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아라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오래 참음(약5:10) 2006.1.16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인정받기(약1:12) 2006.1.17 새해말씀사경회(새벽) 8
3. 정금같이(욥23:10-12) 2006.1.18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5
4. 금보다 귀한 연단(벧전1:6-7) 2006.1.19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3
5. 예수 참음에 동참하여(계1:9) 2006.1.20 새해말씀사경회(새벽) 33
1. 오래 참음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약5:10)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본문은 우리에게 참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배경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당시의 초대교회가 있었는데 이 글을 쓴 야고보 선생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 아픈 현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이 사회적인 지위와 물질의 소유에 따라서 사람들이 법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예제도도 있고 그랬으니까 사람들이 더더욱 그런 사람들 간에 계급 같은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있고, 자유인이 있고, 노예가 있고, 또 자유인 중에서도 돈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대부분 돈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거론된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들은 이미 벌써 차림새나 모든 것이 틀립니다. 들어오면 교회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고 편안한 자리에 앉으시라고 이렇게 하고 가난한 사람이 오면 앉아계시든지 서계시든지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연스럽게 가난한 자들 속에서 불평이 교회 안에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야고보 선생이 제일먼저 교회를 향해서 책망을 하십니다. 신자들을 향해서 특별히, 교회까지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아주 강경한 어조로 책망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어조를 뚝 떨어트려서 누그러뜨리면서 그렇게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지체들을 향해서 이제 야고보 선생이 권면하는 대목입니다. 그게 이제 제가 읽은 7절부터 뒤로 쭉 이어지는데 오늘 설교 내용은 이제 그 중에 한절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원망하지 말라. 교회나 지도자나 그런 교회의 상황이나 원망하지 말라. 그러면서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받고 그 일은 성경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어조이기는 하지만 그러지 마라. 그러면서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타이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아주 뼈가 있게 원망하지마라. 그래야지만 너희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상황을 인해서 성도들이 불평하고 막 이렇게 원망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앞에서 이야기했던 야고보 선생이 그렇게 교회에서 잘못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막 엄청나게 거의 신자 취급도 안하다시피 그렇게 질타를 하면서 그러면 정작 그렇게 고통을 받은 지체들에 대해서는 위로를 해야지 그들에게도 원망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그러면서 강하게 또 이쪽에서 대해서도 그렇게 경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과 관계가 있는가 하면 지금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사실 야고보 선생이 이런 식으로 충고를 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야고보 선생이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을 때, 이 참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 참는다는 그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면 참으면 더 커다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참으면 더 커다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목욕탕 같은 곳에 가보면 여탕이야 별로 그러지 않겠지만 남탕에는 가끔 온 몸에 문신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여탕에도 계신가요? 그런데 전신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어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문신을 하고 들어오는데 대게 그 문신은 용 같은 것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궁금한 게 있었는데 저렇게 하다가 저것을 만약에 지우고 싶으면 어떻게 지우나. 비누로 해도 안 지워질 것인데 살을 바늘로 찢고 거기에다가 특수 잉크를 집어넣는 것인데 그게 안 빠집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이태리타월에다가 비누를 묻혀서 열심히 닦아도 그 문신이 안 지워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의 몸에 그런 문신이 있는데 지워버리고 싶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의사를 찾아가거나 아무튼 지우는 방법이 마땅히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첫째 둘 중의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냥 산다. 두 번째 칼로 확 깎아버린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 끝나고 오십시오. 온 몸에 등판에 다 새겨졌는데 그것을 다 깎아내면 어떻게 하라고, 마치 회를 뜬 광어 뼈다귀처럼 될 것인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다른 사람의 몸과 자기 몸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의 몸은 안하는 것입니다. 여기 혹시 몸에 어떤 잉크나 오물 같은 것이 묻어서 닦아내는데 비누로 닦고 이태리 타월로 문질러도 안 지워지면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둡니다. 그 다음에 다시 닦고 또 다시 닦고 그래서 일주일이나 닦아내지 출근해야지 되는데 안 지워지네, 어떻게 하지, 칼을 가지고와 그래서 떠내지 않습니다. 회 뜨듯이 떠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야고보 선생이 얼마나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고통당한 지체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신앙으로 이겨라. 그러면서 타이르면서 하나님이 너희들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하면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 신앙생활을 해나가다가 보면 우리들이 보기에는 부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좋아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딱 잘라서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에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그 모든 사물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라서 우리들이 원하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만 우리를 데려가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지 않은 사물의 질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질서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너무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이 질서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질서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랑을 하면 눈에 콩꺼풀이 씌워서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에게서 정확하게 단점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식들에게서 단점을 발견하는 것은 노력을 별로 안 해도 됩니다. 드러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빠져있다고 하는데 자빠져있는 것도 보기 싫고 일어나서 게으름 떠는 것도 보기 싫고 모든지 다 사랑의 콩꺼풀이 다 벗겨지고 미움이 생겨나게 되면 단점이 잘 보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의 단점을 정확하게 보고 더군다나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더군다나 그것을 마치 남인 것처럼 벗겨버리려고 하는 것은 오물이 붙었는데 그것을 칼로 깎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안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이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질서와 밖에 사물에 있는 질서가, 자기 안에 있는 질서도 자기에게 익숙해져있고 자기 밖에 있는 사물들의 질서도 자기에게 익숙해져있으면 그 익숙해진 사물의 질서를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깨닫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사람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갈등을 일으키면서 자기가 반응을 할 것입니다. 자기가 싫은 상황 속에 들어가면 어떻든 반응을 할 것입니다. 화가 확 난다든지, 아니면 비슷한 말이지만 핏대가 확 난다든지, 아니면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든지, 아니면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든지, 심하게 폭력을 한다든지 뭔가 하여튼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면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도 모르던 자기 안에 질서의 정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생각 있는 사람은 깜짝 놀랍니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발견하기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럼 목사님, 그러면 자기 안에 잘못된 질서를 발견하게 되려면 결국은 생고생을 해야지만 겨우 발견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니 늘 설교말씀에 우리의 변화는 끝이 없다고 그러는데 우리 끝이 없이 생고생을 해야지 되는 것이 이게 신앙생활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들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고도 이제 깨닫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보다 더 원하시는 방법은 그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빛이 되어서 한편으로는 그런 사물들의 질서가 변하지 않아도 말씀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의 잘못된 질서를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말씀에 유익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그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질서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판단을 해보십시오.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고난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계기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되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상기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모든 경영이나 이런 것들을 좀 바꾸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찬양을 부를 때도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던 찬양이 자기가 어떤 상황에 들어가게 되면 그렇게 그 찬양이 사랑이 되고 들으면 눈물이 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유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고 그냥 고생만 했다. 그러면 이 속에서 막 마음이 아주 강퍅하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차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생을 많이 하면 할수록 마음이 모질어지고 완악하고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는 작용이 없이 환난을 많이 당하기만 한 사람은 굉장히 성품이 모질고 악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환난을 많이 만나고 고통을 받게 되면 처음에는 환난과 고통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어느 한순간에 내가 다 잘못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달구시는구나. 연단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깨트려집니다. 그때 많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것이나 사물들의 질서는 평안합니다. 크게 어려움이 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쭉 보니까 자기가 너무 추루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어서 그냥 마음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가슴이 저리도록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 사이의 고통의 차이가 있습니까? 대부분 간증할 때는 후자는 별로 간증거리가 안됩니다. 모든 게 평안했으니까 전자는 간증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사실은 마음에 느끼는 고통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으며 생활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환경의 아무 변화가 없어도 그 하나님의 말씀 그 앞에서 그 말씀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를 돌이키고 회개하고 진실하게 뉘우치면서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정욕적인 사랑을 다 토하고 그리고 순결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소유하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저나 신자 된 많은 사람들이 항상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상황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말씀으로만 하셔서 인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만큼 그 말씀이 그에게 깊이 스며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부대끼면서 자기에게는 결코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십니다.
