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4-6)
녹취자 : 허 혜숙
우선 여러분이 이처럼 뜻 깊은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지난 20년 동안 조국 교회에서 그 이전에 50년을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격동하듯 치달아온 역사를 우리들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격한 변화의 물결들이 쉬지 않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전에 없었던 성경공부의 열기, 제자훈련, 찬양집회, 그러면서도 부흥회 같은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 그리고 사회참여에 대한 논란, 여러 가지 기다란 목표 프로그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화 투쟁의 시기를 지난 것도 바로 이 20년 어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처럼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향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하여 왔고 언제나 이런 질문은 교회로 하여금 진지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역사를 보면 언제나 이렇게 격동기를 지날 때마다 교회는 양분되는 기류가 더욱 강한 색채를 띠고 흐르기 마련입니다. 한쪽에서는 교회를 지난 번 민주화 투쟁에서 본 것과 같이 사회개혁을 위한 매체로 삼으려는,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그러한 현실변혁적인 시도가 있고 또 한편에서는 아예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외면하고 복음의 타겟성만을 강조하는 초월주의적인 신앙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양쪽에 속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 신앙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 때는 성령 운동도 전체 그리스도인 가운데 마지막 잎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멩이를 들고,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십자가를 끌고, 거리로 뛰어나가서 화염병을 던지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막 잎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왜? 신앙과 삶이 분명히 분리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신앙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켜서 형식적인 교회 생활에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급격히 영적각성과 신앙부흥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바로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도 풀 수 없는 난제와 같다’라고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해와 또 침묵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정도 된 일입니다. 그 때만해도 사람들은 이런 신앙부흥이라든지 영적 각성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돌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행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이 소개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뭔가 부흥이라는 것이 우리들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극단의 혐오감을 갖고 있는 옛날 50년, 60년, 70년대에 있었던 그런 부흥과는 틀릴 지도 모른다는 부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식들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방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 단 한 권의 책도 안 나온 것을 보면 역시 이런 이해도 필연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러면 조국의 교회가 이처럼 부흥이라는 성경 속 흐르고 있는 명백한 맥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한 시간 동안에 부흥에 대한 그 위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다 하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 가서 우리는 부흥을 추구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흥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교회의 참된 모델을 신약 성경 속에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성경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회로 하여금 신약의 교회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 참된 원동력이 바로 부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 영적각성, 이런 기치를 높이 들고 현수막을 내 붙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20여 년 동안 조국 교회에는 현수막이 나붙었고 헤아릴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겠다는 이념 아래 한국교회를 끼쳐왔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야말로 그 모든 것들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여러분, 이데올로기와 성경의 진리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데올로기는 그 이데올로기 주장 하나로서 도무지 성경의 비평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류로 인정되고 시정될 수 있는 모든 여지로 보이게 하고 그리고 절대적인 자리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나 교회의 의식이나 그리고 목표적인 추구의 자리에 올라가 앉는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적인 캐치프레이즈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은 그렇게 부흥을 추구한다고 떠드는 사람에 의해서 부흥이 이룩된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진정한 부흥을 맛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들을 가리켜서 신앙부흥이라고 그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된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말만 무성하고 그리고 좋은 말은 다 골라서 주워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말이 풍성했을 때에 언제든지 교회는 능력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부흥, 위대한 영적인 각성 이런 것들은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앉아서 여태까지 조국의 교회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던 마치 뒤엉키는 파도에 떠올랐다가는 물결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물거품과 같은 그런 수많은 이데올로기를 만든 인간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부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그 입에 부흥, 리바이벌이라는 그 한마디를 입에 담기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교회로 하여금 회막의 교회로 돌아가게 하는 힘을 저는 부흥이라고 정의 합니다. 부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부흥은 교회로 하여금 회막 상징의 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 곳에 집회를 다니면서 이상하게 초대교회라고 쓴 교회 간판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세울 때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면서 결국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목회자 가운데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연구대상입니다. 누구든지 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다 될 것 같으면 우리가 힘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돌아가고 싶다고 다들 몸부림치는데 점 점 점 초대교회하고는 먼 교회 모습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가 완전한 교회입니까? 무슨 완전한 교회입니까? 그 당시에도 그 속에 죄가 가득한 사람들이 있어서 헌금을 착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무지가 난무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길을 정리하도록 부른 사도들은 과부들이나 공궤하는 재정집사로 세우는 이런 이상한 일들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있었던 교회 가운데 초대교회만큼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교회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그 교회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그 교회가 될 수 있게 되었던 그 참된 원동력을 오늘 우리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러니 북치고, 꽹과리치고 현수막을 걸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여 삼창을 한다고 해서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부흥이 오는 것이면 부흥을 못하는 교회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이 모든 용어의 천박한 사용으로부터 부흥이라는 한 마디의 말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왜 안 됩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 합니다. 예수를 믿고 어떻게 헌신하고 어떻게 헌신하면 초대교회가 되고, 또 예수를 믿고 어떻게 사심을 버리면 초대교회가 되고, 또 예수를 믿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노인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알기는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되게끔 하는 것이 바로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역사를 보면 교회가 거의 완전히 가까울 정도로 신약성경으로 돌아갔던 때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될 것입니다. 1620년에 청교도들은 오직 신앙의 자유 하나를 위해서 대서양에 자그마한 범선을 타고 바다를 넘어서 신대륙에 도착하였습니다. 1620년에 도착을 했는데 1670년에 어느 목사님이 보스턴 법원에 법원장을 선거하는 선거에서 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그는 개탄하며 모든 회중들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할아버지로부터 신앙을 배웠습니다. 우리할아버지가 제가 어렸을 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청교도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서 이 신대륙에 건너 왔는데 7년을 살았단다. 그 7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 청교도들 가운데서 누구를 욕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거역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이기심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내거나, 불경건한 말로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단다,’ 그야말로 하늘의 나라가 지상에 있는 것인데 이런 때의 역사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 잠자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실컷 자는 비결을 배우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습니다. 헤겔의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는 그 말입니다. 여러분, 잠자는 수많은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없습니다. 