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가라
녹취자: 백지영
(청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힘에 넘치도록 헌신하며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젊은 날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10대 이전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결같이 10대나 20대가 지나기 전에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여러분 저는 지금 언급한 이 이야기를 확실히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여러분 정말 설교를 해 보고 복음을 전해보면 나이가 먹을수록 복음으로부터 멀어져요. 그것이 확실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이가 더 들면 그 다음에는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쌓이고 뿐만 아니라 그릇된 구조물들이 머릿속에 많이 생겨가지고 순수하게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만큼 힘든 것이지요. 그래서 스펄전, 헨리 마틴, 브레이너드, 또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이런 모든 사람이 전부 다 10대에 주님을 만났어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청소년 교육이 엄청나게 중요해요. 오늘날 교회에서도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처녀 총각 때 예수를 그래도 믿었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만큼 젊음의 때가 신앙에 몰두하기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청년) 청년의 때는 단순화의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로 말미암아 받는 감성이 크게 살아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에 쉽게 몰두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으로부터 강한 유혹을 받는 시기도 이때이며 반면에 신앙에 대하여 눈뜨게 되고 영적인 삶의 가치에 대하여 깊은 인식을 갖게 되면 비교적 다른 것들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할 수 있는 시기이다.
그래요. 단순화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로 말미암아 받는 감성이 많이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방탕한 길로 가기도 아주 쉬운 때라는 것입니다. 단순하다니까요. 그러니까 전에 대학생의료선교회인가 거기 가서 강사하는 이가 그러더라구요. 교수님 전에는 캠퍼스에 이단이 제일 무서웠는데 요새는 이단보다 더 무서운 이단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향락이라는 것이에요. 돈 많고, 학생들이 주머니에 50만원씩 30만원씩 넣고 다니고, 차있고 하니까 더군다나 이제는 과외도 하고 그러니까 그러면은 마지막에 가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육체에 탐닉하는 것도 단순화, 단순하게 그 한 가지 일에 빠져 버리게 되는 그런 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청년) 소년의 때를 잘못 보내면 청년의 때가 불우해 지고 청년의 때를 낭비하면 중년에 하나님 없이 살다가 노년에 허무주의와 체념의 친구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젊음은 마치 30년이 지나면 갚기로 되어 있는 지불만기의 약속어음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는가!
30년으로 날짜가 정해진 지불만기어음이에요. 지금 막 쓰면 나중에 갚을 길이 없다구요. 전도서를 한번 찾아보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청년)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광을 경험한 지혜자는 젊은 날을 곤고한 날이 이를 때를 대비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젊은 날의 허물과 실수는 가치를 찾아가는 방황이 될 수도 있으나 머리털이 희끗 희끗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노년이 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불결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일까?
그러니까 그 젊음에 대한 정의도 세상에서는 그 젊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 젊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지 한번 이야기 해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젊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젊음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하지요? 젊은 날에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하고, 또 젊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자꾸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토론)
(답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이야기했어요. 세상은 우리에게 젊음을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젊음이었습니다. 그 다음,
(토론)
(답변)
아주 중요한 얘기가 나왔네요.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지요.
(토론)
(답변)
그런데 오늘 질문자의 의도를 간파한 두 대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시기다. 또 한쪽에서는 젊음의 때에 마음껏 누리자. 그런데 오늘 전도서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젊음을 보는 것이에요. 어떤 시각에서 지금 이 젊음을 보고 있어요?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세상에서 가르치는 젊음과 어떻게 틀리지요? 무엇이라고 말하지요? 전도서 기자가 정의하고 있는 젊음의 날은 어떤 것이지요? 읽은 성경을 살펴보세요. 그러면 답이 나오지요. 여기서는 청년의 때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 하면 “곤고한 날을 준비하는 시기”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광을 경험하고서 그는 이 젊은 날이, 젊어서 왕이 되었지요? 그렇지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깨닫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젊은 날을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날이 아니라 인생말년에 찾아오는 그 곤고한 때를 준비하는 시기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방법이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해요? “너의 하나님,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것이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인가 보겠습니다.
(청년) J.I. 파커 철의 장막 저편이나 전쟁에 찢기어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이야기가 다를 지 모르나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지역인 영국과 미국에서는 지나간 세대의 풍요가 우리 모두를 신앙적으로는 난장이와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 같다.
