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으로 떨게하소서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사 64:2 下)
녹취자 : 이시내
선지자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강림하시고 그래서 산들을 진동시키시며 불이 섶을 사르고 불이 물을 끓임과 같이 그렇게 확연하게 역사해주시도록 구하였습니까 그것을 2절에서 두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는 것과 그리고 이방백성들을 향해서 떨게 하는 것 그 두 가지를 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대적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고 열방으로 하여금 떨게 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사실은 히브리작문법에서 보면 중첩되는 병행구절입니다. 대적과 열방이 짝을 이루고 알게 해달라는 것과 떨게 해달라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슷한 의미로 중첩되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 무지한 인간과 이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은 그 무지 때문에 멸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는데 그 근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복된 백성들이고 이미 그 하나님을 알고 있는 백성들은 더욱이 축복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조금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고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믿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과 당장 오늘 누리며 살 수 있는 육신의 평안이 그들에게는 가장 커다란 관심거리입니다. 그들은 영원의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이 없고 그들의 생각은 오직 감각적이고 탐욕적인 것에 집중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즐겁게 해볼까 몸부림치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즐거움이 끝난 후에는 그 즐거움보다 더 큰 허무와 고독 속에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 세상의 실정인데 세상은 도무지 그런 자신의 불행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돌이켜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놓기 위해서 우리는 애를 씁니다. 때로는 인생의 이치를 예를 들면서 신앙을 설명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해도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상의 것이 있으니까 한번 나와 보라고 그들에게 선전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 교회가 애를 쓰고 뭔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교회에서도 접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것들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 교회의 노력을 우리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어쨌든 무관심한 그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어찌하든지 의문을 갖게 만들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어야지만 그들이 정말 변화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희망이 없는 인간이고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죄 가운데 있고 자신들이 그렇게 죄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눈뜨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줘도 그들에게는 전혀 기쁜소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쓰고 애써서 복음을 전하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주님을 바르게 믿는 신앙의 참된 행복을 전파하려고 애쓰면서 어떤 때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열매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좌절할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악된 어두움 속에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누군가가 가르쳐주어도 믿지 않으려고 각오를 한 완강한 불신앙으로 가득찬 세상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삭을 줍는 것 같은 우리의 이런 보잘것없는 노력으로 언제 이 세상이 복음화 될 수 있을까 하는 답답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누가 전한 복음처럼 그렇게 위대한 능력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이 우리의 전도하는 말이나 설교를 듣고 거꾸러지는 일이 없어도 우리는 열심히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10명이 듣지 않고 한명이 들어도 우리는 듣지 않고 돌아선 9명을 기억하지 말고 우리에게 복음을 듣고 무릎을 꿇고 주님을 만났던 한사람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그 한사람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투자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쉽게 가르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 진리를 전하여 주를 경외하는 백성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탐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 정말 괄목할만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가 위해서는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능력 있는 역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온 땅을 뒤흔들어 산을 뿌리째 뽑고 그리고 온산에 붙은 불처럼 복음의 불길이 번져가고 그리고 타오르는 불길 앞에 그릇에 담긴 물이 속수무책으로 끓어오르는 것처럼 저항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복음의 편만하고 위대한 승리에 우리들은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승리가 일어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백성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아는데 왜 그 열방의 백성들이 떨게되느냐 그것은 간단합니다. 