잠자는 다수의 역사는 책을 써서 먹고사는 역사가들의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싱싱하게 살아 있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보여주었던 그 위대한 선조들의 신앙의 시대, 역사가들이 기록하기를 넘어갔지만 하늘나라에는 장엄한 기록의 장을 메워가고 있는 위대한 살아있는 교회의 역사를 오늘 우리들이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국의 교회들이 이렇게 교회가 교회되게 만드는 그것 없이는 교회가 교회 될 수가 없는 그 참된 신앙 복음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극단적으로 혐오하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이 시간에 한번쯤 그들의 입장에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국의 교회가 부흥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르고 순수하지 못한 잘못된 부흥을 추구하는데서 빚어낸 수많은 고통과 더러운 배설물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50년, 60년, 70년대 초반까지로 기억을 하죠? 있었던 그러한 부흥회가 전혀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던 그러한 모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바르지 못한 집회 속에 있는 조각난 진리를 사용하셔서라도 하나님은 그 시대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거기에는 어느 정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도 인정해야 되고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놓은 것,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우리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책임이라면 그 운동의 책임이고 공로라면 그 운동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 적으로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지난날의 세속적인 부흥의 추구를 제현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부흥과 영적인 각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반응인 것입니다. 한쪽 끝에서 펑 하고 튀기며 반대쪽으로 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 교회의 교육수준도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사람은 전부 다 고등학교이상 나왔습니다. 발에 치이는 것이 학사 학위 소지자이고 놀고먹는 것이 박사 선생님들입니다. 그러면서 고학력 사회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제 뭔가 교회가 불 떼는 것 같은 그런 것들은 그만 두고 뭔가 자신들을 차분히 가르쳐 줬으면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교회가 범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령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모든 교회에 깊이 베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로잡고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로서 남겨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다루고자 하는 신앙의 주제는 그 부흥에 있어서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오늘 한 가지만 하고 저는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무엇을 가지고 교회다워 지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흥과 어떤 관계가 있고 부흥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교회의 참모습에 대해 진지한 교훈과 도전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잠자고 있는 다수들을 통해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는 대부분이 잠자는데 자신을 할애해 왔습니다. 18세기에 위대한 영적부흥이라는 책을 쓴 존 빌리스의 책을 번역한 허쉬우스 버너라고 하는 사람의 언급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잠자는 다수의 역사만을 기록하기를 즐거워한다, 교회는 잠 자체가 인생의 행복인 것처럼 언제나 푹 잠들어 왔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눈을 부스스 뜨고 일어나는가 하면 다시 또 이전보다도 더 깊은 절망적인 잠에 빠지곤 하였다.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던 시대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보존되어 간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이 교회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 사도행전 3장에 그러니까 2장에 성령 강림했으니까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실질적인 처음 장면이 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바로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풍성한 시기입니다. 시기적으로 길기 않은 시기였지만 그러나 그 교회로부터 우리는 한없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 경건서적을 가려서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눈치 챘을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그 이후로는 왠지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심령을 움직이는 경건서적을 쓰는 작가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18세기 부흥의 시기의 대륙의 끝 무리였습니다. 그러면서 로이드존스 같은 사람은 기인이었습니다. 돌연변이입니다. 많이 읽으십시오.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교회의 시대는 어쩌면 지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완전에 가까운 부흥을 노리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2장에서 성령강림이 있고 난 후에 예루살렘교회는 괄목할만한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교회를 변혁하는데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사도들의 관심은 교회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변혁하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들의 관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신 반포 교회에 꿀이 많습니까? 왜 말이 없습니까? 그들의 관심이 무엇 이었습니까? 교회를 변혁시켜야 되겠다는 그런 운동들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냥 살았습니다. 목표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막 살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이 그냥 막 살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부흥하였고 그리고 복음은 영혼의 불빛처럼 번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순종하였고 순종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주셨습니다.
먼저 이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죄인의 마음에 각성을 일으키는 복음진리의 케리그마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기독교적인 선포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구약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가리어진 비늘을 벗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설교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심리적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고 사도들은 서슴없이 이 악한세대에서 회개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수많은 회심 자를 교회에 보내셨습니다. 부흥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영혼들을 찾아서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나갔지만 부흥이 있었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물결과 같이 교회 속으로 떠밀려 왔던 것입니다. 참된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천국과 방불한 성도의 교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읽어드린 이 성경 본문은 바로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거지를 만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적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조국의 교회가 오늘 이 성경본문의 두 구절밖에 안 되는 성경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하나님께 깨닫게 해달라고 며칠만 통성기도해도 교회는 바뀔텐데 하는 소망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느 시대든지 부흥은 구호를 외치면서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에 의해서 부흥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겸비하게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고 무릎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흥의 촛불이 밝혀졌던 사실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순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성전 미문에 앉아서 고침을 받는 이 사건이 왜 중간쯤 나오지 않고 왜 성경 앞머리에 나와 있는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겨본 적이 없습니까? 이것이 반드시 일어난 사건에 연대기적인 순서가 앞에 왔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올까요? 2장에서는 성령이 강림을 했고, 설교를 했고, 그리고 종말론적인 선포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부흥이 일어난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 2장의 뒤를 이어서 이제 교회가 그렇게 부흥으로 소유한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걸어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출발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앞부분에 이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가면 내 사역을 성령이 와서 계속 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예수그리스도 당시에 일어났던 그 수많은 병자들을 고친 그 치유의 사건과 연속선상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앞에 이 사건을 앞에 기록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이 치유의 개인적인 사건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사건이었으나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을 기록하여 앞에 둠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무엇을 통해서 참으로 교회되고 싶으신 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는 자신의 힘으로 위치를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가능한 병자였습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들어다가 걸식할 수 있도록 성전 문 앞에 두었습니다. 미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아름다운 문에 흉측한 앉은뱅이가 앉아있습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아마 강퍅한 사람이라도 성전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라도 동전 한 닢을 던져줄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많은 장소라고 생각해서인지 하여튼 그 자리를 택했습니다. 금과 은으로 꾸민 아름다운 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문 앞에 불행한 처지가 되어서 거지로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이처럼 일평생을 남의 동정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뭔가 좀 달라고 손을 내밀었던 것은 조금도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에서 도움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또 믿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그 시간을 그는 거기에서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속에서 세상의 모습을 읽습니다. 