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5下-6)
녹취자 : 김세나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다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즉, 공급하시는 은혜, 소생시키시는 은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5절을 비유를 하자면 이제 모든 영화나 연극의 절정이에요. 불꽃놀이를 할 때, 어두운 밤에 팡하고 축호를 쏘면 실같이 가느다란 빛 줄기를 그리면서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장렬하듯이 터질 때, 형형색색의 빛깔을 내고 이제 불꽃이 그 놀이를 끝내는 것처럼 그 5절이 바로 그렇게 활짝 장렬하듯이 폭발하는 불꽃과 같은 구절입니다. 여기까지가 이제 두 번째 토막이고, 마지막 6절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시인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새로 나온 번역에는 상을 차려주시고라고 했기 때문에 이 상이 밥상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만, 예전에 성경에는 이 상이 도대체 무슨 상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이 상이 초등학교 졸업식때 교장선생님께 받는 그 상인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이 상은 히브리말로 슐한이란 상인데 이 유대 히브리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밥상을 가리켜요. 이 밥상은 오늘날 우리의 소파에 놓이는 티 탁자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옆으로 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음식을 집어 먹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그러한 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말 성경에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한 이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당신이 나를 위하여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면전에서 내게 한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시인에게 그렇게 감격적인 그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깊은 감격의 이유가 되겠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이 답변은 조금 있다가 하고, 먼저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구절을 보면 결론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잔이 가득 넘치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이고,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도대체 이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했을 때, 그 고백의 의미부터 추적을 하고 그리고 시인이 터질 것 같은 기쁨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그 두 가지 근거에 대해서 추적해 봄으로써 오늘 우리들이 신앙에 있어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고 또 어떤 것들을 결핍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죠.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 5절을 잔치 집의 문맥으로 해석을 합니다. 신랑 신부가 모두 기뻐하고 그를 시집, 장가보내는 대소가의 식구들이, 친구들이 모여 함께 잔에 잔을 맞부딪치며 기뻐하는 광경을 이 5절에서 그리고 있다는 해석이죠. 뭐 특별히 그러한 해석에 반기를 들어야 할 이유는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왜 5절에서만 그렇게 잔치 집 문맥이 나오냐는 이의는 제기할 수 있겠죠. 어쨌든 여기에 보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 잔은 결국 술잔이죠. 술잔인데 이것은 그냥 술잔이 아니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포도주 잔이죠. 독주나 그러한 이상한 술잔이 아니라 포도주 잔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료였습니다. 물이, 질 좋은 물이 별로 없고 또 질이 좋지 않은 물을 계속 먹으면 다리가 붓고 몸이 붓고 하는 부작용들이 생기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그들은 포도주로 음료를 만들어서 물 대용으로 먹었습니다. 그래서 공평하신 하나님은 물이 흔치 않은 대신 아주 질이 좋은 포도주가 생산되게끔 그렇게 축복해 주셔서 지금으로부터 한 100년 전에 그러니까 구약의 주석가 카이헤 델리치 이런 사람들이 살았을 시절이에요. 그 사람들이 자기의 주석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에스겔 골짜기에는 엄청난 포도들이 수확되는데 한 송이의 무게가 6킬로에서 7킬로되는 포도들이 생산이 된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성지 순례를 딱 한번 갔는데 그 골짜기에서 포도 한 송이에 6킬로, 7킬로 되는지를 확인을 못하고 왔기 때문에 문언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의 이야기는 구약시대에 그 가나안 정탐꾼들이 하나의 포도송이를 꿰어 내려나오는 것이 절대로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런 질 좋은 포도가 생산이 되기 때문에 포도주를 만들어요. 그런데 이제 잔칫날 먹는 포도주는 늘 마시는 그런 포도주가 아닙니다. 정말 좋은 포도주는 여러분 생각에 오래 묵히면 비쌀 것 같죠. 안 먹어서 모르겠어요. 지금도 한 450년 된 포도주가 우리나라에 있어요. 값으로 헤아릴 수가 없어서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게 맛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뭐 역사적으로 하도 오래 되었으니까 좋다 그러는데 그게 아니고, 중요한 것은 아주 일조량이 많아서 포도가 최고의 포도가 열리던 해 담근 술이 최고에요. 최근에 한국에서도 포도주가 경매가 되었는데, 20병 들이 한 박스가 4억 원에 경매가 되었어요. 병 당 2천만 원인데, 여러분 생각에 에이 그것 2백년은 되었겠지. 아닙니다. 1990 몇 년도 산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그 해에 프랑스 어느 지역에 너무너무 몇 십년 만에 포도가 잘 되어서 그 때 담근 그 술이 그렇게 맛있대요. 그래서 그것을 만들어서 다 팔리고 마지막에 안 팔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값에 팔리는 거죠. 그러한 포도주는 그냥 저녁에 혹은 점심 때 김밥 먹으면서 설렁탕 먹으면서 마시는게 아니라 잘 보관했다가 잔칫날 그 질이 좋은 포도주를 내놓으면서 손님들을 대접해 놓는 거예요. 그것을 잔에다가 쫙 붓는데 넘치도록 붓는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주인의 마음에 가득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잔칫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오랫동안 아껴둔 포도주이긴 하지만, 당신들을 위해서라면 이것은 나에게 조금도 귀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확 붓는, 거품을 일으키면서 부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시인 다윗의 마음 안에 넘쳤던 아주 놀라운 희열과 기쁨을 가리키는 거죠.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잃어버리고 사는 단어들이 있어요. 기쁨, 희열, 환희. 그런 기쁨 단어들을 우리들이 잊어버려요. 가슴 시린 감동, 그리고 벅차오르는 환희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힘, 그런 것들은 오늘 우리에게 미국에 있는 단어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우리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고 참된 신앙의 정수로 돌아가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삶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동시에 기쁨과 슬픔이 깃들 수 없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두 가지가 가능해요. 왜냐하면 기쁨의 이유와 슬픔의 이유가 근원이 다를 때에는 이 두 가지가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없죠. 동일할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한 인격 안에 동시에 깃들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우리말에도 처영이라는 말이 있어요. 처절하다의 처자와 영은 예쁘다라는 뜻이에요. 너무 예뻐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픈 그런 감정의 경우.