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과 순종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계명과 순종 (레26:3-4) 2005.1.16 주일오전 1
2.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신30:20) 2005. 1. 23 주일오전 14
3.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신28:2) 2005. 1. 30 주일오전 23
4. 불순종의 저주 (신28:15) 2005. 2. 6 주일오전 37
5. 불순종과 계명 (신28:15) 2005. 2. 13 주일오전 50
6. 복을 베푸시는 주권 (신28:12) 2005. 2.20 주일오전 64
7. 다시 복 주시는 하나님(신30:2-30) 2005. 3. 6 77
8. 말씀에 익숙한 자들의 불순종 (신30:14) 2005. 4. 3 주일오전 90
9. 순종의 원천 (시119:54-56) 2005. 4. 10 주일오전 105
10. 순종하는 자가 역경을 만날 때 (시119:39) 2005. 4. 17 주일오전 115
11. 순종하는 자가 핍박을 받을 때 (시119:157~158) 2005. 4. 24 주일오전 125
12-1. 마음을 낮추시는 기회(신8:2) 2005.5.26 교직원예배 137
12-2. 저주란 무엇인가 (신28:15) 2005.2.1 교직원예배 141
1. 계명과 순종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가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찌라”(레 26:3-4)
1.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의 배경을 좀 살펴보면 오늘 이 성경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 속에서 함께 주어진 규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 전체는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교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에 이 책 내용 전부가 제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장부터 16장까지는 더러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일반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의 방법, 또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의 방법, 그리고 그 제사장을 임명하는 규칙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7장서부터 25장까지를 2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이라고 하는 말로 집약이 되는데 그래서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개인적인 성결과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인 이스라엘이 교회로서 하나님과 맺는 성결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읽어드린 이 26장 본문은 이제 3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26장과 27장에서 이 모든 앞에 나온 내용들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삶의 적용을 합니다. 여기에서 불순종과 순종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을 가르치심으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도록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교회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복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참으로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원해서 고통스러운 길, 괴로운 시련의 길, 고단하고 견디기 힘든 그런 고난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태어난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고 싶어 하고 그리고 그 행복한 길을 자신이 걸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행복한 것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서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오복이니, 칠복이니 하면서 인간이 참으로 행복해지는 비결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논했고 철학자와 많은 사상가들은 인간이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일리가 있는 이야기일 뿐이지 진짜로 행복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던 사람들 중에는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권 쓰고 그리고 TV에 나와서도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자기는 이혼하고가정이 깨지고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수면제로 나날을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처럼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실제 행복에 도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2. 복을 구하는 자들에게
오늘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제일먼저 권면하시는 것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사실 우상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이 명령은 권면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행복도 없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못 박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이 레위기에 있는 명령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 심각한 범죄의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너고 그리고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빽빽한 구름 사이에 하나님과 대면하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그래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로 많이 향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우상을 금하시는 것을 심각하게 명령하시는 것은 광야생활에서도 만나는 많은 족속들로부터 우상숭배를 배우지 않도록 경고하시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강력하게 경고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우상을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긴다고 하면 25장가지 주어진 이 모든 제사의 규례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우상은 그야말로 우상이었습니다. 깎아 만든 신상, 부어 만든 상, 혹은 나무나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경배하고 예배하는 행위가 우상숭배였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의미에서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종류의 우상숭배로부터는 이제 상당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깊고 진실한 신앙 때문이 아니라 과학과 합리적인 사고의 발달로 인해서 사람들이 점점 이런 것들을 안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죄에 빠져있음을 우리는 사회에서 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어둠 속에 있는 이 불쌍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그리고 오늘의 운세를 살피는 바보 같은 미신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굉장히 용서받기 힘든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심지어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을 왜 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또 실으면 그것을 또 보는 사람들은 오죽 답답했으니까 그것을 보겠습니까? 행복한 사람들은 그런 것 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 오늘의 운세 같은 것을 보는 것을 뭐가 그렇게 궁금합니까? 그냥 살면 되지 뭐가 그렇게 궁금합니까? 불안하면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될 것이고 그리고 행복하면 하나님을 찬송하면 되지, 그까짓 것들을 보겠다고 하고 그리고 자기도 스스로 복 받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있는 점집 같은 곳을 가서 이름석자를 들이밀고 그리고 점을 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 교인이 아닌데 점을 치러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갔더니 점치는 사람이 한참 점을 치다가 산통을 집어던지면서 너희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지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친구들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기 있는 친구가 교회에 가끔 나오는 친구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 뭐 하러 여기에 와서 점을 치는가. 예수나 잘 믿고 잘 살 생각이나 하지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와서 산통을 깨고 점괘도 안 나오게 하는가 하면서 똑바로 신앙생활 하라고 야단을 치더랍니다. 그래서 가서 교회서 회심하지 않던 사람들이 점집에서 회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더랍니다. 진짜입니다.
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증조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니까 그때가 1800년 대 말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무당한데 갔는데 몇 번 뭘 하더니 나중에 신경질을 내면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까 요즘 서양에서 새로 들어온 예수한테 가보라고 그래서 그게 계기가 되어서 그 집안에서 계속 목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또 이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점집에 가면 은혜가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모든 우상숭배가 왜 이루어질까요? 하나님이 성경을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상숭배 때문에 수만 명이 죽고 하나님이 그렇게 엄중하게 심판하시는데도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친 듯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우상숭배의 동기는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긴다고 그러면 우상을 사랑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흔히 조상신을 섬긴다고 그러는데 조상을 흠모하고 사랑하고 그렇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제사를 드릴 때 조상이 하얀 옷 입고 머리까지 풀어헤치고 우리를 안아주기를 원합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런 계명이 우상숭배에는 없습니다. 우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우상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섬기는 이유는 자기가 잘되고 싶은 이기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부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부분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사랑해서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해택을 받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원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적용을 하게 되면 오늘날 이런 고전적인 의미에서 깎아놓은 금이나 은, 이런 목상에 대해서 절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우상숭배는 이제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지만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우상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이 우상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애쓰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렇게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고 인간이 많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을 위해서는 가끔 놀고 쉴 때도 있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마 쉬거나 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쉬고 놀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니까 쉰 게 쉰 것이 아니고 논 게 논게 아닙니다. 결국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니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이제 물질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물질을 얻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고 또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지위도 필요하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분투하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일생을 살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자기 사랑에 대해서 몰두하면서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우상숭배의 삶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중심이 틀린 삶입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중심이 되고 그 하나님을 위한 사랑에 의해서 모두 재편된 삶, 그것이 곧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언약백성들의 삶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그런 옛 생활의 모습은 없지만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수많은 우상을 가슴속에 가지고 하나님 대신에 그것에 의해서 재편된 길과 가치를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금하였지만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 속에서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말함으로서 신학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우상숭배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욕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도저히 좀처럼 용서하시지 않으시려고 하는 무서운 죄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간음의 죄였고, 또 하나는 우상숭배의 죄였습니다. 많은 죄들 가운데 하나님이 특별히 이 두 가지 죄를 그렇게 중대하게 다루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많은 죄들이 결국은 자기 사랑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훌륭한 교부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야기하기를 인간의 자기 사랑, ‘아무르쓰이’ 라고 하는 이 인간의 자아 사랑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며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 악과 그 모든 더러운 것들이 빛나간 자기 사랑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사랑은 소극적으로 자기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본능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 사랑은 보다 높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의 뜻을 펼쳐서 지배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점령해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되면 이웃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자기를 비우는 삶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그 요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사랑의 극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과 이 세상의 자원을 모으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이유이고 바로 그 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엄중하게 금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누누이 그 백성들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경험을 보더라도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일정 기간동안 일시적으로 더 많은 재물을 손에 넣거나 좀더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또 사람들에게로부터 명예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물질이나 이 세상에 있는 명예와 그리고 권력 같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므로 나 스스로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실제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자아가 이런 세상의 자원이나 행복한 상태를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면 영혼의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물질이나 행복한 조건들을 소유해도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은 죽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가지 증상들을 일시적으로 치료할 수 있고 경감시킬 수는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영혼의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는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나님보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면서 애쓰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깊이 경고하시고 너희는 언약백성이니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지 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그런 물질과 세상의 자원을 자기에게 손에 넣는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행복이 없기 때문에 그가 진정으로 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느 한순간에 훅! 하고 모든 것들을 불어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추구해온 많은 사랑의 결과들이 얼마나 헛되고 아무 것도 아닌지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치를 언약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의 근원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나 이 세상에 자원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의 수준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러분이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데서 어떤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이미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맨 첫 장을 펼치면 우리에게 이렇게 찬송하라고 가르칩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이 모든 언약백성들의 복의 근원인 것과 동시에 하나님은 그 언약백성들이 당신 자신을 인해서 행복하고 즐거워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므로 행복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성소 신앙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너희는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소라고 하는 말은 좁은 의미로 사용되면 하나님 앞에 지은 그 성막 속에 두 개의 방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막 뜰이 이제 천으로 쳐지고 그 성막 가운데는 진짜 고요한 성막이 있고 그 성막은 12평의 방과 6평의 방 두개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6평의 방은 대 제사장만 일년에 한차례씩 들어가는 지성소였고 그 앞에 있는 12평의 방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밖에서 제물을 드리고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소였습니다. 그것이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가는 곳이었는데 그 성소를 가리키는 곳이 좁은 의미에서의 성소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성소는 휘장이 쳐진 그 모든 성막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성막은 후에 성전으로 발전되고 그 성전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는데 그 “거하신다”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로 “에스케노센”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샤칸”이라는 말에서 왔고 이것은 바로 성막을 칠 때 사용되는 용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것이 마치 성막으로 텐트가 쳐져서 이스라엘 백성들 한가운데 있었던 것과 같은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과 만날 성소를 만들도록 지시하시고 그 성소는 광야의 생활에 맞게 이동식 성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에 머물게 되면 제일먼저 성소가 쳐지고 그 성소 주위에 열두 지파가 자리를 잡고 진을 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구약의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소를 공경함으로서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의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중요한 말을 할 때마다 사용하시는 후렴구 “나는 여호와니라” 하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성소 신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여호와의 신앙이 핵심이었습니다.
성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때 그 성소에서 만나주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제를 눈에 보이는 통치를 구현해 가시는데 그 통치를 구현해 가시는 중심의 자리가 성소라고 하는 신앙이 바로 성소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생겨나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와 가정의 일들, 심지어는 국가의 일과 나라에 대한 많은 일들, 심지어는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행복하고 말할 수 없이 기쁜 모든 일들, 이 모든 일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성소를 향하였고 그 성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축복을 빌거나,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해결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소를 향하여 가지고 올라오는 인생의 문제들 속에는 크고 고상한 문제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인간이 살아가는 하찮은 보이는 일들도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모두 성소를 향하게 하는 그런 제목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한나는 성소를 찾았고 거기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나라의 중대한 일도 아니고, 민족에 관한 중대한 일도 아니고 아들 하나만 낳게 해달라는 평범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첩에 의해서 동요한 상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는 다른 곳을 찾지 않고 성소를 찾았던 것입니다.
외적에 의해서 공격을 받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왕들이 바로 그 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성전이 사라졌어도 성소 신앙은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니 포로기 시대에 이런 신앙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소에서 모두 떠나가 이방의 포로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이 성소를 향해서 눈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할 때도 바로 이 성소를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포로 이후에도 에스라와 같은 사람은 백성의 부패와 타락을 깨달았을 때도 그는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그 문 앞에 그 성전에서 울면서 그 백성을 대신해서 참회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이 성소 신앙은 성소가 우상이 되어있는 신앙이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성소 신앙이 된 그런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축복의 저수지와 같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그치고 말씀이 감화를 잃고 시험과 그리고 많은 죄악들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면 그 저수지에 붙어사는 많은 성도들의 삶이 곤고해지기 시작하고 시험과 그리고 커다란 고난들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시험과 어려움들이 이 성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 성소 신앙으로 인해서 성소가 고임을 받지 못할 때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내 성소를 공경하는 것이 너희가 진정으로 축복받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신 이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도 여전히 진리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소를 바라보고 오늘도 그 성소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깊이 깨닫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많은 성도들의 섬김을 필요로 합니다. 영적으로는 그런 정서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이 교회의 축복된 상태를 깨트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기 때문에 이 성소를 지키기 위해서 기도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무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영적인 권세들에 대항하는 철저한 헌신으로 영적인 전투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영적인 축복들을 이 어두운 세상에 흘려보내기에 위해서는 먼저 성도의 아름다운 헌신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뿐 아니라 이 땅에 자원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자신에게 있는 많은 것들이 이 성소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흘려보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질로, 마음으로, 재능으로, 영적인 헌신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겨서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과 주님을 알지 못하는 고통 하는 이 백성들에게 흘려보낼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진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 성소를 공경하는 것이고 이렇게 성소를 공경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못 박고계십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축복받기를 원하면 너희들이 우상에게 빌고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긁어모아서 스스로를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소를 깊이 사랑하고 그 속에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그 성소가 언제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고칠 수 있도록 하늘과 이 땅의 자원으로 가득한 성소가 되기를 구하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신앙의 비결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축복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명을 너희들이 준수할 때 이 율법을 너희들이 잘 지킬 때 내가 시후를 따라서 비를 내리고 그리고 땅은 그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농경문화를 시작하게 될 텐데 이 농경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제 때에 추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 농사를 지어서 일년을 먹고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농사가 잘되면 부요한 삶을 살고 그것이 실패하면 일년 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그해 농사의 풍, 흉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관건이 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나라 전체가 흉년이 들게 되면 인심이 흉흉해지고 반역이 일어나고 강도와 살인 등등의 심각한 범죄들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가 제때에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음란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을 섬긴 동기는 그 비와 모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중에서 바알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비를 제때 내려주는 그 풍요로운 곡식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산당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간음하고 그런 음란한 방법으로 우상을 섬겼던 이유도 모두 제때에 비를 내리기 하기를 비는 제의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너희 자신, 혹은 이 세상에 있는 우상이 너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 여호와가 제때에 비를 내리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평범한 사실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 땅에서 행복해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행복보다는 고통의 열매를 이 세상에서 거둡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순종하는데도 특별한 뜻이 계셔서 그를 연단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많은 경우에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당하게 되는 그 고통과 괴로움의 모습들이 바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싫어하고 단지 이 세상에서 복 받기만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복주시지 않으니까 이제 하나님께 빌기보다는 이 세상 우상에게 빌고 그래서 신앙을 팽개치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끌어 모아 자기도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정으로 축복하시는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혹은 그 이외에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만 공급되면 행복해질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은 그것들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육체는 땅으로부터 왔고 영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자원이 함께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우리의 영혼에 부어지는 은혜의 자원은 이 땅의 물질의 자원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육신의 축복뿐 아니라 영혼의 축복이 더욱 중요하니 많은 물질과 이 세상의 자원을 소유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들이 부족해도 하늘자원이 넉넉하기 때문에 스스로 행복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의 전대를 한번 보십시오. 혹시 구멍이 뚫어지지 않았습니까? 미친 듯이 긁어모으고 인색해지고 심지어는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서슴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부지런히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모으지만 구멍이 뚫어지지 않았습니까? 애쓰고 힘쓰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고통으로 보내고 지금도 결핍과 괴로움 속에서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결핍 속에 처한 사람을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주님을 위해서 순결하게 살았던 그 많은 사도들이 가난한 삶을 택하고 고난과 벗 삼으면서 그렇게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보다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계명을 주셨을 때 거기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은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순종하면서 거스르면서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한 사람들의 마지막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것 같았으나 어느 한순간 하나님이 불어버리셨습니다. 인색했으나 구멍 뚫어진 전대와 같았고 그리고 녹스는 동전과 같아서 많은 것들은 동록이 먹었고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를 (?)수가 없었습니다.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설교 속에서 예화를 들었던 그 목사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지역 전체가 재개발이 되어서 쓰지도 못하는 이상한 땅들을 가지고 있던 전부 한 평에 7-8백만 원 씩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 평만 가지고 있어도 갑자기 50억, 이천 평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졸지에 100억, 150억의 부자가 되게끔 상황이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제 그런데 그 건축업자의 조건은 교회고 뭐고 여기에 살던 사람은 다 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준이 안 어울리기 때문에 다 뜯어버리고 저 평창동에 있는 것같이 한 채에 몇 십억씩 하는 고급빌라를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수준이 안 맞는 사람이 살면 동네 물 버린다고 다 가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고 합니다. 한 집도 남김없이 가는 조건으로 협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가 어디로 가야지 될지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 뭘 걱정하십니까? 교인들이 그렇게 많고 그 교인들이 적으면 몇 억에서부터 많은 사람은 백 몇 십억까지 받는다고 하는데 십일조만 다 내면 교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했는데 여러분처럼 똑같이 웃으십니다. 김목사님 참 순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요? 그 사람들이 그 십일조를 왜 하겠는가 하면서 그 교회는 토박이들이 많은데 집사, 장로, 함께 개척한 사람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니 그러면 장로가, 명색이 집사가 십일조를 안 하는가 하니까 목사님이 웃으면서 안 하지 그것을 할 리가 있는가 하기에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그런데 어디에 있는가. 그러면 생활비 몇 십 만원이 들어오는 것은 십일조를 내고 땅 팔아서 그것을 헐값에 사서 와서 거기서 여태 살다가 떼 부자가 되었는데 한 푼도 안 내고 그것을 떼어먹고 도망간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거 몇 백억씩 받는 사람들이 새파랗게 젊은 20대가 아닙니다. 인생 살 것 다 산 머리가 하얀 노인네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돈과 함께 망하라고, 그거 떼어먹고 가서 얼마나 잘사나 보자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 그것 설교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안 들을 사람들인데 이래도 안 내고 저래도 안 낼 것이라면 한번 말씀이라도 올바르게 쳐서 이게 진짜 이것이다. 평생 가책이라도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습니다. 그런 엉터리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몇 백억씩 받으면 몇 백만 원이나 돈 천만 원이나 내놓으면서 하나님 이 교회를 축복해주십시오. 가증입니다. 그게 음란한 것입니다.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그까짓 것 다 늙은 나이에 한 2억만 통장에 넣어나도 실컷 밥 먹고 살 텐데 몇 백억씩 가슴에 끌어안고 어디에 가려고 하는지, 난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친 사람들 같습니다. 왜 그렇게 탐욕스럽게 그렇게 사는지,
이스라엘 백성들 보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이빨 사이에 고기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눈을 부릅뜨고 광야에서 죽는지, 그게 언약백성의 삶의 모습입니까? 누가 다 내어놓으라고 했습니까? 왜 웃습니까? 심각한데.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친 듯이 13평에서 15평, 15평에서 20평, 20평에서 30평, 30평에서 40평 마지막에 똑바로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마지막에 집을 팔 때 십일조를 내야지 됩니다.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23평 살다가 32평으로 갔으면 그 집을 딱 팔아서 차액을 십일조 내고 나머지 가지고 보태서 살 것이지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하고 마지막에 끝까지 하다가 마지막에 죽을 때 그럼 자식들에게 집 팔아서 십일조 내고 나머지는 네 것이다, 그리고 물려주겠습니까? 나라의 세금은 정확하게 내지 않습니까? 이게 뭡니까?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내가 그런 것입니다. 참 당신들이 진짜 그 사람들이 자기들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소에도 안 하던 사람들이라면 내가 이해를 합니다. 작은 것은 다 내고 마지막에 땅 몇 백억씩 판돈은 안 내고 그게 결국 바리새인들이 하던 그 행동이 아닙니까? 그렇게 살면서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기를 구하고, 하나님은 아부하는 사람들을 복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순종해서 십일조 안 내고 그리고 조금 돈이 들어온 것은 십일조 해서 내고 그게 하나님을 향한 아부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십일조를 내는 것입니까? 하려면 다하고 안 하려면 하지 말지 그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뭐하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그 모두 다 더러운 삶입니다. 왜 그런 탐욕을 가지고 사는지, 그런 불순종 속에서 축복을 구하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인격적인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축복을 받을만한 삶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이 돌이키려는 노력이 없이 축복을 해달라고 비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축복을 받을만한 삶의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게끔 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확실히 믿으십시오. 믿으려면 믿고 말면 말고 둘 중의 하나를 태도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기 원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이중적인 순종을 우리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는 내면의 순종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외적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구분은 되지만 그러나 나누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내적인 순종은 밖으로 끊임없이 순종으로 흘러나오려고 하고 밖으로 흘러나오려고 하는 외적인 순종은 내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순종할 수 있는 마음에 은혜를 가진 사람들의 순종을 실천하며 살고 순종을 올곧게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내적 순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유통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대사가 거기에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이삭을 앞세우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거기서 벌려놓고 진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들이댑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러면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이제야 내가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사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것을 모르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브라함 속에서 당신을 경외하는지 안 경외하는지 이삭에게 칼을 들이밀 때까지는 하나님이 모르셨다. 그게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도 모르고 아브라함도 모르고 도대체 아브라함 속을 아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 뜻이 아닙니다. 뭘 보여주는가 하면 이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 속에 당신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이 사랑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순종이 내적인 순종으로 머물러있는 것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밖으로 흘러넘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뜻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지만 이제야 네가 나를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이 드러났구나. 그런 뜻입니다. 드러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내적인 은혜의 열매입니다. 내적인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반듯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내적인 은혜가 없으면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 순종하게 하는 자원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둘 다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우리의 영혼이 깊이 변화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와서 그래서 내적인 순종으로 꽉 차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우리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은 버리게 만듭니다.
옛날의 모든 부모들은 다 그렇지 않았지만 옛날 부모들은 지금 부모들보다 훨씬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보면 너무 불쌍합니다. 자기의 인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심지어는 혼자되어서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삽니다. 그러면 자식은 훨훨 다 날아갔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들을 다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자식을 버리지 자기 인생의 계획을 버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내적인 이런 순종을 소유할 수 없고 이런 내적인 순종이 없으니 누구도 외적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굳인이라고 하는 청교도 목사는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 안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우리를 바꾸어놓습니다. 이것은 바뀌지도 않았는데 그따위로 살아. 그러고도 인간이야, 너는 왜 그렇게 못 살아.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라. 계속 그런 식으로 그 사람에게 막 들이대면 그래, 나는 이것밖에 못 산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무슨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합니까?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 가난하게 살아도 올바르게 살아야지 그래야지 잘 안될 때 하나님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지, 이렇게 요동치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붙었다가 세상에 붙었다가 하면서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인지, 생각을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오늘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축복이 사라진 것 같은 위기의 때에 있다면 여러분들이 정말 외적으로 이런 순종의 은혜가 여러분 속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서 자기의 계획을 하나님 앞에 모두 포기하고 살 준비가 되었는지 그런 은혜가 여러분들을 주장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아첨을 해서 행복해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식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택하십시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깊이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이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고자 하는 이 불순종의 죄들이 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거기에는 뭐가 필요한가 하면 의지의 결단과 올곧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배우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나는 모두를 잃어버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릴 수 없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갈 때 그에게 딱 제시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의무에 맞추어서 그 의무를 붙들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내적인 순종에서 흘러나온 외적인 순종입니다.
그래서 이제 느헤미야 29장을 비롯해서 에스겔과 같은 여러 많은 성경구절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지키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면 이 안에서 영적으로 끊임없는 생명의 역사, 이 생명의 정체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올곧게 순종하고 의무에 충실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가면 내면의 세계에 있는 이 순종이 더 강화됩니다. 내적 순종이 더 풍성하게 됩니다. 은혜가 풍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풍성하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께 고난을 받으면서도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간곡히 부탁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소망 가운데 하나가 여러분들 모두 축복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었던 목사님이 나는 심방을 가도 이방 저 방을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남의 집에 가서 침대 방까지 문을 열어보고 그러는지 이 목사님은 가기만 하면 그러십니다. 특히 새집을 샀다고 그러면 좋아서 열어보시면서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맨 처음에 그랬습니다. 목사님 사택이 너무 후져서 그런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성도가 그렇게 가난하게 살다가 집이라도 한 칸 사면 그렇게 기쁘신 것입니다. 오면서도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3. 축복의 길을 보이심: 계명과 순종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막 핍절하고 고통당한다는 이야기가 들어오면 내가 그렇게 괴롭고 아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누구는 빚에 시달리고 고통을 받는다고 그러더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도와줄 능력은 없고 너무 괴로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원하는 마음은 여러분이 잘 살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가난하지 말고 하나님이 특별히 연단하시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할 수만 있으면 정말 여러분들이 복 받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면서 일하다가 보니까 진짜 강물같이 흘러가기 위해서는 진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복 받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픈 게 내가 하나님이래도 복을 줄 수 없게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괴로워하고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정말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탐욕입니다. 먼저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지 심지어는 그들을 위해서 목회자로서 축복을 빌기도 힘듭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빌기보다는 뭘 빌게 되는가 하면 저 사람을 좀 고쳐주십시오. 왜냐하면 고쳐지지 않은데 저기다 축복해주시면 더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그나마도 더 멀리 떠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이 잘 나가보십시오. 그러면 하님을 영영 잊어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주라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좀 고쳐주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의 관심이 신앙이 없습니다. 환경에만 있지, 그런 것을 볼 때 진짜 너무 괴롭고 아픕니다. 아니 왜 그렇게 살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난은 그렇게 좋은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적당한 품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프실까? 이런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은 무엇도 안 해주시고 무엇도 안 해주시고 원망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한번 살아봅니다. 해보십시오. 그게 되는가. 진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면 그게 되는가 한번 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고쳐야지 됩니다. 그래서 진짜 여러분들이 정말 복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너무나 간절히,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순종의 은혜가 가득 차게 하십시오. 그것을 밖으로 흘려버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고,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해주십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려고 마음을 가지신 사람들은 이 세상이 그 축복을 막을 수가 없고 주님이 가는 길에 가시밭길을 놓은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이 새해 말씀 사경회에 영혼 깊이 순종의 은혜를 받고 그리고 외적으로 이 순종의 삶을 살아서 그 어느 해보다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
“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21)
1.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을 때 이미 하나님이 주셨던 명령들을 모세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명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 내용들의 대부분은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난 후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세가 당부하고 있는 내용들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입니다.
우리들이 읽은 이 부분은 이제 이 신명기 전체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그 결론을 통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그 축복 속에서 사는 결정적인 신앙생활의 지침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이 성경을 통해서 모세는 삶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단순히 의무적으로 섬겨야 할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삶의 근원이며 원천이라고 가리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 하나님이 바로 장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너의 장수가 되시고 또 너의 생명이 되신다고 말하십니다. 이 장수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성경에서 너의 날의 길이라. 그래서 이 “욤”이라고 하는 히브리단어는 객관적인 말도 가르치지만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시간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날이 다했다고 하면 결국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날은 그 사람의 날이지만 죽은 다음에 계속되는 날은 그 사람의 날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날의 길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목숨의 길이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제 모든 것들이 그 당시보다는 좋아져서 사람들이 살기가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고령화되면서 이제 사람들이 태어나면 일찍 죽게 될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이 점점 사라집니다. 2018년부터는 우리나라도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문맥으로 볼 것 같으면 사실 이 땅에서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매우 절박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쉼 없는 전투가 있습니다. 누가 오늘 하루도 살아있어야지 살았다고 말할지, 내 날이 얼마나 길 것인지를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언젠가 한번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900년 대 초인데 그때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수명이 40대밖에 안되었다는 통계를 제가 봤습니다. 그러고 가만히 보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48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옛날 분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장수하고 오래 사는 노인네들이 드물었습니다. 그만큼 의료해택도 못 받고 질병과 그 다음에 전쟁, 심지어는 기근 이런 것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단명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지만 청교도 쪽의 어느 자료에 보니까 청교도 시절에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34-5세밖에 안되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통계를 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때를 지났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질병과 전염병, 풍토병 그리고 발달하지 못한 과학 때문에 겪게 되는 그 모든 인간의 질병과 고생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했습니다. 그러니까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을 지났다고 했는데 그 기간이 그렇게 호의호식하며 지난 기간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고난과 질병에 노출되어 있었고 또 하나님의 징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도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곧 들어갈 것이라고 하지만 뭐 편안하게 지어진 아파트에 이사하는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주민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만 희생이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고 들어간 후에 그곳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모든 기근과 질병의 위험,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지 않으면 장수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2. 삶의 원천이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이 너의 장수가 되신다고 하신다는 이 말씀은 단순히 엿가락처럼 길게 살게 해준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그들의 육신적인 생명이 치탈당하지 않도록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공급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비인간적인 삶을 살면서 목숨만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 그런 장수는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원으로서 공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이 말씀을 드리면서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묵상해보십시오. 여러분 이제껏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얼마 전에 저희 아버님이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하신 말씀이 애야, 이제 내가 18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러셨습니다. 그러니까 6.25때 중공군에 총에 맞은 것부터 시작해서 그 수많은 삶의 골짜기를 넘어오면서 17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셨고 이번에 암을 수술하면서 18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셨다고 그러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나는 아버님처럼 죽을 고비를 세어보지 않았지만 그러나 역시 나도 그 못지않게 정말 죽을 것 같은 인생의 고비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셔서 이렇게 왔으니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고 이렇게 살아서 목숨이 붙어서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감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이제껏 공급해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셨으니까 이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제껏 까지만 필요했던 은혜가 아니라 앞으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이 땅에서 필요한 자원들을 공급해주셔서 사람답게 잘 살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셔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습니까?