저는 이 앉은뱅이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이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오늘을 살아가야 할 하루의 생명을 부지해 줄 그 무엇인가를 구걸하고 있는 처참한 앉은뱅이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정상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종교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세상의 모습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 요구를 채워 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얼핏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조금도 누구를 의지하려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얼마나 자립심이 강한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오늘 밤에 전도지를 들고 이 환락가를 누벼보면 금방 알 것입니다. ‘아저씨, 예수 믿으세요, 아저씨의 영혼이 지옥의 불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말합니다. ‘애들은 빨리 가서 자라’ 이 세상에 소망 없음을 우리는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씩씩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씩씩한 사람이 집에 가서 고요한 밤이면 벽을 마주하고 베개를 적시는 연약함의 사연을 아십니까? 그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좋은 저녁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 술을 퍼마시고 개가 토하듯이 바닥에다 먹을 것들을 토하고 거리를 누비다가 아침에 아픈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면서 다시 술을 먹으며 다시 사람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웃으시는 분들은 수상한 사람입니다. 아무 때나 웃으면 오해를 받습니다. 여러분, 그 모든 것이 혼자 힘으로 인생을 지탱할 수 없다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세상이 강해 보일 때 사실은 한 번 복음이 그들의 급소를 찌를 때 거꾸러지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부흥의 시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핏 보면 이 세상은 자기 혼자 힘으로 신나게 잘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많은 교육을 받고 재물을 누리고 미래를 보장받을수록 더 스스로 자립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만한 세상의 태도는 어디에서든지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총집합입니다. 세상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깊이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깃들어있는 그 많은 공허함은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공허함의 총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자립심이 강하고 자신감에 차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은 혼자의 힘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피상적으로 볼 때에 세상이 무서워 보이는 것입니다. 왜? 너무나 확신에 차서 복음을 받아들일 여유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알 때 그렇게 교만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피상적으로 알 때 그 세상 앞에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신령한 영안을 열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눈을 열게 했던 신령한 영안을 주셔서 도단 성을 둘러 싼 아람 군대의 뒤에 계신 수많은 하나님의 천군과 천사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그런 영안들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이 그렇게 혼자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 곧 그들이 본질적이고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씩씩해 질 수있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지점을 여러분이 주목해 주십시오. 여러분 세상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우리는 쓸데없는 것만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그렇게 자립심 강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인생과 세상의 근원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 앞에 손을 내밀어 구걸하고 있는 거지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읽을 수 없는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그들이 알 지 못하는 그들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자신들은 인정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내면에 절망적인 모습에서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다시 찾을 생각도 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는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종소리여 내 인생을 향해서는 그칠 지어다’ 그 이야기는 하루 속히 자기를 구원해 달라는 몸부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죽었다고 단말마적인 몸부림으로 외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는 신앙고백과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세상의 강함을 읽는 대신에 허무 속에서 몸부림치는 세상의 모습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낀 손으로 무릎을 꿇은 채 사도들을 향하여 손을 내밀며 무엇을 얻을까 처참한 눈빛으로 사도들의 도움을 구하던 세상의 이 모습을 우리는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서 흘릴 눈물이 너무나 적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웃음은 늘어가도 눈물은 마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신령해 지는 것과 우정이 충만해 지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혼동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기네끼리 사교적인 모임으로 변해가는 것이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은 점점 비참한 영적인 방황의 자리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소득이 늘어가는 것이 이런 영적인 상태에 아무런 개선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가 찬란하게 꽃 피웠던 나라들의 번영을 보면서 우리들은 뼈저리게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귀하게 살고 국민소득이 3만 불 되는 것은 대통령의 기도제목일 지 모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제목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겨울에 다시 무명 양말을 신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이 조국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물같이 흐르고 공법이 하수와 같이 정의가 물같이 흐르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꿈꾸고 그리워하고 목말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은 늘어나는 재산과 늘어나는 국가의 번영을 즐거워할지라도 우리는 쇠하지 아니하고 강건하여 가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역사 속에 투사해서 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역사는 쇠하여 가도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보며 환호성을 쳤던 선지자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비관 속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르던 낙관의 역사관을 우리들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혼자 힘으로 잘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내면의 세계에서 이처럼 간곡한 탄원으로 교회를 향해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고요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들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너희여 나를 구원하라, 교회여 어찌하여 우리의 역사를 버리려느냐?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들은 정녕 조국을 잊었는가?’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못 듣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눈이 가리어져 있고 우리의 귀가 멀고 우리의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성된 심령으로 조국을 바라보십시오. 들려오는 수백만 아니 수천만 명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이 우리의 귀에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와 앉은뱅이가 그들을 주목한 이유가 같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도 요한사도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쳐다보았습니다. 멀쩡히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왜 또 쳐다보라고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주목하여 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 너는 우리를 쳐다보고 있지만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쳐다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가 사도들을 쳐다보는 눈길과 사도들이 그를 쳐다보는 눈길이 같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향해서 ‘너는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 사도가 말했을 때 사도는 근원적으로 그의 인생의 문제를 치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가 그를 주목한 것은 오늘의 양식거리,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를 쳐다 본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적선이었던 것입니다. 한 모금의 포도주와 한 조각의 빵을 살 수 있는 은화 한 닢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때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언제나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또 세상은 말합니다. 그들이 요구하고 원하는 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세상은 교회로 하여금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마땅한 몫을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언제나 요구하는 것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교회는 애처롭게도 세상의 그런 요구에 부응해 보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 서 있고 역사는 교회의 둘레에 서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구분은 될지언정 나누어질 수는 없습니다. 오늘 와서 신령한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이 잠시 두세 시간 후면 문을 나서면서 그 세상에 물결을 이루어가고 있는 한 사람의 영향력 있는 요소로서 이 세상의 한 부류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남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세상의 요구를 그리스도인들이 거절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가 놓여있는 그 시대의 요구들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 강조하신 것이 결국은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세상을 등지고 숲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팔복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 변화 산에서 당신의 변화하는 신령한 모습을 보았던 모든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게 하셨습니다. 왜? 거기가 바로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모이는 것은 잠시입니다. 