸드폰에 있지 않습니까? 다운 받아서 옆에 놓고 보면 아주 명확하게 잘못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충성된 자를 온전한 길에 행하는 자’라고 짝을 맞추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평행법이라고 합니다. AB, 그리고 똑같은 말을 A'B'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곳이 짝을 이루는 평행구로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충성된 자’ 이것은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 뜻이고, ‘함께 살게 하리니’ 이것은 ‘저가 나를 섬기리니’ 이렇게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는 이 땅에 충성된 자의 또 다른 국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함께 살게 하리니’는 ‘나를 섬기리니’의 구체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완전한’이란 형용사가 히브리말로 ‘타밈’이란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 아주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사실 이 성경 구절은 물론 ‘완전한’이란 뜻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온전한’입니다. 노아를 두고,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완전’은 상대적인 완전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완전한 사람일 수 없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너무 타락하고 악한데 비추어 볼 때에 노아는 그래도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뒤에 가서 실수 하는 장면을 보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 무색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때에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온전한(완전)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섬기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길. 온전한 길’ 성경이 온전한 길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는데 특별히 시편 119편에서는 완전함의 개념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따라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온전한 길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충성된 것이 어떠한 사람의 사람됨,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람됨이 하나님의 일과 연관시켜 생각할 때 발현되는 성품이지 않습니까? 충성된 사람과 농땡이 치는 사람 두 사람을 기도원 골방에 가만히 내버려 뒀을 때, 둘 다 같이 기도하는데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뭐 한 사람은 뭐 충성된 사람은 기도도 열심히 할 것입니다. 농땡이 치는 사람도 열심히 알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일에서 제외해 놓고 보면 사람이 충성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실 때 신실한 성품이 발현되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어떤지는 부딪혀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외국 사람들은 살아보고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유럽에는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겪어보고 실제로 부딪혀 보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깜짝 깜짝 놀란 적 없습니까? ‘아,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네? 굉장히 무섭다’
(예화) 여러해 전인데, 제가 아는 목사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장로 선거를 하는데 몇 년쯤 교회를 다니는 것이 좋겠습니까?’ 해서 ‘교회가 정하기 나름이지만, 교회를 옮기고 그래도 5년 정도는 지나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우리교회는 규정이 5년이라고 하였더니, 2년 반 된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너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고 봐야 할 걸.’ 그랬더니 ‘이 사람은 정말 좋다’는 것입니다. 너무 신앙도 좋고 인격도 훌륭하답니다. 그래서 장로로 세우고 싶다고 해서 그러지 말고 2년 반만 더 두고 보지 그렇겠냐고 했더니 ‘아니, 이 사람은 그래도 다른 것 같아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한테 물어봤으니까 하는 이야기 인데 나라면 2년 반 더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1년 뒤에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 사람의 새로운 변모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겪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관련될 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더군다나 돈이나 보상이 개입되면 측정 불가입니다. 돈이나 어떤 보상이 개입될 때에는 측정 불가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인지 측정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 사람의 사람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충성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열심히 일하는 것과 온전한 삶이 분리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너무 헌신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 일에서 떨어져 나와서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볼 때 너무 엉망인 것입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는데, 아주 가까이 있어서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 사실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멀리서 보면 오해를 할 수도 있고 사람이 뭔가 하나님 앞에 아주 훌륭하게 쓰임을 받고 교회에서 사랑을 받게 되면 시기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멀리 있을 때에는 이런 저런 잘못된 정보를 접해도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아, 그런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면서 정말 저 사람의 삶이 온전하구나 하는 것이 느껴져야 하는데 반대입니다. 멀리서 봤을 때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헌신적이고 희생하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는 도저히 저만큼 못할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나 아니면 사람 됨됨이나 그러한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품은 사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순들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매우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사람이 인격적으로 부실하면 그의 행위나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들을 전부다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과 온전한 삶이 분리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게 결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할 때 말하자면 이러한 격차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완전하지 않으니까 처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성화도 덜 되고 인격도 부족한 것이 많아서 이 사람 저 사람 부딪히기도 하고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화되고 생각도 넓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갈 때까지는 누구나 섬기는 것과 그 사람의 삶이 어느 정도 격차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온전한 삶이 계속해서 분리된다면 그것은 일의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인격적으로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오해를 받거나 혹은 모욕을 받을 때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느 한도만큼 견딜 수 있는 사람인가 알게 되는 것이지, 일하기 전에는 사실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일 하면서도 무수히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롭게 모든 일들을 잘 수행할 때 뿐 아니라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혔을 때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끊임없이 그 사람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세워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그 동기가 하나님 사랑인 사람들은 어떤 일들이 안 될 때 항상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그 일의 성취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핑계 댈 사람도 없고 원망할 사람도 없습니다. 왜입니까?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셨는데,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지, 너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놀라운 것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을까? 자신을 구원한 것을 생각할 때 큰 감사가 생겨나게 되고 언제나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때인가 하면 일을 하는 목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심히 일하는 것과 온전한 삶 가운데 현저한 불일치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성취되는 것이 꿈이고 거기에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랑은 의지의 합치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많은 사람들 중에 충성된 사람을 찾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삶을 보십니다. 여러분이 충성스러울 때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아니라 무위도식 할 때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십니다. 충성하는 사람도 하나님 면전에서 그냥 하나님 앞에 태만하게 사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어서 영적인 상태가 매우 나빠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충성된 사람은 그 충성이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 충성이라면 온전한 삶으로 그의 충성됨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면서 마음으로는 그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은 심각한 부조화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찾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사람들입니까? 정말 여러분에게는 눈을 감을 수 없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그러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가 있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섬기다가 불평하고 불만하고 그래서 태만하고 혹은 짐이 무거워서 아예 벗어버리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사랑의 부족 때문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사랑하면 거짓과 위선, 가식이 없이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그 대상을 위해서 무엇이나마 조금이라도 섬기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고 말할 수 없는 큰 영광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그 사랑의 대상이 불완전하고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보시고 모든 사람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더더욱 사랑은 충성을 불러 오지 않겠습니까? 헌신을 불러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길이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로 우리의 인생을 삽니다. 단연코 말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는 쉼도 필요합니다. 휴식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적절히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며 또 쉴 수 있을 때에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하는 일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있는 일이 있는가. 자나 깨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일의 목표, 그것이 크기와 종류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헌신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어떤 일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고 내 심장을 뛰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주시고 재능이 모자라면 재능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Ⅲ. 충성된 자들의 은총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어떠한 은총을 베푸시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함께 거하게 하신다는 것과 두 번째는 당신을 섬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A. 함께 거하게 하심
‘거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단어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세 개 있습니다. 그것은 ‘샤칸’이란 단어입니다. ‘샤칸’은 뭐냐 하면 일시적으로 있다가 그 다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장소에 특별히 당신이 계신 임재를 나타내신 적이 있습니다. 항상 거기에 머물러 계신 것이 아니라 곧 사라집니다. 모세가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을 뵈었다가 그 다음에는 곧 사라집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들이 ‘샤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적으로 거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나그네라는 단어가 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나 족장들이 약속의 땅을 얻지 못해서 남의 땅에 우거하면서 일 년이나 이년 살다가 다른 곳으로 가고 목축을 할 때 옮겨 다니는 것 같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두 단어 가운데 한 단어가 쓰인 것이 아니라 이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야샤브’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야샤브’라는 단어는 그냥 거주하는 것입니다. 영구적인 형태로 집을 짓고 그렇게 영구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업 위에서 영구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동사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차적으로는 다윗이 충성스러운 자를 만나면 그와 함께 살고 싶어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당신이 함께 거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밀함, 사랑, 하나님과 운명을 같이 함,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약속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이 우주적으로 온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해 실현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다윗 임금이 충성스러운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제 너 영원히 나와 함께 살자’라고 할 때는 ‘살자’라고 하는 그 말 하나에 왕이 가진 모든 것을 함께 누리며 살게 하는 은택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는 정말 충성스럽구나. 일평생 나와 함께 살자’라고 하는 이야기는 ‘너 정말 충성스럽구나. 이번에 내가 5천만 원을 너에게 특별히 상급으로 주마’라는 말 보다 비교될 수 없는 높은 수준에 있는 호의와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동행하신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의 사태를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외롭지 않고 자원이 모자라서 패배하거나 혹은 진리에 대한 빛이 부족해서 오류에 빠지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말 잘하고 재주 좋은 사람들, 얼굴 예쁜 사람들, 돈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당신을 섬기게 하심
마지막 두 번째로는 그 충성된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이 당신을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다’라고 하는 단어가 ‘에샤르테니’라는 단어인데 ‘나를 따른다’라고 되어 있는데, 결국 그것이 ‘샤라트’, ‘섬기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제 따른다기보다는 섬긴다고 번역했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어쨌든 충성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을 섬기며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요새 신문에 계속해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은퇴한 사람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까 하는 것입니다. 은행장 하다가 극장에서 도우미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다음에 좋은 대학 나와서 댄스 강사 하는 사람 이야기, 노년을 끊임없이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서 노인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일입니다. 일이 하도 많아서 어떤 때는 좀 쉬고 싶다고 하는 느낌을 가질 때이니까 그런데 정말 어느 날 ‘그래, 이제 안 해도 된다.’ 이게 아니라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그만 두라고 한다는 때가 올 때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공통점으로 말합니다. 견딜 수 없는 소외감. 젊었을 때 그만 두라고 하면 내가 능력도 있고 젊음도 있고 돈도 있고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표 내려고 했는데 더 좋은 곳 찾아봐야지’ 그런데 그만 뒀다는 소식 듣자마자 여러 곳에서 콜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 와라. 우리한테 와라 한번 만나자. 우리 회사 만나기 전에는 다른데 하고 이야기 하자 말아라.’ 하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소외감 느낄 이유 없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늙어서, 별로 늙지도 않았는데 필요 없다. 필요 없다. 절반만 월급을 줘도 일 하겠다고 하는데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거저 와서 봉사하겠다고 하는데 필요 없다고 합니다. 집에 가라고 합니다. 그럴 때 밀려오는 말할 수 없는 어떤 허전함과 소외감, 그게 너무 심하면 우울증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 경험 못 해 보셨죠? 우울증이 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아를 가진 존재입니다. 자아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잡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아는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자신이 창조적인 일을 해 가면서 내가 이러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덜컹 하고 끊어지면서 모든 일에서 탁 떨어져 가면서, 그게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나가면서 바로 속박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떨어져 나갔을 때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무엇인가 자기가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고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뭔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나이 60이 되어서 직장을 그만 두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60되고 그만 둔 다음에 어느 교회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 교회는 60세에 딱 퇴임을 하게 되면 퇴임하자마자 무조건 여태까지 직장 다니느라고 교회 봉사를 못 했으니까 1년은 교회 와서 무조건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시켜달라고 하고 정년퇴직 한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 교회 청소도 하고 정원도 가꾸고 합니다. 목수하던 사람들은 목수일도 하고 직장 다니던 사람들은 어느 구속에 가서 자원 봉사자로 헌신도 하고 도서관 같은 곳에 봉사도 하고, 그것을 일 년을 집에서 출근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참 그 이야기 듣고 굉장히 많은 충격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어떤 사람은 아예 중간에 휴직을 하고 그러한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창조적인 일을 이끌어 가면서 갈 수 있으면 괜찮은데 어느 한순간에 계속 무위도식하는데 계속해서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분발 해라, 충성 해라, 다시 일어나거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동안에는 그래도 편합니다. 그런데 ‘너 정말 무위도식 할래? 영원히 무위도식 해라’ 그러고 주님이 쫙 줄을 그어 버리시면 밀려오는 소외감은 어떻겠습니까?
