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꾸는 생활 태도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사과, 관계의 지혜(잠15:1) 2007.4.15 주일오후 1
2. 다툼, 관계의 파괴(잠20:3) 2007.4.22 주일오후 10
3. 약점을 들춤, 관계의 위기(잠17:9) 2007.4.29 주일오후 18
4. 위로, 관계의 강화(잠17:17) 2007.5.6 주일오후 26
5. 부정적 태도, 자기고립의 길(막2:1-4) 2007.5.13 주일오후 35
6. 용서, 관계의 새로운 시작(잠17:9) 2007.5.20 주일오후 45
7. 사랑받는 비결(잠3:1-4) 2007.6.3 주일오후 50
8. 변명하지 않는 사람(창40:14-15) 2007.6.10 주일오후 59
9. 배우려는 사람(잠12:15) 2007.6.17 주일오후 67
1. 사과, 관계의 지혜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15:1)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봉사해야 되는지 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바로 잠언, 다른 성경에도 많이 흩어져 있지만 특별히 이 잠언에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잘 믿고, 사랑하는 일을 하지 않고, 인생을 어떻게 슬기롭게 살아야 할 것인가만 연구 한다면 그 사람이 그 일을 잘 해 낸다고 해도 하나님앞에 정말 훌륭한 덕이 있는 삶은 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복속 되어야지만 참 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실제적인 삶의 지혜가 모자라서 올바른 태도를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그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준다면 그 사람은 그 지혜 때문에 하나님앞에 정말 보다 더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고난이나 괴로움이 물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의 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괴로움을 주어서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외톨박이가 되는 경우도 있고,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다 떠나가 덕을 입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저 사람은 인덕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물론 다른 사람을 많이 돕는 사람입니다. 수전노 치고 인덕 있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풀어서 많은 사람을 도와주지만 그것만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지 절대 인덕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인덕이 있느냐?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서 많이 베풀면서도 삶의 지혜가 있어서 태도가 올바른 사람들만이 그 인덕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자녀인 청년들을 보면서 정말 걱정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물 흘리며 기도는 하고, 교리를 배운다고 하는데 삶의 태도가 많이 잘못되어 있는데 그것이 자기가 잘못 되었는지를 모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보면 참 걱정스럽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그래서 저는 오후 예배를 그렇게 부활하고 싶어서, 사실 오후 예배 솔직히 말하면 장로님들은 제 건강 생각해서 반대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집을 세우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주일 낮 예배에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버리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나 그래서 사실 오후예배를 연 것입니다. 그래서 오후 예배는 대게 우리들이 하나님앞에서 삶의 태도를 어떻게 고치며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작하는 시리즈가 몇 번이 될지는 모르는데 짧으면 10번, 길면 20번쯤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에 이른 삶의 태도라는 제목을 가지고 은혜를 받아 보려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에 우리가 유순한 대답은 화를 누그러뜨리게 한다는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 이제 첫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제목은 뭐냐면 용서를 비는 삶 혹은 사과 하는 삶입니다. 복잡하게 용서까지 안해도 사과 하는 삶입니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 온 다음에 땅이 굳어진다. 그런데 그것은 땅이 평지 이어야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평지이고 물이 잘 빠져야지 그 이야기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비탈이면 어떻게 합니까? 비가 오면 골이 패이고 땅의 질이 나빠서 진흙 덩어리입니다. 비가 오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창이 됩니다. 산이 있는데 나무가 없은 산에 폭우가 쏟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다 골이 패어서 비가 땅을 다 망가뜨립니다. 우리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평지와 같은 인성을 지니고 있으면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오히려 그 사람과의 사이가 친근해 지고 인간관계가 탄탄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보면 부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고 연단을 많이 받은 부부가 끈끈하고 탄탄합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있고, 직원들도 있지만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교인하고도 끈끈하고, 교회하고도 끈끈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친구도 다투고, 싸우고, 삐져도 보고 또 잘못했다고 빌어도 보고 이런 산전수전 겪어 본 친구들은 한번도 다투지 않은 친구와의 우정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인성이 산비탈이나 진흙 같아서는 안되고 평평한 땅이고 좋은 흙이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대학에 교수로 있을때의 일 이었습니다. 교수로 가니까 교수실이라고 아주 조그만 것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평생 공부방 하나 없다가 학교에서 내 방을 주니까 저는 너무 감격적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방을 준 것이 감격이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꺠끗하게 청소를 하고 사당동 가구시장에서 25,000원을 주고 소파를 사다가 거기에 하나 가져다 놓고 그 다음에 학교에서 준 책상 위에 테이블보라도 하나 씌우고 그리고 그곳에서 내 방처럼 애지중지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교수실 구조를 보니까 이상한 것이 옆에 있는 교수님 방하고 구멍이 뻥 뚤렸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봤더니 원래는 방이 하나 였는데 교수 수가 늘어 나니까 중간 하나를 막았는데 하필이면 그 중간에 라지에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막아버리면 양쪽에 또 라지에타를 달아 돈이 들어 가니까 라지에타를 두고 구멍을 뚫고 담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었는데 옆에 연세 드신 여교수님이 계셨는데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으셨습니다. 저는 소리에 너무 민감해서 너무 거슬렸고 그때 제가 누구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교한테 “교수님한테 가서 죄송하지만 볼륨 조금만 줄여달라고 부탁할래?” 그래서 우리 조교가 가서 문을 똑똑 두드리고 “교수님 우리 교수님이 볼륨 조금만 줄여 달라고 하시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야! 그래 내가 볼륨은 줄인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저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너는 나 보고 볼륨 줄이라고 하면서 너는 왜 교수님실에 네 친구들 데려와서 노닥거리냐?” 그러니까 그 조교가 거기서 아무소리도 못 하는 것입니다. “너 나보고 볼륨 줄이라고 하지 말고 네 친구들 데리고 교수님실 들어오지마 시끄러 죽겠어!” 조교는 떡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났으면 괜챦은데 이 분이 전화기를 드는 것입니다. 구멍이 뚫려 있어 옆에서 다 들립니다. 전화기를 들더니 신학과 과장한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신학과 과장님 이십니까? 저는 아무개 교수입니다. 나는 옆에 있는 김교수하고 좋은 이웃이 되어서 살아 보려고 하는데 신학과 교수들 왜 그렇습니까? 도저히 이것 화해가 안되네! 속상해서 이거 방을 옮기든지 말든지 해야지” 그것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더니 전화기를 탕하고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한번 반성해 보았습니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많이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 합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자존감 없이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그 날은 당신이 먼저 탕하고 나가 버려서 저도 그냥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말은 안 했는데 밤에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목회하기도 전이니까... 목회를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니까 이렇게 강심장이 된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까지도 처녀 같은 깨끗한 마음 이었습니다. 시달리지도 않고... 가슴이 벌렁벌렁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그동안 스트레스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라디오를 듣다가 끄지도 않고 자기는 그냥 강의를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니나노가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 없이 참다가 딱 한번 이야기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러나?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데 그러면 안 될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교수님을 찿아 갔습니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저 김남준 교수입니다.” “들어 오시죠” 벌써 안색이 곱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교수님 어제 일로 너무 속상 하셨죠? 저희 조교가 제가 없는 동안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제 연구실에서 소란을 피우고 교수님을 불편하게 해 드린 줄 몰랐습니다. 하여튼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때서야 얼굴이 펴지더니 “아! 그런게 아닙니다. 교수님이 미워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 조교가 버릇이 없어서... 앉으세요 차나 한잔 마시고 가세요” 그래서 차를 한잔 타 줘서 마시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다 하는데 아니라고 자기가 주책없이 라디오를 틀어서... 그리고 자기도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거기서 끝냈어야지 나이 먹어서 거기서 과장에게 전화를 걸고 한것이 자기도 얼굴이 붉어져서 잠을 잘 못 잤다고 했습니다. 말 나온김에 잘 되었다 싶어 “교수님 사실은 라디오 틀어 놓으시고 강의 들어 가셔서 제가 몇시간 동안 니나노 들었거든요. 제가 제일 싫어 하는 것이 니나노 이거든요.”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자주 있었거든요.” 그 다음부터 그 교수님하고 너무 친해 졌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자기 남편이 가져 왔다고 예쁜 케이스 들어 있는 맛있는 차를 가져와서 교수님 이것 타서 드시라고... 그런데 저는 빚지고 못사는 성격입니다. 맛있는 케익을 하나 사서 드리면서 “제가 빵집에 들러서 하나 사 가지고 왔는데 정말 부드럽고 맛있습니다. 출출할 때 드세요.” 그렇게 선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2년을 지내다가 그 분은 선교사로 가신다면서 퇴직을 하셨습니다. 그 후로 바뀌어진 것이 무엇이냐면 제가 그때는 책을 안 쓰고 우리 집사람은 기억을 할텐데 타이프를 쳐서 묶어서 아이들에게 읽혔는데 그것이 나오면 항상 하나씩 드렸습니다. 교수님이 그 타이프 친 것을 다 읽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전, 베델로 올라가자, 묶은 땅을 기경하라 다 읽고는 자기 동료 교수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김교수가 글을 썻는데 타이프쳐서 이렇게 보잘것 없이 제본이 되었지만 그 내용이 정말 좋고 우리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겠다 라고 했더니 다른 교수들이 “그래 나도 한번 읽어 보자” 그렇게 하나씩 내가 준 것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 교수님들 전체가 나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가 온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보다는 안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병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입니다. 국군 병원에서 근무하는 군인 이었는데 환자가 한명 실려와서 보니까 같은 군인인데 이 사람이 누구냐하면 자기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주먹이 세다가 자기를 수없이 구타하고 괴롭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대등한 군인이 되었으니 찿아가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야! 너 기억나냐? 너 고등학교때 나를 괴롭힌것 기억나지?” 그렇다고 하더 랍니다. “너 나한테 사과해라” 그러니까 그 친구가 화를 내면서 내가 너한테 왜 사과를 하냐고 해서 결국 그 친구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법정에서 진술을 하는데 일곱 번을 사과하라고 찿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으니까 옛날 그 원한이 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때는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그렇게 했으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해서 결국 친구에게 죽임을 당한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항상 잘 할 수는 없는데 잘못하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앞에만 잘못을 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도 뭐 맨날 생각할 것 같으면 좋은 신자인데 생각하기는 뭘 생각 합니까? 어느날 이제 환경에 어려움이 오고 한 대 얻어 맞으면 그래도 내가 잘못 했나보다 하고 그때서야 정신이 들지... 그런 삶의 태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괴롭힌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살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 주시지만, 새 출발 하는데 사람들은 다 등 돌렸어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등까지 돌리게 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각자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삶의 태도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무리 개선이 되어도 자신은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를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무슨일인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책망을 받거나 상대방이 굉장히 화가나서 지금 뭔가를 캐 묻는 것입니다. 그때 유순한 대답은 화를 멈추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격하게 뭘 어쨌단 말이야 하고 대들면 커다란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 여러분 전공이니까 잘 아실것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가 “여보 왜 이렇게 월급 봉투가 허술해”하면 “여보 미안해 이번달에 쓸일이 너무 많아서” 그러면 넘어 가는데 “내가 무슨 술을 먹어, 내가 무슨 바람을 펴” 그러면 아내는 있다가 본론이 아니라 왜 저녁에 들어와서 큰 소리 내느냐고, 그러면 이제 남편은 이 여자가 대드는 것 좀 보라고 이렇게 처음에 일어난 문제하고 아무 상관도 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판 싸우고 나면 왜 싸웠는지 이유가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가 “미안해 여보 잘못했어 다 내가 부족해서 그래” 이 한마디만 진실하게 하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예화) 자동차 운전 면허를 따고 한달밖에 안 되었는데 저도 생각이 참 없지 한달도 안된 그 병아리 면허 가지고 무슨 철원까지 간다고 멀쩡하게 운전경력 5년, 10년씩된 교수님들 뒤에 태우고 운전하고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수님들은 내가 운전 잘 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운전면허 취득한지 삼주 되었다고 하니까 교수님들이 갑자기 경상도 말로 시껍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갔다가 왔는데 이제 많이 피곤해 졌는데 휙 나오는데 대로에서 버스가 달려 오더니 끼이익 하고 서는 것입니다.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소로에서 나오면서 툭 튀어 나오니까 저쪽에서 운전수가 문을 열더니 씩씩 거리면서 시커먼 사람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잽싸게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3주밖에 안 되었거든요 정말 미안합니다.” 이 사람이 말 할 틈을 안주면서 계속 “미안합니다” 했더니 이사람이 나를 쳐다 보면서 “에이 씨 잘해요 잘해” 하면서 다시 차를 타고 갔습니다. 제가 그냥 차에 타고 멍하니 앉아 있었으면 문을 확 열었을 것입니다. “운전을 뭐 그렇게 하는거야!” 그러면 저는 “너는 왕년에 초보 아니었냐!” 한마디 했으면 유리창 날라 갔을 것입니다. 그런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사과를 적시에 안할까요? 우선 첫째는 무엇이냐면 자존감, 자존심 때문입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안 하는데 이것이 올바른 자존심이 아닙니다. 나는 일본을 보면서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불쌍하냐면 사람들은 정말 젠틀합니다. 동남아를 다녀보면 한국사람 어떻냐 하면 “굿”, 대만사람 어떻냐 하면 “굿” 그럽니다. 그런데 일본사람 어떻냐 하면 “젠틀” 이라고 합니다. 젊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 대접을 잘 못받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위안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 이렇게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접을 못 받는 것입니다. 독일을 한번 보십시오. 독일사람에게는 나치 이야기가 금기시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기분 나빠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대통령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서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머리를 수그려라 했더니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흐느꼈습니다. 국제사회에 다 보도가 된 것입니다. 이 나라는 정말 양심이 살아 있는 나라다. 그 사람들 괴롭힌 것 다 배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훌륭하게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남의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일본 보고 손가락질 하면서 하는데 우리는... 제가 월남에 갔을때, 두 번째인가 월남에 갔는데 월남 기독교 지도자들이 내 집회 하는데 다 왔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쭉 앉아 있는데 그 사람들 몇백불씩 도와 주고 하는데 선교사 한테 그랬습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 빼 먹지 말고 정확하게 통역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온 목사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와서 기쁩니다. 그런데 30년 전에 우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들 나라 사람들 끼리 싸우는데 우리 군인들이 와서 당신들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사과합니다” 그렇게 전하라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다 과거에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자기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본하고 뭐가 다른 것이 있냐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서 애를 낳고 32년 동안 쳐다 보지도 않고 그 아이들이 벌써 32살이 되었습니다. 30살이 넘었습니다. 자기들은 안하면서 일본 보고는 손가락질을 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잘못 했을때에 그것을 즉시 잘못했다고 못하는 이유가 둘인데 하나는 알면서 안 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자존감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올바르게 있는 것은 그 사람의 품위 이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있는 것은 열등감의 반영 입니다. 그래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절대로 사과를 안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 내가 잘못했는데” “그것 내가 책임 져야해”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처리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이 자존감이 잘못된 방식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삶은 비굴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아이들 말로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백명이 보면 99명이 네가 잘못했다라고 이야기를 해주는데 본인은 그것이 잘못 되었다 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반성의 능력 결핍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사회에서 똑같은 밥 먹고 똑같은 옷 입고 컷는데 학교는 대학도 나오고 고등학교도 나오고 배울만큼 다 배웠는데 왜 자기 반성 능력이 결핍 되었느냐? 요즘 아이들 키우는 것처럼 키우니까 반성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반성이라고 하는 것은 더군다나 자기 반성 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려야 합니다. 자기는 자기 편입니다. 그런데 반성은 자기안에 제 삼자를 세워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가끔 가책을 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이 객관적으로 세워서 너 이러면 돼 하고 자기가 또 다른 자아를 감시하게 하는 것은 끊임없는 사색의 훈련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아이들 컴퓨터 이것 못하게 해야 하는데 저는 안 합니다. 저는 진짜 이메일도 가끔 들어가서 볼 정도이고 일체 제가 안합니다. 그런것을 많이 하면 반성 능력이 안 생깁니다. 반성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색을 많이 해야 하는데 사색은 감각으로부터 멀어져야 사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육신의 오감을 가지고 보고 먹고 듣고 만지고 하는 이것으로부터 멀어져야지만 사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혀 못하면 느끼는 것이 없으니까 사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끔 느끼고 그 다음에 이것을 닫아 두어서 침잠속에 있어야지만 생각이 집중되면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 사색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매일 컴퓨터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감각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정신이 돌 정도로 감각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맨날 노래듣고 노래도 뭔가 생각을 하게 하는 노래가 아니고 그냥 덜덜덜 떨게 만드는 요상한 노래만 계속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구경가는것 좋아하고 텔레비전 보고. 책도 안 읽고하니 그런 인간이 어떻게 반성 능력이 생기냐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면 여러분 가정 자체가 불량품 생산 공장이 되는 것입니다. 다 A/S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서 삶의 태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안되는데 개념이 없는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일생에 몇사람이 안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삶의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고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좋은 부모 밑에서 사랑을 흠뻑 받으며 그 부모가 고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가 자식을 고쳐주고자 하는대로 모본을 보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부모 자체에게 개념이 없습니다. 부모 자체가 인간이 그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보는것도 없고 가르쳐 주는것도 없으니까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못 걸러지면 두 번째 그물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를 보면서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엄마가 아무리 공부하라고 백 마디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손을 꽉 잡고 우리 좋은 대학 들어가서 만나자 그러면 이 아이는 더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념이 있고 올바르고 삶의 태도가 잘 훈련된 친구들이 이렇게 개념이 없고 삶의 태도가 불분명한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냐하면 친구가 되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친구를 사귀면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주고 해야 하는데 그 아이들이 무슨 성인군자요 사도입니까? 안 합니다. 몇 번만 개념 없이 굴거나 얌체같이 굴면 단절하고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가능성이 있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선생을 만나면 되는데 나도 선생을 해 봤지만 공부 잘하고 예쁘고 착한아이들을 가까이 하고 싶지 개념이 없고 애들이 튀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감동을 주고 싶냐 하면 그것은 주님이 감동을 시킬때나 가능한 것이지 일반적인 속에서는 안 나오는 것입니다. 숙제도 잘 해가지고 오는 아이가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면 이 아이가 무슨일이지 어디 다쳤나 하고 생각이 되지만 맨날 숙제도 안해오고 투덜거리고 교수들 욕이나 하고 다니던 아이가 안 나오면 이 자식 또 안 나왔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군다나 요즘같이 몇 명 모아놓고 서당에서 가르치는 훈련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 새카맣게 모아 놓고 가르치는 그곳 어디서 그런 선생님을 만날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그물은 통과 했는데 네 번째 가능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끌어 안고 가르쳐 주는데 좋은 배우자가 왜 그렇게 망가진 배우자에게 장가를 가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다 결혼을 했으니까 해당 사항이 없는데 자매들 보면 황당합니다. 자기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한테 시집 갔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냥 독신으로 살다가 죽지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뭐 사모님도 목사님 존경하시고...” 10년 넘어 가니까 그런 현상이 조금 생겼습니다. 그럼 10년 살던 사람하고 결혼 하던지... 말도 안돼는 이야기를 오후 예배에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교육을 잘 받고 삶의 태도가 잘 되어있는 남자는 얼굴 뜯어 고치고 뺀드르 해 졌다고 해서 한눈에 뿅하고 안 갑니다. 절대 안 갑니다. 절대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태도가 너무 달라서 그것을 유지하는데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개 통과 했습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에 걸리는 것이 좋은 목회자를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여러분들의 삶의 태도를 고쳐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얼굴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고쳐 주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200명 정도 모일때는 삶의 태도를 고쳐 줬다고 확신합니다. 그 때는 제가 1월달에 모두 심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 가면 가정의 심방을 하고 부부가 문제가 있으면 남편, 아내 각자 교회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대학 다니는 아이들은 따로 심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어떤 지체는 처음에 가서 심방을 하니까 말을 안해서 한참을 이야기 하니까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너는 다시 심방을 해야겠다 해서 테잎을 이만큼 주고 한달안에 듣고 2월7일 월요일날 5시까지 와라. 그런데 왔는데 또 헛소리를 합니다. 다시 테잎을 주고 3월에 와라 그렇게 4차 6월까지 심방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펑펑 울면서 내가 세상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인생의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목회자가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일이 일어 났습니까? 부부가 싸우다가 싸우다가 네말이 맞는지 내말이 맞는지 목사님께 물어 보자 하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다 틀렸다 말입니다. 너는 이래서 잘못되었고 너는 이래서 잘못 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은혜를 받아야지 그 목회자를 존경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은혜도 안갚고 돌 같은 마음인데 똑 바로 살아 하면 “너나 잘 하세요”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다섯 개는 걸리기에 굉장히 어려운 그물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물들을 다 통과하고 빠져 나와서 각자 시집 장가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대손손 잘못된 삶의 태도가 대물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계에 흐른 저주입니다. 다른게 아니라... 그러면 누가 상식을 깨뜨리고 아주 덕스러운 인간이 나와 가지고 그 핏줄을 다 바꿔나야 하는데 누가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반성이 있으면 항상 사색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이 나은 이유가 뭐냐면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안하면 떙입니다. 열심히 봉사나 한다고 돌아 다니고 선교한다고 돌아 다니고 기도를 안하면 이것은 삶의 태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옛날에 있던 교인인데 장모님인가 장인 어른인가 돌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사위니까 상주에 속하는데 아내는 아버지 돌아 가셨나 어머니 돌아 가셨나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선교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빈소를 비우고 가버렸습니다. 자매가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서 하소연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불렀습니다. “당신 왜 그랬습니까?” 어물어물 해서 “당신 성경 구절 생각하면서 뛰쳐 나갔지?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어! 목사님 그것 어떻게 아셨습니까?” “틀렸네” 이것이 바로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해야 하냐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일정기간 떠나서 기도를 깊이 하면 그 속에서 자기 반성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아! 내가 잘못했구나” “아!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떠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났습니다. 체계적이지 않지만 좀 났습니다. 그런데 요즘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보십시오. 미친듯이 새벽에 일어나서 정신없이 돌아 다니고 애들은 게임을 하고 정신이 팔려 살고 있습니다. 엄마는 텔레비전에 빠지고 아빠는 직장일에 빠지고 아이는 게임에 빠지고 아무도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각자가 왕 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가면 어떻게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세우고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길러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 보는 삶입니다.
