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감사하라Ⅱ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공급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마6:30) 2001.11.11 주일오후 1
2. 영원한 감사의 제목(신26:10-11) 2001.11.18 주일오전 13
3. 은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후8:1-2) 2001.11.18 주일오후 24
4. 교제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빌1:5) 2001.11.25 주일오후 32
5. 시련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시66:10) 2001.12.2 주일오후 43
6. 우리를 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①(시52:8-9上) 2001.12.9 주일오후 50
7. 우리를 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②(시52:9下) 2001.12.16 주일오후 60
1.공급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30)”
감사절이 되었기 때문에 감사를 생각하는 것은 마치 어버이날에 꽃 한 송이 들고 부모님을 찾아가는 마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평소에 늘 하나님 앞에 이런 감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감사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 감사를 강조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지만 그러나 늘 그런 감사의 은혜 속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이런 절기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사를 한번 되새겨 보는 것도 마음 깊은 곳에 염려와 근심으로 말미암아 깔려있는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일깨워서 주님 앞에 다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은혜가 참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우리들이 이런 은혜를 새겨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우리에게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곳에 감사가 있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지 못하는 곳에 혹은 주님이 주신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는 감사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화: 어느 음식점 주인이 교회에서 왔다고 하니 좋아하더라는 이야기-교회 다니는사람들이 감사 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감사에 넘치니까 안 믿는 사람들도 그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곳에는 항상 감사가 있지만 은혜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곳에는 감사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하고 은혜에 대한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좋은 것이나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그런 것들이 곧바로 그에게 감사와 불평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즉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쓰디쓴 고통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다 불평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리는 것 없이 쓰디쓴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많은 좋은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고 쓰디쓴 고통의 잔을 마시면서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와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때 폐가 안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신앙이 없었던 때였기 때문에 재수 없다고 생각했었으 나, 지금은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폐가 건강하다고 한다-그 때 신앙이 있었으면 그 상황에서 도 달리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연약한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연약한 것이 많았으나 그것은 불편할 따름이고, 그 연약함이 할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하고 그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드는 족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기고만장했을 텐데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더 깨트려지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으니까 그 속에서 은혜의 요소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한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자랑할 것이 있으니 내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 내 약한 것을 자랑하면 사람들이 나를 하찮은 사람으로 평가할 것이고 오리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했습니다.
이처럼 은혜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삶에 대한 관점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은혜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감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는데, 우선 첫째는 우리들이 거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부터 은혜를 더듬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의 비유로 이어지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19절 이하의 본문은 언제 읽어도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묘사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앞에 나온 기도의 교훈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앞에는 예수님의 주기도문이 나오고 그 앞에는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즉 한 토막으로 굽이치듯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말씀하시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크게 확대되고 굽이치면서 마지막 주제에 대한 진리들이 이어서 쏟아져 나오는 형태입니다.
기도하는데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받을 평가나 평판을 기대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최고의 상급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 따로 기도 따로 되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기도의 문제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 육신을 위한 것에 집중되어서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도의 초점이 그런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초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냐를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주기도문의 큰 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곧바로 “너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하시면서 결국 마지막에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분부가 바로 주기도문의 기도의 성격이 그런 기도의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 적인 기도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방해세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염려와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염려와 걱정이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류가 무엇을 먹고 마실까’하면 괜찮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먹고 더 좋은 것을 마시고 더 좋은 옷을 입을까’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득 차게 되면 그 마음으로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분명하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할 자기의 사명을 저버리고 오히려 이렇게 자신의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 간구하며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름없는 기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기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초점의 문제입니다.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맞아야지 삶의 초점은 A인데 B를 기도한다면 외식하는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자와 기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에 이어서 공중 나는 새, 들의 핀 백합을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지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자기 육신의 생활을 위한 염려나 혹은 집착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부당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렇게 우리들이 먹고 입고 마시며 살아가는 이 문제가 사실 일반 은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특별은총이고 또 한가지는 일반 은총입니다. 특별 은총이나 일반 은총이나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인데 일반은혜는 접근의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이어서 하나님의 자녀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도 접근이 가능한 은혜의 세계이고, 특별 은혜의 세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접근이 가능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베푸시는 사랑은 특별하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이교도들까지도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은혜에 의해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힘을 얻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만드시고 그들의 악과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심판과 죽음을 연기시키시면서 그들에게 돌이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번영하게 하시고 발전하게 하시고 또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입고 마시며 살 수 있게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전세계에서 나는 식량이 균등하게 배분되기만 하면 이 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신 것은 구약시대의 맛나 사건과 같은 사건을 재현시켜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탐욕을 제거하셔서 부를 나누어 가지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의 의무를 우리에게 각성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주신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토대로 살펴보면 지난 한해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가운데 우리들이 매일 받았으면서도 소홀하게 생각하고 거의 감사해본 적이 없이 살았던 감사의 제목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비로소 ‘그렇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셨다고 말해야겠지?’하고 생각하는 것 말고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정말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물질적인 은혜들, 단지 먹고 입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교육, 우리의 건강, 철 따라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옷, 그리고 유난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 힘들 정도로 그렇게 뒤쳐진 생활을 하지 않도록 인간의 기본적인 문화의 생활을 누리며 살수 있도록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다시 한번 이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고 다시 그 감사를 가슴에 새기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요긴하고 우리의 신앙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지난 해에도 그랬고 지난해에도 그랬지만 올 한해는 정말 어려운 때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고생들도 많이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힘든 때를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올 한해동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이 공급하시는 놀라운 은혜는 교회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경제적으로 모두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 시기였지만 성도들이 열심히 헌금하고 자신의 물질을 쪼개어 드려서 교회가 1년 동안 운영되어 오는데 거의 어려움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내서 교회가 운영되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다만 그 도구가 되었을 뿐이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로로 사용하셔서 주님이 공급해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많은 헌금들을 드려서 교회가 이제까지 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론 지난 한해가 쉽게만 넘어온 것은 아닙니다. 늘어나는 교인들, 교육에 대한 강조, 늘어나는 교역자들과 여러 가지 많은 필요들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재정적으로 이 만큼이면 되었다고 넉넉함을 느끼게 하는 때는 한 주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무엇이든 잘해서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는데 도움이 되기 위한 아이디어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 돈을 사용하고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려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교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면 아슬아슬하게 하나님께서 생각지 않게 채워주셔서 감사하면서 또 한 걸음을 나가고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운영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깊이 개입하면 신앙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교회운영에 깊이 개입하면서 ‘정말 교회가 목사님의 교회도 아니고 성도들의 교회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구나, 그리고 주님 자신을 위해서 당신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교회구나’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간증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을 향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요 주님이 하나님의 교회에 공급해 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넘치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년에는 예년에 없었던 엄청난 일이 있었으니 시가 40억 가까이 되는 토지의 잔금을 모두 치르고 우리가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한해 전만 해도 계약금을 구할 수 없었어 발이 부르트도록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계약금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하고 마음을 조렸지만 불과 6개월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잔금을 거의 지불하고 그 토지를 우리의 소유로 넘겨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공급하시는 은혜를 교회 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해가 오면서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으며 섬기고 있는 교역자들이 생활비가 없어서 고통을 받거나 주린 적이 없이 넉넉하지 않은 사례금이기는 하지만 제때에 섬겨서 그들로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선한 계획을 짜고 교회 운영을 계획함에 있어서 돈을 보고 계획한 적이 없고 무엇인가 기도하면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성도답게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일들을 계획하면, 하나님이 그 계획을 기뻐하시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목양을 책임지고 있고 아울러 교회의 경영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고 우리들이 세워놓은 예산대로 거의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어떤 때에는 더 넘치게 채워주셔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고 또 이 땅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을 하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물질적인 공급을 통해서 많이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믿음을 가장한 자기의 성취욕 때문에 과다한 모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물질적인 공급을 의심하면서 과다하게 소심해져서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일에 있어서 도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도록 인도해 오신 것도 주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믿는 담대함 때문이었다고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11월에 들어서면서 저는 생각만 하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보면 우리 모두는 부족하여서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했어도 주님은 우리를 참 잘 돌보셨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공급해주시는 은혜가 교회에 더 넘친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연초를 시작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어깨가 무겁고 정말 허리가 휘는 것 같은 중압감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이 되어 보고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지출되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가 주님 기뻐하시는 일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시고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고자 하는 우리의 중심을 보셔서 돈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좌절되지 않게 해주신다는 살아있는 간증들을 1년 동안 간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물론 이 일들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토대가 되어서 헌금했고 넘치는 은혜의 감격을 누린 사람들은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액수에 관계없이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주님 앞에 살았기 때문에 그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서 거짓말처럼 교회가 운영되어 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전도사 시절부터 교회 생활하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결핍된 교회 경영의 마인드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단순히 그것은 경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때는 돈이 중요한지 성도가 중요한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교회 경영에 있어서의 편견들이 굉장히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우리들이 믿음을 가장한 자기 성취에 들떠서 그렇게 과욕은 부리지 않되 정말 진지하게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고 성도를 성도답게 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투자라고 한다면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는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오히려 모험적인 정신으로 교회를 운영해 가고자 할 때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고 싶은 소망들이 생겨났고, 그런 소망들이 이제껏 까지 교회를 움직여 오는 한 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마음을 움직이셨어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헌금했을 리 없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어도 그 은혜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그렇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내년에 우리 앞에 놓여있는 한해는 지난 한해보다 훨씬 불확실한 한해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이전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 그 어마어마한 건축의 문제들까지 걸려있지만 그러나 이 일이 피할 수 없이 주님이 시작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주님이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현재의 염려를 능가하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교회를 통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지난 한해동안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생활하셨고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 시기를 핍절함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나게 되었고 실제로 자신의 힘으로는 그 핍절함을 이길 수 없는 지체들은 보이지 않게 혹은 보이게 섬기는 성도들의 섬기는 손길을 통해서 균등함을 누리면서 한해를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 우리 육신의 필요, 먹고 입고 쓰면서 한해 동안도 가족들이 건강한 가운데 깊은 염려 없이 한해를 보낼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더 큰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으나 성과가 미미해서 마치 한해동안 여러분들의 꿈이 좌절된 것 같은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돌려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우리가 건강하고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신앙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언제나 살아있는 날 동안 내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기뻐하시면 다시 또 일을 시작하게 하실 것이고, 또 주님이 우리가 변하는 것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셔서 우리로 좀더 나은 생활을 유지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꿈들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경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 일들이 잘 성취되어서 모든 기업 위에 뛰어난 기업을 갖게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연봉이 계속 올라서 모든 동년배들보다도 뛰어난 대우를 받으면서 직장 생활하게 되기를 저는 바라고, 여러분들의 지위도 높아져서 보다 많은 부하직원을 거느리며 머리가 되데 꼬리가 되지 않는 직장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그러한 삶의 발전과 번영을 진심으로 기원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미래에 대한 과다한 욕심은 현재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잊어버리게 만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오늘을 살아가는 삶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한도 내에서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이루어질 가망성이 없는 높은 꿈을 꾸면서 현실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오히려 은혜로 여기지 않고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고통스러운 현실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성도의 마음속에 ‘주님이 여태껏 베푸신 은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지금도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이 물질적인 베풂과 은혜들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에 비춰볼 때는 지나치게 너그러운 것이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이런 은혜와 공급하시는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베풀어주시는구나’하는 겸비한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좌절된 꿈에는 분노가 뒤따르기 마련이고 감사가 없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를 아는 곳에는 감사가 있고 현재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꿈이 오히려 현재의 소망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한해동안도 작년보다 여러분들이 특별히 뛰어난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작년보다 여러분들이 더 열심히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올해도 여러분들을 입히고 먹이셨습니다. 시시때때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갖게 만드셨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모든 누리는 것들은 대부분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여러분들에게 공급해 주신 것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거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은 날 우리 식탁에 양식이 떨어지는 적이 없었고 입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헐벗은 몸으로 출근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느 때에 그것이 필요하고 어느 때에 우리에게 그것을 공급해 주어야 할지를 아시는 지식이 있는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한해동안의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적으로도 넘치게 베풀어 주셨고 우리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이 그렇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종종 목회를 하면서 물질적인 문제나 혹은 부채 대문에 고통 당하는 지체들이 있어서 마음이 아픈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분들은 또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는 실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논리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처럼 우리의 필요한 많은 물질을 공급함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의 응답으로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알아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이 이렇게 알아서 너희에게 공급해 주셨으니 이번에는 너희가 알아서 나를 위해서 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닐까요?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지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 위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인 명령입니까?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인 명령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이름의 높아짐, 이 땅에 실현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도록 부름 받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함으로 이 세상 어디에 내다 놓든지 간에 주님을 위해서 살수밖에 없는 사람,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어디다 내다놔도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며 살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시면서 1년 동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껏 한해동안 별로 감사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도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것에 대해서 한번 깊이 감사해 보십시오. 내가 먹은 양식, 그리고 내가 입은 옷,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많은 것들,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주셔서 누리게 하신 것인데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기도도 하지 않는 죄인에게 이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매일 공급해 주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일용할 양식,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의복과 마실 것들, 이것을 인해서 우리들이 깊이 감격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당신이 우리와 가지고 계신 관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 소중하고 감사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많은 물질적인 축복들,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넉넉히 누리며 쓰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채워주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는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요 단순한 의복이 아니요 단순한 먹고 마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급받은 그 많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 주는 필요한 양식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잊고 살았던 우리에게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절절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는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한해동안 우리가 주님께 늘 순수하게만 살았나요? 한해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격하면서만 살았나요? 한해동안 하나님 잘 섬기면서만 살았나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슬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힘입으면서 주님 찬송하며 살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원망하며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 섬기며 살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불순종하고 반항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와 참회로 아버지 앞에 늘 뉘우치며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강퍅함을 스스로 키우며 한해동안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앙의 태도 여하에 관계없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처럼 순종과 불순종, 신앙의 유무, 그리고 당신을 섬기고 안 섬기고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를 당신의 품에 불러 당신이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먹고 입게 하시고 생활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그렇게 공급해주시는 물질을 먹고 누리고 그렇게 소비하면서 거기서 얻은 힘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고 거기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삶을 살곤 하였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의 생각이 교차하니 하나는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셔서 물질적인 누림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기를 즐겼던 우리의 불 신실하던 삶이 두 번째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둘러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런 은혜 아래 살면서도 주님을 노골적으로 거스르며 살던 우리의 불 신실함은 서로 교차하면서 오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잘못하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한해동안 주님을 거스르는데도 우리에게는 육체의 힘이 필요했고 불순종하는데도 우리에게는 먹고 입을 양식들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이 그것들을 모두 공급해 주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애통하면서 고멜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 것을 기억합니다. 그가 이방 신에게 찾아가서 바친 그 포도주, 그리고 거기에 드린 제물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것을 이방 신에게 바쳤는데도 끊임없이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으로 남편 호세아를 보내어 고멜을 찾아오게 하신 그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신실하지 못한 고멜의 그 불순종과 타락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임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처지가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우리는 그 힘으로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거스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할 때도 먹이셨고 순종할 때도 입히셨으며 주님을 멀리 떠날 때도 마시게 하셨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도 먹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잊지 말고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한해동안 살아온 이 모든 삶,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의 모든 물질적인 공급, 우리는 단 한순간도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누렸던 것,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앞으로 누리게 될 모든 것들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은혜를 안 성도의 마음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감사의 정이 있고, 그 감사의 마음이 남아있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런 크고 놀라운 사랑을 주님께 입으면서 가치 없는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이 큰사랑의 호의를 입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홀로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는 주님의 은혜를 모르고 산 막돼먹은 자식이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철이 들어서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입히고 먹이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거스를 때에도 주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셔서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시되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공급자가 되셨는지를 가슴에 새기면서 우리의 꿈도 우리의 희망도 그분에게 걸고 우리의 삶의 이유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며 우리의 염려와 근심도 그분의 손에 맡겨드려서 주님이 이렇게 공급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게 하시고 싶었던 삶,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우리들이 삶으로서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주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 이외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물질과 우리에게 주신 모든 번영의 축복들이 사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나쁜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없고, 우리가 누리고있는 좋은 것 중에 우리 스스로 얻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입니다.