(예화) 제가 그 이야기 한번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중학교 학생들을 섬길 때 한 애는 선생님이 데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교회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가서 딩동 하고 벨을 눌렀습니다. ‘야, 나 왔다’ 그러니까 ‘네’하고 나오다가 싹 들어가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너무 화가 났습니다. 문을 두드리면서 ‘너 교회 가자고 그러는 것 아니니까 한번만 나와서 나를 봐라’ 그러니까 그제야 나와서 보는 것입니다. 출석부를 탁 펼치면서 ‘너 이름 여기 있지? 내가 너를 2년 동안 데리러 다녔다. 하나님이 나보고 뭐라 하셔도 나는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너는 오늘부로 잘렸어.’ 하면서 빨간 볼펜을 확 그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다시 너를 데리러 오면 성도가 아니다. 너는 이제 신자가 아니야. 우리 교회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너는 찾지도 않고 전화도 안 할 거야.’ 하면서 쫙 그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뺀질대고 안 나오던 놈이 그 다음 주일에 제일 일찍 나왔습니다. 견딜 수 없는 소외감입니다. 잘렸다고 하니까, 그래서 느낌이 어떻더냐고 물으니까 굉장히 무섭더라는 것입니다. 빨간 줄로 확 그어지는 게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외입니다. 소외.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의 보람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높은 지위를 누리고 얼마나 좋은 백화점에서 좋은 옷을 사 입고 큰 집에서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이 한 시점에서는 의미 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영원을 향해서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내가 여기에서 풀빵을 구워 팔고, 내가 뭐 길거리를 쓸면서 인생을 살았어도 내가 섬기는 분이 하나님이시라. 일생 마지막에 살 때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온 그 날이 나에게는 정말 행복이었습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하는 일이든 직장에서 하는 일이든 집에서 하는 일이든 애를 키우는 일이든 무슨 일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믿음으로 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의미적인 연결 속에서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갈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충성되다고 하는 것은 하는 모든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간다면 충성스러운 사람과 별로인 사람이 구별이 안 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일이 잘 되어 갈 때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계속 돈 많이 벌고 수입이 확확 들어가서 한 달 건너서 인센티브를 주는데 열심히 회사 안 다닐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시련과 어려움이 오고 고통과 괴로운 날들이 밀려 올 때 누가 충성된 사람들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면서 살게 하는 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충성하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확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약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그 힘, 위기 속에서 나를 지키시고 적절한 사람들을 내게 보내주시고 내게 없는 자원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고, 모든 것을 결국은 내 몸을 주님 앞에 바치지만 하나님이 나의 몸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시도록 힘을 주시지 않으면 그 힘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매일 매일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쁨과 함께 슬픔이 있고 보람과 함께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과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주 다이나믹 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매일 매일 새로운 간증을 쓰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충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앙의 묘미를 모릅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새로운 간증을 쓰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 무위도식 하면서 살고 무위도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았다면 올 한해에는 정말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충성된 자와 안식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본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갔고 그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매우 진노하셨고 그래서 이 백성들을 쓸어버리시려 하셨습니다. 모세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의 기도를 들으셔서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정말 출애굽기, 민수기를 보면 이 모세의 일생이 정말 소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게 된 지도자가 된 후에는 죽을 때까지 추호의 안식이 없는 생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참 큰 능력을 주셨지만 그 능력이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고난을 덜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깊은 위기 속에서 모세는 이제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위기는 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자기가 사자를 보낼 테니 그 사자와 함께 올라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 올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오늘 올리고 있는 기도입니다.
II. 위기속에 올리는 기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눈 밖에 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은 크게 상심하고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고자 작정하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고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셨으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죄에 동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특별히 사랑하셨고 그 사랑의 징표로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수준의 영적인 교제와 깊이를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진노에서 누그러뜨린데 만족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다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간절한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세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걸고 공동체를 위해서 간절히 중제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고 주님의 진노를 샀으나 전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그리고 너는 내 앞에 은총을 입은 자라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내가 정말 주님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었다면 나에게 이러이러한 기도가 있으니 들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그게 마치 자신의 개인적인 노획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가 자기 개인을 위한 은혜이고 나 자신을 위해 이 은혜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은혜는 개인에게 주셨어도 공동체를 위해서 쓰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그 은혜를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사랑이 생깁니다. 그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기쁨이 있고 에너지가 주어집니다. 그 기쁨과 에너지를 가지고 슬픈 자들을 위로하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하나님이 기쁨을 주신 것이고 그 은혜로 물질을 주셨으면 그 물질을 가지고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그 은혜를 주신 의도대로 사용할 때 은혜는 계속 증폭되고 은혜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은혜대로 생활하지 않고 이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이 은혜는 소멸됩니다.
A. 갈길을 보이소서
그러면서 모세가 세 가지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갈 길을 보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자, 이제껏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아무 계획이 없고 하나님의 임재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고 다시 행진하라고 하시면 행진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안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천사인 사자를 보내어 대신 인도하시겠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모세로서는 거의 300만 가까이 되었을 이 백성을 데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 이것이 커다란 근심과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진노를 잠시 끄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백성과 하시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야할지 그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갈 길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충성된 사람들은 갈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되, 개인의 갈 길이 아니라 공동체의 갈 길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자기에게도 가정이 있었지만 그 가정의 문제보다도 더 커다란 것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염려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근심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잘못된 교회론 때문에 매우 이기적이고 그리고 자기만을 위하는 그러한 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교회의 위기와 어려움들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인지 그들의 열심과 헌신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의 열매인지를 하나님은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은 개인의 위기와 교회의 공동체의 처지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공동체의 생활과 함께 엮어서 생각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신앙이 없다면 그러면 그의 신앙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신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마음 안에 있는 성도는 항상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모세는 개인의 안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며 이 공동체의 갈 길을 인도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은총을 입게 하소서
두 번째 기도는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왜 모세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로 주님의 은총을 입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 나로 주님의 은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따르는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해 보면 구약에는 하나님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여하시면서 모세를 중보자로 삼으셨고, 신약에서는 율법과 대조되는 복음을 우리에게 주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삼으셨는데, 그래서 모세는 옛 언약의 중보자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입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특별한 은총을 입히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아주 중대한 범죄를 지었고 하나님이 이 민족을 진멸하고 싶어 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분노는 컸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단 진멸하지 않고 일단 이 백성들을 살려두시는 것 까지는 했는데 모세의 마음에는 이제 이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당장 다시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하나님이 당신과 가진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면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 하나님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자,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은총을 빌며 자기 개인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면서 "주님은 이름으로도 나를 안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께 제가 당신 앞에 은총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한 사람이오니 하나님, 내가 지금 심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이 아프신 것처럼 나의 심령이 찢어지고 있사오니 하나님, 이 고통 하는 당신의 종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라는 의미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공동체에 일어난 문제를 항상 자신의 신앙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고 속에서만 가능해집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해결 하겠지.’ 교회의 질서에 있어서는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일어난 이 고통스러운 일은 정작 문제를 일으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모세는 지옥을 넘나드는 극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은총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 기도를 그대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 골육지친 중 몇 사람이라도 구원 얻을 수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에게 끊어질 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똑같은 마음입니다. 왜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자기 골육지친을 너무 사랑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면 더 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골육지친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사도바울의 이 고통이 바로 하나님의 고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 골육지친 중 몇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될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모습을 뵈올 수 있다면 나는 오히려 그들을 대신해서 멸망해도 좋다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언제나 부정어를 동반합니다. "나 당신 사랑하고 잘 살거야." 이것은 감동을 못 줍니다. "죽어도 사랑해." 그래야지만 사랑의 진실함이 묻어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볼 때 신비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살아온 일생을 다 이야기 한 적은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살아온 인생은 대하소실입니다. 물론 읽어주는 사람 별로 없지만, 뭐 잘난 사람들만 읽어줍니다.
(예화) 신문에 며칠 동안 김연아 이야기를 도배를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이 속에서 역한 감정까지 생겨났습니다. 연아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문의 태도가,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죽고 가족들이 오열하고 하는데 그 김연아 보도 하나 하는 것을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세 페이지, 심지어 네 페이지까지 실어서 도배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냥 저 구석으로 밀쳐져 버렸습니다. 언론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신문을 볼 때 항상 비판적으로 봐야 합니다. 신문을 보면서 끄덕 끄덕 하면서 따라가면 신문을 전혀 안 읽은 사람도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알랑 보통이라고 하는 철학자가 ‘신문 사용 설명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TV를 보면서도 항상 다 믿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적으로 봐야 합니다. 저는 아주 강한 반발심이 며칠 동안 들었습니다. 신문을 보기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김연아를 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내가 스케이트 타는 사람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럽습니다. 또한 안양사람이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좋은데 신문이 미운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합니까? 신문이고 방송이고 나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문과 방송의 중요한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해 줘야 합니다. 그러한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사실은 신문사가 망해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경영하는 사람은 매우 특별한 철학을 가진 자여야 하는데, 장사꾼 같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경영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뇌가 맛이 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일입니다. 오늘날 그래서 신문을 다 믿지 않습니다. 바라보면서 항상 머리기사가 나오면 이게 여기 나와 하는가 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적이 없다’고 하면 ‘아, 이런 일이 있었었구나.’ 이렇게 뒤집어서. 어찌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까?
부정어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가슴 시려온 우리들만이 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삶입니다. 모두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생각 없습니까? 지난주에도 ‘아, 정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이런 생각하신 적 없습니까? 하필이면 화제가 있던 날 도서관에서 노회 어느 장로님이 책을 읽고 있었답니다. 이 분이 가셔서 두루두루 연락을 해서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연락이 오고 전화가 왔습니다. 사람들이 큰 일이 났는데 평정을 속히 찾으시냐고 하는 것입니다. 별로 동요한 적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귀도 나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나도 좋으신 하나님은 당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 그 나쁜 일을 좋게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월요일, 화요일 이틀 동안 4층에서 집회를 하였고, 저녁에는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불이 나지 않았으면 여러분이 와서 열렬히 3층까지 모여서 기도를 하였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오긴 뭘 옵니까? 그런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은총을 입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도와주시옵소서.’