(예화) 2004년에 일본 자동차 회사 미쓰비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7명의 최고의 임원들을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를 법원에 냈습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130억 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그 회사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왜 이 어마어마한 거액을 청구 했느냐 하면 2003년도에 미쓰비시에서 신차가 출고 되었는데 결함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차를 리콜을 한다고 하면 누가 사겠습니까? 그래서 자꾸 감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면서 2004년 그 신차의 매출이 40%가 줄어든 것입니다.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고발해 버린 것입니다. 같은 자동차 회사인데 1989년도인데 도요다 자동차 회사에서 신형 렉서스를 출시해서 미국에 수출을 했습니다. 그래서 8,500대가 팔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가 잘 팔려 나가고 있는데 그 시승장에 와서 그 차를 사겠다고 온 사람이 자동차 딜러하고 같이 차를 탔는데 자동 항속장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100 킬로미터를 놓으면 100 킬로미터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함이 있는 바람에 벽을 들이 받고 차가 전파가 된 것입니다. 그때 도요다에서는 즉시 발표를 했습니다. 우리가 새로 출시한 신형 자동차에 자동 항속 장치에 문제가 있다. 그러니 그 차를 모두 리콜해서 고쳐 주겠다. 주위에서 미쳤다고 했습니다. 새로 나온 차이고 막 팔리고 있는데 문제 많다고 보도를 했으니 그 차를 사겠습니까? 그런데 예상을 깬 것입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24시간만에 자동 항속 장치의 부품을 모두 실어 왔습니다. 그리고 전부 연락을 해서 8,500대를 다 리콜을 했습니다. 리콜할 뿐만 아니라 차를 고칠때까지 타고 다닐 렌트카를 줘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새것으로 다 교체한 다음에 사장이 정중한 사과 편지와 함께 선물 하나씩 다 포장을 해서 보냈습니다. 용서를 해 달라고... 그랬더니 3년만에 미국시장 전체에서 1위를 점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인가 하면 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제가 잘못을 했습니다. 제가 정말 실수 했습니다. 나를 용서 하십시요라고 할때 처음에는 그 사람을 깔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이사람의 마음속에는 저 사람이 한번 잘못 했다고 꺽어지면 그것 자체가 무슨 의미이냐면 나는 당신과 계속 관계를 가지고 싶습니다. 내가 잘못을 했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아직까지도 당신은 저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런 자체가 상대방에게 존중심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람도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표현을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항상 그 마음속에서 그늘을 항상 거두고 그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에 있는 지체들에게 용서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가르쳤습니다. 무슨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교회안의 이 영적인 공동체도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용서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빌때 용서를 하고 용서를 빌때 그것이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용서할때마다 치루신 희생과 노고를 생각하고 또 내가 그런 용서를 덧 입었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앞에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 하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푸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제 기도는 충분히 했으니까 그래도 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가서 사과를 해 보십시오. “여보 내가 어제 당신한테 짜증을 부렸는데...그리고 사실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거든” 그런것은 이야기 하면 안됩니다. “당신이 왜 잘못을 했는지 내가 한번 이야기 해 볼까?” 그렇게 시작을 하면 이것은 싸우자는 이야기 밖에 안 됩니다. 그런것은 나중에 그 사람의 마음이 다 풀어 졌을때 그때 이야기하면 다 받아 들여 집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 하면 안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가슴에 묻어두고 우선 사과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여보 내가 어제는 당신한테 잔소리 해서 미안해 피곤하게 회사에서 일하다가 돌아 왔는데 내가 옹졸한 마음에 당신에게 잔소리를 했어 미안해” 그러면 남편이 금방 그럴 것입니다. “여보 내가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늦게 돌와 왔으면서도 큰소리 치고 미안해” 그러면 다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 알게 됩니다. 왜 그렇게 짜증을 냈나, 남편이 먼저 잘못을 했지만 내가 말하는 태도가 남편의 자존감을 헤쳤나, 나머지는 말 안해도 가슴에 흘러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정말 젠틀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까이서 섬기던 지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체의 특징은 뭐냐면 정말 자기 과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해도 나는 반신반의 했는데 어느날 이야기 하는데 목사인 내가 화가 날 정도입니다. 내가 쭉 이야기를 했더니 “그것은 목사님이 모르셔서 하는 말씀 인데요” 조금 이야기 하니까 “그것은 목사님이 일부분만 보셔서 그런데요.” 또 조금 이야기 하니까 “그건 목사님이 다른 사람 이야기 듣고 그러시는 것인데요” 조금 또 이야기 하니까 “그것은 목사님이 전체를 파악 못 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내가 그랬습니다. “야! 내가 너만큼 모를것 같니?” 막 나갔습니다. 그 후로는 깊은 대화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한테 매우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면 외로운 것입니다. 뭔가 마음에 안들어서 나무라면 “목사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제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일 지나 가보면 그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그가 힘들게 만들었던 것들이 나에게 알려 집니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야단을 친 것을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르셔서 그러시는 것인데요” 그것은 이해 가는데 “그것은 한쪽 면만 보시는 것인데요” “남의 이야기만 듣고 그러시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이 뭐냐면 생각이 모자라고, 뭘 모르고, 귀만 얇고 이런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과할 지점에 사과를 안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떡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떡으로 만들고도 어떻게 그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 지기를 바랍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너희는 용서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그래서 초대교회의 전통은 뭐냐면 형제들을 만나면 자기의 죄를 서로 형제들에게 고백을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서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멀리 갈 것도 없고 교회에서 보면 껄끄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자기가 잘못을 했는데 가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그러면 돼” 그러면서 공을 저쪽으로 넘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잘못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이라도 만나서 한번 이야기 해 보십시오. “아무개 집사 사실 오늘 설교 들으면서 생각 났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당신이 잊어 버렸을지 모르지만...” 절대 안 잊어 버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을때 까지 안 잊어 버리고 자식들 한테 남기고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런 저러한 일이 몇 년전에 있었는데 사실 나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잘못 했다고 생각해 그 생각이 늘 있었지만 사과할 기회가 없었어” 어느날 밤 12시가 넘었는데 우리 딸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3층으로 올라 왔습니다. 그래서 “애가 공부 하느라 고달프고 한데 왜 콧노래지?” “어 아빠!” 그러더니 들어오면서 팔로 꼭 껴 안으면서 “아빠 오늘 너무 기분 좋은 일이 있었어” 그래서 “왜? 선물이라도 받았니?” “아니!” 몇 달동안 힘들어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오늘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이슬아 내가 오늘 할 이야기가 있어 교회 앞마당까지 왔는데 좀 내려 올래?” 그래서 내려 갔더니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니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오니까 날아 갈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날아 갈 것 같은 사람들이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무거운 것을 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한다 라고 하는 것은 마치 새가 추를 달고 날라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벼워야지만 사람들에게 기쁨이 넘쳐서 내가 도와줄까? 얼마나 힘들겠니? 내가 갈까? 힘든데 내가 도와줄까? 이런 마음이 기쁨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가서 한번 해 보십시오. 기도 간절히 하고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 해 주셨는지 생각을 하고 그리고 가서 한번 “미안해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번 용서를 빌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2. 다툼, 관계의 파괴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잠20:3)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제일 급한것은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설교를 했습니다만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육신의 삶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뜨거운 사랑? 그런데 그것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우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면 그 다음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 가서 사람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을 하시는 분에게 제가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돈 못버는 분들을 보면 기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보십시오. 예전에는 음식점에 싸고 많이 주면 다 갔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고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까 좀 비싸도 맛있는 집에 갑니다. 경제 수준이 조금씩 나아지니까... 전에는 맛있고 값이 합리적이면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음식이 맛있는게 문제가 아니라 좀 깨끗하고 갔을때에 사람 대접을 해주는 음식점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음식점에 들어가 보면 배가 나온 사장이라는 사람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맺는데 부지런히 손님들 신발을 거꾸로 돌려 놓습니다. 그 집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이제 무엇인가 사람 대접을 받는 그런 곳으로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면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영광입니다. 다투지 않는 것이 대접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 나름대로의 영광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더라도 사람 나름대로의 영광이 있습니다. 원래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것은 뭐냐면 재물, 명예, 좋은것이 많은 것 이런것이 영광 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남 다른 대접을 받게 하는 효과 그런것이 영광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희대의 유명한 사기꾼 살인자가 “우리 둘이 사진 한 장 찍읍시다” 하면 여러분들 도망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명한 사람이 오면 서로 그 옆에서 사진 한장 찍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영광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영광스러운 사람 옆에 있으면 그 영광의 부스러기를 조금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는 몰라도 유명한 사람하고 같이 악수를 했던 그 사람이다 하면 좋아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제가 전도사 였을 때인데 목사님이 김포공항에서 올림픽 가는 선수들을, 교인이 하나 있어서 축복 기도를 했는데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텔레비젼을 보니까 기도하는 것 1초정도 나왔습니다. 또 어떤분은 텔레비젼 촬영을 했다고 해서 봤더니 손만 계속 나오더랍니다. 그것도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사람들이 받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의 기쁨입니다. 그것이 영광 인데 사람들이 그 영광을 인정해 주는 것이 너그러운것 같습니까? 인색한것 같습니까? 인색합니다. 인색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좋은 점들이 사람들에게 과소평가 받거나 없이 여김을 받지 않도록 자신의 영광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자존감을 지킨다, 품위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다투지 않는 것이 영광입니다. 다투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이 다 그렇게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잘 다투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것 같습니다. 목사들이 모인 사회에서도 늘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접을 받는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건드리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상대해 주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친구가 없이 외롭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간관계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굉장히 외롭습니다. 마음 털어 놓을 친구 없고 어려운 일이 있을때 마음이 따뜻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다투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희생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꾸 다투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투게 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두가지 인데 첫째는 혈기 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별로 엄청난 이해 관계가 얽힌 것이 아닌데 항상 이 속에서 울컥하고 솟아 나오는 혈기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속에서 억누를수 있는 저항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그렇게 혈기를 부리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왠만한 사람들이면 다 그 정도는 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이 튼튼한 것입니다. 여기 의사 선생님들도 많은데 이런 이야기 했다가 나중에 면박 당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는데 혈압이 높으면 위험하죠? 그렇죠. 그런데 사실은 혈압의 수치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혈관의 튼튼함이 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혈압이 매우 높은데 혈관이 과장을 하자면 바늘로 찔러도 안들어 갈 정도로 말도 안되지만 그렇게 튼튼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왠만하면 안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혈압이 조금 높은데 선천적으로 혈관이 아주 얇게 타고난 것입니다. 그래서 툭하고 터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혈압이 높아서 터지나 혈압이 안 높아서 터지나 마찬가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사람중에 늘 혈압약을 먹거나 고생하던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가 혈압의 문제를 못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도가 넘어가는데 혈관이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탁하고 터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 정도는 끓고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살아 오면서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친구,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신앙을 가지면서 자기를 절제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혈관 벽이 두텁습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끓어도 잘 안 터진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정철수 집사님이 나를 눕혀놓고 진찰을 하더니 배를 만지면서 스트레스 덩어리가 창자에 다 모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내가 누가 준 것인데 했습니다. 이것을 누르고 살 수 있는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그 혈기가 없다고 하는데 없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절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조금만 끓어도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많이 끓는데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보면 조금 끓어도 후루룩 나와 버리는 사람이 괜챦습니다. 그래서 혈기 부리는 사람들 중에 착한 사람들 굉장이 많습니다. 여러분 남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성질 부리고 그 다음에 몇배 갚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 안 사줘도 되는데 꽃다발 사오고, 다이아몬드, 보석 사주고, 옷 사주고... 한번 성질을 부리는데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들어 갑니다. 사람이니까 혈기가 없을 수는 없지만 이것을 계속 방치를 하면 이 속에서 계속 그 사람의 얼굴 모양을 망가뜨려 버립니다. 여러분 늘 다투는 기질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러면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마음에 안들어도 표정이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골이 패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름 펴지는 약을 발라도 안됩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항상 쾌활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눈꼬리에 잔주름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이 웃어서... 그래서 어떤 사람을 붙들고 웃는 사람들이 있던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인상을 완전히 결정하는 것입니다. 형언 할 수 없는데 하여튼 그 사람은 싫습니다. 마주 치는것 조차 싫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답고 웃고 밝은 모습을 보는 것이 좋지... 이런 것입니다. 저 사람이 계속 다투는 기질이 있어 인상이 뭔가 우울하고 사람들에게 도전적인 인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은혜로운 상태이면 그런 것들이 견디어 지고 참아 집니다. 그런데 무한정 그런 에너지를 집어 넣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에너지가 더 이상 힘들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은 만나기가 싫은 것입니다. 얼굴 보기가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편애라고 하는데 편애 아닙니다. 편애가 아니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 더 좋아 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열두제자중 세 사람을 더 좋아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이 순서 입니까? 무슨 순서 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에게도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명이 있고, 열두명이 있고, 칠십여명의 전도대가 있고 수 많은 무리들이 있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혈기를 통제를 안 하면 무슨 말을 해도 싸우려고 덤벼드는 사람들처럼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앞에 입을 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하고 싶은데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이 사람들의 가슴에 찬바람이 흐르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여성이 있었습니다. 좋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도 좋은 대학을 나왔습니다. 여자들 보면 왜 당찬 여자들 있지 않습니까? 당차서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실적도 너무나 잘 올리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사람들을 보면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승진이 있는데 떨어졌습니다. 이 여자가 책상에 엎드려서 펑펑 울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남자들만 못한게 무엇이 있나? 승진한 사람들 보니까 이해가 안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적을 많이 올렸고 그것이 객관적인 데이터로 나와 있는데... 이 여자가 혈기가 있으니까 못 참고 인사담당 상무를 직접 찿아간 것입니다. 문을 탕탕 두드리고 들어가서 “상무님! 저는 이 회사에 들어와서 이 회사밖에 없었고, 정말 집에 잠깐 다녀와서는 이 회사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보이면서 “보십시요! 내가 누구만 못했습니까? 이 만큼 실적을 올리고 가는 곳마다 나는 이 회사를 위해서 기여 했는데 어떻게 회사가 나에게 이렇게 배신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상무가 담배를 뻐끔뻐끔 피면서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안절부절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할 말이 없으니까 저렇게 하고 있는구나 하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공격을 한 것입니다. 상무님이 담뱃불을 끄면서 하는말이 “야!” “예” “잘들어?” “예” “나도 너 승진 시키고 싶거든 그런데 네 직속상관이 네가 싫데” 이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충격이었습니다. 자기는 무조건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은 것입니다. 상사하고 늘 부딪히고 경쟁관계에 있는 동료들하고는 늘 경쟁하면서 끊임없이 이익을 가지고 다툰 것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 굉장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데 그러나 이 사람을 직접적으로 도와 주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막판에 자기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어떤 유능한 사원이 있는데 처음에 탐을 냅니다. 그래서 돈이 없다고 하면 돈을 더주고, 일이 많다고 하면 줄여 주어서라도 이사람의 능력을 다 빼어내고 싶어합니다. 일을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사람들하고 부딪힙니다. 한번 두 번 부딪힐 때는 이사람 편인데 “자식들 일도 못하는 것들이 그 친구 만큼만 하라고 그래” 그런데 세 번, 네 번 반복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고통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여기 있어 올려 주는 이익과 유익이 큰가, 내가 마음적으로 당하는 고통이 큰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그것이 아니라 이사람이 여기에서 일할때 이 사람이 올려주는 실적이 큰가, 아니면 이 사람이 가져가는 돈이 많은가, 아니면 직원들이 조금 불편한게 큰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직원들의 불편한 문제가 아니라 조직을 이끌면서 자기에게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차 없이 내보내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에 계속 갈등하다가 어느 순간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직장이나 사회에서 보면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사장이 자기를 심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확 배신하는 것입니다. 확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오다가 그것이 탁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혈기를 가지고 다투는 것입니다. 성질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의 부모들은 무서워서 받아 주었을지 모르지만 냉정한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절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습관적으로 되었을 때는 자기가 그 회사 사장이면 안 짤릴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짜를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2인자라도 언젠가는 옷 벗고 나와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점수를 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말고 모든 사람이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 만나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 사람, 식사라도 한번 하고 싶은 사람,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갈 이유가 있을때 같이 있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혈기입니다. 자기가 다행히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혈기를 부려도 사람들이 대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 자식!” 이라고 버린 뒤 입니다. 그것이 결국 덕이 있는 삶의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에게 빛을 비추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이 오매한 영성이나 심오한 기도의 세계, 누구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진리의 바다 이런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여줘도 잘 모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흘리는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덕스러운 삶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착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이십시오.
두 번째는 뭐냐면 다투게 되는 더 큰 이유는 이익의 충돌입니다. 그런데 다투기를 좋아 하는 사람은 자기 이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아 그럼 목사님 돈 이야기 하시나 하는데 돈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세상의 원리와 이치가 주고 받으면서 이 사회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자라는 인간들이 부족한 지체들로서 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갈 때 하나님이 지속시키는 두가지 방편을 주셨습니다. 나눔과 용서입니다. 그런데 항상 한쪽에서만 흘러 들어가는 나눔은 베품이지 나눔이 아닙니다. 한쪽에 있는 것이 오늘은 이렇게 흘러 들어갔는데 내일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흘러 들어 옵니다. 오늘은 저 사람이 내게 죄를 지어서 내가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를 해 주었는데 그 다음에 내일은 저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해 주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한 회사에서 아프리카로 전략적인 수출을 하기 위해서 상사원을 내 보냈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되자 고위직 간부들을 내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서 승진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이 아직까지 경제 개발에 대해서 눈이 어두울때 그 나라 공기업하고 계약을 맺었는데 누가 봐도 이것은 환상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맺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것은 땅집고 헤엄치기다. 어떻게 이런 계약을 성사 시켰냐?, 이것은 완전히 몰아주는 계약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계약서를 회장이 들여다 보고는 “어느 놈이 이 계약을 했어?” 칭찬 해줄지 알고 저쪽에서 “제가 책임지고 했습니다.” 했더니 “다시 가! 이것도 계약이라고 했냐?” 왜 그랬을까요? 사장이 하는 이야기가 “아프리카 그 나라 땅이 얼마나 넓은데 한번 장사하고 말래?” 그 사람들이 뭘 몰라서 계약은 했는데 계약대로 진행되다 보면 이익을 한쪽으로 거의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약이 이미 성립 되었으니까 이 계약을 파기할 수 없으니까 이번에는 이 사람에게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다음에 기회가 주어지면 절대로 그 사람하고 계약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알아보고 동의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청년 가운데 한사람이 있는데 사무기기를 파는 청년 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무기기를 가져가면 중고하고 바꾸기도 하고 돈을 얹어서 교환해 주기도 하고 하는 일을 했는데 어떤때는 가면 너무 좋은 기계인데 이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 얼마만 주십시오 하고 떨이를 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항상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이것은 너무 좋은 기계입니다. 이렇게 헐 값으로 파시면 나중에 후회 하십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을 제가 소개 시켜 드릴테니까 저한테 파시는 가격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그 사람에게 파십시오” 그 사람이 동물 보듯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세일즈맨이 이런 놈이 있나 하고... 그런데 그 대신 자기는 그런식으로 영업을 했기 때문에 한번도 살아 가면서 위기를 만난적이 없고 거래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친구가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개를 시켜주고 소개를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는 다툼의 원인이 대부분 작은 이익에 너무 밝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양보를 하고 그러면 언젠가 그 메아리가 다시 돌아 옵니다. 그런데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게끔 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빈대들입니다. 이 빈대는 한번은 빈대가 될수 있지만 영원한 빈대는 될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빈대가 되기 위해서는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 다니면서 물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물린 사람은 절대 그 빈대하고 같이 안 논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양보를 하면 언젠가 메아리가 되어서 다시 내게로 돌아 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못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개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시리즈를 외워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살아가는 길이 굉장히 고달 픕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한번 두 번은 양보를 하지만 내가 양보하는 것을 저 사람이 이용한다고 할때 그 양보의 크기나 질이 문제가 아니라 모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용 당한다고 생각할 때 모욕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과는 인간성을 한번 알고 나면 그 다음에는 거래가 성립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피해가는 것입니다.
(예화)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장로님이 저에게 복장 터지는 이야기를 했는데 공장이 큰게 있는데 전기가 필요해서 업자를 불러서 형광등을 달았다고 합니다. 공장에 형광등을 400개를 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사를 끝내고 그 다음날 일을 하고 요절복통을 했다고 합니다. 400개를 한꺼번에 켜고 끄게 해 놨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400개를 다 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업자를 불러서 어떻게 인간이 그럴수 있냐고 했더니 이 중국사람이 계약서를 펴 놓더랍니다. 그러더니 계약서 봐라. 형광등 400개 써 있지 스위치 몇 개라는 것이 어디 써 있느냐? 이런 사람들은 그 회사가 다시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주고 스위치를 달았다고 합니다. 다시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옛날에 제주도는 제주도가 아니라 제주목 이었습니다. 목이면 군 보다는 크고, 도 보다는 약간 작은 개념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는 관리를 목사라고 했습니다. 저같은 목사가 아니고... 그래서 한양, 서울에서 내려 갈 것 아닙니까? 왕정시대이니까 아무개가 이번 제주목사로 내려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삼가명복을 비나이다 왜냐하면 그때만해도 제주도는 생기는 것이 없고, 가난하기 이를데 없고, 고구마나 파서 먹고사는 그런 시골이었고 배를 타고 가면 몇일씩 노를 저어서 돛단배를 타고 가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그곳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귀향 갈 때 제주도로 많이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사람이 가는데 친구들이 “어쩌다가 자네는 재수가 없어서 제주도 목사로 가나?” "에이 뭐 사람 살라고 하는데 일이 있겠지?“ 하고 갔습니다. 갔는데 제주도에서는 난리가 난 것입니다. 새로 신임 목사가 온다더라 하니까 아무리 제주도가 가난하다고 해도 그곳에서 사업하는 사람도 있고, 논마지기라도 크게 가지고 있는 부자들도 있을것 아닙니까? 각자 산삼이니, 녹용이니, 금부치니, 필육이니를 가지고 줄줄이 새로 부임한 목사의 관아에 줄을 선 것입니다. 옛날에는 부임하면 그것이 업무 시작이었습니다. 들어오면 옆에 앉은 비서가 아무개 금 10냥 그리고 놓고 가면 인사한번 하고 절하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가 다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들어 왔는데 ”나는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제주도에 왔는데 당신들을 잘 살게 해주려고 온 사람인데 그런 금부치 없이도 나는 먹고 살만 하니까 가지고 가서 사업에나 보태 쓰고 그래도 남으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누어 주시도록 하시오.“ 그리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부자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 주어야지만 마음이 편안할텐데, 이것이 관례적으로 있었던 일인데 이 목사가 절대적으로 이것을 사절하는 것을 보니까 뭔가 고단수의 정치적인 계략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 적어서 그러는 것인가?” “우리 한번 길들이는 거야 뭐야!” 하면서 부자들이 흩어 졌습니다. 그 소문이 온 도에 다 퍼졌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옛날의 목사는 거기에 앉아서 관아의 기생들이나 거느리고 술이나 먹고 재판이나 하고 그러더니 수시로 행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높은 부자들이 사는 집이 아니라 가난한 저작거리 그 다음에 소 키우는 동네 고기 잡는 어부들 이런 사람들을 찿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든지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모든 백성들이 그 목사가 있는 관아에 찿아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 만나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개월정도 시간이 흘러 가니까 도 전체에 목사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임기가 2년 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년 반쯤 지났는데 사람들은 다 아쉬운 것입니다. 제주도가 생긴 이래 이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내려 오신것이 처음 이었는데 이분이 가시면 이만한 분이 오실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 임기가 끝나고 올라 갈때가 되었는데 이제 한 두세달밖에 안 남았는데 그렇게 자주 나오던 저작거리도 안 보고 목사님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도와 주었다더라, 부자들을 혼냈다더라, 불량배들을 쳐 넣었다더라 이런 이야기들이 일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제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요즘 왜 안나타나시나?” 그래서 관아에 찿아가서 물어 보니까 목사님이 매우 위중하셔서 누워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뵙게 해 달라고 하니까 목사님 자신이 자신의 몰골이 너무 사나워서 절대로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자기의 병실에 들이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온 도민이 궁금증이 더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이 마음씨 좋고 어진 목사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온 몸에 종창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의사도 가보고 백약을 썼는데 무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들리는 이야기가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냐? 그러면서 백성들이 매일 그곳에 몇십명씩 모여서 흐느끼면서 우리 목사님 빨리 쾌차하시라고 그렇게 흐느끼는 사태까지 벌어 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길이 없나하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거기에 비서 같은 사람이 하나가 방법이 하나 있기는 있는데 굉장히 어렵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가 절벽에서 풀뿌리라도 케 오라면 케 올테니까 한번 이야기 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뭐냐면 약이 오직 한가지가 있는데 종창마다 우황을 발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황이 뭐냐면 소가 야생하는 삼을 먹고, 먹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생겨서 종기나 암 같은 것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덩어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아무 소나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삼을 먹어야하고 삼을 먹은 모든 소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겨야 생기는 것인데 그곳에 소를 많이 길러서 우도가 있었는데 그래서 소가 많으니까 당연히 어디에서 삼 먹는 소도 있을것 아닙니까? 별의별 소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도 생기는 소가 있고 해서 거기가 한때 우황의 산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황의 값이 얼마나 비싼가 하면 지금 정확히 모르겠지만 금 하고 비교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디 목덜미에 났다더라 엉덩이에 났다더라 하면 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났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발라야 되겠습니까? 그때부터 온 제주도에 우황 수집 운동이 벌어 졌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세간도 팔고, 자기 소도 때려 잡아서 우황이 있어 보이는 소는 잡아서 그것을 빼서 우리 목사님 드려야 된다고 모은 것입니다. 그렇게 방금 뜯어낸 우황이 양푼으로 하나 가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라도 바르고 나으시라고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몇일이 지난 다음에야 아주 중요한 몇사람에게만 면회가 허락되었습니다. 가 보니까 온 몸을 전부 우황으로 뒤집어 쓰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종기는 안 보입니다. 이제 거의 다 나아가고 있는 증거 였습니다. 드디어 목사가 근엄하게 입을 띠면서 “내 사랑하는 백성들의 넘치는 애정으로 이 부족한 사람들이 거의 완쾌되어 가고 있습니다. 몇일 후에 우리 모두 한번 만납시다.” 그리고 몇일 후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몸에 바르고 있던 노란 덩어리는 우황이 아니라 계란 노른자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대 제주도에 부임한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임금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갑부가 되어서 돌아간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챙겨 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거기에 나타나서 칼과 채찍을 휘두르고 곤장을 쳐서 백성들을 감옥에 가두기 시작했다면 작은 재물을 얻고 떠나간 다음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고 아마 조정에서는 아마 제대로 목민을 못했다고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살면서 이렇게 양보하고 자기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툼을 면하고 피하는 비결입니다. 대게 다투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관계를 갖는데 있어 진통제적 관계 기술이 있고 보약적 관계 기술이 있습니다. 진통제적 관계 기술은 뭐냐면 아파서 죽게 되지 않는 한 절대 약 먹고 그런데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맞는 것이 진통제입니다. 평소에는 죽어도 안 찿아 가고 전화는 물론이고 편지 하나 안 하고 기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절대 나누워 주지 않고 아쉬울 때가 되면 너무 친한 것처럼 찿아 와서 아양을 떱니다. 이것이 진통제적인 인간관계의 기술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이익에 밝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정말 그 사람을 알고 깊이 이해하는 삶을 살기가 힘이 듭니다. 보약은 봄에 먹으면 가을에 힘이 납니다. 가을에 먹으면 내년 봄에 힘이 납니다. 그래서 지금은 괜히 공돈 들여서 먹는 것 같은데 나중을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저 사람에게 베풀 수 있을때 다툼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오히려 조금 더 불편하고 내가 오히려 더 힘들게 그렇게 합니다.