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는 보다 높은 거룩함의 차원으로 승화된 기쁨이에요. 성도가 이 세상 사람과 다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세상이 알 수 없는 이런 기쁨과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성도의 특권이고 행복인 것이에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들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모두 그 마음 속에 이러한 빈 잔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이 빈 잔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쾌락과 지적인 호기심의 만족 같은 것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매우 특별한 갈망이에요. 그것은 오직 영원한 세계의 것, 그리고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채워질 수 있는 채워질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영혼의 빈 잔이에요. 그것이에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분을 의지하며 그 분의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이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부터는 이것들이 남아있는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말이죠. 우리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굉장히 쾌락에 빠져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거든요. 그래서 이제 경건한 삶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 쾌락에 빠지는 현대인들을 무조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강력하게 배척하고 질타하는 마음만을 가지려고 해요. 그것을 일면으로 보면 옳은 것이고 또 그 사람이 하는 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갈 때 그렇게 타락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 세상에 대해서 무엇인가 반발과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도 똑같은 사람일 수 있죠. 그렇지만 한 걸음더 나아가서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에게 있는 극단적인 쾌락에 빠지는 삶,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그 마음의 빈 잔을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하는 극단적인 적용의 오류를 보여준 것이에요.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이렇게 하면 오늘 열 두시까지 해야 되는데, 조금 더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죄악, 악이라고 하는 이 나쁜 것들은 모두 인간이 하나님을 본 받으려고 할 때 생겨나는 현상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이 둘이 있는데 올바르게 하나님을 본뜨는 방법이 있고 그릇되게 하나님을 본뜨는 방법이 있어요. 올바르게 하나님을 본뜨는 것이 덕이 있는 삶이고,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것이 바로 사악한 삶이에요. 자, 생각해 봅시다. 인간의 교만이라고 하는 죄는 결국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의 말로에요. 여러분, 사람이 사치스러운 것은 옳지 않죠.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가난을 미덕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은 하나님 앞에 덕스러운 삶일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사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의 자원과 자기 사람 됨됨이에 맞게끔 그것들을 사용해야 하는데 마치 자신의 자원이 한없이 많고 자기는 매우 존귀한 자처럼 생각해서 자기를 위해서 그것을 많이 허비하는 것을 사치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무한히 풍족히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사용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당신 자신에게 그 영광이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그릇 본뜨는 거죠. 쾌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영원한 행복이셔요.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 안에서 행복해져야 되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안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관계 가운데 살아가는 가운데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행복해지는 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에요. 이해 되시죠? 어렵지 않죠. 그런데 인간이 아무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그것이 행복을 자신에게 계속 주려고 할 때, 그 극단적인 방법이 쾌락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영혼의 질병 상태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옳고 그름의 판단은 살아있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의 질병처럼 생각하고 선악의 기준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사람 안에 망가진 영혼과 정신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지만 선교가 가능해 지는 거란 이야기에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빈 잔을 주셨는데 그것은 이렇게 세상의 헛된 것들로 채워지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만날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고로 만날 수 있는 재앙은 무지에요. 무지.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것은 악이에요. 죄고요. 왜냐하면 모르는 것은 알지 아니하기로 자신이 선택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끊임없이 아는 것이에요. 그래서 숨쉬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기를 원하는 열망 속에서 매일 매일 살아서 그래서 지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 인격적인 성숙을 함께 이루어가야 하고 그 위에 섬김의 성숙을 함께 보태가야 하는 것이에요. 그게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에요.
어떤 사람이 그래요. 아 무슨 열린 교회는 무슨 교인들을 학생으로 아나. 왜냐하면 그 공부해야 해요. 교회 딱 등록하면, 요즘은 많이 싸졌어요. 그런데 옛날에는 한 10년 전에는 교회 딱 등록하면 교인이 되기,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 사야 되는 책이 46,000원이었어요. 요즘은 한 24,000 원 정도.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해요. 그래서 이야기 했어요. 교회는 학교다.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다. 입학은 있지만 졸업은 없다. 졸업은 죽어야지만 졸업과 함께 이제 장례식을 치러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또 배워요. 그래서 우리 교인들에게 라틴어로 스튜데오 에로구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다 외워야해요. 스튜데오 에로구스. 나는 공부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알아가요. 그러한 갈망이 있는데 그 갈망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으로서만 채워질 수 있는 거예요. 막 성령 운동한다고 다니고 뭐 언젠가 보니까 금이빨 소동이 나가지고 교회마다 사람들이 집회하면서 금이빨 만들어주는 그런 집회가 있대요. 뭐, 그럼 뭐 몇 날 해도 영혼의 빈 잔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장 문제집 가지고 공부만 하고 그런 다고해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참된 지식과 사랑으로 마음이 채워질 때 그 때 우리는 정말 든든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참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사는 삶이 되는 거예요.
