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5. 외부강의
소쩍새 우는 사명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녹취자: 박은희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서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수월치 않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제가 한 90분정도 100분정도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턴데 유익이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요일이었습니다. 언제인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수요일 저녁의 일이었습니다. 설교가 다 끝났는데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와서 설교가 끝났는데, 막 내려오는데 잠깐 상담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러자고 그랬습니다. 저희교회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교역자실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자기를 소개하는데 지금 사당동 총신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그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런데 신학생이 우리교회는 뭐하려왔냐고 그랬더니, 다른 교회 전도사로 있는데 오늘 특별히 말씀을 듣고 싶어서 본 교회를 놔두고 이 교회를 왔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냐고 그래서 해보라고 그랬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잘하려면 어떡해야 될까요?”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설교를 잘하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야지 나처럼 못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그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내가 설교를 잘하면 왜 이 방배동에 개척교회에 이러고 앉았겠습니까? 바울처럼, 이전에 유명했던 설교자들처럼,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다니며 하나님말씀을 전파하지,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내가 이 방배동 개척교회에 왜 있겠습니까? 나는 설교를 어떡하면 잘 하는지 대답해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떡하면 설교를 못하는지는 압니다. 왜? 내가 설교를 못하니까 어떡하면 설교를 못하는지 압니다. 당신처럼 맨 날 돌아다니면서 어떡하면 설교를 잘합니까? 여기저기 맘에 드는 목회자 쫓아다니면서 설교 잘하는 방법 좀 하나 알려 주쇼 그러고 계속 돌아다니면 나중에 꼭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 대 영으로 한방 맞았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있더니 다시 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허공을 쳐다보더니 다시 질문을 하나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데 어떡하면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간절히 살고 있습니까? 간절히 살지 않은데 간절한 기도제목이 나온다면 거짓말이고, 간절히 살고 있다면 이제 와서 교역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는 방법이 어떻게 하는 건지를 묻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언제가 제가 책을 썼는데 책을 읽은 어느 독자 한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책을 직접 가르치던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신학교의 졸업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책을 읽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뭐라고 그랬냐하면, 교수님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설교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제게 설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시 한수를 적었습니다. 그 시가 뭐냐 하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이 미당 서정주선생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피식 웃고 편지를 가끔 오는 편지니까 옆에다 휙 던져놓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말입니다 그 학생의 그 한마디가 제 마음을 오래도록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설교에 있어서 이 같은 고백은 우리에게 아주 신선한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 아름답게 국화꽃을 피우는 기술을 배우기위해서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80년대 이래로 수 없이 많은 세미나들이 열리고 그리고 수 없이 많은 강해설교 학교들이 열렸습니다. 저도 여러 차례 가 보았습니다. 강해설교 세미나, 강해설교 방법론, 이런 내용들을 수없이 많이 소개하고 또 현수막을 떼었다 붙었다 했습니다. 저도 목회자들이나 목사 후보생들을 위한 이러한 강의에 때로는 나가서 강의를 하곤 합니다. 특별히 지난해에는 두란노에서 할 때 전국에 목회자들이 그 바쁜 신년 첫 주에 무려 900명이나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제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강의를 하면서 저는 참 감사했습니다. 이게 뭔가 이제 설교에 변화를 갈망하는 그런 목사님들의 마음은 그런 세미나에 모습에 실려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결국은 이제 저는 ‘아, 역시 우리나라는 그래도 아직은 말씀을 가지고 진지하게 영혼들에게 먹이기위해서 고민하는 선한목자들이 참 많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한편으로는 그런 집회에 자주 다니면서도 그런 모임이 정말 그렇게 먼 길을 걸어온 목회자들에게 정말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반문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 현수막에 걸려있는 그럴듯한 구호처럼, 시간표는 온통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것 인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지식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강해설교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이론을 배우고, 성경의 언어를 습득하고, 또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자기를 위한 적절한 설교의 모델들을 탐구해 가는 일들이 설교사역에 도움을 줄 것은 분명합니다. 그 자체는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요란스럽게 현수막이 나붙습니다.