(예화) 제가 직장 다니고 있을때인데 아침에 회의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로 이야기 하자면 팀장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왜 싸우나 보니까 쓰레기를 사무실에서 발생 했으면 그것을 문 앞에 내 놓으면 되는가? 아니면 직접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가를 두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러는 것입니다. “아! 저 쫌생이 너무 싫다” 그 사람은 그날 회의 이후로 모든 쓰레기를 자기 문 앞에까지만 놓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쓰레기통까지 가져가 버립니다. 이 사람은 훨씬 편리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자기 친구가 되고 어려울 때 자기 우군이 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그 회의 자리에서 다 잃어 버리고 아주 치사하고 야비한 자기의 얄팍한 인간성을 남김없이 다 들여다 보여주는 기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소탐대실입니다. 작은 이익을 얻고 나머지를 다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이 어떤 것 입니까? 우리가 항상 그 사람을 생각하면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양보하고 희생하고 오히려 그를 섬기고 이런 일이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 주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다. 너희는 이런 섬김을 나에게서 받은 것을 기억하고 나의 이 정신을 물려 받아서 이번에는 나에게 받은 그 섬김을 나에게 갚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갚아라. 그러니까 내가 까다로운 사람을 만났을때 이렇게 생각 해야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까다로운 사람인데 하나님이 인내 해 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다듬어 지지 않은 성격인데 자기가 하나님앞에 다듬어지지 않은 성격의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가 하나님앞에 다듬어 지지 않았을때 얼마나 오래 참으시면서 자기를 다듬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혈기에 찬 사람들은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판단합니다. 이 사람은 상종할 사람이 아니다 이런식으로 순간적으로 판단 합니다. 사랑의 부족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오늘은 내가 양보를 해서 저 사람에게로 흘러가고 내일은 흘러 간 것이 저 사람에게 양보를 해서 나에게 흘러 들어오고 이렇게 하면서 있을때에도 없는 것처럼 없을 때에도 있는 것 처럼 그렇게 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이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이런 이치들을 따라 사람들이 산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그렇게 살아야겠습니까? 한번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간에 다툰것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익의 문제 아닙니까? 부모님 누가 모셔야 되냐? 병 간호 누가 하여야 되냐? 아니면 생활비는 얼마씩 보탤거냐? 그런것들 때문에 싸우는 것 아닙니까? 좀 양보하고 너그러웠으면 얼마든지 화해할 수 있는 관계 였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반성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빛된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삶인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 줄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약점을 들춤, 관계의 위기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17:9)
우리 지난주에는 다투는 것, 싸움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시작할 때부터 열받은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면 나중에 외로워집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람들은 나는 가끔 혈기를 부리고 뻣뻣해도 사람은 누구든지 부드러운 사람을 원합니다. 그런데 말할 때 그렇게 혈기를 부리고 아니면 사소한 일 인데도 마치 저 사람 안 누르면 큰일 나는 것처럼 싸우려고 하는 사람처럼 덤벼들면 기도생활을 많이 해도 고난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주 설교 더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그냥 끝냈습니다. 더하고 싶은데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오늘은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약점, 자기자신도 알고 있는데 잘 고쳐지지 않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컴플렉스라고 합니다. 그런것을 건드지리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데서 아무리 점수를 잘 따도 관계가 파괴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주전 3세기경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춘추 전국시대입니다. 많은 나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서로 싸움을 하던 그런 때 입니다. 그때 일곱나라가 있었는데 제나라, 진나라, 초나라, 연나라,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이렇게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나라 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비라고 하는 한나라의 공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덕망이 높고 사상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교훈을 모은 책 한비자 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세편에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 사람들은 용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실 용을 상스러운 짐승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식당 젓가락에도 용, 유리창에도 용, 신발에도 용, 심지어는 짜장면 그릇에도 용, 용을 그렇게 좋아 합니다. 그런데 그 용을 자신들은 단연코 용의 자손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의 자손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용의 그림이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그 뿐만 아니라 동남아쪽에 가도 다 나옵니다. 그런데 용의 그림이 각 나라마다 다 틀립니다. 그래서 용을 이렇게 보면 중국 용은 발톱이 5개 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용의 그림을 잘 보면 요즘 그림 말고 옛날 왕실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 발톱이 4개 입니다. 일본에 가서 보면 발톱이 3개 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정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5개이다 조선은 조금 떨어지니까 4개만 하고 왜놈들은 더 떨어지니까 3개 이상이면 재미없다 이렇게 불문율이 된 것입니다. 감히 못 그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용은 아주 친밀합니다. 그래서 용은 상스러운 짐승이고 전설적인 짐승이지만 우리는 산신령을 섬겨도 산신령이 사람들 무등 태워 주었다 뭐 그런 것이 없는데 중국 사람들은 용을 사람이 타고 다닐 정도로 용이 친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이 사납고 무서운 짐승이 아니라 복을 가져다 주는 짐승 이었습니다. 그래서 입에다가 구슬을 하나 물고 다니지 않습니까? 그 구슬이 무엇입니까? 여의주입니다. 그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 뭐든지 뜻대로 된다는 여의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중국 사람들이 친근한 짐승이 용인데 그 용을 탈 때 금기사항이 있습니다. 목 아래 수없이 비늘이 많은데 목 아래 딱 한개의 비늘이 있습니다. 그런데 길이가 한자, 30cm하는... 그런데 모든 비늘이 다 아래쪽으로 나 있는데 그 하나만 거꾸로 나 있습니다. 이것을 역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건드리면 비늘이 찢겨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플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순한 용인데 역린을 건드리면 용이 갑자기 돌변해서 그 사람을 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을 친근하게 하고 다니지만 용을 탈 때 주의하여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용과 친근하게 지내는 비결입니다.
용 뿐만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역린이 있습니다. 이것은 타고 난 것 일수도 있고 살다 보니까 생겨난 것 일수도 있습니다. 타고난 것은 어떻습니까? 저는 운동을 젊었을때 싫어하지 않고 야구, 축구 다 좋아 했는데 특히 야구에 한참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직접 한 것이 많지는 않지만 탁구도 좀 치고 운동이라면 그래도 조금씩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스케이트가 안 배워 지는 것입니다. 저는 학교 다닐때 중학교, 고등학교때 우리 학교가 아이스하키가 전국에서 유명했습니다. 그러면 봄 되면 동대문 스케이트장 가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멋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유니폼에 빨간줄, 파란줄 간 스틱을 들고 하키를 타고 얼음을 누비는 것입니다. 동네에 가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데 수 없이 했는데 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스케이트는 두개 산 것 같은데 그런데 항상 스케이트 날은 안 닳고 옆에 구두만 계속 닳는 것입니다. 쓰러져서... 그래서 결국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도 나에게 하나의 역린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도 노래 못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 것도 타고난 역린입니다. 예를 들자면 얼굴이 못생긴것 그런 것은 타고난 역린입니다. 키가 작은 것, 눈이 작은 것, 이런 것은 타고난 역린입니다. 후천적인 역린도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아직 시집을 못 간 것, 그래서 나이 든 자매들이 명절에 집에 내려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 하는 것입니다. 집에 가면 자꾸 역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야 너 올해 나이가 얼마냐?” “서른 여섯 인데요?” “야 우리 어머니는 너 만할 때 손자 봤다” 그래서 뭐 하자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자매는 그렇지 않아도 시집을 못간 노처녀 소리 듣는 것이 괴로운데 우리 어머니는 너 만할 때 손자를 봤다해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무심코 쓰는말 “얼굴도 못생긴게” 이것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라 꼴갑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말을 했는데 이 사람이 얼굴이 너무나 이쁘게 생긴 사람이면 “에이 얼굴도 못생긴게”하면 이것이 상처가 될까요? 안될까요? 안됩니다. 그것은 역린이 안되기 때문에... 그런데 진짜 못생겨서 고민을 하는데 이 사람이 다른 뜻으로 “에이 얼굴도 못생긴게” 하면 쾅하고 와 닿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정말 똑똑합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대학원 나오고 박사가 되고 똑똑합니다. 그런데 “에이 무식하기는...” 이런 말을 하면 상처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안 받습니다. 그런데 내가 공부도 못하고 대학도 좋은데 못가고 해서 치이는데 무심코 늘 하는 이야기인데 “무식하다”, 예를 들어서 전자제품 못 만져서 그러면 “에이 무식하기는...” 이런말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학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어느 날은 에어컨을 키려고 하는데 안켜져서 보니 텔레비전 리모컨을 가지고 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에이 무식하기는...” 그것이 무슨 학력과 관계 있는 것 아니쟎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진짜 학벌이 없어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듣는다면 가슴에 쿵하고 내려 앉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의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은 잘 해서 친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나쁜 인상을 안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통계가 나왔습니다. 음식점을 가면 음식점이 너무 맛있는데 그러면 6개월 동안에 6명에게 전파가 된다고 합니다. 맛이 없다면 26명에게 전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부정적인 것에 예민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콤플렉스를 화제로 올리는 것이 좌중을 굉장히 재미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꾸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대머리 벗어진 사람 있지 않습니까? 모이면 한번쯤은 이야기 안하는 적이 없지 않습니까? “어휴 이제 앞동네 뒷동네 만나겠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할 때 이렇게 사람들이 다 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해 하지만 그 이야기를 했던 사람은 가슴에 찍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다섯개쯤 좋은 인상이 새겨져서 호의적이었던 사람이 그 하나로 점수를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된 후에 그런 것을 경험 했습니다. 뭐냐면 설교는 열 번을 했는데 아홉 번을 죽을 쑤고 다 졸다가 가고, 한번을 너무나 잘해서 펑펑 울면 그 전에 아홉 번을 다 용서 합니다. 그리고 항상 타율이 1할 밖에 안되는데 타자로서는 은퇴해야 합니다. 1할이면... 이승엽인지 박승엽인지는 4할대가 넘지 않습니까? 1할이면 아무것도 아닌데 신기하게 열 번 설교했는데 아홉 번은 죽을 쑤고, 한번은 장렬하게 터져서 하나님 만나게 해 주었다면 매번 갈때마다 헛방인데도 오늘은 터지려나 오늘은 터지려나 하고 예배에 참석을 합니다. 그런데 리더쉽은 틀립니다. 아홉 번을 아주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서 결정도 잘하고 지혜롭게 이끌어 가는데 인간이니까 약점이 있어서 한번 생각을 잘못해서 결정을 잘못해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면 아홉 번 잘 한 것은 싸그리 잊어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잘 하는데도 불안하게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도 되나 하면서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고 행정적 지도력의 차이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다 그런 약점이 있는데 사람들은 누군가의 역린을 건드렸을때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순린을 건드렸을때는 쾌감을 못 느낍니다.
실험을 해 볼테니 들어 보십시오. 제가 건망증이 있습니다. 어떤때는 아주 심합니다. 그래서 정말 심각할 정도로 심합니다. 한번은 학교 교수생활 할 때인데 밤 늦게까지 수업을 끝내고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으니까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서 기다리겠다 하고 막 뛰어 내려와서 내 차를 탔는데 누가 운전대를 뽑아 간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운전대를... 그때 내가 프린스를 타고 다녔는데 운전대를 뽑아가나... 정말 기가 막히다. 어느 놈이 운전대를 뽑아갔나? 그런데 알고보니 뒷좌석에 탄 것입니다. (성도들의 웃음소리) 이렇게 좋아하지 않습니까? 건망증이라는 내 역린을 건드리니까 이렇게 행복해 하지 않습니까?
제가 정말 힘들게 신학대학을 다녀서 졸업식에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석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장이 나와서 상을 주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우리 집사람이 당신 정말 축하한다고 안아 주었습니다. 아무도 안 웃지 않습니까? 이것이 순린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악한 인간들입니까?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굉장히 중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다른 사람하고 친해 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스스로 자기 역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나 건망증 많거든 그리고 이야기를 푼수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은 그렇게 만족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바보처럼 굴은 것을 이야기 하니까 그렇게 깔깔 되더니,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고 하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 지는 것입니다. 순린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것을 그렇게 건드리고 싶어합니다. 배 나온 사람을 보면 “왜 그렇게 많이 먹어?” 이렇게 하고 싶어 집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에 왔는데 설교를 실컷 했는데 설교 이야기는 안하고 허리가 몇이냐고 자꾸 물어 봅니다. 처음에는 모른척하고 대꾸를 안했는데 집요하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숟가락을 딱 놓고 그랬습니다. “목회자의 나이와 배의 사이즈는 천국 비밀이요” 그렇게 집요하게 남의 역린을 건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웃고 떠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사람 속에 사람을 판단할 때 두가지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 성향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것이 무엇이다 하고 지성이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마음의 기울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울기가 있어서 좋아하는 감정이 들기도 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지성과 정서 두개가 합쳐져서 사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속에서 싫다 라는 감정으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감정에 의해서 모든 정보가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으면 사람이 굉장히 말이 많습니다. 그럼 발랄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수다스럽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인가 도전하는 정신이 있으면 그 사람을 향해서 마음이 좋다는 쪽으로 기울면 도전정신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험심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싫으면 모험심이 있어도 무모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하면 몇 시간도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정보인데 마음의 기울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옷, 저옷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마음에 들면 여러 가지 패션이 소화가 잘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들면 얼굴도 못 생긴게 껍데기만 바꾼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화장을 예쁘게 하고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주름 그었다고 수박되나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잘 들어 보십시오. 그러니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보 보다도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느냐 싫어 하느냐가 인간관계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인상을 사람들에게 남기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나쁜 인상을 그 사람에게 안 심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그 역린을 건드릴때 건들지 못하도록 도와주고 그 사람을 보호해 주면 눈물 나도록 그 사람이 고마운 것입니다.
(예화) 요즘은 우리딸이 음식 조절을 해서 날씬해 졌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할아버지를 좋아 했는데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오시기만 하면 오천원이나 만원을 주셨습니다. 애들은 돈 주면 좋은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제일 싫은 어른이 누구냐 하면 머리만 실컷 쓰다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많이 컷다 하면서 “길거리에서 보면 몰라 보겠네” 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돈을 주고 쓰다듬어야지 돈도 안주고 머리만 쓰다듬으면 뭐 합니까? 그런데 이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고 우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귀여우니까 생각없이 “야! 너 뭘 먹고 그렇게 토실토실해 졌냐?” 평소에 자기가 콤플렉스가 없었고 날씬했다면 할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제가 그렇게 얼굴이 좋아 졌어요 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아마 지금도 그 집사님이 설교 듣고 있을 것입니다. 남의 집 딸을 보고 이렇게 보더니 “야 너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좋아졌니?” 그러면 끝나는데 “떡판 같구나!” 이 아이가 들어오더니 아무아무개 집사님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선물도 하고 해서 화해를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 속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사람의 역린을 잡아댕겨 보고 싶은 그래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싶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자기는 무심코 한 그 행동들이 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원한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삶의 현장에서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싫어하나 하고 충격 받는적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이것밖에 안 되나 하고 생각하는 적이 있습니다. 돈 없을때 돈도 빌려주고, 그 사람대신 일도 해주고, 심부름도 해주고, 좋은 일도 해주고, 어려울때 힘이 되주고 내 마음은 그 마음이 아닌데 이런 것 다 주워 끼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역린을 몇 번 건드려 놓으면 그런 것 사람들은 다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아이 한테 공부 이야기, 그 다음에 배 나온 사람한테 지방 이야기, 머리 벗어진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에게 환영을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일들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도 감격 했던 부분이 그런것 입니다. 그 사울이 그렇게 주님을 만나서 바울로 변하는데 그 인간이 얼마나 나쁜짓을 했습니까? 스테판을 죽일때 가편 투표하고 증인이 되어 옷을 지켰던 사람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손에 피를 묻힌 사람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사람도 예수님 잡아 죽이려고 가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만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 정말 한번 죽을래? 네가 지금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 아냐?” 그렇게 하시지 않고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 다음 이야기는 더 부드럽습니다. “뉘시이니이까?” 우리 같았으면 “네가 그것을 알아 뭐해! 얻어 맞으면 되지” 그런데 예수님이 “나 네가 핍박하는 예수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러분 아담이 타락한 다음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지 않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히브리어로 보면 아주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끔찍한 죄인인데도 하나님이 분노하지 아니 하시고 사랑하는 음성으로 불러 주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어떤 콤플렉스가 있을때 그 콤플렉스가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얼굴이 못생겨서 내가 무슨 피해를 봤습니까? 저 사람이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무슨 손해를 봅니까? 그러니까 그 콤플렉스를 자꾸 건드리는 것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아주 나쁜 짓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약점이 나에게 손해를 주는 것도 별로 없는데 그것을 건드려서, 노래를 못하는 음치인데 집요하게 노래를 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노래 못 하는 것을 보고 깔깔대고 웃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나쁜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없을때 꿔주고, 힘들때 도와주고 그런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제일 먼저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그것을 감싸주고, 내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약점이 감추어질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약점이 나에 의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인간들과 사귀면서 살아가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가끔 그런 것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종종 직장 같은데서 어느날 상사와 만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럴리는 없지만 예수 안 믿는 사람들 보면 오래간만에 사장님, 부장님 그런 관계를 떠나서 한잔 두잔 술을 먹다 보면 거나하게 분위기가 좋아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평소에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음 한번 해봐?” 그런데 그것이 진짜로 해 보라는 것인지 알고 막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린을 막 잡아 땡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술 기운에 했지만 당하는 사람은 안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 저 인간이 나를 싫어하는 구나”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날 세월이 한참 흘러간 다음에 “자네는 정말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어서 어떻게 하든 붙잡아 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눈물을 머금고 자네를 내보내지 않을 수 없네” 앞의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고 뒷 이야기는 진실입니다. “내보내고 싶네” 여섯 글자만 진실입니다. 나머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제 업무적인 연관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날 것 아닙니까? 부하 직원도 거느리면서... 그때 묻고 싶습니다. 아주 유능하기는 한데 여러분을 아주 같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하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능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여러분을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하고 같이 일을 하겠습니까? 후자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목표를 세우고 가는 길이 라고 할지라도 목표가 굉장히 중요 합니다. 회사에서 이익을 많이 내어서 회사가 발전하고, 전망이 있는 회사가 되서 주식이 오르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기업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사회 봉사가 아니고 이윤창출 입니다. 그래서 이윤을 낸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심리학에서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과학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사람을 데리고 있으면 가끔 내 역린을 건드려도 너무 유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회사는 돈을 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정도 능력은 안된다 그러면 과학적으로 이 사람을 쓰면 안되는데 인간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머릿속에 있는 과학이고 이 속에서는 그렇게 안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좋아하는 사람하고 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사람을 쓰는 입장이라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쓰임을 받는 입장이라면 반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는 너무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는 너무 회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회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 합니까? 사장이 싫다는데... 회사는 사장 것인데... 다른 사람의 역린을 건드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역린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당한 사람만 가슴에 저리도록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이속에 꼭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감수성에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거의 원수가 되는 사람도 있고, 좀 건드려도 덜한 사람이 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콤플렉스 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과민반응을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미련하게 그것을 건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건드리면서 어느날 자신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람은 자기를 버렸다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마음에 깊이 품었는데 그 사람은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나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정말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 주고 싶으면 자기의 역린을 건드리면 됩니다. 자기가 자기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은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한테 푼수 한번 떨었더니 그렇게 좋아 했습니다. 그럼 내가 오늘 저녁에 올라가서 정말 자존심 상하고 내가 열등감이 있는 것을 내가 건드리다니 하면서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기를 잘 용서하고 한편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웃기고 싶으면 자기의 역린을 건드리면 됩니다. 아무리 뽑아서 피가 나도 누가 안 말리니까 해 보십시오. “나 대머리거든 조금 있으면 앞동네 뒷동네 만나, 머리가 세 개 있을때는 다 넘겼는데 두개 빠지고 나서는 양쪽으로 발랐는데 요즘은 하나 더 빠졌어 그래서 광만 내 달라고 했지” 다른 사람이 얼마나 즐거워 하겠습니까? 자기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러면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노래를 너무 못해서 그럴때 “노래를 못하시는 대신에 글을 참 잘 쓰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글은 노래와 같습니다”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노래도 못하는게 그런 것이 아니라 글도 잘쓰는게... 얼굴이 못생겼는데 얼굴 못생긴 것 이야기 하지 말고 당신은 스스로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만약에 사람을 마음에 아름다움으로 세워 놓는다면 당신은 절세의 미인입니다. 당신의 가슴에서는 향기가 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얼굴이 너무 예쁜 사람은 뭐라 합니까? 하나님은 중심을 취하고 사람은 외모를 취하는데 당신은 영혼도 아름답고 얼굴도 예쁘니 양쪽의 사랑을 다 받겠네요. 그렇게해서 남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는 이것 하나만 가슴에 깊이 새기십시오. 평생 살면서 제일먼저 다른 사람들 볼때 장점이 먼저 들어오는게 아니라 약점이 들어 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우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약점을 발견하게 될 때 저 약점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저 사람에게 붙여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가, 역린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건드려 지려고 할때마다 잘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넓은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을 자꾸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역린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자꾸 역린을 건드리는데 이 사람은 사람들이 그 역린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면 그것은 무슨 의미 입니까? 나는 당신과의 관계가 너무 소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런 역린을 가지고 있어도 제가 보기에 당신은 여전히 좋은 사람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사도바울도 이러한 역린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디모데오서 같은데 보면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다 나는 이전에 핍박자요 포행자요 이런 하나님을 원수로 알고 대항하는 몹쓸 인간이었다’고 하는 그것이 항상 역린 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예수님이 “그래 네가 그런 인간이었지”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항상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수 많은 약점들을 주님앞에 고백할 때 한번도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린들을 이용하거나 하지 않고 아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역린을 바라 볼때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 마음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에 장애 체험을 하면서 길을 가는데 나무 토막 하나를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높이가 한 7-8cm정도 되는데 넘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넘어가야 하냐고 했더니 지도해 주는 지체가 이렇게 뒤로 제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휠체어가 뒤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들리겠어요? 아니면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지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몸으로 밀고 문지방 건너듯이 건너서 다시 뒤를 들라는 것입니다. 이론은 되는데 죽어도 안되는 것입니다. 장애인이 이것을 하느냐고 했더니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무수히 뒤로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들면 뒤로 제껴질때 빨리 손을 머리 뒤로 한다는 것입니다. 수천번을 하고나서 그 감각이 생겨나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전거를 탈 때 아주 숙련된 사람이 오토바이처럼 앞바퀴를 들며 뒷바퀴 하나가지고 가지 않습니까? 그런 실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그것을 들고 있을때 사람들이 ”야! 묘기구나“하고 텔레비전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이 아주 전문적으로 연습을 하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장애인이면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이라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없는 사람의 눈에 보이면 정말 그것이 웃기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넘어 가려다 못 넘어가고 수없이 넘어지는 것이... 그런데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역린을 항상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린 결론은 그것입니다. 남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흔들면서 화제 거리로 삼고 깔깔대는 것은 정체가 사랑없음 입니다. 결론은 사랑없음 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상처받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하늘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여기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땅은 다 그런 아픈 죄인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가서 용서를 빌어 보십시오. 그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당신 놀렸는데 내가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까 그 정체가 무엇인가 했더니 나의 재기발랄함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없음 이었다. 당신은 평생을 그 콤플렉스를 끌어 안고 아파하는데 나는 그 역린을 건드리면서 즐거워 했다.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가 했더니 덮어주지 못한 사랑없음 이었다. 그것을 내가 깨달았다. 정말 미안하다.
(찬송) 예수사랑 나의사랑 내 맘속에 넘쳐 그대를 사랑해
이해할 수 있습니까? 가서 여러분들이 그러한 삶의 태도로 살기 바랍니다.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하지 않기로, 그런데 안될 것입니다. 수시로 이 속에서 느낄 것입니다. 그것을 꺽고 그러면서 사는 동안에 자기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향기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어느날 자기가 어려움을 당했을때 자기가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나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4. 위로, 관계의 강화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잠17:17)
지난 시간에는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관계가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위로,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을때 위로해 주는 것이 관계를 강화해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옛말에 곶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해도 가진 것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진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반드시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때, 그것도 아주 적절한 때에 그들에게 나누어 줄때 우리들은 사람도 얻게 되고 자기자신도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화) 제가 대학에 교수로 있을때 였습니다. 일년에 두 번씩 방학이 되면 교수들이 수련회를 갑니다. 수련회를 가면 대게 1박 2일로 가는데 하루 저녁때에 각 과별로 교수들끼리 알아서 모이고, 모인 그곳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한학기 동안의 일도 이야기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학과 교수님들과 같이 지금 생각에 어느 고기집에를 간 것 같습니다. 물론 학교에서 준 돈을 가지고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선배 교수님이 한분 계셨는데 이분이 그런 것을 참 잘합니다. 가서 앉으니까 풀이 푹 죽은 아줌마 여 종업원이 물컵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탁 소리가 나게끔 탁자에 올려 놓았습니다. 물을 찌익하고 엎지르면서... 뭔가 손님이 온 것이 방가워 보이지 않고 좀 일찍 가서 그런지, 좀 쉴 시간에 가서 그런지...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이 분이 아줌마를 부릅니다. 그랬더니 뭘 시키려고 하는지 와서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뭘 드시겠어요?” “우리 시키지 전에 아줌마 여기서 일하고 얼마나 많이 힘드세요?” 그러더니 저녁 먹을 돈에서 오천원짜리 하나를 꺼내더니 아줌마를 주는 것입니다. 아줌마가 이러시면 안된다고 하니까 쓰시라고 손에다가 쥐어 줬습니다. 갑자기 얼굴 표정이 복사꽃처럼 피더니 나는 갈비집에 가서 반찬이 무제한으로 나오는 것은 첨 봤습니다. 수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다른 사람도 꽤 왔는데 다른데는 신경도 안 쓰고 수시로 드나 들면서 계장 떨어 졌네 뭐 떨어졌네 하면서 계속 주더니 조금 있더니 주방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뭔 소리인지 들어 보니까 도대체 손님이 왔으면 반찬을 내 놓아야지 뭘 아끼고 안 주냐고 이 아줌마가 주방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곳도 돼지갈비집 이었는데 종업원 한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이 심통이 난 얼굴입니다. 한국 종업원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도 아줌마인데, 그래서 밥을 먹는데 무언가 심란한 일이 있는지 가위질하는 손이 불안 합니다. 가위로 꼭 찔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에 사연도 많고 해서 갈비집에서 이렇게 갈비나 자르고 있는데 저 아줌마는 얼마나 사는게 막막할까? 그리고 고기를 먹고 나오면서 이천원을 팁으로 주었습니다. 그때 이천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벌써 15년전 이었으니까... 이천원을 주었더니 그때 그 아줌마처럼 감사하지 않고 툭하고 받더니 주머니에 넣겠지 했는데 카운터로 덜렁덜렁 걸어 가더니 띵하고 돈 통을 열더니 툭하고 집어 넣고 쾅하고 닫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줌마 이집 주인이세요?” “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왜 주었을까? 그 갈비집 큰 것을 하는데 나보다 백번 부자인데 가난한 교수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면 불쌍하니까 주지 말라고, 나 주인이라고 하지 종업원인척 받아 거기에 휙 집어 넣고... 그 다음부터는 “아줌마 이 집 주인이에요?” 하고 항상 물어 봅니다. 주인이라고 하면 안 줍니다. 그 둘 차이가 뭘까요? 한 사람은 꼭 그런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돈 많습니다. 그 큰 갈비집 한 200명은 들어와서 먹을 수 있는 갈비집인데 뭐가 부럽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도울때에는 늘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이지만 꼭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은 덜 필요할 때 열 번을 도와주는 것보다 커다란 감동을 준다는 것입니다.