(예화) 어느 교회 10년 전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우리 교회보다 더 비참하였습니다. 한 쪽에서 모여서 허름한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교회당이 벽돌로 잘 지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홀랑 탔습니다. 목사님께 그랬습니다. "나 같으면 얼른 남대문 공사할 때 세웠던 것 세워서 천막이라도 쳐 놓겠어요." 그런데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왜 저렇게 내버려 두었는지 물으니까 일부러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왜 인지 물었더니 정신 차리라고 보여주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불탄 교회를 보면서 교인들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저는 불탄 것을 보면 교인들이 시험 들지 않을까 했는데, 원래 시험에 들었던 사람들이니까 더 시험 들 것도 없고 회개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제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간절히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C.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세 번째로는 가장 중요한 기도인데, "이 족속을" 혹은 "이 무리들을" "이 민족들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면 지금 어떻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마음속에 진노의 불길을 잠시 낮추시기는 하였지만 지도자인 이 모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향한 예전과 같이 그 뜨겁고 애절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 족속들을 보시옵소서. 주님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백성으로 여겨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여삐 여겨주시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겨주시기만 하면 왕의 모든 관심은 자기의 백성을 돌보는데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적이 침공하면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이고, 굶주리게 되면 먹여주실 것이고, 낙심하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돌이켜 달라고 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세 가지는 모양은 다르지만, 하나의 기도입니다. 하나의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공동체가 어려움을 만날 때 모두 하나님께서 이제껏 자신에게 베푸신 은총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에스더가 그랬던 것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어려움 속에서의 의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살리시는 것 같은 놀라운 응답을 주십니다.
III. 하나님의 응답
A. 하나님이 동행하심
그래서 오늘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 모세가 위기 속에서 올린 기도에 대해서 응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친히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 앞에 빌던 기도의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커다란 특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민족이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유언처럼 남긴 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이렇게 회상 시켰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민족이 하나님이 이렇게 가까이 해 주신 민족이 있느냐? 이 땅 위의 어느 민족이 부르짖을 때에 이렇게 하나님이 가까이 들어주신 민족이 있느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 당신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해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때까지 모세는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렸겠습니까? 그리고 이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렇게 응답을 받기 까지는 바로 앞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 각성한 백성들이 회막에 나아가서 기도하였고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여호수아는 그 회막에 남아 회막을 지켰습니다. 기도하면서 지켰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이 위기 때에 어떠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그것이 모세에게 쉼임
그리고 하나님이 한 가지 더 그에게 약속하셨는데,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움직이지 않게 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함께 동행해주시지 않겠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또한 마음이 풀어지시기는 하였지만 "나는 안 가고 사자를 보내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때로부터 이 모세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끊임없이 요동치는데 이것이 무슨 정욕과 욕심으로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근심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러한 근심이 자신에게 있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거룩한 목표를 가진 사람의 간절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빚어낸 큰마음의 거룩한 번뇌였습니다. 여러분, 오히려 기도 속에서 이러한 거룩한 번뇌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기도할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는 사람들은 그 기도하는 시간에는 마음이 출렁거리며 요동칩니다. 믿음과 불신앙 사이를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교회와 이 땅위에 있는 인간들의 비참한 형편을 보면서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기도하는 그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이 세사에서 커다란 풍파가 온다거나 큰 위기가 닥친다거나 사업의 어려움이 온다거나 혹은 심지어 죽을병에 걸렸다거나 혹은 사형선고를 받는다고 해서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이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정말 갈망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고백한대로 ‘내가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으니라’라고 하는 고백이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두려운 것입니까?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배반하면 어떻게 하나, 우리가 만약에 이 하나님을 거슬려서 범죄 해서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야 할 백성들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러한 근심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요동치는 것입니다. 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어떠한 인상을 받습니까? 아주 심하게 말하면 이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용서하고 싶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면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당신이 하고 싶은 그 일을 동일하게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려는 사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려 할 때 모세가 하나님을 가로 막으며 간절히 기도하기를 몇 번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강력히 호소하는 모세의 변증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 집니다. 이방의 많은 나라들이 이렇게 말하겠죠. 저들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막상 애굽에서 끌어내기는 하였는데 끝까지 인도해 줄 수 없으니까 중간에 버렸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백성 가운데 더렵히 여김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세를 단지 국수주의적인 애굽의 개념을 가지고 모세의 생애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세는 그렇게 좁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에게 교회를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생각하면 정말 우리의 마음에 쉼이 없는가. 안타까운 갈망, 그렇게 되기를 간절한 갈망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뛰게 하고 있는가. 그래서 주님이 볼 때 ‘너는 내 마음을 가진 자구나. 너의 마음은 나의 영광을 위해 나의 교회를 위해 나의 백성을 위해 내 민족을 위해 너의 마음이 쉼 없이 요동치고 있구나. 그리고 그것이 너희로 하여금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를 올리게 하는구나.’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하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켜봐야 했던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자기가 예언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역사 속에서 보면 영광인데,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다시 한 번 죽음의 고통을 겪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합니까? 예루살렘이 함락 당할 때였습니다. 예레미야는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롱 안에 감추어 놓았던 패물을 가지고 와서 양식을 사러 다니기 바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도 알지 못하였던 우리 자신을 보게 해 주시고 또한 우리와 하나님, 나와 교회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확인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아플 때 함께 아프고 주님이 고난을 당할 때 함께 고난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기의 백성들이 당신의 마음을 따라 오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의 죄와 불순종 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의 가슴을 찢는 간절한 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 앞에 살려는 마음의 진실한 간구에 오히려 하나님은 더욱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기회를 통해 기도 많이 하시고 그래서 나중에 "어려움을 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이었습니다. 주님의 교회에 유익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환란은 충성을 입증함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오늘 여기에는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가 등장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예수님께 일체의 책망 없이 칭찬만 받은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어느 교회든 특징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빌딩이 아주 아름다운 교회, 교인들이 아주 많이 모이는 교회, 혹은 부자들이 다니는 교회, 아주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 제가 아는 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교인이 80명이 출석했다고 하는데 60명이 박사였다고 합니다. 굉장히 목회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분은 박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등등의 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란과 궁핍을 많이 당한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당시의 ‘스메르나’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이즈미르’라고 하는 대표적인 터키의 두 도시가 이스탄불과 이즈미르입니다. 이즈미르는 항구도시이고 아주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어마어마한 건물들이 있다고 하며, 로마의 아주 번성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도시 속에서 “환란과 궁핍을 내가 알거니와” 예수님의 마음속에 서머나 교회 하면 환란을 많이 당하고 물질적으로 매우 큰 궁핍 속에서 고통을 받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교회가 예수님께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일체의 책망 없이 칭찬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왜였습니까? 물질적으로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였고, 많은 환란을 다해 교회에 평화로울 일 없는 고통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무리들이 있어서 이 사람들이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아주 심하게 박해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말하는 환란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비방을 해서 결국 그 핍박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환란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환란과 궁핍이 특징인 교회가 예수님께 왜 칭찬만 받을 수 있었는지 가르쳐 주셨는데,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궁핍과 환란을 “안다”고 말씀하시고, “사실은 네가 부자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즉, 여기에서 예수님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영적인 의미에서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자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고 경제적으로는 궁핍의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교회였습니다.
Ⅱ. 환란에 대한 경고들
그런데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궁핍과 환란 속에서 큰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고난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살아온 이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시는 대신 환란에 대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A. 장차 받을 고난들
환란과 시련을 견디고 궁핍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산 이 교회를 향해 위로의 말씀과 격려의 말씀과 축복의 말씀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너희가 환란과 궁핍을 당하고 있는데 앞으로 장차 정말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공동체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평화를 잃어버리고 고통이 찾아오거나 핍박이 오면 아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쳤나보다, 교회가 하나님께 이러한 시련을 당하는 것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죄를 지었나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교회의 무슨 불법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일곱 교회 중 당신이 가장 사랑하던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징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에 고난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고난을 주실 때 그 고난을 연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교회에 고난을 주셔서 당신의 교회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십니다. ‘고생’과 ‘고난’, ‘고생’과 ‘연단’은 다릅니다. ‘고생’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신앙이 있건 없건 다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는 것, 우리가 그 고난을 통해서 성숙의 기회로 연단 받을 기회로 삼는 것, 이것은 신앙이 있는 교회, 신앙이 있는 신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징계 이상의 더 큰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환란을 당할 때 종종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의 어떠한 죄가, 혹은 나의 어떠한 허물이 이러한 죄가 이것을 자초하였는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을 하고 돌아보며 회개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내게 일어나는 모든 시련과 교회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이고,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이 교회, 서머나를 보십시오. 주님 앞에 큰 믿음을 가지고 환란과 시련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궁핍을 견디며 신앙의 정조를 지키던 교회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고통 받는 교회에 “장차 받을 고난”을 더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환란과 궁핍을 이기며 믿음의 부요한 이 교회를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더 큰 고난을 이 교회에 예비해 두셨으니 이는 바로 이 교회가 이러한 시련을 감당할만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B. 마귀의 시험
그런데 이 고난은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당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것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도리라 주장하면서 복음을 믿는 이 서머나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면서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고수하는 것처럼 말하였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유대인들이 아니요, 오히려 유대인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집단이라고 하는 탈을 쓴 사단, 곧 마귀의 패거리들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똑같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름을 가지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교회 속에 침투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그리고 교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신앙들을 파괴하는 일들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고통을 주면서도 자신들이 하는 이 일을 추어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으면서 도전하였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마귀의 패거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복음을 대적하는 이 유대인들을 사용하여 마귀에 속한 이 무리들을 사용해서 순전한 서머나 교회가 고통을 받게 허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괴롭히고 박해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식으로 이 사람들을 법에 고소하고 정부의 권력을 이용해서 옥에 던져서 심판을 받고 그 중 어떤 사람은 순교를 당해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이들은 모략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기복신앙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눈에 이 성경구절이 해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환란과 궁핍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서머나 교회가 그 믿음을 지켰더니 사단의 무리들에 의해 커다란 시련과 박해를 받게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장차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순히 박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옥에 던져 재판을 받게 하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목숨까지 노리는 끔찍한 고난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기에 그렇게 순전한 교회가 시련을 당하고 환란과 궁핍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던 성도들이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고 장차 받을 고난들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가 순전할수록 악과 고통과 핍박을 당하게 하십니다. 진리가 없는 교회에 비 진리의 도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통적인 신앙을 갖지 않은 교회에 이단의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까? 순결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가 죄인들이 미워하는 교회일 수 있습니까? 질서를 추구하지 않는 혼란스러운 교회에 무질서의 도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진리의 빛 가운데 살고 싶어 하는 교회가 아닌데 과연 어두움의 권세가 공격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위대합니다. 악인을 바꾸어 선한 사람으로 바꾸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워하는 죄인들을 고쳐 하나님 의지하고 만물 중에 자신이 찢기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복음은 이처럼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악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얼마든지 그들의 악으로 진리를 짓밟을 수 있고, 그들의 이단적인 사상으로 정통적인 교리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세를 잠시 떨칠 수 있고, 무질서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짓밟으면 짓밟히는 길가에 버려진 한 알의 씨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짧은 순간에는 교회에서 악이 이기는 것 같고 이단들의 도전이 처처에 횡행할 때에는 정통적인 가르침들이 무색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10분 15분만 걸어가면 동네에 산이 있고 산이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옹달샘이 있었습니다. 작은 샘에서 물이 퐁퐁퐁퐁 솟아오릅니다. 그러면 무릎을 꿇고 샘물에 엎드려 물을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개구진 아이들이 막대기로 막 휘젓습니다. 그러면 일시에 그 샘이 흙탕물이 됩니다. 막대기가 샘물을 다 더럽혀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면 흙먼지들이 다 가라앉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옹달샘에서는 샘물이 퐁퐁퐁퐁 솟아납니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실만한 아주 맑은 물이 됩니다. 성경은 악인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합니다. 쌀이 깨끗하게 소제가 안 되던 시절이 있습니다. 쌀알에 겨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을 또 쌀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겨를 깨끗이 털어내지 않고 섞어서 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키에 담아 키질을 합니다. 높이 쌀을 위로 올리면 쌀이 올라갑니다. 키를 확 내리면 바람이 일어나면서 키위에 있던 검불들이 휙 날아갑니다. 그러면 쌀은 무거우니까 밑으로 떨어집니다. 몇 번을 반복하면 겨가 다 날아갑니다. 겨가 뽀얗게 쌓입니다. 키질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참된 알곡과 바람에 나는 겨는 구분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잠시는 악을 당하게 되고 혼란스러워 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잠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장한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을 박해하고 심하게 악을 행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교회들을 이렇게 악을 당하게 하시고 또한 악한 무리들에게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교회를 순전하게 만드십니다. 그러한 악을 당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더더욱 위에 계신 하나님 한분만을 의존하게 하시고 자신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깊은 고통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C. 교회의 환란