여기서 이 떤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떠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두움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좋은 대로 인생을 살았고 그리고 자신들이 자기의 행동의 최고의 판단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고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그것에 의미가 있는 그런 인생을 산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뜻이냐 하면 그렇게 신앙이 없고 하나님을 거스려 살던 사람들조차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서있다라고 하는 그 저항할 수 없는 느낌을 갖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이야기 하나님에 대해서 스쳐가는 소문처럼 들었을 때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강한 권능이 나타나고 주님자신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되자 그 빛에 비추면서 자기가 바로 자기를 창조하고 이 땅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위에 있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은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함께 가지고 옵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임할 때에는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거나 항상 즐거워하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수많은 죄인과 열방의 수많은 백성들이 두려워 떨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물을 말리면서 가나안에 들어섰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가나안땅에 있었던 수많은 원주민들의 가슴이 물같이 녹아내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임재를 죄인들이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그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이 부흥에 대한 경험이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기쁨과 영광스러움과 신령함의 경험이 되지만 하나님과 올바르지 않은 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들은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에 대한 균형잡힌 생각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을 아주 두려워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부흥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나님에 대한 아주 새로운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잘 들으십시오 아무리 성경을 잘 배우고 설교를 듣고 그렇게 해도 하나님을 대면하는 만남이 없이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면 차가운 개념만 살아있을 뿐이지 진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설교를 듣고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항상 기도하면서 잊지 말고 기도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배우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모두 머리 속에 머무는 관념의 것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은 글을 읽은 사람이 사랑을 잘 알겠습니까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아서 삶과 죽음사이를 오갔던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더 잘 알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성경의 지식이 있고 그 위에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들이 겸비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항상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부흥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경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이런 것들은 모든 교회에 항상 충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이런 경험이 멀어지고 나면 우리의 신앙은 결국은 지식으로 대체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체험이 그치고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는 심령의 강력한 부흥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 성품 때문에 감격하고 그 성품에 대한 경험 때문에 그 하나님이 정말 위대한 분이시라고 하는 그 찬양과 감사가 터쳐나오는 일들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제일 먼저 이미 하나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부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자신들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잠시 세상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자신과 교회를 향해서 집중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아 알면서 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임박하게 자기 앞에 미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자기들 모두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실뿐이라고하는 그러한 생각 속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불현듯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있고 자신들의 신앙이 잠들고 있거나 혹은 죄악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고통을 주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해 심판하실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러한 대목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부흥을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부흥이라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그 부흥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흥의 본질적인 차이가 바로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 자신의 죄로 인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대면할 때에 느끼는 떨리는 두려움 이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참된 부흥과 거짓된 부흥의 아주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만나면 그런 이야기 하지않습니까 요새 어떻게 교회가 좀 부흥했어? 사실 이런 질문이 말이 됩니까? 부흥이면 부흥이고 아니면 아니지 좀은 또 무엇입니까? 부흥이라는 말을 아무데나 쓰면 안됩니다. 그건 또 좀 낫습니다. 요즘 별로입니다. 부흥을 좀 일으켜봐 이 사람아 다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누가 열린 교회 좀 부흥했어? 이렇게 물어보면 아니요 조금 성장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맞는 말입니다. 참된 부흥과 오늘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편에서 이야기하는 부흥은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장을 하는 것도 꼭 그런 어떤 뭐 이렇게 교회사 속에서 몇 번 나옴직한 어떤 그런 강력한 부흥이 아니면 교회는 이 땅에 교회될 수 없다 그런건 아니라고 제가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런 부흥을 못본채 수명을 끝냅니다. 그리고 어쩌면 제가 이렇게 설교하면서도 예전에 한번 그런 부흥을 봤지만 그러나 또 못볼지도 모릅니다.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성장이라고 해도 다 같은 성장은 아닙니다. 