이 파커는 퀘스트 훠 가들리니스라는 그 책에서 캐리포니아주의 레드우드 이야기를 하는 데 전 잘 모르겠어요.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이야기이에요. 레드우드라고 하는 삼나무가 있는데 큰 것은 높이가 110미터 이상이 된다고 해요. 그리고 둘레가 보통 18미터까지 된다고 해요 그래서 국립공원에 보면 나무 밑둥이 구멍이 뚫어져 가지고 그 나무 속으로 차 다니는 것 보신 적 있지요? 그런 나무들이 엄청나게 있는 것이지요. 저는 강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가끔 어렸을 때 숲속으로 들어가면 무서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어요. 가끔 진짜 숲속에는 인가 근처에는 숲속이 별로 없으니까 차가 가다가 그때는 고장이 많이 났어요. 고장 몇 번 나야지만 강릉까지 도착하는데, 고장이 나면 차를 구석에다가 세워놓고 사람들이 다 내려서 다음 차가 오면 그 차에다가 무슨 부품 갖다 달라고 해서 그것이 서울 갔다가 서울에서 그 다음에 올라오는 차가 가지고 와 가지고 차를 고쳐 주어지만 갔어요. 다 신작로지요. 울퉁불퉁한 비포장이에요. 그런데 내리면 길게는 여섯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요. 그러니까 개울 속 같은 데 가서 돗자리도 피고 어떤 사람은 신문지도 깔고 두러 누워 자는 사람, 그 사이에 나물 캐러 다니는 사람 별 사람 다 있어요. 지금부터 30년 전 일이에요. 그런데 그 숲속을 들어가 보면 어느 정도로 사람이 안 다녔는지 완전히 낙엽이 쌓여서 썩고 쌓여서 썩은 상태에서 밟으면 그 낙엽이 여름인데도 발목 이상 쑥 들어가요. 그것을 삽 같은 것 가지고 파보면 아무리 파도 흙이 안 나와요. 그럴 정도로 긁어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쌓여서 썩고 쌓여서 썩고 쌓여서 썩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나무들이 자라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북쪽지방에서는 침엽수림들이 많이 자라잖아요? 제일 보기 좋은 나무는 낙엽송이에요. 낙엽송, 잣나무, 전나무 이런 것들인데 아주 멋있게 자라요. 그런데 쳐다보면 보이지 않고 낮에도 숲속에 들어가 있으면 무서운 느낌이 들 정도로 어두워요. 울창해가지고. 그런 속에 서 있으면 갑자기 우리가 왜소해 지는 느낌을 받잖아요? 그런데 파커 같은 경우야 나하고 스케일이 틀리니까 그렇겠지만 무슨 둘레가 18미터라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아마 18미터를 만들려면 적어도 여섯 사람 이상 손을 맞잡아야지 겨우 원주 18미터의 원이 나올 텐데 그런 정도의 아름드리가 아니라 여섯 사람 정도 손목을 잡아야 할 나무들이 길 같이 서 있는 그 속에서 인생이 한없이 왜소해 지는 것 있잖아요? 그러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거목들과 같은 그러한 신앙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전부다 사람마다 열심히는 사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서 깃들일 수 있는 그런 거목들은 바람이 불거나 웬만큼 난리가 쳐도 부서지거나 부러지거나 그러지 않아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뮌다고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 영적인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파커는 청교도들이 그랬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두 가지를 든다면, 하나는 성숙된 경건함이에요. 이 두 단어가 연결된 것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해요. 성숙된 경건함이에요. 가벼운 경건이 아니라 가벼운 경건도 있을 수 있어요. 예수 믿고 얼마 안 되어서 예수 사랑해요 찬송을 부르고 그럴 때 진지하지요. 그러나 성숙된 경건함은 아니에요. 성숙된 경건함, 경건함이면서도 성숙되어 있어요. 그래서 깊은 맛이 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연단된 꿋꿋함이에요. 꿋꿋함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지요. 세상의 유혹이나 혹은 도전 앞에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 지적인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고 영적인 도전에도 넘어지지 않고 그리고 세상의 풍파와 유혹의 도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꿋꿋함, 그것이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호세아 4장을 한번 봅시다. 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런 것들이 어디서 비롯됐다고 지금 말합니까? 그 다음 사람 누구지요? 재길이 형제 대답해 보세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았을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1절에 보니까 계속 나오지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세상이 그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이런 등등의 모든 악행들이 땅에 가득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이에요? 아는 대로 대답을 해 보세요.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이 질문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거든요. 그런데 이 질문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를 믿고 나서 한 15년이 흐른 다음이었어요. 누구도 나에게 이 지식의 문제에 대해서 강하게 도전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심부에 오는 것이 이 지식이에요. 한번 봅시다. 빌립보서 3 장을 보세요.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11)
여기서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 3장을 우리는 오래도록 젊은 날의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꾸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니까, ‘나는 유대인이다. 정통 유대인이다. 심지어는 난 율법을 잘 지킨다. 난 할례를 받았다.’ 이런 것을 자랑하니까 나도 그렇다 그것이지요? 그런데 왜 지금 자랑을 안 하느냐? 7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유익하던 것은 무엇에 유익하였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도록 자꾸 가로막았던 것 그러나 그것을 자기가 유익하게 생각했던 것 그것을 전부 다 배설물처럼 여긴다는 것이에요.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내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그러니까 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었다 이것이지요. 그렇지요.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상통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를 참 깊이 알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가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가능해 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이 추구하던 바가 있었어요. 그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었지요? 10절에 보니까 무엇이지요? 알고 싶었던 것이 어떤 것이에요? 알려한 것이 어떤 것이에요? 첫째는 그리스도, 두 번째 부활의 권능, 세 번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세 가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에요. 그것이 잡았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잡으려고 계속 좇아가는 이유였어요. 그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하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많이 나요? 사도바울이 이런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느냐는 것이에요? 그리고 왜 그런 차이가 비롯되었을까요? 답이 6절서부터 8절 사이에 나와 있어요. 무엇이지요?
