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목회를 하라
녹취자: 장형주
지금 우리들이 교회를 해 나가고 있고 이런 속에서 지금 최근에도 논쟁이 많이 벌어지고 있지만 마케팅 교회 그 다음에 신사도 운동, 방언 운동, 예언 운동 해가지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저한테 허락된 시간이 9시. 좀 더 하려면 9시 반이나 그저 두 시간에서 세 시간 하라고 그랬는데 그 시간까지 다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힘껏 문제들에 접근을 해서 우리들이 일방적으로 하면 내가 삼십분에 하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여러분들이 문제를 느끼고 돌아가서 고민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공부안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진짜로. 굉장히 혼란스럽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또 매번 올 때 그냥 오지 않고 뭐라도 가지고 왔는데 그래서 사실 최근에 이런 문제를 느끼면서 제가 교회에서 그 정기적으로 중생과 회심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그거를 한 것을 이렇게 풀어 가지고 사실은 정리가 좀 됐는데 뭐 그렇게 가벼운 내용은 아닙니다. 대신 각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했는데 그래서 이 책을 여러분 드리려고 350권을 출판사에다 주문해서 창고에 갖다 놨는데 가만히 생각하고 나니까 이것을 주는 것보다도 기독교에서 구원 전체가 이 기독교 신앙과 사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이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를 먼저 여러분들이 전체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야지만 이 회심목회가 왜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냐는 문제가 이해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실은 그래서 이것 두 권을 다 드렸으면 좋겠는데 이것은 내가 가지고 오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해서 너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면서 사실 이 책은 이것보다 훨씬 더 두 배쯤은 안 되지만 70%정도는 더 비싼 책입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이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한 삼년이나 사년 전에 여러분 선배들에게 이거 한권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때는 이제 소프트 커버로 나누어 줬는데 아마 받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계속 낙제를 하셨다던지 휴학을 하셨다든지. 그래서 이것을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지금 정가가 14000원짜리 책인데 끝나고 가실 때 한 권씩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 가져왔는데 320권인가 밖에 못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가시고 못 받으신 분들은 우리 교회 전도사님들이 티켓을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티켓 수만큼 내일이나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목요일이죠? 내일은 좀 힘들겠습니다. 다음 주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 티켓 가지고 오셔서 받아 가시고 이거는 그냥 가지고 가십시오. 이거는 여러분들이 원가에 우리 서점에서 나왔으니까 이거는 여러분들이 필요하면 보시고 아니면 그냥 이거 처음부터 착실하게 읽으시면 제가 왜 오늘 여기서 이렇게 열렬하게 회심목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 희망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포괄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약 270개의 각주가 들어가 있고 참고한 책만 80권 정도입니다. 존 오웬의 책이 10권정도가 참고 됐고 각주에 존 오웬 각주가 약 45개 내지 50개 정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풍부한 청교도와 개혁주의 문헌이 이 아래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따라서 공부해 간다면 구원론을 계속 펼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우리 구원론에 대해서는 대게 성서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이 있고 조직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이 있는데 조직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성서신학교에서 보면 산만하고 성서 신학 쪽에서 설명하는 것을 조직 신학 쪽에서 보면 너무 수박 겉핥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 대신 둘 다 아주 중요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최초로 성경신학과 조직 신학의 통합을 꽤하면서 개혁주의 구원론을 제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서철원 교수님이 여기 계실 때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다 꼼꼼히 읽으시고 추천서를 써주셨습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책을 가지고가서 제가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걸 25회 독을 했습니다. 지금 25회 독 째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걸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 속에 깊이 집어넣어서 이렇게 ‘시작’하면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셨고 죄가 어떻게 들어왔고 인간은 왜 구원받아야 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구원이란 무엇이고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는 그 과정이 어떻게 구원서정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는 서정 속에서 알미니우스주의나 소키누스주의와 어떤 논쟁이 있었고 어떻게 그 교리들이 피를 묻히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개혁교회가 되었는가? 그런 거 우리는 그 교리의 틀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것을 기록을 한 것입니다. 적은 양은 아닙니다. 거의 400페이지 정도 되는 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바는 꼭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기 어려우면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한 챕터씩이라도 묵상하면서 각주 읽지 말고 본문 다 읽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각주에 들어가서 각주를 읽고 이렇게 해서 한 이주일이면 한 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만 말고 계속해서 서점에는 이것에 대한 교제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선 급한대로 아주 급한대로 교회의 장로, 집사, 그리고 교사들만이라도 구원교리를 가르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에 대해서 퀴즈를 한 이십 개 정도 교리적인 퀴즈를 내서 교회에다 나눠주고 풀어보라고 하십시오. 우리교회에선 교리반에서 퀴즈를 내면 신대원 다니는 학생들이 20점에서 40점 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심각한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구원교리만이라도 정확하게 터득해주면 구원교리가 나머지 모든 교리의 집약이 구원교리고 나머지 교리는 구원교리에서 펼쳐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 하나만큼은 여러분들이 확고하게 넣고? 가르치는 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아무것도 몰라도 좋으니까 “공부한다.” 그래놓고 “내가 구원교리를 가르쳐줄게” 하고 큰소리 먼저 쳐 놔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공부 안 해 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가서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굉장히 힘들게 하는 질문 속에 시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타락할 거 다 아시면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부터 시작해가지고 ‘아담에게 영혼을 하나님이 후 불어넣으신 것입니까? 창조된 것입니까?’부터 시작을 해서 그러면서 구원교리를 탄탄히 다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기도하다가 이 책을 주기로 마음에 결심을 하고 급히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끝나고 가실 때 하나씩 받아 가셔서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아무리 난삽한 신학을 공부해도 그것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두 터득된 교리를 가지고 여러분들이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여러분들이 참고로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우선 우리들이 제일 먼저 ‘왜 지금 교회의 목회에 있어서 우리들이 회심목회를 생각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먼저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충격을 받을 이야기지만 교회가 매년 3,000개가 문을 닫는다고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물론 닫은 교회들 중 어느 교회는 영영 사라지기도 하고 좀 더 목회가 잘 될 만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두 번째 개척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3,000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3,000개 약간 안 되는 교회가 다시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얼마나 목회가 어려운가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 하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근데 지금은 안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회자들은 ?개척교회를 했는데 ‘자기는 전도사 때 목회가 안 되는데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저 양반 저렇게 설교를 하니 목회가 될 리가 있나? 행정을 저렇게 하니 될 리가 있나?’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가 개척교회를 해보고 느낀 결론이 ‘목회가 안 되는 것은 아무 이유가 없고 되는 것만 이유가 있다. 원래 안 되는 것이다.’ 누가 그럽니까? 믿음으로 개척하라고 해서 “주여 믿습니다.” 하고 문을 확 여니까 벼랑이더랍니다. 절벽이더랍니다. 더 이상 우리들이 웃으면서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무엇보다도 교회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 되었는지 이제는 교회가 무슨 참된 교회가 되고 종교개혁자들이 꿈꾸던 교회가 되고 그건 나중문제고 교회로서 모양이라도 갖추면서 존립하는 것 자체가 이제 심각한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는 항구에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교회 부목사들 어디 자리를 알아봐서 내보내려고 그랬더니 시골교회에 10명만 모여도 이력서가 20통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랬더니 10명 모여도 어차피 그 교회는 교인들이 헌금해서 교회 운영하는 게 아니라 도시교회에서 보조받기 때문에 생활비는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시골교회는 안 간다.’ 이런 것이 아니라 시골교회도 갈 데가 없습니다. 뭐 시골에 목회자도 못 모셔서 없는 교회 꿈 깨십시오. 그런 교회가 있나 찾아보십시오. 절대 없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교회에는 교인 30명이 모이는 교회인데 예배당도 없습니다. 2층에서 하는 교회인데 모집원서를 냈더니 이력서가 30통에서 40통 들어오고 그 중에 5명은 박사입니다. 해외에서 박사 받은 사람. 결국 박사 받은 사람이 갔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근데 여러분들이 이제 불과 3년 내지 길어야 4년 후에는 그 중에 빠른 사람들은 2년 후에 만나게 될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 그럼 오늘 강의에서 무슨 길이 있나보다’. 이런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어떤 경영적인 차원에서의 길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을 모으고 그 다음에 교회가 모양을 갖추고 운영이 되는 것 기본적으로 무엇입니까? 사람만 있고 돈만 있으면 교회는 문 닫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왜 문을 닫겠습니까? 아무리 적게 모여도 단 10명이라도 모이고 생활비가 나온다면 왜 문을 닫겠습니까? 문을 닫는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입니다. 도저히 월세를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문 닫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다 보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존립을 해야 되겠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탈하지 않고 이 교회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이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떠난 사람이 헌금 보냅니까? 일단 거기 있어야지 있어도 헌금 안하는 사람은 있지만 일단 있어야지 헌금을 하던지 뭘 하던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교회에 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래서 미국에 있는 마케팅 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먼저 소비자 조사를 합니다. 교인들이 이 동네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교회를 원하는가? 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교회에 사람이 모이는가? 그러면 그 목회자의 목회방법과 리더십이나 모든 것들은 어떤가? 경영의 노하우는 무엇인가? 그런 것을 배워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를 해서 사람이 큰 은혜를 못 받아도 그것 때문에 교회의 문을 닫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람이 안 모이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이게 무슨 세속적인 신자냐? 진실한 신자냐? 따질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서 이제 그 다음에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옆에 있는 교회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화) 실제로 내가 아는 어떤 교회는 온 교인들 보고 아무리 전도하라고 해도 안하니까 전도하는 사람들을 20여명 정도 고용을 합니다. 그리고 기본급을 60만원을 주는 것입니다. 한 명을 데려다가 교회에 등록을 시키는데 3만원 인센티브를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계가 달렸으니까 온 힘을 다해서 일을 하는데 자기가 이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그 다음에 철저히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점조직으로. 그래서 도저히 이탈하기 어렵게 그물처럼 꼼꼼하게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교회에서 자기가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으면 ‘이 교회는 아닙니다. 내가 다른 교회로 가겠습니다.’ 뭐 이렇지만 그러한 분명한 것이 없을 때에는 자기를 그렇게 꼼꼼하게 챙겨주고 그리고 떠날 수 없도록 그렇게 철저하게 묶여져 있는데 그걸 구지 그렇게 옮겨야 될 이유가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이렇게 하면서 그나마도 아이디어도 있고 그 다음에 사업가적인 수단이라도 있고 그 다음에 뭐 자기 대라도 좀 있고 리더십이라도 있고 해가지고 꾸려나가는 사람은 그나마 말하자면 유지가 되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 되는 교회는 이제 월세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제 교회가 문을 닫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가장 좋은 경우를 가상을 해서 그렇게 해서 교회가 사람을 모으게 됐다고 쳐봅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래서 이만한 정도의 교회를 이정도 교회만 지니고 있으면 어깨를 필 것입니다. 어디 가서라도. 그렇게 하고 만약 교회를 한다고 칩시다. 그래서 생활이나 교회 운영이나 문제가 없다고 칩시다. 그게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교회냐 이겁니다. 그게 교회냐 이 이야기입니다. 성경과 역사는 타락한 다음서 부터는 철저하게 바벨론과 예루살렘의 대조입니다. 이 바벨론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사람이 중심이 된 인본이 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하나님이 본이 된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이 바벨론은 크게, 많이, 높이 이것이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편성을 많이 확보하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세상나라요 그게 그것이 바로 바벨론, 그 상징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맨 처음 세워질 때 그 시작부터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무엇입니까? ‘아 내가 신학교를 졸업했으니까 교회를 해야되겠구나.’ 부목사로 오라고 그러는 괜찮은 교회도 없고 그러고 목사가 되면 또 교회에서는 내보내지 않습니까? 부담스러우니까. 나가라고 그러고 ‘내가 뭘 하겠나? 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소명을 주신 것이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경에 밀리는 것입니다. 소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 ‘이제 나는 어쩔 수 없다. 나는 이것을 해야 된다.’ 그러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냐하면 죽어도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이 모일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뭘까? 어떻게 해줘야지만 이 사람들이 교회에 남을까?’ 이렇게 하고 질서의 파문을 그려가는 이 자체가 벌써 이 시작점 자체가 인본주의에서 시작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깃발을 이렇게 꽂아서 중심을 이렇게 내리게 되면 이 파문이 이렇게 그릴 수도 있고 반대로 이렇게 그릴 수는 있지만 어쨌든지 간에 이 시작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야 되겠습니까? 한 사람의 목회자가 교회를 세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소명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소명의 핵심은 팔자가 아닙니다. 자꾸 하나님이 환경으로 나를 인도하셨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은 자기의 의식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vocatio, calling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제일 먼저 일을 만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죄인이요, 그리고 지 멋대로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근데 어느 순간에 복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그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이 모든 인류는 구원의 희망이 있구나. 그리고 참된 구원이 없다면 이 사람들의 삶이 어떤 윤택한 삶을 살고 어떤 발달된 과학 기술 속에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직업도 가지고 사회활동도 하고 하면서 주일날 와서 주일학교도 하고 전도도하고 직장동료에게 예수 믿으라고 복음도 전하고 하며 사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살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이 복음적인 사실이 너무나 중차대하게 느껴져서 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도저히 다른 일들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자기가 이런 영혼들에 대한 연민을 제쳐두고 그냥 일상적인 이 세상의 직업에 매몰되어 산다면 자기에게 저주가 있을 것 같은 그런 현실적이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력한 calling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로잡힘.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께 사로잡힘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가노라.” 앞에 있는 푯대가 있기 전에 뒤에 있는 푯대가 분명히 먼저 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 사로잡혔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의미입니다. 복음의 의미. 그럼 도대체 복음이 무엇입니까? 제가 여러분들이 줄 저 책속에서 다 이야기 하고 있는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율법과 뭐 그런 게 아니라 딱 4단어입니다. JESUS died for us.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게 복음이라 이겁니다. 이것이 확장된 것이 신학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에 깊이 사무치는 것입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그 소명의 가장 정확한 example을 우리들이 누구에 의해서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바울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전에 그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그 다음에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종교적으로는 쥬다이즘 속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당시대의 쥬다이즘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복음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분명히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천벌을 받아서 죽은 인간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께 천벌을 받아서 죽은 죄인인데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을까? 죽으셨다는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고 살아난 것은 자기가 직접 봤습니다. 이 둘 사이에 도저히 좁힐 수 없는 논리의 간격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가 깨달은 신학적인 사실이 뭐냐하면 ‘예수께서 죽은 것도 사실이고 살아난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리신 분이었다면 죽을죄를 지으시지 않은 것이 분명할 것이고 그렇다면 죽은 그것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For us입니다. Died for us.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구나.’ 가슴속에서 그게 골수에 사무친 불이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Gnosis Christo.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essence, 정수라는 말입니다. 그게 소명의 핵심이란 말입니다.
