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실천을 위하여
(2003-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참된 예배자가 되자(롬12:2) 2003.1.7 교직원예배 1
2. 죄를 무서워함이 경건입니다(마1:20) 2003.1.14 교직원예배 7
3. 마지막 때에 있을 의무(벧전4:7) 2003.1.21 교직원예배 15
4. 마음으로부터의 기도가 주는 영향력(마6:7) 2003.1.28 교직원예배 20
5.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는 자가 되라(빌1:3) 2003.2.4 교직원예배 24
6. 감사의 힘(빌1:3-5) 2003.2.11 교직원예배 29
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복하라(사55:3) 2003.2.18 교직원예배 34
8. 말씀을 즐기는 위험(약1:22-25) 2003.2.25 교직원예배 37
9. 구속의 감격을 늘 간직하라(출12:5-11) 2003.3.4 교직원예배 41
10. 그리스도를 추구한다는 것(히12:4) 2004.3.2 교직원예배 45
1. 참된 예배자가 되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복된 새해의 첫 근무 시간을 허락해 주시고 이처럼 예배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저희와 함께 해 주셔서 오늘도 이 말씀을 들을 때 은혜가 넘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도는 영적 예배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드릴 영적 예배에 대해서 말합니다.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드리던 구약의 제사와 대칭된 것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 예배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라고 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신령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러한 영적 예배를 말하면서 어떠한 사람들이 이러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섬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적인 일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독교적인 일에, 여호와 종교적인 일에 수종 들었지만 전혀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던 인물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엘리와 같은 사람이었죠. 그는 여호와의 종교를 수종드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년을 보면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룟유다는 훌륭하게 기독교적인 일에 봉사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하나님을 섬긴 자라고 기억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적 섬김 뿐 아니라 영적 섬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육적 섬김이 정말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줄 모르는 사람이 행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경배하도록 돕는 그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이 우리에게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영적 예배자가 먼저 되기를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본받는 다는 말이 ‘쑤스케마티조’라는 단어인데 틀에다가 무엇인가 액체를 붓고 찍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붕어빵이나 주물 같은 것을 찍어내는 것입니다.이 세대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각 사람을 모두 획일적으로 일률적인 사람으로 찍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도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그 시대에 관한 문제에 관한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시대가 아무리 그렇게 찍어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끔 TV를 돌리다 보면 70년대 영화가 나오죠. 어깨 깃이며 넥타이의 크기가 크고 머리는 길게 길러서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왜 그런지 내가 창피하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왜? 그때에는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고 그리고 지금은 이미 그런 게 유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면서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도덕과 관계가 없는 것은 조금 따라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남들이 깃이 짧은 양복을 입을 때에 또 기왕에 양복을 살 바에는 그런 양복을 사서 시대에 뒤지지 않게 입고, 그리고 남들이 이렇게 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다 하면 조금씩 따라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유행을 선도하지는 마세요. 선도하고 창조하지는 마세요. 그건 너무 튀니까. 어느 정도 따라가는 것은 괜찮아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면 괜찮고. 남들이 머리에 염색하면 사모님들이나 직원들이 조금씩 염색하는 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빨간 머리나 초록색 머리는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좀 세련되게. 그래서 양말 하나를 사도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사지 말고 검은 양복이 있는데 그 밑에다가 무슨 색 양말을 신을까 아니면 바지를 살 때도 내가 윗도리가 초록색이 있는데 바지는 무슨 색 입으면 될까? 내가 몸이 뚱뚱한데 옷을 입을 때 검은 색 계통을 입으면 날씬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절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그 시대를 호흡하고 그리고 살아갑니다.
전도사님들이 있지만 만약에 이 전도사들이 그야말로 주일날 교회 올 때 도포자락에 수염을 기르고 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들어와서 진짜 내가 전도사 도사다 그리고 만약에 성경을 가르친다면 그게 현대 커뮤니케이션이론에서는 노이즈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 도시나 이렇게 세련된 교회에 있지 않고 저 산에 있어서 그래서 도교나 가르치는 사람이기를 기대하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적절하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게 어느 정도 그 시대를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화요 여리고전도 나갈 때 우리 전도사들이 그렇게 도포자락 휘날리고 수염 기르고 갓 쓰고 그 다음에 산신령이나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들고 가서 45평 아파트 문을 두드리며 예수 믿으시라고 하면 아마 혼절할 겁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사치하지는 않더라도 티셔츠하나 사 입어도 색깔 맞추어서 사 입고. 괜찮아요. 두 개 사 입을 거 모았다가 하나 사 입고. 괜찮아요. 사치 아닙니다. 잘못된 것 아닙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대가 우리를 아무리 찍어내려고 해도 우리가 저항하면 찍혀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순응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응하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부패성과 죄 같은 것들이 부도덕한 이 세상의 틀에 찍혀서 획일적으로 만들어내지고자 할 때에 거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본에 의해서 찍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뭐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 라는 안일한 교역의 형태, 그리고 대충대충 섬기는 것, 그리고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 제 육신의 이익을 따라 섬기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정신이고, 시대의 정신이 자기의 육체의 욕망이나 부패성과 결합될 때 그 때에 틀에 찍혀 나오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고만고만하게 찍혀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어제 백금산 목사님이 세배를 와서 같이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그 교회 저도 갔다 온 교회인데 1200명 모이는 교회인데--그 교회를 갔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데 (전혀 다른 교회니까) 그 교회 목사님께서 30분 설교에 예화를 여덟 개를 엮어서 설교를 한다고 하니까 예화 수집 담당 강도사가 있어서 그 사람은 밥만 먹고 예화만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인데 그래서 그걸 공급해 주고 자기도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담임목사님을 이 신도시에서 유능한 설교자로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가서 성경을 쭉 설교 하니까 30분 이상 설교하면 안 되는 게 철칙으로 되어 있는데, 90분씩 설교하는데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니까 예화 수집 담당하던 강도사가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실지로 90분씩이나 집중하고 말씀을 들으니까 .나중에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지만 알고 보니까 이게 아닌 것 같다. 이게 아닌 것 같다.
우리들이 항상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쉽게쉽게 가르치고 살아가고 하는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들이 좋아합니다. 이게 쉬워요. 그런데 우리의 사명이 뭡니까? 그렇게 이 세상에 의해서 찍혀낼 것 같은 사람들을 도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찍혀내지지 않도록 뭔가 거룩한 감화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의 역사에 도구가 되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 놓으신 이유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매일 매일 섬기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단히, 생각이 없이 우리의 육신의 경향성 그다음에 우리의 부패한 지향성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풍조 이런 것들에 의해서 틀에 찍혀내 지기를 거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영적 예배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오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희랍어로는 ‘그러나’라는 뜻입니다. 강한 반의어죠. 그러지 말고-- 그 반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뒤에 나오는 “변화를 받아”는‘받아’라고 하는 수동태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지요. ‘새롭게 하고’는 능동태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변화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시지만 변화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주로 변화시키시지 변화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변화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목회자들을 보면서 저를 포함해서 목회자뿐만 아니죠. 우리 모든 성도들을 보면서 오늘날에 가장 결핍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을 향한 추구입니다. 그 추구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뭘까요?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고 하나님을 추구 한다 그게 결국은 무슨 뜻일까요? 변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온전해지기를 갈망하는 것, 내 마음속에 그리고 있고 성경을 통해 내 마음 속에 심겨진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갈망과 지금 현재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내 모습사이에 존재하는 격차 때문에 괴로워서 견디지 못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때까지 지키고 이끌고 지켜주신 은혜 감사하지만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겨우 이정도 밖에 되어있지 않은 것, 그리고 지금의 나의 그런 존재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그 당위의 존재보다 훨씬 차이가 있다 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나는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부적절하게 어긋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나로 인해서 주님의 창조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안타까움과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마음 아파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어서 현재의 모습을 인해서 안타까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추구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이 세상의 틀에 찍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고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틀에 찍혀서 주조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틀에 찍히는 것은 정적이지만 --이 세상을 본받는 것--그것은 그냥 찍혀져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끊임없는 동적인 개념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잡았다 함도 아니라 !!!그러면서 닮아가고 더 온전해져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결국은 끊임없이 변화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변화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는 급속하게 부패하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지식적으로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고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그의 영혼의 상태는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사람 그래서 나에게는 받아야 할 이런 은혜가 있고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또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시 세우는 그런 마음 지킴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열렬히 기도하다가 은혜를 경험한 사람, 말씀을 경청하다가 은혜를 경험한 사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생각하다가 변화 받은 사람은 있어도 자다가 변화 받은 사람은 없고 오락을 하다가 변화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누구든지 변화시키실 수 있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십니다. 변화시키시고 역사하십니다. 방종하게 마음의 허리띠를 풀고 그리고 옷매무새가 흩어진 채 살아가는 일을 일 년 내내 되풀이 하는 사람과 매일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그리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내가 정말 영적으로 변화받기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생각하면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께서 결코 똑같이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영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인 예배자가 되는 것이지요.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한 사람의 모든 인생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예배자의 사람됨을 넘어설 수도 없고 모자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에이든 토져는 기독교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참된 예배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깊이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이 사역해서 무엇 하렵니까?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시고 그 영혼들을 더 잘 돌보고 그리고 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르쳐서 훈련시켜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genuine christian을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그들이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남아 있든지 다른 곳으로 떠나가든지 어느 곳에 흩어져 있든지 간에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그들이 참된 예배자가 되고 그래서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 삶이 확장되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이 예배가 희랍어로 ‘레이뚬비아’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히브리단어로 ‘아보다’인데 그 ‘아보다’ 는 바로 밭 갈다라고 되어 있는 ‘아바드’에서 나온 것이고 거기에서 ‘에베드’가 나오는 데 그 ‘에베드’가 바로 종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예배와 노동 이런 것들이 모두 다 하나로 포괄 되는 개념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가 넓은 의미의 삶으로 확장되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참된 예배자가 되면 11시에 예배할 때에만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가고 숨 쉬고 먹고 마시는 인생 전체가 예배가 되고 예배자는 자신이 예배자가 된 정도 만큼만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 수 있고 그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그의 전 삶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런 예배자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사람들은 예배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communion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좋아하신다고 하는 애정을 예배를 통해 표현했고 그의 전 삶에 하나님이 더할 수 없는 축복을 주셨으니 그 축복은 바로 참된 예배자들과 함께 해 주시는 임마누엘의 은혜였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니라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다윗이 어디를 가도 이기더라 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자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으로도 움직여 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천천의 기름대신 흘러내리는 몇 방울의 눈물로도 지존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단 말입니다. 왜? 어마어마한 제물과 어마어마한 희생양이 있는 그곳에 주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참된 예배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시선이 고정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셨고 지금도 참된 예배자를 오늘도 찾고 계시는 거지요.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물론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사역을 해야 됩니다. 저는 한 해를 넘기면서 올 해처럼 노심초사 하면서 한 해를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호된 연말을 보냈습니다. 1년 동안에 1039명이나 보내 주셨고 그리고 그 중에서 400여명을 건졌습니다. 왜냐하면 1500명이 최소한이고 아마 어쩌면 2000명을 넘게 보내 주실지 몰라요. 그리고 아마 그 중에서 800명 정도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이들을 돌볼 것인가 어쩌면 올 한 해가 말하자면 우리들이 그렇게 가슴아파하고 힘들어 하던 그런 기존의 대형 교회로 돌아가느냐 열린 교회의 독특한 목양적인 구조를 가지고 영혼들을 보듬어 안는 사역의 틀을 새롭게 다지느냐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초조하게 연말을 지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 사역자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정말 가슴 시릴 정도로 여러분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여러분 중에 누구도 게으르거나 나태해서 영혼들을 유기시킨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수고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게을렀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렇게 상황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룰이 없이 불합리하게 어느 것에 집중되어 있고 뭉쳐있는 사역들을 양을 확대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펴서 그래서 다가오는 많은 영혼들을 보내줄 이 새해에 대비하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탐구하고 조사해서 그래서 효과적인 방법들을 우리들이 찾아내고 효율을 극대화하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제껏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할 것이고 그래서 그걸 위해서 우리들도 끊임없이 기도하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이제 제도들을 새롭게 하고 틀들을 새롭게 짜갑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모든 것들을 인정하면서 그 위에 여러분들에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런 훌륭한 방법을 만들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모든 계획들이 아주 적은 의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좋은 제도와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가나안을 향해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함께 하시던 하나님을 사자가 대신할 수 없었던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아주 지혜롭게 그 일들을 해나가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은 단지 제도와 프레임이고 시스템일 뿐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제도나 시스템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서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자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좋아하시는 사람 예배자가 됨에 있어서 예전보다 비교될 수 없는 훌륭한 예배자가 되요. 그렇게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세 번째는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은 표준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표준이 철저하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것 그다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다음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 결국은 그 모든 초점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이 초점이 되어서 우리가 분별력을 갖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되어서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께 관심이 집중되어있고 이것을 하나님이 선하게 생각하실까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렇게 하는 것 이외에 더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는 길은 없을까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일을 맡기시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그런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육신의 편안함이나 마음의 부패로 인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일하려고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에게는 어두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의 생애를 돌아보십시오.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가 되었을 때 예배를 드리면서 나도 기뻐했을 때에 하나님도 기뻐하셨고 하나님이 내 예배를 기뻐 받으실 때에 예배자인 나도 즐거웠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매일매일 해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금년 한 해도 52주가 여러분들 앞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여러분들이 행한 수고는 정말 감사한 것이었고 몇몇 사람을 제외해 놓고 여러분들 대부분이 흘린 땀과 수고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저는 기억 못해도 주님이 모두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지난 한해는 지난 한해대로 주님을 훌륭하게 섬기며 살았지만 올 한해 우리 앞에 새롭게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1년을 사역하고도 참된 예배자가 되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슬픈 것일까요?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이 일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는 요셉을 하나님이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그 집안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올 한 해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죄를 무서워함이 경건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첫 난감한 일이였겠죠? 정혼을 하고 약혼을 했는데 히브리사람에게는 결혼보다 정혼이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혼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미 결혼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취급되는 것입니다. 근데 아이를 가졌다! 자기색시가! 자기는 한 번도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아이를 가졌다! 그를 때 남성들이라면 제일먼저 찾아오는 감정이 어떤 감정일까요? 분노의 감정일 거예요. 그 분노를 해결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호소하면 돌로 처서 죽임을 당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 있어서 그 일을 당했을 때, 우세했던 감정이 분노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었나? 바로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에서 나타났습니다. 요셉의 마음의 상태까지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현몽하게 하셔서 주시는 메시지였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요셉의 마음속에 있었던 우세한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커다란 두려움, 무서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궁금한 것은 그 무서움이 무엇에 대한 무서움인가? 무엇에 대한 무서움인 것 같아요? 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기가 막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벌써 결론적으로 결론부터 이야기하는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 의라고 하는 개념은 하였든 논문을 한번 써보면 좋을 정도로 성경에서 어마어마한 덩어리입니다. 한번 탐구한 적이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덩어리입니다. 성경에서 의에 대해서 파악을 했다고 하면은 거의 성경의 줄기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는 어마어마합니다. 창조 그 상태가 의에 상태였고 그 의를 잃어버린 것이 개기가 되어서 의와 불의가 투쟁하고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 후에 의에 승리를 담보하시고 그 보증 속에 살다가 마지막 불의한 자를 처벌하심으로 의로운 왕국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개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종합적인 개념인데 여기서 의롭다고 할 때에 그런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요셉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오늘 새벽에 설교했듯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 속에서 원래 원 의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존입니다. 절대의존의 상태에서 절대순종하며 창조의 원래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의다 그것이 원의에요 그것을 잃어버린 거죠 죄가 들어오면서 요셉은 말하자면 인간이 죄인이니까 그 원의를 모두 회복할 수 없지만 그런 경향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의로운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은 혈기가 있고 불의를 차마 보지 못하고 용감하게 뛰어나가서 단칼에 차단하는 그런 식의 의에 개념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 전체 중에서 아주 부분적이고 표피적인 개념입니다. 훨씬 더 뿌리가 깊다 그런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나와 정혼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분노가 아니고 그가 하나님께 온전히 기대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우리들이 올바르다는 미명하에 우리들이 얼마나 자신 속에 있는 포악을 따라서 그렇게 사는 기회로 삶는지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죄에 대한 분노가 있을지 몰라도 죄인에 대한 긍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점 에 있어서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셔요.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탁월한 분노와 함께 죄인에 대한 한없는 긍휼,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인간들은 그 두 가지가 어떻게 자신 속에 융합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요셉이 죄에 대한 두려움을 깊이 갖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나와 정혼한 여자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분노보다는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워한 것이 단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참함, 이런 것들이 아니에요 죄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면 죄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영적인 수준이 높다고 해서, 신앙이 뛰어나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영적으로 깊은 사람은 죄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쉽게 죄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그래도 항상 마음속에는 그 죄를 폭발물처럼 다루는 두려움이 내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향해서 강한 삶은 한없이 약한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동반한 마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탁월하게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정확하게 비례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재는 것은 쉽지 않아요. 내가 지금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있는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요한 웨슬리같은 이런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를 다룬 일기들을 위필드 일기나 이런 것을 읽는 것이 굉장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비교하면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가. 내 마음의 틀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틀인가 하는 것들을 우리가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우리가 무의식중에라도 죄를 어떻게 생각하고 내 생활에서 발견한 죄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스스로 살펴보면 아주 분명하게 그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뭐냐 하면 죄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자꾸 혼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자체를 자신의 연약함과 혼돈을 하거나 혹은 자기가 분명히 파악한 죄인데도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하는 자신의 특질과 뒤섞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죄는 우리의 마음의 틀 속에서 아주 교묘하게 지지를 받으면서 숨게 되요 은신처를 마련하게 되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죄를 무서워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다. 그리고 죄는 더 큰 죄에 대해서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 잠깐 갔을 때에 일어난 일인데 여러분 보시면 모르시겠어요? 어는 목회자 한사람이 여러분 읽었습니까? 목회자 한사람이 읽었죠? 강도짓하고 성폭행하고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가 있냐? 그리고 또 예배시간에 설교하고 그리고 새벽기도 끝나면 슬슬 한 건하러 돌아다니다가 문 열려 있는 집은 가서 흉기로 위협하고 성폭행하고 돈 뺏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한 20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제가 있던 교회에 같은 노회인데 그 목사님이 권총으로 사람을 죽였어요.