이제 금속성분이 담겨져 있는 성분을 우리들이 광석이라고 합니다. 그 광석이 색깔이 여러 가지모양을 했습니다. 검은색, 회색, 별의별 색의 광석이 다 있지만 그 광석이 덩어리로 있을 때는 이런 색깔이어도 가루가 되어서는 색깔이 틀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긁어보는 것을 테스트 혹은 시금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느다랗게 줄같이 생긴 것으로 광석을 확 문질러보면 홈 사이로 광석이 깎이면서 가루가 들어갑니다. 광석 자체는 검은색인데 갈아서 보니까 하얀색 가루가 조은서에(?) 쭉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겉보기에는 그게 검은 것 같아도 사실은 잘게 가루로 빻아놓으면 원래 본질적인 색깔은 회색이라는 것이 발견이 됩니다. 그러니까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시험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한번 갈아서 우리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참음은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더 큰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데려가시기만 하지 않고 때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그런 사물의 질서 속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잘못된 마음의 질서를 보게 하시고 그리고 마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그런 마음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삶의 질서보다도 여러분들의 영혼 안에 마음 안에 있는 사물의 질서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변화된 본성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질서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고치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우리 주위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인간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삶의 상황은 요동치면서 바꾸어진 질서 속으로 드나들어도 그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것은 그런 환경에 의해서만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일 뿐이고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바꿀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싶을 때까지 참는 것은 그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참는 것은 자기가 참고 싶을 때까지 참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저히 참기 싫을 때, 참을 수 없을 때까지고 깊이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환경을 통해 충분히 자신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성도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이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이 도저히 볼 수 없는데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신자도 고난의 선물이 없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고난이 없이도 자기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순간순간 경험하며 살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아주 성숙하게 되면 사물의 질서가 조금밖에 변하지 않아도 그 작게 변하는 사물의 질서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큰마음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그런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신앙이 어리면 환경이 엄청난 변화가 와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생겨야지만 겨우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데 신앙이 깊어지게 되면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나도 그 속에서 그 환경을 통해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게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성도는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고난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 고난의 불을 통해서 이 속에 있는 이 거짓된 신앙의 찌끼들이 그 신앙의 연단 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지금 교회에 와서 이렇게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이제 굉장히 많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극받지 않았을 때는 자기 안에 뭐가 있는지 몰랐는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생기고 나니까 이 속에서 그것이 불길이 되어서 자기를 달구면서 여기에서 자기가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거짓된 신앙의 찌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입장에서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단하신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입니다. 누구도 고난의 불이 없이 좋은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정말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말할 수 없는 관심, 그리고 나의 모나고 그리고 부패함이 가득한 나를 순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이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말할 수 없는 애정의 표현이다. 고난을 통해서 아! 내가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내가 아프더라도 결국은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시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런 고통 속에서 참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서 오히려 아주 평안하고 모든 것이 잘되어갈 때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고 부패하기 짝이 없었던 사랑이 오히려 자기가 원하지 않은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막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도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가서 많이 아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위로합니다. 정말 위로합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것이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축복, 또 하나는 일반 섭리를 통해 주시는 축복, 사업이 잘된다. 애들이 건강하게 자란다. 아니면 내가 하는 사역이 잘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일반섭리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그 영혼을 만지시는 축복입니다. 그 영혼의 축복은 모든 뛰어난 섭리의 축복보다도 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로 고통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직접 그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가 이야기를 합니다. 고난 받은 선지자들로 본을 삼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인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일생을 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의해서 나의 좋은 선지자라고 불렸던 아주 친근하고 친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많이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들을 고난당하게 내버려두셨을까요? 아닙니다. 욥이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욥으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능력이 많으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사물의 질서를 하나님이 한순간에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신비한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그래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자기에게 고통을 준 상황, 고통을 주고 있는 사물들의 질서, 자기를 아프게 한 사람, 자기가 이렇게 고통 받는 원인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다 버리고 오직 나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서 이 모든 사물의 질서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런 제 이, 제 삼의 원인들에 대한 관심을 다 버리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이런 고난 속에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무엇인가하면 오히려 하나님, 내가 이제껏 까지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접하시나. 나도 한번 복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했는데 내가 여태까지는 내 밖에 있는 사물의 질서를 바꾸어달라고 기도하고 한 번 더 나아가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한번 바꾸시라고 그렇게 우리들이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번에는 한번 반대의 기도를 해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지금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말할 수 없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못된 내 안에 있는 질서를 가진 나를 보시면서 느끼시는 주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나에게 섭리 속에서 주신 이 모든 상황을 내가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것을 통해서 나의 무엇을 바꾸시려고 하시는지요? 제가 그렇게 바꾸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많은 고통들을 결국은 저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것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언제나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한숨에 고난을 물러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한 시간 정도 더 하고 싶은데 출근해야지 되지요?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깨트려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옥합이 그냥 있을 때는 아무 향기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트려지니까 향기가 가득 차고 깨트려지니까 그것을 예수님께 부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생각하면 막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픕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인간관계로, 그 아픔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그러면 사물의 질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영혼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모두 놓아주십시오. 그들은 모두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 앞에 있는 나밖에 없다. 하나님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질서를 가지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내가 원하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 마음의 질서를 가지고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살면서 내가 더 정결한 사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 그래서 내가 깎여지고 부서지면서 내 안에 예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제가 주님께 만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만족스럽지 않은 사물의 질서 속에서 내가 며칠 더 연단을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 나에게 더 많은 시련을 주십시오. 애들이 잘못해서 야단을 칠 때도 애들이 엄마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내가 잘못했지만 내가 맞을 정도는 아닌데 왜 나를 개 패듯 팹니까? 이러면 화가 납니다.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유를 대봐. 왜 그랬어. 아무도 핑계될 것이 없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정말, 그런데 참아야 합니다. 아주 참고, 또 참고, 참고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하고, 풀어주고, 놓아주고, 모두 그리고 아무 것도 미워하거나 맺히는 사람들이 없이 하나님 한분께 서서 하나님 제가 정말 이 시련을 통해서 저도 모르던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저를 정말 정결하게 만들어주십시오. 제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인정받기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12)
오늘 성경에 보니까 우리가 참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을 복이 있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우리가 동의해줄 수 없는 사람을 복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험을 당하는데 그 시험을 참는 자, 그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가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시험을 당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 안 하고 “시험을 참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깨달아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시험을 당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참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신자가 있는데 시험이 신자에게 다가온 모든 사람이 복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잘 참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무슨 복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속에 나와 있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이렇게 나옵니다. 아! 그러니까 시험을 당하는 것의 축복은 옳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구나.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옳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무엇일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물의 현상적인 질서 속에서 그 사람이 옳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서 그래서 사실은 그 사람이 옳은데 옳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서 그 옳지 않게 판단되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잘 제 자리에 돌려놓으시면서 과연 그 사람이 옳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시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이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옳게 했는데 그리고 하나님도 그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그 사람에게도 시험을 당하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들이 한두 마디로 잘라서 이야기할 정도로 많은 요인과 변수가 있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할 때 항상 나밖에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만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련된 사람들을 다루시는 그 속에 또한 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교회를 봐도 자기가 있는 자리에 따라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각각 다르고 또 직장에 있어도 직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이치에 따라서 생각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커다란 책임이 없이 회사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좀더 놓은 지위에 올라가면 생각하는 것이 좀더 입체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최고 책임자는 회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생각하니까 사람의 생각이 지위에 따라 각각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물들을 하나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함께 관여될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을 다루실 때 결코 하나님이 혼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홀로 다루시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전체적으로 다루십니다. 그 속에서 때로는 옳다고 판단되는 사람도 하나님이 측량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시험을 당하게 하시고 그 시험을 참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흔히 이렇게 옳은데도 시험을 당하게 된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들이 욥의 예를 듭니다. 또 어제는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을 우리들이 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욥의 고난과 우리들이 한번 가만히 보면 사실은 욥이 그냥 애매하게 고난만 당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욥을 사단에게 자랑하셨습니다. 동방에 한 의로운 사람 욥이 있는데 이만한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럴 정도로 정말 훌륭하고 순전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시험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는데 결국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과 친구에게 나타나셔서 그래서 욥이 옳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엄청난 환난과 시련을 당한 욥이 그 시련의 와중에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외적으로는 이런 고난을 당할 정도로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런 시험을 당하면서 자기 안에 자기도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에 보면 유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하면 사람들이 여행을 하다가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돌맹이 옆에 불을 피우고 거기에 뭐도 좀 끓여먹고 추위도 피하는데 이상하게 불을 한참 때니까 이상하게 바위가 오줌을 줄줄 싸더랍니다. 아! 참 이상하다. 바위에서 오줌이 나오나. 그러다가 불이 다 꺼지고 나니까 딱딱하게 굳었는데 속이 말갛게 들여다보이는 것이 단단한 바위 같아서 돌맹이를 던져보니까 딱! 하고 깨지기에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없을까? 라고 생각한 것이 이제 그 후에 생겨난 유리입니다. 바위만 볼 때는 바위에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지지 않았고 그 바위를 망치로 쳐서 깨트려본 들, 혹은 톱으로 썰어서 켜본들 그 속에 그런 유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느껴지겠습니까? 그런데 불을 때서 뜨겁게 하니까 그게 오줌을 싸면서 그 속에 유리성분이 있다고 하는 것이 입증이 된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욥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이다. 동방에 그런 순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욥을 착각하신 것이 아니라 욥을 그 외적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면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속속들이 순결하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후에 시험을 당하면서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서 거기에서 자기가 사랑하던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육신의 질병까지 얻으면서 거기서 욥은 자기 안에 형통할 때는 자기도 알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미래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뭐라고 하는 것입니까? 찌꺼기 많이 끼어있는 그런 금속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금은 금인데 찌꺼기들이 많이 끼어있는 그런 불순한 금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을 가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이 찌꺼기들을 토해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은 비록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해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 고난은 하나님이 그를 정결하게 하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사는 사람,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모질게 행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십니다. 학교에서도 보면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을 위에서부터 몇 명 끊어서 특별관리를 하고는 했습니다. 그 학생들은 집에를 마음대로 못 가게하고 공부시간을 늘리고 선생님이 특별히 관리를 하면서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서 훈련을 시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고 그래서 자신이 특별히 뭐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을 것 같은 경우에 옳아 보이는 경우에도 그의 속까지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그 고난의 불길 속에서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사람들을 고난의 불을 통해서 그렇게 토해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를 더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첫 번째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나는 신앙에 그렇게 크게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 할 때 생각을 바꾸십시오. 특수반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십시오. 공부를 잘해서.
(예화: 예전에 전도사 시절 때 어느 집사님이 자기 딸을 학교에서 안 보내주는데 그 이 유는 상위권에 있는 학생들은 잘라서 방과 후에 도서관에 넣어놓고 공부를 시키 고 밤이 늦어서야 보내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
특수반에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얼마 안 살은 인생길이지만 돌아보면 형통하고 행복하던 그런 때는 별로 남겨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면 말할 수 없이 시련이 옵니다. 어떤 때는 나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사느라고 살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고난이 닥칩니다. 아주 고강도의 고난이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때는 신자의 마음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하나님이 참 공평하시지 않다. 그러면서 눈에 나보다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웃고 떠들고 행복해하는 모습들이 막 떠오릅니다. 그래도 나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쾌락을 즐겨본 적이 있는가? 어디에 가서 한번 사치하고 방탕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는데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난이 찾아올까? 그러면서 자기의 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을 그런 쪽으로 막 하다가보면 이게 먹구름처럼 번져가면서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라는 고백이 안 나옵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은 다 옳고 저는 다 틀렸습니다. 이 고백이 선물이어야 합니다. 왜 틀렸는지를 모를 때도 일단 믿음으로 그렇게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시험을 참는 것이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게 되면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험은 하늘에서 그냥 욥의 경우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집이 부서져버리고 가축들이 다 탔는데 그러면 사실 누구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왜 양떼를 이렇게 돌보았나. 주님 우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럼 누구에게 할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않은데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환경을 통해서 오는데 대부분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자기를 그렇게 인정하지 않다가 보면 결국은 그것을 제공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죄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 특수반에 들어왔구나. 지금도 이렇게 보면 정말 알 수 없이 시험을 당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인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매우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지나게 하십니다.
