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녹취자: 김경애
빌립보서는 바울이 말년에 옥중에서 쓴 편지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나니까 이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니까 생각도 바뀌고 철학도 바뀌고 중요한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미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미친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전부 다 미친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믿고 나서 저 사람은 미쳤다는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정상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옛날에 무엇이 중요했습니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베냐민 지파다.’ 사실 베냐민 지파는 자랑할 것이 없는 제일 후진 지파입니다. 그런데도 무엇을 자랑했느냐하면 그 지파는 그 지파대로의 자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후진 학교라도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의 의로는 내가 최고다. 그리고 그것밖에 없다. 그리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교회를 핍박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번 미친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서 확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인생이 이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한번 뒤집혀지지 않고는 제대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도 바울로 하여금 사도 바울의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가 한번 나타나셔서 그리스도가 만나주시니까 이전의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젊을 때는 친구가 없으면 조급했습니다. 그래서 엊그저께 신문을 보니까 일본 초등학교 애들이 자살을 자꾸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요즘말로 이지메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 사람이 한사람을 바보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돌리는 것입니다. 같이 따돌리니까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소외의식을 느끼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어렸을 때에는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도 친구가 있고 어울려야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친구들 속에서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크고 나면 이성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연애지상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둘이 사랑하고 우리 둘이 있는데 세상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명예만 있으면 최고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자기에게 굴복하면 좋아합니다. 그 다음에 돈입니다. 돈을 가지고 다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이런 것은 전부 다 예수를 믿으면서 ‘무슨 필요가 있으랴?’ 왜? 예수 한 사람이 자기의 인생 가운데 들어오시니까 완전히 전부 다 인생을 보는 각도와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뒤바뀌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삶의 목표가 틀려지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틀려졌느냐하면
(찬양)
예수 더 알기를 원함은 대속해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예수를 한번 딱 만나니까 만나고 나니까 완전히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가 나에게 무엇을 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가 바울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지금 실컷 두들겨 맞고 지금 옥 속에 갇혀있습니다. 사형언도를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몸입니다. 예수가 바울을 위해서 무엇을 주었습니까? 예수님이 바울에게 무엇을 누리고 가지게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몰랐을 때에는 이 사람은 오히려 촉망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것을 약속받고 있었습니다. 출세를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자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잃어버리고, 동족을 잃어버리고, 친구를 잃어버리고, 모든 명예와 모든 전망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그 순간에 예수를 만나고 나서 발견하게 되는 전망과 자기가 예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전망 두 개를 바꾸게 한 것입니다. 한순간에 예수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시니까 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확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열렬한 팬이 된 것입니다. 팬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한 번에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사람들보다 아무리 세상을 사랑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가 깊이 체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확신과 방황과 모든 회의와 모든 불성실과 모든 견고하지 못한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의미를 진심으로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동네에서는 모여서 목사님과 모여서 지하실에다가 후줄근하게 교회를 개척했는데 기도 처소를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도 아닌데 은혜 받은 강사님이 모여서 아들, 딸들이 주는 용돈을 털어서 그것을 조그만 지하방을 하나 얻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요즘은 한물갔는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춤추러 다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기도처소로 가는 것입니다. 시장 보러 왔다가 기도하고 가고 그리고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은혜를 받고나니까 사람들이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연이 은혜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람들이 와서 시끄럽게 떠드니까 동네 사람들이 온통 진정서를 낸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에 진정서를 내서 그 기도 처소 때문에 우리가 못살겠다고 그랬습니다. 그 시절은 진정서가 무섭던 시절이기 때문에 형사 두 명이 파견을 나왔습니다. 형사들이 옛날에는 왜 그렇게 가죽잠바를 입었는지 모르겠는데 가죽잠바를 입은 사람 둘이서 무엇을 하는지 보았습니다. 시끄럽다고 그러는데 가서 보니까 시끄러운 것입니다. 끝나고 나서 기도를 하는데 과연 시끄러운 것입니다. 보고서를 써서 올려야하는데 그랬는데 거기서 예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함께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체험하고 형사 둘이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보고서를 쓰고 말고 할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서 은혜를 받고나니까 자기가 가서 보니까 굉장히 건강하고 아주 좋은 모임이었고 전혀 근처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할 그때에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래놓고 보았더니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딱 만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자기가 여태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옛날에 자랑했던 그런 것들은 그런 것을 자랑하며 살았던 날들이 너무 창피한 것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딱지를 잔뜩 모으고 구슬을 많이 모은 친구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혹시 여러분들이 이만큼 성장해서 아들이나 딸이 가지고 노는 구슬이나 딱지가 탐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병자입니다. 