그런데 그 동기가 뭐냐 하면 이천오백만원을 빼앗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 거예요. 근데 그 이천오백만원을 빼앗은 동기가 뭐냐 하면은 교회를 지으려고 그랬대요. 실화에요 합동 측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처음에는 내가 예기했죠. 말도 안 된다 그랬는데 나중에는 이해가 가더라고요 어떻게 이해가 갔어요. 오십쯤 됐어요. 오십 후반쯤 되었는데 죽어도 교회가 안 돼요 그런데 동기들 교회는 잘되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언가 이 분이 내린 결론은 자기는 교회건물이 없고 친구들은 교회건물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잘된다고 본 게에요 아직도 복역 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보게 되자 군대에서 가져나온 군대에서도 그것을 왜 또 가지고 나와요 그때도 예수 믿는 사람이었을 텐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중간단계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그런거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야 끔찍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지만은 그런 일들은 여러분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이것입니다. 정말 놀라워요 그런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작은 죄들을 그런 식으로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걸로 버무려버리니까 마음의 틀 속에서 숨고 그 숨는 작은 죄는 그보다 좀 더 큰 죄에 대한 친화적 성격, 경향을 불러일으켜요.
그래서 마음의 틀 전체가 연약함으로 포장된 죄들에 의해서 지배되면서 마음전체가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야기하는 “프로펜세티” 마음 자체가 죄에 대한 지향성을 갖게 되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처음에는 자신이 죄를 선택했는데 혹은 허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죄에 의해 자신이 선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죄를 선택할 수 있는 그 선택의 범위를 이미 뛰어넘어서 죄에 의해서 사로잡힌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요셉이 가지고 있던 그 마음의 틀을 생생하게 보여줘요 그 마지막으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죄의 무엇을 두려워한 것인가? 첫째는 죄의 근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렇게 내 아내 될 사람이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를 가져서 나 혼자 소유할 수 있는 여자를 어떤 남자가 나누어 가졌다는 말이지 그런데서 오는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이 죄의 근원에 대한 두려움, 죄의 근원이 무엇이냐 죄의 근원은 하나님을 향한 거역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모든 통치에 대한 도전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해 놓으신 모든 계획을 자신에게 향한 계획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모든 구원의 계획들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역사하고자하는 동기를 가진 것이 바로 그 죄다 그것이 예전에 가지고 있는 의로운 성품하고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분노를 느끼기 전에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게 되요 그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요 우리를 흔히 약함이라 고하면서 얼버무려버리는 작은 죄들의 근원과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폭행을 하고 강도를 하고 살인을 하고 그런 죄의 근원이 차이가 난다면 우리가 죄에 크기에 대해서 각자 다른 방식의 마음을 가지고 죄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은 항상 같아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인 도전입니다. 그래서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신자가 죄를 짓는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가 어느 순간 죄를 택하게 되면 그러면은 어느 순간 죄를 짓게 되고 그 죄가 죄를 짓고자하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죄를 택하잖아요. 그러면 신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내제하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일시적으로 작용이 정지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존재는 하는데 작용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받아들이는데 까지 어렵지 일단 그 죄를 내가 품고나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죄가 운데 빨려 들어가요 그렇기 때문에 죄의 근원이 같기 때문에 작은 죄에 대한 태도는 큰 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중요한 죄에 원리에요
그래서 결국은 작은 것들에 대해서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너그럽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이라는 말로 이렇게 비벼버리려고 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결코 커다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고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그 죄를 비난하고 그 죄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여건이 마련이 되고 죄가 진전해서 그것을 선택할 때가 되면 거기에 대한 전혀 말하자면 반항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들이 죄에 근원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요셉이 가졌던 두려움의 또 하나는 자신의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자신의 밖에서 존재하는 것도 굉장히 두려운 것이지만 이 신자의 영혼은 죄가 자신에게 연관 지으려고 한때 그때 경건하고 의로운 영혼은 가장 격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요 두려움을 느끼게 되요 그래서 요셉이 그렇게 무서워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죄가 자기 가까이 왔고 그런 죄는 언제나 있는 죄 아니에요? 여성이 간음을 하고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갖는 일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어요? 그 시대에도 다 그런 일이 있었죠. 근대 요셉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많은 죄 때문에 무서워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공포에 질려서 이 세상을 살수 없겠죠. 근데 그것이 자기와 관련 있는 사람을 통해서 매우 가까이 왔다라는 것입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잇는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그래서 자신이 연루될 위험이 있다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위험을 느끼면서 깊이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넘어가 보면 그 도덕적으로 잘못된데 빠지거나 교리적으로 이단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항상 가르치는 세 가지 교훈이 뭐냐 하면 그들의 죄에 대해서 엄위 경책할 것, 그들을 긍휼이 여길 것, 마지막한가지가 뭐냐 하면 견책하며 서 깊은 두려움을 느낄 것 왜? 죄를 저 사람속 에 일어난일이라고 객관적으로 보지말라 특별히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해서 세가지를 강력하게 이야기해요 경책과 사랑과 용서와 깊은 두려움을 느껴라 그이유가 무엇때문이냐하면은 교회가 가지고있는 특수성때문입니다. 무슨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드렸지만은 이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만물속에 존재하는 컴뮤니케이션이 다 단절됬어요
그래서 결국은 새하늘과 새땅이 거기에서 회복됨으로써 모두다 복구되고 창조의 질서로 돌아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맛보기로 그것들을 회복하는 샘풀을 이 세상에 두신거에요 그게 뭐냐하면 교회란 말입니다. 교회가 창조시에 가졌던 그런 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소유하게 되요 그런데 여기서 은사문제가 나오는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그 은사를 사용하지 않은 면 그것이 죄가운데 사로잡혀 살아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요 왜나하면 은사가 개인적인 은사가 아니에요 그 영적인 커뮤티케이션의 통로를 따라서 자신의 은사가 흐러가도록 만든 것이 교회의 원리에요 그래서 창조시에 그 모든 피조물들을 영적으로 연결시켜놓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주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흘려보내시고 계속흘러보내시는것입니다.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이신론적인 생각이고 계속 창조하셨을뿐 아니라 보존하시는것입니다. 계속흘러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그 컴뮤니케이션을 통해서 그 찬란한 창조주하나님에 그 영광이 나타나는것입니다. 그영광을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해력과 의지의 영광이라고 봐요 그런 찬란한 영광이 나타났는데 그런 컴뮤니케이션의 통로를 구속받은 그리스도안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에게 회복시켜주신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모든 은사는 그통로를 통해서 흘러보내서 그 창조주하나님의 신성의 하나님의 추만한 것을 드러내게되요
그러니까 니 은사는 내 은사라는것입니다. 내 은사는 니은사라는것입니다. 니께 내꺼다 니소유는 내꺼다 나에게 어떤 특별한 재능을 주셨으면 내꺼다 그게 어디에서 실현이,구현이 되느냐하면 이렇게 신학적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도 초대교회가 그것을 정확하게 신학적인 의미를 이해한거에요 성령의 충만속에,그래서 제일먼저 일어난 것이 뭐죠? 성령강림일어나고 제일먼저일어난일이뭐에요? 자기의 소유를 다팔어갔고와서 그통로를 통해서 다흘러보내는것입니다. 그 통로로 흘러보내는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너 많이 주셨지 그것 내꺼야” 그러지 않고 “내께 니꺼야” 그게 차이야 그 공산주의와의 기독교의 차이야 공산주의는 비슷한 이론인데 “너많치?그것 내꺼야”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이사람은 그게 아니라 “나많아 그것 니꺼야”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서 흘러보내는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공유하게되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중에 지금은 아직은 못했읍니다.만 구제문제를 이야기하면 그러니까 “체르티” 사람들에게 구제를 배푸는 문제가 여기에 나와요 그게 뭐냐하면 동기가 내가 많이 가지고있기 때문에 너에게 시여한다라고하는 나는 그것을 나스스로 이름붙이기는 제왕적 사고방식이라 생각하는데 내가 많이 가졌으니까 준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많은것들을 누리게 된 것은 내가 하나님앞에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주신 것은 모두 상급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것입니다. 내가 갖게된 지식이나 부나 나의 이러한 특별한 능력이 그 하나님앞에서 인정을 받아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것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하면 이게 내가 얻은 획득물이되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하면 이중에서 내가 처분할 수 있는 모든권한을 내가 가지고있는것입니다. 그중에서 내가 배풀면서 산다고 생각해요 시여적인 생각을 가지고있는것입니다. 그럴경우에는 자기 의가 필연적으로 동반되게되고 자기의 의가 필연적으로 동반되게되면 그것과함께 영적인 생명이 현저하게 약화되게 되요 그리고 복음적인 의로부터 멀어지게 되요 그리스도가 안보이게되요 이것이 바리세인이 받은 사고방식입니다. 어째든 그 통로를 통해서 흘러가게 되어있는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알고나면은 우리들의 재능이나 뛰어남같은 것이 그것로 인해서 우리가 높아지거나 교만해질수없다라는사실은 분명하게 깨닫게 되요 그런데 그런통로를 통해서 그 죄도 들어와여 이죄도 나 개인의 것이 아니야 그런 것은 없어요 개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인 문제는 없어요 내가 딱죄를 짓게되면 교회바깥에서,골방에서 나혼자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르지만 그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타고 흐르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창조가 이루어지기전까지 교회를 통해서 샘풀을,컴뮤니케이션에 복원을 통해서 그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보여주고 했던 교회의 영광은 말하자면 창조시에 가졌던것같이 완전하지않아요 가변적입니다. 사람들이 성화를 통해서 온전하고 진실한 삶을 살고 온전하게 되면 진짜 창조의 수순에서 찰란한 빛을 발해요 그리고 두려움과 사랑 이런것들을 함께 안겨주는것입니다. 초대교회때 이런 것을 경험하게된것입니다. 찬란하게 들어와요 그런데 인간각자가 성화에 있어서 뒤쳐지고 그릇된교리에 붙잡혀서 살게되면은 현저하게 그 커뮤니켜이션 통로를 통해서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아니라 죄와 이런것들이 타고 흐르게 되어요 그러면서 그 연결들이 끊어지게되요 끊어져나갈 때 결국 그리스도께로 현실적인 “프렉틱칼”한 접붙힘에서 멀어지게되요 그렇게 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참 주님이 그런 은혜주셔서 거룩한 상태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했던 아름다운 모습들이 순식간에 발해면서 깊고 아주 더러운 침체속에 빠지는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것들이 바로 오늘날 교회에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의영광은 바로 그런것들을 복원하는거에요 그런데 이것이 객관적으로 저쪽에서 존재하는것이아니라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으면서 들어오는것입니다. 더군다나 죄를 고유한다고 하지만 다른사람의 죄를 통해서 원리적으로 흐르는 것은 간접적이지만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인입선(?)이 되것입니다. 