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부활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인생, 사람의 일생을 살펴보면 기운이 펄펄 넘치고 활기가 있어서 죽음과 거리가 먼 젊을 때에는 이상하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큽니다. 그러나 육체의 기운이 점점 쇠잔해지고 마음의 소망도 사라져서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이 되기까지 늙으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게 됩니다. 만약 죽음에 대한 젊었을 때의 공포를 그대로 가지고 노년을 맞게 되면 아마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체념의 지혜를 주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죽음과 동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인간에게 정하신 것이요”(히9:27상)라고 말했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그렇게 죽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힘입어 영원히 멸절되지 않고 살도록 창조되었고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그분의 생명을 누리면서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육체는 비록 흙으로부터 지은 바 되었지만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덕 입으므로 말미암아 불멸의 몸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불멸의 육체와 영원히 살 영혼이 만나서 불사하는 존재가 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아담이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죄는 들어왔고 이 죄는 영혼과 육체의 심오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혼으로 자연적 생명은 남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영원히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는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 결과인 죽음에 의해 삼킨바 되도록 변질되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에 불과하였지만 영혼 자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에 덕 입음으로서 육체가 불멸할 수 있었는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런 육체를 향해 베풀기로 하셨던 영원히 불멸할 수 있는 덕을 하나님이 스스로 거두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불멸할 영혼을 품은 채 시간 속에서 소멸하므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비극 속에서 사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구원 받을 인류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것은 바로 죄 때문에 잃어버린 인간의 이 아름다운 지위를 회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루시므로 말미암아 불멸하도록 창조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죄의 영향을 끊어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혼이 그분께 접붙여지게 만드셨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영혼과 관계를 맺으시고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시는 생명을 그 교통을 통해 한없이 부어주시므로 영혼이 영원히 불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담지하게 만드셨습니다. 육체는 시간 속에서 소멸을 향해 달려가고 마지막엔 죽어 이 세상에서 모두 흩어져 사라지지만 물질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 육체의 죽음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어떤 식으로든지 이 세계 안에 물질로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부활의 날에 이 모든 육체의 물질들을 거두어 영혼과 다시 결합시키시므로 하나님이 하나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만드시는데 이것을 가리켜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흩어져 있는 우리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들은 구원을 얻고 죽은 자의 영혼은 낙원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의 육체와 불멸하는 하나의 몸이 되고 구원받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의 영혼은 음부로부터 올라와 육체와 결합이 되어 영원히 불사의 몸이 되는 것을 가리켜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은 두 부류의 부활로 명백히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고 또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부활과 함께 영원히 들어가게 될 영광스러운 천국생활과 지옥의 상태는 각각 불멸하고 불사할 몸과 영혼을 요구합니다.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는 예수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다시 살리신 몸과 다시 살리신 영혼이 만나 영원한 축복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신자들은 아침마다 날마다 새롭게 점증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계시의 빛을 보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신자는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 생활하면서 언젠가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그 변화, 여러분들이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어떤 것이었는지 회상해 보십시오. 괜히 마음이 들뜨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약에 제대로 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었다면 만남의 한 복판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예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밝은 진리의 빛이 어둔 영혼을 찢고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그 계시의 빛과 함께 우리의 온 마음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의 인격 안에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사랑을 알게 된 말할 수 없는 생애적인 희열이 무한대로 확장된 가운데 매순간 새롭게 일어나는 곳이 천국이라고 알면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에 보석이 많다는데, 많으면 뭐해요? 누가 사겠습니까?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무엇을 사겠어요?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무엇을 사겠어요?
하늘나라에서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이 비췸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매순간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깨달음으로 극도의 희열이 우리의 영원한 천국 생활 안에서 무한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은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무한히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의 아름다움은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천국 생활의 기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가불해서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만난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큰 집에서 살고 예쁜 신부에게 장가를 들고 석고상같이 잘 깎아 놓은 신랑에게 시집을 간다고 해서 그 천국의 기쁨이 가불해서 맛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유효기간이 있는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이 세상에서 앞당겨 맛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매순간 느끼며 그것에 감격하면서 그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맞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값없이 아무 공로 없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처럼 우울하고 어두운 것은 돈이 없고 물질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의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지옥은 매순간 당신의 엄위하신 성품을 보여주시므로 더러운 영혼을 가진 지옥의 인간들이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공포에 떠는 곳이 지옥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보여주시면 보여주실수록 그것은 아주 밝은 빛이 되어 그들에게 비치되 자신들의 영혼이 영원히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공의로운 성품에서 발현되는 두려움과 큰 공포가 매간 새롭게 점증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여러분들이 드물기는 하겠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고 죄를 짓고 혹은 양심의 큰 가책을 느끼므로 자신이 뒤집혀지는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공포와 두려움이 매순간 새롭게 다가오는 곳이 지옥이고 육체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과 육체의 모든 고통을 감당하면서도 그 고통은 겪지만 영원히 육체는 소멸되지 않는 그 일을 위해 육체가 부활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나님께서 실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첫 열매로 부활한 것입니다. 죽었던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님이 능력으로 다시 살리심으로 그분께 접붙여질 우리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 보증이 되신 것입니다. 그 보증으로서 부활하게 하신 성령님이 신자의 마음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이 부활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이기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고난의 골짜기를 노래 부르며 지날 수 있었습니다.