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녹취자 : 김세나
시편 23편은 다윗이 지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저자 문제가 어느 시기였는지에 대해서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른 저작설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시편이 비교적 다윗의 인생 초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이 다윗의 아주 늦은 생애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후자의 견해가 훨씬 이 본문의 내용에 부합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을 보면 목가적인 분위기를 아우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인생의 연륜이 관통합니다. 삶의 지혜와 신앙의 깊은 경지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세 토막으로 나누어 집니다. 첫 번째 토막은 1절인데 시편 23편 전체의 총론적인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는 고백입니다. 두 번째는 2절부터 5절까지인데, 왜 여호와가 자신에게 목자이신지를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은 6절인데, 이것은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언약 백성의 미래의 삶에 대한 결단을 적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3일 동안 마지막 절까지 다 설교 할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시인은 제일 먼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왜 이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을 했을까 묻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소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늘에 계신 그 절대자를 향한 두 개의 대표적인 존함이 등장합니다. 히브리말로 엘로힘이라고 하는 하나님과 야훼, 우리말 성경에서 여호와로 번역되어 있는 야훼라고 하는 그 여호와. 이 두 단어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을 가르킵니다. 각각 그 하나님을 다른 측면들을 현저히 차별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엘로힘이 어디에서 왔느냐에 대해서도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만, 비교적 지배적인 견해는 울이란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적을 합니다. 히브리말로 울. 도토리 나무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도토리 나무라는 어원에서 왔을까. 팔레스타인에서 바람이 불고 큰 기후가 엄청난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와도 쓰러지지 않고 건재하는 나무 몇이 있는데 그 중의 나무 하나가 토토리 나무랍니다. 거기에서 강한, 아주 강한이란 의미를 갖은 하나의 은유가 나왔고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강력하고 온 땅과 하늘 전체를 지배해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전능자로 묘사하는 것이 바로 이 엘로힘, 하나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기록된 여호와라는 이 단어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도 여호와도 모든 만물과 온 땅 위에 탁월하게 뛰어나신 위엄과 능력이 있는 주권자이심을 지시하고 있지만, 엘로힘은 강하고 능력이 있는 신이라는 개념이지만, 야훼라고 이 이름은 모든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존함이 아니라 언약백성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존함이에요. 그래서 출애굽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나 자신을 알려주되, 아직 야훼로는 계시하지 않았으니라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유명한 에흐에 아쉐 에흐에라는 문장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오직 언약 백성들이었고 언약 백성들은 이 이름을 자신들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한없이 선민의식을 느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시편 23편의 위대한 시에 대한 해석을 시작하기도 전에 제일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다윗이 불렀을 때, 이것은 자신과 하나님이 맺고 있는 관계가 위대하고 모든 만물에 뛰어난 전능자와 하찮은 인간, 단지 그 절대자와 무한자인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탁월하게 뛰어난 위대하신, 티끌 같은 인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고 불변하고 영원하신 존재이시지만, 자신과 그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이 짧은 단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맺은 특별한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동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그 언약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언약적 혜택이에요. 이러한 놀라운 그림이 이 야훼라고 하는 한 단어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에요.
(찬양) 온 땅과 만물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예화) 어느 중학생이 물리 시간에 우주에 대해서 배우면서 선생님에게 물어 보았어요. 그러면 선생님, 도대체 이 우주가 얼마나 크고 넓은가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야, 임마. 내가 그것을 알면 여기에서 너를 가르치고 있겠니. 그렇지만 네가 알고 싶어하니 그냥 간단하게 설명해주마. 너희 집이 어디냐. 저 목동에 삽니다. 그래? 그러면 목동의 네가 아파트에 사는데 온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중의 너희 집이 있는데 여러개의 방이 있는데 그 중의 제일 작은 방, 화장실이 있어. 거기에 빨간 전구가 켜 있어. 9마리의 날파리가 너희집 화장실에 빨간 전구를 돌고 있는데, 그 중의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라고 생각하면, 그리고 너는 그 파리 등에 붙어 사는 세균 정도라고 생각을 해 보자. 우주 이 끝에서 저 끝에서 얼마나 넓은지는 학회에서도 논의하는 주제에요. 가장 크게 보는 사람은 빛이 960억년을 달려가야지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은 빛이 150억년 정도 달려가면 끝에서 끝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최근에는 끝에 가봐야 소용이 없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1초에 2천킬로미터씩 우주는 확장되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 무한한 크기의 우주는 다른 차원에서는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로 이루어졌다는 멀티유니버시 이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배운대로 우주를 생각하면 우주는 별별로 이루어져 있고 밤 하늘의 여러분들이 가서 망원경을 이용해서라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개수는 6천개이고, 그러나 우주의 별은 6천개가 아니라 수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고 한 무리의 별이 약 1천억개 내지 2천억개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의 은하이고, 이런 은하가 1천 억개쯤 있는 것이 우주라 하고, 이 은하 하나의 길이는 각각 다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해있는 이 은하계만 약 빛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20만년을 달려가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은 대부분 지구와 같은 위성이 아니라 태양처럼 불타는 기체덩어리의 항성이에요. 그리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항성은 빛이 4년 정도 달려가야 하는 거리이기 때문에 수성, 금성, 화성, 지구,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이라는 태양계가 5백원 동전 안에 들어간다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이 서울에서 대구쯤 거리에 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거죠. 밤하늘에 보이는 북두칠성이 네 번째 별과 다섯 번째 별이 국자모양으로 나가는 것 같아도 둘 사이의 별의 간격은 900만 광년쯤 된다고 합니다.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그 큰 우주를 도대체 그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고 사람들은 고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첫째,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있으라 하시는 그 한 마디로 말미암아 이 모든 우주는 단번에 생겨났습니다.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그 하나님이 자신과 비교될 수 없이 탁월하게 높으신, 질적으로 전적 질적으로 자신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복하며 두려워 떠는 것으로부터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이죠. 