지금 형제가 상당히 답에 가까이 다가 간 발언을 우리에게 해 주었어요. 정리를 하면, 여기서 내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겼다 그랬는데 이것은 살아오면서 인생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없이 살 때에 내게 있었던 내가 좋아하던 것은 다 쓸데없다 그것은 아니거든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전히 성경을 기록하면서 율법을 인용하고 있잖아요? 구약의 지식을 버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고. 그것보다도 전에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 중에서 자꾸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 그런 것들을 해로 여기는 것이에요.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중심적인 것을 벗어나서 예수를 알게 됨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아는 것이 이 사람의 인생의 목표같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지요? 지식의 은사는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우리에게 아주 값지고 귀한 것이에요. 참된 것을 아는 것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예배도 있고 경건도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러한 것들을 삶의 목표로 갖게 되었는가 했더니 8절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더 그리스도를 알기를,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참 깊이 만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신앙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없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그 신앙 자체가 불안전하고 그리고 언제나 살아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런 욕구자체가 없다는 것은 체험은 많을지 몰라도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고상한 지식 그것을 아는 체험이 현격하게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엇이냐 하면 10절을 잘 보세요. 알고 싶은 것은 지금 이야기한대로 세 가지였거든요? 그리스도 자신이었어요. 그 다음에는 그 부활의 권능이었어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들을 다시금 살리시는 그 위대한 권능, 그 다음에 그 고난에 참여하는 신비 그것을 알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알고 싶어서 사도는 어떻게 했어요? 첫째, 그의 죽으심을 본받았어요.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가 알게 되는 것 그것은 사색하고 명상함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 그 속에서 이러한 진리의 말씀들이 깨달아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할 때 그것은 말하자면 전 생애를 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함께 내 건 그러한 인생의 추구를 통해서 얻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것이지 결코 사색하고 명상하고 좋은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청년) 젊은 시기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의 한 양식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영적 삶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의 체험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모든 혼돈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자신을 추구할 때 우리에게는 이전과 다른 신앙의 목표가 주어지게 되고 전과 다른 가치관들로 신앙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아무래도 여러분들에게서 좋은 대답이 잘 안 나올 것 같아서 묻는데, 전도사님들 두 분이 대답을 해 보세요. 무엇이냐 하면 이런 것 있잖아요? 예수를 믿고 나서 그 다음에 복음이 무엇인지, 도대체 성경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여기서 섬기고 저기서 섬기고 그러면서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기가 말씀을 듣고 나름대로 마음속에 각성이 일어나서 정돈이 되었어요. 그런데 정돈이 되고 난 다음에 비로소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면 참된 체험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영적인 체험이? 그런데 정작 그런 것이 정리 안 되었을 때에는 방언도 받고, 은사도 받고 그러다가 이상하게 정돈이 된 다음에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체험을 사모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그런 체험들이 잘 안 일어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받지 않아요? 김승기 전도사님, 그렇지 않아요? 제 말에 동의할 수 있어요? 동의할 수 있지요? 그러면 왜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체험이 정작 뭔가 정리가 되고 진짜 하나님과의 깊은 체험을 원할 때에 안 일어나는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것을 단순히 사람들 속에 있는 어떤 죄악의 요소라든지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얘기해 보세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지금 두 분 전도사님이 하신 이야기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인 해답이 잘 안 되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오직한 형제 같은 경우가 체험을 비교적 많이 했지요? 그렇지요?