1년 동안 힘쓰셨겠지요. 애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쓰고 애쓴 모든 사람들이 넉넉한 물질을 공급받으며 한해를 산 것은 아닙니다. 힘쓰고 애썼지만 빈손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는 실패하고 더 큰 부채를 안고 슬픔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이 한해동안도 우리의 생업에 우리의 직장 생활에 복을 주셔서 우리로 한해동안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큰 은혜와 사랑을 깊이 기억하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여러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니 주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사용하면서 그렇게 섬기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정당하게 누리고 하나님을 봉사하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긴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막을 수는 없고 누구도 그것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푸셔서 물질적으로 넉넉해지거든 조금 나아진 삶을 사셔도 괜찮습니다. 지하실 공기 안 좋은 곳에 살던 사람들은 주님이 공급해주시면 지상으로 옮아가셔도 괜찮고 작은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함께 교육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조금 넓은 아파트를 누리며 살아도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넉넉하게 공급해주시면 건강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초라한 식단을 조금 개선해서 가족들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넉넉한 식단을 짜는 것도 죄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도를 넘어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주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살 특권이 있고 또 그렇게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은혜에 대한 찬송이 배가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하나의 명제와 또 하나는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탐닉하거나 그것을 누리는 것이 지나쳐서 그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근본적인 의도인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에 방해가 되기까지 그것을 누리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 두 명제 사이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한편으로는 누리면서 하나님을 더 찬송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축복들이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이 소명에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자기를 조절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놀라운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해서도 주시기는 분명히 주님이 주셨는데 그것들을 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히려 멀어졌던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지혜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지만 그것을 사용한 사람은 솔로몬 자신이었고, 솔로몬이 아마 그렇게 지혜로운 왕이 되지 못하고 평범한 왕이 되었더라면 오히려 그렇게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결국 지혜는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솔로몬이었고, 솔로몬이 주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서 불행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지혜를 사용한 솔로몬 안에 있는 불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 이 모든 공급과 축복들은 앞으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저절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들은 많이 받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조심해서 주님이 공급하신 물질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알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노력해야 될 것이며 또 주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고 결핍한 느낌을 갖는 사람들은 그 결핍 때문에 오히려 불 신앙으로 흘러서 더 공급해주실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를 오히려 불 신앙으로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잘 간수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물질적인 축복과 이 은혜들은 주님이 우리와 가지신 관계를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이었으니 한해동안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해를 지나면서 주님께로부터 한해에 받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그 한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남은 두 달 동안도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영원한 감사의 제목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내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26:10-11)
이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모두 인도하고 이제 마지막 가나안 땅이 가까이 보이는 지점에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회고하면서 광야 생활을 회상하는 그 회상과 함께 적어 내려가고 있는 당부의 글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라고 할 때 그 ‘신’은 우리들이 ‘신신당부한다’ 할 때의 그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신당부하며 명령한 기록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 이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설교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모세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또한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26장에 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추수를 할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지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감사에 대한 명령을 하는 가운데 신앙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의 최초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사람인데 애굽에 가서 번성한 민족을 이루었으며 그래서 애굽의 바로의 치하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광야의 길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고 주님이 축복해주셔서 추수하게 하신 처음 맏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그런 감사제를 드리면서 두 가지 하여야 할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과 나누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초의 감사절을 지키면서 해야 할 일이라고 지금 모세에게 신신당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오늘 2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이를 때에 신앙의 고백을 하면서 회고하여야 할 것을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에서 건져주신 구원의 은혜와 그리고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이 두 가지, 다시 말하면 구원의 축복과 그리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 이후에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구원의 은혜와 그리고 축복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이 고백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절기를 지키도록 분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가 안 가는 점은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첫 번째 감사제를 드리면서 무엇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가 하면 우리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 사람인데 애굽에 가서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이제 감사의 절정은 그 다음인데 거기 바로의 압제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제를 드리는 사람 가운데는 그 애굽의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해서 홍해를 건넌 사람이 두 사람을 빼놓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고백을 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들을 건져내신 구원의 행동이 한 개개인을 향한 동시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향해서 행하신 그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후손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 조상들을 애굽에서 건져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을 건져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자신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수많은 감사제목을 가지고 있어도 그 모든 것보다도 뛰어난 단 한가지의 감사제목이 있으니 그것은 애굽과 같은 죄악 된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숨질 때까지 마르지 아니하는 감사와 찬송의 제목이고 우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자자손손 우리의 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그런 감사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사는 동안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번성할수록 바로에게 압제를 받는 고통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럽고 고달픈 노역에 종사했고 심지어는 나중에 그들의 번성함을 우려하는 바로의 정책 때문에 아들을 낳으면 즉시 죽여야 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들에게 아무 희망도 없었고 그 애굽 바로의 치하에서 더럽고 치사한 노예 살이, 짐승처럼 살다가 동물처럼 죽는 것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떤 희망적인 미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 모세를 보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한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430년 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내가 네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리라”고 하신 그 언약이 정확한 실행이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지내는 동안에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잊었고 옛 조상들의 하나님과 동행하던 아름다운 신앙의 이야기들은 전설처럼 들었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어떤 기대도 이들이 갖고 있지 않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자기의 백성들이라도 자기의 선택된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하감 하시고 자기의 사람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질 계획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바로의 지배 아래 있었고 누구도 그들을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소명을 받은 모세가 바로 앞에 나아가 내 백성을 놓아달라고 말했을 때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랴 하면서 한번에 모세를 그 궁에서 내어쫓았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바로의 마음속에, 애굽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려고 하는 어떤 자비의 마음도 없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더욱 희망이 없는 나날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구원의 행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애굽의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 열 번의 그 위대한 재앙은 애굽 왕국에 지축을 뒤흔드는 위대한 경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만심에서 깨트려졌고 자기의 신들을 향한 모든 의뢰와 경외 심들이 산산이 부서졌으며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과 양 치던 목동이었던 늙은 그 모세가 한없이 큰 인물로 보일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태도가 바뀌었으니 그것은 바로 지축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처음 난 모든 것들을 죽이시는 징벌 가운데 바로의 마음을 꺾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속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전 세계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숙명적인 노예 살이에서 구출 받은 적이 없었고 더욱이 그들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며 추격하는 600승의 병거를 뒤웅치는 홍해의 바다 물 속에 수장시키면서 불렀던 미리암의 소고에 맞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엄한 찬송은 애굽의 전역에 메아리치고 홍해의 물결처럼 흘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첫 세대는 그 감격이 어떠하였을까요? 애굽의 치하에서 노예 살이로 살아가던 그 종살이 콤플렉스에 일생을 매어 살던 아무 희망이 없는 그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은 바로 자기들을 선택된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구원 행동이었기 때문에 자신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하나님의 위엄에 대해서 한없이 감사하고 그 위대한 힘에 대해서 한없이 기뻐하는 그런 감격과 찬송으로 어우러지는 그런 감격을 그들이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었습니까? 지금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천국의 백성들과 함께 단정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지만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때 여러분들은 죄와 사슬에 포로가 되어 있었으며 마귀와 앞잡이로 생활했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원수처럼 여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기쁨과 보람으로 여기며 살았던 막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도 하나님을 먼저 본 사람이 없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주신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이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며 수많은 죄를 물처럼 음식처럼 먹고 마시며 주님의 진노아래 살다가 하나님의 생명과는 관계가 없이 비참한 인생을 마치고 지옥 불 속에 던져져야 했던 우리들을 주님이 구원해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의 즐거움을 구하고 향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며 인생의 날이 오래면 오랠수록 아버지의 진노를 쌓으면 살수밖에 없는 숙명적으로 죄의 길에 붙어서 걸어가던 여러분들을 주님이 건져내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많이 배우고 우리보다 정직한 사람, 우리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이 많이 있는데 왜인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우리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뽑아내어서 아들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같이 아무 쓸모 없는 벌레와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주님은 때가 되매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피로 우리를 속하셔서 주님의 자녀가 되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믿고 구원받기로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며 주 앞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피 길을 열어놓으셨지만 자기의 의의 신발을 벗고 그 피 자국을 밟고 아버지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영원한 나라를 향해서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셨고 잠시 살다가 썩을 육신을 입은 사람들이지만 거듭날 소망을 가지고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살 사람들로 주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만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어떤 선한 것도 우리에게 없고 어떤 장점도 우리에게 없었지만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주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 그 피로 우리를 사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어두움의 나라에서 광명 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는지,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주의 친 백성으로 삼으셨는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그런 구원의 놀라운 은혜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미친 이 구원은 복된 것이기에 살아서 숨쉬는 날 동안에 그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내게 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마치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기본점수이고 그리고 그 위에 진짜 우리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바닥이고 그 위에 더 많은 축복들이 쌓여야지 만 겨우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우리의 탐심이지 하나님의 교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이 살아있을 때는 주님이 자기와 같은 쓸모 없는 죄인을 구원해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에 대한 펑펑 우는 감격이 있습니다. 왜 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피로 나를 구원하셨을까?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의 세계를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면역이 되지 않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가슴속에서 기정사실로 익숙해지지 않고 생각할수록 날마다 그 은혜가 감사하고 날마다 그 구원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우리를 이렇게 사랑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우리의 부모도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도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모양으로 그 형상을 쫓아 창조되어 주님을 한없이 기뻐하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살도록 만들어진 인간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죄 가운데 휘둘리며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자기의 순전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33년 동안 종처럼 우리들의 발을 씻기며 일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피 흘리게 하심은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맞아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속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찌할 수 없고 숙명적으로 죄에 매여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무 희망이 없는 종살이 속에 살아가던 우리들의 그 죄악 된 생활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시고 그 순결하신 몸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셔서 우리 대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당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그 피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그 처절한 고난이 아니었다면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빚 덩어리인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우리는 주님께 그 은혜로 산 사람이 되었으며 이전에는 우리가 주님을 모르고 살며 우리의 존재 전부다 마귀에게 복종하고 지옥의 권세에게 자기를 다 바치며 자기를 신처럼 여기며 사는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심으로서 우리를 얽어맨 모든 죄악의 형벌을 끊어버리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기쁜 복음이 전파되어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건만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우리의 마음에 이 복음이 믿어졌습니다. 우리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우리를 그 모든 죄악과 형벌에서 구원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이 복음의 약속을 믿는 마음이 생겨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선해서 이 복음이 믿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해서 이 복음이 우리에게 믿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 중의 괴수에게 그 죄보다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심지어는 주님의 나라에 이른 그 후에라도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이 복음이 믿어지게 하셔서 우리를 주의 자녀 삼으셨을까? 그 궁금증은 마지막에도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풀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리하던 사단의 자식이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원수들이었고 죄와 함께 살고 죽던 사람들이었는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에게 선물로 믿음을 주셔서 이제 주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그런 빚진 존재들이 되었다는 것 이외에 우리들이 확인할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그 확인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 가운데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 그 구원의 은혜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동안에는 항상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자기와 같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탁월한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고난도 이깁니다. 자기처럼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폭풍과 흑암 속을 지나는 인생에 시련 속에서도 주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시며 자기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살게 하신 이 구원의 은혜는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만 입이 다 있어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노래할 수 없고, 우리 입술에 혀가 굳기까지 우리의 혈관의 피가 식기까지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사랑은 송축하여도, 송축하여도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일년동안 우리는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이 세상에 사소한 걱정이 묻혀서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이 큰 구원의 은혜,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예수 생명의 은총을 그것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먹고 입고 마시는 작은 염려,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속히, 속히 움직이시지 않는 마치 하나님을 자신의 노예처럼 삼으려고 하는 이기심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의무를 잊고 살아온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인해서 우리 속에 감사가 넘치고 나면 아무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고 욕망도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내가 받았고 이제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이 동행해주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면 충분합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구원의 감격이 넘치던 우리들에게 늘 있었고 펑펑 우는 감격 속에서는 항상 감사의 제사를 주님 앞에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나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그 구원의 은혜를 기뻐할 때마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우리의 즐거운 의무는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고 살아서 숨쉬는 날 동안 우리들의 기쁨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을 누리면서 사는 그 기쁨이 우리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확신과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쁨이 우리의 삶 전체를 쌓고 그래서 우리의 전 삶은 감사의 열매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일 먼저 이런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인해서 우리에게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이 여러분들에게 일생동안 감사의 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 큰 기쁨과 감사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회복하는 복된 시간이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 구원의 놀라운 은혜, 그리고 내가 이제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 그런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감사하라고 지시하는 마지막 제목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낸 그 구원의 행동 이후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광야에서 베푸신 은혜와, 그리고 또 하나는 가나안의 정복의 과정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뛰어서 광야로 뛰어나올 때는 충만한 믿음으로 뛰어나왔지만 광야는 믿음 하나로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각적으로 그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광야의 긴 세월동안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주님이 내리시는 만나와 주님이 입히시는 의복, 그리고 주님이 신기신 그 신발로 그들은 헤어지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고 굶주리지도 않는 일평생을 광야에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정말 신실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을 위해서 근심하기 전에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먹는 문제가 아마 장난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잠시 후 여러분들은 떡 한 가마를 먹어치우실 것입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한 가마, 순식간에 없어져서 뒷줄에 서면 못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먹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200원 짜리 농심 라면 하나씩만 끓여도 한끼에 6억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마 어마한 식량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무엇으로 해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새벽에 나가보니까 온 천지가 하얀 가루로 쌓였습니다. 그것을 걷어냅니다. 언제 내렸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고 살 때만 아닙니다. 어떤 날은 그것을 먹고 가서 하루 종일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것을 먹고 힘을 얻은 다음에 기적의 불기둥 아래서 그 불빛을 받으면서 우상에게 절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지쳐서 잠이 들고는 그 이튿날 아침에 우상숭배하기 위해서 소진된 체력을 채우기 위해서 들판으로 걸어나왔을 때, 그때도 만나는 있었습니다. 이게 광야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섬기며 살 때에만 주님이 우리에게 입히시고 먹이고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거스르고 주님이 주신 물질로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심지어는 자기의 배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며 이기적인 삶을 살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음식을 먹고 가서 나를 대적하고 이방의 신을 섬기고 세상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이것을 통해서 너희를 내 사랑이 신실함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금년 일년을 더더욱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 말고도 또 금년 한해 동안도 주님 앞에 빚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이제껏 먹고 마시고 그리고 지금 누리며 살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간절히 기도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줄을 미리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로 베풀어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며칠을 지내는 것도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곤고한 영혼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은 그것 못지 않게 힘겨운 일입니다. 주님을 거스르고 주님을 멀리 떠나 살던 사실상 주님의 품에 있지 않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다시 돌아오라는 은혜의 손길을 내미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복음의 빛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길이 힘들다고 벗어나서 가시나무떨기 사이에서 떨고 있을 때에 여러분들을 자기의 것이라고 부르시면서 찾아오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여러분들을 건져내신 후에 핍절한 여러분들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퍅하기 짝이 없는 여러분들의 가슴을 녹이시던 분이 누구였습니까?