오늘날은 하나님을 무슨 이웃집 아저씨 같이 그렇게 대하고 심지어는 농담하는데 하나님을 들먹거리는데 구약에서는 모두 사형 당했을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가장 근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제일먼저 온 땅과 만물 위에 탁월하게 높고 엄위로우신 그 분 앞에서 부복하여 두려움 속에서 떠는 것, 거기에서 신앙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두려움이 단순한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는데 신앙의 묘미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주 티끌 같은 존재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높고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지극히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는 그 순간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존재의 무한한 격차, 그 것을 의식할 때 하나님은 탁월하게 높고 위대하시고 자기는 티끌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부복하는가 하면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아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고 탁월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아주 불결하고 설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을 하는 거예요. 이 그러한 인간의 하나님이 당신과 아무 관계 없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형상을 닮게끔 창조하시고 당신과 관계를 갖게끔 만드시고 하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당신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을 보이시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인간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의해서 이끌림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거의 동시에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부복하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모든 가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에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심지어는 행복해지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신앙의 대의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인데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커다란 손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그리하지 않는다치면 우리에게 큰 벌이라도 내리실 것처럼 위협하듯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셔야지만 겨우 행복해지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완전한 만족과 지복속에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에게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시고 만약에 그런 것이 채워져야만 하나님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죠. 좀더 하면 좋은데, 진도가 많아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할 때 그러한 그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속에서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그 여호와가 오늘 나의 목자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라는 그림은 온 땅과 만물을 초월하는 완전하고 위대한 존재이지만, 목자라고 하는 존재는 땅에 내려와서 짐승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요. 우리는 이 시를 읽기 전에 다윗이 실제로 예전에 목자였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해요. 그래서 이중의 유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 믿으면서 일생을 살아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고 이끄시는 것이 마치 자기가 양 떼들을 이끌고 돌보았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에서 착안해서 이 시를 이중의 유비를 가지고 써내려가요. 이것은 언제나 마음을 새기면서 23편을 읽어야 해요.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을 이 다윗이 목자라고 불렀으니 자신은 뭐라는 거예요. 왜 대답을 못하세요. 하나님을 목자라고 불렀으니 다윗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23편을 눈 씻고 뒤져봐도 양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꼭 양을 쳐야만 목자입니까. 소를 쳐도 목자입니다. 돼지를 쳐도 목자고, 요즘같이 보신탕용 개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인데, 이 23편을 읽으면서 아무도 자기를 개라고 생각하거나 말귀 못 알아듣는 돼지라고 생각하거나 밥 많이 먹는 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뭐라고 생각을 해요? 양. 그 양 그럴 때 어떤 그림입니까. 파란 뉴질랜드의 초원에 순백의 티끌하나 없는 하얀 양이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여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거죠. 그것을 자기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사는 것은 개떡같이 살아도 상상할 때에는 자기가 그런 양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멘 할 대목이 아니잖아요.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이 기록된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성경이 기록된 것은 코리안 문맥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문맥이에요. 제 동생이 젊었을 때, 중동에서 근무를 했는데 지금도 중동사람에게 최대의 욕이 양같은 놈이에요. 그래서 중동 사람들의 양같은 놈이라는 욕 속에는 욕심많고, 무능하고 게으르고 머리 나쁘다는 그림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과 일하다가 다른 욕을 하면 참는데 양같은 놈 하면, 이 사람들도 화를 버럭내고 대든다고 해요. 성경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것은 양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그림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집어 넣은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속죄의 재물로 바쳐졌던 그 양을 투사한 거죠. 오히려 성경에는 양에 대해서 꼭 긍정적인 묘사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53장입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거든, 양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자기 길을 계속 가려는 고집도 있어서 그래서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하는 거죠. 하나님은 너무나 자주 성경에서 당신을 목자로 묘사하시고 인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와서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전도하여야 할 잃어버린 영혼들까지도 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짐승들이 각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맹수와 같이 강한 발톱과 큰 이빨을 가진 짐승이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이빨과 큰 발톱은 없지만 어마어마한 덩치가 있어서 백수의 왕이라고 하는 호랑이나 사자도 감히 덤벼들지 못하는 코끼리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힘은 없지만 주위의 공격기 있을 때 자기의 몸을 변신하여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카멜레온과 같은 동물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없지만 누군가가 자기를 괴롭히고 해치려 할 때 몸을 동그랗게 감싸면 온 몸이 가시가 되어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고슴도치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있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선 이 양은 빠른 다리가 없습니다. 물론 뛰기는 하지만 그러나 짐승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러한 달리기 선수는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한 2-3미터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양이 길을 잃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왜냐하면 바짝바짝 붙어도 계속 걸어가야지만 겨우 가는 존재인데, 혼자 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온 길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와도 돌아온 양의 이야기는 보지 못해요. 그래서 누군가가 찾아가서 구해오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이빨은 있는데 풀이나 껌 같은 것을 씹기에 적합한 넓적한 어금니, 뿔이 있는데 그것은 나무를 받아서 넘어뜨리기 위한 뿔이 아니라 그냥 말려서 디자인으로 하는 그 정도에요. 이러한 양의 이러한 특성을 갖은 동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리고 인간을 그 양에다가 비유하셨어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양의 생존은 어디에 달려있는가 하면 사람과 가까이 하면서 사람과 가까이 하면서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사람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동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라고 창조하신 것이에요.