완전히 이제는 대답이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갔어요. 각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대답을 다 했는데,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사실은 이렇게, 그러니까 오늘날의 있어서 제가 고통스러운 한 광경이 무엇이냐 하면 이 뒤에도 나오거든요?, 조나단 에드워드가 권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분명히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경건서적을 활용을 하라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요즘 보면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는 활용할 경건서적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읽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 그 다음에 지금 이야기한 이런 문제 같은 것들에 대해서 거의 우리들이 답을 찾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영적인 생활에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얕은 생활을 할 경우에는 제기할 수 없었던 많은 의문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지금 세 분이 말씀하셨는데 정리를 하면, 한 분은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뭔가 복음은 복음대로 축복은 축복대로 막 떠돌아다니면서 도대체 박수치고 불 때고 아니면 그냥 가서 예배하고 그 다음에 봉사하고 그러면서도 뭐가 뭔지 정리가 안 되는데, 지금 이 이야기는 사실 정리가 되신 분들은 이해가 될 것이에요. 이해가지요?, 그런 것들을 정리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체험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지금 진전도사님 말씀이거든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리스판스(response)를 원하는데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니까 그런 체험들이 잘 안 온다 그것이거든요. 그 다음에 김승기 전도사님 말씀은 정반대로 보았어요. 정반대로는 아니지만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원한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은 정말 원하는 것이냐 이것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오직한 형제님은 오히려 정리된 사람들은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간절하지 않으면서도 간절한 것 같지만 그러나 오히려 정리 안 되었을 때가 더 간절하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세 대답에 대해서 하나씩 논박을 하겠어요. 첫 번째 진전도사님의 대답에 대해서는, 논박이라기보다도 반론인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물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이 은혜를 베푸셨을 때는 더 많은 책임이 따라요. 잘못을 했을 경우에도 우리는 동일한 잘못에 대해서 동일한 책망을 하나님 앞에 받지 않아요. 신앙의 수준에 따라 다 다른 책망을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구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정리가 되었어요.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어요. 혼돈이 정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러나 상당히 자기의 잘못된 인식들이 부서져 나가고 복음으로 다시 서게 되는 이러한 은혜를 입게 되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되게 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 그랬는데 그렇게 더 많은 것들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는데, 사실 가만히 보면 정리되지 못할 때에 기도가 정리된 다음의 기도보다 간절해 질 수 있다면 그것은 상태의 문제이지 수준의 문제는 아니에요. 기도의 수준이 같을 수가 없어요. 더군다나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단순히 정리되었다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만 보통으로 기도하거나 웬만큼 기도해 가지고는 안 들어 주는 어떤 높은 수준으로까지 체험 그 자체가 무슨 과자 따먹기 하는 것처럼 장대를 높이 들어 올리신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되요.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럼 전도사님 개인적으로 예를 듭시다, 주님을 만나고 뭔가 정리된 다음에 기도가 더 간절해 졌어요? 아니면 정리되기 전의 기도가 훨씬 더 간절했어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금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간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그런 어떤 신비하고 기이한 사모하는 영적인 체험들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늘 주시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것이지요. 그렇지요?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런데 이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런 성령의 체험들, 우리들이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듣고 그러면서 깊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체험하게 되는 그런 영적인 체험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지금도, 그럼 이제 지금 진전도사님 하시는 이야기가 오직한 형제 이야기하고 연결이 되지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간절해지는 것은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간절해지지 않거나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렇게 정리가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느끼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간절하게 기도를 하게 되요. 쉽게 이야기해서 정말 성경에서 보면 참된 중보기도의 영을 가졌던 그 사람들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었어요. 오히려. 정리되었을 때 정리되지 못한 사람이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없다 그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정리되고 안 되는 것이 기도에 간절함에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것이지요. 그 다음에 김승기 전도사님 하신 말씀은 참된 간절함이 있는가 그랬는데 그것도 다 같은 맥락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고 자기 나름대로 뭔가 정리가 되었다고 사람이 더 교묘해 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더 교묘해 지는 것은 아니고, 교묘해 진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그렇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놀라운 통찰력이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에요. 