어두운 세상에서 영혼의 목마름은 육신의 허기짐보다 더 진하였고 쓰러질 것 같은 때에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마셔도, 마셔도 해갈될 수 없었던 여러분들의 영혼의 만나를 내리심으로서 그 하늘의 양식으로 여러분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살게 하신 그런 영혼의 회복의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여러분들에게 이 일을 행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주일 동안 짐승처럼 살다 와도 주일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부르시고 하루를 아무렇게나 살아도 이튿날 성경을 펴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의 힘과 우리의 공로가 아니오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하는 고백 말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물론 한해동안 이루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도 있고 감사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고통들이 여러분들을 짓누른 경험도 있습니다. 더욱이 믿음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는데도 감당할 수 없이 계속되는 고난과 어려움은 어떤 때는 주님의 말씀보다는 마귀의 속삭임이 우리의 귀를 기울이게 할 정도로 낙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사모하는 것이 있고 얻고 싶어하는 것이 있더라도 우리가 얻고 싶어하는 것은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들입니다. 저는 감사절마다 인용해도, 인용해도 지루하지 않는 한 예화가 언제나 있습니다.
(예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신대륙을 건너가서 일어난 이야기)
보십시오. 문제는 어느 관점에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가고 미래에 대한 강한 욕망을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감사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삶은 불평할 수밖에 없고 불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한해동안 살아오면서 이루지 못했던 것들도 있고 오늘 감사절 설교를 들으면서 감사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칠흑과 같은 인생의 어두운 한복판을 지나는 지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구원의 은혜와 아침마다 새로운 성실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이 공급하시는 은혜는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인해서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그 안에 있는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후 경험한 놀라운 은혜는 가나안에서의 은혜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정복의 놀라운 역사는 정말 기록적인 역사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 놀라운 정복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했다고 자랑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친히 역사 하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이길 수 없는 대적들을 이기고 꺾을 수 없는 원수들을 잔멸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들은 선진민족들이 사는 가나안 땅을 접수하고 거기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깃발을 높이 꽂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 모습은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이 우리의 기업이신 예수 안에서 복된 삶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 추수를 맞으며 그들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면서 누렸을 그 감격을 생각해보십시오. 조상대대로 그들은 정착지가 없는 인생을 살았고 그들은 농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며 애굽에서 농경의 문화를 맛보았다고 하지만 곡식 한 톨, 이삭 하나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단지 남의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군들에 불과했고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약속대로 심지 않은 포도 원에서 포도를 거두고 뿌리지 않은 밭에서 곡식을 거두며 짖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거기에서 누리게 하신 그 놀라운 축복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우리들의 원수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안식을 앞당겨 맛보면서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세상과의 싸움을 이겼으며 우리 믿음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도전해오는 우리의 부패한 자아와도 부지런히 싸워서 여러분 가운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룩한 생활에 있어서도 현격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니 받고 미끄러진 사람들이 없다고는 아니할 수 없지만 미끄러진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견고히 서서 어두운 세상 속에서 주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살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완전히 넘어져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복된 싸움에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들의 응원군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 사랑과 은혜를 힘입으면서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이후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더욱이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맛본 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교회로 인도하셔서 여기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고 성도들의 사랑과 교제의 섬김을 한 몸에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이처럼 성장된 신앙을 가지고 자라왔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누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시킨 것이며 누가 여러분들을 섬겼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이 여러분들을 섬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릎을 꿇고 여러분들을 섬기신 것이니 또한 얼마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맛본 놀라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낙심하고 시련에 빠질 때마다 시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어깨를 일으켜 세웠고 그리고 똑같은 실패를 예전에 경험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서 있는 지체들의 경험과 그리고 그들의 넘치는 위로와 도움은 복이 되었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우리는 이 교회 속에서 공급받았습니다.
여러분 말고 저 자신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도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던 순간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낙심되고 실패에 가득 찬 마음이 되었을 때 여러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고 나도 여러분들과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의 말씀을 지팡이로 붙들고 일어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가 그러할진대 여러분들은 더 많이 그랬을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한 지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죄악 된 세상을 많이 방황하다가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련이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시련과 고통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염려하면서 그렇게 시련과 고통이 계속되니 어떻게 하여야 되는가. 그랬더니 그 지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아무리 시련이 많아도 고난이 많아도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있는 한 저는 살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고통과 시련이 올 때 사실 고통과 시련에 진 것이 아니라 외로움 때문에 패배했지만 이제는 내가 사랑할 교회가 있고 기도해주는 성도들이 있으니 나는 살수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성도가 누구입니까? 타관 땅과 같은 낮선 순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성도들의 고향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성도들이 이 세상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은 자기와 똑같은 사랑을 입은 자녀들을 두셔서 그들이 함께 순례자로서 어깨동무하고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과 같은 시련의 날에 서로 어깨를 기대며 체온을 나누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주님이 지난 한해동안에 우리 서로 서로가 어깨를 빌려주며 그렇게 의지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한해를 살아왔습니다. 낙심될 때 확신에 찬 지체를 보며 믿음을 갖고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질 때 아하바의 사랑의 감격에 흐느껴 우는 지체들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우리도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결심을 새롭게 하였던 추억들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 그런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축복을 누리면서 지난 한해동안 인도해오셨고 지금도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세워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염려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과 우리에게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그 약속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한 것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자기는 자기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겠노라고 외쳤던 하박국은 포도나무와 무화과와 외양간의 송아지가 사소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시고 그리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뽑힌바 된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한 사람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엄청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업이 되시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마음껏 누리고 기뻐하며 하나님 자신으로 만족한 삶을 살 때 여러분들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이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셔서 근심 위에 모든 근심을 면하게 하시고 은혜에 대한 감사 위에 감격을 더하게 하셔서 일평생 여러분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러분들의 신앙의 고백이 주님을 향한 찬송이 되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런 감사 속에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3.은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지난 주 오후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사할 제목 가운데 먹고 입고 마시고 쓸 것을 풍성하게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본 것이 육적인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제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저희 교회에서 두어 번 설교한 기억이 납니다. 그 때마다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던 말씀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마게도냐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아주 부유한 축에 속하는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린도는 항구 도시였고 돈이 많은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부유하면 가난한 사람만 예수 믿으라는 법이 없기 때문에 교회도 좀 넉넉해지기 마련이겠지요.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고 거기에 있는 성도들이 굶주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에 부름을 받았으니 좀 야박하게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자기 교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당한 데는 자기 교구 남의 교구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두 교회와 함께 힘을 합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성도들을 헌신시켰습니다. 그 때에 많은 교회들을 참여시켰지만 그러나 이 마게도냐 교회의 헌신이 유달리 돋보였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돕도록 촉구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런 호소를 했습니다. “어쨌든지 이 복음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너희 이방 사람들에게 미쳤으니 너희가 이 복음에 있어서는 유대인들에게 빚진 사람들이 아니냐. 너희가 그런 사랑의 빚을 졌으니 이번에는 너희가 이 어려움을 만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도움으로서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균등하게 이 어려움을 면하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 속에서 고린도 교회에 다시금 이 헌금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사도 바울이 보기에 이 고린도 교회는 넘치는 헌신으로 이 일에 참여한 것 같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헌금해서 교회가 운영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헌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운영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은 헌금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넘치게 헌금을 했습니다.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액의 연보였고 그 연보를 받아들었을 때에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아마 적잖이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겉모양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사람인데 자기의 몸을 다 바쳐서 섬기는 탁월한 헌신의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놀라움으로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성도가 거액의 헌금을 했을 때 우리는 ‘감춰둔 돈이 많았었구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가득 찼으면 그렇게 넘치게 헌신했을까’라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냐 교회는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사도가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마게도냐 교회에 바라던 바가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넘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사도 바울 일행도 이 선교를 위한 구제헌금을 시행하면서 각 교회에서 얼마쯤 나올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점에서 사도 바울을 비롯한 그 일행의 생각을 깨트려버렸다는 것입니다. 우선 액수의 면에 있어서 이 교회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헌금을 했던 것 같고 두 번째는 액수뿐만 아니라 그렇게 헌금을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철저히 헌신하는 그러한 영혼의 영적 헌신의 과정이 먼저 있었다는 것 때문에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한없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넘치도록 마게도냐 교회가 헌신했는데 마게도냐 교회가 놓여있는 상황이 어떠했느냐면 그 교회에 두 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하나는 환난의 시련을 많이 당한 교회였고 또 하나는 극도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헌금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진 것이 있어야 헌금을 하지 가진 것이 전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직 직장에 다니지 않을 때에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나니까 너무 바치고 싶은데 바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제 마음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깨달음을 많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죄인의 고통보다 훨씬 큰 것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신자가 그 사랑을 도저히 갚을 것이 없다고 느낄 때 그때 그 마음에 느끼는 고통이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보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데 주님 앞에 무엇인가 드릴 수가 없을 때 느끼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 찬송을 부를 정도의 상황이 되게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이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오죽 바칠 것이 없으면 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겠습니까? 사실은 몸만 바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물질도 드리고 싶고 건강했으면 건강도 드리고 면류관이 있으면 그것이라도 벗어서 드리고 뭐든지 그렇게 드리고 싶고 젊음이 있으면 더 많은 헌신도 드리고 재능이 있으면 남이 섬길 수 없는 자리에서 주님 섬기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 어린 나이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지 모릅니다. 시간이 있는 사람은 그 시간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쁘고, 젊음이 있는 사람은 젊음을 드릴 수 있어서 좋고, 물질이 있는 사람은 물질을 드릴 수 있어서 좋고,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그 얼마나 좋고 귀한 지 모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누구도 그 사람의 섬김을 받아주지 않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니아 교회는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교회였습니다.
(예화: 옛날에 모시던 목사님이 가난한 교회에 집회를 가셨는데 신문지에 싸서 올려둔헌금이 40원 이었다는 이야기-만 배나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도 40만원 밖에 되지않았다)
(예화: 지하실 열린 교회에서의 가난했던 이야기)
그리고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환난이 많은 수의 시련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온다고 해서 모두 시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외환 위기가 왔을 때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죽는 줄 알았는데 돈 있는 사람들은 그 때 더 행 했다- 차가 없으니 길 잘 뚫리고 은행에 맡겨둔 돈은 이자가 올랐다)
이 마게도니아 교회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환난 날에 환난 때문에 오히려 이익을 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환난이 와도 시련이 되지 않는다면 환난이 환난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성도들은 환난이 곧 시련으로 이어졌고 그 환난은 수많은 시련에 시련을 가져왔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번 잘못하고 나니까 외환 위기가 몰아닥치고 환난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외환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문제가 없었을까만은 그 때 그 문제가 터진 것은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일천억달라만 현찰이 있었어도 우리 나라가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답니다. 우리는 한번도 당해보지 않았기에 그 환난이 무슨 환난인가 하고 있었는데 3-4개월이 지나면서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광경들이 시작되었습니다. 회사에 잘 다니던 사람들은 강제로 쫓겨나고 보란 듯한 직장에 다니던 사람들은 모두 도산하고 출근 가방을 들고 관악산으로 도봉산으로 어슬렁거리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반듯하게 살아가던 소시민들이 거리의 노숙자로 내몰리고 가족은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산지사방 뿔뿔이 흩어져서 부모를 찾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시련 속에서 정신과 육체가 함께 황폐해 갔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를 비관해서 소중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것을 보면 환난이 가져다 준 이 시련의 힘이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마게도니아 교회가 이런 시련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교인들마다 각기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아무개 하면 온실의 꽃처럼 곱게 신앙생활 하면서 자라난 사람, 또 누구는 하나님 앞에 복을 많이 받은 사람, 또 누구는 말씀에 집중하는 뛰어난 사람, 이렇게 떠오르는데 간혹 성도들 가운데는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참기 어렵게 목회자의 마음에 마치 살을 가르고 소금을 뿌린 것처럼 가슴이 아려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시련을 당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도 그 환난의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들,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환난의 비바람이 너무나 거세어서 상한 갈대와 같이,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고린도 교회 하면 많은 은사를 받은 교회, 에베소 교회 하면 뜨거운 사랑이 불붙은 교회, 골로새 교회 하면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을 알았던 교회, 이런 식의 인상이 있지만 마게도니아 교회 하면 환난의 많은 시련이 할퀴고 간 교회, 성도들이 착하기는 하지만 환난의 많은 시련을 당한 교회라는 느낌이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졌으니 아까 말씀 드린 그 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제가 마음속에 느끼는 것과 유사한 생각을 사도 바울이 이 사랑하는 마게도니아 교회를 생각하며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환난의 많은 시련을 당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이 환난의 시련을 당하면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도 뭔가 남은 것이 있을 텐데 가난도 보통 가난이 아니라 극한 가난이라고 했습니다. 생존선상의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그런 극도로 가난한 가운데에서 그들의 교회는 환난의 비바람과 시련의 폭풍을 한 몸으로 받은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가 부자인 이 고린도 교회를 부끄럽게 할 정도로 넘치는 헌신으로 구제의 헌금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인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극도로 가난한 교회, 그 위에 환난의 비바람, 시련의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그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뒤에 가지고 있었던 넘치는 기쁨이었습니다. 이 단어를 여러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까?