10년 동안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목양을 하면서 사실 요 근래에 여러분들이 정말 이 세상에서 복 받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진 것도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교회가 커지고 우리의 사명이 주어지다가보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이 세상을 흘러가야지 될 텐데 흘러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물이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지만 흘러갈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물길이 있어도 물이 흐르지 않으면 그것이 강일 수 없고, 그리고 강이 거기 흐르지 않으면 강 주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복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흘러갈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입니다. 그런 축복들을 주시는 원천이 누구신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축복의 원천이 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생명은 앞에 나오는 장수와 대조를 이룹니다. 어떻게 되면 이 두 가지가 다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이제 장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들이 사는 동안에 들어주시는 이 땅의 지상자원이라고 말한다면 뒤에 나오는 이 생명은 하늘에 속한 자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땅에 있는 자원을 많이 소유하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하늘에 자원이 넘치지 아니하면 그가 흘러가기는 흘러가는데 강물처럼 흘러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환경보호를 위해서 많이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래도 옛날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옛날에 한번 중랑천에 가보셨습니까? 제가 그 천 근처에서 여러 해를 살았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만 해도 한내라고 그래서 그 중랑천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얼마나 깨끗했는지 우리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빨래하러 거기로 가서 빨래하며 감탄했습니다. 어쩌면 이 물이 옥으로 짠 그 실같이 그렇게 옥색 빛 같이 그렇게 물이 깨끗한가 하면서 거기서 빨래를 하고 거기에서 미역을 감고 붕어도 잡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뭐 저기에 염색공장들, 무슨 금속 만드는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폐수가 흘러나오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카맣게 흘러나오며 썩는 냄새가 진동하며 흘러갔습니다. 개천 언덕의 주변에 땅을 일구어 배추를 심어먹고 무도 씨를 뿌려서 심어먹고 그랬는데 그렇게 폐수가 흘러가고 난 다음에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청에서 와서 말뚝을 박습니다. ‘여기에 경작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경작하더라도 여기에서 나오는 농작물은 중금속이 오염이 되어서 먹으면 큰일 난다’고 팻말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흘러가는 강인데 폐수가 흘러가고 나니까 주변이 차라리 안 흘러가는 것만 해도 못합니다. 다 썩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풀에도 중금속이, 그 다음에 오이에도 중금속이, 배추 위에도 중금속이 계속 스며들어서 먹으면 사람들 속에 중금속이 쌓여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연출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이 땅에 있는 자원만 많이 주시면 그 사람이 흘러갈 때 강물처럼 흘러갈 수 있겠습니까? 흘러가기는 흘러가지만 폐수처럼 흘러갑니다. 신앙이 없고 돈만 많아보십시오. 무슨 짓을 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늘 은혜가 없고 이 땅에서 지위가 높아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령한 은혜의 감화 없이 이 지상에서 명예가 아주 높아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추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돈도 많습니다. 그럼 흘러갈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폐수가 되어서 흘러가서 그 돈 가지고 죽음에 있는 사람으로 망가트립니다. 그 재능을 가지고 죽음을 막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지위를 가지고 주변에 있는 땅들을 다 더럽혀 흘러갑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자원만 가지고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경제적으로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면 깊이 생각하십시오. 오늘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아, 내가 이렇게 어려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은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시면 어려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아도 내가 흘러가는 폐수처럼 될까봐 내가 진짜 변화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물질적인 고통 중에 두시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무조건 복 주신다고 그러면 나는 하나님께 그러시지 마시라고 내가 그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축복이,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제클린 캐네디와 결혼했던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유명한 시대의 소프라노 마리 칼라스와 함께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손자가 결국 물려오고 물려오면서 그 손자에게 할당된 돈이 우리나라 돈으로 한 1조원 약간 돈이 유산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작년인가 읽었는데 그 돈을 자선단체에 모두 기부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빌 게이트 제단에 모두 다 바치고 싶다고 하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할아버지도 그렇고 자기 조상들이 그렇게 거부로서 일생을 살았지만 돈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한번도 못 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래서 돈을 버리고 싶다고, 그러면 여러분은 그럴 것입니다. 아, 그럼 나나 주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본성의 빛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도 이 땅에 자원만을 가지고 있고 하늘의 자원을 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본성의 빛만 가진 사람도 깨닫는데 계시의 빛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잘 깨달아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늘의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생명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러분 안에 가득 있을 때 그 은혜의 자원 위에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실어주실 때 그때 그것이 흐르는 강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지나갈 적마다 그렇게 감사한 곳이 있습니다. 양수리입니다. 양수리가 왜 양수리인가 하면 물 두개가 만난다고 그래서 양수리입니다. 무슨 물이 만납니까?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입니다. 그 물은 끝이 없습니다. 그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그 물이 마르면 이 나라는 생명이 없습니다. 물이 한없이 흘러갑니다. 미국의 테니시 강이 흐르는데 거짓말을 많이 말고 조금만 보탠다면 강인데 수평선이 보일 정도입니다. 모터보트를 타고 30분을 갔는데도 강을 못 건넜습니다. 우리 양수리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흐르는 넉넉한 물을 보면서 그렇게 흘러가면서 경기도 평야를 다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하늘자원이 생명의 가득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기왕이면 많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 받으면 실개천같이 흘러갑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울처럼 흘러가면 더 많은 토질을 새롭게 할 수 있고 강처럼 흘러가면 수백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평야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교회가 이렇게 이 세상에서 유명한 교회, 아니면 높은 빌딩을 가진 교회 그런 교회 말고 이렇게 흘러갔기 때문에 교회가 흘러간 자국마다 평야같이 그렇게 변화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흐르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해갈함을 얻게 하는 그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주님이 부르실 때 너 뭐하다가 왔니? 그러실 때 하나님, 우리는 흐르다가 왔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흘렀고 우리들이 하나님이 흘러가게 하신 그곳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다 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평생을 교회를 섬기는데 마지막에 주님 앞에 갈 때 망가진 교회, 고장 난 신자들, 짐승 같은 어린아이들이 교회에 꽉 차있다면 우리의 삶이 삶이 아니라 사실은 재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섬기지만 이것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것이요, 세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우리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하늘의 생명이 우리에게 한없이 두려워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개를 구할 때 균형을 여러분들이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적인 생명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렇게 해서 그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나는 교인들 무조건 복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돈이 많아지면 꼭 범죄 하더라. 그래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저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복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축복의 생명을 걸지 말고 신앙의 생명을 걸게, 아! 그렇구나. 바로 그것이구나.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멸망하는 유다백성을 향해서 탄식하는 주님의 음성을 전해주었습니다. 뭐라고요? 너희에게 두 가지 악이 있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너희들이 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은혜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런 기도를 받을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신앙도 없는데 하나님이 많이 복주시면 전 범죄 합니다. 하나님 제 신앙만큼 복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앙에 생명을 걸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그 많은 자원들의 복을 부어주시면 여러분이 넘칠 때 예수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땅의 자원과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는 그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첫째는 사랑이고, 두 번째는 순종이고, 세 번째는 연합입니다. 부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선 첫째는 이렇게 되기 위해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이 영어로 표현한다면 ‘Love God’ 그러면 될 것입니다. ‘To love God’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러면 되는데 그런데 이게 공교롭게 영어에는 그런 표현이 없지만 히브리 성경을 직역하면 거기에 전치사가 하나 붙어있습니다. 그것은 ‘Love into God’ “하나님 속으로 사랑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을 깊은 속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학교를 할 때 어느 선생님이 아이들을 이렇게 해주다가보면 자기가 특별히 마음에 사랑이 가는 아이들이 있지만 늘 말을 안 듣고 그러면 사랑이 덜 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너무 소홀했다고 그러면서 어느 선생님이 그 아이를 이렇게 안아주면서 이리와 그러면서 안아주었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탁! 뿌리치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더랍니다. 아이들이 아이들이 아닙니다. 벌써 안 것입니다. 나를 끌어안지만 그러나 이 사랑이 애쓰는 사랑일 뿐이지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그 선생님으로부터 속속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족들도 해체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는 돈벌어와. 그래서 툭하면 내가 나 위해서 그랬나. 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고생하고 그러는데 거짓말입니다. 필요한 것은 속속들이 사랑하는 것, ‘Love into’ 속으로 사랑하는 것, 이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속으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러면 여러분이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좀 하고 또 이렇게 살아갈 때 그 뭐 하나님이 그러시면 하나님이 그러실 것입니다. 탁! 뿌리치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게 얼마나 무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되 속속들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속속들이 그래서 주님에 속한 모든 것이 좋고 주님께 들어있는 모든 성품이 사랑스럽고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겉으로만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속으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속속들이 사랑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신자. 뼈 속 깊이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을 느낍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하나님을 속속들이 사랑할 때 주님의 그 사랑의 감격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속속들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순종입니다. 이 순종을 히브리말로 ‘샤마’ 그런데 이 샤마는 “듣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바로 하나님이 들으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재미있는 것이 듣고 순종하고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그 목소리를 순종하고 그러는데 그 목소리 속으로 순종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또 ‘into’라고 하는 전치사가 붙어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일하는 성도들이나 교역자들이나 일을 시켜보면 사람들이 각각 다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라 지시하면 그 이야기만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서 해봅니다. 그래서 안 되면 가만 내버려둡니다. 그래서 왜 안 되니? 그러면 그 다음에 자기가 일한 것은 한 시간인데 안 되는 것이 왜 안 되는지를 연구한 것은 두 시간쯤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 되는 이유와 핑계를 쭉 설명합니다. 사랑이 안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쭉 하면 그것을 왜 목사님이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마음의 속까지 쭉 읽어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가서 실행해갑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실행을 하니까 그러니까 기계적으로 했는데요. 그게 아니라 그 마음이 스며들도록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 속에 그 지시한 사람의 마음이 스며들게끔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스며듭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무슨 일만 생기면 그 사람을 부르고 싶습니다. 전자의 사람은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차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전수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항상 일의 품질이 떨어지거나 안 되거나 잘못됩니다. 혹은 일은 되었는데 부작용을 더 많이 일으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에게 일을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가운데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점점 그 사람과 그 지시를 한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사랑하는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교회에 갔다가 왔는데요. 하나님 앞에 네 의무를 다하라. 헌금을 했는데요. 교회에 가서 봉사 좀 해라. 청소당번 했는데요. 제가 안 한 것이 뭐가 있나요? 이것은 듣기는 듣는데 속으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거라. 그러면 아, 내가 주일도 못 지키면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핍절한 영혼이 되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 저렇게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구나. 내가 어떻게 해야지만 내 영혼이 바르게 살수 있을 것인가. 이게 바로 목소리 속으로 듣는 것입니다. 애야, 일어나라 너 그렇게 게으르게 살아서 어떻게 하니? 그럴 때 부모의 마음속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왜요? 7시도 안되어서 일어났는데 이렇게 대꾸하지만 부모의 마음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내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게으르게 살 때 어떻게 이 경쟁이 치열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다가보면 마음의 정욕이 쌓이고 부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될 텐데 이렇게 의지가 없는 생활을 하는 나의 미래를 염려하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 어머님, 우리 아버지가 게으르지 말라고 나에게 당부하시는구나, 어떻게 하면 내 마음 뼈 속 깊이 이 게으름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 부지런히 살수 있을까? 이게 바로 목소리 속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복주면 반듯이 타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립니다.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해도 하나님이 너 때문에 괴롭다고 그러시면 이런 인생은 진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지상의 자원과 하늘에 있는 천상의 자원을 우리에게 모두 주셔야지 우리들이 흘러갈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목소리 속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목소리 속으로까지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보면 그를 부종하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또 예외 없이 그를 부종하며 되어 있는데 거기서 똑같이 'into'라는 전치사가 또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부종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다바끄”입니다. 다바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영어로 ‘클리브’ “달라붙어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접착제 같은 것에 붙여서 벽에다 딱 붙이는 것, 혹은 나무판자 같은 것을 대서 못을 박아서 원래는 분리된 두 물질이었는데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 이런 것이 다바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런 다바끄의 연합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면 우리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 앞에 느끼는 거리감 때문입니다. 혹은 낯섦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낯섦, 그리고 거리감, 이런 것을 느끼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를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면서 사는 그런 것을 원하십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 순발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다바끄의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어디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의 마음이 깊이 느껴지는 것, 이런 다바끄의 영적 생활이 바로 연합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안 짓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목표는 그들과 친밀한 연합 속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부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보면 하나님 속으로 다바끄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자신이 모두 죽고 녹아들어서 그래서 주님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는 그런 종류의 다바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물질을 두개를 이렇게 붙인다고 그럴 때 여기에 이것을 붙여주는 강력한 접착제로 이렇게 붙여도 두개가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공업용으로 쓰이는 접착제 가운데는 어떤 물질 두개를 붙이면 두개가 물질의 독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있는 게 아니라 그 접착제가 이것도 녹이고 이것도 녹입니다. 그래서 두개의 물질이 아예 교합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이런 특수접착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되지요? 붙은 것을 떼어내려고 망치로 때리면 두 물질 중에 하나가 깨트려지면서 부서지지 접착된 부분이 절대로 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다바끄의 연합이 그런 종류의 연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로 만족하는 것은 다바끄의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근원이신 하나님,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누리며 강물처럼 흘러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다바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아무리 많은 자원을 주고도 그 대가로 이런 하나님과의 다바끄를 손상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면서 사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합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의지의 올곧음 안에서 꽃피웁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죄를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과 다바끄의 연합을 누리게 되는데 모두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 그 연합을 누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그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금방 풀어집니다. 그래서 더러워집니다. 부패해집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지속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때 그 다바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속적인 은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붙어있어야 하겠다고 의지의 올곧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끊임없이 다바끄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내적으로는 연합해,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친구
주님의 안에 있어 연합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그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그를 위해서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자원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에 살아왔던 모든 삶을 기억의 뒷전으로 넘기고 이제 새로운 한해가 펼쳐졌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 한해를 이렇게 모든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이 땅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흘러가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많이 섬기면서 그 일을 위해서 그분 속으로 사랑하고, 그분 속으로 그 목소리를 청총하며, 그리고 그분 속으로 다바끄의 삶을 살아서 이렇게 여러분들의 생애 어느 해보다도 하나님을 많이 섬기며 거룩해진 복된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28:2)
1. 본문의 배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많은 계명들을 모세가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다시 한번 반복했습니다. 그것이 신명기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놓여있는 28장은 신명기 모든 하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순종을 가르치고 있는 특별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님이 택하신 이유와 그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 사는 원리와 비결들을 모세를 통해서 제시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이후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약시대의 교회의 예표였기 때문에 적용은 조금씩 달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이 순종과 축복의 원리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잘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 설교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 가운데 전체의 방향을 바꾸게 하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우리가 읽은 본문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약속은 내가 너희로 모든 민족위에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민족, 현저하게 뛰어나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민족이 되게 해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뛰어나게 드러나는 목적입니다. 온 세상에 있는 나라들이 전부 자신의 나라가 모든 나라위에 뛰어나고 나라의 이름이 드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좋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외국을 여행하면 우리보다 훨씬 잘살고 발달한 나라에 갈 때는 왠지 위축이 되는 느낌이 들고, 그러나 사실 그럴 필요도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좀 들고 우리보다 좀 덜 발달한 나라에 가면 넉넉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자기의 나라가 강하고 그리고 뛰어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국은 그냥 그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그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들에게 주신 지식의 빛을 나누어주심으로 참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리고 참으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나라와 민족답게 사는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뛰어나게 해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뛰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꼭 주셔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입니다.
2.‘복’이란 무엇인가?
여러분,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복에 대한 여러분의 잘못된 생각을 정리하고 성경적인 복 사상을 바로 섭취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이 세상에서 복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이 그것을 주실 때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복이 무엇입니까? 먼저 이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생각해보고 이후에 성경의 견해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복은 다분히 이 물질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면 물질의 자원이 없는 복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면 잘 수긍하지 않습니다. 우선 누가 복 받았다고 할 때는 제일먼저 어째든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에 가면 복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식당마다 집마다 거꾸로 걸어났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왜 그렇게 거꾸로 해났는가, 그랬더니 복이 쏟아질까봐 그런다고 합니다. 이렇게 글자가 있으니까 밑으로 쏟아지는 개념이니까 이렇게 놓으면 쏟아질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가지고 모자라서 세 개씩 겹쳐서 써서 그래서 거꾸로 매달아났습니다. 대문마다, 그 다음에 창살마다, 이불무늬마다 다 복자, 숟가락 끝에도 복, 사람들이 얼마나 복을 받고 싶어 하는지 하여튼 복복 쭉 복을 써서 놓고 하다가 안 되니까 애들을 낳아서 복돌이, 복순이, 복동이 해서 막 복자를 집어넣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다분히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물질이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들은 많은 생각을 하면서 참된 복이 무엇일까? 그래서 오복도 만들고 칠복도 만들어내고 나름대로 행복의 조건들을 만들어냅니다. 이상한 것 하나는 오복 가운데 자식은 복이 안 들어가도 이빨이 들어갑니다. 치과를 경영하시는 분들은 상당히 격려를 받으실 텐데 오랫동안 살면서 이빨이 자식보다 훨씬 더 복의 요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빨이 잘못되면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고 그러면 섭취가 제대로 안 되고 건강에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반듯이 복의 개념이 이 세상의 물질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많은 물질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조금만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불신자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의 건강, 마음의 평안, 그리고 그 위에 이 세상의 물질을 많이 누리는 상태, 이런 것을 이 세상에서 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평안함이라고 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육신의 평안이나 심지어는 마음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두 이 땅에 있는 자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자원은 물질을 포함한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많이 누리고 있는 상태가 복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어떤 것을 복이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비슷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도 많이 누리고 있는 상태, 그런데 차이점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첫째는 누리고 있는 것이 이 땅의 자원만은 아닌데 이 땅의 자원과 하늘에 자원을 동시에 많이 누리고 있는 상태,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된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을 미덕이라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 자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부요하게 될 수 있는데도 신앙이라는 가치를 선택하기위해서 가난해졌을 때 그때 칭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을 칭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 가난을 미덕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복된 상태는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많이 누리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복과 차이가 나는 점이 무엇인가 하면 평강이 반듯이 있어야 하는데 이 평강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마음의 평안은 그저 자기 자신이 마음이 평안하고 만족해하는 상태에서 비롯된 평안을 이야기 하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평화로움에서 오는 평안함, 주님이 보호하고 지키시는 데서 오는 평안함, 그 내면의 상태 위에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풍족히 누리고 있는 상태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된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다 한 가지를 더 보탠다고 할 것 같으면 성경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그 모든 복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모든 자원이 하나님의 창고로부터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신령한 하늘의 은혜의 자원, 그리고 이 땅의 자원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고 여러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만 인생이라는 이 짧은 기간동안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맡기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자기에게 그것을 가져다주신 원주인이신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하늘에 있는 자원과 땅에 있는 자원을 합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목적에 기여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 믿고 믿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많이 파괴된 사람들이 누리면서 사는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지 됩니까?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실제로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은 모두 자신의 불행에 기여합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떨어져나간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자원은 그의 불행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 땅의 자원은 분명히 근원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허락 하에 불법한 방법으로 그것을 빼앗았습니다. 문제는 빼앗은 그것이 그들을 지금 불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물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불러일으켜서 영생에 이르는 길에 대한 관심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았고 말씀이 떨어졌으나 길가와 같은 그 마음, 혹은 돌짝밭과 같은 마음에 떨어진 씨같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도록 열매 맺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의 번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진 신앙이 망가진 사람의 번영이 그를 얼마나 황폐하게 파괴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그것이 복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셔서 복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자원을 동시에 누리는데 그 모든 것들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나가거나 끊어졌을 때는 이미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복된 상태에 있도록 내버려두지를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복주시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원리가 왜 그러는지를 여러분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하겠으니 오늘 여러분들이 인생을 보는 모든 눈들을 한번 바꾸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백성의 신조로 부르셨습니다. 실질적인 조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저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거기서 말한 모든 민족은 이스라엘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종류가 다른 모든 이 세상에 있는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그리고 그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평화를 누리고 하늘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풍족히 공급받아 누리고 있는 상태, 그것이 복된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누리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누리게 되는 통로가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지는 이스라엘에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이 복들이 흘러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실 때 개개의 수많은 물질들과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것들은 개별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두 상호연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개별적인 피조물들이 각자에 대해서 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하나의 연결은 보다 더 큰 목적을 향해서 함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들이 모든 연결이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영광은 불변하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렇게 창조되었을 때도 충만한 영광이었지만 그 모든 이 땅의 창조된 세계를 관리하도록 부름 받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부여받은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서 그 자원 두 가지를 가지고 계속 흘러가면 이 충만한 영광이 더 충만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영광이 아름답게 빛날 작정이었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만물의 연결들은 대부분 다 파괴되어버렸습니다. 화목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파괴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버리니까 인간 안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는 평화라고 하는 것이 사라졌으니까 결국은 근원으로부터 이탈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셨더라면 이 세상에는 복이라고 하는 단어조차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죄가 이 세상에 가득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가 들어와서 이 세상이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길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이 오고 거기에서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위에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원을 주십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은 물질이나 육적인 삶을 위한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고 하늘의 자원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는 신령한 은혜의 자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과의 평화한 관계 속에서 계속 공급받으면서 살수 있게 하는 통로가 열리는 것을 가리켜서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런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그 자체를 영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을 강물처럼 흘러가면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과 평화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주신 하늘과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 그런 사람이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예전에는 소위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주거나 가정에 가서 예배를 드려주고 헌금을 받아서 자기가 착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 백번 양보해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와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늘자원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자원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왜 그럴까요? 그런 하늘자원을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은사는 남아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자원이 잘못 흘러간 것입니다. 또 이 땅에 있는 자원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안 가졌을 때 잘못 흘러간다고 하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 명백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 가십니까? 갑니다. 흘러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주셔도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방향이 결정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크게 축복해주십니다. 그런데 축복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축복은 항상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집니까? 왜 대답을 못합니까? 그럴 때도 있지만 안 그럴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총명하게 하시고 그 호화로운 왕권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지혜와 부를 가지고 타락합니다.
사울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사울은 별 볼일 없는 집안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높여서 왕의 지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누가 주셨습니까? 왕이 되면서 이 땅에 있는 어마어마한 자원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기름을 부을 때 주의 성신이 임했습니다. 하늘 자원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가 하나님이 주신 이 땅과 하늘에 있는 자원을 올바르게 사용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그 왕을 책망하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책망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이 부어져서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것인지는 뭘 인해서 결정되는가 하면 그것도 하늘자원 안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은혜의 작용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자기만의 독립적인 인생의 계획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의 계획은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의 계획에 통합되어버립니다. 눈을 껌벅거리는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요즘 엄마들이 다 그렇지 않지만 요즘 엄마들하고 옛날 엄마들하고 틀린 것이 있습니다. 요즘 엄마들은 독립선언을 많이 합니다. 네 인생은 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옛날 엄마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하니까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또 그 엄마의 엄마도 그 엄마를 그렇게 키웠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의 인생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자식들을 위해서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무엇에서 즐거워.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삽니다. 자식들이 그 엄마의 섬김을 받으면서 자식들이 잘됩니다.
3. 성도의 참된 행복
나는 오늘 묻고 싶습니다. 그럼 지금 독립선언을 한 엄마들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갔는데 그 엄마가 옛날 엄마보다 행복한가. 행복의 관점의 차이니까 나는 무슨 세미니스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봉건주의자도 아닙니다. 성차별자도 아닙니다. 나는 양성평등주의자입니다. 이콜리스트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을 하고 간 그 엄마가 독립선언을 하면서 네 인생은 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 사랑합니다. 조금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면 사랑하는 것이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이지,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찾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했다. 그러면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지금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듯이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포기하고 자식을 위해서 살면서 자식의 성장과 자식의 번영을 보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느꼈던 그 부모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하는 권리가 이 독립선언 한 엄마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 사람마다 느끼는 차이입니다. 이 사람은 이런 사상을 가졌으니까 사는 것이고 이 사람은 이런 사상을 가졌으니까 사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문제를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각자 받아들이고 더 중요한 것으로 설명한 것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의 계획은 사랑받는 사람의 인생의 계획에 통합됩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는 사랑은 자신의 인생에 독립적인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계획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실현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모든 축복이다 쓰레기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마술사 시몬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만약에 은사가 주어지면 그 은사를 가지고 돈 주고 팔 사람들이고 땅에 있는 자원을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더러운 폐수처럼 흘러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자원이 많이 주어지면 많이 주어질수록 어마어마한 도랑이 되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들판을 더럽힙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목적이 죄 때문에 이렇게 망가진 세상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흘러가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 물이 흘러가야 강이 되지. 아니 계곡만 파여 있는데 그게 무슨 강이겠습니까. 영어로 와디라고 하는데 무수천이라고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쓸데없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홍수가 나 그냥 떠내려갈 뿐이지 그게 무수천 주위에 농촌은 되는 법이 없습니다. 흘러가야지 됩니다. 그럼 뭐가 필요한가 하면 자원이 필요하고 그 자원이 많이 있으면 큰 강이 되어서 흘러갑니다.
자, 하천이라고도 얘기할 수 없는 실도랑이 있다고 얘기합시다. 그런데 그곳에 물이 흐르기는 흐릅니다. 그런데 꾸준히 성실하게 흐릅니다. 천년을 흘러가도 그것은 단 열 마지기의 땅도 두루 적실 수가 없습니다. 실개천이 흐릅니다. 부지런히 매일 맑은 물이 흐르면 몇 천 평의 땅을 적셔서 옥토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못합니다. 그런데 하천이 흐릅니다. 맑은 물이 큰 개천을 이루면서 흐릅니다. 그러면 몇 십 만평의 땅 정도는 적실 수가 있습니다. 한강 같은 큰 강이 되어서 마르지 않은 물이 한없이 흘러갑니다. 수천 만 평의 평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도 하나님이 자기들의 백성들에게 자원을 주시지 않고는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축복에 대한 갈망을 갖는 것은 그게 올바른 갈망이기만 하면, 탐욕이 아닌 올바른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는 갈망이기만 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과 일치합니다. 그러면서 쭉 흘러갑니다.
연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슬픔에 쌓인 자 위로하며
길 잃은 자들을 친절히 이끌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복된 상태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늘에 있는 자원과 땅에 있는 자원이 모두 필요하고 하늘에 있는 자원은- 정신 차리고 잘 들으십시오. -그들의 고통의 근원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고 땅에 있는 자원들은 그 고통의 결과인 비참함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비참으로부터의 구원까지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에 서울대를 나온 어느 고시공부를 하던 어느 청년이 찾아와 상담하 는데 고시를 그만두고 취업이나 할까 하면서 낙심하기에 끝까지 고시를 하지 않 은 미련 때문에 생각이 나서 다시 돌아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 오니 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다시 도전하라고 하자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공부 를 해서 붙는 좋은 결과가 있었다. 조금 도와줌으로 인해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뀐 이야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물질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힘을 주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제 각 길로 가고 정말 망가진 집안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만 하늘의 자원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 망가진 가정을 천천히 치료하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가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하늘자원을 가진 인생이 하나도 없었을 때 그 집안은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기본이라고 하는 사람은 유명한 역사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쇠망사를 쓴 유명한 역사가가 있습니다. 그가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기록한 가운데 첫 번째 든 게 무엇인가 하면 가정에 가치가 붕괴되어버렸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원이 아니고 땅에 있는 자원만 가지고 있을 때는 이것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요즘 보면 압니다. 옛날에 가나안에서 부부싸움을 했다고 그러는데 가나안에서 부부싸움해서 헤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요즘 먹고살만한데 신속하게 헤어집니다. 제주도에 한번 내려가서 택시를 탔더니 택시기사가 하는 말이 제일 빨리 이혼한 사람을 봤는데 택시타고 아직 기본요금이 꺾이지 않았는데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면서 여자가 떠나가더랍니다. 이제 너하고 나하고 끝이다. 얼마나 빠릅니까?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뭐 결혼을 했어야 이혼을 하지, 그렇게 해서 자기 갈 데로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은 있는데 하늘의 자원이 모라자라니까 인류의 좋은 가치가 유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자원들을 이 고통 하는 세상이 너무나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그것을 안 주시고 세상을 고치실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인생사는 게 싫은데 실의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겠습니까? 내가 그 사람을 죽어도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데 내가 무슨 자원을 가지고 그 사람을 용서하겠습니까? 내가 왜 그 사람의 단점과 결정을 참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도 못 참겠는데 왜 그 사람을 참고 기다려주고 견디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늘자원이 없으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자원을 공급해주시지 않고는 이 세상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아파가 누워 있는 동안에 아프리카에 있는 정말 인간 이하의 삶을 살면서 고통 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너무 불쌍합니다.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오늘 고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거기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하늘자원만 갖고 가서는 안 됩니다. 왜? 지금 막 질병과 굶주림 속에서 에이즈 속에서 죽어 가는데 살아야지 하나님을 믿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이 땅에 있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주시지 않고 그 자원을 가지고 이 세상을 흘러가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물이 없는데 어떻게 흘러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을 많이 공급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에 흡수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해서 찾아가는 영혼의 작용이 미덕의 삶입니다. 그 상태가 선한 상태를 향해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향만 정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실개천처럼 흘러가는 고통 하는 이 세상에 너무 작은 도움밖에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강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얘기했던 “공법이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거기에 나오는 “하수”라고 하는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입니다. 쭉 흘러갑니다. 그렇게 흘러가면 방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딱 정해져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늘의 있는 자원과 땅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 땅에 있는 자원이 없어서 고통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자원이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가 오래 참고 기다려주고 그리고 그를 변화되기까지 참고 그래서 하나님의 인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때 어느 한 사람이 주니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을 끝까지 품고 용서하고 사랑해서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늘자원은 거의 없는데 이 땅에 있는 자원만 많다. 그럼 그것이 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중금속과 이런 것들로 엉킨 새카만 끈적끈적한 액체가 되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주변에 있는 땅들이 그것을 빨아먹으면서 땅이 다 파괴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땅이 다 파괴되어버립니다. 식물을 심으면 그 중금속이 들어가서 먹을 수가 없고 먹으면 사람이 불구가 되어버립니다. 고기가 들어가면 그 고기가 살지 못하고 죽고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기형의 고기가 태어납니다. 그 고기를 낚시해서 잡아먹으면 사람이 기형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많은 물질의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방향으로 하늘자원이 없는 폐수가 되어서 흘러갈 때 그때 그 사람은 죽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웃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시면 이 땅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그런 식의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여러분들이 한번 느껴보십시오. 그분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그 고동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은 많은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공급해주시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불처럼 붙어서 온 세상을 태우고 물처럼 흘러서 온 땅을 두루 적시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복의 개념을 이렇게 설정한 사람 이외에는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후에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들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흘러갈지 자기 욕망밖에 모릅니다.
두 번째 하늘자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그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자원만 그에게 많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저희의 신은 배요” 그랬습니다.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축복이 하늘과 이 땅에 자원을 많이 누려야 하는데 그럼 예수님과 사도 같은 사람들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이 별로 없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옷 한 벌로 돌아가셨고 사도들도 금마차를 타고 다녔다는 사도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을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이 별로 없으셨고 사도들도 자기 자원은 없었지만 그분들은 어떻게, 자기 혼자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자원을 넘치게 주셨더니 설교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은혜 받은 성도들이 집하고 토지를 다 팔아서 교회로 가지고 왔습니다. 사도가 돈이 뭐가 필요합니까? 아니 사도의 재산이 뭐가 필요합니까? 같이 공동생활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목적은 개개인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대적인 삶이 되어서 목적은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에 교회를 어느 교회보다 부강한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물질을 가지고 선교했고 그 물질을 가지고 고아와 과부를 도왔고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고 교회를 경영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원이 흘러가면서 하늘의 자원과 흘러가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비극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하면 이런 성경적인 복을 전체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흘러가고 하늘 은혜도 별로 필요하지 않고 이 땅에 자원만 많이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복을 안주십니다. 왜? 망가지니까.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자녀가 너무 갖고 싶다고 달라고 막 그러는데 그 손에 뱀을 들려주겠습니까? 자녀에게 정말 필요한 게 떡인데 돌맹이를 손에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악한 부모라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물질이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끈이 되어서 타락으로 못하게 하나님이 허리에 졸라매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졸라맨 채 어떻게 하든지 한번 잘 살아보자. 나도 한번 인간시대에 나와 보자. 한번 해보자. 되나 한번 해보십시오. 절대 안 되고 내가 매일 안 되기를 빕니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게 해달라고,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목자로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물질의 부족이 여러분의 죄의 결과라고 직격탄을 날리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늘자원이 부족한 것도 모두 여러분의 잘못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새해를 시작하면서 한번 여러분들이 인생 전체를 하나님 앞에 전 도면을 펼쳐놓고 심사를 받으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평생 여러분이 생각하는 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침만 흘리다가 죽을 사람이지 절대로 그 복을 누리지 못할 사람들 중에 다수가 있습니다. 왜? 인생에 판 자체를 안 바꾸고 하나님 앞에 돈만 받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안 주십니다. 그러고 만약에 그렇게 어떻게 해서 획득하는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을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복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누리도록 지정된 복이고 이 소명과 복은 연관이 됩니다. 소명이 큰 사람들은 하나님이 큰 자원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각도에서 인생 전체를 하나님 앞에 한번 넣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분의 계획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계획을 그분의 계획 속에 통합시켰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리고 그분께 통합되었습니까? 나는 죽고 그분만이 살고 정말 그 방향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회개가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는 주님 이외에 사랑하던 것들을 버리고 다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있는 자원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만 이 땅에 있는 자원의 결핍을 인해서 예민한 것만큼 하늘의 자원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도 예민해있는지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부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흘러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안 주시겠습니까? 강 하나가 도도히 소리도 내지 않고 흐르면 수 천 만평의 황폐한 땅이 평야로 바뀝니다. 곡창지대가 됩니다. 그래서 수천 만 명의 사람들이 먹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고치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복들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며” 이 성경에 보면 복이라는 단어가 “베라코트”라고 그래서 복수로 나옵니다. 복들입니다. 그러니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이어서 언급하는 많은 것들, 복의 근원은 하나님 한분이시지만 그 복들의 다양한 양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자원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성도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원을 흘려보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 설교가 조금 길어지더라도 여러분이 양해를 하십시오. 안 하면 말고, 자, 들어보십시오. 한 오 분만 더 하면 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명과 연관을 안 짓고, 이게 복이 타락의 도구가 되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좀더 설명을 하겠으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계속 방탕하게 죄를 짓고 사는데도 복을 주실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그래도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주시지만 그러나 현저한 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돌이킨 후에 하나님을 섬기고 뭔가 이렇게 흘러가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도 잘 나갑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사명을 쉰 떡처럼 생각했는데 어디서 잘 알아서 그래서 열심히 충성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도 주시고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아, 내가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사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구나. 이것은 내가 잘 산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러니까 과거 지향적입니다. 과거에 이 복을 받기 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 똑바로 했더니 하나님이 이것을 주셨구나. 그러면 이것은 자기가 종착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면 자기에게 주신 모든 복은 과거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니까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해서 자기가 빼앗아온 전리품입니다. 여기에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복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보같이 생각하고 그것을 또 자랑거리라고 간증을 합니다. 그래서 그 간증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다시 부패합니다. 간증이 빛을 잃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흘러가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게 조금 잘했기 때문에 보상을 해주신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이제 더 흘러가라고 하나님이 보태주시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기가 막힙니다. 모든 강의 시작이 어딘가를 따지는데 그 시작을 시원지라고 그렇게 합니다. 발원지, 혹은 시원지라고 합니다. 그럼 그 발원지, 시원지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면 1년 365일 동안 최소한 300일 이상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어야 합니다. 그게 시원지로서의 자격입니다.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나가는데 강에는 어마어마한 강이 흐르는데도 시원지에 찾아가면 요만한 웅덩이입니다. 거기서 퐁퐁 물이 솟아나옵니다. 들어옵니다. 그러면 강물이 시원입니까, 아닙니까? 흘러나오면서 내려가면서 땅에게 뺏깁니다. 저의 이 문학적인 표현을 이해하십니까? 흘러나오자마다 땅에게 뺏깁니다. 땅이 그 물을 빼앗아갑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작은 물이 저 바다 가까이 가서는 폭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계속해서 그 강에 보태어주는 것입니다. 실개천이 돌아서 개울을 이루고 개울이 하천을 이루어서 그래서 그 강이 계속 시원지에서 나오자마자 땅에게 뺏기면서 흘러가는데 그 뺏기고 흘러가는 동안에 계속 보태어집니다. 그러면서 시종일관 뺏기면서 왔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흘러들어왔던 개울은 안 뺏기면서 왔습니까?
