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아내들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녹취자 : 홍연주
오늘 읽은 성경 중에 앞부분은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고 뒷부분은 우리 집사람이 좋아하는 부분인데 오늘은 제가 기가 좀 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니까요.
오늘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오늘 시간이 되면 여기까지 설교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성경의 위대한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 확인을 한 다음에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확인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저의 의견에 동의해주지 못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행동 이라고 하는 것은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원리 속에서 살면 그 원리 속에서 수많은 잘못된 행동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원리라고 하는 것은 행동을 생산해내는 기계와 같습니다. 내버려둬도 계속 그 기계에서 수많은 행동들이 찍혀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는 종종 공장에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그것이 옥수수 튀밥이라고 할지라도 연속해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 기계가 자동적으로 움직이면서 그렇게 수많은 제품들을 쏟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동 하나하나를 고쳐도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뜯어 고치면 새로운 삶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의 원리를 고치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원리가 하나님 앞에 옳은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원리가 제시됩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동의를 해줍니다. 이 세상에 나아가서 볼 때에는 그런 원리가 보편적입니다. 그런 원리가 있고 성경이 ‘이렇게 살아라.’ 하고 똑같은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현실적으로 적용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아무리 둘러봐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전자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까, 후자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합니까?
어떤 사회 심리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조사해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성이 여성화된 가정이 모두 행복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자체가 남성의 여성을 촉진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오늘날의 시대를 저는 가장이 사라진 시대라 라고 생각합니다. 가장은 없고 한 가정의 멤버만이 있을 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가정 속에서 가장이 멤버로서 존재할 뿐이지 가장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가장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가장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자식들만 모여 있다고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은 한 아내와 한 남편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 속에서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풍조는 이제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억압을 받아왔고 부당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이 모든 인류사회의 가정의 파괴와 고통의 원인이 남성의 전형적인 횡포에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들이 해방되고 일어나야 할 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저희 할머님이 일흔일곱에 돌아가셨는데 칠순이 다되도록 시어머님이 살아계셨습니다. 근데 그 시어머니를 용서를 못하셨습니다. 너무 고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여섯에 시집을 오셔서 나이 칠순이 될 정도면 54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너무 싫어하셨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너무 싫어하셨습니다. 꿈에라도 나타나면 질겁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커다란 한 시대의 비극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사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옛날의 사회가 어땠든지 앞으로 사회가 어떻든지 중요한 것은 오늘 하나님이 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오늘날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주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이 없는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의 가치관들을 우리의 신앙생활과 어떻게 조화를 시켜보려고 시도하는 것들을 우리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수아가 마지막에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날 너희가 누구를 섬기겠느냐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라고 하는 이런 결심으로 우리의 삶의 원리를 성경 중심으로 재건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면서 언젠가 한번쯤은 지금현재 또 앞으로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지금 그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그러고 나가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잘 소통이 됩니까?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은혜의 세계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얘기가 ‘미쳤구나.’ 입니다. 바울이 ‘그래 우리 미친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아름다울 미에 친할 친 아름다운 예수에 미치면서 하나님과 더 친하게 사는 사람. 미친 사람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보면 세상 사람과 우리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뭘 몰라 우리는 그리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날 알고 난 주님을 안다. 이게 은혜 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원리들은 그렇게 세상과 어떻게 해서든지 조화를 찾아보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본받기보다 세상을 열심히 본받으려고 하려는 이유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간단히 얘기하면 불신앙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우리보고 어떻게 얘기했습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무슨 뜻입니까? 