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과 신자의 영적생활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2월 2일-4월 20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9월 17일
목 차
1. 게으름의 뿌리(잠22:13) 2003.2.2 주일오후 3
2. 게으르지 않은 자의 게으름 (잠26:14) 2003.2.9 주일오후 10
3. 게으름의 발전 : 정욕 (잠21:25) 2003.2.16 주일오후 16
4. 게으른 자의 선택과 결과 (잠15:19上) 2003.2.23 주일오후 27
5. 게으른 자의 선택과 결과 (잠15:19下) 2003.3.2 주일오후 35
6. 부주의함은 게으른 자의 선택이다(1)(잠24:30-31) 2003.3.9 주일오후 37
7. 부주의함은 게으른 자의 선택이다(2)(잠24:32-34) 2003.3.16 주일오후 43
8. 수면생활의 방탕함을 면하라(잠20:13) 2003.3.23 주일오후 51
9. 선한 일을 향한 약한 반응(잠19:24) 2003.3.30 주일오후 60
10. 게으른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 (잠10:26) 2003.4.6 주일오후 71
11. 게으른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 (잠10:26) 2003.4.13 주일오후 82
12. 게으른 자의 교만함(잠26:16) 2003.4.20 주일오후 91
§ 잠언에 관하여
지혜의 장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많은 지혜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 잠언은 시편과 달리 짧은 경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경구들은 한 장 전체에 걸쳐 나름대로 통일된 이야기를 나누어서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의미 연결 없이 조각조각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이 잠언은 내용상의 앞뒤 연결이 매끄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을 풀어나갈 때는 적절한 추론의 과정을 동반해야 하며, 신앙적 틀 안에서 일정한 논리를 미리 세워 이 훈계들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흔히 잠언을 국민윤리 교과서나 처세술을 알려주는 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시도입니다. 잠언은 그러한 종류의 책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보다 지혜로운 삶의 방식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지혜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을 통해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가운데에서 체득한 실천적인 지혜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범죄와 실패들을 통해 얻은 뼈아픈 경험과 은혜 아래 살아가면서 터득하게 된 놀라운 영적인 이치, 자신이 깨닫게 된 하나님의 마음, 율법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면서 얻게 된 통찰 등을 융합하여 이러한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지혜를 잠언은 아주 짧은 글귀로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문장이 필요한 삶의 진리를 아주 짧은 글귀로서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문학적 표현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담, 격언, 표어 같은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는데 이 잠언 역시 그러한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법이 갖고 있는 강점은 말은 짧은데 그 여운은 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그 말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그것을 되 내이게 하여 결국 그에게서 어떤 각성까지 끌어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수없이 내뱉고 듣는 무수한 말들은 대부분이 그 대화가 끝나고 나면 별로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속담이나 경구들은 다릅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와 같은 말은 한번 들으면 계속 마음을 맴돌다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불현듯 떠오릅니다.
잠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잠언에 담긴 경구들은 그 각각의 내용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뼈에 깊이 사무치는 체험 속에서 형성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곰곰히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면, 나중에는 그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게 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데려다 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잠언은 성경 66권 중에서 게으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기준으로 볼 때 게으르다는 말은 성경 전체에 걸쳐 약 22번 나오는데, 그중 잠언에서만 17번이 나옵니다. 이것은 삶의 지혜를 말함에 있어서 이 게으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우리로 하여금 짐작케 합니다.
1. 게으름의 뿌리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22:13)”
본문은 게으른 자를 “밖에 사자가 있다. 나가면 나는 그 사자에게 찢겨 죽을 것이다하면서 집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이 글이 기록된 당시는 농경사회였습니다. 지금이야 실내에서 일하는 직업들도 많이 있지만, 이 때만 해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계속 빈둥빈둥 놀면서 도무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게으른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젤’ (lxe[)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아짤(lx'[)이라는 동사입니다.아짤은 한가하게 기대다‘늦추다’ ‘머뭇거리다’는 뜻의 동사로게으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본문에서 ‘게으른 자’라는 뜻의 형용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면 게으른 자에 대한 잠언을 쓴 지혜자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게으른 자를 바라보는 지혜자의 시선은 일상적인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영적인 부분으로까지 깊이 들어갑니다. 잠언에 기록된 지혜자의 해석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의 상황을 보고 지혜자가 터득한 교훈들인데, 특별히 본문의 이 구절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일의 의무를 회피하는 방식에 지혜자의 시선이 모아져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게으른 자의 의무를 회피하는 방식은 핑계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라고 해서 그의 혀까지 게으르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게으른 자일수록 핑계가 많고 변명이 많습니다. 몸은 게을러도 혀는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게으른 사람 중에 말을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게으른 사람도 대단히 말을 잘 합니다. 그는 자신이 밖으로 나가 일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아주 절절하게 표현해 내었습니다.
밖에 사자가 있고, 길거리에도 사자가 있다. 내가 나가면 사자에 의해 찢겨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갈 수 있겠는가?
그러면 대체 게으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핑계를 대는 것일까요? 게으른 것이 나쁘다는 것은 동서고금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왜 게으른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정당성을 싣고자 끊임없이 변명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게으른 사람은 본질적으로 빗나간 자기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게으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태도의 옳지 못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바에 충실하게 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기 사랑입니다. 사실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힘든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합니다. ]
온 종일 빈둥대며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어느 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텔레비젼이 고장나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는 벌떡 일어나 신속하게 그 텔레비젼의 수리를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상황이 다급하면 그 무거운 텔레비젼을 들고 수리점으로 뛰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 게으른 사람으로 하여금 분주하게 움직이게 하였을까요? 고장난 텔레비젼이 그를 각성시켜 정신차리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텔레비젼을 고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순간에도 그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잠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의 궁극적인 정체는 빗나간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이 게으름의 기초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움직이기에 그는 게으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그가 지금 아무리 바쁘게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게으름의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 치고 탁월한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탁월한 영성을 소유했던 사람 가운데 게을렀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게으른 사람에게 그런 아름다운 선물을 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게으름의 원인인 자기 사랑을 빗나갔다고 표현하는 데에는 이유는 있습니다. 게으름이 빗나간 자기 사랑인 이유는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통해서 돌아오는 이익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 게으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집안에 불화가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게으르면 온 가족이 힘들고 고단하게 살 것이고, 부인이 게으르면 모든 집안 식구들이 괴로움을 겪을 것입니다. 성경은 충성스러운 자는 추수할 때 마시는 한 그릇 얼음냉수에, 게으른 자는 눈에 연기와 이빨의 초에 비유했습니다. 충성스런 사람은 부리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지만, 게으른 사람은 부리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그를 부리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게으른 사람은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해내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들까지 괴롭고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항상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도, 때로는 쉬어야만 하는 때를 맞이합니다. 육신과 영혼이 일로 인해서 많이 지쳐올 때는 잠시 육신을 쉬게 해주십시오. 이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무한정의 긴장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드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적절한 휴식의 때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일 할 때 확실히 하듯이, 쉴 때에도 확실하게 육체와 마음에 쉼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쉼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 역시 문제입니다. 몸에 위험 신호가 오면 하루쯤 푹 쉬어 주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지만, 며칠에 한번 꼴로쓰러질지도 모르니까 새벽 기도 나가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밖에 나가면 사자가 나를 찢어 죽일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새벽기도 나가면 피곤이 사자와 같이 나를 찢을 것이라고 핑계 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쉼을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 속에 남아있는 그릇된 방식으로 자기를 위하는 부패한 성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옹호해 줄 육체의 명령과 죽이고 눌러야 할 정욕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영혼 뿐 아니라 육체에 대해서도 내가 어느 지점까지 일할 수 있고, 어느 지점까지 긴장을 견딜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라는 내면의 권고가 자신의 부패한 욕망이 시키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특별히 몸이 약한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아 맘껏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제가 모두 납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저는 몸이 늘 안 좋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순수하게 아프기 때문에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인지, 혹시 조금이라도 게으름이 병합되어 아픈 것을 핑계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명확하게 구별이 가지 않는 경우를 만나곤 합니다. 물론 아픈 사람들에게는 건강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고 해도 당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질적인 연약함과 그릇된 자기 사랑으로 말미암은 게으름 사이에서 명확하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부패한 본성의 손짓을 냉정하게 외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에 이용당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쉼의 시간을 악하게 사용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자기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게을러지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를 성취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얻는 보람보다, 지금 당장 좀 더 편하게 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육적인 요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자기 사랑은 본능에 가까운 욕구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에 매우 민감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기를 학대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왜곡된 방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향한 온전한 사랑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와 목적,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의 정체,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행복,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된 자신의 신분들을 정확하게 자각하고 거기에 자기를 정확하게 둘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 없이는 이기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자기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들을 자신에게 세워가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삶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사고와 정서와 의지의 질서가 가지런히 정돈되는 것은 은혜를 받아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변화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굽어지지 않은 지,정,의 속에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존재 목적들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에게 자신의 위치와 존재목적에 대한 정확한 깨달음이 생겨나면, 자기가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가능해 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자기 사랑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삶의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경험하고 그 인격을 알고 나면 빗나간 가지 사랑에 빠지기가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방식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왜 자기를 사랑하셨고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셨는가를 인격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은 삶의 목표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도 그러한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에서 전위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 사랑이 빗나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탐욕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빗나가 사랑은 자기 자신을 그릇되게 위하는 방식인데 이런 사랑은 자신의 영성을 죽이고 자신의 삶을 퇴보시키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이런 위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이 자기의 의무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를 그릇된 방식으로 위하면서 받는 열매라고 하는 것은 너무 부정적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염두에 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도 게으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공중 나는 새, 들에 핀 백합도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도 먹이고 입히신다는 이야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노동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이 지내는 그 동기가 만일 게으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고 자신의 육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도 망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게으른 사람들 가운데 인생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혹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짐승들이 생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듯이-그런 것이지 낙관할만한 철학이나 이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절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유는 돈을 벌고 안 버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을 하지 않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실 때에는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동 그 자체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인간의 참된 의무이고 죄가 들어온 이후에도 인간은 그런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어도 에덴동산에 노동은 있었습니다. ‘아담 할아버지와 하와 할머니가 선악과를 안 따먹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생명수 강가에서 포켓볼이나 치고 놀 텐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했는지 보십시오. 그 많은 짐승들의 이름을 다 붙여주고 창조주에게 위탁받은 이 세상을 관리해 나갔습니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노동을 하고 저녁에 잠들 때에는 행복한 피로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동 그 자체는 징벌이 아니라 노동에서 맛보는 인간의 고통과 쓴 열매, 열매 없음, 헛된 수고, 이런 것들이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맡기신 이 세상을 죄가 없는 상태에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다스려나가는데도 노동이 필요했다면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얼마나 더 많이 노동해야지만 될 수 있겠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여러분들의 맡은바 생업에 열심히 종사해서 일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구라파를 가끔 가보면서 본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구제해줘도 무한정으로 원칙이 없이 아무렇게나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신박약아나 자폐증에 걸려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구제비로 살아야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쌀 필요도 없이 기계로 할 수 있는 빵 포장 같은 일들을 정신박약아나 자폐아 같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돈을 주고 싸게 하는 것입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을 시킨 다음에 품삯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자기가 노동한 대가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그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대우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끔 배려해주는 것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된 것을 자꾸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 할 수 있도록 재료가 되는 것은 많이 사고 많이 보고 만드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야 합니다. 음식도 원칙도 통일성도 없이 계속 사먹으며 산다면 몇 일이나 가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구제를 통해서만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할 수만 있으면 그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자력으로 노동을 통해서 살아야되겠다고 하는 분명한 생각들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일반은총적 차원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손의 수고한 대로 먹으리라고 한 하나님의 축복의 실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삶도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이러한 원칙이 더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훌륭하게 만들어 놓으신 영역이 성화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이 너무 힘겨울 때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놓으셨을까? 한번 구원으로 영원히 완성되고 죄에 대해서는 아주 초연한 천사 같은 사람으로 -무엇에 의해서도 유혹을 받지 않고- 단단하게 살다가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안 하시고 이렇게 성화의 영역들을 신자들에게 주셔서 각자가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려고 애를 쓰고 주님께 도움을 받으려고 애를 쓰고 살아가는 것에 따라서 각자 각자가 다양한 성화의 정도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셨다면 인간은 다른 방법으로 훨씬 더 빨리 부패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낙담하지도 않고 교만하지도 않게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혔는데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늘도 어제의 은혜를 토대 삼아서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부지런함이 얼마나 필요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금년도 여러분들이 많은 주의 직분들을 맡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직분을 맡기만 하면 안 되고 그것들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야 합니다. 훌륭하게 수행해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자신의 삶을 면밀히 살피면서 이제껏 까지 쓸모없는 데에 소비한 시간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고, 그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도록 흘러 내려가는 하수구를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말에 가서, 감당도 못하는데 많은 직분을 맡아서 여기저기 짖밟고 다니면서 하나도 제대로 한 것이 없고 직분 맡은 장소에서 마다 한 번도 시원한 얼음냉수가 된 적이 없고 이에 초같이 혹은 눈의 연기 같은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일단 직분을 맡았으면 이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직분을 맡겨주실 때 스물 네 시간에 몇 시간 더 얹어서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리적인 시간은 절대 늘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껏 까지 주님을 섬기는 직분을 맡지 않았을 때에 허투로 사용했던 시간들을 정돈해서 그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길 생각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설거지할 때도 좀 빨리빨리 하고 치울 때도 좀 빨리빨리 해서, 그 수십 년 동안 하는 일의 빨리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터득해서 그것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빨리 수행하는 방법을 터득해야합니다. 그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기이지 똑같이 움직인다면 동물과 인간이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일을 반복하면 반복하기 때문에 정확하고 더 빨리 신속하게 끝낼 수 있도록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해야 합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들을 끊임없이 연구합니다.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될 것을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정확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반복되는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테니까 그렇게 방법을 터득해 놓으면 엄청난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컴퓨터로 책을 한권 썼는데 각주의 크기가 잘못되어서 하나씩 고치고 있었다-한 청년이 단추 하나만 누르니 한꺼번에 다 바꿔졌다)
그렇게 살면 부지런한 것이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기도 제목은 ‘주님의 일을 할 때 먼저는 우리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해주시고 두 번째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십시오.’입니다. 교회를 시작한지 이제 9년 정도 되는데 가끔 목회자인 독자들이 저의 삶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설교 준비하랴 심방하랴 집회도 다니랴 하는데 개척후 원고지 2만 매 정도를 썼습니다. 어떻게 그런 시간이 나느냐면, 물론 열심히 사느라고 애를 쓰지만 그분들도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니까 사실은 그분들보다 훨씬 덜자고 훨씬 덜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애를 써야 되는 것은,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빨리 완벽하게 하는 방법들을 터득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이 세상에서 행하는 생업의 일도 그런데 우리의 실제적인 영적 생활의 측면에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정말 그 원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화라고 하는 구원받은 이후 천국에까지 맞닿아 있는 커다란 그라운드를 허락하시고 거기에서 우리들이 주님을 모두 믿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랑을 더 많이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신 사람도 있고 그보다 못 미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떻든 모두 주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 서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성화의 커다란 그라운드에서 인간들이 걸어가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때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그 성화 속에는 자기 자신의 거룩해져 가는 것도 들어가고 하나님 섬기는 것도 들어가는데 그런 모든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면 참 가지가지일 것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조금 올라가다가는 주저앉아서 올라간 시간 보다 더 많이 쉬고 있는 사람이 있고 아예 십자가 내려놓고 서너 명이 모여 앉아서 고스톱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이시겠습니까?
2. 게으르지 않은 자의 게으름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26:14)"
지난 시간에는 게으른 자는 ‘밖에 사자가 있다. 길에 나가면 사자가 자기를 찢을 것이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게으른 자의 특징인 핑계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첫 시간이기 때문에 게으름의 근본적인 원인을 깊이 캐들어 가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고 잘못된 자기 사랑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잠언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의 한 구절을 가지고 게으른 자는 도전이 없는 삶을 되풀이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상적인 것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삶이 게으른 자의 표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돌쩌귀라는 말이 어려운 말일 것입니다. 영어로 hinge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문을 세울 때, 문만 매달면 문이 쓰러지니까 아래와 위에 hinge를 박으면 hinge를 따라서 돌게 되어있습니다. 문이 계속 hinge를 따라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의 기술은 hinge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달려있습니다. hinge 하나를 제대로 놓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바닥을 넓게 부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이 제대로 놓이지 않으면 문이 자꾸 찌그러지고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해서 망가지기 때문에 완전히 수평이 된 상태에서 hinge를 정확하게 제자리에 박되 그 hinge는 문이 폐품처리 될 때까지 문을 붙들고 있을 정도로 든든해야 합니다. 수백만 번을 열고 닫아도 hinge가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 hinge는 결코 문을 놓는 법이 없습니다. 문을 놓으면 그 hinge의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돌쩌귀인데 돌쩌귀가 얼마나 단단히 그 문을 붙들고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돌쩌귀를 달아서 문을 폐품 처리할 때까지 문이 계속 돈다는 것입니다.
문이 그렇게 되는 것처럼 게으른 사람은 겉으로 보면 뭔가 좀 하는 것 같고 움직이는데 침대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침대가 hinge가 되어서 이리 저리 돌아눕고 엎어지기도 하고 구부리기도 하며 움직입니다.
저는 시간을 아끼다보니 운동도 별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제 자신의 건강을 관리해나가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잠입니다. 건강이 상당히 나빠지고 한도를 넘었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한나절까지 잡니다. 좋은 것을 먹고 운동을 해도 소용이 없고 일단은 쉬어야 합니다.
(예화: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수영을 해보려고 했는데 새벽기도 끝나고 바로 다니다 보니 코피가 펑펑 쏟아져서 그만 두었다)
운동이나 몸에 좋은 음식보다 육체에 쉼을 줘야 합니다. 한도가 넘으면 모든 것을 접고 쉽니다. 그렇지 않고 버티면 며칠을 드러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석 달에 한번 정도 그런 때가 있는데 새벽기도만 인도하고 들어가서 피곤이 풀렸다고 느낄 때가지 푹 잡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안 풀리면 이 성경말씀을 재현해야합니다.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매일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면 그 육체의 한계가 매일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게으른 자는 기본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무엇을 쏟아 내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력을 소진하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쏟거나 정열을 불태워서 뭔가를 해야되겠다고 하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 게으르신 분들은 저에게 이렇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제가 게으르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지만 저라고 꿈이 없겠습니까? 목표가 없다니요’ 그런데 그것은 목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사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목표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불태워서 매진하는 실제적인 삶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 그것이 목표지 그렇지 않으면 희망사항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해서 지게를 지고 사는 사람이 너무 힘들어서 리어카를 사려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일하다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 고급 아파트에 고급승용차를 타는 것으로 목표를 다시 바꿨다면 그것은 희망사항입니다. 목표는 구체적인 실천의 계획이 서있고 성취가 가능한 단계가 확정되어있고 그 목표를 생각하면 자신의 삶이 확확 이끌림을 받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illusion을 가지는데는 비용이 안 듭니다. 그러나 목표를 가지는 것은 반드시 비용이 듭니다. illusion은 자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자기가 희생하면서 가기에는 너무 먼길입니다.
(예화: 한국인으로 세계 발레계에 명성을 날리는 사람의 발이 잡지에 나왔는데 인간의 발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바꾸는 목표는 자신의 절제를 요구하고 희생을 요구합니다. 제가 늘 ‘단순한 삶’을 요구하는데 하나님 앞에 단순한 삶을 살지 않고는 충성될 수가 없습니다. 충성된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은 단순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학교밖에 모른다’는 사람에게서 자기의 학문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나오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목표를 향해서 자신의 삶을 재 정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죤 오웬이 말하는 순전한 그리스도인(genuine christian)의 뛰어난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위한 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삶의 모든 것이 그 목표에 적합하도록 재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럽다고 하는 것과 단순하다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노력을 안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오겠다고 하는 것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8시까지 자는 것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자면 8시는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돌쩌귀에 문이 돌 듯이 침상에서 구르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목표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안에 있는 게으름과 나태가 그렇게 시켜서 거기에 종노릇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이처럼 목표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절제하거나 재 정돈하거나 무엇을 쏟아 부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보겠습니다만 “게으른 자의 정욕은 그를 죽이느니라”고 하는데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히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보다 정욕에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속으로 쉽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그렇게 목표가 없으니까 목표가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게으른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머릿속에 게으른 남편, 혹은 학교 갈 때마다 집안이 뒤집히게 볶아야 일어나는 아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침상에서 구르지는 않는다. 그럴 시간도 없다. 나는 이런 설교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 소수는 할 일이 없어서 백수처럼 이렇게 침상에서 구르면서 지내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 새벽기도는 안 나와도 아침 일찍 일어나야 직장에 출근하고 밥 먹고살게끔 짜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라 돌쩌귀를 따라서 돌 듯이 인간도 일정한 틀을 가지고 계속 돕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이 없습니다. 정해진 자신의 일과를 소화해내기에 급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지도 모르면서 문이 돌쩌귀를 따라서 돌 듯이 규칙적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볼 때는 게으른 삶이 아닙니다. 새벽기도는 나올 시간 없이 7시 반에는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 파 짠지가 되어서 여덟 시나 여덟 시 반쯤 퇴근해서 먹는 둥 마는 둥 밥 뜨고 가족들과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웃고 떠들다가 열 한시쯤 되면 피곤에 지친 얼굴로 잠들었다가 그 다음날 아침 또 일어나는 생활이 반복되는 사람을 보고 누가 게으른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상이 없이 계속 도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내면의 세계도 변화가 없이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면서 삽니다.
작은 문은 작게 돕니다. 그러나 큰문은 많이 도니까 얼마나 부지런합니까? 하지만 문이 커서 많이 도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다가 보니까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어느 정도는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왜 사는 지도 모르고 이렇게 살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지도 모르고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에 내 영혼은 안녕한지에 대한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핑계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쁘다는 것도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없이 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바쁘게 사는데 새로운 도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삶도 똑같이 돌쩌귀에 얹혀서 빙빙 도는 일을 되풀이하는 문과 같은 삶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보면 침상에서 구르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제가 일반적인 생활을 이야기했습니다만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서 이야기해봅시다. 누가 여러분들보고 게으르다고 말하겠습니까? 주일이면 아침 일찍 나오니까 안 믿는 가족들이 교회에서 산다고 욕합니다. 완전히 교회에 미친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고 점심 식사 후 구역 모임하고 오후 예배드리고 교구모임하고 계속 반복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세상일처럼 되어서 규칙적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자신의 영혼의 참된 변화, 변화가 없는 것에 대한 고뇌, 변화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변화를 목표로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염려와 근심, 진리를 알고자 하는 최종적인 열심, 그것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 이런 것 없이 계속 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20년 째 도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30년 째 도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태부터 도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살았는데 누가 그 사람을 게으르다고 하겠습니까?
남들은 교회에 미쳤다고 하는데 여러분 정말 예수에 미쳤습니까? 이것이 바로 침상에서 구으는 게으른 자의 삶입니다. ‘죄 죽임의 교리’에서 인간 편에서 여러 가지 의무를 행하므로 죄를 죽일 수도 있고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도 있는데, 그 무엇을 하든지 공통적으로 그렇게 죄죽임을 위해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실천을 할 때에 그것이 무엇이든지 구석구석에 혈관이 퍼지듯이 배어있어야 할 자세가 두 가지 있습니다. 신실함과 부지런함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기면 불안해서 결국 다른 사람을 하나 더 불러서 이중 장치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신실함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는데 안 할 때도 많은 것입니다.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안 할 때가 있어서, 규칙적이면 파악할 수 있는데 불규칙한 것입니다. 그렇게 신실함이 없으면 안됩니다. 새벽기도 하기로 했으면 신실하게 그 약속을 따라서 살려고 하고 주님이 사명을 맡겨주셨으면 보든지 안보든지 변함없이 하는 것이 신실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부지런함입니다. 하기 싫을 때까지만 하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는 것은 참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을 때까지 하고 하기 싫을 때가 오면 목표가 있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참는 것입니다. 그것을 노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설교를 준비하면서 강력한 도전을 받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지속적인 기도와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죄가 깃들 수 없는 틀을 만들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깊이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기도가 되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기도는 하고 싶을 때 대성 통곡 하고, 눈물 씻고는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기간동안 계속하는데 어떻게 인간이 기도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는 힘듭니다. 고도의 영적인 생활을 누리는 사람도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떤 기간 동안은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어떤 기간에는 기도 생활을 안 하는 것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좋을 때는 좋아서 하고 싫어도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르고자 하는 자신을 밀치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직업에서뿐만 아니라 이 성화의 삶에 있어서도 신실함과 부지런함이 성화를 위한 모든 노력에 핏줄처럼 배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머지는 다 살 수 없고 죽는 것입니다. 핏줄처럼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요구되는 자세와 정신이 바로 신실함과 부지런함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에 배어야 합니다.
돌쩌귀를 따라서 문이 도는 것처럼 일정한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사는 것 이상이 없는 사람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입니다. 살수밖에 없는 생활의 여건이 그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마치 엎드러져 있는 사람의 넥타이를 손으로 휘어잡고 끌고 다니듯이 생활이 그를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나면 정말 코피 나게 살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산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일이 많아져서 미친 듯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았고 남들에게 미쳤다 소리 들으면서 교회도 부지런히 오갔는데 진짜 미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칠 정도로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표가 없고 삶에 끌려 다니니까 삶 자체가 굉장히 피곤한 것입니다. 타율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든 의무 이상을 안 하려고 하는 자세가 몸에 배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게으른 본성을 거슬려야 하는 성화의 노력에 있어서 형식적인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아’하고 발견해도 그 이상 진전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머리 속에서 잊혀지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계속 살아있으면 자신의 양심을 찌르고 자기가 뭔가를 해야 하니까, 마음을 드리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새벽기도’ 책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 안 하셨습니까? 인도하는 사람 가운데에서 새벽기도 안 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새벽기도도 안 하면서 이것을 가르쳐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배우면서도 ‘새벽기도를 내가 할 수 있는데 빤질거리는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렇게 고민하기 시작하면, 남이 보기에는 부지런히 신앙 생활하는 것 같아도 자신이 지금 침상에서 구르는 것처럼 목표가 없는 규칙적인 일상적인 삶을 고단하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고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도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슴 저미도록 매달려야할 기도가 안나옵니다. 왜냐하면 그러려면 성취되지 않은 미완의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얻고 싶어서 매달려야 할 것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삶을 계속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늘 말하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성화를 위한 모든 노력 속에 배어야할 거듭난 성품으로서의 신실함과 부지런함이 아니라 타고난 성실성과 쇠심줄 같이 질긴 근성의 토대로 자기의 육을 중심으로 한 삶을 계속 반복하고 그 형식을 깨트리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삶이 전부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영적으로 게으른 삶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늘 반짝이는 거울과 같습니다. 닦아내면서 그 마음을 통해서 다시 자기를 비추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는 별다른 것이 아니고 늘 일상적인 일을 한다 해도 어느 순간 고민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겨도 되는가. 이것은 아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나’ 그런데 이런 괴로움이 조금만 있어도 다 집어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면서 고민해야합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되면서 영혼의 고뇌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런 자세로 가슴에 부딪히는 고뇌를 가지고 ‘삶은 이렇게 살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앞에 더 영광 돌리는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한번밖에 없는 이 인생을 허무하게 살지 않고 정말 주님의 이름을 빛내고 살 수 있을 것인가’하며 계속 고민하며 살아갈 때 그 삶은 침상에 구으르는 것 같은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삶이 돌쩌귀를 따라서 문이 도는 것 같은 삶일지 모르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 계속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여러분들의 환경에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생활 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40이나 50이 되어서 아이들과 가정도 거느립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영적으로 고뇌가 많고 괴로워하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겠습니까? 한 아내의 남편에서 이탈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식들의 한 아버지인 자리를 바꾸겠습니까? 물론 은혜 받고 4-50이 넘어서 선교사 되고 목사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고뇌를 하여도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갑자기 열린 교회를 떠나겠습니까? 그러니 남들 보기에는 형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괴로워하면서 자기 분투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 사람은 죽은 자의 삶이고 한 사람은 산 자의 삶입니다. 그 차이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전자의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은 정말 모욕을 받고 계시는 것이라면 후자의 사람을 통해서는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 우선 순위를 따라서 자신의 삶이 재편되어야 합니다. 환경은 우리를 영원히 도와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극복하고 싸우면서 이겨야 할 상대가 바로 환경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육적인 게으름도 문제지만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신앙적인 게으름입니다. 육적인 게으름은 자기 개인에게만 해를 끼칩니다. 돈 못 버니까 굶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밥을 벌어먹기 위해서 사기를 칠 경우에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만 어떻든 자기 개인의 문제에 그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게으르게 되면 먼저 자기 영혼이 죽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트려집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그릇된 모본을 보면서 신앙 생활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을 넘어트립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도전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뜻 없이 되풀이되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그것은 부지런한 삶이 아닙니다. 그 삶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침상을 구으르는 삶일 수 있고 돌쩌귀를 따라서 부지런히 돌아가는 문과 같은 삶일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여러분의 삶의 질을 새롭게 하고 변화되도록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게으름의 발전 : 정욕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21:25)”
성경의 진리는 마치 보석과 같아서 어둠 속에서 볼 때에는 그저 유리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햇빛에 비춰보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보석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할 때 진리를 보면 그저 무미 건조한 말씀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알갱이 속에 또 다른 진리의 빛이 들어와서 우리들이 파악하고자 하는 진리를 비춰줄 때에 우리는 뜻밖에도 그저 굴러다니는 구슬과 같았던 그 보잘것없는 말씀 속에서 그토록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지만 이 게으름에 관한 잠언의 많은 교훈들을 보면서 저는 그렇게 햇빛 아래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오색 영롱한 무지갯빛을 뿜어내는 보석과 같은 작용을 경험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잠언의 말씀을 통해서 실제로 게으르지 않아도 일에 허덕이면서 부지런한 삶이 영적으로 보면 게으른 삶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문이 돌쩌귀 위에서 계속 돌아가는 성경의 비유적 표현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입니다. 정말 우리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많은 생활인들을 보고 게으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삶이고 그렇게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자기의 영혼을 거의 돌아보지 않고 내팽개쳐둔 삶을 우리들이 얼마든지 보게되고 그런 게으름들은 결국은 자기 영혼에 심각한 질병들을 가져오고 급기야는 치명적인 질병을 가져와서 자기 자신의 질병을 어디서부터 손대야할 지 모르는 만신창이 된 상태를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이 경각심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벌어먹고 살고, 또 그렇게만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니 이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이렇게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영적으로도 그렇게 부지런한지를 점검해서 자신의 영혼도 열심히 돌보고 간수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화: 여성들이 다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화장하는 시간은 1시간 정도 걸린다-1년이 면 365시간이고 하루 8시간 근무한다면 40일이 넘는 시간이다. 10년이면 휴일 빼고 1년 반 을 근무한 정도의 시간이다. 50년이면 7년 반을 근무한 시간과 맘먹는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하나님 앞에 하루를 단정하게 맞이하고 하루를 넉넉히 비교적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의 하루를 살 채비를 갖추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요? 사람마다 대답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적은 시간으로도 많은 충전을 받을 수 있지만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욕구가 그만큼 많기 때문에 겨우 하루를 버틸 정도 가지고는 만족이 안되고 하루를 제압하고 살아갈 정도로 완전무장하기 전에는 불안해서 하루를 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영적으로 부실한 사람들은 과거의 부실한 건강까지 회복하려니까 그 위에 힘이 넘쳐서 하루를 맞이하려면 또 시간이 걸리고, 시간차야 각각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시간을 투자하고 실제로 자신의 영혼의 재충전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만은 우리들이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 없이 일의 노예가 되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허덕거리고 인생의 보람이나 목표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도 없이,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든지 자기의 영혼을 돌아본다든지 하는 일없이, 땡 하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직장으로 뛰고 땡 하면 돌아와서 세수하고 밥 먹고 파자마 바람으로 쓰러져서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엎어져서 자고 다시 아침에 일어나는 식의 삶을 사는 것은 거의 동물수준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아주 중대한 죄악입니다. 어떻게 얻은 구원인데 그렇게 살다가 죽겠습니까?