사람이 늘고 교회재정이 풍부해지고 자녀들이 많아지고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외적으로 이렇게 어떤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진짜 그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많아지니까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든지 늘리든지 이사를 가든지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외관상으로 변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이 많이 늘어나니까 교역자도 늘어나야 되고 직원도 늘어나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직원이 늘어나고 교역자들이 늘어나니까 차도 많이 늘어날것 아니겠습니까 돈도 많이 쓰게될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서로 비교를 하고 재봅니다. 일 년에 돈은 얼마나 쓰냐 뭐 얼마나 들어오느냐 직원들은 몇 명이냐 일꾼들이 몇 명이냐 성도들이 몇 명이냐 세례는 몇 명을 주었냐 뭐 등등의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외적으로 커지는 것들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성장이 다 똑같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성장의 질도 엄청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떤 케이스에서는 진짜 이렇게 놀랍게 외적으로 성장하고 부흥은 아니더라도 외적으로 팽창된 규모로 교회가 발전합니다. 또 한쪽에서도 발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러한 성장이 질적으로 어느 교회의 성장이 성경에 가까운 성장이냐고 이야기 할 때에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부흥의 때에 경험하는 것 같은 그런 어마어마한 인식은 아니더라도 함께 모였을 때에 교회가 이루어가는 성장의 기반이 함께 모였을때에 함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부흥의 정도는 아니라고 할찌라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으면서 그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두려움을 개인적으로라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고치고 그 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자기부서짐이 있는 성장이냐 그런 것이 없는 성장이냐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회사에나 나옴직한 그런 강렬한 부흥을 보면서 성장한 교회의 모델을 현재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제는 순수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상한 성령의 역사들입니다. 죄에 대한 심오한 회개와 가책이 없는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그 백성들이 거룩하고 신령한 체험들을 하지만 그 체험에 매달린 신앙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진리위에 쌓아져가는 그런 거룩한 기독교 사상이 공존하는 그러한 성장 이런 것들을 정말 볼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우리에게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때에는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이라기보다도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차선은 무엇이냐면 부흥이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편만한 부흥의 역사가 오지 않는 때에라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교회가 무엇으로 교회되는지를 성서를 통해서 점검하고 그리고 그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어떤 것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지를 생각하면서 그 성경의 원리에 충직하게 따라가는 그런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만약에 그런 충실한 성경의 원리를 따라가기 위해서 양적인 성장이 지장을 받는다던지 포기를 해야된다던지 할 때에는 아까워하지 말고 포기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하면 누룩이 순수하면 그 누룩을 많이 만드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가루서말에다 놓고 누룩을 뿌려서 덮어놓고 내버려두면 전체가 누룩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 놓아두면. 그러나 소수인 작은 양의 누룩의 순도가 문제가 되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반대의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 말의 가루가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줌의 누룩의 순수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부흥을 주시기 전에라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막사는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성경이 참된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고 있고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다라는 이 지식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체험에 관계한 지식인가 아니면 차가운 관념인가 만약에 우리에게 정확한 지식들은 있는데 그 지식이 깊이 우리가운데 체험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체험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높이고 경배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할 것같으면 그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가지고 아주 깊이 진실로 고민을 하고 그리고 그러한 각도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들이 끄덕끄덕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부흥이 일어나면 우리의 오금이 부딪쳐서 소리가 날정도로 그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우리 죄가 얼마나 크고 그리고 우리들이 그럴듯하게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가증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싶어하고 그럴 때에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돌이켜달라고 하는 간절한 참회와 탄원들이 터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직면하게 됩니다.
