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울림 6장
녹취자 : 김세나
제 6장
구원받은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장 9절)
그 덕들
여기에서 “덕”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말 성경에 “덕”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서 “taV aretaV”(타스 아레타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그 덕들을’이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의 단수는 “aretah”(아레테)입니다. 이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본래의 의미는 ‘탁월함’입니다. “aretah”(아레테)의 문제를 고민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들이었습니다. “aretah”(아레테)는 그리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책 「이상국가」에서 “aretah”(아레테)가 무엇인지 규명하기 위하여 긴 논변을 펼쳤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aretah”(아레테)가 무엇인지를 규정하였습니다.
그리스는 도시 국가입니다. 폴리스라고 불리 우는 이 도시국가는 그리스 본토에 약 100여개가 있었습니다. 평균적으로 인구가 약 5천 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로 그리스의 이 모든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통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와 인도에 이르는 헬라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 때 그들이 제국에 꽃피운 문화가 바로 헬레니즘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들은 인구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침입에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제일 먼저 풀어야 했던 숙제는 국가 존립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어떻게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는가 이었습니다. 둘째는 어떻게 나라를 잘 다스려서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의미하는 ‘덕’은 한 개인이 국가를 유지하고 행복 하는데 이바지 하는 덕을 의미하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시민의 유익을 위해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 정신의 힘을 “aretah”(아레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리스인들의 교육 목표는 “aretah”(아레테)였고 이 교육을 통해서 그리스 시민들은 자신의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공동체의 유익에 이바지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후에 그리스를 지배하였던 로마제국에서도 역시 이러한 정신은 이어집니다. 로마의 법, 체계 역시 이 “aretah”(아레테)를 목표로 한 그리스의 교육과 법률, 문화와 제도, 윤리를 바탕으로 로마니즘을 이루었습니다.
기독교의 문맥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를 정복하고 로마제국이 섰지만 지중해 세계에서 최후의 승자가 기독교 이었다고 말합니다. “aretah”(아레테)의 단어가 기독교의 문맥에 들어오면서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aretah”(아레테)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해석하면서 이 “덕”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덕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지혜, 선함, 권능, 공의”를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이 세계에 작용함으로써 그 분의 창조와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그러한 구원 계획의 성취를 통해 인류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덕”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덕”이 이사야서 43장 21절의 찬송에서 유래하였다는 데에 이견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장 21절) 다시 말해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이 이사야 43장 21절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찬송”이라는 구절이 히브리어로 “תְּהִלָּתִ֖י”(테힐라)인데 ‘나의 찬송’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셔서 당신과의 교제 속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구원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로 이러한 덕을 찬송하는 것이 그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이 “덕을 선포한다.”는 의미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위대한 지혜와 하나님의 선, 그리고 권능을 찬송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입술로 부르는 찬송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 자체가 울림이 되어 하나님의 이 “덕”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선포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본문은 “יְסַפֵּֽרוּ׃”(예삽페루)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들을 말로 진술하거나 기록함에 있어 빠짐없이 상세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위대한 구원의 행동에는 그 분의 성품이 묻어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그 속성들이 시행되는 것이 바로 “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덕을 존재와 삶으로, 그리고 말로 이 세상에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능력과 지혜, 그의 선하심과 사랑,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존재와 삶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들려주고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존재와 삶을 통해 선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떻게 소명을 주셨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상세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포는 설교자의 선포를 통해서 공중적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소명은 설교자에게만 주신 소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교회에서 언제는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위대한 덕들이 설교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 교회를 찾든지 사람들은 그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강단의 외침을 통해 하나님의 이 위대한 덕에 대하여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사람들의 생각이나 자기의 견해나 철학적인 사색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위대한 존재와 성품에 관한 선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삶의 방식을 결단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말 하고, 생활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덕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존재의 울림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 모든 선포의 중심에는 언제나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장엄한 사상의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 없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그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주고 그들의 사상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글이든지 말이든지 무엇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에 관해 선포할 수밖에 없고 또한 사람들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관한 사실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셔서 신자로 삼으신 이유입니다.