여러분은 즉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착하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가 세상을 위해 부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휴머니테리안이 지향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교회에게 이렇게 묻기를 좋아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있느냐? 네가 역사 속에서 마땅히 지불해야 할 임대료를 이 세상에 지불하고 있느냐?’ 이것을 질문했습니다. 교회가 신령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때마다 세상이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complex를 느끼고 그리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이런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만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고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궁금하게 여기는 이 주제를 향한 해결의 길로 접어드는 데 아무런 답을 주지 않은 고민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섬길 수 있는 그 모든 섬김의 시작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반복 할 테니까 아멘을 한 번 해보십시오.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고통하고 자기모순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 허무한 세상의 유일한 해답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추수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세상의 비극이 끝나는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일 없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양분하려고 시도한다는 그러한 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이 여러분 중에 있으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세상의 질문 앞에서 전전긍긍해 온 교회 시대마다 영혼의 구원과 세상의 일이 통합되기는커녕 점점 양분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조국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지난 세대에 초월적이고 파괴적인 신앙 일변도에 예수천당의 신앙의 흐름은 반성해야 될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점도 곰곰이 생각하면 그들이 전도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whole gospel을 전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수많은 순교자의 뼈들이 오늘 여러분에게 사도행전 3장을 증언하고 있는 이 시간에도 강도에 묻혀있고 만주에 묻혀있고 시베리아 벌판에 썩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동토의 땅에 뒹굴면서 그들의 영혼은 천국에서 오늘 저의 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의 순교자적인 죽음과 그리고 복음 하나를 전하고 영혼 하나를 건져서 천당에 보내야 되겠다라고 하는 이 불타는 집념 하나를 가지고 때로는 박물장사로 변장하고 때로는 내서인으로 변장해서 산골과 화전민들을 누비고 동토의 땅을 누비며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생사를 걸었던 순교자적인 삶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 반성해야 될 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에 가리어진 것들을 벗겨 주셔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교회사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인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수면상태에 가까이 들어가고 현실을 파괴할 수 있는 영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릴 때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이런 쓸데없는 논쟁들이 교회에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점에 지성인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부편투표에 표를 던져야지만 지성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대륙의 교회가 경험한 바였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자신들을 위한 역할을 교회에 요구해 왔습니다. 인도주의가 원하는 바를 세상은 언제나 교회에 요구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더 나은 윤리적인 공동체인 교회인 너희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런 세상으로부터 이런 현실적인 요구를 부응하도록 그렇게 강요받아왔던 것입니다.
오늘 성전 미문에서 거룩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게 가득 차 있을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도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는 대신 그들의 자비를 통해서 오늘 하루 양식을 구해서 오늘 하루 잘 먹고 따뜻한 방에 누워서 내일도 깡통을 들고 여기에 나와서 구걸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이 일 하나에 이 거지는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을 주목하도록 그에게 촉구한 것은 단지 그의 하루 양식을 해결해 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앉은뱅이를 불러서 자기를 주목하게 만든 것은 그의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 때 굉장히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식으로 극단적일까?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이 성경의 숲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당연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탁월한 안목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평범한 성경 본문 속에서 남이 제기 할 수 없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답을 해가면서 우리는 보다 더 깊은 성경의 메시지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왜 이렇게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한 푼 주십시오.’ 하는데 불쌍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거지가 설령 구원을 받고 성령 충만해 진다고 할지라도 오늘 먹고 살아야 될 것 아니에요?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러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는 것입니다. 좀 치우치지 않았어요? 맨날 하는 이야기가 치우친다는 이야기입니다. 균형 잡힌 복음에 의하면 이런 것 아닙니까? 그 복음이 우리가 말한 복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이에요? 저처럼 우선 시계라도 풀어주면서 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시계라도 풀어주노니 오늘 저녁 자장면이라도 사먹어라 하면서 주고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하면 될 것 아니에요?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잘 보십시오. 오늘 날 사도들이 했던 방식으로 접근을 하면 대부분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저 사람은 치우쳤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는 그 놀랍게 균형 잡힌 사람들의 허한 영적인 생활을 꿰뚫어지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서 있는 반석이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우리의 구원의 영원한 반석이 그리스도예수이심을 깊이 체험하고 안 사람마다 모두 균형 잡을 수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난 시기마다 그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정말 위험할 정도로 치우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물결을 따라서 사람들이 원색적인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고 한 편의 설교는 한 사람의 피를 토하는 것같이 농도 짙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세상은 교만한 무릎을 이 복음 앞에 꿇고 그리고 이 세상의 헛된 영광 뒤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그리스도예수의 보혈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사람들은 흐느끼고 회개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교회는 부흥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면 되잖아요? 은과 금은 없다고 그러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왜 은과 금이 없습니까? 네? 그러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내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없냐? 그러면 성도들이 낸 그 연보 다 어쨌어요? 집 팔고 땅 팔아다가 모두 보따리 째 발 앞에 갖다 뒀는데 그것 어쨌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정말이 아닙니다. 은과 금이 없다는 것은 정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재정이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왜 ‘은과 금은 없거니와’ 라고 말합니까?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까? 아니 그러면 거기 있는 것이 성도들의 것입니까? 사도들이 도장 찍으면 다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없다고 합니까? 위증을 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위증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없어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과 금이 없다라고 말해야지만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것이 우리를 엄청난 혼돈으로부터 구해주는 원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거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더 이상 그들을 쳐다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하여 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은과 금이 없다고 하는 순간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던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가 바로 이 앉은뱅이에게 기대했던 바는 바로 이런 실망이었습니다. 