학생들도 신학교에서 가르쳐보면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하라 공부 하라 그럴 때는 공부안하고 맨 날 기도원에 가고 그 다음에 교회에 봉사 한다 그러면서 학교도 빠지고 그러던 학생들이 이제 개척을 해놓고 목회에 전념할 때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 때 꼭 가방 메고 또 공부하러 다닌답니다. 그렇게 왜 거꾸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목회할 때 목회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마치 강해설교가 아니면 비성경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는 이런 식의 붐이 정말 이 조국교회의 강단을 깨우고, 설교자의 설교의 능력을 회복시키는데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과 그리고 그 설교의 이론을 공부하는 것들이 그 사람이 성경적인 설교를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강해설교 부흥과는 상관없이 침체되어있는 교회의 일반적인 영적인 상태는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30년 내지 35년 전에 주일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의 눈에서 바라보는 교회가 뭐 온전한 통찰일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런 나름대로의 영적인 본성에 대한 감각이 있지 않습니까? 제 어렸을 때에 눈에 비친 교회는 그때도 물론 교회의 문제가 많고, 분열의 문제, 그다음에 윤리적인 문제 혼란스러운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교회와의 분명한 차이를 하나 이야기를 하려면 그 때는 신학교에서 가르쳐주는 내용도 훨씬 조잡하고 가리방(gariban)으로 긁어가지고 등사기로 밀어서 교재를 만들어 쓰던 그러던 시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는 그래도 뭔가 교회 속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하나님을 위한 열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의 영혼을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는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면 그야말로 마음이 부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어느 곳을 가보아도 정말 뜨겁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전에 저희 어렸을 때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그러면, 그때 부흥강사들의 신학적인 수준이나 이런 것들, 뭐 그렇게 뛰어났겠습니까? 지금도 그 설교집들이 남아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도 300명 모이는 교회라 그러면, 동네사람까지 전부다 모여서 400명, 450명 모여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집회를 다녀보면 주일 낮 예배에 500명 모이는 교회에 제가 어느 교회 작년에 집회를 갔더니 심지어 150명밖에는 안 모이는 교회입니다. 목회자가 한숨을 푹푹 쉬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실정입니다.
국민소득이 만 불이 되면서 이제 좀 잘 살게 되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예전처럼 가난하게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일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강해설교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냉담해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일깨워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고, 그 은혜를 갈망하고 그리워하게끔 만들고 있느냐? 하는 것이 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질문하고 싶은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가 성경적인 내용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하등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교회에 초대교회 시대 때의 그 설교 유형들을 보면 오늘날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교회의 설교유형도 그런 유형을 상당히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설교제목입니다 그렇게 하고 성경복음서에서 한 구절을 딱 택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따라가야 합니까? 첫째, 그 다음서부터는 이제 목회자가 생각나는 대로 대지를 잡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따라 가야 됩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얘기를 쭉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 붙들고 따라 가야 됩니다. 삼 대지, 성령을 의지하며 따라가야 됩니다. 4 대지, 고난을 받더라도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게 나오면 밤새도록 나와도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어느 본문을 택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본문을 택하든지 똑같은 종류의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을 따라가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다음 주에는 교회를 섬깁시다. 그러면 어떻게 섬깁니까? 첫째, 기도로 섬깁시다. 기도얘기 또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 붙들고 섬깁시다. 세 번째, 성령 의지하여 섬깁시다. 네 번째, 고난을 받아도 섬깁시다. 그러니까 매일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에 제직회 헌신 예배드리면서 집사 직분을 감당합시다. 어떻게? 기도로 감당합시다. 말씀으로 감당합시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어디를 펴든지 설교는 똑 같습니다. 왜? 