그랬는데 이제 졸업을 합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쌍한 인간들, 하나님을 모르고 여전히 어둠속에 있는 이 불쌍한 죄인들을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인간들을 내가 도울 수 있을까? 한 영혼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난 괜찮다.’ 라는 전도자의 spirit이 이게 목회를 하게 되는 동기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이 전도자의 spirit의 결과물입니다. 나가서 죽어라고 전도했는데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다면 아니 목을 하려면 회가 있어야 목을 하지 않겠습니까? 회가 있어야 목을 할 것 아닙니까? 모이지 않는데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목회를 하냐는 말입니까?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개척을 이미 저는 은사가 아니다, 달란트가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고 그럴듯한 교회가 청빙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꿈 깨십시오. 그럴듯한 교회가 왜 데려가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창들이 어린 나이에 400명, 500명, 심지어 천명 넘는 데 갔는데 죽도록 고생합니다. 차라리 개척하고 말지. 당회 한 번 하다가 얼굴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가서 생선 횟집에 들어가서 “무슨 회를. 드시겠어요?” 하니까 “당회 빼놓고 아무거나 가져오십시오.” 그러니 그게 무슨 기독교 지도자로서 그게 완전 고용사장처럼 가가지고 장로들 시다바리 다하고 말이지 그게 무슨 목회에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또 어떻게 합니까? 참아야합니다.
자 그런데 어떻게 돼냐하면 그렇게 갈 수도 있습니다. 청빙돼서 갈 수도 있습니다. 가도 이 정신으로 합니다. 그래서 항상 청빙돼서 교회 가는 후배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야 너 갈 때 거기에 뼈 묻을 생각하고 가지 마라. ‘나 싫다고 하면 그만두고 말지.’ 이런 마음으로 대담하게 가라. 그리고 천천히 교회를 개혁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가서 한번 죽든지 살든지 담대하게 외쳐서 이 인간들이 거꾸러지도록 그렇게 설교를 하라. 그래서 네가 옳게 하는데 교인들이 ‘저 못된 목사 말이지 우리 평안한 마음을 다 깨트렸다. 쫓아내자!’ 그래서 쫓아내잖아. 주님을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 웃습니까? 웃을 대목이 아닙니다. 근데 지금 아직 시간이 다가오지 않아서 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sprit을 가지고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만약에 내가 청빙을 받아서 갔는데 이런 교회란 말입니다. 그럼 제일 먼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깃발부터 부러뜨려야 하지 않습니까? “넌 틀렸다. 이게 아니다. 이게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든지 이렇게 교회에 변혁이 일어나야 할 것 아닙니까? 진리가 아닌 문제에 있어서는 너그럽게 최대한 참지만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칼 같이 깃발을 들고 왜?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간다고 안했습니까? 아골 골짝 빈 들에도 간다고 안했습니까? 소돔 같은 거리에도 복음 들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 찬송 최근 3년 안에 부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거대한 교회의 변화의 틀 속에 코드에 맞지 않는 찬송가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채플 시간에도 한 번 불러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뜨악’ 할 것입니다. 생뚱맞게 그런 것을 부르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희가 신학교 다닐 때만해도 가장 눈물 많이 흘리게 하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면 가서 맨 처음에 교회를 한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사람이 얼마나 모일까? 교회 유지는 될까?’ 그게 아닙니다. 어차피 소명 받을 때 ‘그래서 이제 내가 복음을 들고 갑니다.’ 라고 할 때는 나는 이미 무제한의 헌신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굶으면 굶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나는 순교한다.’ 그러고 시작을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달란트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의 문제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수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와서 강의를 하면 dries collar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dries student들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절대로 개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큰 교회 찾아간다면 부패합니다.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가서 세울 때, 무슨 뜻입니까? 세울 때 내 속에서 복음이 너무 불타서 그래서 ‘나는 이것을 외칠 수 밖에 없노라.’ 하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듣지도 않고 도망가는데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계셔요? 나 같은 인간도 사랑해 주실까요? 복음을 더 들려주세요.”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근데 안 모입니다. 안 모여도 계속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이것이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왜? “나는 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오직 이 복음이 나에게 사무쳐서 외치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전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고 치면 가슴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행복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게 간절한 소원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이 되면 과연 그렇게 시작하는 목회자가 ‘그래도 300명은 모여야지 소나타는 탈 텐데.’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래도 200명은 모여야 어디 가서 명함이라도 내놓지. 창피하게’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말입니다. ‘좀 잘 먹고 살려면 그래도 한 600명은 모여야지 아파트도 한 40평 쓰고 차도 좀 그럴듯한 거 타고 나도 남처럼 말이야 교역자도 여럿 거느리고 총회도 좀 기웃거려 보고 그러지 않겠어?’ 그게 예수가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말입니다. 이 정신으로 교회가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안됩니다. 되는지 안 되는지 저는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한번 실험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피나는 전도자의 삶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학교 교훈이 학교 다닐 때는 되게 복잡하고 웃겨 보입니다. 저는 아직도 못 외웠습니다. 너무 복잡해서. 그러나 살아보면 그게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된 다음에는 이게 나중에 목회자가 되기 전에 먼저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타는 듯한 마음으로 ‘저 친구는 거의 영혼 전도에 미쳤구나.’ 그 전도의 동기 자체가 폭발적인 전도방법 이런 게 아니라 영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 마태복음 9장에서 나왔던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그러지 않았습니까? (?) 창자에 이르기까지 떨리다 그런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영혼의 좌소를 창자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말로 등가 번역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으니’ 그 번역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것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이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의 부탁의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렇게 될 때에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적게 모일 수도 있고 교회가 커져서 많이 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지는 것 자체가 가치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하든지 목회와 그 다음에 복음의 진리를 대중화 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다 타락으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가르친다는 것과 대중화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회개시켜서 교회의 영역을 넓혀 간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말씀 앞에 깨뜨려지면서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면서 결국은 이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그런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자기에게 이런 깃발을 꽂을 것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복음이 있는가?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시작을 해서 복음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냥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한번씩만 설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려면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간단한 복음을 제시함으로서도 회심하고 구원 받을 수 있지만 구원받은 영혼들에게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 복음 주변에 많은 지식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존 오웬이 그렇게 엄청난 학문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그 시대에 복음을 파수했던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이번에도 제가 오면서 책을 보니까 존 파이퍼 목사님하고 엔트 라이트하고 한 판 붙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엔트 라이트는 하나도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존 파이퍼 목사님은 베들레헴교회에 담임목사이지 않습니까? 담임목사로서 세계적으로 그 사람의 인기는 유럽에서 하늘을 찌릅니다. ‘50년 안으로는 누구도 엔트라이트의 테제를 못 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근데 한 판 붙었습니다. 칭의 문제를 가지고. 그런 목회자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점이 여기가 아니면 공부를 한들 무슨 방향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어디 가서 공부해가지고 하나 받아가지고 와서 어느 학교 들어가서 학생들을 그래서 가르친들 학생들에게 진짜 가르쳐줘야 될 이것을 전해 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기껏 3년 가르쳐놓으니까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그러는데 절대 쓸데없는 것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절대 쓸데없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오늘날 왜 이런 것들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깊이 회개해서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기부정과 자기 깨어짐 속에 참된 크리스찬이 되고 그 토대 위에서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어감으로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며 결국은 그가 천지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해갈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목회의 본질인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정직하게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중에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설교를 하는 위치에 있을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주일학교 학생일 수도 있고 어른일 수도 있지만. 그럼 최근에 두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쳐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기록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설교 현장을 보면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괴로워서 눈물 흘려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둘 다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자기의 제자 멜랑히톤에게 말했습니다. 편지를 했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화를 내든지 아니면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도록 설교해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복음을 명료하게 설교하므로 회심하지 않는 사람이 당신에게 화가 나든지 아니면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성과가 없었을 때 그 쇠약한 설교를 보면서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든지. ‘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렇게 초라하게 밖에 외칠 수 없을까?’ 이걸 고민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엇이 문제냐 하면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때 나의 이 설교를 통해서 저 죄인들이 죄인들로 보고 설교해야 합니다. ‘이 죄인들이 깊이 깨뜨려져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만나야한다. 그게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든지 이미 중생한 사람이든지 간에 전자의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나야 되고 후자의 사람은 이전에 만난 회심의 경험이 새로워져야 된다.’ 라고 그렇게 그런 결심을 가지고 외쳐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뭐냐 하면 자기도 감동하지 않는 내용을 들고 와서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화) 한국이 나은 프리마돈나 조수미가 인터뷰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은 노래 부를 때 어떤 마음입니까?” “나는 그 카네기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청중들이 내 노래를 듣고 뒤로 넘어져서 졸도할 것을 꿈꾸면서 나는 노래합니다.” 일본 바둑의 역사에 토혈국이라는게 있습니다. 둘이 바둑을 두다가 한 사람이 졌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욱’ 하는데 피가 확 토해져서 바둑판에 다 쏟아져버리고 거기서 엎드려져서 죽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 기보가 지금도 전해내려 옵니다. 오락을 하다가도 지니까 원통해서 피가 토해서 거기서 엎드려서 죽었는데 소명 받은 사람이라는 사람이 지금 저 영혼들의 운명이 달린 현장에서 이 복음을 외치며 설교하는데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물을 흘려보내는 수도관이 보내버리고 난 다음에는 바짝 말라서 아무 물도 묻지 않는 것처럼 그런 PVC수도관 같은 존재가 되어서 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만약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면 이건 진짜 100%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이 지점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절대 이 사람을 목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삯군목자는 참된 양을 목양할 수 없습니다. 왜?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알기 때문에 그 벼다 주는 꼴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지 않습니까?
제가 한때는 강해설교 강사로 6-7년 동안 열심히 불려 다닌 사람입니다. 지금 오라고 해도 안갑니다. 오라고 하는 데도 없습니다. 요즘은 설교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마케팅하고 엔터테인먼트하고 심리학 도입하러 다니지 이제 다 물 건너 간 이야기입니다. 강해설교는 80-90년대 이야기입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유행입니다. 유행. 그것조차도 유행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진리대로 전하는 그것이 관심이 돼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많은 교회의 교인들을 늘리고 교회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마케팅도 택했다가 심리학도 택했다가 엔터테인먼트도 택했다가 강해설교도 한번 택해보는 것입니다. 기도도 한번 택해보고 그러다 은사운동도 택해보고. 무엇이든지 그냥 성과를 가져오니까 택하는 것이지 무슨 그 속에 심오한 사상이나 이런 소명의 움직임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설교자로서 이런 질문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회중으로 돌아가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회중일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설교를 듣고 하지 않습니까? 한번 심각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영혼이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까 지금 곧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가야 된다.’ 라고 하는 진지한 촉구를 회중으로서 여러분들이 들어본 경험이 있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교회에 있어서 교회가 교회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이 진지한 회심목회가 우리들에게 사라져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말입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밖의 요인이고 또 하나는 교회 안의 요인입니다. 교회 밖의 요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시대적 조류입니다. 시대적 조류라고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확 밀려오는 것은 조류가 아니고 바닷물의 흐름은 느립니다. 천천히, 천천히 해류가 흘러서 그래서 물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시대의 조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시대의 조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가? 여러분들의 시대는 더 심각합니다.
(예화) 제가 Th. M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같이 공부하는 어느 전도사가 와서 학교 마당에서 굉장히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 나에게 “전도사님, 전도사님.” “왜요?” “내가 이번에 어느 목회자 세미나를 갔었거든.” “그런데” “어 나 너무 충격 받았어.” “뭔데?” “어느 교회 어느 한국교회 목사님이 나오셔서 세미나를 인도하는데 십자가를 설교해야지만 된대. 십자가를 설교해야지만 그게 참된 목회래.” 그 충격을 받은 것이 아주 현저히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강사에 대해서 감탄한 것입니다. 그러고 돌아가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통탄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시간의 공부, 예수 믿은 다음에 대학 다닐 때 배운 공부, 신대원에 와서 3년, 대학원에 와서 2년 동안 공부하고 이제 내일 모레면 논문을 쓸텐데 이제 와서 “십자가를 교회에서 설교해야지만 그게 좋은 거래.”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 감당할 수 없는 순수함. 그게 왜 그렇게 되느냐 그게 시대의 조류입니다.