저의 아들이 민주화 항쟁이 한창일때 최루탄 가스를 먹고 목에 기관지염이 걸렸습니다. 총신대옆에 살았으니 얼마나 최루탄이 날라 왔겠습니까? 온 유리창을 박스 테잎으로 붙였는데도 날라 와서 아이가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입도 없던 그 가난한 때에 겨우 히브리어 강사해서 15만원 받아 먹고 살던때에 아이를 데리고 소아 아동병원을 갔습니다. 그런데 입원비도 없을 정도로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이제 강의를 하는데 나하고 같이 입학한 사람이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나한테 배웠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내려오는데 이제 다른사람은 가고 내가 병원에 들려야 한다고. 우리 아들이 기관지염으로 입원을 했다고 하니까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 따라와서 기도를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전도사들이니까 돈이 있겠습니까? 돈은 없지만 따라 왔습니다. 그래서 병원까지 따라와서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고 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잊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늘 고맙고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 저의 심성으로 볼때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지만 뭔가 어려움이 생겼다 하면 제가 도울 것 같습니다. 그때의 인상이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에... 인생이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을 시작한 그곳에 목사님이 돌아 가셨는데 자유당 시절에 정치하던 분 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박 대통령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노동 운동을 하시다가 뭘 좀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가만히 보니까 서울시에 청소하는 것을 맡으면 괜챦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당시의 시장을 찿아 갔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줄이 닿아서 약속을 잡아 주어 시장집으로 찿아 가게 되었는데 뭐 부탁을 하러 가는 입장에서 그냥 가면 되겠습니까? 그래도 애들도 못 사주는 갈비를 돈을 모아 가지고 한짝인지 반짝인지 고급 선물세트로 유행했는데 통짜로 든 갈비를 싸가지고, 비닐에 잘 싸서 가지고 갔는데 자기가 가지고 가면 시장이 받을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갔는데 시장은 보이지 않고, 부인도 안 보이고 그것을 가지고 들어 가려고 하니까 식모들이 와서 그것 뭐냐고 하니 시장님 드릴 선물이라고 하니까 이리 내 놓으라고 하면서 이쪽으로 가지고 오시라고 하면서 창고를 여는데 갈비가 수없이 매달려 있더랍니다. 자기가 사 온 것은 제일 조그만 갈비 였습니다. 그러더니 갈고리를 걸더니 휙 밀어서 저쪽으로 던지더랍니다. 그래서 애들이나 사서 삶아 줄 것을 저것을 왜 가지고 갔나? 이 집은 부자집인데... 그러니까 그런 것은 저도 별로 감동을 안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좋은 인상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아직 깊이 관계는 맺지 않았는데 왠지 사람이 괜챦습니다. 유머도 있고 표정도 밝고 진실한 것 같고 속임수가 없는 것 같고 “사람 정말 괜챦다 배려 할 줄도 알고 괜챦다” 이런 사람도 있고, 도와주는 것도 없고 받는것도 없지만 하여튼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사람이 느끼하거나 아니면 사람이 거만해 보이거나 제일 꼴불견은 잘난척하거나 해서 별로인 사람들이 있고 그 다음에 중립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그런 감정이 안 생겨서 사정권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번 생긴 인상은 사람들이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인상이 한번 생기게 되면 그 다음에 그 인상이 그의 행동이나 말들을 해석하는 기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속에서 그런것들이 다 해석이 되면서 해석을 인상이 안 좋은 사람들은 안 좋은 쪽으로 하고 그래서 인상이 좋으면 좋은 쪽으로 자꾸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인상이 좋고 만나면 기분이 좋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말을 잘하면 “말도 잘하네” 하는데 인상이 안 좋은 사람이 말을 잘하면 “말은 잘하네” 그런다는 것입니다. ‘말도’와 ‘말은’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꾸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관계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면 그것을 잃어 버리지 않고 더 좋은 인상을 심어 주면 관계의 발전이 있겠죠? 또 만약에 나쁜 인상을 주었는데 그 사람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살아서는 안되는 관계라고 한다면 그 나쁜 인상을 좋은 인상으로 뒤집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 때에나 뒤집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회가 인생을 살면서 마치 대나무의 마디처럼 그렇게 오는 떄가 있습니다. 대나무를 자를때 마디에 대고 자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마디와 같이 기회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때가 언제인가 하면 그들이 정말 고통을 당하거나 커다란 어려움을 만나서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상실의 때, 이때가 바로 그런 마디의 역할을 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모든 것이 넉넉하고 잘 되고 있을때에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베풀어주는 호의나 도움에 대해서 감각이 예민해 질까요? 둔해 질까요? 둔해 집니다. 그래서 별로 기억에 잘 안 납니다. 그러나 자기가 너무 궁핍하거나 아니면 너무 어려움이 있으면 그때에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주면 그 도움을 누군가가 오래도록 기억을 합니다. 또 자신이 심적으로 고통 가운데 있을때에 누군가가 위로를 해 주면 그 위로가 이 사람에게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가운데 뭐가 나오냐면 “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가운데 얻은 환자의 신상에 관한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죽을때까지 지키겠다”는 서약이 나옵니다. 그런것과 관련해서 환자와 의사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하나도 자매와 결혼을 했는데 자매는 육군 대위였고 의무 장교였고 형제는 병사로서 입원을 했다가 둘이 결국은 좋아하게 되어서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여자가 훨씬 더 많은데 그런 감정이 왜 그러냐면 자기가 몸이 아파서 누워 있을때에는 무엇인가 감정적인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결핍의 시기입니다. 그럴때에는 평소 같으면 거들떠 보지 않을 정도의 사람인데도 가까이 와서 “아프시죠, 얼마나 힘드세요?” 하고 뜨겁지도 않은 머리에 손을 얹으면 이것이 감동이 되어서 밀려 오는 것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구나 나를 정말 아끼는 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심리가 있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데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에게 여러분들이 나쁜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니면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둘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그때 그 상대방이 무엇인가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만났으면 여러분들에게 매우 드물게 찿아오는 기회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평상시에 여러분들보다 사회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좋은 기회가 찿아 온 것입니다. 그런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아파서 입원을 하거나 혹은 상을 당했거나 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칩니다. 그래서 자신 속에 있는 이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다 내가 비록 당신에게 나쁜 인상을 남겼지만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으며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싶습니다 라는 이 표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호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한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파서 병중에 쓰러졌을때 꽃다발을 사서 찿아가서 좋은 말을 건네면 잊을 수 없는 위로가 되지만 평상시에 꽃다발을 들고 찿아가면 뺨 맞습니다. 그 사람이 여자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별로 인상도 좋지 않은 사람이 백주대낮에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면 얼마나 불쾌 하겠습니까? 그런데 병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상을 당했을때에 형편에 맞게 부주를 가지고 가서 슬픔에 가득찬 표정으로 두손을 꼭 잡고 “얼마나 힘드십니까? 저도 일년전에 저의 아버지를 여의고 몇 달 동안을 그렇게 슬펐습니다. 그 심정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더군다나 막내 라면서요” 이렇게 까지 나오면 눈물이 핑 돌면서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상시에 봉투를 들고 찿아가면 이것은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인간관계를 해 나가는데에는 항상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가 필요할 때에 활용하려고만 하지 그 사람이 필요할 때 그 사람의 질서 맞추어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보약과 같은 사교가 되지 않고 항상 진통제와 같은 사교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전 안 보이던 사람이 뭐라도 들고 나타나면 이것은 그 선물이 하나도 반갑지 않은 무거운 청탁을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한두번만 이렇게 나타나면 비서한테 “그 사람한테 전화오면 나 없다고 해라” 하고 지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요즘은 휴대폰도 좋습니다. 수신거부 하면 됩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나오니 이 사람 어디 갔나 하는데 찍힌 것입니다. 수신거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얍삽하게 사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외로워하는데 자신의 삶의 태도가 그렇게 살아가니까, 사랑이 없이 살아 가니까 자기 사랑은 자기를 휘돌아 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 자신의 고립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고립되고 사람으로부터 고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이 세상을 향하여 흘러가야 하는 그리스도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든 그런 상황에서 판단을 하는데 항상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을 해서 집에 왔는데 집에 들어와서 시계를 보니 열시는 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전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당신 아는 사람 혹은 당신 친구, 사업상의 누구, 교회의 누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더라 그런데 아무리 연락해도 연락이 안되고 내일 아침이 발인이라더라. 그때 갈등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내일 새벽같이 회사에 나가야 하는데 시간은 10시 30분이고 차타고 상가집에 가면 11시 30분이고 갔다고 오면 2시는 되는데 4시간 자고 6시에 나갈 수 있을까? 내일 일도 산더미 같은데, 내가 건강도 안 좋은데 그리고 내일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 하는데 하면서 망설이다가 그냥 넘어가지... 그 날은 편합니다. 확실히 편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계속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의 인생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학교에 있을때 그 교수님은 지금은 학장이 되었는데 사석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디든지 그분은 거리가 소원해 보이는 직원이라도 상을 당하면 그 바쁜 교수가 언제든지 나타납니다. 언제나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대학 다닐때 일 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지만 같은과 친구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자기도 집안에 바쁜 일이 생겨서 안 갔습니다. 그리고 몇일 있다가 학교를 갔는데 알고 보니까 교수님이 그 집에 가서 밤을 새고 온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 교수님이 자기를 부르더니 “야! 너 아무개야!” “네” “네 친구 아무개 아버지 돌아가신 것 들었냐? 못들었냐?” “예, 연락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안 왔냐?” 집안에 이런일이 있고 저런일이 있고 막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뭔 일인데? 그것이 뭔데? 얼마나 엄청난 일이 너의 집안에 일어 났는데? 네가 사랑하는 친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 가셨는데 그보다 큰일이 네 집에서 일어 났냐? 만약에 그렇게 큰 일이라면 네 친구는 너한테 뭐냐?” 거기서 시쳇말로 박살을 내 버린 것입니다. 이 녀석을 말로 아주 깔아 뭉개서 박살을 내 버렸습니다. 인간도 아닌 것으로 낙인을 찍어 버렸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되는 구나 하고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수님께서 사람의 도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쓰레기 라는 것입니다. 우리 상가집에 가서 밤 샌 사람중에 사정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 아버지가 돌아 가셨으니까 내 사정은 그 친구의 슬픔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인 자기도 가서 밤을 새면서 그 제자를 위로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너한테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 났는지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까 할말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사랑은 그 고통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그 친구 아버지 죽은 것이나 동네 아저씨 죽은 것이나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울까요? 내가 잠을 좀 덜 자는 것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상가집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속에서 찿아와 줄때 오랜 세월동안 절대로 안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조문객이 수백명이 왔다가도 절대 안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온 사람과 안 온 사람이 두편으로 나누어 집니다. 정확하게...
그러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평소에 자기에게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던 사람인데 자신이 큰 슬픔을 당했는데 안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까 이렇게 해석을 해 주면 좋은데 이렇게 생각을 안 하고 여태까지 나한테 우호적으로 해 준 것이 진심이었나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후에 알고 보니까 그 집 부모님도 돌아 가셨다더라 이정도가 되면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변이 아닌 경우에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또 평소에 인상이 나뻤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완전히 그 사람이 결정적으로 구두점을 찍는 것입니다. “아 !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찍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 사람이 웃으면서 무엇인가 선물을 들고 나타나도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언제나 거래 이상의 관계를 넘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의 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잔치집 보다는 초상집을 찿는다.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도 새기지만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기쁠때 기쁨을 보태 준 것은 잊혀 질 수 있는데 슬픈 상심의 시간에 나타나서 위로를 준 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잊혀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은 헌신하지 않고 필요한 때에 상대방이 관계를 통해 자기에게 이바지 해주시기를 원하는데 이것은 황제적 발상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든 원리가 주고 받는 것이지 그런 것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상명하복의 관계도 아닌데... 그런 것 없다는 것입니다. 대게 직장 상사라도 그렇게 하면 부하 직원에게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잘못된 태도라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아는 목사님이 돌아 가셨는데 사실은 그 목사님을 생전에 뵌 적이 없습니다. 그냥 같은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 라는 것을 확인할 뿐인데 돌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심방을 하고 왔는지 뭘 하고 왔는지 몸이 너무 지쳤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가지마” 했는데 제가 그러면 안된다 하고 나서 가만히 보니까 상주가 누군가 했더니 우리 후배입니다. 그런데 별로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전도사 생활할 때 그 형제는 부목사 였는데 내가 나이도 훨씬 많고 학교도 훨씬 선배인데 제가 안수를 4-5년 늦게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먼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같이 있는 사람들이 다 후배들인데 나도 반성할 점이 있는데 사석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회의 석상에서 목사님 목사님 하는데 그 중에 한 형제가 이 형제는 아니고 다른 형제가 내 책도 많이 읽었다고 하면서 나를 굉장해 좋아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무르 익어서 내가 말을 놓으면서 그래 뭐 사람 사는게 그렇지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옆에서 듣고 수련회를 갔나 어디를 갔는데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사가 어떻게 부목사 한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제가 깍듯이 “정말 죄송합니다 목사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기억들입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상주입니다. 그리고 일년전에 저희 아버님이 돌아 가셨는데 그러면 저는 거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진 사람이고 교회도 알려 져서 많은 목사님들이 왔다 가셨는데 안 나타났습니다. 그때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꼭 가야하나? 내린 결론은 뭐냐면 그러니까 가자 그리고 조화도 보내고 부조금도 아주 넉넉히 챙겨서 그리고 직접 부목사님 한분하고 찿아 갔습니다. 제가 가니까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부조를 하고 진심으로 위로하고... 그러니까 그때서야 자기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 가셨는지 다 이야기 하면서 마음이 서로 따뜻해 졌습니다. 제가 가지 않았더라면 오래전에 그 일을 가슴에 담고 서로 겸언쩍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다시 얼마나 그러냐 우리 아버지도 일년전에 돌아 가셨다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자 그러면서 목회는 어떻게 하냐하면서 위로를 하면서 따뜻하게 격려를 하면서 돌아 왔습니다. 그것이 사람 사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사람 사는 지혜입니다. 누군가는 흘려 보내는 사람이 있어야지만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받아 들이지만 내일은 흘려보내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살아왔던 삶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분은 참 인덕도 많아 어떻게 가는 곳마다 저렇게 귀인이 나타나서 돕는지” 그럴때 그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 중에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삶에 태도가 어우러져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세상도 갈 필요 없이 여러분들이 소련에 가서 자비를 베풀일은 없을 테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분 내가 나타나서 여러분들 이분이 굉장히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평소에 이분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과 같은 신세를 지신분 할때 몇 명이나 손을 들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처럼 여러분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삶의 태도는 돌아 보지 않고 사람들이 나만 미워하느니 고독하니 나만 외톨이니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니... 애들도 가까이 다가온 이웃 아줌마 인상이 나쁘면 사탕 아무리 줘도 안 받습니다. 절대 안 받습니다. 돈을 줘도 안 받습니다. 더군다나 어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비록 그 사람이 높은 지위나 아무런 재물이 없어도 정말 저는 그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나의 은인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오늘 간증에 나온 것처럼 그분은 꾸밈없는 사랑으로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물질적으로 그분에게 혜택을 받은 것은 없지만 그 마음의 친절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손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이 살 만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어디가든지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 그리고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내가 슬플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위가 높든지 권력이 크든지 하면 쓸데없는 객군들이 많이 나타나서 이것이 기회다 하고 꼬리를 칩니다. 그런 것은 인정을 합니다. 어느정도 거품이 있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그렇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고라도 덕을 많이 베푼 사람들의 상가는 조문객으로 붐비고 박덕한 사람은 찿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희생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중에 그 급한 소식을 듣고 누가 찿아 오겠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별로 지위가 높지 않고 사회적인 명성이 없고 큰 재산가가 아닌데도 그 사람들이 많이 오는 상가를 많이 봤습니다. 큰 꽃다발이나 거액의 부조는 없어도 사람들이 진심으로 찿아와서 그 사람에게 신세 진 것을 말하고 그리고 슬퍼하고 그들과 나누었던 과거를 추억하고 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고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태도 아니겠습니까?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뭐 합니까? 사람들 속에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이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다 드러나서 실제로 우리가 살아 있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혜택을 누릴수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와서 사시니까 예수님이 이사를 오니까 그 동리가 큰 빛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니까 그 동리가 큰 빛을 받아서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다니는 회사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보다 회사의 지체들이 도움을 받습니다. 혜택을 받습니다. 떠나가고 다른 사람이 오니까 자꾸 여러분 생각이 납니다. 그 사람이 있을때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이럴때는 우리를 도와주었는데 그 사람이 있었으면 우리를 잘 이끌어 주었을텐데... 그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런 어려울때에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이렇게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항상 돕는 사람이 나타 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로를 받아 보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더 나쁜 사람들은 누구냐하면 상대방이 그런 위로의 도움을 주었는데 거기에 메아리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말은 안하지만 네가 당신 그렇게 찿아가 주고 위로해 주었는데 어떻게 당신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때 얼굴도 안보여? 그것을 대 놓고 이야기 하는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지워진 것입니다. 그런일이 두 번 세 번 되풀이되면 그 다음에 그 밑에 줄을 긋고 빨간 글씨로 써 놓습니다. 인간이 아님...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우리의 마음속에 그렇게 빨간줄을 그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면 되겠느냐 그것은 아닌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아랑곳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개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개념인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까 이야기했던 용기있는 교수님이라도 만나 “야 이자식아 네가 그것이 인생을 사는 태도냐? 그래 네 사랑하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온 급우들이 와서 밤을 새는데 네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 뭔 일이냐? 네 아버지도 죽었냐?” 이렇게 충격적으로 두들겨 패서 번쩍하고 벼락을 맞는 것처럼 인생을 사는 이치에 대해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괜챦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모든 교수들이 학생들한테 그렇게 다룰줄 압니까? 안 다룹니다. 그것도 무언가 인생에 있어서 주관이 있고 뚜렷하니까 학생을 휘어 잡으면서 그렇게 이놈의 자식, 삶의 태도가 그것이 뭐냐고 호통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가 개념이 없어 그 사람 자신이 그리고 빈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밑에 학생들이 무슨 빛을 보겠습니까? 그것을 누가 가르쳐야 하냐면 부모가 가르쳐야 합니다. 친구가 어려움에 쳐 했을때 가서 도와 주거라 그런 것을 초등학교 다닐때 이미 벌써 부모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렇게 실천하는 것을 아이들이 봐야 합니다. 거기에서 인간 사는 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들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개념 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지혜가 없는 삶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그대로 너희가 그 사람에게 그렇게 행하라 이것이 황금율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슬프고 어려운일을 당했으면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사랑하는 친구들이 와서 위로해 주고 그런 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간관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경제적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 돌아 가시고 나서 교회 식구들이야 서로 챙겨주고 하지만 외부에서 온 사람들의 명단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을 다 못하니까... 기억을 하지만 확실한가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면 항상 열어 보아라. 그분이 나하고 절친한 친구인 것을 초월하지만 그냥 눈으로 아는 사이였는데 그러게 고맙게 기억을 해주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 찿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십만원을 했으면 이십만원 봉투에 넣어라. 그 사람이 화환만 보내 주었으면 10만원 보내라. 그 사람이 인사만 왔으면 화환 보내주고 그 사람이 부조만 했으면 나는 꽃다발이라도 보내고... 항상 돌아 온 것 보다 더 많이 돌아 가야 합니다. 이것이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든 사람이 물질도 넉넉해서 항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베풀수 있으면 좋은데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쯤 되면 사람들에게 베풀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까? 아파트 두채 장만하면... 아닙니다. 뭐냐면 베푸는 사람은 아주 없는 가운데에서도 늘 다른 사람에 베풀어서 혜택을 받게 해 주고,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자가 되어도 결코 물질을 사람들에게 흘려 보낼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곶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는데 놀부네 곶간은 비어 있었습니까?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곶간이 아무리 커도 인간이 되먹지 못했으면 거기서 인심이 안나는 것입니다. 곶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는 이야기는 흥부 같은 사람한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놀부 같은 사람한테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스크루지 같은 사람에게서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수전노들 말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냥 외롭게 돈만 끌어 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인생사는 맛이냐는 것입니다. 혼자 잘 살면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함께 나누면서 살고 그 사람이 나 때문에 혜택을 입어 기뻐하고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와) 이번에 총신대학원을 갔습니다. 갔는데 뉴스에는 안 나왔지만 일억원을 그 학교에 기증을 했습니다. 4년동안 주기로 하고 이제 끝났기 때문에... 일억원을 기증하려고 갔는데 원장님, 교수, 원우회, 학생회 간부들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눈치가 없어 보이는 학생이 불쑥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에서 주는 장학금 말인데요?” “네” “저희가 오늘 특별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 학우들 가운데 두 사람이 병원에 입원할 처지인데, 열린교회 장학금가지고 거기에 쓰면 안됩니까?” 사람들이 전부 힘들어 하는 분위기입니다. 저렇게 눈치없이... 장학금은 장학금이지 그것을... 몇 사람이 면박 비슷하게 왜 그러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해서 내가 그랬습니다. “무슨 병 입니까?”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인데 그럽니까?” 했더니 한명은 외국인 학생이고 한명은 내국인 학생인데 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속된 교회도 없습니까? 선교하러 왔으면 선교 단체라도 있을텐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혈혈단신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그것을 오천원씩, 천원씩 걷어서 수술을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와 우리 열린교회가 수술해 주겠다. 그리고 나서 내가 오자마자 궁휼사역국 디렉터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까 우리가 좀 도와줍시다. 흔쾌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안양병원하고 특별히 계약을 맺어서 의료보험이 나오면 그것의 반을 병원에서 부담하고 반을 교회에서 부담하고 이렇게 약정이 되어 있습니다. 어디가도 우리교회 만큼 좋은 조건으로 수술 받지 못할 것입니다. 수술하고 회복할 때까지 우리교회가 돌봐 줄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설명할 때 목이 메었습니다. 일억을 가져다 준 것은 감동을 덜 주었는데 당장 아파서 죽게 되어있는 자기 원우를 열린교회에서 받아서 치료해 주겠다고 하니까 아이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했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꼭 필요할 때이기 때문에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형제는 위급할 때 까지 인하여 났느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이상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는 사람들은 물론 이거니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혈육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의 원리입니다. 성육신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믿을 사람과 안 믿을 사람을 갈라서 대우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자기를 녹여서 끊임없이 세상으로 흘러 들어간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감화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들 중에 예수님이 돈 줘서 여기 나온 사람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 믿고 사명대로 살아 가니까 고난이 많은데도 우리가 예수님 놓지 않고 십자가 붙들고 따라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 입니까? 그런 사람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곤고 하던때 우리 혼자로는 도저히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부모도 나를 버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친구들도 나를 떠났을때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나를 불러 주시던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그 흘러온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감동이 되어서 주님을 붙들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사탕으로 유혹을 했다면 이렇게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돈 다발을 들고 예수님이 유혹을 했더라면 우리는 부자 되기 직전까지만 따라가고 부자된 이후에는 안 따라 갈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중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사람 혹은 마음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있거나 무엇인가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자꾸 실망을 줄때 그 때 그 사람이 고통을 겪는데 안 나타나면 그것으로 관계의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그런때에 안 나타나는 것은 이것으로 당신과의 관계를 정리 합니다 라는 제2의 절교 선언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마구 반복하면서도 인생을 형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늘 베풀고, 돕고 특별히 그 사람이 정말 어려운 상황에 쳐했을때 그때 나타나 주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마음과 정신의 도움 이런것들을 베풀면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때 잊을 수 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한경진 목사님이 돌아 가셨지만 여전히 존경을 받으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간증을 내가 들었습니다. 검소하셨고 그분들은 일제 시대를 지난 분이기 때문에 한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평양 숭실학교에서 교육울 받은 사람들은 그런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 이었습니다. 삶의 태도가 그랬습니다. 그냥 말쑥한 양복 입고 다니시는데 겨울이 되니 너무 을씨년 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파카를 하나 사 드렸다고 합니다.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입고 다니셨습니다. 몇일 지나고나니 교회앞에 거지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시다가 너무 불쌍하니까... 그것을 주면서 권사님의 성의를 무시해도 되나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니까 당신에게 있는 그 옷을 벗어서 그 거지에게 입혀 준 것입니다. 거지가 입고 있는 것을 보는데 화가 안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비밀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지위 높은 사람 그 앞에서 꼬리치고 그러지 말고 사람으로 보면서 그들이 비록 나에게 어떠한 도움의 메아리도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베풀 수 있을때 베풀고 특별히 그들이 큰 도움의 필요와 어려움에 놓여 있을때 그것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 오리 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강물은 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돕고 그러면서 자기 존재의 가치와 목적을 실현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로 말이암아 내게서 흘러 들어간 것이 저 사람을 윤택하게 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 할 수 있는 그런 아량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부어 주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황금율들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형제는 위급한 때가지 위하여 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5. 부정적 태도, 자기고립의 길
“수일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2:1-4)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못난 사람이 잘난 친구를 사귈 수 없고 끼리끼리 모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졸렬하기 짝이 없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 사귀는 친구는 대게 째째한 사람들입니다. 호방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은 대범한 사람을 친구로 얻습니다. 그 사람이 사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건강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어울리는 사람이 맨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비인격적이고, 세속적이고 이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그 수준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예수님의 병 고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준다는 소문이 나니까 의료혜택도 별로 못 받던 사람들이 모두 주님께 환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몸이라도 삐겨서 집어 넣을 수 없을 정도까지 사람들이 꽉 차게 되었습니다. 그때 중풍병자 한 사람도 치료를 받기 위해서 왔는데 중풍병 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사지가 멀쩡해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중풍병자 아닙니까? 침대에 누워 있어서 결국은 침대째 들고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순서를 기다려서 어떻게 예수님께 가서 고침을 받으려고 하니까 하루가 지나도 치료를 받을 가망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환자는 지칠것이고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하나 했더니 그곳에 모인 누구도 상상한적이 없는 희한한 발상을 해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어 구멍을 내고 네줄에 매달아서 환자를 아래에 달아 내려서 순서를 무시하고 예수님 앞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나쁘게 생각하면 세치기이지만 세치기 치고는 정말 창조적인 세치기 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그렇게 내려온 그 환자를 보면서 “이것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냐? 네집도 아닌데 지붕을 왜 뜯니?” 아니면 “물어 낼래?” “이렇게 세치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순서를 무시할 줄 아니?” 하고 면박을 줄 수 있는 말이 굉장히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극구 칭찬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를 여기에서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런 아름다운 본을 남기셨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우셨다는 기록은 세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칫하면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를 그냥 슬픔과 우울함으로 가득차 있어서 자칫하면 예수님 자신이 부정적인 인생을 사신 것으로 우리들이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러한 생각을 잘못 적용해서 예수 믿고 난 다음에 훨씬 성격이 세상에 대해서 파괴적이 되고, 소극적이 되고, 부정적이 되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현세 비관적인 사람, 이렇게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면 돌아가서는 안되는 세상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모양으로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이 이땅에 계실 때 가슴 아픈 일을 너무 많이 보셨고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백성들의 태도의 패역함을 보셨기 때문에 많이 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울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엄격하고 한 이러한 자기깨어짐의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눈물을 씻고 세상을 바라볼때는 좀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태도로 바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오헨리 라고 하는 사람이 쓴 단편 가운데 ‘마지막 잎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많이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스토리가 어떻게 됩니까? 한 소녀가 병에 걸려서 죽어 갑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창문을 열면 거기에 담쟁이가 있고 잎파리들이 있는데 가을이 되어 비바람이 불면서 하나씩 둘씩 떨어져 가는 것입니다. 병이 점점 깊어 갑니다. 그래서 이 소녀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저 담장에 잎파리가 다 떨어지면 아마 나도 죽을거야. 그리고 어느날 보니 딱 하나가 남았는데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침햇살이 밝히 비치는데 그 담장에 잎파리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알고보니 화가가 밤에 그 소녀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그려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많은 조직에 얽혀서 톱니바퀴 굴러 가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모임이든 단체든 회사든 회사안에 있는 더 작은 조직이든지간에 목적이 없이 존재하는 단체나 조직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모임이든지 간에 반드시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목표가 있어서 이 조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직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냐면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간에 성격 전체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소극적인 것은 좀 낳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 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서 어울리며 살아 갈 때 우리는 서로가 교회 안에도 교회 하나가 전체적으로 굴러 가려는 목적과 비젼이 있고 그 안에는 작은 기관들이 있어서 우리 교회만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의 종류가 있고 그 많은 일들을 보헤의 지체들이 자신의 시간과 열정, 물질 심지어는 건강까지 드려 투자를 해서 그 일들을 이루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하나하나의 모임 자체가 무엇인가 해야 할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겨났고 또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직이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생겨 났다고 하면 그 안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이 누구를 좋아할 것 같은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소속된 단체나 기관이나 혹은 조직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졌는데 어떤 사람은 그 모든 되어가는 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무엇인가를 보태어서 이 모임이, 이 기관이 더 좋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비결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방향을 제시해주고 또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을 이해해 주어서 자기의 생각을 보태고 해서 앞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그 모임이 좋아 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은 아무 의견도 내놓을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내 놓으면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계속 그 사람들의 기를 꺽고 생각을 꺽어서 자기도 어디로 데려가지 못하면서 가고 싶다는 사람의 발목을 꺽으면서 계속해서 조직에 고통과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 하겠습니까? 물론 그 사람도 이 모임이나 조직이 망가지거나 교회가 깨뜨려지거나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섬기는 방법이 긍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부정적인 섬김의 방법으로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처음에는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 시킵니다. “이것은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그것은 뭐 돈도 없는데 뭐하러 합니까?” 그럼 막 설득을 합니다. “사실 돈은 없지만 미래를 보면 이런 일들을 준비하고 우리들이 해야지만 앞으로 이런 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한번, 두번 설득을 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람들은 그것이 쉽게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두번은 설득을 하는데 굉장히 힘이 듭니다. 두 번, 세 번, 네번까지는 설득을 해보는데 말만 꺼내면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맞서고 그리고 그를 설득하는데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쏟아 넣어도 설득이 안된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느 한계까지는 설득을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을 설득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더 이상 설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냐면 그 모임속에서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고 책임자이든지, 주위에 있는 동료든지 일단 그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찍히고 나면 무엇인가를 깊이 의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이야기든지 꺼내면 저 사람이 하지 말자고 할테니 우선은 나중에 이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하자고 하는 사람들하고 많이 이야기 한 후 대세를 만든후에 마지막에 이야기를 하겠으면 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직사회입니다.