전기도 여러분 보면 알지만은 어느쪽에서 과부하가 되어서 탁하고 터지면은 전기는 전구다마만 끊어지지만 전구도 열을 받고 제일먼저 틀어지는데가 어디냐하면 쪼인트에요 인입되어들어는 그부분이 타버려요 그렇게 된다는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는 자신과 관련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하면 죄가 몰고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신만 알게 됬어요 그런데 그것은 시작일 뿐이야 내가 이 죄가운데 잉태되었을것같은 이여자와 결혼을 하고 그리고 내가 이죄에 연류되면 그다음에 도래하게될 결과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이였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 오랬도안 버리지못하고 사랑하고있는 아주적은 죄라고 할지라도 만약에 우리가 그 작은 죄의 마지막계획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파악하고 나면 그것을 계속가지고 있을수없는것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식품가운데 하나가 고사리에요 얼마나 고사리를 좋아했는지 고기다음으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전도사때 강원도로 성경학교 봉사를 갔어요 그때에 교회에 후원해주던 탕광지대에 있는 교회에 갔는데 태백산아래니까 고사리가 억수로 많아요 그런데 가난한 동네니까 가가지고 아이들이 새까매 물도 까맞고 뭐든 까메요 목욕도 다시키고 성경학교하면은 부모들이 목욕시켜준거 복음전해준 것은 그리 고마워하지않는데 자기 애들을 비누로 목욕시켜준 것을 고마워하면서 그다음에 또 보내고 또 보내고 그랬어요 근데 제대로 강사는 아니지만 저녁에는 어른들모아놓고 설교를 했으니까 설교가 뭔지도 모르는 신학교2학년시절인데 그런데 상을 채려오는데 고사리국,고사리무침 고사리뽁음 고사리 전골 고사리나물 근데 그렇게 행복할수없어요 고사리중에도 삐쩍마른것말고 이렇게 잘불려서 고기처럼 말랑말랑해서 확풀어진거, 육개장같은데 넣은 것 그것 가져왔어 한없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먹고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수없어요 지금도 그고사리생각하면 침이 넘어가게 그렇게 좋을수없어요 그래서 일주일 내내 고사리만 먹었는데 왜 이리 고사리가 많은가 했더니 여전도회원들이 교회짖는다고 온 여전도회원들이 태백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뜯어왔는데 그것이 교회안에 팔려는 것이 잔뜩있습니다. 그것 요만한 것 하나면 이만큼되는것입니다. 그것 한덩리씩 불려가지고 매끼마다 그것만 해주는것죠 일주일을 먹어도 질리지않았어요 그런데 어느순간에 티비에서 고사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암을 유발하는지 방송을 해주었어요 아직까지도 않먹어요 옛날고사리가 아니에요 강원도에서 나오는 고사리는 달라요 다른데서 나오는 고사리하고 정말 맛있습니다. 더덕하고 고사리는, 그런데 그 고사리의 냄새,모양,마늘넣고 뽁았을때 응근한 냄새, 그대로에요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내몸에 들어와서 암을 유발하는지 알고나니까 먹을수가없는것입니다. 지금도 돌솥비빔밥이 나오면 다 꺼네냅니다. 그리고 먹어요 먹을수가없어요 그렇니까 그렇게 하면않돼 연약함이라는 말로 가볍게 비벼버리고 넘어가면 그러면 우리안에 죄에대한 식욕이 계속우리안에 증가해요 어디까지 증가되냐하면 한없이 한없이 그래서 결국은 섭취하다가 섭취하다가 결국은 죄와함께 폭발해버리는 지경에 까지가게된다 그래서 요셉이 깊이두려워했던 것은 죄의 결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지막에 이죄가 우리를 이끌어가고자 하는곳이 어떤곳인가 기도하기싫어요 그리고 마음속에서 기도해야할 의무에 적절히 대처하지못해요 마지막에 우리를 대려가려는곳이 어디에요? 기도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해요 그래서 기도의 의무를 무시하고 나중에가서는 모든 영적인것에 적대감을 가지고 비영적인 틀속에 사로잡힌 삶을 꿈꾸면서 죄가 들어와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파괴해요 아까 혜선자매가 기도하면서 그렇게 아무렇게나 예배하는 위험에대해서 적절하게 지적하면서 기도했는데 그게뭔에요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두려움없이 습관적으로 덜렁더렁와서 예배드리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덜렁덜렁일어나서 나가는 그것이 결국은 마지막에 가고싶은 것이 어디에요 하나님없는 삶을 살고싶어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안중에 없는 제멋되로의 삶을 거기로 데려가고싶은것입니다. 생각해보셔요 소득이 있고도 정직하게 십일조를 하지않는사람들의 마지막의 죄의 경향성에 대한 마지막계획이 뭐에요?세상의 자원을 잔뜩 끌어모으고 하나님의 자기의 중심이 되지못하고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 되어서 그꿈을 실현해 나가는 뒷돈으로 삶을려고하는거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으로 간음했다 결국에 끝까지 가고싶은 것이 뭐에요? 바로 그런 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속에 그런것이 발전되도록 내버려두면서 영혼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은혜를 이야기하고 그래서는 않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작은것들속에서 온전해질때 큰것들에 있어서도 온전해지는것입니다. 그렇게하면서 우리들이매일매일 살아가야해요 나는 오늘날말입니다. 사람들을 충동하고 자극해서 굉장히 자신들이 강한사람인것처럼 만들어서 세상에서 파송하려고하는 이런 방식에 목회적인 방향성에 대해서 굉장히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잇어요 대부분 실패하고 성공하면 놀랍도록 자기의가 쌓이게 되요 “약할 때 강함되시고 나의 빈잔을 체우내 주나의 모든 것”정말 약할 때 강함되시네 오웬을 보면서 그분을 깊이 흠모하게 된 것은 그분의 강함이 아니라 그분의 약함입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살면서 그가 싸웠던 대적이 세시있었어요 첫째는 알미니안 주의였고 두 번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후에 곧바로 일어났던 소시니안주의였어요 소시니안주의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정통교리를 거의 부정했어요 알미니안보다 훨씬더 과격했어요 그리고 카톨릭입니다.
그런데 하였튼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한 사람이었어요 24일날 이야기하겠지만 저는 그분의 모습을 그릴때마다 단창을 들고나오는 칼과 단창을 들고나오는 자잔한 때거지들 알미니안주의의 때거지들,소시니안주의의 찌꺼러기들, 카톨릭에 이빨빠진 호랑이와같은 날가빠진 사람들 그런사람들은 요만한 단창을 들고나와서 “와 와글와글” 하면서 덤벼들어요 이사람은 장대한 체구에 한번 휘두르면 일곱,여덟개의 목이 떨어질 수 있는 커다란 청룡도를 가지고 나온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한번 이사람에게 걸려서 칼을 휘두르면 단칼에 모두 날라가 버려요 아에 뿌리가 남아있을수없도록 상당히 날려버려요 이런정도까지만 이야기하면 나의 논적들은 뿌리가 뽑혔다 채종적인 선언을 할 정도에요 어머어마한 지성과 탁월함의 사람이었어요 대핍박때 5마일영이 내려요 자기가 살고있는 곳에서 5마일바같을 청교도 목사들이 벗어나면 투옥이야! 설교는 말고 5마일을 벗어나면 투옥입니다. 그런데 아란곳하지 않고 그 피박속에서 숨어다니면서 목숨을 걸고 설교합니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탁월해요 그래가지고 우리들이 읽고있는 뎃스 오브 뎃스라는 책도 기독교의 제한속죄라고 하는 예수님이 죽은 것이 모든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한 사람만을 위해서 돌아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거의 이렇게 뚜꺼운 책으로 써내려가는데 7년을 쓰셨데요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그는 누군가가 이 알미니안주의적인 보편구원론자에게 주장에 쇠기를 박는 글을 써주기를 기다렸어요 왜 너무 힘드니까 건강도 않좋고 결국은 쓰는사람이 없어서 자기가 써요 7년에 걸쳐서 써요 그런데 아포스타시같은 책을 쓸때에는 그때가 벌써 배교가 많이 행해지는 시대니까 심한 통곡과 눈물속에서 그책을 썼다고 고백을 해요 굉장히 약한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그 약함이 결국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고 그리고 그 죄앞에서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역사이래 가장 정통적이고 탁월한 계시의빛을 받은 불과 한 몇사람되지 않는 다섯손가락에 들어갈정도로 그렇게 탁월한 빛을 받은사람입니다.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이 뭐냐하면 그런 강한때문이아니라 약함, 강함은 내가 안닮았는데 약함은 좀 닮은것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한 약함속에서 강함이 흘러나오는거지 어느한순간 뭇솔리니나 돈조가 연설한것처럼 막휘둘러서 막 벌때처럼 일어난다고해서 없는 것이 있는것이냐? 나는 기독교적 선동주의라고 보는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않되요 우리는 하나님앞에 약한자가 되어야해요 오늘새벽에도 기도하면서 이런생각들었어요 정말 내가 하나님앞에서 강하게 살아왔는가? 그것은 옳치않다 매일 약해서 주님을 의지하지않을 수 없고 이런 죄가 가져올 결말을 요셉이 생각햇을때 자기가 그결말을 감당할수있겠어요? 감당할수있었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무서워하는것입니다. 그런 의존의감정속에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살아갈 때 그때 자연스럽게 승리를 꿈꾸지않아도 승리하는 삶이 되요 제 이야기를 해서 않됬습니다. 88년도인가 복음을 개인적으로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고 청교도들의 책을 읽으면서 무한한 용기가 쏟아난 것이 아니라 정말 비참하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때 제가 거의 1년동안 손에 들고 놓을수없었던 책이 여러분들 읽으라고 숙제내준 데이비드 브레이드의일기였어요 나도 기독교를 하는사람이라고 알았어요 그런데 전혀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렇게 약해질수없었어요 무엇을 해도 자신이 없었어요 나자신을 봐도 자신도 없고 변화되지 않는 영혼을 보면 더더욱 자신이없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1년이상 깊이 약해지고나니까 어느한순간에 강해진 자신을 발견할수있었어요 그러니까 강해지고자 우리들이 의지하지않아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강함을 추구하지않아도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죄가 몰고올 결말에 대해서 깨어있고 그래서 깊이 죄의 본질을 파악하고 하나님앞에 낮아지고 견비해지면 견비해질수록 우리들이 진정하게 강하게 되는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요셉처럼 요셉이 보여준것처럼 그렇게 죄에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그죄의 끝가지 가려고하는 원대한 계획을 이해한 그 빛아래서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강하게 하셔요 그리고 많은 사랑을 받게하시고 오늘날 여러분들이 약함이라고 생각하는 많은것들을 극복하며 살수있도록 만들어주시는것입니다. 명심하기바랍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3. 마지막때에 있을 의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7)
마지막때가 되면 여러 가지면에서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려워 지게 됩니다. 몇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영적으로는 마지막때가 될 수록 사전의 역사는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사전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날 때 또한 그것을 대적하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도 더 강하게 나타나도록 우리를 도우시기는 하지만 어떻든 영적으로 이렇게 강한 사단의 역사가 마지막때에는 예고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가 더 힘들어 진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이 보는 마지막때는 세상이 아주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문명과 문화속에서 사람들이 정신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실제로 이러한 예언은 그대로 들어 맞아서 오늘날의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번패스러운지 알수 있습니다. 특별히 농경사회에서는 일은 많지만 그일이 모두 자기 스스로 조절할수 있는 일들이었고 농경사회에서는 일단 해뜨기전 그리고 해진후에는 자기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캄캄하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농촌에서 불켜놓고 밤일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시를 한번 보십시요. 7시, 8시면 한낮이고 10시, 11시도 그저 오전입니다. 전기의 발명으로 말미암아서 얼마나 우리 인생이 좋게 이야기하면 편리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더 세속적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범죄 심리학자가 이야기 하는데 인류가 밤 9시에 잠자리에 들면 전 인류 범죄의 50%가 줄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범죄들이 밤 9시 이후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패스러운 삶을 살게되기 때문에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단절되어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개발되어가고 있는 개도국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캐나다에 한번 가보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북극이 가깝기 때문에 그때가 어느 계절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9시반에 해가 졌습니다. 그런데 한참 차 마시고 놀다 창문을 열어 보니까 벌건 대낮인데 문이 완전히 다 닺힌 것입니다. 뭘 사러가도 파는데가 없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니까 거기 있던 후배가 “목사님 6시쟎아요” 5시인가 6시 딱 되니까 문 닫고 그 다음에 개미 세끼 한마리 안보이는 것입니다. 가보지는 않았는데 스위스 인스부르크에 가보면 8시 이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동물 보듯이 한다고 합니다. 관광객을 빼 놓고는. 왜냐하면 저 사람은 가정도 없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정도로 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해가 있건 없건 5시면 5시 시간이 돼서 딱 끊나면 칼 같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 뭘 사려면 보통 힘든것이 아닙니다. 그런것도 하나의 우리와 같은 삶의 과정을 통해 터득한 그런것입니다. 그래서 전세계를 다녀봐도 우리나라처럼 24시 써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24시. 목욕탕도 24시, 약국도 24시, 해장국집 심지어는 보신탕집도 24시. 어떻게 생각하면 편리한데 그렇게 번패스럽기 때문에 마지막때에는 신앙생활하기가 더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또 마지막때에는 이러한 환경과 영적인 요인 때문에 사람들 속에 세상에 대한 관심사가 하나님에 대한 관심사보다 훨씬 더 증대되어서 다투듯이 이세상을 사랑하고 이세상에 있는 관심사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신앙에 몰두하기 어려운 그런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것을 베드로 사도가 경계하면서 만물이 마지막에 가까웠으니 무엇보다도 기도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 기도를 이야기 하게 됩니까? 두가지를 함께 염려하는데 정신을 차리는것, 근신하는것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획일적으로 나누어져 있는것은 아니지만 의문이 없이 이렇게 삼중으로 되풀이해서 썼을리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정신차리는 것은 정신 차리는 것이고 근신은 근신이고 기도는 기도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예수님이 늘 말씀하신 ‘깨어있어라’라고하는 대목입니다. 그 대목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듯이 유지되는 마음의 상태를 예지하라는 것입니다. 입증을 해보이겠습니다. 사고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만 하면 정확하게 파악이 됩니다.