그럼 그 조류는 어떻게 흘러 온 조류인가? 길게 따져 가면 타락할 때부터 시작이 됐겠지만 가깝게 시대사적으로 따져 보면 이게 결국은 18세기 사상사적으로는 훨씬 더 전에 12세기 이후 13세기부터 준비가 되지만 본격적으로 봇물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입니다. 왜냐하면 이 계몽주의라고 하는 것은 이 자체가 계몽주의 사조를 18세기경서부터 보지 않습니까?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를 계몽주의로 보는데 그런데 보면 계몽주의를 살짝 거치면서 개혁신학이 최전성기를 누리다가 계몽주의가 오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 계몽주의 이전에 어떤 인물이 나오냐면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칸트라는 인물이 나오고 등등 이제 수재, 천재급의 철학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구도는 간단한 것입니다. 뭐냐하면 이성과 계시의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데카르트 이전까지는 서구에서는 기독교철학이 곧 철학이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목회자들이 다 철학을 했으니까. 중세 기독교철학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란들이 나오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까지만 해도 콧방귀도 안 뀌었는데 지금은 전부 다 중세에 분명히 철학이 존재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데카르트가 이전까지는 어떻게 되었냐면 모두 이 철학이 존재론 중심입니다. ontology. 존재론 중심입니다. 그래서 어떻하냐면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나란한 인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옆에 또 내 친구도 있고 친구의 친구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뭐 동네 아줌마도 있고 이렇게 수많은 인간이 이렇게 수없이 많이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고 그 다음에 우리는 계속 이렇게 이동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이 세상의 사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 속에서는 진리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도 계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이렇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절대적인 것이고 보는 것은 360도 모든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 자신은 하나의 상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계몽주의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 안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물들을 볼 때 오관을 통해서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관을 통해서 보게 되면 그것이 그러면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지만 그러나 우리의 오관은 항상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은 진정한 실체가 아니고 substance 실체는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철학이나 이런 철학의 구도들이 아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그게 진리다. 우리가 다 모르긴 하지만 ‘진리는 불변의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최선의 것이고 그리고 가장 말하자면 최고의 존재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게 있다고 치자. 그러면 이 뒤 너머에 이런 것말고 실체가 있다고 너희들이 그러는데 그 실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Ding an sich 이게 독일어로 물자체입니다. 물자체라고 그러는데 물자체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장 너희들이 눈만 찌그리고 봐도 동그란 그릇이 길다랗게 보이고 길다란 그릇은 넓적하게 보이는데 그게 원래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은 네가 지금 보는 환경 속에서 그게 그렇게 된 것이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그 다음에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야 이 사람아. 여기에 니가 있는 것이야. ‘나’가. 그리고 여기에서 이 수많은 것들이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는 거야. 여기에 사물도 있고 이런 객관적인 진리라고 하는 것도 있고 어쩌고 저쩌고 다 있고 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국은 니가 이게 판단자가 돼서 보는 것이다. 그럼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뭘 믿을 수 있냐면 보는 너 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들은 다 돌아가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그러면 너는 믿을 수 있냐?”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말 안합니다. 어떻게 하냐면 “끝까지 의심하라. 그러면 마지막에 죽어도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만 남는다.” 그게 무엇입니까?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cogito ergo sum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자기가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이미 벌써 이 사람 나오기 약 1,1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Si fallor ergo sum. ‘만약에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한다.’ 이것의 패러디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하는 것입니다. ‘나는 끝까지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끝까지 의심을 해서 마지막에까지 도달했을 때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그 지점이 온다는 그게 뭐냐면 명석 판명한 사실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조금만 더 할테니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이 지금 년도를 정확히 잊어버렸는데 메르센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씁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에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명함을 내놓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한테 편지를 쓰는데 편지 속에서 뭘 얘기 했나면 소위 이야기 하는 영원진리 창조설을 이야기 합니다. 그 영원진리 창조설이라는 게 뭐냐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기독교 사회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데카르트가 맨 처음에 카톨릭의 사제였습니다. 맨 처음에 나타날 때 카톨릭이 헷갈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이미 과학이 발달되기 시작하면서 초자연적인 것을 다 안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데카르트가 나와서 뭘 얘기했나면 영원 진리 창조설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논리요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요지가 뭐냐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예전엔 어떻게 봤냐면 하나님이 세우신 이 모든 질서가 영적세계, 정신세계를 거쳐서 이것을 가지계라고 합니다. 가지계에서 가시계까지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시계까지 내려와서 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의 이런 질서가 이게 가시적인 세계에서까지의 질서로 쫙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런 펼쳐져있는 이 세계가 아주 놀라운 질서를 자연 속에서도 보여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최근에 창조론, 진화론으로 피터지게 싸우다가 대안이 하나 딱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지적설계이론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제 진짜로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그런 지적설계이론을 이미 이 당시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런 영적이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질서인데 그 하나의 질서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차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자연의 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런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그런 메디아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기서 어떤 것들을 우리가 발견해 낸다면 그것은 추적하고 추적하고 올라가서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러한 학문과 모든 지식에 있어서의 어떤 원리나 원칙, 법칙 같은 것들이 거슬러 올라가면 규칙이 되고 거슬러 올라가고 거슬러 올라가면 여기에 뭐냐하면 하나님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분께 속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그 분으로부터 오고 여기에서 나타나는 규칙적인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로 귀결이 된다는 쪽으로 이렇게 연결을 지어서 가지계와 가시계를 통합하는 원리로서의 신적존재로 한정됐다는 것입니다. 이게 계몽주의 전까지의 세계관이고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계몽주의가 오면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단초를 이 데카르트라는 인물이 제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냐면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데 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냥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법칙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칙은 진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냐면 이 진리는 이렇게 하고 하나님과 이 사이에 불연속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예전까지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진리 자체라고 봤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이 진리라고 하시고 근데 여기서는 그렇게 안보고 진리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선하고 악한 사건이나 가치를 가지고 추적하고 추적해가서 진리가 무엇이다라고 까지는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의 발현이다라고 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뭐라고 그랬냐면 “여기가 하나님의 존재야.”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야 너희들이 여기에서 최근의 과학적인 발견과 계몽된 정신으로 야 봐라 여기 과학적인 증거를 볼 때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고 이야기 하는데 그건 너희들이 틀린거다. 왜냐하면 이 법칙과 진리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아무리 뒤집어 찾아내도 네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여기이지 여기에는 하나님이 없다. 이 이야기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에 그 너머에 영원한 그 곳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으로는 절대로 파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카톨릭에서 막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를 곤경에서 건져 줄 뛰어난 철학자요, 인재가 나타났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까지 다 하면 시간이 너무 갑니다.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이야기하면 이게 영원진리 창조설입니다.
이 분이 진리를 능가하는 분인데 두 번째 논리는 이 분이 진리를 능가하는 분인 것은 분명한데 어차피 이성으로 찾아갈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를 보고 이 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투사해서 이것은 A입니다. A'입니다. A''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게 이야기를 안하고 “요렇게 믿음을 통해서 터득하는 진리를 알파하고 하자. 그 알파가 이성을 사용해서 올라가는 이 베타라는 지식을 능가한다. 이렇게 볼 수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부드럽게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세 번째로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이 존재로부터 연역해 내려 온 어떤 믿음의 추론에 의해서 어떤 것을 진리라고 깨닫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이성으로 건널 수 없는 이 지점을 뿌리로 해서 연역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신뢰하기 어렵다. 고로 알파와 베타가 있다면 베타가 더 신뢰할 만한 것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카톨릭에서 ‘저 놈 나쁜놈이구나.’ 이런 결론을 내리고 파문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습니다. 누룩처럼 번져간 것입니다. 이 사상이. 이렇게 번져 가면서 이렇게 데카르트가 만들어 놓으면서 이제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던 인간의 인간중심적인 사상이 르네상스서부터 싹트지 않습니까? 르네상스를 생각할 때 우리들이 secular 르네상스랑 크리스천 르네상스를 다르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르네상스는 그 르네상스의 방식과 정신을 받아들여서 그래서 인간이 교권에 억눌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도록 지배를 받는 거기가 잘못됐다고 생각을 하고 신앙과 교회를 개혁해야겠다는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크리스천 르네상스운동입니다. 그런데 secular 르네상스는 다릅니다. secular 르네상스는 가치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계셨던 그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의 자율이라고 하는 이것이 오토노미Autonomy, 자율이라고 하는 이것을 이전까지는 뭐냐면 은총아래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오늘날 우리가 가르쳐야 할 복음교리가 이런 것이지 않습니까? 지난 시간에 Mortification of sin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뭐냐면 진정한 자율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아래서 그 은혜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갈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답게 자율스러울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테제라고 합니다. 근데 이걸 그렇게 안보고 어떻게 되냐면 은총이 없이 인간을 자율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은총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에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 될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이 때에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오토노미Autonomy를 이루게 된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잘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이 이 데카르트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이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데카르트로 하여금 이런 식의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나는 여기서도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 원을 또 그리는 것이 아닙니까? 수없이 많은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어떤 명석하고 판명하게 고찰했다고 할지라도 A라는 나와 B라는 내가 일치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무슨 느낌을 받습니까? ‘아 다원주의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구나.’ 데카르트가 없었으면 다원주의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나중에 사고 치면서 발생한 일을 보면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철학계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데카르트가 독창적인 인물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데카르트로 하여금 이런 식의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단초를 준 사람이 누구냐면 중세말기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유명론 nominalist였습니다. 그런데 또 똑같이 개혁가들이 아주 좋아하던 철학자가 nominalist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세 후기에 나오는 유명론과 실재론, 윌리암 오캄의 면도날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유명한 논쟁들 있지 않습니까?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이 있고 그리고 관념론적 실재론의 논쟁이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은 뭐냐면 인식론과 존재론의 싸움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가 닿는 것입니다. 그런 논쟁 속에서 이 사람이 힌트를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이 이렇게 중세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거기서 이것을 발달시킵니다. 이 발달 된 것이 칸트에게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도덕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탁월하고 훌륭하긴 하지만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 뿌리 자체는 매우 취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우리가 왜 선하게 살아야 되는가?’ 그것에 대한 마지막 대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쓰냐면 ‘하나님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을 하라.’ 그것을 가리켜서 ?. ‘그래서 신을 맨 위에 놓고 생각하던 사고를 버려라.’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이 사유체계를 받아들인 다음에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를 사장시켜버리고 나면 내가 여기서 굳이 선하게 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신이 그런 선을 원하고 내가 선하게 사는 것이 그 신의 성품에 부합한다.’ 이래야지만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도 선하게 살텐데 그것을 모른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되냐?’ 그러니까 뭐냐면 ‘신이 있다고 투사를 해라.’ 그게 ?.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 ‘니가 똑바로 안 살면 심판을 받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라. 실재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냐 없는 것이냐 그것은 나에게 묻지 마. 그것은 각자 신앙에 달린 문제야.’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잘 들으십시오. 이 이해가 지금 우리시대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아주 기가 막힌 툴이 되는 것입니다. 뭐냐면 하나님과 동떨어지게 놓고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이렇게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이게 이미 벌써 이제는 이런 식으로 상대주의적인 세계관이 일반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나에게는 진리인 것이 저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내가 진리라고 생각하면 그냥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최종적인 판단자요, 그리고 가치의 최고봉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의상 그런 가치가 다른 사람들에게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접점을 찾아서 사회 공통적인 선을 수립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말하자면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과 부합하느냐 하면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유의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볼 때 여기에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이런 질서를 만들고 계신데 여기 이렇게 가다 돌아서서 도망가던 이 인간에게 담대하게 외쳐서 ‘너 틀렸다. 그리로 가면 굉장히 불행해진다. 그리고 이 온 우주와 세상의 중심은 니가 아니고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이것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빨리 돌아오라.’ 그러면 그 때 하나님이 복음과 그 다음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그 사람을 중생시키고 회심시켜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우리들이 경험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와서 그 다음에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단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이고 교회가 서가는 모습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넌 틀렸고 넌 아무것도 아니고 사실은 너는 진리 가상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수 많은 개체 중에 하나일 뿐이지 별 볼일 없는 인간이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너는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 후의 삶도 끊임없이 너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사랑을 못 박으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만 거기에 너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 이게 이 시대를 향한 전면적인 도전장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이 시류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강에서 여러분들이 물이 도도히 흘러갈 때 철벅거리면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강물의 힘을 느끼지 못합니다. 근데 어느 순간에 거슬러서 올라가려고 몸부림치면 팔이 아프도록 헤엄을 치는데 몸은 항상 제자리에 서있거나 뒤로 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물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머리를 이만큼 씩 기르고 다녔습니다. 남자들이. 아무도 그러지 않지 않습니까? 넥타이가 이렇게 올라오고 주먹만하게 하고 다녔습니다. 여기 깃이 이만하게 하고 나팔바지 입고 지금 아무도 그렇게 안하지 않습니까? 누가 하지 말라는 사람 있습니까? 근데 다른 사람들이 다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느 전도사가 와서 “목사님, 제가요. 목사님 책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거든요.” “어 그래 잘했네.” “그래서 받은대로 교회에서 .외쳤거든요.” “그래서?” “나가래요.”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 보십시오. 그럼 만약에 이런 핵심을 양보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러면 무슨 어떤 제3의 해결방법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해결방법은 없습니다.