저는 이것을 묵상하면서 아,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놀라운 묵상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강에 보태기 위해서 달려온 개울은 안 뺏기고 무슨 비닐 안에(?) 묻어서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속 뺏기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계속 보탭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그 개울은 실개천이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실개천은 더 작은 도랑이 공급해준 것입니다. 그 물은 어디서 왔는가 하면 흩어져있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곳에서 지표의 물들이 모아져서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흘러가니까 계속 흘러들어오면서 시원지에서 물이 나오자마자 자기를 빼앗기고 나누어주면서 흘러가는데 마지막에는 저 끝에 가서 폭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강이 되어서 수 천 만평의 황무지를 평야로 만든 후에 수명이 끝내고 바다로 흘러갑니다. 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을 때 그것을 절대로 과거에 내가 잘 사는 것에 대해서 전리품으로 하나님이 주셨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이게 부패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런 축복을 못 누리고 있는 사람의 과거를 의심하게 됩니다. ‘서금서금하게 살더니 그 꼬라지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마음대로 주물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시면 더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흘러가면서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늘에 있는 자원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흘러갑니다. 땅에 있는 자원을 빼앗기며 흘러갑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아도 일체 안 섬기고 그림같이 앉았으면 6개월을 가나 보십시오. 은혜를 받았으면 무엇이라도 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놀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망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도저히 자기가 할 일이 없으면 교회에 와서 마당이라도 쓸어야 합니다. 점심시간에 밥그릇이라도 씻으며 설거지라도 해야 합니다. 동네 마당이라도 쓰십시오. 독거노인이라도 찾아가십시오. 은혜를 주셨으면 그 은혜를 가지고 소진하듯이 막 하면 하나님이 계속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딱 끌어안고 있으면 6개월이 안 가고 다 썩어버립니다.
4. 계명과 순종
물질의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막 부어주시면 그럼 흘러가십시오. 막 낭비하자. 하나님이 주셨는데 기분이다. 자 쓰자. 그리고 확! 하고 알거지가 되는 것 그것은 아닙니다. 흘러가십시오. 그래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셨을 때 인색해하지 말고 그것들을 흘러가게 두십시오. 그게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것을 움켜쥐고 그리고 부인도 비밀번호를 모르게 통장을 넣어놓고 어느 놈이 먹는지 하나님만 아십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리고 한쪽을 그렇게 틀어막고 애지중지하고 있을 때 뒤에 터져서 막 빠져나갑니다. 해보십시오. 누가 말리겠습니까? 해보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그냥 이렇게 땅에 스며들어가도록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간 인생 자체가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뭐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그러지 않았는데 그냥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은 인생에 목표가 별로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냥 착한 신자가 되면서 살아가는데, 네 인생은 다 주님 섬긴 날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몸 둘 바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게 진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이런 것을 주시는가 하면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티슈마 배콜 아도나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티슈마”라고 하는 것은 내가 듣는다는 것입니다, 콜은 목소리입니다. 말씀이 아니라 원래 목소리입니다. 여호와의 목소리 그 앞에 into라고 하는 전치사가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그 속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주님의 마음속까지 읽어내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뜻에 부합한 사람이 되려고 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흘러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확신을 드립니다. 주님이 주시면 난 흘러갑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면 나는 그것을 내 전리품이라고 여기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흘러갑니다. 내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이 세상에 자원과 하늘의 자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흘러가고 수많은 나의 이 땅과 하늘의 자원을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이 땅이 번영하고 윤택해져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복을 받을 수 없게끔 사는 것입니다. 방향이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안 고쳐집니다. 복을 절대로 못 받습니다. 왜? 하나님이 부어주시면 폐수가 되어서 흘러갈 사람, 하님이 부어주시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을 방향으로 흘러갈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결핍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최선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축복을 위해서는 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인생의 판을 확 뜯어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 한번 가족들이 모여서 털어야 합니다. 진짜 우리 가정이 흘러가는 이 삶과 방향이 주님이 마음껏 이 땅과 하늘의 자원을 부어주실 만한 그런 가정으로 우리가 흘러가고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땅이 너무 고통 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늘의 자원이 없어서 고통 하는 수많은 사람들, 이 땅에 있는 자원이 없어서 아파하는 수많은 사람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 각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 누리고 있는 자원의 크기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원의 크기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시대의 한복판을 흘러가게 되는데 꾸준히 실개천같이 흘러가다가 끝날 것인가. 깊이를 잴 수 없고 폭을 알 수 없는 강처럼 흘러서 교회는 하나지만 그 교회를 통해 두루 적실 수많은 땅에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누리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환희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들의 헌신에 달린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불순종의 저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가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28:15)
1. 저주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우리는 참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원을 많이 누리는 것이며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과 평화한 가운데 내적인 평안을 누리는 것이 참된 복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흘러갈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주님을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인생의 계획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통합되고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강물처럼 흘러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받음으로서 비로소 자원을 소유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밖에서 복을 받아보려고 하는 모든 기도는 잘못된 것이며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진짜로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어제 말씀드린 설교를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삶 전체가 여러분들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들었던 설교를 모두 제삼, 제사 다시 들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 한번만 듣지 말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들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일 없이 복을 원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허무한 희망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간절한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들에게 이 복을 많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창조하셨으나 죄 때문에 망가진 이 세상을 우리로 흐르게 하여서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시는 분입니다. 그럼 이런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내신 그 목적과 계획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복의 계획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이 땅의 자원만 많이 가지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면서도 마음에 평안을 얻기를 원합니다. 성취될 수 없는 희망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두 시간에 걸쳐서 전할 말씀은 저주입니다. 저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밝히 말씀드림으로 말미암아 저주에 대한 잘못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그리고 복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무분별한 교만으로부터도 여러분들을 건져내는 것이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설교의 목표입니다. 본문은 지난주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모세가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상세하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신 것과 주신 계명을 반복해서 지시하고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그들이 처하게 될 위험과 그리고 상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미리 예견하고 그들을 지도해주는 것이 신명기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복도 많이 나오지만 저주가 그 복과 함께 짝을 이루면서 거의 같은 비율로 반복해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저주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아주 짤막하게 요약해서 여러분들에게 성경의 저주 사상을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사전적으로 이 저주라고 하는 의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비는 것입니다. 특별히 말로서 다른 사람의 저주를 비는 것, 그래서 그것을 어떤 힘이나 다른 힘을 빌어서 소원을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저주는 무엇인가? 성경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저주하신다고 하는 표현이 여러 군데 등장합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또 어느 곳에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두 가지 사상이 뒤섞여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아주 명쾌하게 나누어서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언약 백성들과 저주
성경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저주하신다고 할 때 우선 저주받는 대상에 따라서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지 않은 이방백성들에 대한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닌 이방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들,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의 나라들, 그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열렬한 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언약백성들을 향한 특별한 은총과 그 언약 안에 들지 못한 이방의 백성들을 향한 일반적인 은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일반적인 은총과 특별한 은총을 함께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햇빛을 비추시는데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햇빛을 비추시고 또 우리가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비를 내리셔야지 만 이 땅에 곡식이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논에만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사랑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본성의 빛을 주셔서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하나님이 기준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신 본성의 빛을 따라서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면 비록 그 나라가 이방의 나라고 또 그들이 불신자이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 앞에 많이 범죄 해서 이제 그 땅을 더럽히게 되면 하나님이 저주하십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백성들에 대하는 저주 속에는 그들을 향한 미움이 배어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당신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그악하게 범죄 해서 땅을 더럽히게 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실행하는 저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처럼 그런 이방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보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 앞에 많이 범죄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을 때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의 실행된 형태입니다. 옛날에 독일 나치나 혹은 일본의 군국주의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이제 궁금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들, 이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은 저주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런 점에는 이 저주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 특별히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계시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 약속을 주고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으신 백성들, 그 무리들 전체가 언약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언약백성들 이 속에는 그 언약을 끝까지 지켜서 그 언약관계에 충실할 사람과 중간에 이 언약관계를 배신할 사람들이 섞여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모두 건져내어서 모세를 통해서 그 큰 기적을 보고 그리고 이제 광야로 나아오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나는 모든 자손들을 언약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열두 아들로 이어지는 많은 자손들이 번성했으나 그 씨는 모두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씨였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시내산에 가서 다시 한번 모세를 중보자로 해서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종의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러 이러한 은혜를 베풀고 이러 이러한 것을 주시고 보호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이러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만 사랑하고 순종할 것, 그것을 함께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맺은 백성들이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모세를 중보자로 해서 맺은 이 언약은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다시 한번 새롭게 확대해서 갱신한 것입니다. 그 언약을 맺은 그 언약체결 속에 모든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들어갔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백성의 무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언약에 참여한 모든 백성들이 끝까지 이 언약을 지키며 하나님께만 붙어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언약관계 안에 불러들여졌지만 그 언약을 파괴하고 깨트릴 사람들이 그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바다에다가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낚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그물에 가득 고기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부가 끌고 밖으로 나와서 보니까 거기에는 먹을 수 있는 고기도 있고 못 먹을 고기도 있습니다. 그것을 쓸 수 있는 고기는 내놓고 못 먹을 고기는 버렸습니다. 그 그물이 교회라고 한다면 그 교회 안에는 그렇게 소용이 되는 고기와 소용이 되지 않는 고기가 섞여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그림 같은 비유는 알곡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알곡이 있고 쭉정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가려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내산에서 맺은 그 언약을 통해서 그 언약에 모두 참여하였지만 그 사람이 모두 끝까지 그 언약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신실한 자들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 언약을 배신하고 떨어져나갑니다. 교회 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지만 여러분들이 모두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합니다. 자신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지금은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는 판단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가려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교회에 들어와서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신자인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그가 드러나게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반하고 배교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그 사람을 모두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형제인 것처럼 사랑하고 한 교회로서 끌어안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교부 터플리아노스 같은 사람은 홀 클라이스트이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들어온 모든 신자들을 정확하게 진짜 하나님께 붙은 신자인가 아닌가를 가려낼 수 없다. 또 지금은 아닌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참다운 변화를 받아서 다시 예수께 붙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한 그 사람을 모두 예수 안에 있는 형제라고 생각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한 교회에서 한 신앙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중에 어떤 신자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아는 경우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검증을 많이 해봐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자신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면 조금 옆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설명을 드리면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께 진짜로 붙어있는 참된 신자와 형식적으로 붙어있지만 참된 신자가 아닌 사람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핵심적인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접붙여진 참 언약백성도 불순종할 때가 있고 범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의 주도적인 경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혹을 받습니다. 그때에 은혜가 충만하면 이길 수 있는데 이 성화의 생활을 잘못해서 은혜가 식어집니다. 그래서 범죄 하게 됩니다. 불순종하게 됩니다. 이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고 죄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깊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죄가 주는 즐거움은 잠시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불순종하고 가끔 죄를 범할지라도 참으로 예수님께 속한 참 생명을 가진 성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일반적인 은혜는 행하지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성이 마음속에 없습니다. 가끔 말씀의 빛을 받거나 혹은 어떤 신앙적인 열정이 생겨나기는 하지만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을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는 이 사랑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신자가 아닙니다.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지옥에 갑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이 끊어진 상태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침체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언약에 참여하였으면서도 어떻게 구원받지 못할 수가 있는가. 있습니다. 언약에 참여한 계명이 진짜로 구원받은 계명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그래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럼 그 아이는 비록 자기가 어린아이라서 하나님을 모르지만 그 부모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는 의미는 그 갓난아이가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고, 혹은 엄마의 믿음을 보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원리에 인해서 이 아이가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 언약아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백성들이 난지 팔일이 되면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팔일밖에 안된 애가 무슨 신앙을 고백하고 회개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언약백성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그 부모의 신앙을 본받으면서 진짜 내가 언약의 백성이고 그리고 이 언약 안에서 내게 제시해주신 그 모든 복음적인 유익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복되구나. 하고 자기의 죄인 됨을 참회하고 그 복음의 구원을 받아들일 때 실제로 그 언약의 유익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불순종하고 신앙을 떠나면 유아 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언약의 파괴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백성의 형식적인 동아리로부터 이탈해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면 외관상 하나님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백성들은 다시 둘로 나뉩니다. 진짜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본질적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들, 그 언약은 받았고 해택은 누렸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 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렇게 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참된 성도가 된 사람들은 이따금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그 언약을 파괴하고 불신자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질이 변화되지 않은 이 언약의 형식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불순종하면 배교해서 완전히 불신자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에게 당신이 저주하신다고 할 때는 이 두 사람의 경우에 저주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 저주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먼저 진짜로 구원받고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저주가 경고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에게 자녀가 하나 있는데 학교에 가서 늘 싸우고 공부를 안 하고 말을 안 듣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자꾸 나를 오라 가라 합니다. 오늘도 밥을 먹여서 가방을 싸서 손에 들려주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어제도 학교에 갔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너 똑바로 들어, 오늘 이제 학교에 너 가는데 오늘 가서 또 친구와 싸우고 공부안하고 말썽을 피우고 오면 넌 오늘 엄마에게 죽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이 엄마가 아이가 엄마의 말을 듣고 가슴에 새기기를 원하는 것은 살해의 위협을 느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중요한 것은 학교에 가서 싸우지 말고 공부 잘해야 해. 그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넌 죽는 거야,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화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말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참으로 구원받아서 예수의 생명을 가진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이 저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주의 실행에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저주를 담보로 어떻게 살라. 혹은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 아이가 오늘도 가서 학교를 가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가서 친구와 싸우고 말썽을 피우면 오늘이 바로 나의 제삿날이구나. 그리고 애가 학교에 가서 만약에 친구와 싸웠다면 유서를 쓰고 집으로 옵니까? 애들아, 이제 오늘 너희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나는 오늘 저녁에 가면 우리엄마 손에 죽을 것이야. 그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고 언약의 동아리 속에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저주를 하신다고 그럴 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저주하신다고 그럴 때 거기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그 저주는 경고인 동시에 실행하는 저주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경고인 동시에 즉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불순종하면 너희는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고 합니까?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판에 있어도 저주를 받고 삶 전체가 저주가 된다. 이것을 경고하심으로 아직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경고를 받고 하나님의 참 생명에 참여하게 해서 그들을 인도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여러분 중에 아직 완전히 거듭나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아, 이것은 정말 무서운 말이구나. 내가 이렇게 교회에 나오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이제 참다운 신자가 되지 않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것, 그런 효과를 하나님이 가져오게 하셔서 그들에게 저주를 말씀하시니까 이것이 사실은 돌이키지 않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인생에 또 다른 방편입니다.
여러분들은 제 작년 9월의 설교 한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9월 15일경에 행해진 거듭남과 회심의 시리즈 중에 거듭나셨습니까? 의 설교였습니다. 그 시리즈가 행해지는 3주 동안에 약 100명의 사람들이 자기가 거듭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교구에서 당신은 아무래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 같으니 다시 제대로 순종을 공부하고 참 신자가 되라고 권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설교 시리즈가 행해지고 난 다음에 특히 9월 15일 경에 행해졌던 그 딱 한편의 설교에 45명의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그 후에 많은 지체들이 그렇게 뺀질대던 지체들이 영혼에 대한 깊은 근심을 품고 각 교구실에 문을 두드리면서 그러면서 새가족반이 꽉 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말씀의 충격을 받고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도 있지만 아마 그중에 상당수는 바로 이 언약에 참여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참 예수님께 접붙여지지 않은 그런 구원받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그 속에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저주를 말씀하심으로 언약 속에 참여했지만 언제든지 언약을 배신하고 떠날 수 있는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저주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그들은 완전히 일반 백성은 아닙니다. 그래서 솔로몬 스토다드같은 목사님은 이런 상태를 반쪽만 언약아래 있는 상태라고 묘사할 정도로 이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이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경고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실행되는 저주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구원받고 예수님께 접붙여진 사람들은 이미 마음에 주도적인 경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따금 범죄하고 때로는 큰 범죄에 빠져도 이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저주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완전히 구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명령에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그 언약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반항하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자기 저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경고하심으로 순종하게 하고 언약관계 안에 참여는 했지만 완전히 변화되지 않은 백성들에게는 경고하는 동시에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불순종하게 될 때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엄위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의 생각 속에서도 이 저주의 문제가 명료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불신자들이 이방나라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와 그리고 형식적으로 언약 안에 참여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그 중에 참 백성들의 저주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저주가 각각 어떻게 틀린지를 여러분들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 진짜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지난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 순간에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뿐입니다. 그대들의 이름이 이 교회에 등록된 것이 여러분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을 진심으로 믿고 무엇보다도 이전에 살았던 모든 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날들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어린이들인지, 어른이든지, 죽음을 앞에 둔 노인이든지 상관없이 이 원리는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고 진정으로 회개하여 참 신자가 되지 않은 사람들,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면 여기에 적어놓은 모든 저주가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구원받았는가. 진짜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을 회개했고 그리고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그 경향성이 있는가. 가끔 불순종하고 범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순간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신자가 되고 싶어 하는가. 그것이 자신에게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진정한 언약백성들에게 있어서 그 저주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진정한 언약백성,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저주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그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과 저주를 함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주가 이 땅에 임하는데 하늘에 비가 그치고 전쟁과 기근이 있고 그 다음에 이 땅에 흉년이 들고 그리고 병충해가 일어나서 잘 살은 곡식들이 모두 초토화되고 이런 때가 온다. 그때에도 너희가 나의 전을 향하여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서 용서와 자비를 구하면 이 땅을 고쳐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때가 있다지만 불순종하는 모든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죄를 한번도 지은 적이 없이 그렇게 순결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난 일주일동안 우리는 마음으로, 행동으로, 입으로 수많은 크고 작은 죄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면 그 죄를 짓고 불순종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일주일 동안 지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오늘 우리는 후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을 향해서도 성경은 하나님이 저주하신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참으로 구원받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의 독특성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이방백성들에 대해서 그들을 속속들이 미워하시면서 진노하시는 그 심판의 무서움, 언약관계 안에 형식적으로 참여했지만 거기서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항함으로 배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미움과 그 다음에 엄격한 진노, 거기에서 오는 저주 이런 것이 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그 앞에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 안에 두 개의 법이 싸우는 것을 본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렇게 구원받고 정말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이 속속들이 미워하셔서 그들을 저주하시는 그런 저주는 없습니다. 이방의 백성들 중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언약관계에 형식적으로 참여하여서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받았지만 그러나 참되게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거부하고 그리고 총체적으로 배교하고 불신자의 길로 돌아선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미움이 배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게 저주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그런 저주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참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을 때 저주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것은 저주의 의미가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구원받은 사람들이 받는 저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는 자원이 고갈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설교한 구원받은 사람이 누리는 그 복과 딱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진짜로 구원받고 참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때로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지라도 파멸하시는 그 사람을 속속들이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저주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자원을 끊어버리십니다.
그러면 자원을 끊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럼 여러분들이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제가 진짜로 오래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진짜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한 신자가 되었는데 불순종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많이 때리셨습니다. 사업도 망하고, 몸은 병이 들고, 돈은 거덜 나고, 애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래서 회개하기까지 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거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지 저주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 징계는 오히려 진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이런 징계가 있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징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뒤따르는 특권입니다. 이게 바로 진짜 징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올바른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때리시는 것이니까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를 잘못 살 때 징계를 하지 않으시면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사생자라고 그랬습니다. 진짜 자식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원이 끊어지는 것이 이제 진짜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 받는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면서 살면 그러면 하나님이 찾아가서 저것을 죽여 버려. 그리고 하나님이 공격을 하지 않으시고, 미움 마음을 가지고 공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원을 다 끊으십니다. 그러면 저절로 저주받은 것 같은 유사한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고 불순종했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는 사람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하늘자원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끊어졌거나 아주 거의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서 기도할 수 도 없고 성경을 펴서 읽어도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서 예배시간마다 마치 주유소에 대어놓은 차에 기름이 가득 채워지듯이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급을 받으면서 가는데 빈털터리가 되어서 예배당을 떠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시지 않은 넓은 의미의 저주의 상태입니다. 자원만 끊어지면 하늘자원이 끊어집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은혜의 경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참 하나님의 자녀인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한 신자들이 하늘자원에 인해서 넘치는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는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하나님이 하늘자원을 끊으셔서 그래서 공평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참 신자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날마다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지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정욕과 싸우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자원들을 가지고 이 척박하고 고통 받는 세상으로 흘러가서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도구로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자원을 계속 더 많이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주일에 은혜를 받고 세상으로 돌아가도 아무것도 안하고 TV나 보고 놀고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렇게 안일에 빠진 삶을 살고 돌아온 사람들은 은혜를 받기가 힘듭니다. 참회하지 않는 한, 그러나 일주일동안 주신 은혜를 가지고 그 하늘자원을 가지고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주고 곤고한 사람들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늘의 자원을 가지고 위로해줍니다. 그리고 참아줍니다. 그리고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분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 주일에 오면 하나님이 하늘의 자원을 더 많이 그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불순종하면 끊어집니다. 그래서 고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자원이 끊어지고 고갈이 올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넓은 의미에서 저주를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회개해서 다시 하나님 앞에 돌이키면 되는데 돌이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땅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키면서 영혼의 고통을 육체로 위로하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이 땅의 자원도 끊어버리십니다. 그래서 하던 사업은 자꾸 망합니다. 돈은 자꾸 없어집니다. 예상도 못했던 사고들이 일어나면서 자기가 믿었던 자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고갈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늘의 자원도 끊어지고 땅의 자원도 없어집니다. 그렇게 흘러가야지 되는데 흘러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흘러가던 방향이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늘자원과 땅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흘러갈 때는 아름다운 강물이었습니다. 지나가는 곳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어났습니다. 새벽이 깃들고 그리고 산천초목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강에는 아름다운 고기들이 오가면서 수초들이 형성이 되었고 새로운 땅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죽고 그리고 가시와 엉겅퀴들이 생겨나고 새들도 날아가고 물고기들도 다 없어지고 그리고 건조한 땅에 가시와 엉겅퀴들이 가득하고 까마귀만 기분 나쁘게 울고 지나가는 그런 벌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은 그가 참 신자이기 때문에 저주하신 적이 없지만 상태로 볼 때는 저주받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친교는 환난이나 고난, 시련 이런 것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게 그것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을 어떤 것으로도 끊어놓을 수가 없는데 불순종하면서 살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들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친교,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끊지 않는 하나님의 친교가 실질적으로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사라지고 나니까 마음에 이 은혜의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평강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요동치는 이 세상에 의해서 자기가 요동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이 내적인 평강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세상이 요동치는 것에 따라서 자신도 요동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이 안정될 수가 없고 평안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불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그들에게 임하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진짜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 참으로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이 축복을 극단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고 이제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을 십자가로 치르시고 심지어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죄를 위해서도 예수님이 모두 율법을 따라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묘사를 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비하면 태평양에서 어린아이가 오줌을 누는 것과 같다. 그 한번의 오줌을 누었다고 해서 태평양 바다의 전체의 그 물이 불결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내가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단칼에 피바람을 몰고 내 인생을 파국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그릇된 담대함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이 둘 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솔직히 부모지만 자식이 항상 사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자식을 향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경험한 이야기인데 애가 좀 유별나기는 했습니다. 여러 가구가 모여서 같은 집에서 사는데 그날도 뭘 잘못해서 엄마에게 죽어라고 맞았습니다. 그 엄마 하는 이야기가 꼴도 보기 싫어, 이놈의 자식아 나가라, 그러니까 이 아이가 이제 하도 야단을 자주 맞으니까 울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홧김에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오던 자전거에 치여서 나가 떨어졌습니다. 무릎이 다 까지고 피가 났습니다. 애들이 와서 아줌마 아무개 자전거에 치여서 넘어졌습니다. 그러잖아도 요즘 보기 싫어죽겠는데 더 밟으라고 그래.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냥 뛰어나가서 자전거 주인과 대판거리 싸웁니다. 똑바로 해야지.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그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자기를 도와준 사람이 아닙니까? 저놈의 자식 나가서 죽어버리든지 그랬는데 그 자전거가 와서 치여서 쓰러트렸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구원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 받아들이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늘자원이 다 끊어집니다. 어떤 은혜도 마음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도할 수도 없고 말씀의 감화를 받을 수도 없고 순종할 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 땅의 자원까지 다 끊어집니다. 그래서 다 경제적으로 거덜이 납니다. 그래서 핍절합니다. 그래서 이제 궁핍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끊어지고 마음으로는 요동치는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게 저주받은 상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순종하는 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입니다. 다음 시간에 설명하겠지만 이 계명과 규례라고 하는 것은 보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으로 가는 정거장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야, 너는 이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애야, 이 엄마의 소원은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 말만 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 가르쳐주는 부모는 이것은 꽝입니다. 항상 가끔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가르쳤으면 그 다음에 너 이제 오늘 거짓말하면 안돼. 부지런해야지 돼. 어른들에 대해서 예의를 지켜야지 돼. 이런 구체적인 것이 나와야 합니다. 이 구체적인 것이 바로 계명과 규례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훌륭하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 부모의 충고를 받으면서 엄마, 진짜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요. 이렇게 모든 엄마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주어지는 엄마의 실제적인 작은 명령들을 따를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요. 뒤집으면 너희들이 계명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서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종이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부패한 신자의 특징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포괄적인 고백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주님 없이 살수 없어.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불순종하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입니다. 주일도 막 짓밟아버리고 십일조 생활도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리고 사소하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계명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인지 나중에 가봐야 압니다.
3. 결론과 적용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진짜 여러분들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저주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것과 같은 상태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하늘의 자원이 여러분들에게 넘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자원을 하나님이 주셔서 여러분들의 지금의 인생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인생입니까? 하나님과 평화하고 내적인 평강을 누리며 그 은혜의 평강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빚어져가고 있는 많은 사람을 용납함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을 그 자원을 가지고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복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는 여러분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이런 복된 상태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밖에서 스스로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든 기도는 저주받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행복이 있고 하나님 안에서만 복 받는 일들이 있지 하나님 밖에서 이 땅의 자원이나 많이 소유하고 그래서 복을 받게 되는 그런 복의 길은 하나님 안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짜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로 형식적인 언약의 참여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순종하라고 주신 계명을 보며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기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이 모든 저주가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언약관계에서 이탈하면 여러분들은 배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진짜 구원받은 신자라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지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계속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늘자원으로 이 땅의 자원도 끊어져서 그래서 쪽박을 차고 그리고 비참하게 파산당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의 평화는 끊어져서 부랑아 같은 영혼을 끌어안고 거리를 헤매다가 아끼는 자 없이 죽는 것 이것을 택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구원받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전부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가려고 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그분의 사랑을 받고 사랑하고 그리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공급해주시는 하늘은혜의 자원을 갖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땅의 자원을 풍족히 가져서 주셔도 이것을 사랑하지 않고 흘러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스며들도록 나누어주고 그래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복된 사람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 두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고 목자로서 전심으로 여러분들이 이 두 번째 길로 들어서라고 간절히 권면할 뿐입니다. 선택은 그대들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불순종과 계명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 28:15)”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정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불순종할 경우에 저주하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되었는데, 진정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고유한 의미의 저주를 하나님께서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순종할 경우에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우리를 위협하셔서 순종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저주의 의미가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라는 것입니다. 즉 참된 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내적인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풍족히 누리면서 사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 저주의 상태는 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져 평강을 잃어버리고 자원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자원이 동시에 끊어져서 핍절한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구원받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자원의 고갈로 말미암는 고통스러운 결과가 불순종 하는 자녀들에게 찾아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제일 먼저 살펴볼 것은 불순종의 정체입니다. 도대체 이 불순종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강력한 표현으로 저주로 위협하시고 자원을 모두 끊어서 실제로 불순종한 자들이 핍절한 가운데 자원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두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살펴보고 아울러서 불순종의 정체를 논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먼저 순종의 정체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을 바깥으로 발출하고 싶어 하시는 성향을 가지고 계시고 천지가 바로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변화된 삶을 흘려보내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존재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삶이 통합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획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최종적인 선을 지향해서 살아가는 참된 미덕의 삶을 가리킵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인간에게 모두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성향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게 되었고, 인간은 자기만의 독단적인 인생의 계획과 성향들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바로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발자취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 신자의 내면의 세계는 자기의 계획을 전적으로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계획이 성취되는 곳에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정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인 그 모든 계획을 따라서 개별적인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시를 좇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는 삶의 실천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을 반영하고 또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은 반드시 그를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어주는 내적인 은혜의 작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이 두 가지를 총체적으로 하나로 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계명에 대한 순종은 참다운 순종이 아니며 동시에 눈에 보이는 계명에 대한 참다운 복종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명 중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계명이 들어있습니다. 그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한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일 큰 계명이 바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이 바로 모든 계명 가운데 제일가는 첫째 계명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계명 중 제일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 아니라 모든 다른 계명을 준수하고 순종함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깃들여야 할 조건이 바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서도 외면적으로 어떤 율법의 요구에 부합하는 복종의 삶을 산다면 그것은 죽은 나무에 과일을 실로 매달아놓는 것 같은 행동입니다. 또 반대로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사실상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은 그 나무 자체가 죽어있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게도 순종이 먼저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마음에 임하는 것이 먼저냐 하는 것을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도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하는 실제의 생활이 하나로 통합되어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 보는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인 삶에 순종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자기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쇄신되기를 힘써야 하고, 만일 자기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은혜가 고갈된 상태를 깨닫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부합하지 못하는 불순종하는 삶의 가지를 잘라버리고 실제로 자신의 온 마음을 기울여서 개별적인 의무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들이 불순종의 정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게 하는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데, 불순종하게 만드는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그 대적의 뿌리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 대적의 뿌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만히 멈추어있지 않고 어느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과 친근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과 가지고 있는 거리감을 좁히려 하고 그것과 연합되려고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너무나 깊이 사랑하는데 그를 만날 수 없으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 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주 깊어지면 톱이나 도끼로 가슴을 쪼개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낍니다. 그런 통증을 느끼게 하는 정체는, 사랑 그 자체가 연합의 감정인데 물리적인 여건에 의해서 떨어져 있는 것을 통해서 강한 거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해서도 성립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한 사랑에서도 모두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다양한 사랑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하나님의 자녀들인데도 세상이나 혹은 세상 안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나보다 아내나 혹은 부모나 자녀를 더 사랑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닌 자기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남편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매우 다양하고 여러 가지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옷 입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검소하게 생활하는데 먹는 데 다 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먹는 것이나 입는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미장원은 좋은 데 가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런 모든 것에는 관심이 없고 책만 보면 욕심이 생겨서 자기의 다른 가재도구라도 팔아서 책을 사야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대상이 다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양해 보이는 사랑의 대상들의 정체를 계속 더듬어서 뿌리를 캐보면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가 좋으니까 그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목사님의 말씀이 이해 가는데 그러나 우리의 주위에 보면 정말 자기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부모를 위해서 온전히 희생하거나 아니면 자녀를 위해 온전히 희생하거나 아니면 자기 이웃이나 나라를 위해서 온전히 희생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대신 그런 것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에 그것도 자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결국 자기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이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순교나 인신의 제사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을 위해서 그렇게 자기를 다 불태우도록 희생을 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없이 절대 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데 목적이 없이 그럴 수 있습니까? 그 목적이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이라고 하니까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랑은 자기 몸을 어떤 목적을 향해서 불사르게 내어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80년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미어지게 아픕니다. 더구나 그런 것에 대해 동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고통하는 사람들을 대변해서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정말 갖게 하고 싶은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신령한 작용에서 생겨난 복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본성이 빛이 가져온 또 다른 종류의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대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받는 것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은 옛 자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종류와 대상이 많은 것 같아도 그 근원을 계속 더듬어 내려가 보면 마지막에 결국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냐 아니면 자기를 사랑할 것이냐,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모든 계획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루면서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나님과 평화 속에서 자원을 누리며 흘러가는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계획과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대로 살아서 나를 만족하게 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의 창조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행복이 이 우주의 모든 것보다 가장 뛰어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삶의 궤적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옛 자아에 대한 사랑의 포기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그릇된 자기 사랑이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전혀 반대방향입니다.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양립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집니다. 깨트려지면 내적인 평강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누리는 이 내적인 평강 자체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오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결국 삶은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계획을 성취하는 궁극적 선을 향해서 흘러가는 항로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흐름 자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지고 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수는 없으시지만, 그러나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을 하나님께서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원의 고갈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져서 평강을 상실하여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고, 마땅히 흘러가야할 삶의 방향을 상실하여 정욕을 따라서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자원은 핍절한 상태가 되어서 하늘 자원과 땅의 자원이 고갈됩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저주 받은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순종의 정체는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순종은 결국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자가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거듭나게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모두 고백하고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이유와 그 죄 많은 백성 가운데 구원받게 해주신 원인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자기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왔던 모든 삶이 다 죄였으며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게 된 그 고통 자체가 바로 그 죄의 비참한 결과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 신자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은 모두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으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가장 가치를 느끼고 그 사랑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상실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그 구원 계획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가 하나님의 계획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어디로 흘러가야 되겠는지 그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 하늘의 은혜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부어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흘러가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신자의 최초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 죄의 잔존하는 세력들이 남아있습니다. 그 정체가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기회만 닿으면 이 잔존하는 자디 잔 세력들이 연합을 하고 규합해서 우리 안에서 강력한 힘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불순종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하면서 끊임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한 분주하던 마음을 끊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는 또 누구였으며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분이 제일 처음 나를 이 흉한 죄와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주실 때에 내 영혼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심겨졌는지를 생각하고 처음 그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변화된 때를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회할 때 내 안에 생겼던 빗나간 자기 사랑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 경험했던 회심의 경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은근히 대적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축복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흘러가는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의 만족을 위한 자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던 자신의 삶을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도모했던 하나님을 버린 그 악한 삶, 주님의 계획을 거스르고 내 자신을 더 사랑하며 흘러가려고 하는 그 악한 삶, 그 불순조의 삶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아래서 죄인의 속이는 역사들을 모두 드러내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내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자기 안에 있는 옛 삶을 십자가 아래 끌고 가서 심판을 통해 정죄하고 그것을 처벌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신자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느끼는 고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쇄신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의 삶을 살면서 복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는 신앙을 팔아먹으면서까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손에 넣어서 행복한 상태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를 제가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성이 있는 상태에서 판단한다면 모든 것이 다 망가지고 이 땅에 있는 물질만을 많이 소유한 상태가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다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상태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적인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평화한 가운데 그 샬롬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 세상의 환경의 변화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이 평정의 상태,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복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팔면 이미 이런 하나님과의 화목은 파괴되어 버립니다. 내적인 평강이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사람이 진정으로 복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가 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함으로서 그 방향이 설정됩니다. 이미 신앙을 팔고 이 땅에서 부를 소유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면 이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파괴되었습니다.