두 번째 경우에는 옳다 인정함을 받는데 그 받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은 처음부터 틀렸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험을 주십니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잘못되었는데 잘못된 것을 이 사람이 알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고쳐도 그래도 올바르게 되기 힘든데 이런 작용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당하기 전에 이미 그 이전에 하나님이 수없이 말로 경고하십니다. 그러지 마라. 하나님이 말씀을 계속 보내십니다. 어느 때가 되면 시험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보내십니다. 그것을 알아들으면 견디기 힘든 고통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험에 기울게 되면 이런 객관적으로 자기를 고치시기 위해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자기의 마음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쇄신된 심령 속에 잘 들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고 쇄신한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모든 영혼의 어두움들을 물리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이성을 향해서 말씀을 건네시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고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쉬워집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시험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의 지성에 말을 건네셔도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설령 희미하게나마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토대로 삶을 결단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 번 말씀을 보내어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을 통해서 그가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게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고 그러는데 처음부터 잘못한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이 어떻게 옳게 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행한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행한 일보다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이후에 행할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게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면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어떤 원천을 가진 것입니다. 그 본성이 변화되면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러면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시험을 당해서 많은 고통을 겪을 때는 그가 잘못 행했지만 그 고통의 과정을 겪고 나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 그래. 네가 처음에는 잘못해서 나에게 시험을 당했으나 징계를 받았으나 그러나 이제는 네가 연단한 자가 되어서 그래서 깨끗하게 되었구나. 이제는 옳다. 이제는 네가 내게 인정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필요한 것이 참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이 세상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상대방이 혼자서 잘못했고 또 자기는 정말 순결한데 상황이 자기를 그냥 시험만 받게 하는 그런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항상 시험을 당할 때 그런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죽여도 욥과 같은 사람일 리가 없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니까 나에게는 그런 시험은 없다. 나는 아예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해도 내가 욥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마음이 편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기도하면서 아무리 자기가 원하지 않는 부당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여러분들이 근거 없는 비난을 받는 것 같고 혹은 여러분들이 추호도 이익을 누리지 않는데 여러분들이 비난을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오해와 비난, 시련, 고통 내가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가까지 물어주게 되는 억울한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나는 욥의 경우에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주 희귀합니다.
그래서 보면 부부가 싸웁니다. 요즘은 경제가 어려워서 많이 싸운다고 하는데 아내 이야기를 쭉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 남편이 점점 짐승처럼 여겨집니다. 그런 인간이 없습니다. 인간이 왜 그럴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당장 불러서 그러면서 이랬다며 하면서 그 이야기를 쭉 들어보면 어제 와서 연약한 척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얼마나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남편이 못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 여우처럼 느껴집니다. 그럼 늑대하고 여우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시간이 지나서 지혜가 생겼습니다. 뭘 이야기를 해도 겉으로는 다 들어주면서 일단 머릿속에서는 반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두고 보자. 그런데 서로 그것을 못 봅니다. 그리고는 이제 신앙이 있는 한쪽은 자기는 욥과 같다고 정말 믿음대로 살려고 했는데 남편이 자기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보고 물어보면 자기는 아내의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아침이나 제대로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우회를 만들어서 점심시간에 예배를 드리는데 상사가 야단을 치니까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하며 반발하자 그 상사가 믿는 것은 상관없는데 점심시간이 끝나면 바로 와서 근무하기를 원한다고 했다는 내용)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항상 자기는 신앙의 낭만에 취해서 모든 것이 자기가 주님을 똑바로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몽상가입니다. 절대 안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기도하는 게 뭔가 하면 다른 사람이 바뀌게 해주십시오.
(예화: 돌아가신 어느 목사님이 시골 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는데 그 교회의 장로님 한분 이 너무 자기를 괴롭게 하시기에 고통스러워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분이 바뀌기를 기도하자 어느 날 하나님이 그 장로님을 당신도 바꾸지 못하셨다며 목사님께 차라리 그분을 포기하며 마음을 바꾸기를 말씀하셨다는 내용)
그러니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당할 때 아무리 참아도 왜 애들도 때리다가보면 잘 맞는 애들이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안 때릴 텐데 패라, 네 자식 죽지, 내 자식 죽나. 그리고 입 꽉 다물고 다 때렸는데도 안 일어납니다. 이런 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의 마음은 때리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는다고 하더라도 이 참는 것은 그냥 악을 쓰고 견디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고치기 위해서 두신 그 사물의 질서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탈하려고 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기가 변화되기를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이 어두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깨달음이 없이 그냥 참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한을 남길 뿐입니다. 여러분 신앙 없이 그냥 참기만 하는 사람은 나중에 화병이 생깁니다.
(예화: 예전에 친구 어머니를 모시고 한의원을 갔는데 한의사가 맥을 보더니 처음 보는 그 어머니에게 가슴에 맺힌 것이 많으니까 병이 되었다며 화가 나면 가끔 화도 내고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병이 된다고 했다는 내용)
그러니까 그냥 참기만하면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자기가 끊임없이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달으면서 계속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오늘 새벽에 여기에 나온 사랑하는 지체들 중에도 아마 견디기 힘든 시련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다. 회심하고 30년이 지나면서 저도 수많은 불길을 통과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시련의 시기들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나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은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많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은 그렇게 명백하게 잘못한 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시련을 통해서 변화되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선 이 생명의 면류관은 이 피곤한 인생의 길이 모두 끝난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면류관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것이 삼위일체적인 삶, 신자의 삼위일체적인 삶,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칩니다. 그래서 돌이켜섭니다. 하나님 앞에 쇄신됩니다. 영혼이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이런 신자의 삼위일체인 삶을 통해서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점점 더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주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를 빌면 무한한 사죄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번 잘못하면 항상 그 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자기의 마음속에서 털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그렇게 낙인이 찍히고 완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그러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떠난 사람들이 회개하고 심령이 쇄신되고 그래서 당신의 뜻을 세울 때 발견하는 삼위일체적인 삶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이 옳게 행동한 경우에도 내면의 세계까지 모두 옳은 것은 아니고 그래서 시험을 받고 또 자신이 죄가 있을 때는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잘 참아야 합니다. 목사님,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잘 참으면 하나님이 빨리 옳다고 인정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과 불순종이 막 뒤섞여서, 원망과 복종이 뒤섞여서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거든요. 그런데 그 인간은 더 많이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제가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만의 문제라면 이렇게까지 내가 고난을 당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 아무개 때문에 결국은 제가 이렇게 당합니다. 나에게 이정도의 시련을 주시려면 저 인간에게는 폭풍을 주셔야 합니다. 이러면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섭리를 믿었던 것처럼 형들은 나에게 악을 행하기 위하여 나를 해하기 위하여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상황이나 사람들을 절대 미워하면 안 되고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저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내 속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교만하게 살았겠지. 아! 저 사람들은 나를 어렵게 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구나.’ 이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내 안에 내가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그런데 대담하게 이런 기도를 해볼 용의가 없습니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어렵겠지만, 하나님, 제가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그냥 평탄한 길로 인도하려고 그러지 마시고 이번 기회에 저를 정금과 같이 아주 순결하게 만들어주셔서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나를 생각만 하셔도 기쁜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를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게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내 행복보다 훨씬 큽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아! 이제 네가 철이 드는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시기가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정금같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23:10-12)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본문은 고난 받던 욥이 자신은 정말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고난을 받는다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나중에 가서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자신을 정말 정결케 하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계속 겹치는 이 고난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그리고 앞으로 더 어떤 고난을 해롭게 더 당하게 될지 욥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비록 동기는 처음에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지만 이 세 친구들이 욥을 도와주는 모든 방식은 사실 욥에게 괴로움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과 고통은 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다루시는 분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상에서 죄 없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없고 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후하게 대우해주신다고 하는 평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욥은 자신이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단에게 자랑하실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순수한 마음으로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욥이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환난이 계속 겹치는 것을 보면서 아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말할 때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또한 하나님이 취하시지 않겠느냐, 이러면서 제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난이 길어지자 그리고 또 친구들이 옆에서 변론으로 자신을 괴롭히자 이 욥은 이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고 그러면서 비로소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엇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아주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정결케 되어야 할 그 어떤 찌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섬겼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이며 그러며 자기가 당한 처지에 대해서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의 감정을 쏟아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자신 안에 연단을 통해서 정결케 되어야 할 찌꺼기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고난의 의미를 욥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겉보기에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순전하게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내 안에는 아직까지도 정결케 되어야 할 찌꺼기들이 많이 있구나. 그것을 이 욥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런 시련을 욥에게 허락하신 것은 그냥 사단과 내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섭리 속에서 자기가 당신이 사랑하시는 욥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한편으로는 사단에게 하나님을 진실 되게 경외하는 사람이 있고 또 사단이 그것을 꺾을 수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욥으로 하여금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찌꺼기들을 토해내서 그래서 예전보다 더 정결하고 순수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알고 경배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욥이 예전에도 과연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배하던 사람이었지만 과연 그것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예전에도 욥이 평안한 가운데 자기는 이제 겨우 더러운 찌꺼기가 가득한 광산에서 금방 캐낸 그 철광석과 같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었을까?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깨닫는 방법에는 관념적으로 깨닫는 방법과 경험적으로 깨닫는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관념적으로는 내가 죄인이고 그리고 내가 정말 내 안에 더러운 것이 많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관념적으로는 인정할 수 있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보다 더러운 것이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그런 관념적인 방법 말고 경험적으로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자기가 비로소 진실로 자기가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뼈저리게 아파합니다. 관념적으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사실은 인정하지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내 안에 이런 부패함이 있구나. 내가 이렇게 희망이 없는 죄인이구나. 