본받는다는 말이 헬라 원어 의미로 국화빵처럼 찍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로 하여금 이 세상이 너희를 틀 속에 집어넣어 찍어내지 못하도록 하라 라는 얘기입니다. 가족들의 각 관계 속에서는 우세한 가장 우등한 덕목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 주되고 우등한 덕목을 지키며 살 때 그 이외의 작은 덕목들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 우등한 덕목이 무시되면 다른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온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니 좋았더라. 왜 좋았습니까? 있어야 할 것들이 가장 좋은 자리에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것을 보며 ‘하나님이 좋았더라’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반드시 있어야할 상태가 아니라 잘못된 상태, 하나님이 의도하시지 않는 자리에 만약 놓여있어 달이 떠야하는데 해가 뜨고 빛을 비춰야하는데 갑자기 불을 꺼버리고 물이 바다로 모여야 하는데 산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의도에 반하여 일어나면 ‘좋았더라.’ 라고 말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탈해있으면 더러운 것이 되고 추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학생들을 데리고 필리핀 선교여행가서 바닷가에 가니까 큰 고기가 헤엄치며 지나갑니다. 정말 장관입니다. 근데 그 고기 중에서 큰 고기가 거기서 떼를 지어 헤엄쳐야합니다. 파란 바다위에서 배를 타고 밑을 들여다 볼 때 보기에 좋을까요, 나쁠까요? 생각만 해도 시원합니다. 그 고기 열 마리를 잡아다가 여기에서 펄떡펄떡 뛰어놀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러운 것입니다. 개구리가 풀숲에서 뛰어놀 때는 귀엽고 예쁩니다. 그게 교회에 뛰어다닌다하면 어떻겠습니까? 더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어떤 행위나 삶의 어떤 모습이 절대적으로 정죄 받느냐 안 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있어야할 자리에 놓여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신도이지만 그러나 그 자리에서 새로운 형제자매들을 둘러 앉혀놓고 내가 어떻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는지 이렇게 말했을 때는 아름답습니다. 어느 순간에 김 목사가 자리를 비웠다고 오늘은 내가 설교를 해야겠다고 올라가서 아래서 하던 이야기를 똑같이 하면 그것은 더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본적인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질서 속에 우등한 덕목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내가 남편에 대한 것은 복종입니다. 이 덕목이 무시되면 다른 면에서 아무리 능력이 많아서 남편을 먹여 살리고 남편의 배가 일 년에 몇 센치 씩 나오도록 요리를 잘 해줘도 그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 갖는 덕목은 당연히 사랑입니다. 또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덕목은 교훈입니다. 사랑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갖는 것은 배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덕목이 가장 우세한 덕목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우세한 덕목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불편하지 않게 살아가면 잘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 하는 것입니다. 평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얼마나 평등합니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성경은 오늘날 어줍지 않은 민주주의가 얘기하는 그런 평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고방식도 잘못된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살펴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볼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얼핏 눈에 끌리는 단어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을 하기 전에는 길거리에 스치며 지나가도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교회에서 한 지체로 한 설교자에게 설교를 들으며 목양을 받으며 살아갈 때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에게 복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이 남녀평등 그런 사상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지금 여기서 남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아닙니다. 여자들이여 난 모른다고 할지라도 남자들이면 복종하라 라고 말하지 않고 아내들이여 여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와 여자는 같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부르는 것입니다. 한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를 안 갖고 자유롭고 싶으면 결혼 안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종 할 이유가 없습니다. 좋으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여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부르고 있습니다. 즉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서 결혼을 하는 순간에 그는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서약 속에는 먼저 ‘그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겠나이다.’ 여기에 서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누구 양은 신랑 누구누구 군을 신랑으로 맞아들임에 있어서 라고 결혼 서약을 할 때 그것은 한 인격체인 그 남자에게 남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깊이 복종하며 살 것을 하나님 앞에 증인들 앞에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 교회 교육 문제가 시집 장가 다 가고 십년 이십년 다 산사람을 바꾸려고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가기 전에 앉혀놓고 말씀에 장작불을 떼 곰탕처럼 완전히 곤 다음에 시집장가를 보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자기 남편에게. 그가 순종하는 것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입니다. 남편과의 관계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의 경륜이 복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속에 펼쳐져있는 이 모든 가정 대부분의 비극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또 할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운전을 똑바로 해야지, 가정이란 차를 끌로 시궁창으로 가는데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수 없지 않냐는 것이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질서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를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자가 영적이 가장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의 질서는 온데 간데 없습니다. 