마찬가지의 느낌을 세상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인 것을 자랑하고 율법의 의를 자랑하고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만난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고 나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거기가 아니라 그 다음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 다음에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하면 그렇게 내 인생을 예수가 송두리째 바꾸어놓으셨는데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어 놓으셨을 때에는 내가 그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내 인생을 예수께 걸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근본이 뒤흔들리면서 뒤바뀌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런데 아직도 예수를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더 행복해지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그것이 내가 이 어두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믿음의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속에서 신앙으로 쌓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십일조를 내고 장로가 되고 그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를 절대로 그만두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고 그래도 교회를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교회 가는 목표 자체가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대를 물려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계속 다녀서 40년, 50년이 되었다. 은혜하고는 상관없이 거기에 다니는 것입니다. 친구들도 만나고 말입니다. 교회를 가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 앞에 내가 은혜를 받고 내 인생이 새로워져야겠다는 그런 목표가 아니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서 오랜만에 일주일에 한 번씩 친구를 만나고 오면 괜히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어떻게 진전되느냐하면 옛날교회에서 예배가 끝나고 나면 부녀자들이 꼭 전봇대 밑에서 모여앉아서 서너 댓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조아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나했더니 그것이 곗돈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하는 재미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낙찰계를 하고 돈을 타먹었으니까 그 계돈을 내러 오는 사람도 있고 이번에는 누구에게 낙찰이 될까하는 희망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께 구원을 받고 보니까 그 예수가 누구인지가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에 대해서 조금 보여주었는데 사도 바울은 완전히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내게 귀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로 여긴다고 그랬는데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성경에서 표현을 점잖게 표현한 것입니다. 똥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똥이 여기에 있으면 걸어가면서 ‘나는 이것을 전혀 탐내지 않아!’ 그러면서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이 똥에 대해서 전혀 사심이 없어!’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있으면 피해가는 것입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입니다.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입니다. 그 똥 속에 아무리 돈이 묻혔다고 할지라도 싫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내가 예수를 알기 전에 사랑하던 것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이렇게 똥처럼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 그런데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다 그 일을 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부터 종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종교적으로 살고 종교적으로 추구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은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목표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수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종교적인 인물이었으니까 예수를 믿고 나니까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모든 날들이 열심히 살면 열심히 살수록 예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고 그 열심은 극에 달하니까 이제는 체포영장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갔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 자랑스럽고 귀하게 여겼는데 예수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역할을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이제 똥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그것에 사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더럽고 ‘저것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구나!’ 하면서 이전에 자랑하던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그렇게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없고 그렇게 살면서도 생명이 없었는데 ‘내가 나의 의는 율법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며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의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사실을 이전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그때 죄인을 찾아오셔서 관계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는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속에서도 보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몰랐던 사람들이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돌아갔지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된 방식으로 안 사람들은 삶과 신앙이 분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좋은데 생활방식이 형편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다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 속에 갇혀서 지금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이 사람의 소망은 사람들이 탄원서를 내서 자기를 석방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관계입니까? 사랑하는 관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구주 예수를 참 사랑하고’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예수를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깨닫고 싶고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관계가 끊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알아야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쫒아가노라.’ 전에는 그리스도가 나를 잡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도 바울을 잡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부르지도 않을 때에 예수님의 사람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갈 때에 주님이 오셔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사울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사로잡았는데 이번에는 무엇이냐 하면 그 그리스도 예수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뒤에 있는 푯대가 없으면 앞에 있는 푯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붙잡힌바 된 것 만큼만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지 아무렇게도 붙잡히지도 못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쫒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앞에 있는 푯대가 분명하기 전에 먼저 뒤에 있는 푯대가 분명한 것입니다. 왜 1년, 2년 신앙생활을 하고 말씀을 들어도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물에 물 탄 것 같고, 술에 술탄 것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지 마는지 흐리멍덩한 삶을 살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사도 바울이 붙잡힌바 되자 그는 무엇을 붙잡아야할지 분명했습니다. 무엇을 붙잡아야할까?