중세 시대에 이 모든 사물들을 생각할 때, 그 사물들의 고등하고 하등한 정도에 따라서 그것을 질서를 매기던 사고방식을 교회도 따랐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존재도라고 해요. 이제 흙이나 돌맹이 같은 것이 가장 낮은 존재도를 가지고 있고, 식물들은 그 위에, 동물들은 그것보다 높고 인간들은 그것보다 더 뛰어나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그러나 여러분, 인간과 모든 인간이 아닌 것들, 자연 피조물들과의 관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차이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사색할 줄 아는 동물이에요. 그리고 반성할 줄 아는 동물이에요. 그것보다 더 탁월한 것은 뭐냐 하면 모든 피조물들 중 유일하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피조물이에요. 그 차이는 아주 탁월하게 뛰어나요. 그렇게 놀라운 것이 인간이에요.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면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니까 사실은 다른 것들보다 하나님을 덜 의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순서는 거꾸로에요. 돌맹이나 물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덜 의지해도 되고 그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는 존재에요. 그 인간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보다 가장 탁월하게 창조했기 때문에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아래로는 창조하신 그 모든 세계를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게 인간의 영광이에요. 그게 인간이에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미국의 신학자는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고 노래했어요. 여러분들이 가만히 신앙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은혜 충만하고 그리고 열렬히 기도하던 때에는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경건을 외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독립심이 강해서 그래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 뭔 일이 생겨도 하나님 앞에 물어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신앙이 가출했기 때문에 굳이 엄마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고, 아빠한테 여쭤볼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게 신앙의 바락이에요. 오늘날 한국교회 기도 안하는 것 보면 이 사실이 명확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주 싫어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하늘에 계시지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너무나 필요해서 간절하게 몸부림치며 주님을 찾고 주님을 의존하려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계시는 거예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을 갖은 때가 두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불쌍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가장 영혼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없어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해서 진심으로 회개하며 아픔의 눈물을 흘릴 때, 그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요.
(찬양)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맨 처음에 우리들이 세상의 불신자였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갔었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사람 중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태신앙이든 처음 예수를 믿었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반드시 우리의 인생 중 어느 한 때에는 도저히 나는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이다. 이 인생의 무게를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그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복음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우리가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이에요.
저는 두세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요. 부모님은 안 믿으셨는데도 두세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16살까지 교회를 출석했지만, 그 때까지 회심하지 못했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했고 6년 동안 하나님 없이 지독한 방황을 했습니다. 사춘기 때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두려움과 괴로움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요. 내가 오늘도 인간으로 살아있어야 하는가. 그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청소년 시절의 나의 구원의 길은 독서였어요. 그리고 사색이었어요. 그런데 그 많은 책을 읽어도 잠시는 내 마음에 위안을 주지만, 그러나 나에게 인생의 길을 가르쳐 준 사람도 행복한 것 같지 않았어요. 내가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는데 어느 순간에 나에게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 준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나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거예요. 그 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복음을 붙들었어요. 지금도 생각해요. 21살 때 가을에 아주 작은 예배당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성도 20명 밖에 안 보이는 손바닥만한 교회당에서 톳밥 난로를 때면서 예배를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담요를 깔고 앉아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고 옆에서는 삐걱 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서 찬송을 불렀는데 그 때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어요.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한없이 흘려요. 이전까지의 나의 인생이 불행한 것이 우리 엄마 때문이고, 우리 아빠 때문이고 세상 때문이고 친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알게 된 것은 내가 이렇게 불행한 것은 나 스스로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 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주님을 믿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주님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고 그리고 주님을 믿고 나니까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을 양에다가 비유하신 것이에요.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쓰러질 듯이 예배당에 나아와 아버지 앞에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드리는 예배와 아이씨,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끝나? 그러면서 드리는 예배가 같을 수 있겠어요?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펼쳐서 오늘도 나에게 은혜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먹이지 아니하시면 나는 이 험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성경을 피는 사람과 잠 안올 때 자기 위해 성경을 피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이 똑같이 다가온다면 거짓말 아니겠어요? 신앙의 대의는 그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자기가 끊임없이 그분을 의지하며 그 분께 붙들려 살지 않으면 자신은 절대로 독립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을 자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매달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요즘은 너무 배불러요. 배불러요. 신앙이 배가 불렀어요.