주 나의 사랑 나 주의 사랑 그 사랑은 내 기쁨
주님의 주시는 그 놀라운 기쁨이 시련도 이기고 환난도 물리치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사람 보기에는 가난하고 환난을 많이 받은 교회이고 시련 속에 살아온 교회이지만, 하나님이 외적으로는 그들에게 주신 것이 없는 것 같아도 그러나 그들의 영혼에 주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은 교회였기 때문에 기쁨을 누릴 수 있었고 그 기쁨 때문에 그 큰 가난이 있는 교회였음에도 -환난의 시련이 몰아치는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헌신으로 우리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게도니아 교회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넘치도록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이 헌신에 참여한 것이 전혀 예상을 깬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기쁨이 있었고 그 놀라운 기쁨은 그들로 하여금 좋으신 하나님을 넘치도록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많이 받은 나머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 속에 넘쳐날 때에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바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놀라운 기쁨이 있었고 그 기쁨은 바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게도니아 교인 각 사람에게 베풀어주고 넣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영혼에 베풀어주신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고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 속에 살 수 있게 만들어준 놀라운 정서,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며 삶으로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어준 그 놀라운 신령한 은혜가 그들의 영혼 속에 비밀스럽게 역사하고 나니까 기쁨이 솟아나게 되었고 그 은혜의 기쁨은 가난도 그리고 환난과 시련도 이기고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넘치도록 헌신하게끔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의 주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사랑은 보이는 아름다운 헌신에 의해서 고백될 때에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당신 자신만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줄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시고 기꺼이 이삭을 죽이기 위해 이삭의 목에 칼을 댈 바로 그 때에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그렇게 하심으로서 비로소 아브라함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있는 것을 깨달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 마음속에 하나님만을 사랑하던 순전한 사랑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상당히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임을 파악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죽여 바치기까지 하는 그 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 속에 떠오르고 있는 잠재적인 위험의 요소들을 제거하게 하시고, 그 실행의 과정을 통해서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불어넣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성취하셨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우리의 진실하고 환경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앞에 자기를 드리는 진정한 헌신을 통해서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기의 설교 속에서 그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심을 간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대들의 회심을 믿지 아니하겠소”라고 말입니다. 유난히 헌금을 걷는 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겸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통찰 때문이었고 하나님이 만일 그들의 영혼 속에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정말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드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헌신을 불러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충격적인 설교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교회를 생각할 때에 사도 바울이 눈물나게 고마웠던 것은 마게도니아 교회의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컸으면 가난도 이겼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도 극복하고 넘치는 헌신으로 자기의 형제들을 섬기는 그 자리에 마게도니아 교회가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해동안에 주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공급하시는 물질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중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들이 주님의 나라와 의만 구하지 않았는데도 주님이 더해주신 모든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미리 아시고 공급해주신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빚진 자된 부채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나의 소유, 나의 건강과 연장된 나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 쓰고 남은 모든 것들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베풀며 선용하기를 아까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을 볼 때 하나님 앞에 먹고 산 것 보다 더 감사한 것은 주님이 여러분들의 영혼에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곤고해서 발을 들여놓았지만, 어린아이들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얼굴을 할퀴어 버릴 것 같이 앙심을 품고 발톱을 간직한 성난 고양이처럼,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곤고해서 나왔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발톱을 옹크리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던 곤고하게 살아 마땅한 여러분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지난 한해도 많이 어루만지고 지나가셨습니다.
강퍅한 마음을 녹이기도 하시고 완고한 그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깨트리기도 하셨으며 교만한 마음을 한없이 낮추셔서 주님 앞에 부복하는 자세를 배우게도 하셨는가하면 주체할 수 없이 무너져서 하나님 앞에 살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일으켜 세우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변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점집과 굿하는 무당 집을 두루 다니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붓던 여러 명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고, 이방 신에게 복을 빌던 사람들이 회심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술주정뱅이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 단정한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였는가하면, 오래된 악습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살던 정죄 받은 마음속에 살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앞에 그 죄의 사슬에서 풀려 나와 주님을 자유롭게 찬송하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로 어떠한 생명의 기운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가 흘러 다시 그 황폐하던 인격이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는 복된 역사를 하나님이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다양한 변화 한복판에는 항상 한 사람의 영혼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죄와 허물이 많고 많은 세월을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힘들 정도로 고집대로 살아온 죄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만지고 지나가셨던 것입니다. 참회의 눈물과 회심의 경험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훌륭한 증거가 되었고, 소망 없는 죄인들이 뉘우치면서 복음의 빛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양심의 정죄를 받아 기력을 잃었던 성도들이 다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붙들고 일어서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모든 경험을 통해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고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은혜를 예비하시고 이 은혜로 들어와 이 은혜 가운데서 살게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 은혜로운 초청을 거절하고 주님을 떠나 여전히 곤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 은혜 속에서 한해를 살게 하셨고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미끄러진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실족한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지체들의 마음을 찔러 고통스럽게 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은혜가 역사 하는 곳에서도 완고한 죄인들이 전혀 없는 땅은 없습니다. 그 축복된 가나안의 땅에서도 여전히 산꼭대기에는 가나안의 이방 신을 섬기는 원주민들이 남아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이러한 형편을 돌아보면서 아무리 은혜 받은 성도들이 많고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도 자만하지 않는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교회 구석구석에는 아직까지도 어두움이 있고 구석구석에는 흐느끼는 성도들이 있으며 구석구석에는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남아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조금 받았으면서도 아직 자아의 고집대로 살려고 하는 완고한 죄인들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흘리는 뼈아픈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퇴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성도들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겸손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완고한 지체들을 여전히 남겨두신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없이할 수는 없다고 하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은혜 속에서 성장되어왔고 여러분도 영적으로 자라왔습니다. 넘어지면서 다시 일어설 때는 한편 키가 자랐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성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 주님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쁜 감사의 제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우리들을 섬기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제물로 바쳐 우리를 위한 영원한 화목 제물로 단번에 드리셨고 그것도 모자라서 지금은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들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그분께 여전히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못살고 신앙이 퇴보하고 은혜에서 멀어질 때는 주님 대신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슬퍼하시고 여러분들이 그 은혜 아래 살면서 극한 가난, 그리고 넘치는 환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신앙의 성장을 보일라치면 우리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서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1년 동안의 그 영혼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지금 뒤로 미끄러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뉘우치고 다잡아 주님의 은혜의 줄로 여러분들을 다시 한번 붙들어 매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만난 하나님인데 뒤로 미끄러지려고 합니까? 어떻게 되찾은 생명, 어떻게 다시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인데 다시 뒤로 물어가려고 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 베푸신 은혜를 깊이 감사하면서 괴로운 날이나 즐거운 날이나 언제든지 우리 주님만 사모하고 우리 주님 때문에 감사하고 일평생을 사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교제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5)”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는 옥중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형을 당할 지도 모르는 죄수의 신분으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그렇지 않은 교회가 없었겠지만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특히 잊혀질 수 없는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자주장사인 루디아의 마음을 하나님이 여셔서 세워지게 만든 빌립보 지방의 교회였습니다. 그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빌립보서 앞에 에베소서가 나오고 그 앞에 갈라디아서가 나오는데, 재미있는 관찰 가운데 하나는 첫 머리에 사도가 어떻게 편지를 시작하는 지를 대조해보면 재미있는 비교가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에는 편지를 쓰자마나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다급함을 보이는가하면 이 빌립보서에서는 하나님 앞에 먼저 찬송을 드린 다음에 길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자기의 애절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와 결혼했다고 하는데,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성경이 있다면 이 빌립보서와 누가복음입니다. 언젠가 한번 그 전편을 설교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이 빌립보서는 사랑스럽습니다.
갈라디아서가 매를 들고 가르치는 것 같다면 이 빌립보서는 자기가 가르쳐주고 싶은 제자들을 격한 감정으로 끌어안고 너무 기쁘고 사랑스러워서 흐느끼다가 가르침을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찬송, 하나님께 대한 감사,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 이런 것들이 진하게 배어있어서 1장에서 읽은 사람의 눈물을 빼고 2장부터 3장, 4장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기쁨 속에서 이 편지의 내용들이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귀한 서신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제목을 말하기 전에,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면서 동시에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도 두 종류입니다. 기도를 해주기는 해주는데 기도할 때마다 ‘왜 저렇게 살까’하며 근심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기도할 때마다 기쁨을 주는 사람, 소망을 주는 사람,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저 영혼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클까’하며 은혜는 그 지체가 받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은혜 받은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저런 분이시구나’를 깨달으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지체를 보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성도인 것 같습니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러움은 너희들이 잘못 믿고 잘못 살기 때문이라’ ‘내가 너희를 위해 늘 기도하는데 하나님 앞에 늘 아프다’하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기도할 때마다 너희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를 인하여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성도들입니까?
똑같이 주님을 구주로 믿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에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고 너무 소중합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데 그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에 항상 아프고 근심스럽습니다. 주님의 마음만 근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에도 염려이고 근심입니다.
저는 요즘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와 기쁨이 우러나게 하는 성도들은 얼마나 착한 성도들인가’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감사와 기쁨이 우러나게 하는 성도들은 말씀에 대해서도 반응이 예민하고 영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잘못 살다가도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뉘우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는 잘 못 깨달으면서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자기의 양심을 비추기만 하면 자기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자기 복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늘 마음에 눌림과 아픔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은 그리 쉽게 변하지를 않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가슴아파하며 기도했는데도 기도가 응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때에 그 영혼 앞에서 느끼는 목회자의 절망감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경험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비록 여러분들이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구역장을 하거나 아니면 교사를 하면서 변화되지 않는 영혼 앞에 서있는 것이 얼마나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 것입니다.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위해서는 변화되지 않는 영혼 그 사람이 목놓아 울든지 그의 변화되지 않는 상태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어떤 사람이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든지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하는데, 그래도 사람이 변하지 않을 때 느끼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33년 동안 사시는 동안에 주님의 마음이 그래도 위로를 받으시는 때가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의 복음 증거를 통해서 회개하고 변화되는 영혼들을 보면서 천국의 기쁨을 잠시 맛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일생을 사시는 동안에 결핍과 고통 속에 사시면서 세상으로부터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환경을 통해서는 위로 받으실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안식년도 없고 휴가도 없는 33년의 생애를 보내셨고 특별히 공생애 3년 동안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의 참다운 변화는 아마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느끼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두 성도들 가운데 인생 살아있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교회를 떠나서 어디로 가든 지간에 목회자가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하고 여러분들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기쁘고 소망이 생기는 그런 성도로서 주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도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으며 또 여러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변화된 마음, 변화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의해서 어린아이처럼 쉽게 변화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따라서 자기 자신이 그 뜻에 부합한 삶을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진실한 순종과 그렇게 살지 못하였을 때에 마음 아파하는 어린 아이 같은 뉘우침과 자기 부서짐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것은 완전한 기대를 가지고 계신 그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이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었기에 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감사하고 한없이 기뻐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곧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었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 사랑스러웠던 빌립보 교인들, 그들은 곧 우리 예수님께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으며 그를 위해 사도가 간구할 때에 기쁨으로 기도했더라면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도 바울의 간구를 들으시는 주님의 마음은 빌립보 교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함께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이런 성도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한없는 감사의 제목이 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마다 일체 슬픔과 탄식이 없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 속에 아버지 앞에 우리를 위해 대신 도고하실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일까요?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과 우리 안에 있는 빗나간 자기 사랑,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욕망을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잘못된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로 하여금 이런 성도들로 남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일평생 우리들이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얼마만큼이라도 우리들이 이렇게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마음속에서 터쳐 나오는 갈망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땅에 떨어진 주님의 명예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하며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비교적 선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에게 사랑 없음을 인하여 아파하며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부수어 주님의 형상을 닮아 예수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증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늘 말로 하는 바이지만 자기의 지은 죄를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이고, 죄악된 세상을 살면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인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그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이 되었고 자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복음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옥에 갇혀서 부자유하게 억압을 당하고 문초를 당하지만,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 안에 이루어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복음의 일을 기억하면서 그 고통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가 사도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사도가 아닌 우리 주 예수님의 마음에 이런 사람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때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정말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너무나 행복해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만들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로 그런 교인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도는 억누를 수 없는 감사와 감격 속에서 이들을 인해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복음에서 교제함을 인함이라”했습니다. 교제를 인해서 그렇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버이날 설교에 늘 말씀드리지만 부모님이 연로하신 다음에 그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서로 교제가 있어서 우애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각자 갖가지를 가져다 드린 후에 밖에 나와서 서로 싸우는 자식들은 선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여럿 가지고 있는 부모들은 그것을 위해서도 일평생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우애하면서 살도록 부모 자신이 처신하고 가르쳐야합니다. 몇 푼 안 되는 유산으로 자식들의 마음을 갈라놓아서 서로 우애하지 못하게 만들 바에야 모두 불우이웃을 돕던지 교회에 헌금해 버리든지 해야지 그것으로 자식들의 마음을 다 갈라놓습니까? 그렇게 우애하면서 사는 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제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사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교제’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코이노니아’를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귐’이 가장 좋은 말입니다. 서로 사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사도바울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빌립보 교회도 한 교회인데 사실 감사할 만한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한 교회에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좋은 일꾼들을 보내주신 것도 감사하고 큰 교회당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건강도 감사하고, 감사의 제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감사의 제목들을 모두 밀치고 사도는 “교제함을 인함이라” 했습니다. 함께 사귀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연합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뭐 그렇게 기뻐할 이유가 될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할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에서 교제함을 인함인데, 희랍어 성경에서는 ‘복음에서’가 아니라 ‘복음 속으로의 교제를 인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이스라는 전치사가 이동의 의미, into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의 사귐이 아니라, 복음 속에 사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있으면 사귐이 복음 속으로 이동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미는 명백해졌습니다.