2. 불순종과 자원의 끊어짐
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자원이 주어져야 하는데 하늘의 자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주님을 앙망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축복입니다. 신앙을 팔고 주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그런 하늘의 은혜와 자원을 부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끊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자동적으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남은 가능성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소유하는 것인데 최대한 그 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상황이라면 이 세 가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계획대로 많이 얻은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행복할 수 있는 다른 세 가지 요소들이 다 파괴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자원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죄가 계속해서 속이는 것입니다.
좀더 진전시켜 보자면 이 땅에 있는 사람들 중에 땅에 있는 자원을 가장 많이 소유했던 사람은 아마 황제일 것입니다. 역사상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의 황제, 프랑스의 임금 정도가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가장 많이 누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행복했습니까? 여러분은 중국의 자금성이라고 하는 곳에 가보셨을 것입니다. 그 황제들이 이 지상에서는 가장 많은 자원을 소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면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자금성 바닥이 돌로 깔려있는데 그 돌 밑에는 벽돌 사십장이 깔려있습니다. 사람 한 키 이상 되는 깊이로 땅을 파내고 벽돌을 쌓아서 평지를 만든 것입니다. 위만 깔면 되지 왜 그렇게 깊이 파고 그 속에 벽돌을 쌓아 땅을 다졌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밖에서 굴을 뚫고 들어와서 황제인 자기를 죽일까봐 땅을 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음식을 해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태후를 보면 손가락 끝에 은으로 만든 뾰족한 장갑 같은 것을 꼈습니다. 음식을 푹 찔러보면 독이 들어있는지 아닌 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살인의 위협을 느끼면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행복한 임금이나 일평생을 살지 사람을 죽이고 황제가 되고 자기도 그렇게 죽임을 당하면서 그 황제의 위에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가지가 모두 파괴된 가운데 하나의 자원을 많이 소유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예화: 왕이 입는 옷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장인 한 사람이 7년을 만들었다고 한다. 왕은 늘 세탁하지 않은 새 옷을 입었으니 그는 옷 여섯 벌 정도만 만들면 인생이 끝나고, 왕이 만일 석 달 입다가 버리면 왕이 일년반 입을 외투만 만들다가 그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자원을 빼앗아서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생이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모든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들을 지워보려고 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편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고통 속에서 살고 불안 속에서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최선의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래서 제멋대로 흘러가려고 하고 하늘 자원도 모두 끊어진 상태에서 이 땅의 자원만을 하나님께서 마구 부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정말 멸망에 던져 버리시려고 내팽겨 치신 사람이기 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땅의 자원도 하늘의 자원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늘 자원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은혜의 자원을 얻기 위해서 신앙을 판 사람이 있습니까? 신앙을 팔아서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하늘의 자원을 많이 공급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신앙을 팔고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불순종을 해서 이 땅의 자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빼앗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말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가끔 종류가 틀린 물건을 서너 가지 묶어놓고 한꺼번에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지고 와서 보면 세 개를 묶어놨는데 두개는 필요 없고 한개만 필요합니다. 직원에게 필요한 것 한가지 만 사겠다고 하면 살려면 다 사고 한가지 만 팔수는 없다고 합니다. 똑같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이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모두 하나의 세트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도 싫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도 싫고 하늘 자원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하나님께 돈만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행복할 수 있겠다’한다면 그렇게 행복해질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주시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빨리 삶을 총체적으로 결단하십시오. 인생을 이정도 살았으면 지금쯤은 어느 방면으로 흘러가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해져야 합니다. 다른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택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서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공급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서 흘러가면서 사는 그런 성경적 복된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삶의 방향도 정하지 못한 채 정욕을 따라 흘러가고 마지막에는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모든 자원도 끊어진 속에서 그렇게 핍절한 가운데 고통 하는 삶을 살 것이냐 둘 중의 하나 이외에는 제 3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시는 그 중간의 선택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유산을 챙겨서 보무도 당당하게 부모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로 떠났을 때 그 첫날밤은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가슴 설레고 화려한 밤이었을까요? 이제 부모의 간섭도 없고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허랑 방탕했습니다. 결국은 그 자원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돼지우리에 들어갔습니다. 배가 고파서 쥐엄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잠시는 그 중간의 선택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사실 두 가지 이외에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불순종이라는 판단을 내리심에 있어서 사용하시는 기준이 계명입니다. 불순종과 계명의 관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오늘 성경은 ‘그 저주가 너희에게 반드시 임하고 미치리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화자인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저주가 반드시 너희에게 임하게 만들겠다. 여러 가지 방해 요인이 있어도 반드시 그 저주가 실현되도록 나는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실행할 것이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임하며’ 부분은 히브리 성경에서 ‘들어오고’라고 되어있습니다. 마치 적군이 국경을 뚫고 확 밀려들어오듯이 그가 원하지 않았지만 그런 저주가 그의 삶의 경계를 부수고 밀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져서 평강을 상실합니다. 어디로 흘러가야할지 삶의 방향도 잃어버립니다. 마지막에 결국은 하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원이 고갈되어서 안팎으로 완전히 자원이 고갈된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그렇게 만드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치리니’는 ‘낫샤드’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시편 23편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에 정녕 나를 따르리니’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필연적으로 추격을 해서 그를 뒤쫓아 가서 잡아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의 개념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를 선택하고 그 죄에서 만족을 느끼지만 죄가 몰고 올 필연적인 파국과 고통은 사양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속에 이미 벌써 고통을 배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자체 속에 이미 복됨(blessedness)을 함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그것은 저주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죄를 선택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상태가 되느냐 하는 것이 궁금하시지요? 그것은 죄의 속이는 작용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죄가 들어올 때 이 죄가 몰고 올 모든 파국적인 결과와 고통까지 동시에 제시한다면 이 죄를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숨기는 것입니다.
뱀이 이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질 것이다고 했는데 그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밝아진다는 것이 사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지 않는다가 아니라 진짜 죽는 것인데 그것을 숨겼습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사랑이 공정한 판단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종종 아주 탁월한 사업가들이 사업을 전혀 전공하지 않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판단하고 계산기 몇 번 두드려보면 결코 타산이 맞을 리가 없는 사업에 손을 데서 폐가 망신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경우는 하고 싶다고 하는 성취의 욕구가 객관적인 이윤의 창출이라고 하는 가치 판단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기업가는 원론적으로 이익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판단하는 것에 자기의 성향이나 취미나 이념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업가로서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죄가 그런 식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담배입니다. 담배를 피우면 마지막에 폐가 된장에 저려놓은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담뱃갑을 보면 그런 것을 생각나게 해주지 않습니다. 예쁘게 포장돼서 금박 은박으로 싸서 예쁜 여자가 담배피우고 있는 장면을 그려놓는다든지 합니다. 그리고 뒤에 아주 작은 글씨로 많이 피우면 해롭다고 써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폐암에 걸려서 지불되는 의료보험 기금이 어마어마합니다. 담배 팔아서 얼마나 남는지 모르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가족 관계의 파괴, 거기에서 오는 생산성의 저하, 이 모든 것들을 계산하면 그것 팔아서 돈 몇 푼 남는 것은 남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담뱃갑을 무섭게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흡연실을 너무 우아하게 만드니까 흡연을 자꾸 촉진합니다. 그러지 말고 사방을 유리벽으로 만들어서 소금물을 잔뜩 넣고 폐암에 걸려 죽은 사람의 폐를 진열해야합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어두침침하게 해놓고 스피커를 달아서 마지막에 폐암에 걸려서 헉헉거리면서 죽는 최후의 신음 소리를 들려줘야 합니다. 담뱃갑도 예쁘게 디자인 하지 못하게 법으로 만들어서 폐암에 걸린 폐의 사진을 그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피우지 못할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속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도 행복할 수 있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야’ ‘하늘 자원보다 이 땅의 자원이 더 중요해’하면서 모든 것을 팔아서 그것을 사게 하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살 수도 없거니와 산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상태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영성이 깊다고 하는 것은 결국 늘 접촉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수많은 죄의 유혹들 앞에서 그 죄 속에 담겨있는 이 파괴적인 영향력들을, 미래에 오게 될 것을 현재적으로 미리 앞당겨서 느낄 수 있는 통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깊이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담배에서 가장 해로운 니코틴을 빼버리면 담배의 즐거움은 그대로 있고 몸에 해롭지 않고 오히려 필수록 폐가 건강해지는 그런 담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맛이 없습니다. 시거를 왜 좋아하냐면 그 담배를 싼 종이까지도 담배 잎입니다. 그래서 빨아들일 때 니코틴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쏟아집니다. 그것이 폐를 타고 들어가서 핏줄 속에 스며들어서 온 몸에 퍼지면서 일종의 마취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버리고 나면 맛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는 그 속에는 반드시 그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기를 거절하는 저항 내지는 반감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빼버리면 그것이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거기에 죄인의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반드시 저주를 임하게 하셔서 자원을 끊어버리십니다. 이것이 사실 성경의 기록에는 저주라고 기록되어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해석학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여러분의 자녀가 있는데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용돈을 줬는데 더 많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 용돈으로 이상한 잡지책이나 사보고 PC방가서 게임이나 하고 별로 유익하지 않은 이상한 프로그램을 깔아서 시간이나 허비하며 보냅니다. 그러면 부모의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돈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자원의 풍부함이 내 아이를 망치고 있구나 생각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가장 빨리 해야 하는 일은 용돈을 회수하고 생존에 필요한 용돈 이외에는 안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원이 없어서 잘못 살지를 못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서 돌아가려고 결심하게 된 것도 결국은 더 이상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자원이 다 떨어졌을 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이러한 저주가 사실은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한 방법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오늘 성경에 명령과 규례라고 나오는 이 계명들이 순종하는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순종 자체는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뜻에 스스로 복종하려고 하는 내면의 경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날 때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 함정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릇된 자기 사랑에 빠져서 살아가다가도 우리들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우리 안에는 보다 우월한 은혜의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비췸을 받으면 강력한 회심의 경험 없이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야지만 행복하겠다고 하는 인식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하며 사는 삶이 가져다준 말할 수 없는 피곤함과 고통들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진지하게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아주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자기 안에 있는 이러한 경험을 지나치게 확대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고 싶어’하는 고백이 생겨날 때 그것을 확대해석해서 이것이 자기에게 있는 가장 우세한 경향인데 자기는 지금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에 의해서 피해를 받고 있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불순종하면 그 사람에게 끊임없이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로잡지 않아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아간 결국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다고 하는 착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 때 자신이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수많은 다른 요소에 의해서 자기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 사이를 혼돈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하나님께만 순종하며 살고 싶다고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자기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혼돈하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오래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 있으면 다시 사라지고 이미 죄의 지배 아래 있을 경우에는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은혜의 경험들이 간헐적입니다. 훨씬 더 많은 경우가 죄와 정욕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갑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 불순종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따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러나고 이따금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드는 것, 그런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고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경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는 이 삶을 이런 포괄적인 고백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랑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적용시켜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과 더불어 싸우면서 순종을 성취하고 사랑을 방해하는 수많은 유혹이 있는 요인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한 항구에서 배가 다른 항구를 기항지로 하고 출발했습니다. 뱃사람들은 배가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GPS시스템이 발달해서 비행기를 조종 할 때도 가야할 곳을 입력하면 갈 수 있는 비행기 길이 빨간 줄로 뜹니다.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쩌다 항로를 이탈하면 파란 줄이 나옵니다. 그러면 다시 방향을 돌려서 빨간 줄과 파란 줄이 겹치게 하면서 자기가 내릴 공항까지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섬 하나 없어도 뱃길을 압니다. 바람에 떠밀리고 물결에 떠밀려서 약간 빗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즉시 깨닫고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마지막 자기가 가고자 한 기항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순종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그때 더 심오한 참회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일순간이 감상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내가 왜 나를 사랑하며 살았는가, 그것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내가 이렇게 미끄러졌는가를 생각하고 거기에서 자기 사랑을 끌고 와서 정죄하고 처단하고 처벌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불순종도 마찬가지로 그런 방식으로 처벌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인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이 구원 받은 우리를 계속 믿고 순종하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을 인도하셔서 우리를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 최종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과 평화한 상태에서 평강을 누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따라서 살고 하늘과 땅의 자원을 가지고 이 세상을 고치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 흘러가면서 꿈꾸는 것은 이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이 나처럼 사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처럼 그것이 내 바깥에서도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된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이 고쳐지고 고쳐져서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드러나기를 꿈꾸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상태가 최종적인 선입니다. 그 선을 향해서 끊임없이 영혼의 작용을 가지고 칭찬할만한 덕을 쌓으면서 그 목적에 기여하면서 흘러가는 삶의 발자취가 참된 미덕의 삶입니다. 문제는 이런 최종적인 선의 상태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모든 지식을 인간이 가지고 출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녀인데 부모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오직 너만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다. 이제 이 엄마의 소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정말 훌륭하고 이 세계와 이 민족에게 매우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착하고 진실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를 향한 사랑과 부모의 그 생명을 버리기까지 자기를 위해 희생하신 그 모든 소망이 묻어 전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정말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훌륭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 부모의 마음에, 우리 어머니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최종적 상태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어떻게 해야지만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에게 감동을 받았지만 여전히 공부 보다는 게임이 하고 싶고 친구들이랑 몰려다니고 싶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는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떠드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렇게만 하면 안 되고 그런 최종적인 목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으면 그 다음에는 구체적인 행동 요령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일찍 일어나라. 게을러서는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해라. 공부를 할 때에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진지하게 매달려야 한다. 모든 친구와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러나 이긴 후에는 패배한 친구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 이처럼 수많은 것을 반복해서 일러줘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규칙입니다. 그 아이가 착하고 사회에 유익이 되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적 선의 상태라면 어머니의 매일매일 가르치는 삶의 규칙이 바로 계명입니다.
다시 비유를 들자면 폭이 매우 넓은 개울이 있습니다. 개울 저쪽 끝에 안개가 껴서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리는 없고 이쪽부터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징검다리 끝은 아스라해서 끝이 어떻게 되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징검다리를 따라가면 그 강 건너편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건너갔더니 마지막에 개울 건너편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그 개울 건너에 있는 땅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신 최종적인 선한 상태입니다. 이 징검다리를 이루는 돌멩이의 기다란 배열, 그래서 강 건너편으로 데려가는 그 긴 배열이 바로 참된 미덕의 삶입니다. 놓여있는 돌멩이 하나하나는 바로 계명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주어진 계명은 하나님이 심심하니까 아무렇게나 한번 해보라고 던져준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선을 목표로 하고 구원 받은 우리들을 참된 미덕의 삶으로 이끄시고자 하는 총체적인 계획 속에서 주어진 하나하나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아직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왜 어머니가 자기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듯이 개별적으로 주어진 계명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면 할수록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기독교 사상가가 되어야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인 우리가 하나님을 포괄적으로 사랑한다는 고백, 포괄적으로 순종하며 살고 싶다고 하는 고백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하나하나의 돌다리와 같은 이 개별적으로 주어진 계명을 배우고 익히고 순종하면서 자기의 삶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그 하나하나의 계명의 의미를 완전히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최종적인 선을 우리에게 이루는지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것 하나하나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적용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갈 때 우리의 삶 전체는 최종적 선을 향해 찾아가는 참된 미덕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내적인 평강을 유지하게 됩니다.
환경의 많은 변화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핍박이나 고난이나 이런 수많은 환경의 뒤흔들림에도 요동하지 않는 내적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참된 미덕의 삶을 계명을 통해 배우면서 갑니다. 그 계명을 따라서 순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주십니다. 하늘의 은혜의 자원을 주셔서 그의 영혼을 비옥하게 하시고 이 땅의 자원을 가지고 당신을 섬길 것을 알기 때문에 충만한 자원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망가진 세상 한복판을 흘러갑니다. 그래서 고치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바로 이 두 자원에 의해서 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 고치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이런 큰 꿈을 갖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도 굶주림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 대부분이 어린이들입니다. 불과 하루에 오십 센트만을 가져도 해결할 수 있는 기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바로 어떤 사람들은 1년에 180억불씩 향수를 허비하는 데 씁니다. 한쪽에서는 한모금의 물과 빵이 없어서 내일의 생명을 기약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코뿔소나 기린만큼도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1년에 몇 백조씩 쓸어 넣으면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흘러가야 합니다. 단지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 내 민족을 뛰어넘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 심지어는 이교도들까지도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품고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때에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망가진 세상을 볼 때마다 자원이 없어서 핍절해 죽어가는 그 고통하는 세상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있는 수많은 자원을 누군가가 품고 가서 그들 위에 흘러가줄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찾으시겠습니다. 메마른 곳에 비처럼 날아가서 뿌려주고 굶주린 곳에 떡이 되어서 그들에게 가서 먹여주고 삶의 좌절을 느끼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말씀의 빛을 받은 현자가 되어서 그들의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원 없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하나님의 복의 원리를 깨닫고 정말 어마어마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자원이 부족해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 교회의 담을 넘고 내 나라의 담을 넘고 민족의 담을 넘어서 고통 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 그 메마른 땅에 흘러가는 강물이 된다면, 그렇게 해서 회복되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눈을 뜨십시오. 눈을 뜨고 세계를 보십시오. 이 모든 망가진 세계도 내 세계고 고쳐지고 있는 세계도 내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깊이 끌어안고, 내가 태어나지 않은 시대에는 내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었고 내 생명이 끝난 이후의 세계에는 내가 헌신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역사에서 우리의 의자를 물려주어야 할, 우리가 주역으로 살아가는 이 때에 우리는 이 역사의 책임을 지고 그렇게 흘러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라
한편으로는 망가진 세상을 고치고 또 한편으로는 무너진 교회를 새롭게 세우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우리의 속사람을 하나님 앞에 다시 세워서 이 주님의 축복을 분여 받고 그렇게 흘러가는 복된 자녀들이 되어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6. 복을 베푸시는 주권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
1.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하며 살기를 너무 간절히 원하십니다. 왜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 순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지난 다섯 시간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순종을 명하시는 장본인으로서 당신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축복해주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 앞에 정말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복을 누리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빛이 될 것이며 그들이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일이 없이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는 결론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제 이 본문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그 선의 집, 곧 그 하늘을 여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때라 따라 비를 내리고 너희의 손에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고 그리고 다른 민족에게 꾸어주되 꾸이지 않은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선의 집, 곧 그 하늘을 여시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쓰여진 이 “토브”라고 하는 단어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 토브는 엄밀하게 말하면 아름답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토브는 제일먼저 사용된 것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을 때 바로 그 토브입니다. 정확하게 영어의 good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과 좋은 사람은 틀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이 토브가 사용된 시편 23편은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 그것이 끝까지 나를 따라올 것이다’. 라고 고백하였을 때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만 붙어서 계속 살기를 원하게 만들었던 그 동기가 바로 하나님의 선이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있는 그 선입니다. 그 선이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선이 우리에게 내려와서 그 선한 자원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를 구속하신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자원입니다. 이 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저는 이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라고 하는 시리즈에서 특별히 2번째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이신 동시에 또 목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려는 세상의 완성이자 또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그 완전은 보다 더 높은 완전을 향해서 이행하는 그런 천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저에게 이런 반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완전하게 창조하셨는데 그 완전한 것이 뭘 또 한번 더 완전한 데로 갑니까? 완전하게 창조되었는데 더 완전한 데로 갈 여지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처음 창조된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논리적으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봄이 되면 4월 5일 식목일이 옵니다. 그러면 너도 나도 나무를 심습니다. 그때 정말 이 교회 마당을 아름답게 하는 마음이 생겨서 가게에 가서 좋은 나무를 하나 샀다고 칩시다. 물론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를 사다가 마당에다 잘 심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보니까 나무가 드디어 이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보기 좋게 이제 다 약간 시드는 것 같은 이파리들이 잎이 생생하게 돋고 그랬습니다. 자, 이 나무가 완전합니까, 불안전합니까? 대답을 하십시오. 완전합니까, 불안전합니까? 완전합니다. 나무로서 완전합니다.
그런데 이제 4월이 지나고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싱싱한 이파리들이 나오면서 아주 파란 이파들이 가득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나무들은 완전합니까, 안 완전합니까? 완전합니다. 가을이 되어서 그다음에 꽃이 확 피게 되면서 가을에 잎이 떨어지면서 아주 탐스러운 과일이 맺히게 되었습니다. 완전합니까, 안 완전합니까? 그 다음에는 그 나무가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둘레도 훨씬 더 많이 자라고 과실도 더 많이 맺고 꽃도 더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완전합니까, 안 완전합니까? 완전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더 높은 완전을 지향하며 이행하는 세계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천지창조의 원인인 동시에 또한 그 천지를 창조해놓으신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좀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천지창조에 있어서 원인론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고 목적론적인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해놓으신 것입니다. 창조한 세상은 아주 아름다웠지만 그 세상은 인간의 섬김에 의해서 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이 만물을 그렇게 창조해놓으셨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마음으로 문명과 문화를 이루어나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더 많은 영광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에 의해서 만물의 모든 아름다움들이 깨트려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빛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처음 창조될 때 모든 아름다운 영광은 흔적만 남았고 모두 부서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세상을 다 쓸어버리지 아니하시고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계획대로 다시 수리하고 복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주시고 예수의 피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용서받게 해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주셨습니다. 예전에는 왜 이 세상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드셨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왜 내가 이렇게 태어났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정말 아름답고 선한 삶인지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선교라고 하는 것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한 첫 번째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나누어주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래서 세상의 창조의 목적과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깨닫게 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원래 창조하신 목적은 이 세상을 구속하고자하는 목적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의해서 망가진 세상을 그 죄에서 다시 고치시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서 그렇게 고쳐내는 것이 구속이고 죄에서 그렇게 고쳐내었지만 그 상태는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이유이고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하나님이 선택해주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니까 이제 우리들은 진정한 이 구원의 은혜는 이런 소문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한 가운데 내적인 평강을 누립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그 모든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지향하게 됩니다. 그 위에 하늘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이 부어져서 그것들을 도구로 해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흐르는 강물처럼 나를 많은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누리게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이 진정으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던 인생의 목표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나로 인해서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이 고쳐지고 고쳐진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는 영광을 누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그 조화롭고 질서 있는 아름다운 상태를 가리켜서 선이라고 말하고 혹은 그 아름다운 그 상태, 그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목적과 계획에 부합하는 상태와 조건을 선이라고 말하고 그런 선을 이루기 위해서 기여하는 인간의 모든 칭찬받은 삶을 총칭하여 미덕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부어주시겠다고 하는 그 선이 바로 이런 선을 향해서 참된 미덕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자원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려고 하는 것도 선한 자원들이고 또 그 선의 자원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 그 자원을 받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목표로 삼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삶의 상태도 선입니다. 그것을 지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무엇이 선한가 하는 이것은 하나님이 전제가 되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계획이 전제되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선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바느질하는 부녀자들도 보기 힘들 정도로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우리들이 전부 다 양발도 꿰매서 신고 그리고 또 재주 있는 부녀자들은 실로 뜨개질을 해서 옷을 만들기도 하고 또 직접 재봉틀로 자기 가족들의 옷을 지어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럼 한번 봅시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추운겨울을 따뜻하게 나라고 아주 예쁜 스웨터를 하나 짜기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그려서 본을 떴습니다. 그리고 가게에 가서 실을 사오고 바늘을 사왔습니다. 여러 가지 실을 사다가 한 올 한 올 정성껏 떴습니다. 이 부인의 마음속에는 물론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남편에게 입히고 싶은 옷의 모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 연필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그 옷이 완성되기까지는 머리 속에 그 틀이 남아있을 뿐 실제로 그것이 어떤 모양이고 그것을 또 남편에게 입혀보았을 때 얼굴 색깔이나 남편의 외모와 어울릴지 안 어울릴지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확신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뜨개질을 부지런히 합니다. 그래서 한 두 달 쯤 걸려서 다 떴습니다. 그랬더니 드디어 옷의 모양이 나왔습니다. 자기가 옷을 만들 때 만들려고 마음을 가졌을 때 머리 속으로 그린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편에게 입혔더니 자기가 남편에게 입히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아주 모든 색상이 어울리고 모양과 이런 품이나 길이 같은 것이 딱 맞아서 남편이 훨씬 돋보이는 그런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 여자가 말할 수 있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야, 참 좋다. 그 좋다고 하는 뜻은 이것을 아주 뜨개질을 해서 옷을 만들기 전에 자기 마음에 있었던 계획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취가 된 상태가 이 사람에게는 포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체 계획에 어울리면서 나에게도 좋으면 다행인데 하나님이 만드신 전체적인 창조의 계획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나에게는 매우 좋을 때 이것이 바로 사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좋고 다른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 그리고 그 서로 서로에게 좋은 논리와 이유가 아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신학적으로 아주 거대한 작은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눈빛을 보니까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되는 눈빛이어서 오늘 아침에 비유를 하나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은 남북이 많이 화해되어 있고 그리고 전쟁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한 민족이 속히 통일이 되는 날이 오기를 저는 날마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면 정말 무섭게 반공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자, 우리가 그 맹전시대로 돌아가서 비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간첩 한명이 남파되었습니다. 그 남파된 목적은 군사시설을 파악해서 군에 보고를 해서 전쟁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라는 임무를 가지고 남파되었습니다. 그래서 활동을 하다가 그만 경찰과 군인에게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죽어라 도망을 치게 되어서 결국은 자기도 어딘지 모르는 어느 시골에까지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추격해오는 경찰을 피하고 군인들을 피해서 야산에 숨어갔다가 어느 민가에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민가에 가서 같이 대화를 나누어보다가 알고 보니까 이 사람 둘이 친척입니다. 그래서 이 친척이 이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도 경찰도 다 따돌린 후에 그리고 이 사람을 보호해주었습니다. 이 간첩에게 자기를 숨겨준 사람에게 선입니까, 악입니까?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가면서 너무 시골에서 사는 것이 가난하고 딱하니까 돈 뭉텅이를 한웅 큼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도시에 나가서 집이라도 한 칸 사서 사람답게 번듯하게 살아라. 그리고 갔습니다. 자, 평생을 벌어도 만질 수 없는 거금을 품에 안았을 때 이것을 주어서 자기로 하여금 이 시골의 가난을 면하게 해준 그 간첩의 행위는 이 사람에게 선입니까, 악입니까? 이 두 사람은 이해관계가 딱 맞아서 서로 서로에게 매우 선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이익이라고 하는 전체적인 가치를 놓고 보면 이 두 사람은 지금 흉악하게 작당하여 국가의 안위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이게 두 사람이 아니라 3,4,5,6 사람이 연결이 되고 시골사람들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상인조직, 공무원조직, 교수들의 조직, 위로는 군인들의 조직, 정치인들의 조직까지 연결되어서 어마어마한 커다란 정보망을 형성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악한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악의 덩어리고 이것을 파멸해서 부서트리지 않으면 나라의 안위가 위협을 받는 어마어마한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교리적 결론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목적을 따라서 선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삶이 미덕의 삶이라고 한다면 그 선이라고 하는 판단 기준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순종의 목적을 떠난 우리 자신이 호불호의 감정이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고치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늘을 여시고 선한 자원들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찬란한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그 지식이 없어서 어두움 가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밝히게 하시고 그 빛을 나누어주는 현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늘의 자원 그 은혜의 자원을 부어주셔서 죄를 이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이 땅의 자원을 주셔서 고통하고 사랑으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스러져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물질을 흘려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인간다운 존엄을 유지하며 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원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틀을 밖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보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을 전면적으로 대항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시도입니다. 그런 소망을 품는 그런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 정죄되어야 하고 그런 소원을 품는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이미 사악한 삶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복을 주시는 방법
그런데 그러한 축복을 그렇게 하늘을 열고 그 선한 것들을 내려 보내주셔서 그 선한 것들에 일치한 또 다른 선을 향해 찾아가는 참된 미덕의 삶을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때에 수많은 사악한 것들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 사악은 궁극적인 선을 향해 흘러가는 미덕의 삶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악한 삶입니다. 그의 참된 선을 찾아가는 삶이 미덕의 삶이라면 그것에 맞서는 악을 따라가는 삶이 사악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도 이미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지된 것이고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밖에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을 찾아서 살았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깨달았으니까 말입니다.