(예화) 지방에 집회를 하러 내려갔습니다. 그 교회 갔는데 담임 목사님 어디 가시고 부목사님과 같이 대화를 하면서 “목사님, 우리교회가 이 도시에서 한참 뜨고 있는 교회입니다.” “아 그래요?” “목사님이 TV에도 많이 나오시고 성도들이 계속 옵니다.” “아 그래요?” 난 모든지 하나씩 배우려고 하는 것이니까 “뭐 좋은 것 있으면 나도 가르쳐 주시오.” 했습니다.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하도 궁금해서 하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서 자기교회를. 그래서 내가 “목사님은 총신 나오셨죠?” 그러니까 “ 어 그럼요.” 그럽니다. “그러면 신학적으로 회심이 뭔지 아시죠?” “예 알고 있습니다.” “회심 없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죠?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고 자기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만이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죠?” 그러니까 “예 맞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정직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십시오.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장년교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몇 명이나 돌봅니까?” 500명 정도 돌본다고 합니다. “그래요.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보십시오. 당신이 돌보는 교구식구들 가운데 구원 받은 사람이 몇 명쯤 됩니까?”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20%? 30%?”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근데 당신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돌보는 양떼들 가운데 100명 중 70명은 주민등록이 지옥에 되어 있는데 뭐가 그렇게 자랑할 게 있습니까? 어느 교회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당신의 고백에 의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는데 그런데 뭐가 뜨고 있다는 겁니까?” 옆에 청년부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조금 낫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면 40-50%정도 됩니다.” 잘 되고 있다는 관점이 어디에다 둔 것이냐는 것입니다. 교회 제일 애매모호한 말이 은혜 중에 있습니다. 사고치는 사람 없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게 시대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은 갈수록 더 굉장해집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는 것입니다. 뭐냐면 내가 죄인으로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죄를 짓고 내가 죄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면 이 자체를 피해자라고 부각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상이 가스펠송 안에 광범위하게 배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행했고 예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래서 이 사람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판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줌으로서 결국은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구나.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한 짓이라고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 밖에 없구나.’ 이렇게 만들어 줄 때에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길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죄를 짓게 된 것 자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 주소서.’ 그 찬송이 꼭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너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너도 그런 피해자고 하나님은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지금 불행한 처지에 있는 것 자체만이 하나님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부정직하게 해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기본적으로 이미 고대 교부서부터 인간을 볼 때 aversio, conversio로 설명했습니다. aversio는 뭐냐하면 배향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던 인간이 깊이 회개하고 들어오는 이것이 conversio 전향인데 이게 신학적으로 회심이라는 것입니다. 관건은 배향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conversio하고 conversio하고 전향한 인간이 그 마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향해 정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결국은 인간과 신자의 기본적인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을 conversio하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끊임없이 고통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부각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오히려 정신 차려야 할 쪽은 하나님이십니다. 시대가 달라진 것을 빨리 이해를 하시고 우리를 향한 태도를 좀 고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쎈 기도가 하나님을 고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쎈 기도는 하나님을 정신 차리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conversio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많은 기도 운동들이 인위적으로 일으켜져도 그 시작점 자체가 이런 복음이 아니라 인본주의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을 돌이켜 인간이 계속 aversio한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심으로서 그래서 인간을 더욱 더 행복하게 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900년대 후반서부터 들어오면서 다시 새로운 종류의 번영주의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번영주의가 각광을 받은 것은 벌써 60년대입니다. 실용주의가 나오면서 우리나라에도 순복음교회를 비롯해서 번영주의로 들어온 기복신앙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50년, 60년대 시작되었던 그런 번영주의와 오늘날에 있는 성공주의와는 개념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 60년대 일어났던 이런 번영주의는 복음으로부터 이탈된 것이긴 했지만 그 자체가 생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번영주의가 옛날에 50년, 60년대 한국 같은 개발도상국, 제 3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들이 수긍을 하지 않습니까? 워낙 살기가 어려우니까 예수 믿고 새마을 운동도 하고 그렇게 철야 가서 한 풀이도 하고 하면서 새 힘을 얻어서 산다고 생각할텐데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 땅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엘 오스틴입니다. 저보고 자꾸 조엘 오스틴 사상이 어떠냐고 하는데 말 길게 안하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그 말을 가지고 판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근데 그 번영주의는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매슬로우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인간의 욕구단계를 구별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배변과 생리적인 욕구부터 시작을 해서 사회적인 욕구까지 올라가서 맨 마지막에 최상위에 있는 욕구가 뭐냐 하면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이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냥 하나의 질서 속에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학생으로서 그 다음에 어른으로서 뭐 아니면 부하로서 상사로서 이렇게 살아가는 질서 속에서의 자기를 온전히 구현하는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자아실현은. 이 매슬로우도 이 욕구도표를 그리면서 이 사람도 자아실현을 하는 인간은 극히 드문 few 아주 드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뭐냐 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다 펼쳐서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히 물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작품을 확 만들어놓고 돈 한 푼 못 받아도 그걸 보면서 ‘아! 내가 드디어 이것을 만들었구나!’ 그것을 보면서 한 없이 즐거워하는 창조세계를 지으시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행복해 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그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실현해가려고 하는 것이 이게 후기 근대주의에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제는 ‘조직에서 이탈하고 싶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최고의 위치에 올리고 그 다음에 이것을 마음껏 펼치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너는 죄인이고 회개하고 돌아와야된다.’ 이 복음이 이 시대의 코드와는 너무 너무 안 맞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실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 한편 내적으로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어느 시대든지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다 자기를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근데 문제는 교회가 급격히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계몽주의 이후로 계몽주의가 밀려들어오면서 결국은 개혁파 정통주의가 꺾어지기 시작하면서 low?-orthodoxy로 넘어갑니다. high-orthodoxy는 계시를 믿는 정통주의고 low-orthodoxy는 계시를 떠나서 이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low orthodoxy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이게 급격하게 신학에서 엄청난 변화가 밀려들어 옵니다. 그게 뭐냐면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그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뭐냐면 이러한 모든 현대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떻하든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들을 끌어 앉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됐는지 보십시오. 교회에서 결국은 이것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용없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복음의 진수를 영혼 깊이 경험하고 이 세상의 어떤 이성의 추론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줘도 이것은 아니다 라고 단호하게 할 수 있는 그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있어야 합니다. 근데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믿음이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복음적인 경건의 경험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우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이성과 감각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것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도 여기에 맞설 힘이 없고 또 근본적으로 자기도 이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이탈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회를 하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에게 그렇게 하게 하는 강제하는 요소도 없는데 내가 그렇게 어리석게 시대를 맞설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이런 커다란 구도 속에서l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모든 사상들이 흘러가면서 교회들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할 때 그 때가 아주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30년 전 쯤으로 올라가면 제가 처음 회심하고 얼마 안 되던 때 쯤 이었습니다. 교회가 뜨거웠습니다. 가면 열정이 있고 열렬한 기도가 있고 그리고 항상 부흥회를 하면 500명 모이던 출석교회가 부흥회를 하면 700명씩 모였습니다. 옆에 교회가 오는 것은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인사차라도 가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안 모입니다. 절반도 모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회는 점점 바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이 질서 안에서 살 때 모든 것이 단정해 지는데 이런 식으로 뛰쳐나가면서 껍데기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이 안에서 자기균열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도 자기가 누구인지 파악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리학이 엄청난 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칼 융과 프로이드 이후에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산업화사회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need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산업화사회에서 소외입니다. 가정이 다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한 지역에서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 외삼촌, 삼촌 다 같이 살면서 자기가 이러면 안 되고 저러면 안 되고 하는 것을 다 알았습니다. 이제는 뭐냐면 교통수단이 활발해지고 발달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이 저마다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리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사회가 편성이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일 중심으로 사람이 바뀌는데 일이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함께 의논을 하고 살아가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이 사람은 뚜껑 만들고 이 사람은 몸통 만들고 이 사람은 나사 만들고 이 사람인 끼우고 이 사람은 포장하고 하면서 일과 일속에서 단절되는 것입니다. 웬만한 회사는 저 옆방에서 무슨 일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회사는 아예 의도적으로 알지 말도록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 소외현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어받아서 물질생활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 일에 이런 논리를 사용하면서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저히 인간이 꿈꿀 수 없었던 활동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너무나 너무나 피곤하고 골치 아픈 존재가 된 것입니다. 휴대폰 없었으면 연락 절대로 안할 사람이 이게 막 수없이 태평양 건너에서도 전화오고 사람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편리하기 위해서 기술 발전을 이루고 산업화 사회에 들어오면서 인간은 결국은 물질생활을 제외한 영혼 자체는 점점 곤궁해지고 갈 길을 모르는 이런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위로해줘야 합니다. 오락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케팅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막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회심 목회가 사라지고 있는 이 문제가 이게 무엇과 연관이 되냐면 세속화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제 이 교회가 자체 안에서 이렇게 사람을 데려다가 굴복 시키고 회개하게 해서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고 여기에서 경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이런 참된 경험들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되니까 결국은 교회가 상황에 떠밀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어떤 사람이 ‘그건 아니다’ 하고 힘껏 복음을 외친다 하더라도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어느 교회 목회자가 목사 아들을 불러놓고 같이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개혁 신학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앙도 가르쳐 줍니다. 전화가 따르릉 오는데 “목사님 저도 가서 공부 좀 하면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누구요?” “제가 성결교회에 있는 목사입니다.” 그건 알미니우스주의인데 여기 와서 배울 수 있겠냐니까 알미니우스주의가 뭐고 문제가 아니라고 자기 지금 목회가 너무 안 되는데 가서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배우다가 이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이게 알미니우스의 신학? 칼빈주의가 진짜 보석이구나.’ 그랬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니까 “교회가 하도 안 되서 이거라도 좀 배워해 해보려고 그랬는데 10명 더 떨어졌습니다.”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아니 저 목사가 어디 가서 뭘 배워온다고 그러더니 오히려 더 이상해져서 더 딴소리한다고 자꾸 간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붙들고 얘기를 해도 이미 벌써 대세가 기울어져서 사람들에게 이게 호소력 있게 빨려 들어가지 않는 상황이 된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게 남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무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을 이렇게 보면서 삼가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 조의를 표한다는 말이 상당히 신학적인 말입니다. 이게 뭐냐면 자기가 가서 끊임없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을 왜 거기 가서 하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지.