(예화) 언젠가 한번 다른 교회 장로님들이 우리 교회에 모여서 자기들이 우리 교회에 모일테니까 목사님 교회에서 저녁 한번 대접해 주고 말씀을 한번 전해 주셔서 우리들이 은혜를 받게 해 주십시오 해서 저녁을 잘 차려서 대접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교회가 짓고 들어 온지 얼마 안되니까 구경을 해도 되겠냐 해서 그것은 환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역자들이 직원들이 장로님들을 모시고 3층부터 쭉 교회를 돌면서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일쯤 되었는데 홈페이지에 우연히 들어 갔더니 누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열린교회를 바가지로 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정말 치사한게 뭐냐면 항상 익명으로 합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 조차도 밝힐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야비한 것입니다. 나는 누가 어쩌구 저쩌구 이야기 하는데 나는 인터넷 이것을 실명으로 주민등록을 걸고 하자는 사람입니다. 용기가 있으면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사진까지 넣으면 그렇게 욕지거리 하고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욕을 한 것은 아닌데 잔뜩 썻습니다. 길게 썻습니다. 읽고 나서 결론은 뭐냐면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쨎든 마음에 안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면 사람들이 다 와서 교회가 식당이 없냐고 해서 교인이 이렇게 많이 모이니까 식당을 만들면 엄청난 공간이 필요한데 그러면 교육을 못하고 공간이 없어서 이렇게 연구 많이 한 것입니다. 어커디언 도어로... 아마 다른데 가서 못 보셨을 것입니다. 주문해서 만든 것입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펴지면서 한 삼 사백명이 들어가서 밥을 먹을 수 있고 이것을 펴 놓으면 건축법 위반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한 것이 스위치를 누르면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평일에는 마당처럼 쓰고 일을 할 때는 펴서 식당처럼 쓰고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집요하게 시비를 거는 것이 그것을 왜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린공간 있는 자리를 툭 터서 넓은 식당으로 만들었어야 되고 저것은 저렇게 만든 잘못된 이유가 뭐냐면 매주일마다 펴서 식탁을 다 펴야 하는데 그것을 목사들이 와서 펼 것이냐는 것입니다. 고생하는 것은 평신도들인데 왜 평신도들을 괴롭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답변을 길게 썼습니다. 원래 인간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해야 합니다. 예의 바르게 쭉 썻습니다. 보니까 그때 왔던 장로중에 한 사람입니다. 내가 들어가 보면 어느 교회인지 아는데... 너무 불쌍한게 그 교회 목사님이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저런 사람을 기름 부어서 장로라고 세워 놓았으니 고난이 정말 넘치겠구나 오지랍은 너무 넓어서 남의 교회까지...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교육시설이 부족하니 해서 내가 편지를 썻습니다. 장로님 교회가 어느 교회인지 모르겠는데 교육시설 한번 보여 주십시오. 얼마나 넓은지... 한번 좀 봅시다. 당신이 장로이니까 얼마나 잘 해 놓았는지 나도 한번 가서 배웁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결국은 뭐냐면 바보입니다. 두자로 말하면 바보입니다. 저 만큼 머리 좋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일주일에 딱 한번 점심을 먹기 위해서 열린 공간부터 터서 식당을 만들어 놓으면 평일날 와서 쓰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월, 화, 수, 목, 금, 토 까지 다 쓰고 주일날은 새가족 환영회 하고 다 해서 쓰는데... 그러니까 무엇인가 자기 주장이 있으면 머리가 좋든지 머리가 나쁘면 공손해서 겸손하든지 해야 하는데 둘다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 교회 성도들이 고통을 많이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에 보면 다른 친구들은 다 승진해서 과장, 부장 되는데 만년 대리로 정년 퇴직하는 사람도 가끔 나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내 친구들은 줄 서고 김밥싸서 승진 했다고... 물론 자기 친구중에는 일도 안하고 능력도 없는데 김밥을 싸서 승진한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아부해서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이외의 승진한 사람이 모두 김밥 싸서 승진 했을까요? 그 회사 상사는 모두 김밥만 좋아 합니까? 몰라서 그렇지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안 그런 사람도 아직 많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바보같은 사람은 자기가 승진 못한 것은 원칙대로 해서 못했고 친구들은 다 김밥의 도사라서 승진을 했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같지 않은 인생의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대게 누구냐면 부정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번 저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다 라고 회사 상사의 머리에 기억이 되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 거의 끝납니다. 그리고 그 인상은 상사의 가슴에 새겨 지는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절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수십번을 두고 나서야 “아 저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두번 인상에 박히면 그것으로 이속에서 좀처럼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인상의 중요성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그런 인상의 사람입니다. 저는 회사를 경영해 본 적은 없지만 우체국장을 하면서 직원들 열댓명을 데리고 있어 보았고 교회의 목사를 하면서 오히려 직원들 더 많이 데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몇십명의 직원과 교역자들이 있어도 같이 있어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 들어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내가 의도적으로 노력해서가 아니라 누구 이름 떠오르면 가슴속에 번뜩번뜩 타이틀이 떠 오릅니다. 긍정인, 부정인, 긍정인, 부정인... 그래서 뭐냐면 부정인과 긍정인은 똑같은데 생각의 방향이 틀립니다. 그리고 말하는 기술이 틀립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삼일후에 꼭 필요하니까 이런 저런 일을 완수해 놓거라” 하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지 마시죠” “왜?”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없습니다 다음에 하시죠?”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A라고 하고 B는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조금 더 주시고 돈을 지원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두 이야기가 틀립니까 같습니까?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돈이 없다는 이야기 인데 이쪽에서 이야기 한것처럼 “하지 마시죠 돈만 많이 들고 시간도 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지도자를 꺽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의도자체가, 목적자체가 꺽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 인데 저쪽에서는 틀리게 이야기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4일 그리고 돈도 지금 있는 것 가지고는 해 보겠지만 모자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은 계속 회사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가슴에 남는 것이 뭐냐면 돈이 있어야 됩니다, 시간이 더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안 들어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인상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년 대리로 지내는 사람이 대게 전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 눈에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회사를 중대한 실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정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데 삼일 이내에 해 내려면 많은 에너지가 지불이 되겠죠? 돈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돈을 적게 드리고 하려니까 더 많이 헌신해야 되겠죠? 업자들에게 줄 것 몸으로 봉사해야 하고 삼일분 사람써서 해야 할 것을 하루만에 끝내야 하는 압박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압박감을 감당하기 싫어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한번 일 경우에는 상사가 여러분들을 설득합니다. “아니야 그래도 해야돼 이사람아! 무슨 소리야? 그리고 삼일이면 자네가 모자란다고 하는데 이렇게 이렇게 해봐 이틀이면 하지 그리고 돈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 이것 쓰지 말고 해봐 그러면 돈도 되쟌아?” 이렇게 설득을 하는데 매번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어번 해 보고 그 다음에 그런 태도가 나오면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흐를때 물 같이 흐릅니다. 물이 막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그런다고 해서 물이 멈추냐는 것입니다. 중간에 큰 돌맹이 하나를 만나 물이 안 흘러가고 멈추느냐 아닙니다 흘러 갑니다. 큰 돌맹이 피하면서 흘러 가는 것입니다. 부정인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설득을 합니다. 그러다 이 사람 성향이 원래 이 모양이다 싶으면 그 사람 남겨두고 일이 이렇게 흘러 가다가 돌아서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일이 없어 놉니다. 그런데 바쁜 사람에게 계속 일이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A라는 일이 담당인데 부정적입니다. 윗사람이 일을 시킬때 이 사람하고 상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B의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긍정인입니다. 그래서 B라는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한참 일을 시키다 보니까 A라는 사람하고 B라는 사람하고 일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A의 일도 C의 일도 다 B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 자리가 하나 나와서 여러분들이 사장이라면 누구를 승진시키겠습니까? 당연하죠. 너 올라가서 데리고 일해라. 어느날 갑자기 똑 같이 입사를 하였는데 ”B가 승진을 하니까 이 밑에 가서 일해 일하기 싫으면 옷 벗고 나가라“ 냉혹한 카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교회에서 직원들 많이 데리고 있는데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상관이 없이 이야기 나왔으니까 이야기인데 여러 집사님들과 장로님들에 대해서도 제 마음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인상입니다. 아무개 그러면 부정인, 아무개 긍정인, 아무개 아직까지 시험중 아직까지 일을 안 시켜봤기 때문에 확정이 안되었습니다. 긍정인, 부정인 이렇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부정인을 만나면 일에 대한 일을 하다가도 그 사람이 나타나면 말을 하기 싫습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하면 또 안된다는 이야기를 할텐데 뭐하러 그렇게 에너지를 낭비하냐는 것입니다. 입 닫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정인을 만나면 일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들도 보면 머릿속에 긍정인, 부정인이 새겨 집니다. 몇 번은 충고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생각을 바꿔봐라 등등... 그런데 몇 번을 해도 잘 안 고쳐지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하고 일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대신 편해 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일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것입니다. 긍정인들은 생각이 굉장히 틀립니다. 일단 이 일이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들면 기간, 들어가는 비용, 그 다음에 투입되는 사람, 목표치 이런것들은 얼마든지 자기 의견을 내어 조정을 할 수 있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것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다음달에는 지금 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이 힘들지만 우리가 노력을 하면 다음세대에는 훨씬 더 잘살게 될 것이다. 그런 희망이 원동력이 되어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이번에 신문에 났습니다. 자동차 만드는 기술을 스파이들이 빼돌려서 중국하고의 차이가 삼년정도 났었는데 10년을 기준으로 볼때 1.5년으로 줄어 들었다고 합니다. 이미 기술이 유출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 1.5년을 단축 시키려면 지금 그 기술이 빠져 나갔기 때문에 그 피해액이 22조원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닥에서의 기술 1년은 아무것도 아닌데 상위로 올라가서 기술 격차의 1년이 뭡니까 0.5년 차이는 피를 말리는 싸움이고 수백조의 돈을 쏟아 부어서 얻는 효과입니다. 지금 우리가 반도체 이런것에 세계 1위를 달린다고 하지만 맹추격하는 나라하고의 기술 격차라고 하는 것은 6개월, 4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24시간 쉴 사이 없이 일하고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해서 몸부림 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있는 회사들이 이익을 내야지만 살아 남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일 싫은 것이 뭐냐면 왜 그렇게 회사에 가서 처집니까? 그리고 맨날 그 이유가 믿음으로 살다 보니까 자꾸 처진다고 합니다. 무슨 믿음으로 살다 보니까 처집니까?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술도 안 먹지 직장의 역사는 대게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럴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는 태도가 올바르고 예의가 바르며 자기 일에 대해서 진취적이며 긍정적인 사람은 버리지 않습니다. 같이 술 먹으로 가지 않는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에 있는 형제가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회 직장 다니는 젊은이들 30대는 은혜만 받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회에 취직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갈등을 이기지 못해서... 그러면 신앙의 갈등을 이기지 못해서 다 교회로 들어오면 직장은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이 세상속에 나아가서 직장이 힘들고 부조리하면 거기서 하나님이 의를 위해서 싸우라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것이지 사랑하고 싸우고 승리하고 해서 그 세상을 변혁 시키라고 보내준 것이지 직장 다니기 힘들다고 전부 교회에 모여서 매일 모여서 예배 드리면서 교회에서 직원만 하고 있으면 세상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인은 이런 것들을 수행할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 오해할지 모르는데 오해 하지 말고 들어 보십시오. 저는 개인적으로 청교도를 좋아 합니다. 아마 지구상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성결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고 진리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청교도를 좋아 하는 사람을 나는 안 좋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청교도 좋아하면 다른 사람이 청교도 좋아하면 그 사람 좋아해야 되는것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되게 좋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왜 아니냐면 청교도를 잘못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특히 목회자들에게. 전도사들은 더 걱정이 되고 청교도를 잘못 배우면 목회 망칩니다. 여기 교역자들도 있고 젊은이들도 있겠지만 망칩니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이 살던 시대를 고려하면서 청교도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살던 시대에는 다 예수 믿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심이 누가 올바르게 믿느냐가 관심입니다. 더군다나 이 청교도는 영국 국교도로부터, 카톨릭으로부터 심한 핏박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주된 것이 뭐냐면 성경에서 제시한 이외의 것들을 자꾸 더 많이 믿고 더 많이 알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속에서 몸부림치고 청교도들이 싸우고 보니까 당연히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 이런 것 하냐? 그런 것은 성경에 없다 우리는 그런 것 안한다. 그런 것, 그런 것 한다는 말이지 우리는 그런 것 안한다. 그래서 청교들은 굉장히 태도가 저항적이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고 또 그런 속에서 이들의 생명력이 유지되어 가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유지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영국 역사에 보면 성복일치령이라고 나옵니다. 설교하는 사람들의 복장을 통일 하라는 것에 철저하게 항거 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그런속에서 안 믿는 사람이 없고, 보이는 유럽 세계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는 누가 옳게 믿고 누가 쓸데 없는 것을 잘못 믿느냐 하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16세기 문맥이 아니라 1세기 문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소수입니다. 어느 교수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신뢰할 수 있는 통계를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입니다. 그분 이야기는 1,200만이 기독교라고 하는데 순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통계에는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이 480만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석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교회에 제적된 사람으로 따지면 칠, 팔백만 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따지면 우리 교회도 배는 넘습니다. 삼년전에, 사년전에 등록하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교인입니까? 출석이 중요한 것이지 물론 이제 부득이 한 일이 있어서 빠지는 사람 조금 보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엄청난 숫자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 인가하면 그 만큼 불신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문맥이 16세기가 아니라 1세기입니다. 뭘 안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올바른 성경적인 정신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 사람을 섬겨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좋아한다는 사람들 만나보면 맨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제자 훈련을 한다고 욕을 합니다. 온누리 교회 찬양집회를 한다고 잘못 되었다고 비판을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느 교회는 전도만 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또 어느 교회는 도덕 운동만 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어느 교회는 예배는 안 하고 선교만 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다 듣고 봐도 그럼 잘못 되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이니까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 무언가 치우쳐서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지금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동의를 한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러면 사랑의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했는데 그것도 생겨난 과정을 보면 뭔가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 축복을 몰고 다니는 부흥사들에게 그렇게 현혹 당하면서 그런식으로 말하자면 무지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 나와서 집단속에서 이끌리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것들이 다 깨어진체 형성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중심이 안 되어 있는 그런 아픔을 안고 그런 방법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최종적인 교회를 일으키는 방법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지 간에 방법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럼 그런 고충을 안고 교회는 그렇게 고민하다가 제자훈련이라는 것을 내 놓았다 그것을 동의하냐 했더니 동의한다고 합니다. 그럼 그 교회에서는 그렇게 고민하다가 제자훈련 이라는 답을 찿았는데 당신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지. 맞다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틀렸다는 것이지 맞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은 뭐냐? 당신이 생각하는 옳은 것은 뭐냐?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문화사역하는 교회들을 비판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교회에서 복음송이 보급되서 열렬하게 찬양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많습니다. 찬송이라고 하는 것이 삼위일체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삼위일체에 대한 찬송, 창조, 성부, 그 다음에 성령안에 있는 희락, 그리스도인의 삶,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인간의 종말, 우주의 미래 이런것들을 골고루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성가 보면 맨날 하나님 만난 이야기만 잔뜩 씌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장엄한 삼위일체적 특성, 창조주의 그 위엄, 그리스도 구속의 그 위대함과 성부 안에서 교회생활의 아름다움 그 다음에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이런것들에 대한것들이 균형을 안 이루고 어느 한 쪽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정말 가사가 좋고 신학적인 깊이도 있는 것이 있는데 어떤 것들은 도대체 이것을 왜 부르나 하는 것도 있습니다. 월요일날 주님 만났네, 화요일에 만났네, 수요일날에 만났네, 후렴구에 보니까 비오는날 만났네, 눈 오는날 만났네... 이게 뭡니까? 그리고 가사나 신학적인 내용하고 상관없이 곡조속에 거의 몰입이 되어가고 요즘은 격렬한 마귀 워십을 동반해 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루창이 쿵쿵 울리도록 온 예배당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웃통을 벗고 흔들면서 찬양예배를 합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찬송해야 되겠느냐? 너희 교회에서는 어떻게 찬양하는지 보여달라. 가만히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 시대의 청교도들이 이 시대에 살아나면 절대 당신처럼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도하는 교회 비판하면서 전도라는 것이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그럼 너희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번 보여 달라. 그래서 성도들이 그렇게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들을 비판하는데 당신네 교회 성도들이 인근 지역에서 죽어가는 영혼들 때문에 그렇게 전도하는 방법이 비 신학적이고 잘못되었다면 그러면 그 영혼들을 위해서 계속 눈물은 흘리겠는가? 그것은 아니랍니다. 그럼 뭐냐? 그래서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청교도를 연구한 어느 목사님은 그럽니다. 청교도 이야기 하는 교회 중에서 열린교회가 제일 크다고 합니다. 자기들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백명이상 모인 교회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사고방식이 그런식으로 부정인의 생각을 가지고 목사가 목회를 하면 청교도가 아니라 황교도를 찿아도 안된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16세기에 살았으니까 그렇게 살았지 그들이 만약에 이렇게 불신자들이 만연해 있는 21세기를 살았더라면 절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훨씬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목회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19일이면 임직을 합니다. 그래서 안수집사님들도 세우고 장로님들도 세웠는데 일꾼들이 세워지면 이 일꾼들이 교회 전면에 나와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직분을 맡았으니까 일을 하고 성도들을 섬길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뭐냐면 기도 많이 하십시오. 원래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셔서 다 압니다. 충성하십시오 맨날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가 임직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부정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해가 안가는 일이 있습니다. 장로님들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장로님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목회자를 만났는데 이런 목사는 못 만나 보았습니다. “김 목사님 장로님들 때문에 죽겠어요” “왜 그런데?” “뭘 그렇게 하자고 하는지 모르겠어 기력도 없고 돈도 없는데 시달려서 죽겠어 이제 체력이 도저히 안따라가 아무래도 내가 사표를 내야 할까봐 ” 그 긴 세월동안 한번도 못 만나 봤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목회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하지 말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뭘 내 놓아도 하지 말자하고 그래서 자기가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어느 장로님 생각하면서... 당신은 반대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런데 한번도 없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기력이 다 했고 힘도 없고 교회에 돈도 없는데 장로님들이 왜 그렇게 새로운 일을 벌이시는지 제가 도저히 감당이 안됩니다.” 이런 목사님은 한명도 못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문화 그 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아까 이야기 했듯이 너무 급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섯달에는 도저히 안됩니다. 여섯달에 하시죠?”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돈이 모자랍니다. 일을 하는데 돈이 모자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헌금을 더 합시다. 내가 내겠습니다 까지는 안 바랍니다. 헌금을 더합시다. 아니면 우리 삼개월 계획으로 재정을 좀 아껴서 그 일을 위해 돈을 모아서 그래서 그 일들을 합시다. 이런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많은 상처들을 받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목사님 한분을 만났는데 남이 보기에 꽤 목회를 잘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떠나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 입니다. 내가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 이제는 나이도 먹고 이제는 해봐야 얼마 못하는데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해야 겠다는 꿈과 포부들이 있는데 이것이 계속 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그런 생각들이 들더랍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러고 있나? 내가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데 계속 꺽이는데 여기서 내가 솔직히 털어 놓은데 여기서 육, 칠년만 더 있으면 자기는 평생이 보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20년 하면 보장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 필요없고 내게 남은 노후 보장이 안되어도 좋으니까 한 육, 칠년동안 마음껏 꿈을 펼치면서 일 할 수 있는 교회, 목회자인 자기를 믿어주고 그 포부를 펼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그런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노후 보장 못 받아도 그렇게라도 육, 칠년이라도 잘 섬겼다가 그 사역의 장을 마무리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슬펐습니다. 일단 말렸습니다. 그 나이에 어디를 가려고 합니까? 다른데 가도 그 나이에 가도 어차피 개척할 것 아니고 그 교회가 더 좋은 교회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참고 견디십시오. 그리고 충고를 했는데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인 사람들은 참 놀라운 것이 긍정적인 사람들하고 틀립니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진취적이고 앞을 향해 가는 사람은 굳이 자기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 똘똘 뭉칠 생각을 잘 안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롭지 않습니다. 긍정적이기 때문에... 그런데 부정인은 자꾸 사람들이 자기를 비껴 갑니다. 그래서 혼자 외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납니다. 아까 이야기 했듯이 졸렬한 사람은 쩨쩨한 사람의 친구고, 호방한 사람은 대담한 사람의 친구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자비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이 부정적이고 그렇게 일그러져 있으니까 부정적인 사람을 자꾸 규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안에서, 조직안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계속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나 모든 생각들 자체가 그렇게 부정적이 되고 그렇게 저항적인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을 어디에 가서 일을 하든지 간에 주류에 들지 못합니다. 역사를 이끌어 가는 사람, 어느 모임을 이끌어서 성취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제동을 걸고 사람들 속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주는 주변인으로 머물다가 마지막에 아끼는 사람 없이 죽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면 자신의 에너지가 이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랑으로 같이 있어 주는데 두 번, 세번 반복이 되면 그 다음에 자기도 에너지가 부족한데 그 에너지를 뺏어가니까 자기는 좀 밝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하고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취적인 것들이 얻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홍보 동영상에도 나왔는데 국내 아웃리치 가는 이야기... 그것을 보면 시골 교회에 가서 전도를 하겠다고 해도 가장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목회자라는 것입니다.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여기 처음 와 봤지만 나는 이십년을 여기서 해 보니까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십년이 아니라 이백년을 해도 안되는 것은 안됩니다. 그런데 이십년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안되었다고 해서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냐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른 동료들이 와서 우리도 그랬었는데 되더라, 영혼들이 변화 되더라,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더라, 이 동네에서도 기적이 일어 나더라 이런 소리가 들리면 그 다음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난번에도 사십여명이 모인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조직에 있고, 직장에 있다고 한다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인으로 여러분들이 분류되어 있다면 여러분 친구가 없이 외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가 있어도 그 사람도 그 조직에서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기대면서 살지만 그러나 모두 말하자면 그 속에서는 주류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한 회사를 경영하는 큰 회사의 사장이라고 생각을 하고 직원이 있는데 한 사람은 머리도 좋고 아주 똑똑하고 일을 잘 합니다. 그런데 부정인입니다. 그래서 사장인 자신이 뭘 이야기 하면 항상 그것을 꺽으려고 합니다. 일단 이 사람이 설득만 되어서 한다고 하면 가장 잘 해낼 사람인데 계속 부정적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아까워서 사장이 자존심을 꺽고 설득하는 것을 몇 번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중에 두 세번 하다가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야 이자식아 너 없으면 내가 회사 못 할 줄 아냐!” 그리고 보기 좋게 목을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역으로 그 사람 보다 훨씬 못한 사람을 그 사람 위에 승진을 시켜서 그 사람을 완전히 떡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한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능력은 좀 모자라는데도 어떻게 하든지 배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을 이해하고 나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하고 오히려 많이 나누면서 그 사람을 성장하게 만들어서 길러서 쓰고 싶은 것이 그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누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유능한 사람들만이 주님 곁에서 수종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능력이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정말 밝은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선한 뜻을 품고 그 꿈을 가지면 우리의 부족한 것들은 주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 가서도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하면 나는 재수 없어서 여기 밖에 못 왔고 다른 사람은 실력이 없어서 여기밖에 못 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회사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렇게 환자들을 진료할 때 지붕을 뜯어서 내린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사랑과 열정은 모든 창조적 발상의 원동력입니다. 사랑하면 놀라운 창의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처음에는 능력이 월등했는데 그런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능력 개발이 안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서히 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추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향료를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가 뭐라고 합니까? 푼수 없는 여자다. 그것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지 왜 아까운 것을 예수님께 부어 버리는가 그래서 낭비해 버리는가... 그것이 정말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서 그런것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아주 무능하고 부족해 보이는데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유능하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게 사용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직장에서도 제발 태도를 바꾸어 보십시오. 말 한마디만 바꾸어 보십시오. 상사가 뭘 시킬때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럼요 되지요 그리고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돈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되도록 해 보겠지만 혹시 안되면 지원을 부탁드립니다.저도 한번 그 날짜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몇 번만 그렇게 해 보십시오. 눈빛이 틀려 집니다. 교회에서는 이 세상의 사장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니까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셔서 세워 주시는 그것도 잠깐 피었다 지는 들풀과 같습니다. 금방 없어 집니다. 그렇죠. 그렇게 세워 주실 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진취적인 꿈을 꾸고 나도 한번 장로님들이 열분이나 되고 하는데 끌려 다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분 앞에서 도저히 기력도 없고, 없어서 이 정력적인 사람들하고는 도저히 체력과 모든 것이 딸려서 못 끌고 다니겠으니까 좀 젊고 쌩쌩한 사람으로 다시 뽑으라고 내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섬기도록 주신 우리 자리에서 분복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그렇게 섬기기를 바랍니다.