(예화) 한 20여년 전에 수유리에서 진짜 있었던 일인데요 제가 직접 읽었어요. 그 사람의 직업이 의사였어요. 이제 당직을 서고 있는데 택시가 새벽에 오더니 끽 하고 오더니 사람들이 건장한 중년 남성을 이제 떠매고 그리고 병원으로 막 들어오면서 이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그랬더니 갑자기 심방마비로 쓰러졌다고 하면서 그런데 의사가 진단을 매기니까 이미 끝났어요.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난리가 난 거죠. 그리고 이제 하얀 보자기로 덮어놓고 한 한 시간 반쯤 지나고 나니까 가족들이 울며불며 달려온 거예요, 새벽에. 그 의사가 가족이 아니니까 안 됐다 하는 생각은 들어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겠어요? 맨 날 보는게 죽음인데. 가족들은 울고 있는데 그 의사는 가만히 죽은 사람을 보니까 자기가 의사생활을 했는데 20년을 했는데 기묘한 폼으로 죽은 사람은 처음 봤다는 거예요. 태어났던 애들이 이렇게 하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손 펴고 죽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왼손을 꽉 쥐고 오른손을 펴고 죽었어요. 어떻게 저렇게 죽을 수 있을까. 저 주먹 안에 뭐가 있을까 너무 궁금하더래는 거예요. 그래서 가족들이 물러간 다음에 가서 손을 펴봤어요. 그랬더니 화투가 두 장이 있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 화투가 뒤집혀서 똑바로 땅 바닥에 떨어졌는데 의사도 딱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어 삼팔 광땡이네. 삼팔광이 두 개가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무슨 스토리이냐 그리고 처음 데리고온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그제서야 고백을 하는데, 장사집에 가서 밤새도록 놀음을 한 거예요. 그런데 돈을 거의 다 잃었어요. 그런데 새벽녘에 되었는데 끝발이 불은 거예요. 이 사람, 저 사람 돈이 되어서 이만큼이 쌓였는데 딱 패를 두 개를 집는데 삼팔 광땡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야 뭐야. 난 뭐야. 뭐야. 그러는데 야, 넌 뭐야. 딱 보니까 삼팔광땡인 거예요. 삼삼 그러다가 콕 하고 쓰러진 거예요. 심장병으로 죽은 거예요. 그것 나중에 알아도 후손들이 우리 할아버지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보면 엄마, 엄마 우리 할아버지 어떻게 태어나셨어? 그런 것은 애들 안 물어봐요. 아빠, 아빠 할아버지 훌륭한 분이셨어? 그럼. 어떻게 죽었어? 고돌이 하다가 충격받고 돌아가셨다. 여러분들은 지금 웃었죠. 그런데 보세요. 조그만 동양화 두 장 들고 삼팔 삼팔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나 땅문서 집문서 뭐 학위 그 그림보다 더 큰 종이 들고 아등바등 하다가 죽는 사람이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의 빛이 비치지 않으면 영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에요. 설령 생각해도 올바르게 생각하기 보다는 그 두려움을 아주 미신적인 방법으로 모면해 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죠. 다윗은 수많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났고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 기뻐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금방 죽어도 좋을 그러한 아주 결렬한 환희를 경험해서 그러한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거죠. 이웃을 향한 최고의 전도가 뭔지 아세요? 기쁨의 삶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환란과 시련을 만났는데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 행복해 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삶에는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인가가 빠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선교하고 싶으면 가장 좋은 것은 전도지 뿌리는 것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우거지상 하고 들고 가서 전도지를 나눠 주면 뭐라고 물어보냐 하면 이보쇼 예수 믿는 것이 도움이 됩디까. 물어봐요, 그러면 할 말이 없죠. 그러니까 어떤 생각을 해야 되냐 하면 전도를 잘 하는 가장 훌륭한 것은 뭐냐 하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고 가슴이 복받치는 행복한 삶, 그게 남편이 돈 많이 벌어오고 그리고 강남에다가 성형 수술 성공했기 때문에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영적인 기쁨이에요. 영적인 기쁨. 마음속에서 터져오르는 그 아름다운 환희에요. 어떻게 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 이것이 사람의 얼굴 속에서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 기쁨이 가득 솟아나는 삶을 살아가야 해요. 거기에서 이웃을 향한 친절과 베풂, 관용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준비에요. 그것이에요. 그것이 신앙이에요.
시인이 배고픈 시절도 보내고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침체의 시간도 보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데 그가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누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 환희였어요. 여러분들이 이러한 환희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잖아요.
저는 맨 처음에 21살에 회심하였을 때에 집에서 교회까지 30분을 걸어가야 했어요. 아주 그 벌판을 지나서 대게 추운 길을 걸어야 했어요. 구름을 밟고 가는 것 같아요. 너무 기쁘니까.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언제나 그래요. 그게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정성적인 자세에요. 그러면 이 시인은 어떻게 되었을 때 이러한 환희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살펴봅시다.
그 첫 번째 이유가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기 때문이에요. 이 상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밥상을 가리켜요. 그러면 도대체 밥 못 먹다 죽은 조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밥상을 채려주셨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그렇게 하늘에서 밥상이 내려왔다고 치더라도 그 밥상을 채려주신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서 그래서 이 시인 다윗의 마음이 터질 것 같은 환희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식사 신앙을 이해해야 해요. 이스라엘은 많은 점에서 동양의 문맥을 문화에서 많이 반영을 하고 있어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식사에 관한 것이에요.