저는 오히려, 이것이 유일한 대답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러나 오늘 이것은 우리 교회적인 필요에 의해서 제가 이 문제를 좀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우리 함께 대화를 하면서, 여기는 그런 체험을 가진 분들이 여럿 있을 것이에요,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이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깨닫고 그 다음에 무너지면서 그러면서 뭔가 이렇게 정리되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어요. 있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이렇게 정리가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정리된 내용들 속에서는 무엇이냐 하면 주님과의 체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하고 성령의 역사가 참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이 오히려 정리되고 다니까 이전에는 방언도 받고 이런 것들을 잘 했는데 정리되고 나니까 오히려 이런 것들이 바라도 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은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한없는 무게가 되는, 무거운 무게가 되는 그런 것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지금 제가 생각하는 것이 완전한 대답은 아니지만 그러나 한 대답이 되리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정리가 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쉽게 이야기해서 그런 체험이 생기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릇된 것들과 참된 것들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판단이 생겨나게 되요. 체험의 문제에 있어서 더더욱 그래요. 그러니까 전에는 뜨겁게 다가오면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뜨겁게 다가와도 성령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뜨겁게 다가와도 항상 살아있는 의식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과연 참된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가 살아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어떤 이야기가 되느냐 하면,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은사의 체험을 한 것이 이상하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숙된 경건함이나 연단된 꿋꿋함을 잘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그런 문제의 한계예요. 그런데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어떤 이야기가 되느냐 하면,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는 그런 다가오는 체험들을 다 오픈하면서 받아들였는데 정리가 된 상태에서는 체험이 다가올 때는 항상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쉽게 이야기해서 참답게 복음에 기초한 올바른 체험인가 하는 그 문제가 다가오고 거기에 대한 인식이 살아 있기 때문에 정리가 된 사람들에게는 그릇된 체험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좁아지는 것이에요. 아주 협소해 지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커다란 체험이 없어도 일단 머리가 정리되고, 물론 머리만 가지고 정리되는 것은 아니에요, 마음속에서 깊이 뉘우치고 자기의 잘못된 기독교에 대한 시각을 정리하면서 그런 어떤 올바른 복음의 시각을 갖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릇된 체험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져요. 거의 불가능해지게 되요.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그런 어떤 은사의 체험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그 속에서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함을 위해서는 체험이 더해져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간혹 정리가 되고 나니까 오히려 신앙의 체험이 안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대신 전에 안 일어나던 어떤 일들이 많이 일어나느냐 하면, 구조자체가 그렇게 정돈이 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탐구의 정신이 생겨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실 때 말씀을 기초로 체험을 많이 주신다구요. 그리고 결국 어느 한 순간에 만약에 그가 그렇게 말씀으로 깊이 붙잡힌 가운데 정리된 가운데 체험을 주시면 그것은 아주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요. 그래서 체험 속에는 분명히 위험한 요소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 임상학적으로 보면, 그런 방언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체험을 많이 하게 될 때 그때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오픈되어 있을 때, 오픈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런 체험들을 하나님이 많이 주실 때가 가만히 보면 언제인가 하면 신앙의 초기에 그런 일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요. 빈번하게 일어나요. 그러면서 차츰차츰 말씀으로 성숙되어 가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 문제는 거기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무엇이냐 하면, 말씀이 정리가 된 사람들은 참된 것과 그릇된 것에 대한 아주 예리한 판단이 생기기 때문에 그릇된 체험들이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철저한 통제기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런 체험들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적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이 체험을 많이 하고 또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움이지요. 하나님의 뜻이라는데 할 이야기가 무엇이 있어요?
(질문)
(답변) 그러니까 그 문제도 자매가 잘 생각을 해야 되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자매에게 굉장히 많은 책임이 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정리된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 기도 제목들이 있는데 그런 기도 제목들이 자매 마음속에 계속 다가오고 있고 그것들을 자매가 계속 추구하고 있다면 기도는 굉장히 가속력을 얻을 것이에요. 그러나 만약에 반대로, 그런지 안 그런지 지금 모르겠지만, 만약에 머리가 정리되면서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들을 넣어 주셨는데 그런 부담들을 안고 있는데도 자매는 여전히 그런 부담들을 안고 그 부담을 따라서 기도하기 보다는 나름대로 해결 받고 싶은 여러 가지 기도의 제목들을, 그러니까 스스로 발굴해 낸 많은 기도의 제목들로 그런 기도의 부담을 대치하려고 한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 너무 깊이 들어갔지요? 그 다음에 또 나가봅시다.