그런 삶을 살다가 죽으면 누구도 게으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생애입니까? 자기 벌어먹기 위해서 열심히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묘비에는 ‘밤이나 낮이나 밥 벌어먹고 살다가 죽었다’라고 써야 합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사는 야생동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살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내 자신의 영혼에 어떤 도전을 주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하루를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충전시켜주는 은혜 생활을 위해서 더 이상 노력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 더 이상 노력할 의지가 없다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이 중대한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고 두 번째는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재충전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욕구를 육체의 요구로 채우느라고 여력이 없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으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결단하면서 선택하는 것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의 생애를 돌아보면 이점에 있어서 뜻밖의 결론을 얻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 생활 열심히 하고 영적인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자기가 깨트려지고 보다 높은 신앙과 성화의 목표를 향해서 발돋음을 하며 영적인 의욕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던 충만한 은혜를 누리던 때가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한 때였느냐고 물으면, 결코 아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저 자신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러면 핑계 밖에는 늘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만해도 너무 힘든데’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의 영적인 변화의 이력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까 오히려 이렇게 한가하고 기도할 시간이 충분히 많아서 은혜를 많이 누릴 때보다는 바쁜 상황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단 30분이라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서 안달을 하다가 그런 소중한 시간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간구하며 사는 동안에 영적인 부요함을 누렸던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만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동일한 경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영적인 자신의 삶을 위해서 실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죽이는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계속 유지되어야 할 두 가지 삶의 자세가 있는데 그것이 성실함과 부지런함입니다. ‘바빠서’ ‘너무 고달파서’하는데 그래도 안 죽고 살았지 않습니까? 병원에 누었습니까? 과로사로 쓰러졌습니까? 쓰러지기 직전이라구요? 그렇다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건강을 안고 그 직업을 계속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순교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실천이 필요합니다. 듣고,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는 데에는 딴 생각만 안하고 정신 차리고 똑바로 앉아서 듣기만 하면 그런 은혜를 주십니다.
(예화: 집회를 갔는데 한 자매가 설교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깊이 은혜를 받았다-설교 첫 시간 에 반감이 생겨서 노려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자기 속에서 누리고 유지하는 것은 부지런한 자기 희생과 성실한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을 사느라고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첨될 확률이 1년에 벼락 16번 맞을 확률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살아갈 때에도 대박을 꿈꿉니다. 잠깐 속이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것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은혜의 세계에서도 똑같습니다. 자기는 죄를 죽이고 주님이 주신 은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실체인 게으름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기 부인의 틀 속에 넣어서 끊임없이 그것을 부정하고 부인하면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아서 주님이 주신 은혜들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주님이 주신 회심들을 보전하고 살아갈 생각을 해야하는데 게을러서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어느 한순간에 단번에 끝나는 대박과 같은 영혼의 변화를 마음에 소원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만히 누워있으면 살빠지는 기계가 없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희생과 고통 없이 단번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 ‘내가 천국을 보고 왔는데’ 하면서 생의 절망에 빠진 사람, 사업에 망한 사람, 병 걸린 사람, 직장에서 잘린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광고하는 것에 현혹되어서 그런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표어를 그렇게 내걸었어도 개중에는 건전한 집회들도 있겠지만 자기를 끊임없이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매일매일 기도하기를 힘쓰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쓰고 성경을 배우고 그 속에서 은혜 아래서 사는 법을 터득하려는 노력은 안하고 어느 한순간 ‘주여 믿싸오니’하며 감사 헌금 봉투 하나 들고 가서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미친 듯이 거기에 매달리면 불을 받아서 자신의 이제껏 까지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기쁨이 넘칠 것이라는 해괴 망측한 생각을 아직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게으름이 결국은 자기 사랑입니다. 오늘은 그 게으름이 좀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관심은 상반절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했습니다. 게으름의 시작은 자기 사랑의 소극적 표현입니다. 어떠어떠한 일과 그 의무가 자기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게으른 마음이고, 그 마음이 삶에 반영된 것이 게으른 삶이고, 그러한 삶과 마음이 자기화된 사람이 바로 게으른 사람입니다. 인격적 특징이 게으름이 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의무가 없는 곳에서는 그 사람의 게으름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에 있는 산에 가서 왜 김을 안 맸느냐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김씨네 밭에 난 잡초를 보고 박씨에게 가서 ‘얼마나 게으르면 남의 집의 풀도 안 뽑느냐’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의무가 확인되는 곳에 그 사람의 게으름도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게으름의 기초 자체는 자기 사랑인데 처음 출발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같이 그렇게 사악하게 출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출발은 자기 사랑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속에 배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의무를 행하게 하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게 하지 않거나 혹은 그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무를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서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하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단계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의 시작입니다.
(예화: 대충대충하는 사람을 처삼촌 산소 벌초하듯 한다고 한다-벌초는 먼저 잔디가 아닌 것들을 뽑아내고나서 잔디를 깍아주는 것인데 처의 삼촌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렇게 꼼꼼 이 하겠는가 )
게으름의 시작은 최선을 다해야 될 것을, 하기는 하는데 충실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힘드니까’입니다. 최선을 다할 이유는 많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으까’ ‘사랑 받았으니까’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사니까’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나의 존재가 도움이 되니까’ ‘그래야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니까’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나 안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안 하면 좋은 결과가 오니?’ ‘안 하면 네 영혼에 도움이 되니?’ ‘그렇게 안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어?’물을 때 ‘아니’라고 대답할 수박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안 하느냐’고 물으면 ‘싫으니까’ ‘힘드니까’라고 말합니다. 온 우주와 사고의 중심에 자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이 절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영혼에 변화가 오면 이 게으름을 못 견뎌 합니다.
(예화: 신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의 게으름을 봐도 분노가 일었다.)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처음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명령을 하셔도 좋으니까 그 보좌에 앉으셔서 홀을 흔드시면서 명령하시지만 말고 좀 내려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이 사악한 자아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완전히 퇴위시키기 전까지는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 보좌에 오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화: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인 이야기-아무 힘이 없는 단종이지만 죽여야만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에 관해서도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올라가고자 하는 자기 중심적인 죄성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게으름 시리즈를 하겠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이 웃으셨는데 여러분들이 게으름의 죄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름의 입장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말라’ ‘인류 역사 이래로 죄가 우리를 사용해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파괴했는데, 너희가 지금 우리 알기를 발톱에 낀 때같이 아는데, 너희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나의 노예가 돼있다’고 합니다.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은 코피 나는 부지런한 생활 속에서 게으름의 노예가 되고, 진자 게으른 사람들은 그 게으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영향력을 신자의 삶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칼을 들고 왕실에 뛰어들어서 왕을 살해하려고 하는 자객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왕의 음식에 독을 넣어서 죽인 역사적 사례가 동 서양에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살인과 간음과 거짓말과 배교 같은 것들은 큰 칼 들고 덤벼드는 적이라면 게으름은 서서히 우리의 삶에 독을 타서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먹으면서 서서히 우리를 고사시키는 죄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 자체는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두 번째 단계가 그 의무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언젠가는 그만 두게 됩니다. 내용이 없으면 잠시 후 그 형식도 지탱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형식에 심각한 변형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자기 사랑은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다가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거 꼭 해야 되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노력해서 은혜의 삶을 살고 이렇게 죄를 이기고 이렇게 실천을 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라’ 할 때 상당수의 교인들은 ‘저렇게 어려워서 신앙생활 어떻게 하나. 저것은 교회에서 월급 받고 사는 사람 수준이지 나는 아마추어인데’할 것입니다.
저는 목사라는 의식 속에서 살 때보다는 신자라는 의식 속에서 살 때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본분을 망각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본분에 대한 인식 없이 성직에 대한 인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중 만나면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분법적으로 나누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전부 카톨릭 문화의 유산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가르치는 계급이 있고 배우는 계급이 있어서 이 둘 사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속에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뛰어오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교인은 열심히 가르치고 듣는 교인은 열심히 들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를 그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한 자녀로서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한 머리에 붙어있는 지체들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목사가 이래서 되겠는가’하는 고민을 많이 해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수준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명색이 신자인데 이렇게 해서 되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세상이 이렇게 형편없이 배교를 향해서 치닫는 시대에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우리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발전된 것이 그런 은혜들을 수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속삭임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은혜 받았을 때는 그런 비교 의식 때문에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나면 아무 것도 없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 사랑을 받는 자기와의 절대적인 관계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한데 옆에 형편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 받는 것을 보고 시기가 나서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줄 알았더니 하루도 되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다니’하는 생각이 듭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입니다. 그 사랑으로 절대적인 만족을 누리기 때문에 사람에게 받는 것이나 하나님에게 받는 모든 것들이 기쁨의 대상이지 시기의 대상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원리가 여기에 적용됩니다. 신앙이 충만할 때는 다른 사람이 상관없습니다. 궁금한 것은 ‘성경이 나에게 어떤 신자가 되라고 말하는가’ 또 경험적으로 볼 때 ‘내가 어떻게 순종하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나, 어떻게 행할 때 주님이 나를 가슴 아파하시나’ 이것들이 나침반이 되어서 나의 양심과 신앙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안 한다고 ‘아무도 안 하네. 나도 하지 말아야지’하는 것은 처음부터 신앙에서 출발된 행함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많이 그런 사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고 하는 아주 좋은 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에 대해서 전달을 받으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자기 중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든 게으름은 자기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의무를 저버리도록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하는 척 하고 흉내를 내는 것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힘들기 때문에 더 쉬운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의무를 온전히 저버리고 정말 편안한 삶이 되었다고 합시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비양심적이 되도록 노력해서 마음을 완고하게 한 결과 양심의 자극을 더 이상 받지 않는, 나쁜 의미에서 안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먹고 그 의무를 기피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괴롭지 않습니다. 영육 간에 그야말로 괴롭히는 것이 없고 귀찮게 하는 의무가 없는 편안한 삶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거기에서 만족을 할까요? 절대 아닙니다. 소극적인 목표는 완성된 것입니다. 해야할 선하고 마땅한 의무를 위해서 수고하기 싫다고 하는 소극적 욕구는 만족되었는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 욕구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즐겁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게으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신성한 의무를 저버림으로서 살아있는 신자가 되기를 포기한 지경에 이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자기를 즐겁게 해달라는 요구가 거의 대부분 죄를 짓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는 즐거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욕구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타락한 인간 속에서 나오는 욕구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 속에 가지고 있는 욕구가 숙명적으로 모든 사람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욕구들을 누르고 다른 은혜의 질서들이 자기 안에 생겨나게 되면 타락한 본성의 욕구보다 더 강력한 욕구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 죤 오웬은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람의 행동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욕구를 살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예화: 콜롬비아 우주선이 타버린 이야기-무중력 상태에서 저항 없이 시속 2만 8천 킬로를 날아가 던 물체가 대기 중으로 들어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1670도 정도의 불이 난다고 한다)
이렇게 우주선이 터져 버린 것을 보면서 정상적인 사람들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남겨진 가족들과 손을 흔들고 떠나던 그 우주 비행사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 보도를 듣는 순간 차를 몰고 달려가서 그 조각들을 주워 모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올려서 팔면 돈을 억수로 벌겠구나’만 생각하고 만지면 위험한 그 물질들을 모아서 폭발된 지 2시간도 안 돼서 인터넷에 떴다고 합니다. 죽을 때 자신의 몸을 기증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숭고한 뜻입니까? 자기 몸을 기증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위험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잘라 판 이야기가 신문에 났었습니다. 동일한 한 가지를 보면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느끼는 것이 완전히 다르고 관심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들은 그렇게 의무를 저버린 정도에 만족치 않고 서서히 고개를 들면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런 솟아나는 욕구라고 하는 것들은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직접적으로 죄를 짓거나 죄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만족들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게으름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기 바랍니다.
밭에 좋은 씨앗을 심어놓고 하루나 이틀 정도 김을 안매줄 때에는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1-2주일 내버려두고 아예 한달 정도 내버려두면 곡식 거두기를 포기한 밭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로 거기에서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버립니다.
그런 정욕들이 계속 솟아나서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의무로부터 완전히 자기를 거두어버리는 소극적인 편안함 추구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무엇인가 악을 행해서라도 자기를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욕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에는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만 하지 않으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걸음 더 진전해서 무엇인가 죄를 지어서라도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실은 후자의 욕구가 전자의 욕구보다 훨씬 강한 것입니다. 힘든 십자가를 지면서 너무 힘들다고 느끼는 괴로움보다는 정욕이 속에서 불타오르는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것과 격리되어있는 상태에서 그 죄에 접근하지 못할 때에 느끼는 안타까움은 더 격렬하고 신자로 하여금 견디기 힘든 교통을 겪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마치 몇 일 굶은 사자 앞에 시뻘건 살코기를 두고 유리로 막아놓았다면 그 사자가 어떻겠습니까? 미칠 것입니다. 단지 사냥감을 얻기 위해서 몇 일 뛰어 다니는 것보다는 그것을 보면서 자기의 욕구를 채우지 못해서 안달복달하며 견뎌야 하는 것이 훨씬 더 사자에게 힘들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가 되면 ‘죄와 은혜의 교리’맥락에서 보면 죄가 완전히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마지막 가고 싶어하는 것이 그렇게 발전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죄에 계획이 있듯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게으름도 그런 계획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퇴치하는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루하루 죄를 이기기 위해서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써서 노력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삶이 사실은 그러한 정욕으로까지 발전해서 자기를 파멸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처치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인력시장에 가서 흙이라도 푸고 짐이라도 나르면서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 8만원을 쥐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미래가 있나’등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무거울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조금 나아지면 장사라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보면 얼마나 고달픈 삶입니까? 하루도 마음놓고 편히 쉴 수가 없는 끊임없는 노동에 종사하고 자신의 삶의 계획을 짜고 헌신을 요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지막에 오갈 데 없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서 인간 대접을 못 받으면서 빌어먹고 살기 위해서 애쓰는 그 비굴함이 가져다주는 어려움보다는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은 ‘게으른 자의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신앙적인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여러분은 그 의무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여러분들은 전에는 자신에게 없는 줄 알았던 수많은 정욕과 더러운 욕심과 꿈틀거리는 욕망들이 벌떼처럼 살아서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욕구를 채워달라고 데모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이 승리한다는 자신이 있습니까? 그 때 여러분들이 생사를 걸고 싸워서 이기겠다는 결심이 있으면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 안에 그런 원수들을 젖먹이고 밥 주고 길러서 장성하게 만든 다음에 생명을 걸고 한판을 벌이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런 독사의 새끼들을 우리 속에서 길러야 합니까? 끝이 뻔하게 보이는 게으름과의 타협을 우리들이 언제까지 계속하면서 ‘내일’ ‘다음주일’ ‘내년에’ ‘형편이 나아지면’ ‘좀더 희생을 적게 치르고’ ‘쉽게 순종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하는 상투적인 수법에 넘어가면서 자기 안에서 언젠가는 처리해야할 이 끔찍한 독사의 새끼들을 키우고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들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온유한 진리를 터득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에 눈물을 흘리면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땀 흘리고 자기를 쏟아 붇는 실천이 없이 우리들이 정말 죄의 지배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그 회심의 감격을 우리들이 은혜 가운데 보존하며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할 말이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보면 늘 늦게 가서 야단맞고 몇 달에 한번씩 시말서 쓰고 하는 사람들은 회의를 해도 할 얘기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있어야 합니다. 발언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장을 위해서도 아침 일찍 출근하고 직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자기 몫을 감당하고 희생하고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을 할 때도 적극적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며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빛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두 눈이 영롱하게 반짝반짝 빛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삶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게으름은 우리를 정욕까지 데려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 안에 그런 독사의 새끼들을 길러야 합니까? 천사의 말을 듣고 복음의 비밀을 터득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땀 흘리는 부지런함, 자기를 꺾는 철저한 삶, 실천하고자 하는 진지한 몸부림, 그렇게 살 때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에 눈물과 진액이 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와줄 정도로 힘을 쏟고 산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어땠습니까?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뚝뚝 떨어지면서 자기를 다 소진하시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의 기도를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항상 이 게으름이 죄의 강력한 요구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는 강력한 적군의 역할을 도왔습니다. 우리들이 이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 게으름과 야합하려는 자기 자신을 엄중하게 경고해야합니다. 오늘 집에 가서 거울을 보면서 ‘경고하는데 똑바로 살아라’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게으름과 타협하고 싶을 때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짧은 생애의 그 족적 속에서 우리들이 게으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의무에 태만하거나 그 의무를 완전히 저버리거나 그래서 결국은 정욕에 사로잡혀서 패배한 우리 주님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고 말씀 한마디로 귀신이 쫓겨나가고 죽은 자가 일어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지만 예수님은 한번도 그 권능을 의지하면서 우리를 섬기신 적이 없습니다. 그 권능들은 주님이 주신 것들이고 그분은 매 순간 하나님 의지하며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죄는 없으신 분이었지만 그러나 얼마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을 함께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분도 여기 저기 다니면서 복음 전하는 것보다는 쉬시는 것이 그분의 육신에는 더 편했고 밤늦도록 병자를 고치고 핍박과 모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대와 영광과 칭송을 받으시면서 안전한 환경에 계신 것이 그분의 육신에도 훨씬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 한 당신이 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다른 동네로 가자 우리가 이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노라”하시며 전도하러 다니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최선을 다해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일생을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목회자에 의해서 정말 강하게 볶인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눈을 들어서 이 세상을 보십시오. 정말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애통하시던 그 모습들이 여러분들에게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가려져 있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 진리에 순종해서 살지 않으려고 하고 또 순종할 욕구를 가진 사람 중 상당수는 그렇게 순종할 힘이 없어서 죄와 나태에 휘둘리면서 사는 이 어두운 세상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들이 어떻게 일생을 살아야겠으며 정말 우리들이 이 배교적인 신앙이 만연해있는 이 때에 진리의 빛을 받은 자로서 어던 살아있는 동안 이 진리에 빚진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고통하고 참 신앙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 자신이 먼저 그 진리의 복음을 누리고 그 말씀 아래 풍요함을 친히 경험하면서 살지 않고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한번도 당신 믿고 따르는 제자의 길을 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항상 ‘믿음의 길’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죽을 각오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사충성을 말했고 일사각오의 신앙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볼 때 여러분들의 게으른 신앙생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자기를 다 소진시킨 나머지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조금도 헌신할 수 없게끔 굳어져버린 그 게으름을 보면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여러분들을 구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예수님 생각하면서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 생각하면서 이기고 예수님 생각하면서 참고 하나님 많이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하면 하나님이 날마다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정말 고달프게 직장 생활하는 형제가 있었는데 제가 기도 생활 좀 하라고 했더니 ‘목사님, 여기에서 제가 새벽에까지 일어나면 저는 쓰러집니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고 뜻을 세운 것 같아서 그냥 그 말만 하고 해어졌는데 그 형제가 집에 갔는데 ‘제발 기도 좀 해라’고 한 제 얘기가 계속 맴돌더랍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견딜 수 없어서 새벽 기도를 나오기 시작해서 계속 기도를 했는데 그가 나중에 간증하기를 ‘목사님 말씀에 순종할 의지는 전혀 없었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힘들 것이라고 하는 것만 알았지 그 힘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새 힘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계산에 넣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산술적인 계산을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뛰어넘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할 때 반드시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이 수학적으로 보장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이렇게 하면 분명히 손해인데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근거를 대라고 하면 할 말 없으니 ‘두고 봐’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깊이 터득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신앙의 길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성경책의 모서리가 왜 빨갛게 되어있는지 아십니까? 순교자들의 피가 묻혀서 전달되어진 복음입니다. 날마다 자기와 싸워서 흘리는 피, 날마다 죄와 싸워 이기는 피, 그리고 그 이김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이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들에게 내릴 수 있는 한가지 중요한 결론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게으름을 버리고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살아가는 매일 일의 삶을 위해서 지불해야 할 고통과 인내가 아무리 쓴 것처럼 여겨져도 게으르게 살다가 마지막에 정욕에 삼킨 바 되어서 지불해야 할 영혼의 그 무지무지한 고통과 죄의 피해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장 쉬운 일입니다. 부지런히 열심히 품고 모든 일에서 그 게으름을 마치 아주 더러운 벌레처럼 끔찍이 미워하며 거룩에 이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게으른 자의 선택과 결과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15:19上)”
지난 시간에는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게으름은 출발 자체가 삐뚤어진 자기 사랑이기 때문에 그 자기 사랑의 욕구는 처음에는 적극적인 명령을 소극적으로 안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심령이 죄에 지배될수록 내면의 욕구는 보다 적극적인 즐거움을 자기에게 제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게으르던 사람이 자기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지런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으름은 평생 우리들이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 게으름의 심각성이 원망의 심각성과 비슷합니다.
여러분들이 게을렀던 것에 대해서 정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해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영적으로 매우 뛰어나신 분도 그런 죄를 깊이 인식하면서 가슴 아파하며 회개한 적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죄가 위험한 것입니다. 경계 받지 않는 죄가 위험한 것입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깁니다. 말씀은 짧은데 굉장히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말이 안됩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대구법인데 대구법의 원칙에 전혀 안 맞습니다. 게으른 자가 나왔으면 부지런한 자가 나와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야사르’는 똑바른 것입니다. 이런 병행법을 적용하는데 이미 해석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이 두 개가 나오는데 히브리어로는 서로 틀립니다. ‘게으른 자의 길’에서의 ‘길’은 히브리말로 ‘데레크’라는 단어이고 ‘정직한 자의 길’에서의 ‘길’은 ‘오라크’라는 단어인데 ‘데레크’는 정식으로 난 길입니다. ‘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라크’는 ‘통행로’입니다. ‘데레크’가 영어의 ‘way’라고 한다면 ‘오라크’는 영어의 ‘path’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대로’는 ‘쎌룰라’라는 단어인데 ‘쌀랄’에서 나왔습니다. ‘쌀랄’은 ‘높이다’는 의미로 학자들이 추정하기로는 창세기의 야곱이 보았다고 하는 사닥다리-하늘까지 맞닿아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는-에서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요즘도 길이 많지만 다 다르듯이 왕이나 다니는 10차선 정도 되는 길이 하늘까지 닿아 있는 ‘하이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리다’는 의미의 ‘쌀랄’이라는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시편이나 잠언과 같은 시가서에서는 ‘쌀랄’이라는 단어가 ‘길을 내다’는 동사로 사용됩니다. ‘쎌룰라’는 수동분사 여성형으로 누군가가 치켜들어서 하늘로 길을 냈는데 그렇게 길 냄을 당해서 만들어진 대로의 의미입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큰길이고 정식 도로라서 한참 걸어갔더니 가시 울타리가 나온 것입니다. 올곧은 자의 길은 처음에는 통행로 같이 작은 길인데 조금 들어가 보니 하늘에 맞닿아 있는 것 같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짐을 당한 곧게 뻗은 길이 하늘을 향해서 나있는 것입니다. 묘사가 정말 그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아서 친구도 많고 사람들이 빽빽하게 걸어가는데 좁은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은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다 걸어가고 나면 그 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늘과 맞닿아서 천국으로 가는 길이고 넓은 길은 처음에는 그럴 듯해서 들어갔는데 가고 나면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낭떠러지와 심판 받는 곳이 나오는 길입니다. 지금 말씀 드린 것을 기록하면 한 페이지의 기록으로도 다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 속에 이렇게 기가 막히게 압축이 되어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풀어보자면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고’했는데 ‘게으른 자의 길이 가시 울타리이다’가 아니라 ‘가시 울타리 같다’고 했습니다. 가시 울타리를 보신 적 있습니까? 철조망을 쌓아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자의 넓은 길은 가시 울타리를 쳐 놓은 것과 같고’입니다. 해석을 하자면 ‘게으른 자의 들어서는 그 길은 처음에는 큰길이지만 가고 보면 그의 인생 길은 가시 밭 길과 같고, 정직한 자(올바른 자)의 길은 처음에는 작은 통행로 같지만 한참 걸어가면 그 길은 누군가에 의해서 하늘에까지 닿도록 만들어진 하이웨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으른 자들의 삶의 선택은 눈에 보기 좋고 쉽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인생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데레크’라는 말은 인생 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게으른 사람에게는 특별히 자신을 사로잡을 가치가 있는 꿈이 없습니다 꿈이 있어도 그 추상적인 꿈을 실현할 구체적인 생활의 목표가 서있지 않은 사람의 꿈은 그야말로 드림일 뿐입니다. 그 드림이 단지 드림이 아니라 비젼이 된 사람들의 특징은 그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소 목표들이 설정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거기를 향해서 자신을 매진하는 것입니다.
(예화: 시집 좀 보내달라고 말하는 자매들이 있다. 세 가지만 약속하자고 말하는데 신앙생활을 열 심히 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늘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할 것, 세 번째는 화장을 잘하고 옷을 잘 입고 다니면 시집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그 약속은 몇 일 안 가서 못 지킨다)
그런 사람에게는 좋은 형제를 만나서 내년쯤 결혼해야겠다고 하는 것이 ‘드림’입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겠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어느 한 순간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는데 참된 신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소년이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일평생을 살다가, 비록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과 찬란한 명성은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깊이 존경을 받았던 것처럼 ‘내가 마지막에 그런 성도가 되고 싶다’는 그리움이 생겼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목사님 말씀대로 제가 참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합니다. 사람들이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한참 생각하다 ‘나는 참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저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찬 놀랍구나’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도 없어서 다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분위기에서는 그 대답니 멋있으니까 말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향수 속에 그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색동 옷 입고 돌아 가고파’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데 그냥 그립다는 것이지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미 남쪽 바다는 흙을 부어서 다 메워버렸고 파란 물은 누렇게 변했고 색동옷 입은 사람도 없고 친구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는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으니까 그것은 영원히 ‘비전’이 아니라 그냥 ‘드림’으로 남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정말 목적이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금년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군사학에서 전쟁을 치를 때 대 목표가 있고 소 목표가 있습니다. 소 목표는 반드시 대 목표를 성취하는데 기여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전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런 대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갑자기 엉뚱한 데다가 대포를 쏜다면 그 폭격이 그 전쟁의 목표에 기여하지 못한 것입니다. 작은 목표가 반드시 큰 목표를 성취하는데 기여해야 하는데, 그것이 ‘드림’과 ‘비전’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게으른 자는 꿈은 꿉니다. 그런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삶의 목표, 구체적인 이 달의 목표, 구체적인 오늘의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드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꿈꾸는 것은 힘이 안 듭니다. 그리고 꿈꾸는 것은 즐겁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금년에는 내가 최소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만큼 공부해야겠다’ ‘시리즈 몇 개는 터득해야겠다’ ‘이 달 안에 죄와 은혜의 지배 교리 시리즈를 독학을 해서 내 영혼의 상태를 스스로 판단하고 죄의 유혹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야겠다’ ‘금주의 목표는 최소한 테이프 두 개는 듣고 시험에 관한 책을 읽어야겠다’ ‘오늘의 목표는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이런 나의 계획에 은혜를 주시도록 열렬히 기도해야겠다’식의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물 흘리고 땀을 흘려야만 성취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꿈을 꾸는 것은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는 우리에게 땀을 흘리라고 요구하고 눈물을 흘리라고 요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를 쏟으라고 요구합니다. 게으른 사람이 그것을 왜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핑계 대는 것이 ‘밖에 사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힘드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설득하면 여러 가지로 변명하지만 그의 속내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힘 안 드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격적 용어로 말하면 ‘나의 하나님은 내 배다’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저희의 신은 저희의 배요”하는데 그 배는 창자입니다. 히브리 사유의 문맥에 있던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희 하나님은 저희가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은 말에 있어서는 논리가 있을 지 모르지만 삶을 모두 엮어서 그 사람이 논리적인지 보면 무대보입니다. 꿈을 가졌으면 목표를 세워야 하는데 ‘힘드니까’하며 목표를 안 세웁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하면 ‘싫다니까’하며 자기만을 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게으름의 정체입니다.