교제가 정말 좋습니까? 사람들과 교제하다가 자기가 고갈되는 것을 경험한 적 없습니까?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면 경험을 잘합니다. 내 관심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이야기, 성형수술 하는 계 이야기... 등 같은 이야깁니다. 처음 예수 믿고 나서 가장 힘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을 버리고 싶지 않고 또 전도하려면 그들과 어울려야 하는데 그들과 함께 있으면 이방인 같습니다. 관심 없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참 떠들고 이야기하는 속에 있다보면 마음이 dry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다시 교회당에 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나면 다시 그 메말랐던 마음에 하나님 은혜가 흘러 들어와 촉촉이 젖은 마음으로 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았다고 해서 은혜가 저절로 나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날 교회 생활하면서 성경적으로 어긋나고 잘못 배운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도 제대로 신앙이 안 된 사람들이니까 세속적인 이야기나 합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주일날 새벽에 시내 버스에 성경을 들고 두 아주머니가 탔는데 하 는 얘기가 놀러가고 옷 사 입고....하면서 모두 세속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생각하고 어린아이를 가르치려고 집을 나선 사람이라면 조용히 앉아서 공과를 한번 더 읽던지 깊이 묵상하고 한숨 자면 은혜가 간직되었을 텐데 저렇게 세속적 이야기로 많이 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에 마음이 바닥이 났는데 무엇으로 영혼들을 가르치며 예배할꼬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다니면서 교제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일단 교회에 오면 사람부터 사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리는 있지만 전적으로 맞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만나면 교회에 정은 저절로 붙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방긋방긋 웃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교회 온지 한 달도 안되었는데도 이 교회가 내 교회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 못 만나고 은혜를 못 받으면 1년이 지나도 자기 교회를 이야기 할 때는 항상 우리 교회라고 하지 않고 ‘열린 교회’라고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에 와서 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머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하게 되면 사람들과의 교제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고 나면 ‘주님 만난 누구와 함께 대화를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하게 되고 그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 가슴이 너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나도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수준 높은 하나님을 만나서 수준 높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정말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그 참 사랑과 은혜를 알아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주님 바로 섬기면서 살 수 있을까’하는 소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돌아가면 자기만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교제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람직하지 않은 교회생활 가운데 하나가 오직 인간 관계를 기초로 교회 생활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친척이 다니니까, 인정에 이끌려서, 이렇게 얽히고 설켜서 교회생활 하는 것은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부정적인 면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제가 먹고 마시며 함께 오락하는 교제가 아니라 복음 속으로의 교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 속으로의 교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정지된 복음 속에 교제가 있는 정지된 개념이 아니라 교제를 통해서 복음 속으로 점점 이동하는 개념입니다. 교제는 교제인데 그 방향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교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사귀면서 함께 교제를 나누면 나눌수록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의 세계, 진리의 세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되는 그런 변화가 있는 교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자기는 지금 옥에 갇혀 있기에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목회할 수 없고 설교할 수도 없고 심방할 수도 없고 돌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빌립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소식들이 자기에게 전해지는데, 자기가 없어도 그 교인들이 점점 더 함께 사귀고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더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데도 그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세워주면서 그들 스스로가 복음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고 예전에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었을 때 그렇구나 하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그들이 함께 교제하고 살아가는 삶의 경험을 통해서 복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뼛속 깊이 경험하게 되는 실제적인 체험을 동반한 지식들이 그들 속에서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한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하면서 교인들이 몰려다니는 것이 염려스러워지고 젊은이들이 한데 동아리 지어서 돌아다니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던 경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이라 이름하는 사람들이 함께 몰려다니면 복음으로부터 멀어질 것 같은 두려움, 신앙으로부터 멀어질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예화: 전에 모시던 할아버지 목사님이 교회에서 계를 하는 것을 꾸짖으신 이야기)
그것이 바로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교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부터 탈출하는 교제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몰려다니는 것이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했던 큰 감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사귀면서 복음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실제로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워낙 미천하고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 이런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변화를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작은 모임 속에 들어가서 함께 교제하는 동안에 자기 신앙의 문제를 정직하게 발견하고 ‘내가 이렇게 믿어서는 안되겠다’는 자각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한 때는 설교 하나만을 가지고 목회를 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느꼈던 생각은, 기본적인 것은 되지만, 건축자재는 굉장히 좋은데 콘크리트와 함께 비벼져서 응어리져야 하는데 좋은 자재들이 따로따로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 한사람은 변화되었는데 응집이 안되고 따로 따로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더 해보면서 이런 성경구절을 보며 느낀 것이 ‘확실히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넓혀주시는구나’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바로 서야한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온 교인 중 6개월만 예배 중에 하나님을 못 만나면 그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교회처럼 새로 이루어진 교회는 뿌리가 없기에 더 그렇습니다. 오래된 교회는 주님 못 만나도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그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그냥 다니는 경우는 좀 다릅니다. 그리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는다는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가운데 신앙생활이 나름대로 다른 방식으로 굳어진 사람도 다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처럼 주일, 수요일의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신앙이 자라며 세워진 사람들은 6개월만 하나님이 하늘을 닫고 말씀의 은혜를 안 내려주시면 남아있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뼈 묻을 애착할 일이 여기에서 일어났다고 남아있겠습니까? 여러분 중 제일 오래된 사람이 겨우 5년입니다. 2년 반 밖에 안 된 사람도 지난번에 안수 집사가 되었습니다. 역사 있는 교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야깁니다.
그런 신념은 약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집을 허물 때에는 커다란 크레인이 와서 쾅 하고 두드려야 하지만 그래도 망치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발동하는 힘에 있어서는 굴착기에 비교할 수 없지만 부수다가 조금 남은 것은 사람이 올라가서 두드려야 합니다.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은 변화되는 것 같지만 응집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과일을 깎아놓고 손뼉 치면서 앉아야만 교제가 아니라 삶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함께 밥 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성경을 배우는 것, 함께 삶을 나누는 것, 심지어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한 교회에 다니는 것, 그 모든 것이 이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을 복음 속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놓고 주석을 읽은 것도 아니고 둘이 앉아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가슴에 눈물이 가득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런 지체들을 만나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내게 있어서 얼마나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인가’를 깨달으면서 가슴속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없어도 그 교제가 그들을 데리고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서 심방을 한다든지, 함께 밥을 먹으며 식탁에서 교제하고,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응답 받은 이야기, 직장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직 성경을 펼치지도 않고 기도도 안 하는데도 은혜가 함께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세속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밥을 먹으며 육신의 필요를 채우고 있는 중인데도- 이상하게 그 식탁 속에서 함께 교제하고 나면 육신 적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느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지체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으며 이렇게 거룩한 신앙을 가진 지체들과 함께 한 형제라고 불림을 받으며 이렇게 살아갈 자격이 있는가?’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같은 인간을 구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제를 통해서 우리를 복음 속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에 대해서 알고있는 대부분의 것은 이 교제를 통해서 알게된 것입니다. 신앙의 깊은 도리를 터득하고자 계룡산에 들어갔다 오신 분 있습니까? ‘홀로 면벽대좌 하고 8년 장좌불와 끝에 복음의 도리를 터득하였도다’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귐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교역자들에게 존경하는 목사님이 누구인지, 신앙에 영향을 미친 선생님이 누구인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제에 대해서 별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의 깊이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보면서 경험한 감사의 제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가 옥에 갇혔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이 더 빨리 전파되고, 성도들이 더 뜨겁게 사랑하고, 자기가 옥에 갇혔기 때문에 성도들이 오히려 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서 그 교제를 통해서 복음을 더 알아 가는 영적 생활의 놀라운 성장과 진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복음을 아는 놀라운 지식의 진보가 있을 때, 여러분들이 복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될 때는, 항상 ‘다 필요 없다’ ‘이 세상에 쓸만한 인간 하나도 없구나’ ‘나는 이제 외톨박이일 뿐이야.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사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모이고 함께 사랑하는 지체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기쁘기 때문입니다. 주일날도 간신히 나오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가니까 주일, 수요일, 금요일,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면서 신앙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교제 속에 바로 그러한 놀라운 작용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교제는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함께 교제하면서 주님을 더 많이 알아갑니까? 교제하고 돌아가면 정말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순결해지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고, 희미했던 신앙의 진리들이 사람들을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자기도 바로 그런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그런 갈망들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생겨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교제이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감사한 것은 바로 그 복음 속에 있는 교제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제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그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현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없는 것은 합해놔도 없는 것입니다. 아이큐 20인 사람 열 명을 합해놓으면 200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상승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만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은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가 아니라 놀 때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조용히 예배드리는데 그곳에서 노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놀 때는 그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말 있어서 지체들이 여러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눌 때 갈급 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고 은혜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복음 속으로의 교제를 제공해주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의 초기 때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들을 거의 교제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요즘 몇 주간 동안 제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잘못 심기운 나무는 안심기운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전도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하다가 세불여의하여 마음을 못 지키고 교회를 옮기거나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 개인에 대한 선교의 최대의 책임은 처음 그 사람에게 신앙을 넣어주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처음에 나무가 비뚤게 심기면 자라도 문제이고 안 자라도 문제입니다. 이것을 다시 돌아가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을 때는 변하는 것 같은데 뿌리가 변한 것이 아니고 줄기만 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갑니다. 그 중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서 다시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소수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신앙생활에 있어서 비뚤어진 신앙생활의 모든 모습, 훌륭한 신앙생활의 모습, 이 모든 것은 대부분 교제를 통해서 배웁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이 성경에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를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 지식이 머릿속에 있는 상태에서 사랑하며 사는 어떤 희생적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기는 못살지만 그의 삶을 보면서 ‘저것이 정말 사랑한다는 의미이구나’하며 알게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말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하나는 어떤 기도의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인격적인 느낌을 강력하게 받으면서 ‘아, 매달리는 기도가 저런 기도구나.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가 바로 저런 기도구나. 자기를 찢는 참회의 기도가 바로 저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교제를 통해서 그런 식으로 복음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속에 진실로 변화된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소 연약한 사람이 그 사귐 속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에 의해서 그 사귐이 변질되거나 저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교제 속에서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닮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간절한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지난 1년 동안 신앙이 미끄러진 사람도 있고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은 신앙의 생활에서 뒤로 후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제의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깊어져 갔습니다. 연약하던 성도였지만 구역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고 한 교구에서 사귐을 거듭하면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복음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때로는 목회자도 ‘저 사람이 정착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하며 고민하던 사람들이 지체들의 눈물겨운 섬김과 사귐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를 배워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감사의 제목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 하나하나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사랑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사용해서라도 우리를 복음을 아는 지식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려고 하는, 우리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배려와 사랑을 우리들이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똑같은 이유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기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제조차도 주장하시고, 그런 교제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 그렇게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지금쯤은 누군가 그 속에 가서 교제를 누려도 마음이 고갈되는 교제밖에는 제공할 수 없었을 텐데 그가 깊이 하나님 만나고 은혜 받게 해주시니까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숲 속에서 공기를 마시면서 정신이 회복되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받은 그 은혜와 말씀의 비밀 속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깊이 하나님의 말씀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우리들이 해야될 일은 이렇게 충분히 복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을 우리들이 찾아내서 그들에게 교제의 기회를 주고 사귐을 통해서 더더욱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 가는 그런 복된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우리를 희생하는 것, 이것이 교회가 커질수록 우리들이 더 많이 기울여야할 노력들 중 한가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 우리는 지난 11개월 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교제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복음의 비밀들, 교제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맛보게 만들어주셨던 신령한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예배를 통해 설교의 은혜를 받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 영향을 끼치는 동안에도 우리의 연약한 부분들을 이렇게 교제를 통해서 보완하게 하시고 그 교제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느끼며 사는 복된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제의 섬김을 통해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넓혀갔듯이 우리를 그렇게 대우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우리들이 생명 있는 날 동안에 할 수 있으면 예전의 우리처럼 흔들리던 지체들을 이 교제 속으로 불러들여서 이 교제를 통해서 더 많은 복음의 빛을, 이 사귐을 통해서 더 큰 은혜의 광채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어리고 연약한 신도들을 어리고 연약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들이 어떻게 복음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시는지 그 열망을 우리가 온 몸으로 느끼면서 그들을 위해서 무릎꿇고 섬기고 그런 사귐을 제공해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난 한해동안 교회 성장에 대해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셨고, 물론 우리들이 더 충성하고 더 간절한 목마름과 타는 듯한 갈급함으로 주님 앞에 매달렸더라면 우리에게 더 큰 부흥을 주셨겠지만 그런 아쉬움 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주님 섬긴 것에 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너무나 넘쳤고 우리가 뿌린 씨앗에 비해서는 주님이 거두게 해주신 것이 우리에게는 과분하고 죄송스러울 정도로 많았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우리들이 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교제를 통해서 받았으니 교제를 통해서 또한 주님의 형상을 가진 연약한 지체들에게 되 갚고자 하는 착한 마음을 갖는 성도들이 될 때에 주님의 은혜는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5.시련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시66:10)”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은 교제의 은혜였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복음 속으로 더 깊이 알아 가는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바로 그런 천국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체들 한사람 한사람을 생각할 때 ‘나를 만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외톨박이가 된 사람이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외톨박이가 된 사람, 주님을 믿고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세상을 배신하고 이 세상에서 지명 수배된 사람, 그래서 주님이 계신 우리의 모임으로 피난 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이 신약성경이 쓰여진 때는 로마시대입니다. 후기에 쓰여진 서신들은 대부분 로마의 임박한 환난이나 핍박을 느끼면서 쓴 서신들입니다. 저는 로마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카타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굴이 수 킬로미터씩 이어졌는데 밤이면 공동묘지를 지나고 쓰레기장을 지나서 그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그 깊은 동굴 속에서 횃불을 밝혀놓고 누가 들을세라 조용조용히 주님을 찬미하고 교제하는, 오늘은 만났지만 내일은 누가 죽을 지 모르는 그런 사람들의 회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속에서 무한한 감화와 은혜를 많이 입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핍박과 시련으로 가득한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어가는 훌륭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미워하고, 더 나쁜 것은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속으로 더 깊이 알아 가는 그런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감사의 제목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감사의 제목은 하나님의 연단 하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는 환경 속에서는 연단이 잘 안됩니다. 불을 때지 않고도 금이나 은을 더 단련하여 순수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연단의 은혜는 항상 견디기 힘든 시련을 배경에 깔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이 시련과 하나님의 은혜는 상관이 있으면서도 또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의 못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시련이 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이 시련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시련이 넘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의 받지 못한 사람들도 시련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시련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의 받지 못했는데도 시련을 많이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련의 유무를 가지고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해주시고 축복해주시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지 않고 평탄하게 살아가는 삶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사와 찬송의 제목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련과 환난을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무미건조한 삶이 신앙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획일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을 일평생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갔던 모든 신자들 중에 시련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고난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그들이 옳지 못했기 때문에 시련을 주시기도 하고 마음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고치기 위해서 환난을 주시기도 했지만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순수한데도 하나님이 시련을 주신 사람이 있고 하나님 많이 사랑하는데도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지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살아보면 그 뜻이 무엇인지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시련과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때는 시련을 당하자마자 즉시 내가 왜 이런 시련과 환난을 당해야 하는지 아는 경우도 있고 또 조금 살고 난 후에 처음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이 나로 하여금 이런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알게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련과 어려움은 그 사람이 시련을 당한 것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바르다 바르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그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의 가슴속에 그 시련이 무엇을 남겨주고 지나갔느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더 상세하게 이 문제를 풀어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가 없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죄는 없지만 하나님이 그를 더 많이 훌륭하게 만드셔서 더 많은 축복을 주시려고 시련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련은 죄 때문에 온 시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섭리 속에서 그를 하나님이 높은 경지에 이르는 성숙한 신앙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의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셉과 같은 경우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했는데 싫다고 뿌리쳤으니 정결한 신앙을 선택한 것이고 유혹을 뿌리친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옥 속에 들어가서 죽을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죄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련을 당한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해서 일을 만들었고 그 일 때문에 발목이 잡혀서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당하게 된 시련입니다.
