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에서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집에 모인 사람들(시107:2-5) 2000.10.15 주일오후 1
2. 주께서 성전에 두신 사람(시65:4) 2000.10.22 주일오후 7
3. 성전에서의 하루가 천 날보다 좋은 것은(시84:10-11上) 2000.10.29 주일오후 19
4. 성전에서 힘을 얻는 사람 (시84:5) 2000.11.5 주일오후 27
5. 성전에서 누리는두 가지 행복(시42:4) 2000.11.12 주일오후 31
6.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시107:20-21) 2000.11.19 주일오후 40
1.하나님의 집에 모인 사람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시107:2-5)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삶의 여러 상황에서 만나게 하십니다. 열사람이면 열사람의 지문이 다르듯이 백사람이면 백사람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된 간증이 동일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만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만났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다양하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홀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어디서 주님이 그들을 만나 주셨든지간에 그들을 보내어 한 교회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법칙이기도 합니다. 오늘 시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구속받은 자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은 첫째는 하나님이 대적으로 손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또한 함께 모으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처럼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는 말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애굽에서 구속을 경험하고 경험한 그들이 예외없이 한 무리가 되어서 광야의 길로 들어서 가나안에 이르기 까지 광야의 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 각자가 예전에는 하나님을 모르던 자요. 원수와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지만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셨고 만나주신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로 모으셨습니다. 넓게보면 이것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일 수도 있고 좁게보면은 오늘 여기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열린 교회 식구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 속에서 주님을 만났고 어떤 사람은 처음 주님을 만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새롭게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 교회 오기도 했고 교회라고는 발도 한번 들여내 보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전도를 받고 이 교회에 한 가족이 된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이교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곳에 와서 처음 발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현주소가 어떠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의 현주소에서 어떻게 만나주셨던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난 곳이 다양한데도 그 다양한 처소에 그들을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한 교회 울타리 안으로 모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돌보시는 것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공동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동일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고 당신을 자랑하고 그리고 어두움 가운데서 기이한 빛으로 자신들을 불러들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한 교회 안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삶의 상황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을 향한 믿음이 가득할 때에는 마치 우리가 신앙의 마지막까지 도달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한 교회에 와서 보다더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그 곳에서 무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속에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패역과 그리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기적인 본성과 사악학 욕망들을 지적할 때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거룩한 교제에 이르기에 한없이 부족한 것이 많은 미완성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보다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면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지만 사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적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수고와 그리고 사랑, 인내,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전한 우리 자신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교회 속에서 우리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들이 양육받아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다더 훈련 받아져야하며 우리 안에 있는 내부적인 더러운 삶의 동기와 찌끼들이 정결케 되어지는 내적인 갱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발견하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필요성은 이처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데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을 향한 주체할수 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터전들을 제시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고 비할대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고 그 은총에 빛진 자된 그 마음을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에 그 하나님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우리처럼 핍절한 영혼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던 영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헌신적인 섬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비단 교회 안에서만 이런 섬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는 더 많은 핍절한 영혼들과 목자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수많은 지체들이 하나님을 먼저 믿고 그 사랑을 안 우리들의 섬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완전에 이르기를 사모하는 신자들에도 필요하고 아직까지도 누군가의 도음을 필요로하는 많이 불완전한 신자들에게는 더더욱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성도를 섬기면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며 일평생을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도성인신의 모습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그를 다듬고 고치고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지속적인 성화의 경험없이는 결코 그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될수 없습니다. 최근 제가 미국에서 부쳐온 책을 보니까 아주 훌륭한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노 홀리네스 노 히븐 거룩이 없이는 천국도 없습니다. 이 사랑의 신앙이 어디에서 신앙이 들어갔던지 간에 신앙만 들어가면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에요. 교회에서 정식으로 신앙을 배우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목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목양을 받기도 하고 또 눈물어린 사랑으로 성도들을 목양해보고 무릎을 꿇고 자기보다 연약한 지체들을 섬겨보고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지체들의 눈물겨운 섬김을 받으면서 겸손이 무엇이고 섬김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목양과 질서가 무엇인지를 배우면서 신앙을 습득한 사람들은 정말 균형잡힌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속에서 그는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요. 그래서 그는 늘 거룩 속에서 훈련받고 거룩을 사모하고 거룩한 성품에 빛을 받으면서 살기 때문에 그의 마음 속에 항상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나라를 스스로 파수하면서 살아가는지 방법을 배워 나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되는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을 모으셨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지금 1절에서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하나님의 그 인자 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자기들을 구속해 주시고 또 자기들을 모아주셔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맛보게 하시고 자기들을 다스려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면서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그렇게 깊은 감격 속에서 찬송하게 될 때에 그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백성들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찬송하고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가슴벅찬 감격을 지금 누리고 있지만 그러나 예전에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4절과 5절에서 말해주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었냐 하면은 그들은 사막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었어요. 물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건조한 사막, 뜨거운 태양이 내리쪼이고 목이 갈하여 더 이상 광야의 길을 걸을수가 없을 것 같은 그 사막에서 가고자 하는 목적지라고 분명하게 알면 이를 악물고 그 광야 사막의 길을 지날텐데 길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목적지는 원래 있었는데 그 목적지가 어디로 가야할지 자기의 가야할바를 알지못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갈바를 알지못하고 방황하는 장소는 물이 흐르고 꽃피고 새들이 노래하고 숲이 우거져서 그져 갈길을 몰라도 무작정 그 속에서 먹고 마시면서 쉬면서 갈길을 궁리해도 좋은 환경이 아니라. 오늘 하루나 혹은 이틀더 무리한 행군이 계속되면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 모래 바람이 이는 사막, 그 벌판에서 갈길을 잃은채 나그네가 되어서 숨을 거둘지도 모르는 그런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한없이 노래하고 찬송하는 여러분들이 사실은 예전에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막과 같은 벌판에서 갈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더이상 걸어갈수도 없고 주저 앉은수도 없는 그런 상황속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그 광야에서 십자가 그늘을 만나게 하시고 그 그늘에서 쉼을 얻게 하셨습니다 목적을 잃었던 인생의 길에 어디로 가야할지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셨고 마실 물이 없어 기갈하며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죽어가던 우리들을 십자가 아래서 쏟아지는 거룩한 은혜의 생수를 먹고 소생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들을 그 사막과 같은 방황의 길에서 한사람 한사람을 건져 이만큼이나마 정착된 교회생활, 정착된 인생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에게 모든 비극과 슬픔, 아픔과 고통이 모두 종식된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이 충만해지고 주님의 그 거룩한 사랑속에 우리들이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육체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고 여전히 죄 많은 세상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에요. 경건한 자들은 너무나 경건하기 때문에 불경건한 세상이 주는 죄와 유혹의 그림자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경건한 고통을 받습니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좌와 유혹에 시달리면서 그 댓가로 인해서 고통과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차피 죄와 죽음과 고통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믿음의 성도들은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사명을 주셔서 그 은혜대로 이 세상에서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게 변해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비할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과 아픔이 아직 남아있죠.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더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항상 충만하게 살지못할 때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그 광야 다시 그 모래 바람이 이는 그 사막, 다시 그 목표를 잃고 뜨거운 사막의 태양아래서 신음하던 그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아직까지도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수 많은 사람들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고통하며 영혼의 기갈을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사막 그 위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삶을 오늘도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며 고독과 그리고 절망과 싸우면서 혹은 그 절망이 절망인지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비참하게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이제 하나님의 참사랑 깨닫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많은 방황이 있었지만 이 기독교의 신앙의 닻을 내리고 인생의 모든 방황을 종식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모습에 불만족 스럽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다시는 그 불신 세계로 돌아갈수 없다. 라고 하는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수 없다이거죠. 이미 신앙의 발을 들여놓았으면서도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혹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줘도 우리 안에 있는 견고한 패역 때문에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맛보고 누리지 못하고 죄와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 앉아서 쇠사슬에 매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선명한 인도 속에서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왔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지체들이 더 이상 신앙의 방황을 하지 않기를 결심하고 그리고 신앙의 방황을 이 교회에서 종식시키고 싶은 사모함들을 갖게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누가 한 일입니까?
두 번째로 또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할 성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에서 편안히 쉴지, 쉼이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난을 받고 목적을 잃고 방황할 뿐 아니라. 이제 인생은 간절히 쉼을 원합니다. 쉼을 원해요. 저도 굉장히 체질이 강한 사람인데 수면 부족이 누적이 되고나면 반드시 몸에 열이나고 편도선이 돋고 이상이 오기 시작해요. 그러니까는 제일 좋은 약은 잠자야 할 그 시간에 깊이 잠들어서 골아 떨어져서 피로를 확 풀어야됩니다. 그래야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날 때 완전히 새록한 정신이 들어요. 며칠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서 숙면을 못하면서 누적이 되고나면 그 다음에는 즉시 온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요. 우리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안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의 품에 푹 안겨서 그 주님의 품에서 깊이 쉬는 영혼의 안식을 우리들이 종종경험하지 않으면은 우리가 아무리 험난한 길을 걸어오면서 신앙을 다지면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다시 주저앉기 십상이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기억해야되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적인 쉼이에요. 그래서 교회 이렇게 등록해서 너무 곤고한 세월을 보낸사람들에게 등록면담 할때에 내가 그런 얘기를 해요. 심방갔을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음 쉼이다. 좀 쉬어라.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거기에서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다 맡기는 그것이 쉼이에요. 그렇게 쉬고나면 정말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어요. 이런 놀라운 쉼을 누가 주십니까? 이런 놀라운 쉼을 누가 주십니까?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말하지를 심히 피곤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굶주림과 배고픔으로 깊이 지쳐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한사람 한사람 주님을 만나게 하셔서 이 세상의 육신적인 즐거움과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재물과 세상에서의 모든 성공을 가지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저히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던 그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경험하게되니까 사실은 자신이 이렇게 핍절하게 고통한 것이 사실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거에요. 어떤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내 영혼의 곤고함과 피곤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배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깊이 마시고 해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거에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불러 모으셔서 굶주린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먹이시고 기갈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먹여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 핍절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거에요.
이 일들을 누가 하셨습니까? 이 일들을 행한 것은 어떤 사람, 어떤 훌륭한 사람, 어떤 일군 그리고 나를 전도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행하신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에요.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단지 그 일의 도구로 쓰여졌을 뿐이지 우리에게 그런 사막에서의 방황을 종식시키시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거할 성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시고 우리의 갈급하고 그리고 굶주린 우리의 영혼을 진리의 말씀과 은혜의 물로 만족하게 하신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에요. 그래서 오늘 시인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는데 이 일은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에요. 누군가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는거에요.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들이냐하면은 하나님의 교회에 소속된 지체들이에요. 교회에 소속되 지체들,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가 아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었을 거에요. 아마 어쩌면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부흥사가 되어서 어쩌다가 한번씩 스치다가 만날수는 있었겠죠. 그러나 교회가 아니었으면 만날수도 없죠. 교회가 아니었으면 여러분들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여러분들을 붙들고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쉼과 그리고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고 견고하게 뿌리 내려서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주는 중보 기도의 사람들도 아마 없었을 것이에요. 여러분들의 불규칙한 교회 생활을 챙기면서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고 권면하고 그리고 교훈하고 가르치고 깨우치면서 늘 흔들리기 쉬운 여러분들을 굳게 붙들어 주어서 하나님 앞에 살게하시는 이런 도움을 여러분들이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의 교회 수양관이 벌써 세워진지 한참되었어요. 바깥에 보시죠. 커다란 나무들 주위에 아직까지도 부목을 대었습니다. 몇 년이나 더 댈지모르겠어요. 왜 심겨진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불완전하니까 뿌리를 완전히 내릴 때까지 여러개의 나무들을 묶어서 그래서 그 나무들을 지탱할수 있게끔 만들어주는거에요. 뿌리가 흔들리지 말도록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서 깜짝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될탠데 그것은 뭐냐하면은 여러분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종노릇했다는 것입니다. 눈물 흘리고 여러분이 상상도 할수 없는 사람들,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각했던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섬기고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들을 도왔고 그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만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됐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거죠. 그것을 보면은 결국은 하나님이 홀로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이 일들을 행하신다. 이거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 사막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그리고 안식을 얻을 성을 주시고 그리고 굶주리고 목말른 자들이 해갈을 얻어서 이처럼 하나님 앞에 안정된 삶을 살면서 주님을 찬송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은혜를 우리들이 받았는데 이런 큰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장 후륭하게 섬기는 영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뭐냐하면은 교회에요. 교회. 자기가 그렇게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방황을 끝내고 쉼을 얻고 그리고 핍절한 상태에서 벋어나서 하나님의 집에 심기운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서 열매를 맺게된 것 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섬김을 필요로해요.
그래서 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절대로 우습게 생각하면 안되요. 눈에 보이는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싸고 있는 아주 중요한 껍질이에요. 껍질이에요. 그래서 물건이 포장이 얼마나 견고하고 아름답게 되었는가를 보면 그 포장 속에 들어있는 물건의 중요성을 감지할수 있어요. 그죠. 보석과 같이 혹은 깨어지기 쉬운 유리 그릇과 같이 소중한 것들은 단단하고 미려한 포장으로 쌓여있어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우리에게 소중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보이지 않는 교회를 싸고 있는 껍질인 이 보이는 교회가 건강하고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와 같은 방황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우리와 같이 유리하는 사람들을 건져내어서 쉼을 주고 안식을 주고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줄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될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준비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어 이제껏까지 걸어오게 하셨고 그리고 이 교회라는 껍질이 우리를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신앙에 정착해서 살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도구요. 껍질이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내게 하나님이 배풀어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생애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한번 이 교회를 잘 섬기고 그래서 이 교회가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죽은 후에도 우리 처럼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방황하고 쉴곳을 얻지못해 유리하는 수 많은 지친 영혼들을 건져내기에 훌륭한 도구들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세우질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성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다가 죽는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생을 섬기고 마지막에 그 곳에서 숨을 거두는 성도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세가 드셔서 젊은이들 한테는 내가 그런 소리 별로 안해요. 그런데 연세 드셔서 교회로 오시는 분에게 심방가서는 제가 하는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항상 그거에요. 자 이제 이 교회가 우리 마지막이 됩시다. 나는 당신의 마지막 목사가되고. 당신은 나의 마지막 양때 그것은 아니지 그것은 그렇게하면 안되죠. 내가 당신의 마지막 목사가 됩시다. 내가 먼저 죽으면 당신이 눈 감기고 당신이 먼저 죽으면 내가 품안에 안고 마지막으로 축복하리이다. 이제는 정말 우리들이 모든 힘과 마음과 뜻을 모아서 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함께 아름답게 건축되어가서 언제든지 이 교회가 우리처럼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도구로 쓰여지기에 유능한 도구들이 되도록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될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2.주께서 성전에 두신 사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다윗이 쓴 시편 가운데 성전의 아름다움과 그 성전에서 맛보는 성도의 행복에 대해서 그리고 거기에서 마주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노래한 시가 굉장히 많습니다.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윗이 지은 시 가운데 하나님의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가 많다고 하는 것은 그의 정신 세계 속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성전과 관계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긴 많은 생각이 많은 글을 만들어 냅니다. 시인인 이 다윗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깊이 경험하고 그 은혜 속에서 산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탁월하고 거룩한 그 성품을 경험한 이 다윗의 시 속에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사랑이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점에 있어서도 항상 우리는 극단적인 신앙들을 조심해야합니다. 사실 저는 최근에 한20년정도 사이에 한국교회에서 번져가고 있는 사상중에 하나는 무교회주의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단 최근에 한20여년 동안에 한국교회에 조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렇게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번져가는 무교회주의적인 사상은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예전에 예전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로 소수의 무교회주의 자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사상과 사고처럼 그렇게 체계를 갖추지 않았을 뿐이지 상당히 무교회주의적인 그런 상고방식들이 굉장히 많이 있다는것이죠. 그런데 이것도 가만히 따져보면은 사실 하나의 어떤 교회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반동이었어요. 그러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반동이었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이냐 우리는 50년대 60년대 이후로 교회가 계속 급성장을 하면서 사실 성전 지상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사실 많이 빠져있었거든요. 오늘 오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복음으로서 성도들이 깊이 깨뜨려지고 그 복음으로서 성경 전체의 사상을 균형있게 받아들이는 신앙의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개교회주의적인 성향을 띨수 밖에 없었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사실 보이지 않는 교회보다 훨씬 더 강조 함으로써 교회는 물질주의적인 그런 노선을 상당히 많이 밞게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되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는 선교적인 상황도 상당히 많이 가세를 했습니다. 무슨 의미이냐하면은 60년대 이후로 일어났던 이 부흥운동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유입되어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계속해서 공간의 수효가 늘어났어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교회를 더 넓게 짓고 더 크게 지어야될 필요들이 생겨나게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그리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헌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곧 이 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그런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죠. 뭐 사람들이 오니까 어쩔수 없이 교회가 크게 지어져야 되었던 것 만은 틀림이 없고 또 그것이 뭐 불가피한 일이었다고는 생각이 되지만은 그러나 항상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 일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비정상 적으로 확대해서 성도들을 가르쳐놓으면은 그것이 반드시 다른 신앙의 여러가지 측면들과 충돌을 일으켜요. 그래서 언젠가는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져들게되고 균형을 잃게되는위험들이 있다이거죠. 그러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이 신앙의 지식의 틀들이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이거죠. 그리고 그 상황상황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임무와 사명들을 생각하면서 기독교의 진리체계 그 자체를 상황의 필요에 의해서 변칙적으로 그렇게 확대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갈수 있는 그러한 말하자면은 신앙적인 지도가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 가운데서 엄밀하게 말하면은 그런 가운데서 이제 개교회주의적인 그런 이기적인 개교회주의들이 사실 굉장히 많이 팽배하게되었고 그러면서 엄밀하게 말하면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비합리적인 많은 일들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신자들이 있었다.이거죠. 그러면서 인제 사실 80년대 이후를 접어들면서 사회문제에대한 관심들이 많이 대두되게 되면서 교회 자체에 대한 어떤 반성들이 많이 있게 된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그 다음에 붉어져 나오는 반작용들은 뭐냐하면은 이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라는 것이 진짜 눈에 보이는 교회가 진짜교회냐? 라고 하는 반성들이죠.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제 기존의 7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교회 70년대 초반 그 이전까지만해도 신앙하면은 교회를 중심으로만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교회가 성도들의 어떤 영적인 필요성들을 충분히 체워주지 못하니까 소위 얘기하는 O.C.M운동들이 70년대 후반부터 시작을해서 우우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한거에요. 아우사이드 처치 무브먼트라 그래서 교회밖에 교회가 아닌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회원들인 사람들을 모아서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하는 그런 단체들이 많이 생겨나게된거죠. 그런 속에서 그래도 생각이 있는 단체들은 교회가 그것을 못하니까 사실 그런 것들이 생겨나잖아요. 교회가 잘하면 그런 필요성들은 줄어들죠. 그런데 교회에 와서 영적인 기갈을 체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일날은 그저 자기의 어떤 종교적인 호적등본이 되있다고 말할수 있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만되면 선교단체로 무슨 또 개별적인 성경 공부로 다 흩어져서 각기 평일에 모임을 가지면서 거기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또 거기에서 말씀의훈련을 받고 하는거에요. 그런데 사실 교회에는 하나의 의식적으로 오는거고 거기에서 사실 영적인 어떤 필요들을 많이 체우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이거죠.
