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부족을 채우는 사람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2:30)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실 때는,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귀하지만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셔서 그 지도자와 함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에는 모세의 출현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고, 모세가 태어나서 성장을 하자 그를 지도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 세월이 흘러가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하게 될 때는 모세가 이미 죽고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들어서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백성들이 부패하게 되자 사무엘이라는 어린아이를 태어나게 하셔서 지도자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의 새 기틀을 놓으십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꾼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게 하십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하신 것도 바로 다윗을 지도자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종들을 세워서 일하게 하실 때에 혼자 일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많은 다른 종들과 함께 일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통해 하늘 뜻을 이루시는 비결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이고 각별히 사랑을 받던 교회였습니다. 훌륭한 교인들이 많고, 또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인하여서 핍박을 받아 옥에 갇혀있을 때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너무 근심을 해서 에바브로 디도라는 일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바울의 쓸 것도 조금 들려서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울 가까이서 바울을 섬기는 동안에 그만 병이 났습니다. 그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지자 교회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얼추 병이 나은 에바브로 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이 편지를 써준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며 너희의 섬김의 부족함을 채우려했다는 이 평가는 에바브로 디도라는 일꾼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지 아니하시고, 돕는 사람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바울에게는 바로 이 에바브로 디도라고 하는 일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돕게 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교역자인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교역을 하느냐 세상에서 사업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다니엘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 나라를 탁월한 지혜로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다니엘이 전도 활동을 했습니까? 아니면 선교사 노릇을 했습니까? 골목골목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바벨론과 메대 바사의 일을 돌보면서 그 나라를 위해 일했던 관리였습니다. 그런데도 다리오 왕이 그가 갇혔을 때에 뭐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비록 자기 밑에서 밥을 먹으며 나라를 섬기고 있는 일꾼이었지만 그 사람의 눈에도 그는 자기를 섬기는 다니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주의 일도 마음 없이 하면 세상일 하는 것이 되고, 세상일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면 주의 일이 됩니다.
오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연합회 활동을 하니 뭘 하니 하면서도 세상일 섬기듯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위해 일하고, 그것을 다투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의 일을 형식적으로는 하고 있지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사회의 저명인사였는가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나 자랑거리이지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자랑거리는 얼마나 높은 지위와 많은 일을 하다 왔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다 왔느냐입니다.
바울을 섬겼던 탁월한 일꾼, 에바브로 디도는 바로 그리스도의 일에 힘쓰던 일꾼이었습니다. 사업을 해도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이 많은 자원을 주시고 그 자원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서 곤고하고 아픈 사람들을 구하고, 구원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는 영혼들을 살리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그 일을 한다면 그 사업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지 세상의 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밥은 먹고 산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어떻게 성도로 태어나서 그런 생각을 갖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서 사업을 하면 점점 더 커지고 직장 생활을 하면 점점 지위가 높아져서 그 명성과 지위, 그리고 자원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망가진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고,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만드는 일을 위해 수고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다가 주님 앞에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주님을 섬기다 가야합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몸담고 있는 많은 성도들 중에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일을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 시간에 한번 나와 주는 것을 큰 부주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목사님이 예배당 마당에서 성도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면 속으로 “뭘요 이 정도쯤이야”하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느 곤충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개미들을 보니까 80마리는 열심히 일하고 20마리를 놀더랍니다. 그래서 핀셋으로 노는 개미를 다 꺼내고 80마리만 남겨두었더니 다시 80마리 중에서 16마리쯤은 놀고 있더랍니다. 이처럼 일 안하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교회에도 늘 있게 마련입니다.
주일날 어떤 사람들은 옷 보따리를 두세 개 가져와서 갈아입고 주방에서 일을 하고, 부엌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예배 끝나고 청소를 하고 집에 갈 때는 온 몸에 땀이 흐른 가운데 샤워도 못하고 집에 가지만, 교회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은 그림처럼 왔다가 그림처럼 사라집니다. 그게 더 우아해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복된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니까 세상일 하는 사람은 그와 한 배를 탈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목회자를 돕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잠언에 보면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성도들과 마음을 합하여 어떻게 하든지 목회자를 이해하고 성도들을 이해하고 그 사이에서 화합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섬기는 일꾼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이고,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너는 무엇을 하다 왔느냐?”하고 물으실 때 “주님의 일을 하다 왔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네 인생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번영이었고, 교회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실 때에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바는 당신이 남기신 일을 우리로 하여금 뒤잇게 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6년까지는 자기를 위해 세상일 밖에는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금년부터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 일을 하는 방식입니다.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사충성의 자세로 그리스도의 일을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신앙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곡식에는 눈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 밀이 모두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밀은 썩어서 없어지지만 그것이 양분이 되어 그 밀 중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은 눈 하나를 살리기 위해 밀이 죽는 것입니다. 밀은 우리 모인 성도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기에서 밀의 눈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죽어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도록, 우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사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정신입니다.