그런 길을 걸어가면 처음에는 쉽습니다. 오늘 이렇게 자극을 받고 돌아가도 내일이면 또 새벽기도 안나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너무 멀다느니, 근처에 교회가 없다느니, 교파가 다르다느니...... 하는데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자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몸이 약하면 더 쉬고 더 자야 합니다. 그런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잠도 덜 자고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많이 자는 것은 죄 짓는 것입니다. 물론 잠자는 시간에 죄를 짓는 것보다는 자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과 눈감고 자는 것 사이의 격차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화: 대학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건강하면서 6시간 이상 자는 것은 범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러면 안되겠다’고 하며 ‘하나님 부지런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하고 간다면 그것이 뭡니까?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일 새벽 기도를 나오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어떤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잠을 좀 줄이고 할 테니까 건강을 주십시오’ ‘쓸데없는 데 시간을 많이 낭비했는데 그런 것을 버릴 테니 도와주십시오’하며 기도해야지 아무 목표도 없이 ‘부지런히 살고 싶으니 도와주세요’하면 일주일 살고 나도 구체적인 목표가 없으니까 도와주셨는지 안 도와주셨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를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살았다면 어디가 게으르게 살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잠이 너무 많습니다’ ‘쓸데없는 바보 상자에 앉아서 시간을 한없이 보냈습니다’ ‘영적인 유익이 전혀 안 되는 책을 붙들고 독서랍시고 했습니다’아니면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땀흘리면서 살았는데 문이 돌쩌귀에서 돌 듯이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살았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게을렀다고 말할 수 없는데 영적으로는 게을렀습니다’하며 자기의 게으름을 파악하고 어떻게 그런 게으름을 단절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고 ‘제가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도와주십시오’하며 일주일을 살면 하나님이 도와주셨는지 안 도와주셨는지 자기가 했는지 안 했는지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회개도 분명할 것입니다. 회복도 분명하고 어느 길은 가지 않아야 하고 어느 길은 가야 할 지 선명해질 것 아닙니까? 그래야 성화에 진전이 있지 흐리멍덩해서 막연하게 ‘부지런히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꼭 그렇게 해주셔야 해요’하며 눈물 찔끔찔끔 흘리고 돌아가서 텔레비전 한편 보고 나면 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주일 예배 시작하며 ‘부담되는 게으름 시리즈 시작하겠습니다’ 하면 ‘아참’한다면 그런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불결한 삶입니다. 돼지가 씻었던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고 개가 토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삶을 반복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안 고치고 게으름에 관한 시리즈의 몇 번까지 감동을 받는지 한번 실험해볼까요? 금년 50주 동안 게으름 시리즈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을 바꾸지 않고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계속 도전이 되고 집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삶이 그 말씀에 부응하지 않으면 말씀의 미각이 상실되게 되어있습니다. 삶의 미끄러짐, 마음의 미끄러짐이 결국은 말씀의 미각에서 그를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삶을 고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시리즈를 계속 들으면서 결국은 그 말씀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결단을 해야 합니다. 게을렀던 것을 회개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게을렀는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고쳐야겠다는 구체적인 작정을 하고 가십시오. 그래야 성화의 진전이 있습니다. ‘요새 신앙생활이 어떻느냐’고 질문할 때 ‘요즘 게으름 시리즈에 너무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고 하는데 ‘무엇이 변했느냐’고 하면 ‘모르지만 오후예배 때마다 너무 은혜가 된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게으른 자는 넓은 길을 택합니다. 그래서 걸어가는 사람이 너무나 쉽습니다. 씨름도 없고 편안합니다. 죄 죽임의 고뇌도 없습니다. 안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에 게으른 자들이 빠지는 모든 위험에 다 노출되고 그 위험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차원에서는 게으르면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하니까 심각하게 몸이 비대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몸에 각종 이상들이 오기 시작합니다. 체중이 10㎏정도 늘어나면 핏줄이 수백㎞ 이어야 한답니다. 그러면 심장은 능력이 같은데 그렇게 멀리 피를 전달해야 하니까 순환기에 이상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영적으로 게으르면 지, 정, 의가 있는데 의지적으로 매우 나약하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들의 특징은 뭔가를 하고자 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을 때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한다고 해도 힘이 들 때까지만 하고 그만 두면 운동이 되겠습니까? 육체가 힘이 부치는 느낌이 들 때까지 한계를 넘어서 해야지 건강에 좋은 작용이 일어나는데 안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게으르면 게으를수록 의지 박약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신념에 불타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가치 있는 신념에 불타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 중에 없습니다.
정서는 부패하게 됩니다. 게으르면서 자기만을 위하려는 적극적인 죄에 대한 욕망을 갖는 것입니다. 지성은 어떻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책을 읽어도 부담 없는 책만 자꾸 택합니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며 캐 들어가는 논리적인 책들을 안 읽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지성에 미치는 영향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논리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편한 것을 택하게 만듭니다.
‘정보처리학’에서 ‘오토메턴(?)’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누르면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누를 때 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하며 그 속을 열어보는 것입니다. ‘속에 추가 달려서 누르면 플라스틱과 연결되어서 밀치면서 옆을 때리면서 속에서 울려 퍼지는구나’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누르면 소리가 나더라’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연구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는데 만 불편하지 않으면 더 이상 생각을 안 합니다. 그리고 모든 지식들을 줄여 가는 것입니다. 인격 자체가 게으르니까 인격의 3요소인 의지와 정서와 지성에 모두 영향을 주면서 자기 발전을 저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인격이 불결하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의 인격은 불결합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왜곡된 즐거움을 찾아서 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게으른 자의 영혼은 급히 부패해져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많이 손상되어있습니다.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육적으로 게을렀던 것보다 더 게으를 것이고 영적인 일에 헌신하는 일이 육적인 일에 헌신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기 때문에 -게으름은 인격 안에서 일어나는 지, 정, 의를 모두 지배하는 작용이기 때문에- 지, 정, 의가 모두 오염되어 있고, 부패해 있고, 작동을 안 하려고 하는데,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집에 돌아가서 생각을 하고 탐구하겠습니까? 안 그럽니다. 그리고는 게으름이 그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미 죄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그런 은혜의 수단에 참여한다든지 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꿔 나가는 일에 있어서 굉장히 게으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죄가 들어오기가 매우 좋습니다. 마치 경비병 거의 없이 가느다란 철사 줄로 묶어놓은 군대 막사 비슷합니다. 발로 차고 계속 들어오는 것입니다. 힘드니까 경비병을 안 세운 것입니다. 마음 지킴이 좋다는 것도 알지만 마음을 안 살핍니다. 왜냐하면 ‘힘드니까’. 대답은 항상 똑같습니다.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드니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고 자신의 영혼은 죄로 더럽히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 열매가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가시 울타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 노력도 않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까 육체는 다 망가져 있고 자기의 인격은 너무나 불결해져 있어서, 도덕적으로 생기 발랄하고 살아있는 삶의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갖다 두면 티가 납니다. 인격이 융화가 안됩니다. 너무 게으르고 잡다한 것들을 보면서 융화가 안됩니다.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인품의 차이 때문에 일정한 일품을 가진 집단에 갈 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들게 느껴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제를 해도 참된 성도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 이 사람은 숨이 막힙니다. 죄를 죽이라고 하고, 은혜의 지배인지 죄의 지배인지를 따지고, 마음을 지켰는지를 따지고, 예배의 감격에 빠졌는지를 말하고, 십자가를 경험했느냐를 물으니까, 자기가 마음으로 그리는 세계와는 너무나 다르고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치하에 살던 사람이 공산당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곳에 들어가서 궐기대회 하는 분위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교제를 하게 하려고 엮어줘도 잘 안됩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면 성도의 교통이 이루어질텐데’하는데 그 사람들이 너무 단호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너무나 성도의 교통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참된 성도들의 회중으로부터 이탈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패해지기 시작합니다. 육체도 그렇게 망가지고, 그렇게 게으르게 산 사람이 직업활동에 있어서도 성취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 사람들이 택하는 길은 정도가 아닙니다. 사기 비슷한 것을 쳐서 돈 비슷한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법을 피해서 얍삽하게 살아서 한 건 올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의 온 육체 가운데 가장 게으르지 않은 신체의 부위가 하나 있는데 눈동자입니다. ‘어디 건수 없나’하며 살핍니다. 그러면서 길이 아닌 길을 자꾸 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직업에 성실히 노력은 안하고 복권이나 몇 장 사서 바보같이 텔레비전보고 앉아서 1년에 벼락 16번 맞을 확률을 기다리면서 인생 역전하는 얄팍한 상술에 속습니까? 정말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이 당첨된다고 해도 교회에서는 십일조 안 받습니다. 그러면 십일조도 면세라며 더 해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깊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런 길이 넓은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손님을 만나면 그 사람이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봉사해서 만족을 느끼며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면서 보람을 얻으면 그 사람이 돌아가서 많은 사람에게 그 기업을 소개하고 좋은 소문과 함께 번성하게 되는 것이 경영의 기본입니다. 물건을 파는 것도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광고한 것을 보고 사람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써보고 이것이 너무 좋다고 권할 때 물건이 팔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왜? 힘드니까. 돈도 안 남는 한 사람이 왔는데 그렇게 까지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음식점을 차렸는데 사람들이 3-4천 원 내고 국밥 한 그릇 먹으면서 달라는 것 이 많았다. 3천 원 짜리 국밥 한 그릇 먹으면서 뭐 그렇게 달라는 것이 많냐고 했다-가게 문 을 닫게 되었다)
어느 통계에서 음식이 너무 맛있으면 두 달 동안 그 집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이 여섯 명까지 퍼져나가는데 음식이 맛이 없다는 소문은 스물 네 명에게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잘해서 성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잘못해서 망하는 것은 단기간 내에 망합니다. 그리고는 부지런 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는 실직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체도 인격도 인품도 영혼도 일상적인 직업활동도 다 망가집니다. 그것이 가시 울타리입니다.
게으른 사람들 중에 신용이 칼 같은 사람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늘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가시 울타리를 만났을 때 도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예화: 회사를 경영하는 분이 전쟁이 나자 피난 가기 전에 빚을 갚으려고 은행을 찾았다)
대도를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병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넓은 길을 걸어가는 것 같은데 마지막에는 어려움을 만나는데 한가지 정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이 뿌린 씨앗들을 어느 한순간 한꺼번에 거두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런 삶을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씨까지도 말려버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게으르는고. 너는 자신의 일생을 부지런하게 사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구속을 이루셨던 그 예수님을 보라'고 타일러야 합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33년을 사셨지만 3300년을 산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룰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외로움이 그분의 친구였고 고단함이 그분의 동반자였지만 그분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수많은 영혼들을 아버지의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30년을 준비하시고 3년을 불꽃처럼 사역하셨는데 마지막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다가옴을 보시면서 오늘이라고 일컫는 그날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힘을 쏟으면서 사셨습니다. 예수님도 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쉬셨는데 게으른 사람의 휴식과 틀린 것은 게으른 사람의 휴식은 휴식 속에서 맛보는 즐거움 때문에 쉬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뒤따르는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쉼의 목적은 다시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교역자 회의 때 한 교역자가 심방을 안 하는 것이 드러나자 ‘그렇게 하면 되겠 습니까?’하시면서 마음으로 아파하셨다- 다 나가고 나서 손을 덜덜 떠시면서 혼자말로 ‘저렇 게 게으르게 살다가 주님을 어떻게 만날꼬. 저렇게 나태하게 일하다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 주님을 뵈옵지’하시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게으름을 고수하는 한 여러분들이 꿈꾸는 모든 것들은 꿈속에서 사라져 갈 것입니다. 죄에 대한 승리도 거룩한 생활도 진실한 신자도 꿈은 꾸지만 꿈속에서 사라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한번도 승리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짜로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하면서 산 사람들 뿐만 아니라 먹고살고 육신을 유지하는 일에 문이 돌쩌귀에서 도는 것 같이 틀에 박힌 생활을 피곤할 정도로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영혼은 핍절할 것입니다. 정욕이 그를 지배할 것이고 그의 삶은 지금은 편안한 것 같고 아무 목표 없이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이 여러분들에게는 쉬운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시 울타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환난을 만날 때에 여러분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붙들어야 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남은 바 죽게 된 그것을 붙들고 다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싸우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게으르지 않고 어찌하든지 주님을 섬기며 살려고 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부지런한 자의 선택의 결과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15:19)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그것도 지식이기 때문에 교만해지기가 참 쉽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의 빛을 받고 깨닫고 나면 ‘아, 이런 거구나.’ 그러면서 쉽게 말씀을 이해했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확실히 지혜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깨달을 때도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지혜가 원숙해져서 자신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서 실제적으로 활용되는 데는 그 지혜를 실천하면서 오래 사는 것 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그저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길게 살아봐야 마지막에 돌덩이 같은 가슴밖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경건하고 바르게 아버지 앞에서 살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온갖 신앙의 지혜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마지막에 죽을 때 뭐가 됐으면 좋겠습니까? 마지막에 죽을 때 가슴을 딱 갈라 보니까 쇠같이 굳은 돌멩이 하나와 시커먼 죄악의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그런 사람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습니까? 아니면 노년에 가슴을 딱 갈라보니까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보석들로 가득차서 사람들이 서로 갖고 싶어 하는 지혜로 가득 찬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후자가 되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지금은 야자가 많이 나옵니다. 근데 30년 전에는 구경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근데 필리핀 같은데 가서 두개정도 사먹어 보니까 도저히 못 먹었습니다. 무슨 미원 탄 물 같기도 하고. 근데 그게 몸에는 좋다고 합니다. 근데 영화에서 코코넛을 깨뜨려서 빨대 꽂아서 수영장에서 썬글라스 끼고 누워서 먹는 것은 어쩜 그렇게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지 않나요? 그거 꼭 한번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안 어울린다고요? 한번 무슨 기회가 있었는데 결혼하지 전인데 구하게 됐어요. 그걸 어떻게 먹는지 알아야죠. 흔들어 보니까 출렁출렁해요. 그래서 부엌칼로 난리를 쳐서 깼는데 썪은물이에요. 그래서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죠.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으냐 이거죠. 늙었을 때에 대접을 받는 비결이 뭐냐면 돈 많은 것도 대접을 받는 비결이긴 한데 그건 너무 세상적인 대접이에요. 그리고 그런 대접을 받으려고 모이는 사람들은 불순한 사람들이 많아요. 효도를 해도 깨끗하고 순결한 효도가 아니야. 근데 지혜가 가득 있어서 그 지혜를 나눠줄 만한 사람이 될 때 그게 참 훌륭한 거란 말이죠. 이 지혜자가 그런 지혜를 발동해서 이 짧은 문장에 그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담은 거에요. 그래서 뭐냐면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와 같고 데레크라고 했죠. 그 길은 행길을 얘기하는 거에요. 꽤 큰길인데 길은 통칭하는 거죠. 그러나 뒤에 나오는 정직한 자의 길 할때 그 오라흐는 작은길이에요 그 오라흐라는 말이 뭐에도 쓰냐면은 라반이 추격해왔을때 라헬이 안장 밑에 드라빔을 감추고 검사할까봐 아버지 제가 경도가 있어서 못내려갑니다 할때 그 경도를 나타내는 말이 또 오라흐로 쓰여졌어요. 이렇게 오라흐라는 길은 큰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path 작은길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근데 그렇게 게으른 자는 큰길이 주어져도 큰길인 것 같아서 걸어갔는데 그 마지막에 가시울타리를 친것과 같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길이 나온다 이게 지난주에 한거구요. 근데 그와 상반되는 사람이 나와요. 정직한 자의 길은 그 길은 작은 길이에요. 근데 대로라 셀룰라. 말씀드렸죠. 하늘로 쭉 뻗은 하이웨이 같은걸 의미하는 거라구요. 들어간 길은 작은데 쭉 열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정직한 자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성경에 예사림이라고 복수로 되어있는데 야사르라는 동사에서 나온거에요. upright 똑바르다 이런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정직도 되는데 정직이라기보다 의로운 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게으름이라고 하는 그 그늘아래 모든 불법, 편법, 바르지 못함, 부정직 이런것들이 모두 깃드는 거에요. 게으른 사람들은 대부분 요령을 피우는 사람들이거든요.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정직하고 올곧게 살려면은 게으를수가 없고 게으르면서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부정직하고 편법적으로 살고 그러는 것으로 게으름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인생을 보충해야지만 다른 사람하고 비슷하게 사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직한자가 게으른자하고 반의적 댓구법이라고 하는데
죄악된 세상을 방황할 때에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죽을 험한 세상이 왜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즐거울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얼마 남지도 않은 날 동안에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이 마지막때에 아직 이렇게 살아있게 하셨는데, 이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쓰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우리의 물질도 우리의 건강도.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합니다. 머리둘 곳 없는 생애, 깃들 곳 없는 인생을 사시면서 쉼도 없고, 안락한 생활도 없는 생애를 사셨지만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서 주님을 섬겼고, 자신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독려도 없었고, 환영해주는 사람도 적었지만, 사람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그분은 좁은길로 들어서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우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시간을 아껴 쓰시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셨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반밖에 안되는 수를 누리셨지만 이세상의 어느 인간도 할수 없는 위대하고 많은 일들을 이루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게으름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고,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꾸준히 비가올때나 바람이 불때나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기뻐할때나 대적할때나 올곧게 하나님 앞에서 그 진리를 따라 사셨고, 사시는 대로 가르쳤고, 가르친 대로 어떻게 사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누가 시간을 잡아 매 줄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속히 지나갑니다. 많은 날동안에 헤아릴수 없는 많은 은혜와, 복음의 진리들,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 주님의 아름다운 찾아오시는 은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말할수 없이 기쁨이 되었던 시간들은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 있습니다. 이때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껴 써야 합니다. 시간이 있다고 그 시간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순간마다 하나님앞에서 온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고 우리의 물질과 건강과 모든 것을 사용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보십시요.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좁은 길처럼 보이지만, 넓은 길을 택한 사람들은 가시 울타리를 만났고, 그렇게 좁은 길을 택한 사람들은 대로를 만났습니다. 여러분, 어느길을 택하시렵니까? 잠시 게으르게 살고 편안하게 살다가 가시 울타리를 만나서 그 하나님앞에 좌절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은 비록 좁은 골짜기를 걸어가는 것 같고,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면서 행할길을 다하는 것 같지만은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 열려서 허다한 수많은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주님께로 나아가는 영광스런 대로에 선 성도가 되시겠습니까, 가시밭길에 선 타락한 신자가 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금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아끼고 그것을 끌어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부주의함은 게으른 자의 선택이다(1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잠 24:30-31)
우리는 흔히 이 잠언을 우리의 삶을 위한 실제적인 지혜의 지침서라고 생각을 한다. 사실이다. 여기에는 정말 인생을 막 산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인생살이의 무궁무진한 보화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아마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아마도 이 말씀대로 살아 가려고하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잠언의 목적이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는데 있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두 가지 뚜렷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무엇이냐고 하면 이 책 자체가 실제적이면서도 영적인 내용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적인 교훈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춰서 우리의 영적 삶에 활용을 하면 말할 수 없이 귀한 복음의 목소리를 잠언서를 통해서 들을 수 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들이 귀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유능하게 살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가르침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도 굉장히 힘든 것이지만 그래서 그 사람이 세상사랑하다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마음에 품었으면 효과적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방법들을 터득해야 하는데 이것은 또 다른 지혜가 필요한 영역이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영혼의 변화를 받고 성향만 바뀌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침이나 낮이나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제마음은 주님만이 아시지요. 중요한건 하나님이 마음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사령부가 되어서 강물처럼 흘러져 나오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베인 삶을 여러분들에게 원합니다. 그렇게 원하시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뭐가 뒤따라와야 되냐면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 짧은 인생의 시간 동안에 그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고 똑같이 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똑같은 시간을 이세상에 살면서도 더많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수 있을까 그거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거죠.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생활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그러면서 성경속에서 이런 복음의 진리들을 발견할때마다 말할수 없는 기쁨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견딜수 없는 후회가 있었다. 어떤때는 몇 년 동안을 영적인 성장이 없이 올라가다가 넘어지고 넘어지다가는 깨지고 그러다가는 다시 올라가고 하는 마치 기름칠해놓은 바위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올라가다가는 굴러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또 올라가고 이랬는데 알고 보니까 이러이러한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바보같이 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이게 거의 내 인생의 숙명이려니하고 몇 년동안을 미끄러지면서 올라가던 그 길을 아주 간단한 성경의 진리가 나를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 그때는 기쁨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뭐가있냐면 견디기힘든 후회. 5년전에 누가 나에게 이런것들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더라면 내 인생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았을텐데. 미국에 한번 집회를 갔는데 저하고 함께 교제하던 공부를 많이 하셨던 목사님이 자네 정말 그길을 가려나를 두 번을 탐독을 하셨대요. 그러면서 그분이 하시던 말씀이 20년전에 이 책을 읽었으면 10년정도는 줄일수 있었을텐데 그 생각을 하면서 후회했다고. 여러분 100만원만 줘. 그러면 웬 돈 이러지요. 시간좀 내줘 그러면 널널하게 쓰죠? 그거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돈은 벌면 되지만 시간은 벌수가 없어요. 이미 여러분들이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세상에서 거두어 가실지가 정해져 있어요 그 시간은 늘릴수도 없고 당길수도 없어요. 딱 그 시간 안에서만 하나님 섬기면서 사는 거예요. 근데 죽을 때가 됬는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사람과 일에 대한 열정이 있고 훈련이 잘
내일은 다시 오지 않아요. 오늘 흘려 보냈는데 영원한 시간의 세월속에 영원히 묻혀버려요. 다시 복구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타들어가요. 하나님은 존귀하시고 우리의 섬김과 사랑을 홀로 받으실수 있는 분이고 우리가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야 하고 그럴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를 세워주신 자리가 있는데 시간은 계속해서 갑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길이로, 게으르게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길이로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졌던 사람들 가운데 시간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안가졌던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왜냐면 그것을 펼칠수 있는 장이 시간이였기 때문에요.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고 허비하면서 사는 이것이 굉장히 커다란 죄이다. 엄청난 죄다.
여기에 보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진리가 나오는데 내가 증왕에, 증왕에라는 말은 옛날에 라는 말이다.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났는데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이것은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들이 올라왔으며 복수이다 그리고 거친풀이 지면을 덮었고 돌들로 만든 담이 무너져 내렸다 이 얘기거든요. 저는 오늘 오전에 설교했던 내용가운데 하나를 여기다 확대시켜서 생각해서 뿌리를 좀 뽑았으면 한다. 그게 뭐냐면 부주의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셔야 되는 이유가 무엇때문이냐면 게으름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거죠.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없는 자의 포도원 옆을 지나갔는데 무슨 밭이였는지 그 밭의 용도는 모르고 포도원은 말할 필요도 없이 포도가 자라는 곳이죠. 거기를 지나갔는데 포도나 작물은 별로 없고 가시가 올라왔고 거친풀이 지면을 뒤덮었고 돌담은 무너졌다 이거죠. 여러분들이 이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거 아니예요? 아, 용도 폐기된 밭이구나. 개발을 기다리면서 용도를 폐기한 밭은 버린자의 밭이다. 여기서 지혜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용도 폐기된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밭에다가 뭐라도 심어놓고 포도철에 포도를 수확하려고 심었는데 그렇게 된 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밭이 무엇일까 모르지만 곡물을 심는 곳이겠죠. 그럼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밭에서 곡물을 심어서 양식을 삼고 물 대신 먹는 것이 포도주라는 말이죠. 이것은 밭과 포도원이라는 것은 무엇을 얘기하냐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밭과 포도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취미 삼아서 꽃을 몇 개 심었다면 안되도 크게 생존의 지장이 없는데 밭의 소출이 없고 포도원의 수확이 없으면 마실것과 먹을것이 핍절해 지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밭은 농부들이 버린 용도폐기된 밭이 아니라 여전히 경작되고 그래서 그 경작을 통해서 밭에서 곡식을 거두고 포도원에서 포도를 따서 양식과 음료를 삼아서 한해를 살아가려고 하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현재적으로 경작고 있는 밭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풀이 올라왔다. 가시덤불이 올라왔고 거친풀들이 지면을 덮었고 돌담이 무너졌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그밭 주인이 가시덤불씨앗을 거기에 뿌렸나요? 그리고 거친 풀들의 종자를 거기에 심었습니까? 그리고 망치를 들고가서 그 포도원에 들어와서 포도를 따먹을 각종 짐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자기가 쌓아놓은 담장들을 자기가 일부러 무너뜨렸나요? 아니예요. 거기다 물주고 김매고 비료를 주면서 가시덤불을 자라게 기여를 했나요? 거친풀들이 돋아나서 온 지면에 가득 시퍼렇게 덮어버리는 일들을 위해서 농부가 무엇인가 봉사를 했나요? 그러면 아니라고 하면 마음속으로 진짜 기여는 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 가시덤불들이 올라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요? 그러면 거친풀들이 올라와서 한쪽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포도밭 전체를 덮어주기를 바라는 은근한 소원이 농부의 마음속에 있었나요? 돌담이 무너져셔 짐승들이 드나들었으면 좋겠다는 은밀한 소원을 품었었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자기 잘못이 아니잖아. 근데 왜 비난을 하느냐고? 그사람 잘못이 아니잖아. 그사람이 물을 줘도 포도 때문에 주었고 비료를 줘도 포도 때문에 줬겠지 그 사람이 거기서 양식이 안나면 밥을 굶고 포도를 못따면 마실게 없는데 그 사람이 왜 그런 소원을 가졌겠느냐 이거예요. 근데 성경에서 맹 비난을 받잖아요. 연약함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의무를 덮어버리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이거죠. 뭐가 연약해요? 진짜 연약한 사람들은 자기 의무에 대해 해이하지고 태만해지기 위해서 연약하다라는 미명하에 말도 안되는 핑계뒤에 숨지 않는다. 연약한 사람은 정말 누구냐면 하나님앞에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리고 내가 뿌리고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물을 뿌리지만 그러나 농부인 나의 힘으로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셔서 이 포도로 영글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기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짜로 연약한 사람이다. 자기가 의무를 태만히 해서 태만히 하는 것을 자기의 연약함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앞에 아주 파렴치한 행동이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하는 이상한 표현으로 가리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아주 하나님앞에 파렴치한 행동이다. 아주 파렴치한 행동이다. 그렇게 해서 무슨 영혼에 유익이 있겠냐 이거죠. 여러분들이 언제 기도의 은혜를 말려버리기 위해서 봉사한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언제 말씀의 은혜를 마음에서 파버리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마음속에 들어가서 말씀의 은혜를 죽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순종을 안하기 위해서 결심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기도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기 위해서 뜻을 세우고 나는 이제 오늘부터 기도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며 나의 경건생활을 위한 모든 의무에 대해서 태만할 것을 맹세하노라고 다짐한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책을 읽을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법 그런책 읽어본적 있어요? 전도할 마음을 다 빼앗아 가버리는 법그런거 읽어본적 있어요?, 새벽기도 죽어도 안나오는 법 길이 여기있다 이런책 공부해본적 있어요? 거룩하지 않으려는 그대에게 짐승같이 사는법 알려줄게 이런책 본적 있어요? 그러면 마음으로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앞에 영원형벌가운데 들어가고 싶어하는 소원을 품은적 있어요? 어쩔수 없이 기도하고 어쩔수 없이 교회 나오고 어쩔수 없이 봉사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은근히 이 기도가 끊어지길 이 봉사가 끊어지길 거룩한 삶을 위한 나의 노력이 흐지부지해지기를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원한적이 있느냐고요? 없죠? 근데 어느날 보니까 기도 거의 안하고 도전을 받았는데 도전을 받은거나 안받은 거나 그놈의 것이 그놈의 것인 삶이 되버리고 말씀의 은혜를 안받은건 아닌데 지금 순종 안하고 살아요. 그러면서 왜 그렇게 되냐고 물었더니 연약함때문에. 그런 소리는 하면 안되요. 하나님앞에서 말할때는 용어선택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해야되요. 그게 어떻게 연약함이예요? 그럼 지옥은 연약한 사람들이 가는 곳인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요? 그게 어떻게 연약함이예요? 연약함 아니예요.(승현아, 목사님이 면피라고 하신 것 같은데 면피란 단어를 찾아봤는데 없어ㅠ.ㅠ, 혹시 철면피라고 하신건가?)란 말이예요.면피.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아주 파렴치한 변명이란거죠. 그리고 그런식으로 자기를 위장하는 사람은 이미 절반은 위선의 죄에 빠져 있는사람들입니다. 어디 연약함입니까. 악함이예요. 악함. 왜? 마태복음 29장에서 예수님이 한달란트 맡은 종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 게으른 삶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게 어디 연약함입니까? 그런 파렴치한 발언은 연약함이라고 그것을 두루뭉술하게 싸잡고 있으니까 이게 마음속에서 게으름이 악이요 하나님앞에 돌이킬수 없는 죄라고 하는 선명한 인식이 안생기니까 그것과 더불어서 싸울수 있는 마음이 안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밭을 지나면서 굶어 싸다 이녀식아 그런 마음을 품고 지나갈거예요. 똑같이 농사를 짓는데 바보같은 녀석이지 왜 밭을 그꼴을 만들어 놓느냐고 결국은 자기가 가을에 가서 눈물을 흘릴텐데 말이지. 그게 연약함이예요? 연약함이냐구요. 개발에 편자가 무슨소용이 있습니까? 편자가 뭐냐면 말발굽에 다는거예요. 그걸 개발에 달아서 뭐하겠어요. 무슨 얘기냐면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져도 그것을 활용할만한 사람이 못되는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주를 돼지우리에 던지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있으면 뭐하냐 이거예요. 그런 철면피하고 파렴치한 변명을 말이죠. 마른하늘에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겪이지. 그 하나님의 엄위 앞에서 어떻게 명백하게 드러난 게으름의 악을 연약함이라고 표현을 하냐구요. 기억하십시요. 게으름은 용서받기 굉장히 힘든 악이예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 죄가 커서도 그렇지만 그 게으름을 인해서 그렇게 게으름을 미워하며 뼈져리게 용서해달라고 기도한적이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용서받기 힘든 악이라 이거죠. 연약함. 말이 되요 그게 뭐 연약함이예요.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뭐냐면은 선택한 죄만 죄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고 기대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된 것은 그게 자기의 책임이라 이거죠. 자 죄가 정욕을 이용해서 우리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정체예요. 그럼 그 죄가 점점점점 자라서 마지막엔 어떻게 되느냐하면 죄로 가득차서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죄는 그렇게 우리를 지배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죄에는 보다더 궁국적 계획이 있어요. 그건 우리를 사로잡는 거예요. 사로잡는 것은 뭐냐면은 거의 완벽한 노예가 되어버리는 상태에요. 지배에 의해서 더 깊이 들어가면 죄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마치 죄를 짓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 죄가 그사람의 인격과 삶의 떼어놓을수 없는 특징이 되도록 죄 자체를 위해서 지극히 헌신적인 사람으로 그를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할때 그 죄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에 사로잡혀서 미친것처럼 그렇게 사는 거죠. 근데 여러분 그것을 원합니까? 아무리 막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처음에는 자기 속에 죄가 융성하게 되고 정욕이 자기 계획을 성취시키는 방식이 뭐냐면 씨가 뿌려진 것 같은 방식으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악한 생각을 뿌리는 거거든요. 그걸 원한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그것에 가담한 것도 아닌데 그것이 들어와서 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만들고 전엔 죄가 자기를 선택했는데 이젠 자기가 죄를 선택하지 않고서는 배길수 없도록 그렇게 우리의 영적삶을 바꿔 놓는거예요. 근데 내가 묻고 싶어요? 연약함이라고 그러죠? 그거를.. 연약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그런식으로 순진하게 다루는 동안에 마지막 일어나는 것은 훌륭하게 죄의 계획에 먹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어떻게 연약입니까? 그게 연약이냐구요. 연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너무나 살고 싶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경작하고 그래서 밭을 성실하게 일구는 농부처럼 철따라 무엇따라 모든 농부의 의무를 다 했는데도 그런데도 비가 오지 않고 햇볕이 제대로 나지 않아서 곡식이 제대로 영글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그다음이다. 부주의한게 게으르기 때문인데 이런 부주의함은 왜 생길까? 게으른자의 밭과 지혜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밭과 포도원을 지났다고 하는데 한사람의 두 밭을 같이 지났을수도 있구요 병행법이니까 이거를 그냥 밭과 포도원하고 짝이 되고 게으른 자와 지혜없는 자가 짝을 이룬거예요. 그러니까 지혜자가 이것을 볼때 밭의 임자와는 상관이 없이 이 밭 이 포도원을 보고 이야기를 했을수도 있고 아니면 동일한 사람의 두 밭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밭과 그사람의 사람됨을 병행법을 구사해서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일수도 있다 이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상관이 없고 가본 것이 아니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뭐냐면은 여기서 얘기하는 밭과 포도원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을 얘기하는 거고 그다음에 게으른 자와 지혜없는 자를 똑같이 얘기하는 거거든요. 여기서 게으른자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아첼인데 그대로 게으른자예요. 꿈지럭거리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를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지혜없는 자라고 했거든요. 히브리말로 아담 핫세르 레브예요. 만약 이렇게 한다면 지혜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호크마인데 그러면은 여기에서 지혜없는자 할려면 아담은 사람이고 핫세르는 모자란단 뜻이예요. 동사 형태를 가진 형용사예요. 그 단어가 어디에 나오냐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때 없으리로다에 쓰여진 단어예요. 그러면 지혜없는자라고 하면 이렇게 표현해야하잖아요. 아담핫세르 호크마 이렇게 해야하거든요. 호크마가 아니고 레브예요. 레브는 뭐냐면 heart예요. 마음이예요 마음. 물론 해석적으로 볼때에 히브리성경에서 쓰여진 레브 마음이라는 단어가 이해(understanding) 혹은 판단(judgement)이런것들을 암시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 사용되는 적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레브라는 말 자체가 5,000번이상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뜻이 그 속에 많이 들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봤냐하면은 이해가 결핍된사람이구나 혹은 총명이 결핍된 사람이구나 혹은 NIV성경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이 judgement 판단력을 잃어버린 사람이구나 이렇게 해석을 했고 우리말 성경은 그런해석적인 순환을 거쳐서 지혜없는 자라고 간결하게 딱 표현을 한 거예요. 그렇게 번역을 해도 전적으로 잘못됬다고 말하진 않겠어요. 그대신 번역의 과정에서 히브리성경에서 원래의미로 의미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그림과 같은 묘사가 주는 서정성이 확 줄어들고 간단하고 통상적으로 되풀이 되는 성경의 한표현으로 바뀌었다는 거죠. 그것이 제가 좀 섭섭하다 그얘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레브는 뭐냐하면 해석을 하면 게으른자의 밭과 마음이 모자라는 자의 혹은 마음이 결핍된 혹은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의 포도원 곁을 내가 지나갔었다. 이 얘기죠. 중국에 어느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선교의 자유가 있을때 옛날얘기죠. 전도대원들을 이끌고 중국대륙을 쭉 행진합니다. 그러면서 한번 행진을 쭉하고 나면 수천명의 결신자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 우상숭배에 절어있는 땅에서 어떻게 들어보지도 않은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을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할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하는 방법들이 너무 정교한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전도사에게 물어봤어요. 형제님 형제님은 이런것들을 어디서 전문적으로 선교학을 배운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방법으로 중국사람들을 전도하십니까 그랬더니 그분 대답이 참 재밌어요. 마음을 다 해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애를 쓰다 보니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깐 이 세상의 역사에 나오는 공구(tools), 연장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오래전에 우리들이 지금 사용하는 거의 모든 연장의 기본 형태들이 다 마련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연장의 역사를 보면 열심히 한가지를 한사람들에 의해서 연장이 만들어졌지 오늘은 여기서 기웃거리다가 내일은 저기로 가고 그렇게 게으르게 살던 사람들에 의해서는 어떠한 연장도 만들어지지 않아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마음을 모두 실어서 최선을 다하며 부지런히 살려고 할 때 그때에 연장들이 생겨나게 된 거예요. 로마시대 같은 때를 보면 성을 공격을 하는데 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효과적인 도구들을 엄청나게 만들었어요. 성을 때려서 무너뜨리는 공성추나 사다리나 성문을 부수는 도구나 아니면 가까운 거리에 가면 화살이 비오듯하니까 원거리에서 불덩어리를 수십미터를 날려서 성안으로 집어넣는 방법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수하게 연구를 했어요. 왜? 한 방면에 미친 듯이 몰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일할수 있는 도구들이 발명되는 거예요. 왜 그 사람들이 효과적인 도구를 그렇게 발명하려고 애를써요? 짧은 시간안에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걸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게 인류사회에 폭발적으로 기여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특허제도를 도입하는 거예요. 그것을 서로 촉진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인생의 시간이 똑같다면 그 정해진 시간에 많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수 있는 비결은 뭐냐면 열심히만 하면 안 되고 좋은 도구를 가지고 유능하게 일해야 해요 그래야 빨라요. 그래서 저는 같이 스탭들일 일을 해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불성실한 사람이예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은 그만두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근데 다행히 없어요, 말씀듣고 은혜받은 스텝들이 그런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죠. 게으름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게으른 사람이 불성실하죠. 불성실한 사람이 제일 싫어요. 두 번째는 뭐냐고 하면 성실하기는 한데 멍한 사람들. 적이 쳐들어오면 하다못해 부지깽이 라도 들고 싸우러 나가야 하는데 육이오 노래 부르면서 싸운단 말이예요. 맨주먹 붉은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왜 맨주먹으로 싸워? 짱돌이라도 들지.왜 그렇게 싸우냐 하면 전에 있던 사람이 그렇게 싸웠거든요... 그러니까 뭐냐면은 좋은 도구 그리고 슬기로운 마음 이것이 뭘 가져다주냐 하면은 요만큼밖에 안되는 시간인데 이만큼을 사용하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제가 전혀 아낌없이 한번도 뭘 살 때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는게 있어요. 뭔줄 아세요? 책이에요. 책 . 저는 이세상에서 책을 보고 가격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가격을 보고 싸다 안싸다 생각하는 것을 벽돌이나 먹을걸 살 때 그러는 거지 책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예요. 왜냐면 딱 펼쳐 봐서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준다 이걸 잘 읽으면 내가 거룩해 질수도 있겠다 잘 읽으면 내 인생에 늘 소용이 되겠다 그러면 그 값은 받는 사람 맘이예요. 제가 몇 년전에 모티피케이션에 대해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서점에 나갔는데 박사학위 논문이예요. 240페이지인데 7년전에 65,000원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샀어요. 잠깐망설였지만 그것이 매우 잘못 된것이라고 회개하고 두권 샀습니다. 한권은 줄치면서 보고 한권은 두고 보고 그렇게 해서 두권 샀어요. 이게 종이가 얼만데 65,000원이나 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게 재료가 문제가 아니라 이속에 들어있는 지혜가 값인데 어떻게 돈으로 계산이 되느냐 이거다. 이게 도구이다 이게 65,000원이지만 이것을 잘읽어서 내 영혼에 도움이 되고 내가 이세상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다면 65,000원이 아니라 6,500,000원이여도 싼거야. 왜? 그런 도구는 내가 직접 만들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 도구를 사용하면서 살다 보면은 나도 만들게 되. 왜? 필요하니까. 그런데 아니 모든 것 다 끝냈다. 그래서 맨주먹 붉은피로 싸운다 그래서 모든건 내가 자급자족 하겠다. 해보라지. 그럼 전쟁하기전에 먼저 광산에 가서 철부터 캐야지. 그렇게 할 이유가 뭐 있냐구 밤에 만들어서 써야되요? 수퍼가면 파는데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한번도 게으르신 적이 없었던 주님, 죄도 없으셨고 죄를 지으실 수도 없고 아무리 유혹을 해도 유혹에 넘어갈리도 없으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깨어서 사셨던 그분 그래서 자신의 온삶을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앞에 사셨던 그 부지런하신 예수님. 어떠한 부주의함도 용납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섬기는 어떤 일에도 마음이 실리지 않은 섬김이 없이 모든일에 자신의 마음을 다 드려서 아버지께 하듯이 이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섬기셨던 그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며 그러면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죄입니다. 그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감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고는 여러분이 결단코 하나님을 향하여 부지런해질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한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없습니다. 미워해야 합니다.