그런데 이렇게 될 경우 인제 굉장히 뒤틀린 신앙생활이 되게되는거죠. 영적인 필요는 교회 밖에서 체우고 교회는 영적인 필요도 체워지지 않는데 출석을해야되니까 이중적인 교회생활이 되는거죠. 이중생활이 되는거죠.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많은 관심들은 교회보다는 사실은 자신의 영혼의 필요를 체워주는 그 곳에 더 많이 실재적인 관심이 가게되는 거거든요. 오전에 말씀드렸듯이 진정한 교회의 공동체성은 제도의 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는 그 곳에 자신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체의식이 생겨나는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중적인 교회생활이 생겨나게되는거죠. 그러면서 이제 쉽게 얘기하면은 교회 그 자체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눈에 보이는 교회자체에대한 격렬한 무관심들이 생겨나게되었어요. 그런 것들이 생겨나게된거죠. 그렇다고 해서 제 논리는 그러니까 교회 밖에의 그런 운동들은 다 모두 뿌리 뽑아야된다는 그런 것은 아니에요. 교회가 그런 것들을 회복할때까지는 비정상적이기는 하지만은 그런 것들이 사실 필요하죠. 어쩔수 없잖아요. 교회에서 그런거 어쩔수 없잖아요. 그죠. 그러니까는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하게되는거죠. 그 가치 문제를 나는 얘기할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자기가 몸담은 그 교회가 영적생활의 중심지이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훈련받는 본거지가 되고 그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사귀면서 살아가는 그 코이노니아의 삶이 자신의 생활에 기쁨이되고, 그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합일된 것이 그것이 정상적인 교회생활이라이거죠.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깨지게되는거죠.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인제 O.C.M에 대해서 그의 가치 판단을 내가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여튼 현실적으로 그런 상황이 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상황이 이제 결국 무엇을 촉진하게 되었느냐하면은 그 이전에 교회에 대해서 지나친 그런 것을 강요한 것 (저는 실지로 들었는데 어렸을 때 한 20여년전 얘기인데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교회를 자기가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들이 아파서 약을 사러 가본적은 별로 없지만은 교회 나무가 죽어갈 때에 약을사러 간적은 있다고 그런데 사실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 진진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그런 식의 삶이 신앙인 것처럼 성도들에게 그렇게 강요되었다는거죠. 무슨 말씀인지아세요. 또 너무 반대인사람도 있어요. 미국에서 어느 목사님을 초청을 했는데 일주일을 집회를하기로 하고 모셔왔는데 이틀째 되었는데 이제 끝내고 가야되겠데요. 그레서 주체측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수백만원을 들여가지고 초청을 했는데 이틀째, 삼일째 하는데 왜그러느냐 그러니까 지금 미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 부인이 아파서 누웠다 그러더래요. 아픈데 설마 죽겠어요. 그런데 자기는 이 교회보다 가정이 훨씬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 집회를 하는거 보다 자기는 가서 자기 부인 그 아픈 것을 이렇게 뭐 얼마나 고뿔이 걸렸는지 뭐가 걸렸는지 모르지만은 진진하게 이야기해요. 싫어해요. 자기에게는 교회보다 가정이 훨씬더 중요하다 그러면서 가는거에요. 이것도 좀 문제가 있고 저것도 좀 문제가 있죠. 당장 지금 내일이면 죽는다면 모르지만은 그러면 좀더 며칠 아파서 누워있어라그러지 여기 다하고 믿음으로 가면되지. 말이지. 그러니 뭐 주체측은 해놓고 강사가 가버리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비행기타고 가버렸어요. 자기는 항상 그렇게 산다는거죠. 그게 철학이라고 하는데 누가 말려요. 할수없지)
그러니까 그런거 그런 뭔가 비정상적인 균형을 잃어버린 것들이 신앙인 것처럼 성도들에게 굉장히 강조된거에요. 강조된거란 말이죠. 교회에서 와라. 그러면은 회사에서 거짓말을 치고 도망을나와도 오는 것이 믿음인것처럼 말이죠. 그런거에요. 이런 것들이 가득하게되면서 이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그래 그렇게 해서 교회에서 성도들의 헌신을 요구한 결과 결국은 교회가 우리 자신의 신앙적인 삶을 이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붙들어줄수 있었느냐 우리에게 무엇인가 영향력을 끼칠수 있었느냐에 대해서 반문을 하게된거죠.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게된거죠. 그런데 사실은 할말이 없거든요. 그렇게 되었을때에 그렇게 말하자면은 교회의 어떤 중심적인 신앙생활에 대해서 상당한 회의들을 느끼게된거죠. 젊은이들이 지금 굉장히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사고방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요. 그나마도 인제 교회안에 청년부나 대학부 같은 것들이 잘되어가지고 자기네끼리 똘똘뭉쳐서 생활을 할 때에는 그래도 교회안에 젊은이들이 모이죠. 그런데 그것도 문제는 뭐냐하면은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 연령별 성별별로 쪼개진 그 쪼가리들이 교회가 아니라. 이 전체가 교회잖아요. 그러니까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기네들끼리 모인 어떤 또래집단에대한 그런 집착이나 얘기하는거죠. 물론 그것도 하나의 공동체라고는 말할수 있지만은 그러나 교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때에는 정상적인 유니티가 말하자면 아니라이거죠. (그래 제가 있던 어느 교회에서는 하도 대학부는 대학부들끼리만 모이니까 말이죠. 어느 교회의 중직이 그랬어요. 대학부에 올라가서 임대료내라고 말이지. 교역자가 누군지도모르고 자기네들끼리 시간내서 모이고 완전히 이렇게 갈라져있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말이지. 물론 미성숙한 사람들 중심으로 그렇지만 그런거죠.)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정상적인 것들이 아니라.이거죠.
그런데 그래서 결국은 말이죠. 이게 자꾸 성경의 진리가 있는데 자꾸 현실하고 안맞는 것은 뭐냐하면은 하나가 아구가 안맞으면은 그 다음서부터 마출려고 애를써도 이것은 완전히 어거지야 계속해서 돌아요. 계속해서 맞물리면서 거꾸로 돌아가는거에요. 결국 그 마지막 그것이 무엇이냐. 알아가는거죠. 그런 교회에대한 어떤 탈교회주의 적이고 교회 자체를 하나의 공동체로서 교회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서 경시하는 그런 개인적인 풍조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은 원인자체가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런 교회가 성도들의 어떤 영적인 영향들을 실재로 체워주지 못하니까 그러니까는 그 교회를 그렇게 깊이 사랑하고 그 교회가 오래도록 출석하면서도 내 교회라고 느끼는 그런 어떤 영적인 연대감 같은 것들을 심어주지를 못하는거에요. 그게 인제 문제가된거죠. 그런데 사실 그것은 불행한 일이죠. 그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보면은 그런 문제에대한 아주 명쾌한 해답을 준다고요. 그게 뭐냐하면은 인제 이 시인이 지금 이 시편 본편에서 무엇인가 성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아주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상황에서 성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시인은 지금 영혼의 상태로보자면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고백을하는거에요. 이 영혼의 상태는 아주 굉장히 곤고한 상태에요. 죄악이 자기를 이겼사오니그 말을 여러분들은 이해할수 있습니까?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겠느냐고요. 어떤 살아가면서 순간적으로 범죄를 해서 실수하고 그런 것들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에 의하면은 죄죽임의 상황에 정반대가 되는거죠. 죄가 완전히 우승한 상황이 되어가지고 성도로서 죄를 이기면서 살아갈수 있는 그런 능력을 짖눌러서 그래서 오히려 죄의 지배가 자신의 마음속에 편만하고 그러한 죄가 살아 역사하고 은혜가 죽어있는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거죠. 그러니까 영혼의 굉장히 절망적인 상태죠. 그런데 그런 상태속에서 이 시인이 급작스럽게 하나님의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게 무엇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거죠.
그러니까 시편 전편에 흐르는 뭐 시편만이 아니라. 구약전체에 흐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자리에 온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무슨 문제가 있든지간에 모든 문제를 결국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해결을 받는거에요. 국가적인 문제일수도 있고 히스기야처럼 국가적인 문제일수도 있고 그 다음에 한나처럼 아주 극히 개인적인 문제일수도 있어요. 그런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는거에요. 그리고 거기에서 만족스러운 해결을 경험한거에요. 그런 것들이 신약에도 나오잖아요. 예수님의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세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간 세리, 그 문제는 뭐죠. 국가적인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무슨 한나처럼 개인적으로 아이를 낳게 해달라든지 돈이 없다든지 그 문제가 아니었죠. 무슨 문제였어요. 죄의 문제였다고요. 사실은 그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올라가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하게되니까 자기가 정말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되는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영향력이 있어야되요. 죄인들이 이 곳에 들어왔을 때 세상에서는 자기가 별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못느꼈는데 여기 들어왔을 때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자비한 용서를 기대할 마음, 용서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평강과 거룩한 은총에 대한 깊은 사모함, 이런 것들을 느끼게 만들어줄수 있는 어떤 그피리쳐라한 영적인 그 무엇이 교회속에 있어야된다고요. 그것을 이 세리가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호소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거에요. 하나님께 해결을 받는거에요.
그러니까 이 시인 다윗 역시 죄가 나를 이겼사오니 이건 뭐 거의 틀림없이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 사건 직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보죠. 그렇게 죄가 자기를 완전히 이겨버리고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래서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땅에 떨어지고 자신 속에 어떤 죄와 이런 것들이 가득한데 성전에 나아와서 하나님을 묵상하면 자기가 거기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되는거에요. 범죄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도 진실이지만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도 역시 진실이에요. 이 두가지 진실 사이에서 시인이 깊이 괴로워 하면서 여기에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갈망을 갖게되는거에요. 그런 것을 보여주는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볼때에는 막보면 안되요. 그래서 이렇게 오늘 아침에도 제가 그런 묵상을 했는데 성경을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먼저 글자를 안다는거에요. 이렇게 말하면 나도 한글을 아는데. 한문 성경이에요. 한글 성경이건 한문 성경이건 간에 일단 글자를 안다는거에요.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거에요. 하나하나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다음에 왜 이 진리, 이 교리를 진술하고 있는 문장 그 앞에 이런 내용이 나올까? 거기에 대한 만족한 답을 얻어야되요. 그래야지만 이 성경속에 흐르는 흐름이 이렇게 보인다이거죠. 아무거나 하나 찍하고 뜯어내서 성경이 뭐라고 얘기하는지는 상관도 안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그 성경속에 때려 넣어가지고 성경으로 하여금 그것을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정상적인 성경 읽기가 아니라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죄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죄가 나를 이겼사오니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때는 많지 않았었어요. “죄가 나를 이기었사오니.” 지금 어떻게 말하면 다윗에게 있어서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집을 찾는거에요. 그러면서 인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그 구절을 이야기 하는거에요. “주께서 택하사 가까이 오게하신 사람”에대해서 당신 가까이 오게하신 사람에대해서 말하는거에요. 그래서 “주의 뜰에 있게하신 사람들은 복이있나이다.”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시인은 어떤 사람들이 복이있다고 말하냐하면은 하나님이 가까이 두신사람, 그런 사람들이 복이있다는거죠. 하나님이 가까이 두신 사람들, 그 사람들이 복이있다. 옛날에 지금도 있기는 있지만 가사가 많이 바꼈는데 옛날에 합동찬송가에 좋아하던 찬송가가 있는데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주를 그것을 또 나중에는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교리가 또 작용을했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 있느냐 하나님이 가까이 하게 하셔야지 가까이 하지. 좋아요. 다 좋아 다 좋은데 하여튼 그 의미는 무슨 뜻인지 알겠죠.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무슨 뜻이에요. 이해가되요.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라는 것은 이해가되죠. 그죠.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그게 무슨뜻이에요. 그것은 뭐냐하면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의미하는거에요. 여호와와의 친밀함, 하나님과의 친교를 이야기하는거에요. 풍성한 친교, 그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에요. 물리적으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는 없잖아요. 하나님은 무소부제하신 진실하고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이신데 어디로 가면 가까이 가는거에요. (사람들이 성지순례 대게 좋아하는데 난 제일 별로인게 성지순례에요. 거기 가면 뭐하겠어요. 그래도 누가 보내준다. 그러면 싫다. 그럴리는 없지만은 난 거기 갈려면은 차라리 어디 좋은 바닷가에서 쉬다오는게 더 좋을것같아요. 거기가 왜 성지에요. 그런 말 자체가 사실 존재하지 않죠. 성지는 무슨 성지에요. 난 여기가 오히려 성지지. 내가 여기서 주님 만났으면 여기가 성지지 아무도 아멘을 안하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성지에 가면 하나님을 더 느낄수 있나요? 성지에 가서 하나님 만났다는 사람 나는 한번도 못봤는데. 그런데 교회에서 하나님 만난 사람들은 많이 봤거든요. 아니뭐 그렇다고 해서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내준다. 그러면 가세요)
그런데 그렇게 어느 곳에 가야지만 하나님이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디로 가면은 하나님이 가까이 느껴지겠느냐고요. 그런 장소에 교회 세우면 정말 사람이 저절로 모이겠죠.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이 세상에서는 뭔가 그 광야에 서서 모세를 느낀다. 그것은 자기 기분이지 기분에 그런 것이지. 실지로 하나님께서 어느 장소를 간다고해서 하나님이 더 느껴지겠느냐고요. 또 어느 장소에 간들 하나님이 안느껴 지겠느냐고요. 이 시인이 그런 얘기하잖아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닷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여호와의 의로운 오른손에 나를 붙들리이다.” 어디를 간들 하나님을 못느끼느냐이거죠. 그런데 그게 결국은 뭐냐하면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 멀리 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은 침소의 상태를 의미하는거죠. 가깝고 먼,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멀리 느낀는 그런 어떤 영혼의 친소 상태를 가르키는 것이지 물리적인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시인이 얘기하는 거에요. 자신의 인생, 왕도 되어보고 그리고 군인으로서 용맹을 떨치면서 수 많은 전쟁에서 승리도 겪어보고 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이 다윗이 살아왔지만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행복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격이 없는 격이 없다. 그러면 좀 이상하지만 죄나 불순종이나. 어떤 상황으로 말미암아서 단절이 없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친교를 누리면서 사는 그 삶을 여기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상태라고 하나님이 가까이 불러주시는 사람들, 하나님과 가까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묘사를 하는거에요.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생각을 하는거에요. 사실이에요.
사실 인간의 욕망,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모든 몸부림은 무지개를 잡는것과 같아요. 그래서 산을 넘어서 그 무지개를 향해서 막 뛰어가보면은 무지개는 저만큼 도망가고 도망가고 그래요. 또 무지개가 맘이 좋아서 안도망갔다고 칩시다. 안도망가면 뭐해요. 그게 잡히냐이거죠. 각도만 달라도 무지개는 안보이는 법인데 그거에요. 결국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거에요. 아무것도 정말 몇해전에 나이야가라 폭포위에 직경한 한10킬로정도는 될정도로 어마어마한 무지개가 떳어요. 그것을 보면서 야! 태어나서 저렇게 크고 선명한 무지개는 처음이다. 일곱가지 색깔이 아주 정확하게 떳어요. 그런데 30분도 안되서 다 사라져요.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의 나타나는 현상이지 실재 리얼리티가 있는 것은 아니라이거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이거죠. 인간이 모두 쫍고 몸부림치면서 사는 모든 목표들이 다 그러해요. 결국 마지막에 이 시인인 다윗 자신이 이 얘기가 다윗 자신의 이야기기 때문에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거에요. 진짜 이세상의 임금들이 부러워하는 그 영화를 누려도 보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하여튼 다 권력과 여자와 그 다음에 그 모든 인생의 즐거움 하여튼 뭐든지 다 누릴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깨닫는 것은 그것은 모두 헛된 것이고 자신에게 있어서 정말 가장 복된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최고의 복이다.