이 문제가 무엇과 그렇게 깊은 관련이 있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인의 개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도대체 누구냐?’ 라고 하는 이 개념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전도사님, 그리스도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럼 이제 ‘도대체 뭐가 믿는 거냐?’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주 딱 떨어지는 정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대답) 주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하며 삶 가운데 다스림을 받는 사람-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정의가 너무 주관적이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겠는가? 이 문제가 왜 그렇게 문제가 되냐 하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결국 뭐냐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중세에 통용되고 있는 개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결국은 마지막에 핵심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이 개념에 대해서 중세의 카톨릭 사람들과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혁가들 사이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세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중세에서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시라고 본 것입니다. 이 현시가 교회라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도이고 그리고 이 제도 안에 사람들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근본적으로 교회는 이 제도입니다. 이 제도가 카톨릭안에서는 구체적으로 Hierarchy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제적인 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상으로 가르치는 교회와 그 다음에 배우는 교회로 나누고 그리고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교회와 성사를 받는 교회로 나뉘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구분이고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교회에 개념이 이러한 제도적인 질서를 교회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개념은 당연히 이 하부에 따라오는 개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질서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이런 말 보다도 카톨릭 교인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스도는 카톨릭 교회에서 그리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니까 카톨릭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톨릭이라는 의미가 무슨 뜻입니까? 보편교회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그 사람들 속에 교회라고 하는 이 개념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게 아니다.’라고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얼마 안돼서 그 당시에 맞서야 되는 교황이 바로 레오10세였습니다. 레오10세에게 쓴 편지 속에서 그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야기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행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밖으로 행하는 이 선행이 우리 자신의 영혼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압니까? 이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렇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이게 화두라는 것입니다. 이 발언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핵심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맨 처음에 불필요하게 보이듯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오늘날 교회를 개척하면서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무엇인가라고 생각을 했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렇게 내가 해서 교회라는 것을 만들면 그러면 어떻하든지 사람들이 여기 담기고 그렇게 해서 머물면서 관계를 가지고 살 때 이것이 교회가 아닌가?’ 이게 종교개혁적인 생각이 아니라 형태만 바뀌었지 훨씬 중세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하려면 하여튼 제가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말씀드리는데 공부해야 합니다. 자기자랑을 위해서 공부하지 말고 좋은 신자가 되고 제대로 진리를 가르쳐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한 두 사람만 교수되면 됩니다. 너무 많아도 복잡합니다. 또 서로 싸우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수도 그런 걸 깨우치고 교수가 돼야지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식상하지 않습니까? 근데 전 목회자이지 않습니까? 근데 간절히 이야기 하는데 공부해야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이런 역사를 읽어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막 차를 몰고 달려고 어디로 가는지 길을 못 찾겠는데 네비게이션을 보면 지금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 네비게이션을 봐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것이 이런 중세시대 때의 교회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개신교 목회자가 중세시대 때의 사제들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인들이나 타고 다니려고 말입니다. 교권이나 쥐려고 하고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은 저리가라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붙들고 살아가면서 그게 목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지 아직 부목사밖에 안된 사람이 자기네 교회 뜨고 있다고 그러고 70%는 회심도 안하고 구원도 없는 죽으면 다 지옥 갈 영혼들인데 자기네 교회 배우려고 사람들이 수 없이 온다고 하는 이런 소리나 하고 도대체 그런 정신이 무슨 정신이냐 말입니다. 자본주의 더하기 중세시대 때의 정신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이 개념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겠습니까? 18세기 후반을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적인 유산이 종교개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종교개혁이 중세시대를 백지로 돌리고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건 역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중세에 뿌리를 두고 중세의 커다란 흐름이 잘못 갔지만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절충적으로 사용을 해서 종교개혁이 이 중세를 뛰어넘어서 고대의 교부들을 통해서 마지막에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참된 기독교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이 맨 처음에 일어날 때는 러프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아직 조직신학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기독교강요라고 하는 것도 1536년에 맨 처음에 나왔을 때도 뚜껑 열어보면 교리문답집이었단 말입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 좀 더 덧붙이자면 로마 카톨릭의 부당한 성례주의를 공격하고 거기에서 성도들을 바로 잡기위한 카테키무스(Katechimus)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전체적인 체계 속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만 존재합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다 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루터파에서 멜랑히톤으로 이어지고 베자로 이어지는 개혁파 정통주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온누리에 퍼지는 것입니다. 왜?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서 사람들이 학자들이 학교 들어올 때부터 굉장히 지적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도의 교육을 시켰고 예수 그리스도 만났고 복음에 대해서 불타고 순교까지 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하니까 기가 막힌 신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참 신학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여기 몇 년 째 심취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요새 책 잘 안 쓰는 것 아십니까? 책 쓰는 것보다 공부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쓰면 못 쓰겠습니까? 근데 여기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엄청난 기독교의 유산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약 150년 정도 가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이게 이제 low orthodoxy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말하자면 계시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는 거기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니까 그러면서 이성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관계없는 얘기 같지만 그 당시에 애덤 스미스라는 사람이 국부론을 제시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레제스떼르?라고 해서 시장 안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만히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경제는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실로 입증이 됐습니까? 사실로 입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장 자크 루소가 결국은 자연주의를 부르짖었지만 결국은 사회계약설을 내세우지 않습니까? 그래서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들은 결국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그런 계약을 왕이 깨뜨리면 인간은 폭동을 일으켜서 왕을 처단할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것은 결국 뭐냐하면 인본주의의 승리였습니다. 지유, 평등, 박애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 중심선에 무엇이 와 있습니까? 신은 축출당하고 인간이 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고만장해 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면서 구자유주의가 아까 이야기한데로 막 봇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을 안했습니다만 어떤 자료에 보니까 유럽에서 하루에 교회가 600교회씩 문들 닫았다고 합니다. 교회가 초토화 되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종교라고 하는 것이 인간을 향한 거대한 수탈의 도구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됩니까?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을 유물론으로 보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서 그때에 기독교 안에서 구자유주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여기에서 설교는 급격하게 퇴조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교회를 개척해도 그것을 외칠 something이 가슴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선생들 자신이 다 변절되어서 이성주의자들로 변했기 때문에 신약성서가 불트만이 1942년에 demythologization(비신화화)의 이론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표하지 않습니까? 이미 그 이전서부터 벌써 그런 비신화화운동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속에서 외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니까 ‘금과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못하니까 “금과 은도 여기 있거니와” 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거기로부터 접촉점을 가지고 시작하자.’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독일을 기준으로 보면 이게 19세기인데 19세기 말에 자유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이 설교가 완전히 퇴조해서 결국은 여기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냐면 주일날 설교 제목이 감자를 먹는 행복,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행복, 천연두 예방주사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축은 우리에 가둬 기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좋다, 부활절 날에는 생매장 당하는 위험, 예수님은 총각이었을까 이런 것들이 버젓이 주일 설교제목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접촉점은 훌륭하게 마련이 됐습니다. 그런데 와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슈팔딩, 졸리 코퍼 이런 사람들의 설교 속에서 역사적으로 이런 흔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게르하르트 옹켄, 칼 델리치 이런 사람들이 피나게 항거했지만 이미 벌써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이렇게 구라파에서 번지고 있을 때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유럽에 대해서 느끼는 사대사상은 굉장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건너가서 공부를 하러 갔을 때에는 이미 벌써 여기서는 더 많이 배우고 오라고 복음적인 교회에서 개혁주의 교회에서 보냈는데 여기 가면 이미 좌경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배워가지고 돌아온 사람들이 구 프린스턴을 뒤집어엎고 뉴 프린스턴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자유주의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 천지시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자유주의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과 평화만 남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사상이 무엇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과 평화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가 부르짖는 것이 무엇입니까? 헌신적인 사랑과 세계평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면 인간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역사는 다 무엇을 가지고 시작이 된 것입니까? 종교를 가지고 시작이 된 것입니다.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3분의 1 인구가 모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었던 그 유명한 백년전쟁이 무엇 때문입니까? 종교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세속 역사가의 시각에서 인본주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보면 지금 독일에서 루터를 필두로 해서 미친 짓을 한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그냥 살다 살다 결국은 시민혁명에 의해서 민주화가 되고 자유화가 되었을 역사를 갑자기 나타나서 아니 무슨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거 하나에 목숨을 걸고 그리고 막 온 난리를 쳐서 독일 인구에 30년 동안에 3분의 1이 다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년전쟁이 일어나고 그 독일 하나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함스부르크를 비롯해서 스페인 등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에 참여해서 결국은 이 개신교와 카톨릭이 죽어라고 싸우는데 그 속에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라 영주들이 딱 보면서 누구 편에 가면 내가 좀 더 영토를 가질까 해서 이쪽 붙었다 저쪽 붙었다 하면서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본주의적인 역사가가 보면 미친 짓을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아까 이야기한 그 데카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초월하시고 인간은 알 수도 없는 그것을 어느 놈이 ‘난 안다’ 하고 나타나가지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광기입니다. 광기.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루터나 이런 종교개혁자들이 히틀러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600만 밖에 안 죽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어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유주의에서도 똑같이 저렇게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게 기존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보수적인 교회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근본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교리를 제시하면서 우리는 이것만을 믿는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하면 나중에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폭 보다는 훨씬 더 좁게 제시했다고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반발로 나온게 뭐냐 하면 신복음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신복음주의는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 신복음주의가 결국은 종교 다원주의를 열어버린 것입니다. 오켄가를 비롯해서 빌리 그래함, 그리고 플러 신학교 등등으로 해서 신복음주의를 열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그 당시에 빌리 그래함이 눈을 뜨면서 이제 이렇게 편협하게 교리를 부르짖어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을 하고 교리적인 개혁주의 입장을 과감하게 포기를 하고 그리고 전도자로서 폭넓게 나간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호와의 증인까지도 복음전도 주최측에 집어넣어서 전부 다 해서 복음을 전할 수만 있으면 나는 누구와도 손 잡는다는 그런 쪽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복음주의 운동이 나중에 종교다원주의와의 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교회 성장 운동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혼란스럽게 신사도운동, 마케팅 교회, 그 다음에 이머징처치 등등으로 막 혼란한 양상을 빚어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것들이 있을 때 마다 당연히 이 물줄기가 전부다 다 한국으로 튀어서 그래서 이쪽에서는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받아들여서 어쨌든 성공하면 좋은 것이라고 보고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혼란 속에서 이런 것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뒤섞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기 때문에 결국은 오늘날 우리들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이런 변화를 경험하는데 근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누구냐 하는 것으로 결국 귀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은 뭐라고 보았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의를 무엇으로 내렸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중세에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질문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관심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어디에 있었냐 하면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카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그 교회는 어떤 종류의 교회였습니까? 가시적이고 보편적이고 그리고 하나의 제도적인 그런 사제적인 중심의 교회였단 말입니다. 근데 종교개혁자들이 영적 교회관을 내세운 것입니다. 영적 교회관을 내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교회는 제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다음에 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접붙여지는 생명체적 연합이라고 본 것입니다. 생명체적 연합의 이 교리는 독특하게 유니오 쿰 크리스토(unio cum Christo)라고 하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는 이 개별적 연합을 기초로 이런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우주적인 개념입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다 설명을 못하겠는데 이게 사실은 칼빈이 발견해낸 개념이거나 루터가 발견해낸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을 전부 다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 속에서 찾아내서 중세의 오류 속에서 이것을 씻어서 건져 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것을 구체화 시켜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시간을 좀 할애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인가에 ‘만물을 충만케 하려하심이라.’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아나 카펠레 오’ 아나는 다시라는 뜻이고 까페르는 이게 라틴어로 카투스입니다. 머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여러분들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리카플탈라치오라고 부릅니다. recapitulation이라고 하는데 여러분들 총괄갱신론이라고 이렇게 배웠을 것입니다.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총괄갱신론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용어가 싫고 저는 이것을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창조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종교개혁자들이 한 사람의 구원을 그 한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인 여부를 결정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개념이 창조론과 기독론, 교회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냐면 여기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를 머리삼아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창조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머리라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비롯한 전 창조세계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물질적인 창조세계에서 예수가 머리시라는 의미와 영혼을 가진 인간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의미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의미를 갖고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해서 직접적인 머리가 되시고 이런 모든 것들에게는 창조주로서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자입니다.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는 누구십니까? 창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중보는 구속의 중보하고는 다릅니다. 구속의 중보는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이루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함으로서 중보가 되시지만 창조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나님과 함께 이 창조에 참여하시는 종류의 중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창조주이시면서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연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존 오웬이 communication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만물의 연관입니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연결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발하게 하는 하나의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나서 이 연결들이 다 깨뜨려져 버린 것입니다. 희미한 영광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말할 수 없이 끊어져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속하시는 방법이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한 영혼이 말하자면 교회라고 하는 제도의 틀 속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충만한 수에 이르도록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이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작정을 개별적 인간 안에서 현실화 시켜 가시는 과정이 세계선교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커다란 섭리와 계획의 실현과정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교회라고 하는 제도의 틀 속에 들어와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에 대해서 오히려 관심을 적게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보이는 교회에 있는 이 구성원과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의 구성원이 불일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일치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한 사람이 이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될 때 이것은 단순하게 그냥 한 사람이 이제는 예수를 안 믿다가 예수를 믿고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은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론적인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인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론도 교회론적 구원론이 되어야 하고 기독론도 신론적 기독론이면서 동시에 교회론적 기독론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역투사하면 창조론도 교회론적 창조론입니다. 종말론도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들의 수를 꽉 채운 것을 확 드러내시는 그것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식으로 구원을 공동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영적 연합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례의 시행, 혹은 보이는 성사의 교통, 보이는 제도로서의 가시적 교회의 현현 여기에 교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맺은 이 언약관계 안에서의 생명적인 교통, 공동체적인 자기봉헌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그 자체가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 구원자체가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이 지평 속에서 나는 그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시려는 장엄한 계획을 따라서 내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렇게 놓고 보고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충만하게 이루어졌을 때 결국은 하나님의 재창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이 세계의 구원이 함께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창조주의 머리로서 창조되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이것들이 모두 깨뜨려졌다가 구속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아직도 이 교회는 지어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언젠가 이 교회의 건축이 완성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만물들도 탄식하고 신음하다가 구속의 그 날을 기뻐하며 함께 하나님과의 무한한 영광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이러한 상호 연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communication, communicatio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틀을 사용해서 당신의 창조주의 영광을 다시 한번 이 세상 속에 충만하게 드러내시는데 그 때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통해서 이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이게 교회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래서 이 교회가 온전히 지어져가고 그것이 건축이 끝날 때 이 모든 세계들이 함께 본래의 communicatio를 회복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이제는 단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다시 이 모든 창조세계의 머리가 되심이 찬란하게 드러나는데 이게 바로 아나카펠리오?고 리카플라타지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종교개혁자들은 이렇게 교회를 영적으로 이해했다고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가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결국은 뭐라고 봤겠습니까? 무엇인가 영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영적인 실제를 소유한 예전과는 다른 그 사람이어야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목회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하면 이렇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는 이것이 바로 목회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Imago Dei 하나님의 형상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뭉그러져버리고 상실해버린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이것을 이 영혼이 이 형상을 회복하게 될 때 이 형상이 그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며 그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결론이 나오냐면 근데 여기에서 종교개혁자 놀랍게 우리는 여기서 이제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중생 regeneration과 conversion 회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존 머레이의 이후의 전통을 따라서 9가지로 된 구원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파 정통주의 후기에 와서 생겨난 것입니다. 요번에 제가 논문을 썼습니다. 이것은 개혁파의 커다란 라인이 스위스, 초기 스위스 개혁파 정통주의, 그 다음에 독일, 화란계통의 개혁파 정통주의, 영국의 청교도주의가 있습니다. 도르트 총회를 기준으로 이 구원논쟁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알미니스주의자, Remonstrant라고 불리우는 항론파들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보에티우스 이런 사람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예전에 있었던 구원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전에 생각했던 폭넓은 개념의 구원교리를 다듬어서 아주 구체적이고 좁은 의미의 구원교리들을 논리적으로 세워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도르트총회 이후로 후기 스위스개혁파 신학자들 튜레틴이나 마스트리흐트나 이런 사람들, 마스트리흐트는 화란사람이지만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지고 화란과 독일의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영국의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정교한 구원교리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생겨나면서 결국은 regeneration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중세에서는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할 때 칭의, 성화의 개념이 모호했습니다.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쳐 준 것만 꽉 붙들고 왔어도 교회가 저지경은 안됐을텐데 그것조차도 지키질 않았습니다. 칭의와 성화가 말하자면 구분히 모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카톨릭 안에 약간 있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냐면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는 한 사람이 많이 회개를 하는데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서 신자가 되어간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신자가 되는 맨 처음에서의 이 회개가 바로 칭의의 회개고 이후는 성화의 회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개념은 사실 reformer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하고 차이는 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한 사람이 처음 회심해서 의롭다함을 받고 이후로는 끊임없이 참회와 자기 깨어짐 속에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Gratia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Sola Gratia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것을 명확하게 해놓지 않고 죽습니다. 그 이후로 넘어가면서 이 사람들이 ‘그래 너희들이 맨 처음에 회개하고 의롭게 되지만 그러나 이후에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너희들이 점점 더 의화 되어가는거야. 근데 그 gratia를 누가 주는 줄 알아? 교회에서 주는거야.’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gratia infusa의 교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infusa는 주사놓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의미를 몰라도 들어와서 사제가 베푸는 미사에 참여하기만 하면 성사에 참여하면 그 성사를 통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는 주입되어서 그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해서 결국 그는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완전히 구원을 받는다고 보지 않고 이것이 시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gratia infusa할 수 있는 권한을 교회라고 하는 institute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뭐냐하면 sola fide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교개혁자들이 처음 종교개혁을 일으키자마다 제일 먼저 문제제기했던 것이 뭐하면 칭의와 성화의 엄격한 구분입니다. 그리고 이 칭의에 의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칭의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딱 못을 박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 성화는 점진적으로 쭉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이 사람들이 중생이 아니라 new birth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체를 다 신생이라고 본 것입니다. 물론 regeneratio를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20세기 이후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이 좁은 의미의 regeneratio가 아닙니다.