인생에 참된 가치는 그 존재의 양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높은 지위를 누리고 많은 재물과 명예를 가지고 사는가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룩하시고자 하는 그 참된 선을 향해 찾아가는 참된 미덕의 삶이 아니면 그 삶은 하나님 앞에 버려진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분리할 수가 없고 하나의 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이미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고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는데 기여하는 미덕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소명과 맞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필요 없고 이 땅의 자원이나 많이 가지고 자기의 육신이나 만족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이 삶은 짐승과 같은 삶이고 하나님께 정죄되어야 할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물론 악이거니와 그런 삶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꿈꾸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는 커다란 죄악이며 범죄입니다. 그것을 못 박지 않고는 어디에서나 행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젊을 때 주님을 위해서 큰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꿈이 자신이 영광을 받고 자기가 높은 지위에 오르고 이 땅에 많은 자원을 소유해서 사람을 그 발밑에 지배하고 그 자원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그런 식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이 땅의 많은 자원을 가지고도 창조의 목적으로 흘러갈 수 없는 그러나 목적은 알고 있으나 자원이 없어서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 말고 그 두 가지를 모두 소유해서 그래서 이 땅을 고치는 주님의 도구가 되는 사람 그래서 그 하늘과 땅의 모든 자원을 가지고 비가 없는 사람들에게 날아가 비가 되고 진리의 빛이 없는 사람들에게 날아가 진리의 빛이 되고 떡이 없는 사람들에게 날아가 그들에게 양식이 되어주는 그래서 주님 없는 세상에서 흘린 두 눈의 눈물을 씻겨주고 망가진 이 세상에 한구석을 고치는 사람들, 거기에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일평생 똥을 푸면서 살아도 그 목적이 기여할 수 있으면 그는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선한 자원을 하나님이 오늘 너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너희가 누구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인 동시에 그냥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순종을 담보로 한 축복입니다. 그냥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주십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계명과 믿음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징검다리의 비유를 드리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하나 하나의 계명들은 우리들을 힘들게 하고 시험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참된 미덕을 따라가며 우리의 인생을 통해 선을 이루려고 하는 소망이 있다면 기쁘게 그 계명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 참된 미덕을 따라가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자원과 진리의 빛,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부어주시는데 부어주시는 방식이 무엇인가하면 그 하늘을 여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이런 자원들이 가득 있어서 문이 열렸지만 자원은 하나도 내려오지 않아서 열린 문만 한없이 눈이 짓무르도록 쳐다보는 그런 열린 문이 아닙니다. 수문이 열리면 물을 내보내려는 별도의 노력이 없어도 문을 밀고 있던 그 물들이 열린 수문을 통해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늘의 그 문을 여시면 하늘에 있는 선의 집에 있는 많은 것들이 빛줄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리의 빛, 하늘의 은혜의 자원, 그리고 이 땅의 자원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가운데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그분이 가라사대” 열린 교회 이름이 바로 거기서 왔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열려진 교회입니다. open church가 아니라 open the church입니다. 하나님이 여시고 그래서 하늘이 열려졌습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이 땅과 하늘의 모든 자원들이 아낌없이 선한 목적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람들 위에 물 붓듯 부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음식을 먹어본 적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몇 번 사다가 먹었습니다. 레션 박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미군들이 먹는 전투식량입니다. 그래서 누런 곽 속에 들어있는데 그것을 뜯어보니까 수많은 깡통들이 거기서 나옵니다. 깡통을 따니까 고기가 가득 들었습니다. 맛있게 먹고 나서 또 깡통을 따니까 완두콩이 잔뜩 나왔습니다. 먹고 나니까 그 다음 깡통을 따니까 이번에는 과일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일이 반쯤 말린 구덕구덕한 과일이 별의별 색 색깔의 과일이 들어있었습니다. 또 하나를 따니까 커피가 나오고 담배도 들어있고 이쑤시개도 들어있고 티슈도 들어있고 별게 다 들어있습니다. 그때 어린 시절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야, 미군들은 좋겠다. 매 끼니마다 이렇게 먹나.’ 그게 바로 군인들의 전투식량입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무기와 먹을 것, 입을 것들을 계속 공급받을 것인가에 대해 전략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전쟁하면서 이동하는 군인을 따라서 계속해서 보급품이 어마어마한 배열로 전선을 향해서 공수됩니다. 수송이 됩니다. 그러다가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이런 것을 아는 적군이 보급로를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행기를 띄어서 혹은 대포로 치열하게 포격을 해서 보급로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군인들은 고립됩니다. 총알과 좋은 무기가 많이 남아 있어도 삼일만 굶으면 전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대의 비행기를 띄어서 거기에다가 잔뜩 군수품을 싫고 그 다음에 낮이나 혹은 깊은 밤을 이용해서 아군이 있는 쪽으로 가서 낙하산으로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전투는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그때 거기에서 커다란 보급품들이 떨어집니다. 배가 고프다가 떨어지니까 한쪽에는 전투를 해도 이제 보급병들이 가서 막 뜯어봅니다. 거기에 그런 도시락은 기본이고 고기를 비롯해서 과자, 과일, 생수, 마실 기호식품, 담배 이런 것도 들어오고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쓴 위문편지들이 들어오고 심지어는 야한 잡지까지 다 넣어서 내려 보내줍니다. 그런데 내려 보내주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그리고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라. 그리고 그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적군을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달라고 모두 돈을 모아서 그렇게 해서 보내준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사실은 도시락은 전쟁과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어야 힘이 나니까. 그런데 사실 이쑤시개는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빨을 안 쑤신다고 해서 뭐 전쟁터에서 퇴학당할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도 들어있습니다. 급한데 무슨 티슈가 소용이 있습니까? 이러고 닦으면 되지, 그런데 그 물 티슈를 위생검사까지 다 해서 세균이 죽었는지 다 검사해서 밀봉해서 보냅니다. 그것까지 이해가 됩니다. 치열하게 싸우는데 위문편지나 잡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보내줍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보내준 보급품과 위문품들이 군인의 사기를 높여서 그 전쟁을 수행해서 궁극적으로 군인이 존재하는 목표는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쟁취하도록 그 한 가지 목적에 기여하도록 도움이 되라고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그것을 받은 병사들이 전쟁을 하면서 막 싸우다가 위문품이 딱 떨어지니까 그냥 도시락을 먹고, 먹고 나니까 그 다음에 과일을 먹고, 그 다음에 생수 먹고, 그리고 또 소화제를 먹고 잡지도 보고 하면서 그냥 재미있어서 총이고 대포고 다 버려두고 그것을 끌고 산속에 들어가서 동굴에 들어가서 그것이나 보느라 탈영했다면 그게 미친놈들이지 그게 사람이겠습니까? 지금 전쟁이 났는데 보급품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서 보내주는 물자인데 그 물자에 정신이 팔려서 전시에 탈영을 했다면 그것은 사형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귀걸이를 이렇게 하고 다니고 애매한 귀를 뚫고 이렇게 하고 목걸이고 예쁜 것을 하고 반지도 하나 껴보고 그런 것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다니는 것 별로 안 좋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다 위문품입니다. 그러니까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전쟁에만 직접 소용되는 것만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럼 위문편지가 전쟁에 무슨 도움이 되고 잡지가 무슨 도움이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쑤시개가 없으면 무슨 상관이 있고 군인이 땅바닥에서 박박 기면서 얼굴이 전부다 새카맣게 된 사람들이 그까짓 것 크리넥스로 닦으나 안 닦으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주어집니다. 위문품입니다. 그래서 나야 그런 것을 안 하고 다닙니다. 내가 그런 것을 하고 다니겠습니까? 또 안하고 다닌다고 해서 누가 총각이라고 오해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상관없습니다. 싫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하십시오. 위문품입니다.
언젠가 제 생일이었는데 지체들 몇이서 내가 만년필을 갖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만년필을 넣을 수 있는 예쁜 가죽으로 된 케이스를 하나 사왔습니다. 선물하려면 가격표를 떼고 선물하든지 하지 뒤에 보니까 가격이 나와 있는데 너무 비쌌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정도가 넘으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뭐 아끼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비싸고 그것을 거기다 넣어서 안 다니면 무슨 만년필이 녹이 쓰나. 이러고 고맙다고 하고 너무 비싸서 마음이 불편하다고 그랬더니 그 중에 어느 자매가 지혜롭게 나에게 편지를 썼는데 피천득씨가 쓴 ‘인형’이라는 수필집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두 번이나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봤지만 다 기억이 나지 않은데 선물이라고 하는 수필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 그대로 외울 수는 없지만 그 중에 한 구절을 인용해서 ‘선물은 비싼 것도 괜찮다. 좀 사치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왜냐하면 선물이니까.’ 성경구절은 아니지만 마음에 아주 놀라운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내 마음에도 그런 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보니까 선물이 어느 때가 제일 좋은가 했더니 비싼 게 아니라도 평소 생활하면서 현실적인 사고를 가지고는 사기 힘든 것을 선물 받았을 때 그때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선물할 때 제일 짜증나는 선물이 필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중 고등학교 들어갈 때 너 생일선물로 운동화를 사줄게. 뭐 이런 것, 그것은 어차피 생기는 것인데, 운동화 떨어지면 맨발로 다니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운동화를 사준다고 그러는 것, 그런 게 제일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싸도 괜찮다. 또 좀 사치한들 어떠랴. 왜냐하면 선물이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그것을 볼 때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 좀 비싸지만 위문품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위문품으로 주시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도 또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것들을 내가 좀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자매들은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살면서 머리라도 좀 예쁘게 하고 싶으면 폭탄 맞은 것처럼 다니지 말고 미장원에 가서 돈 들여서 하고 그리고 나이가 아직 젊은데 너무 얼굴이 상한 것 같으면 크림이라도 하나 사서 바르십시오. 그게 문제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그런 위문품 때문에 탈영을 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이 불순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런 위문품 때문에 탈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위문품에 맛을 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쏟아지는 그 전쟁 속에서 자기 전우들은 피를 흘리면서 싸우는데 자기는 계속해서 총은 저쪽으로 겨누고 계속해서 헬리콥터가 오는 것만 쳐다봅니다. 그리고 공격할 때는 맨 뒤에서 하면서 후퇴할 때는 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게으르던 사람이 하여튼 위문품 부대 자루가 하늘에서 떨어지면 총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달려갑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였습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가장 부르짖으면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구원해주면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십니다. 축복해주시는 것은 그 복을 그냥 누리고 즐거워하면서 거기에 빠져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위문품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그것들을 모두 자원으로 활용하여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진 존재의 목적을 따라서 선의 상태를 이루는 그 일에 헌신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좋아서 그 다음에 탈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는 끊어지고 위문품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로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위로의 일들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행복을 누리려고 하는 그 자체는 품어서는 안 되는 욕망입니다. 이런 품으면 그 인간을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파멸로 데리고 가는 그런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취가 되어도 불행하고 성취가 안 되어도 불안합니다. 성취가 안 되면 욕구가 만족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주관적으로 불행할 것이고 또 성취가 되면 객관적으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왜 파멸로 가니까. 그런데 그것을 접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내가 그것을 포기한다고 생각하면 항상 박탈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특정한 질병에 걸렸을 때 뭘 먹지 말라고 의사가 지시합니다. 당뇨병에 걸렸을 때 설탕을 먹지 말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간암에 걸렸을 때 기름기 있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든지 이렇게 할 때 먹어도 되는데 내가 절제해야지 된다고 생각하면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선고를 받은 순간 내가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바로 어떤 사람에게 그런 복을 내려주시는가 하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여러분들 나이만한 나이에 이런 신앙의 이치를 명백하게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아마 제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많이 젊음의 시간들을 헛되게 무지개를 찾아 다녔고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영혼을 파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풀에 꽃과 같으니 남은 것이 없습니다. 흘러가버린 세월이외는 남겨진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이 말씀의 빛으로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이 이런 하늘의 축복을 열린 문을 통해서 이들에게 복 주시는 방법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비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우선 첫째는 문자적인 비유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들은 후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들은 이제 농경사회로 진입하게 됩니다. 당시에 이 농경사회는 유목사회보다 훨씬 더 부를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유목생활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문명의 맛이나 문화를 건설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농경사회는 정착된 삶이기 때문에 문명과 문화를 이루면서 아주 발달한 도성들을 쌓아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그런 삶을 살아갈 차례였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곡식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흉년이 들고 기근이 들게 되면 그 땅은 저주받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문화도 정치 경제 군사도 모든 것들이 다 허물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인간관계까지 다 깨트려져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산업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땅의 자원을 누리고 명예를 얻고 평안하게 사는 것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는 강물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물이 흘러가고 미친 듯이 헤엄치면 잠시는 인간의 힘으로 그 물을 거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참 지나고 나면 힘이 빠지고 힘이 빠지고 나면 그 강물에 큰 힘이 느리기는 하지만 빠르고 부지런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모든 몸부림들을 이기면서 그를 저 아래로 떠밀려내려 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실 수 있는 그런 물줄기에 맞추어서 우리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삶의 전 영역에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비를 맞으면서 사는 땅과 똑같습니다.
두 번째는, 신령한 방법으로 이것이 적용되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위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의 비가 우리의 영혼에 계속내리는 동안에는 종종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 밭이 항상 옥토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씨앗이 떨어지면 반드시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게 하는 그런 땅이 됩니다. 그러나 하늘 문이 닫히고 은혜의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고 말씀의 깨달음의 빛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을 억지로 저주하시지 않으셔도 하늘의 은혜의 비가 끊어지면 땅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납니다. 그리고 삶이 곤고하고 핍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이런 것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셔서 어느 날 하늘의 문을 열고 은혜의 비를 내리십니다. 말씀을 열 때 찬란한 계시의 빛이 온몸에 비늘이 돋아나게 하면서 쏟아 부어집니다. 어떨 때는 태초 이래로 이 말씀이 오늘 내 앞에서 처음 열리는 듯 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 예배를 일주일에 한번만 드리라고 누가 주일 예배를 만들어났나. 이렇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것들이 많은데 이게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나. 내가 이제 평생을 살아도 건강해야 기껏해야 한 삼천 편, 정도 설교를 하고 이제 사역을 접을 텐데. 이제 겨우 5만 6천 시간밖에는 사역할 시간이 안 남았는데 이것들을 언제 내놓으라고 나보고 다시 6일을 기다리라고 그러나. 말씀을 많이 듣고 흩어져가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일주일을 기다려야지 저 사람들을 만나는데 내일 다시 모여서 말씀을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늘의 문이 닫히면 밤새도록 성경을 열어도 66권 성경 속에서 오늘 설교할 재료가 안 나옵니다. 이것이 사실은 앞에서 이야기한 그 적용보다도 우리에게 더 중요한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진리의 빛줄기가 쏟아져 내릴 때 우리들이 이 땅에 세우신 목적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망가지고 고통 하는 세상에 진리의 참 빛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생수가 없어서 기갈한 수많은 사람들, 주의 말씀의 양식이 없어서 영혼이 핍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하늘을 열고 내려주시는 이 말씀과 은혜의 비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겠으며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흘러가는 강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질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이나 먹고 아무 것이나 입고 그래도 좋으니 또 여유가 있으면 좋은 것을 누리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내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도 나를 향해 열려진 그 하늘 문, 열려진 하늘 문을 통해서 쏟아 부어지는 내 영혼에 내리는 은혜의 모든 말씀의 그 빛줄기를 일반섭리를 통해서 오는 모든 이 지상의 축복보다도 더 소중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안에 성도의 진정한 안식이 있고 그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옛날 희랍신화에 보면 마이더스 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만지는 것마다 모두 금으로 변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마지막에는 빵을 먹으려고 붙들어도 빵이 금으로 변해서 슬퍼했다는 그 마이더스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늘의 문이 닫힌 사람들은 바로 나쁜 의미에서 마이더스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그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증거를 드러냄으로 황폐해집니다. 그런 사람과 윤리적으로 손을 잡으면 자신도 타락하게 되고, 그 사람들과 함께 경제적으로 제휴를 하면 자신도 손해를 입게 됩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명예를 나누게 되면 자신도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불러주실 때 그 목적은 그것과는 정 반대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와 접촉한 모든 사람이 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 때문에 존귀해지고,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의 축복들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 팔레스타인 땅에서 싸구려로 팔려온 젊은 소년 하나가 보디발의 집에 팔렸을 때 대수롭게 여겼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온 집에 복을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소유와 그의 전토와 그의 모든 집에 그 한 사람 팔레스타인에서 끌려온 그 히브리 소년 때문에 모든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분상으로는 보디발의 집에 종이었으나 사실은 보디발의 그 거대한 가문은 이 요셉이라고 하는 전선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자원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되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지 않았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시고 우리는 그 근원에 맞닿아 있어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해택들을 사람들에게 누리게 함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우리들이 불순종한다면 사람들이 가장 멀리하고 경원시하는 피조물들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꾸어는 주되 남의 민족에게 꾸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아무리 부강했다고 해서 애굽을 능가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벨론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도 많은 복을 누렸지만 계시의 빛을 소유하고 사람답게 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함에 있어서 그들은 그 진리를 빌려주는 사람들이 되었을지언정 이방의 빛을 받아서 비로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그런 이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물리적인 지위와 이 땅에 있는 자원이 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들을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모든 자원을 누리면서 살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들을 우리가 보게 하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순종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3.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심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계시든지 오늘 이 시간에 한번 눈을 들어서 그대들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을 보십시오. 여러분을 향해서 하늘 문이 열려있습니까? 아니면 닫혀있습니까? 하늘의 문이 열려있고 그 열려진 그 문을 통해서 하늘의 선한 것이 내려오고 있습니까? 진리의 빛과 그리고 은혜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이 아낌없이 부어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은 그 자원들을 가지고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미덕의 삶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선한 목적들을 여러분들을 통해서 성취해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기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주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하십니다. 그 찬란한 영광과 그 은혜의 빛 안에서 그분과 화목을 누리는 가운데 평안을 소유하고 흔들리는 이 세상에 요동치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선한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미덕의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부어주시는 하늘과 이 땅의 자원으로 주님이 창조하셨지만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면서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복을 누리면서 이 세상을 고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다시 복 주시는 하나님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신 30:2-3)
1.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로부터 받았던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난 후에 번영한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미리 경고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가 요단강 건너편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설교를 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서 몇 번 안 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모아져있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그 따뜻하고 하나님을 향해 모아진 은혜로운 분위기를 깨트리듯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될 것이며 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렇게 불순종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거스르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다스리게 될지도 미리 경고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백 미터 달리기와 같지 않고 긴 거리를 뛰는 장거리 마라톤과 같습니다. 한번 웃는 자가 영원히 웃는 것도 아니고 한번 넘어진 자가 영원히 넘어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종일관 되게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 안에서 시작된 이 구원의 달음질을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언약백성들의 삶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언약백성의 삶은 많은 가능성이 앞에 있는 것 같아도 그 언약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삶 안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 백성들은 자기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약백성의 삶은 저는 지난 몇 주간 동안에 여러분들에게 계속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삶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2. 언약 백성의 삶
첫 번째 요소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통해서 신자가 내적인 평강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된 내면의 세계의 지극한 평강은 그를 평안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내적인 요소입니다. 그런 내적인 평강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환경에 의해서 쉽게 휘둘리지 않는 그런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사람은 모두 외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도록 되어있는 아주 작은 피조물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외적인 환경에 의해서 휘둘리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녀와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가 구분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된 내적 평강이 있습니다. 그 평강으로 요동치는 이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내적으로 충만한 평강은 환경에 의해 요동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랑의 에너지가 됩니다. 요동하는 사람은 흔들리는 사람을 붙들어줄 수 없습니다. 마음의 참다운 평안이 있는 사람들만이 불안에 떠는 사람의 손을 꼭 붙들어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내적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첫 번째 요소입니다.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이기적인 계획을 포기하게 하는 유일한 동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구든지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장악되고 그 사랑하는 대상의 계획이 자기의 계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자신만이 인생의 목적, 자신만의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참된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그 인생의 모든 계획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포기하고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인생의 계획들을 버리게 됩니다. 대신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의 계획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반드시 의존의 감정이고 의존하지 않는 감정은 사랑의 감정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의존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래서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독립심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강해집니다.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에는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너무나 많고 이 세상에 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는데 자신의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의지해야지 정상입니다. 그런데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고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주님이 자기를 부르셔도 기쁨으로 이 세상을 버리고 죄 많은 세상을 떠나 주님께 갈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아무래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누구를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그렇게 될 때는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 안에는 의지하는 마음이 포함되어있고 하나님은 당신을 깊이 의지하는 사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 중의 하나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지의 마음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정서가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신앙이 사라진다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은혜가 가득 차게 되면 이 의존의 마음이 가득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신앙이 식게 되면 이 의존의 마음이 사라지면서 독립심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밖에서 자신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존의 마음은 또한 순종의 마음을 함께 불러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 것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신자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삶은 추상적인 삶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질 테니까 여러분들이 일치하게 여러분들 안에 있는 의사를 따라서 한번 대답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보실 때 기쁨이 되시고 싶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선한 상태입니다. 그런 선한 상태가 되기를 여러분들은 갈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을 때 싫다고 대답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신자다 되고 싶으십니까? 모두 ‘아멘’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시고 싶으십니까? ‘아멘’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전체적으로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만 오늘 자신에게 주어지는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개별적인 각계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아직까지도 자기가 살아있다는 이야기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독립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삶을 사악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렇게 깊이 의존하게 되면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커다란 뜻들을 받아들이는 것만 아니라 그런 궁극적인 뜻을 향해 그 위에서 개별적으로 매일매일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언약백성이 살아가야 할 또 다른 행복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바로 그런 하나님과의 평강에서 오는 사랑에 의한 순종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많은 자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늘과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자원을 하나님이 많이 부어주셔서 부어주신바 된 그 은혜와 그 하늘과 땅의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는 이 세상에 살아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모든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받아들이고 그 창조의 목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살아가려고 마음을 가진 그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분신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더라면 살아가시고 싶은 그 삶을 대신 살아드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이 땅에 있는 많은 자원과 하늘의 자원을 그에게 공급해줍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그 수많은 은혜와 자원을 공급받고 위문품처럼 때로는 그에게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그런 위로가 그 자원 안에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가 그 모든 자원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은 스스로 그 자원 안에 갇힌 삶이 아니라 그 자원을 가지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걸어가라고 명하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망가진 세상의 한복판에 그 많은 자원을 가지고 흘러가면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어서 어두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깨달은 체험자로서 지식의 빛을 나누어주고 궁핍한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혀서 그들로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하나님께서 고치려고 하는 이 세상에 대한 회복이 영혼에 대한 회복일 뿐만 아니라 죄가 가져다준 육체와 환경의 비참한 결과까지도 고치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또한 그런 하나님의 자원을 소유한 사람도 전 포괄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을 고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흘러가는 곳에는 황폐하던 세상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고 신자는 바로 그런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신자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조차도 걸어가는 인생의 길은 자기 좋아하는 대로 가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많은 자원들은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면서 살 때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행복은 단지 이 땅의 자원을 많이 소유하게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행복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구원의 계획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 상태, 이것을 우리들이 복 받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복 받은 상태의 핵심은 중보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 받은 상태의 첫 번째 요소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고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된 평화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와 실제의 평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과의 평화, 거기에서 비롯된 마음의 평강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구원의 계획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독생자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행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이것 역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충족하게 부어주셨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아니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늘과 이 땅의 자원도 따라서 피 묻은 자원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의 피가 묻어서 그래서 우리에게 흘려져 내려온 그 모든 자원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데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려고 하는 인생의 계획 자체가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이유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복 받은 모든 이 상태를 말함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자 되심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의 감격,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신앙이 없는 모든 축복에 대한 기대, 그것은 모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좋은 것이 오는데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없는 그 모든 이 세상의 번영과 수많은 자원들에 대한 희망은 한낮 허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은 바로 이런 자원들을 충만히 가지고 망가진 이 세상을 예수님이 고치시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던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주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목적,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세상으로 복원시키시려는 그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따라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내적인 평강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삶을 살수 있겠으며 자기와 하나님과 화목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버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늘로부터 부어진 하늘자원과 이 땅의 자원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고치며 살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복 받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생을 모두 끝내게 하시고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복 받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가지고 그리고 그 은혜의 자원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고치면서 이 땅을 치료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충성스럽게 사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땅의 좋은 것을 주셔서 여러분의 육신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노예처럼 부리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넘치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지난 시간에 전쟁터에서 낙하산으로 공수되는 위문품에 비교했습니다. 그런 위문품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보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위문품 때문에 전투에 임무를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불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위험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완악하고 강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 동안 연단을 받았고 이 설교를 들을 즈음에는 그들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유순해져있었습니다. 이제 잠시 후 모세도 사라지고 모세만도 훨씬 못한 여호수아라고 하는 지도자에 의해서 요단을 건너고 장대한 민족과 더불어 싸우게 될 터인데 그 모든 앞날을 생각하면서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오로지 시선이 모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어린아이와 같았겠습니까? 이 때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을 정복하던 초기에 그 기간들을 가리켜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애하던 때라고 묘사했습니다.
3. 불순종에서 돌아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모세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번영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불순종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르게 될지를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제 많은 자원이 있습니다. 철전지 한이 되도록 가슴에 맺힌 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곡식과 풍성한 왕권이 주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고 이것들은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이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에 심으신 계획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참으로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당신의 계획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자원을 부패한 방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할 때 이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빼앗고 그들에게 주신 자원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불현 듯 일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종, 모세와 같은 사람의 후예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끝없이 전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보이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신 이후에도 돌이키지 않을 때 그들을 징벌하실 것을 경고하고 있고 이것은 후에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그 아름다운 땅을 이 민족들에게 빼앗기고 주님이 주신 그 모든 자원을 상실한 채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들, 그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이 세상의 자원들이 사실은 그 원천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자 이 모든 자원들은 다 끈 떨어진 구슬과 같아서 흘려버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적용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느 지체가 보내온 긴 사연을 읽고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그러나 그 은혜를 하나님 앞에 은혜대로 쓰지 아니하고 불순종하므로 지금은 큰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다는 회개의 편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놓으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신 하늘의 많은 자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경험, 말씀의 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건져내시는 구원의 놀라운 능력, 성령의 놀라운 권능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을 그 어두움에서 무지 속에서 건져내어서 그런 은혜의 빛을 누리게 하셨을까요? 예전에는 이 땅에 있는 자원이 끊어져서 핍절하게 살았고 가난하고 병들었었지만 하나님이 다시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자원을 열고 땅의 자원을 부어주셔서 풍족하게 되었고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 고통 받던 사람들이 물질의 부를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복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해주셨을까요?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더 사랑하고 그것과 함께 부패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것을 허락해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가던 실패의 길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런 자원들을 끊임없이 주신 것, 하늘의 자원뿐 아니라 이 땅의 자원들을 주신 이유는 이 땅과 하늘에 있는 자원 모두를 가지고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서 이 땅을 고치는 도구로 살아가게 하는데 필요한 자원으로 사용하라고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이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베풀어진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가지고 척박한 이 세상 한복판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명을 이루기 위해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여러분 자신이 부패한 가운데 다 썩혀버리고 이런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자원들은 사명을 위해서 쓰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게 사용하는 동안에 자신의 육신은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육신이 행복해지는 것만큼 영혼은 파괴되었고 은혜의 자원들은 고갈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원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유한한 자원 안에 스스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날마다 경험하고 있는 불순종이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평화하고 그 자원을 누리면서 사명을 따라가야 할 그 삶이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에서 단절된 채 동떨어져 나와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트려지고 하늘의 자원도 고갈되고 얼마 되지 않는 이 땅의 자원을 움켜쥐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행복해보려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 그 모든 시도는 사악한 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삶을 복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매우 나쁜 것이고 그렇게 사명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모든 자원인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렇게 모든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획에서 끊어진 상태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에서 돌아오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 때는 믿음생활을 충만하게 잘 이어갈 때도 있고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한번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 영원한 패배와 버림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한번 이기고 승리한 것이 앞으로도 영원히 승리할 것이라는 완전한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찬송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싸우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의 실패 때문에 오늘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의 승리 때문에 내일의 싸움에서 자만해하지 않는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날마다 걸어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불순종과 죄로 인해서 그 모든 자원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아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늘자원이 끊어져서 오는 인식일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오늘 성경에 보면 돌아오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세 가지가 나와 있는데 그 첫째는 돌이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돌이킨다고 하는 것이 돌이키기 전에 가던 방향이 있었고 가는 그 방향이 옳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슈브”라고 되어 있는 이 “돌이키다”는 단어는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던 방향이 바뀌어서 새로운 방향을 잡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던 방향이 바뀌어서 새로운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방향이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갔던 것은 목표가 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갔던 것인데 슈브함으로 말미암아 이쪽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것은 이제 이 목표를 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돌이킴입니다. 이 돌이킴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때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동 떨어져 나와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오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돌이킴입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갑니까? 우리들의 인생이 흘러가는 방향은 우리들이 사랑하는 방향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것은 곧 세상사랑을 사랑하는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면 그 삶은 자기 사랑,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우주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족함을 누리는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거기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이 아주 굉장히 강합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뭐 나 위해서 사는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터벅터벅 걸어갈 때 누가 힘차게 걸어갑니까? 그냥 한걸음, 한걸음 뛰어가면서 걸아가면서 다른 생각을 하다가 벽의 모서리 같은 곳에 부딪히면 금방 이마가 찢어져 피가 쏟아지고 심지어는 뇌진탕으로 쓰러집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 누가 힘차게 내려간다고 생각합니까?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을 헛딛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앞으로 미친 듯이 굴러가 쓰러집니다. 그렇게 자기는 절대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걸어가는 생각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발자국인데 사실은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강한 대적하는 감정이 깃들어있고 누구든지 내가 흘러가는 이 방향, 내 인생의 가는 길을 가로막으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친 듯이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것은 뭔가 굉장히 심각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는 방향이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돌이킴이 곧 회개가 아니라 돌이킴은 커다란 개념의 것이고 회개는 그 속에 들어가는 엔진과 같은 부속정도의 핵심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그 회개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뜻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물론 이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할 수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는 길을 바꾸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하든지 그것은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는 지루해하십니다. 그렇게 흘러가면서 가끔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 땅의 자원을 얻고 싶어 합니다. 주면 어떻게 할 것인데. 더 빨리 자기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이런 은혜의 자원들이 다 끊어집니다. 자신이 힘차게 걸어가는데 가는 길속에서 수많은 곤고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에는 반듯이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하늘의 자원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자원을 하나씩, 하나씩 거두어가십니다. 그러면서 이제 깊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뭘 깨닫게 되는가 하면 죄가 자기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그 다음에 이 죄가 가져다 준 영혼과 육체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평강 속에서 살았던 때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깊이 고백합니다. 그때 이전에까지는 자기와 죄가 하나가 되어 있었는데 자기의 죄를 깊이 고백하면서 그렇게 죄를 사랑했던 자기를 미워하게 됩니다. 이게 자기 깨어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는 아픕니다. 그 아픔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바로 그 옛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픕니다. 죄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할 때 아프지 않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너무 아픈 것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쾅쾅쾅! 십자가에 못 박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다시 그 방향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생각해보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왜 주님이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영광의 하늘을 버리고 이 비참하고 더러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까?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찢어 고난을 당하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이 되실 때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아!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행복을 찾으면서 행복하지도 못한 채 자기만의 자원에 갇혀서 죽어가는 우리를 구원하사 하늘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부어주시는 그 영생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던 그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새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 듯이 확 밀려옵니다. 그것이 죄의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도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넘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되니까 사랑 자체 안에 있는 속성 때문에 자기의 계획을 더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게 돌이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안하고 복만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복을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뜯물통에다가 아까운 생수를 부을 리가 있겠습니까? 잘못 흘러가는 인생의 방향에다가 하나님이 막 그 땅에 자원을 부어주시면 그 사람 자신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망가트리고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요즘처럼 여러분들이 정말 복 받기를 간절히 원한적도 많지 않습니다. 모두 정말 복 받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의 자원만 하나님 앞에 타내려고만 하면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절대로 복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가던 삶의 방향을 바꾸면서 하나님, 이제 저는 더 이상 행복 같은 것 필요 없습니다.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이 부어주실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어주십니다. 싫다고 그래도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부어주셔서 당신이 바라는 대로 흘러갈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으니 하나님이 그 사람밖에 없으니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돌이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여러분 안에 계셔서 탄식하면서 그렇게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는 계명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들을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 틀린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내가 여기서 내가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입니다. “오늘 나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것을 따라서 그분의 한 목소리 속으로 너희가 귀를 기울이거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이중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오늘날 나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는 바 모든 것을 따라서 하나님의 음 성속으로 너희가 귀를 기울이라.” 무슨 뜻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모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 많은 가르침들입니다.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살고 행하게 될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한 음성, 단수로 나옵니다. 그분의 한 목소리 깊은 그 속으로까지 그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할 때 모든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말씀이 네가 이렇게 생활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버려라. 그리고 명령할 때는 그것을 아멘하고 지금 한 것처럼 총체적인 전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라는 추상적이고 총체적인 전제에 대해서 쉽게 아멘 하는 것처럼 그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아멘하지를 못합니다. 그 구체적으로 아멘 해야 될 그 삶이 계명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그 목소리에 대해서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오셔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극소수였습니다. 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말을 기록하고 이것을 백성에게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지만 그것도 소수입니다. 보다 더 많은 분량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요만큼인데 그것을 잘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풍부하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들이 풍부하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시인들이 풍부하게 노래한 것입니다. 이게 구약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내려오셔서 그런 하나님의 명령, 너희가 순종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신 것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더 자세하게 가르쳐준 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계명에 대한 순종은 없이 은혜를 받으려고 하고 복된 상태를 누리려고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매일매일 맞딱드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섬김의 현장에서 거기에 하나님이 나와 마주보고 계셨다면 행할 것처럼 그렇게 섬겨야 합니다. 유혹받는 현장에서 하나님이 거기에 살아계신 것이 내 눈에 보였더라면 행동했을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의 삶입니다.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하나, 하나의 명령들, 성경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하다가 깨닫게 되는 구체적인 하나, 하나의 하나님의 생활에 대한 명령들, 가르침들 이것들은 계명입니다. 이 계명들을 지킬 때 비로소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그런 상태가 진짜 복 받은 상태라면 그 복 받은 상태를 가지고 이 세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으로 고쳐가는 것, 창조의 목적으로 복원해가는 것이 선의 상태입니다. 그 선이 저 강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면 구체적으로 오늘 지키면서 살아가도록 주신 그 계명을 징검다리입니다. 그래서 그 징검다리를 믿음으로 하나, 하나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밟고 지나가는 일 없이는 결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개별적으로 주어진 하나, 하나의 계명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이 삶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참된 미덕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아울리우스 어거스틴 같은 교부는 애덕의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애덕의 삶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이 천지를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큰 계획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기여하는 삶이 되는데 그런 기여하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동기가 된다는 의미에서 애덕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바로 이 애덕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함으로서 참된 미덕을 따라 살아가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 그 다음에 구속의 계획을 완성시켜드리는 그런 한 도구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덕의 삶입니다. 참된 애덕의 삶입니다. 그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의 동기가 되어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망가진 이 세상을 고쳐서 다시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세상이 되도록 살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멀리 떨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순종의 관계 속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순종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쉐마 베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쉐마는 귀를 기울인다는 뜻인데 콜은 목소리입니다. 그분의 목소리, 그 앞에 전치사 베가 붙었는데 이것은 into입니다. 귀를 기울이는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깊이 귀를 기울이는데 그분의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하시는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읽으려고 하는 그런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한 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는 신자들은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들을 때 객관적인 사실만이 지성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지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전달될 때는 항상 거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전달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면 우리도 울고,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면 우리도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분노하면 우리도 화가 나고, 하나님의 마음이 눈물로 가득 차면 우리도 슬픈 마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소리 속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상 순종의 원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순종은 신자의 진정한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순종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것 없이 순종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율법의 의무들을 행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지를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음까지 깊이 깨트려져서 목소리에 담겨진 하나님의 그 마음까지 읽어내면서 그분과 하나 된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것,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셔서 우리가 잠시 이 세상의 재물에 눈이 어둡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뜻을 거슬러서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살았다면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구하는 이 땅에 있는 많은 축복에 대한 갈망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원을 모두 빼앗아서 그래서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모으셔서 이제는 진동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진동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 파멸될 수 없는 땅의 나라가 아니라 누구도 파멸할 수 없는 하늘나라를 그들에게 주셔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서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하나님 나도 한때는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도 내가 경험했고 그 하늘 은혜 때문에 감격하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이 땅의 자원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자원을 그렇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원을 사용해서 이 땅을 고치는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해서 자원을 주신 것인데 내가 하나님보다는 이 자원을 더 사랑해서 스스로 죄 안에 갇히고 부패해버렸습니다. 여러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런 전체적인 돌이킴이 없이 단지 이 땅에 있는 자원이라도 하나님의 호주머니에서 좀 빼앗아서 고통을 좀 모면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하실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받을만한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드리는 피를 토하는 기도보다는 복받을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 그 위에 오히려 하님이 더 많은 자원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흘러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두 삶을 한번 비교해보십시오. 모든 자원이 끊어진 가운데 마음이 탐심으로 가득 차서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이 땅의 자원을 모으기 위해서 계속 범죄 하면서 핍절한 영혼으로 살아가다가 고갈에 빠지는 인생이 결국 주님이 주신 그 모든 은혜의 자원을 한없이 누리는 것, 하나님과 평화한 가운데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있고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자신의 인생의 계획이 담겨 있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얼마일지 모르지만 죄로 고달픈 인생의 길을 살게 하시는 날 동안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그는 단지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고 망가진 땅들이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두 삶의 차이는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아서 동서 사방에 흩어져 살면서 제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훌륭한 도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동리에 흩어져서 여러분 모두가 다 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솟아나는 샘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강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순종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8. 말씀에 익숙한 자들의 불순종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1.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러 주 동안 우리들이 살펴보았던 같은 시리즈의 설교들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제 광야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야 할 언약백성들의 본분을 적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자리한 30장에서는 29장과 함께 순종이 매우 강조되고 있는 장입니다.
