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섬김
(2016년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6년 1월 11일-1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016년 1월 19일
목 차
1. 말 없이 헌신함(막 14:3-5) 2016.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
2. 인정받은 섬김(막 14:6-8) 2016.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4
3. 사랑을 기념함(막 14:9) 2016.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8
4. 고난 당하는 종들(눅 20:9-12) 2016.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2
5. 심판하시는 하나님(눅 20:13-18) 2016.1.15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16
침묵하는 섬김 1 (2016.01.11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말없이 헌신함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막 14:3-5)
녹취자: 김세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실제 나병이 걸린 사람과는 율법적으로 또한 법률적으로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약 이 사람이 정말 나병을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이 집에서 식사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나병이 걸렸다가 나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 사람이 언제 나병에 걸려 어떻게 그 나병에서 치료가 되고 왜 예수님을 모셔다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사람이 나병 환자로서 고생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매우 특별한 인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쩌면 예수님에 의해 병 고침을 받았던 인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때 예수님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고 그 때 예수님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인 그 여인입니다. 여기에 보면 꽤 긴 본문 속에 이 여자의 대사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여자는 행동만 있었고 말, 담화 자체가 나오지 않는 그러한 인물입니다. 아주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라고 하는 향품,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은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와서 부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라 되어있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 이상 팔아, 데나리온은 한 남자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하루의 품삯이었습니다. 오늘날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 10만 원 쯤 받는다고 치면 3천만 원이나 되는 굉장히 큰 액수의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붓지 말고 판다면 3천만 원 이상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말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가 책망 받을 만한 일을 하였습니까. 설령 그 나드가 3천만 원 이상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 것을 가지고 와서 자기 원하여 예수님께 부었는데 이 여자를 책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 가치로 나드를 환산하며 이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 보다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이 여자를 책망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면 자기네들이 무엇인가 팔아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되지, 남이 하는 일을 책망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으며, 이 여자가 책망 받을 무슨 잘못을 하였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그 앞 절에 보면 사람들이 화를 내었다고 하였습니다. 화를 내면서 어떻게 해서 이 소중한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여자를 책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어 그렇게 많은 돈을 허비하는 것이 좋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함께 식사하면서 이렇게 거액의 향유를 자신에게 부어 그것을 허비하는 것을 좋아하셨을 리 없습니다. 사치한 삶과 예수님의 생애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의 한 일을 보면서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이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이 당신의 장례를 위해서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을 알고 이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이 여자의 이 값진 희생을 당신의 장례와 직결시킴으로써 이 여자의 섬김이 당신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여자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미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기를 위해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도 고귀하기 때문에 기꺼이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부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고 사랑은 끊임없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알도록 일깨워주고 사랑은 그 일깨워준 마음의 필요를 따라 그에게 무언가를 행하여 그의 필요를 채워 그를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해 주려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여자가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부은 것이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시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면 그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그것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 복음의 의미를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그 분께 무엇인가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렇게 억울할 정도로 사람들이 화를 내며 사람들이 자신을 책망할 때에도 이 여자는 대꾸하거나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이 본래적으로 해야 할 그 일에 더욱 집중하며 자신을 헌신하였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이 잘 이해해주고 그래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우러러 보일 수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모든 사람이 내 마음을 나처럼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부모 자식 간에도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인데도 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이 믿음을 따라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그래서 섬기는 것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이해하고 그리고 그를 존경해줄 수 있다면 구약에서 수많은 선지자들과 그리고 신약에서 많은 사도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모진 박해를 받고 순교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따라 주님을 섬기며 그것으로서 충분하다, 때로는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정해 줄 때도 있지만 혹시 그렇지 않을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겠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주님을 섬기다가 비난을 받을 때 그 때 그 섬김이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지 혹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인정인지가 거기에서 판가름 나게 됩니다. 주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고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지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나를 이해하시고 내가 섬기는 것을 받아주신다는 이유 하나로 깊이 만족하고 주님 의지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된다면 그것으로서 충분해 하는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삶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십니다. 당신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때에 그들 곁에 계시고 보이지 않지만 그들 곁에 계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십니다. 주님이 나의 섬김을 받으시고 그리고 나의 눈물을 기억하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이렇게 논쟁하며 싸우는 대신 모든 부당한 대우를 그대로 견디며 변함없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여 주님을 섬겼던 이 여자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침묵하는 섬김 2 (2016.01.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인정받는 섬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6-8)