6. 용서, 관계의 시작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17:9)
오늘은 사람을 얻는 법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을 구하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어떤 것은 잘하지만 또 어떤 것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또 잘하는 것도 어떤때는 아주 잘하지만 어떤때는 잘못하는 것이 인간에게 늘 있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때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그리고 실수를 할 때에는 그때는 우리가 잘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못하는 그 사람이 같지 않아 보이고 아주 하챦아 보일때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이 잘할때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여기에서 용납 또는 용서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화) 영국의 유명한 비평가겸 평론가중에 ‘토마스 칼라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논문을 완성했는데 어느날 자기가 들어가 보니까 그 원고 뭉치가 없어 졌습니다. 그래서 하녀에게 물어 보았더니 휴지인줄 알고 벽난로 속에 집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허겁지겁 찿아가 보았으나 이미 재가 되고난 다음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후에 그때를 회고하면서 그때 그 하녀가 그 원고를 벽난로에 넣지 않았더라면 몇 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절약 했을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 하녀를 용서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연필을 들고 다니는 것을 싫어 합니다. 그냥 가슴에 이렇게 꽂으면 가슴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그래서 만년필이고 뭐고 가방에 넣어 다니고 가방이 없으면 그냥 다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 휴대폰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메모의 기능도 있고 목소리를 녹음하는 기능도 있어서 왠만한 메모는 여기에 합니다. 더군다나 저는 음악을 좋아해서 여기에 연결을 해서 음악을 들으면서 산책을 하다가 떠오르면 가던길을 멈추고 이것을 꺼내어 여기에 적습니다. 많이 들어가는 것은 천자까지 들어가고 보통 편리한 메모지에는 이백자까지 들어 갑니다. 제가 언젠가 1년 안되게 정말 집요하게 욕망에 대하여 사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기에 요점만 정리해서 들어간 것이 메모지 63장까지 여기에 썻습니다. 그것이 거의 8개월간 쓴 것입니다. 그러다 산책을 하다가 그것이 떠오르면 가던길을 멈추고 떠오르는대로 썻는데 어떨때는 한참을 보니까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다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니까 언덕에 고정자세로 서서 이것을 쓴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은 도저히 생각이 안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방 갔다 오다가 잊어버렸습니다. 그때 아주 캄캄했습니다. 그때 심경으로는 천만원을 주고라도 찿을수가 있다면 정말 은행에서 대출을 얻어서라도 찿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나절을 마음을 졸였는데 결국 찿았습니다. 그 다음에 기겁을 해서 이것을 펼쳐놓고 타이핑을 해서 정리해 두었습니다. 8개월 동안을 완전한 작품도 아니고 이속에서 메모된 것들을 잃어 버렸는데도 그렇게 마음이 견딜수 없을 정도로 허망하고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 특강한다고 하는 영혼과 시간성에 관한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 부분이고 아직은 책이 안나왔고 신학교용만 나왔지만 어쨎든 미리 받아 보신분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도 제가 5, 6개월 전에 여러달동안 영혼에 관해 묵상한 것이 여기에 몇 개가 있었는데 그중에 세 개를 뽑아 정리해 이장을 만든것입니다. 그러니 63개나 되었으니 63을 한번 세어 보십시오. 그런데 그속에 다 뼈대를 가지고 만들어 졌으니까... 그래서 타이핑을 하니까 A4 용지로 50장이 넘게 나왔습니다.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을 잃어 버렸을때의 그 마음보다 훨씬 더 칼라힐은 굉장했을 것입니다. 진짜 살고 싶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원래 글이라고 하는 것은 쓰는 사람이 많이 아는데 재현이 안 됩니다. 죽어도 재현이 안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쓴 글이 먼저 쓴 글보다 훌륭하게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안타까왔을텐데 이미 벌써 사라진 것이니까 토마스 칼라힐은 이 하녀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마 일평생 그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꼭 필요한 때에 베풀어 주는 도움은 필요 없을 때에 베품을 받는 그 도움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니면서 하나님앞에 투덜거린적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 보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 친구 전도사 한사람은 방을 구하러 다니는데 돈이 천만원 밖에 없었는데 집을 보니 이천오백만원 짜리 집 밖에 없더랍니다. 이것 너무 좋은데 우리는 돈이 안되어서 안되겠다 했더니 주인이 뭐하시는 분이냐고 하더랍니다. 교회 전도사이고 신학교에 다닌다고 하니까 주인이 뛰어 나오면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아이고 전도사님이시냐고 그 까짓것 방세가 무슨 문제냐고 들어와서 사시라고... 그런데 나는 왜 그런사람이 안 나타나는지... 나는 오히려 띠어 먹혔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쫒겨 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왜 하나님이 그런면에 있어서는 왜 나한테는 인색하실까? 또 내 제자 하나는 그때는 아직 정식 교수가 되기전 강사 시절인데 어느날 달려와서 “교수님! 기뻐해 주십시오” “무슨 일 입니까?” “이제 직장 그만두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아니 어떻게 지금까지 직장 다니면서 야간 신학교를 다녔는데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면 가족은 뭘 먹고 삽니까?” “우리 교회에 은혜를 많이 받은 집사님이 있는데 한달에 생활비 70만원을 대주고 학비를 대 줄테니까 이제는 그런것 하지말고 공부에만 전념하랍니다.” 그때 70만원이면 어마어마한 돈 이었습니다. 왠만한 담임목사도 못 받는 돈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28만원 정도 받을 때 였습니다. 그러니까 70만원이면 굉장한 돈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하나님이 혜택을 베풀어 주시는데 나는 뭐 그런것도 없고... 그렇게 투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2학년때 저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아이를 낳기 위해서 그때는 의료보험도 안될 때 였으니까 90만원인가를 우리 집사람이 모아 놓았습니다. 어떻게든지 자연분만을 하려고 하는데 12시간동안 고생을 하다가 결국 제왕절개를 하고 낳았습니다. 그러니 막막한 상태 였습니다. 그러더니 여러분들이 왔다 가셨는데, 대부분 그냥 왔다 가셨는데 어느 집사님 한분이 오더니 봉투 하나를 놓고 가는데 열어보니 사만원입니다.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그 교회앞을 지나 서울여대에 특강을 하러 가는 길인데 마침 그때 생각이 나서 두어시간 일찍 출발을 해서 교회에 가서 교회를 지키는 직원한테 그 집사님 집을 찿아 달라고 해서 가서 가는데 돈을 주면 받겠습니까? 그래서 사만원을 받았지만 과일, 오렌지 한박스를 사만이천원에 사서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니까 반가워 했습니다. 그날도 가니까 중고등부 아이들 준다고 닭을 열심히 튀기고 있었습니다. 역시 남한테 베풀던 그 가닥은 어디로 가지 않는구나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분은 기억도 못합니다. 그러나 제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이 왜 기억에 나는가 하면 그때가 가장 어려운 때 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며서 이웃에 육체를 위해서 베풀수 있는 자선은 나눔이고 그의 영혼을 위해서 베풀수 있는 자선은 용서입니다. 특히 함께 공동생활을 해 나가는 교회의 지체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육체적으로는 육체의 자원이 떨어졌을때가 가장 궁핍할 때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풍족할 때에 도와주는 것은 기억에 안 나지만 너무 어려워서 어떻게 할 수 없을때에 도와주는 그 때에는 그 사람이 적은 액수 이지만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만약에 육적인 자선이 아니라 영적인 자선을 그에게 베풀어 준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제 베풀어 주었을때 그의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자선이 되겠습니까? 잘못했을때 그래서 궁지에 몰렸을때 그리고 그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 있을때에 자비를 베풀면 그 사람은 일평생 나를 잊을 수 없는 은인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만 그렇게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관계에서 저사람이 그런 중요한 잘못을 하면 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뢰가 무너지고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깨질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그를 용서하고 관계를 계속하면 오히려 그 위기 때문에 서로 헤어질 수 없이 아주 든든하게 붙들어 매어진 그러한 돈독한 관계가 되고 두사람 사이에 정신적인 결합이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예화) 비만 오면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다리가 아프시다고 했습니다. 6.25때 총알에 맞아서 뼈가 완전히 부러져 버렸습니다. 뒤에서 총에 맞아서... 뼈가 부러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이야기도 재미 있습니다. 이제 전투를 하다가 후퇴를 하는데, 정신 없이 후퇴를 하는데 뜨끔 하더랍니다. 그래도 정신 없이 후퇴를 하는데 얼마만큼 가는데 이상하게 군화가 질퍽질퍽 하더랍니다. 그런데 군화를 벗어서 터니까 피가 쏟아 지는데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 하더랍니다. 그래서 육군병원에 후송되어서 갔는데 얼마나 바쁜때인지 환자들을 천막에 눕혀놓고 의사가 수술하던 때 이니까 다리를 보더니 가망이 없으니 빨리 자르라고... 그래서 제발 자르지 않게 해달라고 울고 불고 사정을 했는데 다행히 그 당시에 그 군의관중에서 아주 유명한 최고의 외과의사한테 할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를 수 밖에 없는 다리인데 그분이 기가막히게 수술을 해서 다리를 연결시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 한번 부러진 다리인데 뛰어가거나 해서 넘어지면 또 부러지는 것 아닙니까?” “야 이리로 와서 내 다리 좀 한번 만져봐라” 그래서 다리를 만졌더니 뼈가 이렇게 내려오다가 부러진 부분에만 뼈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이것 왜 이러냐 했더니 젊은 나이 였기 때문에 부러지고 나니까 거기서 진핵이 쏟아져서 오히려 더 든든한 뼈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러져도 다른데가 부러지지 그 부러진데는 절대로 안부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저히 관계를 계속할 수 없이 깨어지는 관계가 되었을 때에 그 위기를 잘 넘기면 오히려 그때 그 사람이 영원히 나와 헤어질 수 없는 동지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무제한 적으로 나에게 헌신하고 무제한 적으로 나를 믿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내옆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굉장히 커다란 재산입니다. 무능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을 갖지를 못합니다. 덕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대부분 사람들은 남들이 잘 될 때 덕을 보기 위해서 그에게 잘해 줍니다. 그러니까 잘해줘도 잘 해준 것이 상대방의 마음속에 기억이 남지 않습니다. 옛말에 그런말이 있습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줄을 이어도 정승이 죽으면 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가 죽었을때는 가서 한사람씩 줄을 서서 눈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승이 죽는다면 누구한테 가서 눈도장을 찍을 것입니까? 벌써 권력을 잃어 버렸는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처세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도 그 사람 마음이 기억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실패 했을때, 죄를 지었을때, 좌절해서 희망이 없을때, 낙오자로 찍혔을때, 중대한 잘못을 해서 나에게 커다란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하고 있을때, 그때 용서와 자비를 베풀면 그 사람이 일평생동안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인배는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때 결국은 그 책임 소재를 파악해서 보복을 함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얻지만 군자는 그런 속에서 넓게 보면서 오히려 그런 위기를 그 사람을 자기의 것으로 얻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예화)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주나라시대때 어느 왕의 이야기입니다. 왕이 나라를 지키는 데 공로가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연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회가 무르익고 있었는데 그렇게 연회가 무르익는 그때에 갑자기 바람이 휘이익 불더니 공교롭게 연회장의 촛불들이 꺼졌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있더니 으악 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뭔 소리인가 하고 다시 불을 켰더니 저 한구석에서 왕이 아주 아끼는 궁녀 하나가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궁녀인데 왜 우냐고 했더니 술을 따르고 있는데 불이 꺼지자 마자 누가 자신의 몸에 거칠게 손을 대었다는 것입니다. 어두워 그 사람을 볼 수 없어서 투구의 작은 끈을 잡아 댕겨서 자기가 끊었습니다. 그래서 이 끈의 임자를 찿으면 자기를 욕보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온 연회장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아주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모든 장수들이 바로 이 여자가 왕이 매우 아끼는 그 애희인줄 알면서도 누군가 그 일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이 왕의 진노의 불을 누구도 끌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궁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왕은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이제 물러 가거라” 그리고 문을 닫았습니다. 장수들은 침을 삼켰습니다. 드디어 이제 누군가가 죽는구나? 그때 왕이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끈이 달린 모자를 벗고 계속합시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 갔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주나라 왕이 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친히 수레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가리켜서 친전이라고 합니다. 왕이 친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을 하게 되었고 왕의 이 어간은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어떻게 해서 호위병에 의해 상황이 종료되고 그리고 간신히 그 전쟁의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을때에 온 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피뭇은 칼을 손에 든체 죽어가고 있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왕이 너무 안타까워서 가까이 가서 손을 잡아 주면서 “네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이토록 희생하였구나”라고 칭찬을 하니까 그때 이장수가 숨을 거두면서 왕의 손을 잡으면서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폐하 사실은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던 그날 왕께서 아끼시는 그 애희의 몸에 손을 댄 무례한 사람이 바로 저 였습니다. 취중에 그 일을 했는데 틀림없이 그 일을 알았으나 왕께서 우리 모든 장수들은 투구를 벗고 계속 술을 마십시다 한 그 순간 저는 폐하를 위해서 언젠가는 죽기로 결심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동안에 고난을 많이 받고 때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면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외로운 고통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동기가 무엇 입니까? 그렇게 살면 남들이 알아 줄것이라고 하는 그런 보상에 대한 것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때문이 아니라 사실을 우리의 과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며...
(찬송)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 생각 때문에 우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 아닙니까? 관계의 원리는 유사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못했을때 모든 사람이 핏대를 올리고 짓밟고 할때 누가 그 사람을 그 짓밟는 자리에서 털어주고 그 팔을 잡아 일으켜 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불명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정말 사람을 얻는 사람은 바로 그럴때 그 사람을 일으켜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오래동안 여러분들에게 후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중에 어떤 사람은 나는 어떻게 도와 주는 사람도 없고 박복하고 나는 정말 외롭다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태도를 진지하게 반성해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째째한 사람들 옆에는 항상 졸렬한 사람들만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정말 인격이 비루한 사람 옆에는 아첨하는 사람들이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호방하고 그 사람이 위기에 처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에 대해서 악을 행하고 죄를 지어서 양심의 가책에 고통을 받을때 대범하게 손을 뻗어서 용서의 손길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그 주위에 덕을 베푸는 사람들이 따라 다닙니다. 자신속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는 사람들은 선을 사랑하는 한 사람들이 그 선을 좋아해서 그 사람 곁에 모이게 됩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 앞에 뭔가 실수하고 잘못해서 정말 미안해 할때 오히려 대범하게 그를 용서하고 오히려 베풀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오래동안 여러분들의 영적인 자선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오래도록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생각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7. 사랑받는 비결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3:1-4)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이런 기로에 놓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초대교회시대때 복음을 전했더니 데려다 때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때리면서 다시는 그런 복음의 도를 말하지 말아라 그랬더니 사도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수가 없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숱하게 얻어 맞고 핍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과 원수 되지 않고는 도저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되면 그 사람을 버리고서라도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많은 경우는 자기가 조금만 지혜롭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인간의 올바른 도리를 지키면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고 사람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가 부족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사람에게 비난을 당해 사람에게 인정을 못 받고 없수이 여김을 받는 그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사랑받는 행동만 하면서 사느냐?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시절이 누가복음 2장에 잠깐 나옵니다. 그 예수님의 자라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성경이 뭐라고 가르쳤습니까? ‘예수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또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이 굳이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울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이신데... 오직 하나님께만 사랑을 받으셨더라. 키는 안 자라고 지혜만 자랐더라. 왜 성경이 그렇게 안 적었을까요? 여러분 옷을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을 필요는 없지만 단정하고 품격 있게 입고 다니십시요. 그것이 어디가서 대접받는 비결입니다.
실제로 실험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똑같은 가게에 갈 때 바지나 입고 너덜너덜한 티셔츠를 입고 갔을때 대접해 주는 것과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갔을때 종업원의 태도가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라. 그리고는 아무 옷이나 입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사실 그런데에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에 적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께 보여야 할 중심을 훼손 하지 말거라 하는 뜻 입니다. 그래서 여성이 화장품으로 자기를 단장하고 사치스런 옷으로 꾸며 입기 위해서 기도도 못하고 교회에 십일조도 못내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를 받는다면 집어치어야될 일이지만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앞에 더 없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인데 사람들에게도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고 합니까?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해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에게는 은혜를 받고 사람에게는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선택했을때에 그 기준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사도중에 한 사람인 가롯유다를 대신해서 마띠아를 뽑았을때에는 예수께서 계실 때 우리중에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됐지만 안수집사를 뽑을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그 다음에 특이한 조건이 들어오는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직 주님 일념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교회의 집사가 되는 아주 중요한 조건으로 뽑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주 자의적으로 적용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모두 자기가 워낙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충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을 만나면 재미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저도 그런 마음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교회가 많이 모이고 잘 되는 것은 세속적인 방법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럴껄 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교회가 많이 모이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럴껄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교회가 잘 안되는 것은 그 하나님의 복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네 교회가 잘 안되는 것은 워낙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 때문에 패역한 시대에 인기가 없어서 그럴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약간씩 그런 마음이 스며들어 있었는데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대중적이 되면 저 사람 틀림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허술할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의 입맛에 척척 붙는 사람들이 되지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때에는 은혜 충만하고 사람이 성품이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허구가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범죄하고 어려움이 오기전 까지는 다윗은 백성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아주 많이 받은 왕 이었습니다. 특히 한 나라를 세운 왕들의 역사를 보면 한 나라를 건국한 왕을 보면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발해를 세운 대조영 굉장히 중요한 인물들이고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을 강하게 끄는 그 무엇을 가진 사람들로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미화시킨 면도 있겠지만 물론 나라를 세웠으니까 그렇지만 사실인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겠다고 선언을 했을때에 그때 왕이 있었습니다. 사울 아닙니까? 나라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이제 이 나라를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따르는 사람 없이 자기가 깃발 하나 들고 나는 왕이다 하고 깃발을 휘둘르면 정신병원에서 끌고 갑니다.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지만 왕이 되는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울의 치하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병든자, 억울한자, 빚진자, 원통한자, 이런 사람들이 다윗을 그렇게 따랐습니다. 다윗안에서 무엇인가 외모의 따뜻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잡아 끄는 놀라운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고 다윗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만한 그런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훼손하면서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참다운 진리를 따라가면 사람이 워낙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미워하는 미움 때문에 덩달아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진리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만 있느냐 하면 진리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에 합치하는 어떤 사람의 삶을 볼때 그 속에서 무한한 영감과 감화 그리고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사람들을 합치하게 하는 힘 입니다. 그런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사람 입니다.
(예화) 두 집단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사람을 소개했는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 했습니다. “이 사람은 성격이 거칠고 무례합니다.” 이렇게 먼저 소개를 한 다음에 “그렇지만”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도 잘하고, 의리도 있고, 돈도 많이 벌고, 공부도 많이 했고 가문도 괜챦고 몸도 튼튼합니다.” 이렇게 소개를 했습니다. 다른데에서는 반대로 소개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의리 빼놓으면 시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좋은 교육에서 태어났고 집안이 아주 좋습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그런데 성품이 좀 거칩니다.” 이것이 순서만 좀 바뀌었는데 처음 소개를 받았던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인상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만났을때에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것을 저 사람에게 느끼게 해주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다 팔아먹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옷을 어떻게 입고, 어떻게 행동하고, 매너를 어떻게 하고 이것만을 익힌다면 이것은 앵무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아주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삶의 태도가 아주 나쁘다면 그것은 갑속에 들어있는 칼 입니다. 그래서 효력을 별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성이 깊을 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도 아주 올바르면 이 칼은 번떡이면서 휘두룰수 있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거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존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교를 위해 내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거라 하는 것입니다.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비둘기와 같은 순결의 덕목하고 바꿀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아무리 슬기롭고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순결과 바꿀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과 순전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혜롭지 못하다면 그것이 빛을 발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대할 때 우리의 깊은 영성이나 오묘한 하나님과의 교제, 일생을 살아온 하나님과의 대하소설 같은 라이프 스토리 같은 것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대할 때 우리의 일생 일대기를 봐주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도록 관찰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못하니까... 그냥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저도 그러지 말자 라고 애를 쓰는데 어떨때는 이름만 되면 알만한 유명인사를 만날때가 있습니다. 꼭 기독교의 목사가 아니더라도 책에서 보고, 메스컴에서도 보고, 그 사람이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고, 참 좋은 사람이다 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났는데 잠깐 동안 대화를 나누는데 이사람이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에 붕 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비치겠구나? 그러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어느때 붕 떠서 잘난척을 할 때도 있고 또 마침 만난 그 순간이 업드려 눈물 흘리며 기도한 순간이라면 은혜의 물이 아직 안 빠져 나갔기 때문에 아주 겸손하게 느껴질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어느 시점에서 만난 것이냐의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상대방은 그런 모든 것들을 고려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을 때에는 당연히 은혜가 있기 때문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그래야 하고 은혜가 떨어졌을 때에도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분수를 알고 낮아지고 겸손하려고 할때 그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많은 좋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것입니다. 저렇게 겸손하고 저렇게 온유하고 하니까 저사람의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내가 저 사람의 설교도 듣고 간증도 듣고 저 사람에 대한 소문도 들었지만 그것 이상의 많이 것이 저 사람속에 있을거야 하는 기대와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뱀같은 지혜가 비둘기 같은 순결을 드러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람앞에 잘 보이는 것, 물론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이익이나 사회적인 도움을 기대하고 잘 보이려는 것은 많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부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런것 말고 사람들이 나에 대한 선한 인상을 갖고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다른 사람에게 선하고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하는 노력들을 별로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워낙 하나님께만 집중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안중에 없냐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워낙 집중하는 사람의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에게 부러워하고 선망하는 그런 인상을 남기지 저 사람 하나님께 워낙 집중했기 때문에 나를 무시하는구나 하는 그런 인상을 받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월터 발로우라는 사람이 엔드루 머레이 목사님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분이 화란분이고 선교사 였습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목사님인데 벌써 한 백년 좀 넘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서양사람으로서 153cm이면 아주 작은 키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자로서는 작은 키 이지만 거기서도 거의 난쟁이 수준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별명이 작은 거인 이었습니다. 체구는 그렇게 조그마한데 영적으로는 거인 이었습니다. 그분의 책들이 굉장히 깊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해서 회고를 하는데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영적 체구의 거인이 무릎에 두손을 포겐체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누구도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영상적인 큰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계셨습니다. 잠시후 그는 눈을 뜨고 우리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며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앞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들어 왔는데도 무릎에 두손을 포게고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을 명상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말 어떻게 자기 혼자 예수 믿나? 우리가 들어 왔는데도 저렇게 깊이 주님을 묵상하고 있다니 하면서 학대받는 느낌을 받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침범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고 우리가 올바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안 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사람에게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하는 사람이 대게 하나님을 향하여서도 올바른 태도를 갖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은, 관계를 갖고 싶은, 아름다움이 계속 발견되어져서 사랑하고 싶은, 기억에 남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아울러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못하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굽은 성품과 패역 그리고 쉽게 고쳐지지 않는 메마르지 않는 성품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이렇게 하나님앞에 사람들을 올바로 대우해 주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것들 때문에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 갔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그 사람과 깊이 교제를 나눈것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 그리고 지금이라도 거리에서 만나면 함께 밥을 먹고 싶고 그리고 뜨겁게 악수하고 그리고 살아 온 삶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은 그런 얼굴이 있고 또 어떤 얼굴들은 만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그림으로 떠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어떤 사람으로 떠 오르겠습니까? 가장 나쁜것은 하나님께도 사랑을 못 받고 사람에게도 사랑을 못 받는 것입니다. 패역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아끼는 자 없이 죽었더라 라고 역대기에 나옵니다. 그것보다 조금 나은 것은 하나님께는 잘못 보여도 사람에게는 사랑 받는것 아닐까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는 잘못 보여도 그래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사랑을 받는 것 더 좋은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래서 받는 것입니다. 신앙을 훼손하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그 위에 좋은 지혜와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가꾸어서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을 깊이 관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고 아름다운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될 때 그런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은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의 기쁜 소식들을 신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겠죠? 신경을 써 보십시요. 내가 이러한 태도를 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교회에서도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시집 장가를 가면 아이를 낳은데 저는 기본적인 생각이 아이들이 교회에 오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그래서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정말 마음껏 뛰어 놀고 그져 마음 같아서는 넓은 운동장, 풀밭이 있어서 아이들이 와서 거기서 공차고 뒹굴면서 주일 내내 놀다가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렇게 해라 그리고 가끔 와서 보면 아이들이 꽃도 따고, 풀도 뽑고 그러는데 심어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좀 쓰리지만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내가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꽃 떨어진 것은 가져다 장례 지내주고 땅에 묻어 다시 새것 사다가 심든지 하면서 그냥 살다 보면 그 아이들도 몇 개 부러뜨리면 진력나서 안 부러뜨립니다. 그러다가 크면 그러면 안되는구나 하고 배우고 자랍니다.