오늘 성경은 교회의 환란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당하리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환란이 아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지체들이 함께 이 환란을 당하게 되고, 어떠한 사람들은 투옥되고, 어떠한 사람들은 순교를 하는데 그들이 당할 모든 환란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개개인의 환란과 시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체적인 아픔임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일 동안”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0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기간”. 이것은 얼마가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악인이 저렇게 날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심하게 박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하신 기한 만큼은 그러한 환란이 계속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서머나 교회에게 신앙의 허리띠를 단단히 동이고 미래를 위해 너희 자신을 스스로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교회에게 이 환란을 통해서 자신도 알지 못하였던 자신의 신앙을 보게 만들어 주시고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의지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Ⅲ. 충성과 상급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충성과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에서 “네가”는 개인을 말한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로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지금 악인들에게 환란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할 위기를 겪고 있는 너,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내가 말하는데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A. 충성하라
이 “충성”은 어떠한 일에 대한 헌신이라기보다는 관계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충성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이 게임에 중독되다 시피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밥도 안 먹고 화장실 갈 시간까지 아껴가며 죽어라 게임을 하며 발작 증세가 올 때까지 게임에 몰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충성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이 왕을 기억하며, 자신을 불러준 그리스도를 불러주며 자기를 임명해 준 한 나라의 주권자를 기억하면서 그와 사랑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것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그렇게 몰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충성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 충성은 어떠한 일에 대한 헌신이라기보다는 관계에 대한 헌신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사랑과 정절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하고 싶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들이 하나님 앞에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 언제나 일이 먼저가 아니라 그 일을 맡기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충성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충성할 수 없습니다.
B. 생명의 면류관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관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면류관이라 하였습니다.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관은 무엇입니까? ‘관’이라고 하는 것은 ‘영광’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충만함, 이것이 바로 생명의 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시련이 많고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많은 눈물을 흘려야 되는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오히려 잘 살았던 것을 깨닫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었던 놀라운 힘들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생명은 사랑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생명은 죽음에 항거하면서 끊임없이 살고자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명의 기운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자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자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 힘과 영광, 이것은 지상의 명예와 행복 이상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일에 충성하라. 내가 돈 많이 주마.” 이러한 사탕발림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네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진정으로 충성하라. 진정으로 헌신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마. 그 생명으로 고난을 이기고 환란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으로 극복하고 이겨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마.” 이것을 바로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주십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한정된 시간을 지나면서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만납니다. 그 중 내가 마음에 드는 사태들은 얼마 안 됩니다. 진짜 내 인생이 여기에 머물렀더라면 시간아 머져라 할 정도로 그렇게 모든 것이 좋고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사태들을 보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러한 사태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설령 어느 한순간이 그렇게 나에게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이 좋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이 상태에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학교를 4년 혹은 3년을 다녔습니다. 공부를 너무 잘해서 졸업할 때 상을 주었습니다. 수천 명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집니다.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영원히 머무르고 싶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사태들을 만납니다. 그러한 것들이 주는 만족감 때문에 인생을 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불쌍합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서 인생을 사는데 그렇게 신나고 좋은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육체적으로 신나고 기쁜 일이 있다고 한들 영원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 과도히 마음을 쓰고 자신의 모든 인생의 행복과 삶의 사태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바람직하게 전개되는 것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너무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도 “삶은 언제나 우리를 속인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헛된 기대 속에서 계속 속으며 살아갑니다.
몇 주 전에 수술을 하였습니다. 사실은 굉장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편도선을 수술을 했는데 교회에서는 편도선 수술 했다고 하면 심방도 안 갈 때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죽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8kg, 9kg 빠지면서 밤중에 건너 방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스스로 진통제 주사를 한 달 동안 놓을 정도로, 저만 그렇게 특별히 아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아팠고, 의사가 설교 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 안 듣고 설교했다가 실밥이 터지는 바람에 피를 쏟고 다시 2주 동안 설교를 못 했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비인후과 수술을 하는데 경험한 사람들이 3배 아프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신경이 자꾸 많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그러한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래, 살아온 인생길이 고통의 연속이었는데 그 수많은 고통 중에 한번을 더 보태야 한다면 그러가고 하지 뭐. 어차피 우리의 인생 앞에 전개된 삶의 사태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전개되는 삶의 사태 앞에 나의 기대를 접고 그냥 고통스러워도 이것이 원래 인생이려니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접는 연습을 하는 것,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러한 것은 너무 사소하니까 굳이 저를 돌봐 주시려고 애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니까 정말 위로가 되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그날 밤 앉아 있는데 뒤로 누우면 피가 목으로 넘어가고 앞으로 앉으면 앞으로 피가 쏟아졌습니다. 코에는 손도 대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꼬박 앉아서 24시간 정도 정자세로 앉아 보내었습니다. 잠도 못 자서 머리가 터지는 것 같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이 예전에 나에게 일어났던 고통스러운 일들보다 크게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생겨나는 고통도 아니니 수많은 고통을 겪고 살아온 인생 중에 하나쯤 더해야 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까짓 고통 가지고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눕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 시간이 의사의 말로는 이틀이라고 하지만 20일이 된들 어차피 견뎌야 하는 거라면 제가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괜찮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겪어야 죽을 텐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정말 마음에 평정이 찾아왔습니다. 고통이 덜어지지는 않지만 마음이 맑은 물처럼 고요하였습니다. 목으로 피가 넘어가면서도 그러려니 하였습니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의 사태들이 이 세상에 많이 생겨납니다. 신앙은 그러한 것들을 비 사이로 피해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어도 병도 걸리고 시련도 만나고 악한 사람을 만나 고생도 하고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못 가질 그것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명, 생명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회심하고 난 다음에 항상 저의 약점이라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집중이 자꾸 흔들립니다. 예를 들자면 기도를 하려고 해도 몸에 땀이 흐르고 몸이 꿉꿉하면 기도에 집중을 못합니다. 빨리 가서 샤워를 하고 와야지만 기도에 집중합니다. 이번에 그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은혜를 주시고 내게 일어나는 삶의 사태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내가 당하고 있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들을 잘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이러한 일이 내게 일어나는가? 이 일이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라고 하는 짜증과 고통만 가지고 있을 때에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삶의 놀라운 지혜와 집중력들이 생겨납니다.
여러분은 눈치 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성격이 아주 급합니다. 아직도 그러한 기질들이 남아 있습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속고 있거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감추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허리가 아팠습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참았습니다. 정말 무지의 극단을 달린 사람이었습니다. 아프면 시간을 내고 돈을 투자해서 기초적으로 차근차근 고쳐야 합니다. 아직도 움직일 수 있는데 어디 가서 누워 있느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러질 때까지 갈 때까지 갔습니다. 얼마나 무지막지 합니까? 이 속에서 불끈불끈 치솟아 올랐습니다. 제가 사람같이 안치던 사람 몇 사람 있었는데 대머리인 사람, 배 나온 사람, 얼굴에 개기름 흐르는 사람, 코고는 사람, 허리 아파서 빌빌 거리는 사람이었는데, 모든 것을 제가 다 경험합니다. 항상 나에게 있어서 허리 아픈 불편함과 견디기 힘든 고통은 저의 대적이었습니다. 사단의 가시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침체가 찾아왔습니다. 일을 해야 하는데 허리를 못 움직입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면서 제 마음 속에 든 생각입니다. “네 은혜가 족한 줄 알아라. 감사해 봐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고 내게 있는 연약한 것을 원수처럼 생각하면서 미워하는데 그 미움이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독거렸습니다. “그래 통증이 있다.” 지금은 여러분이 기도 많이 해 주셔서 많이 나았습니다. 한 2년 동안은 정말 감사히 지냈습니다. 아픈 적이 있기는 하였지만 어떤 날은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네가 그렇게도 내 몸이 좋냐? 여기 붙어 있는 게 좋냐? 같이 살자.” 그러면서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낫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책을 보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옵니다. 그러면 말을 겁니다. “왜, 나 좀 쉬라고? 그래 알았어. 좀 쉴게.” 그리고 잠시 기지개 좀 켜고 잠시 소파에 기대었다가 다시 일어나 일을 해보려고 하는데, 계속해서 아픕니다. “하지 말라고?” 이렇게 하면서 사는 중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없는 것만은 못하지만 그러나 “어째 이런 일이 나에게?” 이러고 있을 때에는 거기에는 적당하게 내 몸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에 대한 미움도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낫게 해달라고 기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같이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기회가 됩니다. 그것이 생명 아닙니까?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는데 “아, 삶이 이러한 거구나. 하나님, 괜찮습니다. 불편해도 괜찮습니다. 이틀이 아니라 20일이어도 저는 충분히 기도할 수 있고 몸을 움직이며 일은 못하겠지만 마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충성은 일에 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일에 헌신하는 것은 일을 맡기신 분에 대한 사랑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 안에 성취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은 그 일을 맡기신 분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입니다. 충성은 자기가 좋아서, 그것을 할 만한 여건의 후원을 받으면서 넉넉히 하는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충성은 항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에 에워싸여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그것을 계속 하게 하지 못하는 비극과 비참, 시련과 고통, 이러한 것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 속에서 자기에게 그 일을 맡기신 그 분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계속 헌신하며 할 수 있을 때, 그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미래의 천국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데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충만한 예수의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 설교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참여했던 어느 미국 군의관의 간증입니다. 전투 중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여러 발 총알을 맞고 온 몸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군의관이 피를 흘리는 병사를 끌어안고 지혈을 시켜주는데 눈동자가 막 넘어갔습니다. “힘들지? 아프지? 고통스럽지?” 너무 안쓰러워서 말을 걸었는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허벅지에 콸콸 흘리는 피를 찍어서 군복 한 귀퉁이에 글씨를 쓰더랍니다. “Fidelis senper.” 놀랍게도 이것은 라틴어였습니다. “항상 충성” 그것이 충성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충성스럽게 살아도 사람은 그것을 오해할 수도 있고, 사람은 전혀 올바르게 평가 내려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그 자리에 세워주신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박수갈채 소리 보다는 주님 한분께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되구나.” 음성을 더 듣고 싶어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정으로 생명의 관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이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충성된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시절을 지날 때에는 그 충성이 진정한 충성인지를 우리들이 잘 분간을 못 하지만, 그러나 환란을 통해서 충성처럼 보이는 어느 부분이 충성이 아닌지 그리고 환란을 통해서 충성처럼 보이는 어느 부분이 정말 참된 충성인지 그것을 입증하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일 이끄시고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버시처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 16:12)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는 주후 57년 경 제 3차 전도여행의 끝 무렵 사도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서 고린도지방 겐그리아의 집사 뵈뵈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고린도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로마서에서 자신의 선교 계획과 하나님의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담고 있는 광대한 서신입니다. 오늘 읽은 16장은 로마서의 끝자락입니다. 이 서신 끝에는 34명의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위대한 신학자요, 위대한 선교사요, 위대한 목회자요, 위대한 저술가였지만 이 편지가 끝날 때 사도바울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고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동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산 평범한 한 인간이었음을 엿보게 합니다. 34명의 동역자 가운데 사도바울은 오늘 자신의 동역자로서 “버시”라는 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Ⅱ. 바울의 동역자, 버시
우리가 읽은 12절에 짧은 반절은 제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로마서 마지막 장을 읽다가 한없는 은혜를 받은 구절입니다. 마른 땅과 같아서 무슨 메시지가 나올 것 같지 않은 반 토막의 한 구절,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는 이 한 구절 앞에서 저는 매우 큰 은혜를 받았고,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제 마음속에 이 구절은 살아 있습니다.