녹취자 : 김세나
이렇게 침묵하는 섬김으로 주님께 정성껏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온 것은 예수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자기를 깊이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의 섬김에는 반항이나 말이 없었습니다. 이 섬김 자체가 워낙 이 여자의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 우러나온 봉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책망하거나 혹은 화를 낸다고 해서 휘청거릴 수 있는 그러한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는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고 그러자 그 향은 예수님의 머리로부터 시작해서 온 몸 아래로 흘러내리며 식사하시던 그 장소를 향유의 냄새로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기쁘게 받으시는 최고의 섬김은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깨뜨리지 않았을 그 무엇을 깨뜨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뜨려드릴 예물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깨뜨려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드리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자기가 변화되는 과정이 되고 섬기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섬기기 이전의 그 사람보다 더욱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서도 그 사람의 인격의 변화가 없는 것은 그 섬김의 동기가 단지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의 욕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사람 그 자신을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더욱이 그 욕망이 신령한 욕망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서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드러내기 위한 것일 경우 더더욱 그렇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많은 금식과 기도, 그 많은 섬김, 자신의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율법을 따라 사는 그것이 과연 그들을 바꿔 놓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그러한 타박과 비판, 책망을 받으면서도 한 마디도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섬김에 어떠한 착오도 없이 마음의 계획한 대로 주님을 향한 섬김을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거나 혹은 이렇게 책망 받을 때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우리 모든 생각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여자를 보십시오. 일체 침묵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분노나 책망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일을 그대로 감당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결국 주님이 이 여자의 섬김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여자가 하는 일을 변호하고 옹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제자들이 화를 내고 왜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책망하고 이렇게 하는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야 예수님은 이렇게 이 여자가 행한 일을 인정해 주셨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에서는 이 의미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만나서 우리 스스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두 알고 계시지만 그것을 우리 앞에 실제로 보여 주어서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게도 하시고 또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게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것을 진작에 아셨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주님 앞에 재물로 바치는 그 직전까지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이삭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바치겠다고 하는 마음의 깊은 결단이 실행되는 것을 보시면서 비로소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아무 것도 행하지 말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 예전에는 우리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그러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러한 모든 섬김의 과정에서 그의 모든 섬김의 동기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지,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동기에서 섬김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굳건하고 순수한지 끊임없이 측정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보여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너는 이 섬김을 통해서 이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놀랍니다. 아, 내가 엄청난 사명감으로 이 일을 시작하였지만 조금 이 일이 어렵고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고 난관이 올 때 이렇게 쉽게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믿음의 한계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자기가 누구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에게 깊이 실망하는 대신 우리 주님께 기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견딜 수 있는 인내를 달라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을 달라고 그리고 이것을 피해갈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달라고 간구하고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끝까지 고난만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시시때때로 고난에 처해 있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그러한 깊은 위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이 여자를 향해 화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이 여자의 향유의 가치를 300 데나리온이라고 측정하고 이렇게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낭비하기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참 좋겠다는 논리로 여자를 책망한 것은 사람 보기에 정말 반듯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기에는 이것은 모두 당신을 사랑하는 한 여자의 섬김에 괴로움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논리가 반듯하고 훌륭하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궁극적인 관심사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300 데나리온이라는 돈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지금 예수님께 이 값비싼 향유를 부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 향유는 재산 축척의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그 향유를 조금씩 모아서 그래서 많은 향유를 소유하게 되었고 언제든지 이것을 팔아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이 향유를 조금씩 조금씩 저축하면서 일정한 액수가 모이면 그것을 팔아서 자기의 인생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주님이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주님께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림으로써 