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태도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오늘부터 ‘삶을 바꾸는 태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영적이고 신령한 것이 우리의 인생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는지 나쁜 인상을 갖는지는 10초 안에 결정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인상이 좋지 않으면 일단 마이너스 점수를 줍니다. 그리고 의외로 좋은 점이 나오면 하나씩 하나씩 점수를 더 주는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인상이 좋았던 사람은 일단 좋게 보고 실망스럽고 나쁜 일들을 보게 되면 거기서 점수를 깎아 나갑니다. 저는 이러한 심리학자의 관찰이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수로 지내오면서 채점을 많이 해봤습니다. 신학과의 시험지는 대부분 단답형이 아니라 논술형입니다. 리포트를 채점하는 일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나름대로 리포트를 채점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채점하기 전에 점수는 생각하지 않고 리포트를 A그룹, B그룹, C그룹, D그룹으로 4개씩 분류를 합니다. 4개의 그룹은 인상의 순서입니다. 이렇게 분류한 후에 A그룹부터 점수를 매기기 시작합니다. 일단 A그룹에 올라온 리포트는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잘 못한 점을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점수를 깎아 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C그룹쯤 내려오면 별로 인상이 안 좋은 리포트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특별히 잘한 것이 있는지 봅니다. 글씨가 삐뚤삐뚤하고 후져도 일단 한번 읽어봅니다. 좋은 점이 있으면 C에서 B로 올려 줍니다. 그런데 채점을 해 놓고 보면 A에서 B로 내려가는 것도 몇 장 안 되고, B에서 A로 올라가는 것도 몇 장 안 됩니다. 더군다나 C에서 A로 올라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역시 그렇습니다. 신령하고 영적인 것들은 바탕에 깔려있지만 모든 사람이 신령하고 영적인 것들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목회사역은 신령하고 영적인 것들을 중요하게 볼지 모르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채용할 때, 저는 설교나 말씀에 깊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보다 운전을 잘 하고 말을 잘 듣는 싹싹한 사람이 우선적으로 대우를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목회자를 채용할 때 특히 전도사들에게 신령하고 영적인 것에 큰 기대를 갖고 채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의 밑바탕입니다. 그 바탕 위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교제할 때에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도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을 다시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대부분 한 시간 안에 결정합니다. ‘여기서 이 사람과의 인연은 끝이었으면 좋겠다. 매우 피할 수 없는 사정이 발생하지 않는 한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을 결정하게 하는 요인은 외모부터 시작해서 많이 있습니다. 어떤 독실한 젊은 그리스도인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면접관이 “자네는 왜 복장을 그렇게 하고 왔나?”라고 물으니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면접관은 “너희 하나님은 그렇지만 우리 회사는 외모도 보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저는 외모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정치인들을 보면 ‘저 사람은 정치를 할 수 있겠다. 저 사람은 능력과는 상관없이 사람에게 호감을 못 주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정치인의 외보를 보고 인상이 좋지 않으면 웬만해서 뽑지 않습니다.
또한 말은 외모와 함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사회에서 꽤 놓은 지위에 있는 여성분과 공적인 일로 우연히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여성분이 “목사님. 저는 일평생 사람들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명예나 지위에 대한 살았는데 이번에 제가 사장이 되기 위해서 경쟁이 붙었을 때 보니까 깜짝 놀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왜요?” 하고 물었습니다. 자기는 항상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데 자기를 험담하는 사람이 많고 대적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저는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저의 삶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라고 그분은 말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저는 직장에서 주님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불의를 행하지 않고 이익에 눈뜨지 않고 성실하게 주께 하듯 했는데 올바르게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저한테 말로 섭섭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당신 성격에 그랬을 것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것 말고도 원인이 하나 더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서 “당신이 워낙 신앙이 올곧으니까 타협하지 않고 똑바로 해보려고 하다가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았을까요?” 라고 위로의 말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요즘은 다르겠지만 저는 대학 교수 채용 방식을 알고 놀랐습니다. 교수들과 어른들, 이사장님도 있는 곳에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교수들에게 채용할 교수들을 추천을 하라고 해서 뽑힌 이력서를 보며 이야기합니다. “아무개는 서울대를 나와서 미국 어디에서 공부하고 영국에서 학위를 받았는데 정말 젊은 사람으로 놓치기 아까울 정도로 실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하고 다들 고개를 끄떡입니다. 옆에서 연세든 선배 교수님이 “사람 좋아요. 정말 공부 잘하고 가르치는 것도 똑 소리 납니다. 아마 여러 학교에서 데려가려고 그럴 겁니다.”라고 말하고 마지막 한마디 덧붙입니다. “근데 좀 싸가지가 없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자. 없었던 일로 합시다.” 그런 평가는 살아오면서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별로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 친구는 싸가지가 없어요.” 라는 것은 90%가 말에 대한 것입니다. 말없이 가만히만 있어도 “그 친구 무뚝뚝해요.” 라고 이야기하지 “싸가지가 없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태도의 90%가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사회가 특히 사학에서 이렇게 돌아가는 거구나.’ 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아마 누군가가 서로 묻고 답변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물음이 아니라 무엇인가 문제가 생겨서 약간은 언쟁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이런 광경을 한두 번 보았겠습니까? 가까이는 자기 집안에서부터 시작해서 백성들이 살아가는 수많은 모습을 봤을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해도” 한 사람이 엄청 화가 나서 지금 따지고 있는 중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반대로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격동은 무언가가 출렁거리면서 더 세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가 난 사람이 마음이 상해서 따질 때 멱살을 잡고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확 쏟아 붓는 태도로 대답을 하면 노가 격동을 합니다.