7. 부주의함은 게으른 자의 선택이다(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30-31)
지난주에는 본문을 읽으면서 중요한 것은 게으른자와 지혜없는자 그 사람들이 그렇게 포도원을 망가뜨리고 밭은 망가뜨릴려고 선택한 것은 아니였는데 부주의함과 게으름이 밭을 망가뜨렸는데 우리들이 흔히 부주의한 것을 악이라 생각안하고 자신도 그 부주의함 때문에 피해를 입은 당사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주의 자체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비난을 피할수 없다. 그런데 그 부주의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게으름때문이다. 부주의하지 않으려면 인간의 모든 기관이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된다. 아무일도 없는데 만약에 이 지하철에서 불이 나면 어떻게 될까, 몇분에 몇사람이나 대피할수 있을까, 지금은 아무일도 없지만 만약에 전기가 나가면 어떻게 되나 이런것들을 선택하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되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은 이런것들을 선택하지 않고 부주의한 것을 그냥 선택해 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부주의한 사람들은 대게 게으른 사람들이고 게으른 사람들은 대게 악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되는거죠. 그것이 지난시간에 들었던 중요한 줄거리중의 하나였고 두 번째는 뭐냐면 비교를 하는데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없는자의 포도원을 지났다 그래서 병행법 또는 대구법으로서 두 종류의 사람들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게으른 사람들 아예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혹은 생각을 안하고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게으른 사람들이거든요. 문짝이 돌쩌귀 위를 도는 것처럼 이렇게 계속 바쁘게 반복하는데 그 이상의 어떤 생각도 안하는 사람 특별히 영적인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생각도 없는 사람 이사람들은 뇌를 전당포에 빼놓고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렇게 계속해서 사니까 그런사람들은 어떻게 되냐면은 새로운 발전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어느정도냐하면 그걸 왜 하냐 하면 앞에사람이 계속 했는데요, 이게 이렇게 하면 잘못되지 않냐 하면 생각해본적이 없는데요 그러면서 계속 그 일을 하는거예요. 그러니까 기계의 부속품으로 창조되었으면 좋았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이제 뭐냐면은 지혜가 없는 사람들의 밭이라는게 히브리성경으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밭이라고 했잖아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통찰이죠. 마음을 쏟아서 충성스럽게 잘할려고 애를 쓰면 탁월한 지혜가 생겨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은 지혜 따로있고 충성된 사람들 따로 있고 따로따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셨어요. 그러면서 중국의 전도자 얘기도 해주었잖아요. 여기까지가 지난주 장부책입니다.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근데 히브리성경에는 뭐라고 되어있냐면은 내가 붙잡았고 내 마음을 두었고 내가 보았으며 한 교훈을 취하였노라 여기 맨 앞에 나오는 보고와 두에 나오는 보고가 다른 단어로 쓰였다. 아주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가 쓰여졌고 거기에는 아주 이례적으로 히브리어에서 주어 자체가 동사에 포함되어 있는데 동사만 써도 되는데 주어를 다시 사용했다는 것은 자기를 굉장히 강조한 것이다. 내가 바로 내가 상당히 중요한 충격적인 사건을 본거예요. 내가 그것을 파악했고 그리고 내 마음을 두었다. 두었다는 것은 set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고정시켰다이거죠. 뭐에? 지혜없는자의 밭과 게으른자의 포도원 그 광경에 자기 마음을 두었다는거죠. 그래서 뭐냐면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을 자기마음에 두어서 세월이 많이 지나도 사진처럼 그것이 딱 자기 가슴속에 찍혀서 잊혀지지 않도록 가슴에 새겼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내가 보았고 이것은 눈으로 본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의 교훈을 취하였다. 그 내용이 좀더 자자... 하면 ...게 될 것이다 이거죠.
여기서 지금 해설한 부분을 보면 옛날에 그 밭 옆을 지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마음없는 사람의 밭과 게으른자의 포도원에 가시덤불이 돋아나고 잡초가 온 지면을 덮어서 쓸모 없는 밭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면서 지나간 사람이 많았는데 모두가 그 광경을 붙잡고 자기의 가슴속에 film처럼 찍어서 간직한 것은 아니였다 이 얘기죠. 그렇게 지나가며 아무런 메시지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면 둘중의 한사람이였다. 그사람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말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서 열매를 많이 맺는 밭과 과실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경작하고 있는 사람이든지 다시말하면 부지런함에 있어서 깨어있고 부주의함에 있어서 자유로운 사람이든지 또하나나는 자기도 그 밭의 사람과 심성이 똑같아서 그게 별로 이상하지 않은 사람 그 두종류의 사람이 바로 무심코 지나갔을거라는 거죠.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추측이죠. 비록 내가 잘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잘 산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못사는 것이 안보이는 것은 아니거든요. 다만 자기일에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쓸모없는 일에 오지랖이 넓지 않아서 자기 일에 열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보면은 이 사람의 밭을 보고 아무 의식없이 지나던 사람들은 이 사람과 거의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오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각자 평가가 다를겁니다. 게으름 시리즈 우리남편이 좀 들어야 할텐데 그럴수도 있고 학교갈때마다 일어나라 씨름을 하는 우리 애들이 들어야 할텐데 그럴수도 있고 시어머니인 내가 부엌에 가서 달그락거릴때까지는 퍼질러자는 우리 며느리가 들었으면 좋을텐데 그럴수도 있을거예요. 그건 사람마다 집안사정이니까 그걸 뭐라 얘기하겠습니까?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죠. 근데 여러분들의 그 느낌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너희 스스로 부요하다 하지만 사실은 가난하단다. 라오디게아가 로마시대때 안약의 명산지였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안약 하면 우리로 하면 개성인삼처럼 유명한 약이여서 제국전체에서 그 안약을 사러 와서 돈을 많이 버는 동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안약을 눈 안보이는 사람들에게 발라주는 명산지라고? 네가 눈이 멀었다 그러니까 그 안약 다른동네 사람들에게 팔지 말고 너나 발라라. 물론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나 대강의 뜻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거죠. 그 안약을 사서 네 눈에 발라 보지못하는 것을 보게 하라. 그러니까 각자 다 자기의 판단에만 비춰서 보면 정확하지 않다는 얘기다. 제가 아는 사람중에는 건강하다고 폼잡았는데 병원에 딱 가니까 집에가서 유언하십시오 이런 진단 받은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는 믿을수 없다 이거죠. 객관적이어야 한다 이거죠. 그럼 제가 여러분들에게 MRI역할을 할수 있는 시금석을 하나 제공할께요.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앞에 부지런한 사람들인지 아닌 사람들인지를 잴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을 여러분들에게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겁니다. 게으른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분속에 적절한 분노가 정당하게 솟아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이거죠. 근데 이건 다시 둘로 나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부지런한 것도 부지런함이 하나님께 감화를 입은 것에서 비롯된 부지런함은 영육간에 모두를 포괄하는 균형이 있는 부지런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부지런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천연적으로 물려받은 부지런함이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굉장히 부지런한 분입니다. 근데 할아버지는 별로 부지런한 분이 아니였던걸로 기억을 하는데 아버님은 굉장히 부지런하셨어요. 지금은 연로하셨지만 예전에 보면 60이 훨씬 넘으셨어도 4시30분 넘어서 주무시고 계시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어요. 새벽기도 시간에 일어나셔서 라디오 듣고 계시죠. 예수 믿기 전이셨으니까. 하여튼 그 부지런함은 감당할 수 없는 부지런이였어요. 근데 할머님이 부지런하셨던거 같애요. 그러니까 항상 아버님이나 할머니 보면 손자인 우리들을 보면서 제일 못마땅하셨던게 젊은 애들이 늦게까지 (눈 좌우로 굴리면서 눈치보는건가?) 안하면 되. 왜 이렇게 하냐하면 이게 눈이 작아서 이렇게 하는게 아니고 게을러서 그런거예요. 작게 노력을 들이고 크게 수확을 얻을려고 해서 그런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되요. 이 민족의 게으른 정신을 누가 고쳐주냔 말이야. 정치가들이 고쳐주겠느냐고요 상당수의 돈 많이 번 사람들도 자신들도 정직하기 못한방법으로 번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기대를 못해. 그러니까 은혜받은 성도들에게 이 민족의 정신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정말 개조하고 고쳐야 한단 말이예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헛되게 성공할수 있다고 하는 것이 원초적으로 차단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해요. 그것이 정직한 사회아니야 이거예요. 그리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껴야 해요. 그게 진짜 부지런한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합리적인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사람들을 보면 막 화가 나는 거예요. 왜 저렇게 비합리적으로 살까? 돈이 없으면 아껴서 써야지 왜 카드를 수십장씩 찍어서 막 긁어서 물건을 사들이고 빚더미에 올라 앉아서 은행에서 돈 좀 갚으라고 하면은 까불면 파산할거야 협박이나 하고 말이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적절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면 자기도 다 똑같은 사람이다 이거예요. 또 있어요. 영적이고 신령적인 부분이예요. 육적으로는 정말 부지런한데 그럼 뭐하냐 이거예요.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많이 게으른거다 이거죠. 그런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보면서 잠언을 얘기하고 있는게 아니다. 잠언은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경험한 것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직장에서도 궂은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들은 크리스챤이더라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뭔가 주님을 위해서 주께 섬기듯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라 이거예요. 근데 육적인 부분에서만 그렇게 살면 안되고 영적인 부분에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거죠. 많은 사람들이 주일 예배에 안나옵니다. 왜 그렇죠? 물어보면 신파조입니다. 아이구 목사님 버리쩍거리고 먹고 살아야지 누가 먹여줍니까. 그게 무슨말이냐면 부지런해서 못나온다 이거예요. 우린 게을러서 못나온다고 생각하지만 본인들의 생각은 달라요. 왜 기도안하냐? 목사님 우리회사가 요새 말도아닙니다. 퇴근할때마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 퇴근합니다. 뭐 칼바람이 일고 구조조정이 어떻고... 인간 사는 사회에 뭔 사연인들 없겠어요. 근데 그것만 부지런해가지고는 안되잖아요. 우리가 지금 먹고살기 위해서 이세상에 태어난거 아니잖아요. 그찮아요? 그럴수 없잖아요. 밥을 좀 굶어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죠. 내가 그래서 젊은이들보고 얘기해요. 바르게 살아라. 직장가서 세상의 판에 박힌 사람되지 말고 바르게 살고 똑바로 하고 그래서 밥벌어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에 목걸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목치면 딴데 갖다 붙여라. 거기만 생명 걸 필요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그렇게 사냐. 니가 하려고 애를 썼는데 직장에서 너를 고깝게 보고 신통치 않게 생각한다. 너는 게으른것도 아니고 무능한것도 아니고 열심히 했는데 고깝게 보고 그런다. 어쨌든 니가 신앙의 기본틀이 휘지 않으면 도저히 그 직장에 적응할수 없을 때는 집어쳐라. 하나님앞에 열심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작정하면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주신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있나 아닌가 그게 문제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면 우리가 그 직장 떠나면 그 직장 자기네가 손해야.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빠져나갔는데 보디발의 집에 뭔 볼일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우리 자체가 복덩어리야. 그런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에 주인공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된다 이거죠. 회사에 회장이 있고 사장이 있고, 부사장이 있고 전무, 상무 부장 과장 차장이 있겠죠. 나는 그 밑이예요. 그래서 그하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공 만드시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요셉이 상무였어요 전무였어요. 그냥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한사람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이 그사람을 보고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고 애굽에 복을 내리시고 온 세상의 사람들을 살리시잖아요. 지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이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야 되잖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늦잠자는 습관이나 새벽기도 안나오는 이유가 뭐예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귀찮으니까 싫으니까 힘드니까. 그거예요. 내 기도를 새벽에 받으시겠다고? 참으시라고 그래. 난 자야겠어. 왜? 내가 중요하니까. 세월이 많이 지나서 여러분들이 주님앞에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상상할수 없이 바쁘게 살았는데 주님의 장부책에는 빈둥거리면서 논날이라고 빨간줄 그어져 있는걸 여러분 보게 될 거예요. 보십시요. 게으르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거 경험했죠. 은혜많이 받은사람들이 게을러요. 한편으로는 육적으로 너무 바빠서 영적으로 하나님앞에 자신을 돌봐야 할 시간까지 모두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아요. 이사람 꼭 뭐하는사람하고 똑같으냐면 돈벌어서 절대 헌금 안하고 혼자서 먹어치우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십일조고, 감사고, 주일헌금이고 아무것도 안하고 다 먹어치우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탐욕이예요, 탐욕. 그게 우리 뿌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뿌린데 그것까지 잘라먹고 무슨 삶을 살려고 하는 거예요. 상추나 파를 심어서 길러서 위만 잘라 먹어야 계속 나지 칼을 뿌리에다 대면 뭐가 남겠느냐고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한꺼번에 수천개의 알을 뱃속에서 꺼내려고 확 찢은거랑 똑같으죠. 그 뿌린데 건드리면 되느냐고. 그건 하나님꺼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세상의 제일 바보같은 사람들이 뭐냐면은 다써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쓸 것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현저하게 욕을 보이는 사람이예요. 그 사람은 창조주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자기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망각하고 사는 사람이예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왕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이예요. 노예에요. 노예. 자유케 되었으나 스스로 노예가 된 자유인. 근데 여러분 마음속에 그런것들을 보라 이거예요. 게을렀을때 어떻게 했습니까? 게을러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지 않았을때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말씀을 계속 깨달으면서 은혜받지 않았을때 어떻게 했는질 생각해 보십시요. 말씀을 듣고 마치 마음밭에 길가에 떨어진 말씀처럼 금방 사라져 버리고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때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됐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런 삶의 상황이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데 또다른 증거가 필요합니까? 여러분의 삶 자신이 그것의 증거가 되고 있는데, 그러니 자기 자신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무엇을 깨닫겠느냐고요.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겁니다.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이게 곧 갑니다. 제가 그거를 위기처럼 느끼는데 저보다 연세 많이 드신 분들은 얼마나 심각하겠어요. 살 시간이 없어요. 6시에 일을 시작해서 6시에 끝난다고 하면 자기 나이가지고 시간표를 그려봐요. 오전에는 정신 못차리고 잠안깨서 까불고 놀고, 멍청히 보내고, 친구찾아와서 놀았다 해도 이제 해가 기울어서 2시 3시 넘어가면 언제 이 많은 인생의 밭을 갈려고 해요. 이제는 뉘우치는 마음으로라도 배나 열심히 살아야죠. 그렇잖아요. 이게 심각한게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생활하고 죄와 싸우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던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해도 별로 성화의 생활에 진전이 없을 경우에 진전이 없는 이유는 무엇때문이죠? 죄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고 앞으로 전진할려고 하는거죠. 그러니까 안되는거죠. 그러니까 갈등만 계속 생기는 거예요. 갈등이 많이 생기면 그 다음에 영혼이 싫증을 느껴. 싫증을 느끼는데 육체가 게으름에 빠지고 싶어해. 그럼 둘이서 손을 잡는 거야. 영적인 싫증과 육적인 게으름이 손을 잡으면 그러면 모든 신앙적인 목표를 포기하는 거예요. 죄의 물속에서 그래도 거룩하게 살아보려고 막 몸부림치면서 이제 막 몸부림치면서 영적인 열심이 나오려고 그래. 근데 바보같이 가방을 맸는데 그 안에 금이 들었어. 그걸 빨리 버리고 뛰어올라와야 하잖아 근데 그걸 못버리고 갈등을 계속 느끼면서 허우적대는거야. 근데 인간의 힘이라는게 한계가 있잖아. 나중에는 지쳐서 수영을 못한다고. 수영을 못할 때 육체의 게으름이 와가지고 목에다가 커다란 바위금메달을 달아주는거야.
그러니까 영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죄를 버리지 못해서 기력이 쇠했는데 거기에다가 육체의 게으름이 와가지고 큼지막한 돌맹이 가방을 하나 목에다 걸어주는거야. 그럼 어떻게 되요. 바다 속으로 잠수하는거야. 못나오는 거죠. 그걸 여러분들이 기억한다면 얼마나 이 게으름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한다구요. 근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실패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그 실패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잖아요. 아무리 많이 설교를 듣고 그럼 뭐냐 이거예요 뭐가 바뀌었느냐 이거예요. 이 설교 들으면서 아멘아멘 하면 뭐하냐구요. 삶으로 아멘을 해야지. 하나님앞에 고쳐야 해요.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게으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지혜자가 이거를 간파한겁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마음을 둔거예요. 여러분들도 자신이 게을러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걸 보고 사진으로 찍어서 깊이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 보관해야 해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영적인 게으름가운데 빈둥거린 것은 꿀처럼 달았지만 그 휴식이 끝나고 나서 온 영혼이 견디기 힘든 죄의 가시나무에 뒤엉켜있는 것을 발견하죠. 그리고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죠.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가운데 살려주셨잖아요. 근데 다시 올라오잖아요. 그러고 하는 얘기가 다 사는게 이렇지 뭐. 그러고 사는 사람가운데서 하나님이 뭘 기대하시겠느냐 하는거죠. 그러면서 이제 시인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면 생각이 깊었노라. 그러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 뒤에 나오는 내가 한 교훈을 취하였노라. 같은 얘기죠. 마음에 두고 한 교훈을 취했어요. 그래서 깨달은 교훈의 결론이 뭐자면은 자자, 졸자, 눕자 이게 죄에요? 아니 좀더 졸자 그러는게 죄냐구요. 좀더 자자, 좀더 눕자 이건게 죄입니까? 죄 아니잖아요. 근데 이게 인간을 파멸로 데려간다는 것이죠. 한잔술이 죄입니까? 아니잖아요. 고통가운데 맞은 한방의 아편이 죄입니까? 아니잖아요. 근데 그것이 습관적이 되고 나면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려서 폐인으로 만들어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면 조는게 죄냐, 자는게 죄냐 이렇게 묻지 말고 그게 어디로 가는 징검다리냐 그렇게 생각을 해야되.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구요? 가난이 밀려오고 궁핍이 밀려온다 이거예요. 같은말의 반복이지만 도적과 같이 강도와 같이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의 좋은 것을 강탈해 가는 거죠. 군사와 같이 온다는 것은 무슨얘기죠? 불가항력적으로 온다는 거예요. 자기의 의사에 반해서 자기의 좋은 것을 빼앗아가고 그러니까 강도죠. 사정해서 얻어가면 강도가 아니죠. 구걸꾼이지. 그리고 군인들이 쳐들어오니까 불가항력적으로 탈취를 당하는 거죠. 그건 어쩔수가 없는거죠. 그러니까 게으름가운데 밭을 가꾸지 않아서 가시덤불이 올라오고 온 지면에 잡초가 덮이게 되었는데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 내 밭을 도와달라고 이런 기도는 하면은 시간만 버리는 거예요. 왜 기도를 해. 가서 풀 뽑으면 되지. 정말 여러분들속에 죄에 대한 가책이 있으면 부지런히 죄죽임을 위한 삶을 살아요. 그러면 나중에 그 가책도 다없어져요. 은혜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이미오래전에 나를 용서하셨단 사실이 느껴진다고. 한쪽으로는 죄에 대한 욕망을 계속 가지면서 용서만 해달라고 주님이 나를 막아달라고. 그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하신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셨지만 우리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걸 기대하면 안되. 하나님이 그렇게 안건져 주신다고. 그러면 부지런히 살아야죠. 그죠? 그래서 하루를 살고 나면 좀 피곤해야 해요. 노예들인데 하나님섬기면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안피곤하겠어요. 그러니까 피곤하단 말 너무 하지 말아야 해요. 열심히 일했는데 피곤을 딱 느낄때 아, 정말 보람있다. 우리 주님을 위해서 오늘 진짜 열심히 살았다. 그러니까 힘들고 피곤하고 안피곤하고 그런게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인가? 그리고 피곤과 고통의 정도가 매일 기도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지나친 것이냐 적절한 것이냐 그게 문제이지 절대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안락을 누리고 이렇게 사는 거기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린 것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절대 자기 자신을 학대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의무에 충실하라는 이야기죠. 의무에.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지금 가장으로서 내 의무가 무엇이고 교회의 일꾼으로서 내 의무가 무엇이고, 하나님앞에 한사람의 자녀로서 내 본분이 무엇이고 그리고 내가 정말 이 세상에서 막되먹은 사람으로 살지 아니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의 삶을 이어가려고 하면 성경에서 나에게 마땅히 부과하는 의무가 무엇인가 그것을 보고 그 의무의 기준에 맞춰서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다 잘 살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못살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저않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의무가 무엇인가 그거를 보면서 그 의무들을 내가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가를 점검을 해보라는 이예기죠. 여러분이 정말 게으른 사람들이라면 이미 마음이 의무에서 떠나간 사람이예요. 자기 자신이 하나님앞에 가진 의무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으니까 책임지세요 하는 하나님의 의무를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그 이상의 삶을 안산다면은 그것은 게으름을 패역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이 부지런한 삶과 영적 생활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냐 하면 제 경험에 의하면은 성경도 그걸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만은 주님을 위해서 목표를 정하고 의무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때에는 깨어짐이 풍부해요. 최선을 다했는데 영혼들이 안돌아오는 거예요. 밥을 굶고 말씀을 준비하고 눈물을 흘려서 편지를 쓰고 심방을 하고 다독거려서 끌어않고 기도해주고 선물을 사주고 진짜 창자라도 잘라내라면 잘라낼정도로 최선을 다했는데 영혼이 변화안되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앞에 실망할 것 같은데 절대 안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앞에 잘 깨어지는지 몰라요. 왜? 하나님 이렇게 내가 최선을 다해서 했지만 역시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제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근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하나님앞에 그런 깨어짐이 없어요. 왠지 아세요? 내가 아마 개겼기 때문에 잘 안됬을거야. 내가 좀 열심을 내면 될걸. 그러니까 이상하게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내가 대충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안하고 자기 혼자 다 할려고 했던 것처럼 마음을 쏟아서 성실하게 일한 사람들은 거꾸로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그러구 믿음이 너무 좋아서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내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굉장한 아이러니예요. 그러니 여러분 기억해보세요. 가족들의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흘리지 않죠? 왜 그런지 아세요? 가족들을 위해서 부지런히 하는일이 없을때 그런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엄마, 예수믿으셔야 해요. 엄마 교회 나가세요. 엄마 내가 오늘 엄마한테 사영리 전해줄께요. 이것만 다 들어주면 엄마 용돈줄께요. 얘야 너 내 동생이지 언니 말좀 10분만 들어봐라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족 전도가 자기 힘으로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기도하다가 가슴이 막 저미는 거예요. 그러다 가족 죽으면 어떻해요? 주님을 우리가 무슨 낯으로 뵈요? 그렇게 수많은 날동안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는데.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의 남은 가족들이라도 잘 전도하고 구원얻게 해야해요. 근데 그렇게 가족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고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면 굉장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이예요. 하나님께서 하시겠지요. 안하시잖아요 여태까지. 전도와 성화는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을 사용해서 하시는거예요. 난 말이예요 가끔씩 우리교회 보면은 그 사람이 우리교회도 안다니는데 찾아와서 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교회에 사시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데 이 교회에서 전도좀 해주실수 있습니까? 이 부탁받고 우리들이 안간 집이 없어요. 아세요? 금방 숨넘어가서 죽어가는 집도. 여러분 그렇게라도 한번 해봤어요?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내려가서 동네 가까운 교회에 가서 제가 기도는 하는데 자주와서 편지도 하고 애를 쓰지만 어떻게 제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 안되서 그러는지 가족들이 제 말을 안듣습니다. 맨입으로 얘기하기 뭐하면은 귤이라도 한상자 사가지고 가서 전도사님, 정말 부탁합니다. 목사님, 정말 부탁합니다. 함자는 이렇게 되구요, 집위치는 여기구요, 집안 내력은 이렇습니다. 그렇게라도 한번 해봤냐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간절히 가족들을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은 통곡하면서 기도가 터져나와요. 이게 모든방면에서 이래요. 그러니까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실천을 통해서 그 진수가 무엇인지 맛보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게으름은 그 진수를 맛보지 못하도록 실천을 안하게 만드는 독약이예요. 그러니까 참다운 신앙의 맛을 볼수 없게끔 우리를 아예 진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거라 이거예요.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에 관한 책 읽고,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 많이 한 사람 데려다가 특강 즐기고, 거룩해져라 하면 거룩에 대한 강의나 들을려고 하고, 충성해라 하면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 데려다가 간증하라고 하고 즐기고 말이죠. 그게 뭐냐구요. 우선 자기자신의 삶에 대해서 의무를 제시하고 이 의무에 내가 충실하고 있는가를 봐라 이거예요. 그리고 충실하지 못하다면 깊이 회개하고 충실하지 못하게 하면 시간이 없어서 충성을 하지 못한다면 이것보다 사소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일을 집어치우고 여기에 쏟아부어야죠. 돈이 모자라면 이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에 쓰고 있는 돈을 절제해서 여기에 부어야죠. 건강이 필요하다면은 이거보다도 더 필요없는 일에 소비하는 정력을 더 이상 낭비하지 말고 여기에 쏟아 부어야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앞에 살아야죠. 우리가 어떻게 온전해질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많이 살고 열심히 몸부림치면서 분초를 아껴가면서 살려고 몸부림을 쳐도 너무 죄송해요. 너무 죄송해요. 주께로부터 진 빚,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무지와 세상사랑과 방황속에서 허비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도 갚을 시간이 얼마 안남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게으른지 보십시요. 그리고 얼마나 자기 사랑에 눌어붙어 있는지 보십시요.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시간은 주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편지지와 같고, 시간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으면 주님앞에 춤추고 노래해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는 무대와 같아요. 이제 이것이 지나고 나면은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몇해전에 얘기했지만 말이죠. 노동운동 많이 하던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 만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고 싶은데 중학교밖에 못나왔어요. 그러니 목사가 될 수가 없죠. 근데 이사람이 하는 얘기가 그거예요. 저는 목사는 못되겠고, 주의 일을 많이 하고 싶은데 이것밖에 없어서 전도하고 다니는데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가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배운것도 없고 갖춘것도 없어서 더 크게 주님의 일을 할 수는 없는데 그래서 언감생심 하나님이 저를 크게 써주시도록 그렇게 기도도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혹시 당신이 귀한 사명을 맡겨주신 사람 가운데 게을러서 그 일을 잘 안할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드신데 그 사람 궂이 쓸려고 하지 마시고 절좀 대신 그 자리를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근데 그 잡지를 제가 한 10년전에 읽는데 눈물이 왈깍 쏟아졌어요. 아 진짜 그렇겠구나, 주님이 그렇게 쓰시고 싶어하시는데도 뺀질대고 그렇게 게을러 그런사람을 보면서 주님이 고통을 느끼실때에 이 사람의 이런 기도를 들으시면서 그때 그때 응답을 안해주시니까 우리같은 사람이 이렇게 남아있지 만약에 그때 그때 응답을 해주시면 우리는 벌써 날라갔을거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세워주신 자리가 하찮습니까? 우리에게 세워주신 자리가 귀하지 않습니까?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을 다 주님 드려야죠. 그 예수님 곁에 십자가에 함께 달렸다 한 강도는 지옥으로 가고 한 강도는 회개하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갔습니다.