(청년) 그 지식 안에서 자라가고 그것으로부터 성숙된 경건함과 연단된 꿋꿋함을 얻을 수 있다. 장년과 노년에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많은 이유를 들지 말라. 그것은 모두 성숙된 경건함과 연단된 꿋꿋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젊은 날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하나님을 추구하고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회의에 찬 여생을 보낼 것이며 청년의 때에 신앙의 연단을 이기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아니하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하지 못하며 노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히5장 12을 읽어봅시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그 다음 읽으세요.
(청년) 이 말씀은 사도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낸 불만의 말씀이다. 그들에게서 마땅히 기대되는 신앙의 도리와 비밀들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것들을 신속하게 아는 일에 있어서 진보하지 못하였다고 책망을 받고 있다. 신령한 체험뿐 아니라 신앙의 도리를 아는 지식의 미성숙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계속 우리 체험을 강조 했는데 두 가지가 같이 자라야 되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령한 체험과 그 다음에 신앙의 도리를 아는 지식에서 같이 자라가야 되요. 체험적인 지식과 신앙의 도리를 아는 지식에서 같이 자라가야 되요.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안되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내년쯤 돼서는 철저하게 교리들을 가르치는 그러한 성경공부를 해야 된다고 믿어요. 그래서 두 가지, 교리를 아는 지식과 두 번째는 신령한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지식, 이 두 가지가 같이 자라가야 됩니다. 어저께도 모여서 우리 집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아이가 집안에 하나 있는데 얼굴이 아주 귀티나게 잘 생겼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가 그쯤 되었어요. 그런데 아주 발육도 굉장히 좋아요. 그런데 어렸을 때, 그러니까 여러분이 시집 장가가서 아기 낳으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경기하잖아요? 막 놀라고 그러잖아요. 그때 그것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난다고, 경기하는 애를 잘못 병원에 데리고 가서 손을 잘못 봤는지 어쨌든지 그 후로부터 애가 맛이 갔어요. 그래가지고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가 얼마나 큰데 아무 판단이 없어요. 어른들하고 같이 앉아 있다가도 막 걸어가서 저것 먹고 싶으면 어른이 밥을 먹고 있는데 거기다 손을 콱 집어넣고 그 속에서 콩 같은 것을 꺼내고, 아니면 잡채 먹고 싶다면 가서 콱 집는 것이에요. 확 뒤집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갓난아기 때에는 챙기고 그러지만 등치가 이만해 졌는데 그걸 어떻게 챙기겠어요? 못 챙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외형은 자라면서도 내면이 자라지 않으면 그런 문제가 있지요. 또 한 아이는 주사가 좋다고 하니까 영양제를 논다는 것을 호르몬 주사를 놓아 주었어요. 아이한테. 그랬더니 이제 7살인가 8살밖에 안 된 아이가 갑자기 체모가 나는 것이에요. 어른처럼 겨드랑이에 털이 시커멓게 나고, 수염이 나고, 가슴에 털이 나고 그러는 것이에요. 온 몸에. 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를 잘못 놓아가지고. 그러니까 그런 것은 또 한쪽만 자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올바른 것이 아니에요. 과일이 있으면 그 과일이 점점 커가잖아요. 그것이 처음에 꽃에서 그 다음에 콩알만한 열매가 생기고 그것이 같이 커가잖아요. 어느 한 쪽이 커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배씨가 왼쪽 구석에 달린 배 보았어요? 그런 것 없거든요. 가운데서부터 커가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도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종합적으로, 전체적으로 그런데 그 핵심에는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다 이것이지요. 그 다음 사람,
(청년) 누가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배우고 자신을 온전케 하기에 합당하게 길들여진 시간에 비례하여 온전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어린 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한 몇 가지 방편 그랬습니다. 일번, 지식의 원천인 성경. 그러니까 두 가지 지식을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체험을 통해서 아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신앙의 도리인 진리를 아는, 교리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둘 다 성경이 원천이 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신앙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당연히 성경에 들어 있고, 그 다음에 그 체험이 올바른 체험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주고 또 어떤 체험을 추구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도 성경에 기초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중하게 생각하면서 늘 성경을 사랑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해요. 