(예화) 우리도 교회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짖굿은 짓을 많이 했습니까? 내가 아는 전도사 한 친구는 얼마나 개구 졌는지 여름철이면 교회 옥상에 올라가면 비상 물통이 있는데 물이 들어와서 거기에서 물이 내려가는데 그 물통에 들어가서 수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온 교인이 그때 더러운 물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 녀석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나중에 은혜받고 목사도 되고 했는데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거기에서 오줌도 쌌다고 합니다. 고백하기를... 그렇게 개구지게 살면서도 다 나중에 깨닫고 주의 종들이 되는데 부모는 자기 자식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 아이들도 한번 보십시요. 우리가 어른인데도 아이들이 철이 없는데 두종류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와서 목사님이니까 인사 드려라 하는데 질질 뒤로 빼고 싫어 하면서 엄마 품속으로 파고 들고 그래도 인사 좀 하라고 해도 막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서 얼른 자리를 떠납니다. 아이들이 있는데 만날 때 마다 그 아이는 나를 만나면 징징 거립니다. 무슨일인지 모르는데 그렇게 신경질을 부리고, 심통을 부리고, 골을 부리고, 징징 거리고, 칭얼거리기만 합니다. 항상 이 아이에 대한 인상은 그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보면 두팔을 벌리면서 그것도 그냥 목사님이 아니라 “열린교회 김 남준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면서 항상 팔을 벌리고 달려 옵니다. 그 아이는 매주일 사탕 하나를 얻어 먹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 대한 인상은 항상 좋게 남습니다. 철없는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인상이 남는데 나이든 성인에게는 어떤 인상인들 안 갖겠습니까? 아이들도 이렇게 보면 아이들이 바깥에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앉습니다. 자기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유리 위에 올라가서 뜁니다. 그런데 엄마는 무엇을 하는지 다른 일을 하면서 자기 아이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리 위에 수 많은 발자국을 남겨 놓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발에 흙을 묻혀서 올라가서 나무 의자 위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뛰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의자가 망가지고 흙이 묻고 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거기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밑에는 돌바닥인데... 돌과 돌이 부딪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안되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아주 자지러질 정도로 위험합니다. 탁자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 아이가 어른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이한테는 탁자 높이가 한키 아닙니까? 한키 위에서 떨어져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잘 제지를 하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잘 타이르고 그리고 아이에게 어떻게 다른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행동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것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다 집어 던졌으면 엄마가 가서 그것을 줍고, 아이들이 탁자위에 설탕물을 뿌려놓았으면 그것을 엄마가 깨끗이 휴지로 치우고 일어 서는 것이 교회 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들이 모두 은혜가 바닥이냐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면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깊고 진실한 사랑 그리고 깊고 하나님을 만난 분명한 체험이 있는 단오하고 아름다운 신앙과 영혼의 아름다운 모습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에 읽혀지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심과 외모를 한꺼번에 보시지만 사람들은 항상 외모를 통해 중심에 이를때까지는 몇 년 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중심까지 들어가려는 노력이 없이 결국은 그 인상을 가지고 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지혜로운 것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지혜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비결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뭐라고 했냐면 하나님의 법과 명령이라는 그 비결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사람을 이렇게 지혜있는 사람으로 바꾼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그렇게 테이프 많이 듣고 말씀 열심히 배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삶과 인격이 꽝이던데요? 그것은 뭐냐면 아무리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을 많이 들어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듣고 자신의 삶속에 치열하도록 적용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결코 삶의 지혜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도를 깨울칠때에 득도 했다라는 말을 가끔 쓰지 않습니까? 우리는 감히 쓸수 없는 이야기 이지만 득도 했다라고 했을떄 결국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들어가서 녹고, 용해되고, 자신의 온 삶에 전부 다 녹아서 치열하도록 그 진리에 합치하고자 하는 삶을 산 결과 이속에서 삶에 대한 어떤 명료한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득도 입니다. 득도한 사람에게는 항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도가 무엇인가? 도에 합치한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이 자신에게 적용했을때 실제로 삶이 어떻게 지혜롭게 되는가에 대한 이 세가지의 모든 지식이 함께 들어 있을때 그것이 진정으로 득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도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득도의 정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가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쫒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너무너무 욕을 먹는 것입니다. 개신교 교인들은 상스럽다는 것입니다. 품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았으면 그 법도와 명령을 잘 알고 이것을 나의 삶에 적용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치열하게 생각하는 것이 온전한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지혜의 빛을 계속 그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깊은 영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삶에 공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바구니 속에 부어 버린 물 입니다. 한번에 빠져 나갑니다. 공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산전수전 다 겪고 연단도 받고 은혜도 받았는데 여전히 개념이 없는 삶을 계속 살아 갑니다. 철부지 같은 삶을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깨뜨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행동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법도가 없는 아주 무례한 삶을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삶입니까? 그리고 이런 것들이 결국은 개신교 교인들은 상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태도를 올바르게 해서 하나님에게는 많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는 사랑스러워 가고 사람들에게는 존귀함을 받아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지적인 품격 그리고 삶의 품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어디에 놓든지 간에 예수 표를 붙여도 좋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예화) 교회에 오면서 주차 때문에 동네 사람하고 대판 싸우고 말이죠. 제가 전도사일때 인데 주일날 교회를 가고 있는데 빨간차 한 대가 앞에 가는데 이 차는 다른차를 괴롭히기 위해서 태어난 차 같습니다. 어쩌면 운전을 그렇게 상스럽게 하는지 내가 주일이지만 신호등에서 만나면 창문을 열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하냐고 말입니다. 당신 때문에 몇사람이 힘들지 않냐고 이야기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주일인데... 내가 이야기 했는데 “선생님 죄송해요” 이러면 내 기분이 풀어 지겠지만 “네가 뭔데?” 그러면 거기에서 내가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마음이 안 편해서 이런 상황 저런 상황 생각해 보니까 결국은 말 안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정문에서 둘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창문을 열고 “당신 좀 잘 하쇼!” 라고 했으면 내가 전도사인지 몰라 봤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 문을 열면서 “내가 뭘 잘못 했는데?”하면 “아침부터 정말 재수없네... 재수가 없는 것이 뭐야 차는 빨간차를 몰고 다니면서 사람이 왜 그래!” 나도 화나면 말 할줄 아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뭘 잘했느냐고 옳지 않은 것은 못보거든요 하면서 창문 열고 한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 교회 주차장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들이 항상 태도를 아주 조심하면서 우리 신앙이 통전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 사람들에게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그것이 왠지 사람들이 나를 존귀히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존중 받지 못하고 그렇게 따돌림을 받고 이렇게 삶의 상황이 계속 된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면서 내 자신의 신앙의 결점을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이번에 아주 오래간만에 결혼한 가정을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왜 특별히 결혼한 가정에 심방을 갔느냐 하면 그 이유는 우리 청년부 목사님들이 갖 결혼한 가정에 심방을 가서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목사님이 시범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보여주마 하고 두 번 갈 수 없으니까 둘이 같이 따라 오라고 하고 목사님 두분하고 같이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을 가서 그집에서 7시 30분부터 11시까지 심방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둘이 개통식을 시켰습니다. 여보 당신 해보라고 했더니 자기들은 그렇게 해본적이 없다고... 자기는 아내한테 “여보”라고 부르는데 아내는 절대로 자기에게 “여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개통식 시켜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불러 보라고 하니 “여보” 한번 더 “여보” 됐다 이제는 개통식 했으니 뚫어진 길로 둘이 다녀라 했습니다. 부를때는 “여보”, “당신” 하면서 불러라. 그렇게 개통식까지 해 주었습니다. 결혼한 자매에게 “네 남편이 몇째냐?” 했더니 맏이라고 합니다. 동생이 있고... “그래 너 시집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냐?” 당연히 며느리가 갓 시집을 왔는데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몇가지 자네한테 주의를 주겠는데 내 말을 잘 들으면 사랑받을 거야. 뭐냐하면 절대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면 시부모님께도 정말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정상적인 영성이다. 생각을 해 보거라. 그래서 네가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으면 부모님께도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너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니까 이제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몇가지만 주의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대여섯가지를 가르쳐 준 것 같습니다. 한시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열심히 노트에 받아 썼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일먼저 가르쳐 준 것이 그것입니다. “너의 집에 명절 지내지?” “네 명절 지내죠” “일찍 가거라 그래서 오늘이 명절이면 명절을 준비하는 큰집은 이틀, 작은집은 하루전에 준비를 하는데 내일이 명절이다 하면 오늘 일찍 가거라 그리고 오늘 되기전 3-4일전에, 일주일전에 전화 걸어서 어머니 명절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제가 뭘 좀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여쭈어라. 오라는 소리가 떨어지기 전에... 그리고 너희는 돈이 없으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 가지고 갈게요 라는 말은 못하더라도 직장 생활하고 바쁘지만 어머니 이번 명절에 쓸 고기는 저희들이 사가지고 갈게요 나머지만 준비 하세요 이렇게 말씀 드려라. 그리고는 언제 일하러 가면 되요? 했더니 너희들은 천천히 오거라 내가 다 해 놓을테니 와서 먹기만 해라 하면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마라. 그것은 스스로 함정을 파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 먹고 늦게 오거라 하면 오전에 가고 아침먹고 천천히 오거라 하면 새벽에 가거라 가서 어머니 이것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라. 네가 잘 해도 항상 혼자서도 잘해요 하지 말고 제가 어머니 없이 이 일을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의존적인 사람이 되라. 지혜로운 사람은 모르는 것을 물어 보는 것이 아니라 다 아는 것을 물어본다. 다 아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 보면 실수 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원래 할 줄 아는 것인데 물어 보았으니까? 그럼 시어머님이 얼마나 잘한다고 생각 하겠느냐? 그렇게 하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라.” 태도가 올바라야지... 만약에 너 늦게 가서 시어머님이 꿈지럭 거리고 일어나서 뭐라도 하면 어떻게 생각하냐면 “며느리 둘씩이나 얻어도 내 팔자야 도움이 안되는 구나” 하고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도 안나타나고 밥 실컷먹고 오후 3시나 되어 나타나면 거의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툭하고 나타나면 그 시어머니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에고 저것 또 개념없는 것이 또 하나 들어 왔구나” 그러지 말아라.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슨 큰일 때만 나타나려고 하지말고 그리고 큰일때 나타나면 보따리부터 먼저 싸는 며느리들이 있는데 너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라. 너는 절대로 그러지 말고 무슨일이 있던지 그러지 말고 사람은 사소한 것에서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님 이번 집 사시는 것이 누추하니까 다음에 우리가 집 사드리겠습니다. 그런 허세 부리지 말고 그런 능력도 안 되겠지만 그러지 말고 꼭 일이 있어 전화를 해서 어른이 전화를 받을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게 하지 말라. 애는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전화 한번 왔다 하면 사고친 후에 전화벨이 울리더라. 그런소리 듣지 말고... “어머니 오늘 어디 가세요?” “어디 안 간다 왜 그러냐?” “오후에 잠깐 가 뵐게요” “왜?” “오늘 휴일이어서 집에서 튀김을 했는데 정말 따뜻할 때 꼭 좀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싸 갈수 있는 그런 며느리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태도 속에서 그 속에서 정을 느끼고 그 속에서 그 사람의 성숙함을 보고 그 사람이 주님을 믿으니까 저렇게 변화 되었구나 라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그렇게 자기 자신이 정말 사람들에게 있어 “나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패 끼친것 없어요” 폐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상처를 많이 주었습니다. 대게 그런 소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누구도 안 건드리고 딱정벌레 처럼 살면 된다, 딱정벌레가 누구 괴롭히지도 않고 다른 것으로부터 괴롭힘을 안 받으려고 하는 작은 생물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관심없이 살아가는... 딱정벌레 같은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노래를 바꿔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날 자기 사랑 안해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말고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하나님께 사랑을 이미 받았으니 이제는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베풀고 해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미가 없고 살아가는 삶이 무미건조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시시하고 얼마나 그렇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그 뛰어난 영성이 있어도 지혜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많은 은혜가 있어도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꾸 깨지니까 자신은 계속 소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일곱번씩 용서를 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주고 절대 안 그럽니다. 우리 교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리 교회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나가는 지체들이 많은데 가면 여기는 그래도 온실 이었죠 그래도 그렇게 내가 야단도 치지만 험하게 그럴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죠. 교회 지체들인데 설교를 들으면서 자라는 양떼들인데... 그래서 직업전선으로 나가 월급을 좀 많이 주겠지만 험악한 곳이거든요. 수틀리면 그 따위로 할것 같으면 나가라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지체들이 가끔 하는 이야기가 “그때는 몰랐었는데 이렇게 살벌한 직업전선에 나오고 나니까 진짜 교회에서 하나님 섬길때가 따뜻한 온실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렇게 오래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절대로 오래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세상에서 그렇게 오래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잘 가꾸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많이 주셨거든요. 또 여러분들이 얼마나 눈물로 주님 찿으면서 주님 의지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삶의 태도도 올바르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혜들이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고 또 사람들을 사랑할 때 여러분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사람들이 아주 기뻐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 갈때에 그 삶의 모습이 저가 은혜를 받으니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더라 하는 모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있으면 한번 아멘 해 보십시요. 그것 보십시요. 다 그렇게 되고 싶지요. 오늘부터 한번 해 보십시요. 정말 한번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여러분 한번 해 보십시요. 정말 그렇게 해 보십시요.
8. 변명하지 않는 사람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아니하였나이다” (창40:14-15)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앙케이트를 해서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냐 했더니 잘난척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더 싫은 사람이 누구냐 했더니 고자질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고자질은 어려서부터 배웁니다. 집에 들어가면 동생 입이 간지러워서 견디지 못합니다. “엄마! 엄마 없는 사이에 형이...” 하면서 형이 한 일을 엄마한테 고자질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어 손해를 받게 하는 이 마음은 인간의 죄된 본성안에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왜 인간에게 그런 마음이 깃드는지 그런 것을 여러분들에게 심리적으로 모두 말씀드릴 수 있음니다만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타락한 다음에 인간은 무엇인가 고자질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그의 성품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디에서 입증이 됩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면서부터도 즉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너 왜 그랬냐?” 그랬을때 자기가 그래도 명색이 가장인데 “하나님 모든 잘못은 제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언약을 맺으셨는데 제가 무책임하게 이런일을 행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조금전에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해 놓고는 “저 여자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자한테 가서 “너는 왜 그랬냐?” 뱀이 그랬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후 인간의 속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장면은 요셉이라는 사람이 종살이를 하다가 결국 옥에 갖히게 되었을때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사실 요셉은 하나님을 잘 믿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도 정말 매 순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소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해서 보디발의 집에서 온갖 충성을 다했고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서 그 집안에서 모든 일들을 돌보는 집사요 말하자면 총무의 일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하던 보디발 집의 노예인 요셉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자기는 특별하게 마음에도 없는 여자 보디발의 아내가 아주 과격하게 그를 유혹했고 뿌리치자 그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은 원망으로 바뀌어서 이 노예에게 누명을 씌워서 결국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보디발의 집에 왜 감옥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어쨎든 이 감옥은 잡범들이 들어가는 감옥이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죄인들이 들어가는 감옥으로 그렇게 설명이 됩니다. 그러니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국가의 범죄자들 이었는데 여기에 같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요셉의 인생이 그야말로 끝장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서도 이 사람은 세상에 내가 왜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해서 인생을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까 하면서 원망을 하면서 투덜거리고, 한숨을 쉬고, 낙심하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또 거기에 가서도 열심히 죄수로서의 삶을 살고 또 그곳에서도 열심히 봉사를 했더니 간수들이 많은 범죄자들 중에서 요셉을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자유롭게 다니면서 옥의 일을 자신들을 위해서 돕게끔 그런 자리를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도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삶을 살면서 이러한 자세가 필요 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이 죄와 모순, 슬픔 이런것들로 가득차 있고 우리 안에도 그런것들이 있는데 항상 우리의 마음에만 드는 상황에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그런 상황에 들어가야 하는 때도 있고 너무나 너무나 들어가기 원하는 상황인데도 우리가 거절될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냥 기뻐하고 좋아해서 경박해지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고해서 한숨을 내쉬고 마치 인생 막장이 난 것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그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어드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수많은 파도를 거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되고 거기에서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완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 있어서 자기 마음 먹은대로 질서가 움직여지고 상황이 허락되어 지면 헤헤 거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도 좋게 지내지만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면 낙심을 하고 주저 앉아서 부정적이 되고 파괴적이 되는 사람은 자기는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결국 인생을 살고보면 아주 쓸모 없는 인생을 산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우리는 좀더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을 가지고 솔찍하고 쾌활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그렇게 생각이 없고 가벼운 사람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낙천주의자가 둘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천성적 낙천주의자가 있고 또 하나는 후천적 낙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천성적 낙천주의자들은 뭐냐면 타고난 성품이 낙천적입니다. 타고난 성품이 낙천적인데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예 생각이 좀 모자라기 때문에 그냥 낙천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에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생각이 짧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어려움이 닥쳐도 깜빡하고 지나가면 잊어 버리고 그 상황에 적응해 버리는 그러한 천성적인 낙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깊은 인생관이나 사상 같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후천적 낙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대게 후천적 낙천주의자들이 성공을 합니다. 후천적 낙천주의자는 뭐냐면 실제의 삶의 상황을 보면 즐거워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도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고 그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 소망 가운데서 낙천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간단한 것일 것입니다. 삶의 상황이 매우 어렵고 내가 바라는 질서가 아닌데 이런 많은 고통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인가 인도하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지금은 힘들지만 그 기대를 가지고 우리가 낙천적이 될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예화) 이런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사업가중에 한사람이 사우드웨스트라고 하는 미국의 항공사인데 거기에 켈라헌이라고 하는 회장이 있었습니다. 항공산업이라고 하는 것이 늘 어렵지 않습니까? 지금도 항공산업이라고 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도산하는 회사들도 많고 유류파동 때문에 문을 닫는 회사들도 있고 최근에도 불과 5, 6년 7, 8년 사이에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유수한 여러 항공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우리나라 항공회사도 그렇게 많은 흑자를 내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의식적으로 인생을 즐겁게 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크리스챤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그랬습니다. 그렇게 모든 항공산업이 어렵고 그런때에 직원들이 모두 우울해 하는데 이 사람이 어느날 손수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가 막 떴는데 회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항공사의 회장인 켈라헌 입니다. 우리 항공기를 이용해 주는 고객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서 흡연석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비행기에 어느날 보니 담배를 못피우게 되었는데 흡연석이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진 것입니다. "지금부터 담배를 피우시고 싶은 분들은 모두 날개 밖으로 걸어 나오시기 바랍니다. 날개에 쭉 앉으셔서 차도 한잔씩 드실수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면 영화를 한편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러니까 영업도 안되고 하여 침체되어 있던 이 종업원들의 마음에 예기치 않은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해서 기쁨을 얻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가벼운 도움이 아닌 인생이 가끔 우리들이 원하는 질서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질서 넘어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소문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요셉도 항상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서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항상 그런 신앙으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삶을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에게는 어린시절에 꾼 꿈이 있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를 향해 절하는 그 꿈을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믿고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이 순탄했습니까? 나중에 이 사람이 총리가 된 후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뭐라고 지었습니까? 무나스입니다.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렇게 낙천적으로 살려고 애를 쓴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고통과 눈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식의 삶을 이 사람이 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감옥속에 갖혔는데 커다란 범죄자 두 사람이 들어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은 왕의 술을 맡았던 관원장이고 한사람은 떡을 맡았던 관원장 이었습니다. 둘이 똑같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뜻인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요셉이 해설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둘다 삼일후에 왕이 부르는데 한 사람은 처형될 꿈이고 한사람은 복직할 꿈이었습니다. 그 복직할 꿈을 해설해 주면서 이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앞에 복직을 하겠구나 그러면서 당신이 이렇게 꿈을 해설해 주었으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마워 하겠습니까? 삼일 후에 그꿈이 실제로 이루어질때 요셉을 생각할 것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신세를 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부탁을 하는 입장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절호의 기회 입니까? 이 사람이 바로앞에 갔을때 바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조금만 해 주면 그렇게 억울하게 붙잡힌 사람이 있냐하고 놔주어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요셉의 입장에서는 단 한번 자기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기회를 멍텅구리처럼 날려 보낸 것입니다. 뭐라고 했냐면 “복직하거든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나는 이런데 갖힐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자기 결백을 입증하는 논변이 됩니까? 안됩니까? 진짜 누명을 벗을 요량으로 이렇게 말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됩니다. 육하원칙에 의해서 모년모월모시 내가 방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그 미친여자가 뛰어들어 오더라 그리고 나를 쓰러뜨리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안된다고 몸부림을 쳤더니 이 여자가 자기옷을 확 잡아 댕겨서 그렇게 놓고 나는 범죄자로 낙인이 찍혀서 변명 한번 못해 보고 누명을 써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뼈빠지게 보디발을 위해서 헌신했고 모든 노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그 여자의 모함 때문에 나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못된 인간이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한 여자를 죽일 인간으로 만들어야지만 자기가 결백을 입증하고 벗어나올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했다고해도 누가 요셉에게 사람 인격이 어떻게 그렇게 너절하냐 이렇게 이야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명백하게 모함을 당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보디발의 이야기도 안 나오고 보디발의 아내 이야기도 안 나오고 아무 이야기도 안나온 것입니다. 단 하나 나는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인데 여기에서도 이런 옥에 갇힐만한 일은 한적이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정도의 이야기입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이 현명하고 똑똑한 요셉이 자기가 이 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이런식으로 허비해 버렸을까? 왜 자기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요? 나는 여기에 최소한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이유고 하나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두개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선 인간적인 이유는 뭐냐면 만약에 자기가 누명을 벗기 위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게 되면 누가 대신 감옥에 들어와야 합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그 체면이 다 구겨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보디발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애매히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아도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안한 삶의 질서가 깨뜨려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자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를 신임하고 보디발의 집에서 그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직장생활의 길을 열어 주었던 보디발에게 누가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마음을 쓴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얼마나 슬기롭게 지냈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지만 그리고 후에 총리가 되지 않습니까? 총리가 되는데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보디발이 시위대장 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일을 그렇게 해서 누명을 벗었더라면 아마 이 요셉이 순탄하게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마 실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인 보디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스승이신 김희보 박사님은 이 부분을 해석할 때에 학자들에 의하면 이 감옥이 요셉 같은 수준의 성추행을 범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종류의 저질범을 위한 감옥이 아니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분명히 아내의 행실을 이미 알고 있는 보디발의 어떤 배려에 의해서 이 사람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하십니다. 그 해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안 하고를 그렇게 말 할수 없지만 어쨎든 가능한 해석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때 형들하고 부딪힌 것을 제외해 놓고는 인생을 살면서 이 사람이 배운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신앙적인 이유는 뭐냐면 결국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을 한다. 어떤 위기와 난관이 부딪혀도 내가 스스로 만든 상황이 아닌데 반드시 이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꿈이 성취될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사실은 여기에서도 전혀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피해주는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이 공감을 했는데 교회 어느 지체가 와서 “목사님 교회에 이런 잘못이 있죠. 목사님이 이런이런것 잘못 하셨죠” 하면서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그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결국은 몇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면 안되더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끝났는데 자기가 목사로서 너무 초라한 느낌이 들고 이것을 내가 지체에게 변명을 해서 나의 결백을 입증하는 이것이 정말 좋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러면서 너무 초라해지고 비참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후회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 차라리 혼자 조용히 당하고 있는 것이 낳지 거기에서 자기가 옳은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기도 원하지 않는 일, 사실을 말하려고 하니까 그가 모르고 있는 누군가의 잘못을 이야기해서 오해를 풀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상처를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결백이 입증되어서 목사님이 안 그러셨구나 알고보니 그놈이 나쁜놈이네 이렇게 생각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문제의 해결이냐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요셉은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크기 입니다. 이 사람이 이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과 정신의 크기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때는 안 그랬습니다. 형이 요셉을 왜 그렇게 미워했습니까? 고자질 때문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형들이 뭘 잘못하면 늘상 와서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들이 아버지에게 사랑을 못 받는 것도 억울한데 그래도 사랑 받을 만한 예쁜짓을 한 것은 저놈이 안 가르쳐주고 아버지에게 미운털 배긴 일들만 아버지에게 고자질해서 아버지와의 사이를 더 벌려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로부터 결핍된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을 편애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죄 짓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편애하면 그 아이들이 결코 후회하지 못합니다. 편애하면 안 됩니다. 오빠이니까 동생인 네가 희생해라. 여자니까 남자인 오빠가 이해해라.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있냐고 하는데 틀립니다. 엄지 손가락 보다 세끼 손가락이 더 아픕니다. 해 보십시요. 꽉 깨물어 보십시요. 엄지 손가락은 덜 아픕니다. 더군다나 발가락하고 손가락은 될 것이 아닙니다. 엄지 발가락 한번 깨물어 보십시요. 틀립니다. 안 똑같습니다. 자식도 똑같이 다 배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누군 배속으로 낳지 누구는 등으로 낳습니까? 다 배속으로 낳은 자식이라도 조금씩 다 틀립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내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슴에 묻어두고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도 부패한 본성 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 사람도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이 고난을 겪으면서 많이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삶의 태도가 고쳐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오히려 이 감옥속에 들어 온 것이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합니까? 이 사람이 나중에 결국은 관원장이 이 사람의 공로를 잊어 버립니다. 