평생동안 지 좋은 짓 하고 살다가 하나님앞에 선한 일은 한번도 못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알아보고 그분께 회개하고 그분께 자비를 구했더니 하필이면 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버려두고 그 천하에 나쁜놈, 강도 그놈을 데리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첫 번째 동반자로 삼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랑이 많으시니까 기쁨으로 데려가셨겠지만 그 강도는 일생을 살면서 한번도 누구를 섬겨야 할지를 몰라서 사람을 죽이고 가정을 파괴하고 그렇게 나쁜짓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왔었는데 이제 비로소 누구를 섬겨야 할지 십자가에서 깨달았습니다. 자기처럼 죄인으로 몰려서 죽어가시지만 죄인인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분은 절대 자기들과 같은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욕하고 때리고 침뱉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많은 십자가 아래의 사람과 옆에 매달려서 하나님께 욕을 하는 자기들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간절한 기도를 보면서 이 죄인의 마음에 깊이 묻혀 있던 선한 양심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일생동안 같이 동업하며 살아온 동료를 꾸짖으면서 이 분은 잘못하신 것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이렇게 죽거니와 이분에게는 옳지않은 일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때 날 생각해 주십시오. 구원해달라고도 말을 못했습니다. 나좀 생각해 주십시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그 강도가 얼마나 안타깝게 하늘나라에 갔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서 이제 비로소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고 누구를 위해서 충성하고 누구를 위해서 부지런하고 누구를 위해서 희생하야 하는지를 알았는데 주님이 가자고 하십니다. 일년만이라도 살아서 예수님이 남기고 가신 고난의 십자가를 바울처럼 지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며 자기와 같은 강도들에게 복음 전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사람에게 만약에 열린교회 마당이라도 쓸다가 천국에 가라고 했으면 뛸 듯이 기뻐했을겁니다. 토요일날 청소라도 하면서 한 일년 섬기다가 가라고 했으면 아마 뛸 듯이 기뻐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강도보다는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길지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제가 어느날 한 사오년전에 깊이 내린 결론이 나를 위해서 먹고 마시고 공을 들인 시간들은 아무것도 내 인생의 시간들에 남겨준 것이 없더군요. 자기를 너무 사랑하지 말고 그리고 힘있는데로 부지런히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쓰다가 주님 나라에 같이 갑시다.
8. 수면생활의 방탕함을 면하라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잠20:13)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경향성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실제적인 삶으로 어떻게 하든지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이 게으름 자체도 인간의 부패한 본성 속에 내재하는 경향성이기 때문에 게으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그 게으름이 자신의 삶의 모든 행동 속에 골고루 베어서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게으름이 영향을 강력하게 미치는 곳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취미활동이나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일에는 이 게으름이 베어들지 않고, 대부분 자기로서 마땅히 행하여야할 좋은 의무에 베어드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그랬거든요. 그렇게 게으른 사람이라도 부지런한 것이 있는데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일에는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게으른 것은 아니다. 게을러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한다. 특히 게으른 사람들이 어떤 취미에 빠졌을 때 그 취미 생활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게으를 것이라고 생각이 안들 정도로 부지런하다. 그중에 하나가 화투다. 게으른 사람도 화투할 때는 어쩜 그렇게 손이 빠른지 몇 번을 흉내를 내보려고 해도 잘 안된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이 화투를 하기 시작하면 빨리 빨리라는 말을 많이 한다. 빨리빨리 한판씩 끝나야 돈을 버니까 굉장합니다. 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노름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지도 않고 계속 앉아서 3일씩 4일씩 그렇게 노름을 한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노름이 끝나고 나면 손마디의 살이 쫙 빠지고 손가락이 노란색으로 변한답니다. 앉은자리에서 음식 시켜다 먹고 거기서 화투치고, 거기서 담배피고, 거기서 술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열심히 그 사업에 몰두한답니다. 놀면 뭐하겠어요? 한푼이라도 벌어야죠. 그렇게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게으르단 느낌을 가질수 없다. 그래서 이 게으름은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 베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무를 행할 때 그 사람의 게으름이 구석구석에 베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광경을 보면서는 그 사람이 게으른지 부지런한지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기 싫거나 하기 어려울 때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아주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교회를 두 번 옮겼습니다. 옮기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일을 거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힘이 너무 없고 육체적으로 약해서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함께 일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릴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면 그만하라고 할때 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조금 하다가 그만 두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자기는 없어져 버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딴사람한테 일을 부탁해놓고 부탁한 사람이 일을 다하면 그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보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아주 잘 보여준다는 것이죠. 전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만든 물건들이 쉽게 망가지고 성능이 나쁘다든지 하면은 그렇게 화가나고 마음이 상합니다. 왜 이렇게밖에 못만들까. 좀더 튼튼하게 만들면 이 물건을 자기도 쓰고 다른 사람에게 권할텐데 말이죠. 모든 기업을 하는 사람이나 노동자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는 정말 장인정신을 가지고 철저하게 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제품을 만들어 한국 마크를 붙여서 전 세계에서 호평을 받는 물건중의 하나가 오토바이 헬멧입니다. 세계시장에서 한국제 헬멧 하면 모든 구라파 사람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헬멧입니다. 그 공장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피나게 노력을 해서 세계최고의 헬멧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들만 열심히 한다면은 여러분들의 인생이 결코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 바라는 바의 선택에 대해서 여러분들을 전혀 신뢰할수 없기 때문이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만 선택합니까? 어떤때는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줄도 모르고 선택하는 적도 있지만 선택하면 큰일나는 일인데도 여러분이 좋아서 하나님 얼굴에 침을 뱉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저질르고야 마는 경우 있죠. 그런 것이 여러분의 정체인데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인생이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기준 자체가 우리의 마음의 소욕이 아니라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과 온전히 일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의 성화가 그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이렇게 온전한 삶에 대해 하나님과 같은 소원을 품게되죠.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는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해서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것만을 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기 싫은데도 그 사람이 해야 할 것이라면 발로 차고 쥐어패서 그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설득을 해서 그 사람의 온전한 의무가 무엇이고 그것을 왜 행해야 하는가는 설득해서 남이 선택해서 그 속에 넣어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설복을 통해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는 그것이 인격적으로 신앙을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만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알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들 속에 우리들이 충실하게 그 일을 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내가 좋아해서 하고 있는데 그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을 경우에는 하고 싶은 마음의 지속적인 소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꺾어 버려야지만 계속해서 그 일을 안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과 그 일을 계속해야겠다라는 의지의 행사가 지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안하고 있지만은 해야될 일들을 보여주고 그것에 대해서 할 힘이 없을때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그것을 해야할 의지가 수시로 꺾일 때 마다 다시 그 의지를 북돋워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우리를 내적으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도 역시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협력을 통해서 성화의 과정에서 이루어나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가난할까 두렵다 이렇게 말하는데 사실 히브리 성경에 보면은 가난하지 않도록 잠자기를 사랑하지 말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타락한 인간의 일반적 성품 하나가 나오는데 그것은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병적 현상에 의해서 잠을 안자거나 못자는 것 말고 인간의 내면의 부패성 속에는 잠자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잠자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고 또 하나는 영적으로 잠들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고 하는 말씀이죠. 육체적인 잠을 가지고 말을 하는데 정말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보통사람의 모습입니다. (예화. 목사님 형제들 잠 많은 얘기.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 때문에 힘들었던 얘기)
어느 정도 피곤하고 잠이 온다는 것은 육체가 쉬어야 한다는 의사표시인데 저는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넘는 수면생활의 방탕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방탕이라는 그 자체가 일정한 도를 넘어서 자의적으로 기준이 없이 마구 헤매도록 육체를 내버려 두는 것이 방탕입니다. 동물적인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게 먹는것, 자는 것, 변을 보는 것입니다. 동물들의 특징은 무엇에든지 구애받지 않습니다. 돼지가 자명종 틀어놓고 자는 것 봤습니까? 동물들의 삶에 어떤 규칙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데 잠에 대해서 방탕한 수면생활을 하면서 맑은 영성을 소유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면 잠자는 것이 그만큼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둡고 둔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잠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표시로 내려 주시는 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그랬죠.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과의 교제안에 사람들에게 영육간에 안식을 주시는 방편으로 제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푹 잠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른 성경구절은 몰라도 그 성경구절은 확실히 알고 있는데 그 성경구절을 잘못 사용한다 이거죠. 더욱이 예배시간에 자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잠을 주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얼마나 주님앞에서 평안을 느끼면 자겠나 하는데 그러면 유두고는 왜 떨어져서 죽었나요? 그런거는 굉장히 나쁜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양심이 그렇게 인용하면 안된다고 증언을 하는데 거기에 거스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먹거리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들먹거리는 것처럼 아주 허탄한 짓들이라 이거죠. 그리스도인이 농담가운데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위엄을 생각하고 그 앞에서 옷깃을 여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자기의 양심이 그게 아니라고 증거를 하는데 그렇게 헛된 이야기를 하면 어떻하겠습니까? 그러면 예배시간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바보같은 생각들을 서슴없이 부끄럼없이 그렇게 하냐 이거죠. 그렇게 어거지를 부리면 안된다 이거죠. 그리고 또하나의 잠은 죄악의 잠입니다. 죄악의 잠은 영적으로도 나타나고 육적으로도 나타나죠. 대표적으로 죄악의 잠을 잔 사람이 요나같은 사람이잖아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을 받은 선지자가 다시스로 가면서 풍랑이 일어났는데 배밑창에 드러누워 있는데 거기서 골아떨어진 잠을 풍랑이는 바다에서 배위에 몸을 싣고 곤히 주무시던 예수님의 수면과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영혼의 평안이 가져온 잠을 경험한 것이고, 요나의 잠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니까 심령이 굳어져서 그 굳어지고 강퍅한 심령에서 오는 죄악이 주는 평안함이었습니다. 풍랑이 이는데도 그는 양심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요나야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는 양심의 외침을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굳어진 상태에서 잠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습니까? 요나의 잠이 바로 그런 종류의 죄악의 잠입니다. 그런 종류의 잠이 영적으로도 많이 나타나죠.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경고하지 않는 선지자의 영적인 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 앞에 깨어나지 않는 영혼의 깊은 잠.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죄악의 잠입니다. 모든 육체의 게으름에서 오는 잠, 이 수면의 방탕함은 반드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옳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밤에 그렇게 늦게 잔 것도 아니고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다가 골아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꿈까지 꾸고, 침 흘리고, 이도 갈고, 엉금엉금 기어서 윗목의 주전자의 물까지 마시고 그리고 자다가 자다가 허리가 아파서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다 그래도 잠에 취해서 못 일어나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할 수 없이 일어났더니 아침 10시였습니다. 그때 여러분 상쾌한 아침이 되나요? 아니죠? 양심이 증언해요. 찬란하게 뜬 태양이 ‘그렇게 살아도 되겠니?’ 그러고 내려다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고 그날 저녁에 예배당에 가서 풍랑과 시련이 많은 세상에서 이기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 힘을 주십소서라고 기도할 때 정말 그 기도 속에 힘이 들어갑니까?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 여기에서 보면 좋아한다고 나왔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테헤하브예요. 아하브라는 말에서 왔는데 아하브는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때 쓰여졌던 단어하고 똑같은 사랑하다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잠자기를 사랑하지 말아라. 인간에게는 그런 특성이 있다 이거죠. 게으른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서 정욕을 따라서 껄덕거리면 살든지 아니면은 퍼질러 자면서 지내든지. 게으른 사람에게는 그 두 가지 밖에 그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납니다. 그 이외의 삶은 게으른 자의 삶의 본성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고쳐야할 분명한 죄입니다. 그 게으름에서 모든 영혼의 해악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인간의 부주의함이 게으름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렸죠. 자기는 피해를 본 당사자라고 생각하지만 피해를 본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주의함을 선택한거죠. 왜? 주의깊기 위해서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모든 것이 깨어있어야 하니까 그것이 힘드니까 부주의함을 쉽게 선택한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이건 분명한 죄이고 여러분들이 게으름과 화해하는 한 복음과 화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게으름과 화해하고 살아가는 한 참된 영적인 생명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그 죄를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가슴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많은 날들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날들이지 퍼질러 자라고 주신 날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방탕한 수면의 생활로 여러분들의 시간을 없애버리고 있다면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만약에 하루에 한사람이 한 시간씩만 필요이상으로 수면을 취한다면 일년이면 사백 시간이고 그리고 십년이면 사천 시간입니다. 그 사람이 육십년 정도를 철들어서 활동하다 죽는다면 이천사백시간입니다. 우리들이 하루의 일과중에서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쓸데없는 생각하는 것 빼놓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는 시간들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보고 그것이 이천사백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세월이 흘러가야 될지를 생각해볼때 10년 20년은 간단하게 잡아먹을 수 있는 시간이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단 10시간도 하나님을 위해서 섬긴 적이 없는 사람도 있으니 이천사백시간이면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살아갔던 사람의 일생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요. 저 황금같이 아까운 시간을 어떻게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저렇게 시간을 쓰도록 하나님이 권한을 안주셨는데 그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거예요. 죄가 무엇입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 인생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커다란 죄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를 왕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자기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도 참고 인내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냐는 것이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영혼이 고사됩니다. 여러분도 아마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한가로웠던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교제가 풍성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교제의 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께 부종하는 우리의 간절한 사랑이지 시간이 아니에요. 전 개인적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한번 화장실에 앉으면 한 컵씩 피를 쏟아내야 할 정도로 몸이 극도로 연약하고 과로한 가운데서 생애 최고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면서 살았어요. 지금도 그것을 그리워합니다. 시간이 많으면 뭐합니까? 두 시간 세 시간씩 엎드려 있어도 횡설수설하다가 태반은 졸고 태반은 딴생각하다가 아주 찝집한 마음으로 일어서서 새벽기도를 털고 나가는 그런 식의 마음의 바침이 없는 기도생활이 하나님과 가까워집니까 아니면 열심히 살아가는데 너무 시간이 없어 너무 가슴이 아퍼 어느 한순간에 교회당에 들어왔는데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나에게 짐들이 너무나 많고 십자가가 생각이 나 그러면 무릎 꿇고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팍 터져요. 견딜수 없는 내 마음에 있는 무엇이 수문을 열 듯이 확 쏟아져 나오는 그런 10분의 기도가 앞전의 기도로 한달을 하는 것보다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안되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속에 두 가지 이런 의문이 들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은혜를 받으면 잠이 준다는 겁니까? 두 번째는 그러면 도대체 얼마까지 잠을 자야 한다는 겁니까? 답변을 해드릴께요. 우선 첫째, 은혜 받으면 잠이 줄어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은혜 받는다고 해서 금방 자신의 본성이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다. 은혜 받아도 퍼질러 자던 기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자야 됩니다. 그래서 가끔 주일날 왜 못나왔냐고 하면 자느라고 못나왔다고 하는 사람 있거든요. 그러면 참 마음이 아프죠. 그게 목사가 물어봤으니까 그렇게 대답하지 주님이 ‘얘야 너 왜 나를 경배하지 않았니?’ 하셨을 때 ‘자느라고 그랬죠 다 아시면서 왜 그래요.’ 그럴 수 있겠느냐고요. 하나님 앞에. 그러면 뭐냐면 이건 성화와 관련된 겁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수면생활의 방탕함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 은혜가 정말로 그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성화의 작용을 동반하는 은혜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은혜를 깊이 받았다면 그럴 수 없어요. 자신이 미워서 그렇게 살수 없어요. 이런거죠. 내가 주님을 만나고 성화되어 가거든요. 거룩해져 가죠.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의 연합이 증진되어 가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게 사랑이예요. 왜 편치않느냐면 사랑을 하면 뭔가를 해드려야하잖아요.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저도 맨처음에 은혜를 받았는데 뭐든 해드려야되겠는데 뭐가 있어야죠. 돈이. 그러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 이렇게 하나님앞에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뭘 해드릴수 있을까.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요. 근데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계획을 성취할 수 있는 장이예요. 그것이 없으면 계획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시간이 없으면 그것을 펼칠수가 없어요. 불같이 뜨거운 마음이 있어도 펼칠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달렸다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올라간 강도가 얼마나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겠어요. 근데 허락이 안되잖아요. 시간이 없으면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삶의 계획을 다 가지고 있고 선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도 어느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면 소용없는거에요. 그 스케쥴은 소용없는거예요.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획과 모든 뜻이 있어도 시간이 없으면 펼칠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것은 너무너무 소중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우리의 커다란 자본이 되는거예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참 부럽죠. 주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날이 참 많으니까요. 그러나 젊음이 모두 아름아운 것이 아니에요. 정신 못차리고 술취하고 방탕하게 살면 걱정이에요. 왜냐면 저 인생이 계속해서 명이 길어서 오래 살 때 받게 될 하나님의 불명예가 얼마나 클까 하는거죠. 그래서 제가 언젠가 한번 전국의 의사들이 모여 수련회를 하는데 그랬어요. 당신들 사람 자꾸 고치는데 책임질 수 있느냐? 방탕하게 살고 살인하고 나쁜짓 하면서 사는 사람들 계속 좋은 의술로 고쳐주면 살던대로 계속해서 나쁜 짓 하면서 살텐데 당신이 고쳐놓은 사람이 계속 그렇게 나쁜짓 하면서 사는 것 책임질수 있느냐고 했더니 의사들이 굉장히 황당해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는게 이거에요. 예수님처럼 사람의 몸만 고치지 말고 몸이 약해져서 마음도 무너졌을때에 몸과 마음도 아울러 복음으로 고쳐서 이제 건강을 되찾은 후에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방향을 전환하는 사람들로 그렇게 고쳐주도록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의사로 불러주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그때서야 굉장히 일그러졌던 얼굴을 피면서 아,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구나 그런 눈빛이더라구요. 그래요. 맞아요. 시간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저절로 잠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으로 정해지게 되면 그 목표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삶이 재편되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본성을 변화 시켜주신 사람의 모습이에요. 답이 되었죠. 그러면 목사님, 은혜를 받았는데도 계속해서 수면생활이 방탕한데 그건 제가 성화가 덜 됐기 때문인가요? 그걸 이제야 깨달아요? 그걸 이제야 깨닫느냐고. 죄 때문이에요. 하나님 앞에 목표 없이 살던 옛 생활의 무 목적한 방탕함이 성화되어가고 있는 도중에도 여러분 속에 잔존하고 남아서 여러분들을 그 옛날의 방탕했던 수면생활로 데려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이것도 죄 죽임의 교리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제가 싸워야하겠네요? 그럼요. 싸워야 합니다. 그리서 많이 잠을 자는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잠을 자는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많이 잠을 자는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고 어떨 때 그렇게 많은 잠을 자는지 면밀히 연구해야 합니다. 저녁의 식생활이라든가 수면습관이라든가 이런 기타등등을 다 연구해서 내가 육체를 어떻게 다룰 때에 수면생활의 방탕함이 극치에 달하는가를 연구를 해서 세밀하게 분석해서 내 속에 있는 방탕한 수면생활이 지탱하고 있는 성향을 약화시키고 주님의 은혜를 강화시켜서 나로 하여금 그런 수면생활의 방탕에 흐르지 않도록 자기를 무섭게 채찍질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산다면서요? 주님이 어떤 이유로든지 그렇게 방탕한 수면생활을 기뻐한다고 확신하면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없죠. 여러분의 양심이 그이 옳지 않다고 증거해요. 증거해요. 언젠가 깊이 후회하게 될 겁니다. 죽여야 할 대상이에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자기의 육체의 요구에 굴복해서 푹 자는 동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자기와 싸우면서 사는 충성스러운 사람과의 삶을 비교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새벽에 고단하다는 이유하나 때문에 그냥 퍼자는 동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충성 하면서 일어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 나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단하다는 이유로 여러분들이 언감생심 낮잠도 자는데, 그렇게 하는 시간에 이 사람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혹은 교회의 사역속에서 헌신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해서 어떻하면 하나님께 극도의 영광을 돌릴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10분을 아껴쓰며 재깍재깍하는 초침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요. 고단하니까 여러분들은 저녁때 들어와서 아무생각없이 세수만 하고 와서 tv 보다가 그냥 끄고 자지만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그 밤에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졸음이 오지만 졸음을 쫓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내 마음에 은혜를 채운 다음에 잠들어야겠다고 하며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을 탐구합니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 두사람을 하나님이 똑같이 대우해 주시겠냐구요. 그렇게 하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요. 그러면 그렇게 산 사람은 너무나 억울하잖아요. 뭔가 하나님이 달리 대해주셔야지 한사람은 자기 수면생활을 방탕하게 살았고, 한사람은 끊임없이 싸움을 이기고 투쟁하면서 매순간을 쪼개서 초침소리를 들으며 주님을 위해서 살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두 사람을 똑같이 대우해 주실수 있냐 이거에요. 나는 이세상에서도 하나님이 그 두사람을 똑같이 대우해주시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천국에 가서도 두사람이 똑같을수 없다고 생각해요. 달리 상급을 받아야 된다고 난 얘기하고 싶어요. 옳지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초침소리를 귓속에 떠올리면서 재깍재깍재깍하는 이 초침소리가 무섭지 않아요? 기차소리 같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영혼속으로 우릴 데려가는 초침소리에요. 두렵지 않아요? 어떻게 하나님이 두사람을 똑같이 대해주실수 있겠어요? 전자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엑스트라에요. 후자의 사람은 항상 주연이에요. 예를 들어볼테니까 들어보세요. 안믿는 가족이 있어서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쳐요. 하나님이 절대 전자의 사람을 가족 구원 계획에 있어서 주인공으로 사용 안하셔요. 절대 안하십니다. 후자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보면 후자의 사람의 기도에 의해서 가족들이 구원받거나 그 사람의 감화의 인도에 의해서 가족들이 구원받지 절대로 안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내가 어느 한기관을 맡았다 가정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전자의 사람을 거들게는 할수 있어요. 그러나 주인공으로는 사용안하세요. 후자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영원히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리 탁월해도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후자의 그렇게 초침소리를 떠올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살아가는 부지런하고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절제하는 사람의 딱가리에 불과하다구요. 항상 하나님은 그렇게 사용하세요. 그것도 잘 하면 그래도 괜찮게요. 안되요. 그렇게 살면 큰일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십니다. 은혜를 주셔도 잠을 좋아하고 자기의 육체를 중히 여기는 게으름과 공존하는 마음의 틀자체가 신령한 틀이 아니고 부패한 틀이에요. 그래서 그런 마음의 틀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도 보존이 안되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많이 거두어둔 만나가 해가나면 썩듯이 그렇게 속에서 썩어요. 안되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이 이거죠. 그럼 도대체 우리보고 자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에요. 자야죠. 자야되요. 근데 잠의 목표가 뭐냐면은 잠을 즐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생활할수 있도록 충전시키는 용도로 잠이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시험해 보셨을지 모르지만 잠은 계속 방탕하게 한번 끌러주면 계속 늘어납니다. 계속 늘어나요. 여러분들 모두 12시간씩 잘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진짜요. 가끔 어떤 사람은 그러죠. 8시간 이상씩 안자면 큰일난데요. 물론 인정해요. 그 사람이 종합진단이나 어떤 진단을 해보면은 병리학적으로 그사람속에 어떤 질병이나 연약한 부분이 있어서 그렇게 많이 자지 않으면 도저히 안되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인정해요. 근데 그것은 생각보다 아주 소수입니다. 근데 제가 만약에 그 사람의 경우라면 저는 잠을 많이 자서 달래기 보다는 생사를 걸고 그 체질을 바꿔 달라고 하나님앞에 병고침의 은혜를 구하겠어요. 왜?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살아요? 내가 탁월한 능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잠깐의 시간을 가지고 엄청나게 부풀릴수 있는 그런 권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기의 그 연약함에 적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이 그 섭리가운데 그렇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면 그것도 순종해야 할 문제지만은 기도해 봤냐 이거죠? 하나님, 의사가 그러는데 저는 11시간씩 안자면 안됩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나좀 고쳐주십시요. 눈먼자, 병든자도 고쳐주셨는데 이건 그것보다 쉽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좀 고쳐주십시요. 그 남은 시간을 저를 위해서 쓰지 않고 주님위해서 쓰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매달리면 고쳐줄것이라고 믿어요. 그것이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자야죠. 자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방탕한 기준이란 뭐냐면은 다음날 하루를 영위해나갈수 있는 에너지가 채워졌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수면을 거기서 멈춰야지 그 이상 수면을 enjoy하는거는 안된다 이거에요. 예외가 있어요. 이렇게 됩니다. 살아가다가 피로가 아주 누적이 됩니다. 그때 제가 잘 쓰는 표현이 억장이 무너진다고 하는데 여러분 그말이 무슨말인지 모르죠? 전 저자신이 느낍니다. 어느날 살다가 억장이 무너지는것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어요. 이게 무슨말이냐면 피곤한게 아니라 피곤이라고 하면 의학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피가 혼탁해지고 뭔가 밸런스를 잃은 것 같은 것들이 피곤함이라면 제자신이 의학적인 용어로는 설명을 못하겠지만은 뭘 느끼냐면 피곤한 것이 아니라 기력이 다하였다 기력이 거의 떨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느껴요. 쉽게 얘기하면 기가 다 빠졌다고 하나 그런걸 느껴요. 그럴 때는 어떤 증상이 오냐하면 피곤이 쌓였는데 기력이 남아있고 피곤할때는 자고 일어나면 개운합니다. 그런데 이 기력이 떨어지고 피곤할 때 잠을 자고 쉬면 계속 까부러지면서 계속 더 밑으로 내려가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뭐냐면 건강의 위험신호에요. 이런 위험을 제가 가끔 느끼거든요. 이럴땐 어떻게 하냐면은 며칠 자야합니다. 며칠 계속 자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은 일단은 일상적인 수면생활로는 떨어진 기력이 보충이 안되니까 우선 공기도 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일로부터도 좀 끊어지고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한달에 한번씩 그러면 안되죠. 그러면 둘중에 하나죠. 아주 기적적으로 생명을 부지하면서 살고 있던가 뭔가 좀 잘못된 사람이죠. 그래서 땀을 쫙 흘리고 치열하게 살고 난 다음의 휴식이 정말 아름다운 것이지 그냥 막 비비면서 살던 사람들의 휴식은 더러워요. 그래서 잠은 자야하는데 두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때에 잠의 정도가 어느정도여야 하냐면은 깨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되서도 안되고 그건 너무나 더 잠을 자는 겁니다. 그리고 다음날 하루를 의욕있게 살수 있을 정도로 에너지가 쓸 양만큼 충전될수 있으면 그것으로 ok고 그이상의 잠은 방탕에 속하는거라이거죠. 그게 각자에에 얼마나 될 수 있을지는 각자의 건강과 모든 것에 따라서 각각 달라요. 여러분들이 그 사실을 명심하고 재충전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거죠. 그럼 이제 거의 질문에 답이 된거죠. 얼마나 자느냐 시간을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니까 그 원칙을 딱 정해놓고 그렇게하고 살아가는 거죠. 근데 이제 고민이 뭐냐면은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안올때가 문제가 되는거죠. 그래서 어떤때는 내일일을 생각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야속할 정도로 잠이 안오는거라. 기도를 해도 잠이 안오고, 뭘해도 잠이 안올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가만히 드러누워서 아무생각을 안하면서 가만히 눈을 감고 드러누워 있어도 수면을 취할때에 충전되는 50%의 에너지가 충전이 된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부분적으로 충전을 하든지 아니면 밤을 새워서 뭘 하든지 그건 그때의 문제지만은 어떻든지간에 육신이 원하는 그 이상으로 충전을 넘어서는 것은 망가진데요. 베터리도 충전시간을 넘어서 계속 충전을 시키면 노후가 됩니다. 우리몸도 마찬가지에요. 적정량만 수면이 들어가야지 그 이상이 들어가면 모든 기관들이 쇠퇴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앞에서 살아가야 하는거죠. 그래서 이 수면의 방탕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이것은 옛사람에게 속한 방탕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단호하게 떨쳐버릴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잠 때문에 거의 무시되고 있는 의무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라 이거죠. 얼마나 많은 수면이 우리의 삶에 복군처럼 군림하는지 몰라요. 우리의 경건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모두 우리의 정규적인 삶의 가장자리로 모여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사업하느라고 정신없이 바쁜사람이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기도시간이라고 정해놓은사람 거의 없잖아요. 남의 돈 받고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10시부터 11시까지 기도생활이라고 정해놓을 수 없잖아요. 구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천상 어떻게 해야되죠? 앞으로 땡겨지든가 뒤로 밀려지던가 둘중에 하나잖아요. 근데 두 시간 다 뭐냐하면 방탕한 수면생활에 의해서 짓밟히기 쉬운 시간들이란 거에요. 뭐가 없으면? 깨어있는 신앙의 단호함이 없으면. 만약에 여러분들의 직장이 6시에 출근하는 직장이라면 그렇게 수시로 직장에 가서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하면 자다가 늦게 나왔습니다. 그렇게 못할겁니다. 제가 아는 크리스찬 기업회사에서는 신입사원을 받아서 연수하는 중에 세 번 지각하면 연수중에 그냥 짤라버립니다. 안받아줍니다. 안그러겠죠? 근데 이게 왜 이렇게 되냐? 왜그러냐하면 그것은 정규적인 생활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회생활 자체를 무너뜨리기 전에는 거기에 적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우선순위가 있는거죠. 그리고 양쪽에 이것들이 몰려요. 근데 이게 무시되는 거에요. 뭘하지 않으면? 이 잠의 폭력적인 행동을 규제하지 않으면 일루 치고 나와서 아침시간을 다 부셔버리든지 절로 치고 나와서 저녁시간을 다 부셔버려서 하나님과 교제를 못하게 한다 이거에요. 그거를 살살 다루려고 해서는 안되고 막 혼내야 되요. 방탕한 수면생활에 대해서 아주 단호하게 혼을 내야 되요. 그래서 예외없이 다루어서 부패한 본성속에서 다리를 뻗고 우리의 방탕한 수면이 본성적인 기질을 발휘하도록 마음을 못먹게끔 그렇게 야단을 치면서 생활해야 해요. 새벽에 깨면 기어나오고 안깨면 할수 없고...그러면 결국 못깹니다. 그렇죠? 절대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요.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되요. 이런 게으른 삶이 영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영적으로 영혼의 게으른 잠을 잔다고 생각해보세요. 왜? 신자에게선 이 수면생활의 방탕함이 까딱 잘못하면은 공식이 있어요.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싫증을 내. 이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이 손을 잡는거야. 이게 절대로 독립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영적인 작용과 함께 일어나요. 하나님을 계속 찾아 근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으면 싫증을 내. 이 영혼의 싫증이 육체의 게으름과 손을 딱 잡는거에요. 그래서 방탕한 수면생활의 자락을 딱 펴버리는 거에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죠? 퍼자다가 간신이 세수하고 아침은 먹는둥 마는둥 하고 회사로 내 뛰는 거죠. 그리고 돌아와서 육체를 위해서 필요한 시간 다 쓰고 tv나 보고 이러다가 퍼져서 또 자는 거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영혼은 계속 고사되어 가는 거죠. 이렇게 살면 안됩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살아요. 방탕한 수면생활, 먹고 싶은대로 먹고, 자고 싶은대로 자고, 쉬고 싶은대로 쉬고 그렇게 방탕하게 살아요. 그런데 한사람은 그 졸린잠을 깨치면서 새벽기도 나오고, 피곤함을 무릎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자라도 더 배우려고 하고 그러는 사람들도 육체는 마냥 가서 자고 싶어요. 그런데 이것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사는 거에요. 그렇게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그 두사람을 하나님이 동일하게 취급하신다면 우리가 무슨동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살수 있겠어요? 예수님이 그런 면에서 모본을 보여주셨잖아요. 그 모본을 따르는 사도바울이 말했잖아요. 내가 달려갈길을 다 마치고 선한 싸움을 다 싸웠으니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요. 그걸 바라보면서 그렇게 자기를 채찍질하며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먹지 못하였으며 자지 못하였다고 나오죠. 가끔 기회있을때마다 말씀드리만 12년 전에 마가복음 1장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도 그렇게 게으른 삶을 산건 아니였지만 강력한 확신을 가졌었어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시몬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쳐주고 그리고 나서 숙소에 돌아오시니까 병든 사람이 가득 모여있고 그들을 일일이 하나씩 다 고쳐 주시고 깊은 새벽에 잠드셨을텐데 그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새벽미명에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셨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보면서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신 몸이에요.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똑같아요. 그렇게 과로하면 주무시고 싶으신 거죠. 그래서 오죽했으면 풍랑이 이는 배고물에서 잠이 드셨겠어요. 얼마나 고단하면 그러셨겠어요. 예수님이 보여주기 위해서 잠드신 것이 아니에요. 너무 고단하니까. 얼마나 고단하시면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에 걸터앉았겠어요. 그렇게 머리둘곳이 없는 생애를 사셨어요. 우리가 주님에게서 게으름을 찾아볼수 있습니까? 수면의 방탕함을 읽을수 있습니까? 그럴수 없어요. 제자들은 자고 있어도 주님은 새벽에 나가셨고 깊은 밤에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기다려요 조금만 기다려요 그러면 잠잘 필요도 없고 영원한 안식이 있는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요. 그때는 잠과의 싸움도 필요없고 밤이 없으니 우리가 자명종 켜놓고 새벽기도 기다리고 긴장해야 할 것도 없고 영원한 안식이 기다려요. 근데 아직은 아니에요. 지금은 우리들이 깨어있어야 할때고 우리의 허리띠를 동여야 할때에요. 다만 우리의 육신이 견딜수 있을 정도까지만 우리의 육신에 공급해주면서 잘 우리의 육신을 사용해서 마지막까지 완주를 해야해요. 그 이상도 이하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선한 일을 향한 반응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19:24)”