그리고 질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 속에서 상식으로 만들어낸 질서지 신앙 안에서 세워진 성경적인 질서는 아닙니다. 요즘은 여전도회 통해서 남전도회를 만드는데 어느 교회도 남전도회를 먼저 만드는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인 통해서 침목을 하고 어느 교회는 아예 남편 초청 뷔페잔치를 만들어서 그 부인들이 남편 먹을 것 돈을 다 내서 그렇게 토요일 날 한번이라도 남편을 불러내보려고 합니다. 청교도들은 어떻겠습니까? 남편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했습니다. 남편을 통해서 부인을 만나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고 자녀들을 만나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고 이렇게 권면해주는 영적인 가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의 문제가 올바로 잡혀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느냐. 우선 남편들은 남편들대로 영적인 사람이 되고 좋은 신앙생활을 해서 신앙의 모본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되고 그것이 기본적인 전제이고 그런 가운데서 잃어버린 원리를 찾아야하는데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해주는가에 대한 반대가 아닙니다. 여기서 뭐라고 하냐 하면 복종하라고 하는데 이 복종하라는 말이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복종시킬 때 사용되는 헬라어 단어하고 똑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 언제 복종해야 합니까? 첫째 주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넘치게 주실 때 그때 복종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할 때만 복종해야 합니다. 맞습니까? 아닙니다. 곤고하거나 충만하거나 복종 못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문제지만 성경은 그렇게 복종하도록 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했는데 단순히 복종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 하듯? 여기서 여자들은 기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님이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조금 있다 기죽는 얘기가 또 나오는데 우선 여기서 첫 번째가 주께 하듯 하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예 대부분의 여성들은 예수를 믿어도 이 지점에서는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주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성취될 리가 없다고 믿는 말씀으로. 이렇게 내가 말을 하지만 사람들이 이것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알고 말씀 하신 것처럼 생각을 해서 그렇게 하면 좋다 그런 것이지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러한 원리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저는 수없는 가정을 심방 다녔어도 이 성경구절을 액자에 걸어놓은 가정은 한 가정도 못 봤습니다. 사람들은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 따로 나의 삶 따로 하나님 말씀 따로 내 가치관 따로 음정 따로 박자 따로 하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면전 앞에서 드리는 찬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복종입니다.
주께 하듯 하라 했으니 주께 하듯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뒤에서 설명을 합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니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니까 복종해야 할 이유를 말하기 전에 주께 하듯 하라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남녀 할 것 없이 아내나 남편 할 것 없이 아내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이고 남편이기 전에 또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중요한 신분은 아내와 남편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체입니다. 바울은 게바와 같이 아내 된 자매라고 했습니다. 아내도 넓은 의미로 자매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에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충만히 은혜를 주실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님께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충만한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임할 때 그때에 어떠한 태도로 주님께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은혜가 충만할 때 아침에 눈을 뜨면 누구 생각이 납니까? 주님이 떠오릅니다. 말하자면 삶의 모든 부분 속에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우리 함께 동침하자 그렇게 말했을 때에 그 방엔 진짜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즉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그러니까 신앙을 안 가진 그 여자 눈에는 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는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요셉은 하나님의 현전하심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면전에서 어떻게 범죄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 언제나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의식을 느끼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하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간증이라는 것을 우리가 듣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 정말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사람을 향하여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헌신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두어 사는 것입니다. 연애를 할 때는 상대방의 눈빛 하나에 천국에도 가고 지옥에도 떨어집니다.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재롱을 떨고 웃으면 갑자기 마음이 녹는 것처럼 즐겁고 열이라도 펄펄 나서 토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아이를 키우다가 엄마들이 아이와 함께 울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 모아진 것 이것이 주께 하는 삶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한 여성이 아내가 되어서 남편과 결혼을 하면 그의 모든 어떤 의미에서 삶의 목표, 삶의 이유,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이 한 남자에게 모두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TV에 나와서 교만이 얼굴에 뚝뚝 떨어집니다. 우리는요 삼년 전에 결혼했는데요 삼년에 한 번씩 만난대요. 남편은 남편의 일이 있고 우리는 각각 다른 세계에 살다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데 아이도 안 갖고 남편은 일본에 있고 자기는 한국에 있고 돌아다니다 스케줄이 맞으면 미국에서 만나서 하루 밤 같이자고 안녕하고 헤어지고 한 달 후에 일본에서 만나고 사흘만 있으면 너무나 불편해서 빨리 헤어지자고 하고 헤어진대요. 