똑같은 경우에 있었는데 반대된 사람이 바로 수요일에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는 시편 6편의 사람 다윗입니다. 우리아의 아내와 범죄하고 나서 그는 커다란 시련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구도 핑계할 수 없고 그것은 자기의 죄가 몰고 간 시련이었고 환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련 그 자체로만 보면 이 두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정결한 데도 시련을 당했으니 그 시련을 당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상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자기의 죄 때문에 시련에 빠졌으니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치기밖에 못할 정도입니다. 물론 요셉은 시험을 훌륭하게 이겼습니다만 그렇게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시련을 당했는데도 그 시련 속에서 자기의 신앙을 지키면서 믿음으로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은 차라리 자기의 죄 때문에 시련에 들었는데도 신앙으로 그것을 이기고 극복해서 승리한 사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시험에 대해서 대부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잘해봐야 본전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남겨주신 시련 속에서 그 사람 속에 무엇이 남았느냐면 전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시련을 당했는데 그 시련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후자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시험에 빠졌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추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그 죄의 파괴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마음과 뜻이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연단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은을 단련함 같이 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은을 단련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금을 단련하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발달한 기계가 많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하겠지만 금을 흑연으로 된 항아리에 넣고 불을 때서 가라앉은 찌꺼기는 흘려보내고 다시 굳혀서 녹이는 일을 계속 되풀이하는 동안에 아주 순도 높은 은이나 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순도 높은 금을 가리켜서 정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이 조금 섞여 있는 광석은 1톤에 몇 천원밖에 안 된다고 하여도 금을 채취해서 14금이나 18금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그것은 이미 광석이 아니라 금붙이가 되어서 가치가 뛰게 되고 그것을 더 연단하고 제련해서 정금으로 만들면 그 가치는 더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귀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만일 하나님이 장사를 하려는 의지는 가지고 있지만 자본은 별로 없는 벤처 사업가라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은 사람은 돈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뭔가 신기술을 개발하려고 하시는데 아이디어가 모자라시는 분이라면 머리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은 인간에게 얼마든지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거두실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정말 귀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돈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서서 자기를 돕겠다고 하는 것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학식이 아주 뛰어난 사람은 자기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의 미천한 지식이 탐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기술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마음과 뜻이 하나님 앞에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고정된 사람, 하나님을 향해서 그 마음과 뜻이 아주 훌륭하게 모아진 사람, 어떤 환경이나 여건, 그리고 어떤 유혹이나 흔들림에도 요동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는 그 삶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연단 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연단 된 마음은 반드시 시련이라고 하는 불길을 통해서 오게 마련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시련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목회자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교역의 반 이상은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예배에 나와서 한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일주일 동안 거의 승리하면서 살아가고, 하는 사업마다 불붙듯이 잘되어서 번창하고 자녀들은 질병 없이 건강하게 공부 잘하고 가정이 화목하고 가족 일가친척 중 누가 죽는 사람도 없고 승승장구만 했다면 교역 중 반은 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많은 시련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어떤 사람들의 마음 고생과 아픔은 먼발치에 있는 목회자인 제 마음에도 들려와서 보이지 않게 함께 여러분들의 시련과 어려움에 마음으로나마 동참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1년 동안이 정말 다사다난했고 정말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한 지체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시련 속에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지체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이 당한 그 시련은 어쩌면 여러분들의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여러분들은 잘못이 없지만 하나님이 큰 섭리 가운데에서 여러분들을 더 훌륭하게 복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주님의 사람답게 세우시려고 주신 시련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 앞에 불평을 토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시련을 만났다고 해서 자만할 필요도 없고 자기의 죄와 잘못으로 인해서 시련을 당한다고 해서 낙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의 결과는 시작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미 자기에게 다가온 시련을 훌륭하게 극복해서 마음과 뜻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깊이 연단 되어서 하나님 앞에 이처럼 감사할 수 있는 날이 오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가슴 아프게도 이런 시련 속에서 마음이 미끄러져서 신앙의 길을 멀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끄러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가슴 아프게도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고 그중 어떤 사람들은 아직 다행히 교회에 남아 있어서 우리들이 돌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더 가슴 아프게 목회자의 어떠한 도움도 거절하며 마음을 강퍅하게 세워서 결국은 그 시험에 진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기다려야 하고 그 사람들로 인해서 가슴 아파하고 마치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그들을 위해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지체들은 오히려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붙들게 되었고 자기에게 주신 그 신앙을 하나님 앞에 더 곤고히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비가 올 때는 그 비에 땅이 패어 여기저기 깎여나갈까 염려가 되지만 실제로 비가 오고 나면 깎여나가는 땅도 있지만 모든 지면이 더 단단하게 다져지는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지난 1년 동안 견디기 힘든 시련과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지만 마치 남국의 뜨거운 햇살을 진저리치듯이 받으면서도 결국은 그 따갑고 괴로운 햇빛 때문에 까맣게 영글어가는 포도처럼 그렇게 여러분들의 신앙이 영글어져 왔습니다.
결과는 좋았지만 그러한 좋은 결과를 보기까지 여러분들이 당했던 시련과 많은 고통들은 여러분들에게는 물론이요 주위에서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참 가슴 아픈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들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시련과 환난 속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을 더 붙들게 만들어 주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시련 속에서 연단 하시고 더 단련하셔서 하나님 한 분밖에는 이 세상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분도 없고 내가 의지하며 살 분도 없다라고 하는 신앙의 확신을 더 곤고히 하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놀라운 감사의 제목이 되는지 모릅니다.
시련을 만났을 그 때부터 이 시련을 믿음으로 견디고 나면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질 줄 알고 감사할 정도의 믿음은 안되었지만 그러나 적은 믿음이나마 그 시련 속에서 시련의 물결에 요동치지 아니하고 시련을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에 우리의 일생을 맡기고 거미줄 같은 신앙이나마 하나님의 말씀 하나에 믿음의 닻을 던지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다보니까 우리는 극복할 수 없어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시련들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폭풍도 지나고 풍랑도 지나고 어두움도 지나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도 지나오게 만드셨습니다. 터널과 같이 고통스러운 외로움의 시기들도 극복하게 하시고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로 나오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련 속에서 미끄러지는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시련 속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그 시련을 헤쳐나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물론 우리에게는 우리의 남은 앞날이 시련으로 가득 차게 해달라고 말할 정도의 믿음은 아직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그 시련을 이길 수 있고 그 시련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 시련을 잘 감당하면 오히려 우리들이 단련되고 우리의 마음이 연단 되어서 하나님의 더 큰사랑과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들이 시련 앞에서 두려워 떨기보다는 오히려 그 폭풍과 시련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의 그 손길을 의지하며 살 지혜를 배우게 되었고, 우리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백수가 될 때까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시련 속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희미하나마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선생님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그 풍랑 때문에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화: 열대지방의 나무는 큰 나무들이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이 없기에 별로 감동이 없다. 그러나 설악산이나 태백산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 3백년 이상 되어 보이는 거목을 보면 오랜 세월의 만고의 풍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련이 없이 자란 그 신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잘 알기 힘든 신앙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 단련되고 연단 되어져서 거목과 같이 잘 자란 신앙,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 아는 지식으로 깊이 뿌리를 박은 신앙, 그것이 귀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런 귀한 신앙은 반드시 연단이 있었습니다. 시련이 있고 연단이 있고 고난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련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지난 1년 동안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그래서 정말 어려운 길을 지나왔지만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들을 밟고 머리 위를 지나다녔지만- 이제는 광활한 곳으로 하나님이 옮겨서 주님을 찬송하게 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깊이 감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연단 하셔서 귀한 사람으로 만드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감사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시련을 많이 당하고 어려울 때에 그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때는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것도 많고 약속한 것도 많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해 약속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 스스로 다짐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환난과 시련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내가 정말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리라. 이 시련과 어려움, 눈뜨기 힘든 이 폭풍과 같은 고난이 지나고 나면 내가 일평생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리라. 주님이 죽음을 방불케 하는 이 고난의 자리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나와 내 집을 세워주시면 일평생 내가 내 가지고 있는 재산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알고 살리라. 이제 내 인생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구석 어디에서든지 주님 섬기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는 식의 약속, 다짐, 심지어는 서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6.25 때 어느 부부가 자녀들과 모진 고생을 하면서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받아들이 고 살아남아서 아버지의 고난으로 이루어진 부를 자식들이 누리면서 살게 되었는데 자녀들이 서로 우애하지 않고 허랑 방탕해지게 되었다. 자녀들을 집으로 모두 불러 예전에 고생하며 먹 었던 개떡과 비지떡을 내놓고 “너희들이 아주 어렸을 때 너희들과 함께 먹던 우리들의 식탁 이다. 그때 애쓰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너희들이 걱정 없이 살게 되었는 데 너희들에게 감사가 있느냐”라는 말을 하니 자녀들이 숙연해졌다는 이야기)
주님이 우리에게 섭섭하게 하셨을 리는 없지만 자기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큰 죄가 하나님 앞에 토라지는 죄입니다. 자기 생각에 하나님이 섭섭하게 하신 것은 일생 잊지 않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그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 주신 것은 잘 잊어버립니다. 정말 문둥병자와 같이 아무 희망이 없이 온몸이 퉁퉁 부어서 버림받고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은 신세였던 사람을 주님이 부르셔서 손수 고름을 짜내시고 말씀으로 고치시고 은혜로 싸매시고 축복으로 기름을 바르셔서 새사람을 만들어 주었더니,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새카맣게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길은 항상 자기가 시련을 당했을 때에 얼마나 곤고했고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목말랐는지를 기억하면서 자기를 그 어려움 속에서 도와주신 분이 주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잊지 않는 그것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잊지 않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 앞에 고난을 -시련을- 당했을 때에 항상 하나님 앞에 약속하던 것들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의 뒤편에 보면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래만이 찬양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기를 그렇게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져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사는 삶, 그래서 내가 그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되는 삶, 그 삶이 바로 감사하는 삶입니다.
여러분들 지난 1년 동안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건져주셨습니다. 교회 적으로도 많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주님이 지켜주시고 붙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의무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우리의 온 삶 속에서 주님이 우리의 찬양의 제목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런 연단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와 보답하며 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6.우리를 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①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음으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시52:8-9上)
지난 주에는 시련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를 귀하게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악한 사람들과 자기를 포함한 의로운 사람들, 즉 악인과 의인을 다시 한번 대조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재물을 의지하고 그것으로 자기의 힘을 삼으며 그 재물로 자기를 견고하게 세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악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악행을 열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인 그들의 삶의 일방적인 방식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재물을 의지하고 그 재물로 자기를 견고케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결핍되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 되신 하나님께 뿌리박으며 살아가는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 되신 하나님께 뿌리를 박으면서 거기로부터 진액을 먹으며 사는 생명적인 생활이 그들에게 없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생명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주님께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성품을 아는데서 자라 가는 진정한 영혼의 생명과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그들 안에는 근본적으로 주님을 향한 경외의 정신이 없습니다.