그래서 아까 얘기한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그 찬송가도 결국은 알고보면 그런 것들을 깊이 깨달은 성도의 신앙의 고백이에요. 내주를 가까이 하게하는 것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을 지불하면서도 그것은 홱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자신과 싸워서 이기고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자신의 욕망을 죽이며 극기하는 삶을 살면서 자기부인의 삶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은 우울하게 인생을 사는 것 같고 자유가 없는 종교에 매인 사람처럼 보여요. 그러나 그들의 그런 사악한 자신의 본성과 싸우고 성령 안에서 살려고하는 철저한 자기 죽임의 그 삶들이 복음적이기만 하다면 그들의 겉모습 그것은 그렇게 십자가 짐같은 고생일지는 모르지만은 그러나 그들의 영혼에는 항상 거룩한 평강이 있어요. 그러나 악인의 마음에는 평강이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가 있어요. 그것이 이 시인이 모든 영화와 인간의 부귀영화와 연고성쇠를 다 경험하면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에요. “주께서 선택하여 자기 가까이 있게 하신 사람들이 복이있다” 그런 사람들이 복이있다,이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이 깊은 친교속에서 살기를 깊이 그리워하는 성도들이 되어야되요. 그리고 사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과의 이 친밀함이 왜 나는 이정도밖에 되지 않을까를 가지고 거의 고민 안하는 사람들은 거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이에요. 무슨 놈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 있느냐이거죠. (어느 티브이에 부부가 나와서 나는 그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제일 주책스러워요. 아니 집 얘기를 탤레비전에 나와서 서로 흉보고 뭐 아이고 좀 제발 그러지 말아요. 혹시 꼭 그런 상황이 오게된다면 열린교회 다닌다는 말은 하지말아요. 내가 챙피하니까 둘이와서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일본에있고 부인은 서울에 있는데 빠르면 두달에 한번 만나고 늦으면 6개월에 한번 만난데요. 한번 만나면 얼마나 있냐 그러니까 길면 일주일이고 짧으면 삼일이래요. 그렇게 5년인가 6년을 계속해서 그렇게산데요. 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나는 잘 모르지만은 그러면서 부인이 하는 얘기가 더 재미있어요. 아 왠지 이이가 온다는 소식이오면은 왠지 부자연스럽고 구속을 느끼고 간다. 그러면 그렇게 자유롭고 좋을수가 없데요. 보고싶지 않냐 그러니까 아 우리는 벌써 우리의 사랑은 그런 것을 초월했데요. 그런 것을 초월한 것이 무슨 사랑이에요.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를 사랑하는 이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네가 살던지 죽던지 난 그런 것을 초월해서 난 너를 사랑한다. 그런 사랑이 어디있느냐이거죠.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거 가지고 고민안해요.) 그러데 이 시인을 보면은 이 시인이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이 친교를 잃어버렸을 때에 얼마나 처절하게 고뇌하는지를 그 시편속에서 추적을 해보면은 그러면은 인제 이 시인이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 치는 것을 보면은 왜 이 시인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여 가까이 있게 하신 사람이 복이있다고 단언하는지를 알수있다고요.
이것은 약간 곁가지 이야기 이지만은 사실 이 시편을 공부하기가 참 그렇거든요. 그래서 시편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뭐냐하면은 1편서부터 차례대로 읽는것도 재미지만은 비슷한 시를 쭉 모아서 읽는거에요. 비슷한 시를 쭉모아서, 범죄했을 때 지은 시들을 쭉모아서 읽고 그 다음에 곤고해서 부르짖을 때의 시를 모아서 읽고 그 다음에 전쟁에 관한 시들을 모아서 읽고 왕으로서 쓴 시들을 모아서 읽고 이렇게 이렇게 모아서 읽으면서 저자별로 요렇게 꽤어나가면서 읽으면 아주 재미있죠. 유익이되죠
그런데 이제 그거에요. 그런 것을 보면서 시인이 여기에서 선택이라는 단어를 왜 사용하고 있는지를 아주 잘아는거죠. 이것은 히브리말로 뽑아낸다는거에요. 이렇게 딱 그런데 뽑아낸다라는 것은 뭐냐면은 히브리말로 뽑아낸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뜻이냐하면은 뽑아낸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어느 것을 할까요. 그러고 툭 뽑는 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사다리 타서 뽑는 그것이 아니라. 베스트를 뽑아내는거에요. 선택한다라는 의미 속에 그런 의미가 있는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하시는 복을 누리게 하신 사람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베스트로서 딱 뽑아낸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축복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거에요. 그래 시인이 지금 그것이 성도의 지고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을 때에 시인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는가 그가 누리고 있는 왕이나 권력, 재산 이런것들이 자신의 그런 고통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거죠. 그런 경험을 염두에 깔고 이 고백을 읽어보면 이 고백이 아주 그렇게 쉬운 고백이 아니라고하는 사실을 알게되죠. 깊은 의미를 가진 고백이라는 것을 알게되죠.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어떻게됩니까?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가치로 삼으면서 살아갑니까 어떤 모든 것을 다팔아서라도 사고 싶은 것이 무엇이죠. 어떤 것들입니까? 모든 것들을 다 팔아서라도 사고 싶은 것이 어떤 것이에요. 왜 우리가 그렇게 성화의 삶에 대해서 철저히 강조받고 왜 그렇게 우리들이 그렇게 힘겹도록 죄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도록 애를써야 되는 이유가 무엇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확보할수 있는 것이 무엇이에요. 그게 바로 우리 자신에게 관해서 말하자면은 하나님과의 친교가 그렇게 되야지만 유지가된다이거죠. 욕심이 자기를 이끄는데로 방종하게 살아가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까이 하는 친교를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는 곧 잃어버린다는거에요. 그런 것들을 그래서 삶에 공을 들여야되요. 그래야지만 이 영혼의 상태가 복된 상태를 유지할수 있는것이에요.
그런데 진짜 우리의 관심은 그 다음 고백이에요. 이게 하나의 페러렐리즘이에요. 병행법이거든요. 그래서 “주께서 가까이 있게 하셨다”고 하는 것과 “자기의 집의 뜰에 있게하셨다”는 이야기는 같은 말의 반복이거든요. 이렇게 되어있죠.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있나이다.” 논리적으로 보면은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하셔서 주의 뜰에 거하게 하셔서 그래서 복이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가까이 오게하셨다는 것과 뜰에 거하게 하셨다는 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라이거죠. 그래 여기에서 우리들은 하나의 고리를 발견하게되는데 그것이 뭐냐하면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체험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성품을 알면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잘 경험하게 만들어주시는 성전, 교회와 그가 관계를 갖지 않을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논리는 이런 것이죠.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실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당신과의 친교를 느끼면서 살게해주시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런 깊은 친교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 하나님을 가장 잘 느끼게 하는 성전이 있다어거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은 두가지 점에서 인제 그러한데 하나는 뭐냐하면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에요. 오전 이야기와 거의 같은 구도를 갖는거에요. 사람들과의 만남을 먼저 이야기하죠. 사람들과의 만남은 무엇이냐라고 하는거죠. 하나님의 인격을 깊이 경험하고 그 은혜의 세계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게되면은 그러면은 뭐냐하면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정상적으로 경험하게되면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그 하나님 마음 속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말하자면은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그런 코이노니아를 나누고 있는 많은 지체들을 함께 그런 관계를 경험하도록 만들어준다. 이얘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갖게되는데 그래서 그 에이전 토져라는 사람이 그런 비유를 설명했는데 산에다 설명을 했어요. 산을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하나는 뒤쪽에서 앞쪽에서 옆쪽에서 각기 등산을 하는거죠. 그들의 목표는 정상이에요. 정상을 향해 올라갔더니 거기에서 사람들이 다 만나는거에요. 그러니까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가까이하고자 하고 그분과의 친교를 영혼의 참된 변화를 통해서 그분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그분과의 친교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면 그분과 친교를 나누는 그 보좌 앞에 다른 상황을 통해서 왔지만 동일하게 그 하나님을 만나는 많은 성도들을 만나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아까 부른 247장 찬송이 바로 그거에요. ‘주 믿는 형제 자매들 그 몸은 떠나있으나.’ 다 각기 흩어져 있죠. ‘다 함께 기도드릴 곳 은혜의 보좌 시은소.’ 그러니까 영적으로는 그들이 세계 각 곳이 흩어져 살던지 간에 함께 만나는거에요. 그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런 속에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의하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가페를 경험하기 전에는 결코 사랑할수 없는 존재라는거에요. 그리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다이거죠.
그리고 또 하나 이제 하나님 때문에라 그랬는데 하나님 때문이라 그러는데 그러면 그것은 뭐냐 지금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죠. “주께서 선택하여 가까이 있게 하사 주의 뜰에 있게 하신 자는 복이있나이다.” 그죠. 주의 성전의 뜰에서 있게하신 자는 복이있나이다. 사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는 다윗 때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거든요. 성막이죠. 성막. 그 성막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제사죠. 제사는 결국은 지금 시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절박한 문제인 무엇을 해결해주죠. 그렇죠. 죄의 용서의 문제를 해결해주는거에요. 그러면 죄가 자기를 이겨서 어찌할수 없는 곤고한 상황이 되었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을 가까이 하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거에요. 그게뭐죠. 그렇죠. 사죄하시는 은총을 통해서 주님과 먼 거리감을 느끼던 사람들을 다시 당신의 친교의 세계속으로 불러 들이는거에요. 그런데 사실 그 죄인이 죄를 짓고 죄가 자기를 이겼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과의 그 친교를 느끼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 이 시인을 제사라고 하는 것들을 통해서 그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친교를 회복시켜 주셔서 그 하나님 가까이 있게하시는 사람으로 삼아주신 이것이 결국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거죠. 그 성전 뜰에서 대신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장 앞에서 이 범죄한 죄인이 할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물론 제물을 가지고 왔겠죠. 그런데 사실 그 제물이 죄에대한 보상이 될수 있겠어요. 하나님 앞에서 결국 겸비하게 하나님이 그 곳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아서 급기야는 죄가 자기를 잃어버린 이 상태도 자기로서는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러나 또 한편 그렇지만 사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밖에는 내가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산 것은 하나님 없이도 내가 살수있다라고 하는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고백이 동시에 나오는거에요. 그 문제에대한 완벽한 해결의 길이 무엇이냐하면은 제사를 통해서 용서해주시고 그 친교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그런 작용이 어디에서 일어나요. 그렇죠. 성전뜰에서 일어난거에요.
이런 신학적인 개념들이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한체 사실 이 교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면은 제사가 사라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으니까.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만 죄사함이 있다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거죠. 교회 안에서만 죄사함이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거죠. 그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감옥 속에 들어가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를 지나다가 지기가 너무나 불결한 죄인 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흐느끼며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인제 문제는 뭐냐하면은 그 때에 성전의 뜰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데 이미 벌써 죄인이 자기의 죄를 확신하고 그리고 인제 짐승을 가지고 온단말이죠. 제물을 가지고 굉장히 긴 절차가 있죠. 그죠. 그런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죄를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 너무 불결한 죄인이라고 하는 인식을 갖고 그리고 제물을 몰고오죠. 그리고 또 순서를 기다리겠죠. 그리고 와서 인제 그 다음에 제사장의 기도를 받고 그리고 그것이 산산조각나서 갈라지는 장면을 보고 그리고 이게 피가 범벅된 가운데서 연기가 오르고 하면서 거기에서 인제 제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그 제사가 모두 끝나고 그 감동을 안고 그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모든 과정들이 있잖아요. 그 중에서 가장 픽크는 어디있느냐 하면은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 그 상황이에요. 그래서 흠없는 어린양이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그 현장을 보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결한 죄인이고 그리고 제사장의 사죄의 선언을 들으면서 이제 이렇게 자기가 지은 죄를 이 제물을 보고 용서해주시는 그 사이에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발견하게되는거에요.
마찬가지로 어디서든지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할수 있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제사는 이제 사라졌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의해서 모두 죄 사함이 완성되었지만은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하면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다라고 하는 확신이 필요하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해와 친교의 회복이 필요하다.이거죠. 영혼의 친교의 회복이 필요하다이거죠. 그것을 가장 풍부하게 느낄수 있는 곳이 교회이고 또 교회이어야 한다.이거죠. 그래서 교회가 죄인들이 교회에 나왔을 때에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는 기능 자체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거의 같다. 이거에요.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는거죠. 그래서 교회가 깨어있다. 그리고 교회가 살아있다.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 것들은 결국 무얼 느끼냐하면은 거기에 사람들이 왔을 때에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혹은 내가 이렇게 고난을 받더라도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되겠다라고 하는 모종의 교훈을 누가 아무말도 해주지 않아도 그 모임 속에서 느낄수 있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교회다움이다이거죠. 그런데 교회는 바로 그 속에서 바로 그런 것들, 죄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그리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뛰어난 자비, 그리고 그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과 의무들, 그리고 그 특권들, 그런것들을 정확하게 느낄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곳이 교회인데 참된 진리의 말씀이 체계적으로 구체적인 시간을 가지고 그리고 충분히 귀담아 들을수 있도록 이렇게 선포되는 이 교회에 의해서 그런 작용들이 가장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이거죠.
그러니까 시인이 그것을 동의어라고 보는거에요.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하신 사람과 하나님의 성전의 뜰에 있게 하신 사람, 거기에서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고 간구하는 바를 거기에서 탄원할수 있도록 자기에게 호소할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이게 결국은 뭐냐하면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요. 쉽게 얘기하면은 모든 사람이 거기와서 제사를 드린다고해서 다 사죄의 은총을 받을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거기에 들어올수 있는 사람은 이방인들은 안되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에요.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복이있다. 이말씀이죠. 하나님의 은혜를 그분의 성품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참다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사람, 그래서 하나님과 깊은 친교를 느낀 사람들, 그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집 안에 두신 사람이에요.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교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거기 하나님의 집에 있게하셨다는 사실과 특별한 친교를 누리면서 살게하신다는 사실이 동의어로 사용된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잘들어보세요. 이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연과 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아주 견실하고 그 다음에 감격이 있는 교회생활이 중심축이 되어서 자기의 영역만큼만 살아가는거에요. 정말 자기는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도 없고 헌신하고 깊이 그리워 하는 교회도 없고 그리고 이모양 저모양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신앙은 워낙 유니버시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매이는 소인배적인 신앙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건강하고 견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에요. 대게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깊이 가르침을 받고 자신이 변화받고 목양받기 보다는 이렇게 뭔가 많이 선생노릇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자기의 행함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많이, 의에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그런 경험이 있어요. 그래 교회생활에 이름만 걸어놓고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는 그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열매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에요. 절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결국 시인이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깊이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이런 사실들을 우리들이 깊이 터득하고 난다면은 즉 어떤 사실. 주님을 가까이하며 친교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삶과 그 구체적인 보이는 교회의 그 속에 한 일원이 되어서 사죄의 은혜와 그 다음에 하나님의 그 언약관계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부에 와 있다고 생각을 하면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과 교회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부분이 중복되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에 이를수 있는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공식이 성립하게되는거에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있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깊이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라고 하는 현장 자체가 존재하는거에요. 그것은 하나의 아주 명쾌하고 분명한 원리라이거죠. 그래서 가장 행복한 삶이거든요.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열심히 목양을 받으면서 교회가 필요로하는 일들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곧장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 기록될수 있는 그러한 체계를 갖춘 신앙생활이라는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섬겨주기를 원하는 그 목표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된 것들이 되어야된다이거죠.