우리들은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명백히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은 당신과 관계한 모든 언약백성들이 그 복을 누리면서 사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실패와 혼잡 된 상황은 진정한 복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성경적으로 참된 복이란 최소한 네 가지의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고 이미 몇 주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내적인 평강이 넘치고 그 내적인 평강이 샬롬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하나님과 화해가 없이는 어떤 노력으로도 복된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목적을 사랑하는 자의 목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떠난 이기적인 인생의 계획들이 모두 파괴되고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그 목적에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사는 이것이 복된 상태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세 번째는 자원을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자원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우선 첫째는 하늘의 자원을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을 강하게 하고 영혼으로 하여금 능히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그런 하늘의 신령한 자원들을 풍부하게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 은혜로 영혼이 충만해지고 풍부해질 때 고난과 시련도 이기면서, 환난과 핍박도 견디면서 그 모든 인생 가운데 펼쳐진 괴로움과 고통을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의 자원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복된 상태라고 할 때 세 번째 요소 가운데 또 하나는 땅의 자원을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의 자원을 가지고 이 세상을 고치는데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해외에 나가보면 선교를 한다고 할 때도 선교하는 나라가 잘 사는 것이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넉넉한 자원을 가지고 선교지를 섬기면 이 땅의 자원이 선교의 성과를 저절로 불러오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외적인 경우는 물론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교의 역사를 보면 특히 근대 선교의 역사를 보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나라가 가난한 나라들을 선교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은 그것만으로는 망가진 세상을 고칠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자원과 하늘은혜의 자원을 섞어서 그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세상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된 상태의 네 번째 요소는 앞에 나오는 세 가지 요소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속에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고 부족한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공급이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받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성도의 복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이 복된 상태라고 말하는데 이런 복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언약백성들의 의무이고 또 특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말씀드린 복된 상태의 네 가지 조건은 하나로 묶여져있지 분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진정으로 복된 상태로 도달하는 하나 된 조건들을 그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들만 꺼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과의 평화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함으로 이기적인 자기 인생의 목적을 포기하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이기적인 인생의 동기들이 펄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 있는 자원만을 많이 하나님께로 얻어내서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더 큰 만족을 주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이 충돌을 일으킬 때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미친 짓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일 수 없고 하나님과 원수를 맺지 않고는 그런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불순종하는 자의 변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을 복된 상태에 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망가진 세상을 고쳐서 창조의 목적으로 회복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밝은 진리의 빛과 그리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 끊임없이 변명했습니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고 불순종하면서 자신을 어떻게 변명했는지는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일일이 매거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지천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하나 예를 드는 것조차 의미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백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살면서도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변명과 핑계가 많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다 드려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혹시 자신이 잠시 미끄러져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변명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눈물로 참회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 뿐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들이 불순종하는 죄의 분량에 비례하는 풍부한 변명들이 있습니다. 그런 변명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그러나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죄책감을 약화시킬지 모르지만 그것이 죄의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바꾸어놓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멸망으로 이르는 길은 넓고 같이 가는 친구들이 많은 법입니다.
또 두 번째 우리들이 대는 불순종의 핑계는 이런 것이 아닙니까? 나도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하고 말입니다. 물론 신앙이 허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니 환경의 영향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순종하고 환경의 탓으로 돌린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놓으면 하나님께 잘 순종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불순종하는 일을 행하면서도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죄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들에게 흘러갑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들은 범죄 하여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길이 있지만 마음이 사곡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피나게 의로운 삶을 살아도 하나님을 가까이하기에 너무나 먼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여러분들을 불순종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을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은 영적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세 번째 핑계를 하기가 쉽습니다. 나도 내 안에 있는 죄의 힘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라는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불순종하고 있는 것을 마치 자기 안에 있는 죄의 강력한 영향의 피해를 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과는 매우 다른 도리의 방식으로 불순종과 죄를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고 또 한편으로는 불순종하게 되고 하는 선택이 있는데 우리들이 성화의 삶을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는 것들은 작용인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작용인은 곧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혹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작용인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해지게 되고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혹을 이기며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고 난 다음에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 그 놀라운 일들을 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혹은 성령님의 은혜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고 그런 성령님의 은혜를 부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이 작용인이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아니하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원하는 마음을 아무리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텐데 성령님이 내 안에 작용하시고 우리는 거기에 그저 호응함으로 말미암아서 성화의 삶을 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훌륭한 순종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쯤 가게 되면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제껏 들어왔던 교리와는 다소 모순된 것 같습니다. 왜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관한 교리를 목사님께 배우면서 죄는 분명히 우리 안에 있는 실제이고 가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존재하는 고정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그래서 우리를 악으로 몰고 간다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성령님이 거룩한 일을 위한 작용인이신 것처럼 동일한 논리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작용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질문할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교리적인 지식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은 그 질문에 더 많이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짧은 시간에 걸쳐서 그것이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예증한 후에 설교의 진도를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우리 안에 순종하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하는 성령님은 작용인이라고 불렀고 작용하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작용인이라고 불렀고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만드는 것은 결함인 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즉 작용은 없었던 것에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원인이고 결함인은 있어야 할 것들이 모자라거나 사라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에 원인이 되는 것이 결함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늘 순종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계속되면 죄가 실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겨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기뻐하며 살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에 젖어있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일처럼 괴로운 일이었습니까? 주님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드려서 섬기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이기면서 행하는 그런 실천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괴로웠고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들이 슬펐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넘쳐 있었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실제가 있었지만 그것들을 누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 앞에 혹시 불순종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변명하지 아니하고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하는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작용인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마땅히 있어야 할 은혜의 상태에서 이탈한 결함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고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산 다음에 하나님 앞에 네가 진짜 잘 살았구나. 어쩜 착하고 충성된 종처럼 이렇게 거룩하고 나를 잘 섬기는 삶을 살았는가 말씀하실 때 하나님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산 것은 제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을 때 네가 악하도다. 어떻게 네가 그렇게 내가 너를 구원해놓은 계획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렇게 악하게 불순종하며 살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 아닙니다. 제가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으니 저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대충은 이론적으로 정리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사랑이 빠져 나가면 죄가 남아서 우리를 불순종하게 하고 그것이 죄가 작용인이 아니라 신자 자신이 그 불순종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범인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죄를 사랑하는 것, 불순종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 어두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어디에서 갖고 와서 갖다가 두어야지만 어두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두워지기 위해서는 빛을 제거해버리고 빛을 가려버리면 어두움이 옵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도 이 어두움이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하는 것이 논쟁거리가 됩니다. 존재인가 아닌가? 한번 숙고해보십시오. 자, 그럼 빛을 차단하기만 하면 저절로 어두움은 생깁니다. 침묵을 어디에서 갖다가 두어야지만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나는 것을 끄면 바로 침묵의 상태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자가 죄를 사랑하고 불순종을 좋아하는 것은 마치 어두움을 사랑하고 침묵을 들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어두움은 좋아하고 침묵을 들어보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작용하는 실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책임질 수 있는 실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불순종하게 되면 그 불순종하는 당사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런 불순종하면서 변명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런 변명 속에서 하나님이 마땅히 지정해주신 삶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라운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가까이 있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매우 가까이 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린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그 말씀은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은, 그 명령은 하늘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줄꼬.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는 명령인데 바다 끝에 그 명령이 있으니 바다를 건너가서 겨우 그것을 가져와서 우리에게 들려주어야지 우리들이 순종할 수 있을 텐데 누가 그렇게 들려주겠는가.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권이 둘이 있었는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셨고 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백성으로서의 축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들이 기도할 때 이렇게 가까이 들으시는 신을 모신 민족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이렇게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는가. 또 하나님이 끊임없이 언약백성들에게 찾아와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것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당시의 실존주의 문학가로서 많은 독자들을 거느렸던 카프카의 소설에 보면 (?)소설이 나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사실 저는 깊이 공감했습니다. 주인공이 어느 날 커다란 벌레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는 그 벌레가 죽은 날 온 가족이 피크닉을 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진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사실은 역사적으로 보면 희랍 철학자들도 그런 사실들을 많이 깨달았지만 그러나 사실 중세에 와서 그것을 깊이 깨달았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들이 실존철학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몰랐지만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나에게 누군가 뭘 요구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혼자 존재하는 이 존재 자체가 인간으로서 자신을 지탱하기에 너무 힘들고 자원이 없다고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학가나 사상가나 철학자들에게 답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보면 사람들이 별로 정답도 못하면서 말은 대게 많이 합니다. 엄청나게 많이 합니다. 다 따지고 보면 결국 전부다 물음표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의문을 제기하니까 사실 그 지평들을 넓혀주는데서 아주 놀라운 깨달음은 아니지만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의문점을 제기할 뿐이지 정답을 내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너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후에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 너무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상가들이 그렇게 피를 토할 듯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있는 사람들만 혼돈하게 만들고 자기도 죽어버렸는데 성경은 그 치열한 질문에 대해서 너무 쉽게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 시작하는 이래 모든 철학의 궁극적인 사유의 초점은 도대체 우주의 기원이 무엇이고 인간은 왜 이 땅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지 인간이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가. 이런 것들이 철학과 윤리 안에 있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성경은 너무나 가볍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어떤 논쟁도 없이 하나님이 거기에 두셔서 생겼다. 어떻게 살아야지만 인간이 참으로 가치 있는, 뭐 그러고 떠들고 자기들끼리 머리에 피가 나도록 싸우지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의 목적이다. 간단하게 얘기합니다. 사실 만약에 성경이 그런 것에 대해서 많이 설명했더라면 안 믿어졌을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쫙 빨려 들어오면서 아, 이것이구나.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가까이 있으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가까이 있는 말씀
그래서 피나도록 고민하면서 정답을 못 찾은 사람들인데 언약백성들이 이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가까이 둔 채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언약백성들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말씀이 가까이 있었지만 그 말씀에 매우 익숙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특권인 동시에 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원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가지로 성경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네 입에, 네 마음에 차례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네 입에” 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암기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말씀이 일상화되었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랬는데 이것은 결국은 생각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늘 사고 속에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늘 법이었고 그들의 말씀은 그들의 신앙뿐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생활과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익숙한 지식이 없이는 시민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죄를 지었을 때도 종교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율법을 통해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고 이웃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때도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준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되는지를 배웠고 그것이 재판받을 때 표준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의식적으로 불결해졌을 때도 다시 정결함을 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율법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의 지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들은 사고 속에서 그리고 입술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늘 익숙해진 상태였고 그렇게 익숙해진 상태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 보면 그 백성들이 바로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바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에 익숙한 백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일은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논쟁을 설명하기 전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고 사고 속에 늘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불순종할 수 있는가. 정답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두운 한복판을 걸어가는 일, 가능하고,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생명을 주님께 바치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헌신한 사람이 오히려 그 나라를 허물면서 살아가는 일도 가능하고, 한때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미워하기까지 하나님만 사랑했던 사람이 오늘은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그분을 대적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오늘날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말씀에 대한 경험을 능가하는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이적과 표적들을 애굽에서 보았습니다. 광야에 들어와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위엄 가운데 온 백성들에게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임재도 경험했습니다.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렷한 음성도 들었고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불세출의 지도자 하나님을 대면하고 온 신령한 목회자인 모세의 직접적인 목양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공급해주는 만나가 양식이었고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거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한 그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적으로 내려주는 만나를 먹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구름기둥으로 가려지는 그 은혜의 그늘 아래서도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늘높이 타오르는 기적의 불기둥, 그 불빛을 받으며 그들이 범죄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든지 이런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는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4. 순종하게 하는 말씀
그러면 이 두 사실 사이에 있는 괴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말씀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특권을 받아서 하나님의 많은 말씀에 익숙해져있고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그들의 불순종하는 그 사실 이 두 사이에 있는 괴리를 어떻게 우리들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것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제 저는 이것들을 설명하고 논쟁함으로서 이제 우리들이 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나아갈 길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이 하는 것이지만 그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의 말씀은 곧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를 순종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신자 안에 신령한 은혜의 불과 지식의 빛을 가져다주어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적 사랑은 순환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드려서 깊이 사랑하면 외적이 순종이 쉬어지고 외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을 실천하고 살면 그런 순종의 실천 속에서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존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는 안에 있고 하나는 밖에 있지만 그것이 모두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곧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실패 속에서 아주 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떤 교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있는 상태가 곧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 있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산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 목회의 영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영광은 많은 사람들이나 세상의 끊임없는 박수갈채,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심 이런 것들이 교회의 영광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영광은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을 이 망가진 세상 곳곳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가루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 영적이고 심적인 진리의 빛을 받아서 본질적으로 변화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누룩입니다. 그 누룩을 온 세상에 두루 확 뿌려놓을 때 가루가 아무리 많아도 누룩이 순수하면 얼마 가지 못해서 그 가루는 누룩으로 변하고 맙니다. 아무리 누룩의 덩어리가 커도 누룩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것이 가루를 발효시키며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곰팡이 균을 만들면서 썩어버립니다. 교회의 영광은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곧 사람의 영광입니다.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인간을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사람을 통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그분의 살아계심과 통치하심에 현재성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상관없습니다. 그것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자원들이 목회 사역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서 끊임없이 쏟아 부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목회사역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이 땅 위에 그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한 말씀의 저장고를 세 개를 만드셨습니다. 첫째는 계시의 책인 성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신자들의 마음입니다. 이 계시의 책을 열어서 진리의 참된 빛이 성도들의 마음에 저장고에 들어가서 그것이 끊임없이 신령한 은혜의 열과 영적이고 신적인 진리의 빛을 역사할 때 그가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선한 상태의 세상이 되기 위해서 미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목회사역은, 교회는 바로 이렇게 닫쳐진 하나님의 말씀의 책을 탐구하여 그래서 또 하나의 다른 저장고로 옮기는 것이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넣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목회사역의 영광이 무엇인가 하면 이 사역을 통해서 일을 열심히 해서 교회가 마치 일 때문에 온 난리를 치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 이게 사역의 영광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 속에 하나님의 신적이고 영적인 진리의 빛도 없고 그리고 진정한 은혜의 열도 없어서 불 꺼진 발전소처럼 아무 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살수 있는 어떤 에너지도 갖지 못했던 텅 빈 저장고인 사람들의 마음에 계시의 책을 열어서 거기에 나오는 은혜와 진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사역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고를 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새것과 옛것을 끊임없이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의 또 다른 텅 비어있는 저장고 속에 넣어두어서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서 그들 속에 타오르게 해서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많이 나타나면 그게 바로 영광을 돌리는 목회사역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회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정신과 헌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매주 강단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필요성이 좀 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매주 이렇게 강단을 지키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더 많이 이런 것들이 강조됩니다.
지금은 많이 그런 것들이 없어졌습니다만 저희 초등학교 때만 해도 대부분 연탄으로 살았습니다. 군대에 가면 연탄 가루에다 물을 묻힌 물탄이라는 것을 가지고 써서 불을 때고, 학교에 가면 그것보다 좀 나은 조개탄으로 불을 때고, 그리고 철공소에 가면 그 유연탄을 가지고 가루로 해서 때고, 그리고 집에서는 연탄인 19공탄, 36구공탄 해서 크기가 그게 제일 작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36구공탄, 무슨 48구공탄 무슨 업소 같은 것은 큰 것입니다. 그런 것을 찍어서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날이 바짝 추워지면 이 연탄이 모자라서 돈을 가지고도 못삽니다. 그러면 연탄 집에 있는 주인은 평소에 그 동리에 살면서 뭔가 껄끄럽던 사람들은 연탄을 안 줍니다. 핑계를 대고, 그러면 동리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 얻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왜? 워낙 양이 많고 무거우니까. 여기서 살면서 방배동에 주문하면 안 옵니다. 리어카를 끌고 와야지 되는데, 그러니까 동네에서 안 주면 못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엄마 아빠가 매일 저녁마다 새꼬락지 하나에 두개를 끼고 퇴근하고 그리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2-300장을 쌓아놓으면 겨울이 든든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때서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것을 칼만 들고 그것 가지고 불 때서 거기서 식구들이 그 추운 겨울밤을 지내고 그 다음날 출근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이름모를 광부들이 진폐증을 앓아가면서 그러면서 갱도 쪽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외롭게 곡괭이를 들고 수백 미터 때로는 1-2킬로 들어가서 거기서 그것을 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매몰되어서 죽기도 하고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진폐증에 걸려서 그래서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탄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깨트려진 것을 가지고 차에다 실고 올라오고 올라온 것을 서울 근교에서 그것을 깨트려서 물을 섞어서 그래서 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자의 위치가 무엇인가 하면 그런 말씀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광부들은 캐다가 매몰되어서 죽는다고 그러지만 말씀을 캐다가 매몰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이제 서가에서 책꽂이가 넘어져서 죽는 그런 것이야 있겠지만 어폐가 있습니다. 그 대신 진짜 외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 대신 위로도 있습니다. 그것은 캘 때는 굉장히 힘들지만 거기에는 내가 이제껏 까지 다가가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의 세계를 계속 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회자가 여러분들 앞에 잘 안 나타나는 것을 기도응답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나를 생각할 때 그냥 하루 품 팔아서 하루 먹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루 가서 잘 말씀을 연구해서 그 다음날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니 뭐 많이 캐놓은 것이 있으면 몇 달 놀면서 캔 것을 가지고 놓아도 되는데 나는 없습니다. 매일 가서 캐야 합니다. 일당식입니다. 하루치기, 가서 하루 파서 그날 먹고 사는 것입니다. 나도 먹고 지체들도 나누어주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몇 주 놀면? 그러면 굶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매일 나타나서 온갖 나타나서 언제든지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하면 막장에 안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고갈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너무 적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빨대를 들고 다 나타나서 꽂아서 짝 빨아먹고 안 나오면 발로 차버립니다. 냉혹합니다.
요즘 여러 군데 집회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반성도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진짜 많이 다녔는데 내가 너무 안 다녀서 죄송한 느낌도 있어서 그래서 몇 군데 나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습니다. 지체들이 변화되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니 말씀을 전하고 또 가까이 있는 사람들만 아니라 멀리 외국에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러는데 뭐 나쁠 게 있습니까.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꾸 말씀을 탐구하는 이 생활이 자꾸 끊깁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캐내어서 그것들을 단순한 지성적인 캐냄이 아닙니다. 진짜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야기하는 spiritual 영적이고 디바인 신적인 빛을 끊임없이 캐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져다주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그러나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성 안에서 지성을 사용해서 그런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영적인 빛들을 하나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신적인 지식, diving knowledge 이런 신적인 지식들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탐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나는 모든 목회사역이 거기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애써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노력들은 여러분들이 손을 뻗으면 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놓을 수는 있지만 마음을 열고 갖다가 집어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의 마음이 책꽂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목회사역의 모든 영광은 바로 여기, 이 계시의 책을 열고 거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불변의 말씀의 저장고에서 고귀한 지식과 빛들을 캐내어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텅 빈 저장고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수시로 그 불을 점검해서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 그것이 목회사역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그렇게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진 것과 그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다른 사실이라는 사실들을 자각하고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열망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현실에 만족하고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더 많은 빛과 은혜의 열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를 사모하는 진실한 탐구의 정신이 그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진지하게 천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너는 하나님을 위해 택함을 받았다. 누가 정직하게 가르쳐주었으면 젊었을 때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면서 인생을 낭비하며 방황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알고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말씀에 익숙해져 있는 모습입니까? 여러분들이 의식을 가지고 교회의 기능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바로 이렇게 계시의 뚜껑을 열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불신자들의 마음속에 이 빛을 저장하고자 하는 거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다른 모든 기능들은 부수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그리고 충성되게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들이 끊임없이 교회를 섬겨왔고 또 섬겨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가까이, 가까이 아무리 가까이 갖다놓아도 가슴과 가장 가까운 여기까지는 가져다줄 수 있는 데 그러나 이것을 가슴에 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몫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있는 수많은 기능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출판부가 만들어지고 어느 달에는 한달에 9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간사들이 밤을 새면서 일했습니다. 가정수가 그럴 정도의 가정 수는 되지 않아도 가정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 가정예배 교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구입해가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처음에는 열심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열심이 식었습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골고루 한꺼번에 부패하고 나타납니다. 뒤로 물러가면 한꺼번에 물러가는 것입니다. 싫증이 나면 모든 일에 싫증이 함께 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문서선교부에 가면 달랑 테입을 하나 들었지만 지금은 열어보면 개선을 해서 그 설교 테입에 요약이 들어 있습니다. 왜 테입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용에 요약을 딱 보면 그 하나의 테입 속에 무슨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 요약이 테프마다 실려 있습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그렇게 애쓰고 개선해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열심히 파고 지체들은 파 올린 그것을 성도들 가까이, 예쁘게, 쉽게, 맛있게, 보기 좋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한 열흘 있으면 여러분들이 은혜 받았던 약 10만 명의 독자가 읽어주었던 게으름이 어린이 판으로 나옵니다. 5달 정도 걸렸습니다. 왜 만들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도 성화되어야 하니까, 내 욕심 같아서는 영아부 게으름도 만들고 싶습니다. 인간의 본분은 젖만 먹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많은 책을 썼지만 두 주 후면 나올 한권의 책을 결혼식을 앞둔 신부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인데 원고가 3,000매 정도 되는 분량의 책입니다. 450페이지 되는 책입니다. 꼬박 2년을 썼습니다. 만약 그것을 쓰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교회 봉사를 했다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중요한 직무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계시를 인식하고 그것을 캐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슴속에 불붙게 하는 그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진짜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는 말씀일 수가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익숙한 그 말씀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지 못했는데 진짜로 그 말씀이 우리를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담겨지는 말씀이어야 하는가.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지식으로 깨닫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지식적인 깨달음이 우리의 영혼에 곧바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믿음으로 그 계시를 받아들이고 나면 이성과 합치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계시 중 어떤 것들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지만 일단 신앙으로 그 지식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지식을 이성에 반하는 지식이 아니라 그 이후의 논리는 이성적인 논리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탐구해나가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그냥 이성의 빛만으로 깨달아지는 영역들이 있고 그것이 아니라 신적이고 영적인 빛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지식들이 있습니다. 전자는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체험적이고 이성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본성의 빛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그런 신적인 빛, 초자연적인 빛, 그리고 영적인 그 지식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성령의 강력한 은혜와 임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동일하게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깨닫는 이 깨달음의 자세들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읽는 것보다 잡지에 빠지고 소설에 빠지고 아무 가치도 없는 허망한 것들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고 TV 드라마에나 코를 박고 일간스포츠나 탐독하듯이 외우고 그렇게 해서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 쓰레기 같은 삶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언젠가 공개할 것입니다. 도서관을 만들어놓고 한번도 이용하지 않은 사람, 공개를 하려고 합니다. 5년 이상 교인부터 대상으로 해서, 어떻게 그렇게 살아갑니까? 수많은 지식의 빛을 담고 그 책들이 거기에 있는데 얼마나 가치 있는 일들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그런 지식의 보고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시기가 없이 살아갑니까? 여러분들이 정말로 매몰되어서 살아가는 그 일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한번 다시 하나님 앞에 되물어보십시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보다 더 참된 말씀의 빛, 하나님의 계시 속에 담겨져 있는 진실한 빛이 여러분의 마음의 저장고에 담기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가까이 다가가서 말씀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도 연세가 많이 드신 분이 저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더 신앙을 깊이 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기독교 강요원서를 사다가 2,000 페이지를 노트하면서 모두 읽었다고 합니다. 노인네가,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도서관을 가까이 하면서 늘 이게 너무나 커다란 축복이라서 자기가 그 책을 도서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합니다. 기념으로, 머리가 하얀 노인분도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무엇에 그렇게 분주하게 살아갑니까? 끊임없이 지식적으로 탐구하고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됩니다.
without knowledge, without holiness 지식이 없이는 거룩함도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곳에 어떤 신령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귀가 주는 신비일 뿐입니다. 지식이 없이 거룩함도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탐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두 번째는 생각으로 숙고하는 것입니다. 이 숙고한다는 표현은 깊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자가 더 재미있습니다. 숙고, 익을 숙자입니다. 푹 익도록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숙고입니다. 여러분, 영화는 필름을 일초에 약 33매 정도로 돌려서 정지된 그림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바꾸어주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이런 게 나옵니다. 33장이 돌아가는데 그 중에 한 장 속에다가 술병을 하나 딱 찍어놓습니다. 그러면 눈으로는 술병이 안 보입니다. 확 지나가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영화를 보다가 술이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겨 술병을 찾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머릿속에 하루에 10만 가지의 생각이 스쳐간다고 합니다. 그 스쳐가는 생각들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숙고된 생각에 우리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숙고를 성경에서는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고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떨쳐버리고 그렇게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섬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를 숙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복되심을 숙고하면 숙고할수록 그 예수님은 커 보이고 그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들은 작아보이게 됩니다. 세상을 많이 숙고하면 숙고할수록 주님은 작아 보이고 신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숙고를 만져지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도 많이 숙고하면 만져지고 보여 지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없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숙고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깊이 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얘기가 나왔으니 이야기인데 나는 여러분 들 중에 작년에 결심하고 실행하던 매일의 묵상을 계속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나는 여러분들에게 공개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현저하게 숫자가 떨어지고 있다는 통계가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육신이 약해서 못하는 것입니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싫증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교인들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묵상집이 열린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사랑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이유는 이런 자료들은 마음 앞에까지 갖다놓은 것이지 이것을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숙고된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은 노력을 해야지만 숙고가 되고 세상에 잡다한 생각들은 마음에 내버려두면 저절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은 노력을 해야지만 생각 속에서 숙고되지만 세상에 잡다한 것들은 마음을 지키지 않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숙고가 되어집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깊이 숙고되어지고 그 영향에 의해서 지배될 때 마지막에 그것들이 그 세상적인 생각들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욕과 이 세상에 이기심과 탐심과 각종 욕심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지체들의 역사하는 죄의 법을 불러일으키는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숙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인생 전체가 뒤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영원히 그대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만 그 말씀이 여러분들의 말씀입니다.
마음지킴의 교리를 들으면서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5년이 지난 지금 마음을 못 지켜서 미끄러진 성도들이 많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들으며 속속들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어도 다시 죄의 지배에 걸어 들어간 사람들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한때는 나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이 생각 속에서 끊임없이 숙고되지 않으니까 그것들이 지식적으로만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지식적으로는 이해되는데 그대로 살고 싶고 그 뜻대로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고 익숙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 말씀에 대해 마음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삶의 상황은 같은 사람이 없고 다 틀립니다. 저 사람은 지금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매달리는데 이 사람은 물질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이 사람은 질병 때문에 매달리고, 또 한 사람은 몸도 건강하고 돈도 있는데 깨어진 가족들의 관계 때문에 아파합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그 말씀을 자신의 실제의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항상 말씀은 삼인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그러더라. 성경에 그랬다고 그러더라. 저렇게 하면 변화를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 저렇게 되면 하나님을 만난다고 그러더라. 그런 사람들이 들으면 된다고 그러더라. 이렇게 삼인칭으로만 흘러갑니다. 상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들이 깨닫고 들은 말씀이 수없이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다 적용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명증한 해답을 주는 것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동시에 한 사람의 마음 안에 동일한 정도로 살아서 역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십자가에 대한 설교가 막 도전을 주고 그쪽으로 묵상이 되어지고 어떤 때는 정직에 대한 것들이 계속 마음에 불러일으키고 어떤 때는 또 어느 지체가 신문에 간증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번민이 일어나고 말씀이 우리를 몰아서 당신 앞에 세우실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어느 것이어야지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느 것이든지 하나가 말씀 속에서 지배적으로 계속 역사하고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가 있어서 자신 앞에 펼쳐지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십자가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헌신의 삶에 대해서는 왠지 코드가 안 맞아서 말씀이 선포되면 싫더라. 책도 읽기 싫더라. 성경도 읽다가 십자가에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이 나오지만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다른 본문이기 때문에 차가워지더라. 그런 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는 항상 통일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없는 것이 주된 관심사인가. 그래서 선지자들도 보면 그렇습니다. 이사야 같은 선지자도 맨 처음 소명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막 주시는 것입니다. 가서 외쳐라, 가서 이 백성들에게 내가 벌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내 백성을 위로해라. 내 백성을 어루만져라. 하나님이 영원히 너와 함께 하신다고 가서 전해라. 그 두 말씀이 크기가 틀린 것입니까? 하나님이 시기 시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유익은 같은 시기에 각자, 각자 다른 말씀들을 받지만 항상 동일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삶의 처소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나가고 함께 공동된 연합전선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나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성도의 축복입니다.