이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욥이 거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은 여러분들의 겉모습에 의해서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먼저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은 일반섭리 속에서 베풀어주는 사물들의 축복이 있고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직접 만지시는 영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두 번째 축복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본성을 바꾸는 축복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훨씬 더 커다란 축복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우리밖에 있는 사물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서 일치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 섬김이 제일먼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욥은 자기 안에 있는 찌꺼기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 자신의 마음으로 영혼으로 섬길 수 있었는데 그것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까 자신이 고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는 이 더러운 찌끼들을 다 토하고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연단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단련한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이것은 제련법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도 강원도에 가면 금광이 굉장히 번성했습니다. 지금에야 별로 안 하지만 옛날에는 금광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제 산에서 광석을 캐면서 그것을 잘게 부스면 그 속에 금의 성분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물에다 넣고 거품을 일으키면 하여튼 어떤 원리인지 모르지만 그 비중에 따라서 일반 모래와 금가루가 분리가 됩니다. 그렇게 분리가 된 금가루는 눈으로 보기에는 노란 금가루입니다. 진짜 이거 금이겠구나. 그러지만 가치가 거의 없는 금입니다. 왜냐하면 불순물들이 많이 섞여있으니까. 그렇게 된 금가루를 갖다가 이제 용광로에 넣고 불을 땝니다. 그러면 그 불에 의해서 이제 금이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아직 녹이기 전에는 금가루와 돌가루가 함께 섞여있었는데 사람이 보기에는 노란 금가루 같아도 그 안에는 그것을 금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찌꺼기와 불순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용광로에 넣고 불을 때서 녹이면 액체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고체이기 때문에 함께 붙어있던 재료들이 분리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 가라않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 따라내고 그러면 거기 찌꺼기들이 나오면 굳히고 다시 한번 또 녹입니다. 또 녹이면 다시 찌꺼기가 나옵니다. 또 다시 따라내고 그 찌꺼기들을 또 버리고 불을 때서 녹입니다. 그래서 또 찌꺼기를 갈아내고 다시 담고 이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이것을 몇 번 하다가 그만두면 14금이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좀더 하면 18금이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여러 번 하면 99.9%의 순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9번 단련한 은과 같다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정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금을 그렇게 고체상 태로 만들어서 다시 녹이고 다시 녹이고 하는 일을 반복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한 번에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해서 더 이상은 손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정결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드시는가 하면 그렇게 안 하십니다. 금도 생각해보십시오. 기왕에 녹인 길에 하여튼 다 찌꺼기들을 걸러내면 좋겠는데 그렇게 안 됩니다. 그래서 한번 녹여서 찌꺼기를 걸러내면 굵은 찌꺼기들은 빠져나오는데 미세한 찌꺼기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일단 식혀서 굳혔다가 그다음에 다시 용광로에 넣고 녹여야 합니다. 그 녹이는 과정을 통해서 탈것은 타버리고 그래도 안 타는 것은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져내게 됩니다. 우리가 쌀을 씻을 때도 보면 요즘에야 쌀을 거의 안 일지만 조리로 다 일었습니다. 분명히 한번 했는데 두 번째 다시 물을 한번 하면 돌가루가 또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단을 한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의 일생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이 이번에는 녹여서 우리의 탐욕들을 제거해버리시고, 다음에는 다시 굳혀서 내려서 우리의 교만을 깨버리시고, 그 다음에 다시 녹여서 우리의 그 모든 허영들을 또 제거하십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바꾸어 가십니다. 그것을 욥이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이제 깨달았기 때문에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제 정금과 같이 하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이렇게 연단하시는구나. 이것을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를 깨달았지만 상황이 변한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이것이 끝날지도 모르고, 얼마나 계속될지도 모르고, 이후에 이 시련이 자신을 얼마나 더 많이 바꾸어놓아야 하는지도 욥은 아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알 수 없고 자기 자신도 그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얼마나 더 연단을 받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지는 오직 그가 아시나니 오직 하나님이 아신다니 그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자신이 정금과 같이 나아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은 대부분 욥과 같은 경우는 많지 않고 대부분이 우리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일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나 잘못했는가는 나중 문제이고 우리의 고난은 대부분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아주 쉽게 ‘나는 추호도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욥처럼 여기셔서 그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속이 편합니다. 그리고는 발견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얼마 못가서 자신 안에 수많은 찌꺼기들과 불순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욥처럼 시간이 많이 걸릴 필요가 없고 아주 금세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욥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실제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제가 오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을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고통이 왔는데 이것을 부자연스럽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되는데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 피할 수 있는데 이런 일들을 자원이 부족해서 이것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당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할 수 없습니다. 자꾸 신경이 분산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인 우리 자신이 아름답게 변화되는 거기로 우리가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그 고난이 지금 누구를 통해서 나에게 왔나. 그리고 또 그 고난이 얼마나 계속되나. 또 그 고난이 심지어는 지금 나를 괴롭게 한다는 것조차도 무시하고 그리고 ‘이런 고난이 와도 나는 산다. 그리고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것도 다 지나가는 것이고 이것보다 더 큰 고난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가지만 주목합니다. ‘내가 얼마나 내 안에 더러운 찌꺼기들이 많은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만약에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면 아마 이렇게 강력한 간섭으로 나를 연단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도 많이 만나지 말고 그리고 쓸데없는 시간,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내가 이 왜 불행을 당하게 되었을까? 누가 나를 여기로 몰아넣었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밤에 잠도 못자고 끊임없이 안개처럼, 먹구름처럼 그 마음에서 수많은 절망적인 생각과 분노, 변명, 그 다음에 자신에 대한 비참함 이런 것들이 막 먹구름처럼 피어오릅니다. 이게 사실은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이 신자에게 노리는 것입니다. 그런 먹구름들이 피어오르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원망하고 이렇게 살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싫어하는 감정이 포함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는 것은 전부다 영혼으로 하는 것이고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꾸 제 이 제삼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과 영혼에 더러운 것들이 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 이, 제 삼의 죄를 자꾸 짓습니다. 사람을 원망하면서 미워하는 죄를 짓고 환경을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짓고, 이러면서 절망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짓고 이러면서 처음부터 잘못되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잘못된 것을 타개하는 동안에 제 이, 제 삼의 죄를 자꾸 마음으로 짓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더욱 교통하실 수 없는 영혼의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날이 어두워지면 눈이라도 밝아야 하는데 눈까지 침침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정리되고 풀려질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나를 옳다고 하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한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우리를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내 속으로 난 내 새끼도 싫을 때가있는데 피도 살도 안 섞인 사람들이 나를 모두 좋아할 때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공주병입니다. 그것은 왕자 병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그리고 나를 배척하고 할 때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객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모든 사물들의 변화된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다른 질서 속에 있으면 깨닫지 못했을 우리 자신의 죄와 악함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더 깊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고자 사람들을 용서하고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계속 가야지 될지 아직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아신다. 그 이야기는 깊은 시련 속에서도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 때만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나, 연단하실 때나,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시련을 당하게 하실 때나 하나님이 항상 우리에게 갈 길을 다 알려주시고 결국을 다 보여주시면서 이성적으로 우리를 설득하셔서 항상 우리를 데려가시는 분은 아닙니다. 욥이 집이 무너지고 짐승들이 다 타죽고 그래서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아내마저 다 자기를 다 버리고 도망갈 때 그때 하나님이 미리 야, 이게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제 조금 있으면 세 친구가 오거든. 개소리를 떠들 거야. 귀기울이지마, 결국은 네가 마지막에 계속 참다가 큰 복을 받고 네 세 친구들은 아주 죽사발 나게 망신을 당하고 일이 끝나고 너에 관한 책들이 기록이 되어서 수 천 년 후에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는 그런 결과가 되거든, 이렇게 하시면서 자, 이제 각본을 따라서 이제 불이 내려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궁금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미리 안 보여주실까? 왜 그러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보시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으로는 다 알 수 없는데 그분이 나를 향해 신실하신 분이시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고 하는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설득이 안 되는데 이성을 초월해서 그분께 내 인생을 던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온전히 의지할 것입니다. 그 의지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믿음을 동반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만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각본 미리 안 알려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때 때로는 아주 혹독한 고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거기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하고 우리는 심지어 세게 기도해서 하나님을 바꾸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나의 가는 길이 얼마나 될지 나는 알 수 없고 이 시련의 길이 얼마나 계속 이어질지 나는 파악할 수 없으며 또 지금 내가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이 다음에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알 수 없으나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나의 이 고난을 직접 주도하고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 고난을 주신 것은 좋은 것으로 나에게 갚아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찌꺼기들을 빼내게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을 주신다. 믿으면서 그래서 걸어갑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 하루를 주를 따라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렇게 굳게 믿은 다음에는 어떤 태도로 이 고난의 때를 지나게 하는가. 그것에 대해서 오늘 이 욥이 자기의 처지를 쭉 설명합니다. 내가 그의 걸음을 따라 행하였으며 그의 길에 행하였으며 쭉 합니다. 결국 무엇인가 하면 순종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도 그가 순종하는 길을 걷지 않는다면 고난이 그를 정결케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을 때서 금을 녹여야지만 찌꺼기를 빼내게 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도 우리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려서 그분께 순종하면서 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더러운 찌꺼기들이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당하면서 그 안에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복수심에 불타고 이렇게 하면 시련을 계속 당하는데 참기는 참는데 그 참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계속해서 이 속에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상처라고 합니다. 상처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행복한 사람이 상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상처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것을 자기가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마음에 아픈 흔적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중으로부터 그냥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환경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준 것은 항상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이지 지나가는 자동차가 마음에 상처를 주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돌맹이가 자기에게 상처를 주겠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바뀌는 계절의 순환이 상처를 주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물들의 질서를 자기가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고통을 느낄 때 그때 마음에 생기는 이 부담스런 고통의 기억들이 상처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계속해서 망가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난을 주실 때는 그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찌꺼기를 뽑아내어서 정결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연단 용어로 고난을 주셨는데 이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태도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이 안에 더 많은 찌꺼기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 내 안에 있는 불순종의 찌꺼기가 뭘까?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나도 알지 못하던 더러운 이 찌꺼기들이 뭘까? 하나님 앞에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새로워질 때 여러분들이 정말 정결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말할 수 없이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한번 고난을 당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들은 오늘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이제껏 까지 해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기도를 해보십시오. 기도를 통한 이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이 기도는 우리가 바뀌면 기도가 바뀌기도 하지만 기도가 바뀌면 그 기도 때문에 우리가 바뀌기도 합니다. 정말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이제 기도 속에서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일부러 마음을 모으고 억지로 감사한 조건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덜 내켜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고백을 하십시오. 그러면 놀랍게 그 고백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이번에는 그 고백이 우리를 바꾸어놓습니다. 그래서 한번 이제껏 해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기도를 해보십시오. 하나님. 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이런 큰 시련을 당하는 것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련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 잘난 줄 알고 자기 부족한 것을 모르고 살 사람인데 하나님, 오늘 이렇게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는 나도 알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더러운 찌꺼기들을 내 영혼 안에 마음 안에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이 고난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를 더 깨끗하게 하셔서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기도를 바꾸어보십시오. 그리고 우선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가 아시나니 주님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십시오. 고난이 올 때는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욕망을 버리십시오. 이 일은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게 대우해주실 때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하게 대하고 경배할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미끄러져서 마음에 부패함을 가지고 정결케 되어질 필요가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미끄러진 길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많이 기억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아들의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내가 도대체 귀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쓸모없이 타락한 아들을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는 그 아버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욥을 이렇게 치열하게연단하시는 것이 욥을 향한 매우 특별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단 받을 때 가장 멀리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이 고난 속에서 내가 이제는 주의 뜻을 따르리라. 그리고 마음을 정하고 순종할 때 그러면 하나님이 결국은 우리가 왜 그 연단을 받아야 되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 밖의 사물의 질서를 바꾸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회개하게하고 쇄신시키시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하셔서 우리를 놀랍게 새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에 근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연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참고 또 순종하고 또 믿고 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반드시 “내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율례를 지키게 되었사옵나이다.”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금보다 귀한 연단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6-7)