그래서 결국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이 그거거든요. 교회의 목표는 교회가 필요로하는 일군들을 길러내는 것이 교회의 목표가 아니에요. 오히려 교회의 목표는 교회가 이 교회가 필요로하는 일군들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군들을 길러내는 도구가 되어야된다이거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 교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한알의 밀알이 되어서 모두 썩어서 없어지고 그 속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이 그 속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열매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매들로 맺혀져서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이게 썩어서 문드러지는 그런 것이 교회가 되어야된다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한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의 교회에대한 깊은 사랑,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고 그 속에서 많은 섬김을 받으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들이 보안되고 하나님 앞에 고쳐지고 거기서 인생의 스승들을 만나고 또 그 속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 속에서 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족한 것들을 서로 체우고 공급받는 은총과 자비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기보다 더 부족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을 배우나가는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가만히 이렇게 돌아보면은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를 누리면서 살던때는 항상 공동체가 있어요. 항상 그리웁고 생각나는 교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삶과 섬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있다고 확신을 가질수 있었던 삶의 정황들이있다고요. 그처럼 우리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적이고 그리고 깊은 경외심을 동반한 이 사랑은 구체적으로 보이는 삶의 상황, 구체적으로 들어나고 모든 사람들에게 목격되는 교회의 상황이라고 하는 이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표현되는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깊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사랑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의 목양을 즐거워하고 그 속에서 지체들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이런 삶의 모든 꿈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꿈이 되어야되겠다라고 하는 진실한 생각을 가져야되요. 그리고 항상 주께서 내게 있게 하신 이 교회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참다운 은혜가 어떡하면 그 내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 교회 속에서 지체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나타날지를 깊이 사모하며 살아가는 가운데에 그 사람이 성황의 삶을 효과적으로 살아갈수 있는 중대한 무대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 우리에게 배풀어주시는 축복들, 교회 속에서 우리에게 배풀어주시는 영혼의 참된 변화와 하나님을 하는 지식, 기도 응답의 놀라운 은혜와 교제의 축복들을 모두 받으면서 우리들은 항상 마음속에 주님이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이러한 은혜들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사랑의 부체의식을 느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이거죠. 그리고 그것을 모든 지체들을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그 지체들을 위해서 갚으며 살아갈 때에 그의 삶이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헌신된 삶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성전에서의 하루가 천 날보다 좋은 것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시84:10-11上)
이 시편 84편은 아주 유명한 시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속에서 맛보는 성도의 행복을 그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하루가 주님의 집에서 지내는 그 하루가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에서 보내는 그 세월을 하루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을 다른 곳에서의 천날하고 비교하는데 그것은 행복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주의 궁정에서의 한날은 다른 곳에서의 천날과 비교를 하는 것이 그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집에서 맛보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루의 삶이 천날보다 낫다.라는 것은 결국은 삶에 있어서의 진정한 행복을 삶의 양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질에서 찾은것이죠. 하나님의 집에서 여호와의 궁정에서 지내는 하루가 거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궁정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결국 그 하나님에 계신 하나님을 자기와 자신의 나라와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시자 왕이신 주인으로 보는것이죠. 그것을 묘사한거죠. 또 주님의 궁정에서 하루를 보낸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하나님의 집의 영화로움을 물리적인 영화로을 상징한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의 궁정,할 때 초점은 궁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집, 그 곳의 영화로움, 그리고 그 곳에 있을 때에 내가 영화를 누린다.라고 하는 생각보다는 하나님 자신에게 집중된 묘사라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영광스러운 왕이시기 때문에 초막에 거하시든지 궁궐에 거하시든지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궁정, 여호와의 궁정이 된다는 사실을 시인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정말 사실이에요. 그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참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는가. 라는 것이죠. 그래서 군인들도 보면은 어떻게든지 별을 달고싶어해요. 무궁화 셋이면은 대령이고 그 다음에 하나 더 올라가면 별 하나인데 (그래 제가 군부대에 설교하러 가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별이 그렇게 좋아요. 그랬어요. 그분도 이제 별 달고 싶어하는데 그래 옆에 있는 장교가 하는 말이 목사님 대령에서 별하나 차이는 한계급 차이인데 대우가 99가지가 달라진데요. 99가지가 그래서 깜짝놀랬어요. 아니 그렇게 차이가 나냐. 별 하나 하고 별 둘의 차이는 얼마 아니어도 무궁화 셋과 별 하나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거 하시오. 그래서 별하나 달아주고 왔어요.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뭐 설명을 쭉하는거 다 기억은 안나는데 뭐 차도 틀리고 그 다음에 전속 요리사가 있고. 쭉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99가지가 달라진데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나라도 거 무궁화 셋달고 십년하는 것보다 별달고 한 3년하는 것이 낫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분들은 안그렇죠. 그래서 무궁화 하나라도 한 30년 하게 해주면 좋아요. 그런 차이죠.)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집에서 이 시인이 하루를 거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을 궁정이라고 묘사를 했는데 하나님이 왕이시다. 그 곳에서 하루를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날을 지내는 것보다 낫다. 이것은 인제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행복. 행복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성경에 씌어져있으니까 그냥 줄줄줄줄 읽어내려 가지만 한번 잘 생각해서 여러분들이 한번 시편 151편을 한번 써봐요. 무얼 또 열심히 찾아요. 150편으로 끝났다고요. 그거 뭘또 뭐 찾아봐. 151편에 뭐라고 써있나. 없어요. 150편이 끝이에요. 151편을 써보라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남이 써놓은것만 읽지말고 자기의 고백으로 한번 해보라이거죠. 그 때에 이런 고백이 창조적으로 나오는 것은 진짜 경험이 없이는 힘드는거에요. 경험이 없으면,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랑에 깊이 빠지고나면은 어쩜 그렇게 말도 잘나오고 글도 잘나오고 그러는지 몰라요. 말도 잘나오고 글도 잘나와요. 왜냐하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갖게되면은 풍부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대한 강렬한 경험을 갖게되면은 그 다음에는 갑자기 이제껏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써 먹은 그 말이 너무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는거에요. 뭔가 만족이 안되. 다른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되요. 그래서 자꾸 찾아보는거에요. 그러면서 표현의 지평들이 넓어지는거에요.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의 고백을 기도 속에서 하는가를 보면은 그의 신앙의 깊이와 체험의 깊이를 어느정도 엿볼수 있게되요. (그래 전 비유해서 말하기를 그 사람의 기도와 신앙의 고백은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엿보게하는 창문이다. 그래서 원래 집을 제대로 볼려면은 대문은 열고 활짝 열어놓고 봐야지만은 보이겠지만은 창문으로 봐도 어느정도는 보이잖아요. 그래 그 고백을 듣고 그 창문을 들여다보면은 그 사람의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 수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고백을 갖는 것은 참 쉽지가 않거든요. 그래 이것은 아주 사랑에 깊이 빠진 어느 젊은이를 생각나게 만드는거아니에요. 잘익은
그래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느끼고 맛보는 그 행복이 얼마나 크면 하나님의 집에서 지내는 하루가 악인의 장막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더 낫습니다. 그런데 하루, 천날, 이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여호와의 집에서 지내는 그 하루의 기쁨이 악인의 장막에서 거하면서 지내는 천날의 기쁨을 모두 모은 것 보다도 더 크고 놀랍다. 이거에요. 그런데 만약에 그 하루, 천날 그러는 것이 만약에 인생의 마지막날 마지막 첫날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은 이런 질문이 성립하잖아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루를 지내고 죽을래 하나님 없이 악인의 장막에서 3년을 지내다가 줄을래. 그럴 때에 이 시인은 아주 간단하게 답변할수 있는거죠.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루를 지내고 죽는 것이 내게는 행복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거죠. 그 고백이 정말 쉬운 고백이겠느냐이거죠. 그런 고백이. 일평생을 신앙생활을 해도 한번도 이런 자기 고백을 못하고 죽는 사람들 참 많아요. 그런 고백을 못남기고 죽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그런 깊은 은혜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면 모두 아주 훌륭한 글을 쓸수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 제주가 없어도. 글제주를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아주 작은 글쟁이야. 다시한번 말할께요. 글제주를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아주 작은 글쟁이야. 글쟁이야. 그러나 진짜 큰 사람은 그 글 제주를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도도히 흐르는 진실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얘기죠.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임제 속에서 참다운 성도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맛보는 사람들에게는 표현이 좀 어눌해도 그 속에 흐르는 진실이 있다고요. 그 진실이 그것을 읽고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뒤흔드는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는거죠.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었으면 참 좋겠어요. 그래서 시편 151편을 써내려가고 뭐 권위 면에있어서야 여러분들의 그 시편과 이 시편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한번 나의 시편을 써 내려갈수 있는 그런 풍부한 은혜의 고백거리가 있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 )는 것은 뭐냐하면은 왜 이 사람이 악인와 장막과 여호와의 집을 비교했을까. 여호와의 궁정을 비교했을까 그런데 여기에서의 초점은 악인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이 어떤 물리적인 이 두차이의 차이가 아니에요. 잘 들어보세요. 문학적인 기법이라고요. 여호와의 궁정과 악인의 장막을 이야기 할 때에 여호와의 궁정 그러니까는 화려한 궁궐을 생각하고 악인의 장막 그러니까는 드 쓰러져가는 텐트를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게 말한다면은 그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궁정에서의 하루를 지내는 것이 텐트에서 3년 지내는 것보다 훨씬 편하지 아 그 뭐 말할필요도 없죠. 특급 호텔최고의 객실에서 하루 자는게 이가 득실득실 나오는 여인숙에서 3년지내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에요. 시를 써내려가는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궁궐과 같은 곳이라. 이거에요. 악인은 아무리 큰 집을 짓고 잘 살아도 그 악인의 집은 다 쓰러져가는 말하자면은 탠트와 같다.라고 하는 것이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론 적인 사고방식이에요. 그 자체가 얼마나 놀라워요. 뭐 아까 얘기한 것이 뭐에요. 하나님 집의 문지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 영광하고는 상관이 없는거에요. 그것은 만약에 여호와의 집이 화려하게 지어졌다는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자기가 혜택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문지기란 거에요. 그런 기법을 이해를하고 이것을 들어보란말이죠.
그러니까는 시인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에요. 그 집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자의 집이라고 할지라도 거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이거죠.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그러나 만약에 거기가 초막이든지 궁궐이든지 만약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면 거기엔 영광이 있고 위엄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거기는 궁궐과 같은 곳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거에요. 그런데 시인은 어쨋든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할수 있었는데 그런 시인이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하면서 그 염두해 둔 것이 뭐냐하면은 여호와의 집이에요. 하나님의 집이에요.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이냐하면은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의 참된 행복, 그리고 존귀와 영광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의 허무, 이런 것들을 깊이 깨닫게 된 곳이 어디였느냐하면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런 것들을 경험한거에요. 하나님의 집에서 그런 것들을 경험한거에요.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과 자기가 깊이 사모하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은 떼어 놓을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것이죠. 보여주는거에요. (어저깨 밤에도 한 11시 조금 덜되서 약을 사러 갔는데 약국의 문들이 다 닫혔어요. 길 건너편에 사당역 태평데파트 뒤쪽을 쭉 갔는데 밤에 와 완전히 불야성이더군요.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데 왠 젊은이들이 교회보다 더 많아요. 거기는 나는 열린교회에만 청년들이 있는줄 았았는데 거기는 바글바글해요. 빨간머리, 노랑머리, 파랑머리, 초록머리, 쭉서서 그런데 바쁘지도 않아요. 넷씩 다섯씩 서넛씩 몰려앉아서 다음은 어디로 갈까 의논하는 모양이에요. 그래 밤이 야심한데 거기 모여 앉아서 서서 말이지 그렇게 이궁리 저궁리하는데 이렇게 눈빛을 쳐다봤더니 성도들의 눈빛하고 비슷해. 그래서 이렇게 쳐다봤어요. 뭐가 비슷하냐면은 갈망하는 눈빛이 뭘 갈망하느냐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데 얘네들은 어디가면 좀 신나게 놀때가 있을까. 누가 이차라도 안사주나 그러고 그 가로등 아래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그렇게 궁기를하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보는데 그런데 계네들 한테는 11시가 되는 것이 너무나 아쉽죠. 오늘은 집에갈 시간이 다가오는데 안들어가도 그만이겠지만, 어쨋든 좀 즐기고 싶은데 무슨 껀수가 없나 그 갈망하는 눈빛이 성도의 눈빛하고 아주 흡사해요.)
그런 갈망의 눈빛이 자신의 용망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전까지는 그 눈빛을 잃어버릴수 없는 것처럼 신령한 욕망도 역시 마찬가지라 이거죠. 하나님의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이러한 신령한 욕망의 만족을 얻는 곳이에요. 시인이 어떻게 다른 곳에서 천날을 지내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낫다.라는 결론을 내렸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없이 살았던 수 많은 날동안 하나님 계시지 않는 곳에서 맛본 많은 날들의 행복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있는 그 곳에서 경험한 하루의 기쁨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에 삼년이나 되는 긴세월의 생명을 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짧막한 삶과 맞바꿀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까지 갖게된 것이라이거죠. 그런데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었다이거죠.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거에요. 그러면 도데체 이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뭘 경험했길래. 그 하나님의 집이 그렇게 좋다고 하는 것일까. (제가 가끔 PC방에 들어가거든요. 또 목사가 PC방에는 뭐하러 가느냐. 그렇게 물으시겠지만 주님 섬기러 갑니다. 그 왜 교회 내버려두고 PC,방에가서 섬기냐 지방에 집회를 내려 간다든지 기도원에 갔는데 인터넷 하고 이메일에 다급한 상담 편지들이 막 들어와요. 급한게 없으면 내버려두는데 어떤 때는 급해. 이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아니에요. 그래서 가서 씁니다. 처음에 들어갔더니 사람이 아래 위로 쳐다보면서 왠 아저씨도 지난 사람이 와서 그냥 오면 아무대나 가서 앉아서 하는데 나는 촌스럽게 가서 저 PC방 할려고 왔는데요. 뭐요. 그래요. 저 PC방 할려고 왔는데요. 그러면 저기 가서 앉아요. 그러니까 앉아요. 이제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해요. 나중에 알고보니까 거기에서 하면은 자동으로 요금이 계산되어서 요금이 나오더라고요. 거기 가요. 그러니까는 아직도 그 애들이 PC,방은 다들 지하실이더라고요. 그 지하실에서 왜 그 케케한 공기를 마시면서 거기를 기어들어가서 한시간에 몇 천원씩 내고 그것을 두드리고 앉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가요. 왜냐하면은 진짜 이PC방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직 맛보지 못했기 때문인거라. 애들은 거기에서 빠져 밤을 새워요. 밤을 새우고 그냥 거기에서 정신없이 빠지는데 다른 애들이 뭘하나 그러고 요렇게 쳐다봤더니 게임하는 애들 뭐 인터넷하는 애들 별애별 애들이 다 있어요. 옆에 누가 가도 모를정도로 시끄러워도 상관하지 않고 그냥 거기 몰입을해서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런 기쁨을 몰라요. 그거 하는 것은 빨리 편지쓰고 빨리 나오고 싶다는 것 외에는 내게 느껴지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죠. 뭔가 이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뭔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곳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낫습니다.라고 고백을 할수 있는 것 아니에요. (제가 옛날에 교회 다니다가 중학교 2학년때 집어치우고 고등학교 1학년때에 친구들 꾀임에 빠져서 교회에 억지로 끌려간적이 있었는데 아 막 꼬시는거에요. 거기 가면은 여학생들도 많고 뭐 그러면서 데리고 2층 교회를 갔는데 아 진짜 지겨워요. 그 예배 말이지. 설교는 왠 전도사가 목사보다도 더 길게해요. 나같은 사람 하나 만났죠. 맥도없는 설교를 한없이 길게하는데 기도는 한번만 하고 빨리 주기도문 하고 끝내지 한 없이 늘어뜨려요. 아무 재미가 없어요. 끝나고 나서 여학생들하고 만나서 차도 마시고 몇마디 나누는 것은 재미 있는데 그 짧은 시간의 재미를 위해서 치뤄야하는 예배 견디기의 고통이 너무심해요. 그래서 포기 했어요.) 왜 하나님의 집에서 아무것도 경험하는 것이 없으니까 그 집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낫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이 안나오는거에요.
그러면 시인이 도데체 하나님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뭘 경험했길래 뭘 체험했길래 그 하나님의 집은 악인의 장막의 화려한 집에서 그 영광을 맛보면서 영화롭게 3년을 사는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난 좋다. 왜 그렇게 고백을 했을까? 그 단서를 오늘 시인이 말해주고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그 속에 암시 되고 있는거에요. 그게 뭐에요.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그리고 방패시라. 그러죠. 이 성경에서 해 만큼 의미심장한 명사가 없을거에요. 히브리말로 ‘쎄메쉬라고 하는 단어인데 한해. 여호와 하나님은 한 해요. 그리고 또한 한 방패십니다. 이 ’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의 영광이에요. 이것은 해석의 다른 견해가 있을수가 없어요.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해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에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의 빛을 받음으로서 참 사람답게 그리고 참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피조물 답게 그렇게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지난 주간에 사경회가 다가오는데 하여튼 우리 교회 사경회는 다른 교회 사경회보다 하여튼 3배는 가슴이 조여요. 다른데에서 한 1만명을 모아 놓고 오라.그래도. 눈 하나 깜빡 안하고 가요. 깜빡 해봐야 별거 아니지만은 가서 수 만명이 모였어도 정말 하나도 뭐 이렇게 너무 많이 모여서 부담스럽다든지 그런 생각해본적 없어요. 10만명이 모여도 눈하나 깜빡 안해요. 아 그런데 열린 교회는 말이죠. 정말 힘이들이어요. 왜그러냐 하면은 다른데는 하고 대포 쏘고 와버리면 그만인데 명중을하던지 오바되어서 나가던지 오고나면 그것은 자기네들 몫인데 그런데 이거는 여기는 말이죠. 사경회를 잘하면은 바로 교회와 목회로 이어지고 신통치 않게 되면은 친통치 않게 된 것을 내가 그대로 당해야하니까 내가 대포 쏘고 내가 맞으니까 잘못 쏘면은 큰일이에요. 그러니까는 내가 속이 꼬여요. 그런데 인제 강원도로 갔어요. 그런데 강원도 가서 보니까 창문을 열지를 말아야지 열면은 유혹을 받아요. 뭐 단풍이 뭐 진짜 어려운 말로 처염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마지막 끝물에 불이타요. 그 얘기를 했더니 우리 집 사람이 누구는 여기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전도하고 누구는 거기 가서 그러고 있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야 그러지 마라 나도 여기서 다음주가 사경회만 아니면은 신나는 날인데 사경회 생각을 하면은 창자가 꼬인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경치좋은 데서 창자 꼬이는 것이 매연이 가득한 곳에서 꼬이는 것보다 훨씬더 낫겠다. 어쨋든 처염하게 불붙었어요. 뭐 아!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을이 봄보다 아름다울수 있구나 그것을 아주 깊이 느겼어요. 그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한 솜씨에 대해서 그런데 기상 학자들에 의하면은 왜 그렇게 되느냐하면은 말이죠. 단풍이 아름답데 물드는 것과 이 기상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거에요. 다시 말하면 구름이 많이 끼거나 그 다음에 바람이 많이 불거나 또 비가 막 쏟아지거나. 이렇게 해가지고 기상이 갑자기 추위가 막 와버리거나 아니면은 이상 고온이 계속되거나 이러면은 단풍색깔이 칙칙하게 된답는거죠. 그런데 그런게 없고 비가 쏟아지던지 바람이 불던지 해가지고 이상 기온이 일어나지 않고 햇살이 조용히 비치는 가운데 그저 평년 기온을 따라서 이렇게 곡선을 그리면서 서서히 날씨가 추워지면은 금년처럼 아름다운 단풍이 든다는거에요. 못봤죠. 그렇게 아름다워요. 그냥 단풍나무 같은 것은 아주 새빨간 옷을 입었어요. 너무 이 얘기 계속하면 사경회 참석 안하고 단풍 구경 갈까봐 겁나는데 가지마요. 내가 다보고왔으니까 내가 얘기해줄께요. 그렇게 아름다워요.)