성경을 강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성경을 설교하기 위해서 본문을 택했으면 성경 66권을 드나들지 말고 그 본문자체를 떠 올려서 그 본문자체를 해석해주는 설교가 아니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강좌입니다. 그런 면에서 강해설교는 뛰어난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80년대 이후에 일어났던 강해설교의 붐은 우리나라 목회자들에게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근데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아니, 강해설교의 주안점은 뭐냐 하면 성경을 설교하고 그 성경의 내용을 오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속에 적용을 시켜주자는 운동이 강해설교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강단에. 그런데 사실은 설교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그 성경을 현지 살아가는 청중에 적용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니까는 설교에 대한 정의를 강해 설교가 다시 한 번 반복해주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강단에 충격을 주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말씀과 멀리 떨어진 그러한 설교가 유행했는가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강해설교의 붐이 교회에 일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국 이러한 운동의 요청은 목회자들에게 성경본문을 설교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이러면서부터 이제 목회자의 지적인 능력이 목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분 이름만 다 대면 다 아는 유명한 기도원에, 제가 며칠 전에 집회를 갔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한 1000여명 모아놓고 설교를 해달라고 그래서 갔는데, 그 같은 기도원에서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고 하는 70년대 간판급들 부흥사님들이 10여명이 연속해서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광고도 엄청나게 뿌리고 그리고 각종 신문에도 엄청나게 많이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에 와 있는 어느 목회자가 하는 이야기가 “교수님, 이렇게 난리치고 광고하면 사람이 얼마나 모일 것 같습니까?” 이 간판급들 부흥사가 모여서 집회하는데 이 큰 기도원에 100명이 안됩니다. 이제는 옛날과 같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을 이렇게 어떻게 휘어잡는 그런 것은 시대가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지적인 수준이 상당히 꽤 높아졌고 이제는 좀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엄청나게 많은 기독교 서적들, 하루에 10가지 이상씩 쏟아져 나오는 이 책들이 목회자들보다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강남에 어느 부인들은 모여서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한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지 않았으면 춤이나 추고 술이나 마시러 다닐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 받으니까 그러니까 애들 다 크고 할 일이 없습니다. 뭐 할 것 없습니다. “야, 아무래도 우리목사님 설교 요새 뻥까는 것 같은데 진짜 한번 그런 가 우리가 한번 좀 알아보았으면 좋겠다.” 그래가지고 신학교에서 강사를 불러다가 모아놓고 돈 있고 시간 있으니까 그 집에서 쭉 모여서 한 20명, 30명 모여서 히브리어 헬라어를 배우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설교해 달라는 것이 만인이 유익하고 그리고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될 것입니다. 아마 여기 모인 우리 목사님들 가운데 아마 한 두 분 정도 등록금내고 강해설교 학교 같은데 등록해서 공부 안 해 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도 아마 테이프라도 구입을 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우리 아멘 한번 하십시다. 아멘.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인정하되 이것을 딛고 한 단계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강해설교 학교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습니다. 그런데 3월, 4월에도 제가 갑니다. 그런데 지방엘 내려가든 서울 올라가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거기 모여 있는 목사님들의 의식이 문제가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설교만 바꾸기를 원하지 자기는 바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관심은 어떡하면 설교를 잘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떡하면 좋은 설교를 해서 사람들에게 변화를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좋은 설교를 해서 변화를 줄 수 있는 재료를 얻어가지고 갈까? 하는 것들이 온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유명한 강사 밑에 배우기도 하고, 설교를 영향을 끼치는 목회자들을 불원천리하고 찾아다니며 학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점에 대해서 회의 중 긴급동의처럼 이의를 하나 제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자료를 구하러 다니는 열심이 과연 그 사람의 설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소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서 자신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자료를 구하러 다니는 것만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를 깨우고, 각성이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현격한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사역이 가능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놓여있는 최대의 적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 교회의 회중들입니다. 