게으름 우리 신앙 생활의 얼마나 큰 적인지를 여러 주 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게으름의 근본적인 뿌리는 그릇된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 시리즈의 처음에서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흔히 게으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이 사실은 게으름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몇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본 것은 부주의함도 의도되지 않은 게으름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고,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이는 삶 속에서 마땅히 부지런해야할 부분에 대해서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삶도 사실은 게으른 삶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때 우리는 문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그 침상 위에 뒹구느니라 하는 잠언의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들이 게으름의 정체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는 대목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으로 계속 반복해서 살아가는데 자기가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움직여져서 살아가는 삶의 연속, 쳇바퀴 돌 듯이 살아가는 이러한 삶들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정말 힘겹게 살아가고 누구도 그 사람을 보고 게으르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는 살지 않으면 안될 삶만을 살아갈 뿐 마땅히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거기에 마음을 쏟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부지런히 살아가도 그의 영혼은 거의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내팽개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어떻게 보면 그의 게으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밥 벌어먹고 사는 것으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참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의 환경이 우리에게 신경 쓰라고 하는 것만을 신경 써서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이 모두 육적인 삶에 의해서 뒤로 쳐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상황이 신경을 써달라고 소리치고 외치는 부분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땅히 성도로서 힘써야 할 그 의무, 그 본분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삶의 모든 부분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골고루 돌보아야지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마지막 때가 되면 생활의 염려와 근심 때문에 마음이 둔하여 져서 경건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렇게 부지런히 살아가지만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별로 돌보지 못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채 매일매일 일과에 쫓겨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그런 삶이 바로 믿음 없이 생활의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굳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부패한 삶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난 두 시간에 걸쳐 말씀 드린 것처럼 부주의함입니다. 그래서 잡풀이 돋아나고 가시가 뒤덮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마땅히 주의를 기울이고 정성껏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땅이 모두 잡초로 뒤덮이고 가시덤불이 길같이 자라게 된 농부의 상황, 그래서 못 쓸 밭이 되어버린 상황도 결국은 게으름이었다는 사실도 우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세 번째로 게으름의 또 다른 정체는 무엇이냐 하면 마땅히 그래야 할 선한 것에 대해서 아주 미약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게으른 자는 그릇에 손을 넣고도 그것을 자기 입에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마 무엇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 먹기 위해서 음식물이 담겨져 있는 그릇에 손을 넣은 모양입니다. 그것을 지혜자가 상상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음식을 섭취해야겠다고 하는 필요를 느꼈고 그랬기 때문에 음식이 있는 그릇을 찾았고 자기가 거기로 갔든지 자기에게로 그릇을 가져왔든지 어떻든 자신 옆에 음식이 담긴 그릇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거기 까지는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음식물을 섭취하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통상적인 과정을 다 밟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음식을 먹고 싶으면 음식이 있는 것으로 갈 것입니다. 식당으로 가서 밥이나 음식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까이 둘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은 손을 그 음식의 그릇에 넣어야지만 그 음식을 집을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부지런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밟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거기까지는 했는데 그 다음에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것이 힘들어서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선한 일데 대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을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하나는 일반적인 우리의 삶의 지혜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두 번째로는 우리의 영적 삶의 지혜와 관련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일반적인 삶의 지혜의 측면에서 이런 종류의 게으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무엇인가 선한 목표가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중간까지 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즉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넘치도록 선한 일에 대해서 활기있게 반응해야 되는데 그렇지가 못하고 그 일을 할 때에 힘에 넘치도록 그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42.195㎞를 달립니다. 어느 마라토너의 고백에 의하면 3분의 2까지는 제정신으로 달리는데 3분의 2가 넘고 나면 나머지 30%의 거리, 약 12-3㎞정도는 거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 속에서 정신력 하나로 달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참 지혜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마라톤을 할 때 41.195㎞라고 생각하고 달리면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서 쓰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표지점이 앞에 있는 실제의 목표지점보다 훨씬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달리라는 것입니다.
(예화: 60년대 전설적인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아디스아바바는 42.195㎞를 달려들어 오고 나서 다시 가볍게 트랙을 한번 돌고 쉬면서 ‘지금 달린 것만큼 더 달릴 수 있다’ 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100의 힘이 들어가는 일을 한다면 120쯤 있어야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120정도의 힘을 장전해서 100이라고 하는 일에 덤벼들어야지만 승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골인 지점까지 달려가도 20의 힘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100의 힘이 필요한 일에 100의 힘만을 가지고 출발한 사람이 중간에 어려움을 만난다든지 힘이 많이 소진되는 상황을 만난다면 100을 다 썼는데도 90밖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사업을 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거나 무엇을 할 때에도 항상 필요한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일해야지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고 이 일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헌신하고 위기 상황에 대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지만 이 난관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넘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만 활기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명과 더불어 싸울 때도 마치 서너 명과 더불어 싸우는 것처럼 온 힘을 쏟고, 한시간이면 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시간은 걸려야 되는 일인 것처럼, 그리고 한시간은 걸려야 끝낼 수 있는 일인데도 30분만에 끝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일할 때에 거기에 마음이 집중되게 되고 체력과 모든 것들을 집중해서 쏟아 부어서 그 일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노동을 심하게 해본 적은 없지만 제 일이 글을 쓰고 연구를 하는 일이니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몇 년 동안 교회를 옮기고 짓느라고 사실 글을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많은 시간과 정력을 목회의 현장들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많이 분산된 가운데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각오를 새롭게 합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사람들이 그 정도는 나도 안다는 표정을 할 때 너무 비참하고, 설교가 끝나고 나오는데 사람들이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을 때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서 숨고 싶을 정도로 괴롭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공부하는 적은 없습니다. 인생을 그렇게 쓸 시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공부하는 시간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가치 없는 책은 거의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항상 스스로 ‘나는 지금 영혼들을 위한 고3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에도 저는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분산이 되어서 진척이 없었습니다. 진척이 없으면 초점이 흐려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하고 뜻을 정해서 마음을 다 쏟아 부으면 진척이 있습니다. 몇 일 밤을 새우고 혹은 노심초사해서 매달리면 연구에 진전이 있고 글쓰는 일에 진전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들은 최우선 순위가 당분간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혹은 ‘당분간은 이 말씀을 탐구하는 것이다’라고 고정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살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체력에도 힘을 더해주십니다. 놀랍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진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온 힘을 집중해서 설교를 준비하거나 연구를 하고 혹은 글을 쓴 것이 두고두고 가치가 있지 한 두 시간 쓰다가 일주일 내버려두었다가 다시 두 시간 쓰면, 여러 사람이 글을 써서 합쳐놓은 것 같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내 것 같은데 어떤 것은 남의 것 같습니다. 일관성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깨들은 것이 ‘이 세상의 뭐든지 마음을 다 쏟아 붇지 않고 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래서 되는 일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입니다. 그렇게 안 해도 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여러분들을 보면서 ‘월급이 아깝다. 그대가 이 회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은 나가주는 것이다’고 고용주들이 생각하고, 시시때때로 ‘어떻게 저 사람을 마음 상하게 하지 않고 내보낼 수 있는 실이 없을까’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다른 방면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도 이 사회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빛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각 사람마다 정해진 능력이 있고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마냥 뛰어넘어서 살수는 없지만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능력의 문제와 상관없이 삶의 자세요 기본적인 자신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게으르고 침상에 뒹구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항상 시작은 합니다. 먹고살기가 힘든데 누가 보니까 돈을 잘 번다더라 하면 ‘나도 해볼까’하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작은 해서 몇 단계까지 가는데 막상 그릇에 손을 넣고는 그 음식을 집어서 입에 올리기가 싫듯이 그 이상은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남이 100의 힘을 들여서 이룬 일을 50정도로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요령과 기술로 50의 차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에 뛰어들어가 보니까 100의 힘을 쓰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일 때 50의 힘을 더 발휘해서 100을 채워서 일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50의 힘으로 그 일을 이루려고 하다가 결국은 일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보다 많이 결심합니다. 여러 개의 그릇을 가지고 와서 거기에 손을 부지런히 집어넣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끌어올려서 자기의 입에 넣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입은 언제나 배고픕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직장 생활을 한다면 지각하는 식의 직장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9시 30분까지 출근인데 32분에 걸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교회를 지을 때도 그랬습니다. 8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8시 15분에 슬슬 걸어 들어오는 사람에게 마당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이 나라를 보라. 당신 같은 태도로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우수한 민족이 이렇게 밖에는 못산다’ 8시에 오기로 되어있으면 8시에 이 문을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7시 45분에는 와서 모든 준비를 끝내고 8시 종이 울리면 바로 일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6시에 일을 끝내게 되어있는데 5시 40분에 손 씻으러 갑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안 되는 것입니다. 6시까지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하고 나서 손을 씻고 가든지 그 시간이 아까우면 손을 씻지 말고 가는 것이지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8년이 넘게 한 사람입니다. 일에 있어서 실패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실한 출퇴근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고용한 사람에게는 우리의 1분이 모두 돈인데 그런 식으로 살아서 어떻게 빛 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출근 시간에는 늦게 오고 퇴근 시간에는 몰래 살금살금 퇴근하고 점심 시간에는 신우회 모임 한다고 성경책 들고 가서 2시쯤 되어서나 오면 누가 좋다고 합니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 하려면 말고 하려면 100의 에너지를 요구한다면 자신이 생각하기에 120은 있어야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에너지를 가지고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기쁘고 슬기롭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볼 때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부지런하고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봐도 자기의 손에 수고한 대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다 더 깊은 관심은 그런 육적인 생활이 아니라 사실 영적인 생활입니다. 영적 생활에서는 이 원리가 더 냉혹하게 적용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간혹 살다가 눈먼 돈이 찾아오는 수도 있습니다. 지나가다가 로또 복권을 샀는데 맞을 수도 있습니다. 1년에 벼락 12번 벼락 맞을 확률이라는 복권에 당첨되겠다고 20분씩 기다려서 한 장씩 사서 거기에 인생 역전의 기회를 걸어보는 사람들은 정말 가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역전시켜 주시는 분은 은행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월급 생활이나 하며 살다가 복권 사서 몇 십억 맞으면 그것으로 인생이 역전됩니까?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인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을 사고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미워해야 합니다. 줄 서서 그것 살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십시오. 그것 사서 볼펜으로 줄 그을 시간 있으면 성경 펴놓고 중요한 구절에 줄치십시오. 뒤통수가 간지럽지도 안습니까? 당첨되겠다고 앉아서 그것을 긁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세상이 그런 식으로 갈 때 그리스도인들이 엄중하게 그것을 꾸짖고 ‘이것은 아니다’해야 하는데 성실하게 일해서 보람을 거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야지 대박의 꿈이나 노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식의 삶에 물드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을 본받는 삶입니다.
인생의 참다운 역전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보너스 탈 때 여러분들 인생의 역전이 이루어졌습니까? 신통치 않던 회사에서 갑자기 월급 많이 주는 회사로 옮겼을 때 여러분들 인생에 역전이 이루어졌습니까? 천만입니다. 인생의 역전은 우리 주님을 만남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 가진 재물 없고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없고 변함없이 그 직장 다녀도 주님 만나니까 인생의 역전이 옵디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죄의 욕심을 따라서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보면 하나님을 멀리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택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은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있는데 집을 나가서 밤이 되도록 집에 안 들어온다면 ‘애가 다 컸는데 뭐’ 하면서 잠을 자겠습니까? 어리면 어려서 걱정이고 나이 먹으면 나이 먹어서 걱정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유혹의 욕심을 따라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꼭 찾으십니다. 그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음성이 들려와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듣게 하시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증거 받게 하시거나 혹은 성경을 읽거나, 어떻든 당신이 가지고 계신 우리를 향한 생각과 마음, 그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 보여주시는 방법은 많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슴을 풀어서 칼로 갈비뼈를 짖어야만 엄마의 마음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깨끗한 밥상을 차려놓고 보자기를 덮어놓고 ‘네가 좋아하는 반찬은 냉장고에 있고 찌개는 끓여서 렌지 위에 올려놨으니, 너 위장도 좋지 않으니 너무 짜게 먹지 말고, 그것 먹은 다음에 과일을 먹어라 과일은 깨끗이 깎아서 신선 실에 두었다’라고 메모 해 놓으면 엄마가 없어도 그것을 보면서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군대 가서 엄마를 만날 수 없어도 엄마가 돋보기 쓰고 꼬블꼬블하게 ‘날이 추워서 어쩌니’하고 쓴 한 줄 편지를 보면서 아들이 엄마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보이시는 방법도 바로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가장 통상적이고 좋은 방법이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아무리 보여주셔도 워낙 죄를 사랑하고 마음이 강퍅해져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소원이 너무나 커서 그 하나님의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이 말씀을 던지시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돌덩어리와 같아서 탁하고 튑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아무리 드려도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그 마음을 영원토록 그렇게 돌멩이같이 내버려두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그 마음을 어루만져주십니다. 특별한 것을 깨닫고 간구한 것도 아닌데 어느 한순간에 그 마음이 아주 약해지면서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받아들이고 싶은 심성이 생겨나도록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보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회심과 함께 거듭남을 경험할 때에도 반드시 중생 이전에 성령의 역사 하심이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있습니다. 물론 그것으로서 중생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부드럽게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그 말씀을 들려주시면 그 말씀이 자기의 마음을 찌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아, 그렇구나. 나는 그런 것 다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였구나. 주님이 나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셨구나. 맞아. 지금에서야 생각이 나는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나같이 쓸데 없는 죄인을 형벌에서 구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겠지. 바로 그렇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구나.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이 있나’하는 가책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나면 ‘맞아. 내가 내깐에는 열심히 산다고 살아지만 나 좋은 것만 하고 내가 꼭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안 했구나. 왜 안 했을까? 싫으니까 안 했구나. 그러면 결국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구나.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은 나를 섬기면서 산 것이지 하나님 섬기면서 산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찔리는 것입니다. 회개도 나오고 눈물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그런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자신의 죄와 자신의 강퍅함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깨닫게 만들어주면 만들어 줄수록 한편으로는 비통하고 가슴이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또 한편으로서는 모르면 고칠 수 없을 텐데 알려주시니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실수록 짜증이 납니다. 그리고는 반항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너 열심히 살았지만 사실 날 위해서 산 것은 아니다’하시면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위해 산 것이 아닌 것을 빼버리고, ‘너 날 위해서 산다고 했지만 그 동기가 나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하시면 또 뺍니다. 다음에 ‘너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기는 했지만 그것을 이행하는 삶의 방식이 비성경적이었다’하시면 또 뺍니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빼버리고 남은 게 별로 없으면 나중에는 반발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요. 나는 하나님 위해서 못살았어요. 그러니 어쩌란 말입니까? 난 결국 이것밖에 못삽니다. 능력도 안 주시면서 잘살라고 하니 짜증나. 신앙 버릴까보다’식으로 나가는 경우가 말은 안 해도 성실하게 교회생활 하는 사람들 속에 다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교리’를 다 듣고 나니까 ‘애석하다. 여태까지 전도 대상자들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줄 알았더니 여리고 전도 나오는 나오 사실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었구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기는 대충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정교하게 자기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입증해주니까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인정합니다. 제가 진짜 죄의 지배 아래 살았습니다. 진짜 내 삶의 십자가를 버렸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리면서 그렇게 내 안에 있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많은 위험한 징후들을 무시하면서 살았습니다’하며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쾅 하는 지성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겨우 손이 그릇에 간 것입니다. 그렇게 각성되고 자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영혼이 새로워지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그 사실을 알고 파악한 것만으로 우리의 영혼이 정말 변화되고 새 힘을 얻게 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다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말하기를 거울을 들여다보고 ‘이것을 안경을 그렸네. 이것도 얼굴이라고’하고는 잊어버리고 그냥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고는 깨달은 다음에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백 가지의 말씀을 듣고 자극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가지라도 듣고 끝까지 가야지만 변화되는 것입니다.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셨을 때에 그것을 충분히 강하고 힘있게 반응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데 까지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게으른 것입니다. 떠가는 비행기를 보고 폭탄을 쐈는데 불꽃을 뿜고 굉음을 내면서 미사일이 올라가도 결국 못 미쳤습니다. 계속 발사해도 그 죄의 비행기는 안전합니다. 유유히 비행하는 것입니다. 비행사가 ‘미사일은 절대 안 올라오니 고도를 낮춰라’할 것입니다.
조금 깨달았다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아버지여’하고 엄청나게 은혜 받았다는 말이 많아도 여러분이 변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무서운 줄 아십시오. 핑계 댈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죄 가운데 살았느냐고 하시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가장 대기 좋은 핑계가 몰라서 못했다는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정상참작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핑계 댈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는 한도 내에서는 모든 것을 다 가르쳐줬고 탐구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의 지성과 열정을 다해서 힘닿는 대로 탐구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래도 회심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주님 앞에서 한없이 눈물이 솟아날 것입니다. ‘저들을 위해서 많이 애썼고 힘닿는 대로 가르쳤지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같이 핑계 댈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을 만난 것이 도망 갈 수가 없으니까 어떻게 보면 불행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의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수많은 결단과 결심, 각오의 미사일이 죄의 비행기를 향해 출발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방이라도 날아가서 비행기를 맞춰서 불덩어리가 되어서 먼 산에 떨어져서 폭발음이 들리도록 만드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만약 정말 죄악의 새가 공중으로 날아가고 그 새를 맞추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고도를 보면서 팔이 떨어지도록 활시위를 당겨서 쏴야지만 새의 심장을 뚫고 등위로 화살이 나오면서 새가 떨어질 것 아닙니까? 활을 당기면서도 창공을 뚫고 나가서 저 새를 맞춰야겠다는 욕구가 없으니까 ‘꼭 죄를 떨어트려야 하나. 쏴보는데 의가 있는 것이지’하며 화살이 그저 힘없이 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사람이 전혀 하나님을 향해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겨지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늘 묻고 싶은 것은 ‘왜 사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생명을 건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딴 것은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이것만은 꼭 이루어져야 되겠습니다’하는 기도 제목, 그래서 그 기도 제목만 떠오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그런 기도 제목,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래도록 그런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과 더불어서 몸부림치면서 싸우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화: 누워서 쏘는 화살이 있다-훨씬 크고 화살이 굵어서 온 몸을 실어서 날리기 때 문에 힘을 가지고 멀리 날아간다)
멀리, 높이 날려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을 실어서 화살을 잡아야 된다는 것은 고래 이래로 물리적인 상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앙 속에서도 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많이 운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결단을 수없이 한 사람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산 사람의 나라입니다.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캄캄한 세상에 예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얼마나 전하고 싶었으면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널리 소리쳐서 외치고 싶은 증거의 제목이 있었는데 그것이 예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외치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촉구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대해서 무엇인가 위험한 상태를 알려주시고 결단을 촉구하실 때에 은혜를 받은 것을 기억하지 말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자신이 이런 저런 결심도 했다는 단순한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스스로 대견해하지 말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선명하게 나에게 부인할 수 없도록 내 영혼의 병든 상태를 가르쳐주시고 무엇인가 내 인생의 망가진 상태를 알려주셨을 때 얼마나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씨름해서 ‘결국은 이겼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성도가 열린교회는 말씀의 약발이 떨어질 때쯤 되면 한번씩 주사를 놔 주 니 좋다고 말했다-신년 사경회, 십자가 사경회, 수련회, 기도학교 사경회)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말해본다면, 신년 사경회 때 깨우니까 부시시 일어났다가 2월에 다시 주저앉아서 3월에 코골고 자고, 4월에 다시 흔드니까 일어나더니 6월에 다시 코골고 8월에는 밖에 데리고 나가서 일어나라고 하니까 일어나더니 9월에 또 자고 10월에 다시 깨웠더니 일어나더니 겨울사경회 때 깨워달라고 하며 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늘 깨어났던 것 같지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늘 자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았는데 남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예화: 부산의 어떤 성도가 받은 은혜를 석 달만 간직해도 꽤 오래 간직하는 것 아니 냐고 물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합니다. 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어도 도전을 받았어도 그 일을 이행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 약합니다. 반응이 집요하고 끝까지 가야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삶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으로 이해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재가 수시로 깨어났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늘 깨워도 늘 잤습니다. 뭔가 해보려고 하다가는 다시 자고, 해보려고 하다가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성화 시켜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정말 불꽃처럼 사셨습니다. 자기를 다 태우시면서 일찍 죽어버리시려고 작정이나 하신 분처럼 굶주리시고 과로하시고 건강을 돌보지 않으시고 고통받는 영혼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가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도 실망하거나 낙심해서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이 언제나 강철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껍질을 입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것은 열렬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열렬하게 반응하면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영혼들을 사랑하시되 배반하는 제자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까지 자신의 온 힘을 모아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한 순간에 감동 받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에 대한 끈질기고 집요한 집착, 그것을 통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질깁니까?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불순종으로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끊을 수 없었습니다. 땅 끝까지 따라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칼로도 끊을 수가 없었고 환난이나 핍박, 위험이나 기근, 그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정말 질기디 질긴 사랑이었습니다. 결국은 그 끈질긴 사랑이 우리를 설복 했고 어느 날 그 사랑 앞에 설복 되어서 무릎을 꿇고 주님 없이 살아온 것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쉽게 포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을 가지셨지만 끝까지 사랑하고 우리를 놓으시려고 하지 않고 꼭 붙들어주시려고 애쓰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되었을까요? 우리는 아마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집요함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그분을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집요함이 있습니다. 이런 끈질김이 있습니다. ‘끝까지 순종하기까지는 내가 마다하지 아니하리라. 내 안에 있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끝까지 싸워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는 그런 참된 신자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끈질긴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정신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시는 은혜를 육체의 더러운 것으로 오염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혼은 실증 내고 육체는 게을러져서 그 실증 낸 영혼과 게으른 육체가 함께 만나서 실패의 합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죄와 은혜 사이에 끼여서 근근덕신으로 살다가 죽는 삶이 아닙니다. 사망이나 기쁨이나 고통이나 천사들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충분한 힘을 공급받으면서 늘 자기의 삶의 상황을 제압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정말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예수님과 더불어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끝까지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번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한번 깨닫게 하신 것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하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반드시 그렇게 살아서 반드시 이 문제에 있어서 승리하리라’고 하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 때 그 때에 정말 능력 있는 크리스쳔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영적인 태만과 육체의 게으름이 만날 때에 여러분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데 그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10. 게으른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10:26)”
게으른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설교해오는 가운데 지난주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게으름이라는 말씀을 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미약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게으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분발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이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그림같이 생생한 비유가 나옵니다. 특정한 사람은 안나오지만 지혜자가 일하는 사람을 머릿속에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일꾼을 부리는 사람이 상정되어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은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을 하기는 하는데 그 일하는 모습이 게으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게으른 사람은 집안에 드러누워서 일하러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터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 일을 하는 태도가 게으르기 때문에 부리는 사람의 이에 초와 같고 눈에 연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발하지 아니함으로 그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그 사람을 고용한 사람의 마음에 그런 고통과 불편을 안겨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게으름은 일을 안 하려고 반질거리는 것만 게으름이 아니라 일을 하겠다고는 했는데 애정을 품고 그 일을 위해서 분발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어떻든 그 일을 잘 완성해야겠다는 열정을 품고 그 일을 위해서 분발하지 않는 자체가 게으름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가끔 노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오래 한 사람의 이름을 써내라고 할 때가 있 다-그 사람이 어떤 태도로 감당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오래 한 것만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을 동의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할 때 단지 그 일을 오래도록 맡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위해서 분발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직업과 관련해서 잠깐 말씀드리고 특별 은총적 차원에서 우리의 영적 생활과 관련지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여러분들이 사람을 채용할 때에는 머리도 좋고 순발력도 있고 교양도 있고 거기다 외모도 갖춰져 있고 신앙도 좋고 기타 여러 가지 많은 조건을 보고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쉽지 않고 돈을 많이 주지 않으면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회사를 경영하든지 사업을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마음에 익혀야 될 것이, 이 사업의 성공은 첫째 신앙에 달려 있고 두 번째에는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고 그 사람을 자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때 그 사람의 사업의 경영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경영이 되고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영자 아래서 그 일을 통해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업이 성장해야지 만 그 사업에 모여드는 일꾼들에게 그 사업을 위한 성실함과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정치를 하고 사업을 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성직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특히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이 타락하기가 제일 쉽기 때문입니다. 정치 권력 자체가 부패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락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집권하면 앞사람을 욕하고 들어가도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나옵니다. 권력 안에 그런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도 권력 속에는 스스로 부패하는 상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켜 본 사람이 권력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또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라고 하는 성격 자체가 사람을 부패하게 만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돈이라고 하는 자체가 사람을 뜬구름 같이 일정한 원칙이 없이 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따지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돈 때문에 그 도리도 저버립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성직자적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언젠가 설교하면서 합리적이고 잘 제품을 만들고 돈 받은 것만큼 고객에게 대가를 돌려줄 수 있는 기업들이 잘 살아나게 하고, 음식 맛도 없고 불친절하고 돈만 비싸게 받으면 열심히 단합을 해서 문 닫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한 회사가 도덕적으로 형편없다고 하면 물건이 조금 좋아도 그 회사 말고 다른 회사 것을 사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미 구라파에서는 소비자 단체에서 각 기업의 도덕 지수를 매깁니다. 그래서 매달 공포를 하고 그 도덕 지수를 보고 소비자들이 구매 행위에 참고하는 것입니다.