교회가 항상 순풍에 돛 단 것같이 지나갈 줄 아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가 진실하고 순결한 신앙을 추구하고 나아가려고 할 때에 악마가 가만두겠습니까? 악마도 상종해주지 않는 교회라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이렇게 그저 표류하는 배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언젠가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문제는 없으십니까?” “저희 교회 성도들은 너무 침체에 빠져서 문제를 일으킬 기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기력이 남아야죠! 예배당에 나오는 것도 간신히 나오는 사람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관심이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약에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어서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땀을 흘려 일을 한다면 어찌 시련이 없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건강하고, 주위에 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목회를 하는 교회를 보십시오. 예전에 시련의 바다를 통과하지 않은 교회가 없고, 고난의 골짜기, 눈물의 파도를 헤치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다. 반드시 누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결국은 교회에 시련의 파도가 올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목회자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신앙에서 미끄러진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 눈 뜨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만족하며 배 두드리며 사는 사람들이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기 위해 때로는 시련을 주십니다. 그때에 그런 고난이 일어나면 교회는 모두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에 목회자가 안 죽겠다고 몸부림치면 교회는 나누어집니다. 장로들이 죽기 싫다고 버텨보십시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결집을 해보십시오. 그 나뉘는 상처와 고통은 그대로 교회에 돌아가게 됩니다.
요즘은 교회 다니는 것을 장난하는 것처럼 다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다녔다가도 어려움이 생기면 ‘마음이 편할려고 교회에 왔는데 마음 상하고 괴롭게 교회에 다닐 필요가 있냐?’하면서 훌쩍 떠납니다. 그리고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정해진 교회도 없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돕니다. 이게 뭡니까? 환란과 시련이 많이 닥칠 때에 목회자가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자기가 죽고자 하면 그 고난을 통하여 교회는 더 빨리 하나님이 목표하신 곳으로 갑니다. 그런 시련과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장로님들이 자신이 부족하고 기도가 모자랐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겼다고 할 때에 교회는 살아납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서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교회의 많은 시련이 변화되어서 성도들에게 교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교회 일꾼들에게 이 교회가 자신의 교회라는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게 합니다.
저는 교회의 정치같은 것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한국에서 유서 깊은 교회에서 저를 자기네 교회의 부흥회에 오라고 초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수하게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에 저를 부른지 알았습니다. 갔더니 담임 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였습니다. 3~4일 말씀을 전하겠다고 마음먹고 내려갔는데, 첫날 저를 강사로 청빙한 장로님이 “목사님, 우리가 목사님을 부른 것은 교회의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만저만해서 교회에 큰 분란이 났는데 목사님이 이것을 해결해 주시고 가셔야 됩니다.” “장로님, 번지수를 잘못 잡으셨습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총회나 노회에서 경험이 많은 목사님을 모셔야지, 저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뿐인데 저의 교회도 아닌 남의 교회에, 7~8분의 장로님들이 해결 못하고, 천여 명의 교인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을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제가 어떻게 해결합니까?” 라고 했는데도 결사적으로 부탁을 하는데 난감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은 계속 전했습니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뭔지는 모르지만 해결은 해야겠는데 제가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하고 기도를 하는데 신기하게 마지막 날 아침에 문제의 당사자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숙소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에게 사경회 동안에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자기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지도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에서 마지막 날 집회하기 직전에 당회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랬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경회가 오늘 끝나는데 해결이 안 될 것 같다.” 그랬더니 보통 낙심한 표정이 아니더라구요. “다음 주일에 부흥회에 올 텐데 조건이 있다. 당신들 삼일 동안 금식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모두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에 다시 내려갔더니 정말 장로님들이 금식을 하더라구요. 젊었을 때는 일주일 열흘도 해봤지만 머리가 허옇게 되면 삼일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기가 막히게 해결을 하셔서 양측이 합의문을 썼습니다. 교회에 다시 평화가 왔습니다. 제가 가르쳐 준 것은 “서로 죽어라”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 한 분이 죽으시니까 이처럼 수많은 하나님의 자식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살아있도록 울려 퍼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목회자는 죽고, 한 교회에 은혜의 물이 흐르기 위해 장로님들이 끊임없이 죽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바로 지사충성의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엉덩이 두드려주고 교인들이 칭찬할 때에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고난이 오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명예와 칭찬이 아니라 오해와 비난, 모함, 명예를 깎아내리는 예의없음으로 돌아오게 될 때에 죽기를 싫어하면 자신은 안 죽을지 모르지만 교회에는 큰 아픔이 옵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교회의 지도력의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삼년이 넘게 목회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에 유언처럼 남긴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그는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은사의 사람이었지만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모여서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지도자들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회자와 함께 죽는 사람이 한 사람 밖에 없다면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필요합니다. 