(예화) 여러분 가운데 연세 드신 분들은 옛날에 대가족 사회에서 사셨던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것도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집안의 대가족일 경우에 해답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집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많이 살면 한 집안에 42명 가족이 있을 때도 있다고 하니까 그것은 뭐 얼굴을 다 외울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대가족이 살아도 한 곳에 모여서 모든 식구들이 함께 둘러앉아서 밥을 먹는 것은 없었어요. 요새나 그렇지. 그러면, 그럴 수 있는 방이 없나. 그것은 뭐 지으면 되고 사랑채 같은 곳 트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안 했어요. 왜냐하면 온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 개의 밥상을 차리고 안 방에는 상도 크고 올라가는 반찬의 가지수도 격이 다른 밥상이 차려지고 거기에는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만 들어가요. 우리 어머니도 거기 못 들어가요.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건넛방에서 이제 우리 어머니, 그 다음에 나, 내 동생, 이렇게 어울리면서 밥을 먹고 그 다음에 며느리들이 또 먹고, 마당에서는 거적을 깔고 머슴들이 밥을 먹어요. 그러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요. 그러면 우리 어머니가 안방에 들어가서 밥을 잡수시고, 우리 집사람 남겨놓고 내가 승진을 해서 안방으로 들어가요. 그게 변함이 없는 거예요. 옛날 우리 사람들은 사람이 살다가 세불여의하면 양반이 상민과 함께 잠을 잔 적은 있어요. 그러나 함께 밥상을 마주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반과 상민은 한 가족일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예화) 대학에서 근무할 때 선교학을 전공하신 분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셔요. 중국에서 중국을 선교할 때, 지금이야 언어가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공부하고 심지어는 가서 연수도 받고 선교를 갔지만, 그 때에는 언어 정리도 안 되어 있는 방언이 통용되는 곳에 갈 때에는 그 미리 배우고 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들어가고 본다는 거예요. 그래도 원래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세 시간 정도 있으면 말이 통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결국은 사람들과 의사소통 하면서 살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몇 년을 살면서 언어를 습득하고 그 사람들의 말들을 글씨로 옮겨서 언어로 만들어주는 작업들을 하곤 했어요. 그 때에 일어나는 일들인데 선교사가 가서 지도를 펼쳐놓고 자기가 이렇게 먼 미국에서 여기까지 당신들과 살고 싶어서 왔다고,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손짓 발짓 하면서 설명을 한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제 여기에 살고 싶으니 허락을 해 달라고 하며 잠시 후 나이가 많이 든 노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이 사람들이 촌장 회의에 구성원들이에요. 장시간동안 토론이 있은 끝에 이 사람들이 활짝 웃으면서 걸어 나오는데 그러면 이제 너는 우리 동네에 살아도 좋고 너는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해도 괜찮다. 허락을 내린 거죠. 그러면 서로 악수를 하면서 기뻐하는데 이윽고 이 사람들이 이 새로운 외부인들을 데리고 마을 공회당 같은 곳으로 이동을 해요.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식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먹는 그 음식이라는 것이 서구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식품이에요. 말이 있잖아요. 중국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것 중에서는 귀, 땅에 있어서 다리 달린 것 중에서는 책상, 바다에 다니는 것들 중에서는 잠수함 빼놓고 다 먹는다고. 다 먹어요. 그러니까 별의별 것들이 다 나와요. 지금도 만주쪽에 가보면 결혼식때가 되면 꼭 먹어야 되는 음식이 있는데 뱀국이에요. 그렇게 커다란 뱀을 동태처럼 토막을 내서 국을 끓여서 내 오는데 그것이 우리로 말하자면 국수 같은 거예요.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든 처녀들을 보고 우리는 쟤도 국수를 먹어야 될 텐데, 그런데 거기에서는 쟤가 언제 뱀 국을 먹어야 할텐데. 그러는 거죠. 거기 가보니까 형언할 수 없는 음식들이 나와요. 제가 한번 중국에 갔더니 너무 비싸고 맛있는 것이라고 한 접시 가져왔는데, 전갈 튀김이에요. 못 먹었어요. 그런 것들을 내오니까 서양 선교사들이 정직하잖아요. 솔직하잖아요. 저는 이런 것 안 먹습니다. 갑자기 고함 소리가 나고 분위기가 얼어붙더니 끌고 나가서 죽여 버린 거예요. 죽으면서도 자기가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식탁을 베푸는 이유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는 우리가 한 형제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같이 살고는 싶은데 밥을 안 먹겠다는 것은 형제가 되기 싫다는 거예요. 같이 살고는 싶은데 형제가 되기 싫다고 그러면 그것은 스파이지, 스파이. 그러니까 형제가 되기 위해서 식탁을 베풀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중대한 모독이죠. 죽여버려요.
이러한 사상을 성경이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언약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적인 의식이고 가족들간의 이 식사는 우리들이 가족적인 연대로서 하나님 앞에 특별히 맺은 일행이다 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과 자신들 앞에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식사 신앙이에요. 이러한 것들이 잘 구체화되어진 것이 뭐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화목제에요. 화목제를 지낼 때에는 그렇게 지낸 그 제물을 가지고 성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이 함께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빈부나 귀천이 없어요. 이러한 사상이 신약으로 넘어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죄목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느냐. 그것도 죄인들과 먹고 마시느냐는 비난이었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이렇게 답변을 하셨어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이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으니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하기 위해서 왔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새 옷을 입혀주며 가족들에게 명령하며 지시를 내린 것이 식사할 수 있도록 음식을 차리는 것이었어요. 계시록으로 넘어가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를 평가하시는 그 평가를 이제 이 요한에게 적어서 그래서 그 교회의 사자들에게 그 전하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죠. 그 때에 거기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 교회는 사실은 뜨뜻미지근해서 예수님이 토해내버리고 싶은 교회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회개를 명령하셨어요. 그러면서 이러한 말씀을 덧붙이셨어요.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먹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죠. 더욱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는 간식도 될 수 있겠지만 이들에게 이것은 주식이었으니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하며 등가적으로 번역을 한다면 물과 밥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함께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생명적인 피부치와 같은 가족 관계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인이 감격을 하고 있는 거예요. 더군다나 누가 보는 앞에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라고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게 복수로 나와요.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면전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한 밥상을 베푸셨음이라.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성경에 차리셨습니다. 지금부터 한 15-16년 전인데 히브리어 성경을 이 구절을 읽다가 너무 감격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게 뭐냐 하면 차리시고, 여러분들의 가진 성경에.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베푸시고 라는 단어에요. 히브리말로 아라크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어디에 쓰는 단어이냐 하면 군대들이 횡대, 종대를 맞출 때 흔히 사용되는 용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한 두 개가 아니라 많은 물건들을 질서있게 정리하고 늘어놓는 동작을 가리켜서 아라크라고 하는 것이에요. 제가 그 것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감격을 했겠어요. 오늘의 퀴즈. 왜 그렇게 감격을 했겠어요. 자매님들 오늘 성가대 너무 잘 하셨는데 퀴즈도 잘 맞추셔야죠. 왜 그렇게 감격을 했겠어요? 몰라요? 어떻게 그럴수가. 그러면 여러분들이 일평생 잊어버리지 않게 비유를 하나 들려드릴께요.