(예화: 안경 하나를 사더라도 잘 만들었는데 그 회사가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세금도 때먹고 회장은 바람이나 피우고 돈을 가지고 정치인들이나 찾아가서 줄이나 댄 다면 아무리 좋아도 그 다음 회사 것을 사야 한다. 그래서 그 회사를 문닫게 만 들어야 한다)
누가 잘못 한다고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돌과 화염병을 들고 광화문 네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철저히 감시하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들이 할 바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로 이것을 위해서 수백 만개 되는 기업체를 다 머리 속에 넣고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평범하게 소비생활을 하다가 결정적인 소식이 들리면 저는 구매행위를 중단합니다. 제가 그렇게 해봐야 그 회사가 문 닫지 않으리라는 것은 압니다. 그 대신 힘닿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사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회사들이 여지없이 문을 닫게 만들어 버려야지 만 기업이 도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권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할 수만 있으면 높은 자리로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단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능력껏 높은 자리에게 올라가서 많은 사람의 종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번에 중국에 갔을 때도 거기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긁을 정도로 벌어서 다 남 주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면 가만히 놔두면 다른 사람이 벌어서 나쁜 짓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벌 것까지 다 벌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다 나눠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권력을 쥐어서 섬기고 돈 많이 벌어서 남 주라는 것입니다. 또 회사 다니는 젊은이들에게도 ‘계속 다니지 말고 한 10년 쯤 다닌 다음에 네 사업을 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매달 월급 받아봐야 안전하기는 하겠지만 언제 돈으로 사람을 섬겨보겠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답게 한번 써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사업을 하고 경영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고용하는데,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절대 고용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 게으른 사람이 여러분의 회사에 모든 악의 온상이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잠언에 의하면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정의 소지가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늘 입수를 벌리고 한담을 하며 돌아다닙니다. 정보를 누설할 위험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분발하지 않습니다. 사업의 중요한 기회들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정욕이 부글거리는 사람입니다. 회사의 도덕지수를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밤새 말해도 다 못할 정도로 게으른 사람에게는 정직한 사람의 특징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자신의 사업에 손해를 입히는 형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안됩니다. 더군다나 조직 전체에서 하위 부분에 있는 사람일수록 성실해야 합니다. 상위로 올라갈수록 부지런한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부지런한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근로자 가운데 제일 훌륭한 사람은 창의적이면서도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은 똑똑하지 않더라도 부지런하기는 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나쁜 사람은 정직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고 부지런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아주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의 심정은 이에 초와 같고 눈에 연기와 같습니다.
(예화: 옛날 국광 사과를 씹었을 때 그 신물이 이 사이로 들어갈 때의 느낌이 계속 된 다면 형벌이다-게으른 사람을 고용한 고용주의 마음이 그렇다)
그런 게으른 사람들은 인생이 비참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절대로 아름다운 기회가 오지 않고 와도 그것을 선용하지 못합니다.
(예화: 필리핀에 있는 선교사가 교회에 재래식 변소를 짓는 이야기. 두 사람이 이틀 하면 할 일을 네 사람이 일주일을 했다)
(예화: 필리핀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어쩌다 부지런한 필리핀 사람을 만나게 되어 한달 월급을 더 주었더니 소식도 없이 일주일간 나오지 않았는데 그 돈 쓰느라고 일 주일간 못나왔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을 부리는 사람은 고문입니다. 그래서 사회가 발전하려면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사람은 없어야겠지만 그 회사에 기여하지 못하면 보따리 싸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가 발전합니다. 미국은 마음에 안 들게 일하면 그냥 쫓아냅니다. 아침에 출근해도 문 앞에서 사장이 어젯밤에 잘렸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여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화: 어느 사람이 미국에서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을 책으로 가지고 있을 정 도이다-회사를 위해서 기여를 많이 하면 말단 직원이어도 최고의 대우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일을 조금 하고 돈을 많이 받는 것을 자랑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못을 박고 땅을 파는 일인지 서류를 놓고 씨름하는 일이냐의 차이이지 놀면서 억대 연금을 받는다면 성경에 어긋납니다. 돈은 자기가 노력해서 버는 것입니다. 땀을 흘리는 가운데 소득을 얻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소득을 얻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화: 어느 사업가는 물건이 잘 팔려서 돈이 많이 벌리면 물건값을 내린다고 한다. 그는 탐욕이 없으니 사업을 하면서 한번도 위기를 만나보지 않았다고 한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인이 여러분들을 볼 때 신맛을 내는 초같이 느껴지면 안됩니다. 또 연기는 어떻습니까? 아궁이에 불을 때는데 계속 불은 안 붙고 연기가 난다면 어떻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견디기 힘든 고통을 고용주들에게 안겨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우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점심 시간에 신우회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예배드리는 것에 의해서 확인이 된다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identity가 아닙니다.
하다못해 세탁소를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다림질해주면 옷의 줄도 잘 맞아야 합니다. 두부 한 모를 팔아도 예수 믿는 사람은 날짜 지났으니 사가지 말라고 말해야 합니다. 뭘 해도 달라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에서 살아갈 때에 여러분들을 고용한 사람들의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빛 된 삶입니다. 월급만 작다고 하지 말고 ‘내가 이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주라면 나 같은 사람을 고용할까’하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무엇인가 그 회사에 기여하고 나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 회사에게 돌려줄 수 있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없는 능력은 끊임없이 개발해야겠지만 우선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래서 직장 생활하며 지각이나 수시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영광 가리는 사람입니다. 하다못해 30분이라도 일찍 가서 ‘마당이라도 한번 쓰는 사람이 알고 보니 그리스도인이더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30분이라도 일찍 가서 사무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하루의 일과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도록 섬기는 사람이 알고 보니 크리스천이더라’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것이 보람이 되고 혜택이 되고, ‘ 저 사람이 나와 함께 일하지 않고 다른 부서로 가버리면 나는 누구를 믿고 사나’하는 요긴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하다못해 주일학교 교역자를 써도 오래도록 고민합니다. 물론 그렇게 선택한 것이 100%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능력의 문제이니까 최선을 다해서 할뿐입니다. 좋은 분이 미국에라도 있다고 하면 비행기 타고 가서 우리 교회에 와서 교역자 좀 해주십시오 하고 삼고초려 할 용의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혜택을 보는 것이 영혼들이니까 그 분이 와서 사역을 함으로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이 교육 전도사 되시는 분들에게 몇 번을 머리 숙여 삼고초려를 한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디에서 일하든지 요긴한 사람이 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사람들에게 요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움직이는 그런 게으른 사람에게서 무슨 열정을 기대할 수 있겠고 무슨 꿈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화: 신발 만드는 회사에서 두 번에 걸쳐서 두 사람을 아프리카로 보내서 신발 공장 을 세우면 어떨 지 알아보라고 보냈는데 한 사람은 ‘그 사람들은 신발을 안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어서 안되겠습니다’고 하고 또 한사람은 ‘아무도 신발 신은 사람이 없으니 돈 천지입니다. 그들에게 신발을 안 신을 때는 얼마나 발이 아픈지 가르쳐주고 신발을 신으면 얼마나 신나는지 가르쳐주면 다 신으려고 할 것입니다. 저를 보내주시면 일을 열심히 해서 그 아프리카 흑인들이 옷은 안 입어도 신발은 신고 다니게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열정을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이 그렇게 차이가 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렇게 기골이 장대한 가나안 원주민을 보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저들은 버리셨기 때문이다’하는 열정이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안 생기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아프리카로 보내면 돌아와서 ‘천지가 사자입니다’할 것입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여러분을 고용한 사람에게 여러분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도록 요긴한 존재가 될 때에 여러분들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될 때 여러분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지도자가 될 때 여러분들이 여러분들로 만든 그 신앙의 힘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특별 은총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봅니다. 여기에 보면 “게으른 사람은 이에 초와 같고 눈에 연기와 같도다”라고 했는데 사실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을 세워놓으십니다. 우리 각자를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셔서 섬기는 자리에 주님이 세워놓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정말 성격이 괴팍하고 자기 사업밖에 모르는 신경질적인 고용주가 아니십니다. 그래서 세워놓은 다음에 그들이 충성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자리에 오래 놔두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설명이 안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사명을 잘 안 감당하고 있는데, 저런 식으로 감당해 나가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닌데, 저렇게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누가 되는데, 그가 그렇게 게으름으로 교회에 손해를 주는데도 하나님은 그를 여전히 거기에 남겨두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사명을 맡았다가 도중 하차하면서 자신의 신앙까지 망쳐버리는 것을 가슴아파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게으른데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고, 게으른데도 1년 더 섬길 기회를 허락해주시고, 게으른데도 하나님이 언젠가는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 여러 날 동안 게으르게 섬기면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보다는 그렇게 섬겨서 하나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그만둔다고 안하고 붙들고 있는 것만 해도 교회에 있는 너희들은 내가 베푸는 은총인 줄 알아라’하는 오만 불손한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개중에는 있습니다. 말로는 그렇게 안 해도 실제의 삶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시작할 때 ‘내가 억지로는 시키지 말자. 특히 교회 일은. 더군다나 사정까지 하며 구역장을 해달라 집사를 해달라... 하지 말자’결심했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번씩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을 집사고 세우고 싶은데 하려면 교육받고 시험보고 응답을 해라’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분명하게 열정을 품고 하고 안 하려면 그만두면 참 좋은데 사람들의 태도가 항상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것이 후회가 되기 때문에 좀더 열심을 품어서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데 정신이 덜 차려져서 그러는 경우도 있고 혹은 이나마도 안 하면 내 신앙까지 떨어질까 해서 -사실은 이미 떨어진 신앙인데-그러기도 합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아이들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자 선생님이 안 오시면 모여 앉아서 ‘하나님 우리 선생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하며 기도 드렸다.)
(예화: 어느 성도가 ‘하나님 우리 구역장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서 기 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들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그냥 붙들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붙들고 있는 동안 계속 주님의 이에 초와 같고 눈에 연기와 같이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못하겠으면 보따리 싸고 자리라도 내어주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 세워서 열심히 하게 하실 텐데 그것도 안 합니다.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두 팔 벌리고 막아서서 말도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망치고 교회의 거룩함에 누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사명을 맡았으면 그것을 맡았을 때에는 마치 자신에게 그것밖에는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소중한 줄 알고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활이 재편되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일 뒤에서 자신에게 그것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권위가 생각나고 자기에게 맡겨주셨을 때 ‘주님이 만약에 내 자리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감당하셨을까? 이 일을 위해서 움직이고 일하시던 그 동기가 정말 내 마음속에도 있는가? 정말 영혼들을 돌보도록 우리를 세워 주신 그 자리에서 무리를 보시며 민망히 여기시던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을 정말 내가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을 끊임없이 되물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맡겨주신 일을 하찮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닌데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면서 그렇게 게으르게 그 직분을 맡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주도록 물러나지도 않는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사람이 거기 서있는 존재 그 자체가 주님의 이에 신 초와 같고 쳐다볼수록 눈이 아려서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영기와 같습니다. 그 초와 같고 연기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 입에서 어떻게 생수와 같은 기도가 쏟아져 나오겠으며 그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때 어떻게 예수님께서 기쁨으로 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충성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회개하게 하는 그런 회심시킬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뛰어나게 많은 말재주가 있어서 그 사람을 설복 시켜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능력이 원한다고 해서 당장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지런할 수는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그 일은 정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 구역 식구가 교회에 안 나온 지 2주가 지나도 모르고 심지어 죽었는데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못하는 식의 섬김이 하나님 앞에 정말 부지런한 자의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신분에 있어서는 아들이지만 섬김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아들이기 때문에 뒷짐지고 종들을 시킬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종입니까? 누구를 시키겠습니까? ‘내가 명색이 우리 아버지 집의 맏아들인데 내가 일하랴?’하면 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신분으로는 아버지 집의 아들이요 상속자이지만 열심히 일할 때에는 종처럼 일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큰 회사를 경영하는데 아들이 기름 때 묻히면서 부속 고치고 기름 치면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할 때 그가 ‘내가 이 대기업 사장의 맏아들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 기계 밑에 들어가서 기름때 묻히면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을 하는 순간만큼은 그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자녀이다. 내가 천사보다 낫다’하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주님이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셨지만, 하나님 일을 할 때는 내가 주님의 종이지. 주님의 자녀는 무슨 자녀입니까. 종처럼 일하겠습니다’하고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아주 귀한 일만 하셨습니까? 그렇게 힘들고 천한 일은 안 하셨습니까? 그 시대에 더러운 인간들로 지목 받던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다니는 그 일이 세상적으로 볼 때 고상한 일이었습니까? 그런 창녀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는 일이 세상적으로 볼 때 고매한 일이었냐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고매한 일은 왕궁에 찾아가서 대접을 잘 받으면서 왕의 정치에 훈수나 두는 것이 고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처럼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사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길 때는 험하게 일해야 합니다. 체통 다 차리고 자기 할 것 다하고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예화: 어느 교회 목사님이 부목사님이 마음에 안 들어서 여러 번 충고해도 안 듣자 ‘더도 안 바라고 너 다음에 개척해서 꼭 너 같은 부교역자만 만나라. 그러면 내 심정이 어떤 지를 알게 될 꺼다’라고 했다)
지도자로서 일할 때 성실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얼마나 기쁩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잊혀지지가 않고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습니다.
(예화: 예전에 모시던 목사님 말씀-전에 함께 일하던 아들 뻘밖에 안 되는 어느 부교역자를 상기하시면서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이니까 우리는 은혜라고 표현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사람들에게 맡겨주셨을 때, 자기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맡겨달라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동기가 종으로서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누리겠다고 하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니까 그런 종 같은 헌신이 안 나옵니다. 그 증거를 대보겠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종이십니다’하면 기분이 좋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종처럼 취급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떤 때는 비감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지혜가 왜 이것밖에 안될까.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를 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지혜가 없을까’하며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가끔 목사님들 가운데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 하나로 교인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가지신 분이 있습니다.
(예화: 한 목사님은 교인들이 헌금을 안 하면 ‘여러분, 제가 이번에 여러분 헌금 내는 것을 오랜만에 봤는데 여러분 헌금하는 것 보니 천국 없는 것 같습디다. 천국있다고 믿으면 그렇게 헌금을 조금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시면 다음 주 헌금의 규모가 달라진다고 한다)
저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매한 것도 없고, 요즘은 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구나’를 느끼니까 정말 눈물밖에 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내가 단숨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정말 훌륭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종들을 공부해보니까 제가 아는 지식은 너무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저 같은 사람의 설교를 듣고 여러분만큼 변화된 것은 진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나님이 간섭하시는구나. 어떻게 그 설교를 듣고 저만큼이라도 살까’하는 생각이 들고 노력을 하지만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7-80되어서 원로목사가 된 다음에 어느 날 두루마기 입고 올라가서 ‘여러분, 그대들 헌금하는 것 보니까 천국 없네’하면 다음 주에 헌금이 배로 늘어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한두 주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참 지혜가 부족합니다. 해놓고 보면 일을 잘못했습니다.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제 책임입니다. 노력은 하는데 단숨에 극복이 안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기를 매달리며 의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머리는 나쁘지만, 카리스마는 없지만, 학식은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꿈지럭거리는 것은 하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힘들어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은 고도의 영성이 없어도 합니다. 힘닿는 대로 열심히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것은 눈빛 하나로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없어도 다리 품 팔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한번에 사람을 회심시킬 수 없어도 세 번 네 번 주의 말씀을 들려주고 다섯 번 여섯 번 눈물로 기도하는 일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은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저에게 목회 잘 못한다고 하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하느라고 하는데 그것밖에 안 된다. 나도 마음에 안 드는 당신들 데리고 목회 하니까 당신들도 좀 참아라. 당신들이 변화되는 것처럼 나도 시간이 흐르면 변화되지 않겠는가. 그때까지만 좀 참자’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은 당장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머리 나쁜 사람은 내 이에 초와 같고 내 눈에 연기와 같다’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한번의 설교로 사람을 다 구원을 못하느냐. 그런 설교자는 이가 너무 쉬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괴롭다’고 하신다면 죽어야지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 휘어잡는 카리스마 없는 사람, 큰 능력 없는 사람, 엄청난 지혜가 없는 사람, 학문이 출중하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게으른 사람이 이에 초와 같고 눈에 연기와 같구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못하는 일을 못하는 것은 영적인 생활에도 덜 문제가 됩니다. 문제는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영혼을 후패하게 하고 속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마음을 정욕으로 채우고 거짓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 힘들다고 느껴질 때도 ‘내가 다 못났어도 내가 실낱처럼 붙들고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쓰임 받는 것이 이 부지런함인데 이것마저 반납해버리고 나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봉지는 더럽고 후저도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이(나사 같은 것) 가끔이라도 쓸모가 있으면 잘 넣어둡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녹이 슬면, 봉지도 더럽고 그 속에 있는 나사도 녹이 슬어 쓸모가 없으니 버리는 것입니다. 그릇은 좀 지저분해도 거기에 담긴 된장이 소중해서 쓰는데 된장도 썩고 맛이 없다면 퍼버릴 필요도 없이 독채 갖다 버립니다. 내세울 게 뭐 있습니까? 출중한 학문, 뛰어난 지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카리스마, 아무 것도 없고 마지막에 실낱같이 남아있는 것이 꽤 부리지 않고 섬기는 것인데 그것마저 잊어버리고 나면 기도할 때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합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왜 쓰냐?’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게으르게 살면 안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34일 살다가 죽는 누에같이 정말 짧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게을러서 주님이 우리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맡겨주신 그 길에서 영혼을 섬기라고 맡겨주신 그 길에서 그렇게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할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이에 초와 같고 그 눈에 연기와 같아서 그분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드리는 존재가 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유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동안 이 땅에 살게 하실 지 모르지만, 게으름을 철저히 미워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화가 되면 하나님 앞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구나’ 해도 게으른 사람은 결코 성화 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게을러서 부주의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게을러서 정욕에 불타기 때문이고 의지가 게을러서 생각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게되고 불순종하게 되어서 결국은 성화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배어있는 게으름의 정신들을 추방해야 합니다. 식생활부터 시작해서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무리의 방탕한 생활들을 정말 정돈하고 절제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힘닿는 대로 열심히 시간을 아껴서 주님을 섬기고 재능을 절약해서 하나님 섬기고 열정을 아껴서 주님을 위해 태우기 위해서는 다른 삶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 삶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수님 알기 전보다 배나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박고, 이번 십자가 사경회를 기다리면서 한번 부지런하셨던 주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게으름, 나태, 부주의, 분발하지 아니함, 미약한 반응,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거기서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비결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려고 할 때 그 무게는 육체로 옵니다. 육체가 고달프게 됩니다.
(예화: 어떤 교인이 계속 노라리로 신앙생활 하다가 열린 교회에 와서 교회에 시키는 대로 새가족반을 하고 여리고 전도를 하니까 입이 퉁퉁 부었다고 한다)
그것이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인데 오랫동안 게으르게 사는 동안에 우리의 육신이 우리의 신앙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니까 연세 드실수록 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살날이라도 있습니다. 다섯 시에 퇴근이라면 젊은 사람들은 이제 열 시이고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은 네 시입니다. 그러니 지난날이 아까워서라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고 하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몸도 쑤시고 죽을 지경입니다. 그 때 예수님과 하나되는 비결을 배우는 것입니다.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가끔 너무 몸이 힘이 들면 드러누워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아프네요. 주님도 그러셨지요. 그렇게 유대 땅으로 사마리아로 갈릴리로 그 먼길을 금가마 타고 다니지 아니하시고 걸어다니시면서, 나귀 타고 다니시면서 그렇게 우리들을 섬기시느라고 허리도 아프시고 쑤시기도 하셨지요’하는 생각을 하면 갑자기 그 피곤이 달콤할 수가 없습니다. 감히 예수님이 느끼셨던 것을 느껴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을 배우면서 섬겨나가는 것입니다.
11. 게으름이 떨어뜨리는 잠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19:15)”
게으름에 있어서 잠의 문제를 언급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가장 가책을 덜 느끼는 죄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영적 생활에 아주 심각한 폐해를 가져오는 것이 잠을 많이 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설교 시작하기 전에 묻고 싶은 질문이 몇 가지 있을 것입니다. ‘몇 시간 자라는 것입니까?’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마음속에 질문이 또 있을 텐데 ‘당신은 몇 시간 잡니까?’하는 것일 겁니다. 다 말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체질적으로 너무 약해서 잠을 많이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체질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시기에 건강이 너무 소진되어버렸기 때문에 잠을 자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도 두 가지라고 보는데 -의학전문가는 아니지만 경험상으로- 하나는 피곤이 쌓이면 잠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수면을 잘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이 오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너무 장시간 동안 자기 자신이 모든 면에 있어서 기력을 많이 쏟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오게 되는 잠입니다. 그런데 그 둘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에는 잠을 자게되면 피로가 회복되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잠을 자면 잘수록 깊이 꺼져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수면으로만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건강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을 좀 줄이고 기력을 보강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샘물과 같습니다 퍼내면 다시 고이는데 바가지가 너무 빨리 움직이면 고일 새가 없이 물을 퍼내니까 고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좀 고이게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스스로 이 피곤이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오는 피곤인가, 기력이 떨어진데서 오는 피곤인가를 정확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에 있는 사람보고 무조건 잠자는 것은 나쁘다고 하면서 덜 자라고 몰아붙이면 쓰러집니다. 그럴 경우에는 일을 대폭 줄이고 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력을 보강한 다음에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한 경우는 신경 계통에 이상이 있어서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않으면 물리적인 신경 계통에 문제가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몇 시간 이상 자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그런 모든 면에서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절대로 잠을 많이 자는 습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모든 것을 과하게 하면 안됩니다. 잠을 자는 것, 밥을 먹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 휴가를 가는 것, 모든 것들이 재생산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노는 것까지도 재생산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휴식이나 수면, 음식, 등등에 빠져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소진해버리는 방식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합한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되 재생산을 위한 정도로만 잠을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게으름이 깊은 잠을 떨어트리며 민첩함이 없는 사람은 굶주릴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깊은 잠’이라고 번역된 것이 두 단어가 아니고 ‘타르데마’라고 하는 한 단어인데 성경에 많이 쓰이지 않고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에 쓰인 ‘깊은 잠’이 ‘타르데마’입니다. 그러니까 갈비뼈를 뽑아도 모를 정도를 자는 것이니까 이 잠은 거의 마취 단계의 잠입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게으름이 인간에게 그런 잠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잠을 떨어트리면 마치 마취약을 먹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자게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예리한 지혜를 가져야 하느냐면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삶으로서 적합하지 않게 행동할 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섞여 있기 때문에 너무 육적으로만 생각하거나 너무 영적으로만 생각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사리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봄철에는 계속 잠이 오고 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추운 겨울도 지나고 봄이 되면 기도생활도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것 같은데, 목회하기 제일 어려운 때가 4월입니다. 그래서 4월은 목회자에게도 잔인한 달입니다. 시험에도 제일 많이 들고 한겨울 동안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노동운동 같이 데모하는 것도 4-5월이고 신학교도 그 때가 마침 데모하는 기간(춘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육체와도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연세 많이 드신 어른들이 제일 주의하셔야 되는 때도 환절기입니다. 가을에서 겨울이 될 때도 많이 돌아가시지만 날이 풀리고 봄이 올 때 더 많이 돌아가십니다. 의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겠지만 갑자기 여건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같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특히 결혼하지 않은 형제 자매들의 경우에- 가장 시험에 많이 드는 달이 잔인한 4월, 5월입니다. 벌써 나이는 한 살 더 먹고 집에서는 빨리 시집가라고 하고 아무도 오라는 사람은 없고, 나이라도 어리면 해볼 만 한데, ‘올해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며 마음이 영적으로 많이 흔들립니다.
(예화: 10대는 축구공, 20대는 농구공, 30대는 골프공, 40대는 탁구공, 50대는 피구공)
이런 것들이 육체적인 요인과 영적인 요인들이 모두 같이 섞입니다. 그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그래서 매순간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뛰어나게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부지런하지 못한 게으른 것들을 자꾸 가책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아직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어버리면 자기의 올바르지 않은 삶에 대해서 자꾸 변명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변명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설교들은 가운데에서도 변명이 많이 나옵니다. 골목에 나가면 사자가 나온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입술을 벌리며 쓸데없는 한담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게으른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게으른 사람들은 늘 말이 많고 변명이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말이 없습니다. 별로 안 하는 사람들이 말이 많고 변명과 구실이 많습니다.
그렇게 말이 많고 변명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잠이 늘어나고 삶이 게을러진다고 할 때, 게으름이 자기에게 떨어트린 종류의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종류의 잠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어느 부분까지 육체이고 어느 부분까지 영적인지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이 자꾸 늘고 잠을 많이 자게 되는 것들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로부터는 동정을 받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영적으로는 그런 잠 속에서 원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을 때의 빛깔을 영혼이 잃어버리고 쇠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잠을 떨어트린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그 잠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잠이 계속 늘어납니다. 그리고 자도 자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데서나 자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오면 자고 다시 출근할 때까지 수면의 연장입니다. 잠깐 일어나서 세수하고 우유라도 한잔 마시고 뛰어나가는데 차를 다면 계속 또 자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는 데도 수면이 수면을 부르면서 계속 자신으로 하여금 잠을 이기지 못하도록 잠에 의해서 자신이 지배를 받는 것 같은 상황에 들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 아주 예리한 판단을 가지고 정확하게 어느 부분까지가 육체적인 문제이고 어느 부분까지가 영적인 문제인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부분들은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의사의 판단에 의해서 해야 될 것이고,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부지런히 고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래 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몸은 도구와 같은 것이어서 망가지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사는 날 동안은 고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화: 자동차도 관리하지 않고 끌고 다니면 팔아도 제값을 못 받는다)
우리 몸도 그렇습니다. 꼭 세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병이 나면 고쳐야 합니다. 자기만 불편하다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를 받습니다. 6-7년 전만 해도 제 책들의 거의 밤에 쓰여진 책들입니다. 목회하고 집회 나가고 원고 청탁 들어온 것을 다 쓰면서 책을 쓸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못합니다. 급하면 가끔 하는데 그 후유증이 몇 일 가니까 스스로 절제하려고 애를 씁니다. 공부하거나 성경말씀을 연구할 때 머리가 깨어서 그것에 대한 탐구력이 불 일 듯이 일어날 때는 덮어놓고 잠을 자도 사실 잠이 오지 않으니까 계속 할 때가 있지만 절제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것들을 잘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사려가 깊어집니다. 그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잘 간수하게 되는데 어느 부분까지가 영적인 부분이고 어느 부분까지가 육체적인 부분인가 하는 것을 잘 분별해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부분들은 의사에게 고침 받아야 합니다. 돈 있으면 보약 사 드십시오. 물론 그런 것만 의지하면 안되지만 기력이 떨어지면 먹어서라도 보충해서 주님을 위해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 육신이 없으면 주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예화: 어느 연세 드신 할머니의 소원- 다리만 건강하면 전도하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 몸이 1년 쓰고 버리겠습니까, 아니면 10년 쓰고 버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몸을 사랑하고 잘 고쳐야 합니다. 필요하면 약도 먹이면서 자기를 잘 보살펴 줘야합니다. ‘배고프니? 내가 먹여줄게’ ‘춥니? 따뜻하게 해줄게’ 하며 탐욕스럽지 않는 한 자기 몸을 잘 건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잘 돌보고 영혼은 목회자에게 진단을 받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은혜 받으면서, 자기의 영혼의 상태의 잘못된 데서 오는 수면의 증가를 순전하게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문제도 없고 모두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요인일 뿐이라고 끌고 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변명이 됩니다.
그래서 게으름의 또 다른 특성이 작은 일을 매우 크게 부풀려서 자신의 의무를 회피해버리는 것이 게으름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은 항상 핑계와 변명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유가 있기는 있는데 그 이유를 아주 크게 부풀려서 전체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사람을 써보면 잘 압니다. 무슨 일을 시켜서 안 되었는데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 일이 안된 전부의 이유는 아닌데 작은 이유를 크게 부풀려서 그 이유 하나를 가지고 그 일이 안된 전체의 이유인 것처럼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담임 목사님이 심방을 분류하시면서 배달부식 심방을 말씀하셨다- ‘갔더니 없데요’식의 심방이 배달부식 심방이다)
이 사람은 심방 갔던 순간 마음이 푹 놓이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나에게 언제 물어보셔도 자신 있다’ 심방을 가서 영혼을 깊이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끼쳤기 때문에 자신 있는 것이 아니라 심방을 못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 만만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게으른 것입니다. 갔더니 없다는 말은 그래도 부지런 한 것이고 가려고 전화해 보니 전화를 안 받더라 하는 것은 더합니다. 심방을 지시할 때 목사님의 의도가 ‘그 영혼이 곤고하고 실족하였으니 잘 권해서 다시 은혜 가운데로 돌아오게 하라’는 것이 심방의 목적이라는 것을 깊이 받아들였으면 ‘갔더니 없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일 전에 가서 없었다면 이틀 전에 갔다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하루 전에 갔으면 만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갔더니 없데요’라고 말하면서 ‘누가 나에게 내 의무를 져버렸다고 말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게으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항상 일을 분투하면서 끝까지 성취해내는 근성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고치든지 아니면 맡기지 말든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일을 주지 말든지 해야 합니다.