(예화) 여러분 모두 잊혀진 비사이겠지만 벌건 대낮에 아침에 몇시쯤 됐을까요 10시쯤 9시반 그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일본 전투기 폭격기들이 진주만 상공에 나타나 날라 다닐때까지 미군들은 훈련중인줄 알았습니다. 벌건 대낮에 무참하게 폭격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레이더병의 실수에 기인한 것입니다. 레이더가 생긴지 얼마 안되었을때인데 미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중요한 세가지 원인을 드는데 트랙터, 두 번째가 레이더, 세 번째가 원자폭탄입니다. 트랙터는 망가진 비행장을 복구하는데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떠서 점같은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제대로 판독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사이에 임무교대를 하면서 놓쳐서 폭격을 당한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사고의 기능이 올바로 되어있으면 레이다처럼 작동을 해서 제대로 잡습니다. 그러나 사고의 기능이 제대로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건생활을 게을리 했다든지 어떤 죄에 익숙해졌다든지 이렇게 하게되면 사고의 기능이 금방 영향을 받습니다. 영향의 변화가 제일 먼저 미치는 것이 사고의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이 이야기하는 영적으로 생각해야한다는 것도 심령이 죄로 물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식으로 사고의 기능이 영혼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정서보다도 더 빨리 작용하는것이 사고의 기능입니다. 의지보다도 더 빠릅니다. 그래서 비교하자면 영혼이 전원스위치라면 사고는 백열전구입니다. 전원을 탁 올리면 막바로 불이 바로 들어옵니다. 영혼에 변화가 오면 즉각적으로 사고쪽의 변화가 옵니다. 이것이 망그러져 있는 것입니다. 정신 안차린 상태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언가 정확하게 탐지할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헤매는 삶을 살게되고 정리 안된 사람이 기도하면 말도 안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안해주시니까 다행이지 그대로 응답을 해주시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정신차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충만하려면 사고의 기능이 가지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근신하고’라고 했습니다. 근신은 뭐냐면 마음에 있는 어떤 사고가 행동으로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는것을 가리켜서 ‘근신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태나 사고의 기능이 행동을 유발하는데 행동을 유발하기까지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통제력이 전혀 없는 피조물이 동물입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물고 싶으면 물고, 쓰러져 자고 싶으면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통제가 없이 한번에 확 흘려 내려가버리는 것입니다. 근신이 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대다수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믿을만하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고와 영혼의 어떤 성질들이 아무런 통제장치 없이 삶으로 흘러가 버릴 때 그래도 괜챦을 정도의 그것을 내적으로 가지고 있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체가 이미 그속에 깊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은혜상태에 있는 사람 일지라도 물 흐르듯이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과 물 흐르듯이 저절로 경건한 삶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잠시 시간만 지나면 부패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수기도 보면 그렇게 필터를 많이 집어넣어서 늘 거르는데 여러분 필터 갈 때 보면 못 먹습니다. 코 푼것 같은것들이 덩어리가 되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까지 정결하게 걸러낸 물도 몇 달 쓰고 나면 정수기 가장자리 물통에 이끼가 낌니다. 미끈미끈하게 이끼가 낌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결해도 그 속에 이미 스스로 자기 부패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한 그런 메무새를 가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샘솟듯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하루에 인간이 10만개의 사고를 한다고 합니다. 10만가지의 사고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흘러내려간다고 할 때 금방 더러워 지는 것입니다. 그 통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자기 부인의 삶이 기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제하는 통제력을 통해서 성화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신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키는대로 살면 반드시 영적인 생명은 쇠악해지고, 내키는대로 살면 영적인 생명이 파괴되고, 내키는대로 살게끔 자신의 삶을 내버려두면 반드시 배교적인 삶으로 결론이 간다는 것입니다. 삼켜도 삼켜도 끝없는 무xx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기도하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말씀했던 ‘기도하라 그리고 꺠어있으라’ 이렇게 말씀 안하시고 ‘깨어있어 기도하라’ 이것이 예수님, 사도바울, 그리고 베드로 사도 똑같이 순서가 뒤바뀌지 않고 항상 ‘깨어’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깨어있는것이 기도하는것 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것들은 뭐냐면 정신차린 사고의 상태가 아닌속에서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하고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면 기도할것이 점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간단히 하게되면 나중에는 복잡한 기도를 할수 없을 정도로 단순화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뭐 때문입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영적으로 잠들게 되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더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언제 기회있으면 다루어야된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들이 하는 기도 생활에 요즘 느끼는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생활 자체가. 그래서 기도시간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똑같은 시간을 일해도 밭 한 이랑도 못가는 사람이 있고, 잠깐 일을 했는데도 두 이랑 세 이랑을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가에도 달려 있지만 어떤 기구로 사용하는가에도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생산적이다라는 것은 평소에 기도할 수 있는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기도속으로 들어가는데 너무 과도한 소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그렇게 준비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덥히다가 기도시간 끝내고 정리하고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안한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안한것이나 똑같습니다. 사람한테는 한 것이지만 새벽기도 나왔고 두시간씩 엎드려 있었으니까 한 것인데 자신의 영혼에는 기도를 안한것이나 동일한 영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할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니까 기도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쓸모가 없는 것이나 아니면 사실 기도하지않고 하나님을 의탁해도 될것들 그런것들을 붙들고 기도하느라고 진짜 기도로 섬겨야될것을 거의 섬기지 않는 그런 비효율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것들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사도바울, 베드로 말할것 없이 똑같이 깨어있는 것을 먼저 염려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마지막때에 아까 말씀드린 세가지 방향의 그런 전폭적인 유혹과 도전들을 이기면서 나아갈수 있는 정말 거의 유일한 목회가 기도입니다. 말씀을 위해서 자신이 깊이 깨닫고 강력한 은혜룰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우리들이 든든히 그런 상황들을 대적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영적인 힘을 깊이 뿌리내리게 만들어주는 것은 역시 기도라는 것입니다. 어제 새가족 환영회를 하는데 은혜를 많이 받은 자매인것 같은데 저쪽에 앉아있었는데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는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았고 그것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자신이 믿음이 굉장한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것은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것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다는것은 별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울로 유학온 아이한테 아빠가 매월 25일날 통장에 돈을 넣어줘도 인격적인 경험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인격적인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어떻게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응답을 통해서 그분의 속이 아니라 온 전체를 느낄수 있을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얻어내는 그런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영적으로 신앙을 지키면서 살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느끼면서 그 분과 연합된 삶을 살아가는 방편으로서의 기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열렬한 기도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죽임의 교리에 있어서도 죄를 이기는 탁월한 수단이 뭐냐면 기도입니다. 죄죽임의 가장 탁월한 수단이 기도입니다. 죄 죽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조 수단이고 기도가 주된 수단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그런것들을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생활이 마지막때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기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풍성함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속에서 이런 풍성함이 있다면 우리의 사역과 섬김에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하나님이 많이 사용하셔서 더 큰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더 많이 깨닫고 섭취하면서 정말 진정한 삶을 살아갈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밤에도 11시반 넘도록 심방했는데 어느 지체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면서 공부하고 나니까 자기가 설교시간에 섭취하는 말씀의 양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포하는 말씀의 20%라는것을 깨달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굉장히 높은것이라고 내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많은 순간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분주히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없이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대충대충의 삶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축복들이 현저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받고 그렇게 들어가지 못하는 또다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죄가 얼마나 교활한가하면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정결해질수록 죄는 더 교활해 집니다. 그래서 말씀의 지식이 잘 정돈된 사람들의 짓는 죄는 나름대로 경건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짓는 죄는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파악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교묘한 죄입니다.
그러니까 정리가 되죠. 또는 그물을 짜야 하니까 지식이 촘촘해 집니다. 그래서 죄는 그물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더 정교해지는 것입니다. 빠져나가려니까 더 교활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우리안에 있는 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정돈되어 가면 그것을 파괴할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파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말씀을 전해주려하는데 죄가 파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군다나 견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기도와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죄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잘 정돈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이단 교리를 단순히 받아들이고 싶은 그런 유혹이 생기지 않습니다. 해봐야 여유를 못 누리고 절대로 화합을 안합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렇게 안합니다. 여러분 개고기 먹는 사람들 개고기 먹으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때 통개 잡아서 머리까지 달려있는 삶은개 보여주면서 먹으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쇠고기라하고 맛있다고 하지. 그리고 먹고 나중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한참 지나고 나면 죄가 다시 거기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세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이는 저의 세례와 같이 아니하니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가능, 토색, 불의를 행치 않았습니다. 그 유대인은 진짜 xxx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바리새인이 이런 어떤 하나님을 믿은 신앙과 나름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된 지식은 아니지만 그 죄가 들어 올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안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것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양은 마찬가지인데 들어왔는데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신기한것이 뭐냐면 말씀으로 잘 정리가 되어서 경건하게 사는것이 xx가 되어 가지고 죄를 xx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해서 잡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길수 있는 길은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계속 말씀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성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엉성한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철저한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지식이 철저 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자기 안에 있는 은혜를 계속 유지해서 아무리 적은 죄라도 그것을 즉각적으로 느낄수 있는 민감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먹는것에 대해서 거의 음식을 가리지 않는데 냄새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예민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있을 때도 어디 멀리서 냄새가 나면 담배 냄새 이런것이 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식당에서 나면 식당을 옮겨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마지막시절에 살아가는 놀라운 비결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배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되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내가 기도를 안하는데 덜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라일의 표현대로 기도가 우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럴때에 우리들이 기도의 은혜를 많이 회복해서 정말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4. 마음으로부터의 기도가 주는 영향력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
유대인들의 기도와 이방인들의 기도, 둘 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기도여서 위선에 흐르게 되었고,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해서 문자적으로는 말을 반복한다는 뜻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마음에 없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모두 잘못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외식이든 중언부언이든 공통점은 마음으로부터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경건생활도 성실성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인의 경건생활에 있어서도 성실하게 헌신을 잘 안합니다. 그래서 성실하지 않은 것은 대개 악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말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성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성품 보다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서 자기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성실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성실함이 있으면 일단은 개인 경건의 생활에도 그 성실함이 작동을 합니다. 그렇지만 경건의 삶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형체만 갖추는 경건생활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미니언 오브 씬 앤 그래이스’를 준비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던 교리였지만 제 자신 속에 있는 많은 문제들을 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왜 그렇게 죄를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손쉬우면서도 자주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름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지속적인 기도생활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부분을 깊이 성찰하면서 ‘저를 포함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퍽퍽한 삶을 살아갈까, 부흥에 대해서 갈망한 적도 있고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부흥을 경험한 적도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리도 깔끔하게 잘 되어있고, 그렇다고 엄청난 타락으로 흘러들어간 것도 아니고, 성실하고, 말을 하면 그가 바라는 바가 하나님 앞에 참 올바른데 왜 무엇인가 퍽퍽한 삶일까? 마치 좋은 식품에서 물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퍽퍽할까?’생각했습니다.
그 답을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말씀 준비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적용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그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파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다 보면 마음이 확 녹는 것 같이 매달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내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 아뢰는 면에 있어서 100%쯤 기도가 효과를 발휘하고 자기 자신에게 기도가 감화를 주는데 있어서도 100%라면 ‘그렇게 마음을 실지 못하고 정신을 모으는 정도로 기도하는 것은 70%쯤은 효과를 가져오고 오락가락 하며 졸며 하는 기도는 5-40%쯤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래서 기도라는 용액의 농도의 차이일 뿐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깊이 우러나는 기도가 아니면 0입니다. 아무런 효과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 증거를 대보겠습니다.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효과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웃 월드’이고 하나는 ‘인 월드’인데, 외면으로 향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원을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어 그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야겠다고 마음을 먹으시게끔 해드리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는 그렇게 기도를 진실 되게 드리는 과정 자체를 통해서 자기 속에 내적 갱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갈망하는 것은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지 아직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웬이 그 문제를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이 갈망 자체가 그 사람의 영혼을 엄청나게 바꿔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서 기도를 퍼내는 자체가 영혼의 묵은 때와 더러운 것들을 다 길어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1년 정도만 시동을 안 걸고 내버려두면 시동이 안 걸립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타고 다니던 차 같은 것은 유품으로 보존되어있는데 1주일에 한번씩은 시동을 건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엔진 자체가 부식되어 붙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커다란 힘을 가해도 안돌아갑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길어내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내적 갱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하고 났을 때 두 가지 중 하나도 느낌이 없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났는데 ‘하나님이 내 사연을 들으셨다’하는 느낌, 시편 5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셨다’도 없고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내적으로 갱신이 일어났다고 하는 느낌도 없을 때 그 기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만일 미친다면 어떻게 미치겠습니까? ‘내가 기도 했다’는 것 하나밖에는 미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겠냐는 것입니다. 기도의 팩트(fact)는 하나도 안 일어났는데 나는 기도 했다는 확신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사역에 큰일을 이루어나가시는데 여러분이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내 사역의 일을 하시는데 내가 소외 되었다는 느낌, 이런 것들은 마음으로부터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속적인 기도와 마음으로부터의 기도, 이 두개가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지속적인 기도가 불가능한 이유는 마음으로부터의 기도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부터만 기도할 수 있으면 기도가 stop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거의 이 부분에서,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부패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무지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사단의 역사 때문에 기도의 형식을 남겨놓고 속을 다 파버린 것입니다. 기도 생활 자체가 공갈빵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퍽퍽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영성도 깃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마음의 상황과 밖이 일치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들이 모두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치된 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밑바닥을 길어낸 일이 없는 사람이 진실해질 수가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치명적인 것입니다. 제가 스터디를 하면서 꼼꼼히 자신을 살펴보는 정사를 해보았더니 너무나 많은 날 동안 너무나 많은 기도들이 수고스럽게 드려졌지만 그중 상당수가 하나님이 받아서 뜯어보면 아무 것도 안 들어있는 경우였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없이 성도들을 기도로 휘몰아버리는 것이 마지막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성도들의 무력감, 그렇지 않으면 ‘내가 새벽기도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자긍심 밖에는 가져올 것이 없습니다.
과거 교회 부흥의 역사를 보면 프로젝트를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지역, 교회, 혹은 한 시대를 굉장히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혹은 혼자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낸 것입니다. 펌프 물 푸는 것과 똑같습니다. 새 펌프는 바킹이 딱 맞아서 물이 잘 퍼집니다. 그런데 한참 쓰면 물 좀 쓰고 나서 다시 쓰려고 할 때 물이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처음 물을 부으면 잘 안 퍼집니다. 한 사람은 물을 붓고 한사람은 매달려서 펌프질을 하면 물이 올라옵니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는 생활이 거의 굳어졌을 때에는 ‘오늘은 마음으로 기도해야지’해도 마음에서 안나옵니다. 기도의 두레박을 집어넣으면 달그락거리기만 하고 물이 안 올라옵니다. 형식적인 기도 생활 속에서 기도할 마음이 다 고갈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조금 남은 것이 있습니다. 10분의 1을 긁어 올리더라도 거기서 긁어야 합니다. 그래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 하면 자신의 쇠약한 영혼에 놀랍도록 힘을 줍니다.