A. 사람됨과 섬김
먼저 우리들이 이 짧은 반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됨과 섬김이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 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짧은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각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고, 버시라는 동역자를 생각하면서도 그를 보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 그의 사람됨의 특징을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버시”하면 떠오르는 특징이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에코피아센”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코퍼스”라는 명사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이 명사는 아주 힘들고 고된 일, 고통스러운 과업, 고난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버시는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기억되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넘치도록 많은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모든 환경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기대하고 자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과 똑같아 지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합력해서 자기가 하나님 섬기는 일에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반드시 그렇게 순풍에 돛 다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전개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이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나라 한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뿐입니까? 자기 안에서도 옛 본성과 새 본성의 다툼이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서라도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새 본성의 마음과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려 하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살려고 하는 옛 본성의 마음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선한 뜻을 오늘 저녁이라도 세워 보십시오. 그러면 금방 그렇게 선한 뜻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방해하는 힘을 여러분 바깥에서, 안에서 느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그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왜 이 믿음의 길을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이라 말씀하셨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가르치셨겠습니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버시는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었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난관과 싸우며 많이 고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울 곁에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사도바울에게 헌신하며 주님을 섬겼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피붙이처럼 사랑을 받던 사람들도 돌이켜 서서 사도바울이 정말 사도냐고 의문을 제기하였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을 의심하였고, 그의 사역에 모함을 더하였습니다. 동역자들 가운데서도 그러한 배신자들이 있었고, 함께 동역하던 사람들 중에도 희생을 두려워하며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과 함께 동역하였던 많은 사람들 중 버시는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기도 속에서 떠올릴 때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그는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마음에 어떤 인상으로 남겠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냥 건성으로 하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배짱에 맞을 때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남들이 존중히 여길 것 같아서 직분을 맡았는데 수고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뺀질거리는 사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비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버시를 보십시오. “버시”라는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바울의 마음에 미어지도록 다가오는 인상은 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넘치도록 고통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신앙의 인격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버시”하면 생각나는 인격은 “주 안에서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엔 큐리오”라고 나옵니다. 주님 안에서. 이 주님은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바로 그렇게 부활해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승화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라고 하였을 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 되어 통치자로서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버시가 그렇게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였는데 사도바울은 그냥 일만 하는 사람으로 이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하고 넘치도록 고생을 하고 수고할 뿐 아니라 버시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언제나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아, 그 버시. 우리 주님과 함께 하던 사람.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고 우리 주님께 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에 늘 복종하며 살던 그 사람”이라는 인상이 사도바울의 마음에 가득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일을 잘 하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일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머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항상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는 주님께 연합되고, 그 연합 안에서 주님을 기뻐하는 예수 안에 있는 영적 생활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쓰레기 하나를 줍고 의자 줄 한번 맞추고 아이들에게 성경 한 줄을 가르치고 성가대에 밥 한 끼를 해도 예수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나 같은 사람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사도바울을 존경하였지만 사도바울의 인간적인 끌림 때문에 그 일을 하며 수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 어떠한 긍정적인 이익 때문에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분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분의 마음이 버시의 마음 가운데 부어졌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그 일을 하는 것을 정말 원하셨기 때문에 버시는 그렇게 주님을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섬길수록 주님이 더욱 존귀해 집니까? 섬길수록 주님의 은혜가 더욱 넘칩니까? 수고하면 수고할수록 나 같은 죄인을 사용하시고 이 쓸데 없는 인간을 이렇게 쓸모 있게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 번째는 “사랑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수고하고 사랑하는”이라고 나옵니다.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아가페텐”이라고 나옵니다. 수동 분사 여성형입니다. “아가페텐”,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그러한 뜻입니다.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 받은 버시에게 문안하라.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사랑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My beloved Friend, 사랑하는 친구” 이렇게 됩니다. 누구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입니까? ‘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버시는 하나님께만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과 동역자들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종종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갈등관계에 있은 적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고 반문해야 하는 갈등이 오기도 합니다. 왜 입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신하고 충성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다가 보면 진리의 문제에 관하여 그러한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 특히 성도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갈등관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부터 사랑은 받지 못합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불러 일으켜서 저 사람과 더 깊은 성도의 영적 교제 속에서 함께 지체로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미천한 인격과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 혈기,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에 의해서 움직이는 이기적인 동기, 수없는 지체들과 함께 생활을 해서 10년이 지나도 밥 한번 사줄 줄 모르는 구두쇠 기질,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과는 연관 없이 인격적인 결함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버시는 하나님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을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 격인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도 버시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고, 그리운 이름이었고, 함께 교제하고 싶은 그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종종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어느 교회에 하나님이 보내 주시든지 큰 교회든지 작은 교회든지 사역을 한 5년이나 10년 하고 나면 덕을 볼만한 가능성이 있는 교회든지 아니면 빈손으로 내 보낼 것 같은 아무 가능성 없는 교회이든지 간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렬히 헌신해라. 그래서 담임 목사와 장로님과 권사님과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그대들이 떠나고 세월이 많이 흘러도 나이 드신 분들이 그대들을 기억할 때 눈물이 나는 사람이 되라. 우리 교회에서 그렇게 고생 많이 하신 우리 전도사님,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모두 포기하였던 목사님. 그러면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 교회에 하나님이 여러분이 가는 그 교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다.” 어디 교역자만 그렇겠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어려운 때에 교회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장로님, 기도가 필요한 시기에 생각나는 권사님, 그러한 구역장,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버시는 많이 수고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 주님과 사랑의 연합을 누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면서도 사람들에게도 성도들에게도 아울러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한 교회의 성도로 인정받았을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또한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그러면서 갈등을 불러일으킨 사람으로 여러분은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교회를 섬기라 하신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선한 공로가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예전에 아무 쓸모없던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 주신 것입니다. 진심으로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 버시처럼 많이 수고하면서도 또한 하나님과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버시”라는 이름
“버시”라는 이름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페르시다”라고 희랍어 성경에 나오는데, 이것은 “페르시스”라는 단어의 제3격입니다. “페르시스”라는 이 이름은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지 않으십니까? “페르시아”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페르시스”는 페르시아에서 끌려온 여자 노예 속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을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정황을 알고 있었던 로마사람들이 로마에서 태어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정식적인 로마의 국민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였을 리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낳았을 때 아무리 그 이름이 좋아도 자기 아들 이름을 “쪽바리”라고 지을 사람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석가들의 이야기는 아주 흔한 페르시아 여자 노예들의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정말 고유명사인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이 여자가 이름도 없어서 “있잖아, 연변댁.” 이러한 식으로 불려진 이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들이 추측하는 바와 같이 버시는 정말 페르시아에서 끌려온 비천한 노예, 혹은 노예의 집안에서 태어난 미천한 여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사람 사도바울에게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라는 극찬을 받고 있으니 그는 그렇게 미천한 사람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복음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얼마였을 때 이 편지를 받았을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동역자의 써클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미천한 자였으나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위해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다가 사도바울과 사랑하는 로마교회 교인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비천한 여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를 주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요령 부리지 않고 많이 수고하였더니 위대한 사도의 마음에도 지워질 수 없는 존귀한 동역자가 되었구나. 주석가들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 여자가 주님을 몰랐더라면 그저 그렇게 쓰레기처럼 살다가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죽었을 비천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위해 많이 수고하자 성도들에게도 사랑을 받아 비천한 신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위해서 애쓰고 수고할 수 있는 위대한 구름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 중 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짧은 구절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버시가 기적을 일으켰다거나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설교자였다거나 아니면 선교사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16장을 해설하면서 여기에 많은 동역자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모두 목회자나 선교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버시는 로마교회에서 청소나 하는 자매였을 수도 있고 이름 없는 전도사였을 수도 있고, 교회 한 구석에서 책을 만들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허기진 상태에서 모임에 오는 사람들에게 빵을 구워졌던 여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의 사람됨이 충성스러웠고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성은 진실한 인격 안에서 더욱 빛납니다.