(예화) 자매님들 지금 다 아줌마들이겠지만 대부분. 뭐 아닌 사람도 있겠죠. 코스모스가, 뭘 바르고 오셔서 젊어보이실 수도 있겠죠. 어쨌든 간에 보세요. 방금 시집을 갔어요. 그래서 이제 신혼여행을 가서 룰루랄라 가서 신혼집에 돌아왔어요. 예쁜 신랑도 있고 깨끗한 집도 있고 신이 났어요, 이제. 뭐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명쾌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친정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엄마. 어, 그래. 신혼여행 갔다왔니? 그럼 잘 갔다 왔지. 그런데 왠일이니? 김서방하고 나하고 신혼여행 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엄마 집에 가서 인사하려고 그래. 그래 와라. 엄마 목소리가 왠지 유쾌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사위가 별로였거든요. 그러더니 내일 가려고 하는데 엄마. 와라. 엄마, 내일 우리 가면 점심 줄꺼지? 그래 와라. 내일 가면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엄마가 괜찮다. 그래 와라. 그래가지고 신랑 아침도 안 먹였어요. 엄마가 많이 채려 놨으니까 거기가서 먹자. 그리고 이제 차 한잔 마시고 그리고 이제 열심히 친정에 갔어요. 선물 조그만 것 하나 사들고 엄마 우리 왔어. 음식 냄새도 안 나고 아무 기척이 없고 엄마는 이제 일어난 것처럼 왔니? 그러는 거예요. 응 엄마, 어디 아파? 아니. 엄마 너무 배가 고파. 우리 밥 좀 줘. 그래라. 그리고 밥상을 채려놨는데 보니까 귀퉁이 떨어져나간 조그만 나무 소반에다가 그 다음에 찬장에서 밥그릇을 꺼냈는데 누가 한참 먹던 밥이랑 거기에다가 수돗물을 여러번 붓더니 깨끗하게 만들어서 탁 놓는데 얼마나 세게 놓았는지 물이 쭉 하고 엎지러지면서 통하면서 놨어요. 그리고 반찬을 가지고 왔는데 보니까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를 탁 놓고 들게 그러는 거예요. 그러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 밥상이 의미하는 바가 뭐에요? 무수한 언어가 그 밥상 안에 담겨 있잖아요. 딸내미하고 사위하고 처음 신혼여행 갔다가 인사를 왔는데 엄마가 자다가 일어나서 이빨빠진 사기 그릇에다가 귀퉁이 떨어져 나간 남은 밥상에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만 탁 갔다 놓았어요. 무슨 뜻이에요? 나는 자네가 내 딸을 데려간 것을 끔찍이 후회하네. 내 딸아. 나도 이제 내 마음속에 너를 딸로 생각 안 한다. 그런 모든 언어가 밥상 하나에 다 담겨 있는 거예요. 안 잊혀 지겠죠.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제일 싫어하는 게 심방갈 때 집에서 밥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지 말라고 해요. 제가 목회하기 전까지는 중요한 취미중 하나가 요리였어요. 그래서 내가 만원은 모르지만, 이만원짜리 부패는 차릴 수 있어요. 시간만 주면. 재미있어요. 그런데 교회하고 나서 너무 바빠서 못해요. 그런데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먹는 사람은 한 접시인데 일하는 사람은 죽어라 하고 일을 해야 한 접시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러는 거예요. 왜, 목사가 심방을 가는데 그것을 하겠다고 시장을 가서 왜 그렇게 하느냐. 그냥 가까운 곳에 가서 갈비탕을 먹든지 아니면 나눠 먹든지 여유가 있으면 갈비탕 옆에다가 생선이라도 하나 넣어주든지 그렇게 하면 돼지. 그렇게 하지 마라. 목사님, 사먹는 것 대접해서 죄송합니다. 아이 괜찮다. 그렇게 그것 음식 만들 시간에 나와서 전도하고 기도해라. 그런데 그 중 한 자매가 있는데 목사님, 내가 어느 집에 심방을 하러 가기로 되있는데 그 자매를 심방을 갔는데 전도사님에게 그래요. 교구 전도사님에게 그 집에서 직접 점심을 하게 되면 하지 말라 그래라. 너무 힘들다. 예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연락이 왔어요. 목사님 그래도 한다고 해요. 하지 말라니까. 그래도 한답니다. 냅둬라. 할 수 없지 뭐. 그래서 그 집을 갔어요. 그래서 은혜롭게 예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밥상이 나오는데 나는 한 10년 지나서도 지금도 밥상이 잊혀지지 않아요. 셋이서 들고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뭐, 큰 교자상이에요. 저 끝에서 이끝으로 시작을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은 사온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다 집에서 만든 거예요. 그런데 젓가락을 딱 집었는데 사정거리안에 다 안들어와요. 이게 자기가 저 앞에 무릎을 꿇고 딱 앉아서 그래서 필요한 것을 접시에 담아서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 어떻게 했냐 그랬더니, 일주일 전에 계획을 세워서 밑반찬과 김치를 담그기 시작해서 3일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을 해서 이것을 차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니 한끼 먹고 가는데 뭐하러 이런 것을 하냐. 그랬더니 자매가 하는 말이 목사님이 우리 집에 일평생에 두 번을 오시겠습니까. 한번 오실텐데. 이렇게 차리면 몇 가지나 하니 이렇게 많이 차리나. 그리고 이 시간에 기도하고 성경이나 읽지 그랬더니 아, 이번에는 그렇게 순종적이던 자매가 정색을 하고 나를 탁 쳐다보면서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포기했어요. 그런데 그 자매가 뭐라 그러냐 하면 가장 아름다운 밥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준비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것을 가끔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나같은 인간이 무엇인데 그렇게 성도의 많은 정성이 들어간 그 밥상을 내가 받을 자격이 있을까. 세월이 10년이나 흘러서 그 자매가 이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헤어져서 그 어디엔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내 마음속에도 지금도 눈물이 나요. 그것은 뭘 보여주냐 하면 그 밥상을 차리기 위해 준비하는 광경을 보면 그 집에 손님으로 오는 사람의 중요도가 평가가 됩니다.