그래서 세 가지 작용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고 속에도 희미하게 섞여 있고 감정 속에도 모호하게 섞여 있고 의지 속에도 모호하게 번져있는 그런 것들이 마음에서 길어내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원심분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구나. 이것이 잘못이구나’하는 것이 파악이 됩니다. 그리고 더 기도하면 거기에 대해서 적대감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파악이 되도 정서적으로 밉다는 생각을 안 하면 들어붙어서 영혼이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악을 하고 잘하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계속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하면 정서의 작용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친숙하게 지냈던 자기의 죄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을 일으켜서 자신의 영혼에 황폐함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드디어 어느 한순간 자신의 영적 삶의 발목을 잡고 있는 죄에 대한 극도의 미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들러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죄를 죽이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계속 반복되면 우물의 뚜껑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이 분출하면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거의 일상화 되어있다면 그는 모티퐈이드 크리스천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변화를 계속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경건에 있어서 틀, 형식은 참 중요합니다. 틀까지 뭉개져버리면, 기도의 의미 자체를 무시해버리고 나면 회복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있는 기도생활을 다시 점검하고 외식이 있는지, 아니면 중언부언이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기도를 길어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다고 느껴지면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려고 애를 쓰면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굉장히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길어 올리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는 기도의 농도가 흐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로 1년씩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보다는 무릎을 꿇고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면서 10분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훨씬 빠른 방법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다 보면 그 속에서 가난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헛된 욕망과 허탄한 것들이 어떤 것들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욕망이 어떤 것들인지가 명확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강한 견인차입니다. 힘든 이유는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갈망이 있으면 마음으로부터 기도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도 잘 안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있으면 마음에서 기도를 안 하고 건성으로 하고 싶어도, 의지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놀랍도록 빠르게 죄의 지배에서 은혜의 통치로 옮겨갑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정말 놀랍게 여러분들의 영혼에 새 힘을 주시고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떻든지 또 어떤 죄가 있든지 또 어떤 곤고함이 여러분들에게 있든지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는 그 상황 그 자리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면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5.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는 자가 되라
(빌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 할 때 그 때는 잘 믿고 교회에 잘 충성하고 이런 사람들 만 위해서 기도 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충만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좋은 신자부터 시작을 해서 저 밑에 목회자의 마음에 큰 고통을 주는 부실한 신자에 이르기 까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합니다. 그것이 또 우리 하나님의 일꾼들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해 주면서 그 사람을 생각 할 때 마음에 큰 기쁨과 감사를 가져다주는 교인들이 있고 또 한 편으로는 그렇지 않고 마음에 깊은 고통을 안겨주는 그런 교인들이 있습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전자의 교인들이 많은 교회 가 좋은 교회이고 또 우리 모든 신자는 그렇게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기도 할 때 우리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게 어떻게 우리의 양떼 들 뿐이겠습니까. 우리들 자신 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역 이 모두 끝났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보 사역이 있으니 우리를 위해서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께서 기도 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도 똑 같으리라고 봅니다. 천국에 고통은 없지만은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하실 때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 이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 이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어떤 존재 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또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 하고 또 동료들이 혹은 담임 목사가 나를 위해기도 할 때 에 나는 그 사람들의 마음에 어떠한 존재일까 정말 그 십자가의 정신을 가장 잘 느끼게 히는 대목이 다른 사람을 위해기도 할 때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의 세계가 되어서 본인들도 아파하지 않는 죄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파하고 본인도 괴로워하지 않는 죄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서 기도 하면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돌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기도하게 만들어 주시는 거지요. 일평생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면서 섬기는 일에 들어 간 모든 사람들은 섬기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이 섬기다가 죽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드리면서 섬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시종일관 고통을 안겨 드리다가 죽습니다. 둘 다 사람 보기에는 다 섬긴 거지만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는지는 죄악에 물든 자신의 양심조차 모를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아신다 이거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을 진정으로 섬기되 나를 위해기도 하는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나를 위해기도 하는 내 주위에 있는 동료들이나 그다음에 신앙의 선배들 이러한 좋은 사람들에게 항상 내 자신이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되요. 정말 그런 존재가 되어야 되요. 제 마음에 있는 일평생 의 소원 가운데 하나가 그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뭐라고 하셨지요? 너는 이제 복의 근원이 될 거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너를 말미암아서 복을 받을 것이다. 너로 말미암아 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 말로 “ 베카” 에요.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이건 뭘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끌어 않는 걸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소원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나 때문에 도움을 받았다 하는 그 기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제가 그런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게 제 마음에 있는 기도 제목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항상 희생이 뒤따라요. 희생이 뒤따르고 수고가 뒤따라요. 어떤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사람들이 합니다. 내가 자기보다 머리 나쁘지 않지만 무슨 속을 가지고 저렇게 나에게 부당하게 요구 하는지 알지만 다 알면서도 웃고 속는 것처럼 그렇게 살 때 가 있습니다. 왜, 당장 눈앞 에 이익을 보면 은 내가 손해인 것 같고 하지만은 나를 스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의 인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 할 적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실현해 가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나를 위해기도하시는 예수님이 나를 생각하실 때 정말 기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드실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 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분적으로나마 구역장도 해보고 교역자도 해보고 작은 부서 를 맡아서 영혼을 돌보면서 아마 경험 하셨을 것입니다. 너무 하나님을 나와 함께 잘 섬기고 그렇게 희생적인 사람들은 이 마음에 말이지요 현기증이 느껴져요. 그리고 진짜 이름 석자만 떠올라도 오랜 세월이 흘렀 데도 그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이 그렇게 감사 할 수가 없어요. 기억합니다. 그걸 항상 잊지 않고 기억을 합니다. 그러니 우리 같이 배은망덕하기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우리 인간 도 그러니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옛날에 내가 모시고 있던 우리 박 대천 목사님이 항상 뭐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나도 그 교회에서 7년을 사역을 했지만은 박 목사님 의 목회를 거든다거나 생각을 하면서 목회를 한적 은 없었어요. 내 목회라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하나님 이 내게 맡겨주신 양 떼라고 생각했지 박 목사님 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내가 빌렸다. 난 그렇게 생각 한 적 은 없어요. 항상 밤늦게 심방을 하거나 방학 때 와서 심방을 하거나 교회에서 영혼들을 위해 철야를 하거나 그럴 때 는 항상 “고맙습니다. 전도사님 그렇게 영혼을 돌봐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아버지 같은 분이 항상 감사의 사인을 보냈어요. 여러분도 그런 거 본 받아야 되요. 누군가로부터 혜택을 입거나 호의를 받거나 감사한일이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신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감사 하다는 고마움 의 표시를 보내는 거지요. 그게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관심입니다. 하여튼 그 목사님은 그러셨어요. 그러면서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때는 내가 사실 그 말이 무슨 이야기 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후에 교회를 하고 사역을 더 해 보면서 정말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이 배은망덕하게 자라는 죄인들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실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렇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데 완전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어떠시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과 그 사람의 섬기는 삶이 결코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에요. 누에고치에서 거미줄이 나올 수 없고 명주실이 나오듯이 같은 실처럼 보이지만 거미에게서 나오는 것은 거미줄이고 그리고 누에에서 나오는 것은 명주실입니다. 그렇게 달라요. 그 존재가 삶하고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그 존재를 그려 놓은 삶의 괘적 에 불과 한것입니다. 그래서 이엔 바운저 라고 하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한 사람의 사람됨은 엎드려 기도할 때 그 사람의 사람됨에 능가 할 수 없다. 그게 아주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은 이러한 성화의 신학을 아주 핵심적으로 요약 한것입니다. 한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엎드려 기도 할 때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됨 그 이상을 능가 할 수 없다.” 무슨 의미입니까? 엎드려 기도 할 때 그때 말고 이런 일 저런 일 하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섬길 때 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시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특별한 교통 속에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 사는 사람인지 잘 구별이 안 된다 이거지요. 그러나 엎드려 기도 할 때 에는 구별이 된다는 거지요. 엎드려 기도 할 때 하나님 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사람됨이 그러하다 이거지요.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거절감속에서 엎드려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냉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냉담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일년 동안의 사역을 총 결산하면서 어떤 사람은 저에게 칭찬을 많이 듣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심하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일을 잘해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먹는 사람들은 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 은 그것이 아니에요. 생각을 하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뭘 생각 하냐 하면 1년 동안에 섬겨온 삶을 이렇게 보면서 그 섬기기 위해서 일년 동안 살아온 삶의 괘도를 들여다보면서 그걸 보면서 나도 인정하기 싫었던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에고치에서 실이 나온 것처럼 쭉 흘러나온 그 일년 동안의 삶의 괘적 을 보면서 내가 누에고치인가 거미 인가 보는 거지요. 내가 어떠한 존재인가 내 안에 뭐가 들어있나 하는 걸 보는 거지요. 살아갈 때 는 항상 하나님 앞에 내가 소명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남보다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게 그저 봉사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 해 동안 살아온 삶의 괘적 을 보면서 주님의 축복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 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이한해 동안에 사역을 잘 못했다고 해서 빨리 열심히 일하라고 일로 그렇게 내 몰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여러분들은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 의 자녀에요. 하나님의 일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 그런 사람으로서 섬김을 출발한 사람입니다.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걸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일년 동안 예수님은 내가 기도하지 않는 동안에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기도 하셨고 또 내가 기도할 수 없는 동안에는 내 안에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면서 까지 나를 위해기도 하셨는데 그렇게 그 분들이 나를 위해기도 하실 때 정말 내가 그 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또 감사의 제목이 되었는가 그렇게 생각해야 되요. 그걸 생각해야 되요. 그러한 점검 없이 일만 잘 할려고 하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는 것이 아니 에요. 그래서 정말 이 세상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정도로 열심히 살았는데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하다 죽었지만 한번도 하나님을 섬겨본 적이 없는 사람, 열심히 과로하기까지 섬기면서 살았지만 한번도 그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서 섬기는 것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마음에 깊은 즐거움을 드려 본적이 없는 사람, 이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늘 이야기 하지만 주의 일이라고 하는 것,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돌멩이만큼 이나 흔해 빠진 것이 일입니다. 발로 걷어차면 발에 걸리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마 한국 교회의 유사 이래 기록적인 숫자의 직원들이 교역자들이 이 작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눈 에는 아직까지도 이 작은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 들이 너무나 많이 눈에 보여요. 아마 직원이 배로 늘어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다 못할 것입니다. 교역자가 배로 늘어나도 내가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일은 다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흔하게 굴러다니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리고 사명입니다. 그러나 사명은 그렇게 많아도 사명 자 는 얼마나 적은가를 한번 보세요.
그래서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종 들지만 마음까지 주님께 사로 잡혀있는 사람 그래서 거기서 섬기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를 위해 우리 주님이 기도 하실 때 마다 감사하는 사람 그게 얼마나 소중한가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런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각자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그곳에 세워주셨는데 거기 서있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가 되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중보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감사와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우리들이 사역을 잘 했다면 그 일만 잘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도 주님의 마음에 이런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어 갔으면 일에는 끝이 있어도 사람됨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은혜 가운데 계속 살면서 기도 해야 하고 만약에 섬김에 열매가 없고 부족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깊이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기도 하실 때 마다 근심거리가 아니라 나를 생각하실 때 마다 기쁨이 되게끔 해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뿐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향해서도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난 여러분 들 에게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하고위해서 기도 할 때에 제 마음에 제가 여러분들을 기뻐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닐 겁니다. 또 제가 여러분들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만큼 하나님께도 여러분께서 사랑을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님의 대리자일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목회자인 제 마음에 여러분들이 총체적으로 근심거리 가되고 견디기 힘든 영혼의 슬픔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된다면 여러분들이 저의 마음에 그렇게 큰 슬픔거리가 되고도 하나님께는 말할 수 없는 기쁨 거리가 될 가능성은 제가 깨어 있는 한 그런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거지요. 제가 잠들지 않는 한. 그래서 기도 할 때 는 정말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제 마음속에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 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 만난 것을 정말 고마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네 분 이 자원하는 맘? 으로 떠 나서 오히려 행복하다는? 이야기 생략!) 내가 아는 어느 목사님 한분은 교역자가 떠나면 은 항상 그렇게 인사를 시키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래요. 목사님이 사랑이 많으시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랑도 사랑이지만 정말 그 사람들이 교회에 근심과 목회자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다면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역하면서 죽는데 얼마나 다른지 생각을 해보세요. 저는 뭐 그걸 그렇게 썩 좋아하는 입장은 아닌데 하여튼 박 기찬 목사님은 하여튼 사람에 그렇게 집착하셨어요. 그분의 지론은 뭐냐면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왜 그 사람 이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교역자 누구하고도 의논을 안 하고 기도하고 혼자 정하시고는 저 사람이 검증된 사람이고 정말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섬길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은 하여튼 무리를 해서라도 데려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 시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 한해를 쭉 돌아보면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참 크지요. 근데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베풀어주신 사랑이 그렇게 클수록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도 크고 주님이 우리에게 거시는 기대도 커요. 그래서 한해를 지나면서 정직하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께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의 사역과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분리 될 수 없다 그래서 내 사역을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참 놀라운 사랑 충분히 나타나는가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성과에 만족해하면서 스스로 뽐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받고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더라면 받았을 축복에 대해서 욕망을 갖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해를 보내면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살피고 그리고 내년 한해 사역은 나를 향한 하나님 의 그 큰사랑 나를 위해기도하시는 우리 주님께도 나를 위해 기도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정말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고 그런 존재가 되고 그렇게 섬기고 싶다 라는 마음이 여러분 속에 가득 차야합니다. 교회의 직원으로 근무하는 지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양떼 의 수나 영혼들의 변화 이런 것 들이 면류관이겠지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의 유기체로 협력하면서 그러면서 성도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워가는 겁니다.