이제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것을 가리켜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만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사람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로부터 유익을 얻게 됩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교정될 것이며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도움을 받을 것이며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진리의 빛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자기를 모두 드린 사람이 왜 주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자가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결국 이 여자가 행한 일이 왜 좋은 일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겠지만 나는 너와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물론 우리는 이 여자가 예수님이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예수님 말씀처럼 향유를 부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아마 그러한 가능성은 칼빈이 지적한 대로 매우 적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그래서 이 소중한 나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향유 부은 이 사건을 당신의 장례와 연결시키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생애의 말기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했으니 예수님이 일주일 안에 십자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그 때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이 여자가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당신이 인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당신의 죽음과 그 의미를 연결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자의 이 섬김은 얼마나 탁월한 섬김이었습니까? 옥합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깨뜨려 부었더니 예수님은 그것을 당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여자를 의지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외로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주님의 마음에 어떠한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다.” 즉, 가난한 자들은 어느 때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언제든지 그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의 장례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일은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으로서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그 모든 봉사에 대해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던 어느 한 부분을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온 마음을 다해 섬기고 때로는 역경을 만나고 주위의 사람의 비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오래 인내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일체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경건으로 주님 앞에 보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젠가는 주님이 자신의 모든 이 섬김을 받으시고 자신의 봉사에 대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시고 용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세상이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고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쥐꼬리만 한 섬김으로 즉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에게도 영광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일수록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결국 이 여자의 섬김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려 주셨고 더 이상 이 여자의 섬김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의 섬김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밝히 말씀하시고 이 여자의 편을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구 편에 서시겠습니까? 새치의 혀로 끊임없이 떠들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섬김을 과시하는 사람 편에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때로는 오해받고 때로는 이 여자처럼 책망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는 섬김으로 일체의 침묵과 온유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 편에 계시는 주님이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가 주님을 섬기는 모든 동기가 되도록 그렇게 자신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침묵하는 섬김 3 (2016.01.13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사랑을 기념함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 14:9)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없이 침묵 속에서 당신을 섬기는 이 여자를 인정하시고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최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의아한 마음이 듭니다. 이 여자가 힘을 다해서 자기의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었고 제자들의 반대나 혹은 책망을 무릅쓰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은 인정이 되고 또 그래서 예수님이 이 여자가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한 것도 이해가 되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 사건이 그렇게 엄청난 사건인 것처럼 말씀하셨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죽고 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3천만 원에 달하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부은 사건은 좀처럼 반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온 천하 어디에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렇게 기념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선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무게감 있게 제자들에게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어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 중 하찮은 것이 없지만,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하실 때 아주 후렴구처럼 사용하셨던 도입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서 이하에 나오는 여자가 당신께 향유를 부은 사건에 대한 마지막 평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보여준 복음사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어떤 내용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여 기념한다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이 사건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이 사건이 사람들에게 즐겨 오르내릴 것이며 그때마다 이 여자가 행한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신앙에 있어서 거의 본질과 같은 사건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여자의 행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식사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것뿐입니다. 일체 이 여자의 대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여자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책망하였지만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거나 혹은 반박하는 대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만 나오지 실제로 여자의 대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일을 행하였다는 것입니까?