아니, 이 다윗이 일생을 살면서 끼니를 해결할 때 언제나 뭐 궁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장을 하고 7-8명이 들고 오는 그러한 밥상만 받아봤겠어요? 목동 시절에 쭈그리고 앉아서 모닥불 옆에서 뭐라도 쭈그리고 앉아서 겨우 끼니를 면한 적도 있을 것이고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 다닐 때에는 급히 진설병을 먹은 적도 있잖아요. 다양한 종류의 식탁을 대했는데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상하고 나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귀빈처럼 대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칼을 꽂혀도 반찬을 모두 집을 수 없을 정도로 성대한 식탁을 차려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식탁을 받으면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밥상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설교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설교 끝나고 물어봐요. 목사님. 왜. 그러면 그 밥상이 하늘에서 차려줘서 내려온 거예요? 마치 베드로가 그 하늘에서 보자기 본 것처럼 그랬냐고 하는 거예요. 꿈 속에 밥 먹고 배부르디? 그랬어요. 아, 어째 문학적 상상력이 없어요. 그 사람 참 설교를 들으면서 야 사각으로 된 상에다가 안 보이는 낚시줄 얹어가지고 거기에다가 고기를 낚듯이 낚아서 코카콜라까지 얹어가지고 위에서 달고 내려 왔나보다. 그래서 막 그냥 엘리야가 까마귀가 고기와 떡을 물어다 줬다고 하는데 다윗은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니까 그냥 물고기와 떡을 물고 온 게 아니라 아예 그냥 보이지 않는 낚시줄에 한상 차려서 네 천사가 날개짓을 하면서 달고 내려 왔나보다. 아니잖아요.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을 줄로 믿기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내가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 시인이 도대체 뭘 이야기 한 건가요. 비록 이 시인 다윗은 하나님 앞에 고기와 떡과 채소와 과일, 포도주가 담겨져 있는 커다랗고 넓은 상을 하늘로부터 낚시줄로 꿰어 내려오는 것을 기적적으로 경험하고 먹은 적은 없지만, 그의 영혼이 너무 곤고할 때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다 했는가. 하나님의 자비가 이제는 끝났는가.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기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때에도 주님이 찾아 오셔서 자기에게 성대한 말씀의 식탁을 베풀어 주신 거예요. 베풀어 주시는 거예요.
(찬양)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아멘. 아멘. 그러면서 그 말씀에 그러면서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는 말씀의 놀라운 식탁을 펼쳐 보이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정말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놀라운 기쁨을 시인이 경험했던 거예요. 그래서 내 영혼이 빈잔이 가득차는 것같은 그런 환희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조명해 봅시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그 때의 하나님이 지금의 하나님이고, 오늘날은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영적인 유익을 누리면서 살아갈텐데 그 때에 이 다윗 시인이 3천년 전에 누렸던 그 탁월한 환희와 기쁨이 오늘 우리 속에 부끄럽게도 재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배부르기를 원하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것이에요.