철저한 실망, 내가 요구하는 것이 저들에게 없다고 하는 실망, 내가 바라는 것이 저들에게는 없다고 하는 그 철저한 실망, 그것을 이 앉은뱅이가 체험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 이렇게 말함으로서 사도들은 은과 금 같은 것으로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거지의 기대를 완전하게 꺾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은과 금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앉은뱅이 한 사람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담대해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은과 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담대히 말한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은과 금을 주목하는 대신에 자신들 안에 있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참 생명의 근원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주목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근원적인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유하고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기관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담을 베풀고 사회면이나 메우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귀하지 않거나 가치가 없거나 교회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이상의 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우리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슴을 저미며 슬퍼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이 땅에서 존재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일컬음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뻐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높이 들리워지고 온 백성들이 경배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백성답게 양육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로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이상은 이 땅의 모든 육체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한다는 이사야 40장의 그 예언이 교회의 이상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여호와의 다스림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 고백을 통하여 사도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로 우리의 눈을 돌리는 동시에 그의 불행의 근원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하도록 또 거지가 주목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도들이 은과 금이 없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서슴없이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한없이 부끄러워야 했을 이 이야기를 서슴없이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충만한 하나님은 은과 금이 할 수 없는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은이나 금은 단지 고통 하는 육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이 될 뿐이거니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을 때 교회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살 힘을 잃어버리고 불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참된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구의 삶을 바꾸어 놓아 하나님과 살롬을 회복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각양 은총과 기업을 누리게 함으로써 어두운 세상에서 장애물과 같은 불행의 문제를 훌륭하게 극복하며 천상의 것들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원동력을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은이나 금 같은 것들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인생에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던 시기마다 즉 하나님이 다시 깨우신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필요하여 에스골 골짜기에서 마른 뼈와 같이 교회가 생기를 잃어가고 있던 그 때 교회는 불행히도 자신의 곤궁한 영적인 상태,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것과 같은 이러한 가난한 영적인 상태를 붙들고 고뇌하기 보다는 세상에 은과 금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너희가 은과 금을 찾느냐? 우리에게도 은과 금이 있다. 너희에게 환영받는 그런 사상 우리도 싫어하지 않는다, 너희가 추구하는 가치? 교회도 동참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 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그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가 후일 다른 편지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서 한 것이라’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등져 불행한 길을 걸어가는 인생들을 근원적으로 회심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될 때에는 세상의 은이나 금 같은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 안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있고 이 세상에 모든 보화보다 귀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영적인 권세와 힘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세상에 있는 은과 같이 부서질 사상이나 금과 같이 써버리면 없어지고 말 잠시 돌릴 세상적인 성취에 대해서 눈을 돌렸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교회는 이 세상의 가치를 받아들이게 되고 복음은 빛을 잃어가고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을 사라져가고 하나님이 교회를 기뻐하시는 증거들은 사라져가고 성령은 교회 안에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환영을 받을지라도 마땅히 우리를 환영하여야 할 그리스도께서 슬퍼하고 계시는 기이한 장면이 역사 속에서 연출되어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생한 인도하심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교회가 이끌리기 보다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나 그리고 기능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지는 죽은 자와 같은 모습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예전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김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고백하며 세상에 그 모든 은과 금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피 묻은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그리스도에게 다가가 그의 발을 껴안았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교회에 들어왔는데 들어와 보니까 나보다 훨씬 지체도 높으신 분들이 자기가 교회 들어올 때 다 버리고 온 그것들을 주워 모으면서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더욱 공허해 지기 시작했고 이 세상의 은과 금으로 공허한 자신들의 삶을 메꾸어 보려고 그릇된 보상심리는 언제든지 작동을 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구원을 위한 전도를 사회를 위해서 돈 몇 푼 내는 것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그리워하며 애통해야 할 중보기도에 대한 의무를 사교적인 모임을 가지고 피켓이나 몇 개 들고 명동거리를 누비는 것으로 균형 잡힌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끝내버리고 그리고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대신 우정을 나누는 우정 충만한 교회 분위기로 만족을 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복음으로부터 멀어졌고 행사는 많아도 영적인 삶은 황폐해져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신적인 권위를 잃어버리고 세속의 정신 속에서 사람들이 세운 기관과 멤버십을 나누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각성이 필요하던 시기에는 언제나 교회는 이러한 모습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매우 뜻 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 지점에 서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멈추고 어떻게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신약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을 지 그 원동력에 대한 내면의 문제로 눈을 돌려야 될 때라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교회 자신의 수준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는 본국의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조국의 교회사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금 새롭게 위대한 각성과 부흥을 맞이해서 교회다운 교회로 변하는 것이 선교와 이 세상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커다란 각성이 필요했던 시기마다 교회는 사라져버린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적인 능력이신 그리스도예수의 부재를 애통하고 마음 아파하는 대신에, 가난한 심령이 되는 대신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내게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은과 금을 인하여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교회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예수의 판단은 정확하고 예리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과 알지 못 하는 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같이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부여 받은 근본적인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과연 세상에 은과 금으로 자기에게 부여된 거룩한 소명을 다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피 흘려 죽으셨겠습니까? 왜 많은 사도들이 어디에서나 세상을 향하여 외치기를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이 천하에 구원을 받을만한 이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가 없다고 말했겠습니까? 왜 모든 것을 다 알고 헬라의 철학을 관통하고 왜 에피큐리오스 학파의 학자들과 철학의 논쟁을 불러일으켜서 그들을 무색하게 했던 대 사도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인 사도바울이 순교를 1, 2년 앞에 두고 반백의 노사도가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반백의 머리를 흔들며 흐느끼면서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세상에 임하셨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왜 사도가 ‘내가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노라’ 그렇게 결심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워지는 것들이 무엇을 회복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은이나 금 같은 것들을 많이 모으고 부동산 등기들을 교회가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서 교회가 교회다워 지는 것입니까? 하루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해 줄 뿐인 은과 금이 아니라 고통 하는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 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각성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알려줄 만한 많은 성경구절이 있지만 오늘은 역대 하 한 장만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5장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딱 한 절 12절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였다’ 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르호보암 왕 이후로 유대의 역사는 사실 어두움으로 치달았습니다. 사실 그 어두움은 이미 솔로몬 말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역사 속에 찬란한 샛별과 같은 군주 한사람을 보냅니다. 신앙의 사람은 아사였습니다. 일평생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했다고 성경이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위대한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구스에서 일백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대나라를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이 히스기야는 그들과 가서 비굴하게 뇌물을 주고 돌려보낼 궁리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주여 어찌하시렵니까?’일백만 대군을 박살 내버렸습니다. 쫓아버렸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 일들이 유다역사가 언제 일어났습니까? 솔로몬 이후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의 어머니를 우상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태후의 위에서 폐했습니다.