그 뿐만이 아니죠. 가을이 되어서 곡식을 거두어 들일 때가 되었는데 어느 해인가 농부들이 나가보니까 계속 구름이 끼면서 말하자면은 냉해 현상이 일어난거에요. 냉해 현상이라는 것이 뭐에요. 햇빛이 비치지 않는거 아니에요. 그런 현상이 일어나니까 어떻해요. 이게 다음주에는 곡식을 거두어 들여야할 주간이데 이 눌러보면 물이 찍찍하고 나오는거에요. 벼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식물들은 그 시간이 되면 떠올라서 시간이 되면 지는 그 햇살을 먹으면서 비로소 자기의 존재의 목적에 부합하게 성장을해요. 그래서 결국은 잎을 내고 뿌리를 뻗고 그래서 열매를 맺히면서 마지막에 추수를 거두어 들이게끔 되어있는 것처럼 그런 것 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에서 비춰오는 그 은혜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영글어 가는거에요.
그것을 이 시인이 이 하나님의 집에서 경험한거에요. 하나님의 집에 갔을 때에 하나님의 집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의 영광, 그 임재의 영광의 빛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자신을 왜 창조했는지도 모르고 무지막지하게 살아가던 막 되어먹은 인간이 그 은혜의 빛을 받으면서 인간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되요. 사악하고 악날하고 포악했던 성품들이 변해서 하나님의 거룩의 성품에 부합한 성품이 되었고 그 속에서 한걸음 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에 가까이 다가가는 말하자면 영적인 성숙을 경험해요. 그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통과 거기에 그분과의 교제에서 오는 축복들을 경험해요. 그런 찬란한 임재의 영광 속에서 사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당연코 악인의 장막에서 천날을 지내는 것 보다 그 임재의 영광이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게된거에요. 그런 거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어떤 결론을 얻게되는거에요. 아 그렇구나 그 많은 신앙인들의 진솔한 신앙의 고백,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때 묻지 않은 그 아름다운 고백들은 결국은 태양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의 그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하는 고백이구나. 그것을 깨닫게되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여러분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중의 대부분은 죽음과 함께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들이 아닌가요. 사람이 죽음에 딱 직면하고 나면은 걱정거리가 모두 사라져요. 걱정거리가 모두 사라지죠. 왜 죽음이라는 그 엄연한 실재가 그동안 자신이 염려하고 근심했던 많은 것들을 의미 없게 만들어버리는거에요. 죽음이 옆에 놓여 있을 때 그 죽음의 실재 앞에서도 여전히 고민하기 위해서는 그 고민하는 내용이 죽음을 초월하는 것들이어야 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바로 그거라고요. 이 시인이 그런 우리들이 정말 그렇게 필요로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대부분 우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죽음과 함께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들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의 결심문 속에서 죽음이 지금 온다고 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하고 있어야할 그 일을 하자. 그 고백이 아주 의미 심장한 고백이에요. 다시 한번 해볼께요. 죽음이 지금 온다고 할지라도 해야 할 그 일, 그것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지를 행각하자. 그거에요. 무엇이 그런 것일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시인이 그런 것을 경험한 사람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진솔한 신앙의 고백이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고 임재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큰 사랑을 맛 보아서 그래서 이렇게 이곳에 이 하나님의 집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제게는 행복했습니다. 라고 고백할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내 하나님은 또한 뭐라고요. 방패요. 이것도 뭐 의심할 여지가 없죠. 이 방패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제일먼저 사용된 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의 일이었어요. 다시 말하면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큰 싸움을 하고 나서 인제 두려워하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게 무슨 의미냐하면은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계시해 주신 자기 고백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운 표현이에요. 하나님 자신이 “나는 너희의 방패다.” 이얘기에요. 이 시편에서 방패란 이야이가 많이 나와요. 그게 결국은 뭐에요.
옛날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처럼 병기가 발달하지 못했으니까 끽해봐요. 창 칼로 싸우거나 아니면은 원거리 사격이라 그래봐요. 활을 쏴서 맞추는 것이었거든요. 방패를 크게 만들어서 그래서 막 돌격하다가 저쪽에서 활을 쫀다 이렇게 생각이되면은 일제히 방패뒤에 몸을 숨겨버리면은 그러면은 아무리 비오듯 화살이 날아와도 병사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가 있었죠.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방패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보호, 여호와의 보호하신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죠. 실제로 시인은 31편 같은 데서도 시인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배푸신 은혜가 어찌그리 크신지요.” 많은 악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를 때에 하나님께 피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은신처 속에 이렇게 싸매고 보호하시는 장면을 이야기하는거에요. 이 모두 방패죠. 시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의 삶의 배경 속에서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 몰라도 충분히 이해할수 있어요. 왜냐하면은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견실한 교회생활 속에서 너무나 풍부하게 경험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비오듯 날아오는 그런 어떤 환란의 화살들을 맞을 때가 있어요. 유혹의 화살들을 맞을때가 있죠. 때로는 정당하지 않은 비난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해의 화살을 맞을 때가 있어요. 어쨌든지 간에 자신이 혼자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당할 수가 없고 감당하기에는 불가능 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 그 도우심이 하나님의 보호로 나타난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풍부하게 경험합니다. 이 시를 지은 시인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거에요. 왜적에게 침입을 받거나, 나라의 커다란 환란의 어려움이 임할 때에 하나님의 집에서 간구하고 기도하던 왕들과 선지자들과 그리고 제사장들의 역사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앞에 모여 자기의 백성들이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 환란으로부터 그들을 마치 방패로 보호하듯이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있었을거에요. 집단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풍부하게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현실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고 진실한 인격을 가지고 신앙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라고 할 때에는 그는 평탄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시련과 환란의 골짜기를 지나온 사람입니다. 시련과 환란의 골짜기를 지나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보호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거룩한 성도로 변한 사람이 아니라. 한맺힌 울화병을 지닌 그런 말하자면 화병을 지닌 그런 한맺힌 사람으로 변했을거에요. 그러나 신자의 일생은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혹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심지어는 배신을 당하고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외톨박이가 되어도 결코 가슴에 한이 맺히거나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사악한 마음으로 가득 차지는 않아요. 왜냐하면은 이 세상에서 맛보는 시련의 아픔보다는 방패가 되어서 자기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경험이 훨씬더 크고 풍부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 시인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정말 혼자이구나.라는 것을 경험해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무도 없이 외톨박이로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러분 알고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니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인생의 시련이 좀 오면 어떻습니까? 비바람이 좀 불면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가다가 인생의 길에 항로를 잃어버리는 때가 있다고 해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집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가르쳐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의 배의 불은 꺼졌지만은 멀리서 우리의 가는 배 앞길에 불을 비치며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는 등대와 하나님의 비추시는 도우심을 우리들이 받을수 있기 때문이죠. 거기서 지체들의 위로를 받고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걸어온 성도들로부터 믿음의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우리의 길에 빛으로 우리의 발에 등불로 삼으면서 부족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기쁨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인생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시인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주께서 자기를 그의 오른 손으로 붙드시고 자기를 그의 은혜의 날개 아래 두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를 해칠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뼈져리게 깊이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집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날 보다도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의 깊은 은혜의 영광을 맛보고 주님의 이런 보호하시는 은혜 속에서 살아서 여러분 자신도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집에서의 하루, 열린 교회에서의 하루가 주님 없는 다른 세상에서의 천날을 지내는 것보다 내 생애에 있어서 행복했노라.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길수 있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4.성전에서 힘을 얻는 사람
주께 힘은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성전에 대해서 우리 주일 저녁 마다 몇 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은 오늘 시편 84편에서 “주께 힘을 얻고 더 얻어 시온에서 주께 나아가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많이 듭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힘’ 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이 세상이 고해와 같기 때문에 드는 그 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살고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그 계획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우리에게는 독특한 힘이 필요하다.이거죠. 그리고 그 힘이 우리에게 끊이 없이 공급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가 없다. 이거죠. 그 우리에게 있는 것은 있는거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가끔 충전을해서 쓰는 베터리가 들어있는 면도기를 사용해보면은 느끼잖아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이거 면도를 얼른 하고 가야되겠는데 그래서 면도기가 막 돌아가요. 다 깍다보니까 여기만 요만큼 남았어요. 여기만 얼른 깍고 가면은 되는데 그때 약이 거의 달아서 이게 안돌아가는거에요. 그때 후회를 하는거죠. 골고루 이렇게 깍다가 떨어지면 그냥 갈텐데 여기서부터 깨끗이 깍다가 여기만 요만큼 남겼는데 안돌아 가는거에요. 면도기가 그래 할수 없이 내려놓고 이 칼달린 면도기를 가지고 와서 마저 깍는데 그건 정직하죠. 아무리 통사정을해도 소용없어요. 있는 것은 있는거고 없는 것은 없는거에요. 그래서 어떤 때는 잔꾀를 부리느라고 한번 꺼보았다가 탁 켜보죠. 얼른 돌아가나. 안되요. 있는 것은 있는거고. 없는 것은 없는거에요.)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힘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 힘이 있는 것은 있는거고. 없는 것은 없는거에요. 힘이 있으면 힘 있는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지만 힘이 없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가 없는것이죠. 그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모습이고 또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한계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죠.
그런데 오늘 이 시편 4편에서 말하지를 시인의 경험에 의하면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힘을 얻고 또 얻는사람이 있다. 이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시온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옵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이거죠. 그런데 그렇게 힘을 얻는 비결이 무엇이냐? 어떤 그리스도인, 어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힘을 얻는냐? 그 사람들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뿌리를 박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 뭐냐하면은 저희로 많은 곳으로 샘의 곳이 되게 하신다. 곤고하고 핍절한 영혼으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우리의 인생이 갈하여 견디기 힘들만할 때가 되면은 은혜의 샘을 터트려서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시고 그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적셔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게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힘을 얻고 또 얻는 하나의 비결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건 시인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정확한 경험이기도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새 힘은 우리도 의식할수 없게끔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우리들이 충분히 감지한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내려주실 때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터트려 주셔서 우리의 갈하고 목마른 영혼이 쉼을 얻고 자유를 얻을 때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새 힘을 얻게되는거죠. 그래서 주를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수 있는 용기와 힘, 이런 것들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만남의 경험을 이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경험을 한거에요.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단숨에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곤고한 때가 있고 그리고 고난과 위기에 시달리는 때가 있고 환란의 비바람에 홀로서야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인고하니 그들은 샘의 곳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은혜의 샘을 터트리셔서 그래서 갈한 영혼들을 해갈시켜 주시는 이러한 영혼을 적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사는 삶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힘을 얻고 또 얻어서 새로운 힘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여력을 발견하게되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은 돈이 많아서 돈의 힘으로 우리들이 살아온 것도 아니고 혹은 물질이 넉넉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유 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에요. 가만히 보면은 가난하고 곤고해도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을 때에는 그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어요. 그리고 외롭고 힘겨운 때라도 하나님께서 각자의 사람들에게 은총을 배푸시고 변화를 주실때에는 또 그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힘이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은혜의 샘을 터침으로서 샘의 곳이 되게 하심으로서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오게 하셨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부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그분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쉼과 영혼의 안식이 거기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 때에 우리들이 쉼을 얻고 능력을 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시인이 이렇게 힘을 얻고 또 얻는 또 하나의 비결은 무엇이었느냐하면은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 시온의 대로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보면은 왕이 걸어가는 길이에요. 왕이 지나가는 도로에요. 그 길은 왕이 통행할수 있는 길이에요. 이것을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비유를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 오는 그 행차를 시온의 대로를 걸어서 오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한거죠. 많은 이 고통을 받으면서 걸어가는 그 슬픔의 곳, 그 곳을 하나님께서 터치셔서 슬픔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서 슬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을 맛보게 하셔서 신앙생활을 하시게 하시는 것도 하나의 하나님의 방법이시고 이 똑 같은 말은 또 다른 펴현으로 말하자면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생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그 만남에서 오는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에는 우리에게 항상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새 힘들이 우리에게 주어져요.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다시 맛보게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늘 기억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마다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주님이 매순간마다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제껏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오게 하셨는데 사실은 우리가 슬픔을 머금고 고통을 받을 때에도 평탄한 때에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감격이 있을 때에 사실 우리의 인생은 고달픈 길을 걸어도 기쁘고 감사했고 또 고난으로 가득찬 길을 걸어 가다가도 주님이 우리에게 배푸시는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가 감격에 잠기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에요. 매순간 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우리의 영혼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치고 그리고 위로부터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들이 끊어지고 나면은 그러면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험악하고 죄로 가득찬 세상을 믿음으로 살수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에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찬 길을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고 항상 거기에서 공급되는 주님의 신령한 감격이 있으면 우리는 넉넉히 살아갈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억해야 할것은 무엇이냐하면은 우리에게 이렇게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은혜의 문을 여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삶을 살아 가다가 고갈되고 필요할 때에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창고처럼 활용할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핍절하고 곤고한 영혼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세상의 시련과 고난을 능히 이기면서 걸어 갈수 있게 하시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은혜를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알게 하셨는지를 한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우리가 무지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과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자기의 것을 배푸시는 그 놀라운 그 은혜의 문을 여시는 것들을 우리들이 어디에서 경험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이거죠.