그게 자랑이라고 삼천만이 다 보는 TV에 나와서. 왜 그럽니까? 나는 TV에 나와서 서로 흉보는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하면 한 남자에게 삶의 꿈과 시선이 관심이 묶이게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가지 말아야합니다. 왜, 결혼이 그런 인격적인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결합 자체가 안 되어있는 속에서 복종이 나오니까 노예적인 복종밖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결합된 가운데 복종이 나와야지 그게 복종이지 인격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복종이 그게 참된 인격적인 복종일수가 있겠느냐 라는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안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내가 한사람의 인격체로서 나 나름대로의 삶을 가지고 살아가야지 남편 한사람에게 묶여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함으로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고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출발부터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야합니다. 왜 사람들이 이혼을 떡 먹듯 합니까. 우리나라에서 벌써 7쌍 중 1쌍은 이혼입니다. 미국의 경우는 더 심해서 아예 가정환경 조사서에 친엄마냐 친아빠냐 라고 묻는 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미 이제 그런 란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남편의 무능이나 아내의 무능이나 인내심의 부족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출발자체가 잘못된 꿈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여자임을 버리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려고 할 때 그것은 삶의 모든 꿈을 그 남자에게 묶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태어나기를 꿈꾸면서 결혼에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시집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정리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결국은 신앙적인 의미에서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 같은 동일한 의미에서 남편이 주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왜 그러면 그렇게 남편에게 복종해야하는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원래 우리들은 남편의 말을 고분고분 들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편이 워낙 강력한 집안. 그러니까 안 되면 전쟁을 해서라도 토벌을 하고야마는 집안. 그 집안에 들어가면 군기가 잡혀있습니다. 그런 집에서 잘 쓰는 말이, 여자가! 옛날에 유교 질서가 그런 질서이지 않습니까? 직장생활 하면서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직장생활 하는데 그럽니다. 김 선생님 남편 직장에 전화 좀 해주세요. 그걸 왜 내가 합니까? 아침에 벨이 여자가 울리는 것이 상서롭지 못하대요. 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냐. 그런 의식들이 사람들 속에 차있습니다. 집안에서 남편에게 고분고분하며 사는 집안을 보면 남편이 완력으로 꼼짝 못하게 휘두르는 집안 그런 집안의 여자가 남편에게 꽉 잡혀 삽니다. 그런데 얼마나 불행한가 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치고 가슴에 한이 맺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복종하고는 살아가는데 언제든지 이 속에서 한이 맺히는 것입니다. 한 인격을 비참하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남편이 아내를 워낙 잘 해줄 때입니다. 어렸을 때 공주병이 있던 사람이 시집가면 왕비 병으로 변합니다. 어렸을 때 왕자처럼 키운 아이들이 장가가서는 제왕 병이 드는 것입니다. 아내를 궁녀같이 다스리려고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런 식으로 자라 자기가 하고자하는 욕망에 거치는 것이라고는 하나 없이 어린 시절을 살아와서 그렇게 붕붕 띄워서 기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안 되는 것이 많구나 라는 것을 좌절하지 않을 정도 까지 겪으면서 자라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시집와서 봤는데 남편이 그렇게 해주면서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것은 오고가는 관계 속에서 싹트는 순종입니다. 문제는 언제든지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반대 급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조화가 오래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하고 쉽게 사라져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 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고 이해가 안 될까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무엇과 같으냐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라. 아주 간략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교회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정도는 깊이 알고 경험을 해야지만 아내에게 가서 내가 네 머리라고 말할 수 있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서는 생선의 머리 토막이나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아래 의미에서의 단순한 우열의 의미에서의 머리냐 가운데 토막이냐 꼬리냐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다 할 때 물론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다 그랬으니까 그리스도가 존귀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중요 합니까 몸인 교회가 더 중요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그럽니까? 해체시켜 놓으면 이미 인격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때 바울은 예수님을 본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핍박하니까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이게 주님이 교회의 머리시다 라고 얘기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개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대받는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곡해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라고 했을 때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교회가 갖는 관계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몸인 교회는 아주 세밀하게 머리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주님이 주일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부르셔서 예배하고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아멘으로 화답하고 주님은 우리의 찬송을 들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고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복종하고 우리는 간절히 탄원하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탄원을 듣고 그리고 그것을 긍휼히 여기며 그 탄원을 듣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응답해주시는 것,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존재하는 창조의 질서라는 사실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존재적인 가치로서 우등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는 것처럼 그렇게 남편에 의해서 한 가정이 다스려 나가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이 이것을 잘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범죄는 하와가 했는데 하나님은 누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까? 