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어려운 것이 없이 사니까 이제는 육체의 것들이 가득 채워지니까 영혼이 하나님이 없어서 얼마나 곤고하고 얼마나 고통 받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옛날처럼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눈물 젖은 눈으로 하나님의 성경을 펼치고 말씀 앞에서 엎드려 펑펑 울면서 새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참된 회개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을 관통하고 흘러야할 신앙의 대의는 사변의 물음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껍데기들이 자기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데 하나님이 해결사로 이바지되어야 될 것처럼 신앙은 격화시킵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된 신앙의 본질이 외면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세세무궁토록 울려퍼져야 할 이야기는 회개하라. 그리고 주님께 돌아오라.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라. 인간의 참된 영광은 자기의 약함을 알고 어린 양이 그 목자를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온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위에 뛰어난 그 위대하신 여호와가 자기의 인생 속에 직접 찾아오셔서 아주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간섭하시고 이끄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데도 이 시인에게는 묶여 있어요. 그 묶여진 것이 바로 나의 목자에요. 여호와는 이스라엘 모든 이들에게 계시된 이름이었지만, 그 분이 이 시인의 작은 인생살이에 개입해서 그와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시는 그러한 삶의 모습은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잘 생각해 보세요. 청교도들이 신앙에 관해서 이러한 격언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나님에게는 자식만 있지, 손자는 없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부모님들이 아무리 교회를 잘 다니고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 부모님 때문에 여러분들이 신앙이 보장 되는 것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손자겠죠.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어요. 각자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이 구원의 언약에 참여해서 회심하고 중생하고 변화된 사람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 중에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대대로 믿었기 때문에 애들이 할 수 없이 가자고 해서 아내와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교회 나오는 사람들 있죠. 신앙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생활을 하시는 분들 있죠. 마지막 날에 주님이 털면 다 털려질, 말하자면 쭉정이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여호와는 우리 엄마의 목자시오.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 여호와는 나의 신앙 속에서 체험되어서 그래서 나에게 모든 사람들이 다 부인해도 나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는 마지막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경험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서 그래서 정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런 확신이 없이 문화생활로서 이끌려서 교회를 다녀요. 그러면 그런 차이가 내버려두면 시간이 흐르면 해소될 것 같죠? 해소되는 사람도 있는데 해소된 사람은 시간의 흐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신앙의 역사가 그에게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미지근한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매달려 본 적있어요? 나는 항상 교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러니까 확실히 하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으면 교회를 떠나라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교회 왜 나오느냐 이거예요. 믿고 싶으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나도 믿는데 그런데 내가 만난 적이 없으니 하나님 나를 만나 주십시오 라고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안 하면 저렇게 해도 위선이고 이렇게 해도 위선이에요. 그게 뭐에요.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에요. 부인할 수 없는 증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다 라고 하는 개인적인 확실한 보증을 내안에 갖고 있어야 해요. 그 보증이 성령이에요. 성령. 성령. 그렇게 함으로써 인격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에요. 인격적인 신앙이 무엇입니까. 말로해서 이야기가 통하면 그게 바로 인격적인 신앙이에요. 어떤 사람이 교회 와서 화장실 청소만 하는 거예요. 고맙긴 하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화장실에 집착을 하나 했어요. 그랬더니 뭐냐 하면 옛날에 부흥강사님이 오셨는데 화장실 청소하면 하나님이 건강을 주신다 그랬대요. 그런 이야기가 어디있냐 이야기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병원질 필요 없어요. 화장실 청소하면 돼지. 인격적인 신앙은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릴께요. 신앙, 자기가 믿기 싫으면 안 믿는 거예요. 그것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목회자가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가르치고 또 그에게 성도들이 사랑을 베풀고 해야 되죠. 그렇지만 자기가 끝까지 안 믿으려고 뜻을 세우면 안 믿어져요. 그러나 믿으려고 뜻을 세우면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니죠.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의지대로 될지 모르지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없이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집중하고, 여러분 이제껏 살아오면서 10년, 20년 전의 이야기 말고 최근의 1년만 기준점으로 잡고 1년 동안 기도한 가운데 오만가지 기도하셨겠죠. 그런 것 다 집어치우고 정말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에게 주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는 믿음이 왜 이렇게 약합니까.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납니다. 나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성보다 높은 빌딩보다 평야보다도 넓은 땅보다 한뼘도 안 되는 내 마음속에 믿음을 달라고 간절히 땀이 나도록 기도해 보신적 있으십니까.
시인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른 것은 몇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적시해 주는데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시인을 인도하시는 방식에 관한 것이에요.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주님을 믿으면서 일생을 살아와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그것은 마치 내가 양들을 이끄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인격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유명한 요한복음 10장 목자의 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도 양을 아나니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목자를 따라옵니다. 짐승들 중의 어떤 짐승은 총을 쏘고 채찍질 해서 끌고 가는 짐승들도 있지만, 양은 그렇게 몰지 않습니다.
(예화)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어느 여행가가 글을 썼습니다. 도로 사이에 천여마리의 양 떼들이 걸터 있대요. 목자가 양을 이끌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다가 그만 오줌이 마려우니까 양을 내버려두고 오줌 누러 뛰어 갔어요. 양쪽에 차들이 못 가고 양이 가로막혀서 서 있는데 라이트를 껐다 켰다하고 아무리 경종을 울려도 양들은 꿈쩍도 안 하더래요. 그런데 목자가 소변을 다 보고 와서 양 떼들을 보고 얘들아, 가자. 아주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니까 양 떼들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하더라는 거죠.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이 이 다윗에게 실재로 그렇게 이끄시는 것을 시인이 경험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시인을 인도하시되 인격적으로 감화를 주셔서 인도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강압과 그리고 폭력, 심지어는 말하자면 막 무시하고 막 하대하는 그런 것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종교생활은 참다운 기독교 신앙이 아니에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다음으로 사람을 존중하는 신앙이에요.