(예화) 예전에 없었던 것인데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생각이 났어요. 우리 교회 자매가 하나 있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학교쯤 다닐까 그 쯤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자매의 간증을 구역장 수련회에 가서 쭉 듣고나서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고 내가 열린교회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세웠을 때, 그 꿈꾸던 그 구역장이에요. 그래서 내가 간증이 끝난 다음에 그 자매를 만나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자, 이제 자네의 별명을 내가 하나 지어줄게. 네, 목사님. 너는 열린교회 표준 구역장이다. 표준이다. 그 자매가 아주 똑똑해서 컴퓨터 시스템 뭐 이런 것 하는 회사에 다녀서 꽤 경력을 쌓은 자매였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 남편이 가자고 해서 어떻게 어떻게 자의 반 타의 반 해서 교회에 등록을 했어요. 성격이 새침한 편이에요. 내가 이렇게 보기에는, 그런데 이제 어느 구역에 배정이 되었으니까, 자매님, 직장 잘 다니시죠? 신앙생활 잘 하세요? 구역예배 좀 오시면 안 돼요? 이 자매는 너무 핑계가 너무 좋은 거죠. 직장 다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요. 뭐 그렇게 말하면 할말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구역장이 한달에 한번씩 자기네 회사에 와서 밥을 사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면 조용히 들어주더라는 거죠. 그리고는 돌아가서 그 자매 이야기를 들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개념없이 신앙의 개념이 없이 인생을 사니까 이 구역장의 마음이 찢어 지는 거예요. 눈물로 통곡을 하며 매달 기도를 해요. 매일 기도해요. 본인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다가 직장도 그만 두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구역예배 나오시오 하는데 핑계 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직장도 그만 두었겠다 그러니까 내가 굳이 여기에 살아야 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멀리 쉽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교회로 가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사람들이 자꾸 구역예배 나오라고 하니까 이 자매가 생각을 한 거예요. 내가 이렇게 나오라고 그래도 못 나가고 하니까 그래도 자기는 열심히 있는 열린교회 교인이니까 날 아는게 없다고 우습게 생각하겠지? 그럴 수 없이 나도 배운 만큼 배운 사람인데 그리고 이제 이 자매가 교회 안에 있는 도서관에 갔어요. 도서관에, 그래서 이제 내가 다다음주면 구역예배를 처음 갈텐데 칼빈을 읽고 가가지고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줘야지. 칼빈을 딱 꺼냈어요. 무슨 이사야서 설교집을 꺼냈대요. 쫙 읽었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거예요. 뭐라 그랬냐 하면 나는 예배 시간마다 너무 짜증이 났다. 왜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설교를 할까. 일주일동안 살다가 살다가 지친 사람들이 교회 왔는데, 어떤 때는 잡아먹을 듯이 설교를 한다. 그런데 칼빈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 도서관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 회심하고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 하면 칼빈 선생님의 설교를 읽었더니 우리 목사님은 너무 양반이다. 그리고나서 이제 칼빈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담임 목사 설교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원래 설교는 저렇게 잘못한 자신들을 혼내키는 것이 있어야지만 참된 설교다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회심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구역예배에 가니까 말씀으로 사람들을 코가 납작하게 해줘야지 해서 갔는데 자기가 납작해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사가려던 계획을 모두 포기하고 직장을 새로 구할 계획도 포기하고 더 좋은 직업에 취직했어요. 구역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그렇게 행복해 질 수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행복해 진다면 그것은 질병적 행복이에요. 언젠가는 하나님 아닌 것 때문에 행복해 진 것으로 인한 아주 값비싼 댓가를 치러야 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이외에서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는데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 영혼은 병들기 시작해요. 그래서 모든 기쁨을 하나님에게서 찾아요. 조금만 더 보태자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 발견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요. 거기에서 참된 희락과 환희와 기쁨을 느끼는 거예요. 그 때에 마음속에서 이 가슴 벅찬 환희가 밀려 와요. 밀려 와요.
(예화) 한 5년 전쯤에 제 영혼에 아주 놀라운 그 말하자면 마지막 그 부흥의 시기가 있었는데 막 하나님이 막 너무너무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기도원에 들어갔었어요. 기도원에 올라갔으니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으면 밤중이 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그러면서 이제 기도원 바깥으로 들어가서 숲속으로 들어가요. 하늘에 별들이 가득 있어요. 마음에 온 땅과 하늘 위에 주님의 그 임재하심이 꽉 찬 게 느껴져요.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하네
어떻게 형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사람들은 이 아름다우신 하나님, 이 아름다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찬양) 온 땅과 만물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형언할 수 없어요. 제가 연애도 해 보고 우리 집사람 사랑도 해봤는데 그 비유할 수가 없어요. 풀 한포기 꽃 한 송이가 매일 아침마다 새로워요. 그래서 그냥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다 그만두고 이 어두운 밤 하늘을 맨 발로 걸어서 주님이 계신 저 별 넘어까지 걸어가고 싶은 충동이 있어요.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나를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삼아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요. 주님을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일러 주셨어요. 그 속에서 한 없이 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이 고난위에 슬픈 마음 위에 괴로움을 이길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울에게 쫓겨서 가장 괴롭힘을 당하고 죽을 것 같이 수치스러운 그 박해 가운데 그가 무슨 시를 지었는지 아세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아멘. 아주 그래서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고 주님과 함께 손잡고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매주 기도원에 올라가서 환희에 잠겨 그 때는 막 글도 얼마나 잘 써지든지 그렇게 막 진리에 막 3일만에 책을 한권을 쓴 적도 있어요. 뭐 환하게 비쳐와요. 시인이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영혼의 밥상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해요.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이 100%가 하나님의 복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어요. 때로는 인간의 잔 재주로 잠시 성공을 가지고 올 수 있어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영혼을 안 기뻐하셔도 섭리 속에서 그 사람이 돈도 벌고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안 주시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아주 친밀하고, 이것은 정결한 영혼들에게 주시는 거예요. 아니면 회개한 영혼들에게 부어주시는 거죠. 시인이 그것을 경험했던 거예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어요. 마지막으로 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가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칩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잔칫집에서 기름을 바르는 것을 문맥상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 보다는 구약에 나오는 삼직의 기름부음과 관계된 것이에요.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신정국가를 세 섣달처럼 떠받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그 뜻을 이루어가는 세 신적 기관이 있었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 이것이었어요. 왕은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나라 안에 실현하고 그 나라를 세우신 주님의 고유한 목적을 알고 정치해 나가는 것이 왕의 직무였어요.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를 규율로 사람들 속에 작용하게 하는 대권을 가지고 있었죠.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제사장은 죄인들의 편에서서 어떻게 이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인들을 위해 대신 빌어주는 임무였어요. 이 세 삼직의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직접 지시하시면 그들을 선지자가 기름을 부어서 세우고 제사장들의 경우에는 세습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름부음은 하나의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어요. 이것은 구약의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있어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직임을 주시고 직임을 주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두 가지도 함께 주셨는데,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지혜와 정신적인 특질, 혹은 재능 같은 것들도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인 친밀함을 주셨어요. 이 두 가지가 성령의 임하심으로써 두 가지가 함께 이제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거죠. 그래서 사울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그 성신이 충만한 가운데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을 때와 현저히 구별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을 때 브살렐과 오볼리압에게 그렇게 기름을 부어 놀라운 지혜를 얻게 하신 것과 같은 이치였죠. 그러한 놀라운 영적인 은혜를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것이에요. 그것 때문에 이 다윗은 그 영적인 경험 안에서 자신의 영혼의 빈잔이 가득차는 환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것이 성령의 충만한 임재에요. 거기에서 오는 기쁨이에요. 그것이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는 것도 성령의 은혜이고, 거칠고 모나기 짝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거룩하게끔 변화시켜주시는 원동력도 성령님이에요. 그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거죠.