로마서는 하와가 분명히 범죄 했는데도 한 아담 두 번째 아담을 이야기하지 하와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안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남편은 목회자와 같은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행하며 남편으로서 올바르게 복종하는 아내, 사랑하는 남편 순종하는 자녀들 교훈으로 가르치는 부모들 이러한 관계들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을 남편에게 묻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다. 그리고 그 머리와 몸인 아내와 가정은 나뉘어 질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를 복종시키기 전에 먼저 잘 다스리는 일들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그 남편의 다스림에 복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스리는 것이 있으니까 복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다스리는 것이 있으니까 교회의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잘 다스려야합니다. 디모데 후서에 보면 교회에 중직자들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도 감독이나 장로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도 가정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잘 다스려야합니다. 요즘 여자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네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남편이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쳐야하는 신성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머리가 비어서 텅텅 비었습니다.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그럼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여 진리로 여러분의 마음과 머리를 가득 채우십시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지를 채우십시오. 그래서 제발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의 교훈으로 그리고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 한 교회는 성경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남편이 아내의 머리다.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지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다스림이 있고 복종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질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뭔데 나를 가르치냐 우리 엄마도 날 안 가르쳤는데 우리 아빠한테도 내가 안 배웠는데 네가 뭐냐? 네가 나보다 뭐가 잘났냐. 공부도 내가 더 많이 했지 얼굴도 내가 너보다 더 잘났지 태어난 건 여자로 태어난 것 밖에 없는데 네가 남자로서 지위가 높냐, 능력이 있냐 그렇게 나가면서 싸우는 것이 오늘날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이런 가정 속에 살아가면서 그렇게 남편에게 불복종하던 여자가 나와서 하나님 앞에 은혜는 많이 받고 기도는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여자가 믿음을 가지고 어떤 신앙생활 하느냐에 따라 남자의 구원이 왔다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와서 열심히 눈물콧물 흘리며 은혜 받고 남편이 주는 생활비에서 교회에 알게 모르게 헌금까지 하면서 돌아와서는 매일 불순종하면 정말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인생 살아가다가 뭔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이 맘에 안 들어서 주님 앞에 강하게 불평하고 변명하면서 주님이 앞에 계시다면 붙들고 한번 다투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 그것은 하나님 앞에 패역한 마음입니다. 그런 식으로 불복종하며 살아가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볼 때 베드로는 바울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잖아요, 왜냐하면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베드로서에는 부부간의 문제가 하나님에게 막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부부가 만났으면 결혼했으면 이것은 숙명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다 죽고 살면 다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기하면, 그럼 하나님도 포기해야합니다. 근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이미 아니까 죽으려면 무슨 일을 못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야하는데 그렇다면 먼저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임금 밑에서 궁녀로 시녀로 그렇게 복종하는 것보다 존경하는 내 남편 밑에서 복종하는 것이 낫다 그러는 것은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은 원리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내가 조금 덜 사랑스러워도 사랑하는 척 그렇게 하면서 다음에 마음이 좇아가기를 기다려야합니다. 남편이 존경스럽지 않아요? 그렇게 위대하고 존경스러우면 자기 차지가 됐겠습니까? 그러니까 존경스럽지 않아도 여기서 뭐라고 했냐면 존경하는 남편을 둔 아내들은 존경의 분량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 라고 하지 않고 아내들이여 모두 불러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 에베소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이미 2000년 전 이때에 가정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날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단은 가정의 기본적인 뿌리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파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팀라이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센프란시스코로 날라 가는데 기내식이 들어왔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같이 드시죠, 했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안 드시더랍니다. 왜 안 드시냐고 금식중이라고 목사님이 너무 반가워서 크리스챤이시군요. 아니요. 저는 사탄을 숭배하는 사탄교의 신자입니다. 왜 기도하냐 했더니 미국에 있는 모든 목회자의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서 화요일마다 금식한다고 합니다.
