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주의 종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라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원래 여기에 나오는 이 말씀은 주의 말씀의 종인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종들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직분을 맡아서 이제 교회에서 임직을 하는 사람들은 보다 더 교회에서 깊이 섬기게 되고 결국 그 모든 섬김에 가치와 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아주 아름답게 흘러 결실하게 하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교훈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장로는 다투어도 되고 집사는 완악해도 되고 그리고 권사는 못가르쳐도 되고 또 다른 직분자들은 참지 못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그런점에서 이 말씀은 주님을 수종들며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다투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다투지 아니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이냐면 사람이 살면서 서로 의견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낳아준 부모도 자기와 생각이 틀리고 심지어 함께사는 부부도 틀리고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사람도 생각이 틀린데 교회안에 여러분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생각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달라도 인격의 깊이에 따라서 다른것들을 서로 인정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하면서 이렇게 자신을 살피며 하나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르기만 하면 곧바로 다툼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일꾼들은 그렇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하고 같이 목회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국민교육이 정말 잘못됐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뭐냐면 서로 협의할줄을 모릅니다. 그것은 작게는 주일학교 회의부터 시작해서 멀게는 당회 심지어는 위로 올라가서 노회나 총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생각이 다른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설득하고 자신도 설득당하고 그리고 어느 길이 더 좋고 옳은길인지를 찿아가서 그렇게해서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격의 표시입니다. 신앙인격은 그만두고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기본적인 양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서도 다투지 아니하는 일들이 교회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진리때문에는 절대로 싸우지 않고 너무 사소한 일 가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 싸워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교회 일꾼들은 그렇게하면 안됩니다. 절대로 그렇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으면 그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부지런히 설득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켜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만이 전적으로 옳은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자기는 많이 한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다른 사람이 많이 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 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격의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주의 일꾼이 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슴에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해 나가면서 자기의 의견에 대해서 반대하고 생각이 틀린것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또 어떤때는 잘못하기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지만 올바로 하기 때문에 욕을 먹고 다툼이 생기기도 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무엇이 옳았는지 나타나게 되고 또 세월이 흘러가서 그것이 해결해 주지 못해도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서 섬기게 될 여러분들은 다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틀렸다면 다툴 자격이 없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옳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이 옳으니까 사람들을 언어로 논리로 그렇지 않으면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로 설득하면서 지체들의 하나됨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무슨 생각이 다르다해서 싸우고 돌아서서 영원히 가슴에 미운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을 대해 온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온유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 없어서 골빠진 사람처럼 이 의견 저 의견에 휘둘리면서 아무에게나 박수를 치는 것을 온유하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온유함은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자신감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고 부드럽게 대해주는 친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누가 모세를 보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자기 동족도 죽였습니다. 그렇죠?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나 모세하면 떠오르는 것이 불굴의 지도력. 용기, 결단 하나님 앞에 옳지 않으면 자기 동족들도 죽여 버릴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선 불붙는 지도력 이런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왜 그랬는지 구스 여자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지도자일 하나 하기에도 정신이 없을텐데 그 연세에 장가를 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스여인이 검둥이였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가까이 했던 미래안과 아론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이 미리암과 아론을 따르는 사람과 모세를 따르는 사람으로 나뉘어지면서 모세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이 되풀이 되었다면 여러분 모두 모세의 편이 아니라 미리암과 아론의 편에 섰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회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상처하고 나서 일주일 만에 검둥이를 데리고 와서 코에 뼈를 붙이고 귀에 귀걸이를 붙이고 사모니까 잘 모시라고 소개를 했다면 여러분은 주의 사랑으로 환영합니다 했겠습니까? 그것도 70먹은 목회자가 20살짜리 검둥이을 데리고 왔다면 신뢰했겠습니까? 저는 여러해전에 그 텍스트 본문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미리암이나 아론이나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적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소명을 받았지만 뒤치닥거리는 두 사람이 다 했습니다. 어떤의미에서 미리암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모세는 죽었습니다. 미리암이 갈대 바구니에 모세를 담아서 왕궁에서 젖을 먹일수 있도록 구원해 준 사람입니다. 평생의 은혜입니다. 