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인생의 목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히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을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히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고 살아갈 이런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도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쫒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은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그 다음에 그 사로잡힌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주님이 붙잡아야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붙잡으시고 동행하시니까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는데 요단강이 말라버렸습니다. 주님이 붙잡으시니까, 주님이 함께하시니까 여리고성을 도니까 그냥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붙잡으니까 또 붙잡힌 사람들은 무엇을 붙잡으면서 살아가야할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치관도 분명하지 않고 무엇을 붙잡으며 살아가야할지 확신도 못하며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신앙생활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온전히 이루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예수의 인격과 예수 안에 있는 그 세계가 너무나 크고 넓은 것입니다. ‘이미 내가 다 이루었다.’ 불가능합니다. ‘온전히 다 이루었다.’ 불가능합니다. 왜? 나를 붙잡은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붙잡기 전에는 그저 나사렛의 이단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히니까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은혜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그분 속에 있는 그 모든 신앙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가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쫒아간다고 그랬는데 그것을 잡으려고 쫒아가는 자세에 대해서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여 쫒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내가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이 빌립보서에 있기 까지는 약 25년 내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난 이후로 그는 철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이름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예수의 한 인격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주님만을 섬기면서 살아왔던 모든 날이었는데 그 주님만을 섬기며 살아온 그 모든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일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것이 바로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자세입니다. 이전에 내가 한 일들은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잘한 것이든 잘못한 것이든 그것은 이미 다 과거의 일입니다. 잘한 일들에 연연해하면 교만해질 것이고 잘못된 일에 집착하면 그것은 침체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굳이 잘라버리고 떠내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흘러버린 시간들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런 인생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후회와 자책 속에 빠져서 그렇게 고민하고 낙담하고 그렇게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침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인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가지고 후회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제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30년 가까운 세월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오면서 물론 대부분의 시간들을 주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실패도 많았고 후회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인해 이겼노라.’ 왜? 뒤의 것들을 생각하며 붙들기에는 앞에 있는 푯대가 너무 선명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가 너무나 확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대부분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자꾸 과거를 추억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확실하고 미래를 향한 꿈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그 과거를 인해서 고민하고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내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한다.’
여러분 1년 동안 무엇을 잡으려고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 예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활하고 승천하셨는데 그런대도 그 예수를 잡고 싶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가 누구시고 그리고 나에게 이처럼 완전히 불가능에 가까운 구제불능의 인간에게 그렇게 내가 몸부림쳐도 얻을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내게 베푸셨던 그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 예수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이 사도는 전심으로 그 하나를 찾으려고 쫒아 다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다른 것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만큼 이 원칙이 철저하게 통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전심으로 나를 찾고 나를 추구하면 그리하면 내가 알려줄 것이다.” 즉 예수를 사도가 처음에 다메섹에서 만난 이후부터 점점 세월이 흘러가고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푯대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절차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상을 받기 위한 삶,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굳게 믿음으로써 자기의 삶으로써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할 때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도대체 믿음생활은 어떻게 되는가?’ 자신에 대해서 화나고 내가 이렇게 밖에 못살까하는 짜증이 나는데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게 마음으로 무엇인가 변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변화를 원하는 것은 실제로 그 변화를 추구하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 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 이렇게 구원을 받고 또 이렇게 빌립보 3장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 원하는 사도의 방법은 가만히 누워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옥 속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전심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상을 놓고 경주하는 사람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헐떡거리는 심장을 부여안고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내가 내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돼!’ 그것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결국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고 신앙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는 사람들은 그것이 가만히 드러누워서 가정교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닌 것을 압니다. 자기가 전심으로 형식적인 신앙, 나의 안일한 신앙을 청산하고 그리고 전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서 애쓰고 그래서 날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그리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내 속사람과 그리고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내 겉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때로는 결단하고 이러는 적극적인 삶속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연조가 더해가고 신앙이 깊어갈수록 복음에 대한 탁월하고 해박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래로 바울만큼 깊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선교현장에서 목회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고난을 받고 역경의 순간을 지나면서 피 흘리는 고난과 위기를 체험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붙잡은 예수 그리스도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이러한 절박한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불꽃과 같이 타오르는 삶으로써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좀 더 꿋꿋함이 필요합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이런 꿋꿋함! 