어거스틴을 기독교로 인도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목회자가 있습니다. 밀라노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암브로시우스를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마니교에 빠져서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 하다가 그 마니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회심할까 말까 생각하며 종종 예배당을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먼발치에서 존경하던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고 어떤 때에는 그 설교의 의미를 잘 몰랐지만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암브로시우스 가까이에 가서 대화도 나누고 싶었지만 너무 고단한 목회사역에 쉴 틈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이 나면 암브로시우스는 간절히 혼자 있고 싶어 했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깨뜨려 다가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존경의 눈빛을 보내었습니다. 그 암브로시우스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는 경건하고 우리에게는 친절하고 겸손한 목회자였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Ⅳ.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과 그리고 겸손함, 그리고 온유하고 평안함, 이러한 인격의 특징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의 크기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버시처럼 힘에 넘치도록 고난을 받으며 수고하며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이렇게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며 또한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인격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충성과 낙담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감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수 14:8)
녹취자: 이경순
Ⅰ.본문의 배경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에 동안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정복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설적인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요단을 건너 6장에서 여리고를 정복하고 10장에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동맹군을 혁파했습니다. 그리고 11장부터 21장 사이에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을 족속별로 분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가나안 정복의 두 위대한 영웅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는데 오늘 성경 본문은 특별히 갈렙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사람은 출애굽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 사람이 원래 그니스 사람이었습니다. 이 족속은 가나안 원주민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이 이스라엘의 회중 속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혈통으로 보면 그는 분명히 혈통적인 자신의 동족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음과 할례를 통해 가입하는 공동체였기 때문에 무슨 경로인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어째든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이 사람이 가나안 원주민의 자손에서 이스라엘의 자손이 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오늘 성경에 등장할 때 그는 팔십 오세의 가나안 원주민 출신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물론 당연히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약 45년 전에 가나안 정탐시절을 회상하였고 그 후 40년 동안을 광야에 방황하면서 살았던 그 모든 역사를 함께 지켜봐온 산 증인이었습니다.
∏. 갈렙의 회상
갈렙이 회상하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자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데스바네아까지 왔고 이제 조금만 더 진행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이제 이것도 전쟁이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지휘관을 한명씩 파송하게 해서 그들을 직접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내 정탐을 하고 그 결과를 회중에게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정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그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와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정말 풍족하고 비옥한 땅이었는가 하는 것과 그들이 이제 가나안을 쳐들어가서 전쟁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 적군들의 배치와 상황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각 지파에서 뽑힌 정탐꾼들은 명실 공히 그 지파의 지도자들이었고 그 지휘관들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에스골이라고 하는 골짜기에 가서 포도송이를 보았는데 얼마나 탐스럽고 어마어마하게 큰 포도송이였는지 꿸 채에 꿰어서 사람들이 들고 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과장이라고 하지만 1800년대 말에 써진 칼델리치 주석에 보면 그 당시에도 포도송이 하나에 6키로 그램짜리가 있었다고 하니까 아미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한 기록일 것입니다. 포도송이뿐만 아니라 석류와 무화가 까지 따가지고 와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포도송이와 석류와 무화과가 가득 있는 아름다운 땅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까지는 모든 정탐꾼들의 보고가 일치하였지만 그다음서부터 보고는 두 편으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된 땅으로서 아름답기는 하지만 성은 엄청나게 크고 견고하였으며 또 우리가 그 앞에 섰을 때에 메뚜기처럼 느껴지게 하는 거대한 안악 자손들이 그 땅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 보고를 들을 때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을 가지고 가진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기를 하면서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14장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이었고 비참함을 자각한데서 나오는 커다란 절망의 울음소리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렙이 회상하는 바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당신을 향한 커다란 불신앙으로 보셨고 그래서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되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렙의 회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4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이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 여리고를 정복하고 파죽지세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공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이제 갈렙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 앞에서 자신에게 좋은 땅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정복하기 어렵고 농사짓기도 어려웠을 산지를 달라고 당부하고 그리고 자신의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입하고 나가 싸우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그 산지를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점령하여 하나님이 지정하신 대로 그 땅을 유업으로 받겠노라고 하였습니다.
Ⅲ. 충성된 자는 실망치 않음
지금 오늘 여러분과 함께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 성경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음이라” 충성된 자는 어떠한 여건에서도 실망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 갈렙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A. 마음이 다른 사람
오늘 읽은 민수기 14장에 의하면 그는 제일먼저 마음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마음이 다르다 그렇게 나오지 않고 영이 다르다 이렇게 나옵니다. 좀 심한 말입니다. 내 종 갈렙은 그 영이 그들과는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이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왔다고 굳게 믿었지만 그리고 용기를 가졌지만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들은 똑같은 광경을 보고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보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보면서 주저앉아버리게 되었고 지도자란 사람들이 와서 털어놓은 그 깊은 낙심은 보고를 들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전부 물같이 녹아내리도록 그렇게 절망으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 또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 났습니다. 정신과 의사들하고 심리학자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런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가족 중 한사람이 깊은 절망에 빠져서 그것을 토로하면 이것이 그 가정에 아주 놀라운 전염력을 가진답니다. 그래서 가장이나 누군가가 깊은 절망을 털어놓으면 가족들이 듣고 돌아서면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은 절망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희망도 아주 놀라운 전염력을 가지고 있고 전파력을 가지고 있고 절망도 아주 깊은 아주 강력한 전파력을 전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깊이 낙심하면 온 가족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 열 명의 지도자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애급에 있으면서 수많은 전쟁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사람들이 정말 얼마 안 되는 기간이기는 하지만 광야를 지나오면서 그저 제대로 된 집하나 없이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거기 들어가서 본 어마어마한 성을 보면서 어떻게 저것을 맨주먹으로 공격을 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해서 수학적 계산을 하면서 깊은 좌절을 느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좌절을 사람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하자 놀라운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고 마치 사람들은 무엇에 씌운 것처럼 절망에 미혹된 사람들처럼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곡소리로 하나님 앞에 통곡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기도를 하였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 갈렙은” 여기서 구약에 나오는 ‘내 종’이라는 이 표현은 아주 친근한 표현입니다. ‘아브띠’라고 하는 것인데 굉장히 친근한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뿍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모스서에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종에게 내 뜻을 알리지 않고는 그것을 행하는 법이 없느니라. 그래서 당신의 종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보이시고 알리시고 아주 친밀한 사랑으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뽑혀진 당신의 선지자들이나 당신의 종들에 향한 말할 수 없는 친밀감입니다. 그래서 내종 갈렙은 그 영이 그들과는 달랐다.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오늘 설교준비하면서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서 왜 이 단어를 사용하셨을까? 무슨 뜻이냐면 “저 사람들과는 다른 영을 내 종 갈렙이 가졌다.”라고 할 때 그 사람들이 낙담하고 주저앉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또 나중에 악평을 하고 낙담하게 만들었던 그 열 명의 정탐꾼들에게 마귀가 들렸다거나 악령이 쓰였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혼의 온전함입니다. 그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 다른 영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똑같은 사람인데 악인과 의인을 대조해 보세요. 주님의 사랑 안에 사는 영혼과 그 주님께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비교해보면 어떤 때는 같은 그리스도인인데 정말 거듭나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추호의 경외함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향한 눈곱만큼의 사랑을 그 안에서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마치 그 사람이 다른 영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종 갈렙은 그 영이 그들과는 달랐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갈렙이 가졌던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리는 단순히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그 믿음은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심리적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지적으로 동의하고 굳게 확신하는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갈렙에 이 다른 영이라고까지 표현된 이 마음은 그런 심리학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의 연합해서 우러나오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그 은혜, 자비, 권능을 굳게 믿는 그것이 지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살아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건져내신 놀라운 은혜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출애굽을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 인도를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까지 그 때만해도 얼마나 많은 시련과 환란을 겪었고 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거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이 갈렙의 마음속에는 그 한걸음 한걸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자비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계산을 하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이 사람은 굳게 믿었고 그 사실을 굳게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였고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편안할 때 평안하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신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지 다른지 모릅니다. 믿음이 훌륭한 사람과 자신이 마음이 다른지 같은지, 믿음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동일한지 차이가 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환경과 상황이 닥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시금석에 긁히면서 광석이 그 성분을 드러내듯이 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비밀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그분과 이루고 있는 사랑의 연합의 끈끈한 정도가 그런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과 시련만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는 좋은 환경도 때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탐욕이 드러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더러운 욕망이 드러나고 그가 가지고 있는 교만이 드러나고 등등해서 환경과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종종 우리자신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자신에게 조차도 감추어진 마음을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일어났고 열 명의 정담꾼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하나님과 연합되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을 이 상황을 통해 그대로 드러내게 되었고 그들이 아무리 비관적인 보고를 해도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마는 거기에 있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으며 하나님을 향한 통곡을 쏟아냈고 눈물을 비 오듯 흘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사실은 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연합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보실 때에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까요? 환경이 평안하고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은 믿음을 가지고 그냥 그냥 사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절망이 우리를 절망하게하고 낙심하게 하는 요소들이 눈앞에 환하게 보일 때 그때 열 명의 정탐꾼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종 갈렙과 같이 평소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십니까? 여러분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지금 환경에 의해서 여러분의 마음이 시험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절망하고 낙심하는 사람들 환경과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 없음과 사랑으로 연합되지 않았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 되지 말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는 영이 다른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하나님을 온전히 따름