두 케이스를 한번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907년에서 평양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 당시에 길선주 목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원래 길선주 목사님은 도사였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나고 장로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는데 그날 거기서 강하게 설교를 하니까 길선주 목사가 딱 서서 설교를 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에 하나님의 신이 그 교회당에 충만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거기 올라섰을 때 그의 얼굴은 불 붙는 것 같았고 모든 교인들은 그 길선주 목사가 자기만을 쳐다보면서 설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너무 무서워서 일어나서 교회당을 뛰쳐나가 거리를 헤매다가는 밖에 나가니까 더 무서워서 다시 교회당으로 들어와서 도망나갔을 때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정인로라고 하는 장로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의 얼굴은 불붙고 있었으며 그는 평소의 길선주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곧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때 강한 두려움이 임하는 그러면서 사람들이 말로는 사람들을 어떻게 협박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 깃드는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권세 그 권세 아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주 정확하게 선포되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앞에 있고 우리는 스스로를 감출 수 없다라고 하는 강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의 빛 앞에서 처음 받는 느낌이 무엇이냐면 불 붙는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사랑은 나중의 문제입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제가 아주 깊이 존경하는 분이고 저의 설교사역에 큰 영향을 준 분인데 종교개혁이전의 설교자 15세기에 이탈리아의 설교자 기롤라노 사보나놀라입니다. 그 사람이 설교할 때에 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으니까 얼마나 타락했겠습니까 굉장히 타락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청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어린소녀를 사랑했었는데 시련을 당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 사건을 통해서 이 소년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시고 그리고 만나주셔서 이제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마르코라고 하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변화를 받고 가보니까 개판입니다. 그 당시에 수도승이라고 하는것은 오늘날의 사이비종교의 비리를 능가할 정도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혼자 조용히 속된 세상을 떠나서 수도나 할려고 생갹했는데 벌써 워낙 탁월하니까 영적으로 그리고 성경 66권을 거의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워낙 탁월하니까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일개 수도사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너도나도 와서 그 수도사에게 와서 성경 가르쳐 달라고 하고 수도사들만 오는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수도원 담넘어서 와서 성경 좀 배우자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굉장히 타락했습니다. 교황부터 시작해서 속속들이 다 썩었던 그런 상황에서 카톨릭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카톨릭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면서 청결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외쳤는데 다행히 이 사람은 약간의 신비주의적인데는 있었지만 성경이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옳지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차 없이 공격하면서 설교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황당하게 생각했던 장본인들이 로마 카톨릭이었습니다. 그때 제 기억으로는 6세였습니다. 교황이었는데 사생아가 열두명이나 되는 그런 아주 부도덕한 삶을 살고있고 그렇게 나은 애들을 또 교회에 고위 성직자로 임명하기 위해서 애를 쓰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가차없이 공격했고 심지어 그 교황을 짤라야된다고 했습니다. 중세시대에 그랬으니까 그 사람은 죽으려고 목을 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황을 짤라야 된다고 편지를 써서 유럽에 있는 전 제후들과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생명을 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고 직전에 교황이 물었습니다. 사보나놀라가 왜 저렇게 설치고 다니냐 그랬더니 빨간 모자 하나 씌워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랬습니다. 빨간 모자가 무엇이냐면 추기경입니다. 예전에는 추기경이면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은밀히 밀사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사보나롤라에게 당신 가만히 있으면 우리 교황이 빨간 모자 하나 준다고 하더라 추기경 시켜준다고 하더라 그랬더니 사보나롤라가 마침 내일이 내가 설교하는 날이니까 예배시간에 설교를 통해서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할테니까 듣고 가라고 그랬더니 멍청한 심부름꾼이 거기서 눈치도 없이 내일은 뭐 좋은 소식을 주겠거니 하고 기다렸다가 그 다음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두어모 교회당에서 설교했는데 지금도 플로렌스에 가면 두어모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세시대에 어느정도였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다 물뿌리고 예식하는데 거기서는 복음이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설교가.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기위해서 몰려오는데 예배가 시작되기 1시간 반 전에 문을 닫아야 했답니다. 도저히 들어올 수 없어서. 못 들어온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면 밖에 새카맣게 모여서 설교시간에는 쇠창살을 붙들고 거기 매달려서 설교를 들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회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할 때 그가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그때 사형시킬 때는 항상 하얀 모자를 씌우고 목을 자르는데 목을 자르면 그 목이 떨어지면서 피가 확 쏟아지면서 하얀 두건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은 그 순교의 모자이지 그 예쁜 추기경의 모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 중세시대에 복음이 거의 가리워져 있던 시대에 그 엄청난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위해서 모였다는 것도 기이하지만 모인 그 사람들이 그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를 느낀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그런 것 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플로렌스 시민들이 그 두어모 교회당에서 외치는 그 권한으로 가득 찬 설교자의 외침을 통해서 들은 메시지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메시지였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죄악에 가득 찬 너 플로렌스여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진멸하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진노의 메시지를 외칠 때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여튼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쇠창살에 매달려서 회개를 했다고 하니까 