무엇이든지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깊이 지식으로 깨달으려고 하고 생각 속에서 반복해서 숙고하십시오. 계속 숙고하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일부러 숙고할 필요가 없지만 영의 생각은 끊임없이 숙고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게 올곧음입니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생각해야 합니다. 나 세상은 조금 생각할 것이야. 나는 주님만 영원히 생각할 것이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은 나는 조금만 생각할 것이야.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 그 나라의 영원한 기쁨을 난 더 많이 생각할 것이야. 그래서 생각되어지지 않는 신령한 생각은 계속 붙잡으려고 하고 생각되어지는 세속적인 생각은 버리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으로 끊임없이 적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이 결함되었기 때문에 역사하고 있던 죄의 세력들이 그 은혜에 의해서 놀랍게 죽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 가운데 불순종 가운데 행하던 사람이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질 때 뼈저리게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하는 일들은 한순간이라도 가능합니다. 물론 한순간에 그 체험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시작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으십니까? 묵상하십시오. 끊임없이 영적이고 신적인 빛을 가져다주는 책들을 읽으십니까? 그리고 그 빛을 구합니까? 그 빛 안에서 살려고 노력을 합니까?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그리고 교회에 피곤한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이 섬김, 저 섬김 하면서 하나님과 신령한 말씀을 향한 영혼의 싫증과 사역의 조급함이 타협해버립니다. 그렇게 되어서 마지막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구도자는 그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빛, 주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천년 동안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사는 것보다는 주님의 맑은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단 하루를 노예처럼 살다가 죽겠습니다. 그런 게 바로 구도자의 정신입니다. 그 사람의 하루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거기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순종의 원천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4-55)
1. 본문해설
순종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면 왜 많은 사람들은 순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날은 이 죄와 불순종의 문제를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연약한 정도라고 생각을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율법과 그리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핑계로 비껴가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도 자신도 피해자의 한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행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은 것이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모든 계명에 순종하며 살게 하는 그 진정한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것을 오늘 좀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학적으로 이 주제를 오늘 이 짧은 시간에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어떤 것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순종하며 살수 있는 원천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우리들이 한번 가슴에 되새겨서 우리의 삶에 고치고자 하는데 이 설교를 듣는 목적이 있습니다.
2. 순종의 실천: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먼저 오늘 본문을 해설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그네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기 나오는 “나그네 된 집”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성경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뭐라고 표현할까요? 그러니까 직역을 하자면 “나의 우거의 집에서” 그러니까 나그네로서 주막 같은 곳에서 잠시 머무는 그런 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본 집이 아니라 주막이나 여인숙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그네로서 내가 머무는 그런 집에서, 주의 율례가 여기는 단수로 나오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주님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그 밤에” 라고 정관사가 붙어서 나옵니다. 그리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앞에 나오는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뒤에는 “주의 법을 지키나이다.” 이 율례와 법의 관계가 무엇일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례는 “후끄”라는 단어이고 뒤에 나오는 단어는 “토라”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뒤에 나오는 법은 율법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율례는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명령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 생활의 법은 물론이고 제사를 드리는 법은 물론이고 또 하나님 앞에 기타, 다른 모든 의식의 법들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법은 율법 전체를 통칭하는 것이라면 앞에 나오는 율례는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작은 하나님의 명령, 분부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결국 통합해서 우리들이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편 119편에 실려 있는 본문입니다.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이 이 시가 다윗의 시라고 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겪은 즐거움과 고난을 모두 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의 구간 구간마다 어떻게 시인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는지를 기술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 11l9편을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부르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보니까 이 시인은 순종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55절 마지막에 보면 “내가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지금도 지키고 있지만 또 과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의 법은 “토라” 곧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기본이 되는 틀이었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지켰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 시인은 그 율법을 사랑했고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순종의 실천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본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 많은 고난과 그리고 시련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장 깊이 사랑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의 개가를 올린 이름난 장수였으며 또 아름다운 시를 많이 쓴 시인이었고 행정가였으나 그 무엇보다도 그는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은 그의 온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그 율법대로 살려고 하나님의 요구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순종의 실천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한번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사실 자기가 가고 싶은 인생의 길을 가는데 하나님이 보조적으로 도움이나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면서 자기가 필요할 때 하나님을 찾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우리들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높여주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무 것도 아닌 이세의 집에 태어난 이름 없는 한 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들 특별한 장점도 없이 유명한 가문에 태어나서 반듯한 교육을 받고 전형 인사가 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양이나 치면서 사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의 인정도 형들의 사랑도 받지 못한 이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어주시고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푸라기와 같은 그 사람을 들어서 한 나라의 임금을 삼으셨고 이 땅의 왕국에서는 한 나라의 임금이지만 다시 올 그리스도의 왕국을 알리는 선지자들 중의 뛰어난 선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은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십시오. “내가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많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더 많이 사랑해주십니다. 주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습니다. 한때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그 특별한 사랑을 잃어버린 그런 신앙생활을 한 많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전에는 착하게 주님께 순종했으나 하나님이 그를 많이 복 주실 때 마음이 교만해지고 생각이 허탄한데 빠져서 주님의 계명과 율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렸으니 하나님도 또한 그에게 대한 당신의 친밀함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두운 죄의 길에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건져주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은 거저 구원을 받았으나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며 아파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해주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구원받은 이후로부터 이제까지 우리들이 살아온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또 이곳까지 인도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어 여기까지 업어오셨습니다. 광야의 길에서 수많은 환난과 시련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시기를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찌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도 주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을 거스르고 완고하게 주님께 맛서는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따르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자기의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따라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지식이 증진됩니다. 이 시인이 바로 이렇게 순종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3. 순종의 동기: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두 번째는 이 순종의 동기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의 법을 지키면서 산 그 모든 신실한 순종의 실천이 동기가 주님의 이름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의 법을 잘 지키고 순종하는 동기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이름 신앙을 우리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아직 무지한 상태에 있었을 때 아담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중에 동물들을 이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하와가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 홀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들을 하나씩 아담에게 이끌어 보내시니 아담은 예리한 지성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로서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이제 그 짐승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특별히 이 이름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사랑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거나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이름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또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지만 이름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따위는 모두 말장난이고 실제로는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을 곧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시고 당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곧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겨했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이기리니,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싸우리니 라고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힘을 얻고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나가 싸워 승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수많은 말씀의 종 선지자들이 핍박과 고난 앞에서 목숨을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그것은 곧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이 땅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높일 수도 없고 그분을 깎아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높일 수도 있고, 낮출 수도 있고, 존귀하게 할 수도 있고, 더렵혀지게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주님의 이 이름을 높이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아파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바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였습니다. 어떻게 기억했을까요? 주님이 이름, 나는 주님의 이런 특별한 사랑과 돌봄을 입어서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언약백성이 되었으니 이제 내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같은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면서 시인을 얼마나 예뻐하셨을까요? 모두들 불순종하고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짓밟으면서 사는데 어린아이와 같은 이 시인이 자신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만 주의 율법대로 살지 않는 이 땅의 많은 백성들을 보면서 시냇물처럼 그 눈에 눈물이 흘러 하나님 저렇게 주의 말씀을 거스르고 이 땅에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주여, 망가진 이 세상을 하나님이 고쳐주셔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빛 가운데 살며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이 시인의 어린아이와 같은 눈물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이게 바로 시인의 가슴속에 있었던 그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행복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만큼 주님의 명예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까? 내 안에서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죽이며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지만 그것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교회를 보십시오. 신실하게 말씀의 빛 가운데 거하며 은혜 안에서 주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성도들도 있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이 됩니까? 정말로 무지와 죄악, 탐욕 때문에 그들에 의해서 더럽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분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헌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인이 바로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나는 없어도 주님은 살아계시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또 사라져가도 우리 주 하나님의 이름은 그 사람들 마음속에 그들 모임 가운데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높아져야지 한다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일생을 주의 법을 지키면서 사는 순종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게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밤이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밤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는 “발라라일락” 그 밤 안에서 당신의 이름을 내가 기억하였습니다. 정관사가 붙어 있는 그 특정한 밤 어떤 밤이었을까요? 나그네 된 집에서 사는 인생의 날, 고난과 시련, 근심과 걱정이 있는 그 어두운 인생의 밤중을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였습니다. 대적자들에게 쫓겨 도망을 다니는 인생의 어두운 밤중, 자신의 죄를 인해서 깊이 통회하고 가슴아파하던 인생의 그 어두운 밤중에 시련과 고난이 겹치는 인생의 캄캄한 흑암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환경 때문이라고만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환경을 만들어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의 모든 신앙의 적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았던 그 때는 밝고 화창한 봄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환한 대낮 정오와 같은 밝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고난의 밤중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흑암과 같은 인생의 시련의 밤에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분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그에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와 모든 사랑과 이제껏 까지 공급과 분에 넘치는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높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높아지시는 것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존귀해지는 방법도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이 높아지는 방법도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행복해지는 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들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이런 순종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인가? 동기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면 그럼 순종의 원천은 어떤 것일까? 실천적인 관점에서 시인의 어떤 방법으로 이런 순종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성경이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시인의 마음까지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노래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습득한 방식이 바로 그런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깨닫는다고 할 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개념적으로만 말씀을 깨닫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 이러하다. 라고 하는 것을 그냥 평면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지적인 동의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방법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이 체험적인 방법은 지식을 배제한 체험이 아니라 지식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지적인 동의를 능가하는 말씀을 통한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신자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지적인 동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삶이 바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알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열고 들어오셔서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실 때 시인은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모든 신자들은 그 사랑에 마음이 녹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신자에게 비밀이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각자가 받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만 아는 것과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 사이에 있는 차이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순종을 실천하며 살수 있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순종을 실천하는 동기로 계속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시인의 마음속에 주의 율례가 노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노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속에 계속 담아두는 그런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노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곧 그 율례가 그 시인의 마음속에 계속 살아있었다는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잠시 듣고 잊어버린 말씀이라면 어떻게 그 말씀이 시인의 일상생활에서 노래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말씀이 잠깐 스치고 지나간 지식만의 깨달음이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시인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노래가 되었겠습니까? 전쟁을 하면서도, 일상 업무를 하면서도,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기도하면서도 시인 속에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주님의 이 말씀의 법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그렇게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가득한 시대에 올곧은 신앙을 가지고 순종하며 살수 있었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듣기만 하고 잊어버리는 그런 말씀의 생활을 가지고는 여러분의 생활이 고쳐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마음에 두려는 노력을 계속 해야지 됩니다. 시편이 자신의 청년의 때를 회고하면서 같은 시편 119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를 깨끗케 하리이까 주께 범죄치 아니 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거기에 나오는 “두었나이다.” 하는 히브리 단어가 “짜판”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불씨 같은 것을 재로 덮어두는데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두었나이다. 이런 마음 위에 이렇게 말씀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잘 싸서 감추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벌써 이미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 그래서 길가에 씨가 떨어졌는데 그 씨앗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입니다. 그런데 새가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길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그 씨는 땅과 화합할 때 그때 뿌리를 내리고 30배, 60배, 100의 결실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또 돌작밭도 말씀하셨습니다. 뿌렸습니다. 잠시 그 땅이 그 씨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뿌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밑에 돌맹이도 많이 있어서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말라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떨기도 말씀하셨습니다. 땅이 받아주었고 그리고 밑에 돌맹이도 없어서 뿌리를 뻗었습니다. 뿌리를 뻗으니까 양분을 먹으면서 이파리들이 쭉쭉 자라고 줄기들이 뻗었습니다. 위에 가시가 짓누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잎이 클 수가 없습니다. 맨 처음 싹이 틀 때 뿌리만의 도움을 받아서 싹이 트지만 일단 싹이 트고 이이 퍼지게 되면 그 잎과 가지의 도움이 없이는 뿌리가 자랄 수 없습니다. 거기서 광합성 작용이 일어나고 해서 계속해서 영양분을 빨아서 위로 올려 보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잎사귀도 마르고 뿌리도 말라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말씀을 많이 깨닫고 주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4. 순종의 원천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스쳐갔습니다. 주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깨달은 적도 있고 결심한 적도 있고 그리고 헌신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마음의 저수지와 같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저수지에 담겨 있지 않으면 그 저수지 아래로 이어지는 우리의 삶의 평지에 물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그랬는데 둘 다 복수입니다.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들이 되었나이다.” 이 복수로 된 것을 보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고 그 떠오른 말씀들이 시인의 마음에 울려 퍼져서 그것을 입을 열어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불러들일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죄인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한 가지가 있습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까? 죄인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은 끊임없이 피어나는 뭉게구름과 같고 비온 뒤에 자라는 독버섯과 같아서 끊임없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악한 생각들이 죄인의 마음속에서 생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던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수많은 율례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 그의 마음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래와 곡조가 되었습니다. 시인 속에 그것이 계속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있어야 합니다. 한번 깨닫고 지성의 창고에 드러눕거나 생각의 부주의함으로 잊어버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는 성도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 수많은 말씀들이 내 마음에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
큰 노래를 부를 때에 참 평화 누리도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메아리치고 마음속에서 울려나는 그런 심령이 바로 순종하며 사는 삶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스러운데, 주의 말씀이 너무 귀한데 우리가 순종하면서 사는 삶이 어떻게 고통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마음에 두십시오. 예전에 들었던 말씀이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자만해하지 말고 그때는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았고 오늘은 오늘 주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역사할 때 그 말씀이 끊임없이 내 안에 역사하고 내 마음에 운동하고 작용하여서 그래서 나를 정결케 하고 그 말씀처럼 되고 싶고 그 말씀처럼 살고 싶고 그 말씀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그분이 이 세상에 누리셨던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이 남기신 많은 말씀,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남기신 말씀 중 여러 말씀이 성경에서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늘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기록되기를,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하고 인용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 선생님 한분이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서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의식도 없고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그 병원에 문병을 갔는데 어느 학생이 소리를 지르며 야,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몇 달 동안 아무 의식이 없으셨는데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리고 가보니까 입을 벌려서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말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 자신이 독백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학생이 가서 귀를 조용히 기울여서 한참 듣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시편 1편을 봐요. 그 선생님이 병상에서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그 속에서도 시편 1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경박합니다. 그리고 교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져도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시 즐기기만 할뿐 그 말씀이 가슴에 깊이 묻어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말씀이 순종하는 삶으로 열매 맺지를 못합니다. 주님이 많은 말씀을 보내주셔도 말씀에 화합하는 삶의 열매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보내주신 그 많은 보람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살면 그것이 어찌 순종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의 가슴에 자기가 좋아하는 한 두 마디의 말씀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말씀을 외웠고, 그 노래를 들으며 말씀의 감화로 그의 마음의 밭이 젖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순종의 삶을 살게 한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은 고난까지 이기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에 노래가 된 때가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나그네 된” 이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마구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원래 “구르”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구르는 “유숙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아주 유명한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아직 기업을 얻지 못했을 때 유리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정체를 물었을 때 항상 대답한 말이 “나는 이 땅의 나그네라”고 대답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그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조상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를 나그네라고 고백을 했던 이유는 자신의 진정한 본향이 이 세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그네라고 고백을 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시인은 좋은 환경, 평안한 거처에서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관 땅에 사는 것 같은 외로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고 순종했습니다. 핍박하는 사람과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들로 가득 둘러 에워싼 인생에 나그네 된 고통스러운 때 시련의 어두운 밤중 한복판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속까지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살 깊이 주사해놓은 주사기에 불과했습니다. 원수는 그를 죽이고자하였고 미워하는 자들은 그를 짓밟아버리기 위해서 시인을 고난의 현장으로 데려갔고 까닭 없이 미워하며 시련과 박해를 가했지만 시련, 고난, 그 위기 속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인생의 그 위기와 고난의 때에 오히려 그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주입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의 영혼은 고난 받을 때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마치 치열한 풀무 불 한가운데서 불타고 있는 쇠가 새빨갛게 달구어져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시인이 바로 불같은 시련 속에서 그런 순결한 영혼은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목적은 이 시인을 순결하게 하는데 있지 않고 그에게 고난을 주는데 있었지만 시인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사니까 하나님이 그 시련을 통해서 시인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고난의 모든 풀무, 시련의 연단을 이길 수 있는 모든 비결이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속에 두었기 때문에 이 시인이 그런 삶을 살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찌 살아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지 한번 기억해보십시오. 폭풍과 같은 고난의 때에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헤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유혹이 가득하고 핍박이 있는 그때도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주었고 그래서 우리가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으나 아주 거꾸러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도 예수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듣고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그 말씀이 불탈 때 기도가 힘 있게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책을 읽고 테입을 청취하고 그리고 그 받은 것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지체들과 함께 나누고 해서 말씀이 내 마음속에 계속 살아있도록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많이 순종하고 싶으십니까? 온전히 순종하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의 그 밭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열매들이 가득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에 저수지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우십시오. 그렇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살아서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순종하는 자가 역경을 만날 때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시 119:39)
1.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할 때 만나는 어려움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신자가 어떻게 극복하고 온전한 순종에 이를 수 있는지를 계명과 관련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시편 119편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119편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는 그런 성경의 위대한 장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신자의 내적 생활과 실제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그 계명에 순종하는 삶의 열매가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복된 삶은 하루나 이틀 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계속되어야 할 숙제입니다.
2. 순종하는 시인의 삶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이고 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도록 명령받았는지를 잘 깨닫는 일 없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도 없고 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를 알지 못합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언약관계의 틀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과 모든 계명에 따르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이 구원의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과 언약관계가 자꾸 손상을 입게 되고 이렇게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의 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에 대해서 그 의무를 저버리거나 의무에 반하는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언약관계 안에서 누리도록 지정된 하나님과의 친교의 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후회 없는 부르심으로 구원하신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완전히 버리시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버려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언약의 의무에 충실한 순종의 삶을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친교,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 중에 하나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삶, 이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부지런히 이런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의무가 무엇이고 그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신자답게 사는 인간의 참 도리가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배워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도록 어떤 의무를 부여하실 때 그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깊이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차가운 계명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셔서 우리를 인도할 수밖에 없었던 결국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행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바로 이런 내용들이 잘 보여주는 한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고백은 이런 고백입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함이니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보면 순종하는 시인의 삶이 나옵니다. 이 시인은 많은 신앙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일을 터득했습니다. 이 시인은 앞에 27절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나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내게 깨닫게 해주시면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내 마음에 두겠습니다. 계속해서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렇게 나에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지속적으로 생활하는 그 일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주님께 대한 일체의 거역하는 마음이나 거스르고자 하는 의지가 죽은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순종할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순종할 때가 얼마나 드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부복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져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깨닫고 싶어 하나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서 주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많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맺고 싶으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인은 끊임없이 주의 말씀을 탐구하고자 하였고 주의 계명을 깨닫고자 애를 썼습니다.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자기 안에 남아 있는 무지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미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오늘 이런 시인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손을 뻗으면 달 수 있는 거리가 지금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순종의 삶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할 수 있는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시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매우 중요한 불순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특징은 주께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내적인 복종과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곧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고 이 세상을 선한 상태로 되돌리는 길이며 자신에게도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으면 달 수 있는 거리에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도 사람들은 이 진리를 깨닫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없어져 사라져갈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그들의 생각을 채우고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섞여서 경쟁하며 신앙을 토대로 더 많은 자원을 빼앗아서 누리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도움을 받도록 부름 받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가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고 그들의 삶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과 경배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전해주도록 계시를 부여받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인봉된 채 펼쳐지지 않은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은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일들의 계시를 받아서 그것을 교회의 일꾼들에게 편지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마지막에 될 위대한 계시를 두루마리 속에 담으셨으나 그 계시는 굳게 인봉되어 있었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열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 노사도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에클라센 폴 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목소리를 내어서 어린아이처럼 크게 방성대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에 “크게”라는 부사가 더해졌으니 백발의 노 사도가 엎드려져서 통곡하며 우는 그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를 떠나고 핍박으로 말미암아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하고 지체들과 헤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환란과 핍박이나 죽음에 이르는 고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해고도에 홀로 떨어져 있는 외로움이나 주림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찢어지게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주님의 계시를 볼 수 없다는 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며 울었고 그가 흐느끼고 있는 이 노사도의 울음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도 달랠 수가 없는 종류의 울음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대해 목말라합니까? 우리가 어두운 죄악 세상 가운데 있으며 주님의 참사랑을 모르고 방황할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처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소생될 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 되었습니까?
오랜 여행길에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하고 걸어갔던 나그네가 맑은 샘을 만나자 봇짐을 버려두고 엎드려 그 샘에 입을 담구고 한없이 들여 마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진리가 되어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 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상태가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우리 내면세계에 죄로 말미암아 억눌림과 매임에서 풀려나는 내적 자유를 또한 누리게 되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다준 효과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남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신자가 목마를 때 물을 마시는 사람처럼 내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갈망이 있을 때 말씀을 사모하게 되지만 그런 내적 갈망이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씀의 갈증이 없는 신자는 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애초에 갈망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런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36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자기의 마음을 허탄한 곳으로 향하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계명으로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만 하면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혼이 어두운 가운데 갇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자에게 더 많이 주시고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보태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분투하며 애를 쓴다면 다음 주에는 더 많은 말씀의 빛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오늘 상당히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일주일이 없다면 오늘 받은 말씀의 은혜가 제법 클지라도 다음 주에 여러분들은 차갑게 식은 가슴을 가지고 지난주보다 더 굳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이 시인을 본받으십시오.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뿐 아니라 깨달은바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으십시오. 하나님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십시오.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아서 주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기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나를 구속하신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역경
시인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모함을 간직한 사람이었고 주님이 계시해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충분히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그럼 이제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제 그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복을 부어주시고 그의 앞길은 평탄한 길로 열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이 만나는 역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훼방이 이 시인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모함이 있고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착한 뜻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의지를 행사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평탄한 길이 열린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훼방이 시인의 앞을 가로막고 시인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금 순종한 후에 어려움이 나타나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착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관심이 적으신가보다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해 토라지는 마음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토라지는 마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적절한 미움을 간직한 토라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더 큰 대적으로 이르는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이 세계를 향해 하고 계신 통치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중대한 범죄이고 거룩한 성화의 길을 가는 성도의 본분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것이며 형벌 받을만한 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없이 갈망을 가지고 사모하고 주께만 순종하며 살려고 할 때 그들을 매우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평탄한 길을 열어주셔서 고속도로와 같은 길을 가게 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세상과 벗하고 육체의 쾌락을 좇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며 살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가진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곧게 순종하며 살려고 애썼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전자의 사람들 곧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한번에 오랫동안 몰았다가 한번에 밀려오는 고난이었고 징계였고 그리고 최종적 심판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분노를 그들을 버려두시는 것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욕심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긍휼히 없는 최종적인 심판을 향하여 그들의 생명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서 매일매일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했던 경건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오, 자신들은 순례자라는 사실을 터득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세상이 실제로 자기를 이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대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쓰는 모든 경건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끊임없는 훼방을 만났고 그것은 그들의 삶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고 그들의 마음은 그 장애로 등장한 훼방거리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경건한 추구 속에서 이 세상이 자기들의 집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다른 모든 같은 상황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힘이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순종하면서 살려고 할 때 만나는 그 훼방거리와 고난을 통해서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한 성품은 끝이 없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깊습니다. 존 화이트라고 하는 신학자는 인간은 각각 자신의 마음속에 야수를 한 마리씩 기르고 있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순종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형통한 길을 주시며 치열한 몸부림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목표를 향해 달음질할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여러분들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이 은근히 죄로 미끄러져가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탈할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련과 고난의 때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은혜에서 뒤로 물러간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오는 것도 모르는 도적처럼 여러분에게 와서 여러분들을 은혜의 틀에서 미끄러지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제의 관계에서 탈선하도록 만든 것은 형통하던 때였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고 잘되어간다고 믿을 때 영혼은 은근한 하나님을 향한 싫증에 빠졌고 육체의 욕심들은 다시 번성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연약한 인간입니다. 환경과 더불어 싸우는 때도 연약하지만 그러나 자신 안에 부패한 본성을 누르는데 있어서는 더더욱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연약함을 일깨우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붙들고 의지하게 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을 2년 동안 썼고 그 책이 며칠 전에 나왔습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이 책은 직원들 모두 모아놓고 교직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이 책을 다 쓰고 나서 마지막 서문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교리를 깨닫게 하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이 교리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짐승 같은 삶에서 벗어서 구도의 길을 걷게 하신 그 말씀의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일까? 그러나 비록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이 교리에 대한 깨달음과 탐구를 통해 얻게 되었고 구도의 길에 도움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제가 그것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그 크신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넘어지고 깨트려지는 부패한 죄인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강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적당히 능력 있게 살면서도 시시때때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하셔서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생각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순종을 결심하고 나면 평탄한 길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자 할 때 신자는 끊임없는 훼방에 부딪히며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영적인 고립을 느끼게 하십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안팎으로 원수들이 에워싸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소원을 가로막는 훼방의 일을 할 때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눈을 들어 그렇게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오늘 아침에도 매우 일찍 일어나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6층 꼭대기에서 창문을 열어 관악산 자락을 내려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쓰레기처럼 어지럽혀진 그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 세상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애써야 하는 그 치열한 모든 생존의 경쟁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뺏고 빼앗는 그 치열한 싸움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 하고 지금이라도 고통과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때까지 우리가 살 때도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삶의 여정이 어느 날 불현듯 끝나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도 우리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놓으신 하나님의 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결국 살아있어도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삶이 끝나고 죽음의 장막이 드리워져도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주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 자신의 존재와 자원을 믿지 아니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연약해지지 아니하고는 이 오묘한 비밀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훼방을 만나게 하심으로 당신 품으로 파고들게 하시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시고, 그분에게 자신의 인생의 도움이라고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은혜의 비밀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순종하며 산 것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과 같이 당신을 의존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한번 오늘 우리 주변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런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런 막된 강함 속에서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적인 혈기와 그리고 육신에 속한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형상을 본받아 주님을 닮아가고 끊임없이 자기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으며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며 그 미덕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공통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하며 깨트려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이 시인은 끊임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훼방거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모든 것과 저항하여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시인이 발견했던 순종할 힘을 주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모든 난관을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로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기도에 헌신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속에 새롭게 믿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의 선함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계명은 선한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었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일까요? 선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주님이 가지셨던 그 의도에 부합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부합하는 상태와 목적 속에서 신자는 가장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가지고 있는 계획은 선한 것이라고 하지만 항상 많은 착한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중국에 갔을 때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재로 지정된 하늘의 신을 섬기는 커다란 신당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황제들이 거기에 올라와서 자신들은 천자이니까 아버지이신 하늘께 빌었던 말하자면 신당입니다. 거기에는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신당이 서있었고 그 거대한 신당은 몇 십 개의 커다란 기둥에 의해서 받혀지고 있었습니다. 그 기둥은 이미 벌써 세워진지 오래되는 커다란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 기둥이 하나의 나무인데 세상에 저렇게 큰 나무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나무였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의 설명을 들으니까 그런 나무가 아무데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세워놓은 기둥을 쓰기 위한 나무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들이 대게 천 명 정도가 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잘라서 그래서 건축현장에 가지고 올 때는 오백 명 정도만 남는다고 합니다. 길게는 그 하나의 베어가지고 건축현장까지 오는데 육 개월 이상 걸렸다고 합니다, 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자르다가 죽고, 그 나무가 쓰러질 때 맞아 죽고, 그리고 잘라진 나무에 가지를 다치고, 그 쏟아지는 우기에 진창에 빠지면서 나무를 끌고 오다가 물에 떠내려가다가 죽고, 그리고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에 걸려서 전염병 때문에 죽고, 그래서 마지막 그 산꼭대기에 있는 것을 끌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백 명 정도가 죽고 오백 명 정도만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의 터 위에서 그 신을 섬기는 이 제사의 장소가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무자비한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세상을 의도하신 가운데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 안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이 그런 선한 상태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만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우리도 가장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선한 목적을 이루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런 삶으로 가는 구체적인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만들어놓으시고 싶어 하시는 이 세상의 선한 상태가 강 건너편이라면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주신 구체적인 계명들은 바로 거기에 놓여져 있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진 계명 같지만 그것 하나하나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지금 하나님의 계명의 선하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시인이 왜 훼방거리를 만나게 되었습니까? 오늘 시인이 왜 이렇게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까? 오늘 시인이 왜 자기를 핍박하고 고통을 가하는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계명을 지키면서 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세상과 야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더라면 시인에게 이런 고난이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시인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시인은 그 계명이 선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드디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자 할 때 부딪히는 난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좌절하고 낙심했더라면 그의 영혼은 깊은 침체에 빠졌을 것이고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가득 찼을 것이고 이후의 그의 삶은 어두움 속을 방황하는 불순종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패배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할 때 박해를 만나고 훼방을 만나게 되어 고통이 계속되자 시인은 그 계명이 선하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이 말씀을 버리고 평탄한 삶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더욱 귀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면서 계명의 선함을 믿고 하나님 앞에 순종할 힘을 구하며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 기도는 낙심에 빠지기 쉬운 신자의 영혼을 쇄신시켜 다시 한번 하늘의 은혜로 그를 소생시켜주시는 놀라운 성화의 작용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신자들이 만나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훼방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속에서 우리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기도함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려고 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서 순종하는 자에게도 하나님이 때로는 난관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순종할 힘을 주는 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면 어떠한 물의 저항도 느끼지 않지만 목표를 가지고 강을 가로지르거나 거스르고자 할 때 강한 강물의 힘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애를 쓸 때 오히려 죄의 힘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입술에 남아 있는 하나님을 향한 달콤한 사랑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거역의 쓴 뿌리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의 난관과 훼방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는 현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주께로부터 오는 도움 이외에 어떤 것도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뜻을 찾으며 매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평생 하나님께 순종하며 걸어온 신자들의 마음 안에는 항상 깨트려진 경험들이 풍부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감격스러운 경험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얼마나 밋밋합니까. 그들에게는 작렬하는 기쁨이나 살 떨리는 쾌락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어쩌면 변화가 없는 것 같고 역동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속에는 항상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평화가 있고 거기에서 오는 친교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 세상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해달의 가죽으로 뒤 덥힌 그 칙칙한 성막 안에는 청색 홍색 자색실로 짠 그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이 있었던 것처럼 신자의 마음도 그러하고 하나님과 만남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지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부패한 본성은 죽이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착한 의지는 불러 일으켜서 그래서 끊임없이 어려운 난관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그 계명에 천착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룰 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세상에서 이 땅을 고치고 주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훌륭한 일꾼들로 삼으십니다. 그런 섬김 속에서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은 자기를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연합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도록 주신 그 계명은 하나님을 위한 계명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이 순종의 비밀들을 터득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께 기도하는 방식들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 순종하는 자가 핍박을 받을 때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궤사한 자를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시 119:157-158)
1. 본문해설
오늘 이 시간에는 “순종하는 자가 핍박을 받을 때”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단박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복이 쏟아지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순종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근심걱정을 물러가게 하시고 일시에 번영의 복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주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를 매우 기뻐하셔서 즉각적으로 당신의 도우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곤고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나서 물질의 해택을 누리고 또 오랫동안 막혔던 어려운 상황들이 열려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획일적인 공식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순종을 결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게끔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2. 계명에 순종하는 삶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잠시 해설해보자면 시인은 여기에서 시편 119편 다른 곳에서 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가 처한 삶의 상황과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미친 영향, 이것들을 함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항상 고난의 골짜기만 걸어온 것도 아니고 항상 산들바람이 부는 풀밭 위를 걸어 다니는 것 같은 평온한 삶만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모래바람이 이는 광활한 광야를 지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무서운 때를 지나는 것 같은 때도 있었고 또 산들바람이 부는 조용한 호숫가를 거니는 것 같은 평온한 때도 있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지는 인생의 무서운 시련의 날도 통과했습니다.