사랑할 교회가 없고 은혜를 유지할수 있는 교회가 없는 사람들의 삶은 항상 매마른 삶이에요. 곤곤하고 지칠 때 하나님 앞에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수 있는 사랑하는 교회가 없는 사람들, 오류와 실패 가운데 있어도 그 오류와 실패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행할수 있는 마음에 참다운 변화가 없는 사람들, 그들도 역시 이 세상에서 너무나 불행하고 아픈 사람들이다이거죠. 매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매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배푸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의지해서 우리들이 이제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항상 있어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물질이나 허영, 그리고 자신의 정욕 그리고 자신의 입신의 양면과 출새나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헐떡거리는 것 보다도 더 뛰어난 헐떡거림으로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만 그런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곤고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새 힘을 얻어서 살아갈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의 인생의 궁극적인 해결의 길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신령하고 거룩한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 살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사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매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진실한 자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이러한 삶의 진지한 자세를 하나님 앞에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야됩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얻고 그 은혜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은 결국은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살게 하시는거에요. 한번 우리 속에 있는 거품과 같은 욕망들을 거두어 버리고 죽음 앞에 모두 의미를 잃어버리는 이 세상적인 욕망과 추구들을 다 거두어 버리고 나면 우리에게 아주 선명하고 아주 분명하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선명하게 하나님 앞에 남을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이고 하니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그 은혜의 역사가 우리에게 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우리와 같이 생의 벼랑 끝에 서서 고통하고 아파하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감화와 은혜와 변화의 역사를 불러 일으키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그러한 놀라운 일들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혼들에게 행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유일한 대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힘에 힘을 더 입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성전에서 누리는두 가지 행복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42:4)
사람이라는 것이 잃어버려보지 않고는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이런 것은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역시 동일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잃어버려 보면은 비로소 아! 정말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구나.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구나. 그런 것을 알게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하면은 그 하나는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의생활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그것을 잃어버린것입니다. 배경으로 이야기를 하자면은 많은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다윗 임금과 함께 고라의 자손중 한 사람이 도망을 가는겁니다.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을 갔으니까 거기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없죠. 거기에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만약에 너희 하나님이 계시면 그 좋은 왕궁, 그리고 그 좋은 성소, 다 너희 대적들에게 넘겨주고 그리고 소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너희는 왜 우리 나라에 와서 이렇게 더부살이를 하면서 살아가냐? 왜 그러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이 시인은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서 자기의 처지를 합리화 해서 그 사람들에게 이해 시킬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됩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하고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며 그렇게 하나님을 그리워하는데 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냐? 버림 받지 않고서야 너희 나라를 대적들에게 넘겨주고 빈 몸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렇게 더부살이 할수 있겠느냐. 왜 그러느냐 이렇게 물을때에 시인이 막 할말이 없었습니다. 눈물로 음식을 삼았다 그랬습니다. 주야로 흐르는 눈물로 자신의 음식을 삼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시인이 자신을 변명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렇게 된 상황입니다. 그 때에 이 시인이 하나님의 집을 떠나버리고 물리적인 제악에 의해서 도저히 그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가까이 다가가서 접근할 수가 없게끔 그렇게 외부적으로 강요를 받는 상황이 된것비니다. 그 때에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딱 두가지였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그 안에서 하나님과 맛보았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복,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섬김의 행복이었습니다. 두가지였습니다. 교제의 행복과 섬김의 행복을 회상하면서 시인이 오늘 마음이 상한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한다 라고 하는 표현은 시편에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아주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비유를 하자면은 상하게 되면은 상하지 않았을 때에는 건드리고 두들겨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상하게 되면은 살짝만 건드려도 아주 예민하게 감각을 느끼면서 통증을 수반하게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은 껍질이 까져서 넘어져서 피가 줄줄 흐른다. 그래서 약을 발라서 피는 멎었는데 껍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이 누드가 되었단 말입니다. 까졌단 말입니다. 그렇게 까진 살에다가 손을 살짝대도 살짝 대기만 해도 너무 쓰라리고 아프잖습니까. 또 껍질이 까지지 않았다 해도 심한 타박상을 들게되면은 살짝 이렇게 건드리기만해도 견디기 힘들정도의 통증을느낍니다. 영혼이 그런 상태가 된것입니다. 영혼이 그런 상태가 되어서 뭐 당당하게 살아가는 때라면 니네 하나님이 어디있냐. 그러면은 어디 있긴 내 마음에 계시지.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 할수 있었는데 많이 상했기 때문에 누가 와서 말을 하거나 건드리기만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통증을 느끼는 예민한 상태가 된 것을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상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복된 것입니다. 복된 것이고 이런 상한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역으로 이 시인은 이런 상한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성도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것입니다. 이렇게 상하게 되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지만 마음이 이렇게 깊이 상함을 받고 보니까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던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을 시인이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들고 올라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얼만큼 인생을 살고 보니까 하루와 일주일이 지나가는 것이 제트기를 타는 것 같습니다.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오늘도 낮에 몽고에서 선교사로 공부하다 온 윤정 자매하고 앉아서 야 너 떠나던 때다 언제냐 98년도 1월달에 떠났데요. 그 다음에서부터 우리 한번 사진보자 우리가 얼마나 변했나. 98년 99년 2000년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그렇게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마치 제트기를 탄 것처럼 세월이 빨리 지나갑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서 이제 이만큼 시점에 서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살아온 인생의 길을 이렇게 뒤돌아 볼수록 진짜 허무주의가 왜 생겼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뭐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항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철이든 다음서부터는 항상 생각없이 그래도 인생을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주님 믿지 않던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지만 뭐 남다른 인생을 산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누구보다 무엇을 좀 더 한 것이 없나 그러고 아무리 눈씻고 찾아봐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이 처지도 그저 어떤 때는 안그렇지만 또 어떤때는 수시로 야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정말 주님께 도움이 될까? 그런 생각을 할정도로 내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비하하는 비하보다도 자신을 정확히 보는 그런 때가 종종있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인생을 살았는가. 그리고 이제 앞으로 남은 인생을 그러면 별다르게 살아볼 길이 있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누구 말마따나 삶의 주석을 써야할될 왜 그렇게 살아있는지를 변증해야될 그런 시점에 와 있습니다. 또 저도 이러니 저보다 더 연세를 많이 드신 분들은 얼마나 비감한 느낌이 들겠습니까? 연세드신 분들은 제 설교를 들으면서 기분나쁘실지 모르지만 저는 머리가 하얀 어르신들을 보면은 자꾸 눈물이 나옵니다. 야! 벌써 저분 다 사셨구나. 나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저렇게 다 살텐데 그런데 어떡하나. 지나온 삶은 이렇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잘 살겠다는 자신이 없으니 이를 어떡하면 좋은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서 이렇게 회고를 해보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왔고 뭔가 남다른 인생을 살아볼려고 했지만은 그러나 결국은 남보다도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남보다도 훨씬 못한 그런 삶을 살아왔지만은 그래도 인생에 있어서 그래도 뭔가 남다른 것이 있고 남은 것이 있다면 뭐냐? 그래도 살아온 일이 허무하지만은 았을수 있었던 그런 이유가 있다면은 그것이 뭐냐라고 생각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래도 지난 인생의 삶속에서 주님을 알았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교회속에서 교회를 떠나지 않고 살았다는 것 그것 이외에는 무슨 남다른 삶이라는 것이 없더라. 이얘기입니다. 꼭 교회를 목회하고 섬겨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그래도 내가 가장 기뻣던 일도 알고보면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리고 가장 행복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던 일도 사실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주님 모를 때는 물론이거니와 주님 알때도 나는 기쁘고 행복한데 주님은 안그럴 때도 있지않습니까. 나도 행복하면서도 주님도 기쁘고 그리고 강렬한 기쁨과 행복은 항상 어느정도의 허무감을 동반합니다. 그죠. 그런데 기쁘고 즐거우면서도 하나님도 그러시고 행복하고 너무나 즐거우면서도 그것이 허무하지 않고 기쁘고 즐거우면서도 그것이 영원을 잇대어 즐겁고 기쁜 것이 될수 있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거의가 교회와 관련해서 일어난 일이고 또 교회에서 그렇게 살 지혜를 배우고 얻는 기쁨속에서 체득한 인생의 지혜들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남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내 앞에 살아간 많은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은 그 사람들이 일부를 살았고 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사는 것이 아니라. 수천번 수만번을 앞선 사람들이 다 살아봤잖아요. 그랬는데도 그 사람들의 지혜가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의 지혜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질이 매우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래 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까 역시 삶에 대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을 보세요. 시인이 이방의 땅에 와서 눈물로 음식을 삼으면서 그 하나님의 집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그가 그렇게 하나님의 집. 두고온 하나님의 성막을 그렇게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은 무슨 복직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하나님과 나누었던 신앙의 교제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기뻐하고 그 그리움에 잠겨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분과의 교제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교제의 행복속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압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할때에 주님께 기도할수 있는 은혜가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목놓아 울며 기도해도 말릴 사람이 없는 교회가 있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살아온 날들에대한 추억을 함께 느끼면서 아버지 앞에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자신의 원통한 형편을 토하면서 그분과 통할수 있는 소속된 교회를 가지고 있는 것, 거기에 하나님과 사귀고 교통하는 교제의 추억들이 남아있는 것, 이것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기쁜지를 모릅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오늘 시인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까 가슴이 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한 갈망도 주님도 향한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향해서 바라보시는 그 사랑과 그 열망도 변함이 없을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제사를 꼭 하나님의 성막에서만 드릴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장소에 국한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율법적으로 허락이 되었단말입니다. 그런데 거기를 갈수 없도록 원수들이 물리적으로 막아서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주님의 사랑, 자기를 향한 사랑도 변함이 없고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도 변함이 없는데 뭔가 물리적인 환경이 그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고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박탈해 버리는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이제 이사가지 않습니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다 보따리 싸가지고 이사 오세요. 그랬더니 누가 그러더라고요. 아 이쪽으로 이사 와가지고 부지런히 보따리 싸가지고 이사 온게 언제인제 또 가냐고. 또 가면 어때요. 또 쫓아오면되지. 또 쫓아오면되지 뭘그래요. 거기 가서도 거기 영원히 있겠다는 약속은 내가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또가면, 또 가면되지 뭘그래요.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리고 쫓아간거세요. 교회 가까이 살아서 늘 새벽기도 나올수 있고 그리고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할수 있고 심지어는 집안에서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도 저녁때 나와서 기도할수 있고 아침에 출근하다가도 와서 기도할수 있고 심지어 가까이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점심때 점심먹는다 그러고 달려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수도 있고 이것이 요 가까이 있을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몰라요. 그러나 한번 멀리 가보라고요. 얼마나 곤고한 일인지 가보라고요. 이사가서 큰 집쓰고 좋은차 타고다니고 무슨 회사 가까워지고 회사 가까워지는 것만 좋아하지마세요.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는 일주일에 한번 나가고 회사는 매일 나가는데 거꾸로 되었어요. 회사는 거꾸로는 아니지 회사도 매일 나가기는 가야지 회사는 맨날 나가지만 교회는 매일 나온다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한번 가보세요. 이사 한번 가보시라고요. 얼마나 곤고한가. 그런 곤고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많은 희생을 무릎쓰고 교회 가까이 이사왔잖아요. 그런데 왜 새벽기도도 안 나오고 밤기도도 안나와요. 여기 이사 오겠다는 사람 많아요. 방 빼라고요. 아직도 몇 달 남았으니까 말이지. 그 먼데 살면서 고생스럽게 새벽기도도 나오고 그냥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양도하라고요. 나는 아무리 성전가까이 있어도 이 시인처럼 이렇게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니 그대의 사모하는 마음 가진 사람, 내가 방 뺄태니 이쪽으로 와서 서너달 이라도좀 기도 많이 하라고 말이지 빼요. 아니 내가 집 주인이면 당장 뺄텐데말이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은 사실입니다. 얼마나 복된 것인지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너무나 기쁜일이 있을 때 교회당에 와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언젠가 누가보니까 승진을 했는데 제일먼저 승진하면 제일먼저 뭐하겠어요. 승진하면 집에다가 막삑삑삑삑 전화해가지고 여보 나 승진먹었어. 그럴거 아니에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입딱 봉하고 교회당으로 제일먼저 달려와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고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의 집에와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 주님 사랑하고 주님 의지하는데 견디기 힘든 시련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밤 열두시까지 교회문 열어논다고요.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목사님 문좀 열어주세요. 그래서 문렸어요. 못알아듣고 내가 기도할라 그러는데 문좀 열어주세요. 간판을 보세요. 열린교회입니다. 문 열였다는데 왜 자꾸 열어달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문 열려있다고 가보라고. 정말이요. 그래 정말이지 이 양반아 목사가 거짓말을 하나. 가보니 문이 열리니까 진짜 열렸네. 진짜 열렸지 보시오. 열린 교회라고 써있지. 그런데 이렇게 열어놔도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가끔 도둑 맞아요. 그 대신 12시 되기전에 기도하고 가시오. 그 대신 밤새워 기도할려면 기도하시오 밖에서 문잠그니까. 열려있습니다. 밤12시에 닫으면은 새벽 4시30분이면 문 열려요. 20시간동안 문을 열어놔요. 언제든지 누구도 뭐라그러는 사람 없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괴로울 때나 기쁠때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부여안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과 교통하던 때의 그 즐거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그런 그리움을 갖는것입니다. 이 시인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자신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다. 그랬는데 이 시인이 그렇게 헐떡거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당에가서 하나님께 예배할수만 있다면 내가 얼마나 좋을까. 그겁니다.
일제 시대때 참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일제시대 때 투옥된 성도들의 간증들을 보면은요. 그 사람들이 그 감격하는게 뭐냐하면은 그 사람들이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서 나와서 드리는 첫예배의 감격, 한번 가두어볼까요. 한번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온갖 고초와 문초를 당하면서 감옥에서 예배를 드릴수도 없고 성경도 반입이 안되죠. 그런 상황속에서 죽음직전까지 있다가 이가 다빠지고 머리카락 다 쥐어뜯기고 뭐 심지어 손톱까지 다 빠지고, 인두로 지지고 이런 사람들이 이제 해방과함께 석방이 되어서 자기가 섬기던 그 모교에 돌아와서 예배를 드리는것입니다. 그 감격을 생각해보세요. 바로 그 감격이 시인이 그리워하고 있는 그 감격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남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을지모릅니다. 그런데 또 어느때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내가 매일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야! 이거 내가 뭐하고 살았나. 뭐 남다른 인생을 사는게 뭐가있나. 그러다가 어느날 밤에 자다가 눈을 떳는데 그게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꼭 남다른 인생을 살아야 맛이냐. 남들하고 똑같이 살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우리의 겉 모습이 남들과 똑같은 인생을 살아도 우리 안에 이 세상 사람들이 알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세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질그릇으로 쓰시던지 나무그릇으로 쓰시던지 혹은 금 그릇으로 쓰시든지 쇠 그릇으로 쓰시든지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하는 그 곳에서 그저 하나님 섬기면서 하나님 사랑하고 아는 행복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것이 비범한 인생이지 무슨 세상을 뒤집어 혁명가가 될것도 아니고 뭐 그렇게 맨날 남다르게 남다르게 그러고 있느냐. 그래서 제가 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들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나보고 그래 니 말도 맞다. 그러고는 다시 잤습니다. 그래요.