공동체가 해야 할 일
우리는 이러한 소명을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소명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러한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입니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그 모든 인격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리고 이러한 개개인의 세상을 향한 영향력들이 총화를 이루어 공동체적인 영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저마다 사는 것은 달라도 영적으로 하나의 연대를 이룹니다. 도시가 아닌 한적한 농촌에 살면서 이웃에게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울림을 들려준다면 그것은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지구상의 모든 보편교회가 세상을 향해 들려주는 울림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참 신자다운 사람을 보고 “저 사람 어느 교회 다녀?”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 보다 먼저 그들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그 예수가 누구일까? 예수가 누구이기에 사람들을 저렇게 바꾸어 놓을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실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개개인일지라도 그 울림이 공동체적인 울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에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기 위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교회는 진리의 공동체로서의 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확고한 신학 사상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위대한 사상,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윤리적인 삶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많은 제물과 권력, 혹은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꺾을 수 없는 기독교의 위대한 힘입니다. 존재의 울림의 단위를 개인으로 놓고 생각해 봅시다. 성숙한 신앙에 이른 사람들의 신앙적인 추구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존재의 울림, 곧 선포가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의 울림이 있는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진리를 증거하고 삶으로 입증하는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이 배어 있습니다. 교회에 이러한 설복하는 힘이 없을 때 세상들은 술꾼의 충고들을 듣는 것처럼 교회에 답할 것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입니다.
물론 교회가 존재의 울림을 갖는다고 해서 세상이 항상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여도 순결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순수한 진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삼킬 듯이 복음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의 존재론적인 선포에는 항상 전투가 따라옵니다. 이 전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상적인 전투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바에 대해 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포를 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서 사상적으로 도전합니다. 기독교에 도전하는 사상들은 묻습니다. “어떻게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이 신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서 성경의 진리를 확신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비롯된 확고한 사상의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부지런히 지성을 연마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변증이 사람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변증하고 또한 능력 있게 선포하는 이 두 가지 방법은 불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좋은 목회자들을 길러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훌륭한 신학을 가진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지난 세대에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들을 보존하고 또한 이 시대의 우리의 연구를 보태며 다음 세대의 자손들이 그 진리를 의존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사조들을 이길 수 있는 기독교의 사상들을 수립하고 보존하여야 합니다. 진리의 가치를 확고히 붙들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이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가르쳐야 하고 신학지식으로 성도들을 무장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불신앙적인 사조보다 자신들이 확신하고 있는 이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가 훨씬 아름답고 신뢰할만한 것이라는 확신속에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둘째로는 윤리적인 전투입니다. 세상은 신자에게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적당히 타협하도록 요구합니다. 윤리적으로 천해하게 대립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할 마지막 사람들입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이 일을 위해 헌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헌신한다면 그러한 신념은 반드시 윤리적인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자신의 인격과 삶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도덕적인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셋째로 신령한 전투가 있습니다. 신자의 영적인 생활을 갉아먹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로부터 매우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단적인 교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리들의 도전이 있습니다. 인간의 오감을 끊임없이 유혹하며 그 안에서 만족을 얻으라고 세상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다양한 오락거리와 생활의 편리함 들은 우리로 하여금 안일한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문명의 이기들은 그 시작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은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고 자유를 앗아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사색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할 수 있는 신앙과 정신의 힘을 상실한 사람들은 더더욱 이러한 타락한 문명에 빠져들어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러한 생활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한 주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살다보면 어느새 주일이 됩니다. 가치도 없는 일에 몰두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자신의 마음을 거기에 잠그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의무감으로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신자의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은 거대한 탐미(24:04부분입니다. 단어가 확실한지 모르겠습니다.)와 같습니다. 흐르는 그물이 떠밀리듯 사는 사람들은 얼마가지 않아 믿음의 파산을 경험하고 말 것입니다. 기도를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그날에 볼 수 있겠느냐고 하는 예수님의 염려의 말씀입니다. 현대의 문명 속에 매몰되어 버립니다. 비판적인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강력하게 거스르며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신세가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영적인 전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장 12절) 그러므로 마음을 모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 신령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재의 울림으로 선포하라
오늘날에도 번영을 가르치는 복음이 환영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번영의 개념이 시대마다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70년대에는 이 번영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번영의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이 번영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그리고 자기의 욕망을 성취함으로써 만족감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모두 부자가 됩니까. 그런 식의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만 간증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간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의미의 번영의 복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인간의 행복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있습니까.