두 번째 하나님이 이 종 갈렙을 보았을 때 그의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하셨습니다. 자 오늘 성경은 그가 나를 온전히 따랐다고 말씀하셨으니 뭘 따랐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출애굽 하여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그 때 그의 나이 40세였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애급에서 열 번의 그 위대한 재앙, 바로의 교만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하던 역사, 홍해가 갈라지면서 건넜던 역사, 홍해가 갈라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그 광경, 모든 것을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45년 동안에 사랑하는 종 갈렙이 하나님을 향해서 걸어온 그 모든 길들을 하나님이 보실 때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평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담의 후손이고 원죄가 있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왜 흠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셨을 때 그는 나를 온전히 따른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어떠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았는지를 여러분이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의 일부분을 본 것이 아니라 전체를 바라보시며 이후 이스라엘 왕들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를 재는 기준으로 삼으시고 선하고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들은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고 하나님이 칭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매 순간순간의 행동이었다기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그를 통하여 나의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비 에프터 하트 어브 갓’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뒤에 있는 자 그런 뜻입니다. 뒤에 있는 자란 말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먼저가고 내가 바로 그 뒤를 정확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마음에 닿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희망사항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주님의 뜻으로 분장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그 일을 주님의 뜻으로 분장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고 하나님을 힘입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유익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갈렙은 자기가 앞서가고 그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구실을 찾아서 자기가 가고 싶은 길에 하나님보고 도장을 찍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면 신뢰심도 함께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면 믿습니다. 사랑하면 신뢰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늘 이 아름다운 평가를 받고 있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 마음은 영이 다르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 마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인생이 현저하게 갈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한순간에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이 갈렙을 향하여 일생동안 당신의 최고의 숙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왜 교리를 배워야 하고 신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자랑 때문입니까? 나에게는 이러저러한 지식이 있다는 과시를 목적으로 해서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보겠답니다. 기도하지 마라 그냥 내 말 들어라 그런 사람들이 기도하면 더 위험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지식이 있으면 기도해볼 필요도 없는 것을 그럽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모르니까 기도해보겠답니다. 그런 사람이 마귀가 가지고 놀기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디 한 순간 마음을 톡 쳐서 확신만 주면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방방 뛸 겁니다.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자매를 놓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자매가 시집갔습니다. 그런데 계속 기도합니다. 오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게 말이 되냐 했더니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을 볼 때 윤리적 모순을 극복하시는 분이랍니다. 애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포기 했습니다. 그 윤리적 모순은 왜 극복을 못하고 거기서 주저앉습니까? 무슨 기도할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한테 시집갔으면 응답이지 그리고 빨리 다른 데를 찾아야지 왜 붙들고 있냐니까? 기도할 때 확신이 온다는 겁니다. 확신은 성령님만 주시는 게 아니라 마귀도 줍니다. 자꾸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묻는데 그것도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확신이 있으면 그러면 그게 성경에 보면 마귀도 믿고 떠드느니라. 그러잖아요. 확신이 있으면 다입니까? 거듭난 증표가 없는데,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가는 겁니다. 그것입니다. 정말 산을 옮길만한 믿음 그리고 심오한 지식의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는 길을 온전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은 어디를 가고 계시고, 여러분은 어디를 가고 계시나요?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여호와께 충성함
이런 게 있을 때에 그 때에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된 삶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외면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의 품질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반드시 충성스럽게 살고 야바위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야바위처럼 사는 것입니다. 오늘 15장 8잘에 보면 갈렙의 인격의 특징에 대해서 나오는데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다 했습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께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이름은 매우 특별한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언약의 당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충성하였다 되어 있습니다. 충성한다는 것은 자신이 충성하는 그분에 향한 흔들림 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고 요동치 않는 충성스러움은 결국은 사랑의 비밀이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연합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충성은 어느 한순간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결합되어 있는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야망이나 일에 대한 성취감을 가진 사람도 엄청난 열정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망이나 사역에서 오는 성취감이 가져다준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져다준 하나님께 대한 헌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인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만족을 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이 바로 충성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는 신뢰, 그것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지만 구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하나님 사랑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라는 신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서 내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충분합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그것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의 영웅 두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기억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날 가나안을 정탐한 보고에서 여러분이 후대에 모두 기억하고 있을 이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영웅들의 말소리는 묻혀 버렸습니다. 소수의 의견이 되어버렸습니다. 짓밟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곡하는 절망의 울음소리가 두 사람의 설득을 짓밟아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름은 오늘도 우리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삼무아, 사밧, 이갈, 호세아, 발디, 갓디엘, 갓디,암미엘, 스둘나비, 그우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때에 보고회에서 이긴 열 명의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을 보고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절망하는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짓밟혔고 열 명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의 이름은 남고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흔들어 놓았던 이 열 명의 이름들은 잊혀 졌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쓰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하나님의 자녀든지 어떤 하나님의 일꾼이든지 자신의 충성을 시험 당함으로서 입증해야하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그때가 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사람됨 이상의 그 무엇을 하나님 앞에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충성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충성한 사람들은 바로 그 시험 속에서 충성을 입증해야 할 때에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 때문에 순종했던 사람은 비록 유명하고 커다란 섬김은 아니었지만 아주 티끌같이 작은 섬김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한 모퉁이에서 진실한 마음과 눈물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 속에서 주님을 공경했던 사람들은 결국은 그 시험 속에서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분이고 그리고 그분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그 사람들이 진정한 삶의 보람이었던 것을 입증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충성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소수의 의견으로 묻혀버렸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짓밟히듯이 묻혀 버렸고 사실 진실은 은폐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그 사람들이 혹평할만한 그런 땅이 아니었고 또 그 사람들이 큰 성읍과 견고한 성을 지니고 있고 많은 병기들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보다 더 더한 위기를 하나님이 함께하므로 극복해온 생생한 간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사람을 이기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을 규합하고 특공대를 만들거나 혹은 편을 짜거나 이 사람들을 암살할 정예대원들을 수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불순종을 인해서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고 40여 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40년의 세월이 가장 가슴 아팠을 사람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 긴 세월동안도 45년 전의 그 마음이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45년 전에도 하나님 때문에 충성했던 것처럼 45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 때문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충성하던 사람이 그 긴 풍상의 세월을 다 지나고 그 말 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반역과 부패의 역사를 모두 동참하면서도 순전한 믿음을 그대로 가지고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의 뒤를 따라가는 이 믿음의 사람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45년 전에도 사람 때문에 충성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45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 때문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체의 불평이 없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과 옳음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하나님의 손에 모두 맡기며 45년의 긴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연합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오늘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서 그 산지를 내게 달라고 거기를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복하겠노라고 하는 이 탁월한 믿음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굳이 자신의 충성됨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충성해온 모든 삶의 여정이 사람의 가치와 사람으로부터 그 가치를 평가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의 연합 때문에 바쳐온 충성의 삶이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잠시 큰 목소리를 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흔들어 놓았으나 잊힌 열 명의 사람들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잠시 묻혔으나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았던 두 사람의 이름이 되시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과 충성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계 3:14)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갇혔을 때 계시가 임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일곱 교회에 편지로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였지만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교회의 상태를 각각 진단하고 격려하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게 하셨습니다.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 속에는 제일 먼저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등장합니다. 즉 그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일곱 교회마다 각각 다르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에베소 교회가 제일 먼저 등장할 때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른 손에 일곱 교회를 붙잡고 일곱 금촛대에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주는 둥그런 설명을 사과 자르듯이 일곱 등분으로 잘라서 에베소 교회에게는 이쪽을 잘라서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서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예수님의 성품이나 역할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서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사실 근본이 아니라 처음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이가 이르시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생각하면 “너희는 예수님이 아멘이시라는 사실, 그분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라는 사실, 창조의 처음 시작이시라는 사실을 기억을 하거라. 그렇게 기억을 못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지금 상태가 되었고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예수님의 성품과 하신 일을 기억해야 된다.” 이런 뜻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에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밀레도라고 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나온 그 도시에서 내륙 적으로 약 200키로 떨어진 곳에 골로새 근처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시대 때에 아주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이 라오디아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는데 로마 정부에서 그들을 도우려고 할 때 라오디게아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다고 로마제국의 도움을 거절할 정도로 그렇게 실력이 있는 잘 사는 고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이 실려 있는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얼마나 평소에 자신들의 고장이 부요한 고장이고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물질적으로 궁핍함이 없는 사람인가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라오디게아는 우리 개성이 유명했던 것처럼 안약으로 아주 유명한 고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시대 때 라오디게아 안약 하면 온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안약을 팔아 아주 부요하게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오늘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만든 안약이 로마 전 제국에 퍼져서 앞을 못 보는 사람들에게 그 약을 발라서 눈병이 낫고 성한 눈이 되게 만들어주는 그런 고장이라고? 그런데 너희들 제국에 있는 사람들의 육신의 병든 눈은 너희들이 뜨게 해 주지만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영적으로는 눈이 어두운 사람이다. 차라리 너희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는 안약을 사서 발라서 영적으로 소경이 되지 말고 눈뜬 사람이 되거라.” 그렇게 예수님이 정곡을 찌르는 말씀으로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깨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칭찬을 받은 것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인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로마 시대 때 정말 잘 했던 것이 수로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시대 때는 발동기가 없으니까 물을 펌프로 퍼서 위로 올리지는 못하지만 높낮이를 이용해서 수원지에서 물을 길어서 흘러내려오게 해서 심지어는 강을 건너고 계곡을 지나서 그래서 그 물들을 배달을 해서 공중용도로 사용하기도 하고 개인의 주택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 정도만 한 게 아니라 바람이 불고 먼지가 날리고 하니까 물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관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자 동네에서는 연관을 사용을 하고 많은 동네에서는 돌관을 사용했습니다. 석관을. 석관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홈파진 것을 만들어서 두 개를 깎아 가지고 그 다음에 아래 뚜껑에다가 위 뚜껑을 딱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붙여버리면 그게 돌관이 되어서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먼지가 안 들어오고 좋기는 한데 여름에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면 그 돌이 뜨끈뜨끈하게 되어 그 긴 거리를 돌관을 지나서 물이 흘러오니까 마지막에 물이 떨어질 때에는 미지근한 물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건 진짜 먹을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니까 먹어야 되겠는데 여름에 시원한 물 먹어야지 미지근한 물 먹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가서 사람들이 그늘에다 놓아두어서 물을 식혀서 그래서 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그 돌관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물을 먹어보았지? 먹을 수 있겠디? 못 먹겠지? 너희들이 내 입에 그와 같다. 나를 향한 신앙의 태도가 그와 같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일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일부가 무엇이냐 하면,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이가 이르시되” 그 예수님은 아멘이시오 충성이셨습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했으니, 예수님은 아멘스럽고 충성스럽고 참스러운 증인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멘과 충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II. 아멘과 충성이심
A. 아멘이신 예수