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 그 자체가 똑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여러 번 반복되어서 나타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향유를 부은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만 그것을 같은 사건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이 있고 다른 사건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 여자가 행한 것과 똑같이 옥합을 깨뜨려서 계시지도 않은 예수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었다는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들었습니까? 교황에게도 이렇게 하였다는 것을 들은 적은 저는 없습니다. 엄청난 금액의 향유를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여자가 행한 무슨 일을 말하여 기억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 여자가 행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그 사건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였던 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던 어떤 동기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에서든지 그 복음의 진정한 감화를 입은 모든 사람이 이 여자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심정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자와 똑같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께 붓는 행동을 하지는 않겠지만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었던 똑같은 어떤 일이 복음이 전파되어 그 복음이 감화를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향유는 재산 축척의 수단이었습니다. 우리가 금을 모으는 것처럼 그렇게 모아서 언제든지 시장에 내다 팔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재산 축척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당연히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에 사랑함도 많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바뀌고 보니까 예전에 이 향유를 모아서 모아진 이 향유를 가지고 바뀐 인생을 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의 용서를 받고 나서 삶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향유를 모아서 그 물질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인생을 바라보던 모든 관점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이 여인이 바리새인으로 추정되는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유명한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났고, 제자들이 화를 내며 이 여자를 책망하는 대도 추호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나갈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위대한 힘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참게 만들고 이해받지 못할 때 그것에 연연하지 않게 만들고 또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때에도 그것을 참을 수 있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자의 마음속에는 예전에 없던 사람이 생겼습니다. 예전에 없었던 사랑이 이 여자의 마음속에 생겨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러한 물질 따위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만나 주신 예수님,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자신의 인생의 중심은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은혜, 그 분의 십자가의 사랑, 그 분의 용서, 그 분의 모든 은총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과거로부터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행동이 바로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던 그 물질을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은 낭비되는 향유를 바라보며 돈을 계산하고 있었지만 이 여자의 눈에는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향유의 값어치를 마음 쓰지 않고 오히려 그 모든 것보다 귀하고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 깨뜨려 바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실제로 이 여자의 마음에 있었고, 또한 역사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것을 말하여 기억하리라.”고 한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였다고 칩시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가장 커다란 느낌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아닙니까?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고 그 분이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불행이 자기 밖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니까 사실은 자신의 불행이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였던 자기 안에 있는 요인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가 이 새벽에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씁니까? 이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랑이 우리 안에 역사하도록, 이 사랑이 우리 안에 끊임없이 감화되도록,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은혜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종교와 문화, 피부색깔, 나라와 상관없이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어 그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에 감화를 끼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이러한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나를 주인 삼으며 살았던 모든 날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는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다. 자기 포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위해 살고 예수위해 죽고 예수위해 참고 예수위해 복음을 전하고 예수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러한 삶을 기꺼이 살아가게 되는데 그때 그 사람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신앙과 정신의 작용이 이 여자의 마음속에 일어난 사건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이렇게 향유를 붓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고 그 고난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는데 결정적인 구속행동이 될 것이라는 것까지는 몰랐고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동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것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 마음속에 있는 용서받은 자로서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사랑으로 평가하셨고 그리고 이 향유 부은 것이 당신의 죽음을 예비한 것이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지금도 죽고 계십니다. 당신은 단 한번 십자가에서 찢겨 고난을 당하셨으나 교회는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끊임없이 고통을 겪고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좁게는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좀 더 넓게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좀 더 넓게는 이 세상 모든 인류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복음이 한 사람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끼쳤을 때 복음은 언제나 그 사람을 바꿔 놓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희생하셨을 그 일을 위해 희생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온 마음을 다해 그 일을 행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비록 이 여자처럼 유명하지 않고 부자도 아니고 높은 권세를 갖은 사람도 아니지만 이 여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주 앞에 섬기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 여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침묵하는 섬김 4 (2016.01.14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고난당하는 종들