엄마같은 누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때에는 모세가 결국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미리암과 아론이 옳은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중이 둘로 찢어지게 된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편과 모세편이 찢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이 몇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에 불이 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러가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쨎든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았지만 허락을 하던때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보면 어디에 검둥이하고 장가들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회는 이스라엘 속으로 신앙고백과 함께 들어오게되면 거기에는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별 종자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애굽에서 출발할 때 중다한 잡족들이 따라왔다고 했습니다. 별 종족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마치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서울 출신 할것없이 많아도 일단 들어오게 되면 모두가 예수안에서 한형제 자매가 되는 것처럼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들어와서 하나가 되었으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그 검은 여자하고 장가를 갔을 때 확하고 분노가 생기면서 저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판단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벗어난 모세의 일탈된 행동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그렇게해서 결국 그것을 문제로 삼았더니 그 다음에는 그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일어나서 교회가 찢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직접 수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모세와만 말씀하시드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더냐 하면서 대들기 시작할때에 하나님께서 혼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내가 말했지만 그러나 모세와는 대면해서 말했기 때문에 너희와 모세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장가 든것은 잘한 것이다 못한 것이다 하나도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세가 장가 든 것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회를 찢어놓은 그 상황이 하나님에게는 더 큰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우리 자신을 보면서 항상 올바르게 판단을 합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무좀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발이 갈라지고 물이 줄줄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병원은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약을 발라도 성실하게 발라야 하는데 못된 신자 교회생활하듯이 생각나면 한번 바르고 내버려 두고 했더니 심각하게 갈라져서 시뻘건 살이 들어 나면서 갈라져서 아팠습니다. 그래서 불편하고 양말을 신으면 진물이 줄줄 나오고 참 불결합니다. 발이 성한적이 없고 뒤집어 보면 항상 발가락 사이에 껍질이 벗겨지고 했습니다. 그래도 한번도 나는 도끼 가지고 그 다섯 개를 잘라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하든 고쳐서 쓰려고 했지... 안전하게 예방하려면 발목부터 자르면 절대 무좀에 걸릴 일이 없을텐데 한번도 그런생각을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니까... 그러니까 뭐냐면 교회도 마찬가지로 항상 하나를 생각하다가 또다른 더 큰것을 잃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보양하는 것처럼 아내를 혹은 남편을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도들도 교회에 대해서 그런 것이다 하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렇게 사람들이 비난할 때 은혜 충만했던 때 였습니다. 이 양반도 출렁출렁 했는데 은혜 떨어 졌을때는 어땠습니까? 돌판을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과격한 행동입니까? 그런데 은혜가 충만하던 때 였습니다. 상태가 좋으셨을 때 였습니다. 사람들이 비난을 할 때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기서 문제가 끝났습니다. 모세가 옛날에 돌판을 집어 던지던것처럼 혈기를 부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다 알면서도 또 참고 견디고 하는 그런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친절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집회를 갔습니다. 지금도 잊어버려지지 않는데 어느 목사님이 자신의 교회 안수집사님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 분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얼마나 그분 칭찬을 하는지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우리 교인들 눈에 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른 목사님께 그렇게 칭찬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참 못됐습니다. 그 대신 제가 칭찬을 하면 진심입니다. 입에 바른 소리로 마음에 꽂고 훌륭하시죠 하면서 뒤로 돌아서 훌륭하긴... 이렇게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냐고 참 좋은 분이네요 라고 했습니다.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 났습니다. 밥을 잘 먹고 우리 둘이만 이상하게 응접실에 남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을 그렇게 칭찬한 안수집사님이 저에게 "목사님 이건 사실 다른 목사님께 못 물어 보았던 질문인데 목사님께 한번 물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이야기냐고 했더니 성경이야기라기보다 그 비슷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답변해줄테니 한번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알고 열심히 믿고 교회 봉사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이것이 순 꽝이더라 그리고 이슬람이 진리더라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죠? 이것이 말하자면 변론을 위해 말한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진리에 대한 회의의 고민을 이제 나에게 정식으로 물어 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사람이 것으로 보이는 것과 속이 얼마나 천차만별입니까? 목사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데 나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장래의 장로 후보 1번 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진리인지 이슬람이 진리인지도 확신이 안 가는 사람이 안수 집사해서 나중에 장로가 될지도 모르는 그 지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목사님 마음에 맞게끔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그래도 흉 안잡히게 행동해 왔겠습니까? 그럼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참된 신앙심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딱 잘라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 질문은 나한테 묻지 말고 오늘밤 무릎 꿇고 하나님께 직접 여쭈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신앙에 사활이 달린 문제라고 했습니다. 친절하게 대답해줄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다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잘못 배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많은 허위와 허세 이런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 하고 물어 보면 모르니까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엄마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귀여운 아이가 막 말을 합니다. "엄마 엄마 버스가 영어로 뭐야?" "버스지" "사과는 영어로 뭐야?" "애플이지" 그리고 지나가는데 간판이 있었는데 커피솝 이름이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였습니다. "엄마 저것은 영어로 뭐야?" 하니까 갑자기 확 엎어서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자빠져 자!" 