저는 아주 매우 큰 교회부터 시작을 해서 작은 교회까지 골고루 섬겨보았고, 또 집회도 여러 차례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목회하시는 교회는 물론 안 그렇겠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서울에 아주 특별한 교회들,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 소수를 빼놓고는 대부분의 교회들 1000명 이상 정도 모이고 한 20년 정도 세월이 흘러가서 굳어질 때로 굳어진 교회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 강단에 서있으니까 잘 모르실줄 모르시지만, 2층에 올라가서 아래층을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면 만약에 교회라는 장소만 사진에 안 나오게 찍고 의자만 딴 것으로 바꾸어놓으면 사람들은 그 사진만 보고 이게 기독교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민방위교육을 받는 것인지 구분을 못하리라고 저는 확증합니다. 사람들은 예배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이 낳은 설교자 로이드존슨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주일날 낮에 왜 교회로 몰려오는가? 그것은 예배를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모인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관입니다. 백화점에, 백화점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예화) 저희 집에 슈퍼마켓이 하나 개업을 했습니다. 개업하는 날 분명히 10시 돼야지 슈퍼마켓이 문을 여는데 8시 반부터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그래서 ‘아니 무슨 줄을 서? 무슨 배급 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골목골목을 돌아서 줄줄이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배추 한통에 5500원 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슈퍼마켓이 문을 열면서 개업기념으로 어디서 배추를 가져왔는지 한통에 1000원씩 팔았습니다. 배추 한통에 얼마만 싸게 팔아도 가게 문 열기 30분내지 한시간전에 가서 장바구니 들고 줄서서 기다리느라고 박 터지는 사람들이 교회에는 예배시간 15분전이 돼도 사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5분전 되면 무슨 도떼기시장 모양 꽈르르 몰려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모여앉아 있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관입니다. 멍하고 앉아있는 사람, 주보에 낙서하는 사람, 주저 앉아가지고 또 주보를 열고, 감사헌금 누가 낸 것까지 줄긋고 앉아있는 사람, 뭐 그러다가 꺼떡거리고 조는 사람, 딴 생각하는 사람 별사람들 다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예배를 딱 끝마친 다음에 사람들이 교회당 문을 빠져나옵니다.
끝나는 시간도 항상 똑같습니다. 12시 10분입니다. 52주 항상 같습니다. 이것은 뭔가가 죽어있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강하게 붙들면 30분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봇물 터지듯이 터져서 한 한 시간 쏟아놓다가 내려올 수도 있는 것이고, 찬송을 부르다가 은혜가 쏟아지면 주보에 없는 것 너 댓 곡 더 부르다가 10분 늦게 끝날 수도 있는 것이고, 기도하다가 뒤집혀지는 역사가 일어나면 주일예배가 기도회로 이어지는 경우도 일어나는 것이지 칼로 자른 듯이 12시 10분에 탁 마칩니다. 그리고 12시 15분서부터 식당에서 밥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예 굳게 믿고 예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강해설교를 배우기위해서 보따리 싸들고 다니는 이 학업에 대한 열심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예 냉담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워서 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수 있도록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끼치는 영향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설교를 변화시켜보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련된 설교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절대로 설교자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 목회자들은 설교가 강해설교로 돌아가면 교회가 저절로 부흥하고 교인들의 신앙이 성경의 토대위에 굳게 설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강해설교로 돌아섰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까 말씀드린 말도 안 된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어디를 설교해도 비슷비슷한 내용의 설교들, 이런 설교들을 누가, 제가 아까 예로 드린 그 설교를 하신 분들이 누구냐 하면, 우리목사님들이 존경하는 주기철 목사님이나 아니면 이전에 살았던 한국교회의 기라성 같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한결같이 아까 말씀드릴 때 여러 목사님들이 웃으셨던 그런 방식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순교자가 나왔고, 그리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서 연해주와 만주를 돌아다니며 누구 말대로 소똥에 묻은 콩깍지를 주워 먹으면서 교회를 세우는 순교자적인 개척자들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성경적인 설교를 듣고 누가 나왔습니까? 성경적인 설교를 듣고 옛날과 같은 순교자들을 배출하고 있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럼 이것은 뭘 의미합니까? 