가정의 파괴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사이좋게 살다가 남편이 바람나서 가정이 파탄 납니까? 아내가 춤바람 나서 가정이 파탄됩니까? 그것은 믿는 자들 세계 속에서 흔치 않습니다.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군다나 열심히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없습니다. 먼저 관계에 금이 가는 일이 있습니다. 다른 데에 대해 눈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비교하게 된다는 것은 벌써 맘이 떠나간다는 얘기입니다. 열린 교회 열심히 다니고 은혜 받을 때는 이교회 밖에 없는 줄 압니다. 마음이 향하여 있으면 비교가 없습니다. 그다음엔 비교를 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에서는 남편의 머릿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내의 머릿속에 다른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부싸움을 해도 절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운명입니다. 이제는 물릴 수 없습니다. 죽기 전에는 물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볼 때마다 사람들 앞에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주님 말씀에 이혼하지 말라는 말만 없으면 벌써 내가 집어던졌을 텐데 내가 말씀을 붙들고... 그것은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런 정상적인 인격이 하나가 된 속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두 사람은 하나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보셨습니까? 이미 둘은 하나다. 어느 정도로 입니까? 나눌 수 가 없게끔 하나 되어버린 것입니다. 섞였습니다.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 하나된 것 속에 질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경륜하신 바는 남편이 아내와 및 자녀를 다스리면서 그렇게 가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손에 억지로 끌려 신앙생활을 하는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한은 자기 스스로 그 지위를 하나님 앞에 버리는 것입니다. 가정을 다스려가는데 있어서 신앙이 위에 있어서 신앙을 통해서 아내에게 호소하고 신앙을 통해서 자녀에게 호소해야하는데 신앙에 관해서 얘기만 나오면 남편은 할 말이 없습니다. 왜? 신앙생활을 잘 안하니까.. 그 속에서 어떻게 질서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세속적인 방법으로 질서를 잡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자가” 그런 세속적인 것 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 남편이 아내에게 존경받는다면 그것도 연구대상입니다. 절대 없습니다.
그렇게 가장들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남편을 가장으로 세우셔서 그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다스리면서 살아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왜 그러냐고 묻는 것은 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꼬리가 안 되고 머리가 되셨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정해놓으셨을 때에는 그 자리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좋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노예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편의 이야기라면 무조건 반기를 들고 보려는 그런 성품, 그리고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보려는 욕망, 이러한 것들을 성경은 오늘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나오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머리됨과 같으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라. 그러나 교회가 그러나라는 말은 헬라어의 알라인데 제가 보기에는 오직이라고 번역을 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하라 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부부는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군대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인격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한 몸이 되고 그 속에서 인격적인 결합체로서 살아가는데 그 속에서 지배하고 있는 가장 아내가 남편을 향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고 우등한 덕목이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성자 같은 남편하고 방금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아내가 살아간다면 아마 이런 일들이 가능할 것입니다. 남편이 성자 같아 보이고 이제 방금 회심했기 때문에 뭐든지 그 성자가 하는 말은 하나님 말씀처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관계는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쟁도 하게 되고 때로는 의견이 나뉘어서 합의를 봐야할 경우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을 여기에서 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 하나를 놓고 사립학교를 보낼 것인가 공립학교를 보낼 것인가, 상고를 보낼 것인가 인문고를 보낼 것인가, 대학을 보낼 것인가 취업을 시킬 것인가 다양한 문제들을 놓고 남편과 아내의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남편이 입에 떨어지면 그것이 끝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여자들인 아내의 마음속에 있는 경향성입니다. 범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입니다. 집안에 남편과 아내가 다투는 것을 지켜보면 고집을 안 써도 될 만한 일인데도 고집을 써서 관철시키려고 하는 가운데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뭔가 명백한 잘못한 주장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일단 순종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경향을 가지고 들어야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말을 하면 그것을 자기가 다시 해석해서 그중에서 원하는 것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반응을 통해 남편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런 경향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이 성경에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내 된 여러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묵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속에 남편의 말에 대해서 남편의 말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자가 없는 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경향이 여러분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교인으로서 주님께 갖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언제나 우리가 깊이 동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우리에게 좋은 일을 시킬 때는 아멘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특별한 뜻이 계셔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깊으신 뜻을 따라 우리에게 물이 필요한대도 광야를 걷게 하시고 어떤 때에는 들판을 지나야하는데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고 생수가 필요한데 쓴물을 보면서 뭔가를 생각나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범사에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남편은 예수그리스도처럼 완전히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남편들도 그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남편의 가르침에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누구에게 강력한 손해를 입히고 가정의 기본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그런 어떤 위험과 커다란 부담이 동반되지 않을 때는 순종하고 복종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칭찬 안하십니다. 그런 것들 그런 경향성을 놓고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삶에 자기도 모르는 암초로 작용을 해서 그것이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힘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가정의 모습을 새롭게 하나님 앞에 가꿔가야 합니다.