“그가 또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새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눅 20:9-12)
녹취자: 김세나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하는 이 짤막한 비유 속에는 매우 복합적인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가나안 땅을 주신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요청한 것과 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이스라엘의 죄들, 그리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실 우리 주님의 원대한 계획들이 이 적은 분량의 비유 속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주연이 아닌 조연인 사람들입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위대한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다른 민족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모든 혜택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포도원이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 백성을 심은 것은 거기에서 극상품의 포도를 얻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땅을 개간하고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고, 그 포도나무에 비료를 주고 추위와 더위, 가뭄으로부터 그 나무를 보호하여 잘 가꾸는 농부는 그 포도원에서 좋은 포도를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포도원에서 나는 열매가 들 포도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 애를 써서 포도원을 가꾸겠습니까? 그러한 포도는 포도원을 굳이 가꾸지 않아도 산이나 들판 어디를 돌아다녀도 어디에나 널려져 있는 것이 들 포도인데 그것과 똑같은 포도를 생산하기 위해 그 많은 수고를 들여 포도원을 만들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주인공이시지만 많은 사람들, 눈길을 잘 주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그 사람들을 보면서 새벽 설교 시리즈에 합당한 이야기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여 가나안을 주신 것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포도원만 만든 것이 아니라 거기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살 집, 포도를 소출해서 그것들의 즙을 짤 수 있는 시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일체 만들어서 몸만 들어와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포도원 시설을 해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셨을 때 허허벌판을 주셔서 개척하고 건설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같이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심지 않은 밭에서 곡식을 거두며 그렇게 모든 것을 수고 없이 누리게 해 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농부들이 그 세를 주고 들어왔을 때 그것은 엄청난 혜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혜택이었고 아마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농부들이 그러한 혜택을 받기를 원하였을 텐데 주인은 모든 백성에게 이러한 혜택을 주지 않고 자신이 합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혜택을 누려 포도원에 사실상 주인이 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혜택과 은혜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고, 그들이 지불해야 할 의무는 아주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거저 얻은 것과 다름없는 포도원에서 소출이 없으면 안 내도 되고 소출이 있으면 그중 일부를 주인에게 약속한대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원에 심어 놓으시고 거기에서 극상품의 포도를 원하셨다고 하였을 때 그것의 내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원 삼아 그곳에서 원하셨던 열매는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의와 공평이었습니다. 그 의와 공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헤세드, 곧 하나님의 인자하심 아래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열매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될 때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대하게 되어 평화로운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소작료라고 하는 상징언어를 가지고 지금 비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종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주인은 자신의 종을 소작인들에게 보내었습니다. 아마 이미 약정이 되어 있었으니까 농부들이 착념만 하고 있다면 당연히 때가 되면 소작물들을 주인에게 보내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맺은바 약조였습니다. 저희도 예전에 할머니 살아계실 때 시골에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을 되면 항상 그 땅에서 나는 식물들을, 그렇게 그 땅을 맡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늘 가지고 왔습니다. 감, 밤, 쌀, 이러한 것들을 싣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작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의무이고 이미 받은바 혜택에 비교하면 이것은 그리 큰 의무일 수 없습니다. 집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거처할 곳이 없고 그리고 식물을 생산해도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시설이 전혀 없는 사람들, 사실상 나그네와 다름없는 사람들에게 그 모든 시설들이 제공된다고 하는 것은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아마도 때가 이르렀는데도 약속한 소출이 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자기의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갈 때 그가 가지고 간 메시지는 아주 단순하였습니다. 너희들이 큰 은혜를 입어서 이 모든 것을 거저 누려 1년 동안 농사를 지었고 소출이 생겼으니 이제는 약속한대로 소작료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농부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무슨 뜻입니까? 약조한 소작료를 주지 않고 그렇게 명령을 받고 온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종이 얻어맞고 왔을 때 주인이 하는 행동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도 몹시 때리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몹시 때린 것은 앞에 있는 종들에게 행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고, 하나다 보태어서 능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욕을 보인 것입니다. 몹시 때렸을 뿐 아니라 아주 치욕스럽고 욕이 될 만한 그러한 비열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또 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행동이 계속됩니다. 이렇게 한 종이 가서 얻어맞고 소출도 못 가진 채 오면 그 다음엔 군대를 데리고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 종을 똑같이 보내었는데 이번에는 더 큰 모욕까지 받고 돌아옵니다.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몹시 때렸는데 그 때린 정도가 죽음에 이르게 된 정도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고 거저 보낸 것이 아니라 내쫓았다고 나옵니다. 능욕뿐만 아니라 아주 멸시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 종들은 구약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모든 은혜를 주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누리게 하였으니 이제 그 받은바 은혜를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께 의롭고 공평한 삶을 살라 한 그것이 선지자들의 메시지였습니다. 선지자들이 무슨 돈을 거두어서 바치라고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부터 시작해서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한 마디 대사도 나오지 않는 종들입니다. 세 명의 종들이 주인에 의해 파송되었고 그 결과는 맞고 거저 돌아오고, 맞고 능욕하고,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히 얻어맞고 내쫓김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 종들은 누구입니까?