교회의 많은 성장이 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에 주신 것 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겠고 또 만약에 보내주시지 않는 영혼들과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이 나 때문이라면 얼마나 가슴 아픈거 어요. 그렇지요? 그래서 한해동안 에 이 사역을 이렇게 돌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고를 가지고 이 한해 동안에 사역을 돌아 봐야 합니다. 내가하고 있는 이 교회 에서 행정적인 일들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는가 좋은 업자를 만나고 공사를 순조롭게 되게 하고 혹은 내가 맡고 있는 일들에 헌신된 지체들을 붙여주셔서 잘 사역할 수 있게 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하셨는가 하는 것들을 돌아보면서 나로 말미암아서 내가 섬기고 있는 부서를 통해서 영혼들을 위한 그 하나님의 교회의 섬김이 훌륭하게 이뤄 질수 있었는가 혹시 모든 지체들 중에 내가 맡은 부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만 잘못되어서 마치 수전증에 걸리거나 몸의 일부분에 마비가 올 것 같은 증상 때문에 교회의 다른 지체들이 고통 받지는 않았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온전히 의뢰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과 그리고 비결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해를 보내고 내년 한해는 어떻게 하든지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은 교인들의 숫자나 교회의 빌딩이 아닌 우리의 가장 귀한 재산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거 그러면 환란이 무섭겠어요? 시련이 두렵겠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해칠 수 가 있겠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보고 노린들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목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영혼들을 돌보고 하나님 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그렇게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교회의 목양적인 구조를 이뤄가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 성도들을 잘 섬기기위해서 교회의 행정적인 서비스들을 뒷받침 할 때 그때 하나님의 큰 은혜의 역사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6. 감사의 힘
(빌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우리의 영적인 수준이 상당히 높아도 그것들이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파악하기 어려운 작용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이 가라앉고 심령이 무거워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아무리 힘을 내서 기도하려해도 생각처럼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명쾌하게 깊이 있는 죄가 있으면 시원하게 하나님 앞에 가슴을 찢으면서 기도하겠는데 그것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은혜가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때가 있다. 그때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그 탁월한 방법이 몇 있는데, 오늘은 하나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음악을 배울 때, 화성을 배우고, 화음을 배웁니다. 그러면 교향곡 같은 것에서는 불협화음이 가끔 들어옵니다. 그 불협화음을 보면서 어떤 하늘을 나는 듯한 비상을 보여줍니다. 하늘을 오르다가 어떤 불협화음 때문에 믿음의 논리와는 상관없는 불협화음이 연주되면서 다시 화음의 세계가 펼쳐지면서 연주가 이루어지면서 그 곡의 세계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 생활에 있어서의 비상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끔 사역을 하다가 보면 기도를 하고 지체들을 조이고 야단을 치고 모여서 눈물 흘리며 기도회를 해도 뭔가를 자기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가야할 방향으로 마음이 모아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잘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뭐냐 하면, 아주 재미있게 노는 것입니다. 야유회를 간다든지, 소풍을 간다든지. 마음이 유쾌해지도록 웃고 나면 다시 마음을 추스르면 그러면 사역을 이끌어 갈 때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가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 앞에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껏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만들었던 기도의 제목, 간구의 제목 꼭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될 일을 목표로 매달리는 일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이것들이 너무 오랫동안 실현이 안되고 해서 마음이 무어거워지고 심령이 둔탁해져요. 그때에 한 번 방향을 전환해 보는 것입니다. 간구하는 제목에 대해 마음을 전환해 보는 것입니다. 안 이루어져도 좋다. 그런데 그것은 의심에서 오는 생각이 아니라 자기가 기도하는 그 제목을 보면서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막 어떤 특정한 제목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그러다가 마음이 둔해지고 심령이 무거워질 때 그 제목으로부터 잠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영혼이 활기를 얻는 것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들어온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그 활기 속에서 털려 나가고 다시 담대함과 은혜의 힘을 회복해서 아까 기도하던 그 제목을 통해서 쇄신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그 기도의 제목을 매달릴 수 있게 된다.
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놀랍도록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그런 탁월한 변화들은 항상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도의 응답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그런 것들이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의 송영을 통해서 자기 자신 속에 실제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많이 나온다. 시편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높은 단계는 기도의 제목조차 상실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고요히 하나님을 응시하며 그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비추어 오는 그 영광의 빛의 영향을 받는 것, 그 상태가 가장 최고도의 기도의 상태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잠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한번 감사의 제목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울려 퍼지도록 그렇게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 때에 잠시 활기를 잃어 버린 우리의 기도의 생활은 원기를 회복하게 되고 오히려 그 기도제목에 매달렸을 때에 연약해졌던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한 찬송가 감사의 경배 속에서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좋아하시지만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가 하는 것도 하나님은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이 된다는 것과 그리고 현실적인 불만으로 가득 찬다라고 하는 것은 꼭 함께 있어야 하는 기도의 조건은 아니다. 그래서 감사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간절해질 수 있고 불만으로 꽉 차서 고통스러우면서도 전혀 하나님 앞에 간절해 지지 않을 수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면 어떤 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강하게 집착하다보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속에 고통이 생기는데 그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 신령한 고통일 수가 있다. 근데 자칫하면 마음 속에서 감사조차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육신적인 불만으로 번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영의 작용이 아니다. 기도의 영의 작용은 지금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면서 보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갈망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 사역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열렬한 기도도 단지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에 대한 고통만으로 가득 찬 그런 기도가 되어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한 의미에서의 간절한 기도가 될 수 없다. 기도의 모든 힘은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간절함이 우리에게 감사를 잊게 할 정도의 불만과 고통을 동반한 것이라면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순수한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드리는 그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고통을 느끼며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항상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자세를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자주 그런 감사의 회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도는 감사 자체를 기도라고 말한다. “기도와 도고와 간구와 감사” 이 모든 것들이 기도의 형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받는 그 신령한 은혜의 충정 마음의 틀의 전적인 쇄신은 싸워 이긴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 못지않게 큰 힘을 그들에게 가져다 준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느꼈던 깊은 감사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가졌던 물질이나 지위가 아니었다. 복음이 전해진 첫날부터 그들이 복음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것을 인해서 사도 바울은 정말 기뻐하고 감사했던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가운데 그 자녀들이 함께 생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교제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이루말할 수 없는 큰 특권이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감사해야한다. [교사 리바이벌]에서 그런 이야기를 썼는데, 우리들이 만난 이 교제는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얻는 대가이다. 우리에게 뭐가 있는가? 세상에 많던 친구들. 신실하게 생활하면 할수록 모두 멀어진다. 이전에 죄악된 세상에서 살게 하던 취미나 악한 습관도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즐거움이 아니다. 우리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만족을 누려도 결코 죄가 되지 않는 아름다운 원천이 어디에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한다. 그래서 서로를 깊이 생각하고 지체들을 옆에 주신 교제의 의미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회복하고자 했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였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세상에 생육하고 번성할 모든 이 세상에 인간들이 누리기를 원했던 그 관계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어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함께 거하면서 사는 가족이 되게 하고 싶으셨다. 죄가 들어와서 이것들이 모두 박살나고 심지어는 형이 동생을 죽였다. 남편과 아내, 자식과 부모 사이에 상처와 미움이 싹트게 되었다. 결국은 수많은 관계 단절이 생겨났다.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복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모임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이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모든 이 세상에 인간들이 새롭게 될 그 관계가 먼저 우리에게 선취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남아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죄가 없는 상태였고 우리가 모두 영광스럽게 된 후에는 죄가 들어올 수 없는 상태이다. 지금은 그렇게 주님이 회복해 주셨지만 각자각자에게 여전히 죄가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을 다 보면서 느끼는 게 뭐냐하면, 야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들 하나하나를 모시고 공동체 속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니까 저 사람을 받아주지. 저렇게 노는 사람이 만약에 칼날 같은 이기심을 가진 이 세상에 던져 졌을 때 그 때 누가 받아줄까? 살아온 인생이 상처를 많이 받은 인생이다. 자신 안에 그런 상처를 받은 만한 결함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서로 그런 것들을 가진 것들이 함께 부딪히면서 칼날 같은 소리를 내면서 서로 찔러서 피가 쏟아지는 것이다. 망가진 사람끼리 그렇게 산다.
김자옥씨가 한번 자신의 간증을 썼는데, 자기가 그렇게 상처 많은 가정에서 살다가 대학 2학년때 길을 지나가다 영화하는 사람에게 눈에 띄었다. 그 뒤로 영화인인 길에 들어서서 놀랍게 고속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가운데 부잣집 아들과 결혼 했다고 이혼했다. 그 때는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살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자기도 남 보기에는 화려한 사람이었는데, 실은 안에 썩은 망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만났으니 어찌 행복할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셨다. 그래서 이러한 교재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됩니다. 감사하면서 두 가지를 배워야합니다. 하나는 이 거칠고 모자란 많은 지체들을 용납해 주는 것을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이 것이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용납될 수 있는 마지막 집단이다. 여기서 그가 모나다 모자르다. 그러면서 토해내 버리면 그는 갈 곳이 없다. 예수님의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이 세상에 계실 때, 인생의 막장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다. 창기와 세리, 기생과 죄인들은 그 당시 종교 사회에서 토해 낸 사람들이었다. 토해 내놓은 사람들을 주님이 받아주셨다. 병든 자를 고치고 상한 자를 싸매시고 그 치열한 율법을 탐구, 날카로운 정죄 가운데서도 심지어는 사람들 손에 들려 있는 돌멩이를 보면서도 변화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님의 품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갔다. 그것이 이 공동체다. 그래서 무한한 용서와 욕망! 그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지체들을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지 아니하고 그렇게 모나게 살아가는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래서 각자가 예수님의 분신에 되어서 그것을 품에 않고 여기가 그 사람이 고쳐질 수 있는 마지막 동아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그가 변화되기를 간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하는 것이다.
그런 일에 있어서 얼마나 유능하고 수납성이 있는가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영적인 성숙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게 하는 원동력은 주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하신 것처럼 또한 우리들이 그들을 용납하고 긍휼히 여겨주는 그러한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또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면 끊임없이 용납해주는 그 공동체를 통해 나타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자질을 가져야한다. 그것이 없이 용납해주는 것이 없는 사랑의 특성을 자기 생긴대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을 버린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를 견주어 보도록 한다. 그런 비교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고 있지 않는 많은 모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주님을 아프게 하는 자신의 모난 모습을 발견하고 깨뜨려진다. 그것이 없으면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망가진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진정한 성화의 자기 깨어짐이 있으면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그런데 자신이 완악해지고 은혜 생활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비해져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으면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이런 지위에서 저런 지위로. 껍질만 바뀌지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사랑 받는 자신이 그 사랑받는 주체에게 부합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다 준다. 남녀가 깊이 사랑에 빠지면 그것이 단순히 열정인지 인격적인 사랑인지 혼돈을 느낄 때가 있다. 열렬하게 연애하는 사람들이 결혼해서 금방 박살이 나서 혼란을 느낀다. 열정과 사랑을 혼돈한 것이다. 감정적 열정과 인격적 사랑을 혼돈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대중가요 가수를 보면서 가수의 이름을 부르며 흥분하는 것이 인격적인 사랑인가? 아니다. 열정이다. 사랑은 열정을 동반하지만 모든 열정있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열정을 가지는 말은 상당히 위험한 말이다. 그래서 열정을 가지라고 하기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야한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그런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라는 고전 13장 말씀을 보라. 남녀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열정이 인격적인 사랑인지, 그냥 냄비같은 열정 인지하는 훌륭한 시금석이 있다. 인격적인 사랑인 경우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뜻에 부합하고자 한다. 단순한 열정일 경우에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모든 열정은 믿음에 반대이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삶과 인격이 예수님의 바라고 원하시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 반드시 있다. 그러면 비인격적 종교적 열정이다. 사람들은 혼돈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돈한다. 정말 주님을 여러분들이 사랑하는가? 생각해보라. 열정 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여러분 안에 정말 주님의 형상을 닮고 싶은 주님의 모습을 닮고 싶은 그런 사모함이 여러분 안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닮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파하고 고통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그 교제를 통해서 자기와 같이 모나고 그리고 거친 사람을 용납해주는 그 공동체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동시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스으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참회하면서 고쳐져 간다. 그래서 그 교제는 우리를 완성해 가는 훌륭한 하나님의 수단이다. 거기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고쳐질 곳이 없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교제를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한 번 생각해보라. 그 안에서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배우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 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걸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 생활이다. 여러분에 그런 신앙생활을 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복하라
(빌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사실 안다는 것과 그렇게 산다는 것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떨 때는 별개처럼 느껴질 때도 두 가지가 깊은 관계가 있는 동시에 별개구나라고 느껴집니다. 그런 경험들을 우리가 하지요 그래서 언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받아서 그래서 은혜를 받아가지고 정말 놀랍게 변화되고 그랫어요 그래서 말씀에 사로잡히고 은혜를 받아서 그래서 놀랍도록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옛삶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옛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위대함도 깨달았고 크신 하나님도 만났어요 그리고 지식적으로 그 은혜받은 것을 잘 정돈해서 오늘 내 마음속에 잘 지식적으로 정돈되어서 체계적으로 본존이 되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사람이 앞으로 계속해서 그런삶을 살수있을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얼마든지 그 지식만 앙상하게 남고 그 지식,하나님의 말씀속에 들어오던 그 차란한 빛들과 은혜는 사라져서 골격만 남은 그런사람이 될 수있는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있는것입니다. 물론 인제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중요하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장담할수 가없어요 정말로 그래서 오늘 하루 하루를 주님이 붙들어주시면 하루하루를 신자답게 살아갈뿐이지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매년죽노라고 예기하지 않고 월말에 죽노라고 예기하지 않고 날마다 죽노라 그것이 바로 이 거룩한 신앙생활속에서 간과하면 않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라는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다 목자와양을 외울정도로 공부를 하셨고 아마 우리교회에서 구역장정도되면은 아마 개인적으로 목자와양을 가르칠수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옛날에 써낸 페이퍼놓고 가르칠수있을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충격을 받고 목자와양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많은 사람을 가르쳐도 그사람중에도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목양받기싫다고 목양에서 벗아나는 사람이있습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은 날마다 우리들이 싸워야하는 문제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하면 내게 와서 귀를 기울이고 내게 들어라 그러면 살리라 이 이사야의 예언으로 볼때 이스라엘백성들이 신앙을 버리고 우상들을 섬기고 하면서 너무나 잘못된 길로 가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어요 여호와에 임박한 날앞에서 이 삐뚤어진 유다백성들의 삶을 보면은 심판을 받아 모두죽을것이 분명해요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돌이키면은 살 것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그임박한 환란속에서 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런뜻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또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은 죽은 영혼이 살아난다는 의미도 되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에 불순종하는 삶이나 악에대해서 징벌하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믿는 당신의 자녀들을 심판하지않으셔요 결국은그들을 구원하시지만 그러나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영혼에 고통으로 충분히 댓가를 치루어요 그래서 오늘성경이 말하는 것이 그렇게 영적으로 죽은사람이 살아나는 방법이 있다