예수님은 아멘과 충성이셨습니다. 아멘이라고 하는 뜻은 영어로 'certainly', ‘확실히’, 혹은 'surely', ‘틀림없이’, 그런 뜻입니다. 부사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말할 때 “아멘.” 하면 “확실히 동의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멘입니다. ‘아만’은 ‘굳게 하다.’ 그런 뜻입니다. 아이를 양육해서 튼튼한 아이로 기르는 것도 아만이라는 동사를 사용을 했고 그래서 그것을 또 변형을 시키면 믿는다는 말도 거기서 나왔고, 진리라는 말도 거기서 나왔고, 젖을 먹이는 유모라는 말도 거기서 나옵니다. 아무튼 예수님에 대해서 라오디게아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멘의 예수님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왜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첫 번째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은 아멘이셨다. 나 예수는 아멘이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노멘’의 삶을 사니까, 아멘의 삶을 살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인류가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보낼 것을 약속하셨고 그 긴 세월동안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대망은 계속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고난을 당하고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뚜렷한 사상을 전파했습니다. 그 모든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도 임했고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셨으니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공생애 들어서서 사신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기록들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 주신 기록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하였으니,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뜻이 있었고 그 뜻을 순종하는 아들이 있었기에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우리를 위한 대속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이 생겼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 점에서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을 빚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종교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되 그들이 행하는 행실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라 하는 것 같지만 삶은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심한 신앙을 꾸짖으시며 마태복음에서 15장 3절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셨으니, 사람의 전통이 더 중요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이 더 중요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전에도 몇 번 여러분에게 퀴즈를 냈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주위의 친구나 혹은 이웃하고 “아, 저 사람은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다시는 저 사람하고 상종하지 말아야지.”하고 결정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루에도 몇 명씩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 저 사람 저런 사람이었구나.” 특별히 미워하고 복수한다기보다 확실하게, “아, 저 사람은 진짜 잘못된 사람이구나. 진짜 저 사람 가까이 하면 안 되겠구나.” 결단을 내리게 만들 때 그 동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 더 그런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여러분 인생관하고 다를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내가 돈을 정말 아끼고 알뜰하게 씁니다. 그런데 주위의 사람이 막 헤픕니다. 그럼 이 속에서 화가 확 나는 것입니다. 내가 약속을 너무 잘 지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철칙으로 삽니다. 그런데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을까 분노가 솟아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큰 계명을 어겼을 때는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누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너무 약속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탁탁 맞습니다. 나는 돈 계산이 또렷한데 이 사람을 십 원짜리 하나 빌려가고서도 칼같이 달려와서 갚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 만났을 때 이 사람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극구 칭찬을 합니다. 자기하고 인생관이 딱딱 맞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끔 어깁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연약한 인간이 그럴 수 있지. 주님이 좀 참으셔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멘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짓밟힐 때 가슴이 찢어지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 인생관이 이런데 그 인생관이 짓밟힐 때 가슴이 찢어지는 분노가 생겨나고, 주님의 말씀을 위해서는 순교할 생각이 안 들어도 자기의 인생관을 꺾느니 차라리 장렬하게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쓸데없이 설교시간에 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일상적인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가치관의 우선순위 자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편성되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런 가치 판단과 마음의 질서로 사람들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판단을 내리는 그 판단이 올바를 수가 있겠습니까?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바라보는 렌즈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만 잘 이해하면 신약성경 전체가 살아서 달려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만 살아서 복음서가 살아서 달려오면 그러면 신약성경 전체가 보이고 구약성경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주기도문을 자주 읽으십시오. 저자인 나도 여덟 번을 읽었고 요즘 너무 바빠서 더 읽고 싶은데 못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내 마음에 배도록. 그러면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님의 이름이 언제 거룩히 여김을 받는가? 그 나라가 이루어졌을 때. 그 나라가 성취된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이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제멋에 겨워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심은 거의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일인데 낚시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만날 회사 오면 수시로 칼을 사러 갑니다. 지금은 스위스 칼 어디가든지 인터넷에서도 툭툭 두드리면 배달해 주고 값도 싸지만 그때는 없었습니다. 미제물건 파는데 가야지만 간신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스위스 칼로 붕어 배딸라고. 국산 칼은 배를 따면 생선이 찢어진답니다. 그런데 이것은 ‘솩’ 하면서 잘라진다는 것입니다. 토요일 일요일 계속 밤새워서 낚시하고 월요일은 완전히 팥단지가 돼서 계속 졸곤 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무엇이냐 하면, 낚시 동회회가 있었는데 동호인들이 모여서 어느 낚시가게가 아지트가 되고 거기서 늘 모였었는데 어떤 정말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낚시회 발전기금으로 백만 원을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제 월급이 7만원에서 8만원 될 때였습니다. 그게 나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것이 아무리 낚시가 좋아도 어떻게 저렇게 우리 일 년 치 연봉도 넘는 돈을 자기가 취미 생활한다는 이유로 그럴 수 있을까? 그게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게 자기가 좋아하면 거의 종교적인 수준으로 상승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희열을 느끼고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책입니다. 책에 대한 욕심은 옛날 보다는 많이 없어졌습니다. 집 큰 것 가진 사람 하나도 안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가서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부자가 아닌 게 너무 슬펐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그 흔한 유산도 안 남겼을까? 유산을 많이 남겼으면 논 팔고 땅 팔아서 이 책을 다 사갈 텐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결국 얼마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의해서 자기의 가치관이 형성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깨어진다고 할 때 그런 것들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멘의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 하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겠느냐?” 당신이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하니까 세례 요한이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나 같은 죄인에게 세례를 받습니까? 나는 당신의 신들메도 풀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내게 세례를 베푸셔야지 제가 어떻게 베풉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허락하거라 이렇게 네가 나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그 의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한 아멘의 삶의 사셨던 결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날 밤 기도할 때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진액을 짜 붓는 기도를 깊이 드리실 때 그때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의 잔을 피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기도를 바꾸셔서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기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운명을 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다 이루었다”(요 19:30)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내 야망을 다 이루었다, 내 꿈은 다 성취되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사람의 몸을 입혀 너희에게 보내신 그 뜻을 다 이루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멘이신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꽃처럼 빛나는 화려한 생활이 아니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생활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디서든지 자기를 향한 교회를 향한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품고 계신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큰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멘의 삶을 사셨고 그랬더니 그 한 사람 예수의 아멘 때문에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아담이 아멘의 삶을 살지 않았더니 죽음과 죄가 온 인류를 삼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능력, 산을 옮길만한 믿음,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헌신, 그런 것 없어도 아멘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주 크고 어마어마한 일들을 위해서 아멘하려고 하지 말고 아주 작은 것부터,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일에, 적은 일에 충성했던 사람이 큰일에도 충성합니다. 작은 일에 아멘 하던 사람이 믿음이 자라며 큰일에도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앞에 아멘의 삶을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충성이신 예수
두 번째는 충성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아멘이 그분의 삶의 목표를 보여준다면,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만 삶의 목표는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하위의 타깃입니다. 아멘이 그분의 삶의 목표라면 충성은 아멘을 이루신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성도로 살면서 두 가지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괄적인 헌신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내 인생은 전부 우리 주님 것입니다. 아멘.” 고백에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어른들이 꼭 애들 세뱃돈 잔뜩 걷으면 보관했다 준다고 하면서 엄마아빠들이 빼앗아갑니다. 그래놓고 ‘이거 다 네 거다.’ 그래놓고 매일 학용품하고 운동화만 사 줍니다. 그 돈에서. 애들은 그런 것은 세뱃돈이 아니어도 엄마 아빠가 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난감도 사고 뭐도 사 먹고 싶은데 안 줍니다. 그리고 말로만 ‘다 네 거다. 봐라. 통장에 들어있지 않니? 네 거지? 다 모아서 학교 갈 때 등록금으로 쓰자.’ 애들은 아무도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 주님 다 받으시옵소서.” 말로만 그러면 뭐합니까? 그런데 그 포괄적인 헌신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저의 인생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 안 되고 매일 매일 매 순간 드려야 합니다. 차라리 “예수님, 저는 정말 아무리 내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보아도 내 인생을 주님께는 드린다고 말씀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 드리면서 살겠습니다.” 이러면서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자기 인생을 드리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지, “내 인생 모두 주님 것입니다. 그 대신 죽을 때 가져가십시오. 그때까지는 내 맘대로 좀 살겠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절제를 주옵소서. 순결을 주옵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왜? 지금은 아직 젊으니까. 그러면서 고백하는 말이 “절제를 주옵소서. 순결을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다가 만약 하나님이 냉큼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나는 얼마나 억울할까? 그런 마음에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절제를 주옵소서. 순결을 주옵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놀리는 것이지요. “하나님 내 인생 다 주님 것입니다. 갖고 십지요? 메롱.” 그러면서 살짝 집어넣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감정적 헌신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확 하고 마음이 달아오르면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싶기도 하고 순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저도 한 몇 년 동안 순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더 힘든 것은 순교로 죽는 게 더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정신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의 별명은 충성이셨습니다. 충성은 한 순간에 ‘확’하고 솟구치는 열 받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충성은 오랜 사랑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인격적인 특성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이 충성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충성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익이 남으니까 그 일을 하는 것이고 무언가 자기 열정에 들떠서 그 일을 하는 것이지 사랑이 없으면 충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우면서 난폭하고 거친 사람들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념에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짓밟힐 때에는 아무 소리도 안 하던 사람이 자기 인생관이 짓밟히는 상황이 벌어지면 순교를 각오하고 일어서서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충성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우리 지난 주 수요일 설교에 정탐꾼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논리는 정말 비관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논리적입니다..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믿음에 호소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호소가 됩니까? 믿음이 없는데 호소가 됩니까? 애국심에 호소하라고 하는데 애국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호소가 되겠습니까? 호소가 안 됩니다. 오랜 사랑에서 빚어지는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정말 충성된 사람들 그 충성이 성령의 열매인 그런 종류의 충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인격의 특징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사실 제가 20여년을 넘게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했고 한 5천5백번 가까이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저의 눈을 열어주셔서 저의 인생을 바꾼 말씀이 고린도전서 13장이었습니다. 거기서 정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그러니까 모든 우리의 덕스러운 행동이나 모든 칭찬할만한 특징이 그 사랑에 걸리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양장점이나 백화점에서 찬란한 불빛을 받으며 걸려 있는 예쁜 옷들 그게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으면 너무 예쁩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떨어졌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 그 옷이 그렇게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땅에 떨어져 꾸겨져 던져져 있으면 상품으로 가치가 없고 아주 무가치해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행실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거기에 걸려 있을 때만 아름다운 것입니다. 집에 가서 실험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옷 한번 들었다가 옷걸이 치워버리고 땅바닥에 던져보십시오. 품위가 있나. 그냥 곧 쓰레기통에 들어갈 물건처럼 보이거나 더러워서 휙 벗어놓은 빨래 통에 들어갈 옷처럼 보일뿐입니다. 거기에 품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온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강령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못입니다. 벽에 박힌 것. 거기에 걸린다. 그래서 선지서에 가르침, 율법에 가르침 모든 것들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그 못에 걸리는 것입니다.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누구를 한 나라의 지도자로 세워놓으면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서 아주 평범한 시민이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사람이 행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충성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그의 직분이나 지위가 만들어준 열심인가 하는 것은 자신이 거기에서 리더의 위치에서 있을 때는 증명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거기서 내려와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에도 하나님 사랑했던 사람들은 방법은 달라도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섬기고 하나님 의지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충성은 오랜 동안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빚어진 인격의 특징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한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삶으로 뻗쳐진 힘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뻗치는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런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온 사면을 두루 살피며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충성스러운 삶 속에서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살 때 환경이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온갖 시련과 도전, 제자들의 배반, 그런 많은 시련과 환란이 끝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충성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아멘 없는 헌신은 자기 꿈의 성취를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이에 비해서 헌신이 없는 아멘은 자기기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우리의 영혼 저 깊은 곳에서 터쳐 나옵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습관적으로 아멘 하는 것 너무 싫습니다. 아멘 할 때에는 이 속에서 사실은 살을 찢으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 그게 뭡니까? 경박스럽게. 삶으로 아멘을 말해야지 그게 진짜 아멘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은 자신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면서 사는 사람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곳에서 자신도 기뻐하고 그 뜻에 일치를 이루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의 삶에도 최고의 기쁨이 되는 삶 그 삶이 충성스러운 자의 아멘의 삶입니다.
여러분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다음 주면 11월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30일이 물론 남아 있지만. 12월은 달력의 마지막 장입니다. 한번 개명을 해보시면 어떻습니까? “나의 별명은 이제 아멘이다.” “아멘.”
(찬양)
주 뜻 이뤄지이다
정말 이렇게 아멘이시며 충성이신 예수님 따라 여러분도 아멘의 삶을 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충성된 자를 기뻐하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