오히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 말은 신자의 삶이 항상 고난으로만 얼룩져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복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과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와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원과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경험하는 달콤한 영혼의 기쁨과 정신의 행복을 어찌 말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는 즐거움은 이 세상 사람들이 차마 알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정하십시오. 그의 나라를 위한 사명으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채우십시오. 물론 우리에게는 여전히 고난과 희생, 아픔과 좌절, 수고와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미천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이 헌신이 아름답게 사용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그 속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덕과 함께 행복해하고 즐거워한다면 그 어찌 기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시련과 고난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믿음으로 극복됩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러한 어려움과 역경들을 통해서 그러한 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우리가 알 수 없을 위대한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탁월한 모든 사람들은 고난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한 없이 받으셨지만 그 분은 이 세상에서 늘 고단한 삶을 사셨습니다. 서른 살 밖에 안 되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네가 아직 오십 살도 못 되었는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분은 늙어 보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만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셨던 분이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고난과 역경과 시련이었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와 인간의 타락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과 누렸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삶은 참 하나님의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우리의 믿음과 반대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잠시 그 속에서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혼란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히 올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십시오. 그리고 변함없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 고백하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노예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땀을 흘리며 읽고 눈물로 쓰고 피로 외치며 입술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한결 같이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불러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고 새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와 인격 그 자체가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지 마십시오. 이렇게 우리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덕들이 선포되는 일에서 행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어디선가 그 사람들이 이 우리의 존재의 울림을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선가 우리들이 전파하는 이 진리의 빛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도 이 존재의 울림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도 이 빛을 받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보람을 느끼며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이르도록 충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가끔 사라질 이 세상의 영광도 하찮다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섬기고 또한 이 세상을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을 것으로 굳게 믿지만 그러나 이 세상 나라의 영광을 우리는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의 영광이 하찮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믿음으로 발견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면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을 지나는 동안에 고난과 시련을 겪으셨음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경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사랑하는 여러분 소망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신자의 분투하는 삶이 힘겨워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날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작은 섬김을 통해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덕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티끌 같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고 존재의 울림을 이 세상에 들려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로 쓰레기 같은 이 세상에서 죄의 낙을 더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바로 이 선포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존재의 울림을 동반한 선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했을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존재의 울림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면서 살겠습니다.”입니다.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과하는 순간 우리는 이 소명을 따라 살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명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이 세상으로부터의 어떠한 방해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걸고 이 길을 가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선포적 삶을 사는데 있어서 그것들을 가로막는 도전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러한 희생을 이미 각오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주인 삼은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전부가 그 분께 바쳐졌고 이 세상은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추어도 권리고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누가복음 14장 28절) 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장 38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베드로 역시 결국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였고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사명을 따라 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기상나팔이 부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군인은 없습니다. “에이, 잠 좀 자려는데 아침부터 깨우고 난리야?” 군에 입대하기 전 집에서는 그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군인입니다. 군대가 어떤 곳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영적 전쟁의 군인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울림을 이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고단한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당하는 수고와 고통은 그 분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고난의 연대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전투적인 삶을 살면서도 소망을 그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영광 뿐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은혜를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살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적인 생명력으로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전투적인 삶을 사는 신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신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날, 하나님의 보물로 불러주신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십시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러한 위대한 소명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께로부터 주어진 찬란한 진리의 빛과 충만한 성령의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늘 하루도 이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십시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웅장한 선포가 되도록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코멘트_ 나머지 에필로그는 그대로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