대개 개혁은 서민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이 사람의 개혁은 철저하게 궁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당을 허물고 바알신상들을 깨뜨렸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두드려 엎고 시작했고 그리고 이들에게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앙의 위대한 개혁을 보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의 본거지인 이 남 왕국 유다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생겨서 귀화자가 속출 하리 만큼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일이 도대체 다윗 왕 이레 언제 있었습니까? 이 놀라운 일들을 이 교회는 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시대는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바로 선지자의 권면을 받은 이 아사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아사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백만 대군을 하루아침에 쫓아 낸 왕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를 들이대면서 사람들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놀라운 신앙의 개혁들을 인해서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깊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결단하고 백성들 앞에 나왔습니다.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결심한 것은 열조의 하나님을 찾기로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그 때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열조의 하나님을 찾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해 주실 때 어떤 위대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역사 속에서 모두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차가운 역사의 기록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온 땅 위에 열 가지 재앙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중다한 잡족들로 하여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밖에는 참 신이 없다는 사실을 각성시키셨던 위대한 하나님의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에서 물을 내심으로 말미암아 온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가대로 변하게 되는 이 위대한 역사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열조들의 감격들을 오늘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언제든지 부흥이 오기 전에는 이처럼 요즘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고 옛날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해 주실 때 일어났던 하나님의 그 위대한 일들이 역사 속에 묻혀 흘러 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믿음을 통해 재현될 수 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 교회 안에 함께 계셔야 할 그리스도가 자신들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 밖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갑자기 무의미해지고 그런 은과 금과 같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내가 너희에게 유업으로 주겠다, 그러나 내 사자하고 가라 난 안 간다.’ 그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그 말씀을 인해서 슬퍼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인 각성은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은과 금이 의지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오다가 어느 날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위대한 시대와 성경의 약속을 돌아보며 사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믿었지만 어느 날 미련한 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분별력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눈 먼 자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평범하게 운영되어 오고 그 안에는 언제나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움직임이 그치지 아니하였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동기와 힘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그의 경외하심과 그리고 그의 통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진실한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땅 고쳐주시옵소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각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수많은 증거들을 이전에는 환경의 탓으로 알았던 연일 패배하는 영적인 삶속에서 전투적인 의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패배를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강한 반발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생활로부터 탈영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따라다니는 은총의 표징들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이제 그는 이미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진액을 모두 쏟아 붓기까지 수고하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완전히 썩어 없어져야 할 존재 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의 존립과 자기의 이름을 세상에 내 놓는 것에 헌신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하는 것 사이에 구별이 흐려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애통해 하는 중보의 사명을 하는 대신에 사교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거룩한 슬픔은 세속적인 즐거움에 의해 척출되고 경건한 고민은 균형 잡힌 믿음이라고 하는 미명하에 경박한 낙관에 의해 구축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잠들어 있는 교회의 시대는 언제나 그러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선지자들은 언제나 교회로부터 먼저 핍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경외하고 각성된 설교자들이 교회의 동역자들에 의해서 매도되었습니다. 그리고 치우쳤다고 매도당하고 강단을 패쇄 당했습니다. 이단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꿋꿋하게 살아갔습니다. 진리가 그들을 움직였는데 누가 그를 막을 것입니까? 하늘의 기운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을 뒤흔들었는데 이 세상에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진실로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복음으로 움직인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죄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을 했던 위대한 사람 마르틴 루터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불의를 인하여 애통해 하는 대신에 그 전에 먼저 그는 비텐 베르그 대학에서 고요히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말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로마서를 읽어가고 있는 가운데 하늘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찬란한 진리의 빛이 내 심령 속에 파고들었고 그 진리의 빛은 성경의 위대한 물줄기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환희의 기쁨 속에 목 놓아 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개혁이 불길을 지펴가자 젊은 황제는 그를 유명한 보름스 의제에 그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마르틴 루터 이 시간 부로 내가 황제로서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너의 종교적인 주장을 철회하라’ 마르틴 루터는 그 때 유명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는 내가 어찌할 수 없사옵나이다. 오 예수여 나를 도우시옵소서.’ 그를 거기에 세운 것은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백 번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세운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를 세운 것은 진리였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진리에 충성하고 진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적인 강제력이 그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피 묻은 복음 이외에는 이 민족의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끊어짐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못 박혀 죽은 것 외에 이 세상에서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거룩한 영광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찬란한 복음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복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 때 교회는 세상을 향한 선포를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교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설교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웃지 못 할 일들이 일어납니다. 왠지 압니까? 먼저 합리주의가 일어나고 난 후 사람들은 교회가 십자가만을 설교하는 것을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회 정화에 관하여, 학원탄압에 대한 대책, 이런 것들을 설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먹을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마지막에 조국 강단의 모습이 어떻게 타락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왜 장가를 안 드셨을까? 그것이 중요한 설교제목이었습니다. 감자를 먹는 문화의 말할 수 없는 축복, 감자 먹는 방법에 대해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비브리칼 한가? 이런 것이 성경제목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교회는 피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설교단은 영광스러운 복음의 선포를 대신하고 그리고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18세기에 부흥을 경험했던 프란시스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송)
이 백성 기도와 또 예물 드리니 경배와 같으니 곧 받으옵소서
주 예수 크신 복음을 주 예수 크신 복음을 만백성 듣게 하소서