그러다 바로가 아주 심히 번민하는 꿈을 꾸었을때에 그때 생각이 나서 이 사람을 데리고 오는데 그때 다 이발을 하고 수염을 깍고 그리고 바로 앞에 섰을때 나이가 30세 였는데 후에 애굽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이 요셉의 시대에 애굽에서 공무를 담임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 30세 였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가막히게 그때까지 예비 하셨다가 그 나이가 되었을때에 하나님께서 등장을 시키셔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신령한 생각과 사상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발탁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의 정신의 크기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국무총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에게 뭘 이야기 합니까? 일곱해 풍년이 들고 일곱해 흉년이 든다는 것입니다. 곡식을 전부 거두어 들인 다음에 그것을 많이 보관해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어서 생명을 부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나중에 땅을 저당 받고 나누어 주어서 토지를 넓혀라. 이러면서 결국은 자기가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로 만백성을 건져내고 많은 이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셨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 전체를 끌어안는 아버지의 정신, 어머니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마음의 크기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상황에서 누명을 벗고 자신의 명에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그토록 은덕을 베풀어준 보디발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이런 정신을,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정치인들은 한번 보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정말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화) 제가 직장다닐때 있었던 일입니다. 특별히 공직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제일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감사를 받아서 지적되면 경고, 경고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지만 기분 나쁜 것입니다. 견책이면 승진에 지장을 받게 됩니다. 감봉이면 더 이상 승진을 꿈도 못 꿈니다. 파면이면 퇴직금도 못 타가지고 갑니다. 이렇게 징계들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원들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더군다나 창구에서 돈을 만지고 하는 젊은 여직원들은 감사 나온다 하면 굉장히 떨립니다. 직장생활 처음 하는 사람이면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보면 상사라는 사람이 대게 두가지 유형입니다. 감사 받으면서 자기는 상사인데 직원하고 감사관 앞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과장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쟌아요?” “내가 언제 그랬냐” 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감사 끝나고 나면 그 상사는 그 직장에서 지도력을 거의 잃어 버립니다. 사람으로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상사가 있었는데 평소에는 직원들에게 막 대합니다. 일이 바뻐 죽겠는데 젊은 처녀들이니까 총각들한테 전화가 오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자들은 친구들도 많으니까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지 않습니까? 너무 바쁜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전화기는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때는 지금처럼 전화기가 책상마다 놓여 있는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따르릉하고 전화가 오면 “거기 박아무개 좀 바꿔주세요” 하고 여자 목소리가 나오면 이사람은 “죽었습니다.” “아니 죽다니요? 어제 저녁에 보았는데...” “오늘 아침에 절명 했습니다.” 하고 바로 딱 끊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발칵 뒤집히는 것입니다. 누가 죽었다고 하니까... 나중에는 여직원이 뛰어와서 신경질을 내면서 대듭니다. “과장님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내 친구한테 나를 죽었다고 하면 어떻합니까?” 그런데 수시로 있는 일 입니다. “네 아침에 죽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평소에는 직원들이 그렇게 투덜대고 우리에게 작은 배려도 안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훌륭하게 이끌어 갑니다. 말 한마디면 일사불란하게 따릅니다. 투덜되면서도... 그 비결이 뭔가 했더니 감사가 나오면 그것도 일주일 앞이 아니라 그냥 있다가 감사가 나온다고 통보가 옵니다. 일주일 전에... 그러면 시달이 됩니다. 감사가 나오면 이번에는 몇사람 잡으려고 마음을 먹었다더라. 너나 나나 다 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엄포를 줍니다. 그러다 감사하는 날은 모두 일찍 출근하는데 평소보다 한 30분전에 출근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20여명을 세워놓고 일장 연설을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고 이번에 중요한 감사인데 감사를 받다가 뭔가를 잘못 했는데 너희들이 빠져 나갈 구멍이 없을때는 이렇게 말해라. 전 모릅니다. 우리 과장님이 시켜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말해라. 나머지는 내가 책임을 진다. 옷을 벗어도 내가 벗고 사표를 써도 내가 쓴다.” 그때 그 존경에 찬 눈빛은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가 책임을 지냐하면 뭘 책임을 집니까? 괜히 겉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라도 말단 직원이 뭘 알겠습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그런데 감사하는 사람이 바보 입니까? 직원이 예를 들면 오백만원을 해 먹었는데 “너 이거 왜 해먹었냐?” 하면 “우리 과장님 먹으라고 해서 먹었어요” “그러면 너는 죄가 없구나 과장 이녀석이나 날려 버리자” 그렇게 감사가 처벌합니까? 경찰이나 똑 같습니다. 그러면 수사를 합니다. 그래서 돈 문제는 경찰에 의뢰를 해서 수사를 하고 돈 문제가 아닌 것은 전문적인 부서에서 내려와서 사실 경위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장이 자기가 다 뒤집어 쓰겠다고 다녀도 뒤집어 써 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의 경위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뭘 하다가 자기가 시켜서 했는데도 내가 언제 그랬냐고 감사관 앞에서 싸우는 상사랑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하여튼 말이라도 하다가 잘못 된 것이 있으면 무조건 내 핑계를 대라. 내가 시켜서 그랬다고 해라. 옷을 벗어도 내가 벗고 사표를 써도 내가 쓴다. 내가 너희들을 보호하마.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중국 역사에 보면 왕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제도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절대로 한 사람에게 한쪽 측근에게 모든 권력을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권한을 주면 견제할 세력을 반드시 두어서 이들에게 권한은 적지만 통제할 수 있는 강한 견제력을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사람을 세워놓고 못 미더워서 감시하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감시하는 세력을 못믿어서 또 감시하는 사람을 세워 놓고해서 이중 ,삼중, 사중의 감시망을 펼쳐서 조금이라도 자기를 향해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무리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 제거하는 것은 실수를 해도 별로 문제가 안 됩니다. 안 죽여도 될 사람을 섞어서 몇 명 죽였다고 해서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억울하겠지만 황제가 그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그런데 제거해야 될 사람을 남겨 두면 이것은 자신의 생명과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중국에 왕이 690명 가까이 황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평화롭게 정권이 이양된 것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 입니다. 모두 피비린내 나는 투쟁속에서 피로 물들면서 황제의 위가 다른사람에게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그런 철저한 자기보호를 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 제가 그 역사를 다 읽으면서 황제가 죽어도 행복했을 리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시켜 주지도 않겠지만 나는 사양입니다. 그것 어떻게 무서워서... 땅을 뚫고 들어와서 자기를 죽일까봐 두께가 3m, 4m되는 돌맹이를 깔아서 그 넓은 왕궁을 그렇게 엄청난 돌맹이로 깔고 그렇게 하면서 황제들이 살아 갑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고자질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을 끊임없이 활용해서 자신의 권력의 야욕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 갈때에 이렇게 마음과 정신의 크기가 작으면 간신배들이 왕 주위에 꿰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르고 바를때 그때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황제나 왕과 같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인생을 살면서 바로 그런 순간들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나니 아니 허물을 덮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 뒤집어 내어 쑤셔서 명명백백히 다 가려서 결단을 내어야지 그것이 공이지 왜 덮습니까? 확 들쳐내어서 껍데기를 벗겨서 진실을 규명해야지 왜 덮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억울한 일을 당해서 서로 싸우고 있는 교인들에게 세상 법정의 교인들이 소송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차라리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낳지 세상 법정에 너희들이 가서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고소를 해서 왕 되신 하나님의 판결을 못 받고 거기에 가서 고소를 하고 세상에 가서 판결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다한 허물을 덮나니 했을때 그말이 정말 재미있는 것입니다. 왜 덮느냐는 것입니다. 덮는 것이 아니라 다 뒤집어 내어서 명명백백히 가려서 확 뒤집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요셉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삶의 태도가 바르지 못했던 철없는 시절에는 함께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면서 살아가야 할 형제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당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이 잘 있는지 찿아 갔을때 팔아 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반대하는 형들이 몇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이 사람을 보호해주는 형제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냐면 형들 전체한테 인심을 잃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꿈도 있고 좋은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고난의 세월을 겪고나서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속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왔을때에는 이미 원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억울하다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벽에 머리를 찌으면서 이 여자를 죽여 버려야지 이렇게 칼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훨씬 큰 마음의 정신과 크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을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하나가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자기를 그렇게 보살펴준 보디발에게 누가 돌아가지 안도록 또 보디발의 아내도 행복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면서 홀로 그 누명을 쓰고 고자질로서 그 인생의 위기에서 탈출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다툼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편먹고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정말 결국은 뭐가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간에 서로 상처를 많이 받아서 회복하기 어려운 그런 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학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생활 하거나 사회생활 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하소연하는 적이 있는데 물론 그 사람 말이 맞겠지만 이 세상은 누구 한사람이 옳고 그르다는 것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세상이었다면 요셉이 여기에 나오고 보디발의 아내 하나가 여기에 나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습니까? 가장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주위에 많이 있을때 가장 좋은 길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머리까지는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머리까지는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러한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든지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좋은 기회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왕 앞에 나아왔을때, 바로 앞에 나아왔을때 만약에 이 사람에게 한이 많이 맺혔더라면 국무총리가 된 다음에 제일 처음 해야할 것이 그 여자를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까? 살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이변이 없는한... “너 좀 와라. 나 좀 보자. 너 몇 년전에 나한테 했던 것 생각나냐? 고개를 들어라.” 보디발을 세워 놓고 “네 남편에게 진실을 고백해 봐” 그런 것을 해서 지금 감옥에 가 있는 회장도 있지 않습니까? 그랬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접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접는 것이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억울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접는 것은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것 만큼이나 힘든 것 입니다.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입니다. 그런데 이속에서 그것이 접어지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이 맺혀 있으면 못 접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옛날에 우리 영화에 보면 그런것 나오지 않습니까? 장가도 안가고 일평생을 떠돌면서 칼 하나 차고 부모의 원수를 찿아 헤매는 사람 나오지 않습니까? 일념이 뭡니까? 그 원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 부모의 원수만 갚고나면 자기는 죽어도 좋다 이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한이 맺혀 있으면 그런 것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접으면 이것이 마음에 깊은 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한것이 가슴에 맺혀 한이 되었더라면 감옥에 와서 그렇게 즐겁고 기쁘게 봉사해서 그 전옥들에게 인정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분께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형들을 만났을때에 마음을 접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나를 해하려 하여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행하셨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봉사할 때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직장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동네 사람과 만나서 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은혜가 아니면 예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올바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부인, 자기포기, 자기꺽임 같은 것들이 있어야되는데 그런 자기 꺽임이 있을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렇게 꺽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은혜가 떨어지면 직장에서도 삐그덕 거리리고, 교회에 와서도 부딪히고, 가정에 가서도 불화하고 하여튼 모든 삶의 질서가 혼돈해 지는 것들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앞에 바르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정확하게 마찬가지 입니다. 어쨎든 은혜없이 일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늘 걱정이 됩니다. 언젠가는 저것이 서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그 은혜를 자신속에 간직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상대방을 꺽기 보다는 자기를 꺽고 낮추고 하면서 살아 갈 때 그 사람이 진짜 낙관적인 사람입니다. 후천적 낙천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눈 앞에는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걸어가기 때문에 주님이 나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 질것이라는 신념, 소망, 믿음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9. 배우려는 사람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12-15)
어떤 일을 할때 훌륭하게 잘 준비된 사람과 함께 일을 하면 일하는 그 사람도 복된 사람이고,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도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끊임없이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자기의 능력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일에 도전을 하고 더 좋은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용하실 때 충분히 해 나갈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두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자신의 능력보다도 훨씬 더 큰일인데 하나님이 맡겨 주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게하므로서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긴 일들을 얏잡아 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어떤 일을 하면서 학습해서 성장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지만, 어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사람, 지식이 지금은 별로 없지만 무섭게 성장하는 사람 둘을 비교하면 지금은 두 사람이 비교할 수 없는 격차를 가지지만 잠시후면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뛰어넘고 마는 것입니다. 학습이론에 있어서 학습을 촉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선생님도 아니고 교재의 수준도 아닙니다. 학습자의 배우려는 마음 그것이 가장 그 사람의 학습의 성과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의 글들을 보면서 가끔은 감탄을 합니다. 왜냐하면 컴퓨터도 없고 발달한 필기도구나 많은 책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공부를 해서 이런 업적을 이루어 냈을까? 그것은 뭐냐면 배우고자 하는 끊임없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어떤 학생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까? 1번 부잣집 아이들, 이것은 문제가 많은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선생님들은 누구를 좋아할까요? 열심히 배우려는 학생, 얼굴의 생김새나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잘 배우려는 학생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예화) 여러 선생님들이 제 인생에 지나 갔습니다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선생님은 몇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그런데 공통점을 보면 제가 그분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제가 그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과목을 좋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배우려고 했기 때문에 그 선생님들과 저는 끈끈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선생님이 저를 사랑하시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제가 외국에 나가 있는 바람에 선생님을 못 뵈었는데 고등학교때 만났던 선생님을 30여년 후에 만났습니다. 그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 이었습니다. 저는 학교 다닐때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영어가 재미 있었습니다. 30년전에 영어를 지금보다 잘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나이에 너무 재미 있어서 거기에 빠져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얼마나 귀여워 했겠습니까? 밤 10시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통금시간도 있던 때인데 겨울에 칼 바람이 불고, 눈까지 날려 추운데 그때 영자신문 워싱턴 포스트지나 뉴욕타임즈 같은 것을 들고 가서 이것이 뭐냐고 그 추운 겨울에 퇴근하시는 선생님을 붙들고 가로등 보안등불 밑에서 붙들고 수시로 물어 보았습니다. 한번도 짜증을 안 내시고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더니 30년이 지나 연락이 닿았는데도 또렷하게 저를 기억하십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제일 좋아하는 상사는 다른 직장에서 일 많이 배워 와서 척척 일하는 사람을 상사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하면 모자라는 것이 많지만 그 상사가 가르쳐주는대로 배우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직장에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로 실력도 없고 별로 아는것도 없어서 시장에 내다 놓으면 누구도 안 주워갈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 회사에 들어와서 자기 기개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 나는 인생을 그렇게 안 살아왔어! 나는 누구한테 굽히는 것 싫어! 나는 눈치 안보거든, 지들이 뭔데?” 그러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 갑니다. 그런사람이 지위나 높고 권력이나 있거나 그 회사의 사주쯤 된다면 사람들이 치사해서라도 그 권력 때문에 굴복하면서 살지만 직위도 별로 높지 않고 남에 의해 고용되어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주제에 그렇게 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오늘 성경에 나온바와 같이 자기의 행위를 다 옳은줄로 생각을 하고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파괴적인 만행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정리해고 대상 1호입니다. 그래서 회사가 어려울때 상사가 붙들고 “자네는 정말 우리회사에 너무 필요한 사람이었거든 나도 오래도록 자네와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것 다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한마디만 진실입니다. “그런데 어쩔수 없이 자네가 나가 주어야 겠네...”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지막 너는 떠나 주었으면 좋겠어 그것 하나만 진짜이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런 바보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진리편에서 고집을 꺽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생긴 모습 그것도 자기 맘대로 고칠수가 없겠죠? 그런데 자기의 태도가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진리의 문제도 아닌데 오기로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능력이 뛰어나면 능력 때문이라도 일시적으로 그 사람을 필요로 하지만 그 사람이 필요 없는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그 사람과 결별하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별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내 하고 싶은대로 그리고 내 판단과 내 고집이 옳은대로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우겠다는 의지와 열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화) 이런 사람들이 직장을 다니면 뚜렷하게 차이가 납니다. 직장에서 누군가 전근을 간다던가 혹은 사표를 낸다거나하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또 전근을 안 가더라도 3층에서 일하다 8층으로 부서를 옮긴다더라 이런 이야기가 들리면 다들 모여서 저녁을 한끼씩 하거나 하는 것이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에 제가 직장을 다닐때 풍속도 였습니다. 그때 저녁식사에 온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그 사람의 덕이 입증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먼데 가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데 가는 것인데도, 특별히 승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좌천도 아니고 수평이동 하는데도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모이면 그 저녁값을 그때는 누가 대신 내 주는 것이 아니라 참석한 사람 명단 적어서 경리과 던져 주면 경리과에서 각자 먹은 것을 월급에서 공제를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누가 사 주는것도 아닙니다. 다만 당사자는 돈을 내지 않습니다. 전근을 가 버렸으니 뗄수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나머지 사람들이 자기돈을 내고 와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전근을 간다 하니 저녁 먹을 사람 모입십시오 하고 날짜를 통보하면 음식점이 메어질 정도로 많이 옵니다. 그래서 별로 해주는것도 없지만 빈말로라도 정말 같이 있어서 즐거웠다고, 당신이 가면 이제 무슨 재미로 직장을 다니냐 이러면서 악수를 두 번씩, 세 번씩 청하고 포옹을 하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발령이 났는데, 3층에 있다가 2층으로 발령이 났는데 자기 손으로 보따리를 싸가지고 방석까지 들고 나가도 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멋대로 산 사람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서는 환영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자원을 많이 주셨는데 삶의 태도가 곧고 고쳐지지 않으면 은혜의 자원이 낭비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으니까 자기는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사람들에게 행하는 태도가 “나는 내 고집대로 살거야, 내가 누구 눈치 보는거야, 나 머리 안깍았는데 누가 보태준 사람있어? 그래 나 티셔츠에 바지입고 슬리퍼 끌고 출근한다. 너희들이 내 슬리퍼 사는데 보태준 것이 있어? 내가 무엇 때문에 직장에 와서 기가 죽어? 너희들의 삶은 너희들의 삶이고 나는 나야!” 그것은 텔레비전 광고에나 나오는 것이지 그렇게 인생을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 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다 싫어 합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운 것입니다. 돌아와서 엎드려서 교회 와서 꺼이꺼이 울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람들은 나만 싫어해요.” 그래도 하나님은 응답을 안 해 주십니다. “슬리퍼 신고 다니지 말아라” 하고 응답해 주십니까? 삶의 태도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또 회개하고, 회개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위로해 주셔서 다시 출근을 합니다. 그런데 다시 또 행동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싫어 합니다. 그 사람들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회개하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뱃속으로 난 자기 엄마도 싫다는데 피도 안썩인 세상 사람들이 삶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은데 누가 좋아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령이 나서 보따리를 다 싸도 누가 와서 어떻게 같이 이렇게 정들었는데 떠나면 어떻게 내가 좀 거들어 줄까? 그래서 짐이라도 싸들고 거들어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갑게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 뜻은 무슨 뜻이냐면 다시는 너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왜 그런식의 인생을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화) 몇일전에 제가 부산에서 개혁주의 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신학 포럼을 하는데 목회자들을 위한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해달라고해서 내려갔습니다. 일회 포럼인데 바쁜중에도 목회자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떤 청년이 걸어 오더니 “안녕하세요?” 해서 “누구십니까?”했더니 “혹시 아무개 아세요?” 그러고보니 어느 자매 이름입니다. “목사님 제가 그 자매 남편입니다.” 누군가 하니 한 일년반전에 제가 뭔가 필요한 것이 있어서, 그 아버님도 제가 잘아는 신학대학의 교수이신데 그래서 누구한테 소개를 받아서 과외선생님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과목을 공부를 했는데 제가 눈이 좀 나쁩니까? 저의 눈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포기를 많이 합니다. 한 8개월 정도를 일주일에 한번씩 저에게 와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두번 만난 것도 아닌데 부산에 내려와서 교사 강습회를 한다고 하니까 2,500명이 모여서 바글바글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나 아는 사람들이 와서 목사님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하는데 어느 자매가 와서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8개월 동안 공부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 선생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8개월이나 만난 사람 보고 “너무 죄송한데요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확인이 안되는데...” 그러니까 그때서야 “제가 목사님께 이러이러한 공부를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래서 너무 미안해서 내가 공부할 때 늘 안경을 벗고 공부를 해서 얼굴이 생각이 안나서 그랬다고... 그래서 너무 미안해서 그 아버님도 제가 잘 알고해서 결혼할 때 화환 하나 보내 주었으니 그 정도면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자매는 직장에 취직을 해서 어느 대학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의사인데 조금 시간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그 정도면 목사님이 보내 주었구나 하고 끝나는데 그것을 결혼식때 찍은 예쁜 사진 두장하고 자기가 정성껏 예쁜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그것을 신랑에게 들려 보냈습니다. 그래서 열어 보니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의 기쁜날에 보내주신 꽃다발이 저에게는 말 할 수 없이 큰 기쁨이요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 입니다. “한 8개월 남짓 목사님하고 공부할 때 시시때때로 목사님께서 무엇인가 신앙적인 가르침을 주셨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가슴에 깊이 와 닿던 가르침을 아직까지도 제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성껏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올라 오는데 오랫동안 가슴이 따뜻했습니다. 그렇구나 나와 만난 어떤 사람이 내가 무심코 한 이야기 혹은 마음을 담아 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인생을 더 가치있게 사는데 보탬이 되었다니 참 감사하구나 이런 것이 바로 가르쳐 주면서도 배우려는 태도 입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관계가 유지되고 그것들을 통해서 더 많이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통치를 썻는데 좀 어려운 책인데 항상 주장하는 것이 그것 입니다. 별로 머리도 안 좋은 사람들이 다 이해되는 책을 읽으면 그것이 맹물위에 맹물을 붓는 것이지 농도가 진해 지겠습니까? 90%는 이해 되어지고 10%는 이해가 안 되는 책을 읽어야지만 계속해서 지적인 발전이 있고 이 지식의 세계를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만만히 보지 않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렸을때는 우유에, 죽에, 이유식에 계란도 삶아서 주면 못 먹고 그것을 풀어 숟가락으로 휘저어서 묽게 만들어서 쌀하고 섞어서 끓여서 주어야지만 겨우 먹지만 이제 성장하면 날계란 주면 앞뒤 깨뜨려 쭉 빨아 먹기도 하고 삶아서 통째로 껍질까서 먹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건강에 좋으라고 껍데기 통째로 씹어 먹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먹기도 하고 또 그것을 지푸라기에 섞어서 먹기도하고 계란 후라이해서 먹기도 하고 오무레를 해서 먹기도 하고 이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죽만 만들어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든지간에 책을 썼습니다. 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 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이것은 누가 읽으라고 썻습니까?” 굉장히 도전적 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관심이 없습니다. 쓰거나 말거나...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열심히 읽었는데...” 줄을 쳐가지고 와서 “이부분이 이해가 안됩니다. 목사님 설명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설명 합니다. 백명, 이백명 모아 놓고 설명하라고 하면 못해도 그런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설명 합니다. 설명 할때는 녹음기를 틀어 놓고 설명을 합니다. 이것도 써야 하니까... 자네 한사람에게 가르쳐주고 공중에 날라가면 아까우니까... 녹음기를 틀어 놓고 설명할테니 들어봐라. 그런 자세가 바로 배우는 자세 입니다. 그리고나서 어떤 지체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책을 읽고 느낀 소감이 뭐냐고 했더니 은혜를 받았습니다 깨달았습니다가 아니라 제가 너무 게을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우리 몸을 보면 평소에 스트레칭을 많이 하면 몸이 확확 돌아 가는데 손을 내려 보라고 할때 여러분들 발끝에 손이 닿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집에 가서 한번 해 보십시요. 잘 안 닿습니다. 계속 연습을 하면 20cm까지 내려 갑니다. 쭉쭉 내려 갑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면 지성도 계속 그렇게 사용해야지만 쭉쭉 뻗어 나가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평소에 스트레칭을 안하고, 스트레칭을 한다는 것은 팔이 안 내려가는데 무리를 해서라도 내려가고 이것이 펴지지 않는데 더 피려고 애를 쓰는 고통속에서 스트레칭이 되는 것이고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있는데 까지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칭 연습 하라고 하니까 맨날 이렇게... 이것이 무슨 스트레칭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인상을 쓰면서 아이고 아퍼, 땡기네... 평상시에는 쓰지 않는 것을 한번 어떤 기회가 있어서 이렇게 써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일상속에 쓸수 있는 근육이 되는 것입니다. 지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평소에 쓰는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칭을 해서 지성의 크기를 키워야 된다고 하니까 이렇게 조그맣게 빨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해도 스트레칭이 안되는 것입니다. 안 하던것까지 뻗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게을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으로는 열심히 헌신하고 살았는데 지성은 하나님께 안 바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입니다. 얼마나 같은 말을 해도 “누가 읽으라고 썻읍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보다 얼마나 착합니까? 누구에게 사랑이 가겠습니까? 대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읽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누가 읽으라고 썻습니까?” 이것은 “사모님은 이해 할까요?” 그것하고 똑같은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 정말 자기 사랑을 자기가 받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찬송가 349장에 보면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은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이 아니라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하나님앞에 배우려 하고 온전해 지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이 찬송을 부를때 가슴이 미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것밖에 안되요!” 그렇게 하나님께 찬송 불러서 되겠습니까? “그래요 나 이것밖에 안되요 받으시든지 말든지...” 가끔 사는 것은 형편없이 살면서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었다고 만용을 부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때 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이 네 목숨을 받아서 뭐하게?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나옵니다. 내가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그래서 참 이상한게 자기가 “냅둬 나 이대로 살거야!” 이런 태도를 가지고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은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할때 가장 많이 슬퍼해야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런 감정과 눈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인 것이 너무 싫어 내가 더 헌신했더라면 더 온전해 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나를 더 쳐서 복종 시켰더라면 주님앞에 더 예쁠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자기를 하나님앞에 드리는 그 사람들은 이 찬송을 부를때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입니다. 아이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배우려고 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제가 전도사일때 한 교회에서 칠년을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교회를 떠나는 날 담임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서 칠년을 있었는데 참 잘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밖에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아닙니다. 전도사님! 오죽 열심히 하셨습니까?” 주일 오후 4시면 늘 교역자 회의가 열렸습니다. 목사님이 교역자 회의를 마친 다음에는 늘상 인생 살아가는 교훈 목회하는 교훈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는 참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목사님이 재탕이 참 많으셨습니다. 토씨하나 안 틀리는 재탕이 많았습니다. 다른 교역자들은 레코드가 시작되면 다들 고개를 푹숙이고 저도 맨 처음에는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노트를 하나 마련해 가지고 가서 어록을 작성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작을 하시면 천천히 볼펜으로 한자를 섞어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마 저의 서고 어디엔가에 있을 것입니다. 천천히 써내려 갑니다. 심방을 할때는 이렇게 하십시요. 심방에는 네가지 심방이 있는데 정치적 심방, 사교적 심방, 우편배달부식 심방, 목양적 심방이 있습니다. 일 정치적 심방이란, 이 사교적 심방이란, 삼 우편배달부식 심방이란, 사 마지막으로 목양적 심방이란 그럼으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이 나는데 그것을 주일마다 날짜를 표기하면서 계속 적어 내려 갔습니다. 저는 아직 목사님에 비하면 형편없이 준비가 안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께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쭉 적어 내려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면서 꿈이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우리 능력보다도 더 큰 일에 도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이 있는 한 항상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우리의 힘에 부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며 능력을 구하고 그 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려움을 통해서도 배우고 기쁘고 좋은일을 통해서도 배우고 위기속에서도 배우고 시련속에서도 배우고 윗 사람으로부터 칭찬 받을때도 배우고 꾸중을 들을때도 배워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은 사람이 되고 내일 보다는 모레가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만 어차피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는 날짜는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제한된 시간안에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주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무엇을 하나님이 맡겨 주시던지 이렇게 미련한 자들이 되어서 자기의 행위가 다 옳은지 알고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또 우리안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권고를 들으며 배워 나가고 자기를 고치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을 바꾸는 생활태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