오늘 이 시간에는 왜 그렇게 믿음을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항상 우리의 영혼보다는 육신에 있어서 그래서 우리 육신은 우리들이 예민하게 잘 챙겨주지만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질서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때 우리들이 많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은 사물들의 질서가 될 때 난 많이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련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이렇게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들의 질서와 마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가 항상 우리의 마음에 맞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항상 사물들의 질서가 우리의 마음에 안 들게끔 되어 있는데 조금 마음에 안 든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냥 평안하다고 이야기하고, 많이 마음에 안들 때 그때 지금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아주 마음에 안 들어서 그것이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고통이 올 때 그때 시련을 당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서서히 계속되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확 들어가게 될 때 우리가 이런 것을 환난이라, 혹은 시련이다. 혹은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편지를 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추정하기를 이미 사도가 편지를 보내는 교회들이 박해를 받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 조직적이고 아주 정교한 그런 박해가 이제 로마로부터 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미치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런 박해를 앞두고 있는 지체들에게 지금 시련이 온다고 하더라도 너희들이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여라. 그렇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어서 그 고통이 오래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염려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들이 당하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분명히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눈에 보이게끔 만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계획은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지혜를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이루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그것을 이루시는 방식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지혜를 이루어 가실 때 사람을 사용하셔서 그 지혜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가서 고통을 받는 것이 시련이고 이것이 더욱더 강렬하게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 연단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지혜를 이루시기에 있어서 사랑으로 그것을 이루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는 그것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고 우리 눈에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받게 되는데 그러면 정작 하나님이 사랑으로서 지혜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이렇게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일생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게 하실 텐데 그 하나님이 지혜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살아서 이 사람이 구원받고 살아있는 것이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에 이런 식으로 기여했으면 참 좋겠다.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없도록 고정되어서 운명처럼 강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또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시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화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때 그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 놓여있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지를 주님께서 아시지만 그러나 항상 운명처럼 결정되어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의 뜻에 기대에 화합하여 그래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서 결국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터득하여 주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면서 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생의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자기는 그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지혜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 지혜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최종적인 지혜는 종종 우리에게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설명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왜 이런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내가 왜 이 시점에 하나님이 나를 향해 지혜를 가지고 계시고 사랑을 가지고 계신데도 내가 원하지 않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지 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설명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오고 돌아보면 그때는 정말 그랬어야 됐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국은 이렇게 나에게 유익을 주셨구나,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자기가 왜 그렇게 당해야 되는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지만 그 지혜가 나에게 다 설명되도록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을 얻는 한 방법입니다.
어떻게 되면 믿음이 지식을 얻는 한 방법이 되는가? 믿음은 지금 내가 이렇게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급작스럽게 이 질서들을 마주하여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연단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리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이것을 내가 왜 이런 일속에 들어가야지 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해도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게 바로 이성의 한계입니다. 이성 안에 있는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서 이제 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이 사물의 질서를 궁극적으로 움직이고 계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물의 질서를 움직이는 첫 번째 원인과 두 번째 원인이 있습니다. 두 번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간접적인 원인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이렇게 걸어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나를 치고 도망간 그 차 때문에 내가 사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혹은 내가 교통법규를 위반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제 이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제 일의 원인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원인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행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이것을 기적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제 이의 원인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사람들은 제 이의 원인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사고를 당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실수한 그 운전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하고 고소하고 심지어 보복하려고 마음을 갖고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동물들도 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도 자기가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아프다고 느끼고 고통을 준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하는 것은 짐승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짐승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일 원인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이 일에 대한 제 이의 원인에 대한 관심을 떠나서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지식을 얻는 방법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이성의 추론을 통해서 조달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내가 내 앞에 펼쳐진 사실을 믿음으로,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왜 그렇게 나는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확실한 것 하나는 이런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연단을 받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연단을 받을 때 믿음으로 잘 참으면 그러면 반드시 축복된 결과가 온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왜 그런지는 나는 아직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토대로 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회를 가지고 인도하십니다.
또 하나는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어떻게 우리들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런 식으로 논증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육체와 영혼 이 두 가지를 본질로 가지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타락한 후에는 이제 육신보다 영혼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창조될 때도 물론 그랬지만 창조될 때는 그래도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영원불멸하도록 그렇게 계획되었지만 타락한 후에는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신은 불멸할 육체가 아니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영혼만 불멸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에 우리들이 영화될 때 새로운 육체를 덧입게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 몸에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썩을 육체와는 다른 육체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영혼이 어떤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삶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고 온전하게 하고 쇄신시키시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영혼 됨으로 꽉 차서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에 적합한 영혼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며 계획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패한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요구에는 귀를 많이 기울이지만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는 잘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신령한 사람이 되면 항상 육체의 외치는 함성보다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영혼의 가냘픈 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서 영혼을 많이 배려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고백 속에 많이 나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그런 고백, 무엇이 죽는 것입니까? 육체의 외치는 함성을 계속 거절하고 죽여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영혼의 부르짖음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 그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육체는 우리에게 올바른 것을 요구할 때보다도 올바르지 않은 것을 요구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육체가 내가 지금 기운이 없거든, 그러니까 나에게 양식을 주어서 원기를 회복하도록 해, 이것은 정당한 외침입니다. 그런데 나 지금 배고프거든, 그런데 값비싸고 아주 맛있고 아주 호화스러운 음식을 먹게 해줘, 이것은 인간의 육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외치는 것입니다. 나 지금 춥거든, 그러니까 옷을 입어서 좀 따뜻하게 해줄래. 이것은 육체의 자연스러운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계기로 해서 아주 비싼 옷을 좀 입게 해줄래.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한번 뽐낼 수 있게, 그렇게 만들어줄래. 이런 것들이 항상 섞여 들어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어거스틴 같은 분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면서 자기의 고백론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그런 줄 모르지만 배가 많이 고팠을 때 밥을 막 먹으면서 육체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과 음식에 대한 탐욕이 항상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우리에게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너무 심합니까?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주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은 항상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 속에 숨어서 들어오기를 좋아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먹는 것 같고 자꾸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우리가 일부러 수도사적인 삶을 살면서 그렇게 먹고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값지고 비싼 음식을 분수에 넘치게 그것도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적정한 분량을 초월해서 마구 먹는 것은 식생활의 방탕입니다. 또 여러 가지로 방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자면 음식을 먹을 때 이 음식이 내게 들어가면 건강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먹어야 합니다. 당뇨가 있는 사람이 그냥 단 것이 마음에 든다고 먹으면 큰일 납니다. 분명히 이런 몸의 상태이기 때문에 저런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안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들이 음식을 섭취하는데 이제 배가 부르고 만족이 됩니다. 그때 아주 비싸고 그리고 사치스러운 음식을 방탕하게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 속에 항상 그런 음식에 대한 탐심의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정작 작동할 때는 어떤 때인가 하면 육체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이 작동하는 것이지 아니 보리밥이라도 먹어서 배가 부른데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드뭅니다. 배가 고플 때 자연적인 욕구에 묻혀서 부패한 욕구가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속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데, 그런 것을 볼 때 결국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의 요구에 대해서 정말 민감하지만 그 육체의 요구가 영혼의 부패한 요구를 어떻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지 그것은 잘 모릅니다. 