최근에 제가 R. C. 스프롤 존 거스너의 제자입니다. 존 거스너는 20세기 최대의 조나단 에드워드 연구가입니다. 대단한 학자입니다. 그 제자들입니다. 최근에 책을 썼습니다. 알미니우스주의에 대해서 썼는데 읽어보니까 알미니우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쭉 이야기를 써 내려 가는데 뭐냐면 알미니우스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조명과 중생이라는 사역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날마다 증가되고 때때로 발전되고 촉진한다.’ 알미니우스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근데 스프롤이 이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이점을 논할 때 알미니우스는 중생활동이 시작된 것이 평생 성화과정 속에 지속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서 혼선을 보이는 내용은 중생이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알미니우스의 언급이다. 아마 이것은 중생의 열매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한 실수일 것이다. 만일 그의 말이 중생사역 그 자체는 순간적이 아니라 점진적인 것을 뜻한다면 그는 개혁주의 사상을 반박하고 있는 셈일 것이다.’ 근데 이것은 R. C. 스프롤은 훌륭한 분이지만 전혀 본질을 잘못 짚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미니우스는 존 칼빈 이후에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사람입니다. 근데 그 때까지는 알미니우스주의 때까지는 전부 다 스프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중생을 하나님이 영혼을 확 살리시는 이런 개념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 개념이 있다 하더라고 희미하고 알미니우스는 이점에 있어서 맞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도 이런 조명과 중생이 계속 되어야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기 위한 성화가 아니라 이렇게 칭의 받은 사람이면 당연히 이 안에 성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평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이러한 성화와 칭의가 나뉘어지긴 하지만 구분될 수 없고 성화의 작용을 불러오지 않는 것은 칭의가 없는 것이고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반드시 성화는 뒤따라오기 때문에 이 두 개의 구원이 일치를 이룬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철저히 카톨릭의 선행에 의한 것을 부정하고 여기에 오직 성령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이렇게 인간들을 끊임없이 쇄신시킴으로서 성화되어가고 성화되어가는 이 과정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고 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변화들이 결국은 궁극적으로 영혼이 이렇게 구원의 본질자체가 이렇게 영혼이 변화되어서 예전에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던 사람이 그리스도와 공동체적인 봉헌 속에서 하나로 붙어서 그래서 영적인 유기체를 이룬 생명체적 연합을 이룬다고 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들이 오늘 다시 들어가서 만약에 우리가 교회를 개척하거나 목회를 한다고 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을 교회에서 충분히 해주고 배려를 해주고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람이 교회에 모였는데 그 이상의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좋아하고 그 모임 속에 나와 헌금도 하고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칼빈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게 하나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모인 사실은 conversion하지 않은 사람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아나카펠라오의 다시 접붙여지지도 않은 사람들이 모인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모일 것이냐고 하는 케파?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본질자체가 시작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평생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나가서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어서 벌어먹고 살아도 내가 참된 신자로 이 사람을 가르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야단을 치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단 한 사람의 신자라도 세우기 위해서 그에게 종노릇 하면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 섬기다가 내가 죽으면 죽는 것이다.’ 라고 하는 이 관점을 버리지 말아야지 그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이상한 인간들이 들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서부터 아예 그 기준이 없이 시작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도대체 교회와 상관없이 떨어져있는 인간에 대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견해는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다라고 보는 것, 하나님께 자기 스스로 돌아갈 어떤 내적인 힘,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거나 행동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전적으로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 이게 성경적인 견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결국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원죄를 짓게 되지 않습니까? 결국 인간은 선천적으로 부패한 존재로 태어나게 됩니다. 결국은 죄책과 그리고 오염으로 이루어집니다. 원죄가. 부패가 어떻게 됩니까? 첫째는 전적무능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어떻게 됩니까? 전적인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add extra?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 아니면 도저히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기독교는 인간의 그 본질을 가지고 고민하는 종교입니다. 한 사람이 성공하느냐 성공하지 않느냐 그것은 성경에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양상입니다. 그대가 전도사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붕어빵을 구우며 살아가든지 아니면 또 운이 좋아가지고 한 나라의 큰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됐든지 아니면 노가다에서 삽질을 하면서 살든지 그것은 삶의 양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양상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창조의 목적에 더 많이 이바지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한 인간이 있는데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입니다. 그 사람이 토끼 가죽을 뒤집어쓰고 창 들고 뛰어다니면 딱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인간이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뽀마드를 바르고 종로거리를 지나다닌다고 해서 그게 문화인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쓰여진 바울 서신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 와서 닿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 서신이 쓰여질 때 우리는 한사군 시대입니다.
(예화) 최근에 여러분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1980년대에 한창 날리던 미국의 텔레비전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짐 베커라는 인물인데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거기에도 썼습니다. 근데 굉장합니다. 사람들이 막 그 설교를 들으면 불면증환자들이 그걸 듣고 평화를 누리면서 잠을 자고 양복장에 가서 수표 꺼내가지고 헌금을 긁고 잠을 자고 그랬다고 합니다. 근데 이 사람이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공주의 복음효과?입니다. ‘당신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다 예수 똑바로 못 믿기 때문이다. 똑바로 믿어봐라. 사이클을 딱 맞추면 방송이 선명하게 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이 쏟아진다.’ 그러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자기가 그런 복 받는 것의 화신인 것처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근에 조엘 오스틴도 그랬지만 엄청나게 얼마나 많이 벌겠습니까? 한국에서만 긍정의 힘이 150만부가 나갔는데 어느 출판사에서는 그거 팔아가지고 전 직원이 보너스 받았답니다. 얼마나 많이 벌겠습니까? 당신 그거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별한 복이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복에서 상당히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책 한권 받고 좋아하는 여러분들은 조엘 오스틴이 볼 때는 너무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이 굉장히 안 좋은 사람들이고 갖다 주는 나는 좀 나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최근에 책을 썼습니다. 책 이름이 ‘I was wrong.’(짐 베커책) 그러다가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 다음에 스캔들까지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그 사람이 어마어마한 돈을 횡령한 것으로 혐의를 받고 25년 선고를 받고 감옥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잃어버린 존경과 명예는 작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후로 막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고 소송이 일어나면서 알거지가 되어버려서 소송비용을 대기 위해서 감옥 속에서 4년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나중에 횡령혐의는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4년 9개월동안 거기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감옥 속에서 모든 것을 읽어버리고 성경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이 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속고 있었습니다. I was wrong.’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 혼자 혼돈을 느끼며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근데 그것을 여러분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뭘 가르칠지 몰라서 사람들을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그렇게 흘러가도록 돌보면서 산다고 하면 이것은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가 9년 동안 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는데 200-300명을 내보냈습니다. 저는 굉장히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인으로서 잘 살고 있습니다. 엊그제도 한 명 만났습니다. 가야할 필연이 없는 사람은 가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이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옳게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이 뭐냐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인간이 있습니다. 근데 이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인간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와 아날로기아 피데analogia fide라고 하는 것이 거기서 나온 것이지 않습니까? 중세시대의 존재의 유비와 신앙의 유비, 존재의 유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성으로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은 없지만 하나님 닮은 것이 많다. 그러면 그것이 아버지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닮긴 했지만 하나님 것하고 같지 않은 것은 떼어 내고 하나님과 닮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최대로 확장시켜서 쌓아 가면 결국은 이성으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입니다. 근데 그게 사실 가능합니까? 타락한 인간이.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수많은 이방의 종교들과 이교도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analogia를 잘 못했다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럼 도대체 누가 어느 analogia가 제대로 된 analogia고 어느 analogia가 잘못된 analogia인지 정답을 안 알려준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을 알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구도를 가지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연과 이성, 철학이 있으면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근데 종교개혁가들이 딱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나서 한 칼에 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그런 것들을 한 칼에 날려버리는 시도들이 종교개혁자들이 첫 번째 칼날을 휘두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중세 철학자들 사이에서 말년에 와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철학이 형편없이 말하자면 춘추전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을 다 스스로 막 거부하는 몸부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못자리가 바로 데카르트를 비롯해서 근현대사상이 싹트게 된 모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중세철학이 피나게 진리를 찾는다고 싸워가는데 마지막에는 그 인간들이 태어나는 못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역사의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매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analogia entis 좋아하네. 인간의 썩은 이성으로 그걸 찾아갈 수 있을 줄 아냐? 안된다.’ 하고 단칼에 날려버리고 ‘오직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만나고 온 사람들만이 알게 된다.’ 그게 바로 cognicio duplex?이것이 무엇이냐면 이중 인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인식은 두 가지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창조주에 대한 인식과 구속주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천적으로 보면 창조주에 대한 인식이 논리적으로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주를 아는 참된 지식은 인간이 이렇게 타락하면서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rm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analogia entis를 추구하는 것이 중세철학이라는 말입니다. 칼빈 같은 사람이 보기에 루터나 이런 사람들에게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틀렸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론 창조주가 먼저지만 창조주를 통해서는 창조주를 볼 수 없고 구속주를 통해서만 ? 창조주를 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구속주가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는데 analogia entis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은 이게 먼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주를 보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서 여기에서 다시 내려오면서 이 모든 창조세계의 사물들의 질서를 아까 여기처럼 귀납해 가는 것이 아니라 연역해 내려오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이 자연과 학문의 세계에 그 찬란한 아름다움과 놀라운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믿음으로 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개혁신앙이 학문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시고 구원하신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이 장엄한 우주의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지적계획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가. 내 마지막 유언을 하라고 그러면 ‘총신학생들이여 공부하거라.’ 그러고 제가 ‘으악’ 하고 죽을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좀 정말 갖추어진 학생,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리고 이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알아가고자 열렬한 사람 유학도 보내주고 싶습니다. 없습니다. 이게 있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습니다. ‘가서 어떻게 줄 서가지고 학위나 받아가지고 와서 어느 대학교라도 들어가 볼까? 목회도 하기 힘든데. 할 줄 아는 것은 공부밖에 없는데.’ 이런 사람 아니거나 아니면 기도원에 가서 맨날 불이나 때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
결국은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영혼이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켜서 우리들이 regeneratio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근데 이거는 이제 칼빈 시대의 사람들이 불렀던 그런 의미의 중생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의 중생이 아니라 이제 후기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들 이후에 정돈된 가운데 등장한 좁은 개념으로서의 구원서정 아홉가지 중에 하나인 혹은 여덟가지나 일곱가지 중에 하나인 바로 그 중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네르젝틱? regeneration입니다. 하나님의 동력적인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자꾸 이 구원론이라고 하는 것이 한 신학자가 구원교리를 A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신론이나 인간의 의지 그 다음에 이런 모든 것들을 어떻게 믿을지를 다 보게 해주는 집약판입니다. 이게 이렇게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은 신학시간에 effective calling이라고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유효소명이지 않습니까? 유효소명은 실패합니까? 안합니까? 실패 안하지 않습니까? 근데 알미니우스가 뭐라고 그러냐면 ‘유효소명은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도 임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구원에 관한 단순한 진술처럼 보이지만 이 뒤에는 뭐가 있는 것입니까? 지금 단순히 유효소명이 무엇이고 유효소명이 예수 믿을 사람에게만 임하느냐 안 임하느냐 라고 하는 구원서정가운데 이 소명의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뒤에는 철학적인 어마어마한 담론을 물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알미니우스는 이런 식의 칼빈주의적 인간관에 동의를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구원하려고 그래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나 싫어.’ 그러면 안되는 것이고 ‘ 나 구원 받아야 되겠는데?’ 하면 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뻗어 나가서 결국 뭐냐면 신론에 가서 무슨 문제가 나옵니까? 뽀떼스티야?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이냐라고 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인간의 자율이 어디까지이냐하는 철학적인 담론까지 다 물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칼빈시대에 칼빈이 맞서야 했던 범신론적인 대적자 가운데 오시안더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루터파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칭의를 어떻게 해석했냐하면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의 본질이 인간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뭡니까? 단순히 구원에 있어서 칭의의 정의가 틀린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본질이 신적본질이 인간에게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문제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편재성과 장소성의 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자신의 실재의 본질을 신적본질을 인간에게 존속시킬 수 있느냐?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담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세계에든지 당신 자신의 본질을 나누어서 침투시킬 수 있는 범신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됩니까? 지금 목회에서? 완전히 깡그리 무시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슨 놈의 구원입니까? 교회 나와서 출석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신자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에게 이 사람 중에 상당수는 아직까지 거듭나지도 못했을텐데 ‘당신은 교회 나오지만 그것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예수께 정말 접붙여졌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내 이야기를 다시 들어야 됩니다. Jesus died for us equal...복음을 설교해서 회개하든지 아니면 perish 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 하십시오. 이것이 성경입니다.’ 도전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부터도 장년설교 하라고 올라가라고 그러면 ‘성도를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성도가 없습니다. 없는데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버리시지 않습니다.’ 택하신 적이 없습니다. 택하심이 드러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속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뭘 버리냐는 것입니까? 