그 당시에는 설교내용은 부실했지만, 그러나 설교를 전하는 사람들 속에, 말하자면 불꽃같이 타오르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언뜻언뜻 설교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그 진리들을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았습니다. 우리가 깊이 존경하고 있는 손양원 목사님 같은 경우도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릴 때 목사님들이 웃으셨던 그런 종류의 설교로 부흥회를 하러 다니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을 울리고 감화를 끼쳤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설교자 자신과 설교내용이 함께 변해야지, 설교자 자신이 변화하지 않으면 설교는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변화는 설교의 변화를 보장하지만, 설교를 고쳐보려는 노력은 설교자 자신의 변화를 보장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변화 되었을 때에, 변화된 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변화된 눈으로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이 새롭게 설교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제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의 전임강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신학교 선생이 되었는데 정말 성경이 저에게는 콘크리트 덩어리였습니다.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였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습니다. 읽고 설교도 하는데 그런데 매 성경을 대할 때마다 느낌은, 그 뭐 송이 꿀보다 달고 뭐 그렇다 그러는데 뭐가 그런지 모르겠고, 하여튼 설교시간 되면 주석 갖다놓고 몇 줄 추리고 내 생각을 집어넣어서 이렇게 저렇게 짜깁기를 해서 한편 설교를 하고 나고 또 은혜 받았다고 하면 좋아하고 이러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언젠가 성경을 이렇게 읽는데 그때 학교에서 연구실을 쪼그만 것을 하나 주었는데 그 연구실이 뭐 좋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정경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지금도 그것 하나는 참 생각이 납니다. 그 바로 연구실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 산입니다. 이렇게 치솟아 있습니다. 그 앞에서 다람쥐가 창틀에서 왔다 갔다 할 정도로 그렇게 새 우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태복음서부터 이제 아주 곤고했었습니다. 몸도 안 좋고 하여튼 많이 다운돼 있을 때인데, 거기에 이제 4시에 학생들이 집에 가고나면 6시에 야간학생들이 오는데 두 시간 시간이 남습니다. 그래서 이제 창틀에 성경을 펼쳐놓고 천천히 읽으면서, 그런데 늘 읽던 성경인데 하나님이 놀랍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까지 읽는데 한, 두 달 정도 걸렸습니다. 많이 읽을 때는 5장, 적게 읽을 때는 한, 반장 읽으면서 묵상하면서 읽는데 그런데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까지 읽은 다음에 뚜껑을 탁 덮으면서 그때 제가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태까지 내가 배운 기독교도 잘못된 기독교였고, 내가 가르치는 기독교도 잘못된 기독교를 가르쳤구나 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가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우리자신이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는 새로워 질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와 관련해서 미당 서정주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중 한 연이 설교자와 설교와의 관계에 대한 아주 뛰어난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가을 하늘아래 함초롬히 이슬을 먹고 피어있는 그 국화를 보십시오.
국화가 말입니다. 국화 전시회를 한번 갔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전 그 국화를 참 좋아합니다. 장미처럼 자극적인 향기대신에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국화야 말로 가을에 꽃 중에 백미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방안에 서너 송이만 꽂아두어도 우아한 자태가 방안 분위기를 바꾸어 놓습니다. 하여튼 국화는 싸구려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화분하나에 150만원을 달라고 하는 국화가 있습니다. 하여튼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답게 핀 늦가을에 국화 꽃송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 국화꽃이 정말 아름답구나! 세상에, 사람 죽을 때 묘지에나 꽂아 놓는 줄 알았더니 어쩌면 국화꽃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아니 이 종자가 뭐래?” 그 옆에 사람이 “아니, 그거보다도 이 국화꽃은 도대체 뉘 집에서 길렀대?” 그러면서 찬사를 늘어놓고 한순간에 그 국화꽃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에 보이는 사건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연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국화꽃이 향기를 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끌게 되기까지 그 뒤에는 보이지 않은 사연이 있었는데 국화꽃 옆에서 봄부터 소쩍새가 한없이 가을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쩍새가 도대체 무슨 새인가? 그리고 사전을 찾아봤더니 이 소쩍새는 뭐 카나리아나 아니면 방울새처럼 야리야리하게 생긴 새가 아니라 부엉이 과에 속하는 올빼미 비슷하게 생긴 별로 예뻐 보이지 않는 험상궂은 새입니다. 낮에는 그늘에서 자고 밤이면 나와서 운다는 새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어나기 전에 그 국화꽃이 활짝 필 날을 기다리면서 그 소쩍새가 이른 봄부터 울었습니다. 