오늘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고백한 사도들의 담대한 단언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늘에 계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위대한 능력이시며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누구입니까? 꼭 입헌 군주국의 왕과 같지 않습니까? 아침이면 한 번 찾아가서 인사하는 아무런 실권은 없고 주는 밥이나 받아먹고 형식적인 예우나 해주는 그런 입헌군주국의 왕과 같은 것이 오늘날의 Lord ship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불신앙의 풍류와 하나님에 대한 회의주의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킬 것입니까? 거칠게 밀려오는 이 세상의 파도 속에서 어떻게 교회를 보호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점점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하나님의 자신으로 충만하여 지고 그리스도예수로 가득해 질 때 교회 속에 찾아오는 내적인 변화는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반드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속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되고 그리고 그 편만한 권세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만이 이 세상 속에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즘 하나님으로만 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열조의 하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하나님, 이 동강난 조국교회사 속에서도 순교자를 내었고 그리고 소똥에서 우러나오는 콩 깍지를 주워 먹으면서 만주에다 교회를 개척했던 그 신앙의 선조들의 피나고 불굴의 의지의 사욕들을 우리는 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밖에 몰랐던 그 선조들의 위대한 신앙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그 열조의 하나님을 지금이야 말로 그리워 할 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기독교가 성경의 진리를 파수하는 것은 이제 편협한 종파주의자들의 교조주의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것은 아까 말씀 드렸듯이 균형을 잃어버린 무식한 그리스도인들이 취하는 신앙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학사 학위 이상을 갖고 교육을 받고 강남에 내 집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hole gospel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도 팔아주고 배추도 팔아주고 바자회도 하고 여러분, 아닙니다. 원수의 공격이 사소할 때에는 하나님 없이도 그 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엄습함이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영적 전투인 상황에서는 승리의 깃발을 세워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임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각성시키시므로 진리를 위한 교회의 진군을 확신 있게 하시고 부흥을 주심으로 교회를 권세 있는 공동체로 세상에 드러내심은 이 부흥이 지금이야 말로 절실한 것입니다. 결국은 서로가 ‘너는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 이렇게 말 한 다음에 과연 해 주었습니까? 못 해 주었습니까? 그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어 버렸습니다. 그는 나았습니다. 이것은 치료 이상의 사건입니다. 뛰었습니다. 그리고 걸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다리를 만지며 의심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인생 속에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세상에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 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걸어보았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꼬집어보았습니다. 생시였습니다. 누구도 가르쳐 준 일이 없는데 그는 어눌한 목소리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시옵소서.’ 찬송을 하고 성전을 뛰어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전도훈련을 받지 않았는데도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외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불이 그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아 보라, 그리스도가 나를 살리셨다, 그가 나를 찾아오셨고 그가 나를 고치셨다’ 주님의 이름은 높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저는 이 위대한 일들이 언제 일어났는지 여러분의 주위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언제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3장 1절을 들여다보십시오. 같이 읽어봅시다.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그렇습니다. 그들이 소망이 없는 앉은뱅이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그리스도, 세상을 향한 하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 준 것은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러 교회에 올라가고 많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도하러 올라가던 그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시간이 아니라 이 시간에 이 사건이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3장 1절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들여다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안광이 지배를 철하도록 1절을 주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경을 쏘아보다가는 급기야는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노려보시기까지 우리는 성경본문을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들은 누구였습니까? 신령한 것으로 말하자면 오순절 성령의 불길을 체험한 사람들이었고 이력으로 말하자면 한 번 설교로 3천명을 회개시킨 대 사도들이었습니다. 교인 수로 말하자면 성공한 교회였고, 교인의 질로 말하더라도 그들은 형식적인 신자가 거의 없는 교회였습니다. 교회 재정으로 말하자면 어느 장로님 말씀하듯 ‘우리교회 재산이 얼마야?’ 물어볼 때 거의 모든 사람이 ‘몰라,’ ‘왜?’ ‘너무 많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가 서초동의 땅, 방배동의 건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재산들을 성도들이 기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 교회 지도자는 자기의 목회적인 성공에 만족 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목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주목하기 위해서 기도시간이 되자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절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쁜 생활 중에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했고 회심한 성도들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일에 전혀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특별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TV 보는 시간이 많습니까? 아니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일간지를 보는 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까? 성경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까?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신문을 본 내용이 머리에 더 기억에 남습니까? 설교를 들은 내용들이 더 머리에 남습니까? 물어 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헛되고 허망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해 냈는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역사를 잃어버렸을 때 그들이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땅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인도해 내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날개에 업어 나름과 같이 어떻게 그들을 업어 날랐으며 바산과 시온의 옥을 깨뜨리고 그들을 거꾸러뜨리고 그 어둠의 세력들을 무너뜨리고 여리고 성을 허물어뜨리고 요단강을 말리시며 가나안까지 들어오게 하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잃어버린 순간마다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사기와 기만으로 하나님을 농락하였던 것입니다. 웃음과 함께 절규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우리 앞에서가 아니라 우리 뒤에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었던 그 위대한 일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지나간 푯대가 있었습니다. 돌아다보면 매일 수밖에 없는 그 푯대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앞에 것만 바라보고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까지 드리게 하셨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곤궁할 때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통하며 선택의 기로에서 몸부림치면서 고뇌 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말씀을 펼 때 그 속에서 만나를 준비하시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눈빛으로 여러분이 선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최악의 경우에 분명히 이정표가 그리로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여러분이 범죄 함으로 그릇된 길로 들어섰을 때 하나님은 영원히 잘 가라 손 흔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잘 못 간 그 길, 골목까지 쫓아가서 가슴을 풀어 헤치시고 젖을 여러분의 입에 물리셨습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서 오늘 여기에 앉아서 이름 없는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이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피나는 사연이 있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피나는 사연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도 여러분의 인생과 함께 피 흘리면서 여러분과 동행 해 오셨습니다. 그 분밖에는 아무도 여러분과 함께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 분밖에는 여러분과 동행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간구와 소원을 계속하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박한 기도로 시간을 때우며 가난한 영적인 삶을 근근덕신으로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경박한 기도, 짤막한 기도 속에서 온갖 신령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취침자리에 들어서 5분, 10분 짤막한 기도로 영적인 삶을 땜질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인 한 교회는 근본적인 변혁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학생이 저한테 ‘묵은 땅을 기경하라, 벧엘로 올라가자’라는 책을 읽고 저한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심히 애통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 앞에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써있었는데 그 교회에 가 보니까 어두움이 내리자 그 교회 문은 굳게 잠기고 그리고 그 교회 문을 잠군 열쇠는 미제였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그 교회 문에 써있는데 제가 그 교회 문을 두드리니까 들리는 것은 경비병의 호루라기 소리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두움이 깔린 오늘날의 교회 형태입니다. 여러분, 각성의 때, 각성이 임박한 때에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물 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찬 교회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그런 교회의 출현인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무명의 설교자가 여러분에게 절박하게 외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밝은 얼굴과 웃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하기를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살아있는 것은 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처럼 타오르면서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보배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정죄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십자가 앞에서