원래 버려진 사람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도 이런 마음으로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가슴에 손을 얹고 종이 가지고 여러분들이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 기껏해야 50명, 100명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2주일만 시간 내면 됩니다. 가서 저녁때마다 가서 심방해서 이 아이를 물어보고 엄마한테 ‘이 아이가 정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구원의 증거가 있습니까?’ 조사를 해보라 이겁니다. 객관적으로 해보냐는 것입니다.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제가 여기서 맨날 설교를 듣고 제는 맨날 장난치는데 제 구원받았을까?’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궁금하지 않으면 목자도 아닙니다. 조사를 해보십시오. 그 결과를 실제로 놓고 보면 꼭 맞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내버려두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통곡이 안나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아니 대부분이 다 구원 못받았는데 그런데도 그게 눈물이 안 나오면 그게 어떻게 소명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소명을 무엇으로 확인하냐는 것입니까? 시간 되서 올라가서 사회보고 교회 청소하고 뭐 심방 다니고 그거 아무나 다 하는 일입니다. 무슨 하나님께 특별한 소명이 없으면 때려 죽여도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장이고 허풍입니다. 누구든지 다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명 받지 않은 사람이 못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우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에 일어난 나쁜 일을 내게 일어난 일처럼 생각하면서 아파하는 것, 그것은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중요한 차이점에서 여러분들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러면 어디서 여러분의 소명의 증거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항상 소명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증거가 필요합니다. 증거.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임을 입증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방면에서 그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이겁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는 논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에 이런 것들은 깡그리 다 상관이 없는 것이 되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제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목회자인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에게 일어나길 기대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반이 중생이 없는 회심이 없는 영혼들인데 그 영혼을 열심히 섬깁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일이 최대한의 성공을 거뒀을 때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한번 그 목표가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아 300명이 모였으니까 500명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자꾸 그렇게 커지기를 바라는 것은 바벨론의 특징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들이 행복할까요? 교회가 커지면? 대답을 한번 해보십시오. 성도들이 행복할까요? 대답을 해보십시오. 교회가 그렇게 커지면 성도들이 행복하냐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해야지 않습니까? 아니 조그만 했을 때 목회자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지 않습니까? 교회가 커져보십시오. 얼굴도 못 봅니다. 항상 심방하면 이것이 마지막 심방입니다. 심방가면 맨날 이럽니다. “언제 제가 목사님을 이렇게 대접을 하겠습니까?” 항상 그 이야기 합니다. 자기 스스로 이것이 최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교인이 1100명 될 때까지 직접 등록하는 사람들 다 심방 다녔습니다. 1100명이 넘으니까 아무리 부지런하게 몸부림쳐도 이제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지금은 더 못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미안합니다. 항상 마지막입니다. 심방하는 것이. “누구네 심방갑시다.” “어 거기 2년 전에 심방했는데?”그러는 것입니다. 자 그럼 보십시오. 교인들도 행복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그렇게 국적불명의 인간들이 모여서 교회라고 이루고 있는데 하나님은 행복하시겠습니까? 그럼 누가 행복하겠습니까? 목사가 행복하겠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목회의 정신으로 목회를 안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교인 많지 교인 많으면 생활비도 많이 주고 뭐 하다못해 차라도 좀 나은 거 사주고 집이라도 좀 괜찮은데 사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돈 많고 교인 많이 보십시오. 여기저기서 오라고 그럽니다. 아무리 설교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명함도 내놓고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취하던 영광을 이번에는 그라운드를 교회로 택한 것 이외에 뭐가 달라진 게 있냐는 이 이야기입니다. 그가 진짜 복음에 눈을 뜨고 나면 그렇게 많은 교인들이 곤고하게 살아가면서 나는 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을 찢게 될 것입니다. 그럼 결국 자기도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사냐 이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교회를 크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갖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안 갖는다고 해서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비전을 버리고 핵심가치에 몰두하십시오 그러면 최소한 성공 못하고 죽어도 하나님 앞에 ‘잘하였구나.’ 소리는 못 들어도 ‘충성하였구나.’ 소리는 들을 것 아닙니까? ‘크게 되었구나.’ 라고는 못해도 ‘충성스럽게 했구나. 좀 어리석긴 했지만 그래도 충성했구나. 네깐에는 그래도 최선을 다 했구나.’ 그러실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을 누리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을 거부한다면 개혁주의적 관점에서는 도대체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진다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저 밖에 모르던 이 인간이 살다가 결국은 하나님은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근데 결국은 하나님은 직접 못 봐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징조는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는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통과 악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병원체라면 자기가 느끼고 있는 이 발열과 기침, 오한, 뼈가 쑤시는 것 이것은 악입니다. 이걸 경험하며 살면서 결국 나 혼자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결국은 처음 창조할 때부터 인간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짓이기셔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순결하신 그분이 저렇게 죽으신 것이 결국은 나의 죄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외에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한 면 중 또 다른 면을 동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Amor 사랑입니다. 그렇게 떨리는 두려움이면서도 도망치고 싶지 않은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와 자기 같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증거를 십자가의 사건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여러분 학교 와서 나눠줬던 그리스도의 속죄론, 개혁주의 속죄론, 그게 바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죄와 율법으로부터 속량하셨는지에 대한 교리입니다. 아주 일부분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시면서도 나같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하면 회심의 경험입니다. 이 회심은 중생과 관련된 이건 하나님의 동력적인 역사이지 않습니까? 회심은 인간의 협력적인 역사입니다. 회심은 중생의 첫 번째 Petrus van Mastricht라고 하는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에 의하면 중생한 영혼의 첫 번째 활동이 회심입니다. 이게 의식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게 결국은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의식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무의식세계 속에서는 자기의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려오는 충만한 생명의 연합 속에서 그 생명을 부여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현주소고 그런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을 보이는 하나님의 제도 속에서 구체화 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교회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이 모든 활동이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하자면 유기체적인 섬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동체와 함께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함께 공동체로서 섬기면서 그 모든 것들은 나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로 봉헌이 되고 공동체의 봉헌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열납되어가는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여러분들이 오늘 종교개혁자들이 물려준 유산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이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카톨릭에서 찢어져 뛰쳐나왔기 때문에 그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개신교안에는 분열의 유전자가 생긴 것입니다. 진리를 올바로 알면 이 부패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분열의 유전자인지 성경적인 분열의 유전자인지를 분간해낼 수 있는데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분열의 유전자는 성경적 유전자인데 이 후에 후손들은 그 분열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는 필연적인 종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육욕에 시달려서 교단을 막 찢고 교회를 가르고 편 가르고 싸우고 복음의 전선에 나가서 그렇게 싸워도 시원찮을텐데 교회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그 다음에 말하자면 학자의 글들을 가져다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분석해서 막 투서를 하고 해가지고 학자들을 매장시키고 하는 이런 못된 일들을 하고 있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사람이 그런 식의 삶을 회개도 하지 않고 일관되게 산다면 그가 어떻게 중생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 때서부터 여러분들이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 물질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고 모든 걸 나누어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합니다.
(예화) 제가 아는 교수님 한 분은 유학을 갔는데 돈이 없어서 너무 죽겠는데 기숙사에 와서 뚜껑을 탁 열었는데 성경책 속에서 봉투가 턱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졸업할 때까지는 누가 해줬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학우들이 해준 것입니다. 옆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래서 자기도 할 수 없이 한번 해주고 왔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는 아니겠지만 자기도 그렇게 해주고 온 것입니다. 그런 뜨거운 형제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면 삐에따스 pietas입니다. 이게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뭐냐하면 자기의 죄에 대해서 심오하게 회개하고 오직 나를 이 모든 율법과 죄의 저주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라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오는 그것이 되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콘베르지오할 수 없습니다. 아데르지오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그 창조의 목적에 살게끔 만들어 놓으셨는데 인간 자신이 그러한 질서를 이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왜? 자기가 세운 질서가 아니니까 자기가 질서를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질서를 세운 그 질서 속에 사람들을 넣고 싶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변형을 시켜서 그 속에 쑤셔 넣어서 내 구도대로 모습을 가지고 움직이시는, 작용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이게 바로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는 뭐 그렇게 나쁜 짓을 하는 게 세속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이 딱 올라가서 중심성을 차지하게 된 것 그것이 세속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웃끼는 예인지 모르지만 제 주위에 보면은 굉장히 신실한 목회잔데 세속적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목사님 그런 말이 어디있습니까?’ 하겠지만 아닙니다. 굉장히 신실합니다. 왜? 욕심도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도 없습니다. 도덕적으로도 깨끗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뭡니까? 세속적입니다. 그게 뭡니까? 가치기준이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금식기도하면서 그런 전도대원들 불러서 월급 줘서 전도시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실합니까? 금식기도하니까. 돈을 줘서 그것을 시키니까 얼마나 세속적이냐는 것입니다. 신실한 세속주의입니다. 아닙니다. 굉장히 그런 예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pietas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pietas가 결국 뭐냐하면 언약백성과 비언약백성들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signal, sign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떨리는 두려움과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경건이 히브리어에서 야레yareיָרֵ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원래 두렵다고 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게 히랍어로 넘어와서 유세베이아가 ευ’ σεβεια 되는 것입니다. ευ’ 는 ‘좋은’이고 σεβεια 는 ‘공포’라는 것입니다. 좋은 두려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만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중심성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이 되고 이런 속에서 지난 시간에 강의에 참석했던 분들은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 것 읽어보면 알지 않습니까? 끊임없는 mortification속에서 결국은 영혼이 비비카치오vivicatio되고 그러는 속에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중생인데도 후기 개혁파 스위스 쪽으로 가게 되면 이 중생의 필요성을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것보다 더 우주론적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시키지 않고 내버려둬도 세계창조의 역사는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뭐냐면 인간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뭉개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놓고 버리시지 않는 한 결국은 그 인간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영혼을 다시 회복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회복의 첫 번째 가능성의 부여가 바로 중생에 의해서 그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고 접붙인 그 사람을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해서 점점 더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기독교강요 3권에서 교회론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바로 그렇게 신자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과 수많은 역경을 십자가 삼아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하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람을 구원하셔서 신자를 만드십니다. 근데 아직까지도 여기에 잔존하는 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성화시키고 우리는 거기에 믿음과 순종으로 참여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해서 완전히 참된 신자가 된다고 가정을 합시다. 결국은 못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영화, 성화를 완성시키고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하시지 않습니까? glorification하시지 않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게 되는 마지막 이 목표가 바로 원래 여기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하면 사람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예수께 접붙여지게 하고 접붙여진 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과 모든 진리의 지식으로 가르치고 성령으로 그를 하나님께서 통치하도록 성화의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만드는 그것이 목표가 뭐냐면 사람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이 되어서 결국은 본래의 창조의 목적의 그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뭡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하지 않은 업그레이드 된 무엇을 추가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개만도 못한 개는 없습니다. 소만도 못한 소는 없습니다. 근데 인간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성의 paradox가 있는 것입니다. 개가 아무리 나빠도 개만 못할 수 없습니다. 근데 인간은 나쁘면 개보다도 더 훨씬 나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개는 보신탕이라도 제공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 나쁜 거 어디가 끓여먹습니까? 그런 막장에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참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만드니까 자기가 그런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자기 신앙적이고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고뇌의 핵심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외치면서 설교가는 대부분의 것은 내가 살면서 고민했던 것들이지 내가 고민하고 있지 않은 그것을 어느 순간에 고민하는 것처럼 설교하는 것은 고도의 위선입니다. 목회에서 핵심적인 진리들은 신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한 번에 안되니까 그 사람들을 데리고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때는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교회의 영광도 알고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지체라는 사실을 알면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지만 은혜 떨어지고 진리 떨어져보십시오. 교회에 감옥이 있습니까? 형틀이 있습니까? 고문도구가 있습니까? 그 옛날에 중세교회 때는 하지 않았습니까? 목도 자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 뛰듯 개 뛰듯 하는 것입니다. 징계해봐야 출교입니다. 출교 소용없습니다. 막돼먹은 인간에게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종교개혁 발자취를 따라서 다 여행을 했습니다. 9일 동안에 몇 년전부터 벼르던 것인데 9일 동안 6000Km를 달렸습니다. 휴가를 내서 갔다왔는데 돌아오니까 휴가가 가고 싶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근데 그 루터가 고난 받던 비텐베르그 성당, 그 다음에 탑에 갇혀있었던 막데부르크성, 그리고 쯔빙글리가 장엄하게 아들과 사위와 더불어 전사한 카펠전투의 현장 눈물 안나왔습니다. 그런데 칼빈이 목회하던 삐에르 성당에 딱 들어가는 순간 나올 때까지 주체할 수 없게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칼빈은 사실은 신학적인 독창성에 있어서는 루터에게 밀리는 사람이었고 전사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쯔빙글리와 비교가 안되는 사람이었고 목회적인 경험과 능력에 있어서 가슴의 크기에 있어서는 부쳐와 상대가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부 잘한 것 빼놓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독히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에서 그 못된 인간들하고 싸우면서 거기에서 그렇게 설교를 했다고 31가지의 질병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는데 그 강단을 이렇게 보면서 한 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카플에서 찔려 죽임을 당한 쯔빙글리가 훨씬 덜 고생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셨던 당신이 진짜 순교자입니다.’ 제가 속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목회 안했으면 눈물이 안 났을 것입니다. 한 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돌아오면서도 생각을 하는데 그 분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눈물이 계속 났습니다. 여러분 역사 속에서 볼섹논쟁이라는 것 아십니까? 볼섹이라는 인간이 칼빈을 씹고 다녔습니다. 하다하다 안되니까 나중에 뭐라고 했냐면 ‘여자만 보면은 껄덕거리는 인간이고 붙어먹다 붙어먹다 모자라가지고 결국은 동성애까지 한 놈이다. 증거가 나한테 수없이 있다.’ 이러고 글을 써가지고 온 유럽에 다 뿌립니다. 칼빈이 그런 찬송을 불렀을리 없지만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런 심정으로 목회를 하다 죽은 것입니다.