제가 부교역자 생활까지 모두 합쳐서 교회생활 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철이 들고나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뭐냐 하면 어쩌면 그렇게 사랑으로 충만해야 할 교회가 이렇게 비인격적일까 하는 것이었어요. 부흥사들이 와서 반말지꺼리 막 하고 심지어는 현장도 봤는데 집회하면서 모두 일어나라고 하고 집사보고 수첩들고 가서 얼마 헌금하냐고 적으라고 하고, 적다고 다시 일어나서 적으라고 하고 그렇게 하고 뭐 심지어는 욕지거리를 하고 나와서 무릎 꿇고 있으라고 하고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려서부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내가 목회를 하면서 내가 목회를 하면 진짜 좀 인격적으로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잘 안 된 것 같아요. 그런데 한 가지 하는 것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교회는 매년 12월에 내년도 재직을 임명하는데 본인이 동의 안 하면 절대로 집사 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 주십시오. 절대로 사정하지 않습니다. 구역장도 마찬가지이고, 한번도 그래 본 적이 없습니다. 연말이면 다음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집사로 임명을 할 용의가 있다. 원하면 한 달간 교육을 받고 시험을 보시오. 그렇게 써 놓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자기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네들이 원서를 써요. 나 집사 되고 싶으니까 공부를 하겠다고 쭉 써요. 써 내면 한 달동안 교육을 해요.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봐요. 한 해 150명에서 200명 정도 집사로 임직을 하는데 임직이 아니라 임명을 받는데, 그 인원을 당회에서 모두 면접을 해요. 그래서 기도생활 하느냐. 진짜 구원 받았냐. 기도생활 하느냐. 다 이렇게 물어요. 그 다음에 마지막에 이제 합격자 발표를 해요. 여태까지 그러니까 자기가 하겠다는 의지를 안 갖으면 교회 온지 6년이 된 사람도 집사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교회를 떠나겠죠. 떠나도 나는 별 개의치 않아요. 그것을 강제로 시켜 보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 집사님 왜 요새 교회를 안 나오세요? 말이 돼요, 그게. 왜 안 나와요, 집사가 되요? 성도님, 교인님, 교인님, 왜 요새 교회를 안 나와요? 이것은 말이 되지만, 집사님, 요새 왜 교회 안 나와요? 어느 교회는 권사님, 요새 왜 교회 안 나오세요? 말이 되냐고요.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충성을 해야 해요.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자유하라고 놔둔 것에 대해서는 성도들을 자유롭게 살게하자. 난 이것이 기독교의 참된 휴머니즘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것을 경험한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인격적으로 인도하신 것이죠. 여러분들에게 물어볼께요. 주일날엔 어디를 와야해요? 크게 대답좀 해 보세요. 주일날 어디로 가야 해요? 한 달에 수입을 벌면 십의 일을 어디에 내야 하죠? 만약에 주일날 교회에 안 나오면 어떻게 해요? 첫째, 큰 일 난다. 두 번째, 괜찮다. 일번, 이번중 어느 것이에요? 일번? 이 교회는 확실하게 결석하는 사람이 없겠네요, 주일에. 정말 그래요. 그러면 왜 재적이 천명인데, 출석은 3백명 밖에 안 하는 교회는 왜 그렇게 많을까요? 여러분 생각에는 교회 잘 다니다가 주일날 안 나오고 등산 가면 꼭 떨어져서 발목 부러질 것 같고, 낚시가면 낚시 바늘에 코 꿸 것 같고 돈 벌러 가면 사고나서 돈을 더 까먹을 것 같지만, 그럴 수도 있지만 실험을 해 보면 안 그런 경우가 더 많아요. 그래서 교인들이 더 담대하게 주일도 거르는 거예요. 십일조 누구에게 바쳐야 해요? 안 바치는 것은 큰 일 난다. 두 번째 괜찮다. 그러면 여러분, 십일조를 안 낸 사람들은 연말에 가서 쫄딱 망할 것 같죠? 그렇죠? 그러면 누가 안하겠어요, 십일조를.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서도 안 하는 분들 있잖아요. 왜 그래요. 하나님은 치사해서라도 우리를 그런 방법으로 인도하지 않아요. 교회 한번 안 나왔다고, 물론 교회 한번 안 나왔다고 해서 교통사고 날수도 있고 아니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놀러가다가 차에 치여서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주일 한번 빼 먹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복수하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에요. 그러나 만약에 내가 주일날 교회 안 가도 괜찮더라. 바빠서 가끔 빠져도 죽지 않다. 십일조 가끔 떼어 먹어도 목사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더라. 연말에 가서 계산해 보니까 뭐 돈을 특별히 손해 본 것도 없더라. 아, 이렇게 살아도 괜찮구나,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이제 중대한 실수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신이 이해관계에 관심이 많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맺은 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왜, 사랑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관계에 관심이 많으셔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기계처럼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셔요, 오히려 성경은 그런 식의 경배를 하나님이 지겨워하신다고 나와요. 더욱이 그렇게 예배당에 나오고 돈을 바치면 무슨 원리가 있어서 부자가 되고 무슨 건강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 같은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은 그것은 야바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그러면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교회를 운영하면서 헌금을 내는 것이 목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어요. 마지막에 교회가 돈에 시달리니까 나 한 사람 이외에는 고민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헌금 발견하지 못하지만, 가끔 집회 나가면 우리 사업, 이렇게 이렇게 계약하려고 하는데 꼭 되게 해 주실줄 믿습니다. 돈을 덜컹 하고 감사헌금을 미리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해가 안 가요. 그것 몇 푼에 하나님이 그 엮이시겠어요? 되면 되는 것이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우리는 그렇게 어린 신앙을 버립시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칼빈 선생님이 말했듯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한뜻을 가지고 섬기려고 해야지. 무엇인가 마음에 접고 자락을 깔아놓은 것이 없이 투명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툴면 서툰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하나가 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런 사람들에게나 회개와 반성이 있지, 양파껍질처럼 수없이 껍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실과 참됨이라고 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의 벼랑 끝에다가 선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 놓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요. 