그와 대조해서 자기를 포함한 의인, 그리고 그 시인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집의 푸른 감람나무와 같아서 하나님께 정말 감사한다” 8절과 9절의 요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화: 이사가면 교회당 앞에 나무를 많이 심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화: 전에 다니던 교회 마당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었는데 나무 장수가 5백만원에 그나무를 캐가 겠다고 했다-그 다음부터는 그 나무가 예사롭지 않게 봐졌다)
성경에서 그렇게 귀한 나무 중 하나가 감람나무입니다. 감람나무는 몇 가지 점에서 귀했는데 성전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아주 소중한 목재를 쓸 때에 이 감람나무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 감람나무로 성전을 쓰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로 삼은 것입니다. 감람나무 목재가 어떤 점에서 좋고 그렇게 매혹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경에서 감람나무의 반대되는 나무는 가시나무입니다. 그러니까 감람나무가 얼마나 좋은 지는 가시나무가 얼마나 나쁜지를 생각하면 대조되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감람나무는 아주 귀한 것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감람나무는 또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그 감람나무가 성전의 성구들을 짜는데 상용된 아주 귀한 나무입니다. 그래서 그 나무 자체가 성경에서는 아주 귀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시편에서도 또한 축복 받은 가정의 자녀들을 이야기할 때 “감람나무 같도다” 했습니다. 아주 귀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쓸데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쓸데없는 자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놀부가 볼 때 흥부 집 자식 같은 자식들이 아니라 아주 귀한 자녀를 감람나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등잔불을 밝혀드릴 때 그 기름으로 사용되는 것이 감람유입니다. 지금도 감람유는 굉장히 귀합니다.
시인이 ‘나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 신분이 놀랍게 상승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신분의 상승이라고 하는 것은 지위가 올라가는 개념의 상승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만 고귀하고 높은 신분을 유지하며 산다든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만 돈을 많이 벌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압구정 현대 백화점에 갔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은 다른 것 같고 물건들도 다른 것 같 았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신분의 상승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물질의 다과와 세상적인 지위의 높낮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이야기하는 “나는 하나님의 집의 감람나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만일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7절에서 가슴아파하던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해서 자기를 견고케 하고 그 부를 의지하느라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 텐데, 그래서 생명 되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을 텐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니까 하나님은 다윗 안에 있는 당신을 아는 그 지식과 당신을 향한 그 신앙이 너무 아름다워서 하나님의 집에서 그를 귀하게 하나님이 사용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자로서 일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한 왕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선지자였으며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늘 눈물로 기도하며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는 점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한 예표가 됩니다. 큰 왕국을 다스리면서 번영한 나라의 군주로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집을 훌륭하게 섬겼던 한 사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님을 향한 자기의 고백 속에서 늘 즐겨 토하던 말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히브리말에서 ‘에베드’라는 ‘종’이라는 말은 ‘아바드’에서 나왔는데 그 말은 노예로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예배’라는 말도 나오고 ‘땅을 경작하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렇게 자기를 하나님의 한 종처럼, 하나님의 집의 노예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만일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하나님을 모르고 재물이 있으면 재물이나 의지하면서 자기를 견고케 하고 주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면서 살다가 죽었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정치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 다윗만큼 의미를 가진 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무리 같은 사람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기는 하지만 강력한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이름을 열방에 떨쳤던, 그래서 세상의 역사 자료에도 많이 나오는 임금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서는 귀한 감람나무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세속 왕국에 있어서는 훌륭한 왕이었고 영명한 군주였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안에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삶의 모든 근원을 주님께 뿌리를 박으며 그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던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나라에서는 영명한 군주였지만 하나님의 집에서는 귀한 감람나무 같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 역사에 있어서는 날고 기는 사람들이었고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세상의 역사가 희미해지자 함께 잊혀진 사람들이고 성경도 잊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귀한 감람나무 같았습니다. 다윗이 만약 주님을 알고 주님을 아는 진실한 신앙이 있어서 주님이 그를 마음에 합하게 여기시고 그에게 기름 부으셔서 자기의 사람으로 삼지 않으셨다면 그는 아마 이새의 집에서 짐승의 똥이나 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 두 인생을 한번 대조해 보십시오. 이새의 집에서 짐승이나 기르면서 목동으로 살다가 이름 없이 죽었을 그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 의해서 선택이 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만드셔서 한 나라의 제왕을 삼으셨습니다. 한미한 가문에서 택하여 그를 한 나라의 제왕으로 삼으시고 사울에게 주셨던 그 나라를 다윗에게 맡기시고, 그의 위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것을 약속해 주셔서 심지어 그의 왕국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영원한 예수의 나라의 표상이 되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역사가 지나감에 따라서 잊혀지는 왕이 아니라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고 역사가 지나가도 성경 속에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언제든지 불 신앙의 시대에는 신앙으로 살도록 격려하는 사람으로, 고난받는 성도들에게는 위로의 사람으로, 그리고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심지를 굳게 하는 주님의 사람으로, 이렇게 자극을 주는 훌륭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앞에 있었던 많은 왕들은 살았을 때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했으나 이 다윗은 죽었음에도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집에 귀한 감람나무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이 성경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고 흠모하는 지를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저의 마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그는 죽었으나 여전히 말하고 있으며 그는 이 세상을 떠났으나 하나님은 그를 여전히 사용하고 계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는 하나님의 집의 매우 귀한 감람나무가 되었고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왕국을 섬기고 죽었어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으로서 우리를 섬기는 도구가 되었던 이 다윗의 삶과, 목동으로 잠시 있다가 사라질 그 다윗의 삶은 비교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삶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전심으로 의뢰하고 그의 손에 의해서 그의 마음에 맞게 그의 뜻대로 빚어진 사람들, 그래서 세상의 사람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사람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새롭게 그 형상이 빚어진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에서 소중한 감람나무와 같이 삼아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원리를 우리로 하여금 믿게 만들어준 수많은 믿음들이 있어서 아마 일일이 그 예를 다 들어도 여러분들이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증이 성경 속에서 나옵니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저 고기나 잡으면서 그물 쳐서 고기가 많이 잡힌 날은 웃으면서 돌아와서 행복하고 빈 그물로 돌아오는 날은 한없이 우울해서 집에 와서 술이나 마시고 성질이나 부렸을 그 뱃사람을 하나님이 변화시키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만드시고 초대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여전히 우리에게 그의 신앙으로 말하고 있고 그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그 삶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표지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백했던 오네시모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주인의 집에서 범죄하고 도망 나와 지명 수배된 노예였습니다. 잡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지명 수배된 노예요 주인의 마음에 한없이 고통을 주는 노예였고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옥 속에서 만난 바울에 의해서 복음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된 후에는 신앙 안에서 그의 신복이 되었고 ‘전에는 무익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나에게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러할까? 내가 만일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았더라면 뭘 하고 있을까?’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최선의 경우는 제가 가졌던 꿈대로 대학교 선생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은 한창 방황하던 때에 읽던 책이나 사상에 비춰보고 -하나님을 아는 은혜의 빛이 안 들어왔다고 할 것 같으면- 젊은이들을 대단히 혼란시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화: 교회 잘 다니는 동생을 교회 못 다니도록 설득한 이야기)
그리고 저를 좇아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담배는 워낙 좋아했으니 골초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폐암쯤 걸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하는 일마다 안돼서 고통을 받는 좌절된 꿈을 안고 살아가는 실업자쯤 되어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정도의 퇴폐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평범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연히 천재들을 부러워하다가 후줄근한 인생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면 네가 생각하는 최상의 인생이 무엇이냐? 천지창조 이래로 너에게 나처럼 된다는 말 빼고는 뭐든지 다 해주마’하셨어도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위로가 됩니다. 이 세상 다른 곳에서는 저를 필요로 하는 데가 없는데 그래도 교회에서는 나를 필요로 합니다.
(예화: 외국 집회에 간 동안 교인들이 덜 나왔다는 말에 무척 행복했다)
힘들고 어려워도 결국 그 힘들고 어려운 삶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면서 산다는 것이 행복이고 기쁨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시인이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예화: 숟가락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밥을 먹을 때에 가장 적절하다)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하나하나 만들었을 때에 주님이 쓰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는데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을 위해서 쓰시려고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일 세상에 나아가서 자기를 위해서 살고 단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산다면, 마치 여러분들이 은수저이고 세상이 여러분들을 가져다가 목욕탕에서 발바닥 각질을 벗기는 것에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있으면 식탁에 놓여서 깨끗이 닦여져서 음식물을 먹는 훌륭하고 존귀한 도구가 되고 자싯물 통에 집어넣어도 여러분들은 은수저요 금수저이니까 제일 먼저 따로 깨끗하게 씻어 말려서 정결한 통에 보관했다가 다음 식사 때에 꺼내는, 존귀하게 쓰임 받을 텐데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사니까 그렇게 존귀하고 귀한 사람이 아무 쓸모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몰랐더라면 세상에서 최상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이 시편 7절에서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재물을 의지하여 자기를 견고케 하는 사람 정도의 불행에까지밖에 이를 수 없었을 텐데 주님을 만나게 해주셔서 여러분들을 새사람 만들어서 하나님의 집에 아무 쓸모 없던 사람들을 고치셔서 주님의 집에 매우 요긴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시중 들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힘든 때가 있습니다.
(예화: 가끔 교역자들이 아무개 집사님이 여러 가지 일을 섬기느라 힘들어서 침체에 빠졌다고 보고 한다)
이해는 합니다. 어떤 분의 믿지 않는 남편은 교회에 취직했느냐고 묻는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세상에 있었더라면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여기서 저기서도 나를 필요로 해서 다른 사람은 할 수도 없는 많은 일을 하면서 여기도 섬겨야 하고 저기도 섬겨야 하면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바쁘기 그지없는 삶을 사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인간이 소외감을 느끼면서 살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돈을 소유하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존재해야할 부담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존재 가치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화: 어느 선배 목사님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설교 한번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때는 제가 그런 생애를 마치지 않게 해주시라는 것이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누군가 내 인생에 빨대를 대고 나를 빨아먹을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했습니다.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주님이 이 일을 하는데도 ‘네가 있어야겠다’고 하시고 저 일을 하는데도 ‘네가 있어야겠다’고 하셔서 하나님 앞에 많이 쓰임 받으면서 주님의 집에 없어서는 안될 귀한 감람나무 같이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까?
우리교회는 그래도 형편이 좀 낫습니다만 연말이 되면 부장집사, 전도사, 각 기관의 목사들이 속이 탑니다. 일꾼은 너무 많이 필요한데 일년 간신히 채웠다는 듯이 두 손에 사표를 들고 모두 걸어옵니다. ‘제발 금년은 빼달라. 1년만 쉬게 해달라’고 빕니다. 그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들은 계속 오는데 누군가는 이 영혼들을 섬겨줘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쓰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때 그 지도자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플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젊었을 때 저에게 충고하기를 자네는 어느 교회에 가든지 제발 그러지 말고 교회에 처음 가는 날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이런 사람이고 이만큼 신앙생활 하다가 왔는데 제게 무엇이든지 시켜주시면 열심히 목사님을 돕고 싶습니다’고 말씀드리면 그 목사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던 그 교회에 가서 한달 만에 목사님 찾아 뵙고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상대로 목사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고 계시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감사한 제목인지 모릅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켜주시지 않았더라면 교회에서 왜 우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주일날 예배나 나와주시면 감사하지요. 우리가 뭔가 쓰임 받고 싶다고 하면 많은 지체들은 변화부터 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셨고 우리를 이렇게 고쳐주시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이 사람도 나를 필요하다고 하고 이 일도 나를 부르고 저 사람도 나를 부릅니다. 이렇게 쓰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참 감사합니다.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저만한 나이에는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쩜 그렇게 성숙하고 의젓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고 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감사할 수 없고, 수요일 날도 성도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그 어린 친구들이 열시 반이 넘도록 교회를 못 떠나고 그렇게 눈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면서 코가 시큰해지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들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사람들인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고쳐주시고 나니까 이제 그렇게 변화 받지 못했더라면 지금 세상에서 그저 뒷골목이나 어울려 다니며 술이나 먹고, 그렇지 않으면 돈이라도 좀 벌어볼까 하며 껄떡거릴 청년들인데, 자기 인생을 주님께 겸비하게 맡기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진력하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분투하는 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여기에서 젊은이들이 제 설교를 들으면서 목양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주의 사람들이 나오겠습니까? 조국 교회를 이끌고 나갈 훌륭한 목회자도 나올 것이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어두운 불모의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그런 진실한 선교사들도 나올 것이고 또 그렇게 사역자로 부름을 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고 어디서든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분투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아마 살아갈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술이나 마시고 가정도 돌보지 않고 사업이라고 한답시고 돈을 안 벌면 안 벌어서 술 먹고 벌면 벌어서 술 먹고 가정도 돌보지 않고 그렇게 방종하게 살아갔을 사람들이 한참 그럴 연세에 교회에 나와서 은혜 받고 단정한 교인이 되어서 그 어려움이 많은 중년의 시기를 경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섬기는 젊은 부인들은 또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우리 교인들은 어쩌면 그렇게 세련됐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쩜 그렇게 성숙해서 남편보다 훨씬 열심히, 아침에도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와서 남편과 가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화요일이면 화요 여리고 전도 수요일이면 수요 예배 금요일이면 금요 구역예배, 심방 가고 전도훈련 받고, 어쩜 그렇게 열심히 섬기는 지 모릅니다. 생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겠다 주님을 몰랐으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친구들 부러워하면서 때마다 시마다 요리 집에 모여서 계나 하고 동창회나 했을 사람들, 잘못 나갔으면 춤바람이나 나고 인터넷에서 채팅이나 하고 다녔을 사람들이 그렇게 단정한 자모들이 되어서 주님 섬기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변화시켰기 때문에 세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사람으로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귀하고 소중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 많이 들고 중년이 넘어서 가정주부가 지나가고 나면 어디에 쓸데 있겠습니까? 밥하고 빨래 잘하는 것 말고, 감각이 젊은이를 따라가겠습니까, 힘이 젊은이를 따라가겠습니까? 마음은 청춘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전도를 해도 젊은이들보다 전도를 더 잘합니다. 인생의 경험이 많으니까 젊은이들이 예수 믿으라고 권해도 다가오지 않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 경험을 다 동원해서 ‘주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참된 인생의 도리이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줄 때 그렇게도 호소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우리를 변화시키신 하나님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 쓸모 없었을,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 없었을,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들을 주님이 만나 주셔서 변화시키셔서, 주님의 집에 -하나님의 나라에- 소중한 감람나무와 같이 주님이 사용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의 얼마나 아름다운 행복이고 기쁨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시중 들면서 힘들다고 생각될 때 그 때 한번 그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쓰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이 세상에는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이렇게 많은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이 나를 많이 만나주셔서 나를 많이 새사람 만드셔서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인데 그것이 나에게 짜증부릴 이유가 되고 영적 침체의 이유가 되면 이것은 정말 위대한 역설입니다.