(예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 사돌레트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카톨릭의 사제인데 사돌레트 때문에 스트라스부르크에 갔던 칼빈이 제네바 2차 귀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돌레트가 굉장히 학자였습니다. 사돌레트가 중세철학에 대해서도 훤히 꿰고 있는 말하자면 그 당시로 보면 중세말기에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카톨릭의 중요한 신학자였습니다. 정식으로 제네바교회에 개혁신학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편지를 받았는데 물론 그 사람은 답변을 원하고 준 편지는 아니고 이제 말하자면 좀 꼼짝 못하게 하려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아무도 이것을 대답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시켜서 이것을 하느냐 칼빈선생 밖에 없으니까 가서 삼고초려를 합니다. 칼빈이 돌아와서 답합니다. 결국 이후에 계속 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제네바에서 처음 목회할 때 3천명이었는데 만오천명까지 늘어납니다. 왜냐하면 전도를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각 나라에서 핍박받던 난민들이 칼빈의 그늘 아래로 모이는 것입니다. 거기서 막 생명을 걸고 복음을 외치고 그 진리의 정신대로 살려고 하니까 사돌레트가 아니 도대체 곧 무너질 것 같던 교회가 하나 가 아니라 여러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역자들도 많았습니다. ‘가서 그 사람 한번 만나고 와라.’ 그 사람들이 부하들이 와서 탕탕 두들겼습니다. ‘이리 오너라.’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그러는 것입니다. ‘칼빈선생에게 안내하거라.’ 종이 하나 내려오니까 ‘사돌레트주교와 보내서 왔다고 하거라.’ 종 같이 허름하게 입고 내려온 사람이 ‘제가 칼빈인데요.’ 이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아 그랬구나. 저 진솔한 삶, 권위가 없는 저 진솔한 삶, 경건한 모습, 저기에 사람들이 매료당하는구나.’ pietas. 끊임없는 이미 얻은 구원의 현재화를 통해서 pietas는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게 결국은 회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심을 목표로 사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이 쓴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고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여러분들이 성경을 덜 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부터 먼저 보십시오. 그거 읽는데 시간도 얼마 안 걸립니다. 그러니까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의 두 배정도 크기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읽어서 결국은 거기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회심을 목표로 사역하라는 것입니다. 라헬이 아이를 못 나으니까 야곱에게 매달리면서 ‘나에게 아이를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 죽어버리겠다.’ 그러지 않습니까? 스펄전이 그 예화를 딱 들면서 ‘봐라. -하나의 비유이긴 하지만- 아이를 못 나으니까 이 여자가 야곱이 아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야곱에게 매달리면서 아이를 나보고 낳게 하라. 내가 만약에 아이 못 나으면 죽어버리겠다. 그러지 않느냐? 당신이 진짜 목회자라면 그런 심령이 되라. 영혼을 끌어안고 그 영혼을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중생하고 회심하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이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라. 당신이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사역하는 사람이냐?’ 그러고 확 찌르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문제는 이렇게 여러 시간 풀었는데 답은 간단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여러분 자신이 경건의 진수를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이 얼마나 불행한지 여러분들이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게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길이 좋아서 소명 없이 그냥 덜렁덜렁 온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근데 그만 두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 학기 중에는 공부하고 끝나자마자 기도원 가십시오. 왜 웃습니까? 저는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희화적인 것이 싫습니다. 왜 웃냐는 것입니다. 웃을 대목이 아닌데. 그러고 기도원 가십시오. 기도원 아니면 학교도 좋습니다. 가서 ‘도대체 나는 누굽니까? 그리고 하나님 나는 어디다 쓸려고 만드셨습니까? 내게 소명을 주셨으면 내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이 소명이 참되다는 것을 sealing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를 자유롭게 한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교회에 소속되어서 신실한 목회자를 충성스럽게 옆에서 섬기며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삶이냐 이것입니다. 누가 바나바가 바울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서 한 사람의 평범한 회사원으로 아니면 한 사람의 평범한 장사꾼으로 한 사람의 사업가로 그렇게 어린 영혼들을 돌보고 교회에서 그렇게 평신도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 얼마나 아름답게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왜 이 길이 필연적으로 가야하는 길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 갈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여러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내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소명의 진실함을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행복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이렇게 떨리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날마다 더 알아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없는 이끌리는 사랑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pietas가 증진되고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런 삶의 행복을 느낄 때 그렇지 못한 영혼을 보면서 눈물이 날 것 아닙니까? 그런 영혼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어떻하든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 돕는 도구가 뭐냐하면 두 개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다 보조도구일 뿐입니다. 뭡니까?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진리의 말씀과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 일을 여러분들을 도구삼아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학문이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학문이 어떻게 되냐면 복음진리를 깨닫는데 이바지하는 학문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철저히 공부해서 그래서 이것을 결국은 복음을 안다라고 하는 것에서 존 오웬 목사님은 뭐라고 하냐면 ‘복음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두 개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첫째는 복음과 두 번째는 복음교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Jesus died for us. 이것이 복음입니다. 더 짧게 줄이면 예수가 복음입니다. 뭘 공부할 게 있느냔 것입니다. 복음을. 그런데 그것은 복음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펑펑 울고 회심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사람 안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죄가 무엇인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습니까? 이 복음교리가 바로 그런 지식을 토대로 이 복음을 토대로 그런 지식을 사용해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화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고 회심해서 6개월 동안은 그 설교가 너무 놀라웠는데 1년 정도 지나고 나서 교사하고 그러다보니까 그 다음에 뭡니까? 예배시간에 공과 준비하는 것입니다. 왜? 목사님설교가 맨날 거기서 빙글빙글빙글빙글 도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그럽니다. 예배가 안드려진다고. 그러니까 치열하게 공부해서 성도들이 여러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발짝을 따라올 때 여러분들은 두 발짝으로 도망을 쳐야하는 것입니다. 네 발짝 따라오면 더 멀리 마지막에는 그냥 당신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르쳐주는 대로만 살겠습니다라고 할 정도로까지 지적인 격차를 느끼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할 수 있으면 빨리 그만두기를 바라지만 저는 연구를 좀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지간에 그것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겠지만 두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교회가 수 만평이 되는 것도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다 털어버리고 백 명으로 찌그러져 버리는 것, 그것도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짓는 것 그것도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다음에 오는 사람이 그것을 채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뭐냐면 그런 것은 전부다 다 목회의 양상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어쨌든 15년이고 얼마 있다가 은퇴를 할 것 아닙니까? 그 때를 기준으로 놓고 살아온 날들 중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날이 되고 은퇴하는 그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교하면 그 날이 가장 덜 닮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가 70까지 설교를 하면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31년을 설교한 것입니다. 지금 15년을 설교를 했는데 ? 3800편을 설교했답니다. 자기네 끼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800편이 전부 다 텍스트로 풀려있습니다. 원고지 30만매 분량입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마지막 날, 은퇴하는 그 날 고별설교를 할 때 성경을 폈는데 제 설교를 31년간 들었던 성도들조차도 본문을 읽었지만 무슨 설교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세 가지로 집약이 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부단한 mortification과 vivication을 통해서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는 참된 신자가 되고자 하는 분투하는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탐구해서 복음서에서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그 서고에서 새것과 옛것을 끊임없이 꺼내오는 서기관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능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사상이나 상황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 그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서 힘이 있는 대로 하나님의 학문을 펼치면서 죽을 때까지 계속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입니다. 의과대학 나오고 책 하나 들쳐보지 않고 골프채 치고 돌아다니면 10년 후에는 돌팔이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머리에 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끊임없이 책을 놓고 끝없이 공부하는 학생이기를 자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그 모든 것을 잘 조직하고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강한 능력이 그들을 움직이고 그들의 양심을 때리고 그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그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역사가 없이는 죽어도 사람의 잔재주로 회심할 수 없다라고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공부하지만 그것을 갈멜산 위에 쌓아올린 장작에 불과하고 그 자체가 불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가 열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안하고 신대원 다닐 때 열렬한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도 나중에 목회해 보십시오. 기도 잘 못합니다. 바쁘고 늙으니까 이제 힘이 없으니까 저녁 늦게까지 강의하고 집회하고 새벽예배 못 일어납니다. 그런 한계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방학 때 딱 끝나면 항상 신대원 때 방학 끝나면 기도제목 없어도 무조건 일주일은 금식기도. 기도원 가서. 왜?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묻었던 더러운 때들을 닦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갈 길을 모르지만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처음에 이 길을 들어섰을 때의 마음에 품었던 소원 그대로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갈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그들이 회심할 수 있다면 나는 더 많이 죽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교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제가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I'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원래 없는 존재입니다.’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 있는 대로 신체의 두 부분이 ? . 책상에서 공부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pietas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의 이야기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29살에 죽었습니다. 선교사였고 목회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설교하러 올라오기 전에 항상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고 그리고 설교하러 올라왔습니다. 올라가서 29살도 안된 청년이 설교를 하려고 단상에 딱 서 있으면 설교는 시작도 안됐는데 교인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답니다. 왜냐하면 얼굴에서 찬란한 빛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을 만나고만 왔는데도 저렇게 찬란한 빛이 나는데 그가 직접 대면했던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일까? 그 거룩하심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 죄인들인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답니다. 그게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기도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전도사로 살면서 담임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전도사님. 왜 기도회 안 나오세요? 기도안하세요?’ 이런 소리나 들으면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로님이 ‘전도사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요?’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담임목사가 ‘너 그렇게 기도해도 괜찮겠니? 건강을 좀 보살펴야 되지 않겠니?’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찾아가는 삶이 이 신학의 과정입니다. 이 목회를 준비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꼭 살아서 그런 목회자 한 사람이 얼마나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희망이 없는 이 조국에 폐허가 되어가는 이 교회에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와 이 모든 비성경적인 시대의 사조에 타협하는 목회의 환경을 쓸어버리고 신본주의를 굳게 세우고 나는 내가 만난 신학 중에서 제가 신학을 꽤 여행?했습니다. 진짜입니다. 제가 언제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하겠지만 꽤 많이 여행을 했습니다. 근데 최고로 아름다운 신학이 개혁신학입니다. 그것도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의 약간 맛을 존 오웬의 신학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그래서 요즘도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매일 공부합니다. 그래서 얼 마나 감사드리는지 모릅니다. 요번에 제가 한 권에 520만원짜리 책을 사왔습니다. 화란에서. 한 권에 400년전의 책입니다. 없습니다. 어디에 찾아도 인터넷에도 없고 할 수 없이 샀습니다. 보면서 이런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신학이 이렇게 아름다울수가 있습니까?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러면서 그 진리와 함께 살고 웃고 울고 그 진리대로 사람들을 살도록 가르치고 그러면서 나는 죽어가고 그들은 살아가고 그러면서 나는 죽어갈수록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저들이 자라갈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어느 순간에 우리의 혀가 굳어지고 우리의 피에 흐름이 멈추고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잠깐 살아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저 건물에서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이야기하던 소리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게 벌써 25년전의 일입니다. 지금 벌써 많은 지체들이 벌써 사역을 접은 지체들도 있습니다. 같은 형제들이 그렇게 속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이 기회에 혼신의 힘을 다 하기를 바랍니다. 혼신의 힘을. 그래서 그대들 살아있음에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대들이 살아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더 아름다워지는 이유가 되도록 그렇게 산다면 비록 아골 골짝 빈들에서 복음 때문에 쓰러져 죽어가도 그 삶은 값지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왜? 진리와 함께 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다가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새 예루살렘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