주여 꽃처럼 향기 있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무슨 세상에서 사장이되고 과장이 되고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서 그거 보다도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은 한 교회의 성도로서 한교회의 집사로서 한 교회의 목사로서 또 한 교회의 장로로서 한 교회의 교사로서 하여튼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하는 교회의 한 일원이었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의미있는 직분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 하나님의 집 가까이 언제든지 다가와 기도할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수 있는 이런 소속된 교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단지 인간적이고 조직적인 소속이 아니라. 내가 그 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여기에 두셨고 주님이 나에게 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일들이 있어서 나를 여기에 두셨다.라고 하는 그 소속 속에서 하나님 섬시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르지 않는 행복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려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행복속에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이 시인이 회상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 보면 말하고 있죠. “내가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기쁨으로 저들을 인도하였다. 그것을 회상하면서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상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섬김을 고백하는거에요. 섬기면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수종을드는 세상적으로 볼때에는 커다란 집에 머슴과 같은 사람들이었지만은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머슴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머슴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섬기면서 사는 것을 기뻐한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아! 내 마음속에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통해 섬김을 받고 싶어하시고 우리의 섬김을 통해야지만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있고 그리고 섬기고 싶어하는 사모하는 마음도 내게 있는데 그런데 섬길수 있는 자리를 박탈당한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지금 아파하는것입니다.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해 섬김을 받으시겠다고 할 때에 아직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또 섬김을 받으실려고 할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실재로 섬길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그건 정말 선택된 행복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섬길 때 기억해야됩니다. (언젠가 외국에 한번 나갔는데 거기에 목회자 몇사람이 있는데 목회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부를 거의 마쳐가면서 또 한 사람은 공부를 다 마치고 그리고 부지런히 무엇이든지간에 뭐 부목사로 가든지. 아니면은 담임 목회를 하든지. 뭐 선교단체에 가서 일하든지 하여튼 어디든지 일할 자리를 열심히 찾는데 일할 자리가 쉽게 나서지않았습니다. 그래 모여 앉아서 목회하는 이야기를 쭉하면서 거 왜그랬는지 그 때는 내가 또 좀 힘든이야기를 좀 했어요. 거 힘든이야기를 잔뜩하는데도 이 사람들은 너무 부러워하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놓여있는 상황의 차이구나. 그래서 눈치가 또 제가 빠르지 않습니까. 얼버무리면서 즉시 말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래 맞아 어떻게 보면은 내가 내 목회를 하면서 격는 어려움들을 이분들하고 함께 나눈다고 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 허황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보세요)
아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고 계실 때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섬기면서 살수 있을 때 정말 아직은 행복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하실 때 그때가 아직은 때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시인이 지금 마음이 상한 것이 왜 상했습니까. 문제는 그 성도들에게 머슴처럼 성도들을 수종들어서 하나님을 섬기게하던 그 일을 이제 내가 더 이상 할수없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통해서 섬김을 받고 싶어하시고 나도 그 하나님 앞에 섬기고 싶은데 상황이 허락을 안되는것입니다. 상황이 허락이안되요. 견디기 힘들어하고 괴로워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은 미국에서 좋은 신학교를 나오고 한국에 오셔서 그런데 학교에서 이제 나는 교수로 있고 그 양반은 강사로서 가끔 만나는데 그냥 뭐 한 열흘씩 금식을 한 두 번인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은 나이도 적당하고 그리고 외국에서 공부도 할만큼하고 그리고 이 양반이 나름대로 하나님 만난사람입니다. 그냥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전하고 싶어서 막 어쩔줄을 모르는겁니다. 그런데 목회지가 나서지를 않는것입니다. 아무데도 뭐 수십장의 이력서를 내도 목회지가 나서지를 않는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열흘씩인가를 두 번인가를 금식기도를 했다고합니다. 그리고 조그만 교회가 하나 주어졌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래도 그 사람이 공부하고 온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그 사람의 공부한거나 그 다음에 나름대로 그 사람이 갖추고 있는 이런 것들로 볼때에 아이고 좀 좀더 큰 교회 가도될텐데, 내가 그렇게 생각을했는데 막 너무너무 뛸 듯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시골에 있는 교회에 하나 가면서 그래 또 시골에 있는 교회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러면서 그렇게 좋아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만났는데 뭐 너무너무 행복해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은 섬기고자 하는 마음은 있고 그리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어도 그 섬길수 없도록 이렇게 격리된 사람의 행복, 그러니까 섬김의 자리를 강요에 의해서 섬기지 못하도록 잃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입니다. 하나님께 섬기고 있는데 너 더 이상 하나님 섬기지말라고 해가지고 물리적으로 섬기지 더못하게 해놓았는데 아이고 그만두고 나니까 진짜 편하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지금 이방 땅에 유랑생활을 하면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조롱도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이유였지만 그 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수없다는 그것이 이 사람에게 견딜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교적 덜하지만은 연말만 되면은 우리 교회는 정반대입니다. 구역장 안하겠다 그래가지고 그거좀 제발하라고 쫓아다니느리고 볼일 다 보잖아요. 교사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한번 구역장되면은 좀 가끔 사표를 내야지 딴사람도 좀 할텐데 말뚝입니다. 절대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좀 그만두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기도 해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절대 사표를 안냅니다. 그거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해보세요.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각될때에 우리는 존재의 모든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건드리면 고통스러울정도로 마음이 상한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섬기고 싶은데 그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차단된것입니다. 성도들을 섬기고 싶고 그 하나님께 예배하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이끌고 싶고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올라가도록 무엇인가 그 성도들을 돕고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리고 싶은데 그것을 할 수 있는 건강도 있고 할 수 있는 마음도 있고 하고자하는 신앙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는데 할수없도록 강요를 당하는 가로막는것입니다. 가로 막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곤고하고 괴롭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주일을 거의 빠진적이 없거든요. 목사가 되어서는 더 그랬지만은 목사되기 전에도 거의 빠진적이 없는데 아직 전도사되기 전에 평신도 때 하여튼 이상하게 회사에서 뭐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었어요. 그래가지고는 나를 갖다가 수백명이 등산대회인가 뭔가 그놈의 것을 하는데 거기에 나를 갖다가 움치고 뛸수없게 내가 책임자가 되어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기획을 하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거 막 위에서 막 찍어눌러가지고 한번 그 교회를 못간적이 있었습니다. 직장 때문에 뭐 그때도 은혜 받았을 때인데 순교를 각오하고 뭐 이까짓거 나 이러면 사표낸다고 그러고 휙던져버리고 나왔어도 뭐 그것도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하여튼 그 때 내 생각으로는 이거 한번 나오라 그러는데 이렇게 해서 다 팽개치고 나와서 내가 더군다가 내가 거기에서 기독교 모임 다 인도하고 그러는거 아는데 이렇게 하는거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낮에 갔어요. 그래서 오후에 들어왔는데 하여튼 지옥과 같이 괴로웠습니다. 내가 지금도 그 결정이 잘한 결정이라고는 생각을 안합니다. 뭐 그 때는 어쩔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하여튼 그런데 다들가서 먹고 마시고 산꼭대기에 올라가고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고 나무에도 올라가더라고요. 뭘 딴다고 올라가더라고요. 올라가고 일등이 어떻고 이등이 어떻고 그러는데 나는 그냥 다 준비만 해주고 개울가에 앉아 가지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러는데 어떻게나 눈물이나는지 야 이러고 내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가 지금쯤 교회에서 한창 주일학교 오후예배 드리고 그러고 있을텐데 내가 여기와서 이러고 있나. 비록 내가 전도사는 아니고 목사는 아니지만은 아 정말 괴롭다. 막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예전에 은혜 못받았을 때에는 핑계대고 가끔 빠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때는 그렇게 괴롭지 않았거든요. 일반 은총도 괜찮더라고요. 꼭 그 은혜의 세계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 일반은총의 세계도 괜찮더라고요. 심지어 주일날 가서 술도먹고 그랬습니다. 변화받지 않았을 때. 그런데 은혜받고나니까 지금도 우이동 거기는 가고 싶지가 않아요. 그 골짜기를 생각하면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끝나는데 대판거리 싸우는거에요. 그 싸움 뜯어말리는 일까지 할래니까 더 눈물이 나는거에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것인가 이 지옥같이 괴로웠습니다. 그게 물리적인 환경에 의해서 내가 교회 나갈수 없었던 은혜받고 나서의 첫 번이자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그거 알아요. 여러분 하나님 섬기고 싶고 영혼들을 섬기고 싶은데 물리적으로 나를 섬기지 못하게 가로막아서 내 마음에는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섬기고 싶고 하나님도 나를 통해서 섬김을 받고 싶어하시는데 도저히 섬길수 없는 상황이되면 그 속에서 나의 섬김의 자리 그러니까 우리가 서 있어야할 그 자리를 떠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서 있어야될 그 사명의 자리는 하나님이 나한테 주신거거든요. 그것을 떠나면 그 자리는 비어있단말입니다. 그 비어있는 자리를 들여다보는 그 심정을 아느냐 이얘기입니다. 시인이 그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도했었는데 이제 내가 여기서 그렇게 섬기지를 못하고 이러고 있으면서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는 소리를 들어야됩니다. 그러면서 눈물이 흐르는것입니다. 눈물이 조금 흐르면 옆으로 흐르는데 많이 흐르면 골을타고 입을타고 흘러들어가는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주야로라. 그랬으니까 밤이나 낮이나. 낮에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저녁때는 그 얕잡아보는 비난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경건한 슬픔속에서 사로잡혀 있는 시인의 모습을 보는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게 그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물리적으로 섬기지 못하도록 막았습니까? 누가 떼어놓았습니까? 교회도 있죠. 여러분들의 섬김을 필요로하는 일이 교회에 있죠. 섬기고 싶다 그럴 때 섬길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교회가 있죠. 여러분들이 할 일이 있죠. 심지어는 이미 맡아가지고 있는 일도 있죠. 환경이 그것을 못하게끔 누가 물리적으로 여러분들을 격리시켜 놓지않았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달려올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섬길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수 있는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십니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아요.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느냐고요. 얼마나 좋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을 깊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이 상한 마음이 되어서 슬픔에 잠긴 이것, 이것은 정말 이 시인이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할까요. 그죠. 시간도 있죠. 건강도 있죠. 섬김을 필요로하는 일도 있죠.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얼마나 기뻐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것입니다. (어떤 회사 다니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렇게 그냥 정신 못차리고 일이 많아요. 회사에서 일이 많아서 퇴근 시간도 별로없고 그래요. 그래서 아니 왜 그렇게 당신만 그렇게 바쁘냐 그랬더니 다른 사람은 한가한데 자기는 일복이 터졌데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회사를 옮기기만 하면 사장이 자기를 그렇게 좋아해서 그냥 일을 맡긴다는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퇴근해도 자신은 퇴근도 못하고 있고. 휴일날에도 수시로 불림을 받아가지고 일을 해야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직장생활이 일이 죽어라고 자기를 쫓아다니는지 모르겠다고 이렇게 하소연을 하는데 조금도 불행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행복해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써 주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옛날에 많이 부르던 찬송가운데 그거있죠. 어둔밤 쉬되리니. 그 찬송있죠. 거의 어두운 밤이되고 일할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그죠. 일할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정말 잠시입니다. 시간이 지나가고나면 우리속에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우리의 섬김이 교회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그런 때도 온다 이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건강이 있고 여유가 있고 무엇이든지 하나님 섬길 수 있고 섬길수 있는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필요로하는것, 이러한 상황속에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 부담이 아니라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교회는 여러분 모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섬김이 필요하고 여러분 모두가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겨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을 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해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일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형편속에 우리가 있어서 주님께로부터 이런 기대를 받는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회주시는 대로 우리는 이렇게 섬길수 있는 교회를 주신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고백하며 살수있게된 그 진정한 행복, 그것을 느끼면서 힘에 넘치도록 하나님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것, 그것이 별난 인생이지 다른 것이 별난 인생이 아니라. 이겁니다. 다른 방면에서 별난 것들은 대부분 영혼을 잇대에서까지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 사람의 인생은 순간을 살아도 영혼에 잇대어져 있는 인생이요.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섬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쌓아두는 그런 섬김이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저를 찬송할찌로다. (시107:20-21)
시인들이 감격속에서 우리의 하나님 찬송할 때 빼놓지 않았던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 그 자체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훌륭한 찬양입니다. 가슴에 느끼는 것 없이 열광하면서 가락에 심취하는 것이 찬양이 아니라. 비록 곡조가 없고 가사가 없어도 하나님 한분으로 말미암는 그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우리에게 꽉 차있으면 가사도 없고 가락도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있으면 비록 그것이 가락도 없고 곡조도 없어도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그 감동적인 말 한마디가 하나님을 향한 아주 훌륭한 찬양이되는겁니다. 그거 왜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양과 이방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들이 드리는 그 제사의 차이점이 뭐가있느냐하면은 이방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열광, 자기 안에서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열광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말이죠. 막 어떤 인위적인 방식에 의해서 사람들을 열열하게 찬양하게 하려는 그런 시도들 있잖아요. 그런 시도들은 깊이 경계해야됩니다.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막 자극해서 아주 열광하는 기도를 하게하는 그런 인위적인 자극들 같은 것들은 전부다 옳지않습니다. 그 바알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방식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막 열광합니다. 열광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몸을 상하게 만들어서 피가 흐르게 하겠습니까. 그죠.
그러나 이 하나님을 믿는 여호와의 종교에서의 이 찬양은 출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인격에대한 앎에서 출발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서품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가는 앎에 진전이 없이는 그분을 진정으로 찬양할수 없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참된 지식의 진전 없이 그분을 찬송할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계적인 열광이지 성경적인 진실한 찬양이 아닙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되면 알게될수록 성도들은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진정으로 감사하고 감격하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견하게된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때에 빼놓지 않는 찬송 제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의 거룩하심, 그의 위대하심 찬송의 제목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는 자연계를 주장하시고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죠. 그런데 시편에 보면은 앞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찬송할 때 많이 나오는 찬송의 제목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니 찬양할찌어다.” 그래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앞도적으로 많은 찬송제목으로 등장하는것입니다.
그래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홀로 하나이시고 지존이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고 이런 모든 것들도 다 찬송의 제목이 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성도들이 그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가장 자주 오르는 찬송제목이 되는 이유가 무엇때문이냐하면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가장 실재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다시 다시표현할께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성품들이 있는데 자신의 삶을 돌아볼때에 삶에 현장속에서 가장 밀접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그 하나님의 성품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줄 이해할수 있죠. 무슨 이야기이냐하면은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라고 하는 것이 가슴에 사무치는 성도들의 노래 제목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냐하면은 자기가 그런 인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가치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죄를 짓고 가치가 없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잘 살지못하는데도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사랑해주시는 그 은혜의 혜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다. 가장 현실적입니다. 그죠. 선하심은 또 왜그러느냐 하면은 그 선하심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선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우선 그 자체가 이미 우리를 향해서 악을 행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악을 행하실수 없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실패, 그리고 우리의 허물까지도 사용하셔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자기의 계획을 이루시는 그런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선입니다 원래 그 선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의미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생각없이는 선을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데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잘못으로서 우리를 향해서 악으로 갚지를 않으시고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속에 두셔서 자기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행복이 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가지 성품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가장 뼈져리게 느끼지 않을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성품에 자신의 기도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주는 자비로우시니 우리에게 은혜를 배푸시옵소서. 주는 선하신 분이시오니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옵소서.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성품가운데서도 특별히 그 성품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굉장히 커다란 소망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찼을 때 자주 거론하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은 말이죠.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그 온세상을 다스리고 지배는 그 위대함 이런 것들이 그런 성품이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 이런 것들, 그런 것들도 성도들에게 있어서 자주 찬송의 제목에 오르는데 그래도 인자와 선 보다는 더 뛰어나지 않습니다. 잘 생각을 해보세요. 만약에 하나님이 온땅과 하늘 위에 홀로 위대하신 분이시고 그래서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세상을 감찰하시면서 그 공정하게 역사하시는 아주 뛰어난 하나님이 있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순결하고 자신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위대하시고 아주 정결하셔서 악을 행하는자를 단숨에 찔러멸하시고 그리고 고통당하는 자기의 의로운 백성들을 건지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런 성품이 놀라운 찬송제목이 될수 있겠죠.
그러나 오늘 이 107편의 무대가 되는 것처럼 자기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의 그런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족하다.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만큼 그렇게 가슴 깊이 다가오지를 않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처해진 상황에서 어떤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중에 어떤 분은 그럴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렇게 되면은 사람이 각자 자기 좋은데로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면은 신앙의 균형을 잃을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에요.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이렇게 균형을 갖고 그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알수는 없지만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어느 일부분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것처럼 치우치면은 항상 신앙 자체가 균형을 잃게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도 여전히 이 시편 107편에 나와있는 이 시인도 다른 시편에 나와있는 기록자들처럼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107편에서 특이한 것이 뭐냐하면은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노래하는데 그 인자하심은 그대로 나오는데 선하심에 대해서는 선하심이라고 나오지 않고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할때에 107편 1절에 보면은 똑같이 패턴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다른 시편에서처럼 나오는데 그 뒤에서부터는 계속 반복하는 것이 뭐냐하면은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하는데서 그 선하심이라고 하는 그 표현이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이라는 표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인생에게 행하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기이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일이거든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여기에서 이야기는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뜻밖에 만난 불행이, 고통,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리고 사람들에게 매우 행복을 가져다 주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그러한 하나님 안에 있는 희망을 발견하게하는 아주 기쁜 일들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느냐. 무얼 이야기 하다가 이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리고 그의 인생에게 행하신 그 기이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하게되느냐? 그거는 그 앞에 보면은 문맥이 어떻게 되느냐하면은 이 시편 107편에서 상정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큰 위기와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이유 자체가 뭐냐하면은 뭐 의로운 길을 걸어가다가 당하는 고난이라기 보다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아래 앉아서 고통을 받는데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에 있어서 큰 위기를 만났는데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것입니다.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그 다음에는 말씀을 보내어주시는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작용을 일으키는데 그 사람을 고치는것입니다. 그 사람을 고쳐놓고 나니까. 그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행하신 그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바로 그 중간에 들어있는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감사제를 드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의 우리의 모든 신앙의 경험에 있어서 예외가 거의 없을정도로 거의 공통적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정말 많지가 않습니다. 늘 그렇게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아야되는데 우리의 죄와 불순종, 그리고 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굳어지게된 우리의 무감각,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것이 뭐냐하면은 결국은 우리의 죄,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위기속에 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고 그래서 결국은 회복될때가 되면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간절하게 매달리게 되는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는 방법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보면 말씀을 보낸다는 표현이 마치 사람을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인격화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아주 흔히 사용이 되는 어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곳에서 말씀을 하나의 인격체로봅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내시는데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모로 말씀하시지만은 그러나 그 중에서 상당의 대부분의 말씀들이 사실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체 사라져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각오가 되지 않았거나, 혹은 우리가 고쳐지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말씀이 필요한데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이 우리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해주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습니다. 또 문제를 거의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찔러 쪼개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수 있는 그런 힘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체 많은 말씀들을 흘려보내게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위기속에서 있어서 우리들이 곤고해지고 위기속에 있어서 우리들이 고통을 받게되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기전에 항상 어떤 느낌을 받게되냐하면은 야! 진짜 기가막히다 어쩌면 그 시간에 내가 그렇게 거기에 있을 줄 알고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거기에서 전하셔서 내게 하시는 말씀처럼 듣게끔 하셨을까. 그러죠. 설교가 끝나고 예배가 끝나도 성경을 덮고 나도 계속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에게 작동을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아직 거두시지를 않으신겁니다. 보낸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환난을 만나고 시련을 당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우리들이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물론이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망가집니다.
그래서 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을뿐 누구에게도 위로와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거나, 또 위로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것을 느낄수 없었거나, 혹은 위로와 사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받은 그 고난과 시련에 비해서 매우 적을 경우에는 그 고난과 시련을 많이 격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 자기 자신이 많이 망가집니다. 그러니까 성격이 약간 성격이 일단 말이죠. 이렇게 살면서 사람이 성격이 원만하다. 그러면은 그것은 별종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지가 않습니다. 원만하다는 것이 많지가 않습니다. 대부분 가만히 들여다보면은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75%가 정신 병자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자기도 그런 사람일지 몰라요.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 사람은 정신병을 아주 굉장히 폭넓게 보더라고요. 우리도 분류하면 그 사람의 눈에는 정신병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정신병의 기준이 뭐냐고 묻는다면 또 할말이 없는것입니다.