성경에 입각하지 않은 당회의 폼 잡는 권위, 목회자라고 하면서 목리처럼 부리는 비성경적인 권위와 허세, 권사니 장로니 안수집사니 하면서 나오는 말하자면 위세 이런것들은 전부 다 아는 것이 없는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알면 그렇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 아는것이 세상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알수록 거기에서 깊은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고 자기자신이 거기에 부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가 되었으면 가르칠 것이 많아야 합니다. 기도하면 오래동안 자신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해 왔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 기도의 세계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교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고 그리고 그 진리를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사는 이치에서도 신앙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경륜이 많은 것입니다. "장로님 이것은 무엇이에요?" 라고 물어볼때 아는것이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다가 어려운것을 물어보면 "가만있어!" 하면 그것은 권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배우고 그렇게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순수해질때가 있는데 진리를 잘 가르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 가르치는 자의 마음이 아주 순수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직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무지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안 그렀습니다. 교회에 와서 대게 눈을 지긋이 감고 계신분들 직분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되겠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지금도 생생하게 신앙에 대한 고민이 있어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대화하면 살아있는 신앙의 지식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것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참으며 라고 했습니다. 잘 참아야 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특히 저같은 사람에게는 가장 무거운 십자가가 참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곳에서 참음의 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찿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오래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참음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일은 억울한 일도 있지만 때로는 마땅히 그렇게 당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그런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당하게 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힘든일을 만나도 자기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신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모두 예수님 자신 때문에 당하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고 불의하기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었고 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셔야 했기 때문에 치러야할 고난이었고 당하는 것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니까 고생을 하고 힘든일을 당해도 우리는 할말이 없을때가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뿌려놓은 씨앗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참음, 오래 참으시는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참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받는 위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위로와 비교될 수 없었기 때문에 참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경건의 면역력이 너무 없습니다. 면역력이라는 것은 뭐냐면 몸에 병이 생기고 나쁜것들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말하자면 독소인데 그것들을 스스로 이기고 극복해 낼 수 있는 육체의 힘을 가르켜서 면역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그런 이야기를 못 들었습니까? 옛날에는 머리가 아프면 한알만 먹으면 낳고 감기가 들려도 그져 조그만 물약 하나만 먹어도 나았는데 지금은 약을 쓸어 넣어도 안 낳죠?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것 같습니까? 약을 점점 후진 약을 만들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약은 점점 좋아지는데 인간이 공해에 찌들어 살면서 인간이 면역력을 심각하게 잃어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환경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짜 건강하게 살려면 이렇게 살면 안됩니다. 좀 자연속에서 살아야지 강남은 대게 비싸다고 하는데 공기도 안 좋은데 왜 그렇게 비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모여서 사는데 온 세상이 공해 천지입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요즘도 이렇게 보면 낮에는 괜챦습니다. 새벽에 새벽기도 나올 때 보면 열병합 발전소에서 얼마나 때는지 본네트에 손을 얹으면 밤새도록 타들어간 하얀 재가 쌓여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주민들이 다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총신대학교에서 송전탑을 놓고 말이 많은데 그것이 미관상 안 좋다는 것이 아니라 TV에서 추적을 했는데 한 마을에서 이상하게 암 환자들이 조그만 동네에서 12명이 1년 사이에 죽은 것입니다. 추적을 해 보았더니 송전탑하고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이 뇌암, 장암, 간암해서 송전선 탑을 따라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전력에서는 그런것 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그렇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약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을 막 쓸어 넣으면 낳기는 낳는데 낳는것 만큼 몸의 균형을 또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치유력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화되어 간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자라 간다고 하는 것은 경건한 면역력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치에 안 맞고 고통스럽고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아픈 일들이 일어나는것은 누구든지 예수님도 그런것은 싫어 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 괴롭지 않고 편안하게 그렇게 살다가 조용히 죽고 싶지 원하지 않은 것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비난을 받고, 오해를 받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살수는 어떻게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하려면 그냥 출가해서 가족들하고 이별하고 산속에 들어가서 조그만 집이나 하나 지어 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실컷 기도하고, 조용히 성경 읽고, 그 다음에 마당에서 채소밭이나 가꾸고 저녁에 혼자 조용히 하나님 찬송하고 그리고 자고 하면 그것이 제일 편한 삶입니다. 제가 3주동안 기도원에 있었는데 3주라고 해봐야 수시로 교회일 때문에 내려 왔지만 훨씬 죄도 덜 짓고 그리고 마음의 분주함도 없고 훨씬 마음이 편안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가끔이지 제가 여러분 주일날 끝나고 가족들 버려두고 혼자 기도원 갔다가 다음날 주일날 아침 8시에 내려오면 여러분 동의 하겠습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사람들 속에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오래 참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을 맡고 임직을 하는 일꾼들은 이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혈기 부리지 말고 오래참고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 괴로움을 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설득해서 어디에 가든지 화평을 이룰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