(예화: 회사에 무보직이라는 것이 있다-책상은 놔두지만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는 것)
일을 끝까지 하는 법이 없고 일이 안될 대에 작은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를 크게 부풀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물어봐라. 나는 할 말이 있다’ 하는데 문제는 그 사람을 거기에 일하도록 세워준 그 이유가 단지 일이 되지 않은 이유를 말하게 하기 위해서 해 놓은 것이 아니라 고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일을 하게 하려고 거기에 사람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각자에게 하나님이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우리들이 섬기면서 각자 살아가는 것이 식은 죽 먹기 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난관들이 다 도사리고 있습니다. 분투해야 하는 환경들이 다 있습니다. 거기에 사명을 감당하라고 세워놓았는데 그 분투해야 하는 환경과 분투해야 하는 상황을 다 깨트리고 마지막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데 어려운 환경을 만날 때마다 항상 ‘나는 떳떳하다. 내 일이 잘 안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할말이 있다. 내가 괜히 안 한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고 변명할 것을 준비하며 살아간 그 사람들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변명이 아무리 유창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듣고 싶으신 것은 승리했다는 것, 그래서 고지를 점령했다는 승전보이지 하니까 안됐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이라고 하는 유창한 변명을 듣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도 정말 필요한 사람은 전사적인 사람입니다.
(예화: 네덜란드 둑을 막은 어린이 이야기)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 일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런 전사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면서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각오와 마음을 가지고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고용주들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용주가 볼 때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아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게으름이 잠을 떨어트린다고 했는데, 그 게으름 자체가 없으면 그런 식으로 깊은 잠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분명하게 매일매일 살아야 할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민첩한 반응과 행동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이 게으르지 않는 비결입니다.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이 꼭두새벽에 눈 비비고 세수하고 일어나서 옷 갈아입으면 뭐합니까? 할 일이 없는데.
이렇게 설교를 듣고 나니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정말 못된 것이구나.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목표가 없다면 그것이 뭡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복 입고 조간 신문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을 덜 잤으니 좁니다. 그것이 뭡니까?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슴에 불타는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아빠는 하나님 말씀 연구할 때 화장실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두 다리를 오그리고 한다. 일어나면 생각이 끊길까봐)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목표에서 빗나가는 삶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러니까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될 일이 있으면 잠이 안 옵니다. 완성해야 될 일이 있으면 아침에 일찍 깹니다. 그냥 기계적으로 시간표에 밀려서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에 가야하고 갔다오면 교리반 숙제라도 해야하는 것 말고 자기 속에 불타는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내가 더 많은 진리를 알아야겠다’든지 하나님 앞에 항상 그런 각오와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총신 신대원에 가서 강의한 이야기-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지 신학공부 다 했다고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가 끝난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너는 고3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산다)
고3은 모든 일에 절제하며 삽니다. 캠핑 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여자 친구 사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서 바캉스 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대학 들어가서 합시다. 천국 가서 하면 됩니다. 그런 생각이 성도들이 마땅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종말론적 긴장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좀 잘 하십시오. 간신히 밥이나 벌어먹지 말고 잘해서 돈좀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하고 같은 업종에서 ‘저 사람이 아니면 안되겠다’고 하는 산 위의 동리처럼 한 번 해보십시오. 사업을 해서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벌 생각을 하면 피나게 노력하고 밤잠 안 자며 부지런히 돌아가야 합니다. 열심히 버십시오.
(예화: 중국에서도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해보라고 했다)
(예화: 할머니께서 꼭 한사람을 찍어서 그 사람에게만 변소를 푸게 하셨다)
그렇게 모든 일에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세탁소를 해도 어느 집 보다 줄을 잘 맞추고, 슈퍼를 해도 어느 집보다 싱싱한 물건이 있고 복덕방을 해도 어느 집보다 친절하고 정보가 정확해야 하고 물건을 만들어도 그 집 물건을 틀림없다는 소리를 듣고 해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노력해서 돈 많이 버십시오. 그래서 먹고살기만 하고 다른 사람 다 주십시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에 몇 명 안됩니다. 변종된 정신병의 일환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집어넣은 만큼만 나오지 안 들어가면 안 나옵니다. 그래서 항상 고 3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게으름이 잠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갈비뼈를 빼내어도 모를 정도의, 거의 미취에 가까운 잠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빛나는 목표를 가지십시오. 1년의 목표가 있고 한달의 목표가 있고 한 주간의 목표가 있고 내일은 반드시 해야할 일들의 목록을 적어놓는 것입니다. 고3같이 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하루해가 지나갑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정말 어떤 때는 서럽습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나’합니다.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시간이 지나갑니다.
게으른 사람은 불붙는 목표를 안 가지고 있습니다. 게으름이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깊은 잠을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육체의 핑계를 너무 대지 말고 정확하게 진단하십시오. 의학적으로 이상이 있는지 진단하고 필요하면 고쳐서 자기가 그 육신의 연약함을 빙자해서 영적인 태만이 육체의 게으름과 만나서 수면의 방탕으로 흐르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부지런하게 살았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죤 웨슬레였습니다. 90세를 살았는데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하니 2년에 1200편의 설교를 했는데 한편의 설교가 2시간에서 4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거리를 말을 타고 다니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탁월한 건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렇게 시간을 잘 활용하면서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첫 만남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 될 사람인지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인지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 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쓸데없이 만나서 시간만 없앤다는 것입니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그분이 말했던 것은 목양 관계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사교의 시대이고 웬만한 사람은 지하에 사교장을 만들고 술을 비치하던 시대이니까 사교에서 오는 인생의 낭비를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내 생애에서 많은 시간들을 쓸모 없는 대화와 세속적인 일들에 빠지는 것으로 인해 낭비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방탕한 수면생활은 반드시 방탕한 영혼의 상태의 반응입니다. 건강에만 문제가 없다면 그리고 그 두 가지는 항상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그 문제를 다루어서 어느 부분까지가 순전하게 육체적인 문제인가 판단해서 의학적인 치료를 받고 생활습관을 고쳐서 해결하고 그리고 영적인 부분들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깨트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주시고 사랑해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게으르게 살 수 있습니까? 저는 이번 주에도 마음에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고 막 살았던 때도 억울한데, 예수님 은혜 알고 십자가 사랑을 알고 난 이후에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부지런히 산다고 살았는데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사느라고 열심히 살았는데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쥐가 파먹은 것처럼 다른 것에 빼앗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이 아닙니다. 또 부분적으로는 게을러서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나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섬긴 시간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보낼 때에는 3초쯤을 1초로 치면 좋을 텐데 시간은 언제나 균등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째깍째깍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 버렸는데 얼마나 빠른 지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고민하다 보면 몇 일이 지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면서 빨리 결론을 못 내리니까 3주, 4주, 한 달, 두 달 휙휙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가는 세월을 붙들어 매어서, 잘 먹고 잘 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지식이 모자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지식이 모자라서 그릇 섬기고 빗나간 열심히 섬기고 혹은 마음에 순수함이 없어서 하나님 바르게 섬기지 못한 날들을 어떻게 하든지 갚아야겠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예전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으면 이제는 배나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야하고 예전에 게을렀으면 배나 헌신적으로 살아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어드려서 예전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드려야 하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육체의 연약함이 발목을 잡고 그러면서 세월을 더 빨라집니다. 그런데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일 우리들이 부지런하지도 않고 게으르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교인들에게 한마디 훈시를 하면 그 다음 주에 헌금을 많이 하는 그런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교 준비할 필요도 없이 입을 열면 하늘의 비밀한 진리들이 쏟아져서 설교를 듣는 순간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끝나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 같은 능력도 없고, 그래도 남아있는 것이 이 몸뚱이 움직여서 부지런히 사는 것인데 그것도 못한다면 정말 무엇을 할까? 그리고 부지런히 흘러가는 이 야속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어느 순간에 정말 허공을 치는 것같이 그렇게 한평생을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끝나서 그렇게 큰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는데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우리의 삶을 망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기회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주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회복시켜서 세워주신 그 신앙의 자리에서 끝없이 이탈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주님 앞에 가서 뵈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의 방탕함을 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수면의 방탕에 빠졌다면 30분씩만 잠을 덜 자고 그 시간에 기도에 간절히 힘쓴다면 아마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자기의 육체가 누리던 것들을 빼앗으려고 하면 육체는 견디기 힘든 반항과 저항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빼앗아내려면 고통이 느껴집니다. 그 때에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찬송)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는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 하도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 세상에서 나처럼 사셨을 것이다’ 일어나기 힘든 그 새벽의 시간에 몸을 일으키시고 주무시고 싶으신 시간에 눈을 비비시면서 영혼 하나라도 더 고쳐주시고 어루만지시면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을 가지고 왜 활용을 안 했느냐 고는 말씀 안 하십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 주신 지식, 지금 우리에게 주신 기대, 지금 우리에게 주신 건강, 지금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게으름과 성화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우리의 육체를 정욕에 흐르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죄 가운데 거하게 만듭니다. 마음속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틀들을 허물어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저항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게으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살아야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해태한 사람은’했는데 히브리말로는 민첩함이 결핍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민첩함이라는 것은 목표의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목표의식이 없으면 민첩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의식이 있으면 목표와 관련된 일이 일어날 때 아주 민첩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은 굶주립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은 돈을 벌어도 항상 정정당당하게 승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봐야 늘 지니까 빌어먹든지 아니면 잔꾀로 다른 사람보다 쉽게 덜 희생하고 부를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온갖 불법과 더러운 범죄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태한 사람들, 민첩함이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적으로 주립니다. 지금 자신의 영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는데 민첩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망가졌으면 말씀으로 고치고 힘이 부족하면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잘못되었으면 수술을 해서라도 부정적인 것들을 도려내서 다시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나저제나 하고 게으른 것입니다. 알기는 알아도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민첩함이 없는 사람들은 목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겐 정말로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신자가 되고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땅에 사람으로 살아있는 이것이 주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보탬이 되고 정말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사실로 입증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고자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분명하면 우리는 움직일 것입니다. 얼마든지 움직일 것입니다. ‘내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잘못되고 부족한데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더라’하며 민첩해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말씀이 그렇게 나를 고칠 수 있는데, 죽을병에 있는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약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벌떡 일어나서 그 약을 구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민첩함입니다.
그 민첩함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영혼이 핍절하고 굶주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사무쳐서 주님의 뜻대로 어떻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를 고뇌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살아갈 때 그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수면 생활의 방탕을 면하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신앙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2. 게으른 자의 교만함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26:16)”
인간의 육체는 게으름에 떨어지기 쉽고 인간의 영혼은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실증 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이 게으름이 혼자 작용을 하면 그래도 파괴력이 비교적 작은데 유체의 게으름이 영혼의 실증과 손을 잡을 때 그 때 그 파괴력은 마치 영혼의 실증을 타오르는 작은 불꽃이라고 한다면 육체의 게으름은 거기에 기름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불이 타고 있을 때는 별게 아닌데 거기에 기름을 확 끼얹으면 단번에 놀랄 정도로 그 불길이 확 번져서 삼킬 듯이 타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게으름이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 시리즈를 처음 시작할 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시간은 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까지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그 충격의 기운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오늘 게으름에 대한 설교를 도 하는구나. 게으르게 들어볼까?’하게 되는데 그것은 영혼이 그렇게 실증을 잘 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부패한 죄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비행기도 제트기도 없었으니 ‘지구 반대편은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을까? 심심한데 놀러 가볼까?’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장소에 매여있는데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지루했을까요? 하나님이 늘 오셔서 그들과 교제하시는데 하나님에게 실증이 나서 선악과를 따먹기로 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확 하고 시험이 다가온 것이고 그래서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 시험과 유혹 이김의 교리에서도 다루었습니다만 시험이 올 때 서서히 파고 들어오는 것은 그래도 비교적 대처하기가 쉬운데 어느 한 순간 확 하고 밀려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직접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험은 굉장히 무서운 시험입니다.
(예화: 타향에서 살다가 어느 한순간 울컥 고향집이 생각나면서 서럽도록 복받칠 때가 있다)
죄가 없었던 아담과 하와도 바로 그런 종류의 시험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단숨에 추락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죄가 있는 우리는 그런 시험을 받았을 때 얼마나 쉽게 떨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선 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결국은 자기 속에 뭐가 있는 지를 속속들이 다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게으른 사람의 특성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으로 부지런한 사람의 특성들만큼이나 참 많습니다. 우리가 이 게으름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있는데 오늘 이야기는 게으른 사람은 불 경건한 고집이 세다 는 것입니다. 게으름 사람은 선히 말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고 하는 말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고집이 그냥 고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 경건한 고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들이 대부분 무지합니다.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은 고집이 셀 필요가 없습니다. 말로 해서 논리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고집이 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고집이라는 것은 논리를 팽개친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원래 무지한 사람들에게 많습니다. 영리하고 아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고집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로 해서 말로 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리하고 지식이 많고 논리적인 사람도 설득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지하고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그리고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사람과 논쟁을 안 합니다. 마지막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회개할 일이 생기기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고집이 있다는 것과 신념이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고집은 총체적인 자기 자신의 사상의 얼개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고 소신은 얼래가 총체적입니다. 총체적인 사상과 관념, 인생관, 이 모든 얼개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서 신념 있는 사람의 행동은 고집으로 일관한다고 말하지 않고 신념으로 일관한다고 말하는데 그 신념이 있는 사람들의 행동의 특징은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집이 센 사람의 경우에는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가 개별적이고 하나 하나가 서로 이어지는 논리가 없습니다. 하나하나 이어지는 논리가 있으면 그것을 우리는 고집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념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논리가 없이 마구 흩어져 있으면서 하나 하나를 자기의 집착 때문에 안 꺾으면서 모든 논리에 의해서 설득되기를 거절하고 무조건 한 방향으로 밀어버리는 경향을 가리켜서 똥고집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감당하기 힘듭니다. 가끔 목회하다 보면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깊이 변화되어서 참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 눈에 피눈물이 나야합니다. 우선 목사 눈에 피가 몇 사발 쏟아져야되고 자기 눈에도 피눈물이 쏟아져야 되고 그 사람을 지켜보는 가족들, 그 사람을 돌보는 교회의 지체들의 눈에서도 눈물 좀 쏟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힘듭니다. 정말 안 바뀝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고집이 꺾이게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성화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엄마가 많이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거룩하게 하시더라’하는 것은 성경에 안 나오는 법칙입니다. 엄마가 기도 많이 하면 엄마가 성화 되지 내가 왜 성화 되겠습니까?
(예화: 신학대학 입학 면접을 할 때 왜 신학교에 왔느냐고 물으니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 집 사람이 기도 많이 했더니 하나님이 저를 여기 가라고 하시더랍니다’했다. ‘선생님은 집에 가시고 사모님 보내세요’했다)
그러니까 성화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 날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죄가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보고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을 때, 여러분들이 생각했던 죄의 우선 순위와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던 죄의 우선 순위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엄청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연약함이 아닙니다. 연약함은 누구를 의지하려고 하는 것인데 펄펄 살아서 고집이 하늘을 치솟는데 어디가 연약하다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 잘 미끄러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하다가 정말 바보같이 막판에 아무렇게나 마구 그려버리고 팽개쳐버립니다. 인생도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모가 해야될 일은 불경건한 고집을 아이들이 못 부리도록 강력하게 휘어잡아서 꺾어야 합니다. 가끔 심방 가보면 아이들이 기가 살아서 펄펄 뛰는데 두고 보십시오. 절대로 그 자식이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아이들에게 잘 해 주셨겠지요. 그렇지 않고 그렇게 기가 살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아이들 눈치 보느라고 누가 부모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들이 절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꺾으십시오. 아무리 잘못했어도 용서를 빌 때는 용서해줘도 어려서부터 고집을 부릴 때는 마구 패서라도 꺾어야 합니다. 그 고집이라는 더러운 죄를 붙들고 있는 그 아이가 매가 무서워서라도 그 더러운 고집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징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집이 센 사람 치고 사회에서 많은 사람과 잘 어울려서 생활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도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고집이 세면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밑에 있으면서 고집이 세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절대 아이들을 그렇게 길러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다 용서해도 옳지 않은 고집을 부리는 것은 못 봅니다. 무력으로라도 제압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부모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렇게 야단을 치고 자신 있게 올바르게 살라고 하려면 부모가 정당성 있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기니라”했습니다. 게으른 자가 주어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자의 특성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대답을 한다’는 것은 좋은 얘기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고 조리 있는 정당한 말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혜자는 왕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왕에게는 옳은 이야기를 간청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어느 나라도 제도 자체가 임금이 제멋대로 하게끔 되어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누구 얘기도 듣지 않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나라의 제도가 그렇게 되어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왕이 자기의 권력을 남용한 것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의 정치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한국 이조시대의 정치사를 다 공부하고 나서 자기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제도를 연구했지만 이렇게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왕의 독주를 막는 민주적인 언로가 열려있는 정치구조는 처음 봤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유래가 없었는데 이 나라가 그렇게 망한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극찬한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이스라엘에는 이렇게 나서서 옳은 이야기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 못지 않게 많았습니다. 우선 사람은 아니지만 펼쳐놓으면 옳은 말을 해주는 최고의 권위의 말씀이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잘 연구하고 가르치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가지고 와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선포 때문에 죽으면 영광이라고 생각하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들만 해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최종적인 권위가 있는 성경은 자기의 신앙이 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지혜자는 그렇게 옳은 말로 조리 있게 간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게으른 사람은 그렇게 조리 있고 이치에 맞게 올바르게 대답하는 일곱 사람 보다”했습니다.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 수입니다. 한사람이라면 개인적인 견해니까 한쪽에 치우쳤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일곱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했으면 그것은 사실이라고 봐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곱 사람이 한가지 방향으로 이것이 이치라고 대답해주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 검증된 일곱 사람의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대답보다는 자기 한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엿볼 수 있는 게으른 자의 특성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특성의 첫째는 고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고집에 대해서 절대로 좋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완고하다’ ‘완악하다’ ‘패역하다’와 같은 모든 것들이 고집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집은 비록 논리는 없고 사상적 얼개에 기반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이 고집은 그의 고집스러운 성품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 성품과는 분리된 어떤 의도된 행동이기는 굉장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더 고집이 세냐 하면 성격이 질긴 사람이 가장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부부가 싸워도 신앙의 개입이 없는 한 질긴 사람이 항상 이깁니다. 쇠심줄하고 닭심줄하고 싸워봐야 쇠심줄을 감당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긴 사람은 항상 자신이 위에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질겨서 끊어지지 않는 그런 사람은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창과 칼로 정복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창칼이 밟고 지나간다고 해서 정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를 정복했습니다. 국권을 뺏었으니 정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못했습니다. 토목에서 사용되는 일본식 언어 몇 개를 남겨둔 것으로 우리를 정복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알렉산더가 파죽지세로 몰아붙여서 아프리카까지 정복했습니다. 땅이 왜 이렇게 좁냐며 울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정복되었습니까? 안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제국이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에 네 나라로 쪼개집니다. 그리고 후에 그 마케도니아 제국이 변방에서 일어난 로마 족들에게 단숨에 빼앗겨서 로마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정복했습니까? 로마제국인데 로마 말은 중앙에서 몇 사람만 쓰고 나머지는 전부 헬라어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하셨습니다.
(예화: 정말 마음을 곱게 쓰더니 땅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실제로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창칼로 땅을 지배하지만 마음이 온유한 사람들은 감화력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들고 설치는 베드로를 말리셨는데 로마가 그 발달한 병기를 가지고 지배할 수 없었던 헬레니즘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지는 그곳에 주님의 그 온유하신 모습이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서도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온유하게 십자가게 못 박혀 죽으신 그 감화력 때문에 창칼에 굴복하지 않던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께 귀순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집 센 사람들은 감화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사람에 의해 감화를 받고 그 그늘 아래 모여서 뭔가 그 사람의 덕을 보면서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고집 센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고집 부리는 사람이 돈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든지 권력이 어마어마하게 높다든지 학문이 너무 출중하게 뛰어나다든지 독창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 데서도 배울 수 없다든지 할 때는 그래도 사람들이 모입니다. ‘더러워도 참아야지’하고 이를 갈면서라도 모입니다. 그러나 모여도 절대 그 사람에게 감화는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생각대로 흩어집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집이 강한데 그 강한 고집은 모두 개개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성품 깊이 뿌리박은 고집스러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집스러움이 절대로 영혼의 변화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저는 절망입니다. 저는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집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못쓰겠다면 제 전체가 폐품이라는 이야기인데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저를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들이 기질과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고난 기질은 자기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실 자기가 그 기질의 조작자는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성격이 고집스러운데 그 고집스러운 것 전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두 가지가 문제가 되는데, 그 고집스러움의 내용에 있어서는 죄와의 결탁이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 고집스러움의 방향에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를 빗나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고집이 그 사람이 거룩하게 사는데 엄청난 도움을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집스러움이 하나님에 의해서 전혀 터치되지 않은 가운데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여러분들의 신앙과 영적 생활에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그 고집의 올무에 여러분들이 자꾸 빠집니다. 그리고 나중에 땅을 치면서 후회합니다. 물론 후회 안 하기로 뜻을 세웠기 때문에 회개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든 그 고집스러운 자연적인 기질은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문제가 되는데 내용 면에서는 그 고집스러움 속에 섞여있는 죄와 부패가 문제가 되는 것이고 고집스러움의 방향에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를 빗나가니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만약에 그 고집스러움 속에서 죄성이 빠져나가고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한길로 가기를 원하시는 것들로 방향이 똑바로 잡히면 그 고집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고집 속에는 이미 은혜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안 들어가는데 그 고집 속에 있는 죄성이 왜 빠져나가겠습니까?
도라지는 껍질을 벗겨서 그대로는 써서 못 먹고 찬물에 담가놓으면 쓴 물이 빠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집은 쓴 물 머금은 도라지와 같습니다. 통 도라지를 냉수에 그대로 집어넣으면 쓴 물이 안 빠집니다. 방망이로 두드리든지 칼로 찢어서 조직을 해체시킨 후 집어넣어야지 쓴 물이 빠집니다. 인간도 똑같습니다. 통 도라지처럼 펄펄 살아있는 사람보고 쓴 물을 빼라고 설교하면 처음에는 가만히 있지만 나중에는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더덕이나 도라지의 조직을 두들겨서 주저앉히는 것처럼 말씀으로 때려서 성령의 은혜의 물에 푹 집어넣으면 비로소 거기에서 쓴 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쓴 물이 빠진 도라지에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 조직이 상하지 않게 살살 무쳐놓으면 아삭아삭하고 쌉쌀하면서 맛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니까 인간의 고집 속에 깃들여 있는 죄성이 빠져나가지 최선을 다해봐야 쳐들어오는 은혜도 없는데 왜 도망갑니까? 은혜가 쳐들어와야지 죄성이 보따리를 쌉니다. 죄성이 빠져나가서 똑바로 자리가 잡히면 하나님이 정말 쓰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고난 기질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처럼 바보가 없습니다. 몇 달란트를 맡겨주시든 그것은 주님 마음입니다. 단 그것을 충성스럽게 잘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든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고집이 셉니다. 그런데 그 고집 센 이유는 자기가 깨트려져보지 않은 사람들이 완고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충격을 좀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때 그래도 여러분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이게 아닌가봐’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단순히 여러분들이 힘든 것만을 가지고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와는 다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들이 생각이 나거나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그 사람이 나와 틀리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감지를 했을 때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혼자 독방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는 괴롭기만 하지 최소한 불안하지는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가 그런 것을 보면서 쾅하고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자기가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깨트려짐이라고 하는 것은 통회하는 마음이 죄에 대해서, 죄에 대한 그릇된 사랑에 대해서, 자기 의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을 지적인 면에서 보면 자기가 견지하고 있는 어떤 확신에 대해서 깨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깨트려지면 깨트려질수록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깨지면서 새 세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쾅 하고 충격을 받으면서 ‘아 이게 아니었구나’할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보고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죤스 목사님이 자기의 고백서에서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젊은 시절 이야기인데 -그 시대에 태어나면 다 그 시대의 자식이 됩니다-어느 고서점방에 갔더니 팔리지도 않는 책이 한 권 있는데 죠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분의 전집이었습니다. 그 책을 사서 먼지를 털면서 집에 와서 펼쳐놓고 읽기 시작하는데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티끌만 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드워드 앞에서 티끌 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그런 충격을 받게 되면서부터 그분이 ‘신앙이 이게 아니구나’하면서 청교도에 입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복음에 대한 가장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설교자 중 한사람으로 일생을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충격이 쾅하고 올 때 지식적인 엄청난 충격이 오면서 거기에서 깨트려지게 되면서 지혜로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식들이 깨트려지게 될 때 의지가 완고함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이 세상에 네가 제일 옳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의지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집스러운 사람은 대부분 지식에 대해서 폐쇄된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은 더 알려고도 안하고 그 안에서 성을 쌓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세월이 많이 지나면 망합니다.
저는 중국의 문화가 로마시대의 문화에 못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찬란한 문화를 구가했다고 생각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로마는 15만 ㎞의 도로를 놨고 중국은 4천 ㎞의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중화사상을 가진 것입니다. ‘중화’는 자기네가 이 모든 지구의 배꼽이라는 사상입니다. 중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는데 외국배가 와서 대포를 빵빵 쏴대니까 ‘저놈의 배 당장 날려버려라’하고 신하들은 ‘우리 대포는 거기까지 못 갑니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지식을 아무렇게나 막 받아들이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무 책이나 마구 읽으면 큰일납니다. 안됩니다. 부지런히 지식을 섭취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가끔가다가 지식을 섭취하는 사람들이 겉멋이 들어서 올바른 것을 채 섭취하기 전에 아무 것이나 습득하려다가 잘못됩니다. 그것은 지적으로 깨트려져서 다양성을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주 혼란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잘못하면 고집을 세우려야 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먼저 올바른 것들을 충분히 배워가면서 항상 자기 자신이 올바른 것을 판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가운데 자기가 확신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최종적이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단 성경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진리라고 말하는 것, 설교를 통해서 그것이 진리임이 성경을 통해 입증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세 살적 확신을 구십 까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외에 상대적인 것에 대해서는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말하자면, 외국 여행을 위해서 달러가 많이 소비된다고 하는데 괜찮습니다. 술 좀 덜먹고 쓸데없는 데 덜 쓰면 됩니다. 청년들에게 갈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나가라고 합니다. 외국에 가서 밥만 먹고 와도 남는 게 있습니다. 나이 많이 들면 깃발 따라 다니느라고 힘만 들고 도시락만 먹고 오는 것이니까 젊었을 때 부지런히 가야합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다양한 것을 보면서 생각을 넓히면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저는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학문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한바가지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류의 지성사라고 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지적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담을 수 있는 것이 한바가지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지식의 세계 속에서 깊이 겸비해지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만 여러분들이 믿으실 지 모르지만 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기도 제목이 매일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너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엊그제는 참 한심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았을까. 겨우 이 나이 먹어서 한참 진리를 쏟아내어야 할 이 시기에 겨우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며 하나님 앞에 한탄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세계는 무한하게 넓습니다. 모든 지식의 세계가 그렇게 넓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에 있어서 결코 깨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 완고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완고한 사람들이 계속 그 완고함을 더하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게으름과 연결이 됩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호기심이 별로 없고 또 호기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호기심을 끝까지 규명해낼 정도의 성실함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문제되는 것이 무지입니다. 일곱 명의 사리판단이 이것이 옳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훨씬 지혜롭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지혜가 있다면 그렇게 안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혜를 구하는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지혜가 게으른 사람의 것입니까, 부지런한 사람의 것입니까? 그래서 지혜와 짝을 이루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가 충성입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반대편에 가면 게으름과 악이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면서 같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는 부지런하게 산 사람에 대한 대가입니다.
(예화: 한 형제님을 만났는데 학교 교사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민을 갔는데 영어가 안되니 막일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자동차 정비를 배워서 성공한 이야기-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시카고의 우박으로 인해 자동차에 생긴 흠짐을 빨리 고치는 노하우를 개발하여 성공했다)
세상적으로도 어느 한 가지를 잘해야겠다는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서 독특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고 거기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무지한 지 아십니까? 은혜 속에 살려는 몸부림이 적기 때문이고, 몸부림은 있는 지 모르는데 그 몸부림과 열망이 잠깐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것 가지고는 지혜가 안 생깁니다. 그것이 계속 지속되어서 지속되는 것을 못하게 수없이 도전하는 것을 비집고 계속 그 은혜의 세계를 알겠다고 말할 때 그때 그 속에서 은혜의 세계와 하나님의 광활한 복음의 세계 속에서의 이치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이 ‘mystery of gospel-복음의 비밀’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의미에서는 피묻음 복음이지만 이 은혜의 세계의 아름다운 복음의 비밀들은 우리들의 피 어린 순종의 삶과 부지런한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는 성실하고도 총체적인 복종과 투쟁 속에서 획득될 수 있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할 때 역시 그런 많은 수고 속에서 우리들이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게 해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저는 정말 눈물밖에 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음의 세계에 대해서 엄청나게 압니까? 가끔 새가족들을 만나면 열린 교회에 와서 엄청난 말씀의 세계를 터득한 것 같은데 뻔합니다. ‘목자와 양’ ‘십자가를 경험하라’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입니다. 그것이 전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복음의 은혜의 세계-에서 얼마나 되겠습니까? 태평양의 광대한 바다 가에서 조가비에 모래알이나 몇 개 담은 것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믿고 더 이상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고 마음을 지키면서 애쓰지 않으면서 살아간다면 결국 여기에서 지혜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선히 대답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결국은 그런 어리석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또 책이 나왔습니까? 앞에 책 아직 다 못 읽었는데’했습니다. 저는 저대로 쓰는 법이 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간절히 하다보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면 계속해서 지혜로워지고 지혜를 새롭게 발견할 때마다 항상 동반되는 것이 ‘아 나는 무지하구나.’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워져 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선히 대답하는 일곱 사람의 대답보다는 자기가 훨씬 지혜롭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리석어져 가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쉬움 속에서 게으름 시리즈를 끝냅니다만 정말 우리에게 뭐가 있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을 위해서 많이 섬긴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남은 날들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 앞에 게으르게 살았고, 부지런하게 산 날들은 무지해서 오류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섬기는데 있어서 빗나간 열심히 헛방만 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다 흘러갔습니다. 이제는 남은 날 들이 얼마 안됩니다. 우리가 유능합니까? 우리가 뛰어납니까?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시시때때로 주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우리들이 게으르기까지 하다면 죄송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 게으르고자 하는 자신의 육체와 싸워야 합니다. 영혼이 실증과 더불어 다투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하게 붙들어서 나태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에 땀을 흘리다가 가야지 주님이 땀을 씻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예화: 병자 심방 갔을 때 제일 서운한 것은 병자가 펄펄 돌아다니는 것이다-누워있어야 머리에 손도 얹어주고 할 텐데)
우리도 땀 흘리다 가야지 예수님께서 ‘정말 수고했구나.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다 봤다’하시면 땀을 닦아주실 것 아닙니까? 눈물을 흘려야지만 계시록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산을 옮길 만한 믿음,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방언의 능력, 그리고 신령한 말로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끼칠 수는 없어도-그것은 내가 받은 것이 없어서 못해도- 그러나 부지런히는 살겠습니다. 뭐든지 가르쳐주십시오. 뭐든지 알려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집에 사환입니다. 알려주십시오. 부지런히 살겠습니다’하면서 일생을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 정말 하늘 나라에서 소중한 안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게으름과 신자의 영적생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