어쨋든지간에 고난을 많이 당하고 시련을 당하면 더군다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 사람이 많이 망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지고, 자신도 파괴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진정으로 회복시키신다.라고 할 때의 그 의미는 단지 교회 안다니던 사람이 다시 교회에 다닌다. 뭐 그런 정도가 아니라이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교회를 지금 다니면서도 그 옛날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패역하게 살았는데 그것이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아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그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교회를 다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진정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머무르면서 우리 자신을 고쳐나가는 역사가 일어날때에 우리가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 안에 와서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게되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진다고해서 즉시 사람과의 관계가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멀리 치우시고 또 우리를 용서하시고 즉시 우리에게 말하자면 은혜를 배푸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안그래요. 사람들은 안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한번 사람들은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은 아주 쉽지만은 그 관계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바르게 돌아가는 것은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에 저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어서 관계를 깨뜨렸던 그 가해 행위보다는 훨씬더 크고 지속적인 어떤 보상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뢰를 회복해야됩니다. 자기 자신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합니다. 왜냐하면은 자신이 망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진 것은 자신에게 잘 적응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자신이 망가지는 것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훌륭하게 적응이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일부가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은 사람이 온순하던 사람이었는데 시련을 많이 당하고 고난을 만나면서 사람이 포악해집니다. 그래서 무슨 일에든지 화를 잘내고 막 주먹을 휘두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포악스러운 사람이됩니다. 자신은 그렇게 포악해져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서서히 잘못 바뀌어져가고 파괴되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져가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던 사람이 고쳐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안에 오래도록 머물러서 지속적으로 작용을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고치고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고쳐서 이러한 새 사람을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한번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같은 인간을 왜 이렇게 사랑하실까. 라고하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원망하며 살았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구나.라고 하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와 감격,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언제 느꼇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환경이 평안할 때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격하고 감사하고 그랬습니까?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결국 그런 환경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평안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의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눈을 뜰수 없도록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속에서도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련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 고난 보다도 훨씬큰 하나님의 사랑,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의지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때에 야! 정말 하나님은 인자하신분이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사람들이 우리에게 배푼 그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구나. 그리고 그 하나님께 대해서 깊이 감격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받기 전에는 그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치료하고 오랜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망가진 자기 자신을 고쳐서 자신의 영혼안에 새로운 속살이 돋아나서 자신이 새사람이 되어가는 놀라운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화를 경험하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신에게 행하신 선을 기이하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선이라고 그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놀라운 감사,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새로운 앎을 가지고 그분을 진심으로 찬양할수 있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고난과 위기속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찬송한 것도 아니고, 주께서 주신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 찬송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감사의 찬송을부르는 어떤 사람들은 살을 애이는 시련과 고난속에서도 이런 찬송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께서 모든 배풀어 주시는 것들을 후히 누리며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찬송을 할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찬송하게 만든 것은 환경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변화시켜서 새 사람을 만들어 나아가는 이 우리를 고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을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비록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서 깊이 좌절하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아래 앉았다가 그 삶이 너무나 견딜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더니 주께서 그에게 말씀을 보내어서 고치시고, 그래서 그에게 회복을 주셨다는 것 가지고 찬송을 하고있습니다. 그 분명히 그렇게 깊은 영적인 어두움속에 빠져서 곤고한 삶을 살게된 원인은 자신의 불순종과 죄악이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간절히 부르짖었더니 그 시련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노래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이 인자하신 분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자신이 깊이 깨닫게 된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의 길 속에서 무엇인가 우리를 향해서 안기뻐하실때가 있었죠. 그리고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곤고하고 어두운 세월을 보낸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침체의 책임이 우리의 침체가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지를 않으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짖고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셔서 죄가 있으면 깨닫게 하시고 불순종이 있으면 돌이키게 하시고 그리고 곤난과 시련이 있으면은 그것을 벗어나게 하시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근거없는 오해를 받으면 그 오해와 비난속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게 만드셔서 어떡 하든지 인생의 위기와 고난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한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신 그 성품안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이 선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하고 위대한 일들을 경험하게 한 사람들이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것이 감사제를 드리고 그리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속죄의 제사같은 것과는 달리 이 감사의 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감사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의 의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마음이 넘치는 가운데서 드리도록요구된 그런 제사란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 의미하는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속죄제가 되었던 화목제가 되었던 감사제가 되었던 어떻든지 이것은 제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 제사는 반드시 희생의 제물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희생해서 드리는 삶을 기쁨으로 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힘쓸 가장 커다란 일들은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그리고 그 성품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악하고 완악하고 강팍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감화를 받고 그 사랑에 감격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살지 않을수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드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들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적이 없는 것은아닙니다. 물론 우리에게 그런것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성경속에서 나타나는 성도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뭐냐하면은 환난과 시련이 많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받고 그분의 성품에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드리면서 살게되어있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지배적인 견해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이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감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아름다운 제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제사가 의무감에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찾아오셔서 배푸신 그 인자하심과 그리고 곤경과 위기 가운데 처해져있는 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그것을 깨닫는데서 비롯된 깊은 감격 속에서 그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가득찬 마음, 그 마음이 우리를 운전하여 살게하는 우리의 인생,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훌륭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했을 때 그 예배가 바로 이런 제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고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속에 충만한 감사의 마음이 차게되어서 그 감사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 삶, 그것은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제사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노예적인 삶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들이 인격적인 성격을 깊이 강조하여야 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신앙에 있어서 어떤 강제력은 사라지고 자신의 인격에 호소한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돌아가는 방법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도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리고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리겠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흑암과 사망의 그늘아래 앉아있는 동안에는 그는 이렇게 감사의 제사를 드릴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입을 열어서 우리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송하고 그 기인한 이름을 선포할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라고 이 세상에 있는 수 많은 백성들을 향해서 자랑할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향해서 배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기이하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이 자랑할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 아래 앉아 있는동안에 그의 마음은 지옥과 같았을것이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자랑거리가 없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보람이나. 기쁨 행복같은 것들은 더 말할 나위없이 느낄수 없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통속에서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의 보내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쳐지는 경험을 하게되자 그는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마음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목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싶어졌고 입을 열어서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고 이 세상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분이 행하신 위대한 일과 그 이름을 선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이 그러한 고백을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은혜와 감사가 가득차야합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만약에 우리들이 감사할 제목이라는 것이 단지 겨우 먹고 살며 살아온것에 대한 감사의 제목밖에 다른 것에서 감사의 제목을 찾을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너무 말초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는 먹고, 입고, 그리고 생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 은혜 만입이 다 있어도 다 찬양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우리에게 있어서 감사의 유일한 조건일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곤고하지 않도록 살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 경제적인 깊은 이 위기를 국가적으로 경험하면서도 우리들이 넘어지는가 하면 다시 일어났고 고통을 받는가 하면은 다시 서서 하나님 찬송하면서 살수 있게 만들어주셨던 이 놀라운 은혜,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굶지 않고 요즘같은 시대에 먹고 살고 건강을 유지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라고 하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누구의 고백처럼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데 이렇게 살아있고 인간의 자존심을 유지하면서 살수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받은 더 큰 은혜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을합니다. 곤고한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영혼의 회복의 은혜, 그리고 이 세상에 외톨박이처럼 굴러다니던 상처받은 인간들을 모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교제하면서 살게하신 은혜, 죄 가운데 고통하는 영혼들에게 다가오셔서 사죄의 은혜를 내리시고 그 영혼을 소생시키신 그런 놀라운 은혜, 부르짖을 때에 언제나 가까이 계서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수 많은 시험을 당했지만은 그 시험속에서 우리가 진멸되지 않고 때로는 이길 힘을 주시고 때로는 피할길을 내시면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더욱이 하나님앞에 견고하지도 못하고 충성되지도 못한 우리들을 주님이 주신 그 은혜를 따라서 우리들에게 직분을 맡기셔서 이런 저런 일들을 수종들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수있도록 만들어주신 이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이 오늘 이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 찬양하고 보는 수 많은 사람들 앞에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지난 살아온 1년이 곤고하고 힘들게 느껴지는 여러분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곤고하고 시련에 가득찬 길을 걸어왔고 힘들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곤고하고 시련을 많이 당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눈을 들어서 다시 한번 인생을 다른 방면에서 보면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기쁨과 우리에게 배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모여 앉으면은 나이로는 몇살쯤될까. 뭐 20대에도 다 나타나고 30대에도 다 나타나지만은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은 군대 갔다온 사람들이 군대 갔다온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 뭐 저같이 방위 갔다 온 사람도 할말이 없지만은 옆에서 들어보면은 한 사람이 이제 입을 열어요. 자기 군대가서 자기는 쫄병이었지만은 별처럼 군대생활했다. 그러면서 자랑을해요. 그게 말이되요. 그런데 하여튼 말을 시작해요. 그러면서 자기는 뭐 얼마나 편하게 했고 뭐 자기는 군대에서 얼마나 끝발이 좋았는지를 이제 막 이야기하는데 옆에 사람이 그 사람은 별 두 개 단 사람처럼 이야기를 해요. 서로 자기가 군대에서 편하게 있었고 자기가 최고였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다가 한 사람이 자기는 군대에서 무지하게 고생했다고 얘기하면 그 다음에는 다 똑같이 따라가요. 나는 더 고생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땅굴속에 들어가서 발에 동상이 걸리고, 양말까지 벋고 이런다고요. 그게 인간의 심리입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사람이 자기 시집 잘 갔다고 막 자랑하면 뭐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뻥튀기를 해서 이 세상에 자기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가 한 사람이 솔직하게 돌아서서 야, 나는 시집 잘못왔어 우리 시어머니 진짜 나에게 고통주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말문을 열기 시작하면 야 너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푸념들을 막 늘어놓기 시작해요. 이게 곧 무엇을 보여주냐하면은 삶을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달린것입니다. 그렇죠
물론 인간들이 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슬픔이 왜 없겠습니까. 어디간들 고통이 왜 없겠습니까. 어디간들 아픔이 없고 어디간들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정신병자 빼놓고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다 그런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정말 자신이 하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보면은 기도할때보면 하나도 안 행복해보여요. 기도할 때 우리 과거를 보면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고통받을 때입니다. 그죠.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데 남의 죄 까지 회개하느라고 말이지.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막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의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언제나 기억을해야되는 것입니다.
저는 추수감사절을 11월달에 이렇게 지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별로 그렇게 달갑지않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뭐좀 앞으로 땅겨서 하면 좋은데 시골에서는 언제하면 좋으냐면은 추수걸이 할 때 그 때하면 딱좋고 그런데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보너스 탈 때 그 때하면 나는 좋지않을까.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농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은 애들은 추수를 했는지 안했는지를 모르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 농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도시 사는 사람들한테 추구. 그것이 무엇일까. 보너스막 탈때 그 때에 아주 기분좋은 그런 뭔가 수확을 거둘 때 그 때 하면은 딱 맞지않겠나 생각이되요. 어쨋던지간에 이 추수감사절도 그렇잖아요. 해마다 한번씩 하는 이야기 입니다만은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깊이 감동을 받았는데
(그 매이 플라워를 타고 1620년에 인제 건너가잖아요. 물론 그 이전에도 건너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벌써 그 이전에 상당히 오래전에 사람들을 거기에다가 실려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가는데 사람들이 건너가서 일년동안을 애를쓰고 농사를 지었는데 이게 기후가 다르고 풍토가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뭐 말할필요도 없죠. 뭐가 제대로 되는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옥수수 심어놓은 것은 깜부기가 와서 먹고 그리고 맹수들의 습격이 있고 뭐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스러운 그러한 세월들을 보냈고 더욱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질병이었습니다. 풍토병과 같은 질병들이 그들을 괴롭혔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1년이 지났는데 농사는 흉년이들고 사람들은 많이 죽고 이제 1년동안 신대륙에서 삶속에서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쳐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아주 침통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이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어떤 신령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봐라 우리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올때에 하나님 잘 섬기려고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왔는데 1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농사는 흉년이 들고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죽고 혹은 상당수는 병들어 있는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 그 위에 흉년까지 겹쳐서 내년까지 어떻게 연명을 할지 모르는 이런 위기를 만났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결하지 못하고 우리의 죄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죄를 끊어버리고 일주일 동안 전국에 금식을 선포해서 우리 이주민들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서 회개하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구하자.
그때 한 사람이 난 반대요.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경겅한 신앙적인 제안에 대해서 반기를드니까 누구 왠일이냐 그랬죠. 그랬더니 그 사람 반문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우리가 여기 와서 못 얻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가만히 듣고 보니까 사람들이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여기 올때에 농사지어서 풍년이 들어서 잘 먹고 살려고 여기 왔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잘먹고 살려고 온것도 아니고 뭐 호강하고 호위호식할려고 온것도 아니고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오직 한가지.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방식대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길수 있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기는 물론 의료시설도 없고 우리를 도와 주는 사람도 없고 정부의 도움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거 우리들이 다 알고 하나님만 자유롭게 믿고 섬길수 있다면은 하나님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누가 우리의 신앙을 방해했습니까? 마음껏 여기에서 하나님 예배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방식대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우리들이 1년동안 그 지긋지긋한 핍박과 감시의 눈길을 하나도 받지않고 마음껏 하나님 예배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곤궁하다고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주셔서 우리 1년동안에 굶어죽은 사람 많지 않고 이렇게 해서 살게되었습니다. 자녀들이 계속해서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하면서 이만큼 살아있게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면서 일주일을 금식하지 말고 일주일을 축제일로 정해서 우리 하나님 마음껏 찬양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농사를 짖고 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모두 초청해서 형제의 우애를 배풀고 그렇게 감사하는 그런 절기로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아까 우리의 죄악을 인해서 이렇게 다 망가졌다고 그랬을 때 고개를 끄덕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손을 높이 들면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하면서 똑같은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좌절과 분노를 되 씹어야할 사람들이 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수 있게된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우리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난 한해동안 갖고 싶었는데 못갖게 된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루고 싶었는데 못 이루게 된 것도 있을 것이고, 꼭 필요한데도 하나님이 안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할수 없었던 것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중에 상당한 부분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응답이 올지도 모르고 또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나면 그 때보나는 지금 주신 것이 더 감사하다.라고 하는 고백이 흘러 나올지도모릅니다. 우리의 인생은 피할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습니다. 섭리는 감추어진 뜻이고 감추어진 뜻이 드러날 때 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으면서 사는 것 밖에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실하게 주님을 의지하며 사랑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선을 배푸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런 삶, 그것이 진실한 삶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다른 한편에서 한번 생각을 해봐야됩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 그분이 질문했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주신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살게하시고 은혜받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목양을 받으면서 살게 하셨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들을 만나서 아픔과 설움을 함께하며 살게하셨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외톨박이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곤고할때마다 우리를 찾아와서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주님 자신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할거나 시련을 만나서 가슴앓이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쳐주셔서 우리의 갈길을 보이시고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주셔서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능가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불순종을 능가해서 결국은 우리를 승복시켜서 주님 없이 살수 없다는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 앞에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저는 여러분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삶을 모두 헤아려볼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우선 여러분들 여기에 이렇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앉아서 추수감사 설교를 듣게 하실수 있는 이것 자체가 하나님의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생각하면은 우리를 쓸어버리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화하시는 한 방법이었을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기대를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끼로 찍어버리지 아니하시고 1년 더 여유를 주시고 또한 해 여유를 주시고 또한 해 여유를 주시면서 우리가 지금은 조잡하지만은 나중에는 우리의 신앙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를 기다리고 계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여러분의 이 모습 속에서 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을 이제껏까지 인도하셔서 끊임없이 살게 하셨습니다. 마음 아프게도 몇몇 지체들이 마음이 완악해 지거나 혹은 옛성품을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을 떠난 지체들이 없지는 않지만은 그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많은 대다수의 지체들이 이 교회라고 하는 나무에 붙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인바 되어서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께 만족스러울만치 충분히 변화되지 않았지만은 그러나 지금도 변화되어가고 있는 공사중인 성도들이 될수있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특별히 지난 이 금년한해는 우리 교회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한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이주한지 1년이된 후에 주신 그 교회의 성장보다도 더 큰 성장을 금년한해 동안에 주셨습니다. 얼마 안되는 수로 금년 450명 정도에서 금년 출발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금년에 상반기 동안에만 366명의 성도들이 등록하게 하셨고 그중에 95% 이상의 지체들이 지금 정착을 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던 많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피난처에 들어와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수있게 해주시고 교회를 그렇게 성장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고 충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로 변화시켜주셔서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로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운 은혜로 우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연초만해도 예배를 드릴 때 이층에 거의 사람이 없었는데 주일 예배 드릴때면은 이층에 사람들이 거의 차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배풀어주신 이 은혜는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특별히 금년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제정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많이 복을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감사하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러면서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고 교회가 지난 한해동안도 그저 온 교회를 뒤흔드는 위대한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지만은 그러나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정도로 곤궁하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지도 않고 모든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은혜중에 붙드시면서 이제껏까지 대체적으로 우리들을 하나님 교회 섬겨오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런 속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이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봉사하면서 1년을 이어오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한해가 끝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제 여기를 떠나고 가면 갈 약속의 땅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리고 거기에 이주할 수 있는 여력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 우리들이 몇 달 안있으면 새해를 거기에서 맞으면서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길을 하나님이 예비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한두가지 일만 일어나도 행복하다고 말할수 있는 일들인데 그렇게 해아릴수 없는 많은 감사의 제목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직하나 주님의 그런 신실하신 사랑, 우리를 향해서 배푸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배풀어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만입이 우리에게 있어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다 찬송할수 없고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배푸신 그큰 사랑과 은혜를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보답할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주님이 우리에게 배풀어 주신 이 은혜를 잊이 않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쉬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잊지않는 사람.
그러나 한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짓지않는 집에 심지 않는 포도나무를 먹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살 것을 예고하시면서 하나님이 한가지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죄인된 너희를 구원하신 그 여호와를’ 우리가 누리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우리가 행복하게 느끼는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의로움이 있어서 우리가 남들보다 특이하게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고 살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과 생각을 돌이켜서 주님이 우리에게 배푸신 은혜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오늘도 한번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지난 한해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없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아끼신 것이 없습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 아낌이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마음은 물론, 우리의 건강,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 우리의 가진 소유를 드려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고 인자와 그리고 우리를 향한 기이한 일을 행하신 그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고 우리의 인생의 참된 보람은 주님이십니다 라고 하는 이 고백속에서 사는 좋은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