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사자와 같이 용기 있는 인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부활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후면 죽을 목숨으로 옥에 갇힌 베드로가 편한 가운데 깊이 잠들 수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고 야고보는 이미 목이 달아났는데 두렵지도 않았나 봅니다. 베드로는 거기가 어디라고 푹 잠들었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잠시 머물 이 세상을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영원한 부활을 앙망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면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님의 자녀에게 허락될 영광스러운 특권인 영원한 부활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갈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음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부활, 그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장래의 영원한 부활의 소망 속에서 살기 위해서 지금 현재적으로 내 마음과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경험되어야만 됩니다.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내 안에서 경험될 때만 미래적으로 그 영원한 최종적인 부활을 앙망하며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이 또 다시 나에게 살아난다는 뜻일까요? 이 비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끊임없이 살아나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들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자와 그리스도의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연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연합되지만 그것은 원리적인 연합이고 실제적으로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한 몸을 이루어 사는 것 같은 참된 연합은 사랑을 함으로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둘이 있는데 등기부부와 실제부부가 있습니다. 등기부부는 법적으로 부부입니다. 원리적으로 부부입니다. 실제적으로 부부가 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부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등기를 안 하고 사랑해도 안 되고 등기는 했는데 사랑을 안 해도 안 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결합은 원리적으로도 결합이 되고 실제적으로도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나의 사랑을 버리고 예수의 사랑으로 돌아가 예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와 주님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된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 우리말 성경에 보면 옛날에 못 박힌 것처럼 나오는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에스타오르타이(έσταύρωται) 현재완료 동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있어 왔나니 혹은 못 박힌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사건의 영향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 부활하셔서 정말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계시고 그 예수께서 내 안에서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살아갑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본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삶의 어떤 거룩의 진전도 없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예수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생명 때문에 자신이 영적으로 매 순간 부활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옛날에 한번 주님을 영접은 했지만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자기 내면에서 경험할 때 그때 내가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오면서 최근에 예수께 꺾여 본 적이 있습니까? 난 반드시 이 행동을 하고야 말텐데 예수님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꺾여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것이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인데 예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꺾여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사랑의 감화로 말미암는 꺾음입니다. 작대기로 패면서 노예를 길들이듯이 우리를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깊이 파고 들어와서 우리를 그 사랑에 감화시켜 꺾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네가 그 죄를 지음으로 다시 그리스도를 못 박으려고 하느냐는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으면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그 사랑을 배반한 자신을 깨달으면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 꺾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사랑의 감화에 의해서 꺾이는 그것이 작대기로 육체에 맞으면서 분질러지는 거보다 훨씬 더 큰 고통입니다. 자기가 꺾어질 때는 누구도 그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꺾임이 아주 극대화되게 되면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자신이 꺾이다가 졸도하게 됩니다. 일상적으로 살아온 자기 꺾임의 경험을 넘어선 것입니다. 놀랍게 그렇게 사랑에 의해 꺾이는 그 속에서 우리가 깊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느끼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를 거슬리며 살고 있는 나의 자아가 느끼는 고통입니다. 스며들어오는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면 예수 죽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의 기운이 확 들어오면서 쇠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의 기운입니다. 마지막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죽음의 기운이 생명을 엄습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호흡도 힘들어지고 얼굴에 모든 표정이 사라지고 피가 도는 그 움직임도 멈추기 시작하면서 온 몸이 창백해지면서 죽음의 기운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의 마지막 목표는 완전히 생명을 끊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서 우리 영혼 안에 스며들어서 우리 마음속을 파고들어서 하나님을 떠나 내 멋대로 살려고 하는 육신의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육욕의 생명이 나와 나누어질 수 있는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죽이려고 할 때 그 고통은 우리의 온 몸과 온 마음속에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혹 같은 것이 나면 내가 원하는 살이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나의 정상적인 몸의 일부라고 말할 수 없지만 칼을 대어 찌르면 다른 정상적인 몸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죽음의 고통이 자기 육욕의 생명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죽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가슴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예수와 함께 죽는 그 사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회개하고 깨뜨려지고 난 다음에 평안이 찾아왔을 때 느끼는 것이 생명입니다. ‘내가 살아있구나’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현재적으로 못 박히고 그 못 박힌 나의 옛 자아의 죽음 속에서 새로운 예수의 생명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일시적으로 내 영혼 안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내 온 존재가 다시는 죄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 속에서 다시 사는 그 영원하신 신적인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명백하게 잠시 있다 사라지고 스러질 이 세상에 모든 소망을 걸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세상과 함께 희망이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오게 될 그 영원한 부활을 사모하고 살기 위해서는 오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 깨달은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이것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잠시 머물 세상에 매인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는 저희가 나아온 고향보다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나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나그네로라 외국인이라 일컬음을 받음을 조금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몸은 이 세상에 살아도 마음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소망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 생활은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는 나의 생명이 되어 생명 없는 자들과 접촉할 때 그들에게 생명과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 그 영혼들을 끊임없이 다시 살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훌륭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믿음의 삶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