‘나 정말 짜증 나 죽겠어. 도대체 왕이 왜 나만 사랑하는 거야. 국사가 있으면 꼭 나만 불러. 중대한 일은 나와만 의논해야 된데. 정말 세상 살기가 싫어. 심리적 침체에 들어가네’라고 합니까?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주님을 섬기기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여러분들이 한번만 경험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기며 살던 모든 자리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갔을 때에 그래서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세상에서 몸부림치고 타락도 해보고 이 세상의 즐거움에도 빠져보고 애를 써도 역시 자기의 삶을 회상해 보면 그 때가 그렇게 생각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주님의 도구가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집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수종 들고 거들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귀한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행복하던 때는 주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경험될 때, 그 때가 제일 행복할 때입니다. 주님만 섬기면서 살아가다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세상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가고 싶습니다.
(예화: 정지용씨의 ‘향수’ 라는 시-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돌아간 후 지은 시는 고향에 돌아왔건만 별 볼일 없다는 내용이었다)
여러분들이 세상이 그리워져도 가보면 그 세상이 옛날 그 세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세상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이미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세상에서 이단자요 이방인입니다. 세상으로 돌아가도 그 세상에서 보는 즐거움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고 모두 헛되도다는 지혜자의 고백을 토해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값진 인생은 일생 다 가는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한번만 쓰시지 말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연필로 치자면 맨 처음 몇 번 쓰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런 연필이 아니라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용해 주셔서 주님의 집의 귀한 감람나무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소용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만들어 주셨지 않습니까? 얼마나 소중한 지 모릅니다. 하다못해 식당에서 봉사를 하고 토요일에 와서 청소를 하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새가족을 안내하거나 혹은 교회에서 준 점퍼를 입고 호루라기를 불며 주차를 해도 그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지 모릅니다. 그들 중 아무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고 주님이 더없이 귀하기 때문에 그렇게 라도 자기가 섬기면서 살지 않고는 주님께 지고있는 그 사랑의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서 교회의 한 구석, 한 마당이라도 섬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을 섬기고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년도에도 금년처럼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시겠지요. 또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많은 귀한 감람나무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쓰임 받고 주님께 고임을 받으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성도들을 섬기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여야 할 많은 주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점점 늘어나는 직원들을 보면서, 저는 목회 하면서 직원들 때문에 마음 아파서 고통 해본 적이 한번도 없고 직원들끼리 마음이 갈려서 싸우는 것 때문에 고통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교회에서 일을 가지고 봉사하다보면 오히려 신앙이 뒷걸음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경험인데 신앙 안에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잘 자라 가는 지 모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교회를 섬기는 직장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사역에 들어서게 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일하게 하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교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역자들에게 휴일이 없습니다. 휴일도 없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제가 감독을 해서가 하니라 스스로 자기 사역 속에서 하나님 섬기는 기쁨 때문에 새벽부터 밤 한시가 되도록 교구실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물심양면으로 섬기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때는 일부러 내려와서 그만 자라고 교역자들을 내보내고 불을 끄라고 지시하기도 하는데 누가 시켜서 강압적으로 한다면 얼마나 상막한 직업 전선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섬기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작년에도 휴가를 일주일씩 주었는데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그것을 다 쓰지 않았습니다. 휴가 가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즐거운 속에서 살면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당하는 손해나 어려움이 결코 고통이나 자존심 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섬기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본인들은 그런 즐거움과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 감람나무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그렇게 주님의 손에 의해서 쓰임 받으며 살 수 없었을, 주님 만나기 전의 오네시모와 같았던 사람들, 주님 만나기 전의 다윗과 같았을 사람들, 예수님 만나기 전의 사울과 같았을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주님이 그렇게 변화시켜서 주님의 일에 수종드는 주의 귀한 감람나무로 사용하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더더욱 이 감람나무가 푸른 감람나무라고 말했으니 이 감람나무는 계속 성장하고 있는 감람나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지만 언젠가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들어서 더 뛰어난 일에 사용하셔서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들이 주님 섬기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집에 감람나무로서 주님께 고임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삶에 만족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온갖 부와 영화를 모두 누렸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목을 찾았는데 그것은 왕관을 주신 하나님도 아니고 왕국을 주신 하나님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영토를 거느리고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호의 호식하게 하시는 그 영혼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처럼 하나님이 삼으셔서 주님 몰랐더라면 쓸데없었을 인생을 이렇게 값지게 하신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정이 시인의 마음에 사무쳐서 이렇게 노래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한번 마음을 열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일들을 부담이요 무게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식인가, 그리고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시나무와 같았던 그 쓸모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주님께 고임을 받으며 성도들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생각하며, 여러분들이 그런 꿈속에서 자라나서 주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이 여러분 속에 더 커지고 여러분 자신을 감람나무와 같이 삼으신 그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하며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우리를 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②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52:9下)
우리들이 주님을 알지 못했으면 정말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었을 텐데 부족하나마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집의 귀한 감람나무와 같이 삼으시고 주님께 아주 유용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귀하게 만들어주신 것이 계속 실감이 나야 될텐데 시간이 지나면 짜증이 납니다. ‘왜 나만 감람나무처럼 생각하시는 거야’하는 마음도 드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 몰랐으면 우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주위에서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이 여러분 자신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화: 청년, 주부, 남자들이 주님 몰랐으면 되었을 여러 경우)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을 더럽게 여기는 것은 자기가 옛날에 누구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모두 자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하나님이 푸른 감람나무처럼 귀하게 만드시고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두 번째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선하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주의 이름’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공식을 하나 알려드리자면 ‘주의 이름’은 곧 주님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는 ‘이름 사상’입니다. 그 이름은 곧 그 사람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태도는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양쪽 중 하나가 거짓인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도 싫어합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도 대적합니다. 주님을 높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어디서든지 주님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기림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보면서 맨몸으로 뛰어나가 한판 겨루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욕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뛰어나간 것인데 뛰어나간 사람은 그 사람 하나였습니다. 그 한 사람만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길 승산이 별로 없어 보이는 그 싸움에 자기를 던진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그의 열심이 곧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데 주님이 여기 계십니까? 안 계십니다. 계신다고 해도 안 보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위해서 진실하게 열심히 살면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는데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 보이지만 주님의 이름은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 명예를 위해서 사는 삶은 곧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았던 삶으로 명백하게 기록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만들어 주시고 자기를 그렇게 사용하실 때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하고자 했던 일은 주님의 선하심을 알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면 높여주실수록 주님이 정말 선하고 자기를 향해서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면서 감읍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사람, 그렇게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해야할 두 번째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선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좋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상도 성경에서 보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에서의 선함입니다.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차이가 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하심이 너무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뻗대며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그 인도를 기뻐하느냐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기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그것이 선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따를 수 있는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한 제자는 품에 안으시고 베드로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도 잘못했고 베드로도 잘못했는데 요한은 개인적으로 죄 용서를 받으면서 화목을 경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미워하신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 자신의 죄의식 속에서 예수님과의 화해함을 아직 맛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다니는데 나중에는 띠 띠고 사람들이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고 하시는 것이 순교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듣고 ‘예수님 품에 안겨있는 제는 어떻게 됩니까?’하니 ‘살려두든지 말든지 상관 말고 너는 너 갈 길이나 가라’하실 때, 베드로가 ‘할렐루야’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한 제자도 자기가 요한의 처지가 되고 요한이 자기 처지가 되기를 원했을 지 모릅니다. 그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의 성품을 많이 경험하고 주님이 선하시다고 여기시면서 베푸시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선이 자기에게 당장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성도가 완전히 부수어졌을 때, 그래서 왕이신 그분의 발 앞에 완전히 부복했을 때 할 수 있는 고백이 성경에 가끔 나오는데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자기를 낮추고 자아를 못 박은 상태에서 고백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께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것입니다. 저는 너무 신경 쓰지 마옵소서”하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고귀하게 주님이 바꿔주시고 사용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맥락에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를 변화시켜주신 은혜, 또 하나는 우리를 사용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행하신 우리 영혼의 참된 변화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고 삶의 자세를 바꿔놓고 사람됨을 고쳤습니다. 껍질은 옛날 사람 그대로인데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니까 우리가 쓸모 없는 사람에서 귀한 사람이 된 것이고 예전에는 자기의 욕심의 종의 되어서 자기 육신을 즐겁게 하는 더러운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었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요긴한 사람으로 우리를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오네시모처럼 말입니다. 그렇게도 주인의 속을 썩이던 쓸모 없는 노예가 주님을 만나고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주의 일을 위한 신복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존귀합니까?
그렇게 귀한 것을 알았으면 주님의 선하심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화: 전에 있던 교회의 운전 기사 이야기-생활비가 적어서 못살겠다며 옛날을 그리워 하던 그에 게 한 장로님께서 옛날에 돈은 벌었지만 천하게 살았었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더니 생각 을 돌리게 되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과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교회는 늘 열심 있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있으면 그 사람에게로 일이 다 가게 마련이어서 몇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은 별 보고 교회에 나와서 별 보고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새벽 기도에 나와서 청소하고 주일학교 하고 성가대 연습하고 본 예배드리고......합니다. 왜 겹쳐서 하느냐고 하는데 사람이 없는데 어쩝니까? 그러나 은혜가 있을 때는 했는데 주일이 오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도대체 내가 뭐 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오전 예배드리고 가족들과 어울려서 공원에도 가고 낚시도 가고 영화구경도 가는데 나 혼자 이것을 다 짊어지고,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 옛날에 일요일 밤에 내가 무엇을 했나’ 매일 등산 간다고 가고, 가족 팽개치고 낚시질한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먹고 들어오던 시간이 교회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보다 더 늦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존귀하게 만들어 준 것을 정말 아는 사람들은 ‘주님을 많이 섬기기 때문에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긴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찔릴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 중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사람들, 주님이 귀하게 만들어 주신 사람들은 그러면서 주님의 선하심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무슨 선하심입니까? 자기를 그렇게 변화시켜주신 주님, 그리고 쓸모 없는 자기를 소중하게 사용하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하며 그 속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주님의 선하심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항상 가슴에 담으십시오.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크며, 주님이 내 인생을 향해서 정말 선하신 분이셨다. 야비하신 적이 없으셨고,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었고 항상 선하신 분이시다’ 이런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성품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도 세상이 가끔은 감당할 수 있는데-능력이 많은 사람도 유혹하면 넘어질 수 있으니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주님의 선하심을 전폭적으로 확신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욥과 같은 사람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부인은 “하나님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 욥은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내가 깨우쳐서 주님의 그 깊은 뜻을 다 못 헤아리기 때문에 내가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하며 경험을 뛰어넘어서 그분의 선하심의 확신에 의해서 주장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삐치기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토라지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굉장히 슬퍼하십니다.
(예화: 직장 생활 할 때 상위 부서에서 데려가려고 해서 안 가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결국 가게되었다-하나님께도 섭섭하고 원래 있던 부서의 사람들이 지켜주지 않은 것이 섭섭하여 기도원에 갔는데 무척 아팠던 일)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은 마음을 곱게 먹어야 하나님께서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새롭게 발령 난 부서에 가서 어렵기는 했지만 정말 수많은 간증거리를 낳으면서 보람있게 하나님 섬기면서 직장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가 제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과 정말 깊은 친교를 나누면서 신앙과 직장생활이 완벽하게 하나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주께 하듯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고 요셉과 거의 비슷한 직장생활을 했다고 술회하며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할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항상 사표 써서 다녔습니다. 그후에 너무 감사하고 직장 속에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셔서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가게 되었으면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나보다’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됐는데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은 언제나 환영인데 하나님이 내 결제를 받고 역사 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확신하지 못하는 미성숙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귀하게 만들어주신 사람들, 주님이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달라야 됩니다. 자기를 귀하게 만들어 주시고 귀하게 써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성품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많이 맛본 사람들은 그 선하심을 더 많이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할 삶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배워가야 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스스로 감사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은 말로가 너무 불행합니다. 정말 감사하면서 주님 기뻐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주의 성도들 앞에서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하는 확신과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태도는 비례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녔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지하면서 산다는 것은 오랜 인격적 경험을 통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알았을 때에 의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여러분을 자꾸 도와준다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예화: 미국의 한 목사님의 어머님이 미국에 가시면서 나중에 돈을 받을까봐 기내식을 하나도 잡수 시지 않고 혼절하실 정도가 된 이야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그 하나님이 정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향해서 아까운 것이 없는 분이시다. 자기의 외아들도 나를 위해 주셨쟎아’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가 생겨날 때,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이해가 생겨날 때, 그 때 주님을 의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분도 주님 밖에 없고, 주님 앞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주님께 기대기만 하면 반드시 나를 냉혹하게 대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하심을 안 사람들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감람나무처럼 귀하게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그 은혜, 쓸모 없는 우리를 정말 쓸모 있게 만드셔서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 주신 그 크신 은혜, 그것을 깊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길을 걸어가면서도 ‘이것이 끝이 아니리라’고 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주님의 선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 분의 그 품을 자기가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지금 조금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도 믿음으로 살면 이 고통이 바뀌어서 축복이 되리라고 하는 신앙, 하나님이 자기를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 사람들이 나를 악하게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반드시 내게 선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기 때문에 저들이 내게 베푸는 그 악을 언젠가는 선으로 바꿔서 갚아주실 것이라는 그 신뢰 속에서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주님이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우리를 소중하게 만들어 주신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신 그것을 안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할 삶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하심을 깊이 확신하는 가운데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큰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움이 있어도 그것을 생각하면 '나같이 쓸모 없는 가시나무와 같은 인간을 감람나무처럼 만드시고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나를 사용하셔서 주님의 집에 존귀한 한 그루의 나무로 삼아놓으신 분이시라면 내가 그분을 신뢰할만하다. 나는 그분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그분은 나를 결코 모른 채 하시지 아니하시리라'하는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거기에서 강건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담대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확신이 나오고 관용도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해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새 한 마리 날아 앉을 수 없는 가시나무 떨기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바꿔주셔서 귀한 성도로 삼아주시고 또 많이 망가진 사람들을 고치셔서 무엇보다도 존귀하게 쓰시는 사람들로 하나님이 바꿔놓으셨습니다.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선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혜를 깊이 의지하면서 주 앞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사는 삶, 이것이 감사하는 삶의 마지막 결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