그게 무엇이냐하면은 그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그때에 그돌이키게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하나님의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다는것입니다. 들리는것과 듣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에요 들리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없이 계속 귀에 들리는 것을 의미하고 듣는 것은 의지를 가지고 그무엇인가를 귀를 기울여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그것을 붙들고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고 어두움속에서 해쳐나오고자하는 그런 것이 바로 듣는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에 직원으로 근무하고 늘 테입을 만들고 또 신문을 만들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어찌됬든지 예배에 빠질수없도록 구조적으로 그렇게되어서 예배에 나오고 이런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늘 하나님이 말씀이 들리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늘 들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신을 변화시키지않는데도 배부른 것을 느끼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말씀에 면역이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맺주전에 설교하면서 예기를 했나요? 옛날에 아침에 가서 장사한다고 떡을 만들면은 하나도 떡을 먹은 것이 없는데 새벽서부터 계속해서 떡냄새를 맡고 나면은 그 방앗간에 떡을 팔로 간다말입니다. 그러면 점심때까지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아! 아무것도, 그것을 말하자면 아로마효과에요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데 음식냄새 때문에 질려서 더 이상 밥을 먹지않는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질문을 해보고싶어요 우리가 느끼는 욕구가 정말 정말 정직한가 부정직하다는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욕구가 부정직하다 그래서 만약에 그렇게 해서 떡냄새를 계속 맡게해요 그러면 저녁때도 배가않고파 오후되도말입니다. 세시가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아 냄새가 계속나요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그사람을 현혹시키면은 어떻게 되겠어요 나중에는 굼겨죽일수도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다이어트심하게 한사람은 굶어 죽는 사람도 나오잖아요 얼마든지 그렇수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아무 음식도 섭치되지않았는데 포만감을 느끼는것입니다. 그것은 정직하지않다는것입니다. 사람이 은혜안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영혼이 갈급하고 하루라도 기도하지않은면 그것이 정직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하나님을 갈망하게되요 죄의지배아래있으면 그런 곤고함을 못느껴요 곤고함을 못느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가 역사하는 곳에 가까이 가면 자신이 곤고함을 깨달을 뿐입니다. 그래서 거거서 벗어나면 또 못느끼죠 여러분들이 그러기에 아주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늘 글을 만지고 테입을 만들고 가르치고 그런 속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자세가 필요하냐하면 자신의 가지고있는 속에있는 욕구가 정말 정직한가 그것을 봐야해요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어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해하는 교역자들을 본적이있습니다.? 하나님의말씀에 목말라하고 변화되지못해서 눈무를 흘리는 장로들을 본적이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실것이라고 생각하고 예배당에 들어가는 직원을 본적이있느냐고? 나는 신학대학에서도 근무를 했고 직원들을 데리고 근무도 해봤지만 어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근처에서 사역하는 사람들, 신학교직원,교회에 직원,내가보기에는 80%의 사람들이 정상적이지 않고 병든사람입니다. 그 왜그래요?그속에 있으면서 내가 신학대학있을 때인데 직원이 그 앞에서 열심히 책을 봐요 근무시간에 그렇게 책을 보는것도 말이 않되지 “먼 책이냐? 맨 말도 않되는 마법이 어쩌고 쩌쩌고” 그래서 “그딴 것 봐서 니 영혼에 무슨 유익이 되겠냐” 내 책을 하나 주었더니 “읽지도 않아”결국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의 늘 듣는 것이 자신의 영혼하고는 관계가 없는것입니다. 들리는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뭐가 필요하냐하면은 모든 것에서 다 떠나서 그래서 오로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받아야되겠다 그렇게 내가 개인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정말 변화받아야되겠다 그런 의지가 필요한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앞에 내가 내영혼의상태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부정직하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앞에서 내신앙의 현주소가 무엇이고 내 마음이 어떠하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돼! 그런사람들에게는 끝임없는 발전과 영적성숙이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설교한대로 하나님앞에서 봉사할 때, 섬길때에 당하는 어려움들을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기회로 삼으라고 그랬는데“ 뭐가 있어야지 그렇게 삼지” 자기가은혜아래 있을 때가 그것이 가능한거에요 자기가 십자가가 싫은데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도 없고 기도생활도 없고 하나님의말씀에 감화받는 삶도 없는데 고생은 고생으로 존재하는것이지 어떻게 그것이 성례전적으로 하나가되어서 그리스도예수와 연합하는 기회가 되느냐고? 다 은혜아래 있을 때에 그런작용이 가능하게 되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싶어요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마음에 반영입니다. 마음과 삶이이렇게 격차가있을수있거든 근데 삼투압현상처럼 언제가 이것이 수평을 이루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너무 열열하고 사랑스러운데 이 삶은 아직까지 성화되지않아서 미천해! 그러면 이 삶이 올라오든지 마음이 주저앉든지 두개가 수평을 이루든지 이렇게 되어서 결국은 장기적으로 하나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삶은 이렇게 섬기는 삶을 요구받는데 영적수준을 이래요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결국 어떻게 되요 언젠가는 이사람이 변화되어서 삶을 따라가든지 그렇게 안되면은 언젠가는 하나님과의관계가 얼마나 부실한지 하는 것을 자신의 섬김과 삶을 통해서 여건이 마련되면은 그런 마각을 드러내게된다
그래서 정말 믿음으로 살아야해요 나는 여러분들이 일만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않아요 항상 경계해야돼 항상 불안해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뭐가 남겠어요 교회되! 여러분들이 일잘하는것보다도 여러분들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직원으로 들어온다음에 늘 물어보는 것이 이거에요 신앙이 좋아졌는가? 그러면은 이일은 하면서 계속배워나가면 돼! 그렇게 해서 자신이 하나님의사람이 되어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될 때에 그섬김이 은혜에 물에 잠겨서 정말 하나님과 가깝게 다가가도록 만들어주는 삶이되고,섬김이 될 수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때 할수있으면 임무를 적게주려고 특별히 직원같은 경우에는 특별히 임무가 부가되는 것이 아니죠 그렇죠 될 수있으면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래서 한사람의 일군이 아니라 한사람의 새가족으로 돌아가! 제발 사모님도 마찬가지고 교역자도마찬가지고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회되어야해요 그래서 정말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되요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말씀을 즐기는 위험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잃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2-25)”
훌륭한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좋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교인들이 어느 한곳에 모여서 더 이상 진전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치 댐 같은 데서 물이 내려올 때 삼태기를 물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대면 물고기가 거슬러 올라와서 삼태기 속에서 더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느낌을 선명하게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어려운 일이지만 그분들에게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설교한 기억이 납니다. ‘내가 얼마나 신앙이 성숙했으면 저 정도로 깊이 들어가는 말씀을 배울 수 있을까’하며 이해 안 되거나 힘들지 않고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나하나 말씀을 집어갈 때마다 ‘맞아. 그렇지. 그래야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거였구나. 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자기 깨어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가 되어서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했는데 역으로 뒤집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자기를 꺾어 순종하고자 하는 참된 실천이 없을 때에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영혼에는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지적으로는 교만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죤 오웬이 신자가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greedy for science’ 껄떡거리면서 학문을 더 섭취하고 싶어 하는 학문에 대한 탐욕이 사람을 미끄러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진리를 이해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어서 차곡차곡 쌓여가서 그 주제에 관해서 누가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든지 곱게 펴서 정리된 것을 차례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 그런 삶이 자신이 스스로 속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 주제를 잘 정리해서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고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어서 무슨 유익을 얻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얻은 도구들은 그런 주제에 관해서 헝클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한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고 ‘나에게 설명을 들으면 정리할 수 있을 텐데’하는 사고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영혼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번에 집회를 하면서 제 아내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신을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처럼 받아들이는 입장이 아니라 설교를 감상하면서 ‘맞아. 그렇지. 저렇게 설교해야 돼. 저렇게 설교하니까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구나’ ‘왜 저렇게 설교할까.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을 텐데. 저 부분은 왜 저렇게 길게 늘여서 말할까’하는 자신을 발견했답니다. 그렇게 해서는 자기의 영혼에 어떤 유익도 없습니다.
말씀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은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는 위험입니다. 저는 그렇게 살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은 껍데기만 남은 정리된 사고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열린 교회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모두 자신이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주제를 설명하는 순간만 거룩의 열정이 있는 것 같지만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뿌리가 되는 죄에 대한 미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대로 가지고도 얼마든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상입니다.
두 번째로 왜 그럴까요? 흔히 우리들이 이야기할 때에는 ‘논리적으로 사고가 지배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깨트려지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한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먼저 승복하지 않으면 깨트려지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사경회를 끝내고 교리 반에서도 개인적으로도 사람들을 만났는데 특색은 거의 다 저녁집회에 한번도 안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반론을 제기하고 도망갈 수가 없는 경험을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듣고 자기 속에 깨끗이 정리되고 그렇게 간직하면서 자기는 변화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도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서는 잘 나타나기 어려운 증상인데 그 이유는 한 가지에 대한 집착, 또 한 가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자기 의에 대한 집착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이만큼 살면 상당한 것이 아닌가!’하는 데서 오는 자신의 의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듣게 하는 최상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듣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 의에 대한 과도한 자만심입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어린 아이와 같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그러한 자기 의에 대한 자만심이 있게 되면 모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심지어는 성경 자체의 증언까지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장에 대한 자문적인 자료가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걸어가는데 성경을 통해서 지지를 받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기와 똑같은 방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고 가르쳐지면 깊이 공감하면서 동지로서 악수를 나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깨트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깨트려질 때는 자기 사고와 일직선상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는 깨트려지지 않습니다. 자기 사고와 다르든지 아니면 자신의 삶과 영적 상황에 대한 자기의 판단과 틀린 말씀이 주어졌을 때 깨트려지는 것이지 계속 말씀이 선포되어 스스로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게 만들어주는 말씀을 가지고는 깨트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회개합니까? 죄인이 아닌 줄 알고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깨닫고 나니까 엄청난 죄인입니다. 그때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치명적인 악영향을 이런 신앙생활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더 결정적인데, 죄에 대한 사랑이 아주 우세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자기가 누리게 될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그 일을 위해서 죄를 버릴 때 맛보게 될 상실감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못 버리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잘 정돈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활동만 이루어지면 됩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부서져서 피 흘릴 필요도 없고 눈물을 쏟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떠한 희생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깨끗이 정리 되어서 자기 스스로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신앙이 어렸을 때 소문난 죄를 짓는 사람보다 더 역겨운 사람이 됩니다. 신앙이 아직 어렸을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미미하니까 간음하고 살인하고 미끄러지듯이 짐승처럼 아무렇게나 살면서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소문난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 더럽고 비열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 만큼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그에게 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상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주인이 누구입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심이라’ 하나님이 직접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에게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런 식으로 비열하게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신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이 굉장히 큽니다.
또 하나 여기에서 반드시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면 안 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런 식으로 정리해서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나면 그 과정을 통해서 굳어지는 인간의 마음이 특정한 죄를 지음으로 그 마음이 굳어지는 것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집니다. 이것이 왜 무서우냐하면 전에는 무작정 굳어진 마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죄를 지적받고 깨트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었는데 그렇게 논리적으로 정돈하고 자기를 스스로 속이면서 말씀을 회피하게 되면 이번에는 그냥 굳어지는 마음의 굳어짐이 아니라 논리를 갖춘 굳어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객관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의 삶은 일반적으로 그 말씀 자체를 엔조이하는 것 까지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하에서도 얼마든지 그 말씀을 엔조이하고 그것을 통해서 종교 심리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는 불순종에서 오는 고통을 스스로 보상 받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의 결국에 대해서 성경은 자율하게 하는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찾아오는 현상은 자유가 없는 아주 부자유한, 그래서 죄의 지배를 받는, 노예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너희가 진리를 알아도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너희를 노예로 삼으리니’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적인 생활은 급속하게 쇄하기 시작할 것이고 죄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깊이 순종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십니다.
며칠 전 어느 목사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교인 중 하나가 강박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강박 증세는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증세입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하는데 그 강박 증세가 너무나 심하니까 직장에만 가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사회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 두고 어머니 곁에 달라붙어 있는데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첫째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잘 가르쳐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는 기도는 한두 번의 기도만으로도 놀랍게 그 사람에게 평강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말 자유케 되는 삶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엔조이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변화되지 않고 그 속에서 정리된 지식만을 얻어서 자신도 즉시 누구에게 가르치면서 활용할 기대를 하는 사람의 삶이 정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성화시키시고 그 성화 안에서 성숙해 가게 하시려고 할 때 주님이 그를 거룩하게 하시는 방법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아주 회의적입니다.