그리고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세상의 풍파보다는 훨씬 더 강한 신앙이 우리를 지탱해주고 그 신앙을 가진 우리가 세상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과 더불어 싸워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해지고 굳세져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강함과 굳셈은 우리들이 온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영락없습니다. 여기 있던 화초를 어떻게 해서 살살 보호해서 가까스로 살려놓았더니 햇빛에 내놓았더니 다 말라서 죽어서 고목나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제가 전도사님들보고 그랬습니다. 내년도에는 우리 목표가 우리 열린 교회 성도를 강하게 키우자고 그랬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젖이나 먹는 신앙으로 기저귀나 갈아 채우는 그런 것 말고 좀 강하게 키우자고 그랬습니다. 강해야만 우리들이 비로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성경의 많은 축복들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강하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했고 또 알았습니다. 그리고 알고 싶어 했고 알았고 또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달아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가 옥중에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장엄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신 속에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한 번에 사도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믿음이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험난하고 그리고 풍파 많은 이 세상, 이 캄캄한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하나님의 교부가 될 수 있는지 그는 날마다 추구하고 그런 과정에서 그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지식들이 늘어가고 그리고 그의 신앙과 그의 인격과 그의 삶이 점점 더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온상에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 같은 것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삶의 현장에 서있었습니다.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이 옳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걷기 위해서 그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모든 여건과 모든 악조건과 그리고 삶의 불편함과 모든 육신의 욕심과 정욕과 모든 것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긴장했습니다.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주님께서는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변화와 하늘양식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리고 그 안에서 믿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모든 불신앙의 요소들을 끊임없이 쳐서 거꾸러뜨리고 나를 붙잡았던 그 예수 그리스도, 나에게 구원을 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나는 아직 그에게 붙잡힌바 없으나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그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은혜가 많으시고 그분만이 우리의 일생을 참으로 빛나게 해주실 수 있는 그분께 우리가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이 절박한 마음 그리고 과연 사로잡힌 사람처럼 살아가려고 애쓰는 이런 삶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심방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매일 심방 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수만 있다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연초에 한번은 하면 좋습니다. 만날 만나는 성도들이 내 마음속으로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을까? 왜 그렇게 굳세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까? 왜 저렇게 밖에 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집에 가서 심방을 하고 그가 고민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그 공간에 내가 앉아 기도하고 그 영혼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충만한 은혜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이런 삶이 우리에게 계속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사람으로 강하게 서기를 원합니까? 아멘 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강하게 사는 사람처럼 강한 자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그리고 마음과 뜻을 합해서 그렇게 강한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전심으로 애쓰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에 그러한 속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는 더 잘 아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잘 아는 것인 줄 압니까? 예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누구인지 변론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버리고 예수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언제입니까? 그러면서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 그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죽노라’ 그랬습니다. 올해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습니다. ‘내 나이도 벌써 서른이 넘었습니다.’ 아니면 ‘내 나이 벌써 40이 넘었습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였으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무엇을 바르고 성형수술을 해서 잘 모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이러한 신앙의 깊은 의미가 있고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내년에는 말입니다. 94년도는 이미 길갈에서 굴려버렸습니다. 모든 수치를 굴려버렸습니다. 무능한 사람! 그러면 나였었는데 굴려버렸습니다. 가난한 사람! 그러면 나였었는데 굴려버렸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 그러면 나였었는데 다 굴려버렸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고 뺀질뺀질 대는 사람! 그러면 나였었는데 길갈에서 다 굴려버렸습니다. 우리가 정말 금년도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를 비롯해서 전도사님들 교회를 강하게 이끌어가고 싶습니다. 이제는 작년 한해는 강하게 이끌어가려고 했으나 이끌 사람이 있어야지요. 이제는 금년도에 들어서면 이제는 강하게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그날에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노는 것과 같이 유원지에서 풀밭에 앉아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그리고 잔잔한 호숫가에 앉아서 보트놀이나 즐기고 이러는 사람들로 그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폭풍을 호령하면서 그 폭풍우 속을 꿰뚫고 믿음의 항구로 전진할 수 있는 그런 선장이 되어서 배에 여러 사람을 태우고 여러분들이 안식의 포구로 향하여서 폭풍을 뚫고 돌진할 수 있는 이런 용감한 선장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그리고 이전에 행했던 모든 것을 다 잘라서 잊어버려야합니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 그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어렵게 만든 그 모든 것들을 단숨에 다 끊어버리고 그리고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좀 새롭게 될 것을 하나님 앞에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금년 한해에는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왜 아멘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로 하여금 금년 한해에는 평탄하고 안일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 속에서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예수를 추구하고 강한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살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