이번에도 보니까 어떤 사람이 여자 친구 앞에서 친구의 외모를 가지고 약간 비아냥거렸습니다. 죽여 버렸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가끔 한인 교회를 가보면 외국인인데 남편이라서 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통역기를 끼고 예배를 드립니다. 오래 예배를 드리면 친숙해지니까 밥 먹으면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 때 경악하고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쉽게 남의 외모에 대해서 비하하면서 발언하는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고 나중에는 분노합니다. 이렇듯 말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말은 평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 흔들어 놓고 약간 흔들려서 진정될 수 있는 마음을 출렁거리게 해서 살인까지 하게 만듭니다. 사회에서 누군가가 “싸가지가 없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90%는 그 사람이 했던 말이 원인입니다.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런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왜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할까요? 성숙한 사람일수록 마음에서 시작된 언어를 이성에서 거르고 말을 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언어가 나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말이 마음속에서 생겨나지 않습니까? 누구한테 엄청나게 화가 나거나 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언어가 막 쏟아져 나오지 않습니까? 밤새도록 ‘이렇게 상대가 말하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 할 거야. 또 이렇게 변명하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 할 거야.’ 마음속에서 항상 자기가 논리적으로 이깁니다. 그렇게 반복할수록 마음속에서 격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꽉 차게 되면 마치 똥이 창자 안에서 꽉 찬 것처럼 쏟아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집니다. 어느 한 순간에 터지면서 입 안에서 오물을 쏟아내듯 막된 말을 쏟아냅니다. 사람이 일단 배설을 하고 나면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을 수 없듯이 인간의 말도 그렇습니다. 그 결과는 어려운 일들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는 공통된 착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마음이 상했는데 그런 사람에게도 몇 사람은 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친한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전반적인 인간성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기 때문에 잘 안 고쳐집니다. 솔직히 “당신. 이런 태도가 잘못 됐어.”라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 정도로 가까운 사람도 많지 않고 좀처럼 이야기 해주지 않습니다. 나쁜 습관이 생기면 소위 마음에 ‘프로네마’, ‘틀’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면서 살게 되며 가는 곳마다 인간관계를 다 파괴합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상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이성에서 통제된 언어가 나옵니다. 어떤 말을 할 때, 성숙한 사람은 이 말이 저 사람에게 마음에 상처나 격려를 주는지 또는 이 말이 퍼졌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들을 이성에서 통제해서 말합니다. 대답하기를 천천히 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렇게 말이 걸러져서 나와야 합니다.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훨씬 어려운 것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안하는 것입니다. 더 어려운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완곡한 말로 돌려서 기분 상하지 않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자들에게 익숙한 기술입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의 실수가 많은 사람이 있고 비교적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잘 절제하고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었을 때 격려 받고 기분이 좋고 함께 계속 있고 싶고 관계를 맺고 싶게 만드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계속해서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왕따 시키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가 상을 당하면 조문객이 별로 없을 것이며, 이사를 가도 짐을 날라주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해도 따라가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외로워집니다. 인간의 삶의 재미는 주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교통하고,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또 나와 교통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기쁨일 때 발견됩니다. 우리는 삶이 어려운 사람들을 격려하고 곤궁한 사람들을 돕고 아픈 사람들에게 위로를 하며 남을 배려하는 삶의 습관이 몸에 배서 삶 속에 흘러야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 약간 오지랖이 넓어 보일 정도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베풂의 삶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이 분노를 유순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분노를 격동시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옛말에 남자를 판단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신장과 말과 글을 보면서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시대가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말과 글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 중에 하나는 사랑에서 우러나온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백성들을 명백하게 그릇된 길로 이끄는 외식하던 종교지도자들을 공격했던 언어를 빼고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그야말로 ‘은쟁반에 담긴 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대사를 쭉 읽어보면 예수님은 여인과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여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간음현장에서 잡혀왔으니까 변명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아무 것에 대해서도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간 다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라고 말씀하십니다. 희랍어로 읽으면 따뜻한 어투로 나옵니다. 주님은 돌멩이 들고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쳐라” 그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똑같은 죄인이다. 너희들은 잘한 게 뭐가 있냐?” 이렇게 말하지 않으시고 아주 부드러운 어투로 그들 스스로 양심에 깊은 가책을 받게 해서 돌을 놓고 떠나게 하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났을 때 예수님과 나눈 대화 속에서 어떠한 상처라도 받았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돌멩이를 내려두고 떠나간 수많은 유대인들 중에 자기 스스로 부끄러웠지만 그 말에 모욕을 느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화법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