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선지자는 언제나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묘사하였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할 일을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미리 가르쳐 주시는 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만 사랑하신 게 아니라 이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아버지가 제사장이면 아들도 제사장이 되고 그 직분이 계속 대를 물립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선지자였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고 소명을 받음으로써 선지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명은 다름이 아닌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룩하심과 구속의 은혜를 아는 것,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모두 사무치게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고통을 받는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고난을 받고 돌아왔는데 아무 대책 없이 그 다음 선지자가 파송되고 그가 더 고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왔는데 세 번째 파송을 받고 그 종은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내쫓김을 당하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무 대사가 없습니다. 말이 없습니다. 이 종들은 자신이 소작료를 못 받아 왔기 때문에 자기가 이들에게 간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일의 성과만이 아니라 자기를 사명을 주어 파송한 주인, 그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을 공경하고 주인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와 혜택이 무한하기 때문에 그 주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이 파송 명령에 순종하고 그곳에 가는 사람이 선지자였습니다. 거기에서 소작료를 못 받고 얻어맞고 쫓겨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렇게 거저 돌아왔는데도 두 번째 종은 파송되면서, “아니, 주인님 대책을 세워주셔야지, 이렇게 앞에 있는 선배가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저도 똑같이 대우할 텐데 저를 보내십니까? 다음 사람이 얻어맞을 뿐만 아니라 능욕까지 당하고 인간으로서는 당할 수 없는 끔찍한 모욕까지 받으며 돌아왔는데 저도 똑같이 가라는 말씀입니까?”라고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조용히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모두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섬긴 방식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봉사와 섬김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또 그것에 대해서 적절한 칭찬을 해주고 더욱이 그것 때문에 주인에게로부터 상당히 보상이라도 받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섬김은 항상 그렇게 좋은 것으로 즉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되게 살았는데 모욕을 당할 때도 있고 순전하게 하나님을 섬겼는데도 욕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라고 부르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노래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종들에게 아무 보상을 안 하신 것 같지만 결국 뒤편에 가면 이러한 악한 농부들을 모두 진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행하심으로써 변함없이 당신을 섬겼던 이 사람들의 침묵하는 섬김을 갚아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뜻을 세우고 어떠한 선한 일을 하려고 하여도 어려움을 겪는데 이 세상의 한 인간으로 태어나 땅에서 태어나 하늘 가치를 따라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어떻게 그 모든 섬김이 이해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 모든 섬김이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겠습니까? 고난도 만나고 시련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도 이 주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침묵하며 주님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13-18)
녹취자 : 김세나
종을 셋이나 보냈는데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상하게 하여 내어 쫓았습니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포도원 주인은 더 놀라운 결심을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낼 것이니 그들은 그 아들을 존대하리라, 생각하고 그의 아들을 보냅니다. 그랬더니 그 농부들의 악함이 아주 현저하게 드러났습니다. 아까 왔다간 세 명은 그저 그 주인의 부리는 종들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었지만 이 아들은 포도원을 만든 주인의 자식이고 이 포도원을 물려받을 상속자니까 만약 이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원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기로 모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마지막에 가서 그 포도원 주인의 아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명백하게 구약의 선지자들의 박해에 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죽으실 것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한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신 후 이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끔찍한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결국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그 포도원 주인이 소작인인 그들과 언약을 맺고 마땅히 그 주인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많은 은혜의 혜택을 누렸으니까, 소작인으로서 마땅한 의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이 수확한 양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의 소출을 주인에게 소작료로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모든 시설들을 갖추어 놓고 포도열매 맺는 포도나무도 있고 집도 있고 그 즙을 짤 수 있는 틀도 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그것을 거저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그것을 자기네 것처럼 여겼고 그리고 거기에서 일부를 소득의 대가로 주인에게 줘야 한다는 것을 매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탐욕이 아주 거대한 욕심으로 변했고 그러자 그들은 견고하게 자신들의 유업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마땅한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해 온 주인이 보낸 종들을 몹시 때리고 능욕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오자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에도 보면 ‘사랑하는 아들’이란 이야기만 나오고 그가 보냄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나오지, 아들의 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악한 농부들의 대사만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하는 아들도 여기에서 아무 말 없이 죽임을 당하고 죽어갑니다. 얼핏 보면 아무런 대책도 능력도 없이 당신을 사랑했던 종들을 죽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자기 아들조차 죽임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 그러한 잔인한 주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이 능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인은 농부들을 사랑했고 이 농부들이 포도원 없이 땅 없이 그렇게 불행하게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을 가엽게 여기며 포도원을 만들어서 그 포도원에서 세를 들도록 모든 준비를 갖춰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대한 이 농부들의 반응은 끊임없이 보냄을 받은 그의 종들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상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에는 그 집의 친 아들까지도 죽여 버리는 것으로 되갚았습니다. 아들도 앞에 간 종들을 따라서 일체의 대사가 없이 오직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서 그 소작인들에게 마땅히 바쳐야 할 소작료를 내도록 전달하도록 메신저의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끔찍한 죽음이었습니다.