(예화) 저는 75년도에 하나님 앞에 회심을 했고 그리고 교회에 나가서 그 해에 세례를 받았어요. 나같은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온 것도 너무 감사한데, 그러니 교인 30명 밖에 안 모이는 교회에서 멀끔한 청년 하나가 매일 그렇게 교회를 나오니 그 연세 드신 목사님께서 보실 때에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그러니까 얘야, 너는 세례를 받아라. 저는 학습도 안 받았는데, 무슨 세례를 받습니까. 너는 유아 세례는 안 받았지만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그랬으니 너는 그냥 세례를 받아도 된다. 그러니 세례를 받아라. 불순종할 수도 없고 그래서 세례를 받기로 되어서 문답을 받았어요. 일주일동안 매일 밤마다 교회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나같이 이렇게 쓰레기처럼 살아온 더러운 죄인을 우리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나같은 인간이 세례를 받는 것이 가당하기나 합니까. 그러면서 매일 저녁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와서 촛불을 켜놓고 주님께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나에게 세례를 받을 마음을 주셨어요. 그리고 주일날 세례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11월 15일쯤 된 추수감사절 주간 그날 비록 새옷은 아니지만 깨끗이 빨아 입고 그리고 교회당에 가서 이제 세례받을 때에 세례좌석에 무릎을 꿇고 앉았어요. 목사님이 내 앞에 오시더니 물을 찍어서 내게 말씀하시며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또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는데 생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목사님이 손을 얹어 기도를 해 주시는데 머리 위부터 형언할 수 없는 아주 감미로운 따뜻함이 위로부터 아래로 쭉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언제 경험했냐 하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는데 팔뚝만한 주사를 놓더라고요. 그게 무슨 주사인지 모르겠는데 탁 맞으니까 주사 놓은 자리부터 파문을 긋듯이 뜨거운 기운이 온 몸에 팍 퍼지면서 형언할 수 없는 약간의 어지러움과 그 느낌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의 경험은 훨씬 부드러워서 위로부터 쫙 내려오더니 마지막에 내가 깃털처럼 가벼워 지는 거예요. 내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진짜 몸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가벼워요. 그런데 그게 말하자면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작용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뜨거운 기운이,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충만하게 감싸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눈물이 흘러요. 그러면서 나 같은 인간이 드디어 예수의 신부가 되는구나. 쓰레기같이 살아온 나같은 인간을 우리 주님이 당신의 신부로 맞아주시는구나. 그러면서 이제껏 내 인생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꿈과 야망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소원만 가슴에 떠오르는 거예요.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예배가 끝나서 사람들이 흩어졌는데 물에 젖은 머리가, 머리가 젖은 때에 그 바닥에 엎드려서 얼마를 기도했는지 몰라요. 아무것도, 전에는 꿈도 많고 야망도 많고 그것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이 마음속에서 분노도 많았는데 다 필요 없고 이제 나는 살아도 주님의 것, 죽어도 이제 주님의 것이니 주님이 나를 향해 베풀어 주신 이 큰 사랑을 일평생 배반하지 말고 그리고 주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가슴 안에 가득하게 임하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 이후에도 여러 번 경험을 했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러한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할 때마다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있지 않다는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은 이제 나로 하여금 다시 나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 그래서 무엇보다도 정말 순결해지고 거룩해져서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이 세상이 좀 더 주님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세상이 되고 싶다는 그런데 이 일은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일 매일 주님의 어린 아이 같이 내 손을 붙들어 주셔야 한다는.
(찬양)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멀리 멀리 울리네
그러한 고백이 언제나 똑같았어요. 그 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이 지났고 방황하던 청년은 이제 한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지만 지금도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다가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언제나 똑같아요. 언제나. 언제나 똑같아요.
(찬양)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해서 시인의 영혼은 빈 잔은 가득 차게 되었고 그리고 그는 불확실한 모든 그리고 그는 불확실한 모든 미래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환란과 시련과 어떤 위협과 고난이 기다려도 하나님, 그 모든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따라올 것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은 모든 일생은 주님이 가장 자기를 잘 만나 주시고 피붙이처럼 함께 형제된 자기의 잔으로 사랑해 주시며 하나님의 집 안에 영원히 있을 것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살았다고 그렇게 믿을 수 있는 동안에 이 땅에 살면서 정말 잘 살아야 해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보람을 느끼실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때문에 우리는 잊혀 지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널리 드러나서 그래서 우리처럼 인격적으로 주님 앞에 승복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하늘과 이 지상의 모든 자원을 사용해서 굳고 망가진 이 땅을 펴고 고치고 그래서 그 주님의 사랑을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신을 온전히 버려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