그런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속에서 연단을 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범한 상태에서는 도저히 나타나지 않았던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 묻혀있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 잘못된 본성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런 잘못된 본성들이 어떤 연단 받는 상황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도 우리의 영혼 안에 있어서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를 지혜의 계획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던 요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른 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연단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갔을 때 단기적으로 보면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고쳐서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많은 날 동안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복하고 당신의 지혜를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영위되는 것을 방해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잘못된 본성을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이제 이렇게 그 시련의 연단을 받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형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향한 가장 무서운 형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마음이 완전히 강퍅해져서 부패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경우에 그들이 온갖 사악한 짓을 다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끔 내버려두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하시기로 버리신 사람들입니다. 이미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들을 방탕한대로 살도록 버려두셔서 나중에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이 도덕적인 의지를 가지고 이 인간과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하는 본보기로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그게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아주 무서운 인간을 향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간섭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가 있고 그리고 기대에 부합하도록 변화되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고치면 하나님께서 다시 사랑해주시겠다고 하는 분명한 의지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하는 것과 같은 이 믿음의 시련이 없어지고 말 금보다 더 훨씬 더 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들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금속이 금일 것입니다. 금이 무슨 특별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쇠와 다른 것이 뭐가 있을까요? 쇠보다 더 무른데 뭐 그렇게 금이 가치가 있을까요? 만약에 그 금이 길거리에 돌맹이처럼 굴러다닌다면 귀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굳이 금이 왜 귀한지 이유를 든다면 이 금이 변하지 않습니다. 몇 천 년 전에 있었던 유물들이 출토될 때 변함없이 그 형체와 빛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금입니다. 3-4천년 전에 발굴되는 그 물건들 가운데 금으로 된 것들을 그대로 형체를 보존하고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금의 상징 자체가 변치 않는 영원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금에 많이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금도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 이외에 창조된 모든 것들은 영원히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 있는 물질들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금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값지고 가치 있고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사라지는 것이고 귀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귀할 뿐이지 하늘나라에서는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귀하고, 가치가 있고, 불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영원을 놓고 보면 그것은 변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시간 세계 안에서는 휘황찬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만 시간 세계를 지나 영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금은 돌맹이만큼이나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시간 세계를 초월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영혼을 가지고 그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영혼 안에서 예수와 사귑니다. 그 영혼 안에서 하늘나라의 형제들과 교통합니다. 그 영혼 안에서 영원불멸하고 그 영혼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피조 된 인간존재로서 기쁨을 누리고 그 영혼으로서 후일에 영화의 상태에 우리의 육체가 결합을 합니다.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혼에 가치는 잠시 있다 사라질 잠세적인 세상에서 값진 모든 것들의 합계보다도 훨씬 더 영원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우리에게 마음을 가지시는 중요한 계획이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영혼을 만드셔서 이 땅에 있을 때는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서 아름다운 지위의 빛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죽어서는 그 육신을 벗고 주님과 함께 사귈만한 아주 순결한 영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은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충만히 되게 하고 그리고 또 이 땅에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보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의 빛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일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지혜 있는 일인가하면 다른 일들은 대부분 이 시간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다가 사라지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복을제공해도 그것은 시간 세계 안에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주어도 그것은 다만 한 10시간 동안 그의 건강을 보존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매일매일 그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도움을 받는 그 사람도 언젠가 시간 세계 속에서 육체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죽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의미는 영원을 향하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길 때 하나님을 섬긴 것이니까, 의미는 영원을 향하여 있지만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해택을 받는 사람들의 섬김은 시간 세계 안에서 그 유효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그 일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시간 세계 안에서 조잡한 사물의 질서가 주는 표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영원을 향하여 의미 있는 삶을 결단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지혜의 빛이 영원한 세계 속으로 인도해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처럼 우리의 수많은 요구를 믿음으로 오히려 거절하고 영혼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면서 영원을 향하여 의미 있는 것들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그를 영원히 살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은 신자가 되었는데 지혜가 없는 것은 헛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있기 위해서는 그 지혜가 어떻게 습득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지혜가 습득된 방식은 우리의 영혼이 진리의 빛을 계속 받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즉 지혜는 진리의 빛을 계속 받고 그 진리 속에 자기를 합치시키며 사는 가운데 사물을 잴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정당한 척도,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그 척도를 우리가 가진 것 이것이 바로 지혜를 소유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일은 중요하다고 재고 우리는 그렇게 중요하고 수많은 인간들이 목숨을 걸지만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그러시지 않은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보이는 현세 속에서 출렁거리지 아니하고 영원을 향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끊임없이 진리의 빛을 받으면서 살아가야지 되고 두 번째는 그 진리의 빛을 받은 것을 자신의 삶의 합치시키려고 노력할 때 지혜가 계속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를 가지고 인생을 살 때 지혜가 없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지혜 없는 사람이 올바른 척도를 가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의 착오를 일으켜서 사물이 변천하는 것과 함께 울고 웃고 쉼이 없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될 때 지혜 있는 삶은 평정을 유지하면서 쉼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행복을 사람들이 보고 부러워합니다.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요, 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보여주어야 할 품격은 지적인 품격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사업이 잘 되고, 돈을 많이 벌어서 값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배를 두드리고, 남이 도저히 입지 못하는 엄청나게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그리고 큰 차를 타고 다니고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복을 받겠구나.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신앙이라면 사실은 신앙생활을 할 시간에 가서 부지런히 돈버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빨리 도달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다가 보면 그렇게 복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이 세상 사람들을 자극해야 할 것은 너도 예수 믿으면 나처럼 부자 될 수 있다. 너도 나처럼 예수 믿으면 이렇게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너도 나처럼 예수를 믿으면 놓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지. 그러면서 자극을 받아서 예수 믿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고통은 높은 지위에 못 올라가서 고통이고, 돈을 많이 못 벌어서 고통이고, 큰 집에 못 살아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안에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로 해결이 안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회심한지 30년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 다른 사람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거절하고 방종하게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살 때도 저는 한 번도 돈을 많이 벌고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면서 놓은 지위를 차지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한 번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읽은 책에서도 불신자들이 읽은 책이 많았는데 어떤 바보 같은 불신자도 나에게 그렇게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이 전부다 깡통이고 천치바보라고 생각하지만 지각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그들에게 다가갈 때 네가 예수를 믿으면 나처럼 잘 살수 있고,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그 불신자들이 우리를 쳐다볼 때 측은하게 봅니다. 어쩜 인간들이 저럴까? 제가 예수를 믿을 수 없었던 이유도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나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아! 예수를 믿고 그래도 뭔가 인생의 빛을 봤다는 인간들이 어떻게 수준이 저 정도인가. 내가 네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사실은 인생을 바르게 살다가 몸부림치다가 자살한 이야기를 쓴 사람의 이야기가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내면의 평화입니다. 내면의 행복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못 가르쳐주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제 마음에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우리의 진정한 전도는 바로 이 지혜의 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는데도 이런 지적인 품격이 없고 이렇게 인생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값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런 지혜가 있기는커녕 여전히 이 세상의 탐욕과 빛의 욕망을 가지고 껄떡이는 마음으로 어떻게 이번에 세상에서 정당하게 경쟁관계를 통해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어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예수님의 후원을 얻어서 한번 그렇게 살아볼까 그렇게 마음을 갖는 사람들은 진정한 예수님을 통한 안식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행복을 묻는 여러분들에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어떻게 해야지만 그 참다운 행복이 이를 수가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빛 아래 살면서 돈을 통해서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 인간의 위로를 행복에 도달하려는 사람, 지위를 통해 인간의 행복에 도달하려는 사람, 명예를 통해 그리하려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왜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에 못하는지를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품격입니다. 이런 지혜를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서 사랑으로 깨우치고 다루시는 방법이 바로 이 시련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당하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자, 보십시오. 사람을 많이 의지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가려서 하나님의 눈에 안 들어오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하시거나 혹은 그렇게 믿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도 자기 곁에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불변하도록 자기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셔서 사람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지혜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렇구나. 사랑은 다 흘러가는 것이구나. 그리고 주님만이 나의 영원한 동반자시고, 주님만이 나의 변함이 없는 사랑의 대상이시고 보호자시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작 알았어야 될 일인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만 그러나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면 사람을 데려가시거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거두어가시거나 그러지 않으십니다. 자기가 그렇게 돈을 사랑하는데도 자기가 돈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거두어가십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여튼 있는 것은 가지고 가시고 생길 곳은 구멍을 막으십니다. 가기막히십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기가 막히게 가지고가시고 들어올 때는 분명히 있는데 구멍을 다 막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궁핍이라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돈에 많이 의지하고 있는지를 아주 또렷하게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로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것들이 사라질 때 그때 아주 굉장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주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다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일에 있어서 증인입니다. 간증하라면 밤새워서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얻고 싶으면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이 안 주십니다. 진짜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돈에 대해서 초연해지십시오. 하나님이 철저하게 저도 훈련시키더니 어느 한 시점이 되니까 하나님이 궁핍에서 저를 푸셨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정말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한다면 명예를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주여 하며 당신을 바라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돌릴 텐데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그것을 주시게, 여러분이라도 그렇게 안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철저하게 시련을 통해서 자기는 도저히 있는 줄 몰랐던 그런 찌꺼기들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연단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 금방 잘 안 드러납니다. 오래 불을 때야지만 그게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고 그것도 쏟아져 나와도 아 제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참으라. 참으라. 한 번에 안돼. 깊이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연단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짜 옆에서 보면 가슴이 저립니다. 도와줄 수는 없지만 가슴이 저립니다. 그런데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특별히 관심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깊이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잘 참는 것입니다. 중간에서 자기가 뿌리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런 연단을 안 받을 수 있는데 연단이 되려면 고생하는 것은 우리들이 연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생하면서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게 그게 연단입니다.