꽃샘바람이 한창인 이른 봄부터 시작을 해서 늦은 봄을 지나서 초여름을 거쳤습니다. 무더운 한여름이 가고 굵은 고추가 붉게 물들어가는 늦가을을 거쳐 이슬이 차가운 가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까마귀가 우지 짓고 지나가고 들판에 무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늦가을이 왔습니다. 그때까지 소쩍새는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이른 봄에 시작한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무더운 여름이 오자 울부짖음으로 변했고 찬바람 부는 가을로 들어서자 그 울부짖음은 핏빛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울다가, 울다가 통곡하다가통곡하다가 결국 소쩍새는 목에서 터뜨려 오르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습니다. 긴 날 애처로운 소쩍새 울음소리가 그치던 이른 아침, 바로 피 떨어진 그 자리에 아름다운 한 송이 국화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아름답게끔 핀 국화 꽃송이를 보고 자신들의 국화꽃도 그렇게 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바쁜 목회 일정 속에 시간을 내고 심지어 물질까지 바쳐서 여러 설교 방법론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다닙니다. 그러나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 전에는 소쩍새가 우는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국화꽃은 어느 날 아침 밝은 웃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감탄하여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국화꽃이 어떻게 피어났는지 숨은 사연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국화꽃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보고 웃는 게 아니라 그 아름다운 국화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경건을 배우게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연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국화꽃의 아름다움은 차라리 슬프도록 아름다운 결정체입니다. 그 꽃이 아름답게 만발하기까지 소쩍새는 고통스러우리만치 긴 세월을 눈물로, 흐느낌으로, 울부짖음으로, 통곡으로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국화 꽃피는 사연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소쩍새 우는 사연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단언할 수 있습니다. 활짝 핀 국화꽃과 같은 설교를 하고 있고, 소쩍새 우는 사연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설교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영화를 좋아합니다만 어디 볼기회가 있습니까? 우연히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뭘 하냐 하면 서편제를 하는데 다 보지는 않고 중간까지 보다가 이렇게 껐는데 거기에 보니까 뭘 얘기가 나 오냐 하면, 스승이 고아와 같은 두 아이를 어떻게 데려다가 하나는 고수를 만들고, 하나는 창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창하는 애는 열심히 하는데 이 고수로 만들려고 하는 놈이 이게 꾀를 자꾸 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잣거리에서 북을 때리면서 그다음에 이제 한쪽에서 창을 시켰습니다. 그래 잘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여관방에 들어와서 회초리로 두들겨 패며 혼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말하는 줄 압니까? “이놈아 두드리면 다 장단인줄 아느냐? 속에서 한이 맺혀서 창을 하는 사람의 그 리듬을 네 속에서 함께 타오르면서 네 심령이 이속에서 우러나와서 두드려야지 그게 북치는 거지, 멀거니 앉아서 딴생각하고 박자만 맞춰서 두드리면 그게 북인 줄 아느냐?” 하면서 회초리로 두드려 패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아름다운 국화꽃이라면 모두 피어나는 소쩍새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종자를 받아가고 싶어 했고 ‘누가 길렀대?’ 기른 사람한테 국화를 재배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소쩍새가 우는 동안에는 국화꽃도피지 않았고 통곡의 밤에는 관객도 없었습니다. 꽃 봉우리 조차 없이 기다랗게 올라와있는 시퍼런 국화 한줄기를 옆에 두고 소쩍새는 헤아릴 수 없는 긴 밤을 울었습니다. 그때는 관객도 없었고 찾아와서 박수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는 어둠이었고 그의 벗은 외로움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이웃은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긴 세월을 혼자 울었습니다. 누구도 함께 있어 주는 이 없었고 친구가 되어줄 수도 없었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홀로 앉아 숙명처럼 흐느껴 울다가는 잠이 들고 깨어나서는 통곡하고 통곡하다가는 피를 토하는 곡소리가 토혈 곡을 만들어 갔습니다. 결국 그는 복 바치는 통곡 끝에 피를 토하고 국화 줄기 곁에서 죽었고 그 피를 머금고 국화송이가 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잘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감탄하고 배우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한편의 설교를 훌륭하게 해서 영혼으로부터 심금을 울리는 설교를 하게 되기까지 거기에는 국화꽃 옆에 피 토하고 죽어가는 소쩍새가 있었던 것과 같이,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을 향하여 처절할 정도로 훈련받으며 죽어갔던 영적인 연단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오늘 이 시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의 진정한 영적인 변화 없이 설교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고 헛된 꿈입니다.