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전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눈뜨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선지자가 열방을 떨게 해달라고 열방을 두려워 떨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결국은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진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을 아니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의 백성들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겨우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겨우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방자한 삶을 살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숩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떨고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살면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떨지 못하는 자신을 인해서 불안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감격해 하고 있는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뭔가 자신들에게 불안한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이 얼마나 요동도 하지 않습니까 바닷가에 서서 절벽 끝에 한번 서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파도가 때려서 그 절벽이 깎여나가겠습니까 수없이 수천년 수만년 파도가 치고 밀려 닥쳐도 보십시오 바닷가에 서있는 돌멩이 오천년 일만년이 지나도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내에서는 뭐 바쁘고 여러 가지 기능이 있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니면 구원도 없고 용서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밖에는 없는 이 세상이 전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우리는 힘을 다해 애를 쓰지도 않거니와 설령 힘을 다해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설복시켜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기에는 불가항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찬양)
비추소서 주님의 영광 온땅위에 부으소서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전하소서 빛되신 주님 말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리고 그 땅위에 넘치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 죄인들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 거기에 깊이 감격하게 만드는 해일과 같이 땅을 뒤덮는 이 놀라운 권세는 많이 애쓰고 노력하는 우리의 힘을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필요합니다. 정말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알고 저 사람들은 모르는데 우리의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저들에게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할 수 없을 때 그때 우리는 힘껏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전하면서도 항상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찬란하게 비취는 하나님의 빛. 지금도 이제 기억을 합니다. 어렸을 때는 툭하면 전기가 나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애들이 참 핑계거리가 학교 가서 너 왜 숙제 안 해왔냐 하면 선생님 어제 우리 동네에 불나갔습니다. 요새는 불나가지 않는데 불 많이 나갔었습니다. 그럼 그냥 엉긍엉금 기어다니면서 성냥 찾아서 불을 킵니다 촛동강 하나해서 이렇게 들고 말입니다. 밥 좀먹고 무엇을 좀 할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좀 있다 전깃불이 확 들어오면 그 빛은 아무 쓸데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어두우니까 우리라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게 하고 어떤 사람은 몇 시간씩 붙들고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면 그냥 일러주고 깨우쳐주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다 우리가 알려줄 수 있겠으며 우리가 다 알려주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그런 한계를 느끼면서 우리들이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한순간에 찬란하게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계속 죄 가운데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는 사람들도 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진리에 대한 증언인데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지막 대안은 무엇이냐면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진짜 부흥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이제껏까지 전한 내용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오금이 부딪쳐 떨리는 두려움 속에서 깨닫게 되던지 지옥으로 가던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그렇게 멸망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족과 사랑하는 동포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주님의 이러한 부흥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언젠가 한번 주님께서 강하고 급한 바람과 같이 우리위에 오셔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그런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런 부흥이 임하고 나면 그러면 사람들을 변화 받게 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툭 치면 추르륵 떨어집니다. 지금은 툭치면 일어납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강하게 터질 것 같은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터질것 같은 마음이 되고 마음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아니 집안에 귀신이 들어와도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는데 주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데 이 자리가 어떻게 구별된 자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일정한 공간에 딱 들어설때 강하게 영적인 힘이 느껴지면서 자기가 어떤 권세 아래로 들어가는 그런 경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회개가 나온다던지 견딜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던지 아니면 두려움으로 가득차서 그 공간에 딱 들어왔는데 형언할 수 없는 평강이 확 밀려온다던지 하는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의 임재의 기운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깊이 경험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곧 누르면 터질 것 같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준비됩니다. 