그런데 싫어! 그리고 딱 끊어버리고 내 멋대로 살 거야. 그리고 튕겨나가면 그것은 마치 뭐와 똑같은가 하면 수술대 위에 누워서 하나씩, 하나씩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하는데, 이번에도 어느 병원에서 위를 잘라낼 사람을 갑상선을 잘라내고 하면서 바꿔치기를 했다고 하는데 정신병자들입니다. 지금 애들 장난하는 것인지, 우리 교회의 교인 하나도 그랬습니다. 왼쪽 무릎이 아픈 노인네를 오른쪽 무릎을 파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왜 그런지 좀 잘 애정을 가지고 해야지. 하나님은 그런 실수를 하는 의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돈에 대해서 약해서 자꾸 범죄 하는데 하나님이 다른 것 뜯어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다 때려서 늘 사람들을 걸고넘어지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배를 가르셔서 심술보를 때내십니다. 하여튼 늘 그게 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술보를 떼어내십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탐욕이 많은 사람들은 갈라서 그래서 오줌보 옆에 있는 욕심보를 떼어내십니다. 또 허영에 사로잡혀서 바람이 들어간 사람들은 침으로 찔러서 바람 보에 있는 바람을 쭉 빼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하라고 그러면 더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이렇게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공주병, 왕자 병에 걸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 갈라내셔서 심장 속에 있는 그 공주병 병균들을 다 죽이십니다. 수술하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그런데 이제 개복했습니다. 그리고 온통 다 창자도 꺼내고 심술보도 꺼내서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절제 수술을 하시려고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을 감고 수술대 위에 있던 사람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서 나는 이럴 수 없어. 난 싫어, 내가 원하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리고 튀어나갑니다. 배가 갈라졌으니까 오장육부가 다 흘러나와서 땀을 흘리며 도망가는데 잘도 살겠다. 차라리 수술대 위에 안 올라왔을 때가 훨씬 더 낫고 자연스럽지. 그게 배가 갈라져서 속에 감추어졌던 심술보가 이번에 밖으로 나오고 병균이 온몸에 다 번져서 그렇게 해서 밖으로 나가면 행복한 삶이 되겠습니까?
진짜 형편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원래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으려고 했다가 덜 대쳐진 사람, 이런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저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기도 정리가 안 되어서 오락가락하면서 혼란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연단을 받되 끝까지 인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참고 또 참고 참으십시오.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잘 참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예수 참음에 동참하여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
우리의 인생의 길은 100미터를 달리기하는 것 같고 긴 거리를 마라톤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달려가는 길입니다. 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각자에게 맡기시는 사명의 길이 인생의 길 안에 있는데 대부분 단거리를 달려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실 때 정말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만한 사람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 전체를 살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산 사람이 정말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인생의 길이가 짧은 것이 아닙니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막 살기에는 인생이 짧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기에는 이 인생의 길이가 너무나 깁니다. 어떻게 회심하고 한 5년 정도 살다가 죽는 것이라면 있는 힘을 다해서 올곧게 똑바로 살아보겠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의 인생의 길이는 너무나 깁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들이 있어서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써도 그게 잘 안될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우리 마음이 그냥 나도 한번 이 세상에서 신앙과 긴장의 허리띠를 풀고 그냥 대충 살았으면 하는 유혹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신자의 삶의 실체입니다.
저는 이렇게 한 10년 쯤 되었는데 허리를 심하게 다치고 나서 늘 십자가처럼 짐을 지고 사는데 참 많이 겸손해집니다. 보면 한의원이나 접골원이나 치료를 해주는데 많이 다녔습니다. 무슨 말이 있는가 하면 뼈를 어긋난 사람을 데려다가 거기서 치료를 해주면 뼈가 이렇게 맞추어집니다. 그래서 침대에 이렇게 누우면 다리가 한 2센티 정도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았는데 열심히 누르고 맞추면 다리가 똑같아집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출입문 나가는 길에 다시 또 다리가 짧아진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한번 이렇게 이탈되었던 뼈이기 때문에 잘 맞추어놓고 걸어가도 그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꾸 활동하니까 똑바로 맞았는데 이제 일어나서 걸어가다가 출입문 나가다가 덜컹 하고 틀어지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치료를 받으면서 이제 혹시나 하고 사는 것인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영혼의 뼈가 어긋나서 하나님 앞에 바로 못사는데 예배당에 와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해서 진리로 누르고 성령으로 문지르고 해서 딱 맞추어놓으면 예배당 나가기 전에 덜컥 하고 또 빠져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지는 적이 얼마나 많고 또 우리가 참회의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의 마음속에 또 다른 죄에 대한 욕망들이 생겨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어제도 밤에 잠이 잘 안와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악과 선 사이를 자주 오고가는 사람들인가. 새벽에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매순간 분초마다 주님이 붙잡아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인생은 참 없겠구나. 정말입니다. 우리의 사명,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우리의 인생의 길이 그렇게 100미터 달리기로 끝나는 인생의 길이 아닙니다. 긴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본성적으로 즐겁고 좋은 일을 오랫동안 하는 것을 가리켜서 오래 참음, 인내, 견딤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내, 오래 참음, 견딤 이런 것들은 내 본성이 그런 것들을 싫어하는데 그것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혹은 또 그것을 당해야지만 성취할 수 있는 보다 놓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본성적으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인데도 보다 고상한 어떤 목적 때문에 꽉 참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인내, 오래 참음, 견딤 그런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늘 계시록 1장에 보니까 요한 사도가 밧모라는 섬에 갇혀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의 목숨을 다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순교한 사도들보다 덜 고난을 받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긴 생애를 살면서 자연적인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오히려 먼저 순교하고 주님께로 간 사도들보다 이 세상에 홀로 남아서 더 많은 고난을 받았다고 우리는 봐야 합니다. 뭐 사람들이 어느 정도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전승에 의하면 핍박하는 자들이 이 요한을 죽이기 위해서 끓는 기름 가마 속에 요한을 집어넣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어째든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요한이 얼마나 많이 고난을 당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도 모자라서 밧모라고 하는 외딴 섬에 유배를 보냅니다. 사랑하는 교회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작별을 해서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 혼자 버려졌습니다. 지금도 밧모라고 하는 섬에 가면 요한이 기거하던 동굴이 있고 그가 사용하던 밥그릇 같은 것이 남아 있다고 하니 그가 정말 얼마나 외로운 그 섬에서 성도의 교제와 가족들 간의 친교를 그리워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외로운 섬에서 이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긴 인생을 살면서 죽지 아니하고 그 많은 핍박 속에도 살아나서 자연적인 목숨을 누린 것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그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사명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될 일들을 보여주실 때 그것을 기록해서 그래서 교회에 알리고 그리고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주님이 판단하실 때 그것을 잘 기록해서 그들에게 전해줌으로 후대에 모든 교회가 떨어질 수 있는 영적인 위험들을 미리 경고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사명이 남아있으니까 죽지 않고 그 모진 핍박과 괴로움 속에서도 살아남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각자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언제 이 슬픔이 많은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시는 날 동안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우리가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순수한 동기가 되어서 주님의 뜻대로 모든 일들을 이루는 것을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을 살든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그렇지 않다면 그 긴 날 동안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모습은 추루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잘 참고 또 참아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 우리가 참음으로서 그 사명이 감당이 되지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으셔야지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요한은 먼저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계시를 알리기에 앞서서 자신의 편지를 받는 지체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비록 이 사람은 공간적으로는 교회로부터 잘려져 나와서 외로운 밧모 섬에 홀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였고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성도들과의 교제와 찬양소리 대신에 갈매기 소리나 들어야 하는 호젓하고 외롭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여 편지받은 형제들과 접붙여진 그 영원한 연합은 핍박도 끊을 수 없었고 그리고 그의 고난도 끊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이고 형제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형제들의 시야에서 멀어졌으나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그 믿음의 형제들이 언제나 살아있었고 공간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이 요한이 편지를 받는 사랑하는 교회의 지체들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환경에 아무 어려움이 없이 이렇게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세대에서그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형제들과 함께 동거하며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한 적이 있는지 제가 묻고 있습니다. 만약에 요한이 오늘 살아있다면 여러분들의 처지를 얼마나 부러워했을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한은 그래서 자기를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 이야기하는 것이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예수의 환난, 동참한다고 합니다.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언급할 때 이 사람이 제일 먼저 나는 그 환난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예수의 환난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은 이 세상대로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깨트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려면 반드시 그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예수가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여러분들이 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보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예전에 좋아했던 세상의 질서가 이제는 싫어집니다. 새로운 질서를 원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런 질서를 판단하는 자신조차도 자기 안에 질서를 자신이 보면서 자기를 싫어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질서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질서가 그것들을 부스고 변화시킵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모두 그것을 원하는가 하면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참으로 조화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데 세상이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하면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 질서 사이에 충돌이생기고 그것이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전하는 사람들이 기쁨이 되고 존경을 받지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 질서대로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환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충실하게 그 사랑 때문에 맡겨주신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런 환난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은 이 환난에 동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이 환난에 동참하게 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니까. 그 몸이 가서 이 세상 나라의 질서를 허물고 참 예수의 질서를 세우려고 할 때 그때 끊임없는 환난이 일어나니까 그 몸과 함께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는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나라와, 이게 환난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나라에 동참하는 사람, 예수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의와 희락과 화평이 있는 나라, 진리와 의와 거룩이 있는 나라, 환난만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님을 믿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고단한 인생의 길이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항상 예수의 통치를 받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받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들만이 아는 그 놀라운 위로가 있습니다. 사명의 길을 따라서 걷지 않는 사람들, 예수를 위해 헌신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명을 바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환난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그 나라의 통치를 누리는 기쁨도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의 섬김이 아니었더라면 이 세상에서 정말 죄의 노예가 되어서 아무 희망도 없이 어두운 인생을 살다가 짐승처럼 죽었을 사람들이 그 섬김을 통해서 빛 가운데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자기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면서 인간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쁩니까? 그것은 진짜 사명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을 때 항상 모든 삶의 상황들이 내 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내가 잘못하기 때문에 그런 모든 질서들이 나를 떠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내가 올바르게 그 길을 걸어가는데도 내가 예수의 편에 서있기 때문에 예수의 편에 서있지 않은 많은 이 세상의 사물의 질서들과 내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를 징계라고 이야기하고 두 번째 경우를 핍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나도 잘못하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도 잘못해서 그래서 잘못된 질서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면서 고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따라서 그래도 당신의 뜻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심심한 위로를 주십니다. 사물들의 모든 질서들이 자기를 거부하고 사랑하던 사람들도 떠나고 그리고 내가 믿고 좋아하던 환경들도 사라집니다. 그때 환경처럼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그 길을 올곧게 걸어가려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욱 붙들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고난 중에 위로를 경험하도록 만드십니다. 요한이 바로 그렇게 동참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지체들로부터는 떨어져있었고 고난에 넘치는 긴 생애를 살아서 이제는 할아버지가 다 되었지만 여전히 주님께서 그의 일생을 인도해주시는 동안에 그의 나라에 동참하게 해주셨습니다. 그의 나라를 세우고 그의 나라에서 기쁨과 희락을 누리고 그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그 모든 일에 동참하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예수의 환난에 동참할 때 경험하는 행복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만약에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다가 우리의 인생이 마름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이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니까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 그런데 이 참음이 누구의 참음입니까?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 요한은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곁에 있었고 예수님의 품에서 먹고 마시던 사랑스러운 제자였습니다. 그러니 아마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가장 예수님의 생애를 가까이에서 보았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이 마지막에 죽으시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사람이 바로 이 요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 도망갔지만 이 요한과 함께 도망가기는 했지만 나중에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돌아온 유일한 제자가 바로 이 요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에 가까이서 본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말하기를 애들아, 그분의 생애는 참음의 생애였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예수님의 생애는 참음의 생애였다. 그분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참으셨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그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부끄러운 수욕을 참으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그분이 이 세상에 33년이라는 긴 생애 동안에 사람의 아들로서도 당할 수 없는 그 모든 괴로움과 박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그분이 사셨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분이 당신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제자들에게도 배신을 당하시고 그리고 정작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는 혼자 가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그런 참음의 삶을 사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참음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오직 그 한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오래 견디고 참으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당신 자신이 화목제물로 죽으셔서 범죄 한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시키도록 주님이 분부하신 그 한 가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래도록 참으신 것입니다. 그 하나의 사명을 위해서 오래도록 참으셨는데 그 하나의 완성은 곧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고 죽으시는 거기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정말 진실하고 그 온전한 사랑이 다다랐습니다. 자기를 십자가를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저희들이 잘 몰라서 이렇게 하는데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고난 받고 죽으시는 당신의 처지보다도 당신에게 고난을 주었기 때문에 형벌 받을 그 죄인들의 처지를 더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모두 이렇게 되기를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위한 고난이었고 그 사명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는 참음의 생애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 구유에 누이신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고 내 영혼을 받아달라는 기도와 함께 아버지께 가실 때까지 그분의 마음에 정말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질서가 그분이 원하시는 질서가 얼마나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의 긴 생애는 참음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예수님의 생애는 죽기까지 자기를 복종하신 생애였다고 말합니다.