어떤 상황을 지나든지 간에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특징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시인으로 하여금 이런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교제를 나누도록 만들어준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매일매일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지키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속에서도 시인이 동일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가려고 할 때 그가 어떤 고난을 겪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또 두 번째는 그런 고난을 겪을 때 어떻게 올곧은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켰는지를 고백하고 또 그런 삶을 살 때 자기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일들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차례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노래할 때 시인의 마음에는 우리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교훈하기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자기 고백적인 성격이 강한 그런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래된 이 신앙의 노래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약 삼천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오늘 우리의 마음에 사로잡도록 만들어주는 그 이유는 시대는 달라도 그가 역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참 성도가 되기를 갈망했고 또 오늘 우리도 부족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가 되고 싶은 그 마음이 일치해서 오는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본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교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썼고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는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며 살아왔던 자기의 지난날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도 계명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했을 때 세 가지 경험을 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중에 첫째는 순종하고자 할 때 핍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말하기를 핍박하는 자와 대적들이 자신들의 주위에 늘 있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그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시인은 금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큰 축복과 번영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원수와 핍박하는 자에 의해서 에워싸인 외로운 투쟁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 앞에 조금 순종하고 당장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순종에 대한 보상이 없을 때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 혹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가보다. 주님의 도움이 끊어졌나보다.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신가보다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하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핵심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본질을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지 않을 때는 세상도 우리를 별로 싫어하지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속해버린 참다운 성도가 되면 이 세상도 우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세 들어 살면서도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신의 안목과 정욕에 옳은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경향이고 또 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경건한 모든 성도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계획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려고 했던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 일컬음을 받았고 또 자신도 나그네라고 고백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자처했던 것은 이 세상이 그들의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이 세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본향을 찾아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이 세상을 거스르지 않을 수 없고 이 세상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는 사도가 말한바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갈등 관계와 유사한 것입니다. 그런 유사한 갈등 관계가 참다운 성도가 되고 싶은 신자와 그리고 이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것이라고 하는 결론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참다운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설탕처럼 환영을 받는 사람은 이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참된 신자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참된 신자는 이 세상에 소금과 같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 맛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성도다움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물질의 축복을 내려주시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서 순종하려고 결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섭리의 지혜로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을 고난당하게 하시는데 그 놀라운 섭리 가운데 하나는 성도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려고 할 때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음으로서 성도는 이 세상의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 된 길을 방황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탕자처럼 사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었다는 것을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소망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도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게 되면 그때 우리는 앞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서 깨닫는 것보다도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철저하게 소망이 없는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곳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내 집이 아니라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에 불과하며 우리의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이 하늘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사랑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대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고 보이는 것들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중요한 사명들을 우리들이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고난을 당할 때 참다운 신자인지 아닌지 하나님이 그 고난의 불을 통해서 신자들을 가려내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신자들을 가려내시는 방식이 두 가지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 죄로 인해서 타락했을 때는 하나님이 징계로 그들을 부르심으로 징계로 하여금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실 때 비록 예전에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방탕하게 살았어도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 앞에 참다운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 고난 속에서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참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 주님을 위해서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이 진짜 참된 신자가 되고 싶어 하는 성도라면 그 고난을 당할 때 철저하게 이 세상이 얼마나 사랑할 수 없는 곳이고 이 세상의 영광과 눈에 보이는 죄의 아름다움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이 하나님뿐이시며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미련을 둘 수 없는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그 고통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살려고 했더니 하나님의 즉각적인 위로와 축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이 주어졌습니다. 원수가 에워싸고 그리고 자기를 핍박하는 대적들이 자기를 둘러쌌습니다. 시인이 만약에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순종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원수들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그를 위하는 동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따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 그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세상은 시인을 박해하고 원수들이 이 시인을 에워쌌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잘못한 것이 없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원수에 의해서 압제를 받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매우 괴로워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 섭리는 후회가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 섭리는 우리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 같아도 아주 정교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윌리엄 헨드릭신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자신의 주석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섭리의 계획은 비단을 짜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비단을 짜는 것을 보셨는지 모르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그 동리에 방직공장이 있어서 비단이나 이런 것들을 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비단을 짜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다 손으로 짰지만 이게 무늬들이 그려지는데 그 무늬가 위로 올라오는 게 아니라 밑으로 갑니다. 그래서 위에서 보면 실밥들이 나오고 지저분해서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데 밑에서는 아주 정교하게 학이 날아가고 시냇물이 흐르고 이런 그림의 자수가 놓여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생에 대해서 행하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때는 우리들이 잘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는 잘 알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합력해서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밑에서 정교하게 짜나갑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서 그 비단짠 것을 뒤집어놓고 보면 정말 그때는 이게 왜 그랬는지 모르는데 아주 정교하게 수가 놓여진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이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것 같으면 섭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아봐야 합니다, 시인이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수들에 의해서 에워싸이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고 할 때 박해를 당하고 고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특별히 여러분들 중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고난을 당하고 끝없이 박해를 당하는 가시밭길과 같은 인생을 지나는 여러분들에게 나는 오늘 주님의 자비한 마음을 품고 여러분들에게 격려합니다.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가십시오. 지금은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지금은 비록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고 나에게 이 땅의 진귀한 자원들로 복 주셔서 내 원수들을 부끄럽게 하시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 안에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그 계명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너무나 어여쁘게 보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모든 고통가운데서 주님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강건하게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동안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너무나 쉽게 사랑해버렸을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티끌만큼도 죄가 없는 순전한 상태에서 창조되었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탁월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이었고 영적인 축복을 누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동산 가운데 친히 임재 하셔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시던 사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을 싫증을 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가는 것에 싫증을 내고 그래서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하는 뱀의 꿰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파멸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죄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싫증낼 수 있고 그리고 그분께로부터 멀리 떠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우리 자신들이 지은 불순종과 죄에 대해서 너무 애매모호한 견해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죄를 짓고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참회하고 자신의 죄를 인해서 손상당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통증을 느끼는 대신 오히려 자신도 피해자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행사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어떤 연약함,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정직하게 구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자기도 피해를 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참회하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보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 값싼 동정들이 우리로 하여금 부당한 자기 사랑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종되었을 때 다시 돌아가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탁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했던 어거스틴의 이야기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론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그 의지가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이 주권을 가지고 그 의지를 결정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자신이 죄를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했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인간의 이 의지는 이제 노예상태가 되었습니다. 노예상태가 된다고 할 때 그 의지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입니다. 죄가 그를 노예상태로 만들어서 그래서 노예상태에서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억압받는 의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억압받는 의지가 되었는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모든 인간들은 그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지만 혹시 인간이 그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선한 것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의지적인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의지가 죄에 의해서 속박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죄가 그 의지를 붙들어 맸기 때문에 노예상태로 그를 속박했기 때문에 의지가 자유롭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날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래서 결국은 그 인간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가 하면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그러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죽었던 죄인들입니다. 그렇게 이미 영혼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영혼이 그렇게 죽어있는 영혼이니까 아무 일도 못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어있는 영혼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데드 웍스’ 죽은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인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그렇게 영혼이 죽은 인간이 죄를 택하고 욕망을 따라 살므로 죽은 행실을 행하는데 있어서 그러면 그 인간이 의지의 노예의 상태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자유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불순종해서 죄를 짓고 무슨 어쩔 수 없이 자기도 피해를 본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행사를 하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 살아온 인생의 날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 이러이러한 훌륭한 일을 하셨군요. 하나님 저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데 그것은 정말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이 주석을 열심히 쓰셨는데 마지막 출판 기념회를 할 때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내 주석을 읽다가 성경을 잘 해석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틀린 것이 있으면 그것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사상을 기가 막히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된 다음에는 어떻게 된 것인가? 신자가 되면 근본적으로는 의지의 자유상태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 죄와 사망으로 억매였던 우리의 영혼을 생명과 사망의 법으로 해방시켜놓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남습니다. 예전에 타락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죄가 티끌도 없는 무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의지가 완전한 자유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죄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단서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분이 공급해주시는 은혜의 능력 안에서 살 때 그때 의지의 자유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신자가 되었는데 그렇게 안 살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안 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입니다. 그것도 지금 이것에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 두껍습니다. 그런데 참 너무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오래간만에 감동을 시켰습니다. 성도들이 그 책을 엄청나게 그 책을 사갔습니다. 나는 별로 안 사갈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두꺼워서 베고 자기에나 적합한 책이니까 안 사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성도들이 와르르 와서 사서 거의 다 팔렸습니다. 그런데 참 너무 착합니다. 사갔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 커다란 격려가 됩니다. 정말 격려가 됩니다. 베고 잘지라도, 그런데 어떤 성도들이 나에게 격려를 줍니다. 200페이지를 읽었습니다. 150페이지를 읽었습니다. 300페이지를 읽었습니다. 정말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읽으면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영어도 나오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도 나오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본문만 읽으십시오. 여러분들이 다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실제로 순종하면서 살아보려고 할 때 경험했던 것이니까 펼쳐놓고 한번만 여러분들이 정성을 기울어서 읽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모든 신자의 의지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든지, 축복을 주시든지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십니다. 다만 예전에는 아무리 의지를 가져도 의지가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공급해주시면 이 죄가 계속 죽고 은혜가 살아나서 의지의 자유상태가 최대한으로 확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으면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으면 나는 살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으면 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나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 예배도 안 드리고 요즘 주일 성수 개념이 매우 희박해졌습니다. 주일날 야유회나 다니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어떻게 하늘나라에 가겠습니까?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습니다. 주일날 벚꽃 피는 것이 여러분하고 뭔 상관이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고 놀러가는 사람들,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뭐 하는 것입니까? 지금 그렇게 해서, 온 마음을 다해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써도 어두운 이 세상을 이길지 말지인데 그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사는지, 봄이면 봄바람 타고 여름에는 놀러가고 가을에는 가을바람을 타고 겨울에는 추워서 들어앉고 언제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까? 웃음이 나옵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게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까?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세상이 그리우면 세상으로 돌아가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입니다. 살아야 얼마나 더 살기에 그렇게 합니까? 모든 것들이 다 죄의 작용들입니다. 그게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까? 그 연약함에 자신이 피해자입니까?
정직한 참회가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와 위로를 주십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죄를 짓고 더러운 인생을 산 사람이라도 참회하는 자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살려고 할 때 온통 대적들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가 반발하고 우리밖에 있는 나쁜 불경건한 친구들이 우리를 따돌리고 죄 많은 이 세상에 우리를 이방인 취급하고 환경과 상황이 일어나서 우리를 박해하지 않겠습니까? 시인이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해보십시오. 내 안에 왕성하게 일어나는 죄에 순종하고 불경건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서 세상과 야합하고 그렇게 바람에 떠밀리듯이 그렇게 연약함을 빙자해서 제 멋대로 살아가는 일생을 산, 성도와 매일 매일 주의 말씀을 붙들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주의 백성으로 부르신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분투하는 원수와 대적들이 에워쌀 때 그때 낙심하는 대신 아,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린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모든 불순종, 모든 죄악 이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있습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분투하고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당하셨던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래서 이 세상을 미워하고 그래서 마음속으로 입술을 깨물고 다짐합니다. 이 세상이 주님을 어떻게 대우했나. 주님의 얼굴에 주님을 때린 이 세상의 손과 어떻게 악수할 수 있을 것인가. 주님의 얼굴에 침 뱉은 이 세상과 어떻게 입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고치기 위해서 사는 그런 세상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시인은 더욱 하나님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하기를 이런 원수와 대적들에게 에워싸일 때도 자기는 주님의 증거,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고난 받는 날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주님을 붙들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약합니다. 흔들립니다. 약하고 흔들리는 것과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주님을 배신하는 것은 똑같은 게 아닙니다. 시인도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이 얼마나 어린아이처럼 간절하게 주님께만 매달렸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을 강한 자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약한 자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종이 상전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그렇게 바라는 것처럼 이 시인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은 실제로 그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이 에워쌀 때 시인은 두려웠고 대적들이 에워쌀 때도 시인은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그렇게 고난당하는 날에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외톨이가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분투하는 동안에 오히려 깊이 좌절하고 원수들의 먹이가 되는 것 같은 그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에 주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살아도 되는 때가 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형통할 때는 형통할 데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하고 또 고난이 오면 고난이 올 때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섬기는 일에 번영과 성공이 오면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하고 계시의 말씀이 풍부히 전해지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주님을 꼭 붙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건 하나님께 도움을 갖지 않은 때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상적인 때와 구별된 특별한 시험의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시험의 때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원수에게 시험을 받음에 있어서도 원수가 우리를 해치기 위해서 활동하지 않는 날이 없지만 집중적으로 우리를 공격할 때가 있고 그리고 또 우리 안에 우리 정욕이 활동하지 않는 날이 없지만 특별하게 왕성하게 일어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시련이 오지 않는 때는 거의 없지만 이 모든 것이 함께 합력하여서 우리를 삼킬 듯이 길길이 뛰면서 폭풍과 그리고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우리의 영적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가고자 역사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시험의 때입니다. 그때 특별히 하나님 앞에 특별한 방식으로 그때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창조의 섭리에 보면 때가 되면 먹어야 되고 밤이 되면 자야 됩니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거스르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시험의 때가 오면 먹고 자는 것이 창조의 섭리인데도 배고파도 먹지 말고 잠이 와도 잠을 쫓으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특별한 때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는 순종하면서 살려고 할 때 핍박이 왔는데 바로 그 때가 그런 특별한 때였습니다. 그 특별한 때 시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했는데 주님은 도와주는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는 내가 나그네 취급을 받고 원수들은 길길이 뛰고 대적들은 일어나서 내가 외로워졌으니 이제 내가 이만큼 한 것만 해도 나는 굉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말씀에 붙든 손을 놓고 세상과 야합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마치 고난 속에서, 핍박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은 벼랑 끝에 늘어진 밧줄을 붙들고 매달린 것과 같습니다. 밧줄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분투하며 그 절벽을 올라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밧줄을 붙든 손이 너무나 아파서놓고 나면 밑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거기에 빠진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순종하려고 했는데 고난이 왔습니다. 주님의 즉각적인 도움은 없고 원수들은 일어나고 대적들은 길길이 뛰어서 그의 영혼은 매우 위험한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인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그분을 원망하거나 혹은 그 시험 가운데 스스로 부패해서 죄에 빠지는 대신 올곧은 믿음을 가지고 이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굳게 붙잡아야지 될 때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주의 증거 안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로 결심하고 더더욱 그 고난과 박해 속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섭리 속에서 당신을 사랑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성도를 고난당하게 잠시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차라리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아버지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차마 보시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더욱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순종하며 당신만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아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그 사랑하는 성도들을 고난을 당하게 놔두십니다. 그 고난 속에서 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강해지고 잘 몰랐던 이 세상에 대해서 더 분명히 깨닫고 마지막에 남아있는 세상사랑의 찌꺼기를 털어버리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번영할 때나 그리고 핍절할 때나 주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들을 배워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난이 겹치고 핍박이 가득할 때 많은 믿음의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그분은 티끌만한 죄도 없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었고 일생을 사는 동안에 행동으로는 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거나 불순종한 적이 없는 착한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갔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죄도 없고 욕심도 없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을 아버지께로 구원하시는 그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고난과 핍박, 원수와 대적들에게 에워싸인 생애였고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버림받으신 생애가 아니셨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분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성도의 일생은 예수 생각의 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래서 고난과 그리고 시련, 그리고 박해의 나그네 인생길을 지나 구름 같은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늘나라에 서있을 때까지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의 길을 가시고 당신이 순종하시고 불순종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그래서 주님 없이 아무렇게 나 살아가는 짐승 같은 우리들을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그분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고난은 그분이 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혀 허리에 창 찔려 피 흘리고 죽어 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셨고 그리고 당신과 당신에게 붙은 우리 모든 주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미덕의 삶을 살아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할 날을 꿈꾸며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게 우리 주님의 일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려고 하면 고난이 있습니다. 축복은커녕 시련이 꼬리를 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가 받는 이 고난과 이 시험의 고통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과거에 받은 사랑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또 지금 우리가 받는 이 고난의 큰 것이 이 고난을 이기고 나면 나중에 받게 될 장차 나타날 승리한 자에게 주실 찬란한 영광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다가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비유하자면 말씀은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붙들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튜브입니다. 지금 오늘 여러분들이 인생의 고난의 바다에서 붙들고 있는 그 튜브가 무엇인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계속 소금물을 먹으면서 그러면서 괴로워만 하지 말고 이 구명선을 붙들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붙들고 그리고 이 고난의 때, 시험이 많은 때 순종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핍박과 시험이 가득 찬 이때 더더욱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되 끝까지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시인은 일시의 불순종을 인해서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말하기를 말씀을 지키지 아니한 궤사한 자를 인해서 자신이 슬퍼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입니다. 시인이 비록 고통을 받고 핍박을 받았지만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하찮은 자 취급을 받으며 더러운 인간들에게 짓밟히는 박해받는 자의 삶을 살지만 그 모든 박해하는 자들이 시인의 이 내면의 세계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육체만 멸할 뿐 영혼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이 세상 주관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우리와 육체의 영혼 모두에 대해서 관할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자신뿐이라고 우리를 격려하셨습니다.
시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원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핍박하는 자들이 그를 대적했으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은 곤고하고 시련을 당하나 눈에는 갈 길이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시인을 인정해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친절하심을 시인에게 정절을 지키는 어린 신자와 같은 시인에게 당신의 기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내면은 깨끗하고 순결해서 하나님을 향한 다스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다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원수의 박해와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피눈물이 흘렀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면에서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놀라운 신령한 기쁨이 그로 하여금 흐느끼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힘이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바로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 주님을 거스르며 육신의 쾌락을 쫓아서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핍절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권력자고 세상에서는 자기가 하찮은 자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나의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업수이여김을 당하고 짓밟히는 그 현실을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라는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신자의 일생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현자의 일생이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창조하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그 눈에 비늘을 벗겨주고 어두운 마음에 그 빛을 비추어주면서 그래서 그들도 이 빛 가운데 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은 전도를 잘 하지 않는데 여러분들은 중요한 특권 하나는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영혼에 불이 꺼져서 어두운 사람이 그리고 지성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 우리도 예전에 그렇게 어두움에 매어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고 빛 가운데 살고 싶어도 빛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나 그렇게 살 힘이 없었고 또 걸어가고자 하나 그 길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등불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심으로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어두웠던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여러분들이 가서 그 어두운 마음에 불을 밝혀주는 도구가 되기만 하면 어두운 눈감은 그 지성에 빛을 밝혀주는 그 도구가 되기만 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여러분들처럼 주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사람들이 이 속에 너무나 많습니다. 진짜 우리에게 이웃을 위한 슬픔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게는 우리 안에 들지 않는 또 다른 양들이 있어서 나는 저들도 인도하여 우리 안에서 있게 하여야 할 텐데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잠깐입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눈물흘림을 당하며 며칠 더 걸어가는 길도 이제 우리의 일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나 같은 죄인 어떻게 구하셨는지 생각해보고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인생의 고난의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랑의 품안에서 쉬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아직도 알지 못하는 창조의 목적에 눈뜨고 사람답게 살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순종하며 살아갈 때 고난이 올지라도 주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말씀을 더 끝까지 붙들어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시련의 때, 핍박의 때를 네가 믿음으로 인내하였으니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주님의 인정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이기고 또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1. 마음을 낮추시는 기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넓게 보면 인생 전체가 광야의 길입니다. 광야라고 하는 것은 길이 있어서 가는 그런 곳이 아니고 걷는 곳이 길이고 무엇인가 필요한 것들이 결핍되어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뜨거운 햇볕이 있고 밤에는 추위가 있고 맹수의 위협이 있고 뭔가가 원하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우리를 안락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그런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 광야에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인생 전체를 넓게 보면 그 광야가 곧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좁게 보면 특별히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할 때에 정말 그 삶이 광야가 됩니다.
모세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모세가 애굽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계속 살았더라면 그 인생에는 광야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고 그리고 새 삶을 시작하니까 그다음에 광야가 된 거죠. 그래서 모세를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게 사실 광야에 있을 때도 광야가 아니었거든요. 미디안에 광야에 있었지만 그러나 광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사명을 받아서 들어가니까 진짜 광야가 펼쳐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특별한 광야가 됩니다. 근데 그 광야에는 참 그 어려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 광야의 길을 걸을 때 어려운 것이 참 많습니다. 모자라는 것도 많고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사역을 해 나가다가보면 광야를 지나는 것같이 외로울 때도 있고 어려움들이 많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가 미션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증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종종 사명의 길을 이렇게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원망과 불평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범죄 하던 것들과 같습니다. 광야의 길을 지나면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정착된 생활을 할 때에 누렸던 것들 중에 못 누리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죠? 하긴 뭐 텐트를 치며 이동하며 사는 광야의 행군인데 거기 가전제품이 있을 리가 없고 우리의 삶을 편의롭게 할만한 그런 편의도구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광야는 원래 고기국 먹는 곳이 아닙니다. 거기서 정력에 좋은 마늘, 외, 그리고 또 고기국 그런 것들을 찾고 생각하니까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너무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거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광야의 길은 가나안을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 걸어가는 곳이지 당장 그곳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걸어가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각자 부르심을 받아서 살아갈 때 우리 사역의 현장 자체만 바라보면 참 불평할 것이 많습니다. 뭐도 없고, 누구도 안 도와주고, 어떤 것도 없고 하면 그 괴로울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항상 우리의 눈을 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때 마지막에 이 모든 수고로운 짐을 벗고 주님을 만나게 될 그런 소망을 가지고 우리들이 매일 매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만나는 특별한 괴로움, 특별한 어려움 이런 것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첫째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라는 거죠. 여기서 시험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럴 듯 해 보이는 물건을 이렇게 충격을 가한다든지 껍질을 벗긴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어적인 의미가 그래서 시편에도 보면 바하한이라는 단어인데 자기를 그렇게 시험해 달라는 기도가 시인들의 기도 속에서 가끔 나옵니다. 그런 내용들이 가끔 나옵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들을 했던 이유들도 뭐냐 하면 자기를 그렇게 시험해서 그 온전히 하나님이 드러내셔서 그래서 정직하게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랬던 거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마음을 하나님이 시험하신다. 마음을.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했고 인간의 모든 생각을 아시는 분이시라고 했는데 시험을 하실 필요가 뭐 있는가?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모르셔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알게 해주시는 목적이 있는 거죠. 또 마음과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 어느 정도 괴리가 있을 수 있거든요. 마음으로는 불순종하는데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이 삶의 껍질이 그렇게 돼 있어서 자신도 마음 깊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거든요. 그럴 때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있는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마음을 충분히 드러나게끔 하셔서 허울 좋은 껍질까지 다 깨뜨려버리게 하셔서 죄인으로 하여금 명백하게 자기의 안과 밖이 모두 하나님을 향해서 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야지만 그가 돌이킬 수 있을 것이 때문이에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속에 있는 잘못된 마음들이 충분히 솟아 나와서 그럴듯한 삶의 껍질들을 부셔버리고 그리고 자기가 온전히 드러나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었던 거죠. 어쨌든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떠한지를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오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역경이 오고 때로는 섬기며 살아가는 사역에 커다란 위기가 오고 눌러오는 그 압박감이 우리를 갈갈이 찢어 놓을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 누구도 나를 돕는 자가 없고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처절한 외로움에 휩싸일 때,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섬기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시험하시는 때는 완전하지 않고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에 성령님을 통해서만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와 유혹 이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시험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여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과 악은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따라 다녀요. 시험에 들면 대개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면 대개 악에 빠지게 되요. 그래서 때로는 그 시험 속에서 시험 자체보다도 더 커다란 악에 빠져서 그래서 좌절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이 생기고 왠지 내 사역에 진전이 없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 같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영혼들이 자꾸 미끄러지고 회심이 없고 지체들이 강퍅해지고 또 내가 하나님의 일을 뭔가 수종 들려고 하는데 자꾸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고 내가 하는 일에 자꾸 잘못이 생겨서 교회에 누가 되고 지도자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지체들에게 손해를 주고 이런 일들이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일어날 때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때에요.
이때에는 꼭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낮추는 거예요. 낮춘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절대 의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하고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내 사명도 없고 내 섬김도 없고 내 인생도 없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마음에 문제가 있을 수 없어요. 문제가 있을 수 없죠. 무지해서 죄를 보지 못하고 뉘우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하나님께 복종된 마음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없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어나는 사역의 상황을 잘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유능함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 유능함을 가지고 모두 해결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들이 만나게 되는 어려움 앞에서 우리 내적인 요인들, 즉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깊이 직시하고 그것을 알도록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의뢰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때때로 잘못이 있다고 할지라도 진실해져 가는 것이에요. 마음을 관찰하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르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에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는 거죠.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을 우리를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 광야의 길에 들어서게 하십니다.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그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거든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말이죠. 대개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은 하나님을 향한 의뢰의 마음의 결핍에서 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순종하지 않는 겁니다. 근데 이렇게 하나님이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홀로 버려두셨느냐? 그렇지 않거든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아침마다 만나를 먹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정말 불순종할 때가 되면 이상하게 어떤 절망감 같은 것들이 확 밀려오면서 이렇게 아주 명백하게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우리를 버리지 않고 계시다는 증거를 철저히 외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름기둥 앞에서 원망하고 불기둥 앞에서 범죄하고 만나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그래서 하나님이 순종하는 길을 시험해보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축복은 순종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 이 두 가지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이거든요. 마음이 부드러운 상태가 되면 순종을 잘 하지요. 그래서 잘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돼야 되는데 사실 우리들은 자신은 별로 불순종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자신은 뭐 별로 그렇게 크게 하나님 대적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렇게 길을 걸어가잖아요. 뚜벅뚜벅 걸어가요. 걸어가는 걸음을 보면서 그 사람이 엄청난 힘을 들여서 빠른 속도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가다가 한눈을 팔다가 벽에 한번 부딪히든지 하면 머리가 터져서 피가 나고 가다가 뭐 걸려서 넘어지면 동그라지면서 다리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그때 비로소 얼마나 이 걸어가는 힘이 강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생긴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굉장히 고집스러워요. 자기가 생긴 그 성품,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리 원하시고 사역이 아무리 내게 원해도 나는 이렇게 밖에 못한다 하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삶의 발자취가 아주 굉장히 완고하고 강력한 겁니다. 웬만큼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바꾸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마음이에요. 이게 불순종하는 길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불순종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알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분명하게 우리가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불순종하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섬김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이렇게 섬기면서 살 때에 하나님이 강력한 시련을 주셔요. 사역의 위기도 주시고 그 다음에 사역에 크게 실수를 해서 그래서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도 만드십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르지 아니한지, 또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거기서 깊이 돌이키고 새 삶을 살게 하시죠. 하나님은 일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을 시험하실 때에 지혜롭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꾸고 또 불순종하던 삶을 돌이켜서 하나님께 칭찬 듣는 그런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2. 저주란 무엇인가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신28:15)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주의 설교가 우리에게 하나님 밖에는 어떤 복도 없고 그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모든 인간의 삶이 얼마나 현저히 어리석은 삶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저주라고하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걸음 더나가서 하나님이 복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란을 당하거나, 몸이 망가지거나, 불행한일들이 계속 일어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거두어 가시는 일들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 그런 개념이 비치기는 하지만 본래 성경이 말하는 저주의 중심에 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흔히 동서양 사상에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선징악의 개념에서 온 그런 저주입니다. 우리 토속민담 같은데 보면 거의 권선징악적인 내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동서양이 마찬가집니다. 선하게 산사람들은 잘되고 이웃을 괴롭히고 악하게 산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불행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성경으로 들어온 겁니다. 성경에 보면 계시를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주님이 그걸 주신 목적은 사람들이 이해하게 하시기위해서 주신 겁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에 맞게 이야기를 해야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때문에 성경 속에 그런 개념들이 들어온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똑바로 안 살아서 복수를 하신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성경구절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게 됩니다.
권선징악적인 구도를 가진 인간에게 저주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데 그것을 기록하는 시각은 인간 편과 하나님 편을 오가면서 기록이 되는 겁니다. 계시를 전달해줌에 있어서 하나님 혼자 써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행동을 보고 느낀 것을 쓰게 하셔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심히 분노 하셨더라.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 하셨더라. 이런 것들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성경 속에 묻어 들어오게 된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저주의 개념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칼을 들고 복수하신다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 것은 자원이 딱 끊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축복과 저주가 상대적인 개념이 되는 겁니다. 그가 가는 방향을 기뻐하시지 않으니까 하늘의 자원이 끊겨져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집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인격적인 따뜻한 교제가 끊어지게 됩니다.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의 공급이 끊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저주의 개념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모든 사람이 젊은 날에 요절하거나 큰 불행을 만나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삽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먹을 것이 없어 돈을 꾸러 다니고 그러진 않습니다. 거스르고 악하게 살아도 잘 살수 있습니다. 저주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칼에 생명을 날려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끊으시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악인 번성함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악인은 번성해도 그것이 번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자원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 땅 에서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번성한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자원이 끊어진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겁니다. 그래서 땅의 자원만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식물과 꽃을 좋아하지만 절대로 돈 주고 안사는 것은 선인장입니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선인장이 가시가 아니라 잎이었는데 습기가 없는 곳에서 자라다 보니까 잎이 가시로 변한 거랍니다. 인간이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이 함께 공급되어야지 제대로 된 삶을 살수 있는데 하늘자원이 끊어져도 살기는 삽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모습이나 삶의 방식이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하늘은혜가 끊어진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원이 끊어진 상태이고 그 속에서 인간은 고통 합니다. 혹은 거기에 적응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서 사는 삶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불러 주신 목적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사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땅의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자기사랑의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이 깨트려져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것은 흙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두 자원 중 이 땅의 자원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줄 수 없고 강물이 주변에 있는 흙들을 적시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과 같이 서로 강이 되어 사랑하면서 즐거워하게 됨으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게 되고 상대방의 자원이 내게 흘러옴으로 행복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세리들도 그건 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충분히 그 사랑을 내게 다시 흘려보낼 수 있다고 한다면 저 사람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내가 흘러가면서 적셔야할 마른땅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나는 많이 사랑하는데 상대에게서는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심지어는 선을 행하는 내게 악을 행해서 고통을 주는, 심히 건조하고 마른땅에 더 많은 사랑이 흘러 들어가서 정상적인 사람이 되도록 회복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빼앗기듯이 흘러 들어가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원이 있기 때문에 흘러 갈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계속 고쳐 져가는 겁니다. 한번에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 과정과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고쳐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자원과 땅의 자원의 끊임없는 공급을 통해서 적시면서 흘러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인데 이 자원이 끊어지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늘의 자원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가 신자라 할지라도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 이 많은 땅의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주위의 행복을 위해서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강으로 흘러가야할 자신이 다른 사람의 하늘과 땅에 있는 자원을 빼앗는 아주 메마른 땅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 속에서도 살아남는 겁니다. 그렇게 남아서 자원이 끊어진 상황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악의 삶입니다. 악 그 자체는 선행이기도 하지만 자원의 부족에서 오는 실체입니다. 그러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자원을 빼앗고 고통을 주는 겁니다. 다른 것이 저주 받은 삶이 아니라 바로 그게 저주 받은 삶입니다. 일생을 길게 살았는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적이 있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겁니다. 이 땅에서 생존해 남아 하늘의 자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제한된 땅의 자원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면서 산겁니다. 그가 지나간 모든 삶의 궤적은 끊임없이 폐수를 끌고 지나가면서 산 삶입니다. 감당 할 수 있는 자원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폐수가 들어가서 다 황폐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게 사악한 삶입니다. 사악한 삶은 자기가 선택하기도 하지만 자원이 부족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노가 쌓여가는 겁니다.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그의 인생 전체를 심판하게 되는 겁니다.
의지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서 나를 죽이고 하나님 밖에 있는 어떤 행복도 꿈꾸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순종한다고 해서 갑자기 세계최고의 갑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자원이 부어집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엄청난 자원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게 만드는 내적인 은혜의 자원들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자원의 한도 내에서 사람들을 적시면서 흘러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면 하나님이 더 많은 자원을 누리게 하십니다. 한강이 가장 큰 강이지만 제일 예쁜 하천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예쁜 작은 개울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참된 인생의 가치는 인간의 외향에 있는 외면적인 양 테 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안에 행복이 있고 그 분 밖에 있는 그자체가 저주라 이겁니다.
계명과 순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