두 번째는 유익이 없는 성경읽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호기심이나 아니면 살펴보는 것이 없는, 이사야36장에서 이야기하는 ‘너희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라’, 살펴보는 일이 없는 성경읽기가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살펴보는 작업을 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하고, 또 성경을 살피고 다른 구절과 대조하고 묵상하면서 그렇게 살피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에요. 세 번째는 경건서적을 성경 읽는 일에 보조로 삼을 것. 젊었을 때에 경건서적을 좀 많이 읽으세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젊은 날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25세가 안 되었다면 30대가 되기 전에 그리고 25세가 넘었다면 35세가 되기 전에 적어도 경건서적이 넉자짜리 책꽂이 하나에 가득 차야 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5년 내지 10년 정도 신앙생활을 하고 나면 여기서 저 넓이 되는 책꽂이 여섯 단 정도로 되어 있는 곳에 가득 찰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의 책은 있어야 되겠다 10년 정도로 본다면.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최소한 1년에 20권 정도는 사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것도 잘 엄선해서 그리고 20권 정도면 한 달에 한 권 반 정도 읽는 셈이 되지요? 만약에 10년을 읽으면 200권정도 되는 분량이지요. 그러면 석자정도 되는 책꽂이 한 다섯 칸? 그 정도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읽는 분량보다 더 많이 책을 사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섯 권 읽을 수 있으면 열권 정도 사고 열권 정도 읽을 수 있으면 20권 정도 사고 그렇게 해 가지고 경건서적들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청교도들이 이것을 중시했느냐 하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주일 날 무엇을 합니까 그러면 네 가지였어요. 예배를 정성껏 드리고 두 번째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돌아와서 친구와 가족들과 예배시간에 들은 말씀을 나누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경건서적을 보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푹 쉰다 이 네 가지였어요. 그러니까 경건서적을 많이 읽어야 되요. 그런데 거의 잘 안 사요. 여기도 이렇게 갖다 놓았는데 거의 안 사요. 저것 사서 다 읽어야 될 책들인데 거의 안 사요. 처음에 책 나왔을 때 깜짝 세일할 때만 우루루 모이지 그 다음에는 거의 안 사요. 오죽했으면 교회에서 공짜로 나누어 주겠어요 읽으라고. 그 다음에 지식을 서로 전하라. 이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발견한 지식들을 서로 나눔으로써 자기의 지식이 온전해 진다 그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깊이와 자신의 깊이를 비교하게 되요. 다음에 다섯 번째는 비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도 그것을 교만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많이 임했다 그것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자랑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지요. 마치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니까 “시몬아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육번, 지식을 얻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라. 그러니까 일 년 지나면서, 이번에 추수감사절 때도 생각을 좀 바꿔보아요. 추수감사절 때 그러면 사업도 복을 주시고, 직장도 잘 다니고 있고, 승용차도 사고 그러면서 헌금하지 말고 지난 일 년 동안에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얼마나 자라갔는가 이렇게 볼 때 작년이 참 애들 같다고 생각되면 그것보다 더 큰 수확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요? 그 다음 일곱 번째, 지식을 따라 행하라.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새롭게 발견한 그 지식을 알고는 그 다음에 그 지식을 좇아서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이 이루어져야지만 그것을 통해서 더 높은 지식에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부활과 고난에 참여하는 신비를 알게 되듯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덧붙일 이야기가 있으면 해보시지요.
(질문)
(답변)
그러니까 그것이지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이냐? 사실 안다는 것을 말로 하기 굉장히 어려워요. 그렇지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 같아요. 이해하기 쉬운 차원으로 끌어내리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알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제가 하나 의문을 제기할께요. 이 말이 맞나 틀리나 보세요. 깊이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야기하고 통한다. 맞아요, 틀려요? 어떻게 틀려요? 그러면 이것을 입증하세요. 깊이 이해하고 아주 깊이 아는데 그런데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어떤 경우에요? 그것을 입증해 보세요.