그러면 소리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잘 듣는데 왜 소리를 지릅니까 우리교회에서 소리를 않지르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잘 들으니까 듣는데 왜 소리를 지릅니까 천천히 이야기해도 알아듣는데 사람들이 그 말씀 앞에서 와르륵 무너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이상하게 마음에 강한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두려움 혹은 여러 가지 감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을 하고 주님의 도움을 갈망하게 되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놀랍도록 그 말씀을 빨아들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불현듯 눈을 뜨게 되고 그 비치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진노가 임박해 있다라고 하는 큰 두려움을 느끼는데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제 열렬하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선지자가 기도하고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러 나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보면 알지만 정말 준비된 영혼들이 너무나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접은 했지만 교회는 안나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는 듣는데 정말 가슴에 깊이 새겨져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칼이 들어가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 부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인격과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되고 이것보다도 더 뛰어난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영적인 축복을 기대하면서 그러면서 진짜 하나님이 이제껏까지 우리들이 경험한 것이 이슬비와 같은 그런 축복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소낙비와 같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얼마전에도 비가 왔습니다. 지금 엄청 가물었습니다. 성냥불만 그어대면 그냥 불이 막 붙을 정도로 그렇게 가물었는데 큰일입니다. 비가 부슬부슬부슬 오다가 말아버립니다. 산에 올라가서 발길로 땅을 퍽 차보면 낙엽만 젖었지 땅은 먼지가 푹 납니다. 그런데 소낙비가 막 쏟아지면 10분정도만 쏟아지면 대로변에 또랑물이 막 시뻘겋게 흘러갑니다. 한 시간만 오면 집 떠내려간다는 소문이 벌써 신문에 나고 난리가 납니다. 계곡 사이사이로 막 시뻘건 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이슬비와소낙비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목회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성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개인적인 신앙도 성장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고 진실한 성도들의 수도 더 많아지고 물질로 헌신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봉사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그래서 점점점점점점 커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여기에서 교회역사에서 몇 번 안 일어나는 그런 부흥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서 사는 것보다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말씀 들으면서 주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도우심을 구하면서 사는 여러분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아멘을 큰소리로 하면 또 교만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평생 우리가 함께 이교회에서 수고한다면 이 교회를 어느 정도 많이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할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까지 갈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일주일에 열 명이나 스무 명씩 모아서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일 년이면 천명쯤 되겠습니다. 백 명이라고 하면 십만 명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냥 남아있습니까 사람들이 또 떠나갑니다. 대를 물려서 한 십대 쯤 한다고 해도 서울시민의 수백분의 일도 안됩니다. 그전에 주님이 오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냐면 우리들이 그런 성장을 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흥이 오지 않을 때까지만 우리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꼭 부어주소서 그래서 마치 시커먼 물이 커다란 댐에 수문으로 빨려 내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죄인들을 깨질려고 준비된 영혼들을 물밀듯이 교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부흥아래 있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꿈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우리가 살아있는 날 동안에 이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방만한 세상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도록 우리들이 힘쓰고 수고하며 애쓰고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낙비와 같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축복을 기대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녹아지고 교회가 모두 밀알이 되어서 그래서 온 땅 가득한 이 풀의 섶과 같이 메마른 이 온 땅 조국의 교회위에 우리가 한 하나님의 부흥의 불씨를 붙이는 한 쏘시개가 되어서 점화로가 되어서 그래서 붙여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다 타오르고 그 불길이 번져서 진짜 이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애원했던 것처럼 부흥의 불길이 풀의 섶을 사르듯이 온 땅을 살라서 그래서 이 백성 사는 곳 어느 곳에서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무리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될 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어두움을 뿌리치고 진리의 빛 가운데 사는 사람 어쩌다 한 사람을 만나도 우리들이 그렇게 기쁜데 동네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빛되신 주님의 복음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우리와 함께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런 세상을 꿈꾸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부흥의 불길로서 온 세상을 두려워 떨게 하시는 주님의 위대한 역사를 한번 불러 일으켜주시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대하고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