오늘 사도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음에 동참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지상의 생애를 끝나고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 안에 좌정하고 계시고 자기는 그렇게 부활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이니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 그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동안 당하는 모든 고난이 자기의 고난, 자기의 계획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참는 모든 것이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생각하고는 오래 참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생각해서는 오래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신실하게 따라는 모든 사람들은 항상 예수의 참음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생애가 당신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일생을 남을 위해 사신 생애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실하게 그분을 따라가기를 원하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고난을 피할 수가 없고 때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을 다 사용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자원을 다 활용해도 피할 수 없는 고난이 넘치도록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 그 자체가 참음의 생애였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33년이라는 생애를 사시는 동안에 주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무리에게 환영을 받으실 때도 있었지만 모든 무리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그리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환영받은 순간은 잠깐이었고 많은 무리들에게 하찮은 인간들, 쓰레기 같은 존재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에게도 조차 감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천대하며 핍박하며 침 뱉고 마지막에는 조롱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받으시는 그 모든 고난 중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만약에 그 고난이 싫어서 뿌리치고 튀어나오셨다면 우리의 구속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의 장면을 가리켜서 그분은 마른땅에서 나온연한 순과 같고 그리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과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실 일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과 안위보다 더 중요한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깊이 참고 또 참고 그런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가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신실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몸의 일부로서 올바르게 살아가기만 하고 또 건강하게 예수께 붙어있기만 하면 그는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끝으로 손을 베면 몸의 어느 부분이 아픈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온 몸이 그 아픔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러나 못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병들어 망가진 몸의 부분, 살이 변하여 굳은살이 된 부분, 이런 부분들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안 계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맡기신 그 일을 교회가 따라가려고 할 때 많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우리 모두 원하기는 한번 간증 집에나 나올 것 같은 멋있는 고난, 예수를 위해서 장렬하게 죽을 순교자들이 받는 그런 고난이나 꿈꾸면서 자기도 한번 그렇게 멋진 고난을 받아보기를 원하지만 이 땅에 있는 교회가 부족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때로는 아무 가치 없어 보이는 일 때문에 모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룩한 사명을 위한 박해라기보다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들볶이면서 사는 것 같은 정말 추접스럽고 쓰레기 같은 고통이 자기에게 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사도는 일생동안 열한 사도들이 모두 죽고 난 후에도 이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전승에는 95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러나 95세까지 산 그 긴 생애를 지날수록 이 사람은 점점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는 동리에 불을 내려버릴까요? 하고 물어볼 정도로 과격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긴 세월을 예수님을 만나서 살고 또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후에는 이렇게 사명 하나를 따라서 오래도록 환난을 당하며 예수의 나라와 그 참음에 동참하니까 그 속에서 점점 참음의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너무나 연로하셔서 기동할 수없고 말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살았는데 지체들이 그분을 모셔다가 교회에 세우면 어눌한 말로 손을 높이 들고 애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한마디만 하고 내려가면 교회가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무엇이 변하기 쉬운 사람을 이렇게 날이 갈수록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을까요?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 사람이나 우리나 모두 부패한 사람인데 그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주위를 보면 예수 믿고 젊어서 죽었더라면 훌륭했을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순결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노년에 정말 미끄러져서 주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은 젊어서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실로 당시에 웬만한 사람이 누릴 수 없는 그 긴 수를 누리면서도 날이 갈수록 순결한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많은 환난 속에서 참았기 때문에, 환난과 많은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그 불길과 그 고난 속에서 갈수록 순결한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믿음을 꺾고 구차한 목숨을 구하기보다 오히려 영생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만날 날을 사모하면서 이 외로운 밧모 섬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주께서 보여주실 계시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신령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코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이 세상에서 더욱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더 정결케 하고 더 깨끗하게 하셔서 그래서 예수의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사랑하는 교회에 시련의 불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성도에게 고난의 불길을 보내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고 살 때 언제나 가슴에 새길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맡겨주신 그 길을 걸어가고 내게 생명주시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환난을 참고, 예수 때문에 나라에 기쁨에 참여하고, 예수 때문에 그 참음에 동참하고 하면서 걸어갑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불평하면서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다투면서 견디는 것은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많으면서 인내하는 것은 인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주님이 보내주신 피할 수 없는 고난이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예수의 환난과 나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당하여야 하는 시련의 경우에는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기 되고, 모두 볼 수 있지만 눈을 감고 조용히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는 세상, 입을 닫으면 언어가 의사를 소통할 수 없는 이 세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입을 다물어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래서 그분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주님과 함께 사귀면서 받았던 그 많은 행복, 예수님 때문에 누렸던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행복과 특권, 그리고 예수 때문에 누렸던 그 많은 유익들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은즉 내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리라.
예수와 함께 많은 복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 고난당하실 때 나도 거기에 참여하여야 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볼 수 있어도 눈을 감고, 들을 수 있어도 귀를 막고, 말할 수 있어도 입을 닫고, 그리고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들어서 언제나 거기 계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언제나 변함없이 당신의 피로 사신 우리를 지켜보시는 그 예수님을 관상하면서 그러면서 참고 또 참고 또 인내하고 또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고난을 받아도 그리스도의 몸은 보호하고, 나는 멸시를 받아도 지체들은 사랑하며, 나는 많은 괴로움을 당해도 사랑하는 형제들은 도움을 받으면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잘 들으십시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내 밖에 있는 환경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이기심, 그 하나만이 그 모든 아름다운 삶을 가로막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진짜 언제든지 내가 예수 따라 가고 그 예수의 환난과 그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죽어야 될 자아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자아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면서 사람 때문에 참고, 인간 때문에 견디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인내해서는 그 속에 있는 자기가 죽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십시오. 날마다 나에게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아꼈던 사람, 예수의 발자치를 따라갔던 사람, 부족하지만 예수님이 온전케 하시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 그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나도 걸어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예수 죽음의 기운이 자신의 영혼에 깊이 스며들도록 오! 예수 죽음의 기운이여 내 안에 오소서, 그래서 나는 죽이시고 예수는 내 안에 사소서. 자기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깨트려서 형제들을 유익하게 하고,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지체들은 공경하고 그래서 결국은 전체적으로 나는 시련을 당하나 교회는 보호받고, 예수의 몸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그런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결국은 주님은 그 모든 사물의 질서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주님 앞에서 일생을 살기로 십자가 아래서 작정한 사람입니다. 언제 우리가 평탄한 길을 주시면 예수 사랑 나타내고 살지만 고난이 오면 난 못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랑에 감격할 때 우리가 그랬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신앙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이 세상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우리가 소망 둘 곳이 없는 곳이라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결국은 우리에게는 매우 쓰고 고통스러워도 영혼에는 양약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약으로 날마다 우리 눈에 비늘을 벗겨내서 잠시 있는 것과 영원히 존재하는 것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 것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고,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버리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좋은 것들을 택하면서 일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 마음에 가득한 예수의 사랑을 그대들에게 전합니다.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마지막에 쓰러질 듯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예수의 품에 안기시는 그날까지 참고, 또 참고, 또 참아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참아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