그 어머니 밑에서 그 아내 밑에서 애들이 뭘 보고 자라겠습니까.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남편을 존중하지 않는 아내 밑에서 보고 자란 것이 그것인데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유대인들 가정에서 유대인이 얼마나 혈통을 따지는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남편이 유대인이고 부인이 유대인이면 거기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유대인이고, 아내가 이방인이면 피로서는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유대인으로 처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인 여자가 이방인 남자가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은 유대인으로 처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교육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반말하고 심지어 욕설을 하고 그렇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사는 것은 여자로서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복종함이 없는 곳에서 자녀들이 정상적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작품입니다. 그런 기본적인 질서가 오늘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질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복종의 성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복종의 질이 어떤 것이냐를 우리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십일조도 하고 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하면서 제 마음은 지금 설교 끝나고 나서 오늘 밤에 영화구경 가고 당구도 치고 탁구도 치고 테니스도 치고 실컷 놀러 다닐 생각으로 가득 찬 가운데 입만 가지고 설교한다면 하나님이 그 설교를 받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설교자에게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복종이라는 것은 인격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그 복종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그렇게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깊이 존경합니까? 그렇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존경하는데 왜 신앙생활을 우리가 이렇게 밖에 못합니까? 말입니다. 다 말장난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내 된 자들이여 너희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이 신앙이 개판이고 정말 못 봐주겠는데요.’ ‘너는 복종이나 해라 남편 손은 내가 본다.’ 그리고 남편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환 논리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남편은 아내가 복종을 안 하니까 사랑할 수 없고 아내는 남편이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복종할 수 없고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이런 부끄러운 일들은 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어긋났으면 남편을 설득시켜야합니다. ‘여보, 내가 정말 다른 일들은 당신에게 순종 했는데 이 일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 이건 이렇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축복받는 가정이 될 수 없어.’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고 기도해야합니다. 우리 교회도 원리가 있습니다. 부부가 나오는데 남편이 신앙생활을 안 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남편의 동의 없이 아내가 이 교회에 나와서 등록하는 것 저는 돌려보냈습니다. 남편을 설득하시든지 그 교회에 출석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설득하고 깨닫게 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해서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다스려 나가시는 원리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차하게 다시는 말하지 마십시오. ‘남편이 존경 할만 해야지요. 우리 남편은 나보다 신앙이 두수 세수 아래에요. 내가 맨 날 남편을 가르쳐요.’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거리를 벌거벗고 활보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것입니다. 아내들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다짐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남편을 깊이 존경하기위해 애쓰고 그리고 단 마음으로 주님께 하듯이 그렇게 순종하며 살려고 애를 써보십시오. 아내의 행실로 남편이 존경받은 남편으로 변화되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시골 마을에 두 부부가 이사를 갔는데 돈도 별로 없고, 말주변도 별로 없고, 놀이를 잘 하는것도 아니고, 술을 잘 먹는 것도 아니고, 동네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바보취급 했습니다. 부인도 능력도 없는 남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아내의 마음이 변해서 그 남편을 교장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가보지도 않은 사람인데 말입니다. 일 년을 했더니 모든 사람들이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데 그 사람의 인품이 교장선생님의 인품으로 바뀌었습니다. 평생 같이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존경받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여러분들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남편을 바꾸어야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인 원리가 복종해야 합니다. 범사에 모든 주권을 가정을 다스리는 커다란 주권을 남자가 쥐고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결혼, 대소사의 커다란 문제는 남편이 결정을 하게끔 해줘야합니다. 남편은 위임할 수 있는 것은 과감히 위임해야 합니다.