첫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추어도 나에게 악을 행하실 분은 아니시다라고 하는 확신이에요. 두 번째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이끄실 것이다라고 하는 확신이에요. 제가 교회에서 절대 못하게 하는 말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저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기도 중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다가 지시하셨는데, 여러분들 허황된 이야기가 어디있습니까. 정직하게 기도하다가 생각이 났는데 말씀을 듣다가 깨달음이 왔는데, 목사님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라고 말해도 경건한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들어요.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뛰어넘어서 각자의 마음 속에 지금도 그냥 직접 와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또 본받으면서 수많은 과정에 과정에 보태어서 그렇게 해서 영적인 허풍이 늘어난 거죠. 그러한 공동체들 속에서는 순수하고 한 마음을 품은 깨끗한 경건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에요. 그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거죠. 제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하는 것은 설교시간에 내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우리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해서 모든 교회와 성도가 성경 말씀 앞에 부복하고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은 성경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나를 깨닫게 하시고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면서 말씀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연구소에서 앙케이트를 했어요. 한국의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을 무작위로 추출을 해서 예배 드리고 나오는 사람 100명을 주일 낮 예배 끝나자마자 대문 앞에서 만나서 앙케이트를 했어요. 첫 번째 질문이 오늘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하셨습니까. 95명이 모른다고 대답을 했어요. 그 중에 절반이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 생각이 안 나요. 5명을 메모해 놨다가 3일 뒤에 다시 전화를 걸었어요. 그랬더니 3일 동안에 5명 중 3사람은 잊어버렸어요. 그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에요. 여러분들은 좋은 목회자 밑에서 신앙훈련을 받으시니까 안 그렇겠죠. 내가 봐 본 상당히 많은 교회들은 예배 신앙과 민방위 교육 시간과 구분이 안 돼요. 무엇 때문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없는 거예요.
(찬양)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찌르는 삶, 이제껏 내가 보지 못했던 나를 보여주시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나님이 너 자신을 대면하여 보라고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거예요. 그 때 그 진리의 빛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이고 내 신앙이 어디에 와 있는가 하는 것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 목자라는 말이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목동이 철없는 양을 이끌며 이리오너라 가자 하고 음성을 들려줄 때에 목자를 의존하는 마음으로 양들이 따름으로써 양들이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따르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우리 교회에서는 교리학교를 해요. 그런데 한 기수에 200명 들어와서 가득 모여서 한 4개월 동안에 저한테 직접 개혁교리를 배웁니다. 서론부터 시작을 해서 종말론까지 다. 가르칠 때에 매주 반복하는 카테키즘이 있어요. 요리문답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공부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모두 대답해요. 우리는 세 대상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잘 나타내셨음으로 우리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사람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신들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속에 반복되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은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신 분이신지를 배워나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되는 것이에요. 아무리 성경에서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죄가 아니다라고, 죄다라고 성경이 말하지 않아도 그것보다도 더 좋고 사랑스러운 즐거움을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찾으면 그것은 영혼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똑바로 세워서 자신의 모든 즐거움이 하나님이 누구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매일 매일 알아가요. 주님이 나에게 평화로운 삶을 주시면 평화로운 삶 속에서 분투하며 주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한 3년 지나고 나면 3년 전의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되어요. 시련과 고난을 주셔요. 그러면 그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난이 없었더라면 배울 수 없었던 하나님을 배워요. 그래서 그 모든 우리의 인생속에서 일어나는 순탄한 환경과 고통스러운 역경, 그리고 몸부림치게 만드는 결핍과 그 다음에 참된 기쁨, 이 모든 것들은 마치 하프 위를 오가는 하피스트의 손가락과 같은 거예요. 주의 깊게 손가락을 막 움직이면 좋은 소리가 막 나는 거예요. 이 손가락은 항상 평화롭게만 오는 것이 아니에요. 목회를 하면서도 아주 평화롭게 그리고 안정된 때가 있는가 하면, 교회가 마치 커다란 폭풍을 해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큰 파도위를 항해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있죠. 꼭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닌대도 하나님이 그런 난관을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는 거예요. 그 때에도 하나님은 그 역경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목회자에게 그런 시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 곧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신앙의 의미를 알면 막 고난이 다가와도 고난 때문에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고난 때문에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탁월한 속성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예전에 몰랐던 하나님을 향한 앎을 갖게 되는 거예요.