그것도 또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지요. 그건 맞아요. 이런 점에서 맞지요. 어떤 점에서 맞느냐 하면, 주님은 아무리 우리가 깊이 점점 알아가도 인간에게 실망을 주시지 않아요. 인간이 혹시 만약에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는데 그 도중에서 실망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기의 무지 때문이에요. 언젠가 무지가 벗겨지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참된 지식이 드러나지요. 아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인간에게서도 사실은 거의 통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안다는 말의 정의가 지금 전도사님 이야기하는 것하고 제가 이야기하는 것하고 틀릴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 있잖아요? 전에는 몰랐는데, 한 발짝 떨어져 있을 때는 가끔 만나서 좋은 이야기하고 껄껄하고 웃으니까 사람이 참 괜찮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가서 들여다보니까 맨날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세수도 안하고 직장가고 남의 돈 꾸고 안 갚고 그런 것들이 다 보이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왜 이러냐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안다는 의미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아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 안다라고 하는 미가 과연 이전에 인지하지 못했던 우리의 감추어진 삶의 모습이 폭로되는 것 정도를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실 때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 이야기이지요. 그러니까 정의 자체를 전도사님이 내리는 것하고 내가 내리는 것하고 틀리지만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런 것 같아요. 그 안다는 정의를 그런 식으로 내리지만 말고 그런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이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 같은 동일한 맥락에서 그 안다는 것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람을 알게 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쁘지만 그 나쁜 것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어떤 것, 혹은 외부적인 영적인 힘이나 혹은 내면 속에 자신도 떨쳐 버릴 수 없게끔 굳게 붙어 있는 그 잘못된 습관, 세수 안하고 직장 간다든지 남의 돈 꾸고 잘 안 갚는 그런 인격 속에 단단히 들러붙은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떨쳐 버릴 수 없는 그런 습관들 이런 것들까지도 깊이 안다는 의미는 역시 사랑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이런 것들이 가능하잖아요? 처음에 볼 때에는 그런 것들이 이렇게 폭로될 때는 실망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실망을 느끼면 앎은 더 이상 진전이 안 되요. 그렇지요? 그러나 그것까지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서 앎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 아니에요? 그야말로 진짜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깊이 알고 참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 관계는 종류는 어떤 사랑인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관계가 포함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내가 너를 아노라 그 이야기는 사랑한다는 이야기하고 이콜이에요. 그 얘기가 그 얘기라고. 내가 너를 알고, 창세 전에 내가 너를 알고, 너를 구별하였고, 네가 나에게 잊은 바 되지 않고, 너희가 나에게 잊은 바 되어지지 않고, 내가 너를 기억하노라 이 모든 것들은 그냥 사랑한다는 이야기하고 이콜로 통하는 이야기에요. 특히 구약에서는 더 그래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우리의 잘못된 부분이든지 잘된 부분이든지 위로의 요소에요? 아니면 우리에게 두려움의 요소에요? 위로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내가 너를 안다고 그랬을 때 그것이 말하자면 위로의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그 자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이냐고 말할 때 말하자면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서로 함께 나누는 깊은 앎 그런 것이 앎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앎의 관계는 반드시 사랑이 동반되는 관계일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지만 온전한 앎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숙한 것만큼 사랑하고 그 다음에 아는 것만큼 더 깊이 경외하고 그래서 생명이 있는 그런 속에서 참다운 앎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극단적으로 신앙에 대한 모든 도리만을 알고 그러한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것은 마치 범죄자의 파일을 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외운다고 해서 참다운 아는 관계가 아니거든요. 그런 속에서 깊이 알아가는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때에 이런 생각하면 되요. 이 성경자체를 연애편지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낯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한번 불쑥 보았던 인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보낸 편지였다면 그 편지를 보면서 별 해괴망측한 생각을 다 할 것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그가 정말 자기를 사랑하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깊이 알고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은 그런 벽을 넘어선 관계라면 그 사람이 보낸 편지가 구구절절이 정말 새롭게 다가올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그 깊이도 결국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체험한 깊이에 비례하는 것이에요.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에요. 그런 속에서 자라나가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요. 그러니까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헌신되게 만들어요. 그리고 뜨겁게 살도록 만들어주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힘이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좀 더 덧붙일 이야기가 있으면 하고 일단 1부 순서를 정리하도록 합시다. 덧붙일 이야기가 있습니까?
(질문)
(답변) 그렇지요. 성경 말씀 속에서 찾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성경말씀을 다 같이 공부하고 알면서도 이 속에 잘못된 사고들이 가득 차 있어 가지고 말하자면 사도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고 하는 그 토대 위에서 자기 신앙의 내용들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늘 문제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찬송 하나 부르고 마치고 그리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