자, 여기에서 스토리가 끝나는 것 같으면 말도 안 된다고 성경을 던져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토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따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이 답까지 말씀하시면서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이,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농부들이 행한 종들을 죽이고 마지막에 아들을 살해한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아주 커다란 죄악이라는 것을 일반 백성들까지 깊이 동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 모든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무릇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들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돌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이 돌 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면 공중에서는 상체가 무겁기 때문에 당연히 다리가 위로 들리고 머리가 아래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떨어지는데 밑에 돌이 있습니다. 바위가 있습니다. 거기에 부딪히면 머리가 산산이 깨져서 죽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 살아계실 때 그의 교훈에 반대하고 복음을 거절하고 예수님께 대적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악인이 성공하는 것 같고, 승리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으로 보면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능히 이기고 또 죽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일은 원래의 하나님의 도덕적인 법칙으로 돌아가게 되고 악인은 망하고 옳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인정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 뒤에 나오는 “돌이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는 말씀은 이제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또 부활하신 후에도 아직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그에게 대항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돌진하여 그에게 부딪혀 깨어지지만 마지막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당신을 믿지 않고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은혜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준엄한 심판을 예고하심으로써 이 비유를 끝내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비유를 끝까지 듣지 않는다면 아들이 죽은 대목까지만 듣는다면 그렇게 주인의 명령을 받들어 이 포도원 소출을 내노라고 메신저로서 농부들에게 갔던 세 사람의 종과 그리고 마지막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허무하게 보이고, 그리고 그들의 섬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성을 다해 주인의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그리고 전해야 할 주인의 음성의 가치는 기꺼이 맞고 능욕을 당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었고 아들이 죽임을 당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경고 없이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깊은 경고 속에서 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신 후에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당신의 아들의 죽음의 터 위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심판을 행하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악한 포도원 농부들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지, 영원히 참으시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그 일에 대한 결말이 있을 것이고, 이 때 주인을 대적하였던 포도원 농부들이 진멸당하는 것처럼 또한 인류가 그러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겠습니까? 때로는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더러운 사람들로 얼마나 오해를 받았겠습니까? 심지어 그가 악하고 주님의 교회에 나쁜 사람이라고 역사적으로 종교재판을 받고 사라져간 사람 중에는 정말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실한 종이라고 자신을 가장하고 주님의 교회를 허물어트리고 악을 행하는 일을 얼마나 무도하게 자행하였겠습니까? 때로는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완벽하게 판단할 수 없고 시간이 흐르는 역사 속에서 거짓된 것이 참된 것을 몰아내는 것 같고, 악한 것이 선한 것을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흘러가는 역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도 때로는 이러한 현실에 현혹이 되어서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결정하든지 하나님의 옳음을 바꿔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휘지 않는 법으로 언제나 사람들을 최종적으로 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비유 속에서 나타나는 주연이 아닌 조연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차피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하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독특성은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이 세 종, 아무 대책 없이 보냄을 받아 맞고 심히 능욕을 당하고 마지막에 심히 상하게 되는 이 끔찍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충직하게 침묵 속에서 주인의 명령을 따라 이 메시지를 전달하였던 섬기는 태도, 이것들을 우리들이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의 섬김이 하나님을 향한 섬김인지 사람 앞에서 보이도록 하는 섬김인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오랜 인내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가운데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하며 미워하고 증오하고 욕설을 퍼 붓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일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야 말로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진정한 섬기는 이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결코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아마 이 종들은 비록 이렇게 수없이 매 맞고 능욕을 당하였지만 주인이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날에 크게 칭찬을 받고 상을 받고 그래서 인정을 받는 종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까지 신실하게 침묵하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