에바브로 디도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 에바브로 디도의 섬김이 빛나는 것은 그가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섬김이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마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려울 때에 바울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 디도는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교회에 그런 교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목회자의 마음속에 ‘내가 만약 고난을 당하여 이 교회를 위하여 죽으면 저 사람은 나와 함께 죽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겠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 모두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도 바울을 섬기는 빌립보 교회의 부족함을 채운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양떼들로서 주님을 섬기기에 충분합니까?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주님을 위해 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100명이 모이면 60명 이상은 무위도식하면서 겨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섬김은 항상 우리 그리스도를 섬기기에 모자랍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건축할 때, 교인 100명이 모이는데 1억이 필요할 때에 100 나누기 1억해서 한 사람 당 100만원씩만 헌금하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면 헌금이 반도 안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한 푼도 안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두 배, 세 배를 내야지만 겨우 그 목적한 돈이 나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교사역을 위해, 전도활동을 위해 이만한 헌신이 필요하다고 할 때에 머릿속으로 그것을 교인 숫자로 나누면 항상 그 전쟁에서 실패합니다. 왜? 반 이상은 협조를 안 할 거라고 예상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나, 그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한 우리, 더 많은 사랑과 진리를 맛본 우리들이 그 일을 위해 헌신을 더 해야지만 저희들의 섬김의 부족함을 채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꾼들이 더 많이 헌신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누군가는 그들의 모자라는 섬김을 보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교인 7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교사들이 잔뜩 모였는데 그 지도자들이 하는 얘기가 “목사님, 설교 시간에 교사 좀 그만두지 말라고 권면해 주십시오. 일꾼이 모자랍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7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 일꾼이 모자라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7만 명이 모이니까 일꾼이 모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열 명이 모이면 일이 필요가 없습니다. 7만 명이 모이는데 그중에 5만 명이 놀고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뒤치다꺼리를 할 일꾼이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남의 집 구경 온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제 교인들이 모이는 크기나 교회 건물의 규모를 가지고 자랑을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문제는, 그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사람, 성도들의 모자라는 섬김을 자기를 헌신하여 채우려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의 수에 의해 교회가 평가받아야 될 시기가 온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섬기는 일에 어느 교회가 자신만만하고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눈 없이 세상을 보면 할 일이 없고, 사랑의 눈 없이 교회를 보면 충분하지만, 사랑의 눈을 가지고 교회를 보면 아직까지도 돌보는 지체가 많아서 마음이 아프고,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전 외국에 나갔다 올 때마다 이 세상이 정말 넓고 너무나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 눈앞에 가득할 때에 일꾼으로 보내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교인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주님을 섬기기에 항상 모자라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가 건강을 돌보지 않고 피를 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매일매일 영웅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여서 주님이 그 교회를 통해 받으실 섬김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분이신데 충분한 섬김이 가능하겠습니까? 교회의 일꾼들이 주님을 위해 충성되게 일하고 목숨과 재물을 바쳐서 주님의 교회를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 섬김이 충분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들러리처럼 왔다가 사라져가는 수많은 성도들을 바라볼 때에 마음에 그런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저들이 섬기지 아니하는 저 섬김도 우리가 대신 져야할 십자가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애가 그러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많은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고,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셨습니다. 사실은 그 일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몸소 모본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섬기기에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시고, 그 후에 그 본을 따라서 우리도 주님처럼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서른 세 해 동안 멸시와 욕을 당하시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신 후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썩으시고, 죽으시고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인 것처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고 밀의 눈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살아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깊이 고민하며 눈을 들어 교회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워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하실 때에 그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애써도 모자라고, 성도들이 힘써도 모자랍니다. 그것을 가까이에 있는 에바브로 디도는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지사의 헌신으로 성도들의 부족한 섬김을 채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위하여 당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었고, 그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자기의 육체 속에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광과 존귀와 모든 명예는 주님께 돌려드리고 멸시 천대 십자가를 우리가 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그런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성도들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자신이 성도들의 모자란 섬김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다른 성도들처럼 섬김 없이 무위도식하며 살면 안 되고, 성도들의 모자란 섬김을 우리가 대신 채우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가 더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주의 종이 되었고, 지도자가 되었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이 죽고, 희생해야 합니다. 자신을 죽여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화목하게 하는 일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남전도 회원들은 물론이고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되 목숨을 다하여 성도들의 모자라는 헌신을 자기에게 다 채우며 주님을 섬겨서 성도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주의 일꾼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