(찬송)
보재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예수를 위해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세상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한 내가 세상을 대하여 거룩하게 된 이 십자가의 만남에 대한 사건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신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을 위해 서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인간에 의해서 조작된 부흥으로 이 모든 사태들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와서 우리들을 깨우치고 우리들을 알게 하고 우리들을 무지 속에서 건져내고 어두움 속에서 우리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눈에 가리운 것들을 벗기는 각성이 있을 때 우리는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춤추고 노래 할 때가 아니라 가슴을 부여안고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예수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해야 될 것입니다. 우십시오. 애통하십시오. 가슴을 치고 떠나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다스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혼이 떠나간 것을 인해서 고통하며 기도하십시오. 잠시 후 그 눈물을 여러분 스스로가 서로를 닦아 주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부흥과 함께 여러분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닙니다. 잠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영적인 각성과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위하여 잠자는 다수를 깨우며 기도해야 될 때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큰 소리로 대답해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 되는 것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을 준비한 그 지혜로운 처녀도 미련한 처녀와 함께 다 졸며 잤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보라 신랑이로다’ 외치는 제 3의 소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각성은 항상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 아니하시고 각성된 사람을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흥은 각성된 사람의 고열을 짜내는 기도와 몸부림 속에서 여명의 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지자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들은 춤추던 시대에 흐느꼈고 노래하던 시대에 통곡하였습니다. 복음을 기뻐하지 않은 이 도시 속에서 우리는 조국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탄원으로 모든 사람이 그 분 앞에 나아가는 참된 각성을 기다려야 될 때인 것입니다. 여러분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텔레비전에서 그들의 선거 유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까? 어떻게 한 사람을 환영하기 위해서 4백만 명의 인파가 모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구한테 무엇을 받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누구한테 무엇을 받고 왔어도 기이한 일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준다고 해도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였습니다. 그리고 손에 손에 태극기 깃발을 흔들고 그리고 아무개, 아무개, 하며 이름 석 자를 외치며 연호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설교자로서 주먹을 쥐었습니다. ‘오, 하나님, 이 텔레비전을 좀 보시옵소서. 이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사람의 이름 석 자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데 그 모인 모양이 물결과 같사옵니다. 주님, 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마라도에서 아오지까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도회지 방방곡곡에서 ’예수 우리 왕 이곳에 어서 오시옵소서 보좌로 임 하사 우리를 다스려 주시고 이 땅을 통치하소서. 주님이 다스림이 우리의 즐거움 이옵나이다‘ 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깃발을 흔드는 날을 이 두 눈으로 뵈올 수 있도록 이 민족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만드신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주님의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는 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예수께서 오늘 이 강남에 30억씩 술값을 지불하고 끝난 다음에 여기저기로 몰려가는 그 비참한 군중들을 보시며 어떻게 웃으시면서 이 강남의 거리를 지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나라의 문화를 한국교회에서 서울이 선도합니다. 서울의 모든 지성인이 강남에 모여 있습니다. 서울의 모든 문화를 강남에서 창출해 냅니다. 그런데 그 부패한 모습이 강남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교회에서 제일 큰 교회는 강남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탓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오로지 부흥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그의 영광을 높이는 모든 일에 소망을 두게 했던 것 그 참된 부름과 위대한 영적인 각성을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선조들의 교회에 베푸셨던 그런 위대한 부흥을 우리시대 교회에도 주시도록 매달리며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각성과 부흥의 영적인 축복이 없이는 조국의 교회가 교회사에서 한 발짝도 옮겨 놓을 수 없을 것 같은 처절한 절박함과 열망으로 하나님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되도록 우리 눈을 고정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조국의 교회에 참된 영적인 부흥을 주시지 아니하신다면 우리들이 기도를 하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을 수 없게끔 하나님 앞에 간구합시다. 그러한 목마름과 부르짖음으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거절하며 마침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대저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아오지 탄광으로부터 마라도 앞바다까지 기독교 되는 영광스런 날이 이 땅에 하나님 앞에 탄원합시다.
그리고 이 강산에 넘쳐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미국으로 그리고 우상의 나라 일본으로 그리고 죽음의 장막 중국을 넘어서 죽은 자와 같이 잠들어 에스골 골짜기와 같이 되어버린 유럽을 휘돌아서 대한 해협에서 만나는 위대한 선교의 비전을 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부흥이 있기 전에는 역사의 어두움이 짙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역사가 너무 어둡고 비관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슬퍼하면서 시간을 보낼 그런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것입니다. 기대를 걸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역사도 교회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흥이 있기 전에 역사의 어두움은 더욱 짙고 그리고 교회사의 질곡은 도를 더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이름 하나에 매여서 아침의 개벽을 기다리며 흐느끼는 기도로 그 고통스러운 역사의 밤을 지났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흥의 새벽 빛 하나에 소망을 걸고 가을에 피기를 바라며 봄철부터 흐느껴 울었던 소쩍새처럼 흐느껴 울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흥의 새벽빛이 황폐한 교회의 뜨락까지 찬란하게 비쳐오기까지 항상 그 어두운 역사의 한 밤중을 뼈를 깎는 기도, 살을 떼어내는 고통스러운 중보기도, 피를 말리는 몸부림의 기도로 어두운 밤을 지켜온 교회사에 기록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저의 설교를 경청하는 여러분이 바로 그 소수에 속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자신들의 가슴 저미는 열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들은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열조의 하나님의 시대가 어떠한지를 알게 하셨고 영광스런 그리스도가 함께 동행 하는 삶이 어떠했는지 그들 속에 체험하게 하셨는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어떻게 그들이 간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운이 그들의 심령을 흔들어 지존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그 골수에 불이 사무치게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신 이외에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각성한 소수로서 그렇게 부흥의 새벽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바로 그 때인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를 해 주시겠습니다. 주악에 맞춰서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한 번만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기도 할 때 ‘주님 우리의 곤궁함을 일깨우시옵소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고치시고 살려 주시옵소서, 은과 금 다 가져가시옵소서.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 같이 한 음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