9. 구속의 감격을 늘 간직하라
(출 12:5-11)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인가 깊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삶에 어떤 혼돈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우리의 환경적인 이유를 거론하면서 우리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사실 좀더 깊이 들어 가보면 여러 가지가 없는 게 아니라 한 가지가 없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진 거지요. 오늘 유월절 예식을 처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유월절 예식을 할 때, 어쨌든 그 유월절, 애굽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그 모든 초 태생 들을 치고 죽게 하셨을 때에 그때에 살아남은 것, 그 유월절이 있었던 날을 일년 의 첫 달로 하나님이 고정하신 거지요. 그리고 그달 첫 달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그 유월절을 지킬 때 에는 그 해 첫 달 열흘에 양을 미리 택합니다. 그 어린 양은 양일수도 있고, 염소 일수도 있고, 한 사람 앞에 한 마리는 아니고 그 양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열명이면은 열명을 위해서 한 마리를 예비하고 가족수가 적으면 이웃하고 합쳐서 한 마리를 예비해서 그래서 한 마리를 모두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그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마리를 택하는 거지요. 사일동안 잘 구별되게 간수 했다가 십사일째 되는 날 그 어린 양을 문 앞에서 잡는 것입니다. 문지방에서, 그 피가 문지방에 다 흐르고 그것을 인방과 설주에 발라요. 그리고 쓴 나물을 먹는 것입니다. 먹을 때 에는 신발을 신고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먹는 거지요.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도망 나오던 그때에야 그렇게 먹는 것이 빨리 먹고 출애굽을 하기 위해서니까 가당했다고 하지만 이후에 대대로 이어질 때 모두 그렇게 했다는 걸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대로 교육하신 것입니다. 그 많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이 짧은 시간에 우리들이 모두 나눌 수 는 없지만 크게 세 가지를 우리들이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뭐냐면 한해 첫 시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속의 신비를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마음에 많은 결심들을 하지요. 그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이 강한 소원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그런 소원을 우리 모두가 품을 때 그 하나님 앞에서 영광 돌릴 수 있는 한해가 예비 된 것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였겠습니까? 성령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어려운데 구약시대 백성들이 희미한 계시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그 한해가 시작되는 그 첫 달에 이렇게 구속의 비밀을 가슴에 새겨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한해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한해에 첫 달 에만 우리들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의 신앙을 새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로 시작할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구속의 비밀을 가슴에 새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순종하면서 살수가 없어요. 두 번째는 뭐냐면 그 어린양을 잡고 그 피로 설주와 인방에 모두 바르고 그리고 쓴 나물과 함께 그 고기를 먹어요. 그걸 통해서 온 땅에 가득한 죽음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그해 정월마다 이일을 행하면서 무얼 생각 했을까요. 자기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려주셨다 하는 그 구원의 감격이 그들 마음에 아로 새겨지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우리들이 다양한 환경 속 에서 우리의 힘들음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힘든 것은 한 가지가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게 뭐냐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모든 것을 평안하게 누리면서 지내다 보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민감해 지는데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본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가 정말 십상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매년 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예식을 행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에 강력하게 새겨주셨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는 그때 모두 멸망되었을 백성들이고 그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 주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누구였던가?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죄인에 불과하고 그리고 주님의 용서 없이는 살수 없는 정말 하찮은 인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겨서 우리 자신을 향한 어떤 부당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도 자기 부인의 영역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는 인간이 예전에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어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렇게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나갈 수 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매일, 정말 과장이 아니라 매일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눈물 흘리지 않고는 결코 굿 크리스천이 될 수 없어요. 여기에는 어떤 과장도 숨어있지 않아요.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눈물이 없이는 그가 결코 무엇을 하든지 그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고 그가 어떤 성화의 도리를 배우든지 간에 그가 그 지식만으로는 참 신자가 되어갈 수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칼빈 선생은 죄 죽임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어요. 하나는 내적인 죄 죽임, 그리고 하나는 외적인 죄 죽임, 내적인 죄 죽임은 자기 부인을 통한 내적 절제이고 외적인 죄 죽임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근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이것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걸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부인합니다. 나는 이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그걸 부인해! 난 이것이 하기 싫어, 근데 그걸 부인합니다. 이성을, 욕망을 이런 모든 이 세상에서의 사악함, 욕심 이런 것 들을 철저히 부정해! 나는 십자가를 지면서 살기 싫은데 그 살기 싫어하는 나를 부인 하면서 날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라고 하는 십자가를 져! 자기를 굉장히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내적으로도 자기를 부인 할 수 없고 외적으로도 십자가를 질수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내적으로도 죄 죽임이 없고 외적으로도 죄 죽임이 없는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앞에서 자기는 전체 가 빚진 사람일 뿐 이다. 그래서 하나님의뜻을 복종하며 사는 그 자체가 내게 행복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구속의 감격이 없는 사람들이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적인 자기 부인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있어서 여전히 활동하는 그 내제하는 죄가 어떤 식 으로든지 그의 모든 섬김과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그런 영향을 어떻게 하든지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영광을 돌릴 수 없는 그런 내적인 결함을 갖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거기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 사악하고 죄의 지배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의 눈물을 한손으로 닦으면서 또 한손으로 범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늘 그 구속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날들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뭐냐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곧 떠나야 할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겁니다. 보세요.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30년을 한대로 친다고 하더라도 14대가 넘는 그런 긴 시간들을 살았어요. 삶의 기반과 모든 것이 거기 있잖아요. 그지요? 그런데 옷을 모두 입고 신발의 끈을 동이고 지팡이를 들고 그 어린양을 먹었어요. 이게 결국은 뭐냐면 이 땅에서의 자신의 삶을 나그네 로라 하고 자청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지요? 사랑하는 사람들, 좋은 관계, 물질적인 번영, 심신의 위로, 이 세상에서의 성취, 좋은 평판, 존경심 얼마나 많아요. 이런 것들을 신자들이 적절하게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자보다는 산 개 가 훨씬 났다는 겁니다. 그걸 행복하게 받아들여요. 뭘 줘도 감사하게 먹고 어디에 두셔도 감사하게 살고 무슨 사명을 맡겨도 기쁘게 섬기고 그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 때문에 탐닉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영원히 있을 곳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따라서 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나그네라고 생각을 해야 해! 그래서 우리는 단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어야 합니다. 매 순간, 그리고 그 죽음의 빛 아래서 삶을 보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잡는데 그 잡는 시간이 절묘하잖아요? 해 질 때, 캄캄한 밤중도 아니고 환한 대 낮도 아니고 언제? 아침에 떴던 태양의 빛이 사라져가고 어두움이 시작하는 바로 그 만남의 지점에 그때 어린양을 잡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정말 절묘하잖아요? 왜 하필 밤이 아니에요. 아침에 잡아먹고 저녁때 유월절 기다리면 안 될 거 뭐 있습니다. 그지요? 근데 아니에요. 해질 때, 해가 진다는 것은 해가 땅으로 딱 꺼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남지요? 아직까지 빛이 남아요. 그리고 한쪽에선 어둠이 시작이 되요. 그 절묘한 시간에 어린양을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뭐냐면 삶과 죽음을 동시에 맛보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사라져가는 이 세상의 삶과 그 삶의 빛을 받으며 다가오고 있는 죽음, 그리고 그 죽음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을 능가하는 부활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그때 보다 더 절묘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걸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빛 아래서 우리의 삶을 보고 그 삶 속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끊임없이 경험 하면서 예수와 함께 살 부활의 영광스런 날을 흐느끼고 신음하듯이 사모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게 신자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이나 살던 그 땅에서 이렇게 옷을 입고 허리에 끈을 동이고 신발을 신고 그렇게 급히 양고기를 먹으면서 430년이나 살아오던 고향과 같은 그 땅에서 자신들은 갈 곳이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이제부터는 이 땅에서 나그네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는 모두 나그네로서 인생을 살았던 것이지요.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이 필요 한겁니다. 정말 잠깐 지나가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산대로 주님 앞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텐데 그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았는가? 그것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평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젊음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도 지나가고 좋은 평판과 사역을 하면서 당했던 쓰라린 고난이나 눈물도 모두 지나가요. 그리고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잠시 만나는 인연일 뿐입니다. 마지막에 돌아가는 곳은 오직 한곳 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서 기뻐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들풀 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은 인생이지만 그러나 그 인생이 창조주 위대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 조국교회 한 모퉁이에서 교회를 참으로 교회 되게 하시려는 그 하나님의 뜨거운 열망을 이 땅에 실현시켜드리는 그 한 사역을 거들고 있다는 그것으로 충분히 영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족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부름을 받고 섬기는 사람이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온 삶 속에서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도록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더럽고 비참한 삶이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 안에 실현되고 그래서 경험된 하나님 의 나라만큼만 밖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 갈수 있는 것이에요.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뤄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께 참으로 사랑 받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주님께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된 영혼들에 대해서 깊이 눈물 흘리고 아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번 수련회에 깊이, 정말 깊이 주님을 만나고 예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할 뿐 이 에요. 그리고 천국에서 어떤 상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냥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루하루 일하면서 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 여러분들이 깊이 주님을 만나고 예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 그러면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이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10.그리스도를 추구한다는 것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를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 아침 이 시간에 한 주일을 새롭게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해 잘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은혜를 더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추구한다’라는 표현을 잘 씁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찾는다 ’라는 말로 많이 표현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찾은 결과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혹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열매를 맺게 되어 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공식들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추구한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렇게 열심히 교회도 섬기고 말씀을 듣고 기도도 하고 이런 저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 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주님을 향한 추구와는 상관이 없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아주 부정한 이욕이나 옳지 못한 욕망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일하고 한다 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국면입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를 추구한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결국은 믿음에 있어서 온전해 지기를 갈망하는 것이에요. 히11장에 보면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생애 내내 완전한 믿음 속에서 산 것은 아니었죠. 그렇지만 그들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혹은 믿음이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냈던 특정한 시기를 보았을 때 그들이 믿음으로 산 사람이다 라고 여겨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우실 것이다 라고 하는 개념적이고 일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믿음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그런 개념적이고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아주 개별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되 온전히 믿은 사람, 구약에서 보면 아사나 히스기야 같은 사람 요시야나 다윗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온전히 찾은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죠. 일평생 하나님을 찾았으며 일평생 온전하였으며.... 믿음을 소유했지만 그 믿음이 개념적이고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궁금한 것은 도대체 이 온전한 믿음의 정체가 무어냐? 그 온전한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 .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뢰’ 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면 그 온전한 신뢰 온전한 믿음이 도대체 무어냐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냐 입니다. 왜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때는 하나님을 정말 온전히 믿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반쯤 의뢰하는 그런 신앙이 되느냐 그 대답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많이 연합되어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신뢰가 우리 속에 있었어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잘 연합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열망을 갖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져 소원한 거리감을 갖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그 때 가장 충일하게 되는 거예요.
짧은 시간에 이 비밀들을 다 이야기 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오늘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 이야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를 추구한다 라고 하는 것이 무어냐? 바로 그런 게 추구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그것이 지향하는 온전한 신뢰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핵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연합입니다. 그것을 전심으로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도 포함하고 또 하나는 믿음의 원 저자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가장 잘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는 거죠. 그래서 ‘믿음의 원 저자이시고 동시에 지금은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며 ’그 뜻이에요. 그리고 ‘온전케 하는 이이신 ’뭘 온전케 하는 것이냐면 물론 믿으면 사람이 성화에 있어서 온전해 지지요. 그것이 부수적인 성과 이긴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의 원 저자이시고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동시에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는 것이지요. 그 예수님이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시다 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바라보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민수기를 생각나게 하죠.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뱀에 물렸을 때 모세가 지팡이에 구리 뱀을 만들어서 높이 쳐들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케 되고 그리고 새롭게 되어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시는 것이다 는 것이지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도대체 그렇게 예수를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읽은 4절에 결정적으로 요약이 되어있는 것이에요. ‘너희가 죄와 더불어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으니’여기에서 나오는 히브리 저자의 마음 속에 있었던 그림은 로마시대 때의 격투기입니다. 그 격투기를 희랍어로 ‘탈레’라고 불렀는데 그게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같은 이미지에요. 그 당시 사도는 혈과 육에 속한 경기인 ‘탈레’라고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죽기까지 사람들이 격투기를 벌이면서 한 사람이 죽어야지만 싸움이 끝나는 그러한 치열한 격투기였어요. 그래서 주먹에다 쇠 징을 박은 가죽 붕대를 매고 그리고 무기 없이 싸워서 그를 처참하게 싸워서 짓이겨 죽이는 그런 격투기를 노예들을 풀어서 많이 했고 그것들을 좋아했어요.
그 이유가 정치적인 게 있었어요. 로마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감각은 탁월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공화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백성들의 파워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런 격투기 같은 것들을 자주 열어서 그리고 글라디에이터들을 데리고 칼싸움 같은 것들을 해서 열광하게 만들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흩어 버리는 거지요. 우리나라에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프로 야구, 프로 축구팀들이 마구 생겨 난 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그런 격투기를 본 거지요. 그 격투기의 특징은 뭐냐 하면 중단이라든지 항복이라든지 무승부라든지 둘이 서로 합의해서 휴전이라든지 하는 그런 것이 없다는 거지요. 죽든지 살든지 그리고 마지막에 피 흘려서 누군가가 한 사람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중단 없이 계속 되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그런 싸움이에요.
그 이미지를 여기에 그대로 끌어 온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 이죠. 이 사람들은 히브리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오웬(?)은 바울이 이것을 썼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히브리인으로서 예수를 믿고 그 시대에 살아남는 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은 이미 사도 바울이 몸소 체험했어요. 가족과 모든 골육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치욕을 받는 그런 치열한 삶을 계속 살아왔습니다. 그런 삶을 계속 사는 가운데 이 사람들이 ---한 때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임. 그렇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음-- 있는 거예요. 오늘날 만약 우리가 히브리인이었다면 아마 감히 예수를 못 믿었을지도 몰라요. 그런 정도로 한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자가 되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아오면서 그들이 당했던 고통과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뭐라고 말합니까? 죄와 더불어 싸우기는 했지만 피 흘리기 까지는 안했다 그래서 결국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삶을 못 살았다.라는 것이지요. 이게 잘못된 거지요. 근데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뭡니까? “죄와 더불어 싸웠다 그러나 피 흘리기까지 대항치는 아니하였다”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선명하게 우리의 마음에 비춰오는 한 줄기 빛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죄와 싸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삶일 수도 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무엇 때문에 ? 죄와 더불어 다투는 것만으로는 예수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뭐예요? 죄와 다투는 정도 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거지요. 필요한 것은 ‘피 흘리기 까지 ’죄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휴전이나 화해, 어떤 연장전의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는 지사의 각오. 그것을 통해서만 ??한 약속에 깃들여 있는 위대한 풍성한 삶의 본질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죄를 환영하고 열렬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죄와 더불어 갈등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안에 이미 말씀을 통해서 많은 죄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것들을 놔 두는 것이지요.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공급해 주시면 -- 그래도 은혜가 있잖아요. 그래서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 데 -- 그 많은 은혜들이 죄 죽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를 적절히 억제하는 데 너무나 많이 에너지가 소진되어서 정작 그 죄와 더불어서 싸우고 그 죄를 죽이는 데에는 내게 주신 은혜의 에너지가 사용이 안 되는 거예요. 늘 죄와 더불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갈등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사는데 진정으로 죄를 죽이면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영혼이 죄와 맞붙어 싸워서 본격적으로 맹렬하게 죄를 죽이는 일이 있기 위해서는 전심을 모두 다 실어야 해요. 남겨진 죄, 발견된 한 톨의 죄라도 그것에 대해서 강력한 적대감을 갖고 그런 것들을 퇴치하고 싸워야 되겠다 라고 하는 아주 근본적인 욕구가 필요하다 이거예요. 그것이 제가 요즘에 하나님 앞에 도전 받고 있는 깨달음들입니다. 너무나 긴 세월을 한 번도 죄와 한 번 신나게 놀아보자 그런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그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서 죄와 더불어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죄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는 삶은 죄와 더불어서 지사의 각오로 싸우는 삶이에요. 발견된 죄인데도 그것을 남겨두고 그리고 관용을 베풀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널널한 마음을 가지고 성화의 진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깨달으면 그것들은 차가운 지식으로 개념만 정리되어 가고, 정서는 부패하기 시작하고 생각은 엉클어지기 시작합니다. 의지는 육체의 게으름에 종속되기 시작하고 영혼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거기서 어떠한 진전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음속에 그런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를 떨치고 죄와 더불어 적대감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데 이 속에서 그렇게 까지는 하기가 싫은 거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런 마음을 한 구석에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 된다는 것은 힘든 것이지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죄와의 연합은 상당히 많은 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립지대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죠.
난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땅의 수고를 끝내고 오라고 합니다. 주님이 부르셨지만 가보지 않은 나라입니다. 어두운 밤바다와 같이 캄캄한 죽음의 세계를 향해 친구도 없고 이웃도 없고 목적도 없이 혼자 걸어갑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갈 수 있습니까? 예수여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습니다. 내 영혼을 우리 주님의 손에 부탁드립니다. 달려갈 수 있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맘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의 꿈도 꾸고 유능한 소장학자로 신학교를 한 번 바르게 일으켜 볼까 하는 꿈도 있었고 남들이 들어가 보지 못한 학문의 세계를 파헤쳐서 사람을 좀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은 야망도 있었습니다. 많은 영혼들을 예수 믿게 만들어서 한 번 교회의 큰 힘을 집약해서 목회가 뭔지 한번 보여 주고 싶은 야망을 가진 때도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참으로 신자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고 그리고 내가 쓴 수많은 글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내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그 피가 씌어진 모든 글 속에 낱낱이 다 배여서 그래서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이 나의 삶을 보면서 물씬 나는 그 피 냄새를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이천년이 지나도 복음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창조 이래로 타락한 인간들이 이 긴 역사를 이어 왔어도 역시 그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변화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이 언제라도 오늘이라도 부르실 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두려운 죽음의 바다를 뛰어가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으니 주님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다른 소원은 없어요.
시퍼런 진리를 수없이 깨닫고도 우리들이 여전히 죄에 갇혀서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고,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나도 주님과의 연합이 무엇인지 모르고 죄와 유혹중심에서 맴돌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원망 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핑계할 것이 없죠.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많이 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매일 매일 주님이 우리 인생의 전부인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섬기고 일하고 봉사하고 목회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흘러가는 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 그가 하나님 앞에 정말 뛰어나도록 온전해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경건의 실천을 위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