제가 알던 동창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부인보고 손님이 오셨으니까 뭘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갔다 와서 잔돈을 갖다 주니까 즉시 일어나서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더니 뭘 적고있습니다. 왜 가계부를 적느냐고 하니 부인은 언니하고 계속 살았기 때문에 벌어서 언니한테 갖다 줬기 때문에 한 번도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고, 이 전도사님은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연로하신 어머님 모시고 본인이 다 살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월급을 타가지고 왔는데 이 부인이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주면서 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가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설교하고 복음 전할 사람이 그것을 적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가슴에 깊이 새겨지도록 면박을 주고 왔습니다. 한 달 뒤에 다시 만났는데 전도사님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아내가 살림을 맡은 후 가정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염려해야지 남자가 그런 것 하겠습니까. 위임하세요. 그리고 인격과 신앙으로 아내를 다스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직하고 솔직하게 남편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통장 해놓고 돈 문제 가지고 거짓말을 하고 이것은 인격이 안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남편의 품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남편이 그 아내를 다스려가면서 올바르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데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를 인간의 지나가는 만담거리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살든지 바꾸어야합니다. 절대 남편에게 존대 말 하라. 말부터 고쳐야합니다. 제가 이런 복음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난 다음에 목회를 하면서 여러 가지 느낀 점이 많고 성도들의 가정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서 자기는 모르는데 그 아내가 남편에게 반말하고 범사에 그를 꺾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역겹고 추한지 모릅니다. 그게 단지 그 남자가 못나 보이거나 아내가 인격이 부실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집안에 올바로 복음이 이해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것은 돌격 앞으로도 중요하지만 마귀가 우리의 뒤를 얽어매지 못하도록 해야지만 돌격 앞으로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중에 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 남편 된 자들에게 아내는 깊이 순복하라 복종하며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 복종이 단순히 형식이 아니라 영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복종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에 그런 경향성이 없고 범사에 남편을 무시하고 마구 대하려하는 그런 것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범사에 복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숟가락도 구별된 것을 갖다 놓으면서 자녀들에게도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가장으로서 한 가정의 목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앉는 자리도 그에게만 사용되는 물건도. 이런 것들이 범사에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교육을 이렇게 받았습니다. 헌금을 드리려고 일단 떼어놓은 돈은 쓰고 봉창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미 떼어놓은 그 순간에 구별됐다는 것입니다. 저도 다 지키지 못하고 살적이 많았지만 정신만은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가정을 다스리고 이끌어 가야할 가장이라는 것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 아내들이 세워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내 된 자들이 여러분 자신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의식하지 못하며 살았지만 남편인 사람들도 의식을 못하며 살았습니다. 일, 이년 산 것이 아니라 수십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고 살아왔으니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살펴보십시오. 그 속에 근본적으로 깨져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편의 말에 순복하며 복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므로 나는 투쟁하듯이 내 마음속에 있는 불순종의 요소들을 제하며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쥐꼬리만큼 복종하다가 즉시 틀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그까짓 인격으로 무슨 복종을 받으려고 하느냐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심령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영성이 높았을 것 같습니까, 열린 교회 교인들의 영성이 높을 것 같습니까? 요한이 목회하던 교회였고 나중에는 디모데가 목회하던 교회입니다. 그런 거장들이 목회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초보적인 이야기를 들어야할 필요가 있으니 영적인 삶에 얼마나 심각한 사각지대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존중하고, 순종하고, 복종하며 범사에 남편을 높이고 그렇게 그 발아래에서 안전하게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 갈 수 있게 되기까지 남편의 신앙을 위해서 깊이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매달릴 때 가정의 기본적인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