오늘 제가 성경본문을 읽은 이 사람이 세계요한입니다. 저는 이 사람을 매우 좋아합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도 본받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본받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훌륭하다고 해서 다 본받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7, 8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한사람이 내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요한이 오늘 국화꽃을 피우고 있지 않습니까? 요단 강변에서, 맨 처음에 유대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뭐라고 외쳤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런 정도의 설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제일 처음에 그가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외로운 강 광야에서 홀로 아무도 그의 설교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그의 설교의 청중이 하나님 한분이셨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마 3:5) 세례요한은 신도시 찾아다니며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부천에 십자가를 꽂지도 않았습니다. 재개발 지도를 놓고 교회를 건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광야에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외쳤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홀로 그 설교를 들으시다가 ‘저 음성이야 말로 내가 이 시대에 내 백성들에게 하고 싶은 음성이다’ 생각하셨을 때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건너 사면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와서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을 하는데도 사람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세례요한의 바지 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며 긍휼을 호소했습니다. 어떡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누구의 제자였습니까?
우리는 누가복음 1장 80절에서 이 대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같이 읽으십시다. 시작.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무엇이 강하여졌습니까?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그랬습니다. 요한이 이러한 위대한 설교의 국화꽃을 피우기전에 그는 아주 갓난아이와 같이 어린 시절에 광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 외로운 광야에서 어린 요한이 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나고 장년기에 이를 때까지 무얼 하며 광야에서 지냈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영성을 갈고 영력을 쌓아가는 이러한 외로운 심경들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피를 토하는 영적인 소명과 영감이 간파하였습니다. 그렇게 깊은 연단을 감당해낸 다음에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완전히 국화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설교자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설교자가 아니듯이 구약의 선지자도 다 같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삼류선지자도 있고 일류선지자도 있는데 요나 같은 사람이 바로 삼류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같은 사람은 일류선지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의 신앙의 선지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사야서 구석구석 어디를 펼치더라도 어김없이 배어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그의 갈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하나님만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면 자신의 동족들이 진노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 한분의 영광을 위해 타오르는 갈망은 그 후에 그로 하여금 불후의 길이 남을 위대한 선지서 이사야서를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이사야 64장을 한번 펴 보십시오. 이사야 64장 1절입니다. 이사야 64장 1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으십시다. 시작.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이것은 기도라 하기보다는 차라리 통곡이라고 불러도 좋을 대목이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이선지자로 하여금 이토록 위대한 하나님을 갈망하게 만들었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염원이 단순한 바램을 넘어서서 피어린 열망으로 이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면 자신의 몸과 육신이 공중에 산산이 분해되어 버릴 것 같은 그러한 통증을 느끼며 하나님 하늘에만 계시지 마시고 이 땅으로 내려오시옵소서. 그리하여 불이 지푸라기를 사른 것같이 그렇게 여호와의 능력으로 불신하는 이 시대를 불살라주시옵소서 간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할 적마다 아름다운 성전에서 훌륭한 의복을 입고, 그리고 아름다운 색깔의 겉옷을 걸치고 카펫 위를 걸어 다니는 이사야를 생각하는 대신에, 오히려 찬바람 부는 외로운 벌판을 수척한 모습으로 홀로 엎드려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통곡이라고 불러야 좋을 울부짖음으로 사라진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과 사라진 하나님의 통치의 영광이 회복될 날을 애원하는 처절한 선지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생각할 적마다 누가 생각이 나느냐하면 겟세마네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