(예화) 신학교 교수를 하면서도 아직 안수를 안 받았었어요. 전도사 생활을 13년을 했어요. 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자신만만한 것 같은데 교회에만 오면 겸손해져요. 왜, 차돌같은 청소년들이 절대로 변화되지 않는 거예요. 그 토요일마다 교회에 와서 너무 슬프고 왜 하나님, 저들은 내가 만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왜 저 아이들이 저렇게 방황하면서도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2년 동안을 교회에서 잤어요. 밤에 깨끗이 씻고 보따리를 싸고 아이를 재우고 우리 집사람과 작별을 하고 교회로 출발을 해요. 한강을 건너고 버스를 타고 창문을 열고 일주일 내내 학교에서 진짜 땀을 흘리며 고생을 하는데, 그러면 좀 토요일은 쉬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때마다 불렀던 찬송이
(찬양) 주님 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고단한 이 몸을
폭풍 후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저 아이들이 회심을 해서 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남들은 이렇게 힘들지 않고 학교에서 선생 노릇하면서 사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여기에다가 박아 놓으셔서 이렇게 고통을 받게 하시나 그런데 고통은 잠깐이고 그 속에서 주님을 부르고 주님 앞에 매달리면 주님은 언제나 말씀하셨어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밤새도록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은 새벽에 위로를 주셔요. 또 사역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빠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주 좋은 것을 우리들에게 주시도록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기쁨이 우리에게 가장 꼭대기에 있는 기쁨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하고 짐승처럼 일천 년을 영광을 누리면서 살기 보다는 단 하루를 그리스도인처럼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처럼 살다가 노예처럼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목자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시인을 인도하셨던 이끄는 방식과 목동으로서 양 떼들을 이끌었던 방식이 유사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관계를 보여 줘요. 여러분, 요한복음 10장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미루어보면, 예수님 눈에는 삯꾼인 목자와 선한 목자로 꼭 둘로만 나뉘어졌어요. 이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있어요. 데리고 있는 양이 집집마다 많다면 그러면 이 주인이 다른 직업을 포기하고 양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을 거예요. 몇 마리가 되어야지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한 천마리쯤 되면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양이 그렇제 많지 않은 목자가 다수가 있었어요. 이들은 양이 있기는 있는데 50마리쯤 있다고 한다면 50마리이면 온 가족이 매달려서 생계가 되겠죠. 그렇다고 갑자기 어디에서 수천마리 사올 수 있는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죠? 할 수 없이 겸업을 해야 해요. 다른 직업을 가지고, 그런데 사실 겸업이라고 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하면 그렇게 적은 양을 가지고 있는 가정들이 당시에 힘을 합쳐서 삯꾼을 하나 사요. 그리고 각자 각출을 해서 한 사람의 생활비가 되게끔 만들어주고 50마리씩 50마리씩 한 500마리쯤 만들어서 한 사람 일거리를 만들어서 돌봐주도록 부탁 한다 이야기에요. 자, 그러면 이 사람은 해야 될 일이 목자가 하는 일을 이 사람이 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를 열어주어서 양 떼를 방목하고 그리고 풀이 있는 대로 데리고 가서 꼴을 먹이고 그 다음에 어디 다른 대로 가려고 하면 가지 못하도록 지팡이로 톡톡 치고, 해서 개수를 해아려서 저녁때 되면 데려와서 우리에 집어넣고 문 닫고 퇴근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선한 목자나 삯꾼이나 차이가 없어요. 하는 일이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비상상황이 발상을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도둑이 들어와가지고 칼을 들면서 양 내놔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든지 양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 이놈들이 데리고 와봐야 양을 죽일텐데 싸우든지 이래요. 그리고 또 맹수가 와요. 맹수가 오면 그러면 다윗도 자기가 고백을 했듯이 맹수가 오면 맹수와 더불어 싸우고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양 떼를 지켜야 되잖아요. 그렇게 양 떼를 지킬 때에는 양 한 마리에 얼마짜리이다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강아지 길러 보셨어요? 저희 집안은 오래토록 개를 예뻐했어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때까지 우리 집에 개가 떠나지 않았어요. 그게 죽을 때마다 하도 내가 서럽게 우니까 우리 집안에서 그 다음서부터 개를 안 키웠어요. 너무 사랑해서 개를 못 길러요. 꼭 죽잖아요. 그러면 며칠동안 상심해가지고 밥도 못 먹고 괴로운 거예요. 그러한 인연이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개를, 개가 제가 교수 생활하는데 학교에서 점심을 먹으러 내려왔는데 추운 겨울인데 예쁘장한 옷을 입은 두 학생이 포스터를 붙이고 다녀요. 이렇게 보니까 현상금 70만원. 아니 50만원이라고 붙였어요. 그 때 당시 50만원이면 굉장히 큰 의미였어요. 1995, 96년도. 1992년도의 일이었어요. 굉장히 큰 돈이었어요. 그 당시에 교수 때에 170만원이가 200만원 정도 받을 때의 일이면 그런데 거기에 주먹만한 개가 있는 거예요. 그 개가 얼마짜리 개인지 최소한 100만원은 되겠죠. 뭐라고 할말이 없는 거예요. 그게 발발이 잡종이라도 맨날 데리고 자고 같이 밥 먹고 놀았던 거예요. 어느날 없어진 거예요. 그게 보신탕 집에 끌려갔나, 큰 개가 물여 죽였나. 차에 치여서 죽였나. 밤에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개가 그리운 게 아니라 반개가 그리운 거죠. 누워서도 안 자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막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삯꾼은 그것 안 한다 이거예요. 왜 하겠어요. 처음부터 양을 돌볼 때에 양에게 절절히 맺힌 사연이 있어서 돌 본 것이 아니라 월급 받으려고 그것 했는데 뭐 왜 양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을 하겠느냐 이야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시는 것은 자기가 착한 목자로 자기의 양을 돌보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신다, 이 이야기에요.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어버린 양이 셋이 나옵니다.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은 양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가 나와요. 그 중에서 잃은 양의 비유를 생각해 보세요. 목자가 양을 데리고 우리에 가보니까 저녁 시간에 모두 데리고 가니까 100마리여야 하는데 99마리밖에 없는 거예요. 한 마리다 없어요. 그런데 항상 학교에 다닐 때도 사고치는 애들은 정해져 있고 말썽 일으키는 사람은 정해져 있잖아요. 약간 모자란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결격사유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목자가 이제 와서 쉬고 자야 할 시간이에요. 그런데 쉬고 자야할 시간인데 양을 찾아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호주에 갔을 때 양 한 마리가 가격이 얼마나 되는가 물어봤어요. 여기서는 어차피 가격을 모르니까. 양고기도 잘 안 먹잖아요. 그랬더니 거기에서 당시 호주 달러로 200불이에요. 지금돈으로 계산하면 한 16만원 정도 되는 거예요, 그 때 돈으로. 그런데 목자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도 모르는 이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데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돌부리에 넘어져가지고 골절상을 이루게 될 수도 있고 어두워서 사고가 날 수 있잖아요. 20만원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찾아 나겠어요. 20만원, 포기하고 말지, 16만원 포기하고 말지. 딴 데 덜 쓰고 말지. 그런데 목자에게는 언젠가 그 양을 잡을 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 16만원 때문에 양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어디엔가 두려움 속에 떨고 있을 그 양이 너무 가엾어서 그래서 그 목자의 마음에 있는 사랑 때문에 찾아 나서는 거예요. 그리고 가보니까 저기 어딘가 다쳐가지고 주저앉아서 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손을 뻗어서 그 놈을 데려다가 목에다가 걸치고 오잖아요. 희랍어 성경에 보면 복수로 나와요. 그러니까 한쪽 어깨에 걸친 것이 짐처럼 걸친 것이 아니라 무등을 태우듯이 이렇게 걸치고 돌아오는 것이에요.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다음 일이죠. 돌아왔는데 그 때가 저녁 식사쯤 되었나 모르겠죠. 거의 동네 사람들, 온 동네 사람들이 들어 온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왜요, 왜요. 저녁 먹었어? 아니요. 그러면 밥 하지 말고 다 우리집에 모여. 왜요? 잔치를 할 꺼야. 왜요? 아, 이 양 한 마리 잃어버렸다가 찾았거든. 설마 그 양을 바비큐 한다는 것은 아니겠잖아요. 여러분들이 신앙에 미끄러져서 마음이 떠났을 때 왜 그렇게 하나님이 간절히 찾으실까요. 교회의 일꾼으로 쓰시려고, 착각하지 마세요. 돈 많이 벌어서 헌금하게 하시려고.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그런 것 안 하고 해도 하나님의 일을 충만히 하실 수 있어요. 이유는 오직 하나에요. 하나님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말 어디선가 하나님 없이 어느 속에서 떨고 있을 한 마리의 양, 그리고 인생의 벼랑 끝에서 가시덤불 속에서 고통 받을 그 한 마리의 양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이 그것을 그냥 보지 못해서 찾아나서는 것이고, 우리의 목회,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함께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그 사람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점과는 상관이 없이 주님 없이 살아가는 곤고한 모든 영혼들에 대한 아픔 때문에 개척도 하고 심방하고 말귀 못 알아 듣는 인간을 데려다가 앉혀놓고 한글자라도 가르치려고 하고 모본을 보여서 아무리 말해도 못알아 듣는 사람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게 하시려고 주님이 이렇게 교회를 세우신 것이에요.
그 사람들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온갖 멸시와 모욕을 당한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으니 당신이 그렇게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이 죄인을 찾으시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에서 미끄러질 때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주님께 온전한 신앙의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미끄러지고 넘어지던 곳에 어디든지 간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돌아온 그 곳에는 항상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구속의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찬양)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언제나 마지막에 깨닫고 보면 사람 때문이 아니라 환경 때문이 아니라 사망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천사들이나 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가 없으니 우리가 목자이신 주님 없이도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함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만들어질 때 탕자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을 떠난 것은 언제나 우리였고 돌아올 때는 언제나 우리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우리의 인생의 목자이고 우리의 인생의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되는 대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있는 것이 우리가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죠.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불순종한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시인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른 사람은 이 말을 할 수 있어도 다윗은 이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는 세상에 추앙받는 신앙인이요, 선지자요, 시인이요, 정치가요, 군인이요, 그리고 구약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전공으로 삼았던 위대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인생은 정말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 부으러 왔을 때, 누구를 불러도 하나님이 응답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너희 집에 아들이 이것 밖에 없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 이새의 마음에 아차 하고 겨우 생각이 난 사람이 다윗이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에 다윗이 지워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한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는 다윗 마음속에 있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신대함에 동참할 수 없는 영적인 수준이 형편없이 낮은 여자였습니다. 부부의 연합은 끊어졌고 그리고 그 교통은 평생 이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 중 누구도 다윗과 같은 고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던 인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집안에서 자기 뱃속으로 낳은 딸을 어느 사내 녀석이 겁탈했다고 했는데 그 자식도 자기 뱃속으로 낳은 새끼였습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각기 칼부림을 하고 죽어가는 광경도 지켜보아야 했고, 반역이 일어나 자기를 죽이고 나라를 빼앗겠다는 역모가 일어났는데 그 괴수가 바로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모든 난이 토벌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을 때, 자기의 아들도 전사하였다는 슬픈 소식도 함께 들으며 물 위에 올라가면서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일평생 백성의 추앙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미워하신 불륜이었고 잠시 동안의 즐거움 때문에 그는 가옥 할 정도로 긴 세월 동안에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칼 같은 고통 속에서 인생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상처투성인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나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게 보자란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만들었던 것은 이 세상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환경과 현실을 뛰어넘는 신앙의 믿음,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이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한 선과 은혜를 그치지 않으실 것이라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굳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그 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사는 삶, 신앙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폭풍과 흑암을 지나며 원수들이 욕설과 그리고 끊임없는 고난을 경험하면서도 오히려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시고 그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람 같은 우리의 인생이 속히 지나가고 마지막 날 우리들이 대면할 그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모든 펼침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접힘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인생의 벼랑 끝에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고집을 쓰고 염소처럼 주님의 곁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의 양심의 모진 채